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지난 2월 13일~14일 전체 교수 신임투표가 진행 중일 때 작성한 글입니다. 투표 결과가 나오기 전에 제 입장을 정리해본 글이라 시의성은 다소 떨어집니다. 이필상 전 총장님의 낙마는 여러모로 많은 성찰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이필상 고려대 총장님을 경영학 교수 가운데 드물게 빼어난 분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고대 경영대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마땅히 이 교수님 강의 하나는 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불문율이 있기도 하다. 가장 많은 열성 수강생이 있는 경영학과 강의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경영학자에게도 기품을 기대할 수 있다면 이 교수님을 앞자리에 꼽고 싶다. 고등학교 시절 백분토론 등을 즐겨볼 때 종종 패널로 나오셔서 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풍부한 식견을 보고 배우며 내가 팬을 자청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일련의 사태는 더 가슴이 아프다.


최근 마광수 연세대 교수님이 최근 펴낸 시집에서 제자의 시를 부분적으로 베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마 교수님이 표절 사실을 시인한 일이 있다. 연세대측은 도작이 드러난 교수가 문학창작과 관련한 교과목을 맡는다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마 교수님의 모든 수업을 폐강시켰다(성현석. “이필상 총장이 마광수 교수에게서 배울 점.” 프레시안. 2007. 02. 09. 참조). 물론 마 교수님의 과오는 변명할 여지가 없지만 일단 아니라고 잡아떼고 보는 풍토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난해 8월 이필상 총장님은 <연합공보>에 기고하신 글에서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님의 눈문 표절 파문에 대해 “논문 표절 비리는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칼럼을 기고하셨다. 이 총장님께서 김 전 부총리님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가?”라고 물으셨지만 사실 그 질문은 너무 매섭고 날카로워서 남에게 선뜻 던지기 망설여진다. 그 물음은 남에게 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먼저 여러 번 던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무능도 부끄러움의 능력을 잃은 것만큼 부끄럽지는 않다(고종석. “환멸을 견디는 법.” 한국일보. 2004. 06. 30. 참조)”는 고종석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어 본다.


표절의 경우 3년의 공소시효가 있다고 한다. 이 총장님의 표절 의혹이 발생한 시점은 20년 전이라고 하는데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건 너무 지나치다. 보다 섬세하게 논의를 하자면 표절에도 수위가 있으리라. 표절 아니면 결백 이렇게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닐 공산이 크기 때문에 단순히 마녀사냥식으로 접근할 문제도 아닌 듯하다. 가장 염려되는 점은 앞으로 교수님들이 학생들과의 공동 저술을 꺼리는 분위기가 퍼져 후속 학자를 양성하는 연구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정기원. “표절시비.” 한국경제신문. 2007. 02. 08. 참조).


비례원칙을 넘어서는 무분별한 매도행위에는 반대하지만 전체 교수 투표 또한 그리 바람직한 수단이 아니라는 건 명징하다. 내 모자란 머리로 궁리해볼 때도 진리가 다수결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도 또렷하다. 나는 이런저런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기로 했다. 기실 ‘학내 정치’는 변수(變數)가 아니라 늘 존재해왔던 상수(常數)에 가깝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이 총장님 논문의 표절 여부이기 때문이다. 이 본질을 흩뜨리는 곁가지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로 했다. 진실이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더라도 진실한 태도만큼은 남아 희망의 싹을 틔우는 것을 적잖이 보았다.


진상조사위의 결론이 미덥지 않다면 차라리 재무관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논문 표절 검증을 맡기는 방식을 제안하는 게 더 실효성 있다고 생각한다. 상당부분 표절이 인정될 경우 총장직 수행에 결정적 흠결이 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나는 학교의 단합을 위해 용퇴하라는 주장에는 동감하지는 않지만 김 전 부총리님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껏 촘촘해진 학문적, 윤리적 체를 이 총장님이 통과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고 보면 옛날 사람들의 출처(出處,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에 대한 자세는 너무 깐깐해서 탈이었다. 탄핵 상소가 올라오면 그 날로 벼슬자리를 버리고 낙향해버리기 일쑤였다. 일단 비판하는 말이 들려오면 관직에 물러나는 시늉이라도 하는 그 시절의 풍속이 때로는 너무 넘쳐서 황당하다. 허구한 날 상소-사직-등용의 무한반복이 이어지다 보면 행정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낮아지는 문제가 있었을 듯싶다.


남명 조식은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 하나에 달려있다”고 강조하셨고, 그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이 “고금의 인물을 두루 논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본 연후에 업적의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며 스승의 말을 실천하려 했다(이광일. “출처.” 한국일보. 2007. 02. 11. 참조). 이는 행정의 효율성, 효과성보다 더 중요한 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게다. 논문의 출처(?)가 문제되고 있는 요즘, 출처(!)하는 자세까지 함께 성찰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명확한 결론 없이 우물쭈물했지만 틈틈이 박절한 말들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필상 교수님이기에 더욱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충언을 한 것이라 생각해주시길. 부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벌어지는 곳에 맞잡음을, 마음의 가시가 돋아난 곳에 안도의 한숨이 있기를!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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