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5/24 국민참여당을 위한 덕담 (2)
  2. 2010/05/24 노무현 서거 1주기를 보내며 (3)
  3. 2010/05/05 학생과 수험생 (4)

1.
나는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애정의 눈길을 보냈듯이 국민참여당에도 관심이 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보수정당으로 달려갈 만한 가능성이 가장 많아 보인다는 측면에서다. 내가 보수정당이라고 칭하는 것은 아마도 유럽의 정치 개념으로 분류한 것일 테다. 또렷한 진보정당들이 존재하는 한국에서 국민참여당을 진보정당으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지향한다고 볼 여지는 있을 듯싶다(이런 분류에 동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국민참여당이 괜찮은 보수정당으로 발돋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줄 끼적거려 본다.


2.
국민참여당은 인기가 떨어진 대통령을 내치기에 바빴던 지난 정당사에 견주어 특이한 정당이다. 과거 정부의 공과를 분석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겠다는 포부는 신선하다. 이 당이 기존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옮겨 올 여지가 적잖다는 점에서 야권 분열의 우려는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정치 냉소층의 지지도 얻고, 민주당을 울며 겨자 먹기로 지지하고 있던 개혁파 유권자들이 좀 더 즐겁게 지지할 정당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야권 분립이라고 봐도 좋다. 새로운 지지층을 창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당이 포용하지 못한 옛 열린우리당 지지층을 복원하는 것도 주요 과제다.


경기도지사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불리한 조건을 딛고 유시민 후보가 승리한 이유는 국민참여당에 대한 범야권 지지자들의 일정한 호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당의 등장이 비정한 정치판에서 모처럼 느끼는 사람 냄새라고 여기는 분들이 계시고, 민주당으로는 안 되겠다는 분들도 적잖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어지러운 탈당과 창당 놀이 끝에 탄생한 대통합민주신당을 이어받은 민주당은 의연하게 패배하지 못했다. 위기관리에 실패했던 당시의 경험 때문에 야권 통합의 기수로 민주당을 내세우기 머뭇거리게 만든다. 민주당이 좀 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나는 이전부터 지역적 기반이 없는 신생정당이라면 자유선진당 만큼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공산이 크다고 전망했다.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한 정당 전체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경우는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했던 꼬마 민주당 정도가 기억나는데 거대 여당을 눈앞에 두고 이 모험을 감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국민참여당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과의 후보 단일화가 없이는 단독으로 승리하기 힘든 군소정당일 뿐이다. 바보 노무현의 험난한 좌절을 되풀이하는 것이 지금 이 단계에서 적절한 전략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창당의 기치를 내걸었으니 응원하는 수밖에 없겠다.


3.
우리나라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정당일체감이 낮은 편이다. 당비 내는 당원의 비율이 낮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부 지역주의적 투표 행태는 정당일체감의 부족으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권자가 특정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일체감이 적으니 지역일체감이 상대적으로 큰 변수로 부각되는 것이다. 정당일체감을 위해서는 돈도 들고, 각종 행사에 참석하는 시간도 내야하지만 지역일체감을 실현하려면 선거 때만 표를 찍고 오면 되니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는 요인도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의 차이를 능가하는 가치의 차이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


1968년 미국 독립당을 창당했던 조지 월러스는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는 1달러는커녕 25센트 정도의 차이도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네 여당과 제1야당은 10센트의 차이를 선거 때 2달러로 불리는 재주가 대단하다. 물론 10센트의 차이를 50센트로 벌인다면 지역구도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가치의 차이를 벌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작은 차이도 내실 있게 경쟁한다면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 지도자의 인간적인 매력 역시 그 정당의 경쟁력이 된다.


국민참여당이 내세우는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은 열린우리당이나 개혁당이 시도했다가 흐지부지된 정치실험이다. 민주당과 정책 측면에서 큰 차이를 내기 힘들다 보니 조직 운영 측면으로 접근한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하지만 같은 정책이라도 정책을 실현하는 사람에 따라 효과성에 차이가 날 수 있고, 같은 정책이라도 얼마나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느냐에 따라 효율성이 달라질 수 있다(물론 민주당이 의지는 부족해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점은 인정한다). 국민참여당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민주당에게서 보이지 않는 활력이나 기운이다.


