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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2005.06.09 현릉(顯陵)에서 목이 메다

연개소문 그리고 평화

문화 2007. 7. 15. 04:52 |

1. 연개소문 평가의 어려움
얼마 전 종영된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은 연개소문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했다. 비록 단면적 시각을 많이 노출하기는 했지만 MBC 드라마 <신돈>에 이어 문제적 인물을 재인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무척 엇갈린다. 민족의 자주성을 드높인 영웅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사사로운 권력욕으로 망국을 가져다 온 독재자라는 견해가 버성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그가 한국사에서 품었던 이상이 빼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존재 자체가 드물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연개소문의 사망 시기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는데 665년에서 666년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연개소문은 수나라군보다 더 강성해진 당나라군을 상대로 노대국(老大國)의 자존심을 지켰다. 고구려의 패망에 당시 집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책임이 적잖다는 판단은 적절하지만, 을지문덕이나 안시성주 양만춘에게 쏟아지는 경애에 견주어 연개소문은 상대적으로 폄하된 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잔인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그려져 있지만 그 편찬자들이 사용했던 거의 모든 사료는 『자치통감』,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측 자료였다. 연개소문에 번번이 패한 중국인들의 증오에 찬 묘사를 그대로 끌어다 쓴 건 김부식을 위시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나태다. 설령 자료가 부족해 불가항력적이라고 해도 비판적 검토가 너무 부족하다. 다만 김부식도 그게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해 나왔으나 두려워함이 그와 같았는데 『신당서』, 『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이 일을 말하지 않으니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해 부끄러운 일을 감추기 위함이 아닌가?(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通鑑, 不言者, 豈非爲國諱之者乎)”라고 논하며 중국측 기록을 의심한다. 그러나 김부식은 “소문은 일신을 보전해 집에서 죽었으니 요행으로 모면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라며 연개소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드러낸다. 『삼국유사』는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진흥시킨 것에 대한 비판이 도드라지게 서술되기도 했다.


『동국통감』에서 권근은 더 엄격한 유교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김부식이 송나라 왕안석은 연개소문이 비상한 인물이었다는 평을 인용한 것을 비판한다. 난적의 괴수를 비상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천하고금에 난신적자가 누구인들 비상인(非常人)이 아니겠습니까(天下古今亂臣賊子孰非非常之人乎)”라며 언짢아한다. 조선 후기까지 대부분의 사서에서 연개소문은 강상(綱常)의 도리를 어지럽힌 독재자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고 중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원죄는 충성과 사대의 입장에서 용납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호되게 겪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고구려의 강대한 군사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기 시작함으로써 연개소문에 대한 호의적 반응도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강성함만 믿고 수당과 전쟁을 벌였다는 인식 자체는 큰 변화가 없었고 이런 맥락에서 연개소문에 대한 악감정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이후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연개소문이 재평가된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 하였고, 박은식 선생은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1인자”, 문일평 선생은 “천고의 영걸(英傑)”이라고 평했다. 특히 신채호 선생은 “호족공화제(豪族共和制)라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당 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했다는 진취적 기상을 기렸다. 일제 강점기기의 이런 변화는 독립심을 고취하기 위해 외세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 부각이다. 시대에 따라 동일한 인물의 평이 이렇게 나뉜다. 역사의 재해석은 우리가 어디에 가중치를 두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경계로 삼을 것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과제다.


오늘날도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다채롭다. 다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심리가 다소 작용한 탓인지 이전보다는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좀 더 늘은 듯싶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마저도 어렵다. 인간은 불완전할뿐더러 변화의 궤적을 더듬기도 힘들지만 다면적인 인간의 속살을 헤집기 위해서는 선입견도 다독여야 한다.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시국의 형편이 연개소문을 낳음이요, 연개소문이 시국의 형편을 낳음이 아니다”고 말한다. “고대에 이른바 영웅·위인들이 거의 시국의 형편이 낳은 창조물이요 그 자체의 위대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논리다. 어쩌면 인간이 당대의 현실 제약에서 밀고 당기듯이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풀이도 당대의 시대정신에 맞게 취사선택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거정은 <삼국사 읽다讀三國史>는 시에서 수와 당에게 어부지리를 안겼던 삼국의 인물들을 향해 “반은 영웅이요 반은 흉역이다(半是英雄半兇逆)”라는 탄식을 남겼다. 나도 이 양다리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2. 고-당 대전의 전개와 고구려의 길
연개소문 정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외교정책이다. 연개소문의 대외 강경책이 고구려의 패망을 앞당겼다는 주장이 적잖다.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598년 영양태왕이 요서 지역을 선공(先攻)한 것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수나라와의 4차 전쟁이 당나라와의 대결에서 허점을 노출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승리 속에서 패망의 요소를 배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황제천가한(皇帝天可汗)을 자임하며 한족과 유목민족 두 세계의 최고 지배자임을 지향했다. 대당 온건책을 구사했던 영류태왕 집권 시절인 631년에 당나라는 고구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관(京觀)을 허물고, 641년 사신 진대덕을 통해 고구려 지리를 염탐한다. 이세민은 여건이 구비되면 고구려로 향할 뜻을 여러 번 천명하고 있다. 연개소문이 전쟁을 좀 피하려는 시도를 했더라도 얼마나 통했을지 회의적이다. 가령 1차 고-당 전쟁에서 승리한 645년 이후 고구려는 당나라의 후속 침입을 방어하면서도 646년, 647년, 648년, 652년, 656년에 계속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시성 전투로 유명한 1차 고-당 전쟁에서 『자치통감』, 『신당서』 등에서는 당군의 피해가 2,000명 남짓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군 전사자가 4만 명이라고 할 때 압도적인 승리인 셈이다. 그런데도 당 태종 이세민은 눈물을 흘리며 고구려 원정을 후회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다. 그는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현무문의 변 등의 기록을 직접 보고 고치게 했던 만큼 역사 왜곡의 전과가 있다. 자신이 직접 참전한 전쟁의 기록을 윤색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하기야 대개의 중국 기록이 늘 그런 식이다. 타국에게 패전할 때 추위와 역병으로 둘러대기 일쑤다. 중국의 사료를 볼 때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승자의 기록으로 패자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나태한 발상이다. 중국측 사료에 갇히는 건 좀 과장해서 제국주의를 은연중에 용납하고, 식민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섬세한 문헌비판이 필요하다. 실제로 중국의 경극과 희곡에서 연개소문이 이세민 일당을 패주시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비록 악역으로 비하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왜곡하기는 해도 말이다).


660년 당나라는 백제를 거꾸러뜨린 여세를 몰아 재차 고구려를 침공한다. 2차 고-당 전쟁에서 당군은 고구려의 견고한 요동 방어망 대신 서해를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접 향하는 새로운 공격로를 개척했다. 백제 멸망으로 고구려를 도울 수 있는 우방국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도리어 백제 부흥을 위해 군대를 파견해야 했으므로 고구려에게 부담이 되었을 뿐이다. 반면 당은 더 강력해진 신라를 병참기지 및 원군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662년 연개소문이 평양성 근처 사수(蛇水)에서 옥저도총관 방효태와 그 아들 13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궤멸시킨 것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다. 안시성 전투 못지 않은 사수대첩의 중국측 기록이 소략하다는 것은 그만큼 저들의 패배가 심대했음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평양을 포위하던 소정방은 신라군이 제공한 양식에 힘입어 꽁무니를 뺐다고 전한다. 소정방군이 큰 눈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연개소문 사후 용렬한 자식들의 권력 분쟁으로 촉발된 3차 고-당 전쟁으로 고구려는 막을 내렸다. 이세민이 630년 동돌궐을 이긴 때부터 670년 설인귀 휘하의 당군 10만이 대패할 때까지 40년 간 당나라의 국세는 전성기였다고 평가된다. 690년 성신황제(聖神皇帝)에 오른 측천무후 집권 초기만 잘 넘겼다면 고구려도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봄직 하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고구려라고 당나라의 연전(連戰)을 희망해서 치른 것을 아닐 게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 천하관을 실현하려는 당나라의 침략 야욕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고구려 망국 30년만인 698년 발해가 건국된 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켜도 그 땅을 온전히 지배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고-수, 고-당 대전을 배울 때 수나라와 당나라의 명백한 침략 야욕을 규탄하는 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고구려 말기의 사적을 돌아보며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둥의 볼멘 소리가 아쉬워서 해본 소리다. 누가 평화를 파괴한 약탈자인지는 또렷하다.


연개소문 정권에 대한 단행본을 낸 김용만 교수는 고구려와 신라와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다름에 주목했다.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전쟁에서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싸움은 계속된 것”이며, “고구려는 당나라를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국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언명은 그간의 고정관념을 흔든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 세계관과 고구려 독자노선의 다원적 세계관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와 같은 친당 외교가 어느 수준까지 가능했을지 헤집다 보면 이 혈전을 좀 더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고구려는 김춘추의 길을 걷지 않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길을 유지하기 위한 조율에 실패해서 망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연개소문이 고구려가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을 걸었던 것이지만.


3.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
나는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제도개혁이 아니라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치중했다. 시스템의 개편에 집중하지 않고 1인 개혁에만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사후에 불거질 혼란에 대한 면밀한 준비가 없었다. 연개소문의 대내 정책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도교진흥책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도교의 수입은 대당 유화책의 대표 사례라고 보기도 하고, 반체제, 반문화적 이념을 독재정치에 이용했다는 설도 있고, 불교계의 반발을 사서 지식인들의 분열을 유발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별다른 자료가 없는 판국에 연개소문의 비전이나 철학을 읽었다고 한다면 억지일 게다. 그러나 특별한 대내정책이 드러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연개소문이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허비한 공력을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현상 유지에 안주하기에는 당시 국제정세는 너무 격동적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세 아들을 불러 “너희들은 고기와 물과 같이 서로 화목하여 작위를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유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유언 자체는 멋진 말이지만 가족의 집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그 또한 전근대 사회의 지도자의 보편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들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수여하고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세습하게 했으며, 태막리지(太莫離支), 태대대로(太大對盧) 등 집권을 위한 관직을 새로 만들어 취임하는 등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추종 세력의 발판을 넓히지 못하고 귀족세력의 반발을 유발했다. 연개소문 사후에 벌어진 자식들 사이의 골육상쟁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지한 리더십이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그토록 지켜내려 애썼던 고구려의 존속을 위해 좀 더 세밀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취약한 정통성이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의 침입에 맞선 것이 결국 정권 연장의 수단이라고 평가절하 됨도 이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분명 장군으로서의 자질이 출중했고, 당나라의 패권주의에 맞서 외교적, 군사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란족에 대한 영향력 다툼에서 당나라에 패배하고, 당을 견제할 동맹국 설연타의 멸망을 지켜봤으며, 백제의 붕괴를 막지 못하고 백제 부흥 운동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차츰차츰 불리해지는 국제 정세를 획기적으로 돌이키지 못한 것은 뼈아픈 실책이다. 아울러 연개소문은 고-수 전쟁과 1차 고-당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준 요동 방어망을 과신하다 당나라의 백제 침공이라는 묘수에 결정타를 당했다. 고구려의 관성이 당나라의 혁신을 이겨내지 못했다. 일목난지(一木難支)라고 했다. 고구려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연개소문의 탓으로 돌리는 건 지나친 처사다. 최고 권력자들의 다툼이 아무리 심했던들 연개소문 사후 3년 만에 나라가 망한 것은 70년에 걸친 전란으로 말미암은 고구려의 내상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연개소문의 결정적 실책으로 신라와 척을 진 것을 많이들 꼽는다. 신라와 백제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면 해상 방어망에 유리한 백제를 선택한 것은 크게 그릇된 판단은 아니다.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신라측 인물의 전사자 대부분이 백제와의 전투 중에 죽은 것을 볼 때 백제와 신라의 극한 대립은 연개소문이 양자택일을 해야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음을 추론하게 만든다. 연개소문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지는 않았다. 문제는 동맹의 견고성이었다. 동맹국인 백제가 존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 고구려의 대응이 너무 없었음을 비추어 볼 때 신라와 당과 같은 결속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삼국에게 하나의 민족이라는 당위를 들이대는 건 무모한 일이라는 건 상식이 된 듯싶다. 그렇다고 쳐도 어느 정도 존재했을 삼국의 동류의식은 어떤 형국이었을까. 연개소문이 고뇌했던 삼국의 대립상은 외부의 강적에 대한 견제와 어떤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나당연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연개소문의 한계는 이런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는 적어도 삼국 통합의 의지까지 품지는 못했던 듯싶다.


강화도에 틀어박혀서 정권 연장에만 급급했던 고려 최씨 무인정권을 반추해봐도 연개소문의 처신은 보아줄 만한 것이 많다. 비록 왜와 청의 침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위정자들이 보여준 태도를 곱씹어봐도 그렇다. 선조는 여차하면 명으로 도망갈 궁리를 했으며, 인조는 굴욕적 항복을 할 때까지 무책임했다. 연개소문 부자는 전장터를 누볐다. 둘째 아들 연남건은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고, 당나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전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있어 고구려의 최후가 부끄럽지 않았다. 물론 연개소문가에는 당에 협력한 매국노 연남생이나 신라로 재빨리 투항한 연정토 같이 변변치 못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평양성을 사수하며 고구려 패망에 책임을 진 거의 유일한 지도층이었던 연남건의 존재는 연개소문 정권의 의연함을 상징한다. 설령 권력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패배가 임박한 순간에 제 자리를 늦게까지 지켰던 사람에게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건 막을 길이 없다.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는 바이런의 말을 되뇌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사를 그리워할 때 연남건의 이름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


4. 고구려 패망과 삼국통일의 의의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가 차지한 무게감 때문에 고구려의 패망을 돌아봄은 아쉬움이다. 신라가 생존을 위해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면 고구려는 다원화된 천하의 한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다원화라는 말을 쓰는 건 조심스럽다. 고구려가 국제정치 상의 다원주의라든가 다극화 수준까지 꾀한 것은 아니다. 자국 중심의 일원적 천하관을 둘레에 강요한 서토(西土)의 무리들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독점적 천하관 대 과점적 천하관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겠다. 조중동의 언로 과점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지만 만약 이 세 신문이 하나였다면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은 자명하다. 이처럼 고구려의 과점적 천하관은 오십보 백보이기는 해도 중국의 독점적 천하관보다 좀 더 진일보한 면이 있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중화문명의 독주를 막을 세력이 없어졌다. 중국은 이후 줄곧 지배세력만 교체된 채 문화적 우위를 독점했다.


고구려의 소멸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패권주의를 강화시켰다. 동아시아 문명의 다양성이 감퇴된 측면에 앞서 우리에게 뼈아픈 것은 고구려 문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소중화(小中華)라는 기형적인 자부심이 아닌 당당한 문명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유구한 역사에서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다. 고구려가 졌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고구려의 패배를 새로운 전기로 삼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라도 치밀한 기록을 남기는 국가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꼼꼼한 기록을 남기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치밀한 기록은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의 책임성을 높여줄 것이다. 당파성에 함몰되지 않고 불리한 내용도 가감 없이 남기는 현대판 사관은 불가능한 꿈일까. 이세민이 성군의 표상으로 과대 포장되고 연개소문이 악마성의 표지로 전락한 것은 결국 기록의 차이다. 기록은 국력이다.


역사는 신라의 손을 들어줬다. 신라의 대안이 더 현실 적합성이 높았는지 모른다. 중화문명은 그만큼 대단하고 막강했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인 선택이다. 역사는 결과의 학문이라고 하지만 성과만을 찬양하며 과정을 무시하는 건 아니리라. 그렇다고 신라의 외세 이용을 반민족적 망동으로 치부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589년 수 문제 양견이 서토를 통일하고 오랜 분열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던 고구려, 백제, 신라 또한 분열보다는 통합을 강요받게 되었다. 비록 그 통합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나쁜 쪽으로 귀결되었기는 해도 통합은 당대의 핵심과제라 판단된다. 통합 국면을 적극적으로 대응한 신라의 정성을 부러 외면하기는 힘들다. 다만 오늘날 분단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평화적인 방법뿐임을 역사는 가르쳐 준다. 한반도 대결 국면을 조장하는 북한이 자주적 통일을 주창하는 게 허망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세의 개입을 줄이고 싶다면 평화통일의 길밖에 없다. 신라의 백제, 고구려 병탄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막심했다. 이제 그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곤란하다. 21세기의 통일은 신라의 길을 걸을 수도 없고, 걸어서도 안 된다.


북한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를 정통으로 삼아 단군조선 -> 고구려 -> 고려 -> 북한으로 이어지는 도식을 도출해낸다. 북한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며 의도한 편식이다. 앞으로 남북 간 한국사 학술 교류를 통해 인식의 간극을 줄여 나가야 한다. 지리적 제약으로 인해 남한이 고구려와 발해를 잘 모르듯이, 북한도 신라와 백제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더 잘 알게 된다면 편향성을 다독이고 삼국의 역사를 공정하게 바라볼 안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3월 신축 기사에서 이조판서 허조는 “우리 왕조의 전장(典章)과 문물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한다. 세종대왕은 “삼국이 정립 대치하여 서로 막상막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三國鼎峙, 不相上下, 不可捨此而取彼也)”며 거부한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날 재해석되기 마련이지만 그 출발점은 팩트의 보존이다. 고구려도, 백제도, 신라도 모두 우리의 선조이며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북한의 주장에 반대한답시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언젠가 중국에 흡수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한때 서토를 호령하던 북방 유목민족 가운데 오늘날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영역을 지키고 있는 나라는 몽골뿐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통일로 말미암은 중국화의 증거는 명백하지만 고구려 통일로 발생할 중국화의 심화는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국가의 미덕은 생존이라는 명제는 거개 맞지만 고구려가 생존에 실패했다고 해서 이를 부정하는 건 지나친 처사다. 하물며 고구려가 생존에 성공했다고 해도 결과는 더 파국적이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건 패배주의적 사고다. 그것은 냉정한 성찰도 아니고, 객관적인 관찰도 아니다.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제약조건 속에서 고구려의 독자적 정체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모욕하는 태도는 또 하나의 극단이다.


5. 연개소문과 고구려를 기억하기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과거 천년의 역사는 ‘중국화’의 길을 걸어왔다며 “우리가 ‘중국화의 길’을 선택한 계기는 7세기 후반 8세기 초 삼국통일 과정에서 중국의 힘에 압도당한 체험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갔다’면 비판적 문제제기가 가능하겠지만, 그 시절에 한민족 생존의 가장 현명하고 실질적 방법은 중국화의 길 외에 무엇이 가능했겠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신라의 생존을 위한 대안이 단지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인가. 고구려의 생존을 위한 대안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패만 허락된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중국이 문치를 상징하고, 고구려가 무치를 상징한다는 이분법도 사실과 다를 공산이 크다. 중국화 아니면 소멸이라는 도식은 끝끝내 인정하기 힘들다. 적어도 김춘추에게는 맞을지 몰라도 연개소문에게는 맞지 않는다. 화이관(華夷觀)을 연상시키는 이 전 위원장의 한국사 이해는 단선적이고 체념적이다.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하나둘 중국화(中國化)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아름다운 예외였다. 거의 모든 지배계급이 중국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도 끝내 중국과는 별개의 주체성을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경이롭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중국의 힘이 오늘날 미국보다 더 규정력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한국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일정 부분 건사할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은 무엇일까. 개방성이라는 요인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개방성이 반드시 독창성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중국화 열망을 막아낸 것은 힘없는 백성의 보이지 않는 저항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는 고구려에 대한 기억이 켜켜이 쌓인 덕분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나는 이런 견해가 진실을 조작하는 것도 아니며, 전복적 상상력으로만 그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와 대한민국이 얼마나 연속성이 있느냐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구려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큰 요소 가운데 하나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고구려의 집단기억은 우리네 살림살이에 각인되었고 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전에 백낙청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고 언급했다.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민주화세력도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신선하다. 산업화세력의 경제발전 방식은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지속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한국사회의 건강성을 살린 민주화세력이 크게 공헌했다는 견해에 상당 부분 동감한다. 실상 박정희의 절제를 기대하는 것보다 민주화세력의 견제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음을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고구려 말기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도 이런 균형감각을 발휘해보면 어떨까. 연개소문은 한국사에서 값진 경험을 남김으로써 한민족의 영속과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본다.


나는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전쟁을 치르기 위해 연개소문을 부각시키는 것도 크게 나쁠 건 없다고 본다. 편의적인 이용이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다. 동북아 역사전쟁에 초연한 것을 상생의 손짓인양 생각하는 분들은 노예의 도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노예의 도덕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대범하다거나 겸허하다는 걸로 포장한다(하기야 이 노예의 도덕은 국수주의나 군사주의에게도 넉넉하기 일쑤다). 역사전쟁은 거칠게 표현해 제국주의와 평화주의의 싸움이다. 공세적인 방어로 평화의 기치를 들자. 현대 국민국가의 국경 개념이나 민족 개념을 고대 국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주장도 들리지만 유치한 땅따먹기를 시작한 쪽은 중국이다. 이 와중에 국사 해체론 같은 현실도피적 청담(淸談)이나 늘어놓는 건 개인의 자유다. 다만 허구한 날 긴장하며 경계근무를 해야했던 고구려 병사의 심정을, 배곯이에 시달리는 고구려 아이의 마음을 추체험하며 헝클어졌던 그 시대 개별 인간의 삶을 헛되다고, 우리와 무관하다고 말하지 않는 정도의 예의는 좀 차렸으면 좋겠다.


역사는 결국 미래를 지향한다. 연개소문 시대를 도두보는 건 거기서 좀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다. 세계화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21세기가 다중심성의 사회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마도 이런 이상적 의미의 세계화는 도래하지 않을 거 같다. 나는 대한민국이 세계화 혹은 서구화라는 파고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복수 문명권이 협력과 경쟁을 하는 상황에 일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개소문이 미처 이루지 못했고, 고구려가 실현하지 못했던 그 꿈을 오늘날 이 땅에서 도전해보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고안해낸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요설이 아니다.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의 모색은 편협한 민족주의로 가두기에는 그 품이 너르다. 앞서 강조했듯이 고구려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과업은 한국 사회를 좀 더 풍요롭고 튼실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개소문을 기억하는 건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리는 일이다. 아마도 외부의 싸움만큼이나 내부의 싸움이 지난할 것이다. - [無棄]


<참고 문헌>
이 글에 직접적으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제가 읽고 영감을 얻은 자료들도 모아봤습니다. 단행본밖에 모르던 제가 학교 도서관 학회지 논문 검색과 연속간행물 서고 등을 거닐며 모은 자료라 개인적으로 각별해서 기록했어요. 졸문 작성에 특히 많은 도움을 받은 자료에는 별표(*)를 했습니다.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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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만, 『새로 쓰는 연개소문傳』, 바다출판사, 2003
*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9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출판사, 1999
동북아역사재단 편, 『고구려의 정치와 사상』, 동북아역사재단, 2007
서병국, 『고구려제국사』, 혜안, 1997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7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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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구
:

문화재청에서 실시한 2007년 세계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에서 입선이 된 글입니다. 사흘 연속 과한 음주로 숙취가 덜 깬 상태였지만 책 살 문화상품권을 벌기 위해 힘들게 쓰다보니 많이 엉성합니다. 이 답사기 쓰려고 모은 자료들이 적잖은데 기회가 되면 종묘에 대한 글을 좀 더 보강해서 써보고 싶네요.


<종묘 잡감>

내게 있어 공민왕신당은 종묘의 절반이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라는 놀림을 기꺼이 감수한다. 꼭꼭 닫아두던 걸 요 근래 시원하게 열어줘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준마도를 뵈니 참 고맙다. 공민왕신당의 성립 배경에 대한 특별한 문헌기록은 없다고 한다. 왕조 교체기에 고려에 아직 애정이 남은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처사로 추측할 따름이다. 우리는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대개 조선시대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현대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왕조이고, 관련 유적과 사료가 단연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그치지 않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 고려시대가 아닐까 싶다. 조선미의 극치에서 부러 고려를 회상하는 까닭이다.


큰산은 바라보기에 따라 다르다. 역사는 연속성이 고갱이다. 우리의 유구한 전통 또한 여러 겹의 속살을 가지고 있기에 다각적이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정성이 필요하다. 공민왕신당은 시답잖은 유형문화유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당을 감도는 그 처연한 서정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공민왕의 험난한 좌절을 따가워하기 좋은 곳이다. 문화유산은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많은 것으로만 우열을 따지기 힘들다. 나 같은 녀석에게 공민왕신당 내부를 공개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이런 식으로 영혼을 어루만지는 작은 문화유산들도 소중히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 문화는 고매한 기교 이전에 낮고 약하고 가여운 것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다. 결정적으로 돈도 많이 들지 않으니 일석이조다.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그 땅 위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命毁前朝宗廟, 作新廟於其地).”『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0월 13일의 일이다. 종묘는 새 도읍 한양에서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진 조선의 첫 건축이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종묘에 모셔진 신위(神位)였다. 왕의 주요 책무가 제사권 수호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충효사상을 공동체의 유대를 위해 활용했던 동아시아 문명의 단면이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보장왕 등을 당 태종 이세민이 묻힌 소릉(昭陵)에 바치게 하고, 장안의 태묘에 바쳤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제사 체계가 무너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서글픈 광경이다. 대한제국은 비참하게 망했지만 그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 것은 대한민국인의 자비심 때문만은 아닐 게다. 아마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의 품이 너르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종묘대제(宗廟大祭)를 참관하고 나니 조상숭배관념에 대한 복잡한 감회가 밀려든다.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만 지상에 남게 된다고 여기는 유교적 사생관이 흥미롭다. 백이야 무덤이라는 실체가 있지만 혼은 어떻게 살펴야 할지 막막하다. 신주가 모셔진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면 영혼이 찾아와 흠향하고 다시 돌아간다는 재미난 구조다. 죽음을 삶의 새로운 한 국면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의 상제례가 다른 문화나 종교에 견주어 복잡다단한 이유도 여기 있다. 유가는 영혼은 있다고 믿지만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내세가 없는 대신 죽음을 다른 맥락의 삶으로 잇대기 위한 절차와 형식을 마련했다. 제사에는 숨막히는 보수적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조상을 신으로 상정하려는 유가의 시도에서 서양의 천부인권 개념을 연상시키는 휴머니즘 내지 민중성을 발견했다면 너무 지나친 호들갑일까?


『예기』에는 “상례에 있어 슬픔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슬픔이 넘치는 것만 못하며, 제례에 있어서는 공경함이 모자라고 예가 넘치기보다는, 예가 모자라고 공경함이 넘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예는 방편(方便)이다. 예는 정성을 표하는 돌다리일 뿐이니 예 자체가 절대화되어 인간의 행위를 구속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집집마다 예법이나 풍속, 습관이 다를 수 있다는 가가례(家家禮)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인인례(人人禮)로 더 쪼개보면 어떨까. 이는 개인주의 시대의 미덕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쯤 종묘대제에 여성 헌관(獻官)을 볼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르다는 시시례(時時禮)를 언급하면 의례를 희화화한다고 지청구가 날아오려나.


종묘는 조선왕조가 계속 되어 모실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려 증축했다. 정전은 서에서 동쪽으로 증축했고, 영녕전은 중앙을 고정시키고 양옆을 늘렸다. 지금은 모든 신실이 꽉 차있는 상태다. 친진(親盡)된 신주를 땅에 묻기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별묘인 영녕전을 지었다. 정전과 영녕전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나서 정전애호파와 영녕전애호파가 나뉠 정도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유치한 질문이 나올 법하다. 그런데 정전과 영녕전의 가름은 각별하다. 순두부처럼 흐물흐물하지도 않으면서 일반두부처럼 각지게 썰리지도 않는 다름이다. 일반두부 같은 마니교적 이분법도 아니고, 순두부 같은 니체식 허무주의도 아닌 그리 단단하지 못한 본질과 다채로운 상이점이 버물리는 연두부 같은 건축이다.


누구를 정전에 계속 봉안하고 누구를 영녕전으로 내어 모시느냐를 놓고 적잖이 다퉜다. 가령 태종의 자식인 세종은 태종 왕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삼촌인 정종을 부묘하면서 묘호조차 올리지 않고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리게 놔뒀다. 세조의 후사들은 세조 왕통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문종의 신주를 신실이 아닌 서쪽 협실(夾室)로 내몰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거의 모든 왕이 전대의 임금을 불천위(不遷位)로 삼으며 공적 이상의 호사를 누리게 만들었다. 불천위 제도에 담긴 국왕 평가시스템이라는 원칙보다는 미안하다는 다정함이 압도했다. 거칠게 말해 성리학적 의리명분의 핵심은 “미안하다”인 듯싶다. 태종이 미워해서 종묘에 모시지도 않았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세조가 파헤쳤던 문종비 헌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을 재건하고 신주를 다시 종묘에 모시고, 왕위를 빼앗겼던 단종을 복위시켜 종묘에 모시는 등의 복권 절차가 훈훈하다. 순종과 영친왕이 각각 정전과 영녕전에 모셔짐으로써 종묘는 박동을 멈췄다. 종묘가 사화산이 되었기에 아무런 복선 없이 종묘를 완상할 수 있게 되었다. 종묘의 건축을 헤집는 데 열중한 나머지 ‘종묘의 정치학’을 엿보는 재미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종묘 건축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소박하다. 중국 베이징의 태묘 건축이 여느 궁전 건축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종묘의 박석(薄石)을 최소의 인공미라고 해야 할지 최대의 자연미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고유섭 선생이 말씀하신 “무기교의 기교”의 정수다. 그런데 밋밋한 가칠단청을 올려다보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계산된 단순함이고 기획된 질박함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검소함을 추구해 장엄을 더했다고 하지만 그 연쇄효과가 퍼뜩 떠오르지 않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앞사람에게 투덜거리며 응석을 부리는 건 뒷사람의 특권일 게다. 문화유산 감상은 별난 의견도 내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종묘 건축의 단청이 조금 더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품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 감상이 위인전 읽듯이 일방적이라면 너무 팍팍하다. 마땅한 찬사가 나올 만큼 나왔으니 농담 삼아 옥의 티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종묘의 엄숙함을 좀 눅이는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전사청 앞의 찬막단과 희생대를 거닐며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을 궁리했다. 종묘를 함께 찾은 일행에게 제물로 끌려가는 소가 가엾게 여겨져서 보지 못한 양을 제물로 쓰게 되었다는 희생양의 고사를 나누리라. 인간 이성과 감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품을 수밖에 없는 어떤 믿음을 공유하려고 애쓸 것이다. 인간에게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싶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말이다(종묘제례는 소, 양, 돼지고기를 모두 제물로 쓰니 좀 어울리지 않지만). 종묘에서 넉넉함을 배우고프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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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에서 펴낸 『百濟』는 한국 출판역사의 한 획을 그을 만하다. 신문 한 면 크기(가로 45cm, 세로 58cm)의 국내 최대 문화유산 도록이다. 그 무게만도 20kg에 이르며 500부 한정판에 가격은 200만원으로 단행본으로는 한국 출판사상 가장 비싼 책이다. 내 1년 도서 구입비와 맞먹는 수준이다. 그간 내가 최고로 치던 40만원짜리 『고려시대의 불화』(시공사) 도록을 능가한다(다만 실린 작품의 수나 희소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책이 앞선다. 나는 한때 이 책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큰 맘 먹고 사들였던 30만원짜리 『고구려고분벽화』(풀빛), 12만원짜리 『토함산 석굴』(한·언), 6만5천원짜리 『書院』(열화당), 4만5000원짜리 『반가사유상』(민음사) 도록 등이 갑자기 초라해졌다. 지금은 술 마시고 책 사는데 다 써버렸지만 이태 전만 해도 내 통장에 2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있기도 했었는데 만약 그 돈이 수중에 있었다면 난 구매를 심각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교보문고에서 3만5000원짜리 보급판을 살펴봤다. 사진작가 준초이님은 기존의 문화유산 도록의 앞모습 위주로 화면을 가득 메우는 방식에서 탈바꿈해 문화유산의 특정 부분을 도드라지게 하거나 여백을 넣어 공간미를 불어넣었다. 가령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을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찍는 장면은 일품이다. 성낙주님과 문명대님의 석굴암 관련 책에 실린 본존불의 육중하고 고독한 뒷모습을 올려다보는 사진을 보는 듯한 희열이다. 또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의자왕이 왜국에 보낸 바둑판과 바둑알의 화려함을 이제야 만난 게 아쉽다. 문득 럭셔리 마케팅이 얄미워졌다. 고급판과 보급판의 차이가 너무 커서 보급판을 사는 게 너무 꾀죄죄해 보인다. 값을 좀 올리더라도 사진을 좀 더 보강해서 고급판과의 차이를 줄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실 이마저도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사야할 책들이 밀려 일단 놓고 나왔지만.


