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122
내가 동양 고전에 달통하다는 추정은 나에 대한 오랜 오해 가운데 하나다. 고등학교 때는 내가 잘 모르는 다른 과 친구에게서도 익구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느니 하는 뜬소문이 돌았다. 아마도 내 나이 또래는 으레 “사서삼경=동양 고전”이라는 등식을 품고 있었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지만 내가 처음 읽은 동양 고전은 <도덕경>이었고, 그 다음이 <채근담>, <명심보감>, <장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논어>는 한 번 통독한 이래 번번이 정독에 실패하고 있다. 내가 끔찍하게 아끼는 <맹자>는 짬짬이 발췌독을 하지만 완역본을 꼼꼼히 독파한 적은 솔직히 없다.

하지만 나에 관한 오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확증으로 바뀌고 있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고전 명구를 좋아해서 이리저리 찾아보고 곧잘 인용하는 탓에 그런 심증을 굳히게 만든 내 책임이 크다. 하지만 고전 완역본을 다 독파해야지만 그 고전에 대해 말하는 건 지나치게 엄격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몇몇 경전 번역에 편중하여 아직도 제대로 완역되지 않은 고전들이 많음은 덤으로 지적해본다. 특히 우리 한문 고전의 경우 더욱 더디다. 어지간한 우리 고전들이 다 번역되려면 지금 속도로 따져 100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런저런 제약조건을 덮어 두고 제자백가를 중심으로 탐독해보기로 했다. 중간에 그만 두지 않도록 빠른 호흡으로 읽는 원칙을 견지해야겠다. 훗날을 대비한 초벌구이인 셈이다.

중국 최초의 시인으로 불리는 굴원이 지은 어부사(漁父辭)는 내가 무척 아끼는 시가다. 독야청청을 버리지 못하는 견결하고 고고한 마음자리를 흠모하기도 하거니와 사람 사는 세상은 늘 비슷하구나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옛사람들의 문제의식 중 상당수는 오늘날도 여전히 끙끙 앓아가며 고민해야 하는 화두다. 단순히 말해 어부사에서 보이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항이 그 예다. 뭇사람이 술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는 “중취독성(衆醉獨醒)” 구절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갑갑하다. 동양 고전 읽기가 두려운 까닭은 읽은 만큼 실천이 따르지 못할까 저어되기 때문이다. 홀로 깨어 있고, 나아가 함께 깨어 있을 수 있기를.


070123
이계안 의원님이 23일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그는 ‘정치적 「렉서스(LEXUS)」를 꿈꾸며’라는 탈당의 변에서 “열린우리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강령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이 죽어야 한다고 믿습니다”라며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결단이라 밝혔다. 이 의원님만큼 ‘잘사는 나라’, ‘따뜻한 사회’라는 우리당 정강정책을 많이 읊조린 분도 없다. 개혁이니 민생이니 하는 구호에 그치지 않고 좀 더 세부적인 정당 목표를 자주 언급하는 게 정당 정치의 기본이라면, 이 의원님은 탄탄한 기본기를 자랑하는 분이다.

그런데 “국민들께 「잘사는 나라, 따뜻한 사회」라는 훌륭한 상품을 팔 수 있으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라고 말씀하시니 당혹스럽다. 양질의 상품이지만 포장에 문제가 있어 시장의 외면을 받았다는 식의 논리를 정당 정치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설령 그 논리에 수긍하더라도 그 특단의 조치는 국민이 내리는 것이 더 맞다. 지도자들이 비장한 결심을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사실 시시한 것이었음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도무지 정감이 안 간다면 개인적인 편견일까?

이 의원님을 잃은 건 여당으로서는 큰 손실이다. 그러나 국회의원 몇몇의 탈당보다는 우리당을 거쳐갔던 60여만 명에 달하는 당원들을 더 아프게 받아 들여야 한다. 문득 2005년 4월 우리당 전당대회에서 당의장 후보 유시민 의원님의 연설 한 토막이 떠오른다. “우리의 후보를 위해서는 돈과 몸과 시간을 주는 당원이 있는 정당”이라는 우리당의 창당 초심을 무겁게 여겼더라면 지금의 몰골은 아니었으리라.

이 살벌하고 유치한 생존의 시대에 “인간은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던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우직함이 그립다.