4.
전반적인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정보의 접근과 가공이 쉬워지면서 일반 유권자와 정치 전문가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는 점은 국민참여당의 기회 요인이다. 정치적 영향력이 특정 소수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고르게 퍼지면서 국민의 생활정치 욕구는 앞으로도 더 커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특정 정당의 열성적 지지자가 될 만한 공통분모를 더듬기 힘들다는 점은 국민참여당의 위협 요인이다. 국민참여당은 당 지도부의 참신한 행보와 당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문호를 넓히는 것으로 이에 대응하는 듯하다.


미국식의 원내정당은 원내 의원과 정책 전문가 등이 당을 운영하는 반면, 유럽식의 대중정당은 당비를 납부하는 진성당원이 상향식 의사결정으로 당을 운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옛 열린우리당은 원내정당과 대중정당을 동시에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당의 최후가 아름답지 못했기 때문에 두 가지를 잘못 섞어서 혼란에 빠졌다는 비판을 듣는다. 비교적 꾸준히 대중정당을 추구하는 민주노동당이 외연 확장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볼 때 국민참여당이 대중정당을 절대시하는 건 위험하다.


그렇다고 어릴 적부터 민주당 지지나 공화당 지지가 자연스럽게 나뉘는 미국의 정치 문화에서 가능한 원내정당을 우리가 전적으로 도입하기에는 저마다 지지하는 정당을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운 한국의 정치 문화와 맞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정당이든 대중정당과 원내정당을 절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국민참여당은 당원에게 배타적으로 권리를 줄 사안과 지지자나 국민도 참여할 수 있는 사안을 정하는데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좀 더 섬세할 필요가 있다.


5.
지난 2008년 총선 때는 내게 주어진 두 표를 모두 진보정당에게 건넸다. 이번 지방선거 때는 적어도 비례대표 표는 국민참여당에 건넬 예정이다.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내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니 크게 미안할 일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야권 단일화의 대의를 위해 서울시장을 노회찬 후보로 단일화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다녔다. 결과적으로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고 야권 단일화는 생각보다 촘촘하지 못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국민참여당을 비롯한 작은 야당들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래서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에게도 일침을 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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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한별 2010/05/24 20:51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러게..정당정치의 공고화를 해야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어떤 정당의 당원이라는 것 자체가 살짝 숨겨야할 문제로 치부되고 별다른 자부심도 주지 못하는 현실이 참..신용카드에는 골드카드, 플래티넘카드 네 VVIP를 위한 카드네 하는 마케팅에 잘 낚이던데 당원 가입을 좀 까다롭게 해서 당원이라는 신분이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들면 어떨까 생각도 들더라고. 한달에 만원도 안내려는 우리나라 분위기에서는 공상같은 생각이긴 해. 하지만 일당독재에다가 부패의 유혹이 매우 큰데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이 그럭저럭 지도력을 잃지 않고 복잡한 문제를 잘 해결해나가는 원동력 중의 하나가 공산당원이라는 지위 자체가 갖는 사회적인 명예의 측면을 생각하면 안타깝긴 해. 명망가정당이 아닌 진정한 대중정당을 건설해보지 못한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와 민주노동당의 뼈아픈 분열이 참 아쉽다니까.

    아무래도 지금 당장의 선거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익구 말대로 지금 상태대로라면 참여당의 유시민 후보가 더블 스코어로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을텐데 안타깝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지금의 기대가 좌절과 냉소로 바뀌어서 이명박의 당선처럼 더 부정적인 반동을 불러오지는 않을런지 걱정되고.

    • 익구 2010/06/28 05:09 Address Modify/Delete

      정당정치의 공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무엇이 있을까 고심하다가 보니 답글이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사실 저도 말은 저렇게 해놓고 정당 가입을 계속 망설이고 있으니까요.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것은 믿으면서도 경계해야 하는 오묘한 긴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많이 신중해진 모양입니다. 하지만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아예 정치 관련 이슈를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는 정말 문제가 있는 듯싶어요.

      일전에 <소개팅에서 지지정당 묻기>라는 잡글을 쓰기도 했지만...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오히려 정치적 편향으로 귀결되고, 비정치적인 것에 대한 압력이 오히려 더욱 정치적인 선택을 낳는 것은 아닐까 늘 생각합니다. 노정태님 같은 분은 “오바마니아는 다 민주당원인데, 노사모는 개혁당원 혹은 민주당원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시며,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곱씹을 점이 많았습니다.