학교 도서관에 고급판 1권과 보급판 1권을 신청했는데 선정해줬다. 머잖아 학교 도서관에서 이 귀한 책을 깨끗한 손으로 조심스레 넘겨봐야겠다. 나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끔찍한 애호를 내 나름의 자발적 애국심이라고 생각한다. 입으로 몇 마디 애국을 들먹거리기는 쉽다. 그러나 그마저도 함부로 강요하지 않는 게 민주공화국의 힘 아닐까. 사회계약은 충성이 아니라 의지의 소산이기에. 이런 감상과 별개로 나는 앞으로도 이 땅의 역사에 짙은 애정을 품을 것이다. 아련한 그리움인 고구려 고분벽화를 완상하며 중국화에 맞섰던 그 결기를 추억하고, 애잔함이 서린 조선의 궁궐을 거닐며 실학정신과 소중화(小中華)를 오갔던 조선의 지식인을 반추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이 맹세를 고스란히 살려 넣었다는 소식은 애국심에 대한 내 미감을 헝클어뜨린다.


지난해 말 국회는 국기법을 제정하면서 맹세와 관련된 조항을 넣지 않되, 정부가 시행령에 넣을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위임했지만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그저 존치 여론이 높다는 이유뿐이다. 논란이 일자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를 민주화 등 미래지향적인 내용으로 수정하는 방안이 추진된다고도 한다. 문구를 몇 개 바꾸는 것 이전에 과연 맹세와 애국심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유의미한 가를 따져볼 일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역량과 식견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태도나 자세일 수 있듯이 최소한의 규범으로 삼자는 주장은 외면하기 힘들다. 맹세를 주장하는 분들도 이 짧은 맹세 구절이 애국심 고취에 엄청난 효과가 있다고 믿지는 않을 듯싶다. 다만 공동체의식을 확인하는 실마리로서 남겨두자는 의견이 많으리라 짐작한다. 마지막 보루 같은 걸로 말이다. 그러기에는 우리 사회에 전체주의의 보루가 너무 많긴 하다.


의무적인 충성 서약보다는 이 땅의 흙과 아스팔트를 밟는 발바닥의 촉감으로 내 나라를 사랑하면 어떨까. 가장 고귀한 건 자발적인 것이며 자유로운 것이다. 물론 그 자발과 자유에도 형식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감한다. 그러나 그 형식이 일방적이고 폐쇄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맹세라는 형식이 애국심이라는 실질에 크게 기여할 거 같지 않아 보인다. 개인주의 세태를 염려하기 전에 나라를 아끼는 개성 있는 행동들을 열린 자세로 보듬고 북돋워주는 게 대한민국이 더 살맛 나고 재미난 나라가 되는 길이다. 맹세에 쏟는 그 정성을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눅이고, 이주노동자들의 후생복지를 헤아리는 걸로 전환한다면 더 좋겠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는 파시스트와 아나키스트의 대결도 아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 경쟁도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안에 대한 다채로운 가능성을 여투어 두자. - [無棄]


* 『百濟』는 6월 5일자로 결국 선정 부결됐습니다. 도서관까지 들어오기는 했는데 검수 단계에서 부결된 모양입니다. 학교 도서관 관계자분께서 친히 전화를 주셔서 책 부피도 만만치 않지만 낱장으로 되어있어 책으로 보기에도 애매하다는 견해를 피력해주셨습니다. 혹시 선정 부결이 되더라도 양해해달라는 말씀에 저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흔쾌히 답했습니다. 이 책 아닌 책을 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다면 접할 기회가 거의 없을 거 같아 살짝 아쉽네요. 친절하게 전화주신 도서관 관계자분 고맙습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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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입니다)

 

『열녀전(列女傳)』은 중국 전한(前漢, 서한) 말기의 문헌학자 유향에 의해 저술된 중국 여성들의 전기다. 대개의 사람들이 짐작하듯이 나 또한 列女가 아니라 烈女들의 전기라고 생각했다. 유교적 여성 이데올로기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멀리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제 책 제목은 무던하게도 여인열전 정도다. 제목도 제대로 확인 안 하고 오해해 유향 선생께 미안하다. 변명하건대 유향 선생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신서(新序)』 등을 좋아하는 팬이니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길.


물론 列女들 가운데 烈女에게 주안점을 두고 읽힌 건 사실이다. 인지전(仁智傳)과 변통전(辯通傳)에는 지혜로운 여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사람을 변별하고 정치적 현상을 조망하는 안목, 전고(典故)를 헤집는 통찰력, 권력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용기 있는 여성들이 적잖다. 그런데 이 재주 있는 여성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치부를 위해 쓰지 않는 희생정신까지 보인다. 조나라 장수 조괄의 어머니와 조나라 필힐의 어머니 정도가 예외다. 이 분들이 자식의 허물로 말미암아 자신들까지 처벌되는 건 곤란하다며 항변하는 건 인상적이다.


자식과 남편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도 죄다 그네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는 여성들의 지혜와 식견이 남성을 위한 것으로만 복무하는 구조가 은연중에 엿보였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가로막힌 사회에 자식과 남편을 통해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 설움 같은 게 느껴진다. 유리 천장(glass ceiling)은커녕 강철 장벽이 놓여 있을 때 체념하기보다 대리분출이라도 하려는 노력이 애틋하다. 미안하고 고맙다. 옛 여성들의 기록을 복원하는 건 고구려 말기의 사적을 당나라측 기록에 의지해 반추하는 씁쓸함이다.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제나라 재상 안자(晏子)의 마부 아내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기껍다. 남편이 안자를 모시고 말을 끄는 모습을 본 아내는 남편에게 안자는 재상이 되어서도 신중하고 낮추는데 당신은 그의 마부에 지나지 않으면서 뭐가 그리 의기양양하냐고 핀잔한다. “안자의 지혜를 품고서 거기에 팔 척의 키를 더하십시오. 인의를 실천하며 현명한 주인을 섬긴다면 그 명예가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또 '차라리 의를 즐기고 천하게 지낼지언정 헛된 교만으로 귀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是懷晏子之智, 而加以八尺之長也. 夫躬仁義, 事明主, 其名必揚矣. 且吾聞, ‘寧榮於義而賤,不虛驕以貴’)”는 충언도 잊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온다. 시기상으로 더 앞서니 열녀전 고사는 이것을 윤색했을 게다. 관안열전의 마부 아내는 남편에게 실망한 나머지 떠날 것을 청할 정도였다. 아마 열녀전의 전체적 분위기에서 이혼 선언은 안 어울려서 빼고 대신 좀 더 곡진한 충고를 삽입한 모양이다. 관안열전에서 안자의 키가 6척이 채 되지 않는다(長不滿六尺)며 마부의 우람한 체격과 비교하는데, 열녀전에서는 3척(長不滿三尺)이 못 된다고 키를 반 토막 내버렸다. 아마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거나 마부의 떡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썼을 게다. 후자라면 열녀전에 소설적 측면이 다분함을 엿볼 수 있다. 유향 선생도 사기를 읽다가 나처럼 이 대목이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남편이 말귀를 알아듣고 몸가짐을 삼가 안자에게 더 중용되었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마부의 아내는 인종(忍從)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관안열전의 기록을 볼 때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한 거 같지도 않다. 그러나 마부의 아내는 그 누구 못지않게 여성적 매력으로 충만하다(내가 보기에는). 그가 오늘날을 산다면 어떨까? 남편에게 매여 꽃 피우지 못했던 가능성을 펼칠까? 아니면 가탈스러운 페미니스트라며 흘김을 받을까? 이 시대라고 여자의 말을 귀 담아 듣지 않는 남자의 비율이 크게 줄었을 거 같지는 않다. 나 또한 협상의 대상이 아닌 배려의 대상으로만 여성을 보려고 한다. 반성한다.


여하간 열녀전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퍼졌다.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시도가 고려사 열전에서 처음 보인다. 조선의 사가들은 열전에 열녀전을 수록하며 한자를 列에서 烈로 바꾸어 놓는다. 옛날 여자는 처녀 때는 현숙한 여자가 되고, 시집가서는 현숙한 부인이 되었으며, 사고를 당해서는 열녀가 되었는데 요즘 여자는 그렇지 않아 “꿋꿋이 서서 어려움을 당하고도 이를 무릅쓰고 죽음으로써 그 지조를 바꾸지 않는 자는 찾기 어렵기에(其卓然自立 至臨亂冒白刃 不以死生易其操者 嗚呼可謂難矣)” 열녀전을 짓는(作烈女傳) 까닭을 밝히고 있다. 列女와 烈女의 작은 뜻빛깔 속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당했을까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유향 선생의 열녀전이 첫 시도임에도 가장 나은 모습을 보인 편이라는 게 놀랍다. 후세 사가들이 여성의 정절에만 집중해 편의적이고 형식적으로 지면을 할당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전한 성제(成帝)가 애첩 조비연 등과 놀아나는 게 마뜩잖다는 열녀전 저술 동기가 엄연하다. 그러나 유향 선생은 그것을 편협하게 풀지 않고 유교적 덕목의 너름을 뽐내기라도 하듯 무늬만이나마 다채로움(Variete)을 시도했다. 화재 현장에서 보모(保姆)가 올 때까지 방에서 나가지 않는 법도를 지키다가 불에 타죽은 백희(伯姬)가 있는가 하면, 촛값을 못내 쫓겨날 처지가 된 서오(徐吾)가 “한 방에 나 하나가 더 있다 하여 촛불이 따로 닳는 것도 아닌데 촛불을 왜 아끼는가?”라며 재치를 발산하기도 한다.


적어도 몇 대조가 이런 벼슬을 했고 무슨 문집을 남겼다 식의 족보보다 훨씬 재미나고 유익하다. 물론 시대적 상황이 이런 단편적인 기록 하나만 남기도록 허락했겠지만 유향 선생의 글 묶는 솜씨는 역시 빼어나다. 열녀전에서 어떤 여성주의의 밀알을 기대하는 건 과욕이다. 그렇다고 그러면 그렇지라며 샐쭉 토라지는 것도 무성의한 태도다. 비록 남성들에게 재단되긴 했지만 좀처럼 접하기 힘든 옛 여인들의 이야기인 만큼 복선 없이 읽었으면 좋겠다. 상고주의(尙古主義)하자는 게 아니라 희소가치에 대한 호기심과 독점을 막자는 균형감각을 발휘하자는 뜻이다.


열녀전을 덮고 나니 지난 4·25 재·보선에서 아들을 당선시켜 달라며 휠체어를 타고 무안과 신안을 누비던 이희호 여사가 문득 애처로워졌다. 오냐오냐 키우느라 싫은 소리 할 줄 모르는 어머니, 캐비어만 먹을 수 있다면 좌우 볼 거 없다는 아내, 권세의 흐름에만 민첩하고 돈 헤아리는 데만 눈이 밝은 싱글들이 과거에 비해 더 늘었다(내 편견이다). 여성들이 제 욕망을 스스럼없이 발현하는 건 환영할 일이고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그 욕망이 좀 더 좋은 쪽으로 발현되기를 희망하는 건 여성 억압이 아닐 게다(그렇게 따지면 전 남성 혐오증 환자이려고요?^^;). 내 둘레에 매력적이고 기품 있는 여성들이 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잖은 남성들의 앙큼한 바람일진저.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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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영을 위한 변명

문화 2007. 3. 15. 00:30 |

무료신문 <데일리줌>을 펼쳐들었다가 발견한 하얀 달(http://blog.daum.net/literarywork)님께서 쓰신 드라마 <하얀 거탑> 감상 글을 여러 번 읽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장준혁은 가엽다>는 제목의 글에서 글쓴이는 “장준혁은 명예도, 친구도, 자기를 따랐던 수간호사와 막내레지던트도, 종국적으로는 생명마저도 잃었지만, 대척점에 서 있던 ‘선량한’ 최도영은 사실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심지어 친구마저도. 장준혁에겐 경계심을 푼 눈으로 찾아갈 친구가 최도영 외엔 없으니 말이다”고 안타까워한다.


호기심에 글 쓴 분의 블로그를 찾아가 <장준혁을 위한 변명>이란 연재 글을 모두 읽었다. “장준혁을 악한 사람의 위치로 내몰아친 건 이주완이나 우용길과 같은 겉으로도 비열한 이들뿐만이 아니라 오경환이나 최도영, 이윤진과 같은-사실은 이해관계도 없는-선량한 다수들이다”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선량한 다수가 한 명의 천재를 ‘정의’의 이름으로 밟는 폭력은, 사필귀정은 교훈이 아니라 또 다른, 전도된 약육강식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신다. 누가 누구를 버렸는지 주객전도의 의혹이 짙다. 나는 선량한 다수가 악한을 응징하는 것보다 소수의 착한 사람이 독불장군이라고 지탄받는 걸 더 많이 보아왔다는 점만 지적하고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장준혁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항변이다. “‘부르주아는 자기 계급을 선택한다’는 말이 있다. ‘삼대째 의사인’ 집안의 이윤진이나 ‘형제가 줄줄이 의사인’ 최도영은 자신의 선함과 여유로움을 ‘선택’할 수 있다. 가진 자는 이처럼 ‘자비로움’을 선택할 수 있어도, 못 가진 자는 일단 ‘가지기’ 이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논리다. 만약 최도영도 배곯고 자라고, 이윤진도 월세 집에서 사는 시민운동가였다면, 즉 최도영이나 이윤진의 집안도 변변치 못해 장준혁에 견주어 그다지 나을 바가 없었다면 이 상대적 비교는 무의미해진다. 그런데 장준혁 만큼 집안이 대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염동일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볼 때 반드시 이 논리가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배경론(환경론) 대신 등장할 건 의리론 혹은 인성론일지 모르겠다. 친구의 의리를 저버리고 스승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거나, 남 잘 되는 걸 못 보는 미성숙한 인간이니 어쩌니 하는 시청자 소견들을 봐도 그렇다. 이런 것들보다 장준혁의 처지에 가슴 짠하게 만드는 건 역시 배경론이다. 장준혁과 대비되는 최도영과 이윤진의 유복한 집안은 그에게 최소한의 명분을 부여하기 위한 작가의 교토삼굴(狡ꟙ三窟)이 아닐까 싶다. 개천의 용이 되기까지 갖은 설움을 겪었을 장준혁을 애처로워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최도영을 비난하는 이들이 의사 집안에서 자란 최도영의 윤택한 환경을 핀잔하고, 돈 걱정 없이 시민단체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을 누리는 이윤진을 흘기면서 장준혁의 바보 산수화나 돈이 담긴 케이크 상자를 건네는 행위에 면죄부를 발급한다.


사실 그 면죄부는 장준혁을 옹호하는 자기 자신에게 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면죄부를 마구 발급한 분들께서는 재벌기업의 편법 경영권 승계에는 어떤 분노를 느낄까 궁금하다. 아마 최도영과 이윤진의 앞선 출발을 개운치 않게 여기는 마음으로 재벌기업을 바라본다면 우리 사회의 균형감각 내지 기회의 평등이 한층 더 넓어졌을 것만 같다. 분노는 위에서 아래보다는 아래에서 위로 향할 때 좀 더 쓸모가 있다. 그러고 보면 외과의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시점의 장준혁은 적어도 돈 없고 빽 없는 절대 약자는 아니었다. 혹자는 젋은 시절의 고생이 그를 메마르게 했다며 동정을 표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렵게 자라면 구김살이 있다 식의 근거 없는 편견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장준혁도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다. 장준혁은 선택의 여지가 생겼을 때도 그 여유를 활용하지 않았다. 장준혁이 명인대학병원장쯤 되면 욕망의 질주를 좀 그치고 자비로움을 선택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건지 회의적이다.


드라마는 선악의 명백한 대립구도를 보여주지 않고 복합적 인간, 양가적 감정이 상존하는 인간 모습을 잘 그려냈다. 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사모의 정이나 내연녀와의 애틋함이 장준혁을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가 내면 갈등을 심하게 앓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자신의 신조대로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갔고 차분한 성찰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원체 행동파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정확히는 그가 유능한 확신범이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힘겹게 눌러쓴 상고 이유서가 그 증거다. 장준혁을 현대판 파우스트라 칭하는 건 좀 넘쳤다. 짧은 드라마에서 한 개인의 내면까지 판단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며 개인의 판단 영역이겠지만. 그러나 장준혁의 인간적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인물들의 비인간성을 부러 강조한다면 형평성을 잃은 판단이 될 것이다.


장준혁은 실력 있는 의사였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의술로 많은 환자들을 살렸다. 너무 가파른 의료 윤리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의사 선생님”이라는 칭호에 붙은 사회적 존경 역시 비현실적이긴 매한가지다. 물론 보통 사람이 지키기 힘든 행위를 비현실적이라고 일컫는 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최도영이 철부지가 되고 염동일이 배신자가 되며, 이윤진이 오지라퍼(오지랖 넓은 사람)로 조롱받을 때 우리 사회는 좀 더 현실적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비현실적’이라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노린 건 아니었을까? 너무 양자택일로 묻는 건 같지만 우리 사회에 장준혁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나, 너무 적어서 문제였나? 최도영이 너무 넘쳐서 이 모양인가? 너무 모자라서 이 모양인가?


한국일보 1월 30일자 기사에 우리 사회의 공익제보자(내부고발자) 20인과의 인터뷰 결과를 보면 전체의 90%가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됐고, 절반 가량은 수년에서 10여년 동안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장준혁의 도피처인 현실주의가 먹고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저지른 단계를 넘어 집단적 폭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조사대상의 95%(19명)는 집단따돌림을 당하고, 60%(12명)는 제보 직후 파면과 해임 등으로 직장을 잃었으며, 소송 등을 거쳐 복직에 성공한 일부를 제외한 11명은 아직도 무직 상태라고 한다. 이게 진짜 ‘현실’이다. 공익제보자들은 이러한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55%(11명)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도 다시 제보하겠다고 답했다. 이들의 비현실성은 그렇게 우스운 걸까?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사람을 왕따시키면서 자신은 현실적이라고 희희낙락할 수 있는 건가? 군대 폭력을 지금 수준으로나마 낮추고, 차떼기 정치가 잦아들게 만든 건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고발했던 이들의 공로였다.


자칭 현실주의자들에게는 늘 성역이 많다. 그네들이 자랑하는 추진력을 위해서는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 성역을 돌아서 가는 게 인간미라며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의리의 돌쇠가 마냥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일말의 책임의식도 없이 세속적 꿍꿍이 때문에 의리를 사칭한다면 딱히 곱게 볼 까닭도 없다. 한국 남자들이 사이비 돌쇠에게 건네는 넉넉한 시선은 우리 사회를 곪게 만든다. 문제의식 없이 거침없이 달려가는 현실주의자의 폐해를 곱씹으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엄중히 물어야 한다. 현실을 빙자해서 자신의 태만을 방어하지 않았는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핑계 대며 약자에게 칼자루를 휘두르지 않았는가. 양심을 버리면서 그것이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불의에 타협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위안 삼지 않았는가.


인간은 악하고, 인간들이 모여 사는 국가 또한 악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국가의 유일성, 단일성, 합리성을 가정하는 현실주의는 국제 관계는 무정부 상태에 놓여있다고 보고 결국 힘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상주의 경향을 비판하며 등장한 현실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학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군림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에 맞서는 자유주의에 진보라느니 이상적이라니 하는 수식어가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상호의존을 강조하고 다원주의를 주창했던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야말로 현실을 바로 보고 있으며 적절한 처방을 내려놓고 있다고 생각할 공산이 크다. 현실주의가 무조건 현실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여기는 건 명칭에서 오는 과도한 믿음 때문이다.


현실적이라거나 현실주의자라는 말은 그리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현실상 존재하는 제약조건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응해 실천 가능한 대안을 궁리하는 이에게 주어져야 하는 칭호다. 인간이란 존재의 비루함을 알기에 더욱 인간다움이 고양되는 사회를 위해 가능한 일부터 조금씩 해나가는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인간사의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순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줄여나가려는 의지도 필요하다. 단기적 이익과 사리사욕에만 집착하고 사람을 이용가치로만 환산해서 주판알 굴리기 바쁜 게 현실주의자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현실주의가 소비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헤겔의 명구는 오역 시비가 있다. 헤겔은 모든 현실을 이성적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성에 맞지 않은 현실을 바로 잡아서 이성과 합치되도록 만들면 현실이 참되게(wirklich) 된다고 논증했다. 존재자의 현존이 본질과 조화를 이룰 때, 즉 고유한 개념이나 기능과 일치할 때에만 참되다, 진정하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것은 이성적이지만, 현존하는 모든 것이 진정한 것은 아니다. “이념은 이상이나 당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이념과 현실은 일치하며, 이 때의 현실은 곧 진정성을 지니게 된다(백훈승. 2004.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가?” 『범한철학』 제33집. pp. 153~171 참조)”는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이 논변에 따르면 헤겔은 현실 자체를 합리화함으로써 생존력을 척도로 삼고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 반동적 주장을 하지 않은 셈이다.


이성과 현실의 관계를 놓고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가 대립하고 포퍼를 위시한 사람들이 논박했다. 그만큼 이성과 현실의 좌표 설정은 어려운 문제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복잡미묘한 철학적 용어를 헤집는 것은 내 역량 밖이다. 나는 그저 현실과 이성이 서로 배타적일 때 너도 나도 현실만을 따르지 않는 문화를 구축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의사결정의 단순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개별 인간성에만 천착하지 말고 사회 전반적인 기본 룰로서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상과 도덕으로 빛나는 사회가 아니라 원칙과 상식이 흐르는 사회다. 이와 같은 무던한 지향점은 다시 개별 인간의 주체적 행동이 가능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불가항력이라며 현실을 추수하지도 않고, 부조리를 고치기 위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지도 않아도 되는 게 진짜 ‘인간적인’ 사회다. 나는 이 땅에 그런 인간다움이 좀 더 커지기를 희망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과 비슷한 시기에 올라온 하얀 달님의 마지막 연작에는 “선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몹시 ‘인간적’이었다. 그를 괴롭혔던 ‘인격의 덜 됨’에서 그 인간성의 잣대는 매우 첨탑처럼 놓다랗고 이상화되어 있으나, 그에게서 내가 느낀 ‘인간적임’은 우리가 하루하루의 삶에서 공감할 것들이다”라고 논의를 마무리하신다. “인간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인간적이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들린다. 장준혁에게서 자화상을 발견했다는 분들이 진정한 의미의 현실주의자가 되고, 진짜배기 소신을 건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장준혁의 실력이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 현실주의자들이 할 일이 적잖다. 가령 염동일을 구박하기는 쉽지만 공익제보자들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보복이 온당치 않다고 외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현실주의자들이 근시안적이라는 법은 없다. 현실주의자들은 조금 까다로운 일에도 도전해볼 필요가 있다. 장준혁 정도를 역할 모델로 삼기에는 좀 허전하지 않나요?


끝으로 최도영이라는 인물을 추억한다. 그는 절차에 대한 원칙을 견결하게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좀 느린 감이 있지만 과정에 충실하면 저절로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신뢰하는 자세는 배울 점이 많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논리가 넘쳐나는 세태에 과정과 결실의 아름다운 일치를 꾀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달갑다. 살맛나는 사회는 과정과 결실의 상관계수가 높아지는 세상이 아닐까. 결실의 달콤함에 취하기보다 과정의 쌉싸래함을 만끽하는 이들이 늘기를 바란다. 우리 둘레에 최도영이 좀 더 늘기를 바란다. 그가 단지 드물기에 숫자를 좀 맞춰보자는 소극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가 옳기 때문에 상식이 되고,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에서다. - [無棄]


추신 - 하얀 달님의 정성스런 글들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Posted by 익구
:

춘추(春秋)와 한국사

문화 2007. 2. 8. 12:28 |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을 문체를 바꿔 수정했습니다)

 

<춘추(春秋)>는 주(周)나라의 제후국인 노(魯)나라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다. 은공(隱公) 원년(BC 722년)에서 애공(哀公) 27년(BC 468)에 이르는 255년의 사실을 엮었다. 쇠락한 주 왕실로 말미암아 “옳지 못한 설(說)과 포악한 행동이 행해지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자가 있어 공자가 이런 세태를 두려워해 <춘추>를 지었다”고 맹자는 말하고 있다. 붓으로 기록함으로써 나쁜 것을 단죄하는 것을 ‘필주(筆誅)’라고 하는데 이러한 춘추필법은 동양 정신의 고갱이가 되어 오늘도 전한다. 이 땅의 언론인들이 춘추필법을 잘 구사하는지는 의문이지만.


후한시대 역사가 반고(班固)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춘추의 경우 그 전(傳)이 총 23가(家) 948편에 달한다고 정리했다. 경(經)이 공자가 편찬한 춘추 본문이라면, 전(傳)은 좌구명 등이 경에다가 해석, 부연 설명을 덧붙인 것을 가리킨다. 23개의 학파에서 춘추 해석서를 948편이나 내놓았다니 춘추의 인기를 실감하게 만든다. 후대 사람들은 성인(聖人)의 경(經)과 현인(賢人)의 전(傳)이 합작한 것이라고 좋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우리가 춘추 본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1만 6천여 자로 분량이 매우 적고, 그 내용도 소략하다. “So what?”이라는 질문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법하다. 결국 너도나도 춘추 해설서를 써냈다.


이 수많은 해설서들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열한 다툼 끝에 세 종류가 명맥을 유지했다. 그 영광의 얼굴들이 바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다. 세 경전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가 삼국시대 이후에 춘추좌씨전(이하 좌전)이 춘추학을 제패한다. 삼국지에서 촉한의 관우가 좌전을 좋아해 전장에서도 좌전을 끼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고사다. 또한 촉한의 맹광(孟光)은 공양전을 선호해 좌전에 뛰어났던 내민(來敏)과 함께 두 책의 우열을 놓고 티격태격했다는 기록도 보인다(좌구명 著, 신동준 譯, 『춘추좌전』 1권(한길사, 2006), 20~22쪽 참조).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로지 좌전이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우리나라에서 춘추학의 발달이 더뎠던 것은 이러한 독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좌전을 넘어서는 해설서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정약용의 춘추고징(春秋考徵) 정도가 예외인 듯싶다. 이러한 무관심은 광복 이후에도 다를 바 없어 2005년 자유문고에서 곡양전과 곡량전의 역주본을 내놓은 것이 유일하다. 송대(宋代)에 성립된 개념으로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서를 고른 13경(十三經)은 시경, 서경, 주역, 주례, 예기, 의례, 논어, 효경, 이아(爾雅), 맹자와 더불어 춘추 3전을 일컫는다. 중국 사람들의 선정이기는 하지만 좌전 편향의 우리 풍토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좌전이 역사적 사실 해설과 실증적 탐구에 열중해서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음은 인정해야 한다(좌전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내가 공양전과 곡량전 걱정을 한다니 참 우습다.^^;). 여하간 춘추를 놓고 벌어진 현란한 논쟁을 바라보며 춘추시대 여러 나라의 역사서 가운데 유일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노나라의 역사를 경전으로 승격시켜 아낄 줄 알았던 중국인들의 문화의식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역사가 간략하다고 한탄하기 전에 유득공이 <발해고(渤海考)>를 엮는 심정으로 매달렸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춘추를 익히는 정성의 반의반만이라도 삼국사기를 위시한 우리 사서들에 대한 주해를 달았다면 어찌 동방에 경전 몇 개쯤 나오지 않았으랴!


우리나라 과거시험에서 좌전을 단골 시험 문제로 출제한 것은 익히 전해진 사실이다. 서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주창하며 자신의 일을 합리화했다. 주나라 왕실 기록도 아니고 제후국 가운데 강성했던 나라도 아닌 약체 중의 약체인 노나라의 역사를 배우려고 우리 선조들이 하얗게 지새운 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조선 때  진사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김 아무개의 답안 가운데 “주몽이 고구려를 열고 동명이 업적을 이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김정국(金正國)은 “우리나라 사람의 본국 사적(史籍)에 자세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가소롭구나”라고 비꼰다(김영인. “짜증나는 역사” 데일리안. 2005. 03. 07. 참조).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과 별개로 부여의 시조도 동명왕이라고 주장한다. 즉 본래 부여의 시조를 동명왕이라 칭하는데 삼국사기 등에서 고구려의 시조도 동명왕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한(東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나오는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거의 같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 건국세력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여의 동명신화를 차용해 주몽신화를 만들었다’는 설이 나온다. 또 ‘동쪽의 밝음’을 뜻하는 동명이라는 한자가 특정한 왕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의 공통 분모로서 보통명사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정장열. “드라마 ‘주몽’ 놓고 고구려사 논란” 주간조선. 2006. 06. 27. 참조). 부여족 갈래인 백제가 건국 직후 건립한 동명묘(東明廟)는 주몽을 위한 것이 아닌 부여의 시조를 받드는 사당이었다는 견해까지 있다. 여하간 “주몽이 고구려를 열고 동명이 업적을 이었다”는 표현은 말이 안 된다. 주몽과 동명왕을 동일 인물로 묘사한 삼국사기만 읽었어도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리라. 최근 벌어지는 논쟁을 받아 들여 “동명이 부여를 열고 주몽이 업적을 이었다”라고 한다면 모를까.


우리 역사를 가벼이 여긴 것은 비단 일개 유생에 그치지 않는다. 비극적이지만 거의 모든 식자층이 그랬다. 이황이 남긴 도서는 모두 1,700여 권인데 주자의 저작과 경전 등 중국서적이 159종이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경국대전 등 조선의 역사, 지리 등 관련 서적은 그의 1/3 수준인 55종이었다. 그의 여러 가지 저술도 주자 성리학 등 중국에 관한 것들이었다고 한다(오인환,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의 리더십』(열린책들, 2003), 171쪽 참조).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지어 중국에서도 전설상 인물인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모화사상은 17세기 이후 형성된 조선 중화주의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이이 著, 안외순 譯, 『동호문답』(책세상, 2005), 114쪽 참조).


세종대왕은 북송 때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鑒)을 무척 애독했다고 한다. 이를 인쇄하고 반포하기 위해 새로운 제조법으로 종이를 만들고 새 활자를 주조하는 정성을 들여 백성들에게 보급할 <자치통감훈의>을 편찬했다. 물론 세종대왕이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내용 보강에도 관심을 보인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중국 역사에 대한 흠모에 비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대학자와 호학군주조차 제 나라 것을 경시했는데 대다수 지식인들이 자신의 역사에 얼마나 무심했을지 안 봐도 뻔하다. 선현들이 우리 역사에 해설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면 오늘날 후손들에게 더 풍성한 기록을 물려주실 수 있었으리라.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하나둘 중국화(中國化)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아름다운 예외였다. 거의 모든 지배계급이 중국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도 끝내 중국과는 별개의 주체성을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경이롭다(한국하이에크 소사이어티, 『자유주의만이 살길이다』(평민사, 2006) 中 강위석, <공자와 자유>편 참조).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민심이란 본질적으로 민중의 무의식이 투사된 개념이다”고 설파한 바 있는데 어쩌면 그 설명이 들어맞을지도 모른다(정혜신. “정신분석학으로 본 노 대통령” 한겨레. 2005. 08. 30.) 지배층의 중국화 열망을 막아낸 것은 힘없는 백성의 보이지 않는 저항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자발적 복종의 시대는 지났다. 민초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이 땅에 켜켜이 쌓인 지혜를 정리하고 공유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빼어난 기록문화가 조선 이전의 역사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사기열전의 그 화려한 기록들을 보면서 군침을 흘렸듯이 춘추를 질리지도 않고 잘 우려먹는 중국인들의 은근함에 새삼 부끄럽다. 한문으로 쓰인 우리 고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게 돈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남의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값 정도인 20~30억 원이 당장 없어서 고전 국역 사업에 인색한 현실이 서글프다. 중국의 고구려사 침탈에는 분개하기는 쉽지만, 청나라 건륭제 때 문헌 3458종 7만9582권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발간한 그 치열함을 배우기는 어렵다. 아무쪼록 고전 국역 작업에 대한 투자가 문화강국의 주춧돌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좀 더 늘었으면 좋겠다. 다가 올 한중일 역사 전쟁에 의연히 맞설 수 있는 방책은 가까운 곳에 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중복 리뷰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중복 리뷰란 하나의 서평을 알라딘, 예스24, 인터넷 교보문고 등 여러 개의 온라인 서점에 동시에 게재하는 것을 말한다. 마태우스님과 매너리스트님 온라인 서재만 살폈지만 매너리스트님이 제기하신 “동일한 글로 서로 다른 두 군데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게 온당한 일인가?”에 대한 판단이 다른 만큼 더 이상의 논의의 진전은 보기 힘들 듯싶다.