070124
중국 정사인 25사(史) 가운데 유일하게 완역에 가깝게 번역된 진수의 삼국지(신원문화사 刊)는 현재 절판이다. 가까운 시일에 배송지 주석 등을 망라하고 원문까지 수록된 삼국지가 완역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을 품어본다. 이 땅에 삼국지를 읽느라 밤을 새고, 삼국지 게임에 매료되어 끼니를 거른 사람들이 많은데 견주어 삼국지 번역은 초라한 실정이다. 다행히 신동준님이 역주한 자치통감 삼국시대편이 있어 반갑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북송시대 정치가이자 사학자인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편년체 역사서다.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이전까지 1,36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294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작이다. 자치통감은 조선시대 문과는 물론 무과의 시험과목에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오늘날 행정학 내지 행정법의 위상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가치관을 좌지우지했던 자치통감 완역을 위해 중앙대 사학과 권중달 교수님이 애쓰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8권까지 나온 자치통감은 펴낸 곳이 매번 바뀌었다. 수익성이 낮아 선뜻 출판하는 곳이 없어 정년퇴직금을 털어서 아예 출판사를 차렸다니 고맙고도 죄송스럽다. 2009년까지 31권으로 완간하시겠다는 계획이 꼭 성공하실 바란다.

번역자가 직접 출판사를 만드는 기막힌 현실이지만 나는 이런 미련한 분들이 좀 더 많이 나와서 그 덕을 봤으면 좋겠다. 기껏해야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책 한 권 사주는 일이니 나처럼 미련한 독자들도 좀 더 늘었으면 더욱 좋겠다. 여담이지만 남송시대 학자 여조겸(呂祖謙)이 엮은 동래박의(東萊博義)가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반들이 꼭두새벽인 오경(五更)부터 일어나 “동래박의를 얼음 위에서 박 밀듯 왼다”는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오는 책 말이다. 동래박의는 춘추좌씨전에 대하여 논평하고 주석한 역사평론집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준비 교본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의 벼락치기용 참고서를 읽고 싶다는 벼락치기 예찬자의 욕심이다.^^;


070125
중학교 시절 나는 역사부도를 들여다보기를 좋아했다. 특히 역사부도는 초등학교 때와 달리 상세해서 내 마음을 빼앗았다. 초등학교 역사부도에서 당나라 영토는 오늘날 중국 영토와 거의 똑같이 그려 놓았는데 중학교 때 그게 사실이 아닌 것을 알고 매우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어린애들 보는 교재라고는 해도 사실에 부합하게 그려서 국가의 흥망성쇠와 영토의 변경 같은 걸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았으리라. 물론 요즘 교과서들은 잘 나오리라 믿는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 나는 삼국지 4, 5 게임에 넋을 놓았다. 중국 역사상 삼국시대는 그다지 역사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평가하면서도 삼국지 소설과 매력은 거부하기 힘들었다. 제갈공명에 흠뻑 빠진 나는 중국을 가게 되면 공명선생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를 찾기로 결심했다. 사실 무후사는 한소열묘(漢昭烈廟), 즉 유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유비묘 곁에 공명선생을 추념하기 위해 무후사를 세웠고, 나중에는 무후사가 더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정호갑 기자가 쓴 “민심은 제갈량·관우·유심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기사 제목에 많이 동감했다.

진수는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서 공명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일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고 게으른 자는 비록 가까운 사람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盡忠益時者雖讎必賞, 犯法怠慢者雖親必罰)”, “선행이 작다 하여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악행이 작다 하여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善無微而不賞, 惡無纖而不貶)”. 숱한 난관과 역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칙을 지켜나갔던 그를 흠모한다. 그 의연한 모습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하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 成事在天)”라고 탄식할지언정 뚜벅뚜벅 최선을 다하는 게 사람의 몫이다.


070126
동양고전 책을 사기 위해 헌책방을 다녀왔다. 신촌의 숨어있는 책의 고전 파트는 낡은 책이 대부분이라 기왕이면 보기 좋은 디자인을 원하는 선뜻 손이 가는 책이 별로 없었다. 양질의 도서를 잘 갖추기로 유명한 곳이라 괜찮은 책은 금세 팔려가지 싶다. 한자 원문 주해가 비교적 잘 되어있는 격몽요결, 생소한 해동소학 두 권을 집어 들었다. 해동소학은 조선판 소학인데 이 책을 만나서 우연히 마주친 지기(知己)마냥 기뻤다.

외대역 신고서점의 고전 파트는 우리네 고전 편식 풍토가 고스란히 드러나서 사서와 노자, 장자, 명심보감, 채근담 정도의 비슷한 책들만 잔뜩 꽂혀 있었다. 고전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열심히 보는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책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고 구석에 박아 두느라 더 많이 바래고 찢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헌책이지만 두고두고 볼 고전은 좀 깨끗한 책이 좋겠다 싶어 다시 꽂아둔 책이 많다.

