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다. 설령 꾸더라도 별로 의미를 안 두기 때문에 깨어나서 금세 잊어버린다. 프로이트 같은 분이 들으면 무지 섭섭해하시겠지만 말이다.^^; 주말 아침에 늦잠을 자다가 깨어나서도 생생한 꿈을 꿔서 또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둔다. 꿈속에서의 나는 1인 2역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 번은 3인칭 관찰자 시점, 또 한 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


장면#1
뜬금없이 전투가 한창이다. 어쩌면 꿈도 내 취향대로 각색되었는지 피와 살이 튀기기보다는 그저 칼과 창, 방패 등이 내는 쇳소리만 요란한 것 같다. 만신창이가 된 한 장수가 병사 몇 명과 함께 분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으레 이 대목에서 나오는 장면이지만 "중과부적이오니 어서 피하시옵소서 장군!"이라는 병사의 하소연에 장수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이윽고 장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어서 폐하를 보위해야겠다" 그래봤자 그 말을 따를 부하는 고작 대여섯에 지나지 않는다. 장수는 급히 몸을 피해 궁궐로 향한다. 하지만 몇 마리는 있을 법한 말은 보이지 않고 죄다 보병들만이 흙먼지 날리면서 싸우고 있다. 장수나 병사들도 그냥 냅다 뛰어서 도망하는 수밖에. 말뿐만 아니라 궁수들도 하나 없어서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여하간 비탈길에서 한번 미끄러져 주고, 개천을 힘겹게 건넌다. 이 초라한 몰골의 일행을 추격하는 무리가 있으니 어이없게도 절대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뒤꽁무니만 열심히 좇아오고 있다. 도망가는 쪽이 지쳐서 슬슬 걸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덕분에 어느 주택에 무사히 몸을 피한다. 도망가는 장면의 연속이었는데 힘들다거나 급박한 것을 못 느꼈으니 이건 3인칭 관찰자 시점인 듯 싶다.^^;


장면#2
장수와 병사 두 명(최종적으로 탈출 성공한 건 둘 뿐인 모양이다)이 도착한 곳은 으리으리한 고대광실(高臺廣室)이었다. 그러나 정식 궁궐은 아니고 행궁(行宮) 내지 임시 거처인 모양이다. 마치 창덕궁 내에 사대부들의 집을 본떠 만들었다는 연경당(演慶堂)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모든 건물이 단청이 없는 백골집이었다. 아마도 만월대의 옛풍경을 상상하기 힘들고, 고려 시대의 단청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보니 꿈속에서도 제대로 재현이 안 된 것 같다. 이쯤 되니 꿈의 배경이 고려말, 그 중에서도 최후가 임박한 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 밖에는 수천의 군사가 도열해있다. 행궁 안에서는 불안한 표정의 왕과 신료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러던 참에 문밖에서 서신이 날아든다. 한자로 되어 있어 잘 모르겠지만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처럼 얼른 항복하면 안위는 보장한다는 내용인 것 같다. 왕은 내게 답서를 준비하게 된다. 나는 비분강개하는 마음으로 "웃기지 마라, 너희들 이러는 거 아니다"라는 식의 내용을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우습게도 이 대목에서 마치 사극에서의 내레이션처럼 이 문장을 후세사람들이 절의의 상징으로 기린다는 말이 깔린다.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쯤 되는 양 말이다.^^; 큰소리는 뻥뻥 쳐놨지만 행궁 내의 군사는 일이백명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최대한 기억해낸 꿈의 기억들이다. 나름대로 생생하게 꿈을 꿨지만 돼지는커녕 동물은 하나도 안나왔으니 그야말로 별 신통치 않은 꿈일 듯하다. 고려왕국에 대한 애착이 꿈으로 표현되었나보다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개성 시범관광이 진행 중인데 그 여파로 꿈속에서나마 개성 땅을 밟고 싶었나보다.^^


초등학교 3학년 가을 어느 날 읽었던 정몽주/성삼문 위인전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꿨다. 이 얄팍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충의와 절개의 화신인 두 사람의 삶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으니 말이다. 내가 책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계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은 선생도 선생이지만 시호조차 못 받고 원통하게 간 우왕과 창왕, 결국 고려의 황혼을 장식해야했던 공양왕에게 늘 연민의 정이 솟아난다. 망하기 전에 지렁이도 꿈틀해본다는 심정으로 칼도 휘둘러보고, 문장으로 농락을 해보는 광경이 그려본 것이 아닐까 싶다.


여담이지만 고려시대 사가들이 썼던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도 하고, 『고려사』를 편찬한 후 정사를 편찬한 후에 소각하는 관례에 따라 소각되었다고도 한다(엄청난 분량의 사료를 소각했다니 조선왕조실록의 운영과 비교해서 다소 의아스럽다). 삼국시대의 역사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의해서 간신히 전해지는 것처럼 고려시대의 역사도 대부분 조선시대 사가들의 입맛에 재단되고 있는 셈이다. 여하간 당대에 기록된 1차 사료가 없다는 것은 고려사의 비운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2차 사료가 고려사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하기야 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위나라 조씨와 진나라 사마씨를 띄웠던 것처럼 패장은 말이 없고, 승자는 골라먹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잠에서 깨서 문득 야은 길재의 시조 한 수가 떠올랐다. 정몽주 위인전의 여파로 원척석의 시조와 더불어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외우는 시조 중에 하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읊으면서 고려청자와 고려불화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가끔 이렇게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좋아라 하는 것도 삶의 윤활유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종종 재미난 꿈들을 꿔보고 싶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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