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이 대학도서관 쓰려면 100만원 기부하라? (기사 클릭)

이태윤님께서 오마이뉴스에 대학 졸업생 대출 제도 관련 기사를 기고하셨습니다. 나눠 읽고 싶어서 링크를 겁니다. 기사 말미에 저도 인터뷰이로서 잠깐 등장합니다.^^; 이태윤님께서 주신 질문에 대한 서면 인터뷰 답변을 작성하면서 일전에 제 블로그에 올린 <졸업생에게도 도서 대출을!>이란 잡글을 상당부분 재인용했습니다. 제 의견이 크게 바뀐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정보 갈무리해주신 이태윤님께 다시금 감사합니다.^^


1. 졸업생이신데 필요한 책들은 어떻게 구해 보시나요?

제가 졸업한 학교는 열람실 이용과 자료 열람 및 복제 등은 허용하지만 자료 대출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도서관 홈페이지 상에서 ‘대출불가 사용자’로 분류되는 것을 보고 졸업을 실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서 대출 예약제를 실시하는 학교이다 보니 이용도가 높은 도서의 경우 예약이 불가한 졸업생은 거의 열람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정말 보고 싶은 책의 경우에는 후배들이 대출한 책을 얻어서 보기도 했습니다. 도서관 열람시간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열람 중에 누군가 대출해가면 독서 흐름이 끊기기 때문에 부득이 후배들에게 부탁해 책을 좀 나눠보기도 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죄다 빌려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새책이나 헌책을 사게 됩니다. 실제로 졸업한 이후에 평소보다 책을 더 많이 구매한 것 같기도 합니다. 설령 중고도서 시장이 활성화된다고 해도 한계가 있겠지요. 모든 종류의 책이 헌책으로 나와도 그것을 다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취업을 준비하거나 대학원 등의 진학을 준비하는 졸업생들은 봐야 할 책은 많으면서도 별다른 수입이 없으니 개인의 구매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올 3월부터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입학하는 학교 역시 현재는 졸업생 대출을 허용하지 않는 학교이다 보니 벌써부터 살짝 걱정입니다.^^;


2. 많은 대학이 졸업생 대출 예치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따라 금액 차이가 큰데요. 본인의 경우 얼마까지 예치금으로 납부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기사에 나오는 표를 참고해주세요)

저는 책을 많이 빌려보려고 하는 편이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예치금을 치룰 의향이 있습니다. 예치금이 가장 높은 수준의 학교가 30만 원 정도이던데 그 정도까지도 별 다른 거부감이 없습니다. 예치금이 아닌 연회비를 내야하는 학교의 경우 10만 원 정도면 높은 수준이던데 그것도 납부할 의사가 있습니다. 최고 수준의 예치금과 최고 수준의 연회비를 모두 내야한다고 해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부득이하게 운영하는 예치금이나 연회비 제도는 상징적인 수준으로 줄여나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기에 따라 돈으로 차별하는 인상을 풍겨서 섣불리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도서 대출 이용도에 따라 지불하고자 하는 액수가 다를 테니 조금 차등화 하는 방향도 고려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예치금만 납입하면 2권을 대출해주고, 예치금에다 연회비까지 납부하면 3권까지 대출해주는 식의 차등 말입니다. 오죽 답답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졸업생에게 도서관 이용 방식을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료실 열람은 기본적으로 허용하되, 도서 대출과 열람실 이용 가운데 선택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열람실 이용보다는 도서 대출이 긴요한 저 같은 처지의 사람이 적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재학생들에게 갈지 모르는 피해를 축소하는 방법의 하나로 고안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세세한 조치가 학교에서 실시하기에 비교육적인 처사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자 하는 이에게 아예 기회를 제약하는 것이 더욱 비교육적인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도서 열람과 도서 대출은 엄연히 다른 수준의 조치입니다. 저 또한 장기적으로는 졸업생에게도 도서 대출의 제약이 없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학교마다 처한 사정에 따라 당장 한정된 자원을 대폭적으로 늘릴 수 없다면 이런 식의 제약을 두고, 점차 줄여나가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3. 예치금이 아닌 대학발전기금을 내고 책을 빌린다면 사용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기사에 나오는 표를 참고해주세요)

위의 질문에서 답변 드렸듯이 가능한 한 높은 수준까지 지불할 의사가 있습니다. 도서관 대출 이용을 위한 납부인만큼 도서 구입비로 한정해서 사용하는 도서구입기금 같은 형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좀 더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학발전기금이도 크게 시비 걸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대학발전기금으로 100만 원씩이나 납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던데 졸업생 대출이 긴요한 처지에 있는 분들의 평균적인 지출 여력을 헤아려볼 때 다소 과도한 감은 있습니다.


대학발전기금이라는 명목 대신 동문회비라는 명목의 돈을 납부하면 책을 빌려주는 경우도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평생회원 자격의 동문회비를 한꺼번에 납부하도록 해서 일시불을 요구하는 경우는 1년 남짓한 기간 동안만 졸업생 대출을 이용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부적절한 제도인 듯합니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동문회 차원에서 졸업생 대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모습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장기간에 걸쳐 졸업생 대출 이용을 할 의지가 있는 분들에게는 큰 금액을 일시불로 납부하게 하더라도, 단기간에 걸쳐 졸업생 대출 이용을 하려고 하는 분들에게는 예치금이나 연회비 제도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생 대출이 불가능한 처지이다 보니 예치금, 연회비, 대학발전기금이라도 내고 대출이 가능한 학교가 모두 부러울 따름이지만 이미 졸업생 대출을 허용하는 학교에서도 좀 더 세분화된 정책을 마련하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합니다.


4. 졸업생에게 대출을 허락하지 않는 학교에서는 재학생에게 피해가 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학교 측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실제로 졸업생들이 졸업생 대출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서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혹시라도 재학생들의 도서 이용에 불편을 초래한다면 책을 빌려보는 마음이 그리 즐겁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학교 측에 도서관과 관련한 자원을 확충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야겠지만 그것은 점진적인 과제이지 단시일 내로 해결될 성격이 아닙니다. 보고 싶은 책을 제때 못 보는 불편함은 누구에게나 크겠지만 재학생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동감합니다. 그래서 졸업생들이 예치금 등의 금전적인 지출을 감수하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대학도서관에서는 보통 국내 단행본의 경우 한 종류의 책을 두 권 정도 구매합니다. 요즘에는 대학들이 등록금을 함부로 올리지 못하는 분위기다 보니 도서관 예산 역시 동결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한 권만 구매하는 경우도 적잖은데 대다수 학교도 비슷한 사정인 것 같습니다. 2008년 이후에 대학도서관들이 국내 단행본 구입에 소극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하간 한두 권의 책을 여러 학생이 돌려봐야 하는데 여기에 졸업생이 동참하고, 연체 문제까지 발생하게 되면 재학생들의 피해가 더욱 가중될 염려가 있습니다.


