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충격 그 후...

사회 2004. 3. 25. 02:53 |
탄핵 충격이 이제야 좀 가시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슬픈 기운이 나를 압도한다. 우선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지 못한 것에 슬프고, 겨우 1년 만에 대통령직에서 밀려나 헌재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도 슬프다.


이 넘치는 슬픔 속에서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 믿고 있는 것을 지켜내는 것은 막연한 확신이나 근거 없는 낙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처절한 가르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주된 생활습성인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이번 사태로 큰 타격을 입은 셈이다. 이번 탄핵 폭거는 인간 합리성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해줬다는 점에서 개인사적 전환기를 가져다 줄지 모르겠다.


국회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드높은 요즘이지만 나는 여전히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누구도 한 표 이상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민주주의의 대전제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개개인의 의사의 총합에 일정기간 지배력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의회주의의 식탁 자체를 걷어찰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밑반찬을 조금 바꾸거나, 입가심으로 녹차를 내어올지, 박하사탕을 준비할지 정도 같은 수준에 한정될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번 사태는 의회 민주주의의 이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졌다는 것이다. 그간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된 지도자의 권위를 일관되게 인정하지 않고, 모욕하고 트집잡던 이들이 민의를 겸허히 살피지 않고 수적 우위를 밀어붙인 것은 의회주의의 정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들에게 반민주주의 세력이라는 멍에를 씌우는 것에 주저하지 않겠다.


이제 내게 주어진 과제는 그 날의 슬픔을 똑똑이 간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슬픔의 눈물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미소가 피어나고, 인간의 비루함에 대한 원망은 인간에 대한 따스한 배려와 사랑으로 치환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나는 다시 낙관주의에 지친 몸을 기댄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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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3월 10일 저녁 7시경

익구는 탄핵안 발의 소식을 듣다. 159명이나 동조를 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익구는 그냥 가볍게 민주당 이 제 정신 아닌 것들이라고 구박해본다. 이 때까지만 해도 다들 그랬듯이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하다.


장면2. 3월 11일 3교시 행정법총론 강의 시간

친구 청원이와 지루한 행정법 강의를 들으며 농담 따먹기를 하다. 익구가 침울한 모습을 보이자 탄핵안 발의 때문이냐며 물어 온다. 익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청원이는 설마 탄핵안이 의결되겠냐며 걱정하지 말라며 격려해준다. 익구 또한 히히덕거리며 그럼 그렇지라며 맞장구 친다. 강의 시간 내내 계속 딴짓거리 하며 놀다.


장면3. 3월 12일 오전 11시 20분 집구석

익구는 강의가 없는 날이라 여느 때 같으면 정오는 지나야 일어나겠지만 엄마께서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다. 거실 쇼파에서 좀 더 누워볼 요량이었으나 티비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잠이 번쩍 깨다. 이미 상황은 탄핵 소추안이 상정되어 투표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인의 장막(혹은 개떼들)에 가려진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항의 구호가 간간이 들려오는 광경이 벌어지다. 익구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평소 욕설을 안하기로 유명한 익구였지만 참지 못하고 몇 마디 욕을 입에서 웅얼거리다. 결국 탄핵안이 가결되고 분노는 극에 치닫다. 오후 3시가 되도록 각종 뉴스들을 접하며 화를 삭혔다. 오후에 각 반 개강총회와 신입생환영회를 들르기 위해 학교에 갔다가, E반 신입생환영회에서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도 기분 탓인지 금세 취해서 A반 개강총회 뒤풀이는 참석하지 못하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오다.


장면4. 3월 13일 오후 6시 광화문

익구는 청원, 규상과 함께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서다. 노무현 지지자도 아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기는 아깝다며 호기심에 가득 차 함께 한 청원과 술집 알바라 토요일에 빠지기 싶지 않은데도, 내 몫까지 해달라는 사장님의 격려를 들으며 알바를 미루고 함께 한 규상. 세 사람은 광화문 일대를 헤매이며 촛불을 흔들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보고, 한바탕 웃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끝 무렵에 수현이도 만나 함께 귀가를 하려던 참에 수현이가 알바비로 야참을 쏠 것을 제안해서 일동 흥분했으나 1호선 서울역 근처에 먹을 곳이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무산시키게 되다.^^; 방향이 다른 수현이를 먼저 보내고, 세 사람은 야참을 위해 동대문역에서 내려 헤매이다 심야 영화를 보자는 것까지 의견을 모았으나, 결국 닭꼬치와 햄버거를 사먹고 흩어지다. 전철길에 '다함께'에서 발간한 신문을 읽던 규상이 문자를 날리다. “얘들 탄핵'만' 반대한데.ㅡ.ㅡ” 익구도 서둘러 답문을 보내다. “갸들 원래 그랴.^^; 그래도 고맙잖아.” 집 오는 길 내내 허기를 달랠 수 없던 익구는 노원역 근처 분식집에서 라볶이 2인분을 사서 포식하며 씁쓸한 마음을 달래다.


장면5. 3월 14일 새벽 컴퓨터 앞에서

탄핵 관련 뉴스들과 글들을 읽느라 여념이 없다. 특히 탄핵특별판을 낸 딴지일보를 보며 기분을 좀 풀다. 또한 재미난 피켓으로 모두들 즐겁게 한 디시인사이드에 가서 탄핵 관련 합성 사진들이나 글들을 보며 키득키득거리다. 고등학교 동창 동호회에서 그간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던 친구의 글을 발견하며 우리의 오랜 갈등을 일거에 해결해준 한나라, 민주 일당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다.^^;

“익구야 나 열린우리당 찍을 거다. 이번에 탄핵역풍으로 많이들 열린우리당 지지한다 하더라... 그래도 노무현이 너무 말실수 많이 하는 거 같다. 노무현이 잘만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지 않았겠니? 노무현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성찰하면서 추이를 지켜보자. 4.15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을 기원하며”



장면6. 3월 15일 고려대

정치적 사안에 대한 불개입이 원칙이던 37대 경영대 학생회의 원칙을 깨고, 탄핵 반대 대자보를 제작하기로 의견을 모으다. B4 8장으로 대자보 용지 딱 한 장에 들어맞게 대자보 작업을 해서 주요 게시판에 붙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시 보니 감정적인 내용만 많아서 민망하다.

대통령 탄핵 폭거 규탄한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정치꾼들의 악행 중에서도 가히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국민들과 함께 3.12 의회 쿠데타에 대해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 우리 소중한 민주주의를 분탕질한 무책임한 거대 야당의 횡포를 우리는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은 대통령 탄핵을 수적 우위로 밀어붙인 한민당의 야만스런 행위에 우리는 분노한다.

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 그 부끄러운 낯짝을 치워야할 16대 국회가 탄핵 장난으로 마지막 패악질을 하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고 갖은 손가락질로만 연명하던 이들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막무가내 칼부림을 하고 만 것이다. 차떼기 강도질과 부끄러운 협잡질로 일관한 거대 야당은 제 허물은 보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 탓만 하는 추한 모습을 보였다.

이미 효용을 다한 정치꾼들에게 이제는 정치시장 상품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자. 추악한 탄핵 장난질을 한 정치꾼들에게 다가올 4.15 총선에서 시장의 냉엄한 심판을 보여줄 것이다. 오래 전에 도덕적 정당성조차 잃은 자들이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함부로 끌어내리는 천박한 행태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 한다. 아울러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안에 대해 조속하게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법률적 근거가 미약한 탄핵안에 대해 정당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저 오만한 정치꾼들이 저지른 탄핵에 동의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사소한 차이는 벗어버리고, 공화국 시민으로써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으자.

37대 경영대 학생회 운영위원회



장면7. 3월 20일 저녁 집 거실 오디오 앞에서

익구가 고대하던 김동률 4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음반점에서 구입해서 쭈욱 들어보다. 수능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3 수험 교실에서 익구에게 한줄기 위안이 되었던 동률공 3집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것일까. 혹은 지금 시국이 뒤숭숭해서 편히 감상할 마음이 되지 않아서일까. 아님 동률공의 걱정대로 조금 어렵게 느껴져서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차분히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이번 4집 앨범명은 토로(吐露)... 나름대로 솔직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익구이지만 토로라는 단어 앞에서 무언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다.


지난 일주일간 많은 이들과 이야기 나누고 욕도 해보면서 탄핵 정국의 혼란은 이제 좀 가라앉는 듯하다. 익구도 그간 어수선하던 기운을 털어 내고 차분히 일상으로 돌아오다. 저들이 자초한 최악의 행패에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을 기대하며 하루하루가 늘 희망에 넘치지만 한 편으로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관성의 법칙은 늘 질기고 굳건해서 함부로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직감 때문이다. 여기저기 조직되고 있는 무적의 투표 부대들이 이 관성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번 탄핵 충격을 계기로 거대한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에 균열이 생기기를 기대한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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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뇌 논쟁(?)

사회 2004. 2. 6. 05:45 |
어느 아주 늦은 새벽에 한 친구와 메신저 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 친구도 다니는 대학의 반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터라 자연스레 ‘새터’(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는 반일을 대표하는 자리 있는데 정확한 직함을 몰라서 반학생회장이라고 처리했다) 이 친구가 자칭 타칭으로 쓰는 별명이 있으니 ‘우군’이다. 우군은 ‘새맞이’(그 학교는 새터를 새맞이라고 불렀다)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고민했다. “내용 없이 무뇌한 새맞이가 정말 걱정스럽다”는 말을 덧붙였다.


실은 그 말을 듣고 뜨끔했다. 나도 그 무뇌의 혐의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니까 말이다. 2박 3일간의 일정은 자기 방사람들과 친해지기도 짧은 시간이라며, 이런저런 행사도 줄이고 어떤 새로운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저 예년의 프로그램들을 재탕하는 식으로 새터를 기획하고 있던 나도 갑자기 동병상련을 느꼈다. 나는 “원칙은커녕 최소한의 관심만이라도 있으면야 감지덕지지. 그 관심을 모아 총합을 대충 얼기설기 엮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고...”라고 궁색한 변명을 해봤다. 나의 변명은 이어졌다.


“그냥 선후배간의 첫 만남이고, 새내기들에게는 대학 생활의 첫 시작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원체 크니깐... 그것만으로도 새터의 의미는 그럭저럭 채워지고... 그냥 한바탕 질펀하게 잘 놀고 몇몇 사람 잘 만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 아닐까? 실상 03학번 새터준비하는 친구들은 그냥 놀자판 새터라고 홍보해도 새터를 오려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며 볼멘 소리하는데 말이지...^^;”


우군은 갑자기 과반이 ‘진보적 자치 공동체’라는 것에 동감하냐고 물어왔다. 아마 새터 자료집 같은 것에 글을 쓰다가 그 문구를 집어넣느냐를 고민하던 중에 넌지시 물어온 것이라고 제멋대로 추측해본다. 여하간 우리의 대화는 이랬다.


익구 - 글쎄... 그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만한 과반들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한건가?^^; 사실 내가 속한 단과대의 반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기에 너무 황량하다보니...^^;

우군 - 허허. 오히려 ‘무너져 갈수록’ 그것을 잃어버리면 정말 끝장이란 걸 절감한단다.

익구 - 일단 '진보적 자치 공동체'에서 진보적이라고 붙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다양한'이라고는 조심스레 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상 진보라는 것이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만약에 보수라는 것의 대립어로 쓰인다면 과반이 반드시 진보적 색채를 띨 필요는 없지... 그게 가능하지도 않을테고...

우군 - 아니. 그런 섬세한 의미의 진보 말고. 적어도 무뇌하지 않은-

익구 - 아 그렇다면 진보라는 단어보다는 '개성' 등의 단어들을 찾아 봐야하지 않을까...

우군 - 개성, 개성이라기 보다는...

익구 - 여하간 ‘개성’은 그냥 생각나길래 해본거고... 무뇌의 대립어로서 ‘진보’가 적절할지는 의문이라는 것이지... 차라리 ‘진지’면 모를까...^^;

우군 - 그 무뇌가 개인의 무뇌라면 그렇겠지만 집단의 무뇌라면 어떨까?

