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입니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유나영 옮김, 삼인출판사)는 메시지가 또렷한 책이다. 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의 상징동물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공화당이 만든 프레임에 민주당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코끼리가 되라고 주문하고 있다. 자신의 언어와 자신이 만든 틀 위에서 상대방과 경쟁하도록 만들라는 주장이 신선하다.


프레임(frame)은 통상 생각의 틀 정도로 해석되지만 책에서는 정부나 정당이 설파하는 구호나 선전으로 좁게 쓰이기도 한다. 가령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세금 인하(tax cut)’ 대신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를 만들어 씀으로써 민주당을 압도하는 프레임 우위를 누렸다. 세금의 압제(?)에서 국민들을 구하는 공화당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애틋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미국 민주당의 06년 중간 선거 이전의 잇따른 패배는 공화당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보다 궁극적으로 민주당이 자신들만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함을 글쓴이는 주장하고 있다. 상대방의 실책으로 얻은 승리는 그리 공고하지 못한 건 직관적 경험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집권 여당 의원들 위주로 이 책을 많이 탐독했다고 하는데 이 책의 알맹이는 익히지 못한 모양이다. 기껏 한다는 것이 조악한 정치공학이라니 좋은 책을 읽은 보람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은 06년 5.31 지방선거 직후 <계급의식은 어디로?>라는 칼럼에서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받은 지지의 크기를 보면, 이 사회의 가장 어려운 계층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이 부패한 부자 정당에 표를 건넨 것이 분명하다. 이들의 계급의식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묻는다. 또한 “사회 상층부가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고 하층부가 거꾸로 된 계급의식을 소비하는 허영에 몰두하는 한, 사회 양극화의 출구는 없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이 거의 싹쓸이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를 보면 이 정당이 받은 지지에는 그네들이 좀처럼 보살피지 않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적잖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게 투표합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 이익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정체성에 투표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이 자기 이익과 일치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쪽으로 투표할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단순히 자기 이익에 따라서 투표한다는 가정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52~53쪽


레이코프는 유권자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않다고 명쾌하게 말한다. 정체성 혹은 가치관은 프레임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레이코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그들은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는 가정은 신화라고 말한다. “진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부합해야 합니다. 만약 진실이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프레임은 남고 진실은 버려집니다(48쪽)”라고 주장한다.


언론개혁에 찬동하시는 분들은 종종 조선일보 프레임, 조중동 프레임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가령 보수 언론에서 세금폭탄이라는 프레임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부동산 이슈를 선점하는 효과를 누린 것을 들 수 있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오늘 신문에 종부세가 8배 올랐다며 세금폭탄이라고 하는데 아직 멀었다”라고 말한 것은 세금폭탄 프레임에 걸려든 셈이다. 2006년 1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당 서적, 인쇄물 구입에 지출한 돈이 월평균 1만 405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2000년 70%에 달하던 신문구독률이 지금은 40%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독서량이 적은데 몇몇 언론들의 프레임이 실재하다면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프레임 재구성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뉴딜(New Deal)을 잡딜(Job Deal)로 바꾸면서 일자리 창출에 선뜻 반대하기 힘들게 만든 것도 프레임 전환을 꾀한 대표적인 경우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평통 발언을 통해 예비역 장성들의 직무유기를 질타한 것도 전작권 환수가 한미동맹 균열이 아닌 자주권 고취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또한 옮긴이의 해제에서 들고 있는 중앙일보 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옮긴이는 중앙일보가 ‘양극화’라는 프레임 자체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중산층 되살리기’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222쪽 참조).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는 흔한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대신에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프레임으로 구성되지 않은 사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단순히 사실을 진술하고 그것이 상대편의 주장과 모순됨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프레임은 사실을 이긴다. 프레임은 유지되고 사실은 튕겨 나간다. 언제나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211~212쪽


글쓴이는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민주주의 주인의식의 기초는 제 이득에 따른 호불호를 밝히는 것이라고 원론적으로 주장했던 내게는 큰 지적 충격이다. 또한 진심과 선의가 반드시 통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기가 여간 힘이 든다. 앞서 언급한 평통 발언으로 촉발된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전 국무총리의 대립각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전달된 것보다 사실이 중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고 전 총리측에서는 “대통령께서는 진의가 아니라고 하시던데 일반 국민들이 무슨 뜻으로 들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이 책에 따르면 고 전 총리가 논리의 적부 여부를 떠나 효과적인 반론을 펼친 것이 된다. 물론 지도자나 지식인이 ‘전달된 것’에만 천착하는 건 민망한 일이지만.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vous devez vivre comme vous pensiez sinon aussitot vous penseriez comme vous vivez)”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이 시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프레임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새로운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어내라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단 자신만의 프레임을 만들 때 듣는 사람을 고려하고 현재의 지배적 프레임을 고려해서 섬세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전히 진실의 편에 서려는 사람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의 인간다움이 고양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의 상당 부분이 허상일 수도 있다. 프레임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통해 내 것의 허실을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으리라. 내 신념을 진실 되게 표현하는 프레임을 개발하고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곱씹어본다. 이 책은 내 인식의 한계를 넓혀준 고마운 스승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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