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129
홍사덕 전 의원이 1996년에 펴낸 『지금 잠이 옵니까?』라는 책의 겉표지가 수험생들의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인기를 끌던 적이 있었다. 홍사덕 전 의원의 매서운 눈매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 효과만점이었다고 한다. 믿기지는 않지만 원고지 1100매 분량의 이 책은 단 닷새 만에 탈고되어 기네스북에 오르기까지 했다니 놀랍다. 분명 밤잠을 설쳐가며 그 책을 쓰셨을 게다.^^;

어쩌면 <지금 잠이 옵니까?>라는 문구를 새기며 밤잠을 쫓았을 수많은 수험생들이 대학생이 되어 다시 똑같은 표어를 꺼내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자는 시간 줄이지 말고 깨어있는 시간 동안 알차게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시간 허비를 줄인다는 것 또한 잔인하기는 매한가지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번번이 샌드위치로 때운다거나 어려운 책 붙잡고 있는 시간이 사치스러워 해제만 찾아다니며, 시시한 후배들과 수다 떠는 게 낭비라 후배들 밥 사주는 것도 꺼리게 된다고 가정하자. 차라리 잠을 못자 휑한 모습이지만 한 끼 식사를 맛나게 하고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원전을 읽다가 입술 깨물며 포기하기도 하며, 모자란 후배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안에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모습이 더 멋지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수석 합격생들의 단골 멘트인 “잠은 충분히 잤어요”가 정말 진실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불면 권하는 사회가 슬프다.


070130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님은 배우 박건형님에 대한 기사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며 “‘하나쯤 있어야 할’ 배우”라고 평한다. “하나쯤”은 외로운 것들에게 건넬 수 있는 찬사이자 격려다.

칸트께서 설파하신 목적의 왕국(Reiche der Zwecke)은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로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인격이 도덕률로 결합한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목적”이라는데 주안점을 두고 정리하자면 인간의 개별성이 존중되며 주인의식이 고양되는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돈이 덜 되는 꿈을 꾸는 것이 외면 받는 시대라지만 나는 목적의 왕국을 꿈꾼다. 내 개별성(나쁘게 말하면 모난 성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들께 “저 같은 녀석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요?”라고 넉살좋게 말해야겠다. 자아실현은 남을 함부로 버리지 않듯이 내 자신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데 있다.


070131
경기도 수원시 공무원들이 초과근무수당을 부당하게 지급 받아 물의를 빚고 있다. 2000여 공무원들이 아침 8시면 사무실에 도착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5년 간 했다는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은 담당자의 정신세계가 경이롭다. 서무담당 공무원이 똑같은 필체로 서명하지 않았더라면 끝끝내 밝혀내지 못했을 세금 도둑질이었다. 무죄추정 원칙을 상기하려고 해도 이와 같은 사례가 공무원 사회에서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공무원의 후생복지가 평균적인 취업자보다 못하지 않은 시대에 혈세 착복은 묵과할 수 없는 죄다.

공무원연금 개혁이 지지부진하다. 공무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일반 국민들에게 고통분담을 호소한다면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누군들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혁이 달갑겠냐만 고용 안정이라는 천복까지 누리는 공무원들이 연금 개혁에 반발하는 것은 더욱 명분이 없다. 잘 조직된 집단이 제 이익을 잘 지켜내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원리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의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를 악용해 이익을 꾀하는 데도 절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착하고 성실한 공무원이 많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신뢰보다는 일상적인 감시 시스템과 공정한 평가체계가 더 필요하다는데 기꺼이 동의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워싱턴의 미국시민권연맹 사무실 앞에는 “자유는 영원한 감시의 대가이다”라고 쓰여있다고 한다(아마 영어로 거의 동일한 모양이다). 혈세가 아깝다며 탄식하는 국민의 거친 손을 살갑게 잡고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멘트를 날려줄 수 있는 공무원이 더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070201
고등학교 편집부 선배이신 대중형님을 오랜만에 뵈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신당동 떡볶이는 달콤했고 기다리는 사람 걱정만 없다면 안주 삼아 오래도록 앉아있고 싶은 자리였다. 형과 간단히 맥주를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정권교체 당연론(?)을 주장하시는 최장집 교수님 이야기가 조금 나왔는데 나는 내 견해를 정리해서 말씀드리지 못했다. 나는 본래 어정쩡한 양다리를 걸쳐왔다.

정당 정치 기능을 회복해야한다는 최장집 교수님의 논지에 동감하면서도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을 현 정부나 그 이전의 개혁정부에만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백낙청 교수님의 논리에도 적잖이 공감을 보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에 돌을 던지기 앞서 진보 세력도 적절한 대안 마련에 실패했다는 조희연 교수님의 고백도 경청한다. 구조의 탓이라 둘러대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철같은 의지만으로 막아낼 수 있는 성질도 아닌 것 같다.

박정희 방식과 다르게 경제를 운용하는 대안을 산뜻하게 제시하지 않고서는 모든 논쟁이 허망할 공산이 크다. 형께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신 김만수 박사님의 『실업사회』라는 책은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책은 높은 실업률이 구조조정이나 경제정책으로 인한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임을 논증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 자본구성 변화를 세밀하게 분석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고 설득력 있다.

