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모음

잡록 2003. 7. 16. 23:55 |
각박한 세상, 우리 가끔 시인이 되어 조금 어깨의 집을 덜어보자.
고등학교 시절 함부로 끄적였던 흔적들을 좀 내어보며 웃어보자꾸나.^^

[爽秋情景]


남도의 초가을 단아한 논에는
청량한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벼들이 있다.

쓰다듬으면 사뭇 서글퍼지는
100년 고목이 호젓이 터잡고 있다.

달콤한 고독에 헤어나지 못하는
스산한 부슬비가 후두둑 나리고 있다.

번뇌 버혀내는 싱그러운 이슬과
시름 떨궈내는 지긋한 고추내음이 있다.

무수한 상념속에 헤매이는
깨어있고자 흐릿한 마음하나 있다.

세지(世智) 모를 풋선비가 고달퍼
가락만 나지막히 읊조리고 있누나.
<2000/09/13>

[혬가림]


저녁놀 너볏할제 바람이 스쳐가면
빛바랜 조약돌이 속절없이 애와티네
도니니 무지근하여 봄꽃만 시드는구나

짙은밤 곰살가워 샘물을 길러내면
차디찬 곳어름이 얼러붙어 아뜩하네
무르니 어수룩하여 통나무만 부둥키구나

밝을녘 가물대니 구름을 기다리면
텅비운 곱구슬이 시름겨워 한들대네
너르니 머뭇거리며 생채기만 쓰리는구나

<너볏하다 - 아주 떳떳하고 의젓하다.
애와티다 - 분해하고 슬퍼하다
도닐다 - 가장자리를 빙빙 돌아다니다
무지근하다 - 1.뒤가 잘 안 나와서 기분이 무겁다.
                    2.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무엇에 눌린 듯 무겁다.
곰살갑다 - 겉으로 보기보다 성질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곳어름 - 고드름의 옛말
가물대다 - 1.(불빛 따위가)희미하여 자꾸 사라질 듯 말 듯하다.
                 2. (멀리 있는 물체가)희미하여 보일 듯 말 듯하다.
                 3.(정신이나 기억이)맑지 못하고 희미하다.
곱구슬 - "고운 구슬"의 준말로 억지로(?) 만든 말
한들대다 - 가볍게 이리저리 자꾸 흔들리다. 또는, 자꾸 흔들리게 하다.>
<2000/09/17>

[은행나무]


흔들린다.
떨어진다.
무심하게도.
으스러지고 나부끼는 너희들.

쓴 미소도 과분한.
차마 떨구어 내지 못하는 너희들.
내 마지막 작은 집착.

다가올 겨울의 추위보다
지난날 얘기들이 더욱 야위게.

눈물 몇 방울쯤 애써 외면할 뿐.
<2000/11/10>

[망각의 늪]


망각의 늪에서 나는 기도합니다.

부시도록 슬픈 날
한 줌의 재조차 불어버리고
백사장의 빛나는 모래처럼

여름밤의 흐느낌은
쓰린 고통과 씁쓸한 미소가 되어
저만치서 헤매이는데

망각의 늪에서 나는 혼미합니다.

시련은 아름답지만
행복은 또 다른 아픔이 되어
나를 짓누르는고

순간 입이 닫히고 귀가 막히더니
채 못 벗어낸
역겨운 고백을 되뇌이는데

망각의 늪에서 나는 절망합니다.

얽어매인 고독이
소야곡 읊조리는
서글픈 시름에 겨워

잿빛 하늘은
잦아든 눈물을 부르고
공허한 괴성을 지르는데

망각의 늪에서 나는 주저합니다.

부질없는 순수와
헛된 낭만에
에이는 마음이라도

먼발치에서 바라다가
설렘은 한 떨기 금잔화로
파랑새는 날개를 접으려
<2000/11/21>

[踏雪]


아직은 눈을 밟을 수 없습니다.
그저 타인의 발자욱을 조심스레 스쳐봅니다.
순백의 눈.
짓이겨져 누런빛이 되고
감장물로 어지러이 녹아도
조용히 두 눈뜨고 보아야만 합니다.
못내 그러다
설원으로 목도리 두르고 나아가
청음의 황홀경에 빠져들지니.

오늘도 웃으며 놓인 발자욱에 입을 맞춥니다.
<2001/01/18>

[공명선생을 좇다]


- 대륙의 구석에서 채 피지 못한 웅지여...

혹자는 선생의 공을 논하고
혹자는 선생의 과를 논할 제
나는 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을 본다.

신선의 꿈은 접어두고
세진에 뒤덮이고
잡인과 어울리며
피를 토해내셨지만
선생의 터럭 좇지 못함을 탄식하니.

질퍽한 형극의 길을
기꺼이 필마단기(匹馬單騎)함은
썩어빠진 서생의 가련한 업이로다!
<2001/01/12>

[세상 바라보기]


녹음방초에서 순백까지
산이 좋다.
팽개치는 내가 자랑스럽다.

시대는 빨리 변하고
사람은 빨리 따라잡고
시대는 빨리 도망가고
사람은 빨리 쫓아가는

끝없고 무서운 숨바꼭질!

변하지 않는 것 하나 없어도
변하기 싫은 것 넘쳐나는
변하는 것 하나 없어도
변해야 하는 것 넘쳐나는

끝없고 우스운 숨바꼭질!

그저 푸르른
바다가 좋다.
팽개치는 내가 부끄럽다.

그렇구나! 얼마만큼은 버리고 가는 길.
<2001/02/11>

[그대는]


그윽한 커피향을 즐기면서도
나를 위해 녹차 한 잔 끊여주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음반 사기를 좋아하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나를 위해 시집 한 권 나눠보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내가 두려워하는 영어를 남들보다 잘해서
내가 가진 한을 조금 풀어주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비 맞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나를 위해
흐린 날에는 넌지시 우산을 챙겨주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내가 흔들리고 어려워할 때는
그 어떤 말보다 따끔한 구박 한마디하고 마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더럽고 메마른 세상에 부대끼면서도
맑은 눈물 떨굴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
그걸 할 때면 행복한 미소짓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내가 이상을 논하고 비판할 꺼리를 찾을 때
단지 사랑만으로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2001/03/11>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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