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속에 변치 않는>
  - 『스승의 옥편』을 읽고

  ‘선발자의 이득’이라는 경제용어가 있다. 상대방에 앞서 신상품을 시장에 내놓은 기업이 얻게 되는 이익을 일컫는다. 이와 반대로 선발자가 터를 닦은 시장에 진입해 위험과 비용 부담을 줄이는 ‘후발자의 이득’이라는 말도 있다. 두 이점 가운데 어느 것이 크게 작용하느냐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시장 개척자들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닌 셈이다. 최근 산업자원부는 산업정책 패러다임을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전략에서 혁신 주도자(leading innovator) 전략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히 선진국 따라잡기로는 중국 등과의 경쟁에 한계가 있으므로 원천기술과 창조적 인재에 바탕을 둔 핵심역량을 키우겠다는 포부다.


  정민 선생의 『스승의 옥편』을 읽다가 엉뚱하게도 ‘혁신’ 생각이 났다. 글쓴이의 저작에 잇따라 흐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과 혁신 주도자라는 개념은 제법 닮았다. “전통의 계승은 지금 없는 변치 않을 옛것을 회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원래 있지도 않았다. 쉴 새 없는 변화 속에 변치 않는 정신의 가치를 깃들이자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책의 고갱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옛것을 바지런히 읽어 정갈하게 갈무리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18세기 지식인 탐구로 이어진다. 선생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에서 옛것을 흉내내기 급급했으면서 교조적 권위를 휘두르기 일쑤였던 기득권층을 비판한다. 그는 “민족문화의 주체성과 외래문화의 건강한 결합을 모색했던 지식인”들을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이라 평했다. 이 가능성이 사그라졌던 것에 대한 반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비유가 거칠지만 옛사람이 선발자의 이득을, 오늘을 사는 사람이 후발자의 이득을 꾀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2등 상품이 1등이 되기 위해서는 10배 더 좋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선현과 한바탕 승부를 벌이자는 건 아니지만, 그네들의 다채로운 삶을 추체험하는 게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글쓴이가 틈틈이 한탄하듯이 기술의 진보가 정신의 고양으로 확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생은 문화는 변화할 뿐 발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후고박금(厚古薄今)을 거부한다. 아울러 사람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언급되는 전거들 상당수가 자잘한 일상생활의 섬세한 묘사다. 이를 통해 옛사람들의 고민 상당수가 현재도 여전히 끙끙 앓는 화두임을 보여준다.


  북송 시대 사마광은 황하 유역의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왕안석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 지역을 대표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북 지역이 전통주의를 내세웠다면 신흥세력인 동남 지역은 신법(新法)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지식인의 철학이나 정견이 온전히 그 개인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역사와 환경이라는 맥락은 부러 외면하기 힘든 규정력을 행사한다. 자신의 생각에 시공간이라는 요소(要素)를 눅여낼 때 그 사상이 좀 더 탄탄해질 수 있다. 선생은 전작 『책 읽는 소리』 후기에서 ‘그때 여기’와 ‘지금 저기’라는 두 좌표축을 균형 있게 도두볼 것을 주창한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그때 여기’, 다시 말해 ‘우리의 과거’를 보강한다면 보다 혁신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동서고금을 통합하는 담론을 위한 저자의 제안을 세 가지로 나눠봤다.


  첫째로 기록하는 습관이다. 『지봉유설』, 『성호사설』, 『임원경제지』 등의 백과사전식 저술이 그 실례다. 정조의 『일득록』을 완독하며 희열을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이 새록하다. 퇴계선생고종기의 꼼꼼함도 감동적이다. 선생은 단순히 적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읽는 초서(鈔書)를 통해 자기 나름의 잣대로 가름하여 식견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치밀한 기록은 일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책임성을 높여준다. 다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한답시고 자기 만족하는 건 경계할 일이다. 실상 선생의 글쓰기 작업 자체가 기록의 극치다. 라디오 진행자의 한마디나 식당에서 손에 잡힌 소식지도 메모해둔다. 생활 속의 단상도 잊기 전에 적어 두는 듯싶다. 자식의 효도는 어린 시절에 다했다는 넉넉함이 푸근하다. 조봉암 선생 무덤 앞 어록을 보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고, 차마 속일 수 없는 사람을 모시고 싶다는 바람을 토로할 때 사람냄새가 난다. 이는 마치 18세기 소품체(小品體)의 생활작문, 미시작문을 연상케 한다.


  둘째로 위대한 일상성이다. 도저한 근면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글쓴이는 스승의 닳고닳은 한한대사전을 넘기며 단순무식한 노력이 왕도임을 확인한다. 다산 정약용이 책상다리로 앉아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고사를 전한다. 다산의 제자 황상이 오로지 부지런하라는 삼근계(三勤戒)를 받은 이야기도 꺼낸다. 편안한 휴식이 되는 공부가 진짜 공부이며 질리지 않고 가슴 뛰게 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럭저럭 소일(消日)하지 않는 삶은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라는 『중용』 구절과 만난다. 누구나 사흘쯤은 성인군자 행세를 할 수 있다. 닷새 정도는 공부를 하다가 지쳐 단잠에 빠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사흘과 닷새를 보름으로, 달포로 늘려나가는데 있다. 눈치 보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정성이 하늘까지는 몰라도 사람은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셋째로 줏대 있는 개성이다. 선생은 『미쳐야 미친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미치는 마니아들의 치열함을 예찬한 바 있다. 온달 이야기는 운 좋은 출세담이 아니라 신의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해석을 비롯해 고쳐 읽고 따져 읽는 자세를 환기시킨다. 저자가 두드러지게 살피지는 않았지만 유교 텍스트에 내재된 지배층 옹호 및 차별의식 같은 극복해야할 인습들도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 것이다. 양명학이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진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 같은 면들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전도 결국 그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특히 “정신을 본받고 표현을 본받지 말라(師其意 不師其辭)”라는 한유의 문장론을 강조한다. 옛것을 배우되 옛것을 답습하지 않고 편승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권한다.


  이 세 가지 비책의 뿌리는 역시 개권유익(開卷有益)이다. 서유럽과 영미 선진 출판시장에서는 컴패니언(companion) 북이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출판시장이 고전의 요약정리나 이색적인 재해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면 컴패니언 북은 고전의 핵심 부분을 발췌해 옮기고 여기에 자세한 해석을 다는 식이다. 이처럼 원문을 무궁자재로 인용하기 위해서는 고전 번역이 절실하다. 다행히 지난 7월 한국고전번역원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문고전 번역사업을 국가가 끌어안음으로써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고전 국역사업을 수행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포실한 고전의 토대 위에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을 모색해보자. 민족주의로 가두기에는 그 품이 너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이 땅에서 곰삭은 옛글은 무슨 힘을 지닐까. 자본의 포섭에 맞설 재기 발랄한 언어는 무엇일까.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린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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