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에서 실시한 2007년 세계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에서 입선이 된 글입니다. 사흘 연속 과한 음주로 숙취가 덜 깬 상태였지만 책 살 문화상품권을 벌기 위해 힘들게 쓰다보니 많이 엉성합니다. 이 답사기 쓰려고 모은 자료들이 적잖은데 기회가 되면 종묘에 대한 글을 좀 더 보강해서 써보고 싶네요.


<종묘 잡감>

내게 있어 공민왕신당은 종묘의 절반이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라는 놀림을 기꺼이 감수한다. 꼭꼭 닫아두던 걸 요 근래 시원하게 열어줘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준마도를 뵈니 참 고맙다. 공민왕신당의 성립 배경에 대한 특별한 문헌기록은 없다고 한다. 왕조 교체기에 고려에 아직 애정이 남은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처사로 추측할 따름이다. 우리는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대개 조선시대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현대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왕조이고, 관련 유적과 사료가 단연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그치지 않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 고려시대가 아닐까 싶다. 조선미의 극치에서 부러 고려를 회상하는 까닭이다.


큰산은 바라보기에 따라 다르다. 역사는 연속성이 고갱이다. 우리의 유구한 전통 또한 여러 겹의 속살을 가지고 있기에 다각적이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정성이 필요하다. 공민왕신당은 시답잖은 유형문화유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당을 감도는 그 처연한 서정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공민왕의 험난한 좌절을 따가워하기 좋은 곳이다. 문화유산은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많은 것으로만 우열을 따지기 힘들다. 나 같은 녀석에게 공민왕신당 내부를 공개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이런 식으로 영혼을 어루만지는 작은 문화유산들도 소중히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 문화는 고매한 기교 이전에 낮고 약하고 가여운 것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다. 결정적으로 돈도 많이 들지 않으니 일석이조다.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그 땅 위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命毁前朝宗廟, 作新廟於其地).”『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0월 13일의 일이다. 종묘는 새 도읍 한양에서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진 조선의 첫 건축이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종묘에 모셔진 신위(神位)였다. 왕의 주요 책무가 제사권 수호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충효사상을 공동체의 유대를 위해 활용했던 동아시아 문명의 단면이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보장왕 등을 당 태종 이세민이 묻힌 소릉(昭陵)에 바치게 하고, 장안의 태묘에 바쳤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제사 체계가 무너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서글픈 광경이다. 대한제국은 비참하게 망했지만 그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 것은 대한민국인의 자비심 때문만은 아닐 게다. 아마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의 품이 너르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종묘대제(宗廟大祭)를 참관하고 나니 조상숭배관념에 대한 복잡한 감회가 밀려든다.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만 지상에 남게 된다고 여기는 유교적 사생관이 흥미롭다. 백이야 무덤이라는 실체가 있지만 혼은 어떻게 살펴야 할지 막막하다. 신주가 모셔진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면 영혼이 찾아와 흠향하고 다시 돌아간다는 재미난 구조다. 죽음을 삶의 새로운 한 국면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의 상제례가 다른 문화나 종교에 견주어 복잡다단한 이유도 여기 있다. 유가는 영혼은 있다고 믿지만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내세가 없는 대신 죽음을 다른 맥락의 삶으로 잇대기 위한 절차와 형식을 마련했다. 제사에는 숨막히는 보수적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조상을 신으로 상정하려는 유가의 시도에서 서양의 천부인권 개념을 연상시키는 휴머니즘 내지 민중성을 발견했다면 너무 지나친 호들갑일까?


『예기』에는 “상례에 있어 슬픔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슬픔이 넘치는 것만 못하며, 제례에 있어서는 공경함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공경함이 넘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예는 방편(方便)이다. 예는 정성을 표하는 돌다리일 뿐이니 예 자체가 절대화되어 인간의 행위를 구속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집집마다 예법이나 풍속, 습관이 다를 수 있다는 가가례(家家禮)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인인례(人人禮)로 더 쪼개보면 어떨까. 이는 개인주의 시대의 미덕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쯤 종묘대제에 여성 헌관(獻官)을 볼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르다는 시시례(時時禮)를 언급하면 의례를 희화화한다고 지청구가 날아오려나.


