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숭례문(崇禮門) 광장이 개장했다. 숭례문은 일제 강점기 때 훼손돼 지금까지 98년 동안 찻길로 막혀 멀리서만 바라 봐야했다. 명색이 국보 1호이면서도 정작 가까이 가서 볼 수 없었던 문화유산을 조금 더 가까이서 완상할 수 있게 되었다. 숭례문은 1398년(태조 7년) 만들어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며, 국내에서 현존하는 성문 중에서 규모도 으뜸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시내 궁궐을 비롯한 어지간한 목조 건축물이 화마에 휩싸였지만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참 고마운 존재다.


앞으로도 숭례문 광장 조성과 같은 문화유산 복원과 개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는 6월 1일부터 1일 3회 개방하는 경복궁 경회루 특별관람 신설도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보물 1호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여전히 찻길로 둘러싸여 답답하다. 머지 않은 시기에 흥인지문 광장도 만들어 봄직하다. 또한 철근 콘크리트로 엉망으로 복원한 광화문(光化門)도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라는데 제 위치를 찾아 조선 정궁의 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광화문을 통해 정면으로 경복궁에 입장하는 그 날을 기분 좋게 상상해본다.


많은 외침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목조 건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인 문화유산 복원(혹은 중건)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잘 지켜내지 못한 만큼 다시 세우려는 노력만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마저 소홀히 한다면 볼 것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설령 옛날의 그 솜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안은 다르지만 충북 단양 구인사 조사전이 "이 시대의 국보급 문화재를 짓겠다"는 사명감으로 웅혼하게 지어진 것도 좋은 사례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보여줄 것이라고는 고층 빌딩뿐이라면 얼마나 민망한가. 이제 문화의 향기가 짙게 배어나는 아름다운 도시로 가꾸어 나가자. 육백여년의 애환을 간직한 육중한 몸매로 서울을 굽어살핀 숭례문 앞에서 우리 역사의 부침을 회상하며 영감을 얻어보면 좋겠다. 이제 곧 공익근무로 일하게 될 서울 중구에 또 하나의 명소가 생겨서 흥겹다. 얼른 숭례문 단청을 보러 가야겠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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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로 빚어내는 인연

문화 2005. 5. 22. 08:46 |
흔히들 대학에서의 인간관계는 참 쉽지 않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대학 새내기에서부터 졸업반에 이르기까지 사람 사이에 대한 어려움을 털어놓기 일쑤다. 서로간에 솔직하지 못하다며, 너무 신경을 써야 한다며, 이해타산을 따져야 한다는 등으로 투덜거린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인간관계는 중등학교 이전의 인간관계와 당연히 달라야 한다. 다양한 사람과 갖가지 생각이 부딪치는 데 쉬울 리가 없다. 훨씬 힘들어야 자연스럽다. 거저먹는 인간관계는 없다.


이미 소원해져버린 관계를 애써 외면하고 바빠서 잘 못 만나고 있다고 위안한다. 변변히 교류 나누지도 못하면서 언제 시간이 되면 괜찮은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희망한다. 그러나 세월이 사람을 기다리지 않듯이, 사람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굳이 기다리는 경우는 이미 절친한 관계가 되어 인연의 끈이 매우 질긴 이후의 일이다. 끈을 놓는 것이 더 가슴 아릴 때야 그리운 마음이 싹튼다. 그렇지도 않는데 멀어졌다며 불평하고, 나중에 다시 끈끈해질 거라며 손놓고 있어봤자 백년하청이다.


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인연을 꽤 믿는 편이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이 공간, 이 시간을 공유하는 주변 사람들은 꽤 각별한 연분이라고 본다. 사실 사람과의 만남은 랜덤하고 우연하게 배정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우연성을 필연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노력은 참 숭고하다. 인연이란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최명희의 [혼불] 中)"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항력이라며 될 대로 되라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인위적으로 맺어보겠다고 억지로 떼쓰지 말라는 뜻이지 내 참마음을 내어 보이는 용기까지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또한 나는 이 사람에게서 멀어졌는데,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좋아 해주기 바라지 않는 신실함이다. 도덕경 48장의 "아무 것도 (억지로) 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란 구절을 곱씹어본다. 소중한 인연은 억지 춘향이가 아니다.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영속성보다는 일시성이 두드러진 미래사회의 인간관계는 한 사람과 총체적인 관련을 맺기보다는 그 사람의 한 부분에만 관련을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만나지도 않고 이해도 달리하는 친구들 대신에, 새로운 친구들을 탐색하는 사회적 발견의 냉혹한 과정"을 통해 효용가치가 없는 옛친구들은 빨리 버리거나 잊고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만한 새 친구를 찾아야한다는 그의 주장이 날카롭다(앨빈 토플러 著 장을병 譯. [미래의 충격](1986). 범우사. 88~108쪽 참조).


법정 스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찾아왔다가 외면당한 사람의 볼멘 소리를 들은 스님은 허허 웃으며 "때로는 인정이 없어야 하는 게 수행자다. 만나자는 사람 다 만나주면 내 공부는 언제 하라는 말이냐"고 대꾸했다고 한다(이형삼. "法頂이 있어 맑고 향기롭게 산다." 신동아. 1999년 12월호 기사 참조). 스님은 "인정이 많으면 도심(道心)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법정. [무소유](3판, 2001). 범우사. 75쪽)"고 말한다.


토플러의 탁견이나 법정 스님의 일화에서 내 자신을 가꾸기 위해 애써야함을 깨달았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숱한 관계에서 내가 좀 더 오래 실존할 수 있으려면 내 밑천이 두둑해야한다. 조금 사귀고 나니 별 볼일 없이 깡통 소리만 낸다면 나라도 마음이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사교적 몸부림이야 필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나란 녀석과 진지한 유쾌함을 나눌 수 있게 만드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관계를 맺고 교류를 나누는 자체에만 정신이 팔려 스스로 공부를 등한시하면 사랑과 우정의 샘물도 이내 마르고 만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사향을 지녔으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어찌 바람을 맞아 서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란 구절이 있다. 내가 뿜어내는 향기가 은은하다면 자연스레 나란 녀석과 관계 맺을 유인이 생길 것이다. 내가 풍기는 자유와 사색의 내음, 배움과 인덕의 내음으로 벗을 구해보자. 나는 불콰하게 술에 익은 얼굴로 터놓고 가까워지거나 말쑥한 첫인상의 아찔함으로 유혹하는 재주는 없다. 조금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세월에 바래지 않는 나만의 멋을 아껴주는 고마운 사람을 찾을 따름이다.


내 인연들이 久而敬之(논어 제5편 공야장 中)할 수 있기를 꿈꾼다.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라고 해석하면 친해지더라도 존경심을 잃지 않고 범속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무심해지지도 않고, 세월이 지났다고 차갑게 식지 않는 그런 존재 말이다. "오래 사귈수록 공경하게 된다"라고 해석하면 오래 사귀어도 그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기보다는 강점이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그 약점과 한계마저 품을 수 있을 만큼 그릇이 커진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세월로 빚어내는 久而敬之,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까.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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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KT 신춘문예에 수필 부문을 응모해 동상을 수상했다. 약 270편의 작품이 응모됐고, 대상 1명, 금/은/동상 각 4명씩 13명에게 수상했으니 대략 20대 1의 경쟁률인 셈이다. 내 졸작이 뽑힌 것은 무안하고 민망한 일이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신 KT 관계자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드린다.

대상을 받으신 분은 시집도 내신 적이 있는 준 시인이셨고, 수상자 중에는 문학적으로 조예가 깊은 분도 적잖았다. 그런 쟁쟁한 어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린 녀석이 도전한 게 기특해서 배려해주신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주제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짙은 애정을 드러낸 것이라 표현의 구질구질함도 어여삐 넘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응모작 [황룡사터에 서다]는 지난 설 연휴 때 갔던 경주기행의 감회를 읊은 글로써 익구닷컴에 개재했던 글을 수정해서 올린 것이다. 중학교 논술대회나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은 이후로 글짓기로는 무척 오랜만에 상을 받아서 감개무량하다. 글쓰기가 사치스러워진 시대에 이번 수상을 계기로 글 읽고 쓰기를 더욱 즐겁게 해봐야겠다. 모든 상은 앞으로 잘하라는 의미가 강하니까.^^

부끄럽지만 글 전문을 싣는다. 인터넷 상에서 보기 좋게 각 문단마다 한 줄씩 띄었다.



 

<황룡사터에 서다>

1.

다시 찾은 서라벌은 싱그러웠다. 경주 시내에 도착해 도로변 여러 왕릉과 탑 등의 유적지들을 스쳐 지나면서 천년 고도로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긴 설 연휴를 틈타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이후 10년만의 경주 방문이었다. 문화유적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나이지만 초등학생 때까지 그런 것을 볼 줄 아는 혜안은 없었기에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체 기념사진에서 지루함과 피곤함이 쌓인 어린이의 모습이 그 증거다.

비록 반강제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수학여행을 통해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처음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체계적인 역사 교육까지는 필요 없지만 적어도 우리 문화유산이 보잘 것 없고 하찮은데다 따분하다는 생각을 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중등학교 이후에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첫 단추를 잘못 꿴 잘못이 크지 않을까 싶다. 유치한 구호이지만 진정한 세계화는 한국적인 것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사랑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존하는 것도 능력이다. 진정한 문화강국은 잘 만드는 것보다 잘 지켜내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훼손된 문화유산의 목록은 끝도 없지만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을 애타게 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룡사다. 황룡사는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신라 최대 사찰이다. 동양 최대의 목탑인 9층목탑과 거대한 본존불 금동장륙상 및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황룡사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고, 임진왜란 때도 왜놈들이 불타버린 황룡사의 유물들을 파헤쳐 갔다고 한다.

흔히들 우리의 문화유산이 볼품 없고 보잘것없다고 말할 때 나는 주로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편이다. 하지만 국권이 미약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의 수난을 막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이구열 선생의 [한국 문화재 수난사](돌베개, 1996)와 같은 문화재 훼손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누구나 어려웠던 기억을 되돌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구차하고 비루했던 우리 역사와 똑똑히 마주함으로써 현재를 다잡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

지금의 황룡사터는 금동장륙상을 올려놓았을 커다란 석조대좌 흔적과 9층목탑을 쌓았던 64개의 초석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잿더미가 되고 약탈도 당했지만 발굴 당시에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던 높이 182cm, 최대 폭 105cm인 대형 망새(궁궐, 절 전각의 용마루 양쪽 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는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망새가 클수록 건물도 크게 마련이니 거대한 망새의 존재는 당시의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즐겁게 상상하게 만든다.

유명한 9층목탑 터에 서면 전율이 돋는다. 600년대에 세워진 높이 80m(225척)의 웅장한 목탑의 위용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현존하는 목탑 중에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1056년 요나라 때 만들어진 응현5층탑을 능가하는 높이다. 많은 이들이 9층목탑 복원을 소망하는 것도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짐작하는 화려했던 목탑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리라. 너른 목탑 터에서 세계 최고의 목탑을 세운 것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더 짙게 드리운다. 거대한 심초석을 어루만지며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적 석학 피터 버갓씨의 냉소를 떠올렸다. 그는 한국은 과거의 나라가 아닌 미래의 나라인 듯하다며 이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빈약한 자연적 문화적 자원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사회라도 만든 것이 대견하다(고종석, [엘리아의 제야](2003), 문학과 지성사, 89~90쪽)고 말한다. 그의 빈정거림이 따갑다.

우리가 풍요로운 전통문화를 자랑한다고는 하지만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문화유산을 보면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지켜내는 능력이 부족했던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면 풍성한 문화유산보다는 첨단 기술력의 덕이 더 클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세워질 높이 700m가 넘는 버즈 두바이 빌딩을 수주한 우리 기업의 쾌거나 초고속 인터넷망과 우수한 정보통신기술을 통한 IT강국으로서의 면모가 우리를 미래의 나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미래는 과거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3.

문득 작년 중국 베이징 여행 때 들렀던 원명원이 생각났다. 본디 이화원을 능가하는 호화로운 이궁(離宮)이었으나 수 차례 외국군의 파괴로 폐허만 남게 되었다. 서양루 유적지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부서진 석재들이 그 자체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황룡사터 경우에는 목조 건축이다 보니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그런 감흥이 일지가 않는다. 남은 잔해가 거의 없으니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제대로 느끼기가 힘든 것은 목조 건축의 치명적 단점인 셈이다. 폐허마저 흥미로운 볼거리였던 원명원은 2008년 올림픽을 대비한 대대적인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많은 외침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목조 건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인 문화유산 복원(혹은 중건)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잘 지켜내지 못한 만큼 다시 세우려는 노력만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마저 소홀히 한다면 볼 것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가능한 많은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은 관광수지 적자에 대처하는 장기적인 투자다. 설령 옛날의 그 솜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로 치닫는 세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문화유산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과감한 투자가 절실하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면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전반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도 낮고,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도 날로 줄어들고 있다. 이미 수능시험에서 국사가 사회탐구 선택과목의 하나일 뿐이며, 행정고시, 외무고시 1차 시험에서 국사시험이 사라진다. 우리가 스스로 제 나라 역사를 팽개치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에 이 작은 나라를 놓고 여기저기 군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망언을 내뱉고, 중국은 고구려사, 발해사를 제 것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비극적 현실에 좌절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기보다는 스스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이 난국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은 가난한 자의 빵이니까.

황량한 황룡사터에서 어깨도 쭈욱 펴고 입술도 질끈 깨물어보자.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새로 만들어갈 희망을 노래하기 좋은 곳이다. 9층목탑터에서는 흐뭇한 표정도 지어볼 일이다. 절터에서 맞는 바람이 참 시원하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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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문자문화쇠망약사]라는 책에서 "이제 전자문화는 싫고 좋음이나 옳고 그름 또는 수용과 거부와는 무관하게 마치 바람처럼, 공기나 바다처럼 그렇게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나 또한 쓰러져 가는 문학의 고목 아래서 서성이며 전자제국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다"라며 문자문화의 몰락을 씁쓸하게 전망하고 있다. 문자제국의 유민들은 전자제국을 향해 비이성적이고 천박하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촉한(蜀漢)이 망할 때 성도 백성들이 향불을 피워 들고 위나라 군사들을 맞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담담히 받아들일 따름이다.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는 적어도 글쓰기 영역을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네티즌 모두에게 개방했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과거에는 선비들만이 거의 독점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며 자기들끼리 즐겼지만 이제는 그런 제약은 많이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손쉽게 책을 뚝딱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미치지는 못해도 웹 상에서나마 자신의 잡글을 가지고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고종석 선생은 "글쓰기의 민주주의"는 시간을 우군으로 삼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특히 인터넷은 대중으로서의 지식인을 탄생시키며 즐김으로서의 글쓰기, 아마추어리즘으로서의 글쓰기를 격려해, 교육적ㆍ계급적ㆍ연령적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나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글을 쓰는 문자의 민주주의를 머지 않은 미래에 실현할 것이다.
- 고종석. "글쓰고 책 내는건 특권층의 향유물?." 한국일보. 2001. 02. 13.


하지만 이처럼 글쓰기의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도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에 무게중심이 가있다. 과거처럼 이미지가 텍스트를 보조하는 기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미지 자체가 새살림을 차린 "이미지 글쓰기"라는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자향(文字香)의 그윽함을 설교할 생각은 없지만 문자언어의 성찰 없이는 창조적이면서 생산적인 영상문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읽고 쓰지 않고, 보여주고 보는 것에 급급하다보면 우리의 문화는 까칠해질 것이다. 편식은 결국 스스로를 야위게 만들뿐이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고도의 문화적인 활동이다. 문자를 통해 제 생각을 표현하고, 남의 의견을 분석해나가는 것은 인간 이성과 감성을 동원하는 사고 훈련이다. 향을 옆에 두면 옷에 향냄새가 배고,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반복적인 행동으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을 불가에서는 훈습(薰習)이라고 말한다. 글을 읽고 쓰는 훈습은 당장에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 같지 않아도 시나브로 우리 내면에 변화를 일으킨다. 글로 이루는 훈습은 롤즈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을 향해 나간다.


반성적 균형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라며 마냥 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평가하고, 스스로 다시 궁리하여 보다 나은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중용(中庸)과 비슷한 개념이다. 결국 조금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직관적 판단(개인적 선호)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숙고하여 적절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반성적 균형상태는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라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무수한 글 읽고 쓰는 활동이 있고, 그것은 각 개인의 잣대로 만든 체를 통해 걸러져 다양한 지혜와 성찰을 낳는다. 오늘날 글쓰기의 민주화를 통해 더욱 많은 지식이 창조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문화가 쇠락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나오고 있다. 다양한 영상문화의 발달로 책을 좀 덜 보고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책 대신 다른 매체를 통해 다양한 성찰과 폭넓은 경험을 이룰 수 있음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오만이다. 하지만 글쓰는 행위가 오히려 줄고 있다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가령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얻고 표현의 욕구를 발산하는 온라인 보금자리인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경우 게시판 기능보다는 사진첩과 방명록의 활용도가 압도적이다.


물론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통해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편의성과 저비용은 인정할 만 하다. 하지만 몇 줄 안 되는 방명록과 사진에 대한 왈가왈부를 통해서만 의견을 나누다 보니 긴 호흡의 글이 낯설어지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스럽다(이건 어디까지나 미니홈피를 하는 이들의 대체적인 경향을 말한 것이다). 나도 잠시 싸이 미니홈피를 가꾼답시고 일촌도 많이 맺어 여기저기 인사 나누느라 발이 닳도록 뛰어 다녔고 사진도 1500장 넘게 올려봤다. 이를 통해 소통하고 대중성을 가지려고 꾀했다. 하지만 역시 나란 녀석을 표현하고, 남과 교류 맺는데는 내 정성과 고심이 스민 글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지금은 폐가로 버려 둔 상태다.


나는 글을 쓰지 않을 권리를 옹호한다. 아무리 보배로운 일이라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좋은 일일수록 자발적인 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틈만 나면 지인들에게 잡글이나마 많이 읽고 쓰기를 권한다. 이는 글을 쓰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권리를 함께 누리고, 그 쏠쏠한 이문(利文)을 맛보라는 충심일 뿐이다. 굳이 세속적 꿍꿍이(?)를 밝히자면 타는 목마름 끝에 마시는 물 한 모금이 달콤하듯이 매서운 세파 속에 내어놓는 잡글 한 편이 참으로 달콤쌉싸름해서 우리네 강퍅한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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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앞서 "한나절 이상 투자한 글"이란 글을 먼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다소 있으니 어여삐 봐주세요.^^


1. 연호란 무엇인가?

우리가 자랑스레 배워왔던 세계적인 발명품 측우기는 1441년(세종 23년)에 발명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측우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70년(영조 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건륭은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年號)이다. 조선시대 때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을 모르는 대부분의 국제 학계(한국사를 잘 모르는 중국인들도 포함해서)는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연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당수 중국 학계는 중국의 어떤 역사서에도 측우기 발명과 사용에 대한 기록이 없고, 현존하는 측우기 유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연호 하나 때문에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조선에 전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호란 왕조시대에 어떤 임금의 통치시기를 나타낼 때 붙이는 칭호이다. 한 명의 임금이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여러 개를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은 왜곡된 역사 교과서에서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 이후 중국과 다른 연호를 계속해서 사용한 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밖에 없었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면서 한국을 중국의 연호를 쓴 속국이라며 건방지게 군다. 동북공정으로 열을 올리는 중국도 은연중에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박성래 한국외대 교수는 "한국사의 年號사용에 대한 오해(한국경제신문. 2004. 09. 30.)"라는 글에서 "한국 역사가 일본과 달리 독립된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그리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면서 "일본은 중국과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름의 연호를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은 중국과 끊임없이 교류했기 때문에 독립된 연호를 쓰기 어려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해석에 관련 자료를 찾아보던 중 박 교수가 쓴 "고려초의 역과 연호"라는 논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 교수는 고려 초기의 연호 문제를 집어 보면서 고려가 933년 천수(天授)라는 독자연호를 버리고 중국 후당(後唐)의 연호를 쓴 것은 자주성의 상실과는 관계가 없는 "일대 외교적 승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법의 실질적 필요성에 덧붙여 중국의 외교적 승인도 중요한 요인이며, 중국으로부터 사역(賜曆)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라 삼국 혹은 후삼국이 다투어 원하던 것이라는 주장한다.


그는 "연호=독립"이라는 등식은 근대역사학의 해석으로 조선시대 내내 연호는 황제국인 중국에서나 쓰는 것으로 각인되면서 나타나게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기야 지독한 모화(慕華)국가였던 조선은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청나라가 거의 망할 때까지 붙들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려 초에는 그런 조선시대의 양상과는 달리 "연호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대륙에서 송과 요가 쟁패하고 있을 때는 그때그때 적당히 양쪽 연호를 썼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중국 연호를 쓰던 시절의 한국이 중국식민지가 아니었음은 '서기'를 쓰는 지금 의 한국이 서양 식민지가 아님과 같은 이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기(檀紀)와 서기(西紀)에 대한 논쟁을 바라볼 때 서기가 완전히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측정 수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단기를 고집하는 것이 자주독립을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역법을 함께 쓰는 것이야 편의 수준이 아닌 생촌 차원의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날의 서기보다는 과거에 쓰인 중국 연호가 훨씬 더 정치적 함의가 크고 깊었다.


중국 연호가 단순히 연도 계산의 의미를 벗어나 약소국이 강대국을 따른다는 외교적인 표현임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만큼은 아니라도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이러한 관념이 어느 정도는 존재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중국 대륙은 극복하기 힘든 거대한 존재였고, 기왕이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상책이었을 테니 말이다.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연호를 그 때마다 바꾸어 쓴 것은 단순히 편의주의, 기능주의의 소산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만큼은 아니었다. 한족(漢族)에 올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빠져 청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 연호를 몰래 고집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2. 한국사의 독자연호1 - 고구려, 백제, 신라

혹시나 조선시대만을 생각해서 우리 역사에 독자연호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오해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기록의 멸실로 인해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삼국시대에 적잖은 독자연호가 쓰여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볼 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이런 점에서 고려나 조선의 사대주의는 냉혹한 자기 인식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신라의 연호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문헌 기록은 없고 금석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역사서에 고구려나 백제의 연호를 볼 수 없는 것은 신라 중심의 사관이 작용했다는 점도 있겠지만, 나라가 망한 후 자료들이 전해지지 않아 몰라서 못 쓴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김부식 등이 일부러 빼먹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흔치 않은 것은 괜히 애틋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비에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광개토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식민사관의 영향이며 중국의 황제, 일본의 천황처럼 고구려인들은 자신의 왕을 태왕(太王)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태왕이란 왕중왕이란 뜻으로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질서를 구축하며 그 패자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광개토태왕, 영락태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또한 불상 등의 금석문을 통해 연수(延壽), 연가(延嘉), 영강(永康), 건흥(建興) 등의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연수는 신라, 건흥은 백제 연호라는 설도 있다).


백제의 경우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에서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판독상의 이견과 함께 중국과 관련된 연호라는 주장도 있는 만큼 조금은 신중해야겠다. 이도학 교수는 무녕왕릉매지권 등의 백제 금석문에서 연호가 발견되지 않는 점을 들어 백제는 6갑 간지만 사용해서 기년(紀年)을 표시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2003), 휴머니스트, 351쪽 참조). 그러나 칠지도에 나타나는 "널리 후왕(侯王)들에게 공급할 만하다"는 구절에서 후왕은 제후국의 왕을 뜻하므로 백제왕도 후왕들을 거느린 황제 수준의 위치였음을 미루어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군사를 사열할 때 깃발을 모두 노란색으로 썼다는 기록에서 중국의 천자만이 쓰는 빛깔을 사용했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그나마 다행으로 많은 연호가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법흥왕의 건원(建元), 진흥태왕(진흥왕순수비문에 고구려처럼 태왕 칭호가 나온다)의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弘濟), 진평왕의 건복(建福), 선덕왕의 인평(仁平), 진덕왕의 태화(太和)가 그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독자연호를 버리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사신 한질허가 당태종에게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大國)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한질허는 "일찍이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 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를 사용하겠습니까?"라고 답한다(삼국사기 진덕왕 2년(648년) 기사 참조).


결국 650년에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독자연호를 버리게 된다. 정삭이란 곧 역법을 의미한다. 박 교수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역법을 완성해 갖고 있던 나라는 중국뿐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단순히 역법을 계산할 줄 몰라서였다고 단정하기는 미심쩍다. 독자연호를 포기하고 난 후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료의 부실로 속단하기는 힘들지만 자주성의 시련이라고 평가할 만 하다. 신라가 외교적인 승리를 거둔 것인지는 모르나 우리 민족 전체에는 불행한 결과였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민족의식의 부재를 탓하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에 김헌창이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이 한이 맺힌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독자연호를 사용한 것은 대당관계에 있어서 자주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김헌창의 난이 신라의 사대성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헌덕왕 11년(819) 이사도의 군대를 제거하기 위해 당나라가 원군을 청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드라마 해신(海神)에서 등장했듯이 이사도 집안이 고구려 유민인 것을 감안하면 조금은 당혹스럽다(이사도 집안의 제(齊)나라가 이사도 대에 내려오면 고구려의 색채가 희박해진다는 이견도 있다). 여하간 단순한 왕위쟁탈전으로 볼 수 없을 듯하다.


3. 한국사의 독자연호2 - 발해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독자연호와 관계되어서 가장 눈길을 끄는 나라는 단연 대진국(大震國) 발해이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던 나라였다. 문헌상으로 볼 때 거의 전 기간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2대 무왕이 인안(仁安), 3대 문왕이 대흥(大興), 보력(寶曆), 10대 선왕이 건흥(建興) 등의 연호를 쓴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발해는 당나라에 대해서는 황제가 아닌, 왕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왕이 사망한 후에는 황제의 칭호가 아닌, 왕의 칭호를 올렸다. 정효공주 묘지에는 황상(皇上)이란 표현과 함께 대왕이란 용어도 섞어 쓰인 것도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발해는 강대국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희귀한 발해의 유물들은 일제시대에 빼돌려져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후삼국시대에 들어 후백제를 세운 진훤(甄萱)은 정개(正開)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하며 일세를 풍미했다. 이 연호는 전북 남원의 실상사 조계암 터에 있는 편운화상부도에 새겨져 있다(이도학 교수의 [진훤이라 불러다오](푸른역사, 1998) 참조). 이는 진훤의 백제국이 단순히 반란자 집단이 아닌 새 왕조를 개창한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또한 궁예는 무태(武泰), 성책(聖冊),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는 무려 네 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국호도 고려,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여러 번 고쳤는데 여기서 마진은 "대동방국"을 의미한다. 후백제와 쟁투를 벌이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북벌의 의지를 피력한 것은 다소 허황된 감이 있다. 그러나 대륙 회복의 기상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고려시대는 발해의 방법을 본받아 밖으로는 왕국이면서도 안으로는 황제의 제도를 꾸리는 외왕내제(外王內帝) 방식을 이어간다. 하지만 발해처럼 모든 왕이 독자연호를 쓰지는 않았다. 태조가 천수(天授), 광종이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송, 요, 금, 원, 명의 연호를 번갈아 썼다. 여기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평가한 것이 떠오른다.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고 부르고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했다.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은 상당부분 자주적인 요소가 있었기에 신채호 선생의 탄식은 깊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이 전략적으로 치밀하지 못해서 개경에 머물던 정지상, 백수한 같은 서경파들이 앉아서 죽게 만들어 버린 점과 도참설 같은 비합리적 사고에 기대려했던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또한 김부식 일파가 칭제건원을 반대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충분했다. 금나라에게 사대하기로 한지 몇 년만에 칭제건원을 할 경우 금의 반발이 예상되며 외교적, 군사적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더군다나 사대하려는 대상이 중화가 아니라 금나라였다는 점에서 신채호 선생의 "사대주의의 괴(魁.괴수)"란 표현은 지나친 감이 있다. 적어도 김부식의 현실론은 조선시대에 연호 사용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김부식의 사대성은 그의 저서 삼국사기에서 짙게 드리워진다. 그가 쓴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서 중국의 경전과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망연(茫然)하여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힌 그의 충정은 인정할 만 하다. 그러나 진덕왕 4년(650) 당나라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자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다"라며 주석을 단 것을 비롯해 사대주의에 찌든 편견도 적잖이 보인다. 또한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없고, 가야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고, 발해의 역사도 애써 외면했다.


고대사를 둘러싼 논쟁을 접할 때마다 삼국이 스스로 편찬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는 것이 늘 안타깝다. 고구려의 유기(留記),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 같은 삼국이 스스로 편찬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덧붙여 향가모음집 삼대목(三代目)까지 어디서 뚝 떨어질 수 없을까?^^;). 기껏해야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목을 매달고 있는 우리 고대사 연구의 현실이 너무 비극적이다(삼국유사라도 없었으면 완전 초상집이었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존재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삼국사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4. 한국사의 독자연호3 - 조선시대 그리고 대한민국

조선시대로 오면 고려시대에서 그나마 보이던 이중적인 체제나 실리적 고민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오로지 사대주의에 올인하며 성리학에 빠져 살았다. 명나라의 제후국으로 굽실거리느라 독자연호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인조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 정권의 고루한 숭명배금정책으로 비추어볼 때 조선의 사대는 고려의 사대에 비해 훨씬 저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고종 말기에 비로소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을 건립하며 광무(光武),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썼다. 조선시대 전반을 흐르던 사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지만 이미 독자생존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묘청도 지하에서 이런 칭제건원은 원치 않았으리라.


