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402
한미 FTA가 타결됐다. 협상 내용을 분석해보면 우리가 얻어낸 것과 얻어내지 못한 것을 어떻게 헤아리느냐에 따라 많은 입장 차이가 있다. 벌써부터 농축수산업 손실보전 대책 등이 분주하게 나오는 모양인데 부디 내실 있게 진행하길 바란다. 피해부문의 구제와 보상조치를 얼마나 착실히 수행하느냐에 한미 FTA의 충격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가 달려있다. 특정 부문에 집중될 손해를 국민 전체가 분담하는 사회적 연대가 이뤄질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크나큰 희생을 바탕으로 일구는 경제발전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로 삼기 위해 노력해보자. 아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개방은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070403
3년 반 동안 국회에서 표류해온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2일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70살 이상 노인 가운데 60%에게 한달에 8만9천원을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더 내고 덜 받아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국민연금 개혁은커녕 후세의 부담을 더 늘려버렸다(아마 내가 포함되겠지^^;). 정부가 마련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더 내고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엄중한 현실을 반영한 고육지책이었다.

오불관언 근본주의적 태도로 일관한 민주노동당이야 논외로 치고, 감세와 복지 축소를 주장하던 한나라당의 돌변은 어지럽다. 정부안보다 재정 부담이 더 높은 기초연금제를 주장하려면 뭔가 재원 마련의 방안도 함께 내놓아야 하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그간 숨겨 놨던 화수분이라도 꺼내놓을 모양이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며 민생 법안 처리에는 협조하겠다던 탈당파 의원들은 이번 표결에서 대거 기권함으로써 이 엽기적 사태를 부채질했다.

법사위까지 통과한 정부 개정안을 놔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수정안을 제출한 건 결정적 패착이다. 설마 했는데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됐다. 이렇게 따로 법안을 상정함으로써 자당의 법안만을 고집하는 소인배의 무책임 정치를 낳았다. 나는 이번 사안에서 양비론을 취할 생각이 없다. 나는 정부안이 그간의 논의를 통해 실현가능한 차선책으로 다듬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조속한 시일 내에 재추진하길 바란다.

물론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이 가입자 단체와 합의해 내놓은 조정안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미래의 가입자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재원 마련에 대해 양당의 입장이 통일되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기왕 힘을 합친 김에 재원 마련에 대한 청사진도 함께 제시해주시길 바란다. 내가 머잖아 낼 세금의 크기를 늘리려면 그만한 설득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감춰뒀던 화수분을 좀 보여 달라.


070404
나는 “직선 대표는 본래 인기 없음에 초연할 수 없는 존재다”는 말을 자주한다. 물론 이런저런 단서 조항을 붙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철인왕(philosopher king)을 주창했던 플라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가 타락해 중우정치가 펼쳐지는 끔찍함을 노래(?)했다. 이처럼 인민의 지배(democracy)는 본래 그리 말쑥한 용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 이성이 진보한 것인지, 대철학자들의 험담이 과장된 것인지 오늘날 민주주의는 눈부신 말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적은 나라 가운데 하나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2일 한미 FTA 타결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에서 “개인으로서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면서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내린 결단”임을 강조하셨다. 그러고 보면 노 대통령님께서 지지자들의 반대편에 서서 제 지지층을 허문 일은 수두룩하다. “정치적 손해 가는 일을 하는 대통령은 노무현 밖에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에 특단의 의지로 결정했다”는 발언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어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 배신자라고 욕할 때 어지간한 강심장도 속이 쓰릴 것이다. 그것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속 좁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을 거스르는 직선 대표의 고독 때문이리라.

흔히들 반대자도 포용하는 지도자가 되라고 한다. 하지만 요 며칠 다시 봤다며 호들갑 떠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과도한 비난과 저주를 즐겨 쓰던 분들이었다. 이네들의 추켜세움이 아무리 달콤하다고 해도 옛 지지자들의 돌팔매 몇 개가 더 아플 것이다. 물론 노무현 지지자 가운데 개방에 반대하는 경우는 적다고 본다. 한미 FTA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방 정책은 후보 시절부터 이미 예측 가능한 행보였다. 지지자들은 아마 우려가 더 된다는 뜻으로 부표를 던진 경우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당시의 지지층이 붕괴되는 건 책임 정치에 비추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걱정을 뛰어 넘는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를 추진하며 도드라졌던 비민주성에 대한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길 바란다. 노무현의 뚝심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신이 되어야 한다(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이제 노 대통령님께서 하실 일은 그간의 협상 내용을 조속히 공개하고 불편한 진실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 단편적 정보로 인한 막연한 추측만이 난무하는 사태를 눅이고 최선을 다한 만큼 국민들의 평가를 기다리길 바란다. 진짜 뚝심은 이제부터다.


070405
오마이뉴스 민경진 기자는 “신책불이(身冊不二: You are what you read)”라는 표현을 즐겨 쓰신다. 한 사람의 사고방식은 그가 무엇을 읽고 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민 기자는 2002 대선 당시 “신문 같은 활자매체에 길들여진 구세대와 인터넷에 익숙해진 신세대간의 갈등”이 신책불이의 한 사례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창의성도 결국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적 제약조건은 얼마나 매서운가. 뉴턴은 “만일 내가 더 멀리 내려본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자신의 학설이 논리성뿐만 아니라 역사성까지 갖췄음을 겸손하게 내비쳤다. 이것도 신책불이의 한 사례이리라.