익구 - 집단의 무뇌가 개인의 무뇌의 총합을 넘어선 플러스 알파가 있다면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 사실 그런 감이 없잖아 있고... 근데 근본적으로 집단의 무뇌라고 분명히 규정 내리기 힘든 세상이라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는 듯... 다원주의 사회에서 절대선, 절대악이 없는 이상 저마다의 논리를 가지고 세상을 인식하고 사는 데... 어떤 집단을 무뇌라고 지칭할 수 있을지 늘 조심스럽다니깐... 물론 치명적 도덕적 결함이 있어서 손가락질하기 쉬운 경우라면야 오죽 좋겠지만... 안 그런 경우가 많고... 집단의 무뇌가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집단의 무뇌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그에 적절한 단어를 찾는 것이 어쩌면 너무 오바인지도 모르고... 이래서 낙관적 다원주의자인 나는 늘 회의주의와 짝짜꿍한다니깐...^^;

우군 - ᄏᄏ 무슨 말인지 알겠소. 공감하는 바이요.

익구 - 황당한 것은 위에 했던 말은 내 단골 레퍼토리라 지겹도록 반복하는 데도... 아직도 또 써먹을 여지가 무궁무진하다는 현실이지...^^;

우군 - 세상사는 건 과정이잖냐.

익구 - 과정이랑 성과물과의 균형을 잘 맞춰야겠지... 그 비율은 또 저마다의 몫이겠고... 에구에구 나도 제 잘난 멋에 사는 인간이라... 남들이 참 무뇌아스럽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남들이 다른 기준으로 나를 보면 저 놈 참 무뇌아구만... 이라는 소리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려고 노력 중이지...


여하간 우리의 대화는 이쯤에서 대강 마무리된다. 어쩌다가 ‘무뇌 논쟁(?)’이 벌어졌지만 실은 참 어려운 문제다. 내 생각을 옳다고 믿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다른 사람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차이는 차이로만 끝나고 간극은 메워지지 않는다면...


역시 단골 골칫거리라 그런지 해법도 늘 비슷하다. 그래도 접점을 찾아가는 노력이 소중하다는 것,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를 절감할 때는 어찌해야 하나? 맞부딪치는 생각 가운데 우열을 가려볼 수는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다원주의를 주술처럼 외우며 팔짱만 끼며 여기도 맞고, 저기도 맞다며 황희 정승 흉내를 내볼까나?


상대방을 향해 무뇌아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즉 우열을 가른다는 것은 너무 힘든 과제다. 나는 다만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에 대해 조금 말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내가 믿고 있는 바를 편파적으로 내뱉을 것이다. 그것이 사상의 자유시장의 상품이 될 수 있는지 늘 긴장하면서 말이다. 설령 내가 ‘무뇌아’ 소리를 듣더라도 말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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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 고향 티크리트에서 미군에게 체포되었다. 잔혹한 독재자 후세인이 체포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별다른 저항도 없이 초췌한 모습으로 생포된 후세인의 모습을 보며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확인할 수 있어서 반갑다. 그런 면에서 국내의 전두환이 비자금을 만지며 떵떵거리고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세계 최대의 전체주의적 시스템을 보유한 국가인 북한을 바라보는 것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부디 권력의 단맛에 취한 이들이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것을 후세인의 몰골을 보고 깨우치기 바란다.


간디는 “독재자는 일시적으로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 몰락하는 법이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에 따르는 책임을 수행하지 못한 부족한 지도자는 제거되는 것이 순리다. 다만 이라크 민중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의 야욕과 맞물려 진행된 점은 아쉬운 일이다. 이 과정에 있어서는 이라크 민중들의 우매함을 질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 과도정부는 파벌 대립을 얼른 종식하고 자기들 손으로 민주적인 정부를 세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실은 남 이야기 할 여력이 없다. 우리네 민주주의도 실상 별로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물론 후세인이 못된 독재자임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고 국제적 반전 여론을 무시한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는 두고두고 지탄을 받을 것이다. 후세인 체포로 부시 일당들은 한껏 고무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네들이 저지른 만행은 오래도록 기억되어 자신들의 차꼬가 될 것이다. 후세인의 구차한 모습을 보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부시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는 것도 영 마뜩지 않다. 미국의 네오콘들이 건수 잡았다고 너무 기뻐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쪼록 후세인의 체포로 이라크 내 테러가 잦아들고 치안이 안정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라크의 반미감정과 저항이 비단 일부 후세인 잔당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은 이라크 민심을 잃은 것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자신들에 반대하는 이라크 저항세력은 자생적으로 양산될 것이다. 미국은 앞으로 조속한 민정 이양 절차를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 그것만이 테러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구제하는 길이다. 이라크 침략 전쟁은 인류사의 부끄러움으로 기록되겠지만 전쟁과 테러 대신 평화와 협력이 자리잡는 날을 위한 진통으로 세계시민들은 간직해야 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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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학기에 듣는 정치학원론의 서평 과제인 [정치적 현실주의의 역사와 이론](화평사 刊)은 내내 골칫거리였다. 정치적 현실주의를 주제로 삼은 19개의 논문의 압박은 과제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순간부터 탈고를 마치던 그 순간까지 마음 한 구석에서 부담감의 곰팡이를 마구 키워대고 있었다. 실은 그보다 불편했던 것은 예전 같으면 콧방귀도 안뀌었을 현실주의 논리들이 어느 정도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다.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는 여전히 주도적인 위치에 있고, 한국의 현실도 비슷하다고 한다.


인간은 악하고, 인간들이 모여 사는 국가 또한 악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국가의 유일성, 단일성, 합리성을 가정하는 현실주의는 국제 관계는 무정부 상태에 놓여있다고 보고 결국 힘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우드로 윌슨 등의 이상주의자들이 추구한 국제법, 국제기구를 통한 국가 이익의 조화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도래한 냉전시대에 그 적실성을 상실하고 쇠퇴하게 된다. 이상주의 경향을 비판하며 등장한 현실주의는 오늘날까지도 국제정치학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군림하고 있다.


현실주의에 맞서기 위해 자유주의가 다양한 치장(다원주의, 신자유주의...)을 하고 나오는 모습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무척 재미나게 들려왔다. 지금까지 정치 어쩌고 하면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는 도식만을 그려왔는데, 현실주의와 이상주의(혹은 자유주의)의 대립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몰론 이상=진보, 현실=보수라는 등식도 종종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따져 볼만한 기준인 것 같다. (어쩌다가 자유주의의 우산을 빌려쓰게 되었지만, 거대한 산이 그렇듯이 자유주의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사회과학 용어라는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서도...^^;)


특히나 국제정치 분야에서는 현실주의 맞서는 자유주의라는 것이 진보적이거나 이상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물론 상호의존을 강조하고 다원주의를 주창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진보성이나 이상적 측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들은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야말로 현실을 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논리가 현실을 더 잘 반영하고 있게 만들기 위해 현실주의 논리를 과감히 차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거꾸로 말하면 현실주의가 그만큼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소리가 될 수도 있지만)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크게 자유주의, 현실주의, 구조주의(Structuralism) 패러다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구조주의 이론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이론인 근대화 이론(후진국의 저개발, 저발전은 사회, 정치적 개혁과 효율적인 경제전략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에 대한 반발에서 나타났다. 후진국의 발전은 한참이나 더뎠고 국가간 격차는 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처방전을 부인하고 새로운 이론을 모색하면서 구조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후진국들의 저발전 요인을 국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인 지배와 착취 때문이라고 본다. 즉, 구조주의는 국가간의 불균형을 주된 연구과제로 삼는다. (박재영, [국제정치패러다임], 법문사, 2002 500~ 503쪽 참고)


적어도 분홍빛 이상의 색깔을 선보이는 구조주의는 강의 시간 관계상 생략이 되어 여러모로 아쉽다. 아무래도 교수님께서 아직은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라는 도식 정도를 이해하는 것이 초심자 수준에서 맞다는 판단 때문이셨던 것 같다. 실은 논지와 관계없는 구조주의 타령을 해본 것은 구조주의 이론의 하나인 세계체제이론을 주창한 대표적인 학자에 미국 사회학자 월러스틴이 있다는 것을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월러스틴은 “학문은 대한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며 그런 학문은 도덕적 선택에 이바지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정치적 실행을 통해 세계를 바꾸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학문과 정치의 변증법이라는 화두를 고등학교 시절 익구에게 던진 각별한 인연이 있다.^^;


여하간 횡설수설이 길었다. 자유주의와 현실주의의 기본적인 논리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나오는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두 관점이라는 부분에서 배운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자유주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그 이유의 상당부분은 계몽주의적 낙관주의라는 레토릭에 묘한 향수를 품고 있는 나의 알 수 없는 미신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너무 차가운 현실주의 논리들을 접하면서 의분이 올라온 나는 서평을 결국 현실주의 비판에 대부분 할애하고 말았다. 현실주의의 거두인 모겐소 교수님의 제자인 이호재 교수님에게서 수학하신 지금의 내 정치학원론 교수님께 어줍잖은 비판이 통할 리가 없다고 몇 번이나 몸서리치면서도 말이다.^^;


이런 이론들을 접하면서 가끔은 이게 다 무슨 쓸데없는 말장난인가라는 생각을 배우는 입장에서 해보기 마련이다. 어떤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기존 이론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는 것을 일컬어 ‘이론에 이끌린 분석(theory-driven analysis)'이라고 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론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면서 어떤 새로운 규칙성을 찾아내려는 분석의 경향을 ‘자료에 이끌린 분석(data-driven analysis)’이라고 한다. (앞의 책 머리말 참조) 물론 새로운 이론의 수립은 자료에 이끌린 분석이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배우기 바쁜 학생인 나로서는 이론에 이끌린 분석을 내려보는 것도 벅차다. 그렇기 때문에 말장난 핑계 될 여지가 없다.^^


의도했던 대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되었다. 감정적 의견이나 일방적 자신의 주장 나열을 금지한 서평의 규칙을 지키느라 무척 무미건조해져서 내가 쓴 글 같지 않은 애물단지 서평 녀석을 긁어 붙이기 전에 속 시원히 할 말을 하고 싶었다. 결론은 두루뭉술하게 냈지만 실은 현실주의를 좀 더 비판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은 이 거다. 경박한 자유주의와 천박한 현실주의 중에 어느 녀석이 더 해악이 클까? 소심한 나는 또 부지런히 최악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끝으로 큰 가르침을 주신 엄상윤 선생님께 가슴 깊이 감사를 표한다. - [憂弱]

(아래부터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입니다)


[위협받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위상] -  2003년 12월 1일
  

  “강자는 권력을 행사하여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약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정치적 현실주의의 선구자인 투기디데스는 말했다. 이처럼 국가간 힘의 불균등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힘의 논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현실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학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군림해오고 있다. 이 책은 현실주의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법을 선보이며 이해를 돕고 있다. 현실주의 이론의 형성과 발전을 정리해보고, 여러 나라들 속에서 나타난 현실주의의 모습을 고찰하며, 한국 정치의 주요 이슈에 현실주의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현실주의는 악한 인간들의 권력 투쟁과 국가 이익 추구라는 분석틀로 정치 현실과 국제정치를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들이 당위적 목표를 설정해 정치 현실이 이에 따라 작동해야한다고 본 반면, 현실주의자들은 현실 정치 형태의 법칙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또한 이상주의가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여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과 달리, 현실주의는 비도덕적(amoral) 가치관으로 무장할 것을 주장한 마키아벨리와 같이 현실을 가장 잘 파악하여 이를 잘 조정할 것을 강조하는 힘의 논리와 세력균형 등의 개념을 설파한다. 현실주의만큼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고, 서술할 수 있는 이론이 없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의 우수성이 입증된다.


