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강연회 후기

사회 2003. 7. 20. 01:46 |
2003년 5월14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부터 고려대 경영신관 학우강당에서 개혁당 유시민 의원의 [통일독일과 북한, 정치개혁]이라는 주제의 강연회가 열렸다. KUBS 방송제 표까지 구해놓은 것을 포기하고 가게 된 강연회는 무척이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유시민씨의 강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작년 7월에 교보 교양 강좌에서 [우리 시대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강연회가 있었던 것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홀홀 단신으로 참석했다. 그 강연회에서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대변신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개월 뒤에 이렇게 주목받는 정치 신인으로 성장할 것까지는 예상할 수 없었겠지만.^^;


작년 7월의 강연이나 이번 강연이나 내가 핵심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이다. 주제가 다르고, 상황이 달라도 그의 강연에는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본능적 경계가 깔려있는 듯하다.


이번 강연에서는 북한의 한글전용정책과 한자를 모르고서는 알기 힘들 정도의 한자어가 공존하는 북한 말글의 모순점에서 시작되었다. 북한의 어문정책이 성서 원리주의자와 비슷한 교조주의이며, 경직성의 증거라는 지적은 북한 사회의 참담한 모순 덩어리의 근원을 정확히 집어 주고 있었다. 자연스레 독일 통일 이야기로 넘어간 그는, 독일 통일 과정을 통화 통합, 기업 통합, 사회 통합의 단계로 이행된 것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특히 서독의 사회복지제도가 동독에 그대로 이식된 것을 높이 평가했고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북한에 그대로 이식해도 괜찮겠느냐는 부끄러운 질문을 던졌다.


다음으로 북한 전체주의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적 시스템을 외부적 강압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독일의 브란트 총리, 콜 총리로 여야 합의로 꾸준히 이어져온 독일의 통일 정책을 높게 평가한다. 특히 이미 한 사회를 정상적으로 유지할 기능을 상실한 북한과는 어쩔 수 없이 흡수 통일의 형태가 될 것이라는 발언은 조금 위험스럽기도 했지만 현실과 가장 부합하는 전망이라고 생각되었다. 자연스레 정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불관용이 특징이다” “북한 문제가 나오면 그 불관용이 폭발한다” 등으로 지금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그의 자유주의 신념을 풀어놓는다.


뭐 그의 자유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작년의 강연회나 그의 숱한 글에서 너무나 많이 듣고 보아와서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이런 당연한 바람이 아직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는 한국 사회의 초상이 건재하기에 늘 새롭고 반가운 이야기다. 우리에게 가장 긴급히 요구되는 것이 ‘개인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라는 그의 화두는 익구가 그대로 수입해서 재가공하고 있다.^^; 다수파의 자유는 저절로 보장되지만 소수파의 자유는 의지를 가지고 보장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내가 소수파가 될 경우 소수파로서의 자유를 꾀하기보다는, 다수파로의 편입을 더욱 궁리하는 나에 대한 반성이었으리라.


남북 통일의 기초는 남한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관용하고 어울리는 법을 배워나가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으로 그의 강연은 마치고 질의 응답시간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최근 관심사의 신당 논란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선거 때마다 나오는 신당들과 뭐가 다르냐는 것에서부터 다양한 신당 관련한 질문들이 있었다. 특히나 이번 ‘벼락치기’를 어여삐 봐달라는 말이 재미났다. 하긴 언제나 미리 공부해두겠다고 하지만, 막상 벼락치기하기 일쑤인 우리네 인생을 보아도 너무 나무랄 일은 아닌 것 같다.^^


불가의 자리이타(自利利他) 개념도 잠시 나왔다. 이는 스스로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며,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뭐 아담 스미스가 멋들어진 비유를 들어 설명했던 그 개념과도 일맥상통하겠다. 거의 대부분의 회사원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승진하기 위해서, 더 좋은 보수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할 수 있겠지만, 그 활동으로 인해서 한국경제가 풍요로워진다면, 자신이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될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한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사회... 익구가 제시하는 이상향인 ‘보통선(普通善)의 시대’와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보통선’은 전통적 의미의 착한 행동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것으로 성립되는 소극적 의미의 선행위를 말하는 익구가 멋대로 만들어낸 개념...)


