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함과 귀함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않는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벗어나지 않는다.
군자가 인을 떠나면 어디에서 이름을 이루겠는가? 군자는 밥을 먹는 사이에도 인은 어김이 없으니 황급한 순간에도 반드시 인을 행하고, 곤경에 처한 순간에도 반드시 인을 행한다.”
- 『論語』 里仁편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구절을 두고 해석이 갈린다. 크게 보면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대강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가난함과 천함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벗어날 수 없다면) 떠나지 않는다.


2) 가난함과 천함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닐지라도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2)의 해석이 전통적인 해석이지만 선뜻 의미가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1)의 해석도 음미할 만하다. 박기봉 선생님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을 제외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1)의 해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호기심이 생겨 도서관에서 논어 관련 주석서들을 이것저것 뒤적여봤다. 내가 이것저것 찾아본 번역들을 짜깁기하고 멋대로 편집한 것이라 드러내놓기 민망하지만 스쳐 가는 생각거리로 삼아주시길 바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올린다.


전통적인 해석인 2)의 핵심 논거로 작용했던 주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빈천이 아니지만 억지로 그 상황을 벗어나지 않는다, 즉 빈천을 편안히 여기는 태도라고 풀이했다. 군자가 부귀를 자세히 살피고 빈천을 편안히 여김을 이와 같이 한다고 보았다. 하안(何晏)과 형병(邢昺)은 “운수가 막힐 때와 태평할 때가 있으니 군자가 도를 실천할지라도 도리어 빈천한 경우가 있다. 이는 도로써 얻은 것은 아니다. 비록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억지로 벗어나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時有否泰 故君子履道而反貧賤 此則不以其道而得之 雖是人之所惡 不可違而去之)”라고 했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 호산 박문호가 不以其道得之 앞에 雖(비록)의 뜻이 있다고 본 것도 이와 상통한다.


다시 말해 정당하게 주어진 빈천이 아닐지라도 애써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은 착하고 어질게 살았는데 사회가 타락하고 정치가 어지러워서 군자가 빈천하게 되었다고 해도 구태여 그 빈천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당한 빈천이라면 태연하게 안주하라, 안빈낙도(安貧樂道)하라고 충고하는 글귀가 된다. 맹자가 대장부를 설명하며 “가난하고 천하더라도 자기의 뜻을 옮기지 않는다(貧賤不能移)”라고 했던 구절을 비롯해서 유가의 경전에서 곧잘 접하게 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나가는데 부귀나 빈천 따위의 외부적인 요소에 휘둘리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약용은 왕충(王充)과 견해를 같이 해 1)의 해석에 가깝게 풀이했다. “진실로 이와 같이 본다면 군자는 끝내 빈천을 버리는 날이 없을 것이다. 한번 빈천을 얻어 오직 이를 버리지 않는 것으로 법을 삼을 뿐, 도리인지 도리가 아닌지를 전혀 묻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다운 시중(時中)의 의(義)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 정당한 도리로 얻지 않았기에 그것을 버리지 않았을 따름이다”라며 하안의 주석을 반박했다. 결국 이러한 논리로 “빈천은 비록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에서 떠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즉 정약용의 관점은 2)와는 달리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 정당한 방법을 도모한다면 빈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좀 더 의역하자면 부귀처럼 바라는 것일 때는 온당하게 머무를 만한 가를 살피고, 빈천처럼 싫어하는 것일 때는 마땅하게 벗어날 방도를 궁리하라는 뜻이 될 듯싶다. 不以其道得之의 得之에서 去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 得去之로 해석했다. 得은 빈천에서 떠나는 방법을 얻는 것을 일컫는 셈이다. 양백준(楊佰峻)도 빈천은 사람들이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得은 부적절하고 不以其道得之의 得之를 去之로 바꾸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1)과 2)의 해석 모두 그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딱히 이것이 맞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한문 번역에서 정답을 내놓으라고 투정부린다면 우스운 일이다. 한쪽은 인간다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빈천에 억울해 하지말고 가야할 길을 가라고 주문하고, 다른 쪽에서는 빈천을 벗어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를 염두에 두라고 다독인다. 사실 서로 강조하는 바가 살짝 다를 뿐 결국 지향하는 바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자세한 논어 번역서를 읽다 보면 이렇게 해석상 이견이 있는 구절이 적잖음을 발견하게 당혹스러워진다. 전통적 주석과 별개의 견해가 오늘날 제시되기도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빈천은 탈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써 추구할 만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적극적으로 빈천을 추구하는 삶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본 셈이다. 요즘 회자되는 ‘간소한 삶’의 개념과 잇닿는다. 이렇게 보면 其道得之는 도로써 얻은 빈천이 되고 不以其道得之한 도로써 얻지 않은 빈천이 되어 떠나지 말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전통적 해석은 정당하지 못한 빈천, 부당한 빈천을 자기 잘못에 기인한 것뿐만 아니라 불의한 세상 때문에 뜻하지 않게 손해를 본 것도 감내해야 한다(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정의한다면, 신영복 선생님은 부당한 빈천은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한정해서 본다는 차이가 있다. 


