2/4 수원화성 답사

사진 2006/04/30 01:55 |
수원화성(華城)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졌다. 정조대왕의 정치적 의중은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명명한데서도 확인되는데 이는 장자에 나오는 용어로 요임금처럼 성인이 덕으로 다스리는 땅을 뜻한다. 정조 18년(1794) 2월에 시작하여 2년 6개월만에 완공을 이룬 화성은 당대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을 집약시켰다. 수도 이전에 버금가는 대역사를 속전속결로 처리한 정조의 결단과 추진력이 새삼 위대해진다.


화성은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완벽하게 건설된 도시 성곽이며,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읍성 제도를 따르면서도 공심돈, 포루, 노대, 오성지 등 전례에 없던 새로운 방어시설을 충실히 갖추고 있어서 읍성과 방어성으로서의 다양한 기능을 갖추었다. 그리고 도성의 외곽을 방비하는 군사도시로서의 기능도 아울러 수행할 수 있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전투를 위해 만든 성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성이다. 또한 화성을 세우면서 수원에 수도 기능 일부를 이전하고 주민들을 보상 이주시키고, 상업 기능을 장려하는 등 자족적인 도시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로 계획도시의 개념을 실현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지정 문화재로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화서문(華西門, 보물 제403호)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이란 1972년에 유네스코(UNESCO)가 전 세계에 있는 인류 문명의 중요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에 대하여 이를 보호, 보존하고 소개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선정한 대상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성을 비롯해 창덕궁, 석굴암·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등 7개가 등록되어 있으며, 2004년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산의 역사성과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것이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유지, 관리되고 있는가 하는 진실성(authenticity)이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무너지거나 없어진 부분을 복구하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원형을 잘 알지 못하면서 적당히 추정해서 새로 만들어 놓거나 유산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장하는 것은 진실성을 상실하는 치명적인 흠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수많은 고대 유적이 페허의 모습 그대로 유지, 관리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섣부른 추정 복원으로 진실성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화성은 1970년대에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 등록시 그 복원과정에서 얼마나 진실성이 유지되었는지가 평가의 관건이 되었다. 이 점은 세계문화유산의 등록을 위해 유네스코에서 파견되어 화성을 방문한 조사자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살핀 부분이다. 화성은 많은 부분을 복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결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화성에는 복원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의 복본을 손에 쥔 조사관은 그 방대하고 상세한 자료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현지 방문 조사를 마친 조사관은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밖에 안되지만 성곽의 건축물들이 동일한 것 없이 제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제21차 총회에서 "화성은 동서양의 발달된 과학적 특징이 통합된 18세기의 동양 성곽을 대표하는, 군사 건축물의 뛰어난 사례로 평가"된다며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결정하였다(김동욱. 2002. 『실학의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개. 253~254쪽 참조).


화성의 가치는 당시 공사내용을 담은 종합보고서 성격의 화성성역의궤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그 치밀함과 꼼꼼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다. 화성의 계획, 전체 설계, 각 건물의 내용과 자재의 종류와 수량, 동원된 22종 장인의 이름, 일한 장소, 일한 날짜, 지급한 급여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돌 무게가 얼마인지, 어떤 목재를 사용했는지, 심지어 공사비로 얼마를 지출했는지 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설계와 시공 부분은 아예 그림과 해설을 따로 붙여 놓았다. 화성성역의궤만 있으면 화성은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다는 점이 화성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이유다.