먼발치에서 그네들의 고민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지난달 국립중앙도서관이 발표한 ‘2006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이 1년 간 읽은 책은 11.9권으로 한 달에 한 권 정도다. 이렇게 척박한 독서 풍토에서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반갑다. 다른 건 몰라도 보르헤스님 댓글 가운데 “많은 사람들 중에 책을 읽는 사람은 그 중에서 소수이고, 그 소수 중에 서평을 꼬박꼬박 쓰는 사람은 그 중에서도 희귀종”이라는 구절은 참 많이 동감했다. 아무쪼록 독서할 시간을 건사하는 분들이 흉금 없이 대화하되 앙금은 남지 않기를 바란다.


논쟁이 격하게 진행된 여파로 서재를 닫는 분도 생겼다. 특히 평범하고픈 콸츠님께 아직 인사도 못 드렸는데 여러모로 아쉽다. 한국 경영학계의 거목이신 윤석철 교수님께서는 지난 7월 대한상공회의소 초청 특강에서 마음(feeling)관리를 핵심으로 한 인사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프리챌의 실패 사례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따갑다. 윤 교수님은 2002년 커뮤니티 이용자 110만명을 대상으로 전격적으로 유료화를 결정한 프리챌은 ‘돈내기 싫으면 나가라’식으로 고객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고 지적하셨다. 단지 유료화 때문에 누리꾼의 마음이 돌아선 것이 아니라 그 추진 방식이 누리꾼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윤 교수님은 “마음속 상처는 육체의 상처보다 더 크고, 상처받은 고객이나 종업원의 마음은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한다”고 역설하셨다. 심리적 계약(Psychological Contract)을 헝클어뜨린 프리챌의 실책이 못내 안타깝다. 작년 말 내가 자주 들어가던 프리챌 커뮤니티 하나가 싸이월드로 옮기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나는 이전에 다소 미온적인 발언들을 늘어놓았지만 많은 회원들의 인심을 잃은 프리챌을 고수할 동력이 마땅치 않았다. 고객의 거부감을 덜 줄 알았던 싸이월드의 승리는 누가 봐도 마땅하다.


윤 교수님은 “마음관리의 중요한 수단은 언어”임을 강조하시며, 비트겐슈타인의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는 말을 인용하셨다. 프랑스는 2006년 초 최초고용계약제도(CPE)를 도입할 당시 “신입사원 채용 후 2년 이내에 해고할 수 있다”고 발표해 젊은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독일은 2005년 11월 “임시직으로 써보고, 2년 후 ‘채용’할 수 있다”고 밝혀 마찰 없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례는 의미심장하다.


어렸을 때 데일 카네기의 책을 좀 읽으면 내 사교성에 보탬이 될까 해서 탐독했던 적이 있다. 내가 반발하며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카네기 저서를 중도에 접게 만들었던 챕터가 바로 “논쟁을 피하라”는 대목이다. 철없던 시절 “아니 그럼 내 껍데기를 보여주면서 벗삼기를 청하고, 그저 허울 좋은 허수아비와 사귀란 말인가”라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 다시 찾아본 카네기의 충고에 적잖이 끄덕였다. 그간 내가 벌였던 숱한 논쟁이 그리 매끄럽지 못했던 탓일 게다.


십중팔구 논쟁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법이다. 당신은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논쟁에 지면 지는 것이고, 이긴다고 해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데일 카네기 지음, 최염순 옮김, 『카네기 인간관계론』(성공전략연구소, 1995), 172쪽


내가 보기에 카네기의 논거는 그리 탄탄하지 못하다. 가령 “미움은 결코 미움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없어진다”는 부처님 말씀을 인용한 건 적절치 못했다. 논쟁이 때로는 감정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논쟁을 벌이는 게 그 사람을 미워해서 그런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링컨 대통령이 동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젊은 장교를 몹시 꾸짖으며 한 말 가운데 “개와 싸움을 하다가 개에게 물리는 것보다는 개에게 길을 비켜주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설령 그 개를 죽인다 해도 물린 상처가 아물지는 않을 테니까 말일세”라는 구절도 너무 넘쳤다. 논쟁의 단점을 이전투구로 치부한 건 지나친 처사다.


이런 험담에도 불구하고 “논쟁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피하는 것이다(The only way to get the best of an argument is to avoid it)”는 카네기 말씀을 경청한다. “한 방울의 꿀이 한 통의 쓸개즙보다 더 많은 파리를 잡는다”는 링컨 대통령의 명언은 어떤 사람을 논리로 이겨도 마음으로 감복시키지 않으면 무용하다는 가르침을 준다.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논쟁을 흘겨보지 않을 거 같다. 생산적인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게 정말 멋진 친구라고 아직은 믿고 싶다. 가끔 한 방울의 쓸개즙을 쓸 줄 알아야 한다.


편견에 자유로운 인간은 없고, 합리화하기 좋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자리를 외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한계를 알면서도 우리의 생각을 나누고 교학상장(敎學相長)을 꿈꾼다. 이성을 고양하고, 논리로 무장하는 건 가까운 사이일수록 허용되는 특권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혹시 내가 괜히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감점이나 당할까봐 그냥 입에 발린 소리나 해주는 것이나, 충언을 경청할 줄 모르고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며 멀리하는 것이나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지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비판하는 법을 좀 배우고 싶다. 혹은 미감을 거스르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법 같은 거 말이다. 고등학교 때 아버님이 선생님인 친구와 교직원 정년 단축을 놓고 치열한 언쟁을 벌였던 적이 있다. 나는 선생님들이 정년단축에 반발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교직원 정년 단축을 그렇게 반길 까닭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너무 나갔던 거 같다. 지금도 가끔 후회가 되는 걸 보면 내가 빈약한 논리로 어지간히 우겼나 보다.^^; 그래도 나는 공무원 어머니를 둔 친구가 들을 것을 염려해 공무원 연금개혁 촉구를 물리지 않고, 군인 아버지를 둔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 군 관계자들의 책임 방기 꾸짖기를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지은이를 헤로도토스라고 말한 친구를 구박한 것도 따지가 좋아하는 모난 성격이 드러난 것 같아 민망하다. 사실 그 친구에게 청량리역을 헷갈려 청계천역이 있다고 우겼던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내 훈련소 시절을 회고하며 틈새시장인 니치(niche)의 스펠링을 틀렸던 중대장을 농담 삼아 말한 것도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나는 선배님 과제물에 적어야 할 프리미엄(premium) 스펠링을 primium이 아니겠냐며 마치 아는 듯 말씀드렸던 부끄러운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어느 인용구가 성경이 아닌 햄릿 구절이라고 시비를 따지는 것조차 무익하다고 말씀하지만 나는 적어도 기본적인 사실관계 교정 정도는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루쉰이 “페어플레이는 시기상조”라는 글을 발표하자, 린위탕이 “물에 빠진 개를 치지 않는 것이 페이플레이 정신”이라며 맞받았다. 이에 루쉰은 “물에 빠진 개일지라도 어떤 경우에는 때려야 한다”며 페어플레이를 나눌 상대가 아니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논박한다. 페어플레이 정신의 기반은 완전무결한 인간에 대한 갈망을 누그러뜨림이며, 배우며 참회하며 개선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음이라고 생각한다. 칼 포퍼가 말씀한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라는 경구를 논쟁하기 전에 세 번쯤 외워야겠다.


일전의 이건희 회장 명예 철학박사 학위수여식 사건 때 나는 인심의 문제를 언급했다. 나는 “인심을 잃으면 삼성의 그 휘황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동탄압의 괴수가 되고, 일부 학우들의 노동자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 옹고집으로 비춰질 수 있다”며 어정쩡한 입장을 말해서 양쪽에서 다 핀잔을 받은 기억이 난다.^^; 내가 사람의 마음을 돌아본 까닭은 논쟁을 어색해 하는 우리네 정서가 논쟁이라면 그저 악의에 찬 트집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때 서라벌을 유린할 정도로 강성했던 견훤의 군대가 최종 승리를 거머쥐지 못한 것은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서라벌 백성들이 “옛날 견씨(甄氏)가 왔을 때에는 마치 승냥이나 범을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王公)이 이르러서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하구나(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고 말했다고 전한다. 승자의 기록이라 적잖은 미화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견훤은 서라벌의 마음을 잃었고 결국에는 제 나라마저 잃었다.


손자병법 모공(謀攻)편에는 “백 번 싸워서 백 번 다 이긴다는 것은 선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 최선 중의 최선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전이굴(不戰而屈)이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며, 늘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문경지교(刎頸之交)로 유명한 염파와 인상여 이야기가 부전이굴의 예가 될 수 있겠다. 굳이 논쟁을 피해야 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상여는 진(秦)나라에 빼앗길 뻔한 구슬 화씨벽(和氏璧)을 온전히 찾아온 공로로 상경의 자리에 올랐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 염파는 세 치 혀를 놀린 자가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벼르고 있던 염파를 일부러 피하는 인상여를 보고 주위에서 겁쟁이라고 투덜거렸다. 인상여는 “진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염파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둘이 다투면 적에게만 좋은 일이다. 국가의 안위가 우선이지 개인의 감정이야 그 다음이 아니겠는가?”라고 토로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웃통을 벗고 회초리를 짊어진 채 인상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고 한다. 논쟁이 반드시 일치를 꾀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하나 됨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우애로울 수 있다. 동주 열국지에 “수레를 몰아 골목길로 피한 인상여의 도량은 참으로 크며/ 웃옷을 벗고 죄를 청한 염파의 뜻 또한 웅장했도다(引車趨避量誠洪 肉袒將軍志亦雄)”라고 찬탄한 무명씨의 시에서 그 본보기를 느낀다. 한바탕 논쟁을 벌이고도 다시 손을 건네 뜨거운 악수를 나눌 수 있기가 참 어렵다. 하지만 그래서 더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거칠지 않으면서도 그치지 않는 논쟁을 해보고 싶다. 그런 논쟁을 나눌 사람이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보다 내 자신이 말벗이 될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겠다. - [無棄]


사람을 생긴 그대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

평화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그만둘 때이며
행복은 그러한 마음이 위로받을 때이며
기쁨은 비워진 두 마음이 부딪힐 때이다.

- 황대권, <야생초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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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아침에 SBS 모닝와이드라는 프로그램에서 “루브르의 친구들”을 소개했다. 전세계 주요 박물관 가운데 루브르는 유난히도 마니아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루브르는 관람객의 40% 이상이 두 번 이상 방문하는 반복 관람객이라고 한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한 이래 다섯 번 관람한 나도 어엿한 반복 관람객이자 마니아의 소질이 조금은 풍긴다.^^; 우리네 박물관은 남의 것 약탈한 흔적이 없는 평화가 깃든 곳이다. 남의 것 빼앗지 않고도 제 스스로 흘린 피와 땀의 자취를 모았기에 더 애틋하고 아름답다.


루브르 마니아로 소개된 뱅상 라파노님은 9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루브르를 처음 방문한 이래 30년 동안 한 달에 두 번 정도 루브르를 방문해왔다고 한다. 얼추 따져봐도 700번이 넘게 방문했다는 것인데 정말 탄성이 나온다. 라파노님은 “루브르와 열정(http://louvre-passion.over-blog.com)”이라는 블로그를 개설해서 루브르에 대한 사랑을 온라인 상에서도 실천하고 있다. 블로그를 찾아 들어가 보니 프랑스어에는 문외한이라 거의 해독을 할 수 없었지만, 중앙박물관에서 한창 진행 중인 루브르박물관전에 대한 글(Le Louvre a Seoul)도 보였다.


“루브르의 친구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만든 루브르 후원회다. 연간 30억 원이 넘는 회비로 루브르에 작품을 기증하는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2007년 1월 2일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했다고 밝힌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환수한 문화유산이다. 시민들의 힘을 마땅히 예찬하면서도 이것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성으로 녹아들기를 기원한다.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잡고 미술관에서 감상평을 나누고, 연인들이 데이트 비용을 아껴 문화유산 관람료를 지불하는 등의 고만고만한 생활을 그려본다.


2000년 5월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이 복원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한 풍납토성 경당지구의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니 프랑스의 문화적 저력이 새삼 부럽다. 고고미술사학자 엄기표님에 따르면 지리적 장벽에 막힌 고구려와 달리 백제사는 개발 광풍에 유적지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마구잡이 근대화의 최대 피해자”인 백제사를 아파하며 루브르의 친구들의 정신을 배워보면 어떨까. 루브르를 내 집처럼 여기며 애호하는 그들처럼 우리도 우리들 것에 대한 주인의식을 품어봤으면 좋겠다.


이런 보통 시민들의 문화적 성숙과 더불어 기업들의 적극적 투자도 병행되어야 한다. 메세나(Mecenat)는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문화예술 분야 외에도 과학, 스포츠 분야 및 공익사업에 대한 지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 문화예술가들을 열성적으로 지원한 로마의 정치가 마에케나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용어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쓴 이후, 여러 나라의 기업인들이 메세나 협의회를 설립했고 우리나라도 한국메세나협의회 등이 활동 중이다.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문화예술을 꽃피우는 것은 결국 자본가이며, 있는 사람들의 미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기업에게 조건 없는 지원을 강권할 생각은 없다. 문화예술의 이미지를 이용해 기업 브랜드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해도 무방하다. 내 자신도 문화경제에 투자하는 것이 이문이 남는 길이 될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는데 일조하고 싶다. 소설가 김별아님의 표현을 빌려 “끝없이 배고픈 자본주의의 논리에 밀려 배부른 소리나 지껄이는 팔자 좋은 궁도령”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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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에서 실시한 2006년 하반기 문화유산 사진 및 답사기 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했습니다. 그다지 잘 쓴 글은 아니었지만 작은 상이나마 받게 되어 기쁘네요. 잡글 쓰기를 즐기는 저는 글쓰기로 받는 상처럼 기쁜 게 없습니다. 당초 노렸던 입선 말석보다는 좋은 성과가 나와서 세밑에 제 자신을 위한 작은 선물이 될 거 같아요. 부끄럽지만 졸문을 올립니다.


<동궐(東闕)을 꿈꾸다>

  안거(安居)나 피정(避靜)을 좀 떠나고 싶었다.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고 말했지만 꿀벌도 가끔 슬플 때가 있는 법이다. 나의 우울증이 헤픈 자기연민에 그치는 것이 아닌 뼈를 깎는 자기성찰을 위한 매운 의지이길 바라며 창덕궁을 찾았다. 이태 전 창덕궁을 찾았을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듯이 나는 모종의 세속적 꿍꿍이를 품었다.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는 이유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따른 책임은 막중하다. 이 문화유산은 비단 우리 후손들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공유해야할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의 위기유산(Danger Heritage) 제도는 지정 등록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리는 좋은 징표다. 우리 궁궐 환경의 문제를 꼽아보라면 역시 주차장이다. 규모가 큰 경복궁 동편 주차장이나, 지하주차장과 노상주차장이 사이좋게(?) 들어서 있는 종묘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창덕궁 주차장도 그리 아름답지는 못하다. 금호문 밖으로 난 주차장은 창덕궁의 문화적 저력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일전에 자금성 답사를 다녀왔을 때 놀란 점은 궁궐 안에 주차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천안문(天安門)보다 훨씬 앞에 있는 정양문(正陽門)에서부터 걸어가며 중국인들의 자부심의 근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궁궐도 정문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문화를 정착시켰으면 좋겠다. 나의 이런 생각이 답사객들을 불편하게 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궁궐에 바짝 붙어서 궁역을 잠식하는 지금의 주차장 구조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돈화문(敦化門) 앞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을 바라보며 씁쓸했다. 국민들의 문화적 안목이 높아진 만큼 요구수준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그 다양한 요구를 문화재 당국이 재빨리 수락하기 어렵다는 고충을 십분 이해한다. 그만큼 묵직한 기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좀 더 애써주셨으면 좋겠다.


  27년만의 자유관람을 하려니 가슴이 설렌다. 최근 들어 창덕궁 관람영역을 넓히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2004년부터는 시행한 옥류천 특별관람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던 후원 지역을 개방함으로써 문화적 수요를 충족시킨 긍정적 의미가 컸다. 미공개 지역에 대한 개방에 이은 자유관람 제도의 신설로 관람의 질을 높인 것도 환영할 일이다. 문화유산 보호라는 측면에서 안내원의 지도 아래 짜여진 제한관람을 당장 없애는 것이 곤란한 만큼 자유관람을 통해 다른 각도의 답사를 즐길 수 있어 반갑다. 창덕궁은 날로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서울에 살면서도 창덕궁에 가보지 않은 분들이 창덕궁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서울에 남아 있는 옛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금천교(錦川橋)에는 언제나 묵직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래 너만은 제 자리를 지켜주었구나’ 싶어 돌짐승들을 자꾸 어루만진다. 인정전(仁政殿) 답도(踏道)는 중국의 그것에 비해 규모가 초라해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만만하고 살갑다. 하지만 인정전 박석(薄石)만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경복궁이나 종묘의 박석을 볼 때마다 ‘최소의 인공미라고 해야 할지 최대의 자연미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의 특질을 “무기교의 기교”라고 평했는데 박석이 그 결정판 가운데 하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못하는 일이 없다(無爲無不爲)”는 도가의 정신이 유교적 건물의 정수에서 만난다. 밉살맞은 일제는 이 박석을 걷어내고 잔디를 깔았다. 최근에 다시 복원했다고 하지만 너무 반듯반듯해 정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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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 드므와 박석>
드므란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로서 여기다 물을 담아 두어 화마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궁궐 전각 곳곳에서 이 드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창덕궁 박석은 좀 모자라지만 종묘나 경복궁의 박석은 참 매혹적이다. 돌을 너무 잘 다듬으면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기 때문에 부러 울퉁불퉁하게 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미끄럼 방지 기능까지 있다니 혜안이 놀랍다.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을 늘 멀리서만 지켜봤는데 가까이서 가볼 수 있게 개방해놓아서 기꺼웠다. 현존하는 궁궐 전각 중에서 유일한 푸른색의 유리기와라는 각별함 때문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청기와는 회색조의 일반 기와보다 세 배 정도 비싸다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몇몇 사찰에 청기와를 썼고, 궁궐 건물로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만이 청기와를 이었다고 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자금성의 황금기와나 천단의 청기와보다 더 매력적이고 질리지 않는다. 청와대의 청기와도 그 나름대로 공력을 들인 것일 텐데 선정전의 기와를 상대하지는 못할 듯싶다. 나는 옛사람의 솜씨보다 못하다는 것을 타박하려는 게 아니다. 고금의 기술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옛것을 아끼면서 새로운 미적 감각을 얼마든지 구현해낼 수 있으리라. 햇살에 비친 청기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회의와 낙심을 다독인다.


  선정전 오른쪽으로 내전의 중심이 되는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이 있다. 왕의 침전이 딸린 편전인 희정당과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건물이 너무 꽉 들어차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인데 이 건물은 본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건물 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을 헐어 새로 지은 것이다. 대대적으로 중건된 이후 법궁의 지위를 회복한 경복궁에 대한 훼손의 일환인 셈이다. 철저히 파괴되어 터만 남은 경희궁, 창경원으로 격하되기까지 했던 창경궁만큼은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의 창덕궁은 일제의 전시장이자 연회장이 되었고, 수많은 전각들이 훼절되었다. 이래저래 잘리고 상처 입은 우리 궁궐을 바라보며 일제의 만행만 곱씹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부박함을 반성해야겠다.


  새 모양으로 생긴 대조전 일곽의 처마 빗물받이가 익살맞다며 연신 사진을 찍고 집에 와서 찾아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마냥 좋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던 빗물받이가 있던 곳은 대조전 부속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이었다. 1910년 8월 22일 흥복헌에서는 한일합병을 결의하는 조선왕조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며 버텼다는 순정효황후의 통분이 서린 곳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나 반성한다. 어디 가면 뭐가 있더라며 피상적으로 듣는 것에 만족했던 게 민망하다. 어디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적극적으로 헤집고 오늘날 그 의미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그게 진짜 공부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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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복헌 처마의 빗물받이>
나는 흥복헌에서 역사의 입체적, 총체적 이해를 깨우쳤는지도 모른다.



  후원으로 발길을 돌려 주합루(宙合樓)를 올려다보니 적서의 구별 없이 실력을 키웠던 가능성의 광휘(光輝)를 받는 듯 힘이 솟는다. 보기 드문 6각 지붕에 2층 처마를 한 존덕정(尊德亭)은 아기자기한 맛이 일품이다.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곳은 정조대왕의 꿈이 깃든 곳이라 더 애틋하다. 숨이 찰 때까지 옥류천(玉流川)까지 소요(逍遙)하고 만보(漫步)했다. 발 운동으로 뇌의 혈류량이 증가하면 뇌도 함께 활성화되어서 좋은 생각도 많이 하게 되는 거 같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운치를 더한다. 나는 산책을 즐긴 칸트와 루소를 흉내내 생각거리를 찾다가 “민족”이라는 화두를 꺼내 들어봤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ies』에서 민족은 근대 자본주의가 발달 하면서 생겨난 개념이며, 사람들에 의해 상상되어진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민족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경험에 의해서 구성되고 상상되어진다는 주장이 파격적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경청하지만 “민족은 공동의 언어·혈연·문화공동체라는 객관적 요소에 민족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더해져 공고해진 실체”라는 신용하 교수의 반박이 더 맞는 거 같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 같은 공격적 민주주의의 폭력과 차별에 반대하는 것을 허상과 싸우는 것이라고 손쉽게 말해서는 곤란하다.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말처럼 스스로 무겁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어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남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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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 바위>
옥류천 바위에는 흐르는 물에 왕이 술잔을 띄워 보내면 잔이 닿은 신하는 시를 읊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 길이가 짧아서 시 한 수 읊을 짬이 별로 없었을 거 같다. 아마 글재주가 특출 나지 않고서는 영락없이 벌주를 마셔야 했으리라.



  후원의 정자들은 규모가 소박한 편인데 이는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인공미를 가미하려는 우리 전통 조경의 산물이다. 부러 투정을 부려보자면 후원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지나쳐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미적 가치를 너무 보편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건 무모한 시도인 거 같다. 저마다 독특하게 뿜어내는 향기 그 자체를 완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목재가 덜 들어가는 익공양식이 널리 유행한 것은 웅장한 건축물을 일부러 안 지은 것이 아니라 양질의 목재가 부족해 정말 못 지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빚어낸 정성을 기리는 게 진정 문화를 애호하는 이의 겸허하게 열린 자세일 것이다. 비록 도자의 발색(發色)이 고르지 못했다는 흠이 있지만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흠뻑 빠져도 지나치지 않는다.

  경복궁을 설계한 정도전은 “검소하되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한 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고 말했다. 유교적 이상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검박함을 추구한 왕실의 정신이 지나쳤는지 조선의 백성들은 늘 빈궁하고 고달팠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중국이 사치로 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해 쇠퇴할 것이다”고 일갈했다. 우리의 풍속이 정녕 검소함을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용할 기술을 알지 못한데 불과하다는 그의 지적이 매섭다. 그런데 오늘날 상황은 급변하여 모든 것이 숫자로만 표현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쯤 되면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후원에서 그걸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유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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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정과 빙옥지>
청심정(淸心亭)은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이번에 처음 찾아가 봤다. 청심정 앞에 돌로 만든 조그만 연못인 빙옥지(氷玉池)와 청심정을 향해 앉아있는 앙증맞은 거북이가 있다. 우리나라 돌조각은 무섭게 만든다고 해도 어찌나 살벌한 기운이 안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자연미를 한껏 살린 빙옥지 끝마무리가 인상적이다.



  어느덧 해거름이 내렸다. 창덕궁을 맨 마지막으로 나서며 동궐(東闕)의 온전한 복원을 희망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전락할 때 왕이 거처하던 창덕궁과 구별하기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담장이 놓이게 되었다. 이제 창덕궁과 창경궁을 갈라놓은 그 담장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동궐로 재탄생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문화유산을 더욱 가치롭게 가꾸는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창덕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련정(愛蓮亭)의 모티브가 된 애련설(愛蓮說) 한 구절을 습관처럼 읊조려본다. “연꽃이 흙탕물에서 자라되 진흙에 물들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씻었으되 요염하지 않은 것을 나는 홀로 사랑한다.” 자신이 지탱할 만큼의 빗방울을 머금고 나면 미련 없이 비워내는 연꽃잎처럼 살아야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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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건을 기억하라!

문화 2006. 12. 3. 22:09 |

드라마 <대조영>에서 빛나는 열연을 보였던 연개소문이 타계했다. 나는 연개소문에 대한 신채호 선생님의 긍정적 평가에 상당 부분 수긍하면서도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제도개혁이 아니라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치중했다. 시스템의 개편에 집중하지 않고 1인 개혁에만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사후에 불거질 혼란에 대한 면밀한 준비가 없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연개소문이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에게 “너희 형제들은 물고기와 물(魚水)처럼 화합해 벼슬자리를 다투지 말라”고도 유언했다고 하지만 실효성 있는 방책은 마련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665년 연개소문 사후에 벌어진 그의 자식들 간의 골육상잔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지한 리더십이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결국 연개소문이 죽은 지 3년 만에 고구려는 멸망했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그토록 지켜내려 애썼던 고구려의 존속을 위해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단속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도 부정(父情)은 버릴 수 없었나 보다. 그렇다고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연개소문과 그 모자란 아들들에게만 전가하는 것도 너무 과하다. 큰집이 무너지는 것을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치지 못하듯 이미 기울어지는 대세를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인 ‘일목난지(一木難支)’가 떠오른다. 최고 권력자들의 다툼이 아무리 심했던들 3년여만에 나라가 망한 것은 잇따른 전쟁으로 말미암은 고구려의 내상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 교외 북망산 일대에서 발견된 천남생묘지명 등을 살펴보면 연남생 이하 4대가 당나라에서 누린 부귀영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남생은 동생들과의 권력쟁탈전에서 패하자 당군의 앞잡이가 되는 반역을 저질렀다. 묘지명에는 마지막까지 항전한 남건은 본래 처형될 계획이었으나 남생이 간청해 유배형에 그쳤다고 쓰여 있다. 조국을 배신한 남생의 마지막 형제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그 역겨움이 쉽사리 가시지는 않는다. 남생은 물론 항복한 보장왕과 항복 의사를 전한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산, 성문을 열어 당군을 맞이했던 승려 신성은 모두 당나라의 벼슬을 했지만 오직 남건만이 검주로 유배를 떠났다. 그나마 유일하게 고구려 패망의 책임을 진 인물이 남건이다.


비록 연남건이 권력다툼으로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고, 당나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전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있어 고구려의 최후가 부끄럽지 않았다. 그가 계백장군 같은 무공을 선보인 것도 아니며, 검모잠처럼 고구려 부흥운동에 뛰어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망국의 충절로 따지자면 마의태자 정도의 대우는 받음직하다. 그는 적어도 좌초될 위험에 빠진 배를 버리지 않고 지킬 줄 알았던 선장이었다. 그의 고집이 무고한 고구려 백성들의 피를 더 흘리게 했을 지는 모르겠으나 뒷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참 고맙다.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는 바이런의 말을 되뇌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사를 그리워할 때 연남건의 이름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는 역사를 핑계로 패배의 유미주의(唯美主義)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패배가 임박한 순간에 제 자리를 늦게까지 지키는 사람에게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건 막을 길이 없다. 어려울 때일수록 우직하게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좀 더 늘기를 바란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차마 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의 신뢰성도 그만큼 고양될 것이다. “아무리 패배의 상처가 쓰라리더라도 패배 역시 승리만큼이나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영광을 가져오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no matter how hard the loss, defeat might serve as well as victory to shape the soul and let the glory out)”라고 말하는 미국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2000년 대선 패배 연설문 한 대목을 꺼내본다. 아름다운 패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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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덕 변호사님은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이라는 책에서 당신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사용한 t1t2 판단법을 소개하셨다. 시간적 개념, 시기적 중요성이 가치판단에 중요한 요소라는 내용이다. 는 시간(time)의 약자이고, 1, 2는 어느 한 시점을 의미한다. 그 공식은 다음과 같다.


A>B.
But A(t1) + 0(t2) < B(t1) + A(t2).
Then B(t1) > A(t1).


A와 B의 두 가지가 있을 때 A가 B보다 더 중요하고 하고 싶은 일이다. 그런데 A를 먼저 하게 되면 나중에 B를 할 수 없지만, B를 먼저 하게 되면 나중에 A도 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럴 경우에는 B를 먼저 선택하고 나중에 A를 하는 것이 낫다는 사고 방법이다. 어느 시점(t1)에서 A가 더 중요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흐른 시점(t2)에서는 B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고 느낄 수 있는데다가, A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B를 희생했다면 나중에 B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가치(present value)을 애호하고, 시간에 대한 할인(time discount)을 경계하는 재무이론의 기초와는 다소 어긋나는 이야기다.


물론 “A(t1) + 0(t2) < B(t1) + A(t2)” 에는 허점이 많다. 대개의 경우 A도 t2 시점에서 0으로 수렴하기 일쑤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어야하지 결심한 사람은 대개 목표했던 책을 상당 부분 못 읽게 된다. 1박 2일로 술 마시며 노는 것도 젊을 때 아니면 나이 먹어서 하기는 많은 무리가 따르기도 한다. 유능해지면 질수록 그 유능함을 써먹느라 몸과 마음이 닳는 게 대부분이다. 우선 자리 좀 잡고 나서 좀 기품 있게 살아보자는 계획을 성사시키기가 까다롭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많이 보아왔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기란 참 어려운 법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물결의 가장 큰 폐해 가운데 하나가 덜 유능할 때, 적당히 무능할 때를 만끽할 여유를 앗아간다는 점인지도 모른다. 자유는 유능함과 비례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또한 A, B의 설정은 일견 공정한 출발 같아도 B가 내포한 무게가 더 묵직하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만하다면 무척 가치롭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가령 연애는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고시는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 나라 걱정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고시 공부는 학생 신분 벗어나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해보자. 이처럼 B를 통해 A를 이루기 위해서는 B는 권력지향적이거나 재물지향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건 비교적 또렷하다. 이를 통해 획득한 물적, 사회적 자본을 바탕으로 A를 도모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t1t2 판단법에는 A가 더 중요하고 하고 싶은 일이라고 가정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못 견뎌내는 행위는 단기적 쾌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A를 위해서 B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B를 위해 A는 덤으로 얻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지 않을까 싶다.


마이클 왈쩌(M. Walzer)는 ‘영역의 정의’, ‘다원적 평등’이란 개념을 들어 영역과 영역 사이에 높은 담장이 있어 하나의 가치가 그 영역 안에만 머무를 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된다고 주창했다. 왈쩌는 한 영역의 가치가 다른 영역에 침투해서 침투한 영역의 가치를 왜곡시키거나 무너뜨리는 일을 ‘전제(tyranny)’라고 칭했다. 다원적 가치의 평등한 영역을 보장하고,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왈쩌의 주장은 이상적이지만 충분히 음미할 만 하다. 왈쩌의 견해를 빌려 t1t2 판단법에 전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면 성격 모난 녀석의 괜한 트집이 될 공산이 크다. 고승덕 변호사님은 사람마다 다른 우선순위가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승덕 변호사님의 아름다운 공식에 약간의 첨삭을 통해 좀 더 일반화된 공식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내가 어찌어찌 좀 더 정교한 공식을 만들었다고 치더라도 그게 무슨 실익이 있을까. 이론적 모델을 가지고 승부하는 학자가 아니고서야 보통 사람들의 승부는 실천에 달려 있다. 고승덕 변호사님과 내가 차이가 난다면 목표의 유무, 삶에 대한 애착의 강약이 아닌 “자신에 대한 관대도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이다. 퇴계 선생의 『자성록』 서문에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옛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몸으로 실천함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라는 말씀이 나온다. 솔직히 이 말 잘 실천하지 못했다. 그간 내 자신도 지키지 못할 말들을 많이 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좀 더 덜 너그럽거나 아니면 그럴듯한 다짐을 남발하지 않는 게 좋겠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격려하며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말을 남겼다. 수정주의자들에 반항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뜻인 이 말을 조금 바꿔 ‘성패유리(成敗有理)’라고 써본다. 성공과 패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너무 결과 위주의 사고 같지만 그렇다고 이만한 사회적 통념 혹은 상식을 부러 폄하할 까닭이 없다. 개인이나 조직의 성공사례와 실패사례에서 부지런히 보고 배워야겠다. 고승덕 변호사님의 성공에 이유가 있듯이, 나의 이룸에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공부 좀 하자.^^;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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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극의 진실?

문화 2006. 11. 5. 23:23 |

요즘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한창입니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고구려의 탄생, 고구려의 마지막 전성기, 고구려의 패망과 이어지는 부흥을 그려내며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역사왜곡의 논란을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제 입장에서 봐도 우리나라 고대사 사료는 정말 너무 적거든요.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은 그보다 천년 전에 쓰인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비해 그 양도 1/10에 못 미칠뿐더러 그 질도 변변치 못하거든요. 우리 국사 교과서 초기 국가편의 부여, 옥저, 동예니 하는 나라들의 기록은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그대로 베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자료가 적은 고대사이니 만큼 상상력을 가미한 해석이 많이 필요합니다. 고대사 부분은 정설과 통설이 가장 적다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죠.