  현실주의 지지를 표명하는 이 책은 현실주의의 발전과정과 주요 논쟁들을 시계열적 방법으로 검토하고, 자유주의를 비롯한 비판을 소개하면서 현실주의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각 국의 적용 사례를 살펴보는 데 있어 현실주의의 개념을 유리하게 적용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논지를 전개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었다. 가령 베트남 전쟁 종식을 위해 현실주의자들이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는 대목에서는 전쟁 반대라는 단순하지만 숭고한 인류의 가치를 가지고 반전을 주장했던 많은 수의 반전평화론자들의 노력은 평가하지 않고 있다. 비슷하게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세력균형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의 주요 특징이 잘 드러난 정책이라고 평가하면서 마찬가지로 현실주의에게만 일방적으로 찬사를 늘어 놓는다. 또한 현실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일본의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을 군부의 이상주의적 정책 노선이었다고 평가하는 부분에서는 현실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이상주의를 억지로 끌어들이고 있다. 설령 잘못된 이상이 많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현실주의의 정당성을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 눈에 띄었다. 탈냉전을 예측하지 못하고, 유럽통합 같은 국제 협력 증진과 초국적 단체들의 영향력 확대를 과소평가했다는 현실주의의 실패에는 관대하면서도 자유주의의 실패에는 매서운 칼날을 들이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쉬운 점은 현실주의에 경쟁할만한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대항마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한 검토가 부족해서 객관적 비교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실주의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일부 싣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보다는 그들의 실패를 소개하는 것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현실주의가 이상주의에게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나, 이상주의의 이념적, 이론적 경향은 자유주의 등의 이름으로 현실주의의 대안으로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예로 세계무역기구(WTO)의 확산은 절제된 자유무역과 다자통상체제로 말미암은 경제적 다극화가 미국의 일방적 패권에 세계가 휘둘리는 것을 막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주요 관심사로 부상한 경제 분야의 파급력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중국의 경우 국가주권이 박탈당한 역사적 경험을 가져서 국가주권 문제에 감정적으로 강경하게 반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다가도, 우리의 통일문제에서는 강한 민족적 정서가 개입되어 이상적인 목표에 기울고 있다며 햇볕정책을 실현 가능한 현실적 목표를 얻지 못하는 이상주의의 특징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하는 등의 사안 평가의 상이함이 눈에 띄였다. 이는 다양한 필진들로 구성된 이 책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보인다.


  최근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며 민주주의 실현 같은 이상을 내세웠고, 남북 전쟁 상황의 링컨이 자신의 현실주의를 노예 해방이라는 이상으로 포장한 것처럼 세상은 적당한 위선으로 덧씌운 현실주의가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현실주의도 지나치면 '미치광이 현실주의'가 되어 파렴치한 전쟁광과 같은 얼굴로 등장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다. 한층 높아지고 있다는 개인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이 이러한 천박한 국가주의를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겠지만, 국가 중심의 구조가 당분간은 큰 틀에서 유지될 것이라고 예상되는만큼, 현실주의 패러다임의 분석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우리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실효성 없는 외침도 가려 들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다자주의를 무시하고 노골적인 일방주의를 주창하는 네오콘(neoconservatives)의 발호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균형감각이 되어야 한다.


  위기의 20에서 “건전한 정치 이론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와 현실의 양 요소 위에 입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외친 E. H. 카의 지적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극단적 이상주의자들이 객관적 조건과 물리적 법칙을 외면하고, 극단적 현실주의자들이 정치를 통해 추구할 이상과 목적을 잊은 채 현상 유지에만 급급한 것은 모두 지양되어야 한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상 없는 정치는 맹목적이지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정치는 공허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국제정치를 바라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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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다양성의 위대함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반대자를 접할 때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주스럽거나 구역질나지는 않는다.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표정이 일그러지거나 하지는 않도록 노력한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그네들이 잘 찾아낼 수도 있고, 내가 어쩌다보니 잘못 생각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방식이 옳고 재미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마주보고 있는 저 친구의 세계관과 행동양식 또한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한편으로 나는 당파성의 막강함도 실감한다. 제 잇속을 차리려는 이기적 함수를 가진 인간이 대다수인 세상이라면 입맛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파당을 짓고 자기 몫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인간이란 시리도록 현실적이고 사실판단에 약삭빠른 동물 같으면서도 지극히 추상적 가치에 목매기도 하고 저마다의 이상을 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의나 시대적 과제를 끌어오면서 자신의 무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진보하고 사회는 윤택해졌다.


다양성과 당파성은 늘 오묘한 긴장관계를 그린다. 끊임없이 균형점을 찾아가는 양팔저울과 같으면서도 그 균형점의 이데아는 끝내 찾지 못하고 마는 그 무엇이다. 나 또한 이 균형점의 이데아를 모색하면서 바지런히 여기저기 주워들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딛고 있는 곳의 내 당파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다양성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남들보다 코딱지만큼 더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논리나 어떤 성과물로 상대방을 이기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다원주의는 내 당파성과 권력의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참 좋은 토양이다.


2.
내가 무늬만 개혁적인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들어 개혁 레토릭의 험난함을 절감하고 있다. 개혁세력은 수적으로 다수일지는 몰라도 고종석님의 표현을 빌리면 문화적 소수파이며, 내가 보기에 정치적 소수파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수파는 오히려 단결하고 있고, (한나라당과 잔류 민주당, 자민련의 손잡기나 악의적 언론의 짝짜꿍이나 수구세력의 총궐기나...) 소수파는 열심히 분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늘 지울 수 없이 따라다닌다.


물론 개혁진보세력의 분열은 그네들의 치열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지금은 치열함과 고결함의 미덕보다는 전략전술과 광범위한 양보들을 통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 같이 소심하고 줏대 없는 사람들은 자꾸 지는 모습만 보이고 갈라서 버리면 상처입고 잠수를 타버릴 유인이 강해진다(물론 살다보면 지는 싸움을 해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지는 싸움 만들고서 제 몸 상할 필요 없다는 것이 합리적 경제인의 선택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이기는 싸움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다시 붙잡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포괄적으로 본 ‘우리’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신념은 변함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정에서 표출되는 갈등상은 승리의 환호를 자꾸 흐릿하게 한다.


이런 어지러움 속에서 대강 입장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친노 집단, 혹은 노빠들의 소굴이라는 정치칼럼 사이트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와 같은 열성적 지지자들의 존재가 참 고맙다. 너무나 합당하고 근사한 비판으로 속이 따끔거리게 해주는 개혁세력들의 의견을 경청하지만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호위하는 서프족을 미워할 수 없다. 물론 나와 당파성이 상당부분 맞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 같은 날라리 지지자는 열성적 지지자들에게 진 빚이 미안할 뿐, 그들의 투자 수익률이 낮다고 질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3.
어떠한 사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는 것은 그것이 사소한 일일지라도 참 어렵고 떨리는 일이다. 간혹 내가 서있던 곳이 부실한 논거로 적당히 때운 곳이라 무너지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무식한 내가 무엇을 얼마나 알기에 감히 발언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세다. 그러나 모르면 닥치고 있어야 한다는 청년기 비트겐슈타인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아마 거의 다 침묵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보다는 논쟁의 시행착오법(trial and error method)이 더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 것 같다.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는 양쪽의 입장을 부지런히 경청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정 동네의 우물이 아닌 다양성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들 중에 취사선택해서 자신의 당파성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이 귀가 얇은 녀석은 금세 혼란에 빠지기 일쑤다. 가령 신자유주의 논쟁만 해도 WTO는 전세계 민중을 착취하는 미국식 세계화에 불과하다는 입장과 WTO가 실현할 자유무역과 다자통상체제로 말미암은 경제적 다극화가 미국화를 막고 우리가 살 길이라는 입장과의 간극은 너무나 벌어져 있다보니 양다리를 걸치기도 여간 힘들다.


세상에 미국의 네오콘같은 사명감에 불타는 무식쟁이들만 있다면야 옥석을 가리기 쉽겠지만, 대개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맞서니까 무식한 학생 입장에서는 새우등만 터지는 꼴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새우등이 터지다보면 가끔 콩고물도 떨어지고 그러겠지라는 희망을 안고 오늘도 싸움 구경에 눈이 둥그래지는 수밖에.^^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의 시대에 사는 것은 확실히 정신 없고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 곱절로 흥겹고 신나는 일이다. 다양성과 당파성의 긴장 속에 내 새우등은 늘 조마조마하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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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주의자 익구?

사회 2003. 11. 14. 01:31 |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자꾸만 ‘의회 민주주의’에 기우는 듯하다. 내가 속한 조촐한 학회 세미나에서 박정희 향수라는 이슈가 불거져 나왔는데 나는 의회권력의 교체를 통해 그 시절 잔당들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말끔한 역사청산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권력자들에게 자기 개혁을 맡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 그 보다는 시민단체 같은 곳에서의 노력을 중시하는 입장들이 있었다.


나는 누구도 한 표 이상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가장 합당하고 뒤탈 없는 방법이 의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에서의 표심으로 결판날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비록 지역구도나 일부 편파적 언론 같은 제약요인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출된 권력에 일정기간 지배력을 인정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효율성과 편리성을 함부로 폄하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물론 국민들의 여론형성이나 생활정치 측면으로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다원주의 사회가 심화될수록 이익집단들의 난립도 필연적으로 뒤따를 텐데 과연 시민운동 같은 것들이 얼마나 그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저쪽에서 동의하지 않는다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무심하다면... 우리는 결국 국민 개개인 의사의 총합, 결국은 숫자싸움이지만 그 원칙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이익집단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이익집단인 정당의 소굴인 국회에 의회주의의 앞날을 맡기는 것이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다(아마도 모두 맡길 것 같지는 않고 제 입맛을 찾은 국민들의 꾸준한 째려보기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승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식인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충분히 보장하고 상도덕을 준수하면서 공정히 경쟁하는 구도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에구에구 널널할 줄 알았던 의회주의자 되기도 만만치 않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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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제 단상

사회 2003. 11. 14. 01:20 |
(잇따른 노동자들의 분신자결과 노동계의 울분 섞인 목소리를 접하면서 어떻게 입장을 정리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함부로 발언하는 것은 무서운 죄악이라고 여기는 터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제 솔직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속한 조촐한 학회와 유시민 팬클럽 시민사랑 두 군데에 올린 글입니다. 인식의 박약함에 대한 질책을 환영합니다^^;)


최근 노동자들의 분신자결은 여러모로 가슴이 아프다. 노무현 대통령도 노동자들이 왜 죽음으로 내몰렸으며 죽음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에 대해 귀 기울이려는 제스추어를 충분히 취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다. 하지만 일부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무현이 노동자들을 죽였다”같은 타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국정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노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죽어라, 죽어라...”하고 있다는 인식에는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


솔직히 내가 어떤 위치잡기(포지셔닝)를 해야할지 혼란스럽다. 노동조합 같은 노동단체들도 결국 이익집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이 사회적 약자에다가 양적 다수라는 점에서 사용자들의 이익집단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은 대충 정리가 된다. 하지만 약자 프리미엄이 그네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 입장 정리하기가 참 곤란하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노동계의 의사를 보다 중시하는 방향으로 돌아갔었다. 난 이 분야에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모르지만, 초기에는 그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존재했던 것 같다. 공무원 노조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했고, 화물연대 첫 파업에서도 어느 정도 요구를 들어주었으며, 조흥은행 노조 파업 때도 조흥은행 쪽의 입장을 상당부분 수용한 것으로 기억한다. (조흥은행 사건의 경우 신한은행 노조가 이에 반발하는 등 노조간의 갈등도 있었는데 그 후로 관심을 안 가져서 잘 해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음...)