조선 중기 시인인 백호 임제가 숨막히는 사대에 일침을 놓았던 유언은 들을수록 따갑다.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했으니 이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났다 죽는 것을 애석히 여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四海諸國 未有不稱帝 獨我邦 終古不能 生於高此陋邦 其死安足惜)"는 사자후가 못내 애처롭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이 백마산성을 피해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할 만큼 출중한 장수였던 임경업이 "내가 천지 정기를 받아 가지고 났는데 물건이 아니 되고 사내가 되었는데, 요 조그마한 나라에서 나서 기운을 펴보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라며 개탄한 것도 사대에 찌든 우울한 왕국의 초상이었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단군기원, 즉 단기가 국가의 공용연호로 채택되었다. 이후 1961년 12월 공용연호에 관한 개정법률을 공포하여 연호를 단기에서 서기로 변경하였다. 이전까지는 국내 문서는 단기를, 외교문서 같은 국외용 문서에는 서기연호를 사용했으나 1962년 1월 1일부터는 공식적으로 단기연호 사용이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7년 생뚱맞게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主體)라는 연호를 제정한다. 이는 대놓고 봉건전제국가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주체는커녕 주책 맞을 따름이다.ㅡ.ㅡ;


오늘날 서력기원 연호 사용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다만 일부 국가의 경우 서력기원과 자국의 고유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눈길이 간다. 과거에는 자주성의 상징으로 독자연호가 제정되었다면, 이제는 특수성의 표현으로 고유연호를 제정해봄직하다. 일본은 일왕의 연호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고, 중화민국(타이완)에서는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민국기원(民國紀元)을 사용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622년을 원년으로 하는 헤지라기원(Hegira紀元)이 쓰고 있으며, 태국 같은 불교 국가에서는 부처가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하는 불멸기원(佛滅紀元), 즉 불기를 쓰고 있다. 단기가 부담스러우면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나 1945년 광복을 기원으로 하는 고유연호를 생각해 봄직하다. 머지않아 통일이 되어 남북이 새로운 연호를 제창하는 것도 참 기분 좋은 상상이다.


5. 세계화시대의 한국사

강만길 교수는 "건망증이 심한 민족일수록 역사 실패를 거듭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오욕과 고난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강만길, [역사를 위하여](1996), 한길사, 71쪽)"고 했다. 연호로 읽는 한국사도 이래저래 수난과 오욕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가 보잘것없다고 해서 내팽개칠 수는 없다.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의 서언에서 "국학과 국사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고 외쳤던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비싸기 마련이다. 세계의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어떻게 가르치고 전하는지를 보고 배워야 한다. 미국이 200여 년에 불과한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만 봐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고 자국의 역사를 좀 더 그럴듯하게 기술하고 싶은 욕심은 누구나 있다. 그러나 이웃나라의 역사를 일방적으로 헐뜯고 깎아 내리는 식의 역사 교육은 무례하고 무참하다. 우리의 경우 이웃 강대국들이 먼저 시비를 건다는 점에서 저들의 쩨쩨함만 타박하고 있기에는 너무 위태롭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같은 역사제국주의가 터지자 여기저기서 국사 교육을 강화해야한다며 아우성이다. 역사 분야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나이지만 솔직히 말해 국사교육 강화와 역사왜곡 방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차라리 역사전문가, 외교전문가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그들의 밥줄을 많이 만들어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만 국사과목이 필요 이상으로 천대를 받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한국사와 세계사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교육되지 않는다면 노상 암기과목의 오명을 벗기는 힘들 것이다.


연호를 통해 한국사를 읽으면서 재야사학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재야사학계의 국수주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이에 대한 과민반응도 지나친 처사다. 이웃나라들이 옹졸한 역사왜곡을 일삼는 것에 비하면 우리 재야사학이 하는 일은 애교 수준이다. 고종석 선생은 "공격적 민족주의에 대한 올바른 처방은 해방적 민족주의가 아니다"고 말한다. "민족주의가 타인에 대한 증오라면, 애국심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므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을 바라며 "남을 증오하지 않고도 자신을 존중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고종석,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 1997) 참조). 하지만 해방적 민족주의라고 표현하든 아니든 어떠한 대응이 없다면 우리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국제사회는 비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는 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대부분 중국와 일본의 공세를 방어하는 수준이었다고 본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나 일제의 만행에 분개하는 것은 편협한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라 평화와 문명을 짓밟은 것에 대한 정당한 분노일 따름이다.


백범 김구 선생 [나의 소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런 문화강국의 이상은 아름답지만 이것 또한 상당 수준의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을 갖춰야만 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그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 나라의 국력이 뒷받침되어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엄혹하다. 호방하게 큰소리도 좀 해보고 싶지만 주변 강대국들은 만만치 않다. 발해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강대국에 치이면서도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의 이익을 최대한 도모하려는 날쌘 자세가 필요하다.


독자연호를 마음껏 쓰지 못하고 중국의 억압에 시달리던 시대는 지났다. 바야흐로 세계화 담론이 요란하지만 진정한 세계화, 진짜 세계시민이란 자기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역사상 세계는 어느 하나의 가치와 문화로 통일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죽이지 않고 살려나가는 사회,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고 내 것을 강제하지 않는 사회, 인간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사회를 지향해야한다. 이를 위해 무시 못할 국가적 역량과 깊은 문화의 향기로 무장한 나라를 만들도록 노력해야한다. 몇몇 연예인이 이룩한 한류(韓流)에 만족하지 말고 진지하고 그윽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애호하고 알려나가자. 스스로 사랑하는 자만이 남에게 존경을 받는다. 이제 자중자애(自重自愛)하자. - [憂弱]


추신1.
甄萱은 견훤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도학 교수는 甄萱을 지렁이의 아들로 적고 있는 삼국유사의 출생설화 등을 들어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도 그에 따르는 편이다. 한편 견자가 성으로 쓰일 적에는 진으로 발음된다고 한다. 甄萱의 앞 자를 성씨로 보느냐, 그냥 이름으로 보느냐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고도 한다. 또한 아들이 아버지의 성을 사용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견씨가 아닌 견훤 자체가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한다. 알쏭달쏭할 뿐이다. 일국의 제왕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할지 혼란스러워 해야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추신2.
이 글을 다 쓰고 중국 당나라 문학가 한유(韓愈)가 시를 향한 자신의 병적인 몰두를 두고 "유익함도 없는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 슬프다(可憐無益費精神)(정민, [한시미학산책](2004), 솔, 188쪽)"라고 한 것을 떠올렸다.


참고문헌
박성래. 1978. "高麗初의 曆과 年號." 『한국학보』 4권 1호. 135~155
정운용. 1998.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의 年號." 『한국사학보』 5권. 48~84
"[천자칼럼] 연호." 한국경제신문. 1997. 07. 10.
이덕일. "독자 연호 사용 ‘천하’를 꿈꿨다." 주간 동아. 제251호(2000. 09. 14).
김한종. "고구려의 자주성 내세운 연호." 한겨레신문. 2004. 08. 29.
박성래. "한국사의 年號사용에 대한 오해." 한국경제신문. 2004. 09. 30.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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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45주년을 기념해 학교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4.18 구국대장정이 열렸다. 본래는 오전에 학교에 가서 후배들이나 보고 학교에서 책이나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4.19 국립묘지를 차분히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적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새로 장만한 컴퓨터 앞에서 한창 고민하고 있는 연호(年號)와 관련된 잡글을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서 너무 늦게 출발하고 말았다.


부랴부랴 수유역으로 달려갔는데 막상 전철에 있는 안내지도에는 4.19 묘역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참 난감했다. 약간 헤맸지만 다행히도 길을 제대로 찾아서 무탈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좌우로 태극기가 걸린 길을 따라 걷는데 제법 걷는 것이 미니 4.18을 하는 기분이 나서 괜찮았다.^^ 제법 걸어야 하는 거리라 안내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교통표지판을 따라 가면 크게 찾기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늑장을 부린 터라 이미 고대생들은 이미 도착해서 참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올해는 경영대가 끝에서 두 번째 순서라 참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경영대가 맨 앞에서 간 것 때문에 이번에는 뽑기 운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참배도 하고 싶었으나 아직도 참배가 한참 진행 중인데 경영대 순서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당초 계획대로 혼자 둘러보기로 했다.


4.19혁명 기념관을 가장 먼저 둘러봤으나 고대생들로 붐벼 제대로 보기는 힘들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영상자료와 밀랍인형 전시를 빼고 특별한 유물 같은 것은 없는 터라 크게 흥미를 끌지는 못하는 것 같다. 4.19 혁명을 소재로 한 시비들을 하나하나 읽어보기도 하고, 기념사진들도 주욱 돌아봤다. 비록 문은 닫혀 있었지만 4·19혁명 희생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유영봉안소에 올라가 4.19 희생자 영령에 대한 짧은 묵념을 했다.


그러고는 평소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이 발동하여 건물을 살펴보고 말았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제법 큰 규모에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었다. 전통 제례 건물의 대표주자인 종묘 정전의 단아한 맞배지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단청도 종묘 정전은 가칠단청(선이나 문양 등을 전혀 그리지 않고 바탕칠만 칠한 단청)인 반면, 유영봉안소는 그 다음 단계로 약간 문양을 넣는 긋기단청이었다. 또한 현대에 지은 건물이라서 그런지 암막새와 수막새 모두 무궁화 문양이 독특했다. 유영봉안소 오르는 길에 소맷돌(돌계단의 난간)과 답도(踏道)는 솔직히 말해 너무 성의 없이 만든 것 같이 정감이 가지 않았다. 또한 입구 쪽에 문인석 한 쌍까지는 좋았으나 기왕 옛 흉내를 내려면 무인석 한 쌍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올해도 고대타임(?) 사태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개방시간인 6시를 넘겨서도 참배가 한참 진행되었다. 방송으로 개방시간이 6시까지임을 알리는 방송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듣기 거슬렸다. 열댓 번은 방송이 나온 것 같은데 어차피 강제로 쫓아낼 것이 아니라면 한두 번의 협조 요청 방송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기왕이면 4월 18일, 19일 이틀 정도는 개방시간을 늘리는 것도 검토해 볼만하다. 물론 그렇다고 늦게까지 남아서 민폐를 끼친 고대생들이 잘했다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개방시간에 맞게 서둘러 출발하는 노력을 좀 더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애꿎은 공익근무요원들의 퇴근 시간만 늦추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4.18 고대생 의거는 고대인의 자랑이다. 하지만 4.18이 있어서 4.19가 있었느니 하는 거창한 의미 부여는 자제해야겠다. 초동을 끊었다는 것은 자랑스럽지만, 4.18이 없었어도 4.19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십년전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영국 언론의 비아냥은 분명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어쨌거나 쓰레기통에 장미꽃을 피우기는 했는데... 이제 그 꽃을 꽃병에 예쁘게 꽂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쓰레기통에만 있으면 꽃내음이 쓰레기통의 악취에 묻혀버릴 것이 아닌가(이 문단은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끌어다 쓴 것이다)?^^


후배들을 만나 조형물 "정의의 불꽃"에서 기념사진을 간단하게 찍고 4.19 묘역을 나오며 혁명이라는 것에 대한 상념에 잠겼다. 혁명이라는 것은 저수지에 물이 차서 저절로 넘치는 것처럼 자연스레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시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슴속에 가득 고여 절로 흘러 넘쳐 나오는" 혁명만이 오롯이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어떠한 혁명도 억지로 쥐어 짜내서 성사시킬 수 없다.


이제 적어도 독재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다. 4.19 기록사진 같이 초/중/고등 학생들이 거리로 나설 일은 어지간해서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민주와 반민주의 사생결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될 것이다. 암울했던 시절에 부득이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를 했던 것이 어느 정도 용납이 되었을지 모르나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숙고된 균형감각만이 요구될 뿐이다.


문득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사회학자인 파레토가 했던 "엘리트의 자격이나 요건은 변하지만 엘리트가 사회를 이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4.19 혁명에서 알 수 있듯이 혁명의 과실은 소수가 따먹기 일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와 전문가정신(professionalism)으로 무장한 엘리트주의를 지향하는 녀석으로서 혁명에 대해 궁리하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끝으로 이 날 4.18과 4.19의 의미를 곱씹었던 많은 고대 학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憂弱]



배운대로 바른대로 노한 그대로
물결치는 대열을 누가 막으랴
주권을 차지한 그대들이여
영원히 영원히 소리칠 태양
- 송욱, [소리치는 태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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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오전 10시에 고대하던 창덕궁 특별관람코스를 다녀왔다. 2004년 5월 1일부터 기존의 창덕궁 일반관람코스에서 후원의 관람정, 존덕정, 옥류천 지역을 추가로 개방하는 특별관람코스가 만들어졌다. 옥류천 지역은 1976년 출입이 금지된 이래 28년 만에 개방되는 곳인데 관람 횟수와 인원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관람하기가 녹록지는 않다. 작년에 인터넷 예매와 현장 예매를 도합 세 번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매진되어 근 반년을 기다렸다가 올해 새롭게 개방을 시작하는 첫날 예매하여 들어갈 수 있었다.


창덕궁 후원(後苑)은 궁궐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원(北苑), 왕족을 비롯한 제한된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다하여 금원(禁苑)이라 불리기도 했다. 흔히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비원이라는 명칭이 창덕궁까지 통칭하는 것으로 잘못 쓰여지기도 한다. 이는 창덕궁을 폄하하는 말로써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므로 삼가야 한다. 비원은 원래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기관의 이름 비원(秘院)에서 시작되었으나 1904년부터 秘院을 秘苑으로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비원이 기관(院)과 장소(苑)를 두루 지칭한다고도 하고, 왜놈들이 갖다 붙인 것이라고도 하니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창덕궁 홈페이지를 보면 후원은 뒤뜰이라는 뜻으로 일반민가에도 적용되는 만큼 왕궁의 원유를 후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아 후원의 명칭에 대해 여러모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원의 빼어난 경치 열 가지를 꼽아 상림십경(上林十景)이라고 하는 만큼 옛 명칭 중에 하나인 상림원(上林苑)도 괜찮을 것 같다. 여하간 조만 간에 얼른 결판내서 명칭에 대한 혼란을 줄여야 할 것이다.


창덕궁 특별관람코스의 관람료는 5000원인데 언뜻 비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본래는 10000원으로 책정할 예정이었는데 문화재청과 재경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5000원으로 조정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고궁 관람료가 외국과 비교해 저렴하다거나, 관람료가 싸면 고궁이 가볍게 보인다는 문화재 당국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너무나 파괴되어 중건(혹은 복원)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우리 궁궐을 위해 약간의 투자를 해달라고 홍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이 정도의 인상이 아깝다고 생각할 만큼 쩨쩨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종대왕은 후원을 두고 "내 천성이 화초를 좋아하지 아니한다. 뽕나무, 닥나무, 과실나무는 모두 일상생활에 요긴한 것이니, 이제부터 이것으로 직책을 삼음이 옳을 것이다"며 명했다고 한다. 나는 보는 눈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후원에 기화요초보다 과실수가 더 많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창덕궁 후원에 정자들은 규모가 소박한 편인데 이는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인공미를 가미하려는 우리 전통 조경의 산물이다. 좋게 말해 사치를 멀리하고 검박함을 추구한 왕실의 정신이 투영된 것이지만 그렇게 평하기에는 대부분의 시기 조선 왕국의 백성들은 빈궁했고 고달팠다.


새로 개방된 후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관람지와 관람정이다. 관람지는 한반도 지형을 닮아 반도지(半島池)라 불리기도 했다. 동궐도(창덕궁, 창경궁을 그린 19세기 초의 지도)에는 네모난 모양에 둥근 모양이 합쳐져 나타나는 것과 판이하다. 아마도 이는 일제가 우리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려는 의도에서 조작한 것이라는 설이 그럴 듯하다. 또한 궁궐에는 하나밖에 없는 부채꼴 모양의 정자도 생성 시기가 애매하지만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관람정 주변에는 존덕정, 승재정, 폄우사가 자리잡고 있다. 아(亞)자살 창호가 화려한 승재정이나 효명세자가 독서를 했다는 폄우사도 둘러봤다. 급한 마음에 봄꽃이 피기도 전의 행차라 새싹도 돋아나지 않은 황량한 풍경이 적지 않았다. 아직 잔디가 자라지 않아 존덕정에서 폄우사로 오르는 언덕에 있는 팔자 걸음 연습용 화강암 판석이 그리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보기 드문 6각 지붕에 2층 처마를 한 존덕정은 단연 일품이었다.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존덕정에서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쉬어가라고 있는 취규정을 스치듯이 지나치고 옥류천 영역에 당도했다. 창덕궁의 후원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길러먹던 샘물인 어정에서 한 바가지 들이키니 물맛이 참 달았다. 옥류천 바위에는 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를 한 수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할 수 있는 홈이 있지만 그 길이가 짧아서 시 한 수 읊을 여유가 안 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어봤다. 개인적으로 매우 싫어하는 임금인 인조의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만 없었더라면 완벽했을 것이다.^^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불리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은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특히 유일한 초가 지붕인 청의정에 눈길이 갔다. 동궐도에 보면 약 열여섯 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지금은 청의정 하나만 남아 있다. 청의정 주변에 벼를 심어 추수로 나온 짚으로 지붕을 다시 만들곤 했다고 하니 자력갱생이 가능한 정자인 셈이다. 초가 지붕으로 겸양을 떨었지만 바로 아래 화사한 단청이 허허로움을 보완해주는 것 같다. 아쉽게도 청의정 앞 논은 진흙더미에 불과했다. 아직 모내기를 안 한 모양이다.^^


일제가 서울시내 5대 궁궐을 어느 하나 멀쩡히 둔 것이 없지만 창덕궁은 그나마 피해가 적어 아름다운 옛 모습을 제법 간직하고 있다. 이 덕분에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될 수 있었다. 전통 문화유산은 분명 가꾸면 가꿀수록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먼저 외면하고 소홀히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말처럼 스스로 무겁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어 있다. 이래저래 잘리고 상처 입은 우리 궁궐을 바라보며 일제의 만행만 곱씹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부박함을 반성해야겠다. 후원의 아름다움이 눈부신 만큼 회한도 짙게 드리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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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낙산사여!

문화 2005. 4. 7. 03:43 |

5일 산불이 옮겨 붙으면서 화염에 휩싸인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보타각. (양양=연합뉴스)

강원 양양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이 끝내 천년고찰 낙산사(洛山寺)를 집어삼켰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671년 세운 절로서 우리 역사의 시련과 함께 했다.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전소된 뒤, 조선 세조 때 중창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그 후 겨우 제 모습을 찾았으나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1953년에 다시 지어진 낙산사는 결국 다시 시름에 잠겼다.


문득 고등학교 1학년 때 동해안, 설악산 방면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낙산사를 들른 기억이 났다. 아직도 수학여행 기념사진으로 햇살에 눈이 부신 날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과 찍은 것이 남아 있다. 그 해수관음보살 주변 석축물들이 검게 그을려 그 우아한 풍모가 빛을 바랬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세상 모든 고통의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관세음보살도 눈물 몇 방울 훔치셨을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화마를 피한 의상대(義湘臺)에서의 추억 한 꼭지도 떠오른다. 의상대에 올라 동해를 굽어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교감 선생님과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생각난다. 교감 선생님은 로마사 인물 중에서 누가 마음에 드느냐고 질문하셨고, 나는 패장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는지 한니발을 꼽았다. 그 때 교감 선생님은 네게는 키케로가 더 잘 어울린다고 하셨고, 나는 속으로 어차피 정치적 패배자임은 마찬가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 동종이 쇳덩어리가 된 것을 비롯해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이 또 훼손된 것 같아 안타깝다. 막을 수도 있었던 인재로 인해 국가문화재인 보물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것이 더욱 가슴이 따갑고 부끄럽다. 문화재청의 의지대로 중요한 전각 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최초 창건 당시 가람 원형을 찾아 복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 잃고 고치는 외양간은 전에 것보다 더 튼실하고 보기 좋아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의 절반 이상이 불교문화재이다. 특히 산 속 사찰의 목조건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이번과 같은 끔찍한 비극이 다시 나타나지 마란 법도 없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해인사 장경판전, 화엄사 각황전, 부석사 무량수전, 금산사 미륵전, 법주사 팔상전, 불국사 대웅전이 불길에 타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참혹하다. 아울러 큰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은 보험사나 값비싼 보험료를 내야하는 사찰 모두가 가입을 꺼려온 사찰 보험제도도 정비해서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동해안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답사코스가 화마에 소실됨으로써 많은 이들이 그곳에 서렸던 수많은 추억들이 떨어져 나가는 슬픔을 느낄 것이다. 다시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당당히 뽐낼 그 날을 고대하며 아픈 상처를 다독여보자.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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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문화 2005. 2. 26. 07:52 |
어느 인터뷰의 한 꼭지를 보다가 얼마 전 내가 고민했던 “알고 보면”이라는 주제를 떠올렸다.


▼ 지승호 - 변화를 추구하다보니까 생기는 일인 것 같은데요. ‘성격이 좋게 말하면 쿨한 거고, 잔정이 없어 보인다’는 평도 있고, 잘 아는 분들은 ‘냉정한 듯 하지만 따뜻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요.

▲ 유시민 - 잘 알아서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웃음)
- http://www.freechal.com/sibi , 2005-02-25, 지승호의 유시민 인터뷰 中


유시민의 말은 “알고 보면”이라는 내 고민거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알고 보면 그렇게 각박하고 쌀쌀맞은 사람에게도 풋풋하고 낭만적인 구석이 조금은 있게 마련이다. 알고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답답한 사람에게도 소탈하고 진솔한 면을 만날 수 있게 마련이다. 알고 보면 저마다 아픈 구석을 간직한 좋은 사람이다. 알고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거친 말과 손가락질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내가 관계맺음에서 진정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성찰과는 반대로 대인관계에 나는 대개 무심한 편이다. 제 자신을 가꾸는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다 보니 지인들의 근황이나 요즘 생각들을 챙기는 것을 잘 못하는 편이다. 또한 내 개인주의적(혹은 자유주의적) 성향 탓에 타인의 인생에 어지간하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좀처럼 친하기 힘들다는 인상이 강하다. 결국 “알고 보면”이라는 화두를 실현해볼 여지가 별로 없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인들의 삶 구석구석을 꿰뚫어 볼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뜻일 뿐, 지인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한편, 상대방을 대충 훑어보고 다 좋은 사람이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도 안 된다. 정이 많다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엄정한 평가를 내리고 보상과 문책을 해야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타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비판하는 것도 잘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무심한 데다가 제대로 비판도 못하고, 더군다나 재미나지도 않은 녀석을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을 사귀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제 깜냥 이상의 성과는 늘 위태롭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의 내 인복은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닐까 싶어 늘 전전긍긍이다.^^;


관계맺음이 제법 깊어지면 서로간에 개입을 하려는 하는 욕망이 싹튼다. 상대방이 내가 하는 일에 조언도 해줬으면 좋겠고, 나도 상대방의 언행에 왈가왈부하고 싶어진다. 칼 포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가까운 사이에 한정된 하나의 특권이다. 하지만 나는 이 특권을 쓰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다. 특권의 의미는 그것의 행사 여부가 자유의사에 맡겨진 것이니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내가 이 특권을 쓴다면 “그렇게 하지 마라, 이렇게 해라”는 식보다는 “이런 장단점이 있을테니 알아서 잘 생각해 보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혹자는 무책임하다고 불평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개개인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무심함을 사무적인 관계라고 느끼고, 가까이 하기 힘들다고 착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의견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의 의견이 소중하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다. 나의 무심함은 그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이다.


기우인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삶에 하나둘 개입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내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고 섭섭해하는 독선적 인간이 될까봐 두렵다. 내 인격적 미성숙을 어느 정도 극복해서 이 우려를 씻어냈을 때 그 때는 조금 활발한 개입을 통해 특권을 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내 나름의 방법으로 나같이 모자란 사람과 교류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다할 것이다. 사실 나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다. 푸하하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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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열 선생의 [한국 문화재 수난사](돌베개, 1996)라는 책을 보는 내내 가슴이 쓰렸다. 이 책은 우리 문화재의 훼손에 대한 안타까움을 기록하며 문화재 애호사상의 생활화를 일깨워주고 있다. 흔히들 우리의 문화유산이 볼품 없고 보잘것없다고 말할 때 나는 주로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국권이 미약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의 수난을 막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이 책은 일제시대, 한국전쟁, 해방 이후의 수난 등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만 일제시대의 수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일제의 만행이 문화재까지 미쳤다는 것이야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막상 그 참상을 접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또한 한국전쟁의 난리통 속에 가까스로 지켜진 박물관 유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해방 이후의 수많은 도굴과 도난 사건들도 시리게 다가왔다. 일제의 문화유산에 대한 만행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개성 등지에서 고려고분 파괴와 고려자기 도굴을 크게 조장시킨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내용, 경천사 십층석탑, 불국사 사리탑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사연들, 석굴암에서 사라진 오층소탑과 감실 부처 2점의 안타까움, 행방불명된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 3점, 항일민족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에 대한 파괴, 보신각종이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서 녹아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일, 낙랑고분, 가야고분, 신라고분의 처참한 도굴 사례들, 광개토왕릉비 조작, 백제고분을 연구한답시고 부장품을 파낸 악당 가루베의 만행...


하나하나 가슴이 따끔거리는 이 참담함을 잘 나타내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다음은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미니시의 조사보고에 경북 선산군 옥성면의 처참한 가야고분 도굴현장에 대한 증언의 일부이다.


“이곳의 고분들 중에는 묘광(墓壙)을 그대로 누출시킨 것도 있다. 고분의 봉토가 유실되어 그렇게 광을 노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거기에 접근하지 않고, 또 침해하지도 않는 순박함이여. 사자(死者)에 대한 예(禮)를 결(缺)하고 있는 현대의 도굴, 파괴, 고인(古人)의 분묘에 능욕을 가하고 있는 현대인(일본인)에 비하면 송연한 바가 있다. 구(舊)조선의 도덕을 보려거든 이 옥성면의 제분(諸墳)을 가 보면 족하리라.”
- 이구열, [한국문화재 수난사](1996), 돌베개, 186쪽


이러한 문화재 약탈 사례들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누구나 어려웠던 기억을 되돌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구차하고 비루했던 우리 역사와 똑똑히 마주함으로써 현재를 다잡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켜내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을 인정하되 앞으로는 소중히 보존하고, 지속적인 보수,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잘 가꾼 문화유산은 세계화 시대에 대비한 주요한 경쟁력으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더 이상 잃어버릴 ‘우리의 것’도 없지 않는가.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면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전반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도 낮고,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도 날로 줄어들고 있다. 이미 수능시험에서 국사가 사회탐구 선택과목의 하나일 뿐이며, 2월 25일 치러지는 행정고시, 외무고시 1차 시험에서 마지막 국사시험이 치러진다. 우리가 스스로 제 나라 역사를 팽개치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에 이 작은 나라에 뭐가 그리 뜯어먹을 것이 많은지 여기저기 군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주한 일본대사는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며 망언을 내뱉고, 중국은 고구려사, 발해사를 제것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하나둘 실현해나가고 있다. 그나마 작은 땅덩어리도 반으로 쪼개져서 서로 총칼을 겨누고 있고, 한쪽은 독재와 굶주림에 신음하고, 한쪽은 그 작은 땅덩어리마저 쪼개서 싸우고 있다. 이 비극적 현실에 좌절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기보다는 스스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이 난국을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은 가난한 자의 빵이니까. - [憂弱]


추신 - 일본에게 빼앗겨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재가 있으면 값을 따지지 않고 사들여 우리 문화재를 수집, 보호한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훗날 돈을 제법 벌게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큰 모범이 되어주셨다. 매년 5월, 10월에 관람 가능하다는 간송 미술관을 꼭 찾아가야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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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황룡사터에서 희망을 찾다

문화유산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존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잦은 외침에 시달려 찬란했던 문화유산들을 한없이 파괴당하고 약탈당했다. 또한 일제시대를 겪으며 어지간한 문화유산은 개박살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족간에 전쟁을 치르는 것도 모자라 개발독재 시절 난개발의 후유증도 계속되고 있다. 진정한 문화 강국은 잘 만드는 것보다 잘 지켜내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훼손된 문화유산의 목록은 끝도 없지만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을 애타게 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룡사다. 황룡사는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신라 최대 사찰이다. 동양 최대의 목탑인 9층목탑과 구리 3만여근, 황금 1만198푼이 들어간 본존불 금동장륙상 및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보다 4배나 큰 황룡사종이 있었다고 한다.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고, 임진왜란 때도 왜놈들이 불타버린 황룡사의 유물들을 파헤쳐 갔다고 한다.


지금의 황룡사터는 금동장륙상을 올려놓았을 커다란 석조대좌 흔적과 9층목탑을 쌓았던 64개의 초석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잿더미가 되고 약탈도 당했지만 발굴 당시에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높이 182cm, 최대 폭 105cm인 대형 망새는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망새는 치미라고도 하는데, 궁궐, 절 전각의 용마루(지붕 위의 가장 높게 마루진 부분) 양쪽 머리에 얹는 용머리처럼 생긴 기와 장식물을 말한다. 거대한 망새의 존재는 당시의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즐겁게 상상하게 만든다.