몇 가지 지적해보겠습니다. <주몽>에서 소서노와 주몽의 애틋한 로맨스는 역사적 사실과는 크게 다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는 주몽이 소서노와 결혼할 때 이미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딸린 과부라는 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편찬자는 백제의 시조를 온조왕설과 비류왕설 등을 기록하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하간 적어도 소서노와 주몽의 사랑은 주몽이 북부여를 나와 졸본부여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할 때 비로소 싹튼 것이지요. 소서노는 졸본지역 족장의 딸로서 주몽의 건국사업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소서노는 주몽의 첫 부인 예씨의 아들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고 주몽이 죽은 뒤 비류,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남하해 백제를 세우게 됩니다. 어찌 보면 남편을 고구려 시조로, 아들을 백제 시조로 만든 한국사의 여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략결혼에 시달린 가련한 여인일지도 모릅니다. 아참 슬프게도 우리들의 단세포 왕자 영포는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점도 밝혀야겠군요. 금와왕에게는 대소를 비롯한 일곱 아들이 있다고만 전해집니다.


이 밖에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하면 부여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2개 이상의 부여가 존재했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라고 합니다. 북부여와 동부여의 구분이 매우 어지럽습니다. 금와왕은 해모수가 부여에 자신의 나라를 세움에 따라 동부여로 옮겨간 해부루의 양자였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진한 우정을 나누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몽은 동부여 금와왕 밑에 있다가 독립했다고도 하지만 광개토태왕비와 모두루묘지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 알쏭달쏭하지요?^^; 더 놀라운 것은 <삼국유사>에는 해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족보가 난리가 납니다. 졸지에 해모수는 금와왕의 할아버지가 되어 버리고 유화부인은 금와왕의 할머니뻘이 되며, 주몽은 금와왕의 삼촌이 되어버리거든요. 뭐 부여사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혼돈으로 보이니 만큼 추후 연구 결과를 주목해봐야겠습니다. 이 밖에도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의 지리적 위치와 정치적 위상에 대한 논란도 치열하다는 점을 부연합니다.


다음으로 <연개소문>과 <대조영>에서 겹치기로 출연하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연개소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두 드라마에서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관계가 사뭇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 태종을 패주시킨 안시성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주역인 성주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사료에 없습니다. 조선 후기 송준길과 박지원이 이를 양만춘이라 밝혔지만 우리 학계는 여전히 안시성주라고만 쓰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이라고 쓰고 있다고 하고요. 여하간 두 드라마는 안시상주를 양만춘이라고 호칭합니다. <연개소문>에서는 연개소문의 지휘를 받는 부하장수로, <대조영>에는 군권의 2인자로서 요동 지역을 관할하며 연개소문의 친한 친구 사이로 나옵니다. 하지만 둘 다 사실성은 떨어집니다.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통해 영류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에 반발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주를 복속시키려다 실패하고 결국 서로를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정이 이런데 <연개소문> 도입부에 연개소문을 띄우려는 의도가 지나쳐서 당시로서는 시골 촌구석인 안시성에 연개소문이 전쟁을 직접 지휘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연개소문과 안시성주와의 서먹서먹한 관계를 반추해볼 때, 영류왕과 귀족들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연개소문이 평양성을 비우는 위험을 감수하고 안시성까지 온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는 설정이죠. 당나라와의 혈전을 총지휘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연개소문이지만 안시성 전투에 연개소문이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다는 게 정설입니다. 이 부분은 <대조영>이 좀 더 현실과 가깝게 그렸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으니 만큼 여기에서 그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강한 매력을 느낍니다. 연개소문이 665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는 잔인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그려져 있지만 그 편찬자들이 이용했던 거의 모든 사료는 자치통감,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측 자료였습니다. 연개소문에 번번이 패한 중국인들의 증오에 찬 묘사를 그대로 끌어다 쓴 건 김부식을 위시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나태라고 구박해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연개소문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고구려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라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해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워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했다는 진취적 기상을 높이 평가합니다.


저는 신채호 선생님의 긍정적 평가에 상당 부분 수긍하면서도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제도개혁이 아니라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치중하였습니다. 시스템의 개편에 집중하지 않고 1인 개혁에만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사후에 불거질 혼란에 대한 면밀한 준비가 없었지요. 아들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수여하고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세습하게 했으며, 태막리지(太莫離支), 태대대로(太大對盧) 등 집권을 위한 관직을 새로 만들어 취임하는 등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추종 세력의 발판을 넓히지 못하고 귀족세력의 반발을 유발한 점도 과오입니다. 665년 연개소문 사후에 벌어진 그의 자식들 간의 골육상쟁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지한 리더십이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결국 연개소문이 죽은지 3년 만에 고구려는 멸망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그토록 지켜내려 애썼던 고구려의 존속을 위해 좀 더 섬세하고 균형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했지만 이 대목에서는 한계를 보여줬지요.


우리는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의 리더십을 취사선택해서 오늘날에도 발현할 여지가 있는지 살펴야겠습니다. 일세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화려한 업적과 아쉬운 한계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과거의 사실(史實)을 재해석하면서 오늘날에 주는 교훈을 거름 삼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숙적이기도 했던 당 태종 이세민은 이 세상에는 구리거울(銅鏡), 사람거울, 역사거울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위징이 병사하자 이세민은 매우 비통해 하며 “사람이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성쇠와 왕조가 바뀌는 이치를 알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났으니 거울 하나를 잃게 되었구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얄밉지만 말을 제법 그럴듯하게 하네요.^^; 이 말대로 역사거울에 우리를 자주 비춰봅시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를 정착시킨 한반도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사명감도 품어봅시다.


비록 조금 미비한 점이 있더라도 앞으로 이런저런 시기를 다룬 사극이 많이 등장해서 온 국민의 역사적 소양도 넓히고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 사극 하나 보는 여유 어때요?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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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가 결국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러 갔다지만 나는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지난 7월에 생일 기념 회동으로 섭, 청원이와 함께 다녀온 지 한 달 만이다. 동빈, 홍익이와 함께 지난 7월에 봤던 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을 다시금 보니 역시 두 번째라 그런지 그 때 놓쳤던 느낌들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북한은 1998년부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황하문명과 함께 '대동강문명'을 추가하여 이를 '세계 5대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셋이서 그걸 가지고 조금 구박을 했고, 국보, 준국보 지정을 너무 남발하는 게 아니냐며 좀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의 국보는 2006년 현재 1725점이고, 준국보는 658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지정문화재가 2006년 7월 31일 현재 국보 307점, 보물 1444점, 사적 458개인 점과 비교할 때 국보의 개수가 많이 차이가 난다. 북한도 종전에는 국보, 사전 등으로 구분하던 것을 문화유물보호법이 1994년 제정되고 1999년 개정되면서 국보유물, 준국보유물, 일반문화유물 등으로 구분하게 된 것을 보인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지정사항을 공포하지 않는 관계로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그동안 남한 학계에서는 북한 국보가 주로 사적 중심으로 지정되어 동산 문화재는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으니 이번 전시를 계기로 그 인식이 바뀌게 될 모양이다.


여하간 만약에 북한 관계자가 우리의 말을 들었다면 좀 상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잖은 명품에는 마땅한 찬사를 보냈으며, 회화가 부족한 북한 문화유산의 형편에는 깊은 안타까움을 보냈다. 높이가 90cm에 달해 한반도에서 가장 큰 빗살무늬토기는 그 규모가 인상적이었고,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인 뼈피리는 모형으로 재현해보면 아직도 소리가 난다니 놀라웠다. 영명사터 돌사자는 매우 뭉개졌지만 몇 안 되는 고구려 돌조각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을 인정했다. 우리나라나 중국 등지에서 보이는 사자상은 대개 곱슬머리가 많아 그 이유가 궁금했다. 관음사 관음보살은 전신을 세밀하게 장식하고 맞뚫음기법으로 입체감을 높게 했다. 화강암보다 조각이 용이한 대리석이라고 하지만 돌을 조각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정치(精緻)했다. 절에서 쓰는 북 모양의 종인 쇠북(金鼓)은 어떤 소리일지 궁금했다 징 소리가 날지 범종 소리가 날지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개성시에 있는 불일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소탑 가운데 9층목탑으로 표상된 것에 눈길이 머물렀는데 이 유물 또한 황룡사 9층목탑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함부로 말할 건 못되지만 황룡사 복원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시행착오 없이 이론적으로 완벽히 설정해서 지을 수 있다는 게 허상이 아닐까 싶다. 회화분야는 취약했지만 제법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보였다. 특히 김홍도의 선녀도는 애틋한 사연과 함께 기억에 남는다. 서왕모의 생일잔치에 늦게 참석했다하여 청봉산으로 쫓겨났다가 강원이라는 청년을 사모하게 되어 신선들만 먹을 수 있는 영지버섯을 그에게 먹여준 것이 영지선녀로 인해 인간이 영지버섯을 먹게 되었다니 프로메테우스가 떠올랐다.^^;


진귀한 유물 중에서도 단연 발길을 멈추는 곳은 고려 태조 왕건상이다. 북한에서도 개봉되지 않은 것이라 951년경 제작돼 개성 봉은사에 모셔진 왕건상은 왕실의 가장 신성한 상징물인 동시에 국가적 의례에서 중심적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유교적 제례법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1429년(세종 11년) 태조 왕건의 현릉 옆에 묻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왕건은 수모를 당했지만 덕분에 소실 없이 후세에 전해서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왕건상은 발굴 당시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금도금을 한 조각과 얇은 비단 천들이 붙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복을 입은 상태로 사당 안에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건상에 의복을 입혀야 할지 여부를 놓고 남북이 이견이 있었으나 동대문시장에서 75,000원에 산 옥빛 비단천으로 주요 부위를 가리는 것으로 가까스로 타협을 봤다. 북한은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신라가 아닌 고려라고 보는 만큼 고려를 개창한 왕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서 벌어진 촌극으로 보인다. 왕건의 모습을 부처의 형상에 가깝게 묘사하려다 보니 왕건의 팔다리와 손가락이 곱고 미끈한 것이 전장을 누빈 장수 같아 보이지 않았다. 또 왕건상의 남근은 2cm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색욕을 멀리하라는 불교식 표현이라고 한다.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고 하여 남근이 말의 생식기처럼 오므라들어 몸 안에 숨어 있는 형상을 말한다고 한다. 성기 쪽에 있던 양기(陽氣)가 머리 쪽으로 올라가면 이렇게 된다고 하니 요즘의 거물 숭배나 음경확대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정액을 되돌려서 뇌를 보강한다는 환정보뇌(還精補腦)는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태조 황제께서는 남북이 갈라져 자신의 전시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기획특별전 관람을 마치고 찾아간 상설전시관 관람은 이번이 다섯 번째이기는 하지만 갈 때마다 새로 눈에 들어오는 문화유산들이 참 많다. 국민의 성금으로 되찾아 온 선무공신 김시민 교서를 보면서 해외로 반출된 문화유산을 찾으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지 한탄을 했다. 홍익이는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를 얼른 찾아와야 한다고 역설했고 예상되는 막대한 금액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국보급 문화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보통 그 가치를 보험가로 추산하는데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문화교류전 출품 당시 500억원의 보험에 들어 최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이 98년 미국 메트로폴리턴박물관 전시 때 300억원짜리 보험에 가입한 바 있다. 그러나 문화교류 차원에서 보험가가 낮게 책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감안하면 실제 가치는 헤아리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문화방송 느낌표 프로그램인 ‘위대한 유산 74434’가 말하고 있듯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7만 5000여점으로 추산되고 있으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얼마 전 홍익이가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 다녀와서 장군총에 받침돌 하나가 없어져서 그 부분이 붕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줄 때 마음이 아팠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습기가 차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생생한 증언에 가슴이 미어진다. 우리 국내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해외 소재 문화재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없다지만 적어도 체계화된 목록을 작성해서 끊임없이 환수 노력을 해보는 건 어떨까.


고려 묘지명(墓地銘) 기획특별전에서 최윤의 할아버지 묘지명과 기념촬영을 했다. 해주 최씨 선조이신 최윤의 할아버지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상정(詳定)은 골라 뽑았다는 뜻으로 고금의 예문을 모아 편찬한 책이니 좀 거칠게 말하면 가려뽑은 의례서로서 규정집, 법령집 같은 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명언명구 수집을 즐기는 건 어쩌면 조상님의 상정(詳定) 정신을 좀 이어받아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상정고금예문을 1234년(고종 21년)에 금속활자로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목판과 목판본을 볼 수 있는 작은 기획전에서 아름다운 장인정신을 만날 수 있었다. 대동여지도를 인쇄하기 위해 만든 목판 9장이 공개되었는데 대동여지도는 55~60장의 나무판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12장이 남아 있다고 한다. 어쩐지 함경도 지역의 목판만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기에 의아했는데 상당부분 소실된 것이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 초간본이 발간된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수정작업의 흔적을 보는 건 코끝이 시큰해지는 일이었다. 목판까지 직접 판각했다고 하니 고산자 선생 앞에서 감탄사를 아끼는 건 죄송스런 일이다. 인간의 꿈이란, 노력이란 참으로 숭고하구나 다시금 깨달았다. 신라실에서 아기자기한 신라 토용을 보며 동물모양의 토용은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찰흙 수업 교재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적나라한 성애 장면을 교재로 쓰기는 좀 민망하니까.^^;


건성으로 지나치기 일쑤인 서예실에서 좀 시간을 두고 관람을 했다. 초서체 가운데 하나인 미친 듯이 흘려 쓴 광초(狂草)를 놓고 맨 정신에 이렇게 쓸 수 있는지 갑론을박했다.^^; 나중에 생의 막바지에 여유 있는 하직을 통해 시간을 확보하고 서예를 좀 배우고 싶다. 저무는 일만 남았을 때 추한 뒷모습을 남기지 않고 싶다. 우선 서예감상법부터 좀 배워둬야겠다. 회화실의 경우 주기적으로 교체를 하다 보니 새로운 것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회화 보존의 특성상 오래 전시할 수 없으니 자주 바꿔주는 모양이다. 그런데 한 권의 책으로 된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은 교체 전시를 쪽수만 바꾸면 된다며 박장대소했다. 여전히 회화는 내게는 미개척 분야지만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 선생님의 저작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건 행운이었다. 오 선생님은 우리 그림은 세로쓰기를 하던 습관에 맞게 오른쪽 위에서 시작하여 왼쪽 아래로 가며<↙> 그림을 그렸다고 강조하셨다. 가로쓰기에 익숙한 우리는 자꾸만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며<↘> 그림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회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요란스러운 일본식 표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림을 침범하지 않는 은은한 우리 표구에 대한 예찬도 새록새록하다.


국보 제302호 진주 청곡사 괘불은 길이 10m, 폭 6.3m에 이르는 지라 정말 엄청났다. 괘불(掛佛)은 글자 그대로 '걸어 매다는 불화'를 말한다.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도를 그린 이 괘불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 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화면 가득히 배치했다.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걸개그림인데 이 때 야외에 설치하는 법단이 야단(野壇)이며, 괘불이 걸리는 날에는 절에 사람이 북적거렸기에 야단법석이란 말이 나온 건 이제 상식이 된 거 같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는 이 거대한 불화를 전시하면서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중앙박물관에서 특정 유물 1점만을 대상으로 한 이런 도록 발간은 사상 처음인 것을 보인다.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문화유산을 선별해서 이런 소책자를 많이 발간했으면 좋겠다. 높아진 문화적 수요에 공급이 절실하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케인지언이 되어 본다. 불교회화실을 지나며 나는 또 고려불화의 90%가 외국 특히 일본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광복절이라 보니 일본이 조금 더 미워졌다. 일전에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가장 마음이 끌리는 유물로 꼽은 것이 반가사유상 전시실 가는 길목에 전시된 10세기 고려 철조불두(鐵彫佛頭)인데 나 또한 무척 좋아한다. 다정다감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간의 근심걱정이 가벼워지는 치유효과가 있는 것 같다.


독방을 쓰시는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앉아서 바라보니 은은한 미소가 더욱 그윽하게 다가왔다. 반가사유상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에 걸치고(半跏), 오른쪽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명상에 잠긴(思惟) 불상의 모습(像)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식의 사색과 고뇌는 사람의 몫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반가사유상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말미암아 가장 성스럽게 다가온다. 열반을 앞둔 부처님에게 앞으로 누구를 믿고 의지하냐며 제자들이 하소연했다. 부처님은 “그대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남겼다. 이 말씀처럼 인간은 한바탕 웃고 떠들다가도 결국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상념이 젖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동빈이가 연신 미소를 찬탄하니 안내하시는 분께서 국보 제83호에 비해 미소가 더 깊다며 맞장구를 쳐주셨다. 개인적으로 국보 제78호에 금박이 좀 더 남아 있었더라면 인기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불상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열없는 짓이지만 우아하고 화려한 78호가 다보탑이라면 정갈하고 청순한 83호는 석가탑이 아닐까 싶다. 큰 맘 먹고 산 강우방 선생님의 <반가사유상> 도록을 다시금 펴봐야겠다.


청자실에서는 고려청자가 발색(發色)이 고르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역시 일품이라며 어지러울 정도로 뚫어져라 봤다. 분청사기실의 추상성 짙은 작품들은 현대미술에도 많은 영감을 줄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백자실에서 발견한 희준(犧尊, 소 문양의 술잔)과 상준(象尊, 코끼리 문양의 술잔)은 제기로 종묘나 문묘에서 행해지는 제사에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익살스런 모양에 한참을 감상했다. 술을 담는 야외용 합인 주합(酒盒)도 인상적이었는데 위와 아래는 안주를 담거나 술잔으로 대용하고, 가운데는 술병인 매우 재미난 유물이다. mannerist 선배님께서는 문화적 가치를 특수성에서 찾아야지 보편성에 기대는 건 적어도 학적 영역에서는 그 근거를 대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지적하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우리 미술이 이룩한 것은 역사적으로 한국의 정치나 경제, 문학과 과학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세계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몇 안 되는 분야라고 보고 싶다.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턱없이 낮은 것에 대한 반발심인지, 결국 촌스런 민족주의적 감수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도 마음의 양식을 과식했다. 기획특별전 공짜표를 선사해준 동빈이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표한다. 8월 가기 전에 호림박물관 소장 국보전도 보러 가야겠다. 나는 내 것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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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원 선생님이 역주한 『중국고전산문』(2001, 다락원)이라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났기에 내 나름대로 다듬고 생각을 풀어봤다.


1.
돌아가자! 전원이 곧 황폐해지려고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왕에 스스로가 마음을 육신의 노예로 괴롭혔거늘, 어찌 홀로 근심에 빠져 슬퍼하는가? 지난 일은 탓해봐야 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또한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노라. 실로 길을 잘못 들어 헤맸지만 멀어진 건 아니기에, 비로소 지금이 옳고 어제가 그릇됨을 알았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以獨悲? 吾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途其未遠, 覺今是而昨非.

동진(東晋)의 저명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나이 41세 되던 해에 평택현령(彭澤縣令)에 부임하게 된다. 지금의 면장쯤 되는 자리였는데 봉급은 쌀 다섯 말이었다. 그런데 상급기관인 군의 독우(督郵)가 평택현을 시찰하게 되니 현리(縣吏)가 위관을 갖추고 나아가 맞이할 것을 권했다. 자유로운 영혼 도연명은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시골뜨기 아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으랴(吾不能爲五斗米折腰, 拳拳事鄕里小兒)!”라고 탄식하며 미련 없이 사직하고 불후의 명작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린다. 나는 귀거래사보다 직장을 때려치는 도연명이 더 감명 깊다.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는가(吾不能爲五斗米折腰!)! 이렇게 외치고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
태사공(사마천 자신)이 말하길, “부친께서 말씀하셨다. ‘주공이 죽은 뒤로부터, 오백 년이 지나 공자가 태어났고, 공자가 죽은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백 년이 되었다. 마땅히 어느 누가 능히 태평성세를 계승하며, 주역을 바로 해석하고, 춘추를 이어 지으며, 시경, 서경, 예기, 악경의 취지를 근본으로 삼아야 할 때가 되었는데, 너는 여기에 뜻이 있느냐?’ 제가 어찌 감히 양보하겠습니까?”

太史公曰, “先人有言, ‘自周公卒, 五百歲而有孔子, 孔子卒後, 至於今五百歲. 有能紹明世, 正易傳, 繼春秋, 本詩書禮樂之際, 意在斯乎. 意在斯乎.’ 小子何敢讓焉.”

“어찌 남에게 양보하겠는가?”라는 말을 하며 주공과 공자의 길을 계승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마천이 부럽다.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명심보감』으로 수업을 하셨던 선생님께서 당신이 무척 아끼는 구절로 꼽으신 것이 견선여갈(見善如渴)이었다. 계선편(繼善篇)에 나오는 말로 “태공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을 본 듯이 주저하지 말며, 악한 일을 듣거든 귀머거리 같이 하라’ 또 말하기를, ‘착한 일은 모름지기 탐내고, 악한 일은 즐겨하지 말라’”는 구절의 일부다. 나는 과연 어떤 일을 남에게 양보하지 않고, 목마른 듯이 탐낼 수 있을까. 철없던 시절에는 할 게 너무 많아서 망설였다면 요즘은 할 수 있는 게 너무 적은 거 같아서 주저하게 된다.^^; 사마천 흉내를 좀 내보자면 나는 나보다 999년 전에 태어나신 문헌공 최충 할아버지나 나보다 꼭 100년 앞서 태어난 J.M 케인즈 같은 경제지사(經濟之士)가 되고 싶다.


3.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고, 소인은 혀로 말한다.

君子以行言, 小人以舌言

『공자가어』 「안회」에 있는 말이다. 이 구절은 안회가 공자에게 “소인의 말과 군자의 말이 같습니까? 군자 된 사람은 이를 분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질문한 것에 공자가 답한 것이다. 퇴계 선생의 『자성록』 서문에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옛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몸으로 실천함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간 하고 싶은 말이 넘쳐서 내 자신이 지키지 못할 말들을 너무 많이 한 것은 아닐까. 너무 혀로 많이 말해온 거 같아 부끄럽다.


4.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하지 말며, 올해에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날과 달이 가고, 세월은 나를 위해 더디 가지 않는다. 아! 늙었구나! 이 누구의 허물인가?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日月逝矣歲不我延, 嗚呼老矣是誰之愆?

『명심보감』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주자의 말씀이다. 세월은 나를 위해 더디 가지 않는다(歲不我延)는 말처럼 무서운 게 없다. 이것 말고도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으로 시작하는 주자의 권학시와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로 시작하는 도연명의 권학시도 끔찍이 좋아한다. 퇴계 선생은 『자성록』에서 “다만 이 이치를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 어려운 것이며, 또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참을 쌓아 오래도록 힘쓰기가 더욱 어렵다(惟此理, 非知難而行難, 非行難而能眞積力久爲尤難)”고 하셨다. 퇴계 선생은 학문에 있어서 참을 쌓고 오래 힘쓴다(眞積力久)는 노력을 매우 강조하셨다. 학문은 단순한 앎이라거나 일시적 선행이 아니라 조바심 내지 말고 애면글면 해나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서둘지 않고 쉬지 않는 노력이 부디 배반의 장미를 꽃피우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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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후 황태손 주윤문이 즉위하여 건문제(建文帝)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원장의 넷째 아들과 맞손자 사이에서 골육상쟁을 벌인다. 건문제와 연왕(燕王) 주체와의 전쟁을 역사는 정난(靖難)의 변이라 부른다. 북경 교외에 있는 명나라 황제의 집단 무덤인 명십삼릉(明十三陵)에 묻히지 않은 명나라 황제는 세 사람이다. 홍무제는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거기서 죽었기 때문에 남경에 있는 명효릉(明孝陵)에 묻혔고, 7대 경태제(景泰帝) 주기옥은 6대 정통제(正統帝) 주기진이 다시 8대 천순제(天順帝)로 복위하면서 명십삼릉이 아닌 금산에 묻히게 된다. 정통제/천순제는 자신의 제위를 빼앗았던 동생 경태제를 폐하고 왕으로 낮춘다. 그래서 명십삼릉에 안장하는 대신 경태릉(景泰陵)을 조성해 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게 된다. 건문제는 영락제가 남경으로 쳐들어왔을 때 실종되어 생사가 밝혀지지 않아서 아예 무덤조차 없다. 참고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17대 숭정제(崇禎帝) 주유검은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자 자금성 뒷산에서 목매어 죽는다. 불행 중 다행인지 청나라의 배려로 황제의 예로 명십삼릉에 묻히게 된다.


영락제는 건문제의 치세 4년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무던 애쓴 모양이다. 실제로 명의 기록에는 건문제 시대가 누락되어 있다. 홍무제는 홍무 31년에 죽는데, 영락제가 등극한 이후 명의 문서에는 홍무가 35년 간 지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는 영락제가 아버지 홍무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런 눈 가리고 아웅이 얼마나 통하겠는가. 여하간 정권을 장악한 영락제는 건문제의 옛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철현(鐵鉉)은 영락제를 보고도 의연히 돌아서서 굽히지 않고 항변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영락제는 그의 귀와 코를 잘라서 삶은 후에 그의 입 속에 넣고는 맛이 어떤지를 물었다. 철현은 “충신과 효자의 고기가 어찌 맛이 없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중국사는 이처럼 민망할 정도로 잔인한 이야기들이 많다.^^; 영락제는 건문제 측근들을 무참히 제거했지만 방효유(方孝儒)는 스승이기도 하거니와 명성 높은 대학자이기에 회유하기 위해 즉위 조서를 짓도록 명했다. 영락제는 그가 자신의 편이 된다면 황위를 찬탈한 정통성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한사코 쓰지 않겠다는 방효유에게 영락제는 강제로라도 조서를 쓰게 할 작정으로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다. 방효유는 마침내 붓을 들어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종이에는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라는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영락제는 노발대발하며 “네가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설마 네 죄가 구족(九族)에게까지 미쳐도 좋단 말이냐?”라고 말한다. 그러자 방효유는 “구족이 아니라 십족(十族)을 멸해도 할 수 없는 일이오!”라고 일갈한다. 영락제는 칼로 방효유의 입을 귀 밑까지 찢도록 하고 방효유의 본가, 외가, 처가 친척과 십족인 친구, 문하생을 잡아들여 방효유 앞에서 한 명씩 차례로 처형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방효유를 취보문 밖에서 책형에 처했다. 이 때 죽임을 당한 사람이 847명이라고도 하고, 873명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벌일 것이다. 역사가들이 영락제의 잔인함이 진시황을 능가했다고 한 것은 오히려 무딘 표현이다. 명나라판 수양대군인 영락제를 도무지 곱게 볼 수 없는 것은 내 옹졸함 때문인가.


흔히들 명나라 시대에는 송나라 때 볼 수 있었던 기개 있는 선비들이 적었다고 한다. 명나라의 숭정제는 이자성군이 몰려올 때 그를 지키려는 대신과 군사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내시 왕승은만이 옆에 남아 그가 나무에 목을 매는 최후를 함께 했다고 전한다. 이에 반해 송나라의 황혼은 누추하지 않았다. 사실 남송과 원나라의 전력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송은 몽골에 맞서 독자적으로 항전했다. 1276년 수도 항주가 함락되고 공제(恭帝)가 투항하여 사실상 멸망했음에도 마지막까지 송나라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다. 문천상(文天祥), 육수부(陸秀夫), 장세걸(張世傑)을 일컫는 송말삼걸(宋末三傑)이 대표적이다. 바닷가인 애산에 임시로 망명정부를 세우고 버텼지만 1279년 마침내 몽골군에 함락된다.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물에 뛰어들었고, 송나라 부흥을 위해 베트남으로 향하던 장세걸은 태풍을 만나 침몰해 죽었다. 대도(북경)로 압송된 문천상은 그의 재능을 아낀 원 세조 쿠빌라이칸이 여러모로 구슬렸으나 끝내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문천상이 남긴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인생은 예로부터 누구나 한번 죽는 법, 일편단심을 남겨서 청사를 길이 빛내리라(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靑)”


천하의 쿠빌라이칸도 문천상의 정신을 빼앗지 못했다. 송나라의 최후를 장식한 선비들이 많았던 것은 문치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문인들을 우대했던 송 태조 조광윤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광윤이 황위계승자에게 남긴 석각유훈(石刻遺訓)의 내용은 무척 간단했다. “송에 나라를 물려준 후주 왕실 시씨를 자자손손 돌봐줄 것, 황제의 행동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사대부를 죽이지 말 것” 이 두 가지였으니 외우기도 쉬웠을 것이다. 이처럼 선비의 명예를 존중하고 간언을 미워하지 않은 정신이 바로 송나라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반면 영락제가 자행한 방효유의 멸족은 헌정질서나 대의명분을 지키기보다는 현실의 힘에 굴복하라는 압력이었다. 영락제의 만행은 대다수 지식인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명나라의 마지막이 그토록 시시했던 것도 결국 자업자득인 셈이다.


몽골의 장수 장홍범(張弘範)이 장세걸에게 항복을 설득했을 때 장세걸은 “나는 항복하면 살고 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의리상 마음을 변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제가 누릴 권세와 이득을 알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켜낸 배짱과 용기를 헛된 개죽음으로 칭하고 싶지는 않다. 의병장 조헌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맹세하는 말에서 “오직 의(義)라는 한 글자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두라(唯一義字 終始念之)”고 역설했다.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한 마지막 결전에 앞서서도 “오늘은 다만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삶이나 나아가고 물러섬에서 의(義)라는 한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今日只有一死 死生進退 無愧義字)”고 말했다고 한다. 이기적인 본연을 거스르는 행동은 감동을 자아내게 마련이지만 의리의 사나이에도 등급은 있다. 방효유, 송말삼걸, 조헌, 사육신 같은 이들이 상급이라면 전두환의 충복으로 유명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하급이라 할 만하다. 상하를 가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지킬만한 것을 지켰는지 여부를 보면 된다. 참여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 돌변한 허준영 전 경찰청장을 떠올리면 장세동에 대한 박절함이 조금 누그러지지만 결국 오십보백보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파레토는 “엘리트란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우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로 정의하며, “엘리트의 자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역사는 그들의 등장과 몰락으로 이뤄지지만 항상 엘리트가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여야가 바뀌고, 시민단체 인사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노조가 경영에 참가하고, 여성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결국 신진 엘리트일 뿐이라는 통찰에 매섭다. 이러한 엘리트 이론은 지배계급의 세습을 은폐하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나는 엘리트의 존재에 충분히 긍정적이다. 물론 의회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바탕으로 시민의식을 갖춘 대중을 상정한다. 아울러 다원주의 사회에서 부문별로 다른 전문성을 갖춘 다채로운 엘리트가 성립 가능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갖춘 엘리트, 의회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다원적 가치를 수용하는 문화가 얼마든지 조화될 수 있다고 본다. 엘리트의 위상과 역할, 분류에 대한 이견 속에서도 엘리트의 존재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부러 줄이지 않는다면 엘리트가 차지하려는 부와 명예와 권력은 늘 희소해서 다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이 향유하는 만큼 책무를 다하는 엘리트들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삶은 단 한 번뿐이라고 믿는 사람은 대충 살 생각도 없지만 기왕이면 호의호식하며 살고 싶다. 누군가 나 대신 손해배상과 손실보상을 해줄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누리는 자유만큼 책임을 감내하며 열심히 착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방효유의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효유는 충절로 이름을 빛냈지만 그와 관계 맺은 숱한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었다. 방효유가 제 아무리 선비정신의 고갱이를 보여주고, 지식인의 절개를 드높였다고 한들 억울하게 죽은 목숨 앞에서는 거대한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고약한 사고실험으로 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건 괴롭다. 천만다행으로 개명된 천지에 살고 있는지라 적어도 그런 무도한 경우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러나 입술 꽉 깨물고 연적찬위(燕賊簒位)라고 써내려가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지인들을 북돋워주는 사람이 되기란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지켜야할 것을 지키면서 삶의 보람을 찾는 의리 있는 녀석이 되어보도록 하자. 방효유의 고뇌를 품고, 문천상의 기상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조금 나은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으리라. 제대로 잘 살기란 참 까다롭다. - [小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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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한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을 치르고 왔다.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이어야 하는데 가채점 결과 70점 정도 받은 것 같다. 꾸준히 틈틈이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평소에 한자를 좋아했던 정분 덕분인지 벼락치기 한 것 치고는 선방한 셈이다. 그래도 세세한 실수는 못내 아쉽다. 가령 맛볼 상(嘗)자에 날 일(日)을 넣어야할 것을 눈 목(目)을 넣는다거나, 전전반측(輾轉反側)에서 측(側)자에 사람 인(亻)변을 넣을 것을, 삼수 변(氵)을 넣어버렸다거나 하는 식의 자잘한 실수는 신경이 쓰인다. 꼼꼼하게 보지 못한 티가 확 난다. 본래 어문회 한자시험이 현재 인정되는 국가공인 한자자격증 가운데 가장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다. 다른 시험들은 100점 만점에 70점 이상이면 되는 것을 80점 이상을 고수하는 점은 그렇다고 쳐도, 요즘 거의 의식되지 않는 장단음 문제를 10문제(200문제의 5%)나 내는 것도 엄청난 압박이다. 고등학교 시절 3급, 2급 시험을 치를 때 장단음 문제는 그냥 찍고 말았지만 합격선이 높은 1급 시험의 경우에 장단음 문제 10개를 틀렸다고 가정하고 출발하니 여간 조마조마한 게 아니다.