어떤 대학들은 지역 주민에게도 도서관을 개방한다고 들었지만 대학 당국이 우선 졸업생들에게 도서 대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대학도서관이 갖춰야 할 공공성 이전에 자기 몫의 사사로움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재학생에 비해 더 적은 권수를 더 짧게 빌려주고, 연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한다면 마냥 불가한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재학생 입장에서는 당장은 조금 불편한 점이 늘어날지 모르지만 재학생들도 언젠가는 졸업생이 되는 만큼, 이런저런 제약조건을 붙여 졸업생 대출을 허용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5. 동네 도서관(시립, 구립)이 있는데 굳이 대학도서관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졸업한 이후에 동네에 있는 공공도서관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은 장서를 보유하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개인적인 독서 취향 때문에 공공도서관보다는 대학도서관에 필요한 책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전공서적이나 학술서적은 대학도서관 사정이 낫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찾지 못했지만 장서수나 시설 면에서 공공도서관을 능가하는 대학도서관이 많을 것입니다. 대학도서관은 공공도서관에 견주어 절대적인 숫자는 적지만 장서수는 훨씬 많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도서관 관련 통계를 신문기사 검색을 통해 산발적으로 접했는데 앞으로는 도서관 관련 통계가 체계적이고 주기적으로 관리되길 바랍니다.


여하간 대학도서관이 공공도서관에 비해 장서수는 많지만 이용객수는 적다는 조사 결과도 본 기억이 납니다. 물론 대학도서관은 그야말로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니 모든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학도서관 개방 목소리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개방의 시발점은 졸업생 대출 확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악한 공공도서관 상황 때문에 주민들에게 대학도서관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을 당장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면 학교 구성원이었던 이들을 먼저 보듬어야 하지 않을까요?


6. 졸업생 도서 대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저는 궁극적으로 졸업생이 아무런 제약 없이 도서 대출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앞으로 대학을 평가할 때 졸업생 대출 여부 같은 도서관 관련 규정에 대한 평가도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가 졸업생 대출이 허용되지 않는 불편함을 토로하지만 심지어 휴학생에게도 도서 대출이 까다로운 학교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상당수 대학의 재정 운용에서 도서관 예산이 후순위로 밀려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이런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모아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끝으로 졸업생 대출을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을 책값이나 좀 아끼려는 심보에서 나온 행동으로 보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대출을 요구하는 분들은 도서관이 도서관다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도서관이 본연의 기능을 잃고 독서실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많이 접했습니다. 도서관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곳이면서도 빌려주는 곳입니다. 대학도서관이 책을 빌려주는 일에 너무 인색하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도서 복지’라는 말을 꺼내보고 싶습니다. 졸업생 대출 허용을 비롯한 도서 복지는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국민의 문화생활에 이바지하는데 큰 보탬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Posted by 익구
:

2009년 8월에 썼던 잡글을 보완했습니다. 교육 현실과 접목해본 4장이 추가되면서 오히려 더 횡설수설한 느낌입니다.ㅡ.ㅜ


1.
가모우 히로시의 『떴다! 럭키맨』(원제: とっても!ラッキーマン)이라는 만화책은 럭키맨과 그 둘레 영웅들이 우주의 평화를 해치는 무리들을 처치하는 단순한 줄거리다. 등장인물 가운데 내가 가장 애틋하게 여기는 이는 바로 노력맨이다. 그는 그야말로 근성과 끈기의 화신이다. 노력맨은 운이 좋아 패배를 모르는 럭키맨이나 승리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승리맨처럼 승률이 높은 것도 아니고, 여러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 우정맨이나 뛰어난 예지력을 발휘하는 천재맨처럼 효율적인 전투를 치르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가장 약골로 취급되는 슈퍼스타맨이 지닌 불사신에 가까운 빠른 재생력도 없는 노력맨은 오로지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승부한다. 우리는 노력맨이 되기를 권장하고 강요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연 노력맨이 되면 우리는 행복할까?


얼마 전에 초등학생들도 국제중학교 진학을 대비해서 스펙 쌓기가 열풍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치열한 자기계발은 권할 만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치켜세우는 자기계발이 실용이라는 미명 아래 협소한 분야라서 안타깝다. 젊은 세대들의 스펙 쌓기를 보면서 우려하는 목소리에는 경청할 점이 많다. 청년들이 스펙에 열중하느라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 된다는 비판은 곱씹을 만하다. 이태 전에 리영희 선생님의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읽다 가슴이 짠했던 적이 있다. 젊은이들의 보수화에 대한 물음에 선생님은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 바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자유분방해졌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 불감증이 일상화되고 취업에만 몰두한다면 우리 세대 스스로가 반성할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정명(正名)을 위해서 보수화라는 말보다는 맹목화나 획일화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자기비하 같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엄격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스펙 권하는 사회에 대한 우려가 적잖지만 조금씩 능력사회로 향하는 발걸음 자체는 나쁘게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능력주의 사회는 실력이 학력만큼이나 평가받고, 대학 졸업장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지적 훈련이 존중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런저런 연줄로 말미암아 능력의 가치가 왜곡되지 않는 사회, 열심히 살면 정말로 성공하는 사회여야만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하는 능력주의의 보상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다양한 종류의 능력이 존중받기를 바란다. 프로게이머가 활약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더 밝아졌듯이 말이다. 젊은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흠모하고, 좀 더 윤택한 삶을 누리기 위해 땀 흘림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개성들이 몇 가지 안 되는 목표에 함몰되는 건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라고 하기에는 좀 아쉽다. 사는데 좀 더 요긴하게 쓰이는 기예나 재능이야 앞으로도 존재하겠지만 거기서 그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선망 받는 지위가 분산될수록 특정 지위를 향한 무한 경쟁의 강도가 줄어들어 재능의 낭비를 막는다.