경제건설이 한창 궤도에 오르고 있던 지난 70년대에 오래 방치되어 훼손과 파괴로 얼룩졌던 오래 방치되어 훼손과 파괴로 얼룩졌던 수원성곽에 대한 전면적인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화성성역의궤와 같은 당대의 공사기록이 있고 또 파손되기 전의 기록자료가 비교적 풍부했던 덕분에 거의 원형에 가까운 복원이 가능했다. 이미 시가지화한 팔달문 주변 일부만은 복원되지 못하였다. 한 번 시가지화가 이루어지면 그만큼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 어려움을 증명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천만다행히도 1970년대 성곽의 복원은 시기적으로 아주 적절했다. 이때까지 수원의 도시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주택이나 상업 건물의 신축도 많지 않았다. 덕분에 성곽은 팔달문 구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잔존해 있었다. 수원은 성곽의 정비 사업이 끝난 1979년 이후에 급격하게 팽창했는데, 만약 1970년대에 성곽 정비와 성곽 주변의 건물 신축을 억제하는 행정 조처를 하지 못했다면 화성의 찬란한 유적은 아마도 지금처럼 남지 못했을 것이다. 적절한 시기의 행정 결정이 도시를 가꾸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일이다.


승현(정), 승현(섭), 희경누나와 함께 살을 에는 추위에 찾은 화성에서 조선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다. - [小鮮]



동암문(東暗門)
성곽 깊숙이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어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등을 나르도록 하는 암문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서암문, 남암문, 북암문, 서남암문 등 모두 다섯 곳에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건물을 각루(角樓)라고 한다.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가 있는데 방화수류정은 동북각루의 별칭이다.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이며 시인인 정명도(程明道)의 시 "구름 개어 맑은 바람 부는 한낮 꼭 찾아 나선 길/버드나무 따라 앞 개울가를 지나네(雲淡風輕近午天 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딴 것이라고 전한다.
화성의 북수문(北水門)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쪽에 인접한 높은 벼랑 위에 세워져 있는데, 한국의 건축미와 정자문화의 백미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격식이 구애되지 않은 파격적인 모양에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맛이 있다. 18세기 당시 중국과 조선의 첨단 축조 기법을 고루 녹여 지은 복잡다기한 팔작지붕 건축 양식으로 비추어볼 때 사적 제3호인 화성의 일부가 아니라 단독 국보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주변을 감시하기 위한 용도로 만든 건물에 그치지 않은 심미안에서 한국 특유의 재치와 흥취를 느낄 수 있다.


화홍문(華虹門)
화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의 북쪽에 새운 수문을 말하며, 편액은 화홍문이라 하였다. 다양한 기능과 견고함에 멋진 외관까지 함께 갖춘 화홍문은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다. 일명 북수문이라고도 한다.


동북포루(東北鋪樓)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지은 집이다. 치성은 성벽을 돌출 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인데, 치성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위치마다 포루를 세웠다. 동북포루는 멀리서 보면 마치 조선시대 처사들이 머리에 쓰는 각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각건대(角巾臺)라는 별명을 얻었다.


북서적대(敵臺)
적대(敵臺)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이를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였으며 유사시에는 적을 공격하는 시설물이다. 본래 화성에는 장안문에 북서적대, 북동적대, 팔달문에 남서적대, 남동적대 총 4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장안문 좌우 두 개의 적대만 복원되어 있다.


장안문(長安門)
화성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된다. 중국 주나라, 진나라, 전한, 수나라, 당나라 등이 도읍하였던 장안은 수도(首都)라는 뜻으로도 쓰였듯이 서울의 다른 일컬음이다. 이런 격조 높은 이름을 정문에다 걸었다는 것은 대단한 자심감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八達門)과 거의 흡사하고 서울의 숭례문보다 더 크고 웅장하다. 1920년대 수원시 시가지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반파된 장안문 누각은 철거되었다가 70년대 후반에 복원되었다. 한국전쟁 때 한쪽 추녀가 부서졌을 때 그 아래로 자꾸 차들이 다니다 보니 그 추녀의 잔해가 쏟아져 위험하다고 철거되었다고 한다. 그 때 수리할 여력이 없었으면 전체를 잘 해체해 놓기만 했어도 나중에 원형을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쉽다.


