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219
설 연휴 마지막날 배우 봉태규님이 출연한 영화 두 편을 연속으로 시청했다. <방과 후 옥상>은 억세게 재수 없는 고등학생 남궁달이 전학 온 첫날 학교의 짱을 건드리는 바람에 “방과 후 옥상으로 올라오라”는 통보에 맞서 벌이는 눈물겨운 생존투쟁이 익살맞게 그려진다. 고심 끝에 회피하지 않고 옥상행을 결심하며 거울을 바라볼 때 거울에 적힌 문구가 돋보였다. “겁쟁이는 천 번을 죽지만, 사나이는 한 번만 죽는다”는 셰익스피어의 명구는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한 가지라도 건져가게 하려는 교양주의의 살가운 배려다.

그 문구를 보며 우리 사회에 진정한 사나이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사나이라는 말을 군자나 대장부급의 말로 썼을 것이다. 일전에 김규항 선생님은 <마초의 꿈>이란 글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한없이 당당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한없이 부드럽다”는 게 마초의 기본이라 역설하셨다. 마초의 탈을 쓴 겁쟁이들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을 인간 존재의 숙명인양 비감어린 표정으로 말한다. 이 권위주의의 압박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권위를 세우는 사나이들이 좀 더 늘어야 한다. 어쩌면 양성평등이 더딘 까닭이 마초의 기본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넘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070220
그대를 그리며 무언가를 줄 것이 없어
대나무 부채 하나를 주려고 합니다
부챗살 사이로 맑은 바람 불거든
그 바람 따라 서로를 생각하길 바랍니다.
憶君無所贈 
贈次一片竹
竹間生淸風
風來君相憶

드라마 <궁S>에 나오는 군상억(君相憶)이라는 한시다. 여남(女男)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진 시가 본래는 친구 사이에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시였음을 발견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나는 책 사는 거 외에 특별히 다른 상품을 사본 적이 없어서 벗들에게 뭔가 선물하는 것에 인색한 편이다. 더군다나 옹졸하기까지 해서 남 칭찬도 잘 못하니 나 같은 녀석을 친구 삼아 지내는 사람은 참 심심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욕심은 많아서 부챗살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을 맞으며 그리워하는 우정이 참 부럽다. 일단 내 무심한 성정부터 좀 다듬어야겠다.


070221
2월 21일은 국채보상운동이 백주년을 맞는 날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강제로 떠넘긴 차관을 국민이 대신 갚아 경제주권을 수호하겠다는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문 운동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권리는 극소수가 누렸으면서 망해가는 책임은 백성 모두가 져야했던 비극이기도 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기보다는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역사의 과오로 간직하는 게 옳다. 그런 식으로 일구는 국민통합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는 요즘의 양극화 심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책임을 나눌 만큼 나누면 권리는 또 소수가 거머쥐는 현상의 반복일 따름이다.

김규항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이 같잖은 나라도 조국이랍시고” 십시일반 했던 가련한 국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갑다. 세금 꼬박 내고 법 잘 지키는 것만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세상을 꿈꾼다. 나의 이런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백년 전 대구의 그 애틋함에는 한없는 경의를 보낸다.


070222
노무현 대통령님이 공식적으로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겠다고 밝혔다. 이 땅의 책임정치, 정당정치가 무참히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퇴임 후에도 평당원으로나마 남고 싶다는 대통령님의 바람은 무너진 백년정당의 꿈만큼이나 허망해져 버렸다. 그러나 그간의 국정 최고책임자로서의 책무가 막중하기에 인간적인 연민은 최소한도로 그친다. 남은 임기동안 참여정부의 탄생을 반겼던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을 돌아보시길 바란다. 이는 대통령님이 옛 지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직선 대표는 본래 인기 없음에 초연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그 인기를 지켜내고 만들어내는 힘은 원칙과 일관성에 있다. 제 정성을 다한 다음 겸허하게 국민의 평가를 기다리는 책임정신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통합신당에 대한 대통령님의 부정적 견해는 거개 옳다. 열린우리당 평당원과 지지자들은 이 정당이 그저 여당이라서 지지했다기보다는 내걸었던 창당 초심에 애정을 가졌던 분들이다. 비록 대연정 제안이라는 뼈아픈 패착도 있었지만 열린우리당의 황혼에 즈음해 대통령님이 보여준 결기는 인상 깊었다. 아무런 감동 없는 집권여당 실세들의 몸짓과는 사뭇 달랐다.

부디 대통령님께서 떠날 때의 말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시길 바란다. 그는 속절없이 실패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수많은 지지자들에게 보답해야할 일이 아직 많지 않은가. “울분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있다”는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사람의 의연한 뒷모습이 보고 싶다.


070223
23일에 하루 연가는커녕 반가도 못냈지만 가까스로 조퇴를 할 수 있어서 다행히 졸업식 끄트머리에나마 찾아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경황이 없어서 많은 분들께 축하 인사를 건네지는 못했다. 졸업하시는 선배님들, 동기들, 후배들 다시금 가슴 깊이 축하 드린다. 특히 선배님들의 빈자리는 무슨 수로 메울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어쩌면 이 허전함이라는 것도 선배님을 흠모하는 마음, 동기들을 아끼는 마음,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라기보다는 순전히 내 이기적인 욕심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이렇게 아쉬운 까닭이 실상 내 자신을 위한 아쉬움인지도 모르겠다. 공유했던 지난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좀 더 잘하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별 만큼이나 많은 미래의 가능성만큼은 꼭 부여잡겠다.


070224
이제 막 선배가 되는 06학번에게 원나라 때 영종이 신하 배주에게 당나라의 명재상 위징과 같은 명신이 있겠냐고 물었던 고사를 언급했다. 배주는 “그야 황제가 어떤 황제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둥근 그릇에 물을 담으면 둥글게 되고, 네모난 잔에 물을 담으면 네모난 모양이 되지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06학번들이 제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그릇이 되어주길 바란다.

07학번 새내기들에게는 찰리 채플린에게 “당신의 최고 걸작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Next One(다음 작품입니다)”이라고 답한 일화를 꺼냈다. 모든 선배는 후배가 자신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새내기들이 최고 걸작이자 Next One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 밖에도 낯 뜨거운 연서를 많이 써내려 갔는데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는 주역 계사상전 구절이 자꾸 맴돈다.


070225
드라마 <하얀 거탑>을 1회부터 재방송으로 보다가 기막힌 문구를 접했다. 오경환 석좌교수가 최도영 교수를 격려하며 “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고치고,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오 교수는 최 교수에게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으려 한 순간부터 이미 대의의 길에 들어선 것이라며 한껏 덕담을 풀어놓는다.

최도영이라는 인물은 절차에 대한 원칙을 견결하게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다. 과정에 충실하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믿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논리가 넘쳐나는 세태에 과정과 결실의 아름다운 일치를 꾀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달갑다. 살맛나는 사회는 과정과 결실의 상관계수가 높아지는 세상이 아닐까. 결실의 달콤함에 취하기보다 과정의 쌉싸래함을 만끽하는 이들이 늘기를 바란다. 최도영이 저만 아는 독불장군으로 치부될 때 우리 사회의 아픔은 더 깊어지리라.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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