셈을 치르기 위해 기다리다가 서점 초입에서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발견하고 충동구매했다. 아직 마땅한 완역본이 안 보여서 조금 기다려보기로 하던 참인데 책 말미의 야율초재 부분이 마음에 들어 사버렸다. 원나라의 명재상 야율초재는 “하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은 지금의 수고로움을 더는 것보다 못하다(興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는 구절의 원전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2,000원을 내고 사왔다.

때 되면 도지는 도서 충동구매는 내 고질병이지만 이 한 구절을 곱씹는다면 2,000원 정도는 금방 본전일 게다. 내 아름다운 약점을 너무 나무라지 말기를.^^;


070127
책사냥 마지막 행선지인 코엑스 반디앤루니스는 서가 간격이 넉넉해서 앉아서 책을 고르는 맛이 있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동양고전 서가가 바로 옆에 점술서들이 많은 관계로 번잡한 것과 달리 한적해서 좋았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서점만 알던 내게 교보문고는 큰 문화적 충격을 안겨줬다. 옛 정이 두터워 오프라인 서점은 광화문 교보문고부터 찾지만 가끔씩 외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본래 서점에서 필사를 잘 안 하는 편이다. 깨알 같이 적더라도 몇 자 적지도 못할 바에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 필요한 부분 몇 장 복사하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오늘따라 꼭 적어가고픈 구절을 발견했다. 필사라는 것이 한 자 한 자 눌러쓰는 가운데 그 구절을 눈으로 읽고, 손으로 기억하고, 마음으로 음미하는 효용이 있음을 깨달았다.

성호 이익 선생의 성호사설에서 ‘착한 사람은 박복한가(善人福薄)’이라는 글은 일마다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과 상반되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착한 사람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글이다. 착한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정신적으로 극복해내라는 말 밖에 해줄 수밖에 없는 성호 선생의 안타까움에 동감했다.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는 유물론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강조해 수많은 당대의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신이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인간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아들”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내 종교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 분의 저서를 실제로 접하니 반가웠다.

그러나 선비의 힘쓸 것은 여섯 가지 참는 데에 있다. 주림을 참아야 하고, 추위를 참아야 하며, 수고로움을 참아야 하고, 몸이 곤궁함을 참아야 하고, 노여움을 참아야 하며, 부러워짐을 참아야 한다. 참아서 이것을 편안히 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 이익, 『성호사설』(솔출판사, 1997), pp. 277~278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를 가만 놓아두고 살아 있는 자들만을 걱정하자! 우리가 더 나은 삶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실제로 만들려 할 때,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힘을 합쳐 만들려 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이룩할 수 있다. 또한 적어도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 온 극도의, 천인공노할, 가슴을 찢는 불의와 해악의 상태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만들고 작용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의 사랑을 유일하고 참된 종교로서의 인간의 사랑으로 대치해야 한다. 신에 대한 믿음을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대치해야 한다. 그것은 인류의 문명이 인류를 벗어나 있거나 초월해 있는 존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자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인간의 유일한 악마는 인간, 다시 말하면 조야하고 미신에 사로잡힌, 이기적이고 약한 인간이고 동시에 인간의 유일한 신도 인간 자신이라는 믿음이다.

- 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한길사, 2006), pp. 400~401


070128
고종석(48)에게는 열성독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가 있다. 2004년 문을 열어 270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고종석 팬 카페(cafe.daum.net/kjsfreedom)’는 인문서 저자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인문서 저자의 팬 카페는 손으로 꼽을 수 있다.
- 출판칼럼니스트 최성일님의 한겨레신문 2007년 1월 26일자 기사 中

출판칼럼니스트 최성일님의 고종석 선생님 인터뷰로 말미암아 내가 운영자로 있는 고종석 팬카페 방문자수와 회원 가입이 급증했다. 그간 몇몇 분들 위주로 조촐하게 돌아가던 우리 카페에 활기가 돌아서 매우 기껍다. 사흘 만에 수십 분이 가입해 회원수 300명을 훌쩍 넘겼다. 아마 내가 언론의 힘을 체험한 첫 사례가 될 듯싶다.

정치인들은 언론에 자신의 부고 기사 빼고는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바람직하다고 여긴다는 농담이 있다. 그저 내가 관리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신문지상에 알려진 것도 괜히 가슴 뛰고 신경 쓰이는데 만약 이름 석자가 여기저기 실린다면 어떨까? 유명세(有名稅)라고도 하지만 남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면 그 이목의 눈치를 보느라 개인의 자유가 제약받는 경우가 많다. 이 상충관계(trade off)를 잘 조율해냄도 공인의 실력이다.

선현들이 남의 기림을 바라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인 위인지학(爲人之學)보다 자신의 인격과 덕행을 닦는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한 뜻을 새긴다. 나는 내 자신을 위한 공부를 잘 해나가고 있는가?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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