능력주의의 보상체계는 뛰어난 능력은 대부분 빼어난 성과로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그 성과에 대해 보상함을 골자로 한다. 유능과 성공 사이의 상관관계는 대체로 인정된다. 그런데 ‘능력’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성질의 힘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능력이 서로 다르다는 건 상식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노력에 의해 계발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한계가 있음도 직관적으로 파악 가능하다. 만약 그 한계가 제법 커서 능력과 노력이 포개지는 정도가 너무 작다면 능력주의 사회의 대원칙은 흔들리게 된다. 개념의 혼란을 막기 위해 ‘능력’은 후천적인 ‘노력’과 선천적인 ‘재주’로 나눌 수 있다고 정의하겠다. 능력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아 후천적인 노력과 대비시키는 경우도 많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의 능력은 재주라는 단어로 대신한다.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재능’은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고 말하고 있으니 ‘능력’과 비슷한 뜻으로 보이니 섞어 쓰겠다.


능력이 노력보다는 재주에 의해 좌우된다면 능력주의 사회는 선천적인 요소가 크게 기능하는 셈이다. 노동소득조차도 이런데 재산소득으로 눈을 돌리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재산소득은 부모로부터의 상속이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재주와 상속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 바로 노력이다. 노력맨으로 변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함은 재주와 상속의 덕택을 입지 못한 이들의 유일한 선택지인 셈이다. 그런데 이 노력이 교육을 통해 계발된다고 하면 그 교육에 들어가는 재화를 마련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천정부지로 올라 사회 문제가 된 대학 등록금이 대표적 사례다. 교육비를 재주와 상속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벌어야 한다면 그 시간만큼 공부를 못해 학습 진도가 떨어질 수도 있고, 여가를 충분히 즐기지 못해 행복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 노력이 재주와 상속을 따라잡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2.
재주를 천부적인 운이라고 본다면 재주가 사회적 가치의 분배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부당하게 여겨진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능력주의의 분배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데 그칠 공산이 크다. 롤즈는 이런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몸과 재주가 개인의 소유라고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으므로 사회의 자산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몫이 아닌 것을 분배받는 것에 반대하며 재주란 노력 없이 거저 얻은 것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았다. 우연히 좋은 부모를 만나고 천부적인 재주를 갖게 된 것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삼을 수 없다는 논변은 설득력 있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몫만을 분배의 기준으로 내세우려는 정신을 곱씹어보자.


이에 반해 노직은 재주가 모자란 사람들은 재주를 소유한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이익을 얻음을 강조한다. 재주 넘치고 부지런한 재간둥이가 우리 곁에 있음으로써 우리가 더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항변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일부 사람들이 재주나 노력으로 더 많은 재화를 얻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 잃게 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고 설파한다. 개인의 재능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익을 주기 때문에 재간둥이의 정당한 몫에 손을 벌리지 말라고 일갈한다. 그의 지적대로 재주도 모자라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재간둥이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회를 설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드워킨의 표현대로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주어진 재주에 둔감해지도록(endowment-insensitive)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주에 둔감해진 만큼 노력에 민감해지기를 제안한다.


재간둥이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면 정의로운 분배이므로 그 이상의 분배를 꾀한다면 재간둥이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는 언설에는 맹점이 있다. 침해는 직접적이거나 의도적이고 명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겨주는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의 손해가 막대할 때 이 손해가 경쟁의 승리자의 탓은 아니더라도 그 원인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차병직 선생님이 『상식의 힘』에서 역설하신 대로 “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기는 일이 가능”하며 “경쟁에서 뒤진 사람의 무능이나 나태함조차도, 그것이 이긴 사람의 영예나 쾌감에 기여하는 바는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노력으로 인한 성과물조차도 온전히 자신의 것일 수 없는데 재주로 이룬 업적이 매우 많은 공을 탐내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


더군다나 유능함만을 절대적인 분배 기준으로 활용하면서 유능하지 못한 계층의 생활을 외면한다면 합리적 이기주의의 관점에서도 노직 류의 견해가 그리 달갑지 않을 수 있다. 노직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므로 무능한 이들도 혜택을 누릴 것으로 전망했지만 소득 격차로 말미암은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되면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개인의 자존감이 흔들릴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소수의 재간둥이들은 자신의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공적이거나 사적인 경호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비용은 계속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실업의 상승과 폭력 범죄의 증가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며 미국에서 1%의 실업 상승이 6.7%의 살인 및 3.4%의 폭력 범죄, 그리고 2.4%의 재산 범죄 증가를 야기한다는 머바와 파울스의 연구를 인용한다. 인간은 이기성 만큼이나 이타성을 지니므로 꼭 이런 수치를 들먹이며 윽박지를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능력이 아닌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창하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비록 능력을 몰아낸 자리에 필요를 올리려는 시도가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그의 논의는 사회적 필수재 혹은 기본재를 충족해야 한다는 합의를 도출하는데 기여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는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보다 현실적인 지향점이라는데 대체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능력에 따른 차등 분배의 원칙과 더불어 필요 충족의 원칙이 혼합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결국 생산에 이바지한 정도를 따지되 보상 수준은 그 공헌도의 차이보다는 더 적게 둠으로써 양자를 조화롭게 추구하려고 한다. 필요의 수준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삶의 질까지 확보하는 식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이는 시혜적 평등의 의미가 아니라 한 사회에 공유하고 합의하는 인간다운 삶의 최소 수준이 되어야 한다.


3.
재주라는 우연성이 능력주의 사회의 기둥을 부식함은 충분히 살펴보았다. 물론 재주가 꼭 우연적이고 선천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견도 보인다. 홍성욱 선생님 등이 엮으신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란 책에서는 천재 과학자들의 연구과정을 고찰하며 천부적인 재주가 창조적인 업적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천재성뿐만 아니라 노력으로 다져진 비판적 사고, 집중력, 끈기 등의 다양한 자질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재간둥이 가운데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단지 탁월한 재주만이 아니라 부단한 연구 끝에 성취했다는 건 얼마든지 수긍할 만하다. 이 책에서는 우리 모두가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전보다 더 창조적으로 변모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줄 따름이다. 재주라는 빙산이 생각보다는 거대하지는 않다고 항변하는 대목이 이 책의 미덕이다. 슬프게도 그래도 그 빙산은 꽤 크다.