하여간 노 대통령이 친노(親勞) 색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노동계가 그런 면은 제대로 옹호해주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 기억으로는 오히려 아쉬운 소리를 더 늘어놓았던 것 같다. 노무현 정부가 일부 언론과 재계에 반기업 정서를 들먹이며 협박하고, 굴욕적이라고 비난받을 때... 노동계는 노무현 편을 속시원하게 들어주기보다는 자기 요구를 100% 반영하지 않은 것에 대해 볼멘 소리를 더 낸 것으로 기억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 사람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마음먹기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신이 옳은 위치에 서기 위해 지적, 도덕적 노력을 기울인다면 꽤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해서 자기와 조금 다르다고 함부로 매도한다면 애초에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요즘 보면 노동계와 정부가 아예 심리적 장벽을 쌓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물론 고통받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달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노 대통령과 정부는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노동계가 노무현 정부를 이용하지 못하고 상호간에 입지를 좁히는 자충수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해서 아쉽다. 그러나 그들의 전략개념의 부재를 질타하기보다는 사용자측의 불성실함과 불관용에 더 큰 화살을 던진다. 노사 갈등이 문제라고 하지만 힘센 이들의 억지 엄살에는 너그러우면서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짜증을 부리고 귀찮아하는 인색함을 보이지는 말아야겠다는 늘 다짐한다.


그러나 이런 총론적 합의만 있을 뿐, 노동 문제에 대한 각론적 판단은 아직은 뭐라 내리기 어렵다는 것이 내 솔직한 결론이다. 내가 귀가 얇아서인지 몰라도 이 쪽 입장을 검토하면 꽤 설득력 있고, 저 쪽 입장을 들어보면 그것도 호소력 짙은 경우가 많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절대선이라는 것은 없다고 했을 때, 열심히 듣고 부지런히 사유해서 조촐하게나마 나의 인식을 형성해야겠지만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나태하고 태만하다.


30여 년 전의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우리 사회는 분명 쉴새없이 발전해왔다. 그러나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 발전, 진보의 열매가 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도 확실하다. 세상을 욕하기는 쉽지만 티끌만큼 바꾸기는 참 어렵다. 모순투성이인 현실을 바꾸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도 노동자들의 권익이 향상되기를 바라지만 그 방법론은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 게으르면서도 약삭빠른 내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팽팽히 잘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돌아본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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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보수정당?

사회 2003. 11. 6. 02:04 |
1.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입문 초기에 국민적지지 기반이 있는 진보정당이 만들어지면 진보정당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월간조선 1988년 12월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주대환이 쓴 [진보정당은 비판적 지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를 참고했다)


본질적으로 저는 재야에서 운동할 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민주화 운동으로 빚어지는 사회갈등은 반드시 거쳐가야 하며 또 극복돼야 하는 것이지 결코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국민적 지지기반이 있는 진보정당이 출현하면 그 길을 택할 각오입니다. (중략)
지금의 정치구도는 독재와 민주세력의 공방전을 형성돼 있습니다. 우리는 독재의 긴 터널의 끝 부분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보수야당에서, 이 독재의 질곡에서 벗어나가 위한 공동 노력을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정치가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게 되면 진보정당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겁니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말들을 보며, 어떤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색깔을 칠할 준비를 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말장난에 불과한 허구적 변명이라고 폄하할 것이다. 여하간 노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의견을 내어놓을 것 같다. 나는 이 땅의 정치가 제정신을 찾으면 마음놓고 보수정당을 지지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설픈 개혁에 손짓하고, 극우의 난동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자유주의를 들먹이면서 사이비 보수들을 질책하는 것을 부득이 업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진보를 주창하는 입장에서는 개혁은 보수의 다른 표현이라고 구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적 개혁이냐, 진보적 개혁이냐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기본적으로는 진보와 더 가까운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일말의 양심과 최소한의 역사의식, 그리고 고등학교 사회교과서 수준의 상식만 있다면 도저히 지금의 보수라는 이들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당분간 이 어정쩡한 위치잡기(포지셔닝)에 내 자신조차 흔들리며 지낼 것 같다. 이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해야하는 자유주의의 얼굴, 인민주권을 확립해야하는 민주주의의 얼굴은 내팽개치고 기득권이라는 가면으로 호객행위를 일삼는 이들을 보수주의자라고 여길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만큼 그 가면의 두꺼움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내 입맛에 맞게 해석한 것일 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자칭 보수는 보편적 상식의 경계를 벗어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지점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2.
고등학교 시절 나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평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극단적 진보’와 ‘은근한 보수’가 그것이다. 자칭 중도적 성향이라는 친구가 붙여준 극단적 진보라는 딱지는 기실 이념 인플레이션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이해찬의 교육개혁을 지지하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정책들을 비교적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극단적 진보라고 불리는 명백한 오류가 생각보다 크고 공고하게 퍼져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뭐 이건 고등학생의 머리끼리 맞대면서 나올 수 있는 착오라고 너그러이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다^^;). 아마도 양비론 같은 두루뭉술한 연막을 피우는 것보다는 자기 입맛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비교적 분명하게 호불호를 내놓다보니 오해가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재미난 것은 대학 새내기시절 내가 노무현 지지를 외쳤을 때는 그보다 덜한 화살을 맞았다는 점이다. 천만다행으로 이념의 인플레이션이 진정세에 들어갔고 거품도 많이 빠진 셈이다^^;)


은근한 보수라는 칭호는 일면 나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따른 실망감 표출의 일부이다. 철없던 시절 좋은 말이라면 여기저기 잘도 따와서 조합을 그럭저럭 해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나를 잘못 해석하게 만든 내 책임이기도 하다. 내가 원인제공자면서도 그 때는 은근한 보수를 욕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나빠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말은 그럴듯한데 소심한데다가 행동력이 없다보니 입만 나불거리는 보수쟁이로 낙인찍혔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내 생활태도가 지극히 모범생적 가치관에 충실했고, 진취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중함에 대한 탐구가 나를 답답하고 고지식한 보수주의자로 비춰지게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이에 대한 자각으로 고등학교 중반 이후에는 도덕적 결벽증 같은 것들을 많이 걷어내고 ‘타락 익구’ 같은 새로운 칭호들을 달갑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옛 친구들이 나를 보는 틀은 고루한 원칙주의자이다(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국어 교과서에 ‘고답적(高踏的)’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건 너에게 딱 맞는 어휘라며 감격에 찬 눈망울로 목에 힘주며 말하던 친한 친구의 그 벅찬 표정이다^^;).


극단적 진보는 분명한 오독이지만, 은근한 보수는 꽤 들어맞는 구석이 있는 해석이다. 은근한 보수라는 레토릭이 ‘생각의 진보성과 몸의 보수성과의 괴리’라는 뜻빛깔(뉘앙스)을 풍기지만 않는다면 제법 긍정적인 의미 부여를 해볼 만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 내 범생 이미지에 대한 모독쯤으로 치부했던 그 표현이 이제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재탄생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보다는 더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깨달음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끈을 놓지 않고 왼쪽을 경청하는 겸손한 보수에 대한 목마름이다. 얼마 전 고안해 낸 ‘날라리 우파’라는 개념도 결국 은근한 진보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3.
앞에서 한국 정치가 바로잡히면 보수정당으로 갈 수도 있음을 내비쳤는데, 또 한편으로는 꽤 개혁적인 면모도 있다. 보수동네의 단골메뉴인 공동체를 위한 헌신, 희생이나 애국주의, 민족주의 꾸러미들이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영 마뜩지 않다. 또한 나는 군사주의를 거북해하는 것이 체화된 사람이며, 양성평등 문제에서는 조급증이 날 정도로 빨리 개선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언뜻 보이는 개혁, 진보로 통칭될만한 행위들에 대한 바람이 젊은 시절 잠깐 품어보는 것이 아니라 전생애를 거쳐서 꾸준히 추진해 나갈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역량이 부족한 나는 내 입맛에 맞는 몇 개를 확실히 공략하겠다는 전략을 은연중에 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수동네에서 거닐든, 개혁동네에서 노닥거리든 중요한 것은 극우 헤게모니를 부수는 것이다.


실상 극우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것은 진보의 몫이라기보다는 보수의 몫이 되어야 옳다. 왜냐면 한통속이라고 여겨져서 같은 취급받으면 쪽팔리고 열 받으니까 먼저 더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칭 보수라는 이들은 극우적 질서를 안온하게 여기고, 극우동네의 제도적, 문화적 유산을 활용해서 한 몫 챙기려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진보 세력이 개인의 자유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챙겨주고 있는 기막힌 풍경이다. 명색이 시장경제를 신봉한다는 이들이 이렇게 제 할 일도 못 찾다가는 시장의 냉혹한 법칙에 의해 퇴출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좀 가져보자. 아무리 물질적 풍요를 좋아하는 보수동네라고는 하지만 상도덕에 어긋나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극단주의 세력이나 할 짓이다.  


탈이념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가치체계의 분류로서 보수, 진보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이분법의 대부(?) 플라톤 선생이 보면 좀 섭섭할 정도로 딱 부러지지 않고 짬뽕에다가 혼란스럽게 전개될 것이다.^^; 이런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보수는 여전히 삶의 양태를 바라보는 틀이다. 그렇다보니 요즘은 별로 인기 없다는 이 두 낱말 사이를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다. 신당은 민주당보다는 개혁적이겠지만, 개혁당보다는 구질구질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에 애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그나마 제대로 된 보수정당으로 달려갈 만한 가능성이 가장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차하지만 이렇게 세심한 차이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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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결의안 유엔 안보리 통과가 실망스럽다
- 유엔의 권위는 추락하고 한국은 궁지에 몰리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시간 16일 밤(현지시간 16일 아침) 이라크 통치와 관련된 수정 결의안을 15개 이사국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미국은 9월 3일 결의안을 제시한 이래 네 차례 수정을 하는 고생 끝에 억지 춘향 식으로 결의를 얻어냈다. 그간 유엔의 역할 강화 등을 요구하며 미국을 속썩이던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물론 아랍권의 시리아까지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미국은 앞으로 이라크 점령을 위한 병력과 자금을 모으는 데 추진력을 얻게 되었으며 조지 부시 일당들은 외교적 승리라며 한껏 고무되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라크 침공은 결코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이번 이라크결의안 통과가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유엔의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일 뿐 전쟁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며 인류평화에 이바지해야할 유엔의 무력함에 실망할 따름이다. 평화를 외치는 세계민중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미국의 야욕을 6주간 막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번 결의안은 이라크 치안 유지를 위한 다국적군 구성을 촉구하고, 결국 미국의 다국적군 지휘권 등을 인정하고 있어 미국의 입김이 비교적 많이 녹아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어쨌든 이번 결의안을 바탕으로 미국은 다국적군 파병과 관련하여 한국에게 더 큰 협박을 가할 것으로 보이며, 한국으로서는 이제 국제사회의 결정이라는 짐까지 안고서 파병결정을 내려야 하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서 정확히 집고 넘어갈 것은 유엔 평화유지군(PKO)와 다국적군의 차이점이다. 유엔평화유지군은 유엔사무총장이 사령관을 임명하고 목적도 평화유지활동에 국한되며 파병 비용도 유엔에서 부담하는 군대를 말한다. 즉 유엔이 이 군대를 전적으로 통솔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은 유엔으로부터 위임을 받았지만 미국이 지휘하고 통제한다. 평화유지군이 말 그대로 평화로운 지역에서 이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면 다국적군은 불안정한 치안 상황의 한복판에 내던져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유엔’만 끌어다 쓴 미국침략군의 일원이 된다는 것일 뿐이라고 얼마든지 폄하할 수 있다.