고 정운영 선생님이 쓴 중앙일보 칼럼이 변절 논란을 낳았을 때 프리맨(yong73)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누리꾼이 던진 “그 많은 책을 평생 읽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인생이 허무하지 않을까?”란 물음은 무섭다. 내가 읽는 것이 편협해서 거기에 얽매임을 염려하면서도 그저 주절대다 끝나는 것이 더 두렵다. 앎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 주희와 왕수인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어놓았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는 것도 경계할 일이기에 선뜻 어느 쪽 주장에 손을 들 수 없다. 어쩌면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에서 보신책처럼 둘러대듯이 진실은 중간 어디쯤에 있을지도 모른다. 두루 읽으면서 때 맞춰 움직이는 건 평생을 걸쳐 고민할 화두다.


070406
1857년 독일의 통계학자 에른스트 엥겔(Engel)은 벨기에 노동자 가구 153세대의 가계지출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수입이 적은 가계일수록 지출에서 차지하는 식료품비의 비율이 높고, 수입이 많은 가계는 그 반대라는 경험법칙을 발견했지요. 여기서 도출된 엥겔지수(Engel’s coefficient)는 가계소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엥겔지수가 25 이하면 높은 수준의 문화생활을 하는 ‘최상류’로 분류되고, 26~30은 ‘상류’, 31~50은 ‘중류’로 분류된다고 하네요.

보릿고개가 어느 정도 극복한 1980년대까지도 우리나라의 평균 엥겔지수는 40%을 오르내렸습니다. 2006년 8월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로 본 8·15 광복 이후 경제·사회 변화상’에 따르면 도시근로자가구의 엥겔지수는 1963년 61.3%에서 2005년 26.6%대로 하락했다고 합니다. 1963년에는 식료품비 지출에서 외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5%에 그쳤지만 2005년에는 48.5%로 높아졌습니다. 참고로 북한의 엥겔지수는 1990년대 말의 80%에서 2006년 70%대로 떨어졌다고는 하나 대체로 50% 이상인 개발도상국의 엥겔지수보다는 높은 편입니다. 중국은 40% 이하이며 2050년까지 15%로 끌어내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한미 FTA를 옹호하며 한국 소비자들이 평균 국제 소비자에 비해 농산물에 대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에 엥겔지수가 OECD국가들에 비해 높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인 쇠고기를 먹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값싼 쇠고기를 먹고 오렌지를 즐기는 게 소비자 후생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풍요로운 먹을거리를 값싸게 이용하는 방안과 더불어 농축산업계에 발생하는 역진적인 소득재분배로 인한 사회적 형평성의 문제까지 살피는 균형감각을 키워야겠습니다.

엥겔지수와 삶의 질이 역(逆)의 상관관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요. 엥겔지수를 낮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음식을 맛나게 음미하고, 다채롭고 개성있는 문화생활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일일 겁니다. 자자 밥은 먹고 다닙시다.^-^

- <작렬하는 엥겔지수> 대학로 맛집 탐방을 마친 기념으로 쓴 글


070407
언제부터인가 ‘愛후배’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각별히 아끼는, 가깝게 여기는 후배라는 뜻 정도로 쓰인다. 사람 사이가 다 그렇지만 많은 후배들 중에도 좀 더 오래 남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지난 5년 여간 이런저런 자리에서 스쳐간 후배만 수백 명은 될 텐데 내가 책임지기 힘들 정도의 관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그 정도로 스치고 만다면 망각과 무심이 인연의 자리를 꿰차는 건 시간문제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생활 동안 좀 더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커진다. 그래서인지 나도 부쩍 愛후배라느니, 愛선배라느니 하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愛후배를 자청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愛후배를 삼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잡아함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아난다가 붓다에게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붓다께서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입니다”라고 고쳐 주었다. 서로의 마음에 있는 거문고 줄(琴線)을 건드리는 愛선배-愛후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는 용혜원님의 시구처럼 그렇게 내 자신을 먼저 다잡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란 논어 첫 구절도 조바심 내지 않는 힘이 되리라.


070408
부활절 즈음해서 TV에서 틀어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흥미롭게 봤다. 예수님의 마지막 12시간은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점철되어 있다. 뚝뚝 떨어지는 핏속에서 태형과 십자가형의 잔혹함을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님의 평이 가장 와 닿는다. 비기독교도에게는 얼핏 “예수의 초인적인 맷집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는 평이 그리 불경스럽지 않아 보인다. “영적 영웅이 아니라, 육체적 영웅”으로 다가온다는 지적도 적절하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곧 진리다”라고 말씀하신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가 떠오르기도 하고, 몸으로 살아낸 것만이 진리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에 좀 더 공감하는 듯싶다. 내가 성경에 문외한이라 예수님께서 대중을 진리의 주체로 보기보다 용서의 대상으로만 본 거 같아서다(물론 그런 대중들을 섬기는 심부름꾼을 자청하신 건 경배의 대상이다). 불가의 개유불성(皆有佛性)이란 개념이 기독교에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용서했지만 하느님은 지진을 일으켰다. 나는 그 장면이 그다지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흔든 것은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장 28절)”는 외침이었다. 나는 기독교가 많은 이들의 목마름을 축여줬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박해에서 벗어난 기독교의 흐트러진 모습도 많이 보아왔다. 우리의 잘못을 대신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둘레에 억울하게 고통 받는 이들을 돌아보려는 노력으로 대체하려는 정성도 필요하다.

어릴 적 밤새 읽었던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가 떠오른다. 사반은 예수님 왼쪽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를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다. 소설에서 사반은 예수님에게 “비겁한 자여, 너는 유대 나라와 너의 생명을 버리고서 어디다 낙원을 찾고 있느냐?”일갈한다. 하늘의 영광보다 땅의 영광을 갈구하며 예수님과 격렬히 맞섰던 사반에 좀 더 동감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듯싶다.

내세나 윤회를 믿지 않는 나는 지금 이 생애가 전부다. 나의 현세주의(現世主義)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에, 불국정토에, 목적의 왕국에 좀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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