9층목탑 터에 서면 전율이 돋는다. 600년대에 세워진 높이 80m(225척)의 웅장한 목탑의 위용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현존하는 목탑 중에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1056년 요나라 때 만들어진 응현5층탑을 능가하는 높이다. 많은 이들이 9층목탑 복원을 소망하는 것도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짐작하는 화려했던 목탑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리라. 너른 목탑 터에서 세계 최고의 목탑을 세운 것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더 짙게 드리운다. 거대한 심초석을 어루만지며 고종석 선생의 소설집에 등장하는 세계적 석학 피터 버갓씨의 냉소를 떠올렸다.


이 나라는 뭐든지 규모가 작다. 일본 사람들은 작은 것 잘 만들어내는 데 세계 제일로 알려져 있지만, 옛 일본 사람들이 남겨놓은 유적들은 그 규모가 꽤 볼 만하다. 한국은 궁전이든 사찰이든 너무 작다. 단지 작을 뿐만 아니라 초라하다. 나는 이 나라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미국인이나 유럽인에게 덜 매력적인 것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판단했다. 좋게 평가하자면, 이 나라는 과거의 나라가 아니라 미래의 나라인 듯하다. 이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빈약한 자연적 문화적 자원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사회라도 만든 것이 대견하다 싶을 정도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이탈리아나 아일랜드에 비교하고 싶어하지만, 이 나라에는 이탈리아나 아일랜드만한 과거가 없다.
- 고종석, [엘리아의 제야](2003), 문학과 지성사, 89 ~ 90쪽


우리가 풍요로운 전통문화를 자랑한다고는 하지만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문화유산을 보면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지켜내는 능력이 부족했던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면 풍성한 문화유산보다는 첨단 기술력의 덕이 더 클 것이다. 2004년 12월 삼성물산은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두바이에 세워질 높이 700m가 넘는 버즈 두바이 빌딩을 수주했다. 이로써 삼성은 세계 3대 마천루 모두를 건설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또한 롯데물산은 서울 송파구 신천동 제2롯데월드 부지에 높이 800m 규모의 초고층 빌딩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선조들의 장인정신이 우리를 미래의 나라로 이끌어주는 것은 아닐까.


문득 2004년 중국 베이징 여행 때 들렀던 원명원이 생각난다. 본디 이화원을 능가하는 호화로운 이궁(離宮)이었으나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1900년 또 다시 8개국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어 폐허만 남게 되었다. 서양루 유적지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부서진 석재들이 그 자체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황룡사터 경우에는 목조 건축이다보니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그런 감흥이 일지가 않는다. 남은 잔해가 거의 없으니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제대로 느끼기가 힘든 것은 목조 건축의 치명적 단점인 셈이다.


많은 외침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목조 건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인 문화유산 복원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잘 지켜내지 못한 만큼 다시 세우려는 노력만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 이 마저 소홀히 한다면 볼 것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가능한 많은 문화유산을 복원(혹은 중건)하는 것은 관광수지 적자에 대처하는 장기적인 투자다. 미래로 치닫는 세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문화유산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과감한 투자가 절실하다. 폐허마저 흥미로운 볼거리였던 원명원은 2008년 올림픽을 대비한 대대적인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2002 대선 때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불교 표심을 잡기 위한 공약으로 황룡사, 미륵사 복원을 똑같이 내세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절인 미륵사나 세계 최고의 황룡사 9층목탑이 다시 세워지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설령 옛날의 그 솜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대역사일테니 만반의 준비를 한 뒤에 시작해야겠지만 그 날을 고대하고 있다. 고증이 어려워 제대로 된 복원이 힘들다는 고충이 있겠지만 북한의 문화유산 개건(改建)처럼 원형에 대한 강박관념은 조금 덜어낼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지를 답사해보니 단군릉은 북한에서도 ‘복원(復元)’했다고 말하지 않고 명백히 ‘개건(改建)’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은 동명왕릉, 왕건릉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단군릉은 5천 년 전 유적이 아니라 20세기 유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남한에서 충남 아산에 만든 현충사가 조선시대의 유적이 아니라 20세기의 기념건축인 것과 같은 맥락에 있은 것이다.
- 유홍준,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권(1998), 중앙M&B, 143쪽


개건이라는 용어는 원형 그대로를 복원한다는 것보다는 다소 유연한 입장이다. 물론 북한의 개건 사업은 현대에서 재해석이라는 선의보다는 민족주의를 이용한 정권연장의 꿍꿍이가 더 강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북한 정권의 평소 행태로 보아 대규모 개건 사업은 나치 정권이 독일 전역에 거대한 규모의 기념물들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된다. 하지만 열악한 문화유산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은 평가할 만 하다. 허나 단군 황조(皇祖)와 동명성왕, 태조 왕건께서는 굶주린 인민들 걱정하시느라 잘 단장된 무덤이지만 편히 쉬시지 못할까 걱정된다.


황량한 황룡사터에서 어깨도 쭈욱 펴고 입술도 질끈 깨물어보자.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새로 만들어갈 희망을 노래하기 좋은 곳이다. 9층목탑터에서는 흐뭇한 표정도 지어볼 일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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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경주 답사 중에서 흥덕왕릉, 석불사, 황룡사터만 뽑아 이에 대한 감상을 적어본다)

수학여행의 추억

설 연휴에 경주 관람을 간단하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이후 10년만의 경주 방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 서울시 노원구로 전학을 온 관계로 한달 사이로 경주 수학여행을 두 번 다녀왔다. 두 번의 경주 답사는 거의 비슷한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국사, 석불사(석굴암), 첨성대, 천마총, 안압지(임해전지), 반월성, 무열왕릉, 김유신묘, 경주국립박물관 등을 둘러봤던 것으로 기억한다(이번 답사에서는 분황사와 황룡사터를 새롭게 가봤다). 문화유적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나이지만 초등학생 때까지 그런 것을 볼 줄 아는 혜안은 없었던지라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체 기념사진에서 지루함과 피곤함이 쌓인 어린이의 모습이 그 증거다.


그러나 연달아 있은 두 번의 경주 답사에서 인연을 끌어다 썼는지 중고등학교 때는 경주로 향할 일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아이엠에프 사태로 인해 졸업여행이 취소되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는 강원도 설악산 등지로 떠나는 바람에 들를 기회가 없었다(다음해에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고 한다). 수학여행 하니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공주, 부여로 수학여행을 갔던 것이 떠오른다. 낙화암을 오르고 무령왕릉을 들어가 본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특히 심각한 훼손으로 97년 영구폐쇄가 되기 전에 들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으리라.


비록 반강제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수학여행을 통해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처음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체계적인 역사 교육까지는 필요 없지만 적어도 우리 문화유산이 보잘 것 없고 하찮은데다 따분하다는 생각을 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중등학교 이후에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첫단추를 잘못 꿰는 잘못이 크지 않을까 싶다. 유치한 구호이지만 진정한 세계화는 한국적인 것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사랑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외로운 흥덕왕릉이여!

본격적인 경주 탐방에 앞서 경북 경주군 안강읍에 위치한 할머니댁에서 머지 않은 곳에 위치한 흥덕왕릉을 찾았다. 다른 신라 고분들이 경주 시내나 근처에 포진되어 있는 것에 반해 흥덕왕릉은 농가 밀집지역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표지판이 놓인 입구에 당도하면 휘어진 소나무들이 왕릉을 호위하듯이 빼곡이 들어서 있어 그제서야 왕릉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지리상 떨어져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는 하지만 흥덕왕릉은 신라 역대 왕릉 가운데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갖추어진 대표적인 왕릉의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완비된 능묘제도를 나타내준다는 괘릉(원성왕릉으로 추정)과 비견될만하다.


큼직한 봉분 둘레 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어 눈을 즐겁게 했다. 두 쌍의 돌사자와 한 쌍의 문인석과 무인석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 돌이끼가 좀 피었을지언정 천년도 넘는 세월을 지키고 서있었다. 근처에 이래저래 꺼이진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보였다. 비신(탑신)은 온데 간데 없고, 이수(螭首,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도 보이지 않는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비신도 깨어지고, 이수도 날라가고, 귀부도 쪼임을 당했을 것이다. 목 잘린 불상들마냥 온전한 것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의 능비(혹은 탑비)는 수난의 한국사를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는 셈이다.


흥덕왕릉은 귀부마저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천망다행으로 흥덕(興德)이라고 새겨진 비석의 파편이 발견되어 제 이름이나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신라 고분 중에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 이외에는 확실하다고 알려진 왕릉이 거의 없다.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진흥왕의 릉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어 많은 이들의 의심을 받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흥덕왕릉은 이런 면에서는 복을 받은 셈이다.


흥덕왕은 신라의 제42대 왕(재위 826~836)으로 청해진에 장보고를 두어 방비케 하고,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지리산 자락에 심게 해 우리나라 차 문화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인 장화부인이 죽었는데,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을 그리며 홀로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소원대로 아내의 무덤에 합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질펀한 밤의 황제(?)가 있었던가 하면 이런 순애보도 있었다.


저승에서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있을 이들 부부의 무덤은 수 차례나 도굴 당할 정도로 관리가 소홀한 편이다. 봉분 주위의 호석을 보아도 도굴의 여파로 깨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언제 신라 고분의 사슴뿔 모양 금관과 불꽃 모양 금관을 기대하며 장비를 챙기는 검은 손들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흥덕왕릉도 제대로 발굴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고, 신라의 상당수 고분들이 발굴되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문화재 보호는 더욱 철저하게 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에 조선의 왕릉이 많이 남아있지만 별로 대단치 않은 부장품이 약간 들어가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삼국시대 왕릉은 규모도 규모지만 그 안에 부장품이 무궁무진하다. 비록 고대 사회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지만 후손들은 그것을 잘 지켜낼 의무가 있다.


가까이 볼 수 없어 더 그리운 석불사

다시 찾은 서라벌은 싱그러웠다. 경주 시내에 도착해 도로변에 여러 왕릉과 탑 등의 유적지들을 스쳐 지나면서 천년 고도로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이런저런 유혹을 뿌리치고 곧장 토함산 석불사(石佛寺)로 향했다. 흔히 석굴암이라 부르지만 본래 그 이름은 석불사였다. 말 그대로 돌부처가 있는 절이다.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石窟庵)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경운궁(慶運宮)이 황위에서 물러난 상황(당시의 고종황제)을 가리키는 칭호인 덕수궁(德壽宮)이 널리 쓰이는 것처럼 맞지 않는 명칭인 셈이다.


일제가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고 잘못 조립하여 지금은 불상들의 온전한 위치와 정확한 구조를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수리하는 와중에 슬쩍해간 것도 적지 않으니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일제는 석굴 전체를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갈 계획까지 세웠으나 한일합방으로 굳이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섬뜩한 일이다. 일제는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소재로 각광을 받던 시멘트를 사용함으로써 석굴 내부에 습기가 차는 중 각종 문제점을 낳았다. 결국 1961년 복원 때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유리벽을 설치하여 일반 답사객은 유리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 석굴암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어 제대로 된 감상이 힘들다. 애를 써도 십일면 관음보살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석굴법당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우선 유리벽 너머로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없으니 그 진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또한 생각보다 규모가 너무 적다는 것에 불만이 쏟아진다. 그러나 석굴암의 재료는 화강석이다. 가령 경천사터 10층석탑과 원각사터 10층석탑은 석회암의 일종인 대리석으로 조각되었다. 이런 경도가 낮은 재질은 제작하기가 화강석에 비해 쉽기 때문에 화려한 조각을 뽐낼 수 있다. 하지만 조각하기 힘든 딱딱한 화강석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조각한 데서 찬란한 우수성을 깨달을 수 있다. 이 독창성에서 우리는 세계화의 파고를 어떻게 해쳐 나갈지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리벽 너머의 감상은 어쩔 수 없이 가장 크고 중앙에 자리잡은 본존불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표정은 위엄이 넘친다. 웃는 것은 아니지만 온화한 미소가 느껴지고, 화내지는 않지만 나지막이 꾸짖는 것 같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그 표정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워 마음 깊이 새기고자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대로 볼 수 없어 이토록 많은 답사객들의 애를 태우는 석굴암이지만 습기가 차는 것을 비롯해 이런저런 잔병치레가 심하다고 한다. 영구폐쇄된 무령왕릉처럼 석굴암도 폐쇄를 해야한다는 의견도 들려온다. 천년을 견뎌온 이 위대한 역사가 부끄러운 후손들에 의해 암흑에 쌓일지도 모른다니 안타깝다.


석굴암의 본래 구조와 앞으로의 보존 방법 등을 둘러싸고 많은 치열한 논쟁이 있다. 그만큼 이 문화유산의 가치를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전문적인 내용들은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어느 말이 맞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60년대의 복원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목조 전실은 있을 필요가 없으며, 팔부신중의 배열이 잘못되었으며, 햇빛이 비치는 광창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성낙주는 [인물과 사상] 7권에서 미미한 피해를 침소봉대하여 60년대의 보수공사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최악의 상태에 있던 일제 때의 석굴암으로 되돌아가자는 우를 범할 것이라며 비판한다. 실제 복원 공사에 참여했던 신영훈도 [(천상이 천하에 내려 깃든) 석굴암] 등의 저서를 통해 최선의 복원이었다며 옹호하는 입장이다. 유홍준의 글이 엄밀한 학술논물이 아니지만 성낙주와 신영훈의 글이 비교적 많은 반박논거를 제시하고 있어 뒤쪽의 의견에 더 공감하는 편이다. 사실 이렇게 티격태격하게 만든 원흉은 일제의 엉터리 복원이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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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而敬之를 꿈꾸며

문화 2005. 2. 12. 04:35 |
1.
사람을 가늠하는 잣대는 저마다 다르다. 이러한 개인적 좋고싫음은 큰 합리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개인적 기준으로 사회적 차별의 근거로 삼거나 폭력적으로 교정하려 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개개인의 미감은 존중받아야 한다.


가령 나는 포커페이스보다는 생긋 웃는 얼굴에 더 호감을 느낀다고 하자. 여기까지는 내 자유겠지만 포커페이스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공언하고, 포커페이스에게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웃는 훈련을 강제하는 것은 비합리성을 넘어 폭력성을 띄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내 옆의 사람은 포커페이스가 진중함이 있고, 카리스마 넘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날 때 제 나름의 기준조차 없다면 늘어만 가는 인간관계는 범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옛사람의 신언서판(身言書判)처럼 꼼꼼히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갖추려고 노력한 개인적 잣대는 가질 필요가 있다. 박노해는 다음과 같은 잣대를 제시한다.


인간성을 평가하는 잣대, 그 사람됨과 인간의 격(格)을 판단하는 단 하나의 잣대를 고른다면 나는 약자에 대한 태도를 들겠다. 자기보다 힘있는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들과 서로 주고받는 것은 누구나 한다. 그런 ‘연줄 잡기’와 ‘패거리 짓기’가 너무도 심각하여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제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가난한 이웃에 대한 태도, 여성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태도, 그것이 가치관의 핵심이고 인간다움의 중심 잣대가 아니겠는가.
-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1999), 해냄, 45~46쪽


한동안은 박노해의 잣대를 받아들여 써왔다. 도덕경 77장의 “하늘의 도는 남는 데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 보태지만,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모자라는 데서 덜어내어 남는 데에 바친다(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 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라는 구절이나 고종석의 “강자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약자에게 휘두르는 주먹만큼 보기 흉한 것도 없다(고종석, [참여정부의 抑弱扶强], 한국일보, 2003/11/26)”는 말씀도 새기고 있었다.


2.
그러던 중에 최근에 사람을 바라보는 새로운 잣대를 세워봤다. 강유원의 다음과 같은 독백에 영감을 얻었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과 '옳은 것/ 그른 것'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의 그른 점을 지적하면,
아니 그에 관한 사실을 밝혀 보이면
내가 그를 싫어하는건가?

- 강유원 블로그( http://armarius.net ) Kommentar 20 Nov. 2004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제멋대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칼 포퍼는 말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비판을 구분해야한다고 설파한다.


포퍼는 물질의 세계(세계1), 주관적 마음(정신, 의식)의 세계(세계2)와 구별되는 객관적 사상의 세계, 마음의 산물이면서도 그 인식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는 세계3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상, 언어, 윤리, 제도, 과학, 예술 등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말하는 사람과 그가 내놓은 이론, 지식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FTA 체결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 그 사람이 내놓는 찬성 논거를 살펴보지는 않고 그는 농민들을 다 죽이려는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한다고 치자. 이는 인식의 세계를 잘못 짚어 세계2와 세계3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의 주장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걸고넘어지는 것, “사람=그 사람의 말과 글”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지식의 생산자를 그 지식과 동일시하여 어떤 사상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 사상의 산출자를 없애버렸다. 이는 정치적 해결은 될 수 있어도 학문적 해결은 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의 정치적 해결은 항상 폭력을 수반한다. 열린 사회는 이러한 정치적 해결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신중섭,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9), 자유기업센터, 114쪽


친구가 어떤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된다면 그 견해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친구 된 도리다. 혹시 내가 괜히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감점이나 당할까봐 그냥 입에 발린 소리나 해주는 것이나 애정 어린 쓴소리를 경청할 줄 모르고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며 멀리하는 것이나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것은 친구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배반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물론 타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비판하는 것(혹은 미감을 거스르지 않게 하는 것)과의 균형을 잡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진정성이 담긴 내 선의를 인정받기란 늘 힘든 일이지만 맹자가 말했듯이 “선을 권장함은 벗의 도리(責善 朋友之道也)”일 것이고, 칼 포퍼의 제언처럼 “타인의 행복을 보살펴 줄 권리는 그들의 가까운 친구에게 한정된 하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이 “도리”와 “특권”은 때로는 쓴소리도 할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3.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미래사회가 영속성보다는 일시성이 두드러진 사회가 될 것임을 설파한다. 인간관계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총체적인 인간과 관련을 맺기보다는 그 사람의 한 부분에만 관련을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인간들도 빨리 스쳐가기 때문이다. 그는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이해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이상스러운 일이라며 인간관계의 단편화(파편화와 유사한 의미인 듯)와 자유는 병행한다고 주장한다(앨빈 토플러 著 장을병 譯, [미래의 충격](1986), 범우사, 88~108쪽 참조).


토플러는 개인의 사회적 활동을 “이제는 만나지도 않고 이해도 달리하는 친구들 대신에, 새로운 친구들을 탐색하는 사회적 발견의 냉혹한 과정”이라고 표한다. 효용가치가 없는 옛친구들은 빨리 버리거나 잊고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만한 새 친구를 찾아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유한책임을 바탕으로 한 계약관계가 자유롭고 경제적(?)이라는 사고에서 기인한다. 그의 탁견에 일정부분 동감을 하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풋풋함만큼이나 세월의 무게가 가져다 주는 푸근함을 좋아하는 나는 앞으로도 “貧賤之交 不可忘(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를 잊어서는 안된다, [후한서(後漢書)] 송홍전(宋弘傳)의 고사)”을 주문처럼 외울 것 같다.


관계맺음의 길고 짧음에 대한 논의를 넘어 내가 맺는 관계가 논어에 나오는 久而敬之(구이경지)와 같았으면 좋겠다.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라고 해석하면 친해지더라도 존경심을 잃지 않고 범속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 되고, “오래 사귈수록 공경하게 된다”라고 해석하면 오래 사귀어도 그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기보다는 강점이 더욱 커진다는 뜻이 된다. 어느 것으로 해석하든 관계맺음의 이상향을 잘 나타내준 말이 아닐까 싶다.


久而敬之하고 싶다면 나와 다른 의견을 기꺼이 긍정적으로 검토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단지 자신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섭섭해하고 토라지는 것은 제 그릇의 작음을 선전할 뿐이다. 자신의 의견이 소중한 만큼 남의 의견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의 교제는 생선비린내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란 녀석을 인간적으로 끔찍이 좋아하면서도 생각이 다를 때 함께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자기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이를 적대시하기보다는 서로간의 차이에 감사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칠 마음이 있는 사람과는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꿔도 좋을 것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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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은 실로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을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경복궁 흥례문을 헐고 광화문마저 철거하기로 하였으나 이를 비판한 일본문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 등의 도움으로 1926년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에 옮겨지게 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광화문은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문루가 소실되고 석축만 남게 된다. 1968년 박정희가 복원을 했을 때는 문루를 콘크리트로 처발라버렸다. 이렇게 광화문에는 외세침탈과 동족상잔, 개발독재의 그늘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968년 복원 때 석축 자재들은 조각난 채 콘크리트 자재와 뒤섞이게 되고, 목조 건축물을 문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 단청을 입혀 완전히 바꿔 버렸다. 재정 상황 등으로 인해 비싼 목재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콘크리트를 사용했다는 항변을 인정한다고 해도 너무나 어이없는 복원이다. 영구보존이라는 명분이 무색할 정도로 고유의 옛 정취는 사라져버렸다. 이 때문에 광화문을 원래의 목조 건물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이미 문이 앉아 있는 방향도 틀어져 있고 위치도 뒤로 물러나 있으며, 서십자각 없이 동십자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등 전체적으로 흐트러진 모습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높다.


그런데 박정희의 친필인 현재의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겠다는 문화재청의 발표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박정희가 쓴 현판을 그대로 두자, 목조 건물로 복원할 때까지는 놔두자, 바꾸더라도 한글 현판을 쓰자, 옛 모습을 살려 한자 현판을 써야 한다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현판에 대한 폭넓은 의견 수렴이 있어야겠지만 현판 교체는 적절하다고 본다. 독재자의 글씨를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에 떡 하니 걸어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목조 건물로 복원할 때까지 놔두자는 것은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 실현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 사실 박정희가 엉망으로 복원해놔서 제대로 복원하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 현판 교체까지 정색을 하고 반대할 이유는 없다.


어두웠던 과거의 진실을 밝혀내자는 법안 통과에도 게거품 물던 이들이 이제는 현판 하나에도 무슨 미련이 남아 난리법석을 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과오를 반성하고 오늘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인데도,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더러운 과거만을 옹호하는 이들이 현판 하나까지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들 눈에는 최근 공개된 한일협정 관련 문서들에서 일제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사실상 포기하고 경제발전이랍시고 가로챈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경복궁의 각종 전각들이 일제의 손에 어떻게 훼손되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독립운동의 성지인 탑골공원 정문에 박정희가 쓴 ‘삼일문’ 현판이 어색했듯이 광화문 현판도 박정희의 글씨가 있을 곳이 아니다.


철저한 파괴로 인해 본래의 10~15%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경복궁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보수, 복원이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 복원은 정치논리가 아니라 문화적 안목에서 이뤄져야 한다. 광화문 현판 교체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논의해서 판단할 문제다. 우선은 문화재 전문가들의 역할을 존중하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광화문 현판만 부라리지 말고 차분히 경복궁을 들어가서 우리 선조들의 문화의 향기를 맡고, 일제의 파괴 흔적을 곱씹어보자. 그리고 덧붙여 턱없이 부족한 문화재 관련 예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곳곳에 방치된 우리의 문화 유산을 도두보자. 박정희 일개인에 대한 집착(?)은 스르르 녹아 없어졌음을 발견할 것이다.


한편 현판 교체 시에 한자를 쓸 것인지, 한글을 쓸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궁궐의 전각이나 사찰 등의 문화유산을 복원할 때 한자를 쓰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나 유독 광화문은 선뜻 망설여지는 것은 그만큼 광화문이 우리 문화유산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방증한다. 외국인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보니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한글 현판을 고집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한자 현판을 절대시할 필요도 없다. 한글 현판이 과거의 원형과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한자 현판이 한글을 경시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하지만 적어도 광화문만큼은 한글 현판을 썼으면 한다는 명분도 만만치 않다. 세종로 쪽에는 한글 현판을 달고 경복궁 안쪽에다가는 한자 현판을 다는 등의 대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만하며 보다 많은 접점을 찾아야 한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경복궁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유산들을 보수, 복원하는데 아낌없는 투자가 있어야 한다. 설령 옛날의 그 솜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보수하고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이 마저 게을리 한다면 볼 것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이제 문화유산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깨닫고 전국민적인 사랑이 절실하다. 일본은 허구한 날 자신의 만행을 가리기 바쁘고, 중국은 호시탐탐 고구려사를 넘보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역사와 문화는 우리가 챙겨야 한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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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선생의 국궁진췌

문화 2004. 10. 16. 01:03 |
凡事如是 難可逆見 臣鞠躬盡瘁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覩也.
범사여시 난가역견 신국궁진췌 사이후이 지어성패이둔 비신지명소능역도야

모든 일이 이와 같이 미리 헤아려 살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애쓸 뿐입니다. 일을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미리 내다보는데 밝지 못합니다.



유명한 공명선생의 후출사표(後出師表)의 마지막 구절이다. 촉한이 위나라에 비해 영토, 인구, 군사력 모든 측면에서 열세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후출사표에서 “지금 백성들이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지만 할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구절(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북벌을 거듭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제갈공명의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별 볼일 없는 나라였던 촉한을 위해 공명선생은 국궁진췌(鞠躬盡瘁)하겠다고 다짐한다. 국궁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힌다는 뜻이며, 진췌는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한다는 뜻이다. 결국 국궁진췌는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황제 유선을 향한 그의 변함 없는 충절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준다.


인민과 동고동락했다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죽었을 때 중국인들은 국궁진력이라는 글을 바쳤다고 한다. 인민들을 위해 전심전력했던 그의 국궁진췌한 삶을 애도한 것이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급회장 선거 정견 발표 때 나는 국궁진췌의 심정으로 반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자못 비장하게 읊조렸다.^^; 자유주의자에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는 내가 이렇게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국궁진췌에 열광한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나는 불확실성에 기꺼이 투자했던 그의 모습에서 감동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삼국지를 펴들 때마다 당대의 귀재 공명선생이 힘들고 어려운 길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에서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실력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상을 위해 한결같이 열정을 쏟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링컨이 “한 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험해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주어보라”고 말했듯이, 권력의 단맛에 취하지 않기란 참 힘든데도 그 유혹을 뿌리친 공명선생에게서 서늘함을 느꼈다. 한 사람에게 느낀 어지러움, 아름다움, 서늘함이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공명선생은 일의 성패와 유불리는 따지지 않고 묵묵히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부지런히 대보고 따져서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국궁진췌하기보다는 안전을 위해 분산투자(포트폴리오)에 더 열중할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의 효용극대화를 위해 살다가도 가끔은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최적선택(optimal choice)을 포기할 줄도 알고, 손해보면서 남 좋은 일을 잠시라도 해보는 것을 유쾌한 경험으로 추억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공명선생을 끔찍이도 흠모하지만 내가 꿈꾸는 세상은 굳이 국궁진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진보하는 사회, 착한 사람들의 손해를 먹고 지탱되는 사회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제 몫 챙기기로도 꾸려지는 사회가 그것이다. 여기서 제 몫 챙기기란 남의 자유와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내 소신껏 살면서 내 이익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상도덕을 지켜가며 내 것을 쟁취하는 것이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인 ‘보통선(普通善)’의 세상이다.


어릴적 보통선이라는 개념을 꺼내면서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좋아했으나 경제학에서 말하는 파레토 최적(Pareto optimum)과 매우 유사함을 발견했다. 결국 나의 뜬구름 잡는 소리는 참신하지도 못하고 그저 메마른 사회가 착한 사람들의 눈물로 적셔지는 것이 못내 불편한 ‘보통 사람’의 투정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전통적 의미의 적극적 선량함에 의존하기보다는 소극적 의미의 보통선이 큰 힘을 발휘하는 사회가 더욱 합리적이라는 문제의식은 유효하다.


내가 궁극적으로 국궁진췌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어쩔 수 없이 국궁진췌가 필요한 때가 있다. 사실 모든 시대는 보기에 따라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공명선생도 위나라가 떡 하니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시문이나 읊으며 한담을 즐기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핑계의 과도기에서 내게 국궁진췌의 과제가 주어진다면 반가운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질 것이다. 특히나 자유의 적들과는 국궁진췌해서 싸우는 것이 내 나름대로 공명선생을 따르는 일일 것이다. - [憂弱]


추신 - 고등학교 때 공명선생에게 바쳤던 헌사를 옮긴다.^^;

[공명선생을 좇다]
- 대륙의 구석에서 채 피지 못한 웅지여...

혹자는 선생의 공을 논하고
혹자는 선생의 과를 논할 제
나는 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을 본다.

신선의 꿈은 접어두고
세진에 뒤덮이고
잡인과 어울리며
피를 토해내셨지만
선생의 터럭 좇지 못함을 탄식하니.

