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514
EBS 지식채널 ⓔ라는 재미난 기획물이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됐다. 아쉬운 대로 몇 개를 골라봤는데 흥미진진했다. 최근 방영된 헬렌 켈러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접하니 여운이 짙다. <미국의 우상>이란 제목의 영상물은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만 알려졌을 뿐, 그가 사회주의 운동에 몸담았던 사실은 대개 은폐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읽었던 헬렌 켈러의 전기에는 장애를 극복한 이후의 삶이 매우 소략했다.

헬렌 켈러의 정치적 발언을 원치 않았던 이들이 헬렌 켈러의 주체적 판단력을 불신하는 전략을 쓴 모양이다. 누군가 부추기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험담했다는 게 씁쓸하다. 인간의 비루함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헬렌 켈러의 삶을 발췌해서 간직하려는 그들은 헬렌 켈러를 그의 삶과는 정반대로 소비한다.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던 그를 개인의 초인적 노력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라는 자조론, 자력갱생의 미덕으로만 이용하려 했다. 헬렌 켈러가 자신의 아픔을 미루어 남의 아픔을 헤아리고 해결책을 모색해왔다는 측면은 부러 무시하고 단지 개인적 영역으로만 한정하려고 노력한 이들이 적잖다.

나는 우리 사회에 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우파들이 상식이나마 건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상식은 곧 최소한의 객관성이다. 헬렌 켈러를 발췌해서 간직하듯이 박정희를 발췌해서 찬양하는 사람들이 좀 줄었으면 좋겠다(발췌의 유혹에 나도 예외는 아니다). 헬렌 켈러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쓸모보다 목숨이 길어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정말 낙관주의자의 사표다. “비관주의자치고 행성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이 있는가? 인간정신을 위한 신대륙의 항로를 개척한 사람이 있는가?”라는 그의 죽비소리가 등짝에 사무친다. 행성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신대륙의 항로를 개척하지는 못하더라도, 쓸모보다 목숨이 긴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070515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은 1477년에 창설된 북유럽쪽(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학교 강당의 입구에는 토마스 트릴드(Thomas Thorild)의 시구인 “자유로운 사고는 위대하다. 그러나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란 프로그램에서 비춰준 그 명구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TÄNKA FRITT ÄR STORT MEN TÄNKA RÄTT ÄR STÖRRE다. 스웨덴어는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움라우트(Umlaut)를 제대로 옮겨 적은 건지 잘 모르겠다만서도. 영어로는 TO THINK FREE IS GREAT, TO THINK RIGHT IS GREATER 정도 되는 셈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평범하다고 설파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천성이 악마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thinklessness)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고에도 위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하는 것 자체도 요긴하다.

일단 생각에도 빛깔이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자. 그런데 내 자유로움이 온전히 올바름을 위해 쓰일 자신은 없다. 우선 올바름이란 개념을 합의하기가 너무 어렵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올바름을 모색하되 고집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균형점 언저리를 향한 노력을 할 뿐이다. 올바름을 지키다가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름을 핑계로 무리를 지어 남을 핍박하지도 않는 포지셔닝이 흐릿하다. 자유와 올바름의 중용이란 게 가능할까? 아니 존재라도 할까? 이데아를 빙자한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070516
역사학자 크로체(Croce)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당대사)”라고 주장했다.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실천적인 요구는 모든 역사에 현대사의 성격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지금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역사는 그 사건이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현재의 요구와 현재의 상황을 다루기 때문이다(The practical requirements which underlie every historical judgement give to all history character of “contemporary history” because, however remote in time events there recounted may seem to be, the history in reality refers to present needs and presents situations wherein those events vibrate. - 中).”카(Carr)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풀었다. 책에 포함된 사실이 아닌 책을 쓴 역사가에 대한 관심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는 데 많이 동감한다.

이것과는 좀 다른 맥락이기는 한데 우리네 정치사 연구가 지나치게 현대사 위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건 문제다. 물론 근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원전은 한자 해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치학도에게 그런 걸 요구하기가 쉽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정치학계가 행태주의 방법론에 치우쳐 역사적 방법론을 소홀히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제사상이나 경제학사가 경시되는 것처럼 정치사상이나 정치학사도 관심이 적은 듯싶다. 행태주의는 사회현상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과학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본다는 특징이 있다. 수학적, 통계적 방법을 통한 측정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 “관찰 가능한 현상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다룰 뿐만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수량화(quantification)가 가능한 문제를 다루고, 측정 및 검증 과정에 엄밀한 기법(technique)을 도입하여 정확성을 기하고자 노력(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공저, 『정치학의 이해』, 2002, 25쪽)”하는 태도다. “정치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고유한 법칙적 지식을 발전시키고, 정치적 현실을 어떤 창조적인 목적적 가치규범과 관련시켜 경험법칙과 규범지식의 합리적이고 적합한 체계적 관계를 이론화(김재영 외, 『새로운 정치학의 이해』, 삼우사, 2003, 38쪽)”한다.