      이따금 치러지는 선거에서 한 표야 어쩌다가 찍어줄 수 있겠지만, 매달 제 지갑을 여는 행동은 정말 결단(!)이 필요한 일이니 긴 호흡이 필요하겠지요. 이 결단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현재의 거대 정당들이 ‘내 돈 건네고 싶은 정당’으로 탈바꿈하기란 난망일 테니 말입니다. 여하간 저는 한국의 정치문화가 정치적 기본권을 상당히 제약하는 쪽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2학기 때 배울 기본권론 수업에서 이 고민을 풀 실마리를 좀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서거 1주기를 차분하게 보냈다. 한 달 전에 헌법총론 예습을 위해 탄핵심판 헌재결정을 읽다가 IPTV를 이용해 1년 전 영상을 다시 찾아본 관계로 너무 일찍 추모를 시작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의결서를 보면 국가의 지도자에 대한 예의는커녕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글을 함께 써 내려갔거나 동조했던 이들이 지금은 국민을 향해 충성을 강요하고 있다.


비가 많이 내리던 22일 밤 자정을 전후해서 내 착잡한 마음을 나눠줄 분들에게 무작정 문자를 보냈다. 늦은 시간에 연락을 드린 무례함을 용서하고 답문을 보내주신 분들이 적잖아서 송구스러웠다. 어느 한 분은 내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문자를 보내자 “부끄럽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고쳐야 할 듯”이라는 답문이 왔는데 가슴이 짠했다.


작년 이맘때를 돌아보니 둘레 사람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슬픔을 나누자는 뜻이었기도 하지만 내가 걱정되었다는 분들도 있었다. 서거 속보가 막 전해지던 때에 전화기를 꺼두었던 터라 남들보다 늦게 소식을 접했다. “하 이게 뭐니”라는 문자의 뜻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기분이 참 무거웠다. 물음표까지 생략한 “우냐”라는 문자에 답문을 어떻게 보냈는지 헛갈리지만 아직은 안 운다고 보냈던 것 같기도 하다.


2009년 5월 24일 선배님께서 낮술을 사주셨는데 선배의 물기 어린 눈을 보다가 나는 그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덕수궁 돌담길에 이르렀을 때 선배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훌쩍거렸다. 선배는 내가 우는 걸 보고 울었다고 회고하셨는데 아마 선배의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너무 기력을 소진했던지 줄을 기다리다가 결국 분향을 하지 못했고 며칠 뒤에 조계사에 가서 간신히 문상을 했다.


2009년 5월 25일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친구로부터 “지금을 원하나 태릉입구로 튀어감?”라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고 화랑대역 근처에 사는 친구까지 포함해 세 사람이 모였고 한참을 걷다 중화역 근처 감자탕집으로 향했다. 당시에 나눴던 대화를 좀 더 기억해내고 싶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별 말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집 앞까지 찾아와준 그 친구 덕분에 큰 위로를 얻었다. 다시금 고맙다.


그 때 당시 여러 추모 칼럼이 있었지만 지금 언뜻 떠오르는 건 육상효 선생님이 한국일보에 기고하신 <그는 우리에게 누구였을까>라는 글이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담담히 서술하는 글인데 나도 그 당시에 이런저런 말을 토해냈을 텐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009년 5월 29일 영결식장에 함께 있었던 친구에 따르면 “잘 가요”라는 말을 넋두리처럼 많이 했다고 한다. “(그 시절이) 나쁘지 않았어”라는 말도 적잖이 했던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내가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혹자는 정치인 노무현보다 인간 노무현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정치인 노무현도 좋아했다. 물론 그에게 완벽함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있을 때 했어야만 하는 일, 할 수 있었던 일, 하면 좋았던 일 가운데 몇 가지를 해내지 못했다. 공인으로서 마땅히 비판받을 점이다. 그래서 때때로 실망하고 서운했지만 그런 감정보다 한두 뼘쯤은 더 좋아하고 아꼈던 분이었다.