질퍽한 형극의 길을
기꺼이 필마단기(匹馬單騎)함은
썩어빠진 서생의 가련한 업이로다!
<200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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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근처의 창덕궁(昌德宮)으로 향했다. 창덕궁은 태종이 창건한 궁궐로 경복궁에 재난이 생기거나 전염병이 돌 때 왕의 대피처로 삼거나 왕이 무료함을 피해 잠시 건너 가 쉬는 이궁(離宮)이다.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한 이래로 역대 임금들이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머물렀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먼저 중건되자 광해왕 이후로 역대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경복궁 중건에 힘을 기울이지 않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으로서 경복궁을 능가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볼만한 고궁이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976년까지는 자유관람제도를 실시하였으나 관람객들이 문화재와 원림을 훼손하는 경우 빈번하여 3년 간의 보수공사 끝에 1979년부터 상당 면적의 제한 구역을 설정하고 안내에 의한 시간제 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그래서 서울에 살면서도 창덕궁에 가보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다. 처음에는 불평이 나오지만 창덕궁을 한 번 둘러보고 나면 왜 보호에 안간힘을 쓰는지가 수긍이 된다. 일반관람코스는 안내원을 따라 1시간 15분 정도 둘러보는 것이다 보니 안내원 따라가기 바빠서 궁궐 구석구석을 음미할 수도 없고, 사진 몇 장 찍기도 바쁘다. 하지만 그 덕에 한적하게 즐길 수 있다. 날씨가 안 좋은 탓도 있었지만 익구와 청원을 포함해 8명의 관람객이 한 조가 되어 창덕궁을 둘러보았으니 말이다.


입장 시간을 기다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들어서는 것부터 관람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왕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돈화란 중용에 나오는 표현으로 大德敦化(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에서 따왔다. 돈화문을 지나면 금천교(錦川橋)가 나오는데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600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다리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금천교 그림을 가지고 풍경화를 그렸던 기억이 나서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금천교를 좀 더 음미하고 싶었으나 이미 안내원은 인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어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에 도착했는데 창덕궁 내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한 국보이다. 창경궁 명정전보다는 규모도 크고 단청도 선명하며, 내부에는 전등이 설치되어 있는 등 호화로움이 더욱 돋보였다. 월대에는 청동 드므를 발견할 수 있는데 드므란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로서 여기다 물을 담아 두어 화마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고궁 건물들을 보면 이 드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자금성에도 이 드므 비슷한 방화수조가 있는데 우리처럼 작은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키 만큼 거대한 것이라 상징적 의미를 넘어 실용적으로 화재를 진압하는 데도 쓰였을 것 같다.^^; 목재 건물은 불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런 장치를 둔 것이지만 우리네 궁궐은 허구한 날 불에 타고 다시 짓기를 반복해야 했다.


인정전을 나서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을 지나치게 되었다.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그저 옆으로 지나가기만 했는데도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현존하는 궁궐 전각 중에서 유일한 푸른색의 유리기와였다. 맑은 날에 청기와가 햇살에 비쳐 눈부시게 빛나는 광경을 상상하니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자금성의 황금빛 기와보다 윤기 나는 파란 기와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청기와는 회색조의 일반 기와보다 세 배 정도 비싸다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몇몇 사찰에 청기와를 썼고, 궁궐 건물로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만이 청기와를 이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근정전 만큼은 청기와를 덮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앞으로 복원하는 건물 중에서 청기와를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정전 오른쪽으로 내전의 중심이 되는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이 있었다. 이 곳에는 그나마 내부를 공개해서 서양식 가구들도 볼 수 있었다. 왕의 침전이 딸린 편전인 희정당과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두 건물 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 새로 지은 것이다. 대대적으로 중건된 이후 법궁의 지위를 회복한 경복궁에 대한 훼손의 일환인 셈이다.


드디어 창덕궁 후원(後苑)으로 향했는데, 후원은 궁궐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원(北苑), 왕족을 비롯한 제한된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다하여 금원(禁苑)이라 불리기도 했다. 흔히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비원이라는 명칭이 창덕궁까지 통칭하는 것으로 잘못 쓰여지기도 한다. 이는 창덕궁을 폄하하는 말로써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므로 삼가야 한다. 비원은 원래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기관의 이름 비원(秘院)에서 시작되었으나 1904년부터 秘院을 秘苑으로도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왜놈들이 갖다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얽혀 알쏭달쏭하다. 창덕궁 홈페이지를 보면 후원은 뒤뜰이라는 뜻으로 일반민가에도 적용되는 만큼 왕궁의 원유를 후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아 후원의 명칭에 대해 여러모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조만간에 얼른 결판 내서 명칭에 대한 혼란을 줄여야 할 것이다.


후원에 들어서자마자 그친 듯 했던 비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우산을 펴들어야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부용정(芙蓉亭)과 부용지다. 부용지는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운치있게 있어 경복궁 향원지와 마찬가지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표상하고 있다. 부용지에 물을 공급하는 이무기 조각이 쉴새없이 물을 내뿜고 있었다. 부용지 옆에 있는 부용정도 겹겹이 이루어진 처마가 화려했다.  


부용지 옆으로 자리한 주합루(宙合樓)는 아래층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이 있고, 위층은 열람실로서 이곳에서 부용지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주합루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이 굳게 닫혀 있으니 아쉽게 돌아서야 했다. 정조의 친필인 宙合樓 편액도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곳에서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적서의 구별 없이 탕평정책을 수행하며 활동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정조의 근위세력 양성소였던 규장각은 점차 확대되어 내규장각과 외규장각으로 분리되게 된다. 정조는 영구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들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게 약탈 당한 후 아직까지도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놓고 지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천만다행으로 규장각 소장 도서는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전되었으나,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현재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부용지 동쪽의 영화당은 영화당(暎花堂)은 임금이 신하들과 꽃구경을 하고 시를 지으며 노닐덧 곳이었으나 정조 때부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 바뀌어 임금이 친히 참석한 가운데 과거시험이 치러졌다고 한다. 과거 시험의 응시자들은 영화당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지금은 담으로 막혀 있고 화장실 등의 휴게시설만이 있을 뿐이다. 영화당에서 큰 글씨로 과거의 제목을 내걸면, 아래쪽 춘당대에 앉아 있는 응시자들이 머리를 쥐어짜내서 멋진 글을 지어내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정리해보면 영화당에서 시험 보고, 합격자들은 부용정에서 축하해주고, 규장각에서 책 읽히고 공부시키는 원스탑(one-stop) 센터인 셈이다.^^;


산책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통돌을 갈아서 ∩자 모양으로 만든 불로문(不老門)을 지나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불로문을 지난 왼쪽에는 기오헌(奇傲軒) 의두각(倚斗閣)이 나무들에 가려져서 어렴풋이 보였다. 기오헌과 의두각은 효명세자가 지은 건물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로서 효명세자가 독서를 즐기며 나라 일을 생각하던 곳이다. 효명세자는 1827년 부왕인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30년에 2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효명세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익종(翼宗)에 추존되었기 때문이다. 익구의 翼자인 만큼 웬지 모를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익종은 훗날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어 문조라고도 불리며 신위가 종묘 정전에 모셔져 있다.


조금 더 거닐다 보면 연경당(演慶堂)이 보인다. 1828년에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민가형식의 집이다.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고 사대부 가옥을 본뜬 연경당에 가끔 들렀다고 한다. 방문할 때는 옷차림에서부터 모든 생활 양식을 사대부의 제도에 따랐다고 한다. 최고의 목수가 정성을 다해 지은 집으로, 당시 양반 가옥을 지을 때 모범이 되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샛담을 쌓아 경계를 삼고 일각문 하나를 내어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에 손님이 오시면 이 일각문으로 하녀가 나와서 신발 개수를 세어서 음식 준비를 얼마나 할지를 가늠했다는 안내원의 설명으 재미나다. 남녀칠세부동석은 이제 확실히 옛말이 되었음이리라. 서고인 선향재(善香齋)와 선향재 뒤 편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농수정(濃水亭)도 저마다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연경당을 지나 산책로를 따라가니 주합루 뒤 편에 있는 희우정(喜雨亭)과 서향각(書香閣)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보를 하며 내려오는 길에 내의원(內醫院)이 보였다. 본래는 세자가 학자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성정각이었으나 1910년대부터 왕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고 약을 조제하던 내의원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행선지로 어차고(御車庫)를 들렀다. 과거에는 빈청(賓廳)이라 하여 정승들이 편전에 들기 전에 대기하며 국사를 의논하던 장소였으나 1910년대 이후부터 어차고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순종과 황후가 사용하던 1918년 캐딜락, 1914년 다임러와 평교자, 초헌 등의 조선 시대의 교통수단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주정소인데, 임금이 궁밖에 행차할 때 부품을 분해하여 싣고 가다가 쉬실 때 사용하는 것으로 간이 휴게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재미난 것은 이 것을 72조각으로 해체시켜 나누어 가지고 가다가 휴식시간에 다시 조립을 한다는 점이다. 진열창 너머로는 자세히 볼 수 없으니 잘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로써 창덕궁 관람을 마치고 금호문(金虎門)을 나섰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즐기려는 한국의 정원 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창덕궁은 그나마 많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절반 이상이 파괴된 것이라고 하니 국권이 약할 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얼마나 침탈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경복궁의 경우는 고작 10분 1정도만 남아 있다고 하니 앞으로 지속적인 복원, 보수 공사가 시급하다.


2004년 5월 1일부터 기존의 창덕궁 일반관람코스에서 후원의 일부 구역인 관람정, 존덕정, 옥류천 지역을 추가로 개방하는 특별관람코스가 만들어졌다. 옥류천 지역은 1976년 출입이 금지된 이래 28년 만에 개방되는 곳인데 관람 횟수와 인원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관람하기가 녹록지는 않다. 창덕궁 관람은 안내원 따라 가기 바쁘기 때문에 놓치는 부분이 많은데 익구는 조만간에 특별관람코스로 관람해서 못보고 놓친 부분도 확인하고, 새로 개방된 비경도 감상할 계획이다.


창덕궁을 나서는 길에 때마침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돈화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궁궐문을 개폐, 경비, 순찰하는 업무를 수행한 수문군이 교대하는 의식으로 전통 궁중문화의 재현행사로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어, 영어에 이어 일본어 안내를 해주는데 그만큼 일본 관광객이 많다는 뜻이다. 조선 궁궐들을 이토록 파괴한 것이 누구인데 우리 나라 궁궐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참 많았다. 복원, 보수 공사도 서두르면서 지금은 턱없이 낮게 책정된 우리의 문화 유산 관람료도 조금은 높여서 재정을 늘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본디 여행을 좋아하지 하지 않는 익구지만 역사 기행 형식은 앞으로도 종종 다니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창덕궁 특별관람코스와 더불어 덕수궁, 원구단, 아관(구러시아공사관) 코스와 남산공원 내 한옥마을, 와룡묘 코스 같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짬을 내서 둘러볼 예정이다. 늘 바쁘게 사는 우리들이지만 그 정도 여유는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낼 수 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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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는 10월 1일 청원이와 함께 종묘, 창경궁, 창덕궁을 다녀왔다. 역사학도인 청원과 고궁 마니아인 익구가 어렵사리 일정을 맞춰서 오랜만에 서울 시내 나들이를 떠났다. 돌아다니는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였지만 중학생 때 가본 이후 무척 오랜만에 둘러본 고궁 나들이는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좋은 휴식이 되었다는 평가다.


처음으로 간 종묘(宗廟)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사당이기 때문에 정숙 표지판도 보이고, 무척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다. 본래 종묘에는 화려한 꽃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종묘가 너무 침침하다며 꽃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그루의 꽃나무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나무에 대해 문외한이나 나무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공민왕신당이다. 망묘루 동쪽에 별당으로 고려 31대왕인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된 곳이다. 정식 명칭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 奉安支堂)’으로서 조선왕조의 신위를 모신 곳에 고려의 왕이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특별한 문헌기록은 없다고 하는데 왕조 교체기에 고려에 아직 애정이 남은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처사였을 것 같다고 제멋대로 추정해봤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있다고 하는데 굳게 닫혀 있어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다음으로 종묘 정전(正殿)으로 향했다. 여느 고궁과는 달리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제사를 위한 건물임을 알 수가 있다. 종묘 정전은 남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月臺, 대궐의 전각 앞에 놓인 섬돌)가 넓게 펼쳐 있다. 이 공간은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인데, 묘정 월대는 단(壇)의 일종으로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이 다르게 하늘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다. 검은 돌로 되어 있는 신로는 신만이 지나가는 길이라고 했지만 기분 내며 터벅터벅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종묘 정전은 조선왕조가 계속 되어 모실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옆으로 증축하여 오늘날과 같이 늘어졌다는 점에서 마치 살아있는 건물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지금은 모든 재실이 꽉 차있는 상태라고 한다. 조선왕조가 계속되었다면 정전이 옆으로 더 길어졌을지도 모르고, 지금도 증축을 하고 있어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우스웠다.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때는 재실이 5칸 있었으니 정종이 승하하자 재실이 모자라게 되었다. 결국 사당을 하나 더 짓기로 하고 정전 옆에 영녕전을 세우게 된다.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위패가 영녕전 중앙에 자리한 4칸의 재실을 차지하고 생전 별로 큰 업적이 없거나 평가가 좋지 못한 왕들도 아예 영녕전에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영녕전으로 물러나야 할 시기가 오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중종의 신주를 모시면 세조의 위패가 영녕전으로 가야하는데 명종은 자신의 직계조상인 세조의 위패를 정전에서 빼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결국 정전을 4칸 증축하고 11칸으로 만들었고, ‘不遷之位’라고 하여 업적이 훌륭한 왕인 경우 4대조까지 모신다는 계산에 넣지 않고 위패를 영원히 모시는 편법(?)을 쓰기로 한다(우리궁궐지킴이 누리집(http://www.palace.or.kr) 에서 이상해 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의 [종묘를 다시 본다] 참조했음). 세조에 의해 쫓겨나 죽임을 당했던 단종의 경우 숙종 때 명예회복이 되어 영녕전에 간신히 모셔져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세조를 위한 억지가 영 마뜩지 않다. 또 이렇게 세조를 위해 애썼던 명종 자신은 영녕전에 모셔 있다는 것도 우습다.


그 후 두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19칸으로 늘어났고, 정전을 증축하면서 자연히 영녕전도 늘어났다. 정전과 영녕전에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추존된 왕들도 많이 모셔져있는데 반해 연산군, 광해군은 정전, 영녕전 어디에도 모시지 않았다. 새롭게 평가받는 광해왕(개인적으로 광해왕으로 높여 부르고 있음)의 경우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조선 시대 궁궐의 상당수는 광해왕 시절에 중건된 것이 많다. 지금의 궁궐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광해왕의 공이 큰데 아쉽게도 정전과 영녕전이 지금은 꽉차 있어서 모시고 싶어도 모실 길이 없다.^^;


정전 바로 옆에 있는 종묘 영녕전(永寧殿)도 정전과 거의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으나 규모 면에서 작다. 하지만 무지막지하게 길어서 사진기에 딱 잡히지도 않는 정전보다는 인간적이다. 종묘에는 사실 정전과 영녕전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건축물이 없기 때문에 대강 생략하고 창경궁으로 향했다. 창경궁과 종묘는 서로 통해있어 입장료를 내면 둘 다 돌아볼 수 있다.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육교를 건너는 마음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은 일제가 이 곳의 지맥을 끊어 동서로 길을 뚫었기 때문이다. 도로 조성을 빌미로 본디 연결되어 있던 창경궁과 종묘의 지맥을 훼손한 일제의 만행이 새삼 떠올랐다.


창경궁(昌慶宮)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탔으나 1616년(광해왕 8년)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여 완공하였다. 이 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재건되어 법궁(法宮, 왕이 머무는 공식 궁궐들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는 궁궐)이 됨에 따라 창경궁도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하지만 조선 말기부터 왜놈(여기서부턴 ‘일제’라는 말보다는 ‘왜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만행이 가득하다)들이 엄청난 훼손을 했다. 꽤 오랜 기간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불리던 것을 1983년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이관시키고면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고 벚꽃나무 등도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으로 교체되는 등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육교를 통해 들어간 창경궁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함인정(涵仁亭)이다. 함인정은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정자로 영조가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우선 정전인 명정전부터 둘러보자는 생각에 외전과 내전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빈양문(賓陽門)을 지나 명정전(明政殿)으로 향했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이 중층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법궁보다 격이 낮은 이궁(離宮)이기 때문에 덕수궁 중화전처럼 단층으로 되어 있어 아담한 느낌을 준다. 광해왕 때 중건된 것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조선 시대 궁궐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얼마전 다녀온 중국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과 비교했을 때 너무 초라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명정전을 지나 숭문당(崇文堂)을 거쳐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을 향했다.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행각이다. ᄆ자형의 건물로 방에는 다기들이 놓여 있었다. 마루에 슬리퍼가 놓여져 있어 올라가 볼 수 있는 것 같아서 거닐어 보다가 문득 다기가 놓인 방석 위에 앉아 사진을 찍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결국 방으로 슬쩍 들어가 차를 마시는 자세로 사진 한 장을 간단히 찍고 나왔다.^^; 고궁 전각 중에 이렇게 들어가 볼 수도 있고, 방안에 이것저것 전시도 해놓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전 건물들인 통명전(通明殿),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양화당(養和堂)은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라 대강 훑어보고 창경궁 관람을 마쳤다. 조금 올라가면 춘당지(春塘池)와 식물원이 있기는 하지만 권농장(勸農場)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크게 연못을 만든 춘당지나 아직 철거하지 못하고 흉물스럽게 있는 식물원에 정이 가지 않아서 생략하기로 했다. 창경궁은 건물들이 띄엄띄엄 있고 너른 공터들이 많은데 본디 전각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던 것을 왜놈들이 이래저래 박살내고 심지어 동물원으로 쓰기까지 한 것을 정리하고 나니 지금의 공터가 된 것이다.


기가 막힌 일화가 하나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 일자를 고르고 있던 시기에 창경궁에 서양식의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었고, 전각의 내부 수리를 통해 진열 공간을 꾸며 도굴한 우리 유물들을 전시하였다고 한다. 이토가 고종을 안내해 창경궁 박물관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고종이 푸르고 아름다운 그릇들을 보고 이게 어느 나라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토가 “이것은 귀국의 고려시대의 도자기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고종이 “우리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다. 임금인 나도 모르는데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토는 차마 왕릉도굴품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대강 얼버무려 넘겼다고 한다. 고려청자 전문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총 맞아 잘 죽었다(이 일화는 우리궁궐지킴이 누리집(http://www.palace.or.kr)에서 이구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의 [일제하 문화유산 수난사] 참조했음).


창경궁을 나서기 위해 홍화문(弘化門)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옥천교(玉川橋)는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돌아서 창경궁을 나갔다. 중국 자금성이나 원명원 등도 보수 공사가 한창이던데 우리나라 고궁을 비롯한 문화유적들도 보수, 복원 공사를 끊임없이 해서 옛 모습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경제 침체 속에 힘 없는 문화재청이 예산을 더 타서 쓸 여력이 있을지는 주장하는 나조차 믿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수하고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명나라 시대부터 원형을 비교적 많이 유지해 온 자금성도 꾸준히 보수, 복원하고 있는데 이미 엄청나게 훼손된 우리나라의 궁궐은 더 많은 시일과 경비가 소요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궁궐 답사기 2부 창덕궁 편으로 이어집니다~^^)
Posted by 익구
:

(수강정정해서 들어간 행정학개론 강의에서 당장 이틀 뒤까지 [유토피아]에 대한 과제물을 제출해야 하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이상하게 과제가 너무 하기 싫어서 계속 잠만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책도 대충 읽고, 그간 썼던 글조각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대강 만들어서 냈다. 했던 이야기 또 하는 것이 자꾸 반복되어 내 자신이 태만해지지 않기를 경계하지만 가끔은 이런 호사를 부리는 재미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1. [유토피아] 내용 고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는 산업자본주의가 싹트던 초기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쓰였다. 이 책은 저자가 이상향 ‘유토피아’를 방문한 라파엘에게서 들은 유토피아의 제도와 풍속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현재의 유럽 사회는 흉년이 든 해의 연말에 부잣집 곡간을 낱낱이 뒤지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생명을 잃는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곡식을 찾아낼 수 있으면서도 참혹한 결과가 피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이 책 전반에 흐른다. 귀족 혹은 자본가들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유토피아를 통한 대안 모색을 시도한다.

  유토피아에서는 여자들, 성직자/수도자들, 귀족/지주들과 그들의 가복들, 거지들 등을 모두 노동에 종사시킨다. 모든 인간이 노동을 함으로써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을 해도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게 만들며, 나머지 시간은 교육을 더 받는 데 여가를 사용하는 등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든 간에 그는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올 수 있는데, 모든 것이 공공소유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 창고가 가득 차 있는 한, 결핍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공정한 분배를 받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가 있을 수 없으며,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이 모두 부자인 셈이다.

  유토피아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가 사유재산제의 폐지인데, 사유재산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는 사고가 바탕에 있다. 즉, 화폐가 없는 경제, 모든 것을 공유하고, 꼭 필요한 것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함으로써 불필요한 노동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통해 모든 시민의 경제적인 평등과 계급없는 사회가 이룩되고, 인간다운 활동을 위한 자유 시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해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다. 다소 단순하고 허황된 감이 있지만 유토피아는 평등주의적 이상에 기대어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2. 유토피아의 한계
 
  지적 쾌락을 추구하는 풍족한 유토피아 사회의 주된 특징은 획일성이다. 시민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사는데, 2년에 옷 한 벌 씩 받는다. 또한 결혼과 가정의 문제도 국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데, 부부가 이혼을 원하는 경우에도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엄격한 통제사회의 단면은 공동 식사에 대한 묘사에서 엿볼 수 있는데 각 가정에서의 식사는 사실상 금지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은 마을회관 같은 공공 장소에서 공동 식사를 하게 되어 있다. 매일 마을회관에서 도덕적인 설교를 듣고, 노인들의 평가를 받아가며 식사를 해야한다. 한편, 여행을 할 때 일일이 허가증을 받아야 할 정도로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또한 사회를 문란하게 하는 사상과 사람들은 도시에서 영원히 추방되었고 비합법적인 집회도 엄격히 금지된다. 이 대목에서 ‘유토피아 전체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라파엘은 유토피아인들은 야심, 정치적 분쟁 등 모든 불상사의 근원을 제거해 버렸다고 찬사를 늘어놓지만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화폐를 없애고, 도덕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완전히 제거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 실현수단인 엄격한 통제 메커니즘이 24시간 돌아가야지 겨우 실행되는 초라한 몰골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의 성숙을 위한답시고 외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제약하는 것은 또 다른 극단주의적 폭력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나 마르크시즘 역사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룩한 증오의 역사다. 그들이 내건 사랑이 그리 크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실천한 증오의 크기가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나 마르크시즘을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그려온 유토피아는 먼 미래나 과거, 또는 외딴 섬에 설정돼 있다. 그들이 그리는 유토피아가 지금 이곳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는 사랑, 우애는 무책임하게 클 수 있었고, 그 반동으로 그들이 실천한 증오도 덩달아 그리 클 수 있었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2002), 개마고원 刊, 233~234쪽

  유토피아 사회 또한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일이 수행된다. 그 사랑이 크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게 감시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절대선의 경지에서의 이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유토피아 시민들을 안심하게 만들고, 반대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유토피아 사회를 지탱하는 힘인 것이다. 유토피아는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시켜줄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복은 집단의 위계질서 앞에 순응하고, 전체주의적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사적 영역을 말소시키고 거대한 집단 속에서만 안온함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유토피아는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보여주는 디스토피아(distopia)와 종이 한 장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토피아의 열정이 지나치면 개인의 공간을 소멸 당하고, 순응 속에서만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결과 순수에 대한 강박과 조급증 때문에 자신의 네모 반듯한 기준에 들어 맞게 하기 위해 여분을 덜어내고, 부족함을 억지로 채우는 무리수를 두는 경우를 역사상 많이 보아 왔다. 십자군 전쟁도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성지를 수복하자는 거룩한 사명을 띠고 시작되었고, 마오쩌둥의 문화혁명도 혁명사상 고취를 통해 인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의 약속했으며,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또한 이라크에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라고 강변하고 있다.


3. 점진적 사회공학의 추구
  
  유토피아 논의와 관련하여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칼 포퍼는 유토피아니즘과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점진적 사회공학을 주창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할 생각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즉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식의 목적의 왕국인 셈이다. 기쁨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더는 세상은 개개인을 조정하여 세상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는 ‘치명적 자만’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추상적인 이상에 대한 합의는 참 어렵다. 특히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절대선과 절대악이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다. 미국의 네오콘같은 사명감에 불타는 무식쟁이들만 있다면야 옥석을 가리기 쉽겠지만, 대개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맞서게 마련이다. 가령 신자유주의 논쟁만 해도 WTO는 전세계 민중을 착취하는 미국식 세계화에 불과하다는 입장과 WTO가 실현할 자유무역과 다자통상체제로 말미암은 경제적 다극화가 미국화로의 경도를 막고 우리가 살 길이라는 입장과의 간극은 너무나 벌어져 있다. 신자유주의는 악의 화신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처럼 대립하는 사회 개혁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숙고된 균형감각이 절실하다.

  이처럼 이 무지막지한 차이의 세계를 하나의 구호로 묶는 혁명의 단순명료함은 쉽사리 공감하기 힘들다. 또한 설혹 어찌어찌 해서 꾸려진 유토피아가 개개인의 효용을 극대화시켜 줄지도 매우 의심스럽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토피아라는 미명하에 엄청난 비용이 지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악에 대한 인식이 같다면 이를 오늘의 시점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는 너무 매끄럽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수단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매끈함을 핑계로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날카로운 칼날을 자신 있게 휘두르기 보다는 무딘 칼날도 조심해서 쓰는 것이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점진적 사회공학의 요체이다.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의 시대에 사는 것은 확실히 정신없고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꽃으로 통일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4. 진정한 유토피아란?

  유토피아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열망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한 노력과 욕망이 인류를 진보시킨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아나톨 프랑스가 “다른 시대의 유토피아인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속의 비참하고 발가벗은 상태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유토피아 사상은 여전히 살맛나는 세상을 향한 의지의 표상이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강력한 현실 타파의 욕구와 이상에 대한 철저한 수호라는 특징 때문에 전체주의와 손을 잡기 십상이다. 유토피아로 치장한 전체주의는 더 이상 등장해서는 안되는 비극의 씨앗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동질성으로 무장하기보다는 다양성으로 흩어지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특히 사회적, 문화적 소수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짜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일 것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낳고, 이 차이에는 여러 종류의 불평등이 포함된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라면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을 막고, 불평등이 계속 고착화되는 것에도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상호 존중이라는 가치를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위기의 20년]에서 “건전한 정치이론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와 현실의 양 요소 위에 입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E.H 카의 지적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개인의 자유와 숙고된 균형감각 위에 점진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해 나갈 때 유토피아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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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서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이야기 중의 하나는 맹상군 이야기다. 내 초등학교 일기장에도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맹상군의 정신을 본받아야겠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언젠가 맹상군이 파면되자 삼천명에 달했다는 그의 식객들이 모조리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맹상군이 복직되자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식객 풍환은 다시 그 식객들을 모으려고 했다.


맹상군은 만일 뻔뻔스럽게 찾아오는 자가 있다면 그 낯짝에 침을 뱉어주고 싶다며 버럭 화를 냈지만 풍환은 차분하게 말했다. 세상 이치에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That's the way the ball bounces!(그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이다) 결국 세상 인심은 원래 그 모양 그 꼴이라는 것이다. 부귀한 몸이 되면 따르는 자가 많으며 가난하고 천한 몸이 되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 뿐이라며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시장에 가셔서 보십시오. 아침에는 서로 앞을 다투어 먼저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해가 진 뒤에는 시장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아침에 시장을 좋아하다가 저녁에는 미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저녁 시장에 원하는 물건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식객들이 귀공의 파면을 보고 떠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아무쪼록 그 전과 다름없이 대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어떤 일을 맡아서 하다 보면 혼자 덩그러니 남아서 무진 애를 쓴다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지나가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별 것도 아닌 것이 세상사의 허망함이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아프고 화나고 힘들고, 그 순간을 함께 나눠줄 사람이 정말 절실하게 마련이다. 그 순간은 그저 지나보내고서 나중에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 이들을 보면 아무리 세상 이치가 그렇다고 해도 얄밉고 섭섭한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나는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도덕경 2장의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나 9장의 功遂身退 天之道(공수신퇴 천지도)란 구절을 떠올린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졌으면 몸은 물러나는 것, 하늘의 길이다”라는 구절을 자주 읊조리는 것은 그만큼 내가 일구어놓는 것에, 나와 인연이 닿은 것에 애착 혹은 집착이 강하다는 것의 방증이다. 내가 어쩌다가 좋은 일 하나 해서 남들이 그 덕분에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본다면 괜히 침 흘리지 말기를, 하나둘 나란 녀석을 모른 체 해도 잊혀지는 것에 너무 몸서리치지 말기를 다짐해왔고 비교적 잘 준수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학생회 잡일을 하면서 반일꾼들이 일은 일대로 하면서 욕은 욕대로 먹는다며 하소연할 때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여러분들보다 훨씬 더 구박을 많이 받는 나도 이렇게 싱글벙글 웃으며 지내고 있으니 조금 여유롭게 생각하자고 독려를 하지만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다. 사실 귀찮은 일, 궂은 일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일을 추진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늘 딜레마인 셈이다.