고3 수험시절 주위의 걱정스런 눈초리를 무마해가며 5월에 2급 자격증을 땄다. 한 주 뒤에는 고대에서 한문 경시대회가 열렸고 한문은 그 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지만 아직 기억이 생생한 한자를 조합해서 제법 문제를 풀었던지 장려상으로 턱걸이 입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한문이나 현대 중국어는 고립어(孤立語)이기 때문에 문법적 관계가 주로 어순에 의해 표시된다. 영어처럼 시제나 진행, 완료형에 따라 동사가 변하는 것도 없고 생각보다 문법이 간소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한자 뜻만 잘 알고 있으면 어순에 주의해서 어찌어찌 해석은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한자어가 한문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고립어인 중국어와는 달리 한국어는 토씨(助詞)와 어미를 활용하여 말에서 각 낱말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나타내는 교착어(膠着語)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문을 읽을 때도 토씨나 어미를 사용했고, 여기서 구결(口訣), 이두(吏讀), 향찰(鄕札) 등의 표기법도 파생된다. 참고로 고립어는 문장의 순서를 바꾸면 아예 뜻이 바뀌지만 교착어는 문장의 순서가 바뀌어도 뜻이 거개 통한다. 가령 “나는 내일 서점에 갈 것이다”는 문장을 “내일 나는 서점에 갈 것이다”, “나는 갈 것이다, 내일 서점에”, “내일 나는 갈 것이다, 서점에”라고 해도 뜻이 바뀌거나 하지 않는다.


여하간 한자 자격증에 대해 몇 가지 험담을 하고 싶다. 우선 네 군데의 국가공인 한자 자격증의 급수별 배정한자가 많이 차이가 나는 점은 못마땅하다. 네 단체가 똑같은 한자습득능력을 측정하려다 보니 차별화를 위해 배정한자를 달리 한 모양이지만 수험자 입장에서는 당혹스럽다. 1급은 3,500자가 배정되어 있는데 네 자격증을 모두 따려면 5,000자 가까이 공부해야 한다니 어지간한 중국 사람도 이렇게 한자를 많이 공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으로 한국어문회에서 기출문제의 공개를 꺼리는 점도 불만이다. 수험생이 문제를 알게되면 수험생이 채점한 점수와 어문회에서 채점한 점수가 차이나서 이런저런 클레임이 걸려올 것이 귀찮기도 할 것이다. 그 많은 시험지를 한자 전문가가 하지 않는다면 경미한 실수나 오차가 있을 텐데 그걸 감추기도 힘들 테고 말이다. 수험생들이 제 기억을 복원해서 힘겹게 시험문제와 모범답안을 만들어내는 수고로움을 당최 언제까지 전가할 것인가. 이런저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시험 때는 일취월장(日就月將)해야겠다. 11월에 다시금 1급 시험에 도전하기 전까지 평소에 좀 공부해야겠다. 내 대학 입학에 지대한 공헌을 해준 한자와의 인연을 아름답게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서예학원에 다니면서 먹을 갈던 그 때부터 나는 한자와 한문을 편애하게 되었다. 물론 그 편애는 모국어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한국어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비록 전문적인 한국어 탐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맛깔스런 글을 지어내는 것은 내 평생의 꿈이다. 나는 내 모국어의 품이 넉넉했으면 좋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한자어도 마땅히 한국어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언중의 관심에서 벗어난 옛 한자어들이 서서히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툭하면 불거지는 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의 문제에서 이미 한글 전용론의 승리는 완연하다. 나 또한 한자가 혼용된 텍스트를 읽는 것은 세로쓰기로 된 책을 읽는 것만큼 더디고 꺼려진다. 그러나 나는 한글만을 쓰더라도 필요에 따라 괄호 안에 병용하는 건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한국어를 풍요롭게 쓰려는 사람은 마땅히 한자도 좀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반드시 옳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결코 지적 허영이나 낭비가 아니라 지적 알뜰살뜰함이라고 생각한다.


한자는 물론 중국 사람의 글자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인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자를 아쉬운 대로 잘 써왔다. 그러나 한국어는 영어의 알파벳처럼 다음절 언어인데 반해 중국어는 단음절 언어라 한국어를 표기할 때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국어와 중국어는 어순까지 다르니 우리 글자가 없던 시기에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데 얼마나 고초가 심했을 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두나 향찰 같은 한자차용표기법(漢字借用表記法)이 쓰였지만 한계가 적잖았을 것이다. 이두가 발달한 형태인 향찰의 경우 한국어의 입말을 가능한 한 가장 완전히 표기하게끔 고안된 서기 체계다(고종석, 『국어의 풍경들』, 문학과지성사, 1999, 36~47쪽 참조). 이두는 생략해도 한문이 그대로 남아 이해할 수 있으나, 향찰은 생략하면 문장 전체가 없어져버린다. 향찰로 표기된 문장은 한문이 아닌 한국어 문장인 셈이다. 만약 향찰이 좀 더 발전했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의 가나 같은 보조적인 음절 문자를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향찰은 식자층의 외면으로 고려 초기에 소멸해버렸다. 이두와 한문만으로 제대로 된 언어생활이 힘들었기에 한글 창제를 할 유인이 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향찰이 아무리 정교하게 개발되었더라도 한자를 통해 한국어를 온전히 구사할 수 없었기에 한글 창제 같은 노력이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고종석 선생님이 누차 지적하셨듯이 한글은 음소 문자이면서도 낱글자를 음절 단위로 네모지게 모아씀으로써 음절문자의 효과를 내고 말았다. 실제의 운용은 일본의 가나 같은 음절문자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세종대왕을 위시한 훈민정음을 만든 분들은 처음부터 한자가 끼어들 여지가 있는 표기법을 염두에 두었다는 주장에 동감한다. “ㅎㅢ마o(希望)”, “lㄴ새ㅇㅁㅜ사ㅇ(人生無常)”이라고 쓰는 것보다 “희망(希望)”, “인생무상(人生無常)”으로 표기하는 것이 한자가 들어가기가 쉬움은 몇 번 해보면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요컨대 한글 한 음절과 한자 한 음절이 일대일로 대응되면서 한자가 개입될 여지가 충만해졌다. 이는 한국 한자음을 중국 한자음에 가깝게 고치고 싶다는 한글 창제자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음절합자식(音節合字式) 철자법을 낳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창제자의 의도 혹은 시각적 조화가 한자를 배워야한다는 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자를 쉽게 베어낼 수 없게 된 까닭은 규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한자 습득이 한자어 이해를 돕는 것은 한글전용이란 원칙과 별개로 얼마든지 병행해서 추구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한글 전용이라는 밥상을 차리고 싶어도 한자라는 반찬이 없으면 곤란할 정도로 한자어는 한국어에 깊게 침투해있다.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적정 수준의 한자 학습이 부당한 노동력 낭비이며 인권 유린(?)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종종 이야기되는 한자문화권이라는 개념은 그리 크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자는 한자문화권 밖으로 더 퍼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영어 공부에 쏟는 정성의 일부만 한자 공부에 두면 좀 더 풍성한 언어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동양고전도 많이 읽으면 금상첨화다. 여하간 내 지인들에게 한자 자격증 시험에 도전해볼 것을 권한다. 시험 본다는 핑계로라도 좀 배워두면 좋겠다. - [小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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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말들의 풍경 19편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이 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따온 제목인 듯하다. 고 선생님은 당신이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낱말 열 개로 가시내, 서리서리, 그리움, 저절로, 설레다, 짠하다, 아내, 가을, 넋, 술을 꼽았다. 김수영 시인은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꼽았다. 김수영은 그 수필에서 “그런 것(아름다운 말)을 아무리 많이 열거해 보았대야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는 되지 않고,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차피 개인에 따라 다른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가 설령 회고 미학에 그치면 어떠한가. 그렇게나마 모국어를 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노력이고 용기다. 서로의 아름다움이 섞이고 스밀 때 보편적인 언어미도 시나브로 누릴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런저런 진통 끝에 내가 아름답게 여기는 우리말 열 개를 뽑아봤다. 개인적으로 한자어도 한국어에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고유어 혹은 토박이말로 한정했음을 밝힌다.


하나, 벗. 벗은 사랑만큼이나 파생되는 게 많은 말이다. 아니 오히려 품이 더 크다. 만남과 인연이며, 그리움과 설렘이며, 희노애락과 훼예포폄이 얼룩져서 한 사람의 삶을 빚어낸다. 『후한서』 송홍(宋弘)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후한 광무제가 누이를 재혼시킬 사람을 물색하다가 송홍을 불러 “옛말에 지위가 높아지면 벗을 바꾸고, 재산이 생기면 아내를 바꾼다고 하던데, 공은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諺言貴易交, 富易妻, 人情乎?)?”라 물었다. 송홍은 “신이 듣기로 가난하고 천할 때의 벗은 잊지 말아야 하며, 술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으며 함께 고생했던 아내는 부귀한 뒤에는 호강시켜준다고 했습니다(臣聞貧賤之知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라고 말했다.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도 미천한 사람을 배필로 삼지 말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강수가 “옛사람의 말에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고 빈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보통 여기서 조강지처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지만 빈천지교도 두고두고 곱씹을만하다.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영속성보다는 일시성이 두드러진 미래사회의 인간관계는 한 사람과 총체적인 관련을 맺기보다는 그 사람의 한 부분에만 관련을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만나지도 않고 이해도 달리하는 친구들 대신에, 새로운 친구들을 탐색하는 사회적 발견의 냉혹한 과정”을 통해 효용가치가 없는 옛친구들은 빨리 버리거나 잊고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만한 새 친구를 찾아야한다는 그의 주장이 날카롭다. 그러나 그 탁견은 내 자신이 좀 더 진지한 유쾌함을 나눌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겠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나는 내 벗들과 『논어』에 나오는 구이경지(久而敬之)할 수 있기를 꿈꾼다.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라고 해석하면 친해지더라도 존경심을 잃지 않고 범속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무심해지지도 않고, 세월이 지났다고 차갑게 식지 않는 그런 존재 말이다. “오래 사귈수록 공경하게 된다”라고 해석하면 오래 사귀어도 그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기보다는 강점이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그 약점과 한계마저 품을 수 있을 만큼 그릇이 커진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간에 벗과 관계맺음의 이상향으로 삼을만하다. 『명심보감』에서 “얼굴 아는 이야 천하에 가득하되, 마음 아는 이는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라는 구절이 있지만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요. 다 스스로 말미암을 뿐이다. 내 주위 사람은 다 착한 거 같다고 말씀하시던 어느 형이 생각난다. 선한 인연의 시작은 이런 자세부터다.


둘, 끼니. 중세어로 ‘끠’는 시간을 말하는 고유어였다고 한다. 지금은 ‘때’에 밀려 쓰이지 않지만 ‘같은 때’를 의미하는 ‘함께’라는 말과 ‘밥 때’를 의미하는 끼니, 끼에서 흔적이 남아 있다. 『사기(史記)』에 “임금 노릇을 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爲天, 民以食爲天)”는 말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6년 기사에서 세종대왕이 백성들이 부지런히 농사에 힘쓸 것을 하교하면서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얼마 전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국민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것이 정치의 근본(制民之産)이란 맹자의 경구를 교훈 삼아 어려운 서민경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리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기로서니 날도 좀 가리지 못하고 골프를 쳐서 국민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는 지도자들이 좀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전태일 열사가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건 그 얼마나 인간적인가. 먼 훗날 캡슐 하나만 먹으면 끼니 해결이 되는 약품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이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배곯는 사람에 가장 먼저 눈길을 보내고 손길을 건네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다”고 말씀하셨다지만 인생이 한번뿐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그 천국은 얼마나 허망한가. 빈곤 문제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건 비겁하다.


삼봉 정도전 선생은 “먹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큰 일이구나. 하루라도 먹지 않을 수 없고, 또 하루도 구차히 먹을 수 없다. 먹지 않으면 목숨을 해치고, 구차히 먹으면 의리를 해친다(食之於人 大矣哉 不可一日而無食 亦不可一日而苟食 無食則害性命 苟食則害義理)”고 말했다. 무척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시경』에서 “공짜밥을 먹지 않는다(不素餐兮)”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삼시 세 끼 밥값을 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늘 돌아볼 일이다. 군침 떨어지는 산해진미 앞에서 잠깐이나마 “먹기 위해 살지 말고, 살기 위하여 먹으라”라는 키케로의 말도 떠올려보자. “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 저 생의 본능이,/ 상주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 가족에게도/ 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라고 노래하는 이수익 시인의 「밥보다 더 큰 슬픔」을 찬찬히 읊조리면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 기쁨을 북돋우기 위해서든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든 부지런히 먹고 마셔야 한다. 『도덕경』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운다(虛其心, 實其腹)”라고 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지(Ignorance)가 아니다. 선의의 무심함을 발휘하는 넉넉함을 말한다. 생활을 간소하게 꾸리고, 헛된 욕심으로 간계를 꾸미지 않고, 제 영혼의 순수함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부러 배부른 돼지를 경멸하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숭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다.


셋, 차마. 차마 뒤에는 부정의 몸짓이 따라온다. 그러나 그 부정은 애틋하고 안쓰럽고 안타까워 감히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이것을 하라고 강권하는 사회보다는 이것만은 차마 할 수 없지 않느냐고 호소하는 사회가 좀 더 열려있고 낮은 사회가 아닐까 싶다. 차마 할 수 없는 일은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포지티브 시스템보다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나아가서 자유와 권리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우직한 사람의 어리석음이 세상을 바꾼다고도 하지만 그 우직함은 무언가를 기꺼이 하는데서 있다기보다는 차마 이것은 못하겠다는 데서 출발한다. 남이 모른다고 해서 몰래 나쁜 짓을 하면 결국에는 천벌을 받는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 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못된 짓 좀 할라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차마 이 짓거리는 못하겠다며 팽개치는 사람이 그립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바보들이 많아야 세상이 좀 더 넉넉해진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 바보들에게 함부로 눈 흘기지 말자. 우리는 저마다 차마 못하는 구석은 하나씩 있게 마련이니까. 그것을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남에게 모질게 굴지 못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품는 희망의 고갱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이태. 두 해라는 뜻의 이태에서 ‘이’는 원래 ‘읻’으로 둘이란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이틀이나 이듬해처럼 ‘읻해’에서 발음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자주 틀리는 맞춤법 가운데 ‘며칠’이 있다. 종전에 ‘몇일’과 ‘며칠’을 둘 다 쓰던 것이 1988년 새 한글맞춤법에서 ‘며칠’로 통일된 것이다. 한글맞춤법 제27항은 “둘 이상의 단어가 어울리거나 접두사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은 각각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고 규정하지만 [붙임2]에서 “어원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원형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그 용례로 ‘며칠’을 들고 있다. ‘며칠’은 ‘몇-일(日)’로 분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질 형태소인 ‘몇’과 ‘일(日)’이 결합한 형태라면 [멷닐->면닐]로 발음되어야 하는데, 형식 형태소인 접미사나 어미, 조사가 결합하는 형식에서와 마찬가지로 ‘ㅊ’ 받침이 내리 이어져 [며칠]로 발음된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몇 월(月)’의 경우 두 음절 사이에서 발음의 끊어짐 현상이 일어나서 ‘몇’이 [멷]으로 발음돼 [멷월->며둴]이 되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틀도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 단어를 읻흘이나 잇흘로 적는다면 ‘흘’은 사흘, 나흘 등의 흘과 공통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읻, 잇’은 무슨 뜻의 형태소인지 알 수가 없다. 한자어 ‘이(二)’와 결부시키기도 어려운 것”이라니 알쏭달쏭하다. 요는 며칠, 몇일의 ‘일’이 한자어 ‘일(日)’에서 온 것인지 이틀, 사흘, 나흘의 ‘흘’에서 온 것인지 통일이 되지 않아서 이런 혼선이 생겼다. 날짜를 나타내는 단위 명사의 어원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자주 쓰는 언중의 입장에서 좀 섭섭한 일이다.


이태는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간이다. 이태라는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이 내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프로젝트형 인간관계에 치이는 시대에 이태를 숭상하는 내가 고지식하게 보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이태라는 시간은 관계가 소원해지는 심리적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가수 김동률의 2집 ‘希望’에 실려 있는 ‘2년 만에’라는 노래에서 이태 만에 돌아온 사람의 심정을 말한다. “2년 만에 다시 이렇게 돌아왔는데/ 이만큼만 기다리면 됐는데/ 곁에 없다는 게 그렇게 그대 힘들었나요/ 그럼 나는 쉬웠을까요”라면서 “생각이 잘 안 나요 마지막 모습이”라고 탄식한다. 세월이 빠르다지만 이태는 제법 긴 시간이다. 이태 정도 못 보고 이야기 나누지 않으면 어지간한 금란지계(金蘭之契)도 느슨해지게 마련이다. 몇 십 년 만에 학창시절 동창을 찾아도 낯설지 않게 환담을 나눌 수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란이 있어 부득이 헤어진 게 아니라면 세파에 시달리느라 서로가 잊어버린 것이다. 미디어평론가 변정수 선생은 “인터넷은 사랑을 싣고?”라는 칼럼에서 “내내 친하게 잘 지내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온다간다 말 한 마디 없이 실종되었던 건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이미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다시 만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는 말에 조금 거부감이 들지만 내 자신이 이미 지금도 충분히 겪고 있는 일이다. 내 곁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겠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대개는 옳다.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이 늘어나서 어쩔 수 없이 소홀해지더라도 있을 때 잘했다면 서서히 잊히고 다시 재건할 수 있는 여지도 남길 수 있으리라. 게으른 주제에 미련이 많다.


다섯, 젊음. 젊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나는 다짐을 남발할 수 있는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부담 없이 작심삼일할 수 있고 허영심에 들떠 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게 젊음이다. 이렇게 잉여적 행동을 만끽할 수 있는 게 젊음이기에 그 자체로 특권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는 사무엘 울만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공감한다. 각박한 세태에 묻어가면서도 짬짬이 옛 다짐을 기억하고, 어린아이처럼 즐길 수 있다면 젊음을 사수하지는 못해도 조금 천천히 잃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즐겨 보았던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노자 강의 한 토막이 떠오른다. 청춘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발견할 때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헌신할 때 평화가 온다는 그 말씀이 얼마나 가슴 뛰게 했던가. 색신(色身)은 늙어도 법신(法身)은 함부로 늙지 말자.


극작가 배삼식 선생님은 “제갈량의 오만”이라는 칼럼에서 “결국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유능해’질 것이고, 세상사에 묶여 닳고 닳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젊은이들이 잠깐이라도 그들의 ‘무능함’을 즐기며, 도도하고 오만하게 폼 잡을 여유를 우리 사회가 주기 바라는 것은 영 배부른 소리일까”라고 말한다. ‘유능 권하는 사회’에서 젊음은 너무 담백해지다 못해 메마르고 있는 건 아닐까. 삼고초려한 유비를 맞이하는 공명선생이 지은 시는 호방함이 일품이다. “큰 꿈을 누가 먼저 깨닫는가/ 일평생 내 스스로 알고 있다네/ 초당에 봄잠이 넉넉한데/ 창밖에 해는 아직도 더디 가는구나(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라며 유비를 따라나선 자신이 세상의 먼지에 뒤덮일 것을 자조하면서도 포부를 품는다. 젊은 날의 큰 꿈이 너무 빨리 깨버리게 하지 말아야겠다. 그나저나 세월은 나를 위해 더디 가지 않는다(歲不我延)는 말, 정말 무섭다. 젊음은 칼날 위의 꿀물인지도 모른다.


여섯, 고맙다. 어원이라는 게 이설이 많지만 ‘고맙다’의 어원은 무척 재미나다. ‘고마+ㅂ다’에서 ‘고마’는 본래 신(神)을 일컫는 말이어서 ‘고맙다’는 존귀하다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즉 고맙다는 우리말을 예전 의미로 풀어보면 상대방의 존귀함을 신처럼 받든다는 극존칭이 탄생한다. 당신이 내게는 하느님처럼 존귀한 분으로 여겨져서 공경한다는 표현이라니 이토록 절절한 감사의 말이 흔치 않을 것 같다. 이 풀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고맙다는 말을 쓸 때 이런 마음을 품어보면 좋겠다. 불가에서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하듯이 말이다. 곳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하는 일마다 불공을 드리는 마음으로 둘레 사람들을 고마워하자. 문득이 어떤 이가 얄미울 때 그에게 신세진 것은 없는지 내가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겠다. 남에게 고마웠던 일은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금세 잊힌다. 고마웠던 기억만 건사하기에도 우리 두뇌 용량은 버겁다.


일곱, 너그럽다. 너그럽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말들은 무척 많다. 어질다, 미쁘다, 미덥다, 살갑다, 베풀다, 나누다, 노느다 같은 말들이 언뜻 떠오른다. 하지만 너그럽다는 나와 다른 것을 인고(忍苦)한다는 의미가 좀 더 강한 것 같다. 똘레랑스라는 말이 여기저기 회자되고 있지만 자신이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을 보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너그러움은 양시론을 휘두른다거나 줏대 없이 일단 얹혀서 가자는 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송논쟁이 한창일 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항했던 남인 논객 윤휴는 주자의 해석과 다른 문장해석을 했다는 이유로 송시열 일파들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급기야 억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받았다. 교조적인 이념에 반기를 들었던 그를 포용하지 못한 것은 조선의 비극이었다. 나라에서 선비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푸념을 다시 반복해본다.


그러나 오늘 날에도 송시열과 같은 독선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궤멸시켜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이 세상은 성인과 악당이 못 잡아먹어 안달인 아마겟돈(Armageddon)의 연속이 될 것이다. 조선 당쟁에서 배워야할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이다.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인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이 혼란스러울 때 칼 포퍼가 말한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라는 경구를 습관처럼 꺼내보자. 진수의 삼국지 오나라 편에 있는 제갈량 조카 제갈각의 전기에는 “그 사람의 약점으로 그의 장점을 버려서는 안 된다(不以人所短, 棄其所長)”는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의 약점에 천착하기보다 장점을 도두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종대왕 때 박연이 왕에게 시각장애 악공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天下無棄人也)”고 말한다. 정말 마음을 흔드는 말이다.


여덞, 처음처럼. 브랜드를 만들고 회사 로고를 디자인하는 네이밍 업체 크로스포인트의 손혜원 대표는 처음처럼이란 말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가 개발한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은 성공회대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체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처음으로 하늘을 나르는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 날을 시작하고 있다”는 시와 함께 쓰인 처음처럼이라는 글귀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손 대표는 신 선생님의 글씨로 브랜드를 개발한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자신이 받은 작명료 8000만원 중 5000만원과 두산이 내놓은 기금을 합쳐 1억원을 성공회대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시경』에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란 말이 있다. 시작하기는 쉽지만 끝까지 잘 마무리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시작이야 누구나 곧잘 하지만 끝맺음을 잘 하는 사람은 드물다. 초심을 버리고픈 아찔한 유혹은 늘 내밀하고 지근한 곳에서 맴돈다. 임종을 앞둔 김유신 장군이 문무대왕에게 남긴 말에도 “예로부터 대통을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못하는 일이 없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臣觀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라며 이 구절이 나온다. 어릴 적에는 한결같음을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삼아 놓고 일로매진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진리는 늘 여러 겹이고, 아름다움에는 섬세한 무늬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처음처럼 유지해야할 것은 아주 적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아홉, 애면글면. 힘에 부친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루려는 모양을 나타낸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던 괴테의 말, “절름발이 자라도 천리를 간다(步而不休, 跛鼈千里)”는 『순자』 구절, 『시경』, 『논어』, 『대학』에 3관왕으로 나오는 절차탁마(切磋琢磨)에 이르기까지 노력과 정성을 다하는 말을 무궁하다. 이 가운데 내가 각별히 여기는 말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계원필경(桂苑筆耕) 서문에 보이는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한다(人百己千)”는 구절이다. 최치원의 아버지는 당나라에서 10년을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며 열 두 살의 어린 아들을 머나만 타국 땅으로 보낸다. 최치원은 서문에서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 매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노력에 부응하기 위하여 참으로 남들이 백의 노력을 할 때 천의 노력을 하였습니다(實得人百之己千之). 그래서 당나라에 유학간지 6년 만에 신의 이름이 방(榜)에 걸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人百己千을 되뇌는 까닭은 사람들의 능력이 언제나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우리는 시간과 의지력만 있으면 어떤 것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나 한계는 존재한다”고 말했고, 그 말을 이제는 상당 부분 수긍하고 있다. 바람에 비해 재주가 모자란 한탄은 서글프다.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보고 “오! 신이시여, 저런 하찮은 존재에게는 천재성을 부여하고 나에게는 그런 천재성을 알아볼 재주 밖에 허락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탄식하는 대목은 범인의 안타까움을 함축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人百己千하려고 해도 모든 것에 최선의 노력을 하는 건 내 역량을 벗어난다. 人百己千마저 애면글면 포트폴리오를 해야 한다.^^;


열, 부끄러워하다. 부끄럽다는 형용사형보다는 부끄러워하다는 동사형이 더 생동감 있다. 『맹자』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비롯해서 부끄러워함을 촉구하는 내용이 많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는 구절이나 “사람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 無恥矣)”라는 구절은 제 얼굴에 자꾸 철판이 늘어가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얼굴에 철판을 깔아봤자 오징어라도 구워먹지도 못하는데 개기름까지 바르고 있으니 처연하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는 “군자는 홀로 서 있을 때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고, 홀로 잠을 잘 때도 영혼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君子獨立不慙於影 獨寢不慙於魂)”고 했다. 공식석상에서 정갈한 말과 우아한 자태로 우리를 설레게 만들던 숱한 지도자들이 이래저래 망가지는 것을 보면 참 의아하다. 적어도 나보다는 똑똑하고 잘난 분들일 텐데 왜 저럴까 답답하다. 습관적으로 그네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하려다가 문득 이 분들이 정말 몰라서 저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유능한 확신범만큼 두려운 게 없다지만 인간을 가장 무능하고 무지하게 만드는 것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우렁차게 말하는 사람, 이제 식상하다.


<마치며...>

너무 인용이 많지 않느냐는 핀잔이 있을 것 같다. 뭐 이번 글은 전례(典例)와 고사(故事)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내 취향에 충실해봤다. 독일의 사상가 리히텐베르크가 “새로운 것에서는 진실을 찾기 어렵고 진실한 것에는 좀처럼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한 것에 동감하기 때문이며,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이 말했던 “좋은 말을 만들어낸 사람 다음으로 가치 있는 사람은 그 말을 인용한 사람이다”는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싶기 때문이다. 과학자 뉴턴은 과학의 발전에 엄청난 공로를 세워놓고도 자신을 바닷가에서 장난을 치는 소년이라고 겸양했다. “내 앞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리의 대양이 펼쳐진 채로, 이제나 저제나 더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으려고 애쓰는 소년”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 끝으로 열 개라는 숫자 제한에 걸려 아쉽게 다음을 기약했던 숱한 말들을 기억나는 대로 읊어본다. 모국어의 맛은 두고두고 우려내도 묽어지지 않는다. - [小鮮]

글, 값, 꿈, 즈음, 당최, 아이, 노을, 사흘, 달걀, 글쎄, 비꽃, 선비, 드므, 눈물, 그림자, 즐거움, 갈매빛, 누리다, 보듬다, 가엾다, 덧없다, 거닐다, 하소연, 나그네, 해맑다, 헌걸차다, 도두보다, 마음자리, 오롯하다, 우러르다, 시시하다, 보드랍다, 깔끔하다, 생각하다, 알콩달콩...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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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님 고별 강연 동영상(오마이뉴스)

6월 8일 신영복 선생님이 올해로 17년째인 교수 생활을 마감하는 고별 강연을 가졌다. 운 좋게도 오마이뉴스에서 인터넷으로 생중계해주는 것을 챙겨볼 수 있었다. 선생님 강연의 핵심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이었다. 가장 위태롭고 절망만이 가득 찬 때가 바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기회라는 말이다. 석과불식은 주역(周易)의 박괘(剝卦)의 효사(爻辭)를 풀이한 구절로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며, 왕필처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선생님께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담론 중에서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다.


박괘는 단 한 개만 남아있다는 뜻으로 “세상에 나쁜 악이 만개해 있고 단 한 개의 가능성, 희망만이 가느다랗게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마저도 언제 음효로 전락될지 모르는 곤경의 상황을 의미하는데 주역 64괘 가운데 제일 어려운 상황을 나타낸다고 한다. 한 괘(卦)를 이루는 각 효(爻)의 뜻을 설명한 글을 효사라고 한다. 박괘의 효사인 석과불식에서 석과(碩果)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매달린 과실이라는 뜻으로 절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한다. 이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복(復)괘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선생님은 엽락(葉洛)과 분본(糞本)을 말씀하셨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이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된다는 말이다. 엽락(葉落)은 잎사귀를 떨어야만 줄기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거품 속에 가려 있던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조, 정치적 주체성, 문화적 자존을 냉정하게 직시하자는 외침이다. 분본(糞本)은 잎사귀가 떨어져 뿌리를 거름하고 북돋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뿌리(本)는 곧 사람(人)을 말한다. 선생님은 가장 중요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절망의 괘를 희망의 괘로 바꿀 수 있음을 역설하셨다. 아울러 잎사귀를 떨구고 뿌리를 거름하려면 겨울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뿌리,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질 것을 당부하셨다. 고독 속에서 제 자신, 제 둘레의 실상을 마주하는 건 그 얼마나 두렵고 아픈 일인가.


선생님은 차가운 머리만으로는 안 된다, 뜨거운 가슴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말씀하셨다.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 가장 먼 여행”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애틋하다. “각박한 언어로 제시되면 안 되고 더 큰 인간적인 애정 속에서 융화될 때 진정한 담론”이 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다. 선생님은 사회 변화를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고백(?)하셨다. 그러나 변화시키려는 과정 자체가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보람 있으면 그것으로서 훌륭한 사회임을 강조하셨다. 꽃을 피우기보다 곳곳에 씨를 묻는 노력을 함께해나가기를 당부하셨다. 나는 과연 얼마나 사람의 가치를 온전하게 읽어내고 키워낼 수 있을까. 내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지 반성해본다.


