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430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정당정치 중요성 일깨운 정운찬 전 총장>이라는 제목의 한국일보 사설이 이 사안을 가장 적절하게 분석하는 듯싶다. 나 또한 이번 사건이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현재의 정당정치 구도에 대해 어느 정도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했으며, “사회적 혜택을 정치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낡았다”는 지적이 매섭다. 나는 일전에 농담 삼아 정 교수님이 대선이 뛰어들면 2년 주기로 나오던 거시경제이론 개정판이 올 여름에는 안 나와서 많은 수험생들의 부담을 더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이 추세로 보아 정 교수님의 거시경제이론 8판이 곧 나올 테니 열심히 읽고 궁리해야겠다.


070501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한국 회화 가운데 유명하기로 손꼽히지만 그 발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림에 대한 이해가 더욱 높아진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 이상적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이라 중국을 드나들며 추사를 위한 서책을 수집할 수 있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이 유독 더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 선생은 세한도 발문에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논어 구절을 인용해 제자에게 극진한 고마움을 표한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썼다. 옛사람들이 왜 그림을 읽는다고 했는지 알겠다. 세한도는 발문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완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새겨진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스승이 찍었든 제자가 남겼든 서로의 도타운 마음자리가 내 무심함마저 녹인다.

정민 교수님의 번역을 내 입맛에 맞게 고쳐 세한도 발문을 익구 버전을 완성해봤다. 난 그림 그리는 솜씨는 없으니 이런 발문 혹은 답장이나마 써봐야겠다. 세한도에는 진짜배기 의리가 배어 있다. 고 오주석 선생님의 맛깔스런 세한도 해설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070502
충북 괴산군이 표창한 음주문화상을 놓고 말이 많다. 건전한 음주 문화로 지역경제에 도움이 줬다는 이유로 공무원에게 상을 준 것이 비교육적이라는 비판이 매섭다. 나는 괴산군의 고육책을 아프게 긍정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요식업에 자본을 투하하는 내수 경기 진작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지라 기본 취지를 동감한다.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땅을 팠다 묻는 일이라도 시켜서 임금을 지급하라던 케인즈학파의 해법을 따왔다.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미이자 단기적 처방으로 제시한 것일 뿐 근본적 경기 회복책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술 먹고 노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내수 경기 진작이라는 미사여구를 끌어다 쓰는 집단 최면에 가깝다. 다만 부상으로 국내 여행, 견학을 보내준다고 하던데 부상이 좀 안 어울리는 거 같다. 차라리 전통 명주 같은 걸 부상으로 했다면 반발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술에는 술’이랄까.^^;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어렵지만 맛나게 잘 마시기는 더 어려운 듯싶다. 내 둘레 사람들과 음주문화상을 패러디한 걸 만들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런 상 없어도 잘 마시고 사니 불에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겠다.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 별로 재미가 없는 나는 술자리에서 유쾌한 사람이 되는 게 오랜 숙원이다.


070503
“봉황이 천 길을 날되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선비가 한 쪽에 숨어살지언정 옳은 주인이 아니면 섬기지 않는다(鳳凰翔千仞兮 非梧不棲 士伏處于一方兮 非主不依).” 유비가 삼고초려 하는 가운데 만난 제갈량의 아우 제갈균의 말이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良禽擇木)는 호기가 헌걸차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이 탈당 가능성을 시사하며 신당 창당에 집착하고 있다. 한때 집권여당의 당의장까지 역임하고 참여정부의 국무위원까지 꿰찼던 분들이 내뱉는 말씀치고는 경박하고 무책임하다.

내 주제에 도덕적 훈계를 하는 거 같아 민망하다. 이 분들이 정말 제 밥그릇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하는 건 아닐 거라 믿고 싶다. 현실정치는 명분만으로는 안 되는 영역이 있을게다. 현재 정치지형상 소수세력인 이 분들이 각종 연합을 통해 간신히 영남 지역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냉혹한 실정을 모르는바 아니다. 좌파와 우파의 정책 대결이 또렷하고 공동 정부(코아비타시옹)를 구성하기도 하는 프랑스에서도 사회당이 타 세력과 연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람 사는 게 길다면 길지만 지고 살기에는 너무 짧다. 소심한 나는 대개 현실론의 손을 적잖이 들어줬다. 내 업보다.