김 박사님은 마르크스의 개념을 빌려 자본을 가변자본(임금)과 불변자본(설비, 토지, 건물)으로 나눈다. 사람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가변자본 비율은 작아지기 때문에 실업률은 앞으로도 더 커질 것이라 전망한다. 즉 마르크스가 역설한 산업예비군의 증가를 통계분석으로 살필 때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가 완연함을 입증해 보인다.

경제성장을 주창하는 분들은 이런 우울한 이야기에 그러니까 얼른 파이를 더 늘려야 한다고 말씀하실 지 모른다. 김 박사님의 주장을 가변자본의 감소경향이 임금 하락과 고용 감소와 직접적 연관관계가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의문을 품을 수 있듯이 이네들의 무한성장론(?)이 임금 상승과 고용 증가를 가져다 주는 지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총자본의 증가가 가변자본의 증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장밋빛 상상은 차치하고 대중형님의 지적대로 중국만 볼 때도 파이를 늘리자는 주장이 그리 탄탄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2006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10.7%로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이 이 정도인데 우리나라가 아무리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한다고 한들 갑자기 총자본을 엄청나게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탐스러운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여하간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본가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지 혼란스럽다. 케인즈의 말씀을 음미하며 보다 인간답고 아름다운 사회를 궁리했다.

자본주의는 성공작이 아니다. 그것은 현명하지도 아름답지도 공정하지도 않으며, 고결하지도 않다. 그것은 우리의 기대에 어긋난다. 요컨대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제는 경멸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볼 때 우리는 몹시 당혹스러워한다.
- 마이클 앨버트, 김익희 옮김, 『파레콘: 자본주의 이후, 인류의 삶』, 북로드, 2003, 135~136쪽


070202

어제 대중형님께 아흐리만님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 연 블로그를 찾아봤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한윤형의 블로그(http://yhhan.tistory.com)>를 찾을 수 있었다. 군 생활 중에 틈틈이 작성하신 글도 만날 수 있었고, 이전에 쓰셨던 글들도 알음알음 모으고 있으셨다. 낯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아흐리만님이 입대하시기 며칠 전에 부랴부랴 팬레터(?)를 써서 보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저는 노사모는 아니지만...” “저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저는 반미주의자는 아니지만...” “저는 운동권은 아니지만...” “저는 군면제는 아니지만...” “저는 재벌옹호론자는 아니지만...” 이런 식의 말을 입에 달아야만 안심이 되고 비로소 색안경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한국 사회는 아직도 불행합니다. 도대체 명색이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면서 페미니스트도, 노사모도, 민노당 지지자도, 반미주의자도, 운동권도, 군면제자도, 재벌옹호론자도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니 말입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기회의 평등조차도 제대로 실현이 안 되니 황당하지만 아마 아흐리만님께서 이 황당함을 더 많이 느끼셨을 것 같네요.

나는 이런 좀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은 말미에 나 같은 녀석보다 더 많이 읽고 쓰시는 아흐리만님이 군 생활로 말미암아 읽고 쓰는 것이 자유롭지 못함을 염려했다. 그가 무탈하게 돌아와서 반갑다. 나와 비슷한 또래에 저 정도의 사고와 논리와 용기를 갖출 수 있다니 예나 지금이나 신선한 자극이고 충격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배우고 깨져야할지 벌써부터 아찔하다.

요즘 도덕 교과서에도 된사람이 으뜸이라고 가르치고 있겠지만 나는 든사람과 난사람이 부럽다. 우리 사회가 된사람이 모자라 이 모양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학문과 지식이 풍성한 든사람, 총명하고 영특한 난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아흐리만님의 건승을 빌며 그가 난사람이면서 든사람이고 된사람이길 바란다.


070203
문화유산 답사를 제외하고는 나다니기 싫어하는 나 같은 녀석에게도 때로는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동호의 제안으로 속초 여행을 떠났다. 주말 내내 해야할 방정리를 미루고 선뜻 나선 것은 바다가 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이란 말을 중학교 한문시간에 처음 듣고 나는 물이 좋다고 생각했다. 정체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물의 속성을 배워 자유롭게 흘러감을 본받고 싶다. 바닷바람을 마시며 답답했던 소회를 달랬다.

회맛을 더욱 돋운 콩코드 적포도주의 매력을 발견한 것도 큰 수확이다. 함께 한 동호, 주영, 한영, 기표, 지혜, 해승, 효진이에게 고맙다.


070204
청년 율곡이 스무 살에 쓴 자경문(自警文)을 여러 번 읽고 새겼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터럭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라고 호기로움이 맵다. 율곡 선생님의 뜻을 미욱한 내가 얼마나 보듬을지 모르겠다.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는 말씀 또한 내 이상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스물 두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일기장에 “온 세계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진리”를 갈망한다고 썼다. 내게도 목숨을 걸 수 있는 가치(the idea for which I can live and die)란 것이 있을까? 그것은 찾아내는 것인가, 만들어 내는 것인가?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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