덧없는 세월은 흘러 또 다시 선거의 계절이라지만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분을 가까운 시일 내에 찾지 못할 것 같아서 멍멍하다. ‘또 다른 노무현’이나 ‘더 나은 노무현’이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 때문에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픈 모양이다. 대한민국에 인재가 없지는 않을 테니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일꾼들을 키우고 응원해야겠다.


집단으로서의 유권자는 영원한 면책특권을 누린다. 그 면책특권은 민주주의의 과실이다. 나는 민심이 무조건 위대하다는 명제에 동감한다. 김제동님께서 시사IN 인터뷰에서 “사람은 틀릴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틀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신 말씀과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민심은 천심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맹목적 다수결주의가 아닐 것이다. 변하는 민심처럼 시대정신도, 그 사회의 지배적 조류도 바뀌게 마련이라면 오늘날 일시적 다수파가 된 분들이 잠시 맡은 제한된 권한을 삼가며 쓰는 자세를 갖추시길 바란다.


『회남자(淮南子)』가 출전인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는 고사성어 가운데 이야기의 전체 내용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편이다. 새옹지마는 부푼 희망을 노래하기보다는 차분한 평상심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지고 전해지는 것 같다. 새옹지마와 비슷한 표현으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을 꼽기도 하는데 나는 뜻빛깔이 좀 차이가 난다고 본다. 새옹지마는 오히려 삶의 변화무쌍함을 논한다고 해야 좀 더 정확한 듯싶다.


변화무쌍은 무상(無常)이란 말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는다. 무상에는 늘 변한다는 뜻과 더불어 덧없다는 뜻도 있으니까 말이다. 여하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새기자면 삶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 지방선거가 지방정치 독점이 해소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옳거나 정의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새옹지마의 이치라고 해도 좋겠다. 변방으로부터 노무현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이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길 고대한다. - [無棄]


변방 어르신의 태연자약함을 좀 배우겠다는 뜻에서 새옹지마 번역문을 첨부한다. 직역 위주로 번역을 손질한 탓에 문장이 어색하니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길...


재앙과 복이 바뀌어서 서로 생겨나는 변화는 예측하기 어렵다.
夫禍福之轉而相生, 其變難見也.


변방가에 가까이 사는 사람 가운데 점을 잘 치는 자가 있었는데,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그 말이 까닭 없이 도망가서 오랑캐 땅에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로했다.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그 노인이 말하길, “이것이 어째서 복이 될 수 없겠는가?”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여러 달이 지나서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축하했다.
居數月,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그 노인이 말하길, “이것이 어째서 화가 될 수 없겠는가?”
其父曰, “此何遽不能爲禍乎?”


집에 좋은 말이 많아지자 그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로했다.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脾. 人皆弔之.


그 노인이 말하길, “이것이 어째서 복이 될 수 없겠는가?”
其父曰, “此何遽不能爲福乎?”


1년이 지나서 오랑캐들이 변방에 크게 쳐들어 와서 건장한 청년들이 활시위를 당겨서 전쟁터에 갔다.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 引弦而戰,


변방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은 자가 열에 아홉이었다.
近塞之人, 死者十九.


이 사람은 홀로 절름발이라는 이유 때문에 부자(父子)가 서로 보존할 수 있었다.
此獨以跛之故, 父子相保.


그러므로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변화는 다함이 없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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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본준 2011/01/23 03:4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위의 글을 저에 생각에 견주어 세심히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글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 (공대졸업하고 직장생활 17년째 42세 중년의 청년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 두죠)이지만
    그것에 관계없이 정도를 가야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해두죠

    정권과 권력을 쥔 사람들이 보인 행태는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겠죠

    모두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인신의 틀 안에서의
    최선일뿐~~~

    천심(민심)에게 묻지 않는다면
    그들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영국 속담인가를 빌려서 말하면

    1. 미친 개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는 사람들 ?)
    2. 걷잡을 수 없는 홍수 (당할 수 없어 피하는 것이 상책인 사람들, 전쟁 중의 군사들?)
    3.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는 사람들 (정치인, 학자, 언론인, 경제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
    서 다채로운 사회 경험이 부재한 상태에서 책을 열심히 보아서
    아전인수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인품과 인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을 경계하고 스스로도 이러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라 하였으니
    오로지 경계할 일입니다

    노무현 선생의 일이야 무어라 말로 형언할 길이 없지요

    왜 주변의 사람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였는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이 없는 것을

    노 선생은 어릴 적 독하게 공부하여 그 막장을 벗어났으나
    한 때의 쾌락을 뒤로 하고
    다시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백의종군과 남이 가지 않는 길로 달려 가셨으며
    그것이 백성의 마음을 얻어
    대권을 얻었던 것입니다

    많은 서민의 마음이야
    어찌 그러한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까요 ?