깃발이 바람이 펄럭거리고 있어 사진만 보면 무척 멋져 보이지만 정말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화성의 위용이 생각보다 시시했더라면 대강 훑어보고 답사를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화서문(華西門), 서북공심돈(空心墩)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문이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옹성을 비롯한 화서문의 모든 시설과 규모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와 형식이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구도가 좋다.
공심돈은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원거리 초소이다.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인데 특히 동북공심돈은 화성에서 가장 이색적인 건물이다. 워낙 강추위라 동북공심돈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화령전(華寧殿)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영정, 즉 초상화를 모신 건물이다. 화령전은 순조가 부왕의 어진을 모시고 부왕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해 지었다. 보통 왕이 죽으면 그 위패는 종묘에 모신다. 위패를 모신다는 것은 죽은 이의 혼백을 위로하는 뜻이 있다. 그러나 초상화를 모시는 것은 혼백으로써가 아니고 육신 그 자체에 대한 사모의 정으로 따로 모시는 것이다. 왕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은 궁궐 안에 선원전이라고 해서 별도로 갖추게 된다. 화령전처럼 지방에 따로 한 왕의 영전을 별도로 짓는 것은 매우 드문 예외적인 일이다. 많은 영전 중 건물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창덕궁 선원전과 전주 경기전, 그리고 수원 화령전뿐이다.
화령전 운한각 계단의 소맷돌에 구현된 문양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궁궐 못지 않은 각별한 정성을 쏟은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대왕을 숭모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전배하기 위한 행차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 관아 건물로 활용하였다. 화성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기능 면에서 단연 으뜸이다. 6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에 소원을 빌게 해놓았는데 누가 볼세라 후닥닥 소원을 써넣어 매달았다. 그 소원이 성사되는지 여부는 올해 5월 31일 밤에 알 수 있다.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요.^^;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전 건물로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례를 이곳에서 베풀고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고 하였다. 당호 자체가 어머니를 오래 모시고 싶다는 뜻이 담겨있다. 드물어서 아름다운 치사랑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다만 밀랍인형으로 전시된 정조대왕이나 헤경궁 홍씨의 모습은 생기가 없어 보였다. 괜히 불경스러운 짓거리를 해봤다. 머리 쓰다듬는 건 내 최고의 친근과 애호의 표현인지라...^^;


복내당(福內堂)은 화성행궁의 내당(內堂)으로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로 활용된 곳이라 대장금 영상물도 상영되고 있었고, 대장금 사진이 서있었다.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낙남헌(洛南軒)과 노래당(老來堂)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훼철되었다. 1996년 복원을 시작해서 현재까지 482칸이 복원되었고, 미복원된 85칸의 행궁은 오는 2012년까지 복원이 추진된다고 한다. 일제의 폐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정조대왕은 신풍루에 올라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주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직접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도 될 음식인지 일일이 그 맛을 보았다고 하니 그 애틋한 마음이 고맙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장쾌한 느낌이 좋았다.


보물 제402호 팔달문(八達門)을 배경으로... 완전한 화성의 모습을 위해서는 팔달문 일대의 정비가 필수적이나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역시 있을 때 잘해야 한다.
Posted by 새우범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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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본준 2011/01/23 04:01 Address Modify/Delete Reply

    글을 세밀하게 읽지 않고 훑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현재로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작과 인생을 빼놓고는
    한국학을 이야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국내에서는 가장 깊게 연구하고 그것을 삶으로써 증거하신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님께서 쓰신 옥저들을
    빠른 시일내로 모두 읽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 안 읽으신듯 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경영학이 전공이신데
    재능을 더욱 살려서
    깊이있는 연구와 봉사의 삶을 심화시킴이 어떠하신가 생각합니다

    한번 박석무 선생께 전화를 드려서 찾아 뵙고
    한번 지도를 받아 보세요

    전화번호는 다산연구소에서 쉽게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쓰신 글들을 제가 차례차례 읽어 보려고 합니다

    또 쓰죠


    구본준 삼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