평화유지군과 다국적군간의 차이점에 대한 이해부족이 있기도 하지만 여론은 유엔 결의안이 통과될 경우 파병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결의안 통과가 안 되는 외적 변수를 기대했던 파병반대 세력으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파병반대가 양적 소수파가 된 이상 정부와 국회의 결정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이 뻔한 수순을 밟을지라도 말이다) 정부는 이라크 추가조사단을 이어서 보내고 국민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는 등의 노력을 최대한 기울여야 한다. 설령 파병결정이 내려진다고 해도 최대한 전투병의 규모를 줄이고 인도적인 지원으로 돌리는 등의 세부 협상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국제 정치에서 이상주의도 무척 소중한 가치이지만 현실정치를 외면할 수 없고, 냉엄한 세상 질서와 힘의 논리를 외면할 수 없는 우리네 형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합리적인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미치광이 현실주의가 될 경우 진짜 국익은 내동댕이치고 맹목적 친미주의로 흐르거나 냉전 논리에 빠지는 것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비록 허울뿐이기는 해도 세계는 이라크 침략을 어느 정도 묵인해버렸고 우리의 입지도 그만큼 좁아졌지만 신중한 파병결정과 더불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후유증을 최소화하는데도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삽질을 우리가 나서서 막을 만한 힘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함께 파자며 쥐어준 삽을 들고 적당히 농땡이를 부리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국제 사회의 동의를 얻었다며 득의양양하며 삽을 건네줄 미국의 손을 뿌리치지 어려운 것이 가슴 아픈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삽의 크기와 삽질의 횟수와 깊이를 조절하는 것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 갈피를 잡기 힘든 혼돈일수록 균형감각의 미덕이 소중하다. 파병찬성 세력들은 이번 결의안 통과를 삽을 덥석 잡는 것의 근거로 삼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전히 이라크 침공은 인류사의 부끄러움이며 파병요구도 부당하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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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열렸던 경영대 사회과학학회 2차 세미나에서 ‘언론비평’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텍스트로 손석춘의 [신문읽기의 혁명]을 선정해서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눠볼 수 있었다. [신문읽기의 혁명]의 글쓴이 손석춘은 신문 취재, 편집은 물론 신문과 정치권력, 경제권력과의 관계 등을 여러 중앙 일간지의 기사를 시각적 자료로 제시하며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이를 통해 신문 읽기에서 편집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인 ‘편집을 알아야 기사가 보인다’가 이 책의 문제의식과 집필의도를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다. 글쓴이는 신문 기사내용은 고정불변의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신문이 제시하는 사고의 틀, 삶의 테두리 속에 갇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쓴이를 이를 위해 편집을 바로 보는 안목을 기를 것을 주창한다. 편집을 통해 비로소 신문이라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삶의 현실과 신문 지면 사이에 불가피하게 놓이게 된 여과장치가 바로 편집”이며 “가치 판단이 빠진 편집이란 애초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신문 편집국의 개념과 분업 구조를 설명하고 취재기자에서부터 편집국장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편집국과 편집부의 개념 차이, 취재기자와 편집기자의 분류 등을 이제야 깨우쳤다^^;) 이어 피라미드 구조로 된 신문기사의 편집과정에서 신문사의 주관적인 시각이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중앙 일간지들이 하나의 사건을 두고 표제와 기사내용이 다른 사례들을 들어 신문에 녹아있는 주관적 판단을 증빙해 보이며 심한 경우에는 왜곡되거나 사실과 동떨어진 표제가 붙여져 독자들의 인식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글쓴이는 신문편집의 3원색으로 “기사, 표제, 사진”을 들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개념상 설명이 필요한 “표제”에 대한 중점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그는 표제는 기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기에 중요하다고 말하며 “기사의 전체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사가 읽혀지는 해석의 틀을 제공”해준다고 그 의의를 밝히고 있다. 실제로 독자는 표제를 읽고 기사의 내용을 짐작하고, 읽을지 말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는 것 중에 하나가 표제의 왜곡과 선정성으로 독자에게 진실을 호도하려는 것에 있다.


‘실제로 있거나 실제로 있었던 일’인 사실(事實)을 보도하는 것이 신문의 이상이지만, 실제로는 ’문제가 되거나 관심을 끌 만한 일’인 사건(事件)을 보도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문사가 자기 입맛에 맞는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 즉 사실의 사건화를 이용한 그들의 숨은 의도를 가려내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의 사건화’라는 용어는 이 책에 대한 어느 네티즌의 서평에서 따온 것임을 밝힌다) 종이 신문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보통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서 존재한다. 이 창의 얼룩들을 지우기 위해서는 편집을 이해하고 기사를 비판적으로 읽어 가는 능동적인 독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 텍스트의 첫째마당을 개괄한 나의 발제문을 약간 수정해서 올렸다^^)


세미나는 시종일관 끊김 없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오늘날 신문이 영향력에 대한 고찰이 나왔다. (우리는 논제를 ‘종이 신문’으로만 한정했다) 참가자 대다수가 그래도 일정정도의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음에 논의할 가치가 있는 문제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인터넷 언론매체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최근에 왕성한 의제설정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종이 신문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한 것은 각종 조사통계를 보아도 도통 책을 읽지 않는다는 국민들이 그나마 접하는 정보전달매체가 신문이라는 점과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자기 생각으로 받아들여 부지런히 재생산하는 경우를 들었다. 다음으로 과연 신문의 ‘팩트조작’과 ‘관점차이’의 경계가 어디일까라는 화두가 이어졌지만 역시 녹록치 않았다.


나는 이야기 해보고 싶은 것으로 언론의 불편부당(不偏不黨)은 가능한가, 언론개혁의 목표와 실현방안은 무엇인가, 편집권은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했다. 그런데 별로 싸울 거리가 없어 보이던 불편부당이라는 논제가 활활 타올랐다. 웬만한 신문들의 사시(社是)에 불편부당이나 공정보도를 내걸고 있다보니 한 번 시비나 걸어보자는 거였는데 의외로 이야깃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물론 논의가 확대되면서 이런저런 논제가 섞이다보니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언론의 불편부당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것에서 어느 정도 합의를 보아야 언론개혁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불편부당 문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언론개혁의 목표도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게 보아 ‘정치적 지지까지 표명하는 분명한 입장 드러내기’와 ‘기계적 중립실현에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불편부당보다는 차라리 가면을 벗고 자기의 색깔을 떳떳이 밝히고 경쟁하자는 것이다. 후자는 불편부당의 이상은 찬성, 반대의견을 골고루 실어주는 등의 노력을 통해 일정정도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자가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으로서의 신문사를 바탕으로 한다면, 후자는 공익적 목적과 사회의 공기(公器)로서의 신문사를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불편부당에 대한 설왕설래를 경청하다가 문득 든 의문은 과연 입장 드러내기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이다. 대국적으로 우리 신문의 색깔은 이렇고 어느 당을 지지한다 같은 수준에서 그치는 것인가, 아니면 사안별로 자신의 입장을 밝혀 공론의 장에서 논쟁하겠다는 것인지 등에 대한 혼란이었다. 나는 신문의 제 색깔 드러내기는 좀 더 확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보수 언론들의 자신들의 논조가 보수적이라고 칼럼 등에서 공공연히 밝히고 있고, 기사도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편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도 불편부당을 외쳐되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이 가당찮다는 생각이다. 신문사 입장에서 정치적 지지까지 표명한다는 것은 엄청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정치권력과의 껄끄러운 관계나 독자들의 반발 등이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권력의 압력에 대한 위협은 거의 사라졌다고 본다. 지금도 열심히 트집잡고 욕하고 있지만 잘만 살고 있지 않는가^^;)


결국 지금도 암묵적으로 보이는 신문들의 당파성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그네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부담은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한쪽으로는 자기 입맛대로 세상을 재단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불편부당을 외치는 어정쩡한 포지셔닝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신문사가 이런 어정쩡한 입장이다 보니 글을 쓰는 기고자들이나 기자지망생이나 일반 독자까지도 갈피를 못잡고 덩달아 헷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보통 언론개혁하면 공정보도와 일정정도의 기계적 중립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정의 되지만, 나는 선명한 정치색을 밝히는 것도 충분히 언론개혁의 목표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불편부당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언론개혁의 목표 설정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미 충분히 색깔을 드러내고 있는 마당에 그런 상징적인 조치가 무슨 실효성을 가질 수 있겠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설령 정치적 지지를 드러낸들 그것이 사실 보도를 해야할 부분에서의 왜곡을 정당화 할 수 있다는 지적 또한 타당하다. 언론은 객관적일수는 없더라도 공정해야 한다는 당위적 목표도 맞는 말이다. 이런 반론을 접수하다보면 나의 주장이 언뜻 쉬워 보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제 속셈은 적당히 감추고 공정한 척 하는 지금의 언론 풍토에서 차라리 자신이 편파적임을 드러내는 대신 반대자의 의견을 경청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보는 것에 대한 바람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건 우리 시민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그 실현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다. (딴지일보의 레토릭인 “우리는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적이 되는 과정은 공정하다”가 자꾸 맴돈다^^)


불편부당의 문제는 언론자유와 공익의무간의 문제로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신문사의 눈에 맞는 기사를 선택하고 사설과 칼럼란을 채우는 것은 그네들의 자유다. 그러나 여기서 독자들에게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공익의무와 배치되게 된다. 그러나 이것 중에 양자택일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신문사의 성격이 영리추구와 공익목적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언론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 공익의무를 지닌 제한된 자유라는 것도 확실하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언론 본연의 자세에 충실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언론 자유라는 명목의 갖은 특혜를 주는 ‘계약적 관계’일 따름이다. 언론의 자유는 다른 모든 부문에서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책무가 따른다.


불편부당을 가지고 너무 시간을 끄는 것 같아 편집권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사실 ‘편집권=경영권’인가에 대해서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나왔다. 서구의 언론사들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사주가 영리적 목적으로 신문 지면을 마음껏 재편할 수 있는 우리의 구조에서는 부적절한 등식이라는 데 생각이 모였다. 미국의 경우 편집권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고 재산권이나 소유권과 연계하여 언론자유권이나 편집권을 발행인, 소유주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식 자유언론관을 우리나라에서 주장하는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미국 언론의 편집기능의 자율성이 무척 잘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영자는 일반적인 편집방침을 정할 뿐 개개의 편집업무는 편집진의 자율적 결정에 맡겨진다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관훈저널 2001년 가을호에 실린 부산대 신방과 임영호 교수의 ‘언론자유와 편집권’을 참고했다)


편집권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가 첫째마당에서 시간을 너무 소비한 나머지 둘째마당에 대한 논의를 서둘러 진행했다. 광고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신문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나는 지난날에는 언론이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많은 폐해를 나았다면 지금은 경제권력과의 불의의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 더 큰 일이라는 문제제기를 했다. 얼치기 경영학도이다 보니 아직 경제현상의 왜곡을 읽어 낼만한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진위 여부를 가릴만큼의 내공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계속 속아주고 있는 실정이지만 말이다.^^; 진중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무척이나 설득력 있다.


언론의 왜곡보도는 주로 정치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치면의 왜곡보다 더 심각한 게 경제면의 왜곡보도다. 정치 보도의 왜곡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만, 경제 보도의 왜곡은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 워낙 전문적인 문제라 웬만큼 식견이 있지 않으면 짚어내기도 힘들다.

- 진중권, [언론 ‘경제적 수구성’의 위험], 경향신문 2003년 6월 19일


경제권력에 휘둘리는 신문을 고민하다가 지난날 신문의 부끄러운 모습이 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직도 변변한 사죄의 말 한마디 없다는 친일 행적이나 독재 찬양의 기억들... 아마도 지난날의 과오를 깨끗이 털어 넣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한 일부 언론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고 심지어는 저주를 퍼붓는 광경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기적 함수를 가진 인간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는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손해가 부도덕한 수단과 방법으로 자행된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나같이 별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마저도 지난날의 더러운 과거가 영 마뜩지 않다. 물론 서슬 퍼런 칼날이 두려워 엎드려서 부끄러운 짓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심 어린 사죄만이 재생산되는 분노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진솔한 사죄가 있다면 다 덮어줄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 세미나를 하고 있던 교양관의 불이 꺼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저런 말들이 쏟아졌지만 정리하는 의미에서 언론개혁에 대한 짤막한 발언들을 해보기로 했다. 소유지분 제한이나 신문공동판매, 대안매체 생성과 참여 등의 대안들이 나왔다. 현실적 막막함 때문에 원론적 수준의 이야기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언론의 문제가 조금씩이라도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한결 같았다. 나는 마지막 발언에서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시민의식 개혁도 필요하겠지만 언론개혁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될 법과 제도의 개정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의회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실상 민주주의 사회의 사회문제는 상당수가 궁극적으로 의회권력과 연결되어 버린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나의 의회주의적 열망과는 달리 우리 국회 현실은 너무나 열악하고 절망스럽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진리와 허위가 대결하게 하라. 자유롭고 공개된 대결에서 진리가 불리한 편에 놓이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느냐.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발할 수 있게 하라. 그러면 진리의 편이 반드시 승리하고 생존한다. 허위와 불건전은 ‘공개된 자유시장’에서 다투다가 마침내는 패배하리라. 권력은 이러한 선악의 싸움에 일절 개입하지 말라. 설혹 허위가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일이 있더라도 선악과 진위가 자유롭게 싸워간다면 마침내 선과 진이 '자가교정 과정'을 거쳐 궁극적인 승리를 얻게 되리라.”