선거에서 져도 출마하는 사람이 있어야 선거제도가 존속할 수 있으며, 자기 당의 강령을 들고 나올 수 있어야 복수 민주 정당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당이라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씀이 옳다. 우리도 자신의 신념에 책임질 줄 아는 정치인, 정당을 가져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욕심을 내본다. “차라리 한 때의 적막을 겪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함을 취하지 말라(寧受一時之寂寞 毋取萬古之凄凉)”는 채근담 구절이 사무친다. 나는 김근태님, 정동영님의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처신만은 그 분들보다 더 잘하고 싶다. 그 분들이 밉기보다는 측은하다.


070504
지난 4월 30일 중국 장쑤(江蘇)성 천녕사(天寧寺)에서 천녕보탑(天寧寶塔) 낙성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천녕보탑은 송나라 때 만들어졌지만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2001년부터 국내외 성금을 모아 다시 세웠다. 13층 153.79m의 높이로 중국에서 가장 높은 불교탑이 되었다. 사진으로 봐서는 복원을 한 재료가 뭔지 알 길이 없다. 제작기간이 짧은 것으로 보아 전통 목탑이라기보다 시멘트를 사용했을 거라 추정만 한다. 규모가 크니 내실은 별 볼일 없기를 바라는 내 질투 때문이다. 문득 황룡사 9층목탑을 떠올렸다가 하염없이 상념에 빠졌다.

얼마 전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에 짓고 있는 경주타워에 높이 82m 규모로 황룡사 9층목탑을 음각화한 형상이 공개됐다. 이렇게 나마 황룡사 목탑의 흔적을 살리려는 노력이 안쓰럽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7년쯤 황룡사 복원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나는 황룡사 9층목탑을 제 자리에 복원하자는 견해에 심정적 지지를 보낸다. 박래부 한국일보 논설위원님 말씀대로 “조바심 때문이 아니라 새 자료 발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결정적 증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현재 기술을 집대성해 중건의 첫걸음을 떼는 게 어떨까 싶다.

김홍식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님에 따르면 문화유산 수리에서 흙을 이기거나 바르는 흙일을 중국사람을 고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화재 보수공사가 이윤을 추구하는 도급제도로 운영되기 때문에 값비싼 전통기술을 쓰지 않는다”는 주장이 따갑다. 돈이 안 되는 걸 외면하다 보니 전통기술을 운용하는 장인들이 계승자 없이 고령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전통건축계의 유효수요(effective demand)를 창출하는 건 추레한 경제논리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폐사지의 낭만을 마냥 읊조리기에 우리네 문화적 저력이 너무 갑갑하다.


070505
금요일 밤에 학교 응원제인 입실렌티 뒤풀이를 참석하고 토요일 아침에 집에 왔다. 입실렌티는 고려대학교 교호(校號)로 오스만 투르크에 맞선 그리스의 독립운동가 입셀란테스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지성과 야성을 조화롭게 추구한다는 의미로 ‘지야의 함성’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행사는 가수와 학생들의 공연 및 응원으로 진행된다. 아무래도 가수 중심의 무대가 형성되게 마련이라 대학 축제의 상업성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가령 이번 초대 가수로 아이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가 큰 관심사였다. 요즘 인기가수이기도 하지만 학교 응원가이기도 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샘플링 된 댄스곡 ‘유혹의 소나타’가 고대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끼리야 재미 삼아 하는 말이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그리 어여삐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침 먹고 귀가한 게 참 오랜만이다. 홍익이와 작년 입실렌티 뒤풀이를 아침까지 남았을 때 앞으로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 약속 지키지 못한 게 아쉽기보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 게 부끄럽다. 그래도 작년 뒤풀이보다 더 많은 분들과 풍성한 시간 보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녹지운동장에서 펼쳐진 응원을 엉성하게 따라하며 중요한 것들은 우리 몸에 각인된다는 명제에 대해 생각했다. 입가에 퍼지는 옅은 미소부터 도약할 때의 그 촉감, 어깨동무한 손등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 같은 기억들을 내 마음에 오래도록 담아 두고 싶다. 고연전의 규모에 견주어 입실렌티 응원은 약소하지만 나는 비좁고 흙먼지 날리는 입실렌티 응원만의 매력이 적잖다. 끝까지 함께 해주신 광호형께 각별한 고마움을 표한다. 형님 우리 월요병 없는 세상을 만들어 봐요!^-^