나는 오래 전부터 능력과 필요의 대립 구조에서 노력의 가치를 도두보기를 말해왔다. 그런데 이미 선수를 쓰신 분이 계셨다.ㅡ.ㅜ 피터 싱어는 『실천윤리학』에서 타고난 능력보다는 필요와 노력에 따른 지불의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능력과 필요 사이의 간극을 노력으로 메워야 한다고 보고 “그들의 능력이 어떠하든 간에 그들의 능력의 상한선 가까이까지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돈을 지불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언명했다. 싱어는 필요에 따른 분배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에 따른 유인을 보탰다. 그의 논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적용해보자. 갑의 잠재적인 능력이 100이고, 을의 잠재적인 능력이 50이라고 가정한다. 갑은 60%만 노력하더라도 을이 100%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남긴다. 싱어가 구체적인 예시를 들지 않아서 단정하기 어렵지만 자기 능력의 상한선까지 오른 을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보상을 해줘야 함은 분명하다. 또한 을이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마저 뛰어넘는 120%의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갑과 같은 60의 성과를 낸다면 갑보다 더 칭찬을 건네야 할 것이다.


능력을 노력과 재주의 합이라고 볼 때 노력을 어떻게 측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두 요소의 총합인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조차 마련하기 힘든 판국에 그 능력을 노력과 재주로 가름해서 그 둘의 비율을 따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본 예처럼 보상체계가 수립된다면 갑은 자신의 재주를 감추려는 전략을 취할 유혹에 빠진다. 갑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을이라고 꾸미고 60%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종전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력에 따른 유인이 너무 커진다면 이처럼 재주를 감춰서 노력이라고 분칠하고 잠재적인 능력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소홀하게 된다. 갑이 60%의 노력보다는 70%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이끌어서 사회적인 후생을 증가시키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다고 할 때 재주 숨김 현상은 줄여야 한다.


결국 우리는 재주 많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을 인정해줘야 한다. 노력은 그 다음으로 고려할 요소다. 능력 있는 사람의 성과에 미치지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 노력한 사람에게 현재 수준보다는 높은 수준의 보상을 주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다만 노력한 사람에게 줄 보상을 늘릴 재원은 필요에 따른 분배의 몫을 건드리지 말고 유능한 사람에게 주던 보상에서 일부 끌어와야 한다. 이를 통해 보상의 차이가 성과의 차이보다 현격히 차이나지 않도록 조정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조치가 현행 능력주의 보상체계의 상층부에 있는 유능한 사람에게 반드시 불리하지만도 않다. 엄격한 능력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1등이나 2등에게만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노력을 통해 상위권에 다다른 사람을 위한 보상에 신경을 쓰게 되면 10등을 하더라도 상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매번 1등이나 2등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10등까지도 충분한 보상을 하는 시스템의 사회적 보험 역할을 마냥 나쁘게 볼 일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후천적인 노력의 가치를 재조명했더라도 의문점이 생긴다. 노력도 상당 부분 선천적인 재주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재능이 오로지 후천적으로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가 아닌 우연적인 이유로 노력을 싫어하는 성품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반박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속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재주보다는 노력이 우연성이 좀 덜하고, 보통 사람도 습득할 수 있는 재능이라는 점에 주목할 따름이다. 또한 노력의 적극적 재조명으로 말미암아 상위 1%가 아닌 상위 10%까지 보상체계의 접근성이 높아진다면 재주가 모자란 사람과 노력이 부족한 사람도 도전할 동기 부여가 될 것이다. 1등에 도전하기는 힘들어도 10등은 도전해볼 만하다고 용기를 북돋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재주와 대비되는 노력에 대한 사회적 의식의 환기를 기대한다. 불공평을 완화하는 기제로서 노력에 대한 보상에 주목하자.


4.
2009년 개교한 국제중은 1단계 서류심사, 2단계 면접을 거쳐 3배수를 선발한 뒤 추첨으로 학생을 뽑았다. 2010년에 개교하는 자율형 사립고는 내신 성적 50% 내에 들어야 지원이 가능하고, 2배수를 뽑은 뒤에 추첨으로 선발한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에만 익숙하던 우리네 입시 풍토에서 추첨제의 도입은 참신하면서도 어색했다. 실제로 대다수 언론이 국제중이나 자율고의 추첨 장면을 보도하면서 추첨의 비교육적인 측면을 꼬집었다. 시험은 노력으로 만회할 수 있지만 운 때문에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승복할 수 있겠느냐는 항변은 설득력 있다. 그러나 시험이나 경시대회 성적으로 1배수를 뽑는 것을 지양함으로써 경쟁의 압력을 완화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하려는 목적은 바람직하다. 전남대는 2009년 도전 장학생을 신설해서 학업성적 위주로 장학금을 선발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자기계발 활동 등을 통해 발전가능성이 있는 학생에게 도전 장학금을 줬다. 이 역시 성적순을 극복하는 파격적인 시도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감한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이 단지 1등부터 꼴등까지 서열화한 성적을 나누는 것이라면 마냥 교육적일 것 같지 않다. 노력으로 만회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시험공부가 자본에 따른 경쟁이 되어간다는 비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자녀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특목고 입시를 준비시킬 여유가 있는 부모의 자본도 우연적인 요소이고 비교육적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소수점을 가지고 다투는 입시경쟁의 폐해가 얼마나 극심한지 겪었다. 더욱이 시험 위주의 선발제도는 투입(input) 위주의 경쟁에만 몰두하는 문제를 낳았다. 한국의 대학들이 우수한 신입생을 유치하는 데만 온 정신을 쏟고 유능한 졸업생을 배출하려는 산출(output) 경쟁을 등한시한다는 지적이 적잖았다. 고교 교육의 다양화라는 미명 아래 고등학교마저 엄격한 능력주의에 매몰된 투입 경쟁을 이제는 줄여야 한다.