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어떤 일이나 조직이 유지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 그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내가 경영학도로서 건진 몇 안 되는 지식 중에 수익자부담원칙과 참여자보상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조직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정과 의리, 집단주의 등의 어찌 보면 비합리적이라 할만한 요소들에 많이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빡셀 때는 두 손놓고 있다가도 일이 다 끝나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밥숟가락 들고 찾아오는 것도 그러려니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누군가의 고생으로 이룩하고, 힘겹게 쥐어 짜내야 돌아가는 조직이라면 머지않아 곧 망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망하는 속도를 조금 늦추려 하고, 합리적으로 추정 가능한 수준에서 망하도록 하려고 노력하는 이들도 많다. 풍환처럼 “원래 이 바닥이 그래”라며 속 편히 말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으로 그네들의 노고에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 좋은 사람들의 선의가 악의에 짓밟히지 않는 세상이 되도록 나도 돕고 싶다. 팍팍한 세상을 조금이나 촉촉이 하는데 나도 일조하고 싶다.


나는 경영학도이고 손해보는 장사는 정말 싫어하지만 살면서 가끔 손해보면서 남 좋은 일을 잠시라도 해보는 것을 유쾌한 경험으로 추억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졌으면 좋겠다. 꼭 見善如渴이라는 말처럼 착한 일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 본 듯이 주저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도 말이다. 또한 나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기보다는 내가 그네들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지 못한 것을 먼저 반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주위에 사람이 많아서 부대끼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라며 내 인복에 고마워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아름다움을 품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뤄놓은 것에 마냥 흐뭇해하기보다는 남이 이룰 것을 북돋워주면서 말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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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한달 고심 끝에 겨울학기를 안 듣고 영어학원을 수강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숙제도 꼬박꼬박하고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 샅샅이 뜻을 찾아보고 텍스트도 뒤적거리는 성의를 보였던 나는 새터 준비가 겹친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하나둘 소홀히 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강의 시간에 앉아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아마 토익 시험을 보라고 한다면 별로 실력 향상이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전무했던 토익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절박한 생존상의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영어 공부는 이번에도 시원치 않은 성과를 가져왔다.


물론 despite가 전치사이고, though가 접속사라는 사실과 이 둘을 뒤에 구나 절이 오느냐의 여부에 따라 적절하게 구사하는 법 같은 몇 가지 공식과도 같은 것들을 접한 것이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정법 과거완료의 문장 구조라든가, 동명사와 TO부정사, 관계대명사나 분사구문, 복합명사 같은 시험의 단골소재들을 수박 겉핥기로 걸쳐간 보람은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습이 거의 없었던 만큼 죄다 망각의 강을 한참은 건넜으니 답답할 뿐이다.^^;


영어공부의 효용은 나에게 모멸감을 선사하면서 나의 무식함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다는 점과 갑자기 학구열을 불태울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인 것 같다. 함께 다닌 친구가 나보다 문법 문제를 몇 개 더 맞추는 모양을 보면 나의 조급증은 폭발하고 졸지에 나는 영어도 못하는 촌놈이 되어버린 극도의 소외감을 맛보기 일쑤다.


대학을 졸업하기 위한 졸업요건 중에 토익 780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늘 마음 한구석의 짐이 되고 있다. 아직 토익 시험 한 번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나는 장래에 대한 고민이 없는 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녀석으로 전락하고 만다. 토익점수를 위해 부지런히 매달 시험을 보고 보면 볼수록 점수가 오른다며 권하는 친구 앞에서 나는 영어만능주의 비판이나 하는 고집불통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중학교 1학년 제도권 교육에서 처음으로 영어를 접하게 되면서 영어 단어 외우기를 왜 그리 게을리 하고, 영어문장 암기 시험을 그토록 저주했는지 후회스럽다. 그 때 좀 영어에 애정을 가지고 공부했다면 지금 이러한 몰골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핑계다. 지난날의 언어 국수주의 혹은 폐쇄적 국어사랑에 대한 질타로 지금의 내 초라한 모습을 무마해보려는 속셈이다. 또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한 친구에게 내가 한 덕담은 고작 “전성기의 대국인 미국에 가서 영어라도 건져 오시게”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영어학원을 수강하던 시기에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김영명 교수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책이다. 영어 사대주의를 신랄히 비판하고 있는 책을 영어 학원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틈틈이 펼쳐보는 부조화의 극치였다.^^; 여하간 글쓴이는 책에서 영어 공용화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우리말 사랑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역설한다. 나도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부분 동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빼어나게 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특히나 영어회화는 더더욱 말이다. 그런데도 가스검침원에게조차 토익 성적표를 요구하는 현실은 황당할 따름이다.


글쓴이는 영어 공용화 정책을 펼치라는 자들을 사이비 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 체제에서나 가능한 동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홍세화 선생의 비판과도 일맥 상통한다. 자유주의자가 영어가 공용화되는 것이 대세라면 막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이해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어 공용화에 앞장서는 것도 해서는 안될 일임은 자명하다. 어떤 방향이든 강제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책무인데 대체 그것 어디다 엿 바꿔 먹고 영어 타령만 하는지 모르겠다.  


글쓴이는 기득권, 권력, 부를 가진 세력은 언제나 현실론과 효용을 앞세운 사대주의 세력이었다고 말하며 민족주의 이념은 우리 역사상 한번도 지배층의 주도 이념이었던 적이 없었다며 한탄한다. 중립적 세계화는 허구라며 힘센 자는 중립의 논리를 좋아하게 마련이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아울러 저항 민족주의로서 한국어 사랑은 의미가 있다고 역설한다.


특히 한자파들이 한글하고만 싸우려 하지말고 영어와의 싸움에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는 글쓴이의 지적에 크게 동감했다. 적의 적은 동지인 법이고, 한자파도 영어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는 공동의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고3 수험시절에 틈틈이 한자공부를 해서 한자능력검정 2급 자격증을 딸 정도로 한자를 좋아한다. 조선일보와 내가 유일하게 생각을 같이 했던 때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공문서 한자병용에 대한 논쟁이 붙었을 때 한자병용을 옹호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한자혼용도 아니고 괄호 안에 한자를 표기하겠다는 수준의 한자병용은 충분히 양해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국어 공부를 위해서 일정정도의 한자공부가 병행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변함 없다.


나는 어차피 배우고 가르쳐야할 한자라면 될 수 있으면 일찍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말 어휘의 절반 이상은 한자어이며 한자어들의 상당수가 한자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없이는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글 전용이라는 밥상을 차리고 싶어도 한자라는 반찬이 없으면 곤란할 정도로 한자어는 한국어에 깊게 침투해있다.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적정 수준의 한자 학습이 부당한 노동력 낭비이며 인권 유린(?)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한자의 매력에 빠진 나라고 해도 한글 전용의 대원칙은 건드리지 않으며 우리 말글살이가 한글만으로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미 한글 전용이 대세인데, 한자를 쓰겠다는 욕망을 금기시할 필요까지 없다는 소수자 보호(?) 수준의 논의일 뿐이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샜다. 다시 영어 공용화 논쟁으로 돌아오면... 1998년 여름 출간된 소설가이자 경제 평론가 복거일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刊)라는 책인 우리 사회에 ‘영어 공용화’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세계화와 국가경쟁력이라는 논제가 깔려 있다. 그는 영어는 지구촌의 ‘표준’ 언어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제국의 언어'라고 말한다. 따라서 ‘주변부’의 우리가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해서, 또는 중심부의 지식과 담론을 제대로 빠르게 흡수하여 중심부 못지 않은 경쟁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이른바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 시민들이 보다 더 "영어"에 능숙해져야 한다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는 것이다. 복거일이 자신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점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닫힌" 민족주의를 버리고 "열린" 민족주의로 나가야 한다는 그의 말도 맞는 말이다. 편견이나 아집을 버리고 세계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경쟁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많이 나갔다.


물론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일은 지금 우리의 감정에 너무 거슬른다. 우리 말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는 우리 말을 아끼고 써야 한다는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191쪽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고 그것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은 오롯이 남는다. - 같은책, 194쪽



일면 맞는 말이기는 한데 정서적 거부감은 어쩔 수 없다. 복거일이 말한 민족주의의 사슬에 걸려있다는 죄책감이 더해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의문이 든다. 한 민족의 언어라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효용성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일까? 과연 영어 공용화가 합리적 대안인가?


영어 공용화를 옹호하는 입장은 대개 다음과 같다. 언어는 생활 속에서만이 습득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영어권 국가로 이주하지 않고는 영어를 마스터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어학 연수로 인한 외화 낭비의 절감과 세계화시대에 발 맞추어 간다는 의미에서 영어의 공용화는 필수 불가결 한 것이다. 영어 공용화가 민족성을 해친다는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일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국어에 대한 입장은 갈리게 된다. 복거일은 민족어는 박물관 언어로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대개의 영어 공용화 옹호론자들이 반드시 민족어의 사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민족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문화 주체성 운운하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식의 논리가 더 많아 보인다. 아이들의 언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한국어는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데 매우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고도로 발달, 분화된 언어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일시적인 언어 지체현상을 지나 세 돌이면 두 가지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영어 공용화 옹호론자들은 영어 공용화는 세계화의 추세에 걸맞은 행동이며,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편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물론 영어가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고, 국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공용어로 제정함으로써 비롯되는 많은 혼란과 비용을 감수할 정도로 절실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공용어로 제정한다고 해도 실제 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분야는 전문가의 영역이고 영어 공용화보다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영어가 공용화되면 더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지 않느냐는 옹호론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따진다. 당장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영어가 공용화된다고 해서 원서를 줄줄 읽어 내려갈 일은 없다. 또한 전문적인 입장에서도, 실제 실험을 하거나 연구를 하는 데는 영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다만 대외적인 경향이나 추세를 파악하고 우리의 연구 실적을 발표하는데 영어가 필요한데, 그 분야에서 사용되는 영어 역시 고난도의 전문적 수준을 요구할 정도는 아니다는 것이다. 공용화 보다는 단기적으로 통역과 번역에 능통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학교 교육 정상화를 통해 영어 교육을 시작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봐야지, 전 국민을 영어의 바다에 빠뜨리는 것은 위험한 짓이라는 것이다.


영어 공용화를 반박하는 숱한 논거들이 있지만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가 대개는 현실적 이익을 도모해보자 수준에서 그치는 빈약한 수준이니 별로 반박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대중들을 현혹시키는 두 가지 정도의 주장에 대해서는 확실히 반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영어를 잘 해야 잘 살게 된다는 미신이다. 걸핏하면 드는 것이 싱가포르의 예인데 그들이 현재와 같이 발전한 것은 그들이 영어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선진화된 제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보다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시급한 인구 300만의 도시국가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찬양을 하는지 정말 배알도 없는 처사다. 또 홍콩을 영어 공용화의 표본이라고 받들기도 하는데, 그네들의 영어 문화가 영국 식민 통치의 산물일 따름이며, 설령 2개 국어를 능숙한 홍콩의 모습에 침을 흘릴지언정 그밖에 우리가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영국 연방이 44개국이고 영어를 대부분이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데 그들 가운데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는 5개국도 안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되새겨봤으면 좋겠다. 영어 사용과 국가발전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게다가 영어 공용화는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해줄 것 같지도 않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되면 국민의 약 20%가 영어 상용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로 인해 상류의 기득권층은 영어를 쓰고 그 이하 계층은 한국어를 쓰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사실 뻔할 뻔자 아닌가). 결국 기득권층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점점 더 유리해지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더 불리해질 것이다. 이미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인도, 필리핀, 나이지리아 등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실례로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인도에서는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한다. 다수의 빈곤층은 자기 모국어밖에 모르는 실정이다. 필리핀에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은 미국, 호주, 중동 등 외국 이민으로 빠져나가는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영어 공용화로 이른바 ‘영어 특권 계급’ 같은 것이라도 나타난다면 우리 사회 통합에도 큰 지장을 줄 것이다. 아울러 일부 소수 계층만이 영어를 배우는 북한의 실정을 고려할 때, 다가올 통일한국 시대에 남북 간의 영어로 인한 괴리감도 충분히 생각 가능하다.


둘째로, 영어 공용화가 세계화에 발 맞추는 것이라는 미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세계화’의 개념에 대한 것이다. 아마 세계화 시대에 발 맞추는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정글 세계화’의 개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화란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사회로서, 영어를 쓰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고, 의식주 해결도 쉽지 않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런 세계화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싶다. 영어를 공용화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 정도의 세계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올바른 미래의 사회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세계화에 대해서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인가? 올바른 사회는 아니지만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런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사회가 우리 미래 사회 모습인지 묻고 싶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의 관찰하는 행동이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즉, 한 사람이 그냥 흘러가는 역사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찰한다는 행동 자체가 역사의 변화 방향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역사는 대세의 흐름대로 저절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래의 모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냥 "영어공용화가 될 테니 영어 공부나 열심히 하자"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영어 공용화 사회로 바꿔 놓는 것이다. 반대로 "영어 공용화는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올바른 사회로 가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정글세계화에 어떤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좀 더 바람직한 세계화의 모습은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천시하지 않고, 유럽 백인이라고 우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이다. 인간의 개인 가치를 중요시 여기며 어느 누구의 희생도 바라지 않는다. 각기 다른 점을 인정하며, 그 개성을 바탕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다른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성을 죽이지 않고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이다. 세계화를 이런 다른 점을 존중하고 평등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로 생각할 때, 영어 공용화와 모순이 일어난다. 티베트족이 중국어를 공용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어를 잘 간직해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지금까지 고유한 문화를 이어가고 있듯이, 또 캐나다의 퀘벡주가 영어의 바다 속에서도 프랑스어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세계화가 아닐까?


한국에서 영어 공용화를 한다는 것은 필히 전 국민에게 영어를 강제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러한 강제적인 행위는 세계화 정신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아울러 앞서 말했듯이 자유주의자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자발적으로 영어 공용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가정은 세계화가 되면 한국어가 불편한 생활을 강요할 것이라는 예측에 기반한다. 한국어를 쓴다고 해서 생활이 힘들 정도의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한다면, 이것은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는 세계화 기본 이념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또 지적하고 싶은 점은 가장 큰 다른 점 중의 하나인 언어를 개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없애려 든다는 것은 역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획일화된 세계화는 없는 것이 낫다.


기실 공용어화에 대한 논리는 이미 우리 역사에 있었다. 주요한은 “대동아 공영권의 공용어로서 일본어가 등장할 것”이라며 우리가 빨리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부르짖으면서 우리 민족이 모두 일본인처럼 일본어를 잘 해야 한다고 했다. 친일의 논리는 ‘힘의 논리’였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는 그들의 논리를 다시 듣고 있다. 지금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하는 많은 이들도 애국하는 심정으로 주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구조는 친일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힘의 논리는 “힘은 변한다”는 기본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서정주의 "일본이 그렇게 망할 줄 몰랐다. 못 가도 100년은 가리라고 생각했다"는 솔직한 고백은 이러한 비극적 현실인식을 전형적으로 나타낸다.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과 함께 친일의 논리가 망한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한국어로 잘 포장해 놓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한국어만 가지고도 진리를 잘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중심이 어디로 변하든지 한국어만 지키고 있다면 그들은 진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어 교육은 세계의 중심이 변했을 때, 그 중심에 맞춰서 다시 교육하면 된다. 지금 불고 있는 ‘중국어 교육 열풍’을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영어교육이지 영어공용화가 아니다. 우리는 이 둘을 잘 구분해야 한다.


한 민족이 외세의 침략을 받고 강압에 못 이겨 외세의 언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경우는 있지만 스스로 외국어를 자기 국어로 끌어들이는 일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고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외국어로서의 영어 교육과 공용어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불변인 것은 한글이 우리의 언어고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게 지켜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말글의 지위를 높이자면 우리가 잘 되는 수밖에 없다. 즉 영어를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우리나라를 좀 더 발전시키고 또 우리말글의 지위를 높이는 방편으로 생각해야할 것이다.


끝으로 영어 잘하는 지식인들에게 청컨대, 영어가 좋으면 남에게 강요하지 마시고 그 속에서 좋은 정보 많이 뽑아 국민들에게 쉽게 소개해주는 ‘지식 소매상’의 역할을 많이 좀 해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네들이 타박 안 해도 한국어는 자꾸 소멸되어 가고 있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시라. 불난 집에 부채질하지 않는 것이 그대들의 마지막 상도덕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 개념을 일본말(한자어)로 번역하려고 노력한 것을 생각해보시기를 권한다. 한국어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우리말의 조어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만들 말을 통용시킬 힘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그것은 물론 언중의 책임도 있겠지만 남 위에서 시켜먹기 좋아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길 바란다.


이렇게 시원하게 쏘아붙이고 나서 또 걱정이 된다. 토익 점수는 언제 따며, 대학 영어강의는 또 어떻게 들어야 하나 같은 고민들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으면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글로 쓰려는 노력, 조금 어색해도 한국어 용어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다. 고종석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모국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다. 외국어를 배우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이 처음 배운 언어, 가장 익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외국어 공부량에 비례한 만큼 새록새록 피어날 것이다. 영어 문법 틀렸을 때의 곤혹스러움의 반의 반이라도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채우기를 다짐해 본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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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2학기 교양 국어 과제로 제출했던 사기 독후감이다. 다소 긴 글이라 스크롤의 압박도 만만치 않다.^^;)



1. 사기에 대한 단상들

 나는 [사기(史記)]를 한 마디로 ‘배보다 배꼽이 크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제왕과 제후의 기록인 본기와 세가보다는 신하나 민중의 이야기인 열전이 더욱 재미나고 의미가 있다. 게다가 사기 자체보다는 사기를 쓴 사마천이라는 인물이 더욱 눈길이 가게 되는 점도 그렇다. 어디 그뿐인가. 어떤 인물의 일생보다는 어느 한 구절에서 더 선명한 가르침이 나오기 일쑤이다. 이처럼 배꼽으로 읽는 책 [사기]에 대해 배꼽차원에서 논의해보도록 하자.


 수능을 앞두고 중국어과 후배들 격려차원에서 돈을 모아 먹을 것을 사들고 3학년 교실로 찾아가게 되었다. (나는 외고 중국어과 출신이고, 중국어과는 7,8반이다.) 거기서 한 마디씩 해주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때 나는 한창 읽고 있던 사기의 구절들을 인용했다. 3학년 7반에서는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인다’를 꺼내며 대학생이 된 후에 만나게 될 여러 문제들 사이에 고민될 때 참고로 삼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3학년 8반에서는 관포지교에서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주는 이는 포숙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를 꺼내며 대학생이 되어서도 지금 옆에 있는 친구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감히 그런 구절들을 들먹거릴 만큼의 위치에 있지 않아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 만큼 내가 읽고 있던 사기에 나오는 지혜의 조각들을 공유하고 싶기도 했다.


 내가 읽은 서해문집에서 펴낸 세 권 짜리 사기는 사기의 열전을 주로 실었지만, 그렇다고 열전편만이 아닌 본기와 세가에서 특히 재미난 인물들인 항우, 유방, 여후, 공자, 진승 등을 싣고 있어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비록 완전한 열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사기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사기 열전을 얼치기로 세 번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 어린이용으로 나온 사기를 책이 닳도록 폈다 접었다 했고, 중학교 때 산 서해문집에서 낸 것을 조금은 산만했지만 나름대로 재미나게 읽어내려 갔고, 이번이 세 번째이다. 이미 인물의 이름만 접하면 대략 어찌하겠구나를 알고 있어서 조금 식상하겠거니 했는데 대학생이 되어서 펴드는 사기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이래서 고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다르다고 했던가.


2. 사기란 무엇인가?

 [사기]는 한나라 시대에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으로, 중국인의 공통시조 황제(黃帝)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무제에 이르는 근 3천년을 기록한 통사이다. [사기] 이전의 역사기록은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거나 간략한 연대기적 서술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천은 수많은 문헌과 실제 답사를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투영한 인물중심의 새로운 역사기술 형태인 기전체(紀傳體)를 창조했다. 실로 [사기]하면 한 번쯤은 접했을 개념이 바로 기전체의 대표주자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나 고려사가 조선왕조실록의 편년체와는 다른 기전체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 정도의 내용이 수능을 준비했던 이들에게 한 번쯤은 거쳐갔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기는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를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려한 저자의 의도대로 열전에 가장 많은 비중이 할애되어 있다. 열전의 인물들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재상과 장군, 사상가, 유협과 자객, 충신과 간신배, 대지주와 상인 등 모든 등장인물들은 강한 개성을 내뿜고 있다.


 한 인간의 개성은 격렬한 역사의 변동기에서는 그저 미미한 존재로 치부된다. 그런데 사마천은 여러 역사적 인물들의 인생을 제시하면서 그 인간성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을 주시하며 역사를 쓰고 있다. 제왕이 아닌 황후에 불과한 여후를 본기에 올려놓고, 역사의 패자였던 항우도 당당히 제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또한 공자나 진승 같은 인물들을 제후의 기록인 세가에 올려놓는 파격은 그가 얼마나 개인의 개성이 역사에 미치는 힘이 큰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이다. 열전에서도 개성 있는 특이한 삶의 방식을 포착하여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분석을 아끼지 않고 있다.


 열전은 백이. 숙제 열전에서 시작해 화식열전(貨殖列傳)으로 맺고 있다.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은 행위는 지극히 순수한 정신주의를 표현한다. 반면에 화식열전에서는 극단적인 물질주의를 논하고 있다. 이는 마치 채근담을 읽을 때의 당혹감을 재연시켰다. 채근담에서 보이는 논리적 모순과 앞뒤가 맞지 않음이 [사기]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여기서는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식의 논지를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성공한 장사꾼은 현명한 대상인으로 추앙되고, 실패한 장사꾼은 한낱 장사치로 폄하되는 식의 논리, 즉 ‘성공하면 충신,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논리가 아닌가 의심쩍었다.


 그러나 열전의 첫 머리에 이념과 원칙에 따라 굶어죽은 백이, 숙제 열전을, 마지막에 이(利)를 좇는 상인의 열전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둔 것은 위대한 성현에서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당위와 물질적 본능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제시한다. 이로써 ‘살아 숨쉬는 인간’에 의해서 역사가 창조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융통성 있는 현실 윤리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편견 없이 인간을 직시하는 현실주의 정신이 [사기]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3. 백이, 숙제 열전에서 엿보는 사마천의 역사의식

 이제 사마천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열전의 처음인 백이, 숙제전을 살펴보자. 주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백이, 숙제의 고사에 대한 사마천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뜻이란 사사로움이 없으며 언제나 착한 사람 편이다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백이, 숙제 같은 인물은 왜 그처럼 굶어죽어야 했을까?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안회는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지불하는 대가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이와 반대로 도척 같은 이는 무수한 살인과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천수를 누렸다. 이러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과연 하늘의 도리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天道是耶, 非耶)”


 이는 마치 내가 도덕경에서 발견하고 몸서리치고 무릎을 내리쳤던 구절인 “하늘의 도는 남는 데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 보태지만,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모자라는 데서 덜어내어 남는 데에 바칩니다.”와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사마천은 ‘천도(天道)와 인사(人事)는 무관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심각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되는 행복과 도덕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세상은 정의보다는 불의, 진리보다는 허위, 진실보다는 위선, 원칙과 소신보다는 기회주의가 더 판을 치고 행세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역사가로서의 사마천은 여기서 고민하게 된 것이다. 역사를 서술하는 입장에서 선인이 망하고 악인이 흥한 엄연한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인간이 살아나가는 한,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이 모순은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사마천도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2000년이 지난 후세 사람도 똑같은 상황이 놓여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에 차 있는 세상에서 역사가로서의 사명은 무엇이겠는가? 사마천은 일찍이 열전의 저술 목적을 “의를 돕고 결연히 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을 위해 70여 편의 열전을 짓는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마천은 현실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비록 그 과정이 험난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정의와 진실이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말한 대로 높은 도덕과 많은 업적을 남기고도 그만한 보상을 현세에서 받지 못한 사람들의 전기를 써서 지난날을 비판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려 한 것이다. 비록 현실에서 악이 이기는 것 같아도 현실의 연속인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을 사람들이 저버리지 않게 하도록 그의 일생을 바쳤다. 그는 위에 이어서 말한다.


 “백이, 숙제는 분명 현인이었지만 공자의 붓을 통해서 그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고 안회는 학문에 충실했지만 공자의 논어에 나오게 됨으로써 그 품행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때를 만나지 못해 묻혀 버린 인물에 대한 강한 연민이 사마천이 대작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는 역사상 안타까운 영혼들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숱한 영웅 호걸들의 기구한 운명을 조명하는 데 그가 필생을 바친 데에는 어쩌면 그의 비참한 운명 또한 투영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마천은 이해타산도 없이 친구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받는 치욕을 무릅쓰고 살아남아야 했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애증과 역사에 대한 애증이 자기 자신에게서 이미 불타고 있던 것이었다.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이런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굴욕을 참아내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는 까닭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숙원이 있어 비루하게 세상에서 사라질 경우 후세에 문장을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저술이 완성되어 명산(名山)에 보관되고 각지의 선비들에게 전해질 수 있게 된다면, 저의 치욕도 충분히 씻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사 이 몸이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4. 인상깊은 열전의 인물들

 열전의 많은 인물 중에서 나에게 강하게 인상을 남긴 것은 범여와 한신, 굴원과 맹상군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서로 대칭 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나왔던 인물이 또 나오고 여기서 인용된 사람이 저기서 인용되는 경우가 많은 사기 열전의 특성상 이런 분류나 비교의 작업이 무척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狡土死 走狗烹)’라는 말을 범여와 한신 모두 하게 된다. 범여는 오나라 정복에 같이 공을 세운 대부 종에게 보내고, 한신은 유방한테 잡혔을 때 이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범여는 이 말을 일찍 했고 한신은 너무 늦게 깨우쳤다.


 범여는 월나라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와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월나라를 떠난다. 구천은 범여와 이 나라를 나누어 가질 것이라며 감동적인 말을 했지만, 그럴수록 범여는 불안의 싹을 감지하고 미련 없이 월나라를 떠나게 된다. 범여는 물러날 때를 제대로 알아 실천에 옮긴 인물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잘 나갈 때 그칠 수 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조금만 더’라는 마음이 결국 끝까지 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 후 범여는 뛰어난 장사수단으로 천금의 재산을 이루게 되고 화식열전에서도 범여는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영광을 얻게 된다.


 한신 또한 유방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했던 인물이다. 그가 만약 항우의 편에 섰더라면 감히 한이라 는 나라가 있기야 했겠는가? 한신의 책사 괴통은 한신이 초와 한의 사이의 제나라를 부여잡아 천하를 셋으로 나누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신은 자신을 알아준 유방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괴통은 ‘망설이고 있는 호랑이는 벌만도 못하다.’며 한신을 거듭 설명하지만 한신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공을 과신했던 것이다. 한신은 왕으로 자립할 마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방에서 단지 신하로서만 복종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애매한 태도가 그의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 그는 범여처럼 사심 없이 자신의 지위를 버리지는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지위가 낮아짐을 부끄러워했다. 실의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뒤늦게 반란을 계획했지만 결국 제거되고 만다.


 한신의 딜레마는 자신의 역할에 뚜렷한 주관과 철학을 갖지 못한 채 냉혹한 권력의 언저리를 서성거렸다는 데 있었다. 한신은 권력욕을 버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처신하다가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범여의 과감한 은퇴와 맹장 한신의 모호한 처신은 모두 타이밍의 문제였다. 그것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철학이 뒷받침 될 때 더욱 빛난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3천의 식객을 모았던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주인공 맹상군은 어릴 적 나의 우상이었다. 솔직히 사교에 드는 비용들을 고통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맹상군 같은 풍요로운 인간관계에 둘러싸여 사는 재미를 부러워했다. 특히 나에게 감동을 준 것은 맹상군이 파직되자 수많은 식객들이 모조리 그의 곁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이다. 맹상군이 복직되자 유일하게 남아있던 풍환이 다시 식객들을 모으려고 했다. 이에 맹상군은 다시 찾아오는 이가 있다면 침을 뱉어주고 싶다며 서운해했지만 풍환은 담담히 ‘세상 인심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둔 비유가 압권이다.


 “시장에 가서 보십시오. 아침에는 서로 앞을 다투어 먼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해가 진 뒤에는 시장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아침에 시장을 좋아하다가 저녁에는 미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저녁 시장에는 원하는 물건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 사귀기를 즐겨, 많은 인재들이 모였던 맹상군과는 달리 굴원은 고고한 영혼의 소유자였지만 불운한 생애를 보냈다. 굴원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간신들의 참소에 뜻을 펴지 못하고 결국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사마천도 굴원이 스스로 빠져 죽은 강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부사(漁父辭)에는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깨끗하고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으니 그래서 추방을 당했소이다.”


 혹자들은 이런 그의 처신방법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시대의 흐름은 나몰라라 하고 순결한 척하는 것 아니냐고 시비를 걸어봄직도 하다. 일면 타당한 지적이겠지만, 이런 굽히지 않는 의지를 가진 선비들로 해서 인류 역사는 힘을 얻는 것이 아닐까.