선생님은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 때문에 세상이 더 나아진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는 사람이 끝끝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어리석음은 단순한 무지는 물론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땅의 구접스러움을 익히 알면서도 차마 구합(苟合, 구차하게 영합함)하지 않는 태도는 아닐까. 힘겹다는 것을 알면서도 냉소하지 않고 시시한 실천을 다하는 자세가 아닐까. 현란한 희망과 믿음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합리적이지 못할 때도 많고 정의를 외면하고 강자에 굴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무한의 신뢰를 보낼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그러나 나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기대한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남에게 잔학하게 굴지 못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품는 희망의 고갱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인성, 품성으로 내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고별강연의 강연료를 대신할까 한다. 선생님이 늘 건승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란다. - [小鮮]


다음은 신영복 선생님의 고별 강연에서 사용된 사전원고 전문이다.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언어가 바로 희망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그 다음이 인내일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무작정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망은 견디기는 견디되 곤경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작정 인내하기보다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경우가 훨씬 수월하다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수시로 확인된다. 절망이란 의미가 희망이 없다느 뜻이고 보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희망도 희망 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희망이 단지 소망이나 위안에 불과한 적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는 시구를 비롯하여 희망의 언어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수많은 담론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는 '석과불식'이다. 이 말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기도 한다. 주역 박괘의 효사에 있는 구절이다. 씨 과실은 결코 먹히지 않는 법이며 씨 과실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이 말에서 나는 옛 사람의 지혜를 읽게 된다. 수많은 세월을 면면히 겪어오면서 터득한 옛사람들의 유장함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이 괘를 읽을 때마다 고향의 감나무를 생각한다. 장독대와 우물 옆에 서 있는 큰 감나무다. 무성한 낙엽을 죄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 있는 초결울의 감나무는 들판의 전신주와 함께 겨울바람이 가장 먼저 달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겨울의 입구에서 그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이다. 그것은 먹는 것이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씨를 남기는 것이다. 나목의 가지 끝에서 빛나는 가장 크고 탐스런 씨 과실은 그것이 단 한 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희망이다. 그 속에 박혀있는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석과불식이 표상하는 이러한 정경이 더 없이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의 언어를 이처럼 낭만적 그림으로 갖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낭만은 흔히 또 하나의 환상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곤경에서 갖는 우리들의 희망이 단지 소망이나 위안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의미로 이 정경을 읽어야 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은 우리들 스스로가 키워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밭을 일구고 씨를 심는 경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WTO, IMF, FTA 라는 일련의 힘겨운 상황에서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잇는 박(剝)괘를 연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한 희망을 갖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환상이나 소망이 아닌 진정한 희망을 키워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앙상하게 드러난 나무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성한 잎이 떨어지고 한파 속에 팔 벌리고 서있는 나목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품이 걷히고 난 후의 우리 경제의 모습을 직시하는 일이다. 비단 경제구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틀어 돌이켜 보는 일이다. 그러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들 스스로의자화상을 대면하는 일이다. 남의 돈을 빌려 살림을 꾸리고 자녀들을 내몰아 오로지 돈 벌어 오기만을 호령해 온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든 이 겨울을 넘기고 나면 다시 봄이 오겠지. 이것은 안이한 답습의 낡은 언어이며 결코 희망의 언어가 아니다. 희망은 새로운 땅에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희망은 새로운 땅을 일구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동토에 쟁기를 박아 넣는 견고한 의지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패배할 수 없는 천근의 땅에 씨앗을 심는 각오여야 하기 때문이다.


산지박괘의 다음 괘는 '지뢰복' 괘다. 다섯 개의 음효가 위로 쌓여 있고 제일 밑바닥에 한개의 양효가 싹트고 있는 모양이 복 괘의 형상이다. 글자 그대로 광복이다. 씨 과실 속에 있던 씨앗이 땅 속에서 싹 트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키워내는 것 이것이 절망의 괘에서 희망을 읽는 진정한 독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곤경을 견뎌야 할 지 모른다. 그럴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희망의 언어다. 희망을 키워내는 실천의 방법이다.

Posted by 익구
: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2006 문화유산 사진 및 답사후기 공모전에 출품한 졸작입니다. 솔직히 입선 말석이라도 될 줄 알았는데 똑 떨어졌어요. 문화재청을 살짝 구박하는 내용이 있어 미움을 산 거 같기도 하고, 답사기 콘셉트가 주최 측이 원하는 것과 좀 안 맞았던 거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건 농담 삼아 해본 말이고, 다른 분들이 좋은 글을 많이 써주셔서 많이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양왕릉에서 고려를 추억하다>




1.
사육신묘 답사를 함께 갈 지인들을 찾다가 너는 왜 그리 무덤을 좋아하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짬짬이 흥덕왕릉, 무령왕릉, 능산리 고분군, 석촌동 고분군, 경순왕릉, 고려 고종 홍릉과 고려 희종 석릉, 세종대왕릉, 의릉, 태릉, 동구릉, 홍유릉, 정몽주 선생묘, 최영 장군묘, 이율곡 선생묘, 정약용 선생묘 등을 답사하며 지관(地官)이 될 참이냐는 농담을 많이 들었다. 앞으로의 답사 계획에 경주 대릉원, 융건릉, 광해군묘, 조광조 선생묘, 김육 선생묘 등이 잡혀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그런 지청구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싶다.


무령왕릉이나 세종대왕릉 같이 아주 유명해서 관광객이 몰리는 극소수 무덤을 제외하고는 능묘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어지간한 산사들이 관광객들로 붐벼 번잡함을 느끼기 일쑤인 것보다 고즈넉함을 더 간직하고 있다. 덜 알려진 무덤을 찾는 길은 조금이라도 흐린 날에 찾았다가는 한적함을 넘어 스산함마저 느끼기 십상이다. 제대로 된 안내 표지판이 미비한 경우가 많은 선현의 유택을 부러 찾아가는 것은 모종의 세속적 꿍꿍이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우선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도 결국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무상함 앞에 짜릿한 평등의식을 느낀다. 아울러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지킨 사람을 마냥 외면하지 않음을 믿게 된다. 무덤 앞에서 내 삶을 좀 더 알차고 기품 있게 가꿀 것을 다짐한다.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겠다고 구차하게 명리에 몸과 마음을 팔지 않기를 새삼 결심한다.


공양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고려 말의 충의지사를 추념하기 좋은 시간이다. 『논어』에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구절을 떠올려도 좋다. 살다보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고만고만한 선택지라면 제 입맛에 따라 골라잡으면 그만이지만,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경우에는 취사선택 앞에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맹자는 고뇌 끝에 이렇게 선언한다. “삶(生)도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원하는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지키겠다.” 『맹자』 고자상편에 나오는 유명한 사생취의(捨生取義)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더라도 그것을 쓰지 않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라도 피하지 않는 것은 삶보다 더 소중히 하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도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맹자의 외침을 실현한 여말 망국대부들의 충절에 옷깃을 여민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莊陵)에는 충의공 엄홍도의 정려각이 있다. 영월 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는 단종이 시해 당하자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는 후환을 두려워하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고 의연히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엄홍도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사람들은 그리 오래 기억하지 않을지 모른다. 좋은 일을 해도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냐며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부끄러울 치(恥)자 셋이면 천박함을 피한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질문 하나만으로도 꺼삐딴 리의 역겨움을 제법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2.
일전에 강화도 답사 준비를 할 때 남한에도 고려 왕릉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고려 왕릉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 천도 시절의 왕릉 2기(희종 석릉, 고종 홍릉)와 소재가 확실치 않은 3기(우왕, 창왕, 공양왕릉)를 제외한 나머지 29기는 개성일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까지 17기가 확인되었다고 하지만 국내에서 상세한 자료를 구하기는 어려워서 일반인들에게 양질의 정보가 제공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특히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사적 제191호)과 강원도 삼척의 공양왕릉(지방기념물 제71호)의 2기가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 당국은 세종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고양시에 있는 공양왕릉을 공식 인정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능산리 고분군에는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가 있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묻힌 두 사람의 원혼을 달래려는 애틋함이 고맙다. 비명횡사한 우왕과 창왕에 대한 조촐한 가묘라도 설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공양왕릉은 고려의 마지막 제34대 왕인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쌍릉으로 망국의 임금의 처량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양왕의 비참한 최후와 고려의 멸망이 주는 비감이 그 어떤 감회들을 압도한다. 봉분에 입힌 떼가 듬성듬성 허전하다. 봉분 앞으로 비석과 석상이 각각 하나씩 서있고, 장명등, 석인 두 쌍, 석수 한 마리가 서있다. 비석과 석상, 장명등이 군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본디 고졸한 맛을 자랑하는 고려의 석물이 무참하게 석인들마저 좀스러웠다. 유독 세월의 풍상을 더 겪은 것처럼 마모도 심하다. 그러나 공양왕릉의 참담함은 단지 석물이 조악하다거나 정자각 같은 제향시설이 없어서 뿐만 아니다. 그보다 왕릉 뒤로 보이는 수많은 무덤들이 공양왕릉을 찾은 답사객의 마음을 허탈하게 만든다. 조선시대에 행세깨나 했던 벼슬아치인지는 몰라도 감히 왕릉 바로 뒤에 번듯한 묘역을 차린 몰취향도 밉살스럽고 이를 방기한 조선왕실과 관료들의 무관심도 씁쓸하다.


볼품없는 능역이지만 무덤 주위에 세우는 석수가 맨 앞에 튀어나온 것이 이채로운데 봉분 둘레에 한 쌍씩 두는 보통의 능묘 형식과는 사뭇 다르다. 본래 봉분 옆에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던 것이 한 마리만 남았다가 능역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공양왕이 데리고 다녔다는 삽살개가 형상화되어 능을 지키게 되었다고도 한다. 능역 아래에 있는 연못의 전설을 소개한 안내판에는 왕과 왕비가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홀로 남은 삽살개가 짖어 이 사실을 알렸다고 쓰여 있다. 사서에서는 강원도 삼척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능도 두 개이듯이 죽음도 두 장면이 남은 셈이다. 아마도 한 마리만 남게 된 석수를 놓고 고양지역 사람들이 공양왕을 추모하는 뜻에서 삽살개의 전설을 만들었겠지만 석수의 파격은 역설적이게도 공양왕릉에서 그나마 멋스런 부분이다.


『고려사』에는 이성계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공양왕이 “이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니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며 눈물 흘리며 절규했다고 전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기 역사가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적잖은 왜곡이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여말의 혼란과 패악을 집중 부각시킴으로써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돈독하게 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폄하해 『고려사』 열전 반역편에 싣는 만행을 저지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조선 초기 사가들의 기록은 너무 지나쳤다. 그만큼 오백 년간 지속된 왕조를 무너뜨리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오죽했으면 세종대왕이 학자들에게 내린 유자(柚子)와 정과(正果)가 아깝다는 탄식을 할 정도였을까. 그러나 공양왕의 눈물만큼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기실 그 자리에 누가 있든 간에 망국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공양왕은 시종일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성계 일파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뽑고 내치고 죽였다. 그 쓸모가 다하자 공양왕은 혼암하여 임금의 도리를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다는 이유로 폐위된다. 폐위 교지를 엎드려 들은 공양왕은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다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재가했던 우왕과 창왕의 비참한 말로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원주로 추방된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으로, 다시 삼척으로 멀리 유배되었다가 끝내 두 아들과 함께 목 졸려 죽는다.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신하들이 죽이기를 청하길 열두 번이나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청을 따른다는 이성계의 변명이 가소롭다. 이런 번지르르한 말과는 달리 조선왕조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계육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제 아무리 권력이 달콤하고 대의명분이 또렷해도 함부로 살상해 깊은 원한을 남기지 않는 절제가 필요함을 담담히 말해준다.


3.
공양왕릉을 이리저리 살피며 이광철 의원의 2004년 문화재청 국정감사 자료를 실감했다. 이 의원이 내놓은 고려왕릉 보존관리 실태조사 보고서는 방치된 고려 왕릉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현재 남한에 있는 고려 왕릉급 무덤은 총 5기로 이들 모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예산이 전무하거나 제대로 된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고양 공양왕릉의 경우 2001년 크게 훼손되어 도굴을 당한 것으로 밝혀져 한바탕 난리가 났다. 도굴이라기보다는 보수공사가 잘못돼 단순 훼손된 것이 도굴 흔적처럼 보인 것이라고도 한다. 부장 품목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만큼 도굴 여부를 판단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굴 의혹 기사가 쏟아진 이후 관련 기사를 뒤적여 봤지만 추후에 어떤 결론이 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문화유산 관리의 허술함보다 더 서글픈 것은 그 때 그 때 잠깐 관심을 갖다가 잊어버리는 우리들의 냄비근성이 아닐까 싶다.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뿐만 아니라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고분군에 대한 보호 관리 대책 수립이 긴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요하는 일이라 1년 예산이 3,700억(2006년 기준) 내외인 문화재청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얼마 전 문화재청은 ‘조선시대의 왕릉과 원’ 53기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를 신청했다. 찾아가느라 애먹었던 강화지역의 고려 왕릉들도 강화문화권 정비사업에 포함되어 있다니 뒤늦게나마 다행이다. 이러한 의지를 살려 고분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수행해낼 수 있느냐 하는 문화적 역량 시험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대개 조선시대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현대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왕조이고, 관련 유적과 사료가 단연 많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지상 건축물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그치지 않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 고려시대가 아닐까 한다. 삼국시대를 비롯한 고대사는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대중적 기반을 넓혀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조선시대만큼의 깊이와 저력을 가졌던 고려시대의 문화는 잘 인지되지 않고 있다. 이는 현재 북한 지역인 개경 일대에 고려시대의 주요 문화유산이 있다 보니 접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도 크다. 오는 유월에는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들이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고구려 고분에 대한 남북 공동 연구도 잰걸음을 하고 있다. 이처럼 남북 경제 교류만큼이나 문화 교류에도 눈을 돌려 그간 무심했던 고려 왕릉을 위시한 고려의 문화유산들이 많이 알려져 고려시대 역사를 탐구하고 문화를 음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은 교착상태에 빠져있지만 머잖아 개성 관광이 현실화되면 꼭 한 번 개성을 답사하고 싶다. 왕건릉, 공민왕릉도 참배하고 선죽교의 돌도 쓰다듬어 보고 만월대에 걸터앉아 석양에 지내는 객(客) 행세도 해보고 싶다.


큰 산은 바라보기에 따라 다르다. 우리의 유구한 전통 또한 여러 겹의 속살을 가지고 있기에 다각적이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정성이 필요하다. 공양왕릉은 변변찮은 유형문화유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능역을 감도는 그 처연한 서정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문화유산은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많은 것으로만 우열을 가름할 수 없다. 그 자리에 걸맞은 역사성과 시대정신을 담보해낼 수 있다면 제 나름의 흥미로운 역사의 숨결이 될 수 있다. 거창한 복원과 중건에만 현혹되지 말고 이런 식으로 영혼을 어루만지는 작은 문화유산들도 소중히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 문화는 고매한 기교 이전에 낮고 약하고 가여운 것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다.


공양왕릉에서 고려의 영광과 황혼을 찬찬히 회상해본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기왕 지더라도 떳떳하고 아름답게 패배하고 싶다. - [小鮮]

Posted by 익구
:
[연하카드] - 황인숙

알지 못할 내가
내 마음이 아니라 행동거지를
수전증 환자처럼 제어 할 수 없이
그대 앞에서 구겨뜨리네
그것은, 나의 한 시절이 커튼을 내린 증표

시절은 한꺼번에 가버리지 않네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물, 한 사물
어떤 부분은 조금 일찍
어떤 부분은 조금 늦게

우리 삶의 수많은 커튼
사람들마다의 커튼
내 얼굴의 커튼들

오, 언제고 만나지는 사물과 사람과
오, 언제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는 중얼거리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신부님이나 택시 운전수에게 하듯
그대에게

축, 1월!



“시절은 한꺼번에 가버리지 않네”라는 구절이 한참동안 입안에서 맴돈다. 짧은 연애를 나눴던 벗에게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다했다며 제법 단호하게 말했던 것이 민망하다. 시절인연이라는 녀석도 갑자기 확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사를 두부 자르듯이 재단하는 것은 질색이지만 괜한 미련을 남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내 마음 한 조각과 함께 썰어냈다. 내가 아등바등해도 시절인연은 의도치 않은 다른 모양으로 싹트리라. “오, 언제고 만나지는 사물과 사람과/ 오, 언제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말이다.


육조 혜능(慧能)은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이 일겠는가(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노래함으로써 홍인대사의 수제자 신수(神秀)를 꺾고 선종의 법맥을 잇는 후계자가 된다. 그는 선불교를 중창하고 완성함으로써 동양 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수의 게송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틈틈이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는 성찰도 소중하다. 신수가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점오(漸悟)를 말했다면 혜능은 단번에 벼락처럼 깨닫는 돈오(頓悟)를 제창했다. 선종은 혜능의 남종선과 신수의 북종선으로 나뉘어 경쟁하지만 역사는 남종선의 손을 들어준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의 교의는 본각(本覺) 사상이 기반이라고 한다. 본래 깨달은 존재라는 본각 사상에 따르면 구태여 새삼스레 깨우칠 것이 없는 셈이다. 따라서 수행할 때 깨달음을 기대하는 태도를 대오(待悟)라 칭하며 경계한다. 깨달음을 얻고자 헤아리고 따지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 하여 덧없게 여긴다. 본각으로서의 깨달음은 시간의 틀이나 인과율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얽매이지 않는다. 단박에 깨치는 것은 세월의 무게와는 관계없다는 선가의 가르침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 하는 세월의 무게가 실상 대오(待悟)에 불과할 수도 있단 말인가. 흐르는 시간에 기대어 깨달음을 날름 주워먹으려는 속셈은 아니었던가.


초기 불교에서는 불보살 이외의 자가 성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 이르러 일반 중생도 후천적인 수행을 통해 불성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퍼졌다. 점수(漸修)를 통하여 점오(漸悟)할 수도 있게 된 셈이다. 그러던 것이 종국에는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미망에 가려져 있을 뿐 그것을 떨쳐버리면 성불한다고 말하게 된다. 가령 열반경(涅槃經)은 “모든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나 무명에 뒤덮여 있어 해탈하지 못하고 있을 뿐(一切衆生 悉有佛性 無明覆故 不得解脫)”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각을 가지고 있다는데, 이미 깨우친 상태라는데 그 놈의 무명은 참 짙고도 무거운 모양이다.


여하간 또 우리 내면에 부처가 이미 있는데 뭔 놈의 욕망과 번뇌가 이렇게 많은지 의뭉스럽다. 유마경(維摩經)에서 어느 사리불이 “부처님이 보살로 수행할 때나, 현재 불도를 이루어 부처님으로서 교화할 때에, 그 마음은 분명히 청정할 터인데, 세상이 이처럼 깨끗하지 못한 것은 어인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기 깨끗한 해와 달이 있다고 치자. 그러나 장님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 경우에 깨끗한 해와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해와 달의 허물이냐?” 장님이 청정한 해를 보지 못한다는 비유로 본래 부처인 중생들이 미망에 가려서 본각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는 설명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타종교의 파닥거림과 마찬가지로 안쓰럽다. 내가 백지설(白紙說)과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의 오랜 지지자여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돈점(頓漸)논쟁은 불가의 오랜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지라 그 속살을 들여다보기가 여간 녹록지 않다. 큰 틀에서 우리나라 불교는 혜능의 돈오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했다. 성철스님이 돈오를 한 후에도 계속 닦아나가야 한다는 돈오점수를 왜 그리 통박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성철스님이 주창하셨던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실체 또한 명료하지는 않다. 불성을 깨닫는 순간 게임오버라는 개념인지, 한번 깨우치면 잡생각에서 자유로이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인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고승대덕의 가파른 정신세계를 돈오하기란 쉽지 않다.^^;


다시 혜능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돌아가자. 본래 내 것이란 없다는 가르침이 추상같다. 인연이 닿아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물러나는 것이다. 나의 실체가 없는데 내 소유는 따져 무엇하겠는가 하는 마음, 잠시 내가 맡아 있을 뿐이라는 겸허한 자세가 애틋하다. 부러 집착할 그 무엇도 없는 공(空)의 상태란 스스로를 비우는 것을 뜻할 듯싶다. 참으로 텅 빈 곳에 오묘한 진리가 있다는 진공묘유(眞空妙有)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잊을 때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간디는 “내 것이란 내가 잠시 맡아둔 것일 뿐”이라며 보관인 정신(trusteeship)을 설파했다. 내가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무소유를 체화할 자신은 없지만, 탐욕에 찌들지 않을 양식은 있다.


짧은 연애를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임을 알았다.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았거나, 한 번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시절인연이 닿아 사랑을 할 때는 동질적 경험의 반복이나 번개처럼 들이닥치는 찰나의 깨달음에 너무 기대지 말도록 하자. 범부인 나의 깜냥을 감안해서 대오(待悟)라도 해보자. 세월의 무게에 기대든, 소심하고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에 기대든, 나와 다른 가치관을 존중하고 내 것을 고집하지 않는 열림에 기대든 간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봐야겠다.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고 구박받을지언정 나는 사랑에서만큼은 점오점수(漸悟漸修)를 행하고 싶다. 조금씩 조신하고 조심스레 깨닫고 싶다.


결국 혜능과 신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말았다. - [小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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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한 구절을 읽고 상념에 빠졌다.

만장이 “한 고을에서 다들 훌륭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면, 그 사람이 어디를 가더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인데, 공자께서 덕을 해친다고 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맹자가 말씀하시길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딱 들어서 비난할 길이 없고, 그를 풍자하려 해도 풍자할 구실이 없으며,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거처하는데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동하는데 청렴결백한 척한다. 여러 사람들이 다들 그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여기지만 그와 더불어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덕을 해친다고 한 것이다. 공자께서는 ‘비슷하면서 아닌 것(似而非)을 미워한다. 강아지풀은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벼 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아첨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의로움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정(鄭)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아악(雅樂)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자주색을 미워하는 것은 붉은색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고 말씀하셨다. 군자는 상도(常道)로 돌아갈 뿐이다. 상도가 바로 되면, 백성들은 감흥하고, 백성들이 각성하면 사특함이 없을 것이다.”


萬章曰 : "一鄕皆稱原人焉 無所往而不爲原人 孔子以爲德之賊 何哉?"
曰 : "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同乎流俗合乎 世居之似忠信 行之似廉潔 衆皆悅之 自以爲是而不可與入堯舜之道 故曰德之賊也.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 恐其亂朱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君子反經而已矣. 經正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맹자 진심하편(盡心下篇)에 있는 내용이다. 공자는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집안에 들어오지 않고 가더라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을 사람은 오직 향원(鄕愿)일 뿐이라고 말한다. 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둑(鄕愿德之賊)이라는 공자의 말을 두고 만장은 도대체 향원이 어떤 사람이기에 공자가 그토록 미워했는지 질문한데 대한 답이다. 향원은 한 고장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이비 군자이자 위선자를 말한다. 언뜻 보면 후덕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구합(苟合, 구차스레 남의 비위를 맞춤)하는 기회주의자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려는 이는 제 자신의 줏대가 없게 마련이라는 지적이다.


논어 양화편(陽貨篇)에도 나오는 표현이지만 “섞인 자주색이 순수한 붉은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는 표현이 가슴에 박힌다. 자주색은 붉은색처럼 보이지만 붉은색은 아니다. 하기야 자주색은커녕 때 되면 표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 자신이 벼린 원칙을 사람 좋다는 소리 듣고 싶은 욕심에 내팽개치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내 원칙을 세우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거스르거나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거스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혹여 용기를 내본다고 해도 내 자신에 쏟아질 그 실망의 눈초리를 감내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나 혼자 착하고 싶지 않다느니, 내 성정이 모질지 못하느니 하면서 끝끝내 호인(好人)행세를 하려 들것 같다.


옛 선비들의 고루한 습속까지 죄다 본받지는 않아도 그 견결한 정신의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상징조작에 불과하다는 핀잔을 받을만한 여지도 적잖지만 그래도 여전히 헌걸차다. 자신의 뜻을 목숨처럼 여기는 기백이야말로 선비정신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어도 뜻을 빼앗지는 못하는 게 진짜 선비다. 끝내 자기 뜻을 지키면서 백성들의 눈물을 닦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이는 부귀에 구차하게 빌지 않고, 권세에 욕보이지 않는 고매한 정신이다. 이병기의 시조 구절인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를 넘어 흙탕물에서 자라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사람이 참선비다.


살다보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고만고만한 선택지라면 제 입맛에 따라 골라잡으면 그만이지만,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경우에는 취사선택 앞에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무언가를 버려야할 때 그 손실이 만만치 않다면 머뭇거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제 삶을 오롯이 걸고 결단을 내려야할 때 의로움을 택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맹자라고 이런 고민이 없었을 리 없다. 그는 고뇌 끝에 이렇게 선언한다. “삶(生)도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원하는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지키겠다(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捨生而取義者也.).” 고자상편(告子上篇)에 나오는 이 구절이 유명한 사생취의(捨生取義)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더라도 그것을 쓰지 않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라도 피하지 않는 것은 삶보다 더 소중히 하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도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由是則生而有不用也, 由是則可以避患而有不爲也. 是故所欲有甚於生者, 所惡有甚於死者.).”라는 맹자의 외침에 옷깃을 여민다. 이는 논어 헌문편(憲問篇)에서 인간완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과 상통한다. “이익을 보게 되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칠 줄 알고, 지난날 자기 말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면 인간완성이라 할만하다고 하신 말씀은 그 얼마나 엄중한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이비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향원에 안주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자주색을 미워할 자신이 있는가, 사생취의하고 견리사의(見利思義)할 자신이 있는가. 초심을 초개처럼 버리는 사람은 하고 넘친다. 그러나 초심을 태산처럼 여기며 명리(名利)를 초개처럼 버리는 사람은 드물다. 드물어서 고생스런 길에 들어서더라도 내 자신을 잃어버려서 얻는 부귀영화에 굴하지는 말자. 세상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바뀌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나를 얼마나 더 배신할지 모르겠지만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이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신이 지탱할 만큼의 빗방울을 머금고 나면 미련 없이 비워내는 연꽃잎처럼 살아야겠다. “선비는 궁해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높은 지위를 얻어도 도를 벗어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는 말을 늘 곁에 두자. 자유롭고 떳떳한 선비가 되고 싶다. 한번뿐인 삶을 도저히 대충 살 재간이 없다. - [小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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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봄 대학교 1학년 1학기 국어작문 과제로 제출했던 과제물이다. 예전에 쓴 조악한 글을 만날 때 가슴이 시린 것은 그 당시의 부박함이 아쉬운 것보다 지금도 크게 나아가지 못함을 발견했을 때의 당혹스러움 때문이리라.

쇼펜하우어 지음, 김재혁 옮김.『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고려대학교출판부, 1997.

[논쟁에서 이기자. 그리고 거기서 배우자]

철학사상보다는 기이한 행동으로 더 잘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그의 확고한 인간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설파한다. 그는 부단히 논리학과 토론술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데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논리학은 이성적인 존재의 고독한 사고인 반면, 토론술은 두 이성적인 존재의 상이성에 따라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논쟁적 토론술'이라고 명명한 것은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태생적인 태도에 대한 학설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어떤 명제의 객관적인 진실성 여부와 논쟁을 통한 그 명제의 타당성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논쟁은 자신의 주장이 정당성의 외관을 획득하기 위한 - 말 그대로의 싸움(爭)이라는 - 것이다. 그 현상의 분석 또한 염세주의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내리고 있다. 인간의 타고난 허영심, 수다스러움, 부정직함이 합작(?)하여 진실을 좇기보다는 비록 허울뿐일지라도 자신의 승리를 좇게 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일종의 예방주사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논쟁을 할 때 상대방이 써먹을 술책들을 미리 파악하고 그에 대비하라는 뜻이다.


쇼펜하우어가 늘어놓는 38가지 방법들은 어떤 일정한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고 중구난방 식으로 되어있다. (어쩌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가 소개한 방법 중에 하나를 이미 독자에게 써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론술의 기초에서 언급된 골격을 빌려 나누어 보려해도 여의치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특히 대사상논증과 대인논증 중에서 대인논증의 비중이 훨씬 커 보이며 쓸모 있어 보이는 요령들도 거의 다 대인논증에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런 나눔이 무색할 정도로 쇼펜하우어는 작정하고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그는 논리학은 논쟁에서 소용이 없으며, 상대방을 공략하는 각종 부정직한 요령들만이 논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할 것이라는 신념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요령들을 가만히 따라가다가 혼란에 빠졌다. 수능을 위한 언어영역에서 논리적 사고 영역에서 배웠던 각종 논리적 오류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류를 발견하고 비판하는 숱한 문제들을 풀던 나로서는 갑자기 그 오류들을 논쟁에서 활용하라는 쇼펜하우어의 논리에 적잖이 헤맸다. 조금만 살펴보면 동음이의어를 활용하라는 요령은 '애매어의 오류'이며, 개별적 경우의 시인을 보편적 진리의 시인으로 간주하라는 요령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범주 혼동의 오류' '군중에 호소하는 오류'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의도 확대의 오류' '논점 일탈의 오류' 등을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는 논리학과는 별개의 문제로서 자신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얼마 전 까지는 그런 오류들을 발견해서 지적하는 것을 업으로 하던 이에게는 분명 산뜻한 충격이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밤에 난다"라고 헤겔이 말했다. 낮에 세상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 뒤 밤이 되어서야 사람은 비로소 지혜를 얻는다는 뜻으로 학문이 현실보다 뒤쳐지는 것에 대한 경계를 말하는 재미난 문구이다. 나의 이런 어지러움에도 헤겔은 이런 처방을 내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됐든 그는 첫 번째 요령으로 "상대방의 주장은 최대한으로, 자신의 주장은 최소한으로 하라"를 제시한다. 공격할 틈은 많이 만들되 방어할 틈은 최소한으로 하라는 간단하면서도 멋진 요령이다. 그러나 그 역효과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쇼펜하우어가 빠뜨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그 정도가 지나치면 상대방이나 청중으로부터 '소심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자기 논의의 범위를 이리저리 축소시켜서 성을 세워 상대방의 화살을 잘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옹졸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이겨도 시원찮게 되고 만다. 설득력은 섬세한 수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청중들은 때로는 성문을 열고 나가는 박진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요령들은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인신공격과 무례함으로 대응하라는 너스레를 떤다. 병법에도 삼십육계 줄행랑이 있듯이 그도 최후의 궁지에서는 마지막 발악(?)을 주문하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쇼펜하우어가 애초에 아주 실용적인 목적에서 이 책을 지었음을 천명했듯이 나도 실생활에서의 논쟁에서 그의 요령들을 검토해 보는 것이 그의 의도에도 맞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 동안 내가 온라인 상에서 친구와 논쟁을 벌였던 부분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겠다.


지난 경험들을 돌아보면서 가장 먼저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 나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글을 쓰다가 인용한 한 문구는 쇼펜하우어도 미소를 지어 보일 만 하다. 그 한마디인즉슨, "The way to be successful is to follow the advice you give to others. - 성공으로 향한 길은 당신이 남들에게 해 주는 바로 그 충고를 자신이 직접 따르는 것이다." 이 한 문구로 말미암아 나의 글의 요지는 "당신의 비판을 수용하겠다. 그러나 나에게 하는 비판을 당신 스스로가 따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바뀌는 절묘한 반전을 꾀한 것이다. 어쩌면 치졸한 대인논증인 피장파장이라고 폄하할 수 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왜 그러면 그것대로 행동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엄청난 무안을 주며 청중들에게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깎아 내리는 작용을 한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요령을 적용해보자면 충분히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다고 판단된다.


좀 더 정치 사회적인 문제로 논쟁을 벌였을 때 논쟁은 더욱 격렬했다. 김대중 정권의 실정을 꼬집는 친구의 글이 올라왔다. 그 중에 하나로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며 환경을 버리는 그 정책은 비판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비쳤다. 이에 나는 반론을 제기했다. 환경의 가치를 들먹이지만 전북 도민들의 개발 요구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점잖게 맞받았다. 구체적인 사례로 전북 도민의 절반인 1백만 여명이 사업 추진 지지 서명을 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미 공사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에서 공사 중단 운운하는 것은 전북 도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고서 나는 두 가지 비수를 던졌다. 하나는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친구 글의 성격을 이용했다. 쇼펜하우어가 상대방이 인정하는 권위에서 근거를 마련하라는 요령을 제시했듯이, 나도 "한나라당도 새만금 사업에 대해 명백히 반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가 수긍하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청중들에게는 분명 많은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또 하나는 "교실 안의 쓰레기나 잘 처리하자"는 억지였다. 논의와는 별반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당장 우리 주위의 형편이나 살피자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친구의 주장에 타격을 가했다. 친구의 매서운 주장에 나의 비수가 어느 정도 잘 꽂혀 들어갔는지 친구의 재반론에서는 오염된 시화호의 사례를 드는 다소 감상적인 접근으로서 새만금 사업에 대한 논의를 접었다.


또한 친구는 교육의 실정을 물고 늘어졌다. 무시험 전형이라는 정책으로 수험생의 혼란과 각종 해악을 끼쳤다며 기세를 올렸다. 나는 사안을 보편적인 쪽으로 끌고 가서 보편적인 것을 공격하는 요령을 사용했다. 제도 몇 개가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 의식 속의 학벌주의를 몰아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데 안간힘을 썼다. 우리 스스로가 학벌주의의 철저한 신봉자이면서 교육 문제를 논한다는 것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며 논의의 선을 그었다. 원체 불리한 입장에서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포문을 열었다. 교육 문제는 입시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립학교 개혁법에 대한 한나라당의 미온적 태도를 꼬집었다. 최소한 청중들에게 양비론이라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실제로 다른 한 친구는 우리 둘의 논쟁을 '그게 그거'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친구의 공들인 주장에 김이 빠지게 하는 다른 친구의 반응이 있었다. "코사인 법칙이나 익혀라" 물론 서로 다 같은 반 친구로서 농담 삼아 던진 말이다. 그런 주장하느라 시간들이지 말고 수학 공식이나 하나 더 외우라는 이런 사소한 핀잔에도 그 친구는 상당한 타격을 입지 않을까 생각된다. 적의 적은 동지라 하더니 그 친구가 어쩌다보니 나를 도운 셈이 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요령은 나, 상대방, 청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단순한 청중에서 나아간 '제삼자'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제삼자의 지지를 활용하는 것 또한 논쟁에서의 무시 못할 방책이다.


