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익구는 드디어 생애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 투표날 회사일이 있으신 아빠께서는 오전에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셨다. 사실 투표권 있는 가족 셋이서 오붓하게 투표장을 찾으면 좋았으련만 너무나 자연스레 따로 투표를 하고 말았다. 어차피 기표대에서 찍는 기호가 일치하지 않을 것이 자명했던 만큼 익구는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정치인과 정당을 찍으며 심리적 연대감을 누리는 것도 투표의 묘미인데, 슬프게도 익구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투표의 ‘투’자도 꺼내지 않고 세 가족은 각자의 투표를 했다. 오후에 엄마와 함께 투표를 하고 온 익구는 이미 공언한대로 3번, 3번을 찍고 돌아왔다. 이 자리를 빌어 그간 투표율 제고에 백방으로 애쓰신 무적의 투표부대들에게 한없는 존경을 표한다.^^


시험이 코앞인지 공부하는 시늉을 좀 해보려고 했지만, 개표방송을 기다리며 별의별 잡생각을 다했다. 열린우리당의 과반수는 가능할 것인가, 영남에서 얼마나 선전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컸다. 익구는 탄핵 세력들이 국회 과반수가 되는 광경은 정말 끔찍하다며 몸서리를 쳤다. 저들이 국민들의 추인을 받았다며 득의양양해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 그러던 중에 선거 막판 유시민 의원이 민주노동당 사표를 막아야한다고 해서 민노당 지지자들에게 갖은 구박을 받은 것이 떠올랐다.


사실 유 의원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당원으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상대에게 흘러가는 표심을 돌리려는 것은 선거판에서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이제 막 원내 진출의 꿈에 부풀어 희망의 새싹을 피우려는 진보정당에게 그런 주문을 하는 것은 다소 부적절했다. 유 의원의 발언이 부적절한 것은 논쟁을 벌일 실익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눈물을 막기 위해 남의 눈물을 강요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지만 유 의원의 호소가 민노당에 눈물씩이나 강요했던 것인가는 의문이다.


유 의원의 호소에 대해 김규항 선생이 ‘파시스트’ 짓거리라고 흥분하는 것은 동감하기 힘들다. 이런 식의 최대주의적 재단은 자신을 고립시킬 뿐이다. 세상 천지를 파시스트로 도배해놓고서 대체 어떻게 싸우려는 것인지 답답하다. 좌파 특유의 ‘그 놈이 그 놈’ 전략은 그들만의 인식일 따름이며, 그들의 그런 자세가 연대의 가능성을 소진시켜 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민노당이 지역구보다는 정당득표에서 재미를 볼 것임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고, 유 의원의 분석은 비교적 사실에 근거해서 보다 합리적으로 결과를 도출하자는 제안이었다. 유 의원의 발언은 상당한 적실성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간의 숙원을 풀려는 민노당 지지자에게 그런 주문을 하는 것은 별로 효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민노당 적극적 지지자들이 게거품을 물고 성토를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싶다.


익구의 이런 생각들이 이어지는 동안 드디어 6시 출구조사 결과가 공포되었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이상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이제서야 우리가 기호 1번을 상징하는 엄지손가락을 탈환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하지만 탄핵 폭거라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을 통해 겨우 얻어진 성과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익구는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개표 방송을 지켜보면서 우리당의 승리를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많은 국민들이 창당한지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직 채 정비되지 않은 정당에게 자신의 꿈을 투자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의사이기보다는, 그간 거대 야당에 발목 잡힌 헝클어진 국정 운영의 과오에 대해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역주의의 벽이 두터웠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익구의 고향인 대구를 위시한 영남의 지역주의는 이번에도 그 저력(?)을 선보였다. 호남의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철저히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유권자들은 또다시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주고 만다. 이제 앞으로 펼쳐질 영남의 정치적 낙후성 비난이나 경상도 꼴통이라는 수식어 등의 따가운 눈총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국민을 개무시한 탄핵 폭거조차 준엄히 심판하지 않고, 박정희 향수나 노인 폄하 발언 정도에 놀아난 영남 유권자들은 당분간 수모를 겪어야할지도 모른다. 거여를 견제하려 했다면 한나라당보다는 민노당을 지지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 유권자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익구는 한나라당을 극우세력 혹은 수구기득권 세력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실은 비록 생후 5개월만 살았지만 외할머니댁과 큰아버지댁 등이 있는 대구와의 인연은 소중하며, 함부로 손가락질하기 싫다는 모종의 방어의식이다)