- 존 밀턴 1644년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


나는 존 밀턴과 같은 순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겠다. 내가 믿는 것이 선이고 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승리에 대한 불신도 한 몫 했으리라. 허위의 낮이 뜨겁게 펼쳐지는 데 진리의 갓밝이(여명)를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하다 못해 해거름(석양)조차도 잘 안 보이는데 언제 밤을 지나 새벽녘을 맞이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물론 일부 언론들의 허위의 결정체로 몰아붙이는 것은 조금 지나친 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과 악의 대결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부시(Bush)스러운(?) 도식을 그려보는 것은 그만큼 우리 언론환경이 구질구질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의 창건자 아돌프 옥스는 1861년 8월 16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뉴욕타임스의 목적은 어느 일방을 두려워 하거나 어느 한쪽에 특혜를 주지도 않고, 정당이나 분파 또 어떤 이익집단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뉴스를 불편부당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공공의 관심사항들이 모두 논의되는 광장이 되기 위해 다양한 견해가 반영되는 지적인 토론을 이끌어내겠다는 다짐입니다.” Without fear or favor... 두려움도 없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보도를 하겠다는 뉴욕타임스의 구호가 그들의 세계 최고의 신문의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물론 모두를 납득시키는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를 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가리워진 길을 가려는 언론인과 언론사들이 대접받는 세상이 오리라 낙관한다.


[신문읽기의 혁명]을 가지고 세미나를 한다고 하니 한 선배께서 옛날(97년에 초판이 나왔음)에 나왔던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문제라며 푸념하셨다.^^ 그러나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앞으로 바뀌어 가리라 생각한다. 가디언의 편집국장이자 사주였던 찰스 스콧은 “해석(혹은 주석註釋)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고 했다. 왜곡을 마시고 불공정을 안주 삼는 그대들에게 바란다. “그대들의 맘에 안 드는 해석을 존중한다. 그러나 제발 사실만은 건드리지 마시라. 그대들에게 사실 자체를 건드릴 자유는 없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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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에게 관용을 베풀자
- 최대한의 관용을 베푸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 문제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37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그는 국정원 조사를 거치며 “거물간첩으로의 추락”이라는 수모까지 겪고 있다. 물론 그가 진작에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질질 끌다가 이제야 봇물 터지듯이 쏟아내서 국민들의 혼란을 초래한 점은 아쉽다. 또한 일부 거짓말을 해왔다는 점에서도 비판할 여지가 많으며, 북한 노동당원이었으며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돈까지 받아썼다는 행적에도 따가운 눈총을 받을 만하다. 논란 중인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의 감투까지 썼다는 것까지 확인되면 이보다 더 난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경계인”을 자처했지만 그 자신이 인정했듯이 한 쪽에 경도된 사고를 해왔다는 점에서도 영 찜찜하다. 그러나 그가 오랜 세월 고국을 떠나있으면서 한반도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제대로 가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가 설령 북한에 호의적이고 남한에 악감정을 갖고 있더라도 그런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불편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대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사법당국은 송 교수의 사상과 신념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의 명백한 간첩행위가 입증될 경우에만 신중히 처벌을 해야할 것이다. (여기서 ‘신중히’란 표현을 쓴 것은 그가 엄연히 독일국적을 보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보수 정치인들과 언론, 격앙된 네티즌들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오버질을 하는 것이다. 자기 의지로 귀국하여 국정원에 협조하여 조사를 받은 송 교수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기에 감방에 쳐 넣자고 핏발을 세우고, 그에게 과도한 욕을 퍼붓는 것인가. 이미 송 교수의 저작이 국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는데도 독일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독일국적의 학자가 대한민국 흙을 함부로 밟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이러니 하다. 그가 과오를 시인했으며, 남은 의혹들은 앞으로 조사가 이루어질 만큼 끼니 거른 강아지처럼 허겁지겁 이념적, 감정적 공박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유시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상대방의 잘못을 이유로 들어 자기의 똑같은 잘못을 정당화하는 냉전적 사고틀에 갇혀 살았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계속하되 최대한의 관용을 베푸는 것이 우리 사회의 넉넉함을 과시하는 길이다. 지난날 우리는 북한의 비정상적인 국가모습만큼이나 구질구질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아픈 기억들과 많은 이들의 헌신을 먹고 이제야 북한 앞에서 어깨를 활짝 펴고 자부심을 가질만한 나라를 일구어 냈다. 과거의 실수와 실정법에 따른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송 교수를 따스하게 맞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싶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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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고연전은 다가왔다. 새내기를 중심으로 한 설렘이 느껴진다. 그러나 점차 높아지는 고연전 반대의 목소리도 높다(고연전과 고연제의 용어혼란을 막기 위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고연전은 5개의 경기를 말하는 것이고, 고연제는 이 경기를 포함해서 고연전이 있는 주중에 벌어지는 문화제, 방송제 등의 모든 행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고연제에서 고연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고연전으로만 논의의 범위를 축소시켜 살펴보겠다). 고연전을 비판하는 목소리, 고연대의 학벌주의를 비판하는 외침이 시간이 갈수록 점차 커지고 있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고연전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경기가 끝나고 이루어지는 술판과 기차놀이 등으로 말미암아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지나치다는 입장이 있다. 둘째로 학벌체제를 공고히 하고 양교생들의 엘리트 의식을 부채질한다는 지적이다. 셋째로 남성중심적이고, 비장애중심적인 집단적 대학문화를 반복 재생산한다는 외침이다.


우선 첫 번째 비판은 고연전을 좋아하는 대다수의 고대인들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고, 개선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비판에서는 입장이 크게 갈리는 듯하다. 과연 고연전이 엘리트 의식을 고취하는데 일조 하는지의 여부가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설사 학벌의식, 우월의식을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면 이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교 친선행사에 불과한 것에 타교생이 콤플렉스를 느낄 것도 없고, 또한 우리도 타교생에게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이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과연 고연전을 학벌이 나쁜 여러 대학에 대한 노골적인 집단 우월감의 표시라고 해석해야하는지의 논의를 평행선을 달릴 소지가 많다. 한 쪽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며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지도 않는데 괜히 오버하고 난리라며 열을 내는 광경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인지, 단순한 애교심일 뿐인지 어느 쪽의 입장을 선뜻 들어주기 힘들다. 안티 측에서는 고연전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내세우는 애교심이라는 것이 과연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한국사회의 권력을 학벌 좋은 학교가 나눠 가지는 상황에서 순수한 애교심이 성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지 측에서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에 순수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한다, 또한 그렇게 순수성을 따지는 이들의 순수성도 의심스럽다는 역공을 펼친다. 이토록 치열한 학벌주의 논쟁은 일면 소모적으로 보이지만, 성찰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학벌주의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를 비판하지 않고, 애꿎은 고연전을 물고늘어지느냐는 반발도 있지만, 본디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믿는다면, 그 항변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 분명 이는 서울대 공화국인 이 땅의 현실과는 별도로 진행되어야할 논쟁이다.


세 번째 비판인 고대문화에 대한 비판은 팽팽하게 입장이 갈리는 두 번째 비판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역시 찬반이 맞서지만, 찬성 입장의 강도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두 번째 논점과는 달리 해결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고대의 집단적 문화는 여느 대학들보다 그 정도가 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새터에서부터 시작되는 ‘고대인 만들기’는 FM, 사발식, 응원 등으로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된다. ‘고대스러움’의 부정적 속성에 대한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음에도 고대 문화는 큰 틀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사발식에서 사용되는 ‘막걸리 찬가’에서 저속하고 여성비하적인 소절을 바꾸려는 노력이 한참이나 걸렸다는 것만 보아도 새로운 고대 문화를 창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 수 있다). 군대의 관등성명과 별반 차이 없는 FM도 그렇지만, 지나친 응원도 문제다. 응원을 할 때 힘찬 움직임을 추구하며, 목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야만 상대방에 기죽지 않고 멋진 응원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성중심적이고 비장애중심적이라는 비판이 많다. 그러나 응원에 열광하는 것이 반드시 남성중심적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여자는 목소리 크게 내면 안되고, 큰 동작으로 뛰면 안되는 것인가?), 고연전이나 응원이 기본적으로 비장애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남성중심적이고 비장애중심적이라는 혐의를 상당수 벗겨내더라도, 고연전을 위시한 고대 문화가 문제시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집단주의 때문이다. 선배가 시키는데 FM을 안하는 새내기를 상상하기 힘들고, 이런저런 행사 때 응원을 안하고 뒤로 빠지기도 여간 쉽지 않다. FM, 응원 등을 하기 싫은 이에게도 무언의 압력으로 인해 마지못해서라도 고대 문화, 그 집단주의의 대열에 줄을 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런 면은 많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이른바 고대 문화로 지칭되던 것들이 상당수 그 힘을 잃어 가는 조짐이 보인다(일부 단과대에서 고대 문화를 잘 재생산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는 계속된 비판과 지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고대의 그 굳건해 보이던 집단주의 문화도 개인주의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일상적 자유확립’을 위해 개인의 취향에 따른 자유로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직은 요원하지만 그 과정은 비교적 낙관적이다.


안티 고연전 운동은 아무 생각 없이 즐기던 행사에 대해 곱씹는 계기가 되고, 부정적인 면을 고쳐나가는 데 소중한 도움이 되었다. 정리해보자면 고연전에 대한 세 가지 비판 중에서 첫 번째는 이미 이론의 여지없이 찬반 양측이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큰 틀에서 동감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찬반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고 있으며, 세 번째는 찬반이 맞서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비판 찬성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추세이다. 결국 고연전 논쟁의 핵심은 ‘학벌주의’라는 죄목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고대와 연대가 묘한 공생관계로 학벌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느냐를 입증하는 것이 고연전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끝으로 안티 고연전을 둘러싼 활발한 논쟁이야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너무 과열되지 않기를 바란다. 안티 고연전 측의 고연전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와 자학, 고대에 대한 부당한 매도가 조금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고연전을 지지하는 측의 불성실한 태도가 더 비판받아야 한다. 고연전을 공론의 장에서 구워삶는 것은 좋지만, 서로가 가진 학교에 대한 따뜻한 애정까지 의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올해 고연전도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경기 승리로 인한 잠깐의 기쁨보다는 학교 교육의 질과 학생 개개인의 자아실현 여부로 승부를 걸고 싶다. 그것이 비단 연대 뿐만이 아닌 다른 어떤 대학이든 말이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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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반대가 진짜 국익이다
- 파병 반대 최선의 전략은 국회의 농성전이다

미국이 전투병을 추가로 파병해줄 것을 요청해서 찬반 여론이 들끓고 있다. 지난 파병 논란 때 정부는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미관계의 복원 필요성이라는 국익을 위해 파병을 선택했고, 이 선택의 부당성을 토로하면서도,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반응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 때와는 현격히 다르다. 대량살상무기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고, 이라크 현지의 사정도 무척 위험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추가 파병 요구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많은 이들이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함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서글픈 현실이고, 이를 마냥 덮어두고 외면할 수도 없다. 미국의 으름장을 감당할 만큼 우리네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보니 우리 정부는 이번에도 진퇴양난의 형국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미국의 협박을 정부가 거절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동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추가 파병을 막아야 한다. 정부가 파병을 결정하더라도, 국회가 파병동의안을 부결시킴으로써 파병도 막고, 체면치레도 하는 궁상맞은 전략이 최선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국회의원 잘못 뽑은 것이 이럴 때 후회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지금의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의사와 국익을 잘 반영해서 파병동의안에 임할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추가 파병 문제에 대한 1차적 결정은 정부가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가 운신의 폭이 좁을 때는 국회가 대신 움직여줘야 한다. 사실 국회가 이런 일 하라고 있는 것 아닌가. 전쟁에서 요격전에서 실패하면, 농성전으로 옮겨와야 한다. 정부가 들판에서 목책 쌓아가며 눈치껏 버티다가 결국은 성으로 퇴각해 들어오면, 국회가 불화살과 돌을 굴려가며 성을 지켜나가야 한다. 이런 일도 못하면서 군량미 축내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처사라는 것은 과연 모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슬프게도 이런 익구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지난 파병동의안 처리 때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소수였듯이, 이번에도 상황은 별반 나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정부가 파병 찬성하고 국회가 파병동의안 부결시키는 것이 가장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이렇게 될 가능성이 많지 않아 보인다. 지금으로서 파병을 막는 것은 대통령이 거부하는 방도밖에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은 정부의 입장으로서는 최선이 될 파병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고, 결국 국회는 파병동의안을 조금 끌다가 가결시켜버리는 지난번의 재판이 될 개연성이 높다.


