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부여공주 답사

사진 2006/08/28 22:55 |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신동엽 <금강> 中

부여 출신의 신동엽 시인은 “백제,/ 천오백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고 노래했지만 사실 백제의 흔적을 찾기는 여간 힘들다. 남은 유물이 별로 없다 보니 몇 개 남은 문화유산들에 찬사가 집중되는 감이 없잖아 있다. 일전에 유홍준 선생이 백제의 문화를 잘 나타낸 말로 손꼽았던 삼국사기의 구절이 떠오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15년 기사에 “봄 정월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으며,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말이 나온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대로 백제는 보드랍고 세련된 문화를 향유했던 거 같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문화유산이 부족하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친구들을 졸라 부여와 공주를 다녀왔다.

능산리 고분군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가 있다. 백제왕릉원에는 의자왕과 융의 묘가 있다. 부여군에서는 당나라 북망산에 묻혔다고 전해지는 의자왕의 묘를 찾기 위해 1995년부터 현지 조사를 벌였다. 중국 허난성 뤄양시 인근에서 의자왕 묘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확인하고 북망산의 흙을 옮겨와 이곳에 묘를 조성했다. 660년(의자왕 20년) 음력 7월 18일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했다. 31왕 678년의 역사가 막이 내리는 순간이다.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 북망산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아무리 의자왕의 실정이 있었기로서니 신라 단독의 힘으로 그토록 신속하게 백제를 패망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명의 군사는 백제가 어찌어찌 막아냈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라고 핀잔을 해도 소정방의 13만 군대는 중과부적이었을 게다. 계백이 5천의 군사로 신라군을 맞았다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면, 의직(義直)은 1만의 군사로 당나라군에 맞서다가 백제와 운명을 같이 했다. 그러나 국정을 총괄하는 책임자에게 가장 무거운 화살이 날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가 강화한 왕권을 사치와 방종, 내부 결속력 와해에 쓰지 않았더라면 백제의 황혼이 그렇게 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사비 시대 왕릉군으로 비정되고 있다. 사비 시대 왕이 여섯 분이었으니 역대 왕들은 대개 여기에 묻혔으리라. 하지만 일찌감치 도굴된 관계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지표가 전혀 없어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는 없다. 전북 익산에는 무왕과 왕비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쌍릉이 있으니 무왕은 여기에 묻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오순도순 아담하게 모여 있는 것을 보니 과연 백제의 무덤답구나 싶다. 능산리 1호분(사진에서 출입구가 나있는 무덤) 네 벽의 돌 위에는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의 사신도가 웅장하고 강인한 분위기라면 백제의 사신들은 온화하고 아늑하다. 삶에 지칠 때 능산리 고분의 그 미려한 곡선을 추억하면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백제가 만들었던 지상건축물들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설령 조금 남았더라도 관심의 손길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 역사서 [북사]의 백제전에는 백제를 절과 탑이 매우 많은(寺塔甚多)라고 있지만, 결국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미륵사터석탑만이 백제가 남긴 지상 건축물이 되고 말았다. 원형이 온존하게 남아 있는 것은 정림사터 오층석탑이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백제에서 가장 발길을 끄는 곳도 단연 정림사터다. 정림사터는 남쪽에서부터 연못, 남문, 탑, 금당, 강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형식의 절이지만 정림사라는 이름은 백제시대의 것이 아니다. 백제 때 불탄 절을 고려 때 재건하고 정림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절터에는 고려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으니 백제와 고려가 공존하는 셈이다.