맹상군과 굴원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각기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게 더 낫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다만 나의 경우에는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이치에 비추어 맹상군을 좀 더 배워야겠다고 조심스레 말할 뿐이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굴원을 좀 더 배워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열전에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서 울고 웃으며 우리는 저마다 제 입맛대로 건져 가는 것이 있게 된다. 붕어빵을 먹을 때 머리를 먼저 먹든지, 꼬리를 먼저 먹든지, 지느러미가 먼저가 되든 우리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기에 나오는 인물 중에 자기에게 맞는 인물을 좌표로 삼아 삶을 꾸려 가는 것도 사기가 우리에게 주는 쏠쏠한 재미일 것이다. 역사에서 배울 줄 모르는 것만큼의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5. 역사를 읽는다는 것

 몇 해전 도올 선생의 노자강의를 듣던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서양에서는 죽으면 천국과 지옥에 간다고 믿었지만, 동양에서는 죽으면 역사가 평가한다.”는 정도의 뜻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동양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에 사마천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동양의 인물들은 현세에서 성공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행동이 역사상에서 명성을 남겨 불후하게 되기를 원하게 되었다.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는 이렇게 해서 동양인의 정신 구조, 동양적인 인간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이해와 비판의식은 그 나라 국민의 의식과 문화수준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를 따분하게 여기고 교육제도와 교육방식까지 이를 거들고 있다. ‘교육의 세계화’란 명목으로 국사시간을 줄이는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외국의 국사교육은 점차 강화되는 추세라고 한다. 6살부터 18살까지의 의무교육의 전과정에서 역사과목이 필수인 프랑스를 보며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역사, 특히 국사에서 민족의식과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월드컵 경기 응원, 국토 대장정 같은 것들도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역사가 맡아야 할 진정한 역할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단지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불어넣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갖추어야할 비판정신과 참여의식을 키워주는 데 있다. 역사야말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나아가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창의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의지를 길러주기 때문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은 낙관적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그 숱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망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왔고, 때때로 후퇴하지만 대개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길게 보고 너그럽게 볼 수 있는 안목이야말로 역사를 읽으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보배이다.


6. 나만의 가치를 찾아서

 끝으로 문정희가 쓴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라는 시를 읊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원칙(?)에 맞추어 이 글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이 이 시가 아닐까 염려스럽다. 이 시는 ‘투옥 당한 패장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라는 긴 부제를 달고 있다.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사마천은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것을 위해 '남자'라는 기득권을 포기했다. 그에게는 역사책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는 순결하고 끓어 넘치는 용기가 있었다. 젊은 날의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를 찾기 위해 고뇌했다고 한다. 이제 나에게 물을 차례다. 평생 남의 눈치를 살피며 기둥 크기나 재다가 갈 것인지, 아니면 기둥일랑 내던지고 순수한 열정을 연료 삼아 타오를 수 있는 멋진 사내가 될 것인지를. 이것 참 사기가 내게 많은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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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교과서였던가, 공책 표지에 떡 하니 떡 하니 이렇게 써놓은 것을 보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자유, 평등, 축구”... 축구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외국의 축구 선수와 동향까지 줄줄 꿰고 있었던 그 친구로서는 프랑스 대혁명 이념의 밀도만큼 축구를 사랑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내 자신은 비록 축구는 스포츠 민족주의의 대표주자에다가 남성주의, 집단주의의 원흉이 아니겠냐며 딴지 걸면서도 그 친구의 열정을 존중했다. 물론 마음 한구석의 불편함은 감출 수 없지만 말이다.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자유, 평등이랑 축구 따위가 동급이 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지난 한일 월드컵 때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표가 우연찮게 생겼지만 별로 흥미가 없던 터라 대구로 내려가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경악하는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다. 농담 삼아 미친놈 소리도 좀 듣고,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너는 남자도 아니라는 무시무시한 낙인도 찍힌다.^^; 살다보면 이렇게 완연한 소수파가 되어 여기저기 구박을 받는 경우가 누구나 몇 번씩은 있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대껴 사는 세상에 많은 사람만큼이나 많은 생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나는 그 누구도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무시하고 외면할 위치에 오르지 못한다는 인식론적 기초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가령 나는 조선일보가 너무나 싫고 거기서 기생하는 인간들을 혐오하지만, 조선일보가 구독자 1위를 자랑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신문지의 독자들을 존중한다. 비록 그 신문지의 독자들이 관성에 젖었음을 타박하고 그 신문지의 상도덕이 떨어진 사기행각을 규탄하지만 그 정도와 범위는 얼마만큼이 되어야 할지는 아직 명확히 잘 모르겠다.


세상에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것들을 철저히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도 나의 의무이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해는 못해도 인정은 해준다”는 참 지키기 어렵다. 내가 싫은 것에 대해 더욱 구박하고 싶고 욕하고 싶어지는 나의 옹졸함이 부끄럽다. 언젠가 학원 국어 선생님이 던져준 “너가 어떤 조직을 위해 무슨 일을 하려거든 남의 것을 무시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는 충고는 나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한참기간 유통기한이 지속될 방부제가 가득 들은 충고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에게 한 움큼씩 존재하는 서로 다른 얼굴의 열정이라는 녀석이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좀 더 다양한 열정들이 서로 경쟁하고 연대하는 풍토에서 열정이 식지 않는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몰아세우기는 쉽지만 그저 “다른” 것으로 존중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수가 가는 길을 가지 않는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당위적 목표와는 별개로 다수가 실천하는 것이 진리라고 여겨지는 광경이 많이 목격된다. 그러나 이걸 게거품 물고 질책할 것도 없는 것이 원래 소수파가 불편한 점들이 많지만 또한 장점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요즘 들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날라리 소수파는 늘 다수파가 되기를 원한다. 민주주의 원리 하에서는 소수파는 그래도 조금은 더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고안한 민주주의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다. 다수의 지혜를 모아 절제된 권력을 행사한다면 말이다. 합법적인 방식에 의해 다수표를 획득한 쪽이 정해진 일정 기간 동안 지배력을 행사하고, 소수표를 던졌던 이들도 지도자의 권위와 지시에 따르고 일정 정도의 책임을 공유하는 것은 거래비용도 줄이는 여러모로 효율적인 방식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숫자싸움이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편이 많아져서 내 의사가 좀 더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도 인정을 외쳐대고, 균형감각을 떠받들다 보니 요즘은 뭐 하나 내 입장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한쪽으로 밀어붙이는 나의 습성에 대한 비판을 너무 전폭적으로 수용한 탓인지 어떤 사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내놓는 일이 좀 더 힘들어졌다. 어쭙잖은 경계인 흉내도 아니지만 자꾸만 중간잡기로만 향하는 내 모습이 우습다. 귀가 얇은 내 천성도 있지만 이 쪽 가서 들으며 무릎을 치다가도, 저 쪽 가서 들으면 또 맞장구가 쳐진다. 교묘한 저울질의 끝은 대개가 중간 어디쯤으로 수렴해 버린다. 오래 생각할수록 상반된 대안의 장단점이 보이면서 적당한 타협에 급급한 모습이 부쩍 눈에 띈다.


크든 작든, 역사의 한편은 늘 ‘논평자들’의 차지다. 화사한 진보적/자유주의적 교양인인 그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 앞에선 늘 ‘객관적’이다. 논평자들의 관심은 문제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나 문제의 해결에 대한 논평이다. 논평자들의 목적은 실은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논평자들의 논평은 언제나 같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말의 실제는 이렇다.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핑계로 방법상의 문제를 찾았다.”
- 김규항, [논평자들] 中, 씨네21 2001/08/22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논평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긴 요즘 은연중에 나의 목표가 된 것이 세상을 세련되게 욕하는 내공을 쌓기 아닌가...^^; 게다가 더 끔찍한 것은 확신에 찬 논평을 내놓는 것도 아니라 한참이나 머뭇거리면서 조심스레 논평을 슬쩍 던져서 힘만 빠지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지한 나로서는 이런 어정쩡한 포지셔닝을 취하는 것도 감지덕지인지 모른다. 대충 두 가지 원칙만 세운다면 말이다. 첫째, 나름대로 이상주의자적 기질이 다분하다고 자처하는 나이지만 지나친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다른 이들의 꿈을 현실론을 잣대로 폄훼하지는 않는지 늘 돌아볼 것이다. 둘째, 나의 논평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노력만큼이나 지식과 실천의 병행을 위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가 될수록 우리는 옳고/그름의 문제보다는 그저 다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다. 옳고 그름은 판정을 내리기 쉽지만, 다름의 문제 앞에서는 선택의 자유를 움켜쥐고는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나는 열심히 배우기 바쁜 일개 학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균형은 결국 남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편파적이고 자기본위의 주장일 뿐이다. 그러니 내 입맛을 찾기 위한 탐구를 조금은 어깨 펴고 해야겠다. 어차피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절대 깔끔한 객관성과 담백한 평형감각이라는 이데아(idea)를 확보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사회적 균형이라는 것은 모두가 같은 균형된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사회적 균형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어떤 놈은 왼쪽으로 끝까지 가고, 어떤 놈은 오른쪽으로 끝까지 가고, 또 어떤 놈은 중간에서 폼 잡고 앉아 가지고 야야야, 그러지 마... 그렇게 얘기하고 그래서 총합적으로 어떤 집단적 의사결정이 나타날 때 균형이 취해지는 거라고.
- 유시민, [딴지일보] 긴급출동 이너뷰 中, 2003.10.20



유시민의 말처럼 내 안의 균형을 열심히 잡아 어떤 생각을 내놓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다른 생각들과 서로 다투면서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유시장의 원리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래야만 괜찮은 비주류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유쾌한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고정된 것이 아닌 늘 서로 긴장하면서 교체되는 유동적인 사회는 다소간은 정신이 없지만 그만큼 더 재미날 것이다. 한 쪽은 계속 호의호식하고, 한 쪽은 계속 욕만 해대는 모습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가. 양팔저울은 좌우로 요동을 치다가도 언젠가는 제 위치를 찾아간다. 우리 개개인이 양팔저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사회가 양팔저울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 놈이 그 놈인 것을...”이라며 토라져서 눈을 샐쭉 흘기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설령 거기서 거기이더라도 그 세부적인 차이점에 희망을 투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사소한 다름으로 분열되는 것도 안되겠지만 세심한 관찰력은 균형감각의 기본이다. 나의 발언은 결국 지극히 편파적이지만 그 과정만은 진실하고 합리적이어야겠다. 객관과 평형의 이데아는 불가능하지만 과정상의 엄격함과 성실함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리라. “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은 사적 인간관계에서야 어느 정도 통용되는 것이지, 사회적 관점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을 내거는 이들일수록 더 치졸하게 편들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온 결론을 가지고 당당하게 편파적으로 살자. 나도 누구처럼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한 구석에 있지만 설령 내 결정이 대중성과 거리가 멀더라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비주류의 구덩이에 있다며 내 코가 석자라며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사고를 시작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는 말자. 이런 기본적인 다짐을 지키는 것만으로 이 세상살이가 조금 더 가슴 뛰게 만들 것이다. 게다가 귀가 얇은 나의 천성은 적당한 상쇄효과를 만들어 내어 ‘즐거운 편벽됨’을 만들어줄 것이다. - [憂弱]


이상적인 자유민주주의는 좌와 우의 균형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달리 말하면 자유와 평등의 균형 위에 서 있다. 평등이 쇠약해질 때, 자유는 흔히 더 힘세고 사나운 사람들이 약하고 순한 사람들을 짓밟으며 제 이익을 멋대로 취할 수 있는 권리로 변질된다.

자유가 비실거릴 때, 평등은 흔히 다수의 횡포와 중우 정치로 가는 길을 닦는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에 대한 열망과 평등에 대한 열망은 거의 비슷한 정도로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듯하다. 회색 지대에서 이 둘의 균형을 꾀하는 것이 좌우의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마땅치 않겠지만, 진, 선, 미는 바로 그 곳에 있다.
- 고종석, 오늘속으로(9월23일) 균형 中, 한국일보 2003년 09월 22일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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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한 누리집이 생기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무척이나 늘어난 것 같다. 비단 내 누리집에 올리는 글뿐만 아니라 다른 공간에 올리는 잡글들과 하찮은 꼬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잡글들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나 할까. 내가 그 많은 시간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는 것이라고는 글 읽고 쓰는 것밖에 없으니 오죽하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문자로 된 것을 접하고 구사하는 데 그리 큰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글쓰기의 욕망이랄 것도 없이 내게는 그저 자연스럽고 가벼운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인터넷 세상이 된 요즘에는 글 읽고 쓰기는 내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한 자리 단단히 꿰차고 있는 것 같다. 잡글이나마 써내려 가는 것의 매력에 푸욱 빠졌다고나 할까.


글을 혐오하거나 잘 안쓰는 이들의 핑계는 참 갖가지다. 열심히 쓴 글은 결국 보잘것없기 일쑤이고 그래서 시간낭비이기 때문에, 말장난은 읽는 것만도 고역인데 그것을 생산하는데 나까지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둥,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글 쓸 시간이 어디 있으며 글 쓰는 것보다는 말로 해치우는 것이 더 간편하다는 이유까지 그 사람의 빛깔만큼이나 다양한 글쓰기 거부가 이어진다.


잘 모르는 것에는 침묵하는 겸손한 이들과는 달리 조금은 어설프게 알고 있지만 발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숱한 네티즌들도 있다. 혹자들은 네티즌들의 담론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거덜나는 장사라고 폄하하지만 꼬리글들이 쌓여가며 이루어지는 자정작용은 생각보다 힘이 세며 이른바 조회수의 법칙이라는 것도 무척이나 냉혹하다. 그간 지식인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였던 글쓰기가 지상으로 내려온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내가 글쓰기에 매혹된 것은 잡글을 쥐어짜내면서 나를 맴도는 두 가지 느낌 때문이다. 하나는 내가 참 무식하구나를 느끼며 더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가르침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인식의 흐릿함과 지식의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해보고 논증해보려는 시도를 하면서 나의 무지는 더욱 돋보였다(!). 덕분에 겉멋만 들었던 나를 한없이 겸허하게 만들어주었다.


또 다른 하나는 새록새록 피어나는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다. 영문법을 틀리면 부끄러워하면서도 국문법은 아예 맞고 틀림조차 신경 쓰지 않는 풍토이지만 내 나라 말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애틋함이 글을 쓸 때 생긴다. 아름다운 한국어 문장에 대한 욕망은 자꾸만 커져가고 있다. 제대로 된 한국어를 다루는 것은 소루하지만 그래도 모국어에 대한 경외심의 고백은 두터운 고마움에 비하면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


글쓰기를 즐기는 이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생산성의 문제다. 하찮은 글을 쓰는데도 시간은 엄청나게 잡아먹는 괴물 같은 녀석을 가까이 하기가 거북한 것이다.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것도 아닌 소인(素人, 아마추어)으로서 글 쓰는 이들은 늘 이것이 괴롭다. 나의 글이 들인 노동과 자본에 비해 만족할만한 산출물이 되어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조바심은 언제나 나를 짓누른다.


이런 강박관념에도 불구하고, 투자 수익률이 그다지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쓰기를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다운 쥐꼬리만한 희망으로 도피해버리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꽤 멋스럽고 군침이 도는 글 한 편 지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말쑥하고 산뜻하게 글을 지어서 읽는 이들에게 효용을 창출하게 만들고 싶다는 갈망이 효율성의 압박에서 나를 힘겹게 구제해주고 있다.


‘허영으로서의 작문’이 경제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촉촉한 교양을 사수하는데 얼마나 보탬이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는 아무리 해도 허술하고, 나의 진솔한 글 쓰기는 여전히 메마르다. 그러나 욕망하는 자가 발언하고, 발언하는 자가 권력을 얻는다는 것을 은밀히 믿고 있다. 이런 적당히 돌려 표현하는 권력의지는 나의 잡글 예찬의 주된 밑거름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꼼꼼한 성찰이 자칫 음흉한 자기방어에 이용되지 않았는지 늘 반성할 것이다. 나의 미적지근한 끄적거림이 활동가적 열망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을지 항상 조심해야겠다. 글쓰기는 이렇게 경계할 것 넘치는 귀찮은 작업이지만 언젠가 헌걸찬 글 한편 나와주겠지 하며 너스레를 떨어본다. 끝으로 내가 이 짓을 왜 하나 스스로를 숱하게 구박하면서도 잡글 쓰기에 몸서리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에게 은근한 연대의식을 표한다.


날카롭지만 따스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한참이나 부지런해져야겠다. - [憂弱]


덧붙이며 - 앞으로 해보고 싶은 글쓰기가 있다면 내 전공과 관련한 경영, 경제학에서 파생된 지식들을 엮어 잡글을 써보는 것이다. 나의 이런 바람은 성사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얼치기 경영학도로서 내가 딛고 있는 분야에 대해 쉽고 이로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열망만은 진정이다. “만일 내가 왕이 된다면, 자기도 그 뜻을 설명할 수 없는 말을 쓰는 작가는 글 쓰는 권리를 박탈하고, 백 번 볼기 치는 형벌에 처하라는 법률을 반포할 것이다”는 톨스토이의 말 때문에 괜스레 엉덩이가 무사한지 돌아볼지언정 말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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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주의자다

문화 2003. 9. 22. 02:19 |
나는 개인주의자다. 이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정도는 구분하는 세상이 된 터라 이 말을 좀 더 편안하게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집단주의 풍토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개인주의자를 외치는 것은 조금은 두려운 일이다. 그렇다보니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라는 수식어 치렁치렁 달린 상품을 내어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당당히 ‘개인주의’라고만 말할 시기가 온 것만 같다. 내가 믿는 개인주의가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것’이라면 구태여 경제성 없이 수식어를 앞에 늘어놓는 궁상을 떨 필요가 없다는 자각이다.



태생적 개인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어렸을 때부터 개인주의자의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이를 증명할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남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 고약한 심보다^^;) 선행이란 것은 자기자신만을 위해 쓰이기도 바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나 좋은 일 하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善行이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던 중에 책도 좀 읽고, 학교 선생님들의 끊임없는 훈육을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된다. ‘타인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일부 선행 개방’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즉 나에게만 쓰던 선행을 남들에게도 좀 나누어주자는 정책이었다. 유치찬란한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이 오히려 남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해준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또 다른 하나는 ‘개인 소국가론’이다. 이는 말 그대로 개개인은 하나의 작은 국가라는 인식론이다. 아마 사회과목을 배우면서 정부나 국회의 존재도 알게 되면서 이 조직들을 개인에게도 적용시켜보자는 속셈에서 나온 생각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 때는 스토아 학파의 ‘개인은 소우주’라는 말을 주워들어 만든 것이 아닌가도 의심했지만, 그건 한참 뒤의 일인 것 같다. 스토아 학파의 그 이론을 나중에 듣고, “이건 내 것인데...”라며 2000여 년 전에 선수 당한 것에 대해 배 아파했던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인식론을 기초로 해서 역사를 좋아했던 나는 혼자 생각하는 것을 일컫는 단어로 ‘조정 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쓰는 식으로 국가차원에서 쓸만한 용어들을 내 자신에게 끌어다 썼다. (나중에 ‘조정 회의’는 ‘국회 논의’로 변경된다^^;) 아직도 친구사이를 비롯한 인간관계를 ‘외교’라고 지칭하고, 나의 결심을 ‘정책’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 때의 습관이 남아서이다.



칼 포퍼는 개인주의를 집단주의의 반대라는 의미로만 한정시켜서 사용하겠다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a)개인주의는 (a')집단주의와 반대되고,
(b)이기주의는 (b')이타주의와 반대된다.
- 칼 포퍼 저/ 이한구 역, [열린사회와 그 적들1], 144쪽



이에 따르면 윗줄과 아랫줄의 짝짓기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형태가 나오게 된다.


(a) × (b) = 이기적 개인주의
(a) × (b') = 이타적 개인주의
(a') × (b) = 이기적 집단주의
(a') × (b') = 이타적 집단주의



포퍼는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하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네 가지 형태로 짝지을 수 있는 것을 단 두 형태 밖에는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결국 플라톤은 이기적 개인주의와 이타적 집단주의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찍으라고 윽박지르는 꼴이라는 것이다. 이는 도덕성의 기준이 국가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던, 전체주의적 정의론을 외친 플라톤의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포퍼는 플라톤이 범주 혼동의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오류는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을 같은 범주의 것으로 혼동하는 데서 생기는 오류다. 다시 말해, 포도와 당근을 같이 묶어 놓고, 참치와 닭고기를 같은 범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실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고 북어와 황태를 놓고 헷갈리게 하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황태와 북어는 모두 명태를 말린 것이나 북어는 바람 속에 급속히 건조시킨 것이고, 황태는 찬 공기 속에서 오랫동안 말린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포퍼가 분류한 네 가지 형태 주에서 이타적 개인주의가 가장 좋다는 것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일부 선행 개방’이라는 나의 경험이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이타적 개인주의’로 진화하는 쾌거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버린다^^;) 혹자는 이타적 집단주의가 더 멋들어지지 않느냐며 기웃거리겠지만, 일단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에서 그 빛이 바랜다. 남을 위하면서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우는 열성적인 종교집단이나 공산주의 실험 정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이런 경우는 정말 착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정말 보기 힘든 일이다.




경제학 세계의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이것은 증명하지 않고 참으로 인정하는 명제, 즉 공리(公理, axiom)다. 경제학 이론은 이 공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경제학을 이해하려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 인간’을 인정하고, 그가 내리는 모든 자발적인 경제적 선택을 ‘합리적’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경제학도는 이 공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신성한 경제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 유시민, [합리적 경제인이란?] 中




유시민의 칼럼에서 ‘경제학’을 ‘경영학’으로 바꿔서 이해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이나 이타적 개인주의를 가진 인간상을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학은 완전히 합리적인 인간을 가정하고, 경영학은 제한적인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가진 인간을 가정한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하간 이타적 개인주의보다는 이기적 개인주의, 이기적 집단주의가 더 많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여기서 이기적 개인주의는 흔히 말하는 ‘이기주의’, 이기적 집단주의는 ‘집단 이기주의’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 둘 중에서 오해가 심한 것은 역시 이기적 개인주의다. ‘이기주의 + 개인주의’가 되어 있다보니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도매금으로 구박받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나쁜 것은 이기주의에 있는 것일 뿐, 개인주의까지 누명을 쓰는 것은 부당하다. 이걸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포퍼의 입장과는 달리 단순하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분해 볼 수도 있다. 철학자 김용석의 다음과 같은 깔끔한 정리가 무척 유용하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말 그대로 개인individual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반면에 이기주의egoism는 나ego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전자의 경우 개인은 여럿이므로 모든 개인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 '나'라는 자기는 하나뿐이므로, 결국 자기'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개인주의에서는 말 뜻 그대로 개인이면 누구든 중요시한다.

'나'라는 개인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 너, 그, 그녀 등 모든 개인을 중요시한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권리를 前提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이해 및 타인의 권리 인정과 타인을 수용하는 자세는 개인주의의 본질이다. 반면 이기주의에서는―어원적으로도 쉽게 알 수 있듯이―자기 자신만을 중시하므로 타인을 이해하거나 수용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즉 '나'의 존재는 '나'만을 위한 것이다.
- 김용석, [우리 안의 이기주의, 우리 밖의 개인주의] 中, emerge 2002년 3월




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가르는 관건은 나만 생각할 것인가, 나를 포함한 모든 개인을 생각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기주의에는 자기 존중밖에 없다면, 개인주의에는 이와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개인을 집단에 종속시키는 집단주의 윤리가 구조적으로 합리적 토론과정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우선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는 반면 집단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 의해 방증된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남의 개인’도 ‘나의 개인’만큼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지만, 개인을 사회집단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의식이나 관념, 또는 일상에 젖어 있는 집단 구성원들은 집단의 헤게모니에 기대거나 숨은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개인을 포기하고 패거리에 몸을 담는 것이다.
- 홍세화, [숨은 이기주의자들] 中, 2002년12월11일 한겨레21 제438호




그렇다.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내 삶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개인주의자가 되는 길이다. 내 주변의 착하고 순박한 벗들을 사랑하고 나쁜 놈들보다는 착한 사람들이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개인주의는 의외로 낙천적인 모습을 보이고, 이상주의와도 만난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인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개인주의 없이 자유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내가 추구하고 탐구하는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의 가장 친한 친구쯤 되니 이 또한 일석이조의 효과가 아닌가.^^




개인주의자들은 김철수가 장애자라는 이유로, 박미란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로이 워싱턴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카르멘 차베스가 세번째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압둘라이 알리가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이영순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최경철이 게이라는 이유로 그녀들과 그들에게 시민적 정치적 권리가 제한되는 것에 결사 반대한다. 개인주의자들은 리처드 윌리엄즈가 백인 남자라는 이유로, 캐럴라인 샌더즈가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정미자가 이혼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권순철이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과 그녀들에게 시민적 정치적 권리가 덤으로 주어지는 것에 결사 반대한다. 개인주의는 시민사회의 버팀목이다. 그것은 집단주의 사회에서 목격되는 강요된 연대가 아닌,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정신 사이의 자발적 연대, 느슨하지만 깊숙한 연대, 참다운 연대로 트여있는 길이다.
- 고종석, [개인주의여 영원하라] 中, ‘지성과 패기’ 95.9.10., 산문집 ‘책읽기 책일기’, 문학동네, 1997.



고종석이 말한 그 아름다운 연대에 내가 낄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남이 뭐라 하든 나의 길을 고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내 편이 아닌 이들에게도 따뜻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소수파가 되었을 때 느꼈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올챙이적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양심적 기억력이 내게 존재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꽤 그럴듯한 개인주의자로 남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과 자부심이 생긴다. 아 글쎄... 개인주의자는 낙관론자라니깐... 6(^.^)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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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와 아니무스로 살펴보는 개성화 과정
-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읽고


  [아니마와 아니무스](이부영著, 한길사刊)는 융의 아니마(anima)․아니무스(animus) 이론을 종합한 후, 그 이론을 저자가 수집한 한국인의 꿈, 정신과 임상사례, 현대시, 무속 및 민담, 그리고 [도덕경] 등의 전통 사상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서구의 이론을 가져와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무척 신선했다.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가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니마와 아니무스 개념과 양성평등의 문제를 집어보는 것으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시키도록 하겠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알 구스타프 융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한다.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이다.


  먼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르조나’라는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융은 인간 정신의 표면을 지배하는 양태를 `페르조나'라고 이름 붙였다. 그에 대비해 정신의 내면으로서 남성의 퍼스낼리티의 여성적 측면을 `아니마'라 하고, 여성 퍼스낼리티의 남성적 측면을 `아니무스'라고 명명했다. 정신의 겉면인 페르조나는 때와 장소에 마치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바뀌어서 시대, 문화와 상황에 따라 의식과 행동방식을 적절하게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이면엔 남성의 경우 아니마, 여성에선 아니무스의 태고유형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집단사회 속에서 집단에 의해 요구되는 태도인 페르조나와 반대로 나타난다. 남성은 가장으로, 강한 직장인으로, 논리적인 경향의 남성적 페르조나를 쓰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감정적인 아니마가 자리잡고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요구에 맞추어가는 가운데 남성과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과 여성의 페르조나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내적 인격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남성의 무의식에는 여성적 인격이,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적 인격이 내적 인격으로 자리하게 된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남성과 여성의 의식에서 억압된 것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조건인 원형으로 이미 그렇게 되어있는 것을 핵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31쪽)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연인에게 투사되어 `매력' 또는 `혐오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된다. 즉 남성의 경우 여성에게 아니마를 투사할 때 자기 아니마의 여성상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을 느끼고, 모순된 경우에는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라는 시구는 그런 인간의 표현하기 힘든 무의식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어떤 이성에게 한눈에 반했다면, 그건 자신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며 아니마, 아니무스를 알기 쉽게 설명했다. 상대방을 보고 느끼는 황홀함이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상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첫눈에 반했다’라는 경우를 융은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다. 이는 비단 남녀관계에서만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김근태의 에세이집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쓴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살다보면 괜히 좋은 사람이 있다.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인데, 내게 특별히 잘해주거나 각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신뢰감이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김근태 의원이 바로 그런 분이다.
(김근태 에세이집 [희망은 힘이 세다], 252쪽)



  저자는 아니마, 아니무스의 투사로 인한 사랑의 실패에 대해 높은 의미를 부여한다. 자기 마음의 투사상이 아닌 현실의 그 남자, 그 여자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기 욕심을 채우고 상대를 자기의 이상상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솔직히 이 대목이 가장 실용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자아와 무의식의 심혼과의 융합이야말로 평화의 경지이며 자기실현의 길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했다.


  요컨대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론은 인간이 남성과 여성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남성은 여성적 요소를, 여성은 남성적 요소를 살려서 의식에 통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전체정신의 중심에 거의 접근하게 된다.
(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36쪽)



  지극히 남성우월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은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 프로이트에 비해, 융은 비교적 합리적인 견해를 제시했지만 역시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아마 여성분이라면 융의 견해를 나처럼 이렇게 편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 같다. 결국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체는 어디까지나 남성이고 여성은 객체에서 머무르며 비교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융이 과격한 여권신장을 주창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남성에게 여성적인 것, 여성에게 남성적인 것은 본래 뒷면에 있는 것인데 자기의 성과 다른 성의 것을 앞면에 내세워 살리게 되면 자기 고유의 성이 소홀해진다. 여기서 융은 강조한다. “남성은 남성으로, 여성은 여성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같은책, 58쪽)



  그래서 조금 아쉬운 감이 남는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조화시키자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한다. 조금 더 나아가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나 할까. 세계적으로 남녀평등 지표가 매우 낮은 나라인 한국, 여전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강한 나라인 한국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따끔한 일침을 기대했다면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무리한 요구였을까?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짧은 생각으로는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여자가 만들어지는 것은 맞지만 남자 또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는 남성에게 더욱 어울리는 말처럼 느껴진다. 남성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제조되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오죽하면 “전통적으로 남성성은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회피하는 것으로 자주 정의”(E. 바뎅데, [XY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183쪽)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가. 하긴 가만히 따져보면 남자가 된다는 것은 여성스러움을 피하고,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등의 주로 ‘안티’를 통해서 규정되기 일쑤이다. ‘남성다운’ ‘여성다운’ 같은 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을 프로이트는 “학문 영역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개념”이라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남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윽박지르지만 ‘사내대장부’ ‘진짜 남자’가 과연 딱 정리된 것이 있는지 물으면 혼란스럽기만 하다. 흔히들 남성성은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노력을 통해 얻어낸다는 믿는다. 그래서 남자가 되기 위해 목숨 걸고 쇼(!)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한마디 내뱉어주는 쾌감을 위해. “니들이 남자다움을 알아!”