파병 찬성을 하는 입장도 충분히 존중한다. 대신 순서를 지켜야 한다. 우선 헌법 5조 1항의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라는 문구를 변경하는 개헌절차부터 밟는 것이 순리 아닌가. (혹자들은 5조 1항의 앞부분인 ‘국제평화의 유지’나 헌법 전문의 ‘항구적인 세계 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이라는 문구까지 변경하자고 주장할지 모르나 너무 자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있을지 모르는 파병 딜레마 때마다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느니 이번 기회에 개헌논쟁으로 한 번에 끝내는 것도 좋겠지만 이 또한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열혈 파병론자들은 이 파병이 침략적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외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파병불가피론자들은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으로 해명을 할 것이다. 현실적 불가피론을 인정한다. 다만 공론의 장에서 좀 더 솔직하게 말해달라. ‘침략 전쟁이 맞습니다. 맞고요. 그렇지만 미국의 공갈이 꽤 위협적이지 않습니까. 당장 급한 불부터 끕시다.’라고 터놓고 말하고 한바탕 논쟁을 벌여보자. 국익을 내세워 그 뒤로 숨기보다는 진심으로 이 땅의 현실을 놓고, 파병 반대든, 찬성이든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답답한 상황이지만 익구가 파병 반대를 주장하는 까닭은 대한민국 헌법을 지키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국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냉혹한 국제 정치에서 명분만을 부여잡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고, 정부의 난감한 입장이 역지사지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반대하는 마음도 편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입장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에서는 일단은 자기 생각대로 주장하는 것이 원칙이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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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회계원리 강의시간에 있었던 ᄌ교수의 충격적인 발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 ᄌ교수가 고려대학교 체육위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중에 나온 ‘쓰레기’ 발언이 그 이유였다. ᄌ교수는 야구 특기생을 6명 뽑을 때 당시 후보로 있었던 선수가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이 있었는데 당시는 임선동을 데려오기 위해 혈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만 해도 박찬호는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ᄌ교수는 “결국 박찬호는 한양대에 갔지. 그 때 한양대는 여기저기 쓰레기들을 모아 15명이나 뽑았었거든...”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그러면서 그랬던 박찬호가 지금은 가장 잘 나가고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대략 마무리되었다.


학생들은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교수의 ‘쓰레기 발언’은 영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강의의 지루함을 좀 덜어보려는 이야기였다는 선의는 충분히 인정하지만, ‘쓰레기’라는 단어를 쓴 것은 좀 과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본교의 체육특기생들이 우수했다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타교에 진학한 이들을 일컬어 ‘쓰레기’라는 단어를 쓴 것은 농담으로 지나치기에는 은근히 깔려있는 학벌주의적 사고가 너무 선명해 보인다.


역지사지라고 했다. 고려대와 한양대에서 서울대와 고려대로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자. 서울대의 어느 교수가 고려대 학생들에게 ‘쓰레기’라고 모욕적인 발언을 늘어놓을 때도 우스갯소리이겠거니 하며 넘어갈 수 있을지 미지수다. 물론 지금의 학벌주의 구조에서 가만히 기생한다면 고려대라는 존재가 2, 3등의 자리를 공고히 지키며 각종 콩고물을 편안히 뜯어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 피라미드에서는 서울대를 제외한 모든 대학은 결국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고려대학교의 교훈은 ‘자유, 정의, 진리’이다. 학벌주의는 고대의 3대 이념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에 기댈 것이 아니라 마땅히 없애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자기 학교를 자랑스러워하고 좋게 보려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인지상정이 지나쳐서는 안된다. 정말 학교를 사랑한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건실한 실력을 쌓아나가야지 남을 깔보면서 어부지리로 우월한 지위를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ᄌ교수의 쓰레기 발언을 너무 깐깐하게 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를 계기로 배려할 줄 아는 고대인의 모습을 정립해야 한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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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수험시절 면접과 논술을 공부한답시고 토론 프로그램을 메모해가면서 보던 것과는 달리... 요즘 들어 토론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하나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분명한 목적 의식(?)이 상실된 까닭이 크겠지만... 그런데 8월 31일 일요일 밤에 있었던 케이비에스 2TV의 ‘100인 토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에서는 호주제 폐지 논란에 대한 토론은 최근 본 토론 중에서 가장 뜨거웠다. 그만큼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큰 화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뭐 대개의 토론은 양측의 입장이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지만... 호주제는 특히 더하다.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현행 호주제는 이 땅의 부계혈통주의와 남성중심적 사회를 존속시키며 여성을 억압하는 반인권적인 제도라고 열을 내고... 호주제 폐지반대론자들은 유구한 전통 타령을 하며 서구의 개인주의의 물결에 맞설 방파제라고 역설한다. (지금까지 본 호주제 유지론자의 입장 중에 압권은 호주제 폐지가 공산주의 여성 동등권 이념투쟁의 연장이라며, 공산화의 일환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별걸 다 빨간 색을 칠한다...^^;)


호주제 폐지는 호주의 개념을 없애는 것과 더불어 자녀의 성과 본을 어머니의 것으로도 따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가지고 시비 거는 이들이 많다.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비아냥거리고, 성씨 빼고 이름만 쓰는 사람들을 개만도 못한 놈들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성씨 없던 사람들이 성씨와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이왕이면 명문 세도가문의 것을 써서 명문 세도가문인 척 하려고 했다는 것은 거의 진실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씨 왕조의 후손이니 김수로왕의 후손이니 하는 말을 나누며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한국적 정서라고 둘러대기에는 영 마뜩지 않다.


1989년 민법개정으로 호주의 권리와 의무가 대폭 축소되어 현행 호주제는 사실상 관념적인 제도로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허울뿐인 제도가 미풍양속이고 우리 전통문화의 대들보라고 주장할 이유가 있는지 두 번 생각해도 아리송하다. 특히 호주제 없으면 개랑 다를 바 없어진다고 핏발 세우는 소위 유림들은 뭐하는 이들인가. 진정한 보수는 바꿔야 할 것은 기꺼이 고치면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 상식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변화를 모른다. 이들에게 역사를 더 공부하길 권한다. 조선이 누구 때문에 어쩌다가 망했는지를... 다행인 것은 이들이 더 이상 이 땅의 권력을 넘볼 수 없을 만큼 쇠락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뜻을 이어받을 후세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데 그네들은 위기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건 다 자업자득, 인과응보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시라.^^


권해효 : 60년에 호적법이 생긴 이후에 문제없이 쓰였다는데 사실은 59년도부터 가정법을 개정하기 위해서 많은 여성단체가 50년 세월을 싸워왔습니다. 사실은요. 잘 아시잖아요., 70년대도 있었고, 90년도에 민법 개정도 있었구요. 80년대도 있었구요. 59년부터 있었다구요. 문제가 있다고 제기를 해왔단 말이에요. 무시하고 있었죠. 이제까지요. 사실 무시하고 있었죠.



배우 권해효의 부드러운 말이 무척 호소력 있게 들린다. 그렇다. 지금까지 무시해왔다. 남성의 울타리 안에서의 양성평등을 용인하던 이들이 그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이들에게 드디어 삿대질을 하며 울타리를 넘지 못하게 하려고 하고 있다. 결국 울타리를 없애는 것이 가장 빨리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울타리를 낮춘다거나 쪽문을 내는 정도에서 타협해봤자 남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논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고은광순 운영위원 고은광순과 배우 윤문식의 설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역시 무지는 위험하다.^^;


고은광순 : 네. 호주제를 폐지했을 경우에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거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검증되지 않을 것을 왜 걱정합니까. 지금 현재 있기 때문에 피해가 생기고 고통스러운 건 충분히 검증되어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나온 책에도 보면 얼마나 가슴아픈 사연들이 많은지 몰라요. 줄줄이 많이 있어요. 이건 틀림없이 지금 현재 발생하고 검증된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정도 아니고 개선도 아니고 폐지가 최선이라고 학자들도 다 발표를 했어요. 그래서 용역 줘서 이런 거 저런 거 다 살펴보니까 개인별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겠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개인별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겠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게 오랜 연구 끝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을 없는 척하고 발생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검증되지 않았으니까 가지 말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가혹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요. 노예 해방이 되야 되는 건 당연한데 노예 해방되는 데든 돈이 많이 드니까 하지 말자라고 하는 말은 백인주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비인간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 식의 말은 절반의 인구에 해당하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굉장히 폭력적인 발언입니다.


윤문식 :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오시면요. 지금 그걸 그 법을 관철시키시려면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씀하지 마시고, 저같이 무식한 놈들을 설득시켜야 되는 겁니다. 지금 수많은 사례들 수집했을 때 물론 나보다 얼마나 피해가 있다는 걸 많이 연구하셨기 때문에 그런걸 주장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호주제를 폐지했을 때 그보다 더 많은 피해가 있을지 어떻게 아느냐 이거죠. 그래서 그런걸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를 하는 거 에요. 그리고 지금까지 잘 진행해왔던걸 지금 사례들이 가슴아픈 사례들이 많은 겁니다. 그 사례에 많은 사람들이 물론 민주주의 국가는 다수결이고 물론 후세 인간도 존중해야 되겠지만, 그 몇몇의 소수 인원을 위해서 전통적인 문화의 근간을 흔들어놓는다는 것은 난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거에요.


고은광순 : 소수가 아니구요. 지금 이혼율이 세계 2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윤문식 : 그럼 호주제 폐지한다고 이혼 안합니까? 이혼할 여자는 이래도 저래도 해요.


고은광순 : 그 이혼한 사람들이 다시 재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현재 이런 문제를 성씨문제라든가 호주제 문제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이미 깨졌지만 사실은 실패한 결혼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고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결단을 박수를 쳐줘야 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제2의 삶을 살 때 그 사람들에게 또 다시 굴레를 법이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또 다시 굴레를 주면 안 되는 거죠.



윤문식에게서 대한민국 보통 남자들의 무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자기 아내의 고통은 외면하면서도 후세를 걱정하고, 대한민국의 전통을 사수하는데는 열과 성을 다하는 모순... 한총련 수배자들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면서, 휴전선 너머의 북한의 인권을 걱정하는 오바질도 다 매한가지다. 유시민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며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이들’이 제발 좀 더 줄어들길 바란다.