국보 제9호인 정림사터 오층석탑의 백제의 애환을 묵묵히 담고 세월의 풍파를 견뎌왔다. 목조탑의 형식을 일부 차용했으나 탑신·옥개부·기단부 등을 단순하고 간소하게 처리해 석탑의 축조방식을 제법 구사했다. 특히 옥개석 처마의 모서리 부분을 약간 들어 올려 끊임없는 감탄을 유발하게 만든다. 말로만 듣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이라는 비문을 확인하는 가슴이 짠해졌다. 이 비문으로 말미암아 소정방이 백제를 침략한 것을 기념하는 평제탑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 옛 백제 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에 세워진 탑 가운데 많은 탑이 정림사터 오층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점에서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백제 미감에 대한 유구한 애호를 엿볼 수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사비 시대 백제 유물들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전시로 인해 백제금동대향로나 사택지적비 같은 메인 유물들이 자리를 떠나 있긴 했지만 그만하면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만큼 남아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웠다. 특히 무늬전돌(文塼)은 백제의 미감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부여박물관 앞길에 무늬전돌을 깔아놓았는데 무척 정감 있었다. 부여박물관 체험실에서 왕 의복을 입어볼 수 있었는데 영 어색하다.^^; 1992년 12월 능산리 절터 부군 주차장 부지 유물조사를 하다가 기적적으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에는 발굴책임자들이 밤 사이 도굴을 우려해 작업인부들을 귀가 시키고 야간작업을 해서 3시간 만에 발굴했다고 한다. 당시의 급박하고 조바심 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다. 『삼국사기』 무왕 35년조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 도교에서 신선이 노니는 산)을 본떴다"는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경주 안압지(임해전지)보다 40년 앞서 만들어져 안압지의 모형이 되었을 것으로 보기로 하나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킨 안압지가 그저 둥글게 조성한 궁남지를 본떴으리라 생각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현재 1만평 정도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훨씬 더 컸다고 하니 궁남지의 원형에도 의구심을 품게 된다. 못 가운데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정자까지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는데 1971년에 세운 것이다.

공산성의 맞은편 쪽에는 벽돌무덤을 본 뜬 홍예문이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 들머리임을 알린다.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이야말로 공주가 백제의 왕도였음을 체면치레하게 하는 곳이다. 모형전시관은 무령왕릉과 송산리 5·6호 무덤을 실물과 똑같이 복원해 놓았다. 하지만 실제 벽돌이 아닌 고무 비슷한 재질이라 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송산리 1호부터 6호까지의 고분들은 모두 일제 시대 때 발굴 조사되었다. 1호분부터 5호분까지는 모두 굴식 돌방무덤인데 벽면에는 강회를 발랐다. 이것은 한성 시대부터 내려오던 백제식 무덤축조 방식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6호분만은 무령왕릉처럼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네 벽에 진흙과 호분을 바른 위에 벽화를 그려 놓아 송산리 벽화고분이라고도 부른다. 벽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와 동그랗게 표시한 해와 달, 별들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부여 능산리 고분의 것과 함께 오직 둘 뿐인 백제의 벽화이다. 모형을 잘 못해놓은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길은 없으나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1971년에 온전한 처녀분으로 발굴된 무령왕릉이 백제사 연구에 얼마나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줬다. “20세기 한국고고학 최대의 발굴”이라는 헌사가 지당하다. 하지만 아픈 기억도 남겼다. 무령왕릉 발굴로 인한 전국적인 흥분으로 주체할 수 없었던 발굴책임자들은 “빨리 발굴을 끝내는 게 혼란과 사고를 방지하는 길”이라고 결정하고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단 10시간 만에 발굴을 마쳤다. 한국 고고학의 영광이자 회한이 함께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무령왕릉의 내부를 모형으로밖에 볼 수 없는데 1997년말 영구 폐쇄됐기 때문이다. 1500년을 버텨온 무령왕릉이 발굴 25년 만에 벽이 기울고 금이 가는 등 관리 소홀로 폐쇄 당하는 치욕스런 일이다. 문화유산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무령왕릉 사례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 같다.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다면 공주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백제는 얼마나 아득했을까. 무령왕릉에서 수습된 유물만 108종에 2,906점.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점이다. 백제 문화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증빙하기 위해 무령왕릉은 꼭꼭 감춰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덤의 보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남중국의 묘제를 과감하게 채용한 무령왕릉을 보고 백제인의 외래문화 수용능력이 탁월했다고 평한다. 선진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문화의식이 얼마만큼 발현되었는지 내가 헤아릴 역량은 없지만 말이다. 부장품들이 소장된 국립공주박물관은 폐관 시간이 임박해 가보지 못했지만 언제 찬찬히 음미해봐야겠다.

관리사무소로 보이는 건물 앞에 진묘수가 귀여웠다.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는 짐승을 말한다. 국보 제 162호 무령왕릉 진묘수는 뭉툭한 코에 툭 튀어나온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로 서있는 모양이 뿔 달린 돼지 모양이다. 중국의 진묘수가 대개 흙으로 빚은 데 반해 돌로 만든 것도 응용의 한 단면이라고 우겨볼 수 있으리라. 이 녀석이 무덤을 참 잘 지켜준 것만 같아 너무 고맙다.
Posted by 새우범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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