  
  우리가 보듯 남성성은 두드러지게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다른 남성들 앞에서 그리고 다른 남성들을 위해서 구축된, 그리고 여성성에 대항하여 여성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구축된 개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남성지배], 75쪽)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한 명의 남성의 탄생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한 명의 남자의 탄생에는 늘 여성에 대한, 그리고 다른 남성 및 스스로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남성다움을 성취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 둔 채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김규항, [B급좌파], 83쪽)



  전통적으로 성역할 사회화의 과정에서 여성은 여성성만을, 남성은 남성성만을 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왔다. 고작 몇 십 년 전만 해도 삼종지도(三從之道)니,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니 하는 규범들이 엄존했던 이 땅에서도 최근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은 사실이다. 이 것을 보고 역사는 그래도 진보한다는 명제의 위대성을 실감할 수 있다. 내가 배웠던 고등학교 교과서의 일부를 먼지를 털면서 들춰보았다.


  어느 심리학자는 사람의 인성을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남성적 인성, 여성적 인성, 양성적 인성, 그리고 미분화된 인성이 그것이다. 남성적 인성과 여성적 인성은 각각 전형적인 남성다움, 여성다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고, 양성적 인성은 여성다움의 장점과 남성다움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사람을 의미하며, 미분화된 인성은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의 어느 것도 강하게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주위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성적 성향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한국 교육 개발원, [고등학교 일반사회]1999년 판, 75쪽)



  1970년대 이후 '심리적 양성성'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성격이 모두 발달한 개인이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높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부정적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대면하고 통합된 ‘자기’를 이루는 길은 사실 자신 영혼의 평화뿐만 아니라, 여러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융의 분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과제이다.


  그러나 대개 그렇지만 해결책이 명확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항상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쉽다는 보장은 없다. 쉽게 의식 속으로 편입되지 않을 뿐더러, 사회에서 여전히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을 원한다면 양성성으로 눈을 돌릴 유인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얼마전 술자리에서 어쩌다 나온 친구의 한 마디가 뭇남성들의 이런 딜레마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책에서 양성성 어쩌고 떠들어대도 그래도 역시 남자는 남자다워야지.”


  여성호르몬 또는 아니마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조화, 따뜻한 관심과 지원 등을 갖게 하지만, 남성 호르몬 또는 아니무스는 경쟁과 전쟁, 등급과 서열매기기 등을 만든다. 20세기는 분명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남을 억누르고 지배했던 남성의 세기였다. 남성의 시대가 계속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는 이들은 배려와 조화의 여성성이 21세기를 이끌어갈 것으로 내다본다. 이러한 여성성은 여성만이 지닌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의 가슴에 들어있다. 다만 남성들은 그것을 억압해 왔을 뿐이다. 이제는 남성 안의 여성성을, 최후의 식민지를 풀어줄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딴지를 걸며 지나친 여성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참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것 같아 답답하다.


  ‘지나친 여성화’를 문제시하는 논리는 옹색하기 짝이 없다. 우선 나는 그냥 ‘여성화’와 ‘지나친 여성화’ 사이의 경계가 어디인지, 여성화가 지나친 나머지 실제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이든 중용과 균형이 좋다고들 하니까 남녀가 반반씩 섞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치자. 그러면 당연히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는 거의 모두 ‘지나친 남성화’가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문제가 없는가.
(유시민, [WHY NOT?], 330, 331쪽)



  모든 것이 남성중심적인 세상에서 남성들에게 아니마는 사라진 지 오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남기에 거추장스러운 것이니까. 온화하고, 정서적이고, 따뜻한 여성적인 영혼이 사라진 세상에 '냉정하고,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인 합리주의'가 자리잡았기 때문에 자본만능주의, 각종 전쟁, 환경파괴를 낳은 것은 아닌지 조용히 되물어봐야 한다.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사회적 역할에 집착하기보다 내면의 인격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이론의 핵심이다. 남자는 남자다움을 배우는 동시에 이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말고 내면의 여성적 감성을 키워 나가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움을 배우더라도 내면의 로고스(Logos), 곧 판단하는 힘과 지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남성은 보다 깊은 공감능력과 안정된 정서를 지닌 존재로, 여성은 막무가내로 따지는 것이 아닌 지혜로운 여성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우리는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아름다움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양성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좀 더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다. 더 이상 이 땅에 여자라는, 남자라는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원래 인간은 양성이 결합되어 있는 양성체였다가 신의 노여움으로 두 부분으로 나눠어져서 서로를 찾게 되었다는 신화가 문득 떠오른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여성과 남성 사이의 문제는 인간의 영원한 테마일 것이다. 무의식 속의 여성성과 남성성은 우리 모두에게 자신에 대한 끝없는 반성의 출발점이다. 다른 성에 투사된 내 무의식 속의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의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융이 말했던 한 개인이 온전한 자기에 이르는 과정을 ‘개성화 과정’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6(^.^)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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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이 끝난지 꼭 한 달만에 탈고하고 말았네요. 지루한 이야기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제주도의 직사광선은 무척 따가워 살이 타들어 간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오죽하면 햇볕 때문에 피부가 고운 제주도 여자가 없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겠는가. 하염없이 나를 태우는 태양을 피해 달려간 천지연(天地淵) 폭포에서 간신히 심신을 식힐 수 있었다. 흐릿한 날씨의 천제연 폭포와는 달리 화창한 날씨라 눈이 부셨다. 하늘과 땅이 만나서 이룬 연못이라는 뜻의 천지연 폭포는 천제연과는 달리 평평한 산책로를 즐길 수 있었다. 짙은 녹색 연못을 바라보니 그간의 시름이 반 토막 나버리는 듯했다. 영국의 시인 콜리지는 “자연에는 우울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했다. 환경오염이니 뭐니 해서 눈살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많은 요즘에야 우울함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겠지만, 아직 때묻지 않아서 우울하지 않다는 소극적 의미를 너머 기쁘고 안락하게 해주는 이런 곳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에 그나마 어렵사리 균형을 맞추어 가고 있는 것일 게다.



천지연 폭포의 서늘한 기운이 채 가실 새라 조금 서둘러 간 곳이 바로 정방 폭포이다. 정방 폭포는 천지연, 천제연과 더불어 제주도 3대 폭포 중에 하나로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폭포로 그 명성이 높다. 제주도의 절경을 일컫는 영주십경 중에 유일하게 가본 곳이 바로 정방하폭(正房夏瀑)으로서 이는 정방폭포를 여름에 구경하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는 멀리서 구경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랬다면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 근경(近景)이 오히려 더 좋았다고나 할까. 바다로 쉼 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사방에서 물방울들이 날아왔다. 결국 근처 바위에 등지고 앉아 물방울들을 맞았다. 잠시 걸터앉았는데도 다리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들 이곳이 마냥 좋았는지 떠날 생각을 안하고 물방울에 흠뻑 젖어드는 그 기분에 심취해 있었다. 심지어는 이곳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자는 농담까지 나왔다. (결국 무겁게 메고 다닌 텐트는 한 번도 안 쓰고 고스란히 반납했다^^;) 여로에 지친 퀭한 눈망울과 세파에 찌든 야윈 가슴을 꽉꽉 채워주는 정방 폭포의 효험은 엄청났다. 몇 번이고 그만 두려고 했던 제주도 완주에 대한 용기가 충천되어 남은 제주도의 절반은 아무 군소리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근원적이고 생명에 가까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여행기간 내내 워터홀릭을 자처해도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90% 어른의 70%가 물이며 체내에서 물이 5%만 빠져나가도 혼수상태가 된다고 한다. 참으로 고맙고 귀한 물에 좀 중독되기로서니 무에 그리 대수이겠는가.



물 하니까 갑자기 철학의 아버지라는 탈레스가 생각났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물었던 그 물음 자체다. 생각해보기도 전에 일단 믿고 보라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절에 당당히 의심하며 물음을 던지는 저항의 상징으로서 탈레스는 철학을 열었다는 영예를 얻는다. 나를 옭아매는 이런저런 신화들에 나는 맞설 수 있을까. 신화에 맞서는 무기로서의 생각은 힘이 세지만 그 힘은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내 고민이 있다. 또 ‘믿음’ 이전에 ‘생각’이 존재한다는 나의 개똥철학조차 결국 하나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외치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다고 주워 들었는데(방법적 회의라고 지칭되는) 나는 고작 “생각이 먼저인 것이 확실하겠지...”라며 말꼬리 흐리며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생각은 힘이 세다’라는 무시무시한 선전문구(?)를 남용하는 나로서는 이 부분에 대한 나의 견해가 좀 더 정교해졌으면 좋겠다.



또 물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역시나 노자의 上善若水(상선약수)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라고 외친 이유는 무엇일까? 노자는 뒤를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있기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일부를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기는 쉽다.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해치우는 그들만의 잔치에서 무슨 다툼이 일어나겠는가. (뭐 잔치가 점점 커지면 밥그릇싸움이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전체를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렵다. 이걸 윈윈(win-win) 전략쯤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다음 구절에서 무너진다.



남들이 싫어하는 곳에 기꺼이 머무른다는 것은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속성에서 유추할 수 있다. 노자는 또 이런 말도 했다.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 즉, 공을 쌓아도 그 공을 주장해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상선약수에는 윈윈전략보다는 희생정신이 내포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선약수를 즐겨 쓰는 나는 노자와 입장 차이를 보인다. 공을 쌓았다면 마땅히 보상을 주는 인센티브의 원칙은 상도덕의 근간이다. 이걸 확립하는 것이 희생정신을 독려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기여를 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에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손해보니까 착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지 손해도 안보고, 희생도 안 치르고 무슨 선인이냐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여기서 나의 꿈같은 소리가 펼쳐지고 만다.^^;



나는 궁극적으로 착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진보하는 사회, 착한 사람들의 손해를 먹고 지탱되는 사회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제 몫 챙기기로도 꾸려지는 사회가 그것이다. 여기서 제 몫 챙기기란 남의 자유와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내 소신껏 살면서 내 이익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보통선(普通善)’이라고 지칭하는 이런 행위가 전통적 의미의 ‘선량함’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착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개인주의가 상도덕을 지켜가며 내 것을 쟁취하는 것이라면, 내가 믿는 자유주의가 남의 자유를 훼손해서 나의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선이라는 나의 이데아(Idea)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의 실현은 나조차 믿기 어렵다. 어쩌면 이 개소리는 메마른 사회가 착한 사람들의 눈물로 적셔지는 것이 못내 불편한 ‘보통 사람’의 투정인지도 모른다.



정방폭포의 묘한 힘에 이끌려 잡념들의 보따리가 방정맞게 풀어졌지만 다시 페달을 돌려보기로 하자. 하이킹 본부에서 여자들이 예쁘다며 추천해준 표선면에서 묵어가기는 힘들다고 생각한 우리는 남원읍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남원읍 가기 전에 있는 신영영화박물관을 들렀다. (이 때 표선에 당도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던 친구가 있었다. 누구였더라...^^;) 영화 마니아들에게야 무척 흥미로울지 몰라도 피곤에 찌든 우리들로서는 비싼 표 값에 비해 볼 것이 없었다는 것이 대체적의 의견이었다. 영화의 탄생과 발달상, 한국영화의 역사와 포스터, 각종 영화기자재가 약간은 눈요기가 되었지만 말이다. 쉴 곳이 필요해 2층에 있던 방송국 뉴스 스튜디오와 똑같이 제작한 곳에서 앵커 기분 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갑자기 안내방송이 나왔다. 요지인즉슨, 그 자리에서 2000원으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내 멋쩍어져서 자리를 뜨면서 내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가슴 달래기 위해 도망치듯 나온 박물관 밖 바다를 바라보는 산책로는 제법 아담하고 푸근했다. 그런데도 박물관 입장료 6000원이 비싸다며 연신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올인 샌드위치 가격보다도 싼 박물관 표 값에 왜이리 궁상을 떨었던 것인지... (올인 샌드위치 관련은 2부 참조...^^)



남원읍에서 민박집 잡기가 여의치 않자 일단 허기진 배부터 달래러 들어간 곳은 어느 허름한 분식집이었다. 나는 순두부찌개를 시켜서 무척 맛나게 먹었는데, 투박한 시골음식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세련되고 정갈한 도심지의 음식과 대조되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이 느낌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음날 아침 겸 점심도 이 집에서 해결했다. 떳다 분식에서...^^) 분식집 할머니께 묵을 곳을 물었더니 근처의 모텔을 소개해주셨다. 모텔이 주는 그 미묘한 뜻빛깔의 부담감도 제쳐두고 찾아가 보니 5명이 묵는다니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방의 절반을 차지한 거대한 2인용 침대를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침대 때문에 잠자리 마련이 조금 불편했지만 단잠을 자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넷째 날부터는 큰 오르막도 없었고 평평한 도로가 펼쳐져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영화박물관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입장료 6000원이던 제주민속촌박물관을 생략하기로 하고, (안에 들어가서 한참 걸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환해산성에서 멈춰 쉬었다. 환해산성은 말 그대로 해안가를 따라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로 어떻게 외적을 막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어용이라기보다는 소원을 빌며 돌을 쌓는 기원용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참을 쉬고 있는데도 병승이가 도착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자전거 바퀴 바람이 빠지고 말은 것이다. 자전거 수리점까지는 까마득한데 자전거가 고장나는 바람에 크게 난감했다. 다행히 낚시하던 아저씨께 통사정해서 차를 얻어타기로 하고(병승이 말로는 단순한 낚시꾼이 아닌 밀렵꾼의 분위기가 짙었다고 한다), 우리는 병승이를 남겨두고 넷이서 자전거 수리점을 찾으러 향했다. 수리점은 금세 찾을 수 있었고 위치를 병승이에게 알린 뒤, 병승이를 만나기 전까지 시간을 때울 곳을 찾았다.



나는 그래도 가장 유명하다는 성산일출봉을 가자고 주장했지만, 드라마 올인의 세트장이 있다는 섭지코지로 가자는 친구들의 의견에 따랐다. 자연경관을 보러갈 때마다 “이런 건 지리책에 보면 다 있다고...”라며 문화유적 쪽을 보러가자고 주장했던 나로서는 역으로 당한 셈이었다. 성산 일출봉이야말로 지리책의 단골손님 아닌가.^^;(섭지코지에서 먼발치로 어렴풋이 보이는 광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한참을 구불구불 들어가고서야 도착한 섭지코지는 올인의 유명세가 가시지 않았던지 가장 관광객이 북적였다. 코지란 ‘곶’을 의미하는 제주도 사투리며, 섭지는 좁은 땅이라는 뜻이다. 섭지코지의 산을 오르며 노오란 유채꽃과 어울리는 목가적인 풍경이 물씬 풍기는 너른 초지가 마음을 편안케 했다. 섭지코지의 제일 높은 곳에 보이는 하얀 등대까지 가는 것을 가볍게 그만 두고,(여행기간 내내 오르막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참을 바다를 바라봤다. 특히 용왕의 아들이 선녀에 반하여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 옥상황제의 노여움을 받고 바위가 됐다는 전설을 간직한 촛대 모양의 선돌 바위가 운치를 더했다. (이 바위가 외돌개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외돌개 안 간 것을 잘 했다며 어찌나 기뻐했던지...^^;)



자전거를 수리한 병승이를 만나 서둘러 우도를 향했다. 성산항에서 배를 10분쯤 타니 우도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우도 8경 중에서 가망 유명한 서빈백사(西濱白沙)라고 불리는 산호사해수역장을 찾았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해수욕장이지만 쌀알 모양의 산호가루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의 정취는 일품이었다. 다공질의 현무암에 걸터앉아 파도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톡톡히 즐겼다. 다만 배가 끊기기 전에 우도를 나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옥의 티라면 티였다. 30여분만에 우도를 빠져 나온 우리는 세화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자전거가 또 말썽을 부렸다. 알고 보니 스테이플러 심이 바퀴에 박혀 있던 것을 안 빼고 바퀴만 갈았던 것이다. 결국 병승이와 원혁이가 다시 성산으로 수리를 하기로 하고 병채, 세일, 나는 먼저 세화에서 민박을 잡아 두기로 했다. 세화 가는 길은 시원스레 뚫린 도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힘에 부쳤다. 결국 세일이와 병채를 한참 앞서 보내고 도로 한 가운데서 휴식을 취했다. 비도 조금 쏟아지면서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마냥 추욱 늘어져 시간을 보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무거운 다리를 놀렸다. 다행히 세화는 머지 않은 곳에 있었고 얼른 여장을 풀었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우리의 제주도 일주는 초콜릿이 되어버린 피부를 그 증거물로 남기려 하고 있었다. 감자를 사다가 썰어서 초콜릿을 녹여보려 했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물론 이 날도 간식 잔치를 벌였음은 물론이다. 다음날 우리는 이제 출발지를 향해 달렸다. 다시 뜨거운 햇빛이 우리를 괴롭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다. 무언가에 떠밀리는 힘이 느껴졌다. 지난 나흘 간 부지런히 밟아 온 페달의 관성이랄까. 비록 한결같이 느릿느릿한 속도로 꼴찌를 달렸지만 마음만은 쌩쌩 달렸다. 우리의 마지막을 축하하는 듯한 함덕 해수욕장의 옥빛 바다는 흥취를 돋구었다. 이대로 끝내기 못내 아쉬웠던지 국립 제주박물관 근처에서 와장창 넘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목포로 향하는 배 안에서 원혁이의 의미심장한 말이 기억난다. “완전 만신창이가 되었구만...”^^; 조금 깊게 생채기가 났던지 다리에 힘 주는 게 따끔거리는 것이 마뜩잖았다. 결국 자전거에 내렸다가 올랐다가 하기를 수 차례 하면서 제주 시가지에 힘겹게 입성했다. 나 때문에 행군이 늦어진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자전거를 탔다 내렸다를 반복하다보니 또 저만치 뒤쳐져서 혼자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을 만나게 되었다. 경복궁을 대여섯 번 다녀 온 고궁 마니아로서 제주목 관아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많이 지체된 길이 죄스러워 그만 두고 힐끔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관덕정은 복잡한 제주시내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관덕정은 활터라고 하는데 그 이름 예기(禮記)에 나오는 '사이관덕(射以觀德)'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활 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덕을 본다'라는 의미로, ‘시합이나 내기를 해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다'라는 뜻이다. 그 점에서 나는 점수를 별로 못할 것 같다. 내기나 시합, 뽑기 등에는 여간 소질이 없는 나는 아예 그것들을 피하기 때문이다. 관덕저의 편액(扁額)이 힘있는 필치로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안평대군의 필치라고 한다. 그러나 관덕정에서 마냥 들뜨는 기분만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 까닭은 여기서 20세기 한국사 최대의 비극으로 손꼽히는 4.3 항쟁의 흔적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947년 삼일절 날, 28주기 3.1 운동 기념식을 끝내고 해산하던 도민들을 향한 미군정의 총격으로 무고한 도민들이 살상되는 사건이 여기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 후 무차별 발포에 항의하는 전도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이에 대한 미군정의 계속적인 탄압으로 급기야 다음해에 4.3 항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곳이다. 최소 10% 이상의 도민들이 살상  되었다고 추정되는데도 가해자가 없는 이 기막힌 사건은 제주도의 마지막 여정을 찜찜하게 했다. 얼마전 정부가 민간인 살상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했다고는 하나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는 것 같다. 하기사 현대사에 미스터리가 한 둘이 아니었지만은 앞으로 이 땅에 이런 일이 없으리라 확언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숱한 이들의 노고를 먹고 진보한 역사의 열매를 향유하는 뒷사람의 행복이다.



드디어 출발지의 제주 하이킹 본부에 도착했다. 이 때가 26일 오후 3시였고, 22일 오후 2시 반경에 출발해서 4박 5일간 달려온 쾌거였다. 아이슬란드 속담에 집에만 있는 아이는 어리석다고 했다. 이번 제주도 하이킹은 과연 나를 어리석음에서 구제해 주었을까? 아마도 나는 다시 게을러지고, 운동은 여전히 멀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의 추억은 값지게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도 거의 못타는 나를 데리고 다니느라 지루하게 기다렸을 친구들... 병승, 원혁, 세일, 병채... 모두들 미안했고 고마웠다. 친구들 덕분에 이런 제주도 완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친구들 아니었으면 내가 감히 이런 일을 꿈이나 꿔볼 수 있었겠는가...



제주시내의 민박집에서 느긋한 휴식을 즐긴 우리는 다음날 바다를 건너 일상으로 복귀했다. 다시 무료한 일상으로 돌아가도 제주도의 그 뜨거웠던 여름햇살과 온 몸을 적셨던 굵은 땀방울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인생만사 놓고 보면 하나하나 여행길이다. 그 여행길에서 함부로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내가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두렵다. 6(^.^)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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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기 2부

문화 2003. 8. 12. 14:34 |
아침에 일어나니 이슬비가 살포시 내린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원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전날의 놀란 몸뚱이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지 아직도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어제 세일이와 모의한 관광모드로의 전환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터에 푸짐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 민폐만 끼쳐드리는 것이 아닌지 영 죄송스러웠지만 이 글을 빌어 다시금 감사 드린다는 말씀을 올리는 수밖에. 다시 짐을 꾸리고 협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나는 페달과의 투쟁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눈빛으로 고민을 마주하던 세일이와 나는 “일단 좀 가보자”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결국 자전거 안장에 몸을 싣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완주 대신 반주라도 하는 수밖에. 중문관광단지에서 다음을 도모해야겠군.”



어제의 고난이 밑거름이 되어 이제는 다행히 자전거 출발과 방향전환이 수월해졌다. 내심 흥도 나면서 페달을 돌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득이 근처 학교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약간의 뒤에 실은 짐들에 방수처리를 하며 비가 좀 그치기를 기다렸다. 제주도에 있는 학교들은 참 색깔이 화려하다는 느낌을 많아 받았다. 서울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색동옷을 입은 학교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게다가 높지 않은 아담한 규모가 잇따른 증설로 운동장도 잡아먹고 숨을 막히게 하는 서울의 학교들과는 달리 여유와 푸근함이 느껴졌다.



소나기가 그치고 다시 여정을 재촉했다. 그러나 내가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뒤에 싣고 가던 돗자리의 끈이 자전거 바퀴에 칭칭 감겨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바퀴가 뻑뻑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때 멈췄으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저 부지런히 페달을 밟다가 줄이 엉킬 대로 엉켜버린 것이다. 결국 병승이의 휴대용 칼로 줄을 끊어내고 다시 출발을 했지만 안 그래도 지체된 길을 더 느리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도 짐을 묶는 끈이 바퀴에 감기는 사고를 치고 만다^^;)



어느덧 햇빛이 비치고 젖은 옷들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초콜릿박물관 안내표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급한 길이지만 그렇다고 볼거리들을 마냥 스치고 지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박물관을 가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표지의 5km라는 거리의 위압감에 친구들이 망설였지만 나의 간곡한 호소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천만다행으로 들어가는 거리가 5km 보다 짧아서 어찌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돌로 아담하게 지어진 건물이 동심을 일으키려고 무던 애를 썼다. 초콜릿 몇 개 맛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들어섰으나 헛된 기대였다는 것이 밝혀져서 허탈했다.^^;



뭔가 잔뜩 초콜릿 역사 등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전혀 눈에 가지 않았고 초콜릿 껍데기와 견본 전시도 그림의 떡이니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공짜 초콜릿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뒤에 우리는 한층 풀이 죽었다. 1년 내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낸다는 카페에서 사진을 좀 찍으며 안장에 시달린 엉덩이를 달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초코홀릭인 나로서는 여간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했던가. 공짜라니 이러려니 하는 수밖에.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건 양반이구나 싶었다. 비싼 값 요구하면서도 알맹이 없는 상도덕이 떨어진 것들도 많은 판에 이 정도쯤이야.



또 한참을 달리다가 고행길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송악산이 펼쳐진 것이다. 동산이기는 하지만 평지보다야 힘이 더 드는 것이 당연지사. 조금 샛길로 빠져서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다가 말이 방목되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흔히들 회자되는 ‘말자지’의 실체를 확인하고 친구들은 경악했으나 나는 그저 몸집이 크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문득 한 시구가 떠올랐다.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 문정희,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中



그러면서 사마천을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라고 노래하고 있다. 평생 남의 눈치를 살피며 기둥 크기나 재다가 갈 것인지, 아니면 기둥일랑 내던지고 순수한 열정을 연료 삼아 타오를 수 있는 멋진 사내가 될 것인 지의 물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사계리 해변도로를 달리며 신기한 모양의 섬 두 개를 보며 재미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아본 결과 이 섬이 형제섬이었다. 크고 작은 섬 두 개가 형과 아우처럼 마주보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썰물 때면 모습을 드러내는 갯바위들이 있어 보는 방향에 따라 섬의 개수와 모양이 달라진다는데 내가 본 것은 딱 두 개 뿐이었다. 시원스레 달리다가 용머리 해안에 당도했다. 해안 언덕 모양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과 닮아 이름 붙여졌는데 바닷바람이 바위를 이리저리 파놓은 모습이 장관이며,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힌다. 들어가 했으나 높은 파도로 입장이 불가능해서 부득이 근방에 나와서 사진 하나 찍는 걸로 만족해야했다.



이제 또 다른 난코스인 산방산을 오르게 시작했다. 오르막길의 연속이라 자전거를 끌고 하염없이 올라가야 했다. 산방산은 큰 바윗덩어리가 하나 덩그러니 있는 형상이라 마치 어떤 큰 산의 봉우리를 쏙 뽑아도 놓은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본래 한라산 정상이던 것이 뽑혀 산방산이 되고 그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산방산 아랫자락에서 계단으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산방굴사가 나온다고 하지만, 이미 페달을 돌릴 여력을 소진해서는 안된다는 판단 하에 올라가지 않기로 합의했다. 해안을 바라보며 마시는 물 여러 모금이 마음을 씻어주었다. 본래 물을 즐겨 마시던 나는 이번 여행 내내 철저한 ‘워터홀릭’이 되어 버렸다. 무언가의 부재는 고통스럽지만, 그 부재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갈증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다. 물을 자꾸 마시면 자전거 운전에 지장이 있다는 친구들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아낌없이 들이켰다. 가늘게 나오는 신음소리를 벗삼아 오르다보니 어느덧 내리막길이 보였고 나는 산방산 탈출(?)에 쾌재를 불렀다.



이제 목표 지점인 중문을 향해 달렸다. 약간 길을 헤매는 바람에 날이 어두워졌지만 서둘러 천제연(天帝淵) 폭포로 향했다. 천제연 폭포는 ‘하느님의 못’이라는 뜻으로 한밤중이면 옥황상제의 일곱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폭포야 비가 온 후 가서 보는 것이 물줄기도 크고 제 맛이라고 하지만, 물안개가 자욱해서 경관을 즐길 수 없었다. 3개로 나누어진 폭포를 모두 둘러보는 데 자전거에 시달린 다리를 이끌고 가려니 정말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울창한 수풀이 폭포만큼이나 호젓하게 다가왔다. 천제연 계곡에는 선녀 상을 조각한 선임교라는 웅장한 아치형 다리가 있는데 그 아래로 내려다보는 안개 속에 쌓인 폭포수는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선임교를 건너면 보이는 천제루라는 누각이 딱 내 취향이었으나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보고 오를 마음이 싹 사라졌다. 물안개에 몸도 마음도 젖어 눅눅한 기분에 휩싸였다. 무거웠다.



서둘러 민박집을 잡고 무거운 몸을 풀었다. 낙지전골,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시켜 푸짐한 저녁을 먹고 나니 무거운 기운이 가시는 듯했다. 맛난 저녁을 먹은 후에 근처 할인매장에서 각자 선호하는 간식을 하나씩 골랐다. 내가 고른 초코파이를 비롯해 수박 반쪽, 강정 등을 펼쳐놓고 후식도 거나하게 즐겼다. 이 날부터 저녁 먹고 난 후에 각자 선호하는 간식 고르기는 여행 끝까지 계속되었다. 방정맞은 군것질도 여행길에서는 낭만으로 둔갑해버린다.^^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부터 햇살이 무척 따가웠다. 우리는 제주도 최고의 관광명소인 중문 관광단지로 향했다. 깨끗이 단정된 거리와 쭉쭉 뻗은 야자수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신라, 롯데, 하얏트 등의 특급 호텔들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황홀하던지. 중문해수욕장에 인접한 호텔 산책로를 즐기는데 무더운 날씨라 연신 헐떡거리기만 했다. 물살은 꽤 거칠게 일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정도 가지고 이 찌는 더위를 식히기는 역부족이었지만 말이다.^^;



찌는 듯한 더위에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할 곳을 찾기로 하고 제주국제컨벤션센터로 향했다. 에어컨 바람에 더위를 식히니 좀 나아진 것 같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가 봤으나 그 화려한 가격에 경악하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종영한 드라마 ‘올인’의 무대가 되었던 곳인 것 같은데 ‘올인 샌드위치’라는 메뉴의 가격을 보고 다들 입을 모았다. “올인 샌드위치 먹다가 올인 나겠네.”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형편이 된다면 이런 곳에서 샌드위치 뜯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널찍한 공간에 은은한 음악에, 색다른 맛을 즐기는 것이 뭐 어때서. 학교 앞 식당에서의 밥 몇 끼 식사라고 계산 두드리는 것은 옹졸한 처사다. 개인적으로 여행하면서 뭔가 해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엠티 같은 것을 가서 고기 구워먹고 라면 끓이는 것 정도야 재미로 넘기지만) 몇 끼 해먹는다고 절약하면 얼마나 절약한다고.