우리당이 대구경북에서 전멸하고 영남 전체로 4석밖에 얻지 못한 것은 관성의 법칙이 얼마나 깨기 힘든 가를 보여준다. 우리당의 영남 지역 후보들이 진일보한 득표율을 보여준 것은 의미를 부여할만하지만, 아쉬움을 감출 수는 없다. 연이은 낙선 행렬에도 불구하고 영남 지역에 꾸준히 거물급 인사를 내보내고, 애정을 표시해 온 우리당이나 그 전의 舊 민주당, 국민회의 등의 성과다. 사실 영남 지역이 그간 그 쪽수 때문에 과분한 대접을 받은 감이 있다. 하지만 외로운 구애는 화답을 기다리며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호남 지역에 후보 내기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한나라당의 행태는 무책임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염치인가?^^;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원내 1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다시는 힘없다는 소리일랑 하지말고 열심히 일꾼 노릇 잘 하기를 바란다. 의석수가 제일 많기는 하지만 정당득표율은 한나라당과 고작 3%도 차이 나지 않는 만큼 좀 더 겸허하게 민생과 경제를 챙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당득표율에서 이 정도의 격차밖에 벌이지 못한 것을 보니, 막판 한나라당의 추격세가 맹렬하긴 했나 보다) 또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로 일대 돌풍을 일으킨 민주노동당의 선전도 축하한다. 이제야 제대로 된 경쟁자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 진보정치의 꿈을 마음껏 펼치시길 바란다. 그네들이 늘 비판하던 보수 정치판에 과연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지 기대된다. 기실 민노당도 노무현 대통령 인정하지 않기야 한나라당 무리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제 현실 정치에 들어온 만큼 극우와 보수를 구분할 줄 아는 섬세한 인식을 가지기 바란다. 이제 민노당도 비판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현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 말대로, 진보의 장점은 진보 자체에 있다.


이번 총선은 무엇보다도 제도의 힘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1인 2표제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민노당의 약진이 지금 수준보다 많이 줄었을 것이며, 비례대표 홀수번을 여성으로 공천하는 규정이 없었다면 여성 국회의원의 숫자는 여전히 크게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살맛나는 사회를 가기 위해 적절한 제도 개선이 얼마나 큰 효용을 발휘하는지를 만끽할 수 있는 선거였다. 이제 개혁세력이 의회권력을 쟁취한 이상 그간 미뤄져 왔던 각종 민생법안과 개혁법안들이 조속히 통과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제도의 혜택을 나눠줄 수 있는 17대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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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우범생 2004.04.22 00:51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개표방송 내내 아빠와 익구 사이에는 불안한 공기가 맴돌았다. 영남지역 개표실황을 보여주던 중 정적이 깨졌다.
    익구 왈 “당최 정형근, 김용갑, 김기춘 따위를 또 뽑아주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하고는...”
    아빠 왈 “그래도 자기 지역에서는 탄탄한 인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게지. 너가 좋아하는 것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익구 왈 “한나라당 후보들은 인간들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빠 왈 “저 사람들도 다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지. 세상 살아가는데 어떻게 내 주장만 할 수 있나,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지...”
    다행히 아빠와 의견일치를 본 부분이 있다. 김종필의 10선 실패는 잘된 일이라는 것이다.^^; 자칫 서먹해질뻔 했던 부자지간에 접점을 찾아준 김종필씨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