    그는 권좌를 내려오는 길에 대해서는
    경험이 전무하였고
    또한 슬기롭지도 못하였으며
    그 거센 역풍과 역공에 대해서도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측면이 큽니다

    권좌에 있을 때는
    거센 홍수와 미친 개들이 공격을 피하지 못하였고
    권자에서 내려와서는
    제3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을
    가볍게 받아 넘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인정해 주지 그랬어요

    그래도 누가 그것을 탓하겠어요

    세상은 한없이 혼탁하고

    다산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루 말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옛 어른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18년을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울분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와 슬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충무공의 사례는 또 어떤가요 ?

    탁상공론과 당쟁의 회오리에 걸려서

    죄없는 죄인이 되었지만

    끝내 하늘이 도와 (민심은 절대 그를 버리지 않았으므로)

    민족을 구원하는 성인의 경지에 오르셨잖아요

    공인의 생명이야

    만인의 것인것을

    그것을 스스로 버리셨다니

    해도 해도 너무 잘못하신 것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리 우격다짐으로 적는 것이니

    반대편의 이리떼 승냥이떼야

    원래 말귀가 막힌 자들이니

    무어라 하리요

    오호 통재어라 !

    앞으로는 이에 대한 사례 연구라도 해야지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한 법이라도 생겨야 하는 것은 아닐지

    국가의 운영 시스템을
    선진화한는 쪽으로
    누가 바꿀 수 있을까요 ?

    결국은 또 한번
    민심이 움직여야 할 때가 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달리
    방법이 정녕 없기에~~~ ~~~~~

  2. 구본준 2011/01/23 03:4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위에서 인신은 인식으로 바꿉니다

  3. 구본준 2011/01/23 03: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권좌에 있을 때는
    거센 홍수와 미친 개들이(의로 고침) 공격을 (효과적으로) 피하지 못하였고

학생과 수험생

잡록 2010/05/05 21:36 |

나는 시험보다 교육에 주안점을 둔 것에 법학전문대학원의 대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험이 고급화될수록 교육과 상충관계가 된다. 모든 가치기준이 수험적합성에 맞춰지면서 법과대학의 수업이 파행적으로 운영된 경험을 반추해보면 알 수 있다. 시험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교육을 향한 노력도 평가하겠다는 명분을 늘 기억해야 한다.


한 번의 시험이 아닌 다방면의 교육으로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로스쿨을 도입한 만큼 변호사시험은 의사국가고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의사국가고시의 합격률은 2010년 92.9%, 2009년 93.6%였다. 높은 합격률에도 별다른 시비가 없는 것은 의대 교육과정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종류의 경쟁을 설계해야 한다. 물론 경쟁이 늘어난다고 해서 경쟁의 강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어떤 경쟁을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시험과 교육의 적절한 배합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여하간 나는 ‘시험보다는 교육’이라는 법학전문대학원의 표어에 끌렸다.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것도 결국 잘게 나눠진 시험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내가 로스쿨에 진학한 까닭은 행복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수험생보다는 학생으로 살고 싶다. 수험생과 학생을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수험생이 시험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라면 학생은 교육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한다.


『꼴찌도 행복한 교실』의 저자가 독일의 쿠벤 김나지움의 교장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흥미롭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사고의 깊이와 인성이 고양되지 않은 지식인을 키우는 교육을 가장 경계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곱씹을 만한 언설이다.


고령화 시대에는 젊은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어른을 부양해야 한다. 이제 극소수의 승자만이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잠재성과 소질을 계발하도록 노력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인간을 생각하는 경쟁이 가능할까 막막하기는 하지만 경쟁이 심하더라도 그 안에서 보람을 찾고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교육 현장 등에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방안을 계속 궁리하고 싶다.


