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정기 고연전은 1승 4패로 아쉽게 마무리되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한마당이었다. 고대인에게는 한해에 세 번 큰 명절이 있는 모양이다. 설날, 한가위 그리고 고연전! 기왕이면 승리가 좋겠지만 경기 승리로 인한 잠깐의 기쁨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자아실현 여부로 승부를 걸 수 있기를. 어느 자리에 있든 없어서는 안 될 소금 같은 존재들이 된다면 그것만큼 유쾌한 일도 없으리라.


둘째 날 럭비와 축구가 연거푸 지기는 했지만 마지막 응원은 여전히 흥겨웠다. 경기가 마치자 공교롭게도 비가 조금 내렸는데 나는 이건 고대의 눈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1시간 남짓 내리던 소나기를 거의 온몸으로 받아냈는데 비 맞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로서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서울외고 선배님이신 박수일 응원단장님 바로 아래에 있었던지라 열심히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정말 고생하셨어요.^^


올해는 연대 주최라 뒤풀이가 신촌에서 있었다. 어디로 갈지 고심하다가 선배님들과 동기들이 있는 안암골로 향했다. 처음 뵙는 국주형, 영빈형과도 인사 나누고 반가운 형, 누나, 동기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그 단란함이 너무 지나쳤던 탓인지 너무 술을 달려버렸다. 나름대로 패배의 쓴잔인데도 완급조절이란 찾을 길이 없었다.^^; 칠칠맞지 못하게 지갑과 디카가 든 가방을 몽땅 잊어먹고 집만 겨우 찾아 돌아온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의 어이없음이란...^^;


나는 술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아도 술자리는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려고 한다. 대개는 "쉬어가며 오래가는 음주(혹은 릴렉스 롱런 음주)"를 지향하지만 가끔은 사양하지 못할 때가 있고 기억이 지워질 때도 있다. 지워진 기억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만 지금까지 몇 번의 블랙아웃(blackout, 필름 끊김^^;)에서 특별히 민폐를 끼칠만한 주사는 없었던 것 같아 일단 다행이다. 이번에도 특별한 민폐는 없었지만 내 자신에게 엄청난 폐를 끼치고 말았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은연한 나는 이럴 때 의외의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그래도 휴대전화는 잘 챙겨왔다고 위안을 삼고, 신분증이 싹 사라졌지만 집에 옛 학생증이 남아 있어서 도서관 출입에는 지장 없겠다고 좋아하는 내 자신을 보니 이럴 때는 꽤 쓸만한 듯 하다. 마신 술에 비해서 숙취가 거의 없다며 흡족해하고, 집에는 잘 찾아왔다고 용하다는 아버지의 반응까지 보태서 이 침통한 사태를 잘 무마하는 중이다.^^;


너무 자기위안이 심한 것 같아 조금 우울하게 손해계산을 해봤다.^^; 문화유산 답사하면서 기념사진 찍는 것이 낙인데 당분간 그게 힘들어질 듯 하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가방 안에 넣어뒀던 내 학생회장 퇴임 기념 고대경영 배지도 다 못 나눠주고 잃어버려서 섭섭하다. 지갑 안에 있던 문화상품권 두 장으로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나 더 충동구매할 걸이라는 생각도 든다. 현금은 뒤풀이하러 신촌 간 후배들 술값에 보탰으면 더 좋았을 것을.


책탐으로 미루어 볼 때 내게도 적잖은 물욕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쥐고 있던 것들에 손을 떠나갈 때는 그저 인연이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에서 주인공 꼬마가 돈을 잃어버린 뒤 "내 돈을 주운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곤고로운 사건을 겪을 때라도 이런 정도의 넉넉함을 갖추고 싶다.


당분간 불편한 생활이 되겠지만 자기 소유에 대한 책임감도 좀 키우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얽매이지도 않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 아울러 술 핑계대지 말고 내 부족한 자제력을 수양해야겠다. 비록 지갑과 디카를 잃어먹었지만 술은 끊지 않겠다. 늘 자제하면서도 할 건 다 하는 오묘한 균형을 찾아봐야겠다. 피하기보다는 맞서는 데서 얻는 자유의 달콤함을 만끽하려는 쓸데없는 고집을 좀 더 부려볼 셈이다.


무료한 일상에 지치고 허망한 인생에 투덜거리다가 문득 고연전을 추억하는 날이 올 때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힘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간 잘 보지 못했던 지인들도 많이 만났던 살가움과 정겨움이 가득한 고연전이었다. 끝으로 2005 정기 고연전을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즐거웠어요.^^ - [憂弱]


추신 - 잃어버린 물건들은 택시 안에다 두고 내리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하고 있다. 택시에서의 유실물을 한 곳에 보관하는 택시 유실물 센터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하철과는 달리 택시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란 무척 힘들다. 택시기사의 선의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유실물 주인 찾아주는 수고로움을 덜어 준다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아무튼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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