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김연수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마음산책, 2004)에 나오는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에서 따왔음을 밝힌다>


지난 삼일절에 운전할 줄 아는 친구를 졸라 부여와 공주를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터, 부여박물관, 궁남지, 무령왕릉을 둘러보며 신들린 듯 사진도 찍고 파안대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004년 10월 1일 종묘 답사부터 시작된 목조건축에 대한 관심이 고구려 고분벽화나 고려청자, 불화, 불상, 석탑 같은 고미술 전반으로 확장되더니 이제 문화산업이나 문화정책까지 눈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부여박물관 앞길에 깔린 백제 무늬전돌(文塼)과 무령왕릉 들머리에 세운 벽돌무덤을 본 뜬 홍예문에 왜 이리 설레었던지.


얼마 전 찾았던 서울역사박물관 삼국유사 특별전에서도 무언가 아쉬움을 느끼며 나라면 어떻게 꾸렸을까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저작권법 개정 논란이 일었을 때 고작 이렇게 밖에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지 아쉬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문화산업이나 문화정책과 관련한 일을 밥벌이로 삼아보면 어떨까 진지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행정고시를 봐서 문화관광부쪽에서 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제법 구체적인 진로를 놓고 장고에 빠졌다. 번듯한 미래설계 없이 대학 4학년을 맞이한 나로서는 이제 어떤 식으로는 결단을 강요받을 처지에 놓여 있다.


“선거와 관련한 고민은 공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요약된다. 사회활동에서 내가 드러냈던 철학·성격·언행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게 흔들리면 당락 여부와 상관없이 패배라고 본다. 아름답지 못한 패배다. 그러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더라도 아름다운 패배일 수 있다. 삶이란 승리보다는 패배의 축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빼앗거나 더럽히는 방식으로는 아름다운 승리가 될 수 없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한겨레21과 나눈 인터뷰에서 위와 같은 구절을 읽고 내 심정도 그와 같다며 설레발 쳤다. 나의 경우 고시와 관련한 고민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요약된다. 나는 미래의 안락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결연히 내던질 자신이 없다. 나는 끊임없이 세속에 부대끼며 글 읽고 쓰는 걸로 위안을 삼고, 지인들과의 환담에 영감을 얻고 주말에 한 잠 늘어지게 자는 것을 좋아한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내 필생의 보배가 빛을 바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나의 호사스러운 사치는 곧 현실의 무게 앞에 짓눌릴 공산이 크다. 프리랜서로 유유자적할 깜냥이 되지 않는 나는 시험 공부, 대학원 진학, 취업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어떤 일을 하던 내 역량의 보잘것없음에 지치고 실망하지 않도록 절차탁마해야 함은 자명하다. 내가 궁리한 것을 바탕으로 내가 믿고 좋아하는 것을 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승패를 떠나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남의 입신을 질시하고, 남의 양명에 군침만 흘리지 말고 나란 녀석을 온전히 드러내놓고 견주어야겠다.


『시경(詩經)』에 靡不有初 鮮克有終(미불유초 선극유종)이란 말이 있다. 시작하기는 쉽지만 끝까지 잘 마무리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시작이야 누구나 곧잘 하지만 끝맺음을 잘 하는 사람은 드물다. 초심을 버리고픈 아찔한 유혹은 늘 내밀하고 지근한 곳에서 맴돈다. 나는 변화무쌍한 삶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지라 일단 한번 정해지면 큰 궤도 수정 없이 밀고 나가고 싶다. 신중하게 결심하고 우직하게 밀어 붙이는 전략이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두려움이 설렘을 죄다 잠식하기 전에 길을 나서야 한다. 누리기에 견디고, 견디면서도 누릴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만약 공부를 시작한다면 우선 세 분의 사표(師表)를 두고 차근하게 해나가고 싶다. 삼국사기에서 빠졌거나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을 삼국유사에 수록해 우리 역사를 자주적으로 해석해 문화의 독창성을 일깨워준 일연 스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동법 시행에 일생을 걸어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려 한 김육 선생, 우리나라가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했던 김구 선생이 그 분들이다.


아름다운 문화의 향기에 취하겠다는 목표를 위해 무한경쟁의 황량함을 감내하는 이 역설 앞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반나절 정도는 책 읽고 잡글 쓰는 짬을 내고, 한달에 하루 정도는 부담 없이 놀러 다닐 자신이 생길 때 스스럼없이 이 귀하디 귀한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 듯싶다. 서약보다 질긴 편애만이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줄 것이다. 조만간에 경기도 여주의 세종대왕릉(英陵)을 찾아가 흐트러지고 이지러진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끝으로 외쳐보자. 靡不有初 鮮克有終! - [小鮮]


추신 - 靡不有初 鮮克有終에서 靡 자가 생소한데 靡(쓰러질 미)는 『시경』에서 '無'로 해석되는 조사라고 한다. 여하간 이 구절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만날 수 있다. 문병 온 문무대왕에게 임종을 앞둔 김유신이 남긴 말 중의 일부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을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못하는 일이 없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臣觀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 累世功績, 一朝墮廢, 甚可痛也. 伏願: 殿下, 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疏遠小人, 親近君子, 使朝廷和於上, 民物安於下, 禍亂不作, 基業無窮, 則臣死且無憾
- 三國史記卷第四十三 列傳第三 金庾信(下)<삼국사기 권 제43 열전 제3 김유신(하)>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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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小鮮 2006.03.09 03:2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조만간 내릴 결심이 무엇이든 간에 내 생활이 지금보다 간소해져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겠지. 몸과 마음이 노곤해서 잠깐 졸 때면 종종 내가 깨어났다고 착각할 때가 있어. 나는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직도 쿨쿨 자고 있는 것이지. 아마도 가위눌린 것처럼 머리는 깨어났는데 몸은 좀 더 잠을 청하고 싶다는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지금 나는 미몽에서 깨어나는 게 마뜩찮아서 미몽의 안락을 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몽 속에 있으면서도 미몽을 깨어나고 있다는 착각만 안고 말이지. 이 두터운 각질에 굴하지 않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