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6)

ㅂ - 조지훈, 「봉황수」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하략)


<명청교체기에 심란했을 광해왕에게 올리는 가상의 상소문이다>
신 엎드려 아뢰옵니다. 신이 듣건대 후금은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요동에서 세를 넓히고 있습니다. 저들이 중원마저 평정하고 나면 해동까지 탐낼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대신들 거개가 명나라의 은덕만을 칭송하고 있으나 나라 밖 사정에 슬기롭게 대처하여 위로는 종묘사직을 평안케 하고, 아래로는 생민의 환란을 막으시옵소서. 일찍이 발해는 군주를 황상(皇上)으로 높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호기를 보였습니다. 허나 당나라에게 황제가 아닌 제후로서 조공을 바치며 책봉을 받았고, 군주가 승하한 뒤에는 황제 칭호가 아닌 왕의 칭호를 올렸습니다. 이는 그들의 법식이 정돈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대국에 대처한 숙고의 산물이었습니다. 고려왕조 또한 몽골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밖으로는 왕국이면서도, 안으로는 황제의 제도를 꾸리는 외왕내제(外王內帝) 방식을 이어갔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중화가 소중한 것만 알고 이 강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의 말을 경계하소서. 섬기되 복종하지 않고, 낮추되 굴하지 않았던 선례를 무겁게 여기시옵소서.


후기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기획특별전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묘지명(高麗墓誌銘)’을 보고 왔다. 고려 시대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묘지명은 무덤 주인공이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기록해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이다.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가 공적인 내용을 담는데 비해 묘지명은 개인적인 동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기록 유물이다. 고려 숙종의 딸이자 예종의 친동생 복녕궁주의 묘지명에는 “천자(天子)의 따님이여, 보름달 같으셨네”라는 구절이 써있다. 비록 송나라의 연호를 쓰는 사대외교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로 자부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대외정책도 고려시대의 유연함을 좀 배워보면 어떨까.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7)

ㅅ -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황현의 『매천야록』의 한 토막입니다. 을사오적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더라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은 넘칩니다. 맹자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몰라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부끄러움을 잃는 것입니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인생사에 기왕 지는 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패배가 좋겠습니다. 2004년 입실렌티 초대연사인 한비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힘있는 자에 보태며 달콤하게 살다가 자연사하시겠습니까, 그것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시겠습니까?”


후기 - “사람 사는 세상에 쉬운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힘겹게 밀어 올려도 다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기만 하는 시지프스의 바위 또한 없다고 믿습니다”라는 구절을 넣으려다가 분량 제한 때문에 뺐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프스는 영겁의 세월동안 높은 산의 정상까지 바위를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시지프스를 무익하면서도 희망마저 없는 처지라고 비관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위가 정상에 다다르면 결국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라고 부르고 싶다. 먼저 부끄러워하면서 먼저 고쳐나가고 싶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하지 않는 참회란 얼마나 공허한가. 백치미(白痴美)보다 무서운 것이 무치미(無恥美)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8)

ㅇ - 백석, 「여승」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생활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적 상황을 절제된 시어로 풀어낸 리얼리즘이 돋보입니다. 문득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를 떠올립니다. 이스털린(Easterlin)은 연구를 통해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상식 수준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죠. 이처럼 최저 생활수준을 벗어나면 경제 성장은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이 역설은 행복한 삶은 수치나 물질적인 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줍니다. 한미 FTA 추진 등을 통한 국민소득 상승이 진정한 부민(富民)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해야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크나큰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경제 발전을 반성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습니다. 서러운 눈물을 줄여나가는 성장전략을 모색하는 경영학도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후기 - 이스털린의 역설은 이정전(2002), 『시장은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53~81쪽/ 정갑영(2005), 『열보다 더 큰 아홉』, 230~232쪽을 참조했다. 소득수준과 행복 사이에 어느 정도 정(正)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가설 자체보다 의도치 않은 역설을 발견한 게 참 재미나다. 국민소득 2만불을 돌파하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욕망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빨리 커지는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지구는 넉넉한 곳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탐욕을 위해서는 지구는 넉넉하지 않다”는 간디의 말씀에 동감한다.