끝으로 민주노동당 당원 분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지난해에 이미 이런저런 학생사회의 회의에서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해온 터라 이제는 자연스러웠지만, 이러한 지적들 앞에서는 늘 떨리는 마음이다.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며, 정리해고 증가와 국가보안법 사범 증가 등의 이야기가 반복되었고, 유시민씨는 격앙된 목소리도 답변했다. “김대중씨에 대해서 많은 기대를 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비슷한 문장으로 발언을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조금 부연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진보 정당 분들도 분명 이회창씨보다는 김대중씨에게 기대를 더 했을 테니까. 물론 유시민씨가 원하는 만큼의 기대는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굳이 매섭게 몰아붙이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 여기저기서 보여지는 진보 정당과 민주당, 혹은 개혁당과의 알력은 나같은 새가슴에게는 영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무 과도하게 싸우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김대중씨는 국민이 기대했던 만큼의 일을 하고 떠났다는 유시민씨의 견해에 동의한다. 김종필과 손을 잡아서 겨우 40%의 지지로 대통령을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제 제발 김대중 씹기로 연명하는 정치가 아닌, 새로운 기반에서의 정치가 되기를 유시민씨나 나나 한결같은 바람이다.


뭐 이번 강연을 딴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임했다. 뭔가 내 이 좌충우돌 인생의 좌표를 마련해볼까 하는 흑심도 품었다. 얼치기 경영학도로 이래저래 찌들다보니 적당히 물신주의에 물들어서 ‘개인의 자유’ 다음으로 ‘물질적 복지’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건전한 좌파나 우파나 개인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에서 동일하므로 결국 물질적 복지 추구는 나의 제일의 이념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좌파라고 선언한 적도 없지만, 우파라고도 선언한 적도 없다. 나름대로 ‘정치적 인간’(직업적이고 전문적인 ‘정치인’이 아닌 사회 의사결정과정으로서의 정치의 다양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자처하는 나로서는 아직도 눈치보기만 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대충 정리를 해도 될 것 같다. 익구는 극우파를 혐오해서 한국 사회에 팽배한 극우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데 코딱지만큼 일조하고 싶은, ‘날라리 우파’다. (김규항식으로 말하자면 낙제를 겨우 면한 ‘D급 우파’라고나 할까.^^;) 유시민씨가 한국사회에서는 리버럴을 외쳐도 진보가 된다고 했듯이, 익구도 날라리 우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옹호 정도를 역설해도 분명 불온하게 보거나, 극단적으로 보는 눈초리들이 많을 것이다. 유시민씨가 자신의 자유주의가 ‘고전적 자유주의’와 비슷하다고 했는데,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해 좀 더 배우고 나와도 얼마나 유사한지 찾아봐야겠다.


살아오며 아웃사이더, 소수파, 비주류에 많이 끼었던 터라 나의 이번 ‘날라리 우파’ 선언은 혹시라도 계급 의식에 반하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해먹을 거리가 많은 ‘범생 우파’의 길을 가지 않고 날라리 우파를 선언하는 것은, 그나마 자본주의 세상의 지나친 물신주의에 대한 경계이며, 소수파 경험에서 비롯된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연대의식의 발로이다. 물론 그 무엇보다도 익구의 심약함이 가장 큰 원인이 되겠다만은...^^;


이번 유시민씨의 강연회는 무척 유익했고 아울러 개인적인 결심을 선언하게 해줘서 고맙다.^^ 아무쪼록 새로운 정치 개혁의 흐름에서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기원하는 바이다. 개혁당 당원이 될까도 고심했지만, 역시 아직은 신당 논의를 지켜보는 수준에서 만족할란다. 뭔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익구의 지난 삽질의 역사상 아직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저울질 할 생각이다. 아악 이 옹졸한 눈치보기란...^^; 그래도 “생각은 힘이 세다”


문득 고종석과 칼 포퍼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6(^.^)9 (2003/05/16)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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