외국어고등학교 입시 개편에도 추첨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추첨제를 채택한 학교들과 형평에 맞는다. 외고는 어학 영재 양성이라는 특수목적고의 설립 취지를 거의 살리지 못했다. 다만 외고가 고교 평준화 정책의 보완책으로 수월성 교육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는데 기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수월성은 결국 대학 입학의 수월성으로 귀결됐다. 결국 외고는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보다는 우수한 인재를 선점하는데 더 특화된 모습을 보였다. 대학들도 이에 호응해 내신 반영률을 낮춰 외고생들의 내신 부담을 덜어주는 등 각종 특혜를 제공했다. 2010학년도 서울 경기지역 외고 입시는 구술면접이 폐지되고 영어 듣기평가가 약화되는 대신에 학교 내신 성적의 비중이 강화됐다. 사교육비 경감을 위한 대책이었지만 풍선 효과로 말미암아 내신 합격선이 상승하는 효과를 낳았다. 내신 강화의 부작용은 추첨제의 도입으로 해소할 수 있다. 가령 내신 20~30% 정도를 지원 자격으로 하고, 영어 듣기평가나 구술면접을 합격, 불합격(Pass or Fail)을 정하는 요소로 활용해 일정 배수를 선발한 뒤 추첨을 하는 방식을 도입할 만하다.


추첨제는 정부가 수월성 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교를 도입하면서 사교육비 증가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고육지책으로 등장했다. 사교육을 조장하지 않겠다는 점을 부각하는데 급급했을 뿐 추첨을 결단한 것에 대한 철학적 고려가 부족했다. 나는 추첨제의 부분적인 도입이 노력에 대한 보상 체계를 수립하는데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추첨제를 1%에 대한 보상에서 10%에 대한 보상으로 늘리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차별이 빚어져서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가 자꾸 침해되는 현상을 막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노력을 해서 일군 성과에 따른 정당한 차별이라는 대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추첨제를 적용하는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인생의 한 시기에 펼쳤던 경쟁의 결과가 그 사람의 평생을 규정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추첨제는 특정 학교의 우월적 지위를 상당부분 누그러뜨리고 교육을 통한 산출 경쟁에 좀 더 주안점을 두도록 유도한다. 고령화 시대에는 젊은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어른을 부양해야 한다. 이제 극소수의 승자만이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잠재성과 소질을 계발하도록 노력하는 사회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종류의 경쟁을 설계해야 한다. 물론 경쟁이 늘어난다고 해서 경쟁의 강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법학전문대학원의 경우 학점 경쟁도 심하면서 변호사시험 준비도 병행해야 해서 고충이 크다고 한다. 시험이 고급화될수록 교육과 상충관계가 된다. 모든 가치기준이 수험적합성에 맞춰지면서 법과대학의 수업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번의 시험이 아닌 다방면의 교육으로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로스쿨을 도입한 만큼 변호사시험은 의사국가고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의사국가고시의 합격률은 2010년 92.9%, 2009년 93.6%였다. 이렇게 높은 합격률에도 별다른 시비가 없는 것은 의대 교육과정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경쟁의 강도에 대한 고민은 시험과 교육의 적절한 배합의 문제로 요약된다. 시험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교육을 향한 노력도 평가해야 한다. - [無棄]


추신 - 다른 영웅들이 적의 공격을 민첩하게 피할 때, 노력맨은 빠른 속도로 벽돌을 쌓아 노력 보호막을 만든다. 이 졸문은 그 우직함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노력맨이 되는 건 상찬할 일이지만 노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지는 말자.

Posted by 익구
:

저는 당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에 대한 탐구를 늘 하려고 애씁니다. 이따금 저란 녀석을 소개할 일이 있을 때 제가 생각하는 제 모습을 늘어놓는 것이 참 어렵더군요. 그러던 참에 제 지인들이 저를 두고 평한 이모저모를 나열해보는 것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익구에 대한 말말밀> 연재물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유치원부터 대학 시절까지 학교 안과 밖에서 들었던 오만가지 이야기 중에 몇 개 추려본 헛짓이 어느덧 5탄을 선보입니다. 좀 더 옥음을 모으면 한꺼번에 정리할 날도 있겠지요. 주로 좋은 말들로만 정리한 것이니 진실은 이렇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주세요.

3월부터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2기로 입학하게 된 것을 기념하며 오랜만에 정리해봤습니다. 명백한 오타를 수정한 것을 제외하면 원래 발언 그대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대는 뒤죽박죽 섞여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형은 전생에 아마 사림(士林) ㅋㅋㅋ
- 04학번 후배의 문자

형님은 200년 전에 집현전 대제학이셨을 거 같아요.
- 07학번 후배의 댓글

익구는 글을 짧게 못 쓰는 병이 있어.
- 대학 동기의 정확한 지적!

머리에 쥐나게 하지 마
- 내가 쓴 세밑 인사를 두고 고등학교 동창의 핀잔

비관습적이기도 하지 ㅡ.ㅡ
- 내가 비사교적으로 살아온 것 같다며 한탄할 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추가 설명

형... 익구닷컴에서 글 좀 참조하여,,,레포트 좀 쓸게요 ㅎㅎㅎㅎ
- 05학번 후배의 쪽지, 그 과제가 무엇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음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정말로 찾아보기 어려운(?) 캐릭터세요 =ㅁ=;;
- 언어의 마술사님과의 대화 중

그런데 정말로 익구형과 대화하면 되게 생각이 많아져요.^^
- 06학번(07학번?) 후배와의 대화 중

항상 철학적 분위기를, 학구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너에게 감사하다. 앞으로도 네 순수하고 고뇌하는 모습 잃지 말아라.
- 고등학교 동창의 생일 축하 편지

거추장스럽다는 듯 언급하신 규범주의나 도덕주의는 익구, 그 자체의 모습인걸요?
- atopos님의 댓글

누구와도 먼 사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내성적인 것과는 별개의 느낌이네요.
- 연애편지님의 댓글

내가 볼 때는 더 이상 들 ‘철’이 없는 것 같은데
- 철드는 것이 소망이라는 내 말에 고등학교 동창의 격려(?)

