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의 정치 참여라는 주제로 원고 청탁을 받아 쓴 글이다. 원론적인 주제라 재미난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 적잖이 고생했다. 대학생에 한정하지 않고 주고객(?)을 20대 청년으로 삼아 투표를 독려하는 글을 써봤다)


<한 표의 권리가 청춘을 더 빛나게 한다>

젊은이들이 보수화 되었다고 흥에 겨워 말하는 이들이 있다. 대학가의 보수화 물결을 집중 조명하는 기사들이 어지럽다. 그러나 민주화가 성숙해 가는 단계에서 대학생들이 진보의 짐을 과도하게 질 필요는 없다. 예전처럼 공부를 잠시 미뤄두고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를 고심해야 하는 시대는 아니다. 배우기 바쁜 20대 청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데 그걸 보수라고 치부할 까닭도 없다. 조사결과에 따라 때로는 한나라당 지지도가 높게 나오기도 하지만, 민주노동당 지지도도 평균보다 높게 나오는 만큼 보수화의 표지를 드리우는 건 다소 성급하다. 다만 우려할 것은 과도한 정치적 무관심이다.


젊은이들의 투표율을 날로 떨어진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96년 15대 총선 20대 투표율이 44.3%(전체 투표율 63.9%)이던 것이 2000년 16대 총선 20대 투표율은 36.8%(전체 투표율 57.2%)로 하락했고, 2004년 17대 총선 20대 투표율은 37.1%(전체 투표율 60.6%)을 보였다. 특히 탄핵 정국으로 투표 열기가 놓았던 지난 총선에서 20대들은 0.3% 포인트 상승한 투표율을 기록했다. 30대가 6.3% 포인트, 40대가 2% 포인트, 50대가 5% 포인트가 상승한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다. 20대 젊은이들이 17대 총선의 전체 투표율이 16대 총선 전체 투표율보다 3.4% 포인트 상승하는 것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투표부대를 위시한 온라인상의 뜨거움도 젊은이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비교적 투표율이 높은 대선이라고 해서 상황이 별반 나을 게 없다. 97년 15대 대선 20대 투표율이 68.2%(전체 투표율 80.7%)이던 것이 2002년 16대 대선 20대 투표율은 56.5%(전체 투표율 70.8%)을 기록했다.


2002년 지방선거 20대 투표율은 31.2%(전체 평균 48.9%)였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2006년 5.31 지방선거 20대 투표율은 30%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2005년 10.26 재선거에서는 20대의 투표율은 21%(전체 투표율40.4%)를 기록했다. 한나라당이 완승했던 재선거에서 60대 이상의 투표율은 61.2%에 달해 연령대별 투표율 차이는 최대 3배까지 벌어졌다. 특히 선거법 개정으로 처음 투표에 참여한 만19세의 투표율도 21.4%에 그쳐 그 험난했던 입법과정을 무참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젊은 세대들의 투표장 외면은 적잖이 심각한 수준이다.


물론 정치적 무관심과 선거의 기권은 개인 선택의 영역이다. 선출 투표는 참여한 사람들의 의사의 총합이 반영되면 그걸로 유의미하다. 기권의 자유 혹은 선거 무관심의 권리는 선출된 대표자에게 승복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 의회민주주의다. 있다. 세계 30여 나라가 투표를 의무로 규정해 불참에 대한 공적 제재를 가한다고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나라가 의무 투표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권리의 행사는 권리를 누릴 자유와 더불어 그것을 행사하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하기에 의무 투표제를 섣불리 지지하기 힘들다. 오히려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억지로 투표를 할 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투표장을 향할 때 그 행위는 공동체의 의사를 제대로 모으지 못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젊은 세대들의 투표 불참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다. 그러나 제 정치적 지향이 비교적 선명하면서도 단지 귀차니즘 때문에 기권을 하는 경우까지 보듬기는 힘들다. 정치적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나 옅은 사람이나 똑같이 한 표씩 가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 유신독재나 전두환 일당 시절과는 달리 한나라당은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결과를 통해 존속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아무리 밉살맞은 짓거리를 할 때 쉽사리 손가락질하기 힘든 까닭은 그네들을 찍은 국민들의 의사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을 부흥시킨 것이 국민들이듯이 그들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것도 국민들의 몫이다. 이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세상에서 그나마 평등을 실현하는 1인 1표제를 우리 젊은이들이 적극 활용해야하지 않을까.


경영학에서 대리인문제(agency problem)라는 개념이 있다. 기업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항상 일치될 수 없기에, 주주와 경영자, 주주와 채권자 등의 관계에서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일컫는다. 대리인문제와 관련하여 발생되는 대리인비용(agency cost)은 세 가지로 분류한다. 감시비용(monitoring cost)은 대리인의 행위를 직접 감시, 감독하는 데 드는 비용뿐만 아니라 일의 성과에 대한 평가비용, 합리적 보상체계와 유인체계의 도입비용, 기회주의적 행위의 제재비용 등을 말한다. 확증비용(bonding cost)은 대리인이 스스로 기회주의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물적, 인적 보증을 하는 비용을 말한다. 잔여손실(residual cost)은 감시비용과 확증비용 지출에도 불구하고, 대리인의 의사결정이 주인의 최적의사결정과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주인 부의 감소를 말한다. 감독과 보증노력을 하고 나서도 남는 비효율과 낭비인 셈이다.


보통의 합리적 인간이라면 대리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감시비용과 확증비용을 지출하려고 노력하게 마련이지만 말 그대로 비용이 들기 때문에 대리인의 기회주의적 행위를 원천봉쇄 하기는 힘들다. 결국 일정 정도의 잔여손실은 불가피한데 이를 정치 문제에 대입시켜보자.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이 일정 기간 동안 위임해준 것이다. 주인인 국민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정치권력은 감시비용과 확증비용을 현격히 높이다가 궁극적으로는 잔여손실을 증대시킨다. 사람마다 잔여손실을 견디는 정도는 다르겠지만 대리인들의 삽질이 계속되면 될수록 대리인들을 퇴출시키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다른 대리인을 내세우려는 유인이 커진다. 자신의 잔여손실 내성(耐性)을 넘어섰을 때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강력한 수단은 역시 선거권의 행사다.


루소는 18세기 영국 대의민주주의의 허상을 비꼬며 "영국의 인민들은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롭고 선거가 끝난 직후에는 다시 노예로 돌아가 버린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선거 기간에만 최고 주권자 대접을 받고, 투표날에만 주인의 권한을 행사하는 처지는 크게 나아진 바 없다. 한번 생각해보자. 현행 선거제도의 틀을 유지하고 앞으로 백 살까지 80년을 더 산다고 하더라도 대선 16번, 총선 20번, 지방선거 20번을 할 수 있다. 천수(天壽)를 누린다고 해서 백 살까지 장담할 수는 없으니 우리 생애 전국적 투표는 50번 정도다. 권력도 유한(有限)하지만 우리의 주인 노릇은 그보다 더 유한하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가 한껏 자유로운 시대에 이 빛나는 청춘의 일부를 구접스러운 세상을 세련되게 욕하고, 불의를 자행하는 정치꾼들을 단죄하는 데 쓸 수는 없을까. 청년들의 호기로운 문제의식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두려움에 잠식되게 놔두지는 말자. 나보다 못한 놈들이 나를 다스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면 김종필 대신 노회찬을 의회로 들여보냈듯이 우리 삶을 한 뼘이라도 더 윤택하게 만들 인물들을 좀 더 많이 의회로 보내자. 우리에게 주어진 한 표의 권리를 애호하자.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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