그 후 다른 논쟁에서 나는 쓴잔을 마셔야 했다. 어려운 수능을 성토하는 분위기에 나는 대안 없는 비판에만 몰두하는 것을 문제 삼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를 무섭게 몰아 부쳤다. 대안 없는 것은 오히려 교육당국이라고 지적하면서, 기막힌 한 방을 날려 나를 나가떨어지게 했다. 수시모집 합격생인 나를 수시제도의 수혜자라고 판단하고 수시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측면 공격을 한 것이다. 내가 수시제도에 대해 상대적인 침묵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물고 늘어졌고 그 전술은 청중들에게 유효했다. 쇼펜하우어 역시 청중을 어떻게 다루느냐, 청중에게 어떻게 자신이 옳다고 느끼게 만드느냐하는 문제를 중요시했다. 청중이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만을 외치기보다는 다양한 편법으로 청중들을 구워삶으라는 그의 제안은 실로 정확했다. 나는 논쟁의 성패는 결국 청중이 가린다는 점을 실감하고 그 논쟁에서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지나간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나와 친구 사이에 오갔던 말의 파편 중에서 상당수가 쇼펜하우어의 요령에 부합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라인 상에서의 논쟁이라서 비교적 차분히 이루어졌고 의미 없는 말로 교란시키거나, 상대방이 화를 내는 부분을 집중 공략하는 등의 요령들은 활용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무척 재미있고 뜻깊은 작업이었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며 논쟁의 장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그야말로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일컫는 시대이다. 그러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토론에 대한 냉소가 팽배하다. 그 냉소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장에 최선을 다하는 성숙된 토론 문화를 일구어내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예방주사는 잘 맞아야겠지만 거기에 천착해서는 안될 일이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논쟁에서 배우는 방법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글에서 든 사례들은 온라인 상의 제 고등학교 커뮤니티에서 저와 제 친구가 올린 글들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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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숭배를 거절하자

문화 2006. 1. 16. 03:54 |
『몸 숭배와 광기』(발트라우트 포슈, 2004, 여성신문사)를 읽고

TV에서 연예인들의 예전 모습을 보면 대개는 우스꽝스럽다며 웃게 만든다. 당시 유행의 첨단이 오늘날에는 촌스러움으로 전락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의 기준은 늘 변해왔다. 그러나 어떤 특정 시점에서 지배적인 아름다움 또한 존재해왔다. 『몸 숭배와 광기』는 아름다움 추구에 대한 역사적 조망과 더불어 외모지상주의에 허우적대는 현대인의 광기를 꼬집는다. 특히 이런 몸 숭배에 좀 더 취약한 여성들의 애환을 많이 나타내려고 하고 있다.


얼마 전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살빼기와 성형 열풍이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 프로그램에서 멋 안내는 것은 게으르다는 주장을 펼쳤다. 마 교수는 “선천적 외모가 주는 자연미보다 ‘인공미’가 더욱 아름답다(마광수, 2005,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해냄, 172쪽.)”고 주장한다. 그는 인공미 추구의 일환으로서 살빼기와 성형을 긍정적으로 본다. “몸짱ㆍ얼짱 열풍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온 정신우월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그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마음을 보고 반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외모지상주의를 너무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성형중독 후유증으로 전사회적 충격을 안겨 줬던 선풍기 아줌마의 힘겨운 재활 과정을 지켜보며 아름다움의 문제를 마냥 일개인의 책임영역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노력이 즐거움을 주며 개성을 확장시켜 주는 한(『몸 숭배와 광기』, 33쪽)”에서라면 마 교수의 표현대로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가 외모를 어떻게 평가하느냐(21쪽)”의 관점이 중시되면서 개인의 자유의사보다는 사회적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무한경쟁에 시달려야 한다.


글쓴이는 “육체가 당혹과 부끄러움, 열등감 내지 우월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어서는 안 될 것(270쪽)”이라고 말하지만 다소 이상적이다. 육체든 정신이든 그런 다양한 감정의 원천이 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인답시고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는 것 또한 그리 흡족한 해결책은 아니다. 글쓴이가 아름다워지는 것의 한계선으로 제시한 “내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된다. 한꺼번에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지어서도 안 된다(273쪽)” 또한 원론적인 수준이라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육체를 비하하고 인공미에만 탐닉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는 것 만한 처방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비록 미적 기준을 강제하는 사회적 측면이 적잖으나 제도 개혁보다는 의식 개혁이 좀 더 근본적일 수밖에 없는 문제인 셈이다.


남성도 외모를 가꾸는 시대라고들 하지만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어서 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은 아무래도 여성이다. “여자는 외모, 남자는 능력”라는 등식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 여성이 이런 루키즘(lookism)의 광풍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성차별을 넘어서는 개성의 발현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Jung)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한다.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이다.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사회적 역할에 집착하기보다 내면의 인격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이론의 핵심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시대에 양성성을 갖춘 인간상이 추구된다면 외모에 대한 집착도 상당부분 진정될 것이다.


차이가 차별의 명분이 되는 세상에서는 유럽의 코르셋이나 중국의 전족 같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된다.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아름다움”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든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개인은 좀 더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과 남성 이전에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인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말처럼 스스로 무겁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어 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내면적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이 외면적 아름다움까지 풍긴다면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예쁘다라는 기준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점으로 묶어두려는 절제가 필요하다. 타인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아름답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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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객원기자(?)로 일하고 있는 경영B반 웹진 2005년 11월 1호에 기고한 원고를 전재합니다. 일전에 익구닷컴에 올린 [조선 당쟁에서 배운다]를 정리해본 글입니다. 익구닷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화려한 레이아웃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무덥던 여름도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고, 이제 북악산도 알록달록한 단풍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가을은 또한 가장 책을 읽기 좋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쌀쌀해진 가을바람에 코트 옷깃을 여미며 한권의 책을 넘기는 飛반인의 모습,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멋진 모습이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준비했습니다. ‘늦가을, 飛반인의 문화 산책’! 이번 웹진은 飛반인들에게 가장 ‘대학의 지성인’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인물로 설문조사 된!! 최익구 선배님의 글을 싣는 기회를 가져 보았습니다.

 


 

          이덕일, 199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한줄 서평 - 선조부터 정조까지의 조선 당쟁을 깔끔하게 돌아본다>

          이덕일, 2000,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한줄 서평 - 시대를 역행한 한 정치가에 대한 추상같은 비판이 돋보인다>

          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한줄 서평 -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보는 영조 탕평책의 한계를 짚어본다>

          이덕일, 2004,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1, 2권) , 김영사.

          <한줄 서평 - 정약용 일가의 이상과 좌절을 통해 정조시대를 추억한다>

 


 

[관용이 흐르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꿈꾸며]

- 이덕일 역사서 4종 세트(?)를 통해 조선 당쟁을 헤집다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은 낙관적인 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그 숱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망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왔고, 때때로 후퇴하지만 대개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길게 보고 너그럽게 볼 수 있는 안목이야말로 역사를 읽으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보배이다. 역사를 궁리하면서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나아가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창의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의지를 기를 수 있으리라. 대중적인 역사서를 집필하기로 유명한 역사학자 이덕일의 저서를 통해 조선 당쟁의 진면목을 만나보자. 독선과 오만에 빠진 닫힌 사람들에게서 역설적으로 겸손과 화해 그리고 열린 사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조선 중기 사림파는 훈구파의 집요한 견제와 숱한 사화를 이겨내고 마침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높은 도덕성과 엄밀한 학문성을 자랑하던 사림파는 사소한 일로 분당을 거듭하더니 종국에는 시대변화에 뒤쳐져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된다. 진보의 표상은 수구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눈의 티끌에 성내는 당쟁의 폐해는 이조정랑 임명을 둘러싸고 대립한 김효원과 심의겸의 동서분당 시발점부터 나타났다. 인사상의 이견에서 비롯된 사소한 갈등은 내 편이 아니면 죽여야 하는 극한 대치를 낳았다.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할 것 없이 정권을 잡았을 때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조선 당쟁을 칭찬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쟁에 휘말린 이들이 자당의 이익 수호에만 급급해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잃은 경우가 많았다. 가령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존망의 위기 앞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느라 바빴던 붕당을 곱게 보기란 힘들다. 임진왜란 때는 모든 당파의 공과가 병존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나 잘났다만 외쳤으니 이 얼마나 밉 살 맞 은 가. 점입가경으로 당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원한에 사무쳐 서로를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당쟁이 끝끝내 사대부들만의 잔치를 벗어나지 못한 것 역시 큰 폐단이었다. 영조가 당파간 공존의 틀을 만들려고 애썼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사대부들만의 정치 독점을 흔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탕평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피지배층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고 이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가 절실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으로 말미암은 변혁의 욕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려 했던 정조의 좌절이 더 안타까운 까닭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향한 아귀다툼은 늘 존재했지만 당쟁에 몸담았던 유학자들 상당수가 너무 편협했다. 물론 역사 연구는 최대한 그 시대의 과제와 현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시대적 분위기를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겨서 당론으로 국론을 통일하려 하고, 반대파를 발본색원하려 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을 나누고, 비판을 가한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주의주장을 없애는 길은 그 주의주장의 제창자와 추종자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의주장 자체의 허실을 가리면 그만이다.               아무리 왕조사회의 인식틀과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절대적 진리와 집단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하더라도 살육으로 점철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정조는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강경 대응 주문에 성리학을 지지하면서도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진다면 사학(邪學:천주교)는 자기자멸할 것이다”며 탄압에 반대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한 개명군주 정조의 바람과는 달리 정조 사후 혹독한 박해가 이어졌다. 그러나 교조화된 성리학의 답답함을 서학으로 풀게 된 이상 수천의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수용이 강한 한국 천주교 보급은 사대부 계급 간 밥그릇 싸움에 신물이 난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홍경래가 최후로 버틴 정주성을 함락시켜 여자와 열 살 이하의 남자를 제외한 1917명을 모두 처형한다고 해서 지역차별의 불씨가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다. 장보고에게 비수를 꽂는다고 신라 골품제의 비효율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노비 만적을 강물에 던진다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육신을 거열형에 처한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찬탈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봉준을 죽여도 사람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식는 것은 아니다.


 

 

 

 

 

 

 

 

 

 


<- 1800년 재위 24년만에 정조가 승하한 창경궁 영춘헌

 

 

오늘날 한국 정치는 사림시대의 그늘을 경계해야 한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당파 싸움을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라 비판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정권 연장을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사상 공세를 일삼았다. 겉으로는 대의명분과 개혁성을 앞세우면서 독단아집, 지역주의, 주의, 줄서기에 연연한다면 당쟁의 병폐가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특히 개혁 세력에게 당쟁의 교훈이 필요하다. 사림파는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면서 훈구파의 과오를 답습하기 시작했다. 세월의 무게는 영원할 것만 같은 것도 녹슬게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낯설게 만든다. 개혁의지로 타오를수록 역사를 외경하고, 자신 앞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높을수록 낮아지는 정신이 그립다.

 


사회 내부의 모순에 허덕이느라 시대 정세를 읽지 못하고 나라를 잃는 수모를 당해야했던 조선의 몰락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이제 예송논쟁 따위나 하며 한가하게 소일할 여유는 그리 없다. 더군다나 이제 경쟁은 안에서보다 밖에서 더 치열하다. 우리는 상호공존을 추구하는 정치를 위해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을 동일시하지 않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사람을 원망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사람 자체를 매장하려 하지말고 그 사람이 내놓은 지식과 인식, 내뱉은 말과 글을 비판해야 한다. 앞으로는 사람을 없애 그 사람의 이론과 사상을 손쉽게 정리하는 야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정직하게 경쟁하되 겸허하게 수용하고 깨끗하게 승복하자.


  예송논쟁이 한창일 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항했던 남인 논객 윤휴가 억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마시기 직전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라고 푸념했다. 상호공존의 틀이 무너졌음을 암시하는 윤휴의 볼멘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송시열과 같은 독선을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이며,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약용 일가의 비운은 현재 진행형인지 모른다.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적대시하는 풍토가 잦아들지 않는 한 이 세상은 성인과 악당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광경이 계속될 것이다. 조선 당쟁에서 배워야할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이다.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인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이 혼란스러울 때,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날 때 칼 포퍼의 다음과 같은 말을 꺼내보는 것은 어떨까. - [憂弱]


                                                         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 K.R. Popper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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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조금이라도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려고 개관 시간 전에 서두른 덕분에 별 무리 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이번 관람은 사전답사의 성격이 짙어서 동선 파악과 주요거점 확보 등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된 후 찾으니 하나하나 그 의미가 각별했다. 적당히 생략하며 넘어갔는데도 둘러보는 데 5시간 정도 걸렸다. 함께 온 답사 동반자는 지치지도 않냐며 성화다. 집에 가서 저녁 무렵에야 피곤함을 좀 느꼈을 뿐 그야말로 박물관을 사뿐사뿐 잘도 걸어다녔다.^^;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을 친견한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서투른 사진 실력으로 어렵사리 찍어 온 사진은 당분간 내 컴퓨터 배경화면을 장식할 예정이다. 일본에서 온 고려불화 두 점 앞에서 눈이 떨어져라 황홀경을 만끽했다. 4미터가 넘는 부석사 괘불탱도 장관이다. 백제 금동대향로도 명불허전이었으며 백제 산수문전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신라 사천왕사 녹유사천왕상의 조각은 어찌나 세련되며, 성덕왕릉 원숭이상은 또 얼마나 정겨운가. 황복사 순금제여래좌상과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 앞에서는 황금빛이 주는 찬란함에 매료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고려청자 죽순모양 주전자와 칠보무늬 향로의 미감에 아찔했고, 다시 만난 백자 달항이리도 여전히 정겨웠다. 감은사 석탑 사리장엄구와 고려 청동 11층탑은 금속공예의 백미였다.


대강 훑어봤는데도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했다. 일본, 영국, 프랑스 등지의 유명한 박물관들이 조금 폄하해서 장물 집합소라면 우리네 박물관은 남의 것 약탈한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는 평화와 문화의 이상적인 만남이 아닐까 자화자찬해봤다. 궁궐 답사 등을 통해 목조 건축에만 약간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내가 이제는 조각, 공예, 회화, 건축 등 한국 고미술 전반에 대한 애호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예전에는 오로지 글자만 있는 책만을 고집했는데 이제는 멋들어진 화보집, 풍성한 도록에도 열광하고 있다. 결국 관람을 마치고 나오기 전에 들른 문화상품점에서 백제 금동대향로 도록을 지르고 말았다. 다만 무척 비용이 많이 들어서 앞으로도 이 취미를 간직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전의에도 불탄다.^^;


흔히들 친한 사이에는 정치나 종교 문제를 꺼내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정치나 종교에서의 차이만큼 첨예한 갈등을 유발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이를 염려한 처세책일 것이다. 물론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친밀감을 높이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르게 살아왔음을 감추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자신만이 옳다고 우기지 않으면서 서로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며 배우고 다투는 것이 진정한 우애가 아닐까 싶다. 기실 정치나 종교 문제에 대한 티격태격보다 더 민망한 것은 기호나 취향을 문제 삼는 것이다. 4500만의 기호, 60억의 취향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편협함만큼 볼썽사나운 것도 없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는 내다버려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극우파 인사들이 빨갱이 사냥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일부 개신교도들이 사탄을 때려잡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고 지인들에게 분노를 토로하는 것이 구박거리는 아니다. 이런 공적 영역에 대한 토론이 활발한 것이 건강한 사회이며, 반대로 사적 영역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한껏 존중해주는 것이 성숙한 사회다. 가령 역사를 좋아하고 문화유산 완상을 즐기는 나는 내 나이 또래에서 문화적 소수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소수파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내 마음이 끌리는 것에 아낌없는 시간과 정성을 쏟을 자유가 있다. 남의 미감이 소중한 만큼 나의 미감도 충분히 존중받겠다는 지극히 세속적인 꿍꿍이다.^^;


좋아하는 선배님 한 분이 자신의 삶을 이루는 세 개의 꼭지점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영감을 얻어 나 또한 세 개의 꼭지점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선배님 글의 내용인즉슨 공학적 숫자놀이로 밥벌어먹고, 음악으로 향락하며, 책읽기와 글쓰기 같은 글자놀이를 즐기는 삼각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선배님의 정리를 빌리자면 工-♪-冊이라는 세 꼭지점이 있는 삼각형을 추구하는 셈이다. 나도 선배님과 비슷한 삼각형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경제, 경영 분야로 밥을 벌어먹으면서(과연?^^;) 역사와 문화유산에 끔뻑 넘어가고, 마찬가지로 글 읽고 쓰는 기쁨을 추구할 공산이 크다. 경제, 경영의 經, 문화생활은 돈이 많이 든다는 점에 착안하여 財(문화재의 재字의 의미도 있다), 그리고 텍스트 사랑으로서의 書... 이로써 經-財-書라는 꼭지점을 가진 삼각형이 탄생한다.


인문학적 교양과 사회과학적 전문성간의 균형, 문예적 기질의 원만한 발현,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 input한 양을 넘어서지 않는 output 등등의 대강의 얼개가 나온다. 아무래도 정삼각형이 되기는 글렀고, 이등변삼각형이 될 수도 있고, 한 개의 꼭지점이 끼어들어 사다리꼴이 될 수도 있고, 어쩌다보면 육각형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에 經이라는 꼭지점 대신 공무원 철밥통을 끌어안아 볼까 기웃거리는 모양새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 경우에 공무원의 公이라고 해야 하나, 철밥통의 鐵이라고 해야할지의 사소한 문제가 남지만.^^; 여하간 아직 나의 진로는 반죽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찰흙이며, 어떻게 이어 붙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수깡과 같다. 안개 속에 헤매는 기분이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 너무 조바심 낼 필요도 없겠다.


올해 말까지 무료로 개방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인지라 그 핑계로 몇 번 더 찾아갈 참이다. 바지런히 유물원정대를 꾸려서 출정을 해봐야겠다. 그나저나 유물원정대 일정을 위해 기껏 잡아준 소개팅 날짜도 미뤄버렸다. 한 꼭지점에 충실하다 보니 문화적 소수파를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자기 좋아하는 일 하는데 남 눈치까지 볼 만큼 여유는 없다. 내가 흠모하는 고종석 선생님께서 당신의 팬에게 해주신 말씀인 Carpe Diem, 즉 Seize the day를 주문처럼 외워보자.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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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당쟁에서 배운다

문화 2005. 10. 8. 21:57 |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주최한 ‘좋은 서평이 좋은 책 살린다’ 우수 리뷰 이벤트에 응모한 서평이다. 본래는 조선 당쟁을 주제로 쓰려던 글을 쓰려고 생각하던 참에 이 서평 응모전이 열리기에 책 내용을 추가해서 재구성해봤다. 그렇다 보니 서평이라기보다는 당쟁에 대한 내 생각만 늘어놓은 격이다. 그래도 뭐 덕분에 앓던 이 하나는 뽑았다.^^;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윤휴의 절규

예송논쟁(禮訟論爭)이 한창일 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항했던 남인 논객 윤휴가 억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마시기 직전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라고 푸념했다. 그의 외침은 예송논쟁에서 당파간 공존의 틀이 무너진 후에 야기될 극한 대립의 전주곡이었다. 이덕일 교수의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당쟁의 그늘을 추적해가면서 서로를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던 참담함을 돌아보게 한다. 가만히 물어본다. “왕으로 삼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사도세자의 죽음과 영조 탕평책의 한계

글쓴이는 영조의 두 가지 콤플렉스에 천착한다.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과 경종독살설에 대한 콤플렉스가 영조를 평생 괴롭혔다는 것이다. 특히 경종독살설은 그의 재위기간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는 효종으로 즉위한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아들이 이어야 할 자리를 가로챘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린 것도 비슷하다. 세자빈 강씨를 역강(逆姜)이라 칭하며 신원 문제를 시종일관 거부했을 뿐 아니라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아들의 석방을 직언한 신하를 죽이기까지 한다. 영조가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 벽서 사건 때 분개한 것도 모두 자신의 즉위 명분과 정통성 문제에서 비롯된다. 노론이 나주 벽서 사건을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몰고자 할 때 영조가 추인하게 되는 것도 영조 즉위과정의 한계인 셈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세자와 영조의 생각이 갈리기 시작한다.


세자는 경종 시절 노론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은 객관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 신하가 임금을 택한 ‘택군’이었으며, 당시 그러한 행위는 역적으로 공격받을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니 수십 년이 지난 이제 와서 복수할 만큼 정당성이 있는 행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간 당론 조제가 임금의 역할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훈계하던 정치적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지금의 옥사는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 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194쪽


영조는 탕평을 통해 포용하려했던 소론을 내치려고 하였으나 세자는 이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수십 년 간 절치부심하며 과거사 재평가 작업을 해온 영조로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표명하는 세자는 아들이라기보다는 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귀국한 소현세자 부부를 정적으로 여기고 냉대했던 인조의 좀스러운 증오심이 재연되는 순간이다. 다만 글쓴이가 누차 강조하듯 눈물 많고 정 많은 영조는 아들만 죽음에 몰아넣었을 뿐, 며느리와 손자들까지 죽인 인조의 비정함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소현세자의 비극은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유구한 경험을 다시금 선보였다. 사도세자의 비극도 비슷한 면이 많지만 당쟁의 틀에서 좀 더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세자가 반노론의 입장을 밝혀가며 소론쪽으로 기울자 노론은 자신들의 지위를 사수하기 위해 세자를 향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노론이 조작한 나경언의 고변까지 터지자 영조는 세자에 대한 적개심을 부당(父黨)과 자당(子黨)이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이제 영조는 아들을 정적을 넘어 역적으로 여기고 결국 뒤주에서 가둬죽인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의 탕평정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옹위하기 위해 결국 노론 중심의 일당 독재체제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비명횡사 이후 세손의 지위도 위태로워졌다. 노론의 견제를 뚫고 등극한 정조는 즉위 일성(一聲)으로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추모의 정을 듬뿍 실었을 이 말에 노론 대신들이 얼마나 아연실색했을지 짐작이 간다. 정조는 영조가 못다 이룬 탕평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아버지의 원통한 죽음을 갚아 나갔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지어 친정의 무고함을 항변하려 한다. 이 노회한 정객의 글재간으로 말미암아 사도세자는 실제 이상으로 정신이상자가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글쓴이는『한중록』의 순수성에 거듭 의문을 제기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의 실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고 있다. 혜경궁의 눈물이 “진정 애통해야 할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초래한 가해자들을 위해 흘린 것(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353쪽)”이기에 동정 받을 수 없다고 일갈할 때 여간 통쾌한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글쓴이의 필력에 힘입어 경종, 영조 연간의 당쟁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이 책은 당쟁의 한 사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당쟁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또한『한중록』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당쟁의 끔찍함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현종 연간의 예송논쟁과 숙종 연간의 환국 정치, 경종 연간의 신임옥사를 거쳐 가면서 각 붕당들은 자꾸만 피를 부르는 당쟁의 심각성을 깨우쳤어야 한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앞세워 난국을 타개하려 애썼지만 대다수 사대부들은 편 가르기에만 몰두했을 뿐 화해와 상생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정조의 마지막 노력이 무색하게 붕당정치보다 더한 세도정치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혹자는 사색당파 운운하며 조선 정치의 후진성을 논하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이라며 의분을 터뜨린다. 물론 조선시대의 당쟁이 한국인의 분열적인 민족성에 기인한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이론은 부적절하다. 당쟁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이를 한국사 전체로 일반화 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는 최대한 그 시대의 과제와 현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두부 자르듯이 재단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유교적 문치주의가 당쟁으로 진행된 것에는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과거시험으로 관리를 뽑았던 능력 위주의 경쟁이 심하다보면 단결이 잘 안되는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능력 위주의 경쟁 사회에서 단결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능력주의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능력주의야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정신적 자산이라는 주장은 음미할 만 하다(이성무. 2000. 『조선시대 당쟁사1』. 동방미디어. 21~22쪽 참조). 당쟁 말기로 갈수록 능력주의는 많이 빛을 발하지만 당쟁을 사갈시하는 것보다는 균형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조선 당쟁을 칭찬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쟁에 휘말린 이들이 자당의 이익 수호에만 급급해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잃은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가령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존망의 위기 앞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느라 바빴던 붕당을 곱게 보기란 힘들다. 사실 임진왜란 때는 모든 당파의 공과가 병존했다. 북인은 김덕령, 곽재우 등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고, 남인은 유성룡이 이순실, 권율 등을 중용한 공이 있다. 서인은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고, 부사 황윤길의 침략 예언 보고를 했다(이덕일. 199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22쪽 참조). 그런데도 나 잘났다만 외쳤으니 이 얼마나 밉살맞은가. 점입가경으로 당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원한에 사무쳐 서로를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쟁의 여러 긍정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대부들만의 잔치를 벗어나지 못한 것 역시 큰 폐단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예송논쟁이 제 아무리 고상한 철학논쟁이요, 고도의 정치이론이라고 한들 민생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탁상공론 혐의가 짙다. 영조가 노론과 소론 간 공존의 틀을 만들려고 애썼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사대부들만의 정치 독점을 흔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탕평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피지배층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고 이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가 절실했다. 정조는 일반 백성들의 민원사항을 수렴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고, 모든 노비를 해방시키는 정책을 준비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으로 말미암은 변혁의 욕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려 했던 정조의 개혁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정조의 좌절이 더 안타까운 까닭이다.

사림파는 훈구파의 집요한 견제와 숱한 사화를 이겨내고 마침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높은 도덕성과 엄밀한 학문성을 자랑하던 사림파는 사소한 일로 분당을 거듭하더니 종국에는 시대변화에 뒤쳐져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된다. 진보의 표상이 수구의 온상으로 전락하는데 많은 시일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뿌렸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눈의 티끌에 성내는 당쟁의 폐해는 김효원과 심의겸의 동서분당 시발점부터 나타났다. 가장 오래 정권을 잡은 서인-노론 계열에 가장 큰 책임을 돌려야겠지만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할 것 없이 정권을 잡았을 때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일 상례였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점을 볼 때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 정치도 사림시대의 그늘을 경계해야 한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당파 싸움을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라 비판했지만, 그 자신도 정권 연장을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사상 공세를 일삼았다. 겉으로는 대의명분과 개혁성을 앞세우면서 독선과 아집, 지역주의, 연고주의, 줄서기에 연연한다면 당쟁의 폐단이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특히나 민주화 세력에게 당쟁의 교훈이 필요하다. 사회 각지에 넓어지는 진보의 영역에서 얼마만큼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실현하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림파는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면서 훈구파의 과오를 답습하기 시작했다. 세월의 무게는 영원할 것만 같은 것도 녹슬게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낯설게 만든다. 개혁의지로 타오를수록 역사를 외경하고, 자신 앞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높을수록 낮아지는 정신이 그립다.

비단 조선시대 당쟁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향한 아귀다툼은 늘 존재했다. 또한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것도 여지없이 증명해보였다. “과거 역사에 대한 판단은 현재의 세계관이 아닌 그 당시의 인식틀과 논리,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신앙과 신념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다원주의 원칙에 의거해서 내리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박노자, 허동현. 2003. 『우리 역사의 최전선』. 푸른역사. 200쪽)”라는 박노자의 견해에 동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당쟁에 몸담았던 유학자들 상당수가 너무 편협했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시대적 분위기를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겨서 당론으로 국론을 통일하려 하고, 반대파를 발본색원하려 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을 나누고, 비판을 가한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주의주장을 없애는 길은 그 주의주장의 제창자와 추종자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의주장 자체의 허실을 가리면 그만이다. 아무리 왕조사회의 인식틀과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절대적 진리와 집단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하더라도 살육으로 점철된 당쟁까지는 이르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한국 정치가 당쟁의 병폐를 끊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더군다나 이제 경쟁은 안에서보다 밖에서 더 치열하다. 지연과 학연을 바탕으로 다투던 당쟁의 폐해와는 서둘러 결별해야 한다. 사회 내부의 모순에 허덕이느라 시대 정세를 읽지 못하고 나라를 잃는 수모를 당해야했던 조선의 비운을 되풀이해서는 곤란하다. 이제 예송논쟁 따위나 하며 한가하게 소일할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글로벌 경쟁 아래 우리끼리 다퉈서 이기면 세상을 다 차지한 것인 양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호공존을 추구하는 국내정치, 평화와 번영을 지향하는 남북관계 조성에 더 이상 사도세자와 같은 희생제의가 필요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칼 포퍼의 세계 3이론을 새기며

박세채는 1683년 탕평론을 제기하면서, 당파에게는 우열론을 써야 하고, 권력을 쥐고 흔드는 간신과 그들에게 붙은 무리에게는 시비론을 써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붕당은 사리와 분별이 있는 사대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지기보다는 ‘누구는 우수하고 누구는 열등한가’를 가리는 우열론(優劣論)이 적절하다는 것이다(박광용. 1998.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49쪽 참조). 조선의 현실에서 주자의 시비분별론(是非分別論)보다는 우열조제론(優劣調劑論)이 단기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고육책이리라.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우열조제론은 단순히 단기적 처방이 아니라 영구한 대책이 될 공산이 크다.

박세채의 논설도 훌륭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칼 포퍼의 세계 3이론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포퍼는 물질의 세계(세계 1), 주관적 마음(정신, 의식)의 세계(세계 2)와 구별되는 객관적 사상의 세계, 마음의 산물이면서도 그 인식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는 세계 3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상, 언어, 윤리, 제도, 과학, 예술 등을 설명한다. 세계 3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인공적 산물이지만 일단 그러한 이론이 존재하게 되면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가지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귀결을 산출하며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Popper. 1977. 『자아와 두뇌』(The Self and Its Brain) 참조). 이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말하는 사람과 그가 내놓은 이론, 지식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말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비판”을 구분해야한다는 것이다.

세계 3은 인간의 산물들의 세계로서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을 생산해낸 인간과 분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계 3은 세계 2에서 파생되었으되 의도치 않은 논리적 귀결들과 문제, 인식주체를 벗어난 독자적인 발전과 전개들로 구성되는 자율적 영역이라는 것이 포퍼 주장의 핵심이다. 주관적 인식의 세계인 세계 2와 객관적인 인식의 세계인 세계 3의 구별은 획기적이다. 비판과 토론에서 누가 주장했는가보다 어떤 주장을 했느냐에 주안점을 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 것이다. 이 전환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을 동일시하지 않는 혜안을 선물해준다.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제멋대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주장 자체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사람=그 사람의 말과 글”이라는 등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지식의 생산자를 그 지식과 동일시하여 어떤 사상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 사상의 산출자를 없애버렸다. 이는 정치적 해결은 될 수 있어도 학문적 해결은 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의 정치적 해결은 항상 폭력을 수반한다. 열린 사회는 이러한 정치적 해결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신중섭. 1999.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자유기업센터. 114쪽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전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없는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강경 대응 주문에 정조는 정학을 지지하면서도 “사교(邪敎:천주교)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유학)의 진흥에 의해 막을 수 있다”고 탄압에 반대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한 개명군주 정조의 바람과는 달리 정조 사후 혹독한 탄압이 이어졌다. 그러나 교조화된 성리학의 답답함을 서학으로 풀게 된 이상 수천의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교사에 의한 전파보다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수용이 강한 한국 천주교 보급은 사대부 계급 간 밥그릇 싸움에 신물이 난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홍경래가 최후로 버틴 정주성이 관군에 함락되면서 2983명이 사로잡혔을 때 자행된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열 살 이하의 남자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을 모두 처형한 것은 지역 차별을 반성하지 않고 피로써 잘못을 감추려했던 역사의 비극이다. 어디 그뿐인가. 장보고에게 비수를 꽂는다고 신라 골품제의 비효율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노비 만적을 강물에 던진다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육신을 거열형에 처한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찬탈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봉준을 죽여도 사람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식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자기의 이론과 더불어 같이 죽지 않게 되었을 때, 인간은 용감하게 새로운 모험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지적 전통은, 전에는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방어적 태도로 기존의 교설을 보존하는 데 봉사하였으나, 지금은 탐구적 태도의 뒷전으로 밀려나서 변화를 위한 힘으로 바뀌었다.
- 브라이언 매기. 1998. 『칼 포퍼』. 문학과 지성사. 78쪽

이제 사람을 없애 그 사람의 이론과 사상을 손쉽게 정리하는 야만을 저지르기 힘든 세상이다. 세계 3이론은 그 사람이 내놓은 지식과 인식, 내뱉은 말과 글을 비판함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열린 세상을 만든다. 가수 김민기는 자신의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무덤덤한 이유를 “내가 만든 노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노래란 향유하는 사람들 나름의 창조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정혜신. 2005. 『사람 VS 사람』. 개마고원. 159, 160쪽 참조)”이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세계 3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되는 지식들을 모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지 않는 겸손함을 가져야한다. 세계 3이론은 치열하게 토론하고 정직하게 경쟁하되 겸허하게 수용하고 깨끗하게 승복하라는 깨달음을 준다. 사람을 원망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세계 2와 세계 3을 분간함은 건전한 정쟁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

윤휴의 볼멘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인지 모른다.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적대시하는 풍토가 잦아들지 않는 한 이 세상은 성인과 악당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광경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사회에서 절대선과 절대악이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다.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배워야할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고 싶은 유혹을 버리기가 마음만큼 녹록지 않을 것이다. 고종석의 다음과 같은 말을 늘 곁에 두자. 버리면 가볍다. - [憂弱]


문화로서의 전체주의를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우선 진리의 전유권(專有權)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들이 진리를 전유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 고종석. 2002. 『자유의 무늬』. 개마고원. 143쪽

Posted by 익구
:
한가위 연휴를 하루 앞두고 주임님의 배려로 평소보다 일찍 구청을 나섰다.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고구려 고분벽화 도록이 도착했다는 서울역사박물관 뮤지엄샵으로 향했다. 얼마 전 야나기 무네요시 민화 특별전을 보고 난 후 찾은 뮤지엄샵에서 꽤 괜찮은 고구려 고분벽화 도록을 발견했으나 재고가 다 떨어지고 없었다. 아쉬운 대로 견본품이라도 사려다가 또 들어온다는 이야기에 다음을 기약했었다. 그 때 점원이 나를 알아보고는 말을 건네 왔다.