니가 철이 덜 들면 누가 드니-_-
- 격려(?) 두 번째

너의 시비라면 얼마든지 기분 좋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음. ㅋ
- 대학 동기

넌 참 써먹을 데가 많을 거 같아
- 나에 대한 과찬이 취미(?)인 고등학교 동창

수다맨은 아닌데, 수다스러운 남자.
뭔가 심오한 이야기를 만화책 줄거리 이야기하듯 이야기 하는 남자.
- 대학 동기

익구 같은 사람이 법 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 다음 세대는 좀 더 좋은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
- 대학원 진학을 축하하며 고등학교 동창이 해준 덕담

형 좋아하시는 일 찾으실 거예요 ㅋㅋ 형을 사람들이 안 내버려둘걸요...
- 05학번 후배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 훈련소에서 내게 보내온 편지에도 논어의 한 구절을 ‘한자로’ 써서 보냈던 녀석.
우리 나이 대에 걸맞지 않은 압도적인 독서량과 풍부한 지식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물론 읽기 버거운 건 있다.)
- 대학 동기가 자신의 블로그에 익구닷컴을 소개해주면서 쓴 글

익구는 정말 살아 있는 reference 야. 훗훗훗
이런 저런 생각하는 거나 말투도 그렇고 진짜 틈이 안보이네
최익구도 알고 보면 똘끼 대마왕!
- 만나 뵐 때마다 즐거운 경선누나

조신하게 지내는 건 너에겐 이룰 수 없는 꿈같은 걸?
- 대학 동기
 
익구야~ 이민가지 마
- 고등학교 동창, 2007년 대선 직후 나눈 새해 인사

형은 절대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 헛소문을 들은 09학번 후배

익구 진짜 강의 하나 차려라 구민회관 같은데 강좌 하나 차리면 잘 되겠어
- 밤새 대화를 나눈 고등학교 동창이 뜬금없이 건넨 말

형님은 항상 얼굴에 웃음이 꽃펴있어서 세상을 되게 즐겁게 사시는 거 같아요
- 08학번 후배
 
하여간 말이 길어 ㅋㅋㅋ 잘 지내는 것 같구나 ㅎㅎ
- 나의 말 많음을 염려하는 00학번 선배님

진짜 이름 잘 외우시네요,,, 형은 딱 정치인 스타일
- 04학번 후배

전 나중에 신문 칼럼에서 익구형 이름을 읽게 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작정입니다.
- 05학번 후배

익구형님. 이번엔 얼마나 금주를 하실 건가요 ㅋㅋ 
- 금주에 대한 고견을 청했을 때 07학번 후배
 
넌 충분히 바른생활 사나이다 ㅋㅋ 그만 자제해라 ㅎㅎ
- 희영누나

불쌍한 (익구의) 간장(肝臟)님
- 나의 과음을 염려한 고등학교 동창

네가 인문학 했으면 잘했을 거 같다 이런 생각
- 고등학교 동창
 
형은 꼭 공직에 나가셔서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하셔야 해요. 정치든 공무원이든... 기업 쪽으로 가셔도 훌륭한 오너가 되실 듯
- 지인지감(知人之鑑)을 좀 더 연마해야할 듯한 04학번 후배

익구 같은 분이 회사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우리나라 행정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문자

10년 뒤에도 어제처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네.
- 노무현 대통령님 서거를 접하고 침통했을 때 만나 뵈었던 97학번 선배님

고등학생은 아니죠?
- 2009년 11월 21일 대학원 면접을 앞두고 간단히 점심을 먹으려고 들른 식당 주인 아주머니께서 하신 말씀, 그 때 당시 학부 면접이 같은 날 있어서 아마 그런 오해를 하신 모양임

근데 난 너랑 대화하면 어려운 문제가 더 어렵게 느껴져
익구 쉽게 말하는 법이나 문제를 단순화하는 법을 연습해 보는 것은 어때
풍부한 어휘나 너의 필력은 잘 알겠지만 결국 커뮤니케이션이자나
정확한 정보 전달 만큼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이해를 이끌어 내는 거니까
- 나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건넨 고등학교 동창

항상 궁금한 건데 넌 왜 경영학과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ㅎㅎ
경영학과 내에서 너의 입지를 궁금해 하는 것보다도
너 개인적 의지와 학문적 욕구 같은 걸 짐작해봤을 때 궁금한 거라서.
- 대학 동기, 자주 듣는 질문이었으나 경영학과 무사졸업을 그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음

익구의 글은 유명논객이 썼다고 해도 믿을 만큼 훌륭하지만 저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젊은이의 글은 통찰, 균형감각 같은 미덕보다는 늙은이들을 자극할 만한 치밀한 분별, 신선한 발상 등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시비를 건 건 제가 익구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라고 봐 주시길.
- young님의 댓글

최익구-가만 생각해보면 인터넷을 가장 건전하게 사용하는 녀석이다.
진지하다 어렵다 그럼에도 긍정적이다
난 생각한다. 녀석은 무슨 재미로 살까?
- 고등학교 동창

익구 이놈한테는 글을 쓰기가 너무 조심스러워. 분명 맞춤법/띄어쓰기 등 틀린 글자가 마치 워드에서처럼 빨간 줄이 자동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지.
- 00학번 선배님

“자기를 다스릴 때는 가을기운을 띠고,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봄기운을 띠어야 한다(律己宜帶秋氣, 處世宜帶春氣)” 내가 늘 그렇게 해야 겠다고 품고 사는 생각을 미리 실천해나가는 익구형. 익구형의 성격을 좋아하고 익구형의 글을 좋아하고 익구형의 생각을 좋아하고 익구형을 좋아한다.
- 04학번 후배와 게시판 글을 주고받다가

지금 네 정도의 성향도 극렬 좌파라 오해받는, 명문대 경영학도들의 무관심과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너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너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게 아니길, 이정도도 오해받는데 더 반대편으로 기울면 어떻게 하지 소심해 하는 게 아니길 바란다.
- 고등학교 mannerist님의 정감어린 말씀

한번쯤 ‘인용을 하나도 쓰지 말고’ 글을 써 보는건 어떨까? 당신 글을 볼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게 주장은 명확하지만 그에 따르는 근거로 제시하는 ‘옛 성현들의 말씀 인용’은 모호한 경우더라구. 역으로, 익구공의 글에서 인용을 싹 들어내고 어떤 야마가 남나 한번 따져보길. 당신만큼 ‘옛 성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우와 이 양반 만만찮게 글도 쓰고 멋도 부리는구나’라고 놀라겠지만, 글에서 야마 뽑는 재주, 그리고 더 나아가 글쓴이의 심리 상태까지 읽어내는 사람들에게 호사스런 취미가 쫌 지나친 양반이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니까.
- mannerist님의 또 다른 충고