정치학 교과서들의 설명이 어려워 비전공자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행태주의가 놓친 역사적 맥락으로 접근하는 시도를 해봐야겠다. 크로체의 명제는 반드시 현재에 벌어지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뜻은 아닐 게다. 과거의 사실을 접하면서도 현재의 관심에 부응할 수 있는 안목을 일컫는 건 아닐까. 추체험(追體驗)이란 말처럼 당시의 그 사람, 그 현실 속에 들어가서 생각하고 행동해보자. 그런 사고실험을 통해 과거의 여러 사실 가운데 오늘날 유의미한 사실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나 자신과 시대의 문제에 적용해볼 수 있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님은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운 한국미술사 연구를 강조하신다. 이론의 틀 속에 넣어서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시대정신과 미의식을 체험하는 것이 추체험이라 부른다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알쏠달쏭하지만 대략 이런 개념을 체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070517
라오서(老舍)가 지은 『루어투어 시앙쯔(駱駝祥子)』를 읽으니 온종일 먹먹하다. 시앙쯔는 자기 인력거를 장만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한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실패한다. “내가 도대체 누구한테 잘못했단 말이요?”라고 울부짖던 그는 결국 “빨리 달리라고요? 얼마 더 줄려요?”라고 쏘아붙이고 “왕년에는 나도 악착같이 노력했다 이거야,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나, 요 꼴밖에는”이라며 푸념한다. 나도 저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는 고통이 절절하다. 사실 시앙쯔가 엄청난 신분 상승 욕구를 품은 것도 아니고 그저 배곯지 않는 안정적인 수입원과 자유로운 삶을 갈망했을 뿐인데 그 마저도 과분한 바람이었다.

작가는 시앙쯔가 “다른 인력거꾼들보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그러한 인력거꾼다운 인력거꾼이 되었다”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시앙쯔가 사회의 부조리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그에게 손가락질 하고픈 마음이 슬며시 사라진다. 시앙쯔의 타락은 편안함만을 좇게 된 게으름 때문만은 아닌 거 같다. 그의 절망이 쌓이고 쌓이는 과정을 보면 그의 숙명론을 타박하기 미안하다. 성공하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작은 노력에 작은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팔자소관이 줄어드는 세상일 것이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실은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
시앙쯔는 병이 났다. 셋집 울타리 안에 병자가 그 하나 뿐은 아니었다.

- 라오서 지음, 최영애 옮김, 김용옥 풀음, 『루어투어 시앙쯔』(하), 통나무, 1986, 495쪽


070518
김혁규 의원님이 올린 <5ㆍ18 민주화운동 27주년을 맞아>라는 글을 읽었다. 그는 “저는 대한민국의 언론보다 광주의 민심을 더 두려워합니다. 광주의 동의 없이, 5ㆍ18민주화운동이 낳은 시대정신을 계승하지 않고는 결코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ㆍ18 항쟁을 승리로 이끈 광주의 정신을 존경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적잖은 누리꾼들은 당연히(!) 그의 한나라당 경력을 문제 삼는 댓글을 올렸다. 나는 이 누리꾼들의 투덜거림이 거개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김 의원님이 열린우리당 창당 초기 어려운 시점에서 입당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진정성을 어느 정도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어차피 비례대표 앞 순번 받을 걸 예상했을 테니 위험 부담이 적었다고 핀잔해도 할 말 없지만.

한나라당에는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이 적잖다. 가끔 제 과거에 너무 어긋나는 행동이 민망해서 짐짓 그럴 듯한 말씀을 하기도 하지만 그네들은 과거를 팔아 꽤 괜찮은 수입을 올렸다. 나는 그네들을 너무 미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변하게 마련이다. 그 변화가 바람직한지 여부는 함부로 가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혁세력, 민주화세력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너무 결벽성을 내세우거나 순혈주의를 주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품이 저들의 품보다 작고 우리의 가시가 저들의 가시보다 더 날카롭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우리’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 고심했지만 일단 쓴다). 우리의 꿈은 고작 개개인과 그 둘레 수준의 영역에서 맴돌고 말 뿐이다. 오늘날 국민에게 표 받겠다는 사람 치고 오월의 광주를 대놓고 폄훼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광주의 정신을 잇겠다며 투항(?)하는 사람들이 줄서고 있다. 김혁규 같은 분들이 더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나이지만 가사가 좋은 몇몇 민중가요는 즐겨 듣는다. 김근태 의원님의 미니홈피 배경음악에 깔린 민중가요를 놓고 어느 누리꾼이 당신이 민중가요를 깔아놓다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요지의 방명록을 남겼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넘쳤다. 나는 그 논리에 따르자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광야에서>, <바위처럼>, <청계천 8가>,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노래들 근처에 가서는 안 될 테다. 그건 너무 팍팍하다. 나같이 보수적인 녀석은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명제에 동참할 수 없는 건가. 그건 너무 엄격하다. 자칭 개혁세력, 민주화세력은 (나 같은) 어정쩡한 이들을 너그럽게 거둘 필요가 있다. 콩고물을 보고 달겨드는 사람도 분명 있으리라. 그만큼 우리가 넉넉해졌다는 징표다. 항복한 장수는 후대했던 동서고금의 사례를 돌아보자. 장비가 엄안의 포박을 풀 때 참 멋졌다. 광주의 오월을 상업적으로 파는 이들이 많아지는 걸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길.