전통적 해석의 경우에 군자는 빈천은 외물(外物)이기 때문에 거기에 너무 마음을 쏟지 말고 도를 추구하라, 인을 행하라는 식의 가르침이라면 신 선생님은 부당한 빈천이 불합리한 사회구조나 어질지 못한 사람의 간계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인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저질러서 얻게 된 것으로 본 듯하다. 신 선생님도 반드시 이렇게 봐야 한다고 역설하시기보다는 이건 어떠냐고 제안하시는 정도인 것 같다. 이 부분도 놓치지 말고 생각해보자고 화두를 던져주신 것으로 읽었다.


이남호 선생님은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서문에서 “내가 읽은 보르헤스 소설은 이미 보르헤스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쓴 소설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선생님께서는 문학평론가이시기 때문에 엉뚱한 해석마저 힘있게 들린다.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유명한 명제를 좀 패러디 해 권위 또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라는 아우라를 접하고서 거기에 얽매이지 않기가 힘들다. 주자의 광휘에 맞서길 꺼렸던 조선의 유학자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문학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의도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의 해석 속에 있다”라는 이 선생님의 말씀은 한문 고전을 읽을 때는 얼마만큼 적용될지 고심스럽다. 문학은 오독이 창조적 독서의 일환일 수 있지만, 아니 오독이라는 것이 성립하는지가 의심스럽다. 한문 고전을 한국어로 번역해 읽을 때 오역 시비가 있다면 그것을 풍요로운 해석이라고 치켜세울 수 있는 것인지, 다른 성질의 문제인지 헛갈린다.


가령 『논어』는 孔子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고 그 책을 읽어온 모든 사람들의 공동저술이다. 『논어』에 새로운 주석을 단 사람은 『논어』를 새로 쓴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가 쓴 『논어』는 빈약한 내용의 책이었지만, 현재 내가 읽는 『논어』는 매우 풍부한 내용을 지닌 책이 되었다.
- 이남호,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민음사, 1995, 144쪽


내 얕은 『논어』 읽기는 발설자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과연 공자와 제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네들이 살던 시대 배경은 무엇이고 어떤 해법을 내놓고 있느냐는 식으로만 접근했다. 텍스트에는 실체적 진실이 있어야 하고 그것의 근처를 더듬는 것이 학생의 본분인 것으로 믿어왔다. 교조적 지위를 누렸던 주희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부러 찾으려는 노력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발언록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실익도 없다. 어쩌면 고전의 해석도 실체적 진실이 있다기보다는 결국 합의되고 구성되는 것인지 모른다.


용기를 내서 고전을 집어들고 있다보면 내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하기 일쑤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색하기보다는 어느 어깨가 더 탐스러운지 물색하느라 눈알을 바지런히 굴렸던 것 같다. 그저 거인의 쩍 벌어진 어깨 위에 올라서 호가호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았나 스스로를 반성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할 때 知新은 배운 것을 자신의 삶에서 재해석하고 다른 일에도 확장시켜 가는 과정이다. 이런 세세한 구절 풀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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