익구형님과의 밤을 잊은 대화. 때로는 학자같은 면모를 보이시다가도 때로는 정치가 같은. 뭐랄까 가공할 만한 식견을 지닌 달변가라고 해야할까. 역시나 오늘도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평소 관심만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있던 주제에 대한 화두도 던져주시고.
(중략)
나도 꽤나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익구형은 남달랐다.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 같은 측면 뿐만 아니라 흥미를 가진 분야에 대한 남다른 시선. 역시 학생으로서 모델로 삼고 싶은 선배 중 한분이다. 많이 배워야지 흐흐흐 이런 분 알게 된것도 분명 행운이니깐
- 06학번 후배와 밤새 대화 나누고 난 뒤 후배가 쓴 대화 후기(?)에서 발췌


부록으로는 고등학생 시절 짝을 했었던 석민이가 저에 대해 평한 글을 퍼온 것입니다. 친구가 재담을 통해 웃자고 과장광고를 한 것일 뿐이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달 동안 지켜본 익구씨의 모습...]
- 2001.05.01 작성, 출처 - 서울외고 6기 중국어과 동호회 ‘我是誰’

난 2달 남짓한 시간을 최형(본명:최익구 18세)과 함께 짝궁이란 명목으로 생활을 같이했다.
7시20분에 만남, 계속 동거동락, 11시에 헤어짐 다시 7시간 후에 만남...
부모님보다도 더 오래 생활을 한 나로서는 최형의 몸가짐과 행동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먼저 그의 단아한 자태...
한 마리의 봉황을 보는 듯 하다. 가지런한 손가짐...
바른 몸가짐... 곧은 걸음걸이...

두 번째... 수려한 말솜씨...
그의 수식어구에는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세 번째... 해박한 지식...
철학, 종교, 법, 사회, 문화, 한문, 문학...
우리반, 과, 학교에서는 적어도 최형을 따라올 인재는 없는 거 같다.

네번째...온화한 인품...
절대 거절이란 것을 모르는 부처, 공자, 예수 같은 마음~~~

다섯 번째... 철저한 준비 정신...
솔직히 우리 반에서 쉬는 시간에 다음시간 예습, 준비를 하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최형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

여섯 번째...겸손함~~~!!!

아마 이 글을 읽고서... 분명 꼬리에다가...
"아닙니다 정형... 제가 뭘요..."라고 쓸 것이다.

내가 더 쓸수도 있지만... 최형의 심기가 불편할까봐...
그리고~~~

요새 최형 보고 변태라고 하는 불순분자들이 있는데...
절대 아님... 절대... never...
그럼....모두 안녕~~~

최형 사랑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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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석민동자에게...


물론 이 글에 날라 들어온 돌들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휴... 최익구 안티싸이트는 벌써 활동중 입니다.”
“난 안티 최익구이다... 그는 거절을 안다...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러지마 익구도 가끔 착할 때도 있어.”
“정석민... 널 보니깐 과거 2년 동안 속고 지내왔던 나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과거를 보는 거 같군... 너도 곧 깨닫게 될 것이야...”

Posted by 익구
:

칼 포퍼의 ‘세계 3’에 대한 논문들을 엮은 『객관적 지식』이라는 책이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관계로 여러 선생님들의 글을 참조해 이해해보았습니다.


일전에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라는 포퍼의 저서가 출간된 적이 있다. 포퍼는 유기체를 목적추구적이라기보다는 문제해결적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문제나 문제상황이 감각기관의 인식보다 선행한다고 보며, 우리의 감각기관은 문제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나 동물의 목적이 특정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생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통한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보는 셈이다.


가령 어떤 동물이 물을 마시려고 풀숲을 뚫고 갔다고 할 때, 다른 동물은 앞선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좀 더 쉽게 물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보면 최초의 동물이 특별히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길이 넓혀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계획하지 않은 귀결이다. 포퍼는 언어나 제도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포퍼는 문제를 과학 더 나아가 우리 삶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행착오의 방법을 “문제(Problem 1)→잠정적 이론(Tentative Theory)→오류 제거(Error Elimination)→새로운 문제(Problem 2)”로 도식화한다.


오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인 토론과 경험적인 테스트가 수행되어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 2는 문제 1보다 좀 더 진리에 가까운 객관적인 지식이 된다는 논리다. 이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지식이 성장한다고 이해하면 될 듯싶다.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절대적 가치로서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면 닫힌 사회로 가게 된다며 비판한 내용을 상기해보면 좋겠다. 그의 사회철학인 ‘점진적 사회공학’의 요체는 결국 삶이 문제해결의 연속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해결에 적합한 사회는 결국 자유롭게 비판하고 토론하는 열린 사회라는 데까지 이어진다.


객관적 지식의 성장을 주창하는 포퍼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 세계 이론’을 제시한다. 포퍼는 물질의 세계인 ‘세계 1’, 그리고 주관적 마음(정신, 의식)의 세계인 ‘세계 2’와 구별되는 ‘세계 3’을 고안한다. 객관적 사상의 세계, 마음의 산물이면서도 그 인식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는 세계 3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상, 언어, 윤리, 제도, 과학, 예술 등을 설명한다. 세계 1은 시공간에 있는 물질의 세계 정도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세계 2와 세계 3의 구별에 좀 더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이 이론의 특성상 세계 1의 정의는 물리적 속성이라는 측면이 부각되기만 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사실 포퍼 자신도 세계를 반드시 세 가지로 분류해야만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는 않는다. 스스로도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 편의상의 문제라고 보고 예술작품은 세계 4에 속하는 것으로 봐도 괜찮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 1, 세계 2, 세계 3이 시간의 순서대로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물리적 세계가 가장 분명하게 실재한다고 보는 것은 딱히 더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다. 포퍼는 의식의 출현은 생명현상에서 진화한 현상이라고 설파한다.


다시 말해 모든 유기체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계 1의 생명체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이 세계 2를 낳게 된다. 세계 1이 세계 2를 출현시켰지만 세계 2가 출현한 다음에는 자신을 출현시킨 세계 1에도 작용하여 변화시키는 모습을 두고 세계 2가 세계 1과 상호작용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는 세계 2와 세계 3에도 적용되어 세계 3이 세계 2에서 출현하지만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영역을 구축하며 세계 2와 상호작용한다. 포퍼는 세계 3이 세계 2를 매개로 하여 세계 1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가령 세계 3에 속하는 설계도나 각종 이론들이 세계 2에 속하는 건축가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해보자. 건축가는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땅을 얼마나 파고, 벽돌을 얼마나 쌓을지를 정해서 세계 1인 건축물을 만든다. 이처럼 세계 3은 ‘세계 2에 의한 산물의 세계’로 정의해볼 수 있다. 건축가가 참조한 세계 3의 이론은 결국 세계 2의 영역에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포퍼는 세계 3과 우리 자신이 상호 작용해서 객관적인 지식의 성장을 낳는 것은 동식물의 진화 같은 생물학적인 성장과 유사하다고 역설한다.