종묘는 조선왕조가 계속 되어 모실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려 증축했다. 정전은 서에서 동쪽으로 증축했고, 영녕전은 중앙을 고정시키고 양옆을 늘렸다. 지금은 모든 신실이 꽉 차있는 상태다. 친진(親盡)된 신주를 땅에 묻기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별묘인 영녕전을 지었다. 정전과 영녕전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나서 정전애호파와 영녕전애호파가 나뉠 정도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유치한 질문이 나올 법하다. 그런데 정전과 영녕전의 가름은 각별하다. 순두부처럼 흐물흐물하지도 않으면서 일반두부처럼 각지게 썰리지도 않는 다름이다. 일반두부 같은 마니교적 이분법도 아니고, 순두부 같은 니체식 허무주의도 아닌 그리 단단하지 못한 본질과 다채로운 상이점이 버물리는 연두부 같은 건축이다.


누구를 정전에 계속 봉안하고 누구를 영녕전으로 내어 모시느냐를 놓고 적잖이 다퉜다. 가령 태종의 자식인 세종은 태종 왕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삼촌인 정종을 부묘하면서 묘호조차 올리지 않고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리게 놔뒀다. 세조의 후사들은 세조 왕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문종의 신주를 신실이 아닌 서쪽 협실(夾室)로 내몰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거의 모든 왕이 전대의 임금을 불천위(不遷位)로 삼으며 공적 이상의 호사를 누리게 만들었다. 불천위 제도에 담긴 국왕 평가시스템이라는 원칙보다는 미안하다는 다정함이 압도했다. 거칠게 말해 성리학적 의리명분의 핵심은 “미안하다”인 듯싶다. 태종이 미워해서 종묘에 모시지도 않았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세조가 파헤쳤던 문종비 헌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을 재건하고 신주를 다시 종묘에 모시고, 왕위를 빼앗겼던 단종을 복위시켜 종묘에 모시는 등의 복권 절차가 훈훈하다. 순종과 영친왕이 각각 정전과 영녕전에 모셔짐으로써 종묘는 박동을 멈췄다. 종묘가 사화산이 되었기에 아무런 복선 없이 종묘를 완상할 수 있게 되었다. 종묘의 건축을 헤집는 데 열중한 나머지 ‘종묘의 정치학’을 엿보는 재미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종묘 건축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소박하다. 중국 베이징의 태묘 건축이 여느 궁전 건축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종묘의 박석(薄石)을 최소의 인공미라고 해야 할지 최대의 자연미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고유섭 선생이 말씀하신 “무기교의 기교”의 정수다. 그런데 밋밋한 가칠단청을 올려다보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계산된 단순함이고 기획된 질박함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검소함을 추구해 장엄을 더했다고 하지만 그 연쇄효과가 퍼뜩 떠오르지 않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앞사람에게 투덜거리며 응석을 부리는 건 뒷사람의 특권일 게다. 문화유산 감상은 별난 의견도 내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종묘 건축의 단청이 조금 더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품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 감상이 위인전 읽듯이 일방적이라면 너무 팍팍하다. 마땅한 찬사가 나올 만큼 나왔으니 농담 삼아 옥의 티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종묘의 엄숙함을 좀 눅이는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전사청 앞의 찬막단과 희생대를 거닐며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을 궁리했다. 종묘를 함께 찾은 일행에게 제물로 끌려가는 소가 가엾게 여겨져서 보지 못한 양을 제물로 쓰게 되었다는 희생양의 고사를 나누리라. 인간 이성과 감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품을 수밖에 없는 어떤 믿음을 공유하려고 애쓸 것이다. 인간에게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싶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말이다(종묘제례는 소, 양, 돼지고기를 모두 제물로 쓰니 좀 어울리지 않지만). 종묘에서 넉넉함을 배우고프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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