070519
오랜 만에 분당을 향했다. 초등학교 시절을 성남시 중원구에서 보낼 때 분당구는 이제 막 짓고 있는 곳이라 삭막하고 휑하던 기억뿐이다. 서울을 별로 겪어보지 못한 나는 분당에서 빌딩숲(정확히는 아파트숲)의 숨 막힘을 겪었다. 다시 찾은 분당은 녹지대가 참 많은 곳이었다. 신록은 부자 동네든 가난한 동네든 어디서나 반갑다. 문득 분당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이라고 한다. 분점리(盆店里)와 당우리(當隅里)라는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盆唐)이라고 했는데 당(堂)자가 당(唐)자로 바뀐 영문을 모르겠다.

초등학교 사회 과목 전과에는 직할시 등을 설명하며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도시로 울산과 성남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울산이야 광역시가 되었고,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하고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성남이 아니라 수원이다. 내 기억에 성남이 팔십 몇 만이고, 울산이 구십 몇 만이라 성남이 2등이었는데 지금도 2등이다. 2007년 4월 말 현재 성남이 96만 여명이고, 수원이 108만 여명이다. 수원시의 연도별 인구 현황을 살펴보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성남에서 서울로 전학 오던 해인 1995년 당시 75만 여명이다. 지난 십 몇 년 간 수원으로의 인구 유입이 많았던 셈이다.

사실 수원이 광역시가 되려 해도 경기도측의 반대가 심해 쉽지 않을 것이다. 성남의 경우는 인구만 많을 뿐 서울의 위성도시 성격이 강해 광역시 승격 요건에 맞지 않을 공산이 크다. 문득 내가 살던 동네가 직할시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철부지 시절이 떠올랐다. 1995년에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중앙집권적 의미가 강한 직할시 대신 광역시로 개칭되었고, 울산은 1997년 7월 광역시로 출범했다. 1995년 8월 교육부는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실제 각급 학교 적용은 1996년 3월부터였고 내 또래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국민학생이 품었던 직할시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가 너무 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사람처럼 말하는 거 같아 우습다. 자신의 경험이나 추억에 너무 과도기적 의미를 부여하는 걸 삼가자. 자기 삶을 각별하다고 우기면 끝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흘러가듯 스쳐가듯 하고 잊으면 그만이다.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을수록 경험을 이용해 논리를 입증하려는 유혹이 커질게다.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 “그 때 당시에는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말은 상대방이 청해오면 모를까 스스로 먼저 주섬주섬 꺼내놓을 이야기는 아닐 듯싶다. 경계할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경험론자보다는 합리론자 편이지 않는가(어머나 이 고질적인 편가르기란).^^;


070520
젊음은 동이 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요 며칠 술을 열심히 마셨고 그간 잠잠하다 싶었던 내 주사가 또 펼쳐졌다. 민폐는 끼치지 않으나 내 스스로에게 폐를 끼치는 주사 말이다. 자폐(自弊)는 어감이 안 좋으니 아폐(我弊)나 오폐(吾弊)라고 불러서 내친 김에 고유명사화 해버릴까 보다. 이번에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대동제 주점 자리도 선방했거늘 축제도 끝나 적막한 안암동에서 이런 사단을 벌이다니 비통하다. 사실 전례가 많은지라 좀 덜 놀랄 법한데도 늘 후회스럽고 민망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게 있으랴.

이것저것 잃어버려 보고 나니 내 소유에 대한 책임감이 늘기보다는 기왕이면 덜 가지고 다니게 된다. 분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지품을 약소하게 꾸린 노마드형(?) 지갑을 만든 덕에 좀 유쾌하다. 이러다가 내 물건들이 나를 훌쩍 떠나도 고이 보내 줄까봐 걱정이다. 이런 사건을 겪고 날 때면 나는 늘 금주령을 만지작거린다. “술은 언제나 무죄다”는 게 내 오랜 신조이기는 하지만 길일을 택해 금주 시늉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숙취를 다독이며 문화재청 답사기 공모전 원고를 마무리했는데 가난해진 내게 복음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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