070506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대제(宗廟大祭) 끄트머리를 참관하고 왔다. 무형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낮은 나는 오월 첫째주 일요일에 열리는 이 행사를 알고는 있었지만 번번이 놓쳤다. 이번에도 늦잠이 이기지 못하고 늦게 나섰다. 종묘대제를 크게 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는 절차, 신을 보내는 절차로 나눈다면 나는 신을 보내는 절차만 관람한 셈이다. 종묘제례는 조선왕조가 지내는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다. 종묘제례를 지낼 때 연주하는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더불어 2001년 유네스크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됐다. 종묘 건물 역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상태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 등의 연주에 맞춰 추는 팔일무(八佾舞)를 온전히 감상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팔일무는 여덟 줄 8열씩 64명이 늘어서 추는 춤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실권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계평자(季平子)가 대부(大夫) 주제에 자신의 묘정에서 팔일무를 춰 천자를 참칭한 것이 예에 맞지 않다며 분개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섯 줄 6열씩 육일무를 추었는데 대한제국시대 이후 팔일무를 추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약 공자가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떻게 평할까 궁금하다(설마 따지시겠는가?). 종묘 건축이 검소함을 추구해 장엄을 더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연쇄효과를 잘 느끼지 못하겠다. 난 종묘 건축의 단청이 조금 더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품고 있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보장왕 등을 당 태종 이세민이 묻힌 소릉(昭陵)에 바치게 하고, 장안의 태묘에 바쳤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제사체계가 무너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서글픈 광경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헐레벌떡 몽진하면서도 챙긴 것은 종묘에 모셨던 선대 왕들의 신위였다. 왕의 책무 중에 하나가 제사권 수호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충효사상을 공동체의 유대를 위해 활용했던 동양 문명의 단면이다. 대한제국은 비참하게 망했지만 그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 것은 대한민국인의 자비심 때문만은 아닐 게다. 아마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의 품이 너르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좀 못 되게 말해 제의의 엄숙함은 상당 부분 거세된 채 관광자원으로 전락했다고 폄하할 수도 있다. 수천 명이 모여 관람하는데 그 옛날의 분위기를 기대한다는 게 억지다. 무료로 배포한 종묘대제 자료집이 일반인들의 관람에 큰 도움이 되었듯이 종묘제례악을 손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온라인상으로 공개했으면 좋겠다.

『예기』에는 “상례에 있어 슬픔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슬픔이 넘치는 것만 못하며, 제례에 있어서는 공경함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공경함이 넘치는 것만 못하다(喪禮, 與其哀不足而禮有餘也, 不若禮不足而哀有餘也. 祭禮, 與其敬不足而禮有餘也, 不若禮不足而敬有餘也)”고 말하고 있다. 예는 방편(方便)이다. 예는 정성을 표하는 돌다리일 뿐이니 예 자체가 절대화되어 인간의 행위를 구속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집집마다 예법이나 풍속, 습관이 다를 수 있다는 가가례(家家禮)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인인례(人人禮)로 더 쪼개보면 어떨까. 이는 개인주의 시대의 미덕이 될 것이다.

종묘 구석에 외롭게 자리한 공민왕 신당을 둘러보고 나오며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광해왕을 추념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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