포퍼는 우리가 창안했지만 우리가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 3에 대한 예시로 자연수를 언급한다. 자연수는 인간의 창안물이지만 그 자신의 자율적인 문제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로 소수(素數)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소수의 존재는 인간의 의식인 세계 2에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 3에 존재하다가 발견된 것이다. 소수가 수학자들에게 발견된 이후에는 세계 2와 세계 3 모두에 존재하게 되었다. 덧셈이나 곱셈은 인간이 발명했지만 교환법칙, 결합법칙, 분배법칙은 의도하지 않은 발견인 것도 비슷한 사례다.


세계 3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인간의 산물이지만 일단 이론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갖기 시작한다. 이론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귀결을 산출하며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
One may say that World 3 is man-made only in its origin, and that once theories exist, they begin to have a life of their own : they produce previously invisible consequences, they produce new problems.
- K. R. Popper and J. C. Eccles, The Self and Its Brain(1977)


인간 정신의 산물들의 세계인 세계 3이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을 생산해낸 인간과 분리된다는 점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세계 3은 세계 2에서 파생되었으되 예기하지 못한 논리적 귀결들과 문제들로 구성되는 자율적 영역이라는 것이 포퍼 주장의 핵심이다. 이런 양태를 예기치 않게 불시에 나타난다는 뜻에서 창발적 진화론(emergent evolution)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의도치 않은 귀결, 인식주체를 벗어난 독자적인 발전과 전개는 세계 3의 자율성을 논증한다.


정리하자면 주관적인 인식의 세계인 세계 2에서 객관적인 인식의 세계인 세계 3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진화론에 대한 논증이야말로 포퍼가 애지중지했던 객관적 지식의 존재에 대한 논거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산출한 지식이나 이론 역시 오류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지식은 비판에 열려있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인 면모를 지닌다. 포퍼는 세계 2와 세계 3을 구별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인식하는 자가 없는 인식이다. 그것은 인식 주체가 없는 지식이다.
Knowledge in the objective is knowledge without a knower: it is knowledge without a knowing subject.
- K. R. Popper, Objective Knowledge : An Evolutionary Approach(1972)


세계 2와 세계 3의 구별은 획기적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말하는 사람과 그가 내놓은 이론, 지식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 지식은 어떤 사람의 행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말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비판을 구분해야한다고 설파한다. 비판과 토론에서 누가 주장했는가보다 어떤 주장을 했느냐에 주안점을 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 것이다. 이 전환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을 동일시하지 않는 혜안을 선물해준다.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제멋대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주장 자체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사람=그 사람의 말과 글‘이라는 등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포퍼는 과학의 객관성은 과학자 개인이 객관성을 갖추려는 시도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구와 원수 사이의 협동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객관성은 자기 혼자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 속에서 섞이고 스미면서 만들어진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견을 나누고, 비판을 가한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주의주장을 없애는 길은 그 주의주장의 제창자와 추종자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의주장 자체의 허실을 가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어떤 주장과 그 주장을 한 사람을 동일시해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주장을 묵살했다. 포퍼는 잘못을 통해서 배우려는 자세와 남을 함부로 단죄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먼저 점검하는 태도를 주문한다.


예송논쟁이 한창일 때 서인인 송시열에 대항했던 남인 논객 윤휴가 숙종 6년(1680) 억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조정이 어찌하여 선비를 죽인단 말인가(朝廷奈何殺儒者云)?”라고 외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쟁이 당초 취지에서 틀어져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던 참담함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려는 이상이나 신념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도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없는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공서파(攻西派)의 강경 대응 주문에 정조는 “사교(邪敎:천주교)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유학)의 진흥에 의해 막을 수 있다”라고 탄압에 반대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한 개명군주의 바람과는 달리 정조 사후에 천주교도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이어졌다. 그러나 교조화된 성리학의 답답함을 서학으로 풀게 된 이상 수천의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교사에 의한 전파보다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수용이 강한 한국 천주교 보급은 사대부의 무능한 통치에 신물이 난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홍경래가 최후로 버틴 정주성이 관군에 함락되면서 2천9백83명이 사로잡혔을 때 열 살 이하의 남자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을 모두 처형했다는 끔찍한 기록이 떠오른다. 지역 차별을 반성하지 않고 피로써 잘못을 감추려했던 역사의 비극이다. 어디 그뿐인가. 장보고에게 비수를 꽂는다고 신라 골품제의 비효율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만적을 강물에 던진다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육신을 거열형에 처한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찬탈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봉준을 죽여도 사람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식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없애 그 사람의 이론과 사상을 손쉽게 정리하는 야만을 저지르기 힘든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사람을 쳐내는 광경을 목격한다. 김제동, 진중권, 정연주, 이동걸, 황지우, 신태섭 등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명박 정권의 코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석연치 않은 모양새로 일터에서 쫓겨난 분들을 열거하려니 화가 난다. 비판을 감내하지 못하고 다양성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세 세계 이론은 그 사람이 내놓은 지식과 인식, 내뱉은 말과 글을 비판함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열린 세상을 만든다. 세계 3은 덜 폭력적인 문화적 진화를 바라는 희망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가수 김민기는 “내가 만든 노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노래란 향유하는 사람들 나름의 창조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자신의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무덤덤하다고 밝혔다. 이 말처럼 세계 3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되는 지식들을 모두 자신의 소유인양 착각하지 않는 겸손함을 가져야겠다.


세계 3이란 아이디어는 치열하게 토론하고 정직하게 경쟁하되 겸허하게 수용하고 깨끗하게 승복하라는 깨달음을 준다. 사람을 원망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세계 2와 세계 3을 분간할 수 있다면 우리네 삶은 한결 넉넉하고 너그러워질 것이다. 포퍼의 명언으로 맺는다.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그리고 노력하면 우리는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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