점원: 저번에 그 분이시죠? 꼭 필요하신 건가봐요?
익구: 아 예... 이런 도록은 시중에서 구하기가 힘드니까요.
점원: 혹시 관련 학과세요?
익구: 아니요. 그냥 취미생활이에요.^^;


교보문고에서 할인판매하는 세계문화유산 화보집 냉큼 구매해서 싱글벙글하는 나를 보고 관련 학과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틀 사이에 똑같은 질문의 연속이다. 혹자는 내 취미생활이 너무 방대하다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잉여(剩餘)도 없이 제 밥벌이만 챙기는 삶은 얼마나 퍽퍽한가. 전부 다 제 전공만 파고드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잉여를 낭비쯤으로 취급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유와 운치로도 해석하고 싶다. 점원의 의아스러운 표정을 뒤로하고 가뿐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서다가 이게 남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행동인가 자문해봤다. 만약에 토익 공부를 이렇게 했다면 이상하게 취급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시 문화적 소수파가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아닐까 생각하니 조금 씁쓸하다.


나는 내가 인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으면 좋겠다. 원체 비문학적(?)인지라 문학작품을 손에서 멀어진지 오래지만 역사와 철학 쪽만은 남부끄럽거나 남부럽지 않게 공부하고 싶다. 요즘 들어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분야가 너무 많다. 처음에 궁궐에서 비롯된 목조건축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 문화유산 감상이 고구려 고분벽화나 고려청자, 불화, 석탑 등 고미술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 사상을 비롯한 경제철학 쪽도 섭렵할 계획이다. 늘 멀리 바라만 보는 칸트 철학도 수박 겉핥기나마 도전하고 싶다. 만날 조금씩 갉아먹다가 끝나는 논어와 맹자도 제대로 씹어 먹어볼 때다. 향가와 고려가요도 궁리하고 몇 수 외워서 늘 품고 지내야겠다. 읽고 싶은 책, 빌려봐야겠다 싶은 책들의 목록이 자꾸 쌓이지만 게으른 몸뚱이가 얼마나 따라줄지 의문이다.


이렇게 유식찬란(有識燦爛)해지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이 경영학도라는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욱 멋지고 기품 있는 경영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문화경제학, 문화경영이라는 근사한 레토릭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문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영, 경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문화를 향유하는 삶이라고 본다. 도대체 네 정체는 뭐냐는 물음이 적잖지만 이 혼란스럽고 산만한 모습 자체가 나란 녀석임을 쑥스럽게 고백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보가 있음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무슨 일을 하게 되던 간에 은근하고 탄탄한 인문적 사유를 딛고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부와 권력을 마다할 사람 없지만 그런 것들에만 함몰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우선 위기지학(爲己之學)이며 그 후에 얻는 부와 권력은 외려 내가 바라는 바다.


논어에서 "옛날의 공부하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공부하더니, 오늘날의 공부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구절이 나온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은 자기를 위해,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는 배움이다. 종국에는 그렇게 배운 것을 사회에서 써먹는 데까지 나아가야겠지만 시작은 어디까지나 인격 도야와 자기 수양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위인지학(爲人之學)은 남을 위한 학문, 남에게 보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배움이다. 물론 남의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지적 허영과 세속적 공명(空名)을 마냥 나무라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처사다. 또한 학문이 출세와 치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며 분개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위기지학을 추구하다보면 지혜를 얻기보다는 스스로를 높이는데 열중하고, 시대의 아픔을 살피기도 전에 앞에 나서는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돌 틈에서 솟아나는 싸늘한 샘물은 때로는 외롭다. 눈밭에 고개 드는 새파란 팟종은 때로는 힘겹다. 그러나 그렇기에 맑고 매울 수 있는 것이리라(허영자의 시 [무제]를 거의 그대로 베껴왔다). 내 지적 편력은 거칠고 엉성하지만 그것이 내 의지와 자유의 소산이라면 한계마저도 눈부시다. 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져야할지도 모른다. 내 자신에 대한 투자가 헛되지 않기 위해 괜찮은 수익률을 보이려고 애써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늘상 정색하고 달려드는 것은 금물이다. 치열하되 재미나게 살아야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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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고종석 팬카페 정모를 안암골에서 가졌다. 구청 사무실에서 있는 내내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마냥 안절부절못했다. 간신히 6시까지 버티다가 칼퇴근을 하고 학교로 향했다. 이런 즐거운 모임이 안암골에서 열리다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때마침 경영C반 개강총회가 있는 날이어서 04학번 후배들 몇 명이랑 인사나 나눌 겸 잠깐 들렀다. 1학기에 비해 많이 조촐해진 2학기 모임들을 보면 늘 아쉽다. 시간이라는 필터링이 얄미울 따름이다. 안 그래도 모임 시간에 늦은 터라 서둘렀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일단 앉으면 여간 일어나기가 힘들다. 급하게 소주 몇 잔을 나눈 뒤 총총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길치인 나이지만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약속 장소인 참살이길 끝의 어느 화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서두른다고 했지만 9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고, 많은 분들이 있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일단 자리 잡고 앉으니 어찌나 편한지 모르겠다. 고종석 선생님의 전작주의자인 박강님의 화려한 수집담을 듣다 보니 정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 선생님의 글이 언론매체 등에 나오기 시작한 게 90년대 초반이니 나는 그 때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에 불과했으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계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박강님의 초청을 받아 전격적으로 박강님네 탐방 혹은 답사를 떠날 참이다.^^


한참 환담을 나누고 있던 차에 테이블 저 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홍세화 선생님이 떡 하니 자리잡고 계신 것이 아닌가. 고종석 팬클럽 모임이기도 했지만 고 선생님의 지인들도 많이 초청되어 오신 것 같았다. 홍세화 선생님, 황인숙 시인님을 비롯해 방송작가, 시인, 변호사, 치과의사, 기자분까지 사회적 명사들이 줄줄이 포진해 있었다. 이 분들의 실명을 거론하면 이 모임의 위상이 더 오를 것 같다는 세속적 꿍꿍이를 꾹 누르고 말씀을 나눠보지 못한 분들은 그냥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홍 선생님이 한겨레 구독신청서를 돌리는 모습이 참 대단하면서도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또한 고 선생님의 [자유의 무늬] 99~ 102쪽에 나오는 ‘나’를 베끼는 것을 감시하는 세 사람의 독자 중에 한 분인 "스물일곱 먹은 스웨덴어 학도"분도 참석하셨는데 아쉽게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박강님, lee856님 등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어공용화가 튀어나왔다. 일동은 과연 저자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고 선생님의 의견을 청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스포트라이트에 선생님은 적잖이 당황하셨다. 그냥 뭐 영어를 많이 쓰게 되는 것을 억지로 막지도 말자는 거라며 대강 얼버무리시는 것으로 볼 때 술자리는 될 수 있으면 가볍게 즐기자는 주의이신 것 같다. 나는 적극적 영어공용화론자인 복거일 선생님과 함께 엮이는 것이 조금 아쉽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영어로 벌어먹고 사시는 young님이 반대하시고, 한국어로 벌어먹고 사시는 박강님이 찬성하시는 것도 어색한 듯 재미났다.


문득 대학 1학년 교양국어 시간이 떠올랐다. 영어공용화라는 주제를 놓고 복거일 선생님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게거품을 물 듯이 통박했던 기억이 난다. "만일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영어와 한국어 가운데 하나를 모국어로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자식에게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라는 식의 거친 사고실험이 영 마뜩잖았던 것이다. 고 선생님은 복 선생님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스스럼없이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복 선생님은 네게는 지적으로 할아버지뻘(?) 되는 셈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주 인연이 없지는 않았던지 복 선생님의 다음 문구가 내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이 문구를 중얼거리며 내 스승의 스승을 찬하는 우스꽝스러움이란.^^;


보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이란 말은 너무 가볍게 쓰인다. 현존하는 관행, 질서, 풍습, 규칙, 법, 기구, 공동체 도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선뜻 내놓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것들이 많은 대안들 가운데서 가장 나은 것들로 판명되어 사회적 진화를 통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대안'이라고 제시된 것들은 거의 모두 이미 오래 전에 시험되어 버려진 것들이다.
- 복거일,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2005), 삼성경제연구소, 131쪽


이번 모임의 수확 중에 하나가 열린마음님을 뵌 것이다. 열린마음님께서 고종석 팬카페에 가입인사로 올리셨던 글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의 글을 키운 것의 팔할은 고종석이다. 나의 글은 그에 대한 오마쥬에 불과하고 서양철학이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듯이 나의 글은 그의 글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이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글을 잡아들고 어찌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고종석 선생님은 우리 둘을 보고 경영학도들이 이런 자리에 나타났다며 신기해하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사리 말을 못 붙이는 편이라 그리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못했지만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개 나랑 비슷한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지내는 편이다(하기야 강퍅한 나 같은 녀석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거나, 바라보는 곳이 비슷한 사람과의 교류를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흩어져서 잘 살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마주치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흙탕물에서 자라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그 얼마나 기쁨인가.


이윽고 저쪽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고종석 선생님이 이쪽 테이블로 넘어 오셨다. 초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약간 불콰해진 모습의 고 선생님은 내게 훈련소 생활의 안부를 물어주셨다.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반듯한 녀석"이라고 칭하신다. 민망한 마음에 손사래를 쳐본다. 저 정말 비실비실하게 살고 있답니라고 항변을 해본다.^^; 선생님은 술자리에서 "술 좀 마시십시다"라는 말을 즐겨 하시는 것 같다. 그러다가 대뜸 "너 같이 부르주아 같은 애가 소수파를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셨다. 순간 부르주아 되기도 어렵지만 프롤레타리아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라는 상념이 스쳐갔다.


나는 막연히 내 자신이 프티 부르주아쯤 되겠거니 생각한다. 궁궐건축에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등급의 단청인 금단청을 볼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나는 분명 쁘띠(petit)의 원래 뜻대로 귀엽고 아기자기하게 한평생 꾸려나가는 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는 소시민이다. 엘리트주의를 적잖이 지지하고, 고아한 것을 좋아하는 귀족적 취향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소수파가 되었을 때 느꼈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올챙이적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양심적 기억력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꽤 그럴듯한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가 되기 위한 내 최소한 아니 최대한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고 선생님의 [서얼단상]에 보면 "나는 무던히도 전라도 사람이 되려고 애써왔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번 술자리에서도 진정이 물씬 풍기는 농담(?)으로 경상도 사람이 싫다고,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거슬린다고 솔직히 토로하셨다. 고 선생님 처음 뵈었을 때 내 고향이 대구라는 말을 듣고 놀라셨던 모습이 선하다(난 생후 5개월간 대구 외할머니댁에서 살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게다가 내가 경영학도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라셨다. 내가 아무리 날라리 경영학도에다가 무늬만 경상도 사람이라고 강조를 해도, 경상도와 경영학도라는 표지가 짙게 드리워진 모양이다. 여하간 지금까지는 그 사람이 어느 지역 사람인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거 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역보다는 그 사람의 학력이나 학번에 더 신경이 쓰인다. 망국적 지역주의라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것보다는 다른 거대한 장벽이 있는 셈이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고 경상도가 싫어~"라는 도식이 등장하는 것이 고 선생님의 술버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전라도 사람이기 이전에 개인"이 되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다. 이 말을 하신 선생님 본인에게도 무척 힘들 정도니 말이다.


황인숙 시인님이 나를 잊지 않고 "새우씨"라고 정겹게 불러주셔서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내 아이디가 새우범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님은 시종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안주가 떨어졌다 싶으면 얼른 채워주시고, 나가서 긴급 공수까지 해오시고 말이다. 그냥 좀 앉아서 쉬라고 여러 번 권해도 이게 내 일이라며 마다하셨다. 왜 그리 일만 하시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압권이었다. "그래야 권태를 이길 수 있거든요"... 권태라는 단어가 자꾸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이런저런 인사말에서 꼭 재미나게 보내라는 말을 한다. 까딱 잘못하면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의 연속이 될 것을 염려해서일 게다. 문학과는 담쌓고 지낸지 오랜지라 살아있는 시인을 만나서도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다니 참 서글픈 일이다. 얼마 전 시인님의 시집 [자명한 산책]을 급하게 먹는 밥처럼 후닥닥 읽어 치웠지만 결국 체하기만 했다. 나는 너무 비문학적이다.


고 선생님이 저쪽 테이블로 건너가시고 홍세화 선생님께서 이 쪽으로 넘어 오셨다. young님, 열린마음님과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떤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게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연거푸 강조하셨다. 숙고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나란 녀석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책들을 읽고, 어떤 사색을 하고, 어떤 사건을 겪어서 만들어진 것인지 대답하기가 너무 막막하다. 홍 선생님의 그윽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저 깊이 궁리하고 널리 배우자는 정도의 깨달음 밖에 건지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민망할 따름이다. 하긴 그 마저도 실천을 못하고 있으니 더 비극이지만 말이다.^^; 홍 선생님은 와인 두 잔밖에 못하는 데 오늘은 아홉 잔이나 마셨다고 하셨다. 나는 주책 맞게도 주량이 400% 인상되셨다는 어이없는 말을 했다. 푸하하 홍 선생님은 본인이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술 따라 주는 건 잘 한다며 내 잔을 부지런히 채워주셨다.^^; 그저 망극하고 황송할 따름이다.


고 선생님은 당신의 벗들을 시종일관 "늙은이들"이라고 조금 위악적으로 칭하셨지만, 사실 그렇게만 늙을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곱게 늙는 것은 내게 있어 꽤 중차대한 목표 중에 하나이니 말이다. 지금의 벗들이 세월이라는 가랑비에 너무 많이 씻겨 내려가지 말고, 나중에도 이렇게 도란도란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흥겹다. 시간이 제법 흘러 하품들도 한번씩하고 얼굴을 비벼 피로를 쫓는 모습들이 보였다. 제법 배반이 낭자하게 즐기긴 한 모양이다. 한바탕 정리를 해서 가실 분들을 보내고, 남은 분들끼리 맥주를 간단히 더 나누다가 새벽 3시가 넘어 모임을 파했다. 원체 무심한 나이지만 술의 힘을 빌리면 조금 다정해지기도 한다. young님께 전화를 넣어 조심해서 잘 들어가시고, 담에 사무실 한번 놀러가겠다고 인사 드렸다. 열린마음님께도 문자를 통해 조만간 다시 뵐 것을 기약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거스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러다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거스르기는 또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그저 "좋아한다"라는 단어의 청량감을 만끽했다. 택시비가 6000원이 안 나왔다. 학교와 집이 멀지 않다는 행복감까지 밀려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오는 길은 이렇게 상쾌하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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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잘 논 하루

문화 2005. 8. 24. 15:22 |
나는 종종 혼자서도 잘 논다는 평을 듣는다. 자기만의 세계를 꾸리면서 사색에 빠져 지낼 듯한 이미지에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잡글 쓰는 것을 즐기는 행태... 게다가 역사 공부나 문화유산 탐구 같은 대중성 떨어지는 취미를 보유하고 있다 보니 그런 혐의가 짙게 드리우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도 많이 타고 대부분의 경우 함께 하는 일을 선호한다. 혼자 있는 시간도 무척 즐기지만 그 이상으로 지인들과 알콩달콩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특히 내가 잘 못하는 일이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산책이나 서점 방문은 혼자서도 곧잘 만끽하는 편이지만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거나 문화유산 답사 같은 건 도통 혼자서 못하겠다. 젊은 시절 흔히들 꿈꿔보는 나홀로 배낭여행 같은 건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독립심이 부족하다는 핀잔을 줄 수 있겠으나 진정한 독립심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견결히 지켜내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혼자서 하는 일은 대개 독립적이게 마련이니 말이다.^^; 마치 진정한 자유는 제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얽히고설킨 인연들 속에서 찾아야하듯이 말이다.


굳이 이런 사설들을 늘어놓은 까닭은 간만에 혼자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사직단, 태릉, 의릉, 동묘 등을 혼자서 다닌 전례가 있긴 하다). 토요일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서 갑자기 필 받아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잡힌 일정이라 함께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하였으나 이날로 예정된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갤러리 가이드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청산유수 같은 청장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는 좋은 기회였다. 이런 식으로 대중과 호흡하며 우리 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무척 좋았다. 사람이 유식해지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겠구나라는 생각도 해봤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일부만 개관한 것이고 2007년 완전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과 더불어 양대축으로 키우겠다는 유 청장의 야심 찬 포부에 찬사를 보낸다. 아직도 창고에 잠자고 있는 숱한 유물들을 어서 만나보고 싶다. 내 나라가 그렇게 꾀죄죄한 나라만은 아니었음을, 우리 선조들이 맨날 신음만 하고 지낸 것은 아니었음을 이렇게나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너무 유물론적 관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인천국제공항에 커다란 백자 달항아리를 전시해 놓으면 어떻겠냐는 유 청장의 제안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유 청장 말씀대로 우리 문화유산을 널리 알릴 수 있는 활동들이 많이 있었으면 한다. 자칫하다가 중국과 일본 틈에 끼어서 별 볼일 없는 나라로 전락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깔끔한 내부 전시실은 새로운 볼거리들로 풍성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규장각에 걸어놨다는 임금의 지침을 적은 주련(柱聯, 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씨)이었다. 선생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非先生勿人), 손님을 봐도 일어서지 말라(見來客不起)는 글귀는 얼마나 학자들을 아끼고 면학 분위기(?) 조성에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궁궐 정전 천장에서 쓰였을 법한 용무늬, 봉황무늬 천장 장식도 인상적이었다. 창덕궁 인정전 천장 양식은 목을 쭈욱 빼야만 볼 수 있고, 선정전은 비공개 지역이니 가볼 수도 없다. 경복궁 근정전, 창경궁 명정전, 경운궁 중화전도 높이 올려져 있다보니 세밀하게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니 나도 몰래 가슴이 뛰었다. 이동식 행궁에서 소맷돌로 썼을 법한 나무 해태와 경회루 연못에서 나온 청동용도 볼거리였다.


이 밖에 왕실에서 쓰던 가구나 장신구, 의복과 종묘 제례 때 쓰던 제기들도 질박한 듯 미려했다. 화려한 구석도 적잖았지만 대체적으로 수수함이 지배적인 듯했다. 고려말 불교의 폐단을 지적한 신흥사대부가 새 왕조를 개창한 이래로 유교 문화는 적어도 대외홍보용으로는 사치와 향락을 배격했다. 조선시대 건축기술의 최고 집약체라고 할 궁궐건축에서도 가장 화려한 등급의 금단청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니 말이다(단청 종류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서울 5대 궁궐에서 금단청이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의 백자와 회화들은 고려의 청자와 불화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혹자는 유교의 선비정신을 내세워 절제미를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불가의 고승과 선사들도 만만치 않은 자기수양을 했다. 유교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성리학(주자학에 한정된) 일당독재가 너무 심했다는데 조선의 비극이 있었다.


때마침 개관 특별전으로 백자 달항아리 9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조선 백자의 최고봉으로 뽑히는 백자대호(白瓷大壺)를 보러가기 전에 고려 청자의 최고봉으로 뽑히는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겠나 하는 고약한 심보를 품었다.^^; 하지만 이내 백자의 은근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작은 전시실을 선뜻 떠나지 못하고 뱅뱅 돌면서 음미하다가 살짝 어지럼증까지 느낄 정도였다. 높이가 40cm 이상이 되는 보름달마냥 둥그런 달항아리를 만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의 장인들은 두 개의 사발을 접붙여서 원형을 만들어냈다. 콜럼버스의 달걀도 울고 갈 재치다. 백자대호의 허리부분에는 이음매가 보이는데 이 때문에 완전한 원형이 아니라 둥근 느낌은 한껏 주면서 약간 이지러진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엿보였다.


전시실 여기저기에는 백자를 찬양한 여러 시인묵객들의 글귀들을 적어놨는데 그 애틋함이 절절하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고 최순우 선생이 “달항아리는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한 것부터 온갖 찬사들이 쏟아진다. 그만큼 한국인의 심성에 착 달라붙는 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청자의 귀족적이고 호사스러움보다는 백자의 서민적이고 검박한 풍취를 노래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기도 하다.^^; 여하간 이번 특별전은 백자에도 제법 정을 붙이는 계기가 되어 청자에 올인했던 것에서 백자와의 포트폴리오(?)를 이루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진짜배기를 백자를 보며 감탄하는 마음 이면에는 제대로 된 청자를 봐야겠다는 열망도 커졌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달항아리 중에서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된 국보 제262호 백자대호 앞에서 약간 찌그러진 듯한 모양이 굴곡미를 만들어 내며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효험이 다가왔다. 가장 어설퍼 보인 작품이었지만 눈을 씻고 유심히 바라보면 뭉클한 기운이 치솟는다. 결국 참다못해 디카로 사진을 몇 장 후닥닥 찍어버렸다. 석굴암에서 사진을 못 찍게 하듯이 백자도 사진을 찍으면 훼손할 우려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간 조금 못된 짓을 했지만 그간의 문화재 애호정신에 비추어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유물 보호를 위해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비싼 도록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딜레마다.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 폐관 기념으로 열렸던 한시적으로 국보 제78호와 제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 사진촬영을 허용한 것과 같은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인 우현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의 특질을 “무기교의 기교”라고 평했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의 극치를 백자대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도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못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다”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의 정신을 만난다고나 할까. 백자는 유교 문화의 정수였으나 도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셈이다.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서문을 보면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고 말하며, “실로 삼교(유불도)를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들이 만나서 관계를 맺으며 변한다(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고 했다. 장인들은 풍류나 현묘지도를 체득했을지 모르겠으나 위정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올해는 고유섭 선생의 탄생 백돌 되는 해이다. 열화당에서 여덟 권짜리 전집이 나온다고 하니 쉽게 읽을 수 있는 몇 권은 장만해볼 참이다. “전통이란 결코 손에서 손으로 손쉽게 넘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피로써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써’ 얻는 것”이라고 했던 선생의 말씀이 따갑다.


기왕 나온 김에 경복궁도 잠시 들렀다. 지인들을 데리고 가이드도 몇 번 해줘서 3000원 본전 생각이 조금은 났다.^^; 햇살은 따가웠고 덕분에 흥례문의 단청은 눈부셨다. 우리의 단청은 햇살을 받으면 그 휘황찬란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땀은 좀 흘렸을지언정 그간 다닌 답사 중에서 가장 즐거운 단청 완성을 했다. 이래서 세상만사는 일장일단이다.^^ 김영삼씨가 무식하게 부셔버렸다고도 하지만 중앙청 건물을 철거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본다. 옛사람의 솜씨보다 못할지는 몰라도 이렇게 멋진 건물을 새로 지어서 탄성을 자아내게 하니 말이다. 또한 72억2500여 만원을 들여 3년 10개월간의 보수공사를 마친 근정전도 퇴락했던 단청들에 생명이 불어넣어져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흥례문이나 근정전을 볼 때마다 우리 문화유산 중건 혹은 복원에 대한 강한 의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은 한국인의 미감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동산이다. 중국 자금성 뒤편의 거대한 인공산인 경산과 비교했을 때 지나친 기교를 삼가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려는 우리 장인들의 정성을 읽을 수 있다. 백자대호의 정신을 여기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보물 제 811호인 아미산의 굴뚝 또한 앙증맞은 볼거리인데 굴뚝 장식은 온돌 문화인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나가는 길에 늘 빼먹고 왔던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현묘탑을 찾았다. 국립고궁박물관 옆 뜰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보니 대부분 그냥 놓치고 가능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놈들이 멋대로 가져다 놓은 경천사터 10층석탑을 비롯한 석조 문화재들이 대부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도탑만은 떠나지 못하고 홀로 외로이 서있다. 이 부도탑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박살이 나서 지금 것은 파편들을 모아 간신히 복원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심히 쳐다보면 여기저기 땜질용 시멘트가 슬프게 처발라져 있다. 이처럼 속으로 골병이 들어서 함부로 손을 댔다간 다시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부도탑 너머로 근정전 지붕이 보이면서 불교 문화유산과 유교 문화유산의 오묘한 조화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불협화음이 날 듯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탑파의 미려한 모습이 참 쓸쓸해보였다.


답사를 다 마치고는 외대 근처의 헌책방인 신고 서점에 가서 충동구매를 살짝 했다. 헌책방은 늘 가봐야지 해놓고도 선뜻 못 찾아갔는데 모처럼 마음을 다잡았다. 규모도 크고 분야별로 정리도 잘 되어 있어 헌책의 구수한 향기에 넋을 잃었다. 고종석 선생은 “[민음사만의 일은 아니겠지만](한국일보, 2005/05/11)”라는 칼럼에서 좋은 시집들의 절판을 아쉬워하며 우리 출판문화를 개탄했다. 인문과학 서적에서도 그런 경우는 부지기수다. 절판된 책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그나마 대부분 빌려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물욕이 발동해서 꼭 손에 넣고 싶은 책도 있게 마련이다. 대출 기간 동안 몇 장 읽다가 말고 반납해야할 때 영 마뜩잖다. 며칠 만에 읽는 것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가끔 꺼내보고 싶은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을 때 참 난감하다. 읽는 것이 사 모으는 것을 못 따라갈 때가 많아서 민망하지만 좋은 책들이 일찍 절판될까 저어해서 미리 사둘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책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때였지만 그래도 마냥 신명이 났다. 혼자서도 잘 논 하루였지만 그래도 다음번에는 함께 거닐며 노닥거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혼자서도 잘 놀지만 함께 있으면 더 흥겨운 녀석이니까 말이다.^^ - [憂弱]


추신 - 절판된 도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절판되어서 찾기 힘든 책 중에 내가 갖고 싶은 책 두 권이 있다. F. Copleston 著, 임재진 譯의 [칸트](중원문화 刊)노명식의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민음사 刊)이 그것이다. 서양철학사 정리로 유명한 코플스톤의 열권짜리 History of Philosophy 중에서 칸트 부분만 번역한 [칸트]는 도서관에 딱 한 권 있을 뿐 시중에서는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칸트 관련 저작이야 하고 많지만 내가 읽을만한 책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레 이 책은 꼭 좀 소장하고 싶다.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는 도서관에서 빌릴 때마다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앞부분만 좀 읽고 반납하기 일쑤였던 기구한 인연의 책이라 괜스레 애착이 간다. 이건 이 책을 집에다 놓고 보라는 하늘의 뜻인가라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혹시나 이 두 책의 행방을 아시는 분은 꼭 좀 신고해주세요. 그래서 제 소박한 물욕을 잠재워주시길. 푸하하^^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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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1992년) 가을 어느 날 읽었던 정몽주/성삼문 위인전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꿨다. 이 얄팍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충의와 절개의 화신인 두 사람의 삶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이 문고판 책과의 인연을 어찌나 소중히 여겼는지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인 9월 10일을 '독서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을 정도다. 내가 책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계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됐다. 뜬금없이 위인전 타령을 하는 까닭은 얼마 전 다녀온 동구릉(東九陵) 답사에서 어릴 적의 비분강개가 아스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구릉 중에 태조의 건원릉(健元陵)과 문종의 현릉(顯陵)에서 감회가 남달랐다. 건원릉의 능상을 바라보며 이성계에게서 고려말 모순을 극복한 혁명가를 그려보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호조차 못 받고 원통하게 간 우왕과 창왕, 결국 고려의 찬란한 최후를 장식해야했던 공양왕, 그리고 충절의 대명사 정몽주의 넋을 기리고 말았다. 현릉은 더했다. 사육신이 사형 당하면서도 꿈에서 그린 현릉을 보며 나도 모르게 목이 멨다. 속으로 성삼문의 시조인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를 읊으며 안타까워할 정도였으니 어린 시절 읽었던 작은 책이 아직도 내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육신 이개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정(禹鼎)같이 무거울 때는 삶도 또한 큰 일이나
홍모(鴻毛)처럼 가벼운 곳에서는 죽음이 도리어 빛나더라
날 밝도록 잠 못 자고 문 밖에 나서니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禹鼎重時生亦大(우정중시생역대)
鴻毛輕處死有榮(홍모경처사유영)
明發不寐出門去(명발불매출문거)
顯陵松柏夢中靑(현릉송백몽중청)


우정(禹鼎)은 우임금이 만든 아홉 개의 솥(九鼎)으로 나라와 왕권을 상징하며 제대로 된 정사가 펼쳐짐을 의미한다. 강상(綱常)이 무너진 참혹한 시대에는 목숨도 초개같이 버려야 한다는 그 기백이 헌걸차다. 충의지사를 추억하며 논어에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구절을 떠올렸다. 어려울 때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성이면 감인(感人)이다. 지극한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이런 참 선비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소인배도 있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을사오적 중에 한 놈인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득의양양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는 일화가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전해진다. 남 위에 있으려면 그만한 책임감으로 무장해야 하는데 이 도둑놈은 부끄러움조차 없었다.


현릉을 나서며 단종이 스스로 정사를 펼 수 있을 때까지 문종이 살아 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의 역사가 아닌 단종의 역사가 펼쳐졌다면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현실의 승자는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부녀들을 나눠 가지며 희희낙락했던 수양과 공신들이었다. 끝내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때문에 아무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영월 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가 관을 마련하여 선산에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시신을 수습한 그는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면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고 의연히 말한다. 너무 아름다워 몇 번을 되뇌었다.


김남주의 시구처럼 불의와의 싸움에서 정의가 졌다고 해서 정의가 정의 아닌 것은 아니다. 정조대왕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어 단종조의 충신들을 제향하는 것으로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를 마무리했다(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은 1698년(숙종 24)에 복위되고 단종이라는 묘호도 이 때에 비로소 추증된다). 정조 15년인 이 때는 계유정난이 발생한 지 338년, 사육신 등의 상왕복위기도사건이 일어난 지 335년, 단종이 비명횡사한지 334년만이다. 그릇된 역사를 다잡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역사는 결국 올곧게 산 자의 편인지 모르나 이렇게 맨날 뒷북만 쳐서는 안 될 것이다. 신숙주 등 남은 자들의 업적이 클수록 국가권력의 정통성에 목숨을 바쳤던 갸륵한 충절이 더 아쉽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사람들은 그리 오래 기억하지 않을지 모른다. 좋은 일을 해도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냐며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착한 것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 본 듯 주저하지 말라(見善如渴)"는 말처럼 살도록 노력하자.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지킨 사람을 마냥 외면하지 않음을 믿자. 어느 정도 물들고 타협해서 살다가도 마지막에 양보 못할 부분에서는 "No"라고 외치며 돌아설 수 있는 내가 되자. 힘들 때는 맹자의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다면 천만인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는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말이다.


나는 손해보는 장사는 정말 싫어하는 경영학도로서 비용-편익 분석을 꼼꼼히 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가끔 남 좋은 일 하다가 손해보는 것도 유쾌한 경험으로 간직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어쩌다가 좋은 일 하나 해서 그 덕분에 남들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본다면 괜히 침 흘리지 말기를, 하나둘 나란 녀석을 모른 체 해도 잊혀지는 것에 너무 몸서리치지 말기를 다짐한다. 부귀할 때는 따르는 자가 많고, 빈천할 때는 벗조차 떠나가는 것이 세상 인심일지라도 爲善被禍 吾所甘心 여덟 자를 마음 한 구석에 새기고 있다면 외롭지 않으리라.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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