새로 사귄 친구가 어떤 성격과 취미를 가졌는지 묻지 않고 그 아버지의 수입이 얼마인지를 궁금해 하는 어른의 『어린왕자』 이야기가 떠오른다. 별을 많이 소유하기 위해 쉬지 않고 별을 세는 실업가도 생각난다. 물론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품는 거 자체는 나무랄 일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건 권장할 일이다. 다만 그 탐욕이 체감(遞減)하지 않고 체증(遞增)한다는 게 문제다. 신제품 가격이 떨어질 때를 기다려 사려다가 죽기 하루 전에야 장만하는 어리석은 이의 행태가 떠오른다. 모든 것이 숫자로만 표현되는 세상에 “이쯤 되면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9)

ㅈ - 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도무지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실의에 차있는 친구의 아들에게 지어준 시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로 “관을 덮고서야 일이 정해진다(蓋棺事定)”는 말이 있습니다. 두보는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좌절하지 말고 치열하게 살라는 뜻으로 한 말일 겁니다. 또 한 편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무척 복잡하고 다면적이기 때문이죠. 죽고 나서야 그 사람의 평가가 좀 더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니, 일평생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무서운 이야기로 들립니다. 마지막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해서 흐트러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잖아요. 팬티로 눈동자를 굴리는 마음은 혼자 있을 때 경계하는 마음과 통합니다. 옛 선비들이 좋아했던 말 가운데 홀로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내밀한 행동이 한결같다는 말이지요. 아니,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더 잘해야 합니다. 속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첫마음을 지키고 올바르기를 다짐한다면 웅숭깊은 삶을 꾸릴 수 있을 거예요.


후기 -  팬티 한 장에서라도 제 존재의 위엄을 부여하려는 안간힘이 짠하다. 비록 그것이 근원적인 문제보다는 지엽말단에 치중하는 것이라는 지청구를 늘어놓더라도. 죽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짓을 벌이는 이들보다야 훨씬 더 기품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에서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桐千老恒藏曲),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다짐하는 모습이 애틋하다. 그 소년 같은 마음을 나도 배우고 싶다. 나도 결국 때 묻을 대로 묻어 남는 건 팬티 한 장의 깨끗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애는 써봐야겠다. 한비야님의 말을 빌리자면 “될지 안 될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겠는가?”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0)

ㅊ - 충담사, 「찬기파랑가」

열어 젖히니/ 나타난 달이/ 흰구름 좇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부터 그 맑은 냇물 속 조약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 끝을 따르고자/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랑의 우두머리시여. (양주동 해독)


기파랑은 무척 기품 있는 인물이었나 봅니다. 기파랑이 지닌 마음의 가장자리만이라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하게 만들고, 눈조차 그의 고결한 인품을 흐트러트리지 못했다니 말입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말 가운데 사숙(私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분을 본보기 삼아 학문과 덕행을 쌓는 것입니다. 맹자가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상 사숙을 통한 사제 관계는 매우 많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성호 이익을 사숙했고,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사숙했고, 김춘수는 릴케를 사숙했습니다. 간디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사숙했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사숙했으며, 보들레르는 에드커 앨런 포를 사숙했다고 합니다. 우리 둘레를 보면 멋있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Role model에게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칸트는 데이비드 흄의 저작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외쳤습니다. 주위에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가 될 자신이 없는 게 아닐까요? 여러분은 몇 분의 스승을 모시고 계십니까?


후기 - 향가가 으레 그렇지만 찬기파랑가는 특히 해독에 차이가 큰 편이다. 학자에 따라 향가의 해독이 다른 것은 향가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한국어의 어순에 따라 표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때의 우리말을 향찰을 통해 재구성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양주동 박사가 괜히 인간 국보를 자처한 것이 아니다. 여하간 찬기파랑가의 해독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 양주동 박사의 원형 상징적인 해독과 김완진 교수의 개인 서정적인 해독으로 갈린다. 이 밖에 달, 물, 돌에 대한 의미도 차이가 적잖다. 여기서는 화자와 달의 문답으로 본 양주동 박사의 해독을 따왔다. 맹자 이루편(離婁篇)에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予未得爲 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는 구절은 언제 들어도 애틋하다. 나는 내가 모시는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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