‘무전여행’이라든가 돈 몇 만원 딸랑 들고 가는 여행도 그리 달갑지 않다. 이런 여행길은 결국 이런저런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데, 본인이야 멋진 경험을 한다며 뿌듯해할지도 모르지만, 남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뿌듯함은 나로서는 영 삐딱하게 보인다. 첫째 날 병승이 선배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어찌나 죄송스러웠는데 뱃삯만 덩그러니 들고 떠났다느니 하는 무용담(?)은 불편하기만 하다. 여행을 갈 때는 돈을 쓰러간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나의 신조다. 안 그래도 소비 위축으로 난리라는데, 내 지갑 안 열면서 남의 지갑 열리기 바라는 것도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 아니겠는가.^^; 짠돌이 인생이라도 흔치 않는 여행길에는 너무 아끼지 말자. 여행에서의 궁상은 더욱 초라할 뿐이다. 멋을 즐기는 인생은 결국 얼마만큼은 낭비하며 가는 길이다. 아까운 기분으로 먹고 마시고, 약간의 헤픈 씀씀이에 취하는 것이다. 비단 여행길뿐만 아니라 시시콜콜한 일상 속에서도 가끔의 사치는 생활의 활력이 되어 준다.



결국 이 곳에서 끼니 때우기를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지삿개를 보러 떠났지만, 나와 병채는 건물 안에서 에어컨 바람에 푸욱 빠져 있었다. 지삿개를 다녀온 친구들이 좋았다며 흥분해서 이야기할 때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에어컨 바람의 효용이 그 어느 것보다 컸기 때문일 것이다. 지삿개는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나오는 주상절리를 말한다. 이것은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모양으로 굳은 것으로 용암이 바닷물을 만나 냉각되면서 압축력을 받아 수축작용에 의해 생겨난 틈이 절리이고, 그 형성상태가 기둥 모습이어서 주상이라 부른다. 찍어온 사진 몇 장으로 그 기운이 제법 느껴질 정도로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장관이다. 파도가 절벽을 때리면서 절벽과 물거품의 흑백대비가 그리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근처 매점에서 팥빙수와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게 된 우리는 이번 여행의 최고 한 마디를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된다. 그 내용인즉슨, 날이 더운 터라 팥빙수만 먹기로 했으나 못내 아쉬워던 병채의 권유로 컵라면도 먹기로 한다. 컵라면을 주문하러 들어간 병채왈, “라면도 좀 먹어야겠는데요...” 우리는 동시에 자지러졌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통상 ‘라면 3개 주세요’ 라는 정도의 표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 미묘한 어감이 주는 해학은 대단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놀거리 많다는 중문 관광단지를 너무 가볍게 지나쳤음을 일주 막바지에 들어서 깨달았지만, 당시는 얼른 전진하자는 일념밖에 없었다. 날은 덥고, 오르막은 달릴만하면 나오는터라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려가며 힘겹게 나아갔다. 자꾸 뒤쳐진 나는 늦게 도착한 죄로 친구들보다 쉬는 시간도 적은 터라 자꾸만 중간중간 멈취 서기 일쑤였다. 홀로 천천히 달리면서 몸은 참 정직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조금 더우면 땀이 나고 발이 아프면 통증이 찾아드는 것은 어김이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애써 본심을 숨기고, 자기합리화로 방어를 하기 급급하며 위선으로 치장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몸은 그 자체로 너무나 솔직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비루한지도 모르겠다. 동서양의 숱한 철학자들이 몸에 대해 질시를 보낸 것도 몸의 감추지 못하는 속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참의 오르막을 지나고서 만나게 된 외돌개 가는 내리막길은 무척 구불거리고 가팔랐다. 이곳은 사고가 잦은 지역이라 초심자로서는 브레이크를 요령 껏 잡아가며 속도 조절을 해야했다. 어린 시절 자전거 뒷 안장에 타서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다가 사고를 당한 기억이 있는 터라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난을 떨었던 덕분인지 별탈 없이 난코스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행 중에 나 혼자만 여행자 보험을 가입했다. 도저히 보험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자전거에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었을 때 나를 이끈 건 팔할이 여행자보험 3000원이었다.^^; 외돌개는 말 그대로 외롭게 자리한 20미터 높이의 기둥바위이지만, 내려가는 계단을 보고 생략하기로 결정했다. 외돌개 꼭대기에 있다는 외돌개보다 더 외로운 해송 한 그루를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시원한 곳이 필요하다.



--- 자전거를 벗삼아 떠난 제주도 여행기 3부를 기대하시라...^^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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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시절 날림으로 읽고 썼던 장자 독후감... 고작 이런 횡설수설 쓰는데 12시간 동안 컴 앞에서 거의 자리를 뜨지 않고 자판만 눌러대던 참으로 그리운 집중력을 발휘했던 기억이 납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도 올렸습니다)


[양심 있는 개인주의자 - 장자를 읽고]

  ‘장자’하면 내가 떠오르는 것이 하나가 있다. 아내의 죽음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그것이다. 어찌 아내의 죽음에 노래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는 답한다. “괴로움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는 즐거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어찌 울고불고 하고 있겠는가?”라고. 이렇게 죽음을 계절이 변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대인의 풍모가 내가 장자에 들어가기 전의 편견 아닌 편견이다.


  장자를 읽고 가장 먼저 든 느낌은 “난감함”이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을 잠시 빌려 표현한다는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을 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장자에는 우화와 비유들이 가득하다. 공자가 등장할 정도로 별의 별 사람들이 등장하고 숱한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것을 가만히 읽고 있자니 머리가 아플 정도다. 주인공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도 없어 보인다.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으로 이루어졌다. 대개 내편은 장자의 저술로, 외, 잡편은 후대의 저술로 본다. 그런 외, 잡편이 우화로 이루어져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한 반면 내가 건드린 내편은 난해한 사상으로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뭐 100% 이해를 목표로 한 것도 아니었기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내가 알 수 있는 만큼만 장자를 음미해 보려한다. 노자도 知足不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편에 속하는 2편 제물론을 중심으로 나의 장자 읽기를 풀어보겠다.


  이제는 식상하기 조차한 “반잔의 물”비유를 꺼내보자. 그 반잔의 물을 보고 하는 말을 두고 긍정적,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이 반 밖에 없네”라는 반응보다는 “여기 물이 반이나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는 암묵적인 강요도 덧붙여서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물 반잔을 놓고도 사람을 나누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자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기 물이 반 있구만...” 어떠한 가치판단을 버리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을 기르라는 장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말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장자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여기 오이 한 접시가 가득 있다고 하자. 나같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잘 씻어서 아삭 깨물어 먹고 싶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다면 오이마사지를 떠올릴 테고, 달팽이를 키워 본 사람은 오이를 썰어서 달팽이 먹이로 주고 싶을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오이를 두고서 사람마다의 반응이 다르다. 그런데도 장자의 말대로라면 “오이 한 접시가 있네”라고만 말하고 만다는 것인데 과연 합당한 것인가?


  어떤 사물이 있는데 그것의 가치판단을 넘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만 바라보라는 그의 말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칸트는 자신의 인식론을 기존의 인식론을 획기적으로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하며 말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인식론은 주어진 명백한 대상을 놓고 우리가 인식해 가는 것이었다면, 칸트의 인식론은 그냥 주어진 대상을 우리가 여러 가지 범주를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인식해 낸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끼는 것임에도 말만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든 ‘오이의 비유’가 바로 칸트의 인식이론에 따른 것이다. 칸트는 자신의 인식이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르며 자화자찬(?) 했지만 2000여 년 전의 장자는 이런 칸트의 노력조차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물 반잔의 비유’에서는 그저 “물 반잔이 있네”하고 담담히 바라볼 수 있던 내 눈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칸트의 인식이론을 들먹이며 다시 생각해보니 장자의 말이 영 신통치 않아 보이는 것도 결국 나 또한 어떤 가치에 빠져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된 것이다. 또한 장자와 칸트를 놓고 누구의 견해가 옳은 것인가 따지는 것마저도 장자의 입장에서는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리니... 독자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보아 아마 장자는 독자중심의 글쓰기를 배우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


  논의를 더 확장시켜보자.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가 있다. 장자는 원숭이의 비유를 들면서 따지고 이해득실이나 따지는 세계를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한 쪽에 치우치지 만도 않고, 독단과 독선에 빠지지도 않으며, 양쪽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하늘의 고름(天鈞)’에 머무는 것, ‘두 길을 걸음(兩行)’이라고 말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부산하게 좇아 다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고 받아들이라는 것을 다른 표현을 들어 연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원숭이의 눈으로 보자면 두 길을 걸으라는 이야기는 줏대 없는 회색분자일 따름이고, 무책임한 양다리 걸치기 같아 보인다. 참 힘든 노릇이다.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 어느 쪽이 거처에 대해 바르게 안 것일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맛을 바르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구절은 내가 장자를 통틀어 가장 감명을 받은 구절 중에 하나다. “인의니, 시비니 하는 것들은 이렇게 주관적이라서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가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있겠느냐?” 는 장자의 말이 익살스럽다. 오이의 비유에서 말했듯이 사람마다의 반응이 천양지차인데 어느 것이 옳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표현을 빌린다면 비틀즈의 “Let it be"라는 것이다)


  짧은 소견으로 대략 결론을 내린다. 장자는 오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견해만을 옳다고 목소리 내지 말라는 것이다. 인의니, 시비니 하는 것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 형성된 특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보편타당한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선악, 미추, 우열, 귀천의 분별은 그 누가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런 것에 매여 살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석연치 않은 점이 남는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인의나 시비의 분별을 거두라는 것이라면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장자의 말대로 라면 그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만 외치다 끝나는 것 아닌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이 아니고서야 오늘날의 방대한 규모의 조직과 단체에서는 어느 하나로의 선택의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까. 이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다수결’에 대한 장자의 생각을 찾아 뵙고 묻고 싶다. 장자의 견해에 따르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했으니, 많은 의견 중에서 어느 하나로 선택되는 것은 억지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까? 다수결의 논리는 필요악이라고 말씀하실까? 아니면 다른 비유로 나를 깨우치게 하실까?


  죄송하게도 다시 칸트를 들먹인다. 칸트는 위에서 말한 인식론으로 지각한 내용으로 판단한 것이 ‘물자체’와 일치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각내용과 물자체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칸트의 상대주의에 대한 대목에서야 비로소 장자와의 공통점을 찾은 것 같다. (온갖 인위로 점철된 유사점 발견이다) 장자와 칸트는 절대주의를 부정했다. 다양한 가치와 인식이 공존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기 일쑤인가? 그것은 자신의 인식과 가치, 자신이 믿는 바가 ‘자기자신’이라고 하는 특수한 범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런데 너는 왜 안 그래?”라는 오만한 논리로 무장하는 것이다. “우리 때는 이랬는데 요즘 것들은 그렇지 않아.” “나는 군대 가서 힘들게 고생했는데 너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외치면서 왜 안 가려고 해?” “누구는 재수하느라 고생인데 너희들은 대학 갔다고 주말마다 만나서 노냐?” “그 사람은 내가 봤을 때 정말 아닌데 넌 왜 자꾸 그 사람이랑 사귀려고 하는 거야?”... 이런 식의 숱한 이야기들이 결국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서 남을 나에게 맞추라는 폭력이 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장자가 상대주의, 다원주의를 옹호하면서도, 저가 잘났다고 우기는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의 편협성에 질려 시비를 가르는 것을 그토록 혐오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잣대로 남을 재단하려고 하는 오만을 부리는 것, 그것을 장자는 거부한 것이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살펴보자. 장오자가 여희라는 미녀가 처음에는 대궐로 가기를 슬퍼하다가 왕과 함께 호의호식하자 울었던 일을 후회하였다는 말을 하면서,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여희가 처음에는 집을 나서는 것을 싫어했지만, 새로운 세상에 가서 호강을 하자 집을 떠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듯이, 우리의 삶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확장시켜보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에 익숙한 나는 다른 알지 못하는 나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생무상하고 끊임없이 우리는 변화에 놓이게 된다. 예전의 나가 편해질 만 하니까 무상한 세상이 다시 나를 다른 곳으로 가라고 떠미는 격이다.


  대학 새내기만의 특권으로 ‘사월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는 3월 한달 정신 없이 지내고 4월을 맞이하고 보니 막상 기대하고 있던 대학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이 몰려와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나를 포함해서 사월증후군에 시달리는 이 들에게 장자가 짐짓 이렇게 타이르지 않을까? “고민만 하고 눌러 앉아 있지 말라”고. 충분한 고민과 성찰 뒤에는 자기 속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시련을 헤쳐나가서 새로운 나를 찾아가라고 말이다. 삶의 모든 일들은 무상하기만 하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행복할 수 있을 수 있지 않는가! 이 ‘무상의 역설’을 우리는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유명한 ‘나비의 꿈’을 살펴보자.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정녕 알 수가 없다.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인생이 한바탕의 꿈이라면 참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설령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 할지라도 일단은 모두 진실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 수 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끝내 지금의 삶이 꿈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된다. 나비가 되었으면 열심히 꽃들 사이로 날아다니고 장자가 되었으면 열심히 자기 주장을 펼치라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얼마 전 소개받은 과학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야기인즉슨, 두 입자가 거리와 무관하게 결합되어 상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얽힘현상’으로 조그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물체의 원격이동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내가 여기 있지만 한순간에 저기 있는 것이 가능 할 것이라는 얘기다. 장자가 설마 이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중점적으로 살펴본 제물론의 주제인 ‘제(齊)한다’는 것은 ‘하나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하나’는 전체주의적인 획일화가 아닌 다양함이 존중받고 어우러지는 하나됨을 말한다. 좁은 시야에서는 구별되어 보이는 개개의 사물들이 크게 보면 하나로 통일되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꾸 분리하고 구별해대지만, 크게 보면 모두 같다는 깨달음이다.


  장자는 ‘어느 쪽이 바르게 알겠는가’ 라는 물음에서 핏발 세우며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옳을 수 있는 상태를, 여희의 이야기에서는 지금의 나를 고집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경지를, 나비의 꿈에서 가치적 편견과 주관적 독선에의 초월을 노래하고 있다.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로 통한다. 오리다리가 짧다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유롭게 노닐도록 두는 여유를 장자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다수결을 언급하면서 장자가 현상을 탁월하게 분석했지만 대안제시에는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장자는 이렇게 그럴듯한 해결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자는 참으로 ‘양심 있는 개인주의자’라고 평해본다. 남을 철저히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행복의 극대화를 위해 편견의 벽을 허물고 상식의 틀을 바꾸는 부단한 노력을 하는 그에게서 대자유를 느낄 수 있다.


  달팽이 뿔 위에서 아옹다옹하는 우리들에게 장자가 엷은 미소로 말하는 것이 들리는 듯하다. “허허... 좀 더 너그러워 지면 될 것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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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기 1부

문화 2003. 8. 1. 03:52 |
(2003년 7월 21일부터 6박 7일의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익구가 허접한 여행기를 써봤다)

21일 밤기차로 출발해서 27일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싣기까지 6박 7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여행은 어쩌면 집의 소중함을 느끼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밖으로 나다니는 것에 엄청난 에너지 소진을 느끼는 녀석에게는 이번 여행은 참으로 각별한 감회에 휘감기게 한다. 아직도 여독이 덜 풀렸는지 자꾸만 늘어지는 나른한 몸을 추스르며 조촐한 여행기를 열어본다.



일주일간의 여행이 시작되는 7월 21일에는 마냥 늑장을 부렸다. 밤 11시 40분 기차다보니 낮잠에 흠뻑 취해 있다가 주섬주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인 4시를 훌쩍 넘겨 5시가 더 넘어서야 약속장소인 학교에 겨우 도착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며 조금은 축축한 날씨가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함께 떠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이래저래 시간을 때우다가 9시 즈음에서 출발지인 서울역으로 향했다. 호남선을 타는 것은 처음이라서 약간 설레는 마음을 가져보려고 했으나 역시나 그다지 설레지는 않는다. 재미난 것은 무궁화호를 탄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고등학교 엠티 간답시고 통일호 입석에 시달리다가 안락한 무궁화호에 몸을 실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피식 웃어 보였다. 새로운 여정에 대한 설렘보다는 보다 편안한 기찻길에 대한 만족이 지배하는 나를 애써 부정하지 말자.



11시 40분이 되어 목표행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하였다. 심야 기차라 제법 운치를 느껴보려고 했으나 차창에 비추는 야경은 그리 멋있지 않았다. 나름대로 멋을 내려고 책을 펴들었으나 조명이 너무 어두워 서문만 눈에 힘주고 읽다가 집어넣고 스르르 잠을 청했다. 대전 근방을 달리고 있을 때 눈을 잠깐 떠보니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 창 밖을 응시해봤으나 선로 밖의 풍경은 어둡기만 했을 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어서 시흥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또 졸음에 호응했다. 어느덧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로 접어들었다. 그제서야 내가 호남선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열차 안의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열차에서 호남사람들이 꽤나 있음을 느꼈다.



친가, 외가가 모두 영남이고 비록 5개월 살다가 서울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나도 엄연히 대구가 고향이다. 솔직히 호남사람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접하지는 못했다. 애써 부정하지만 나도 조금은 호남에 대한 편견에 물들어 있다는 반증일까. 갑자기 무슨 적진에 뛰어든 사람마냥 경계심이 마구 발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생김새를 관찰하며 뭔가 트집을 잡을 것이 있나 승냥이처럼 눈을 돌려대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괜한 긴장을 품고 있는 눈에 힘을 빼고 창 밖을 국면전환용으로 돌아봐야 했다. 그간 내게는 없다고 믿고 있는 영남인으로서의 프레임이 사실은 없던 것이 아니라 애써 감춰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살면서 호남지방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지역주의 타파를 입으로 외치고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하며 정서적으로 半호남인이라고 여기던 내가 보였던 경계의 눈초리는 처음 달리는 호남선의 공기만큼이나 낯설었다. 전라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질타하던 나는 내 실존의 떨림 앞에 무척이나 놀랐다. 역이 몇 개 지나쳤지만 개운치 못한 기분이 계속되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즐거운 여행길에 이게 웬 낭패란 말인가. 궁하면 통한다고 약삭빠른 잔머리가 다행스레 작동해주었다. 결국 미묘한 낯설음과 찌푸림에 관대하지 못할 정도로 호남에 대한 애정이 두텁다는 해설을 늘어놓았다. 지역차별의 굴레와 부당한 인식 앞에서 半호남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유효하다는 다짐까지 하는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이 날의 다짐은 분명 무언가 부재 하는 것을 메우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잠결에 괜스레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니 잠이 확 달아나서 좀처럼 눈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결국 아무런 생각 없이 차창을 바라보며 어둠을 벗하는 수밖에 없었다. 22일 새벽 5시 15분에 종착역인 목포역에 당도했다. 아침 9시 제주도로 가는 배를 기다리기까지 무척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북적이는 여객선 터미널의 습한 기운에 한창 시달리고 있을 때 다행히도 승선 시간이 되었다. 무척이나 큰배에 올라타 제주도를 향한 바닷바람을 맘껏 쏘이니 무척 유쾌했다. 배의 속도와 바닷바람이 합쳐지면서 무척이나 강한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지만 갑판에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아 들였다. 그러나 바람은 무척 세차게 불었고 비까지 조금 쏟아져서 재빨리 사진 몇 장을 찍고는 3등 객실로 돌아왔다. 배 멀미는 없었지만 배의 흔들림에 책을 읽기는 불편해서 머리맡에 두고 몸을 누이니 기차에서 말끔히 없애지 못한 졸음 녀석이 찾아왔다. 차멀미, 배멀미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은 없다. 다만 졸음이 그 자리를 대체할 뿐이다.^^



오후 1시 30분이 되어 제주도항에 도착했다. 한나절을 소비하며 달려온 제주도에 발을 디디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비행기를 타는 것과의 손익계산이었다.^^; 왕복하면 거의 하루 꼴이 되는 제주도 길은 조금 비싸지만 시간을 현격히 줄일 수 있는 하늘길을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남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주판을 굴려댔다. 제주도항에서는 제주 하이킹 직원분이 나와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참 잊고 있었다. 제주도를 온 목적이 자전거 하이킹이었다는 것을. 자전거라고는 초등학교 시절 잠깐 타본 것이 전부인 나로서는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에 몸서리치기 시작했다. 뜨아아~ 여기서 한 명의 친구가 더 합세해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일행이 되어 페달을 밟으러 제주 하이킹 본부로 향했다.



여기서 함께 온 친구들을 소개해야겠다. 세일. 그는 대학 새내기시절 2학기가 되어서 알게 된 친구다. 내 기억으로는 세일이가 먼저 반갑게 아는 척을 해주면서 가까워지게 되었다. 본인은 사교적이지 못하다고 자책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소수의 친구들에게 진정으로 잘 대해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친구다. 원혁. 그는 세일이와 단짝으로 같이 다니다보니 세일이를 알게 된 뒤 함께 알게 되었다. 과묵하지만 그 뒤에 감쳐진 촌철살인의 능력이 대단하다. 세일이와 더불어 성실함으로 나를 감복시킨다. 병채. 그는 1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뉴요커로 살다 왔다고 한다. 뭐 그 덕분에 아직도 대학 새내기 시절을 만끽하는 행복한 친구다. 세일, 원혁이랑 마찬가지로 어눌한 편이지만 무척이나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자존심도 강한 친구다. 병승. 원혁이 친구로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게 된 친구다. 다른 네 명과는 달리 무척 쾌활하고 이야기도 잘 풀어내는 친구다. 이 친구의 말들에 맞장구 치는 것만 해도 숨이 찰 정도로 여행기간 내내 활력을 불어넣어 준 친구다.^^



이렇게 네 친구와 나를 더해 다섯 남자들이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위해 뭉쳤다. 솔직히 난 자전거로 제주도 완주하려는 목표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고 발을 동동 굴렀다. 짐짓 태연한 척 했으나 걱정이 태산같았다. 일단 두발 자전거를 탈 수 있을 지부터가 문제 아닌가. 지금도 그렇지만 예체능 분야에는 천부적 무소질로 일관했던 나는 특히 운동 분야에서 그 특질이 두드러졌다. 내가 게으름을 예찬하고 집구석의 사색을 옹호하는 것은 운동을 싫어하고 몸을 움직이며 떨구는 땀방울에 대한 혐오감에 기인한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초등학교 시절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를 힘겹게 타다가 정말 어렵게 보조 바퀴를 떼고 두발 자전거를 타려고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이제 겨우 두발 자전거를 탈 수 있을 즈음 자전거를 도난 당하는 바람에 그 후로는 자전거를 발에 대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 앞에 놓여진 두발 자전거의 압력이 나를 짓눌렀다. 뭐 그래도 한 번 타봤으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거라며 격려해주는 친구들을 위해서도 이를 악물고 자전거에 올랐다. 몇몇 오르고 내리기를 씨름하다 페달에 발이 긁혀 생채기가 났다.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은 않고 얼른 자전거를 운전해야겠다는 일념에 휩싸였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친구들이 내 짐을 나눠서 들어주었다. 어찌나 고맙고 미안하던지. 사람은 자기가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수준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지만, 거기서 나아가 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는 미안한 감정이 마구 솟아오르는 것 같다. 제 무능을 합리화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넘어 타인의 선행을 입을 때는 변명하기가 난처해지는 것은 그래도 낯짝 있는 인간의 도리다.



내 자전거를 더없이 가벼워졌지만 내 마음은 좀 더 무거워졌다. 자전거도 잘 못타는 주제에 짐을 왕창 챙겨온 내가 얄미웠다. 이런 미안함, 고마움을 달래기 위해 자전거 페달과 좀 더 익숙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물론 좀만 언덕이 있다거나 좁은 길이 나올 때면 자전거를 멈추는 바람에 일행의 속도를 자꾸만 떨어뜨렸다. 대학 새내기시절 현대기업경영 생산관리 파트에서 나왔던 명제가 나를 포함한 친구들의 머릿속에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가장 늦은 것은 전체 속도를 좌우한다” [더 골](The Goal)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행군폭을 최소화하면서 행군의 속도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는 대열 앞에 있는 이들이 가장 늦은 녀석보다 속도를 더 내지 못하도록 하는 해법을 제시한다. 좀 더 응용하면 원자재 투입시기와 병목자원을 연결시키는 신호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각설하고.



어쨌든 그 개념들을 떠올린 친구들이 합심해 나를 선두에 두고 행렬을 줄이려는 숱한 노력을 하지만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임을 꽤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여정의 7할 이상을 내가 꼴찌로 달렸으니까.^^; 친구들에게는 추월의 쾌감을, 개인적으로는 절대고독의 시간을 가지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니 그럭저럭 윈윈(win-win)전략이었다고 자부한다.^^ 몇 차례 오르막과 내리막을 접하면서 어느 순간 내가 그래도 자전거맹(盲)을 벗어버렸구나를 느끼게 된 계기는 오르막과 내리막의 인식의 차이를 감지한 순간이다. 처음에는 가속이 붙는 내리막이 위험하기도 해서 브레이크에 손을 대고 긴장하며 가는 터라 싫었다. 그러나 몇 번 지나다보니 페달을 더 밟아도 영 신통치 않게 올라가는 오르막이 더 싫어지고 내리막을 기다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견한다면 불경하다는 소리를 좀 듣겠다만...



일주도로에서 해안도로로 나가니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졌고 거기서 자전거에 완전히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평소 운동을 등한시하던 내 몸뚱이는 여기저기 피로감을 호소했다. 애완견 야니를 데리고 산책 다니는 것마저 없었다면 진작에 나가 떨어졌으리라.^^; 해안도로는 짠기운이 느껴지는 바닷바람이 선선히 불어왔다. 처음에는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도 눈길 한 번 주지 못했지만 자전거에 익숙해지면서 주위 풍경을 힐끔거리며 감상했다. 바다를 보면서도 달려가 발이라도 담그고픈 욕망이 거의 일지 않은 딱 그만큼을 나는 늙어버렸는지 모르겠다. 결국 이번 여행에서 지나친 숱한 해수욕장에서 발 한 번 담그지 않고 그저 파도만 감상하고 돌아왔다.^^;



오후에 출발한 길이라 벌써 어둑해지려고 하고 있어서 우리는 초조한 마음이었다. 서두르는 친구들의 바퀴 굴러가는 것을 따라잡지 못하던 나는 꽤나 뒤쳐지게 되었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급하게 달리다가 결국 옆의 풀밭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속도를 냈다고 해봤자 워낙 저속이었다 보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던 다른 하이킹 여행객들의 안부를 묻는 것을 접하니 얼른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 발의 뜨거운 기운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 수밖에.



밤 9시가 되어서 한림읍 협재해수욕장 근처에 병승이가 아는 선배 집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뭐 다들 오랜 자전거와의 실랑이에 지쳤겠지만 나는 특히나 녹초가 되었다. 점심도 안 먹고 달린 터라 선배 집에서 만들어주신 국수 맛은 달콤했다. 저녁을 먹고 선배형과 병승이의 담소를 듣는 것으로 한참을 보냈다. 특히 술을 매개로 한 이야기들은 재미난 이야기의 단골소재이다. 기발한 술버릇 대목에서는 피곤에 찌든 표정들을 잊고 파안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 친구들과 비단 술자리가 아니라도 재미나게 보낸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반성되었다. 캠퍼스의 낭만이 사라진지 오래라 지만, 대학살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보내는 이야기들 들으며 침만 흘려대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한바탕의 이야기마당도 파하고 잠자리를 정리하면서 세일이와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 정말 도저히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상황을 보고 둘이 빠져서 관광이나 하자는 것으로 대략 의견일치를 보았다. 세일에는 만약에 하는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무척이나 심각하고 딴에는 생존의(?) 절박함에서 우러나와 다른 여행 시나리오의 나래를 펼쳤다. 나 같은 자전거 초심자가 그래도 적어도 평균 이상인 자전거 실력의 친구들과 자전거 완주를 도모한다는 것은 몰염치한 일이라며 도덕의식을 들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일단 두 발 뻗고 쉬고 보자. 그러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리며 속삭여봤다.



‘그래, 모두 내일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서 생각하기로 하자. 그러면 견딜 수도 있을거야.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니까.’


--- 자전거를 벗삼아 떠난 제주도 여행기 2부를 기대하시라...^^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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