일전에 김우창 선생님은 <자기가 선택하는 삶>이라는 칼럼에서 우리 사회가 젊은 시절이 없다고 탄식하셨다. 내면적 의미의 추구와 외면적 가치에의 순응 사이에서 고민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도 자기 스스로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삶을 성찰할 여유가 없다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남을 이기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에 몰두하기 십상이다. 배움이 지속가능하려면 책을 펼치는 순간만큼은 가슴이 뛰어야 한다.


학생이 인격 도야와 자기 수양에 바탕을 두고 공부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나 혼자만의 즐거움에서 그칠 수 없다. 연못가에서 새와 짐승을 바라보며 즐기던 양혜왕이 맹자에게 현자도 이런 놀이를 즐기느냐고 물었다.


맹자는 “현자라야 이런 것을 즐겨한다(賢者而後樂此)”라고 답한다. 현자는 여럿이 함께 즐거워할 줄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래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공직자의 자세쯤으로 좁게 해석하기보다는 모든 배우는 이의 덕목으로 삼아봄직하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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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규범형인간 2010/05/06 13: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사고의 깊이와 인성을 갖춘 사람을 입시에서 일단 거른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기엔 너무 학벌만 봤나;;)

    또 3년이라는 시간동안 수백, 수천개의 법조문과 학설과 판례 등등을 '교육'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교육'이 된 사람과 '교육'이 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

    나도 내가 수험생이 아닌 학생이라고는 생각하는데
    그 배움의 형태가 시험의 연속이 되는 것에 대해 별 거부감이 없다고 할까.. 내지는 현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공부방법이라고 생각한다랄까..

    네 소신이 강하게 묻어나는 글이어서 허투루 답변쓰기가 어렵소.
    두고두고 얘기해보자꾸나^^
    (...라기엔 기말고사 그리 멀지 않았다네ㅎㅎ)

    • 익구 2010/05/24 01:48 Address Modify/Delete

      늘 좋은 말씀 고마워. 수험생과 학생이 크게 배치되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 좋은 학생이 훌륭한 수험생도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의 취지이기도 할 테고 말이야. 내가 학생에 방점을 찍을 때 이것이 단지 내가 대비해야 할 시험들에 소홀하겠다는 의미보다는 수험 공부만으로 채우기 힘든 배움의 기쁨을 좀 더 찾아보겠다는 정도로 정리하도록 할게.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가 있다니 나는 참 복이 많은 녀석인 듯.^^

  2. 홍군 2010/05/17 13:3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로스쿨도 그렇고 의전원도 그렇고, MBA가 그러하듯이 아무래도 '전문대학원'이라는 어감상 직능인(technician)를 육성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강한 것 같아. 이 곳을 수료한 이라면 '법 적용에 능한' 인물이라고 기대하기가 쉬울 것 같고. 아무래도 '교육'이나 '학습'에 초점을 맞춘 기관이라면 일반법학대학원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듯도 하고.

    '법조인'과 '법학자'의 갈림길(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에서의 균형잡기야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마는, 사회에서 기대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대되는 로스쿨 학생으로서의 정체성도 생각해볼만 한 듯. 시험이냐 교육이냐의 갈림도 있을 테고, 교육을 다시 나누어 기술이냐 진의냐의 작은 갈림도 있을 테고.

    경영학도 출신으로 전공에 대한 나름의 애정과 자부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라기보다는 '기능'의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 그렇게 기대되는 사실을 요새 몸으로 느끼고 있는 터라..

    • 익구 2010/05/24 01:49 Address Modify/Delete

      응 내가 좀 욕심을 부리기는 했어. 전문대학원이 일정 부분 직업학교의 성격을 띠는 것은 사실이고 거기에서 일반대학원에서나 실현 가능한 학생을 지향하는 건 다소 모순이 생길 수 있으니까. 대학 새내기 때 경영학만 공부하면 직능인에 머무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이따금 생각나는데... 그간 (부정적 의미의) 기능인(technician)을 면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기능인조차 되지 못하는 허술한 삶을 산 것은 아닐까 반성이 돼. 학부나 대학원이나 객관적으로 볼 때 빵을 위한 학문을 택했으면서도 끊임없이 빵 이외의 것을 갈구하는 자세 자체가 나쁠 것은 없지만... 그것이 빵을 원하면서도 빵조차 건사하지 못할 사람의 변명이라면 민망하겠지. 좀 더 생각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