<맹자>의 양 혜왕 편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하루는 왕이 궁궐에 있는데 하인이 소를 데리고 지나 가더란다. 봤더니 소가 눈이 슬프거든. 우는 거 같고. 그래서 "어디에 데려가느냐" 했더니 "제사지내러 잡으러 갑니다" 그러더란다. 그래 소를 다시 봤더니 우는 거 같거든. 불쌍하잖아. 그래서 소를 잡지 말라고 그랬다. 그랬더니 하인이 "그럼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뭘 잡을까요" 그러자 왕이 하는 말이 양을 잡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가 퍼져 나가니까 온 백성들이 비웃었다. 멍청한 왕이라고. 소는 불쌍하고 양은 안 불쌍하냐는 얘기다. 그런데 맹자가 그에 대해 뭐라고 했냐면,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은 어진 군주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에 조차도 연민의 정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질 리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 주변에서 직관적으로 정서적으로 다가오는 연민의 문제나 이런 것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 뉴스툰 인터뷰 中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 어려운 논거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그저 담담히 상식에 호소하자. 세상의 절반이 희생되어 이룩하는 그 어떤 것도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차분히 주장하자. 윤문식과 비슷한 무지가 지배하는 세상을 바꾸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짜증이 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교감하며 설득해야 할 수밖에. 그래도 승기를 슬슬 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위안 삼을 뿐이다. 끝으로 동국대 영화영상학부 유지나 교수의 다음과 같은 확신에 나도 동감한다.


유지나 : 개인의 행복 추구권으로써 가족이 가치 있을 때 있는 것이고, 어떤 개인 특히 한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는 가족이라면 항상 깨져나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고 좋은 전통을 만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인으로써 이 한반도에서 인간존중의 전통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확신하고 자료 있습니다. 왜 몇십년 전통만 전통이고, 백년 전 전통은 아닙니까? 인간 존중의 전통을 살려서 남녀성이 같이 양성평등하는 가족제도 만들기 위해서 호주제도 없애도 됩니다. 확신합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시면 아실 거에요. 처음으로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저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남녀차별보다는 양성평등이 더 이득이 된다는 것이 뭇사람들의 가슴에 알알이 박히기까지는 엄청난 비용을 지출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양성평등에 대한 신념이 하나하나 늘어갈 때 투자한 것의 몇 곱절 되는 거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별로 리스크가 높은 투자도 아니니 더 많은 개미 투자자들이 몰려들기를 바란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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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응원단의 슬픈 코미디를 기억하자

대구 여름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들어간 환영 현수막을 걷어 가는 소동이 빚어졌다. 이 현수막 한쪽에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는 사진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응원단원들은 현수막을 떼어내면서 장군님의 사진을 어떻게 비에 젖게 할 수 있느냐, 장군님 사진을 가로수에 낮게 걸어놓을 수 있느냐며 항의했다고 한다. 또 일부는 눈물을 쏟기도 했다.


이번 해프닝은 무척이나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사담 후세인이 감동 먹고, 조지 부시가 침을 흘릴 폭압적 전체주의 사회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이런 이들과 통일을 논해야 한다는 것 자체에 회의를 느껴지기까지 하다. 문화적 차이를 이야기하고, 상대주의를 들먹이고 싶어도 보편적 상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버린 이 기막힌 현실 앞에서 할말을 잃게 한다. 인간의 내면적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섬뜩한 광경 앞에서 역설적으로 자유의 소중함과 개인의 존엄성이 부각되고 있다.


또한 불만인 것은 북한의 전략개념의 부재이다. 북한 응원단의 돌출행동은 결국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북한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 남한 국민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는 최근의 남북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갖은 비판 속에서도 여전히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햇볕정책 추진세력들에게도 큰 부담을 지우게 하고 있다. 퍼주기라고 구박받으면서도 대북 경제지원을 지속하고, 욕 먹어가면서 자기네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자꾸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북한의 태도는 기본적인 상도덕을 망각한 것이다.


북한 응원단의 이번 행동은 극우 단체들의 짜증나는 반북시위만큼이나 기분 나쁘다. 일부 단체의 반북시위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며 우리 정부에게 무리한 수준의 사과를 요구하고, 북한 선수단을 환영하고 응원하는 현수막인데도 트집을 잡고 격한 행동을 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거의 찾기 힘든 독선적이고 자기본위의 행동이다. 남을 존중할 줄 모르면서 자기들은 대우해달라고 핵장난으로 협박하는 북한의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북한은 자신들이 짝사랑을 계속 받을 만큼 그리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콧등이 시리도록 슬픈 코미디다. 북한응원단의 이 눈물겨운 충성극에 평양의 김정일 일당들이 흐뭇해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참담하기까지 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앞으로 간다는 것을 믿지만 그 과정이 아직은 요원하고, 그 사이에 희생되는 북한 인민, 남한 국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또한 북한을 저주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을 닮은 전체주의, 군사주의 사회를 꿈꾸는 극우세력의 궐기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씁쓸함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평화통일의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에 우리의 숙명이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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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할의 무임승차

사회 2003. 8. 26. 03:44 |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에 올려진 8월 12일날 있은 지승호의 김규항 인터뷰를 재미나게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한 방 강하게 먹었다. 얼마 전 있었던 한총련 미군부대 진입 시위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대목이다. 나는 그 뉴스를 접하고 “몸 좀 사리고 있지”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들의 치열한 정신이 보기에 이 땅의 보수의 찌든 풍토가 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굽히고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가만히 있어 주는 걸로 합법화를 앞당기는 전략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인터뷰 몇 토막을 긁어보자면...


지 - 한총련의 미군부대 진입 시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다음날 거의 모든 언론들이 한총련을 비난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는데요.


김 = 그게 한총련에서 조직적으로 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찌됐든 저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한겨레를 얼핏 보니까 논설주간인가 하는 사람이 '옛날에 군사정권 시절 같으면 국민들이 그런 폭력적인 시위를 용인을 했지만...'이라고 썼던데 그거 다 개소리거든요. 그때 무슨 국민들이 용인했습니까. 그때도 세상을 몰라서 하는 짓이라고, 빨갱이 새끼들 다 잡아들여야 된다고 욕했습니다. 국민들은 늘 그랬습니다. 걸핏하면 그때 국민들이 떨리는 심정으로 대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했던 것처럼 말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다들 제 식구 챙기면서 알뜰하게 살았죠. 제 얘기 동의하시죠?


지 - 예. 동의합니다.(웃음)


김 = 역사라는 것은 항상 비난받고 오해받는 소수가 뚫고 나가서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무임승차하는 식으로 발전합니다. 차라리 '난 한총련 놈들이 꼴 보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규항의 말에 따르면 나의 “몸 좀 사리고 있지”라는 생각은 나름대로 그들을 위한 생각이라고 여겼었는데 이건 결국 한총련 놈들이 싫다를 완곡하게 돌려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비록 서푼어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나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해서 한총련 합법화를 꾸준히 지지해왔다. 그게 아니라면 헌법에 보장된 사상의 자유에 근거해서라도 지지할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를 들먹이는 거창한 것이 아닌,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그렇지만 당연한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오로지 당위만 부여잡으려는 편협한 사고는 위험하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몸 좀 사리고 있지”는 내가 비굴한 현실주의자임을 증명한다고 스스로를 공격해본다. 나는 이상주의자를 자처하지만 나의 이상은 현실과 타협해서 제 모습을 거의 다 깎아먹기 일쑤다. 고심 끝에 ‘이상실현주의자’라는 억지 수식어구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릇된 것을 현실을 핑계 대며 그럭저럭 괜찮은 것으로 변신시키는 잔머리가 나의 이상실현주의의 요체인지도 모른다. 비난받고 오해받는 두려운 길을 가기보다는 알콩달콩 적당히 손잡아가며 살아가는 전략을 앞으로도 별 문제의식 없이 구사할 것이다.


그렇다. 김규항의 말대로 소수의 희생 끝에 역사는 진보해왔다고 볼 수 있다. 역사의 진보는 재화의 유형 중에서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다. 공공재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


첫 번째 특성은 소비에서의 비경합성(non-rivalry)인데. 한 사람이 그것을 소비한다 해서 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 번째 특성은 배제불가능성(non-excludability)으로서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이라도 소비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성격이다.
- 이준구, 이창용, [경제학원론] 제2판 273쪽, (법문사, 2001)


경합성은 한 사람이 재화를 소비하면 다른 사람의 소비가 제한 받는 속성이다. 즉, 비경합성은 한 사람이 공공재 소비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인 한계비용이 0이라는 말이다. 배제성은 다른 사람들이 재화를 소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즉, 배제불가능성이란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도 공공재를 사용하는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진보가 비경합적인 것은 가령 양성평등의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할 때, 100만 명이 그 문화의 혜택을 누리는 것에서 1000만 명이 그 문화의 혜택을 누리게 하는데 드는 비용이 0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인 경우 한계비용이 0이겠지만, 아마 현실 상에서는 0보다는 클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배제불가능한 이유는 가령 일단 민주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어떤 이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군사정권 시절의 폭압적 의사결정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허나 자발적으로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고 외치는 이들은 논외로 하자^^;)


공공재 문제 앞에서 역사라는 거대한 ‘시장’은 곧잘 실패를 한다. 그러나 그 실패를 만회하는 방법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럴수록 평가가 철저히 이루어져야하고, 보상과 문책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서 소수의 희생이 사후에나마 대접받고 보상받을 수 있어야 한다. 혹자는 그럼 희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불확실성에 자신의 내맡긴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 의미는 충분하다. 햇빛이 비칠 때 투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짙은 안개가 깔리거나 거센 폭우가 들이칠 때 투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진 진보는 참다운 진보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누군가는 계속 희생하고, 누군가는 희생의 열매를 향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상과 문책, 기록과 평가에 대한 인식이 투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희생한 이들에게 희생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하고, 희생시킨 놈들에게는 어느 정도 그 악행에 대한 죄 값을 짐 지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선악의 개념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분명한 악으로서의 조선일보 같은 존재들이 고맙기까지 하다^^;) 착한 이들과 나쁜 놈들을 가려내기 여간 힘들지 않은 세상이지만, 시장의 상도덕이 바로잡힌다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김규항의 사관이 조금은 엘리트주의 냄새가 난다고 핀잔하기보다는, 소수의 희생을 넙죽 받아먹는 대다수 무임승차하는 이들에 대한 질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리고 기록과 평가를 일상화하고, 보상과 문책을 공정하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팔할은 무임승차하는 나의 남은 이할의 양심이다. 6(^.^)9


덧붙이며...

한총련 합법화 논의가 처음 불거져 나왔을 때 한총련이 불법의 그늘에서 벗어난다면, 다양한 학생운동 흐름들과 진검승부를 펼치지 않을까 하는 제멋대로의 상상을 해봤다. 비운동권을 표방하는 나로서는 거대한 경쟁자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거 완전히 김칫국 몇 사발은 들이킨 꼴이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인 상상과는 달리 이미 운동권의 대세를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 한총련이 합법화된다면 그야말로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운동통일’을 꾀할 것 같다는 두려운 상상이다. 뭐 통일이라고 해봤자 그네들끼리 감투 주고받고, 그들만의 언어로 유희하며 학생사회의 대장질하는 쾌감을 공유하는 철저한 그들만의 잔치겠지만 말이다. 학생회, 동아리, 학회 등의 대학사회의 여러 조직들이 하나같이 맥을 못 추는 판에 그네들이 독점을 하면 얼마나 하고, 통일해서 잔치 벌여봤자 얼마나 벌이겠냐는 생각을 곧바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한총련 합법화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도 변함 없이 한총련을 위시한 불법의 눈초리를 받는 운동 단체들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앞으로 합법화 된 그들과 대립각을 세울 일이 있다면 너무나 부족한 나로서는 불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무지한 자의 편에 서줄 만큼 여유롭지는 않기에... 나의 무식을 손가락질 할 뿐 그들의 유식을 탓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식과 무식의 경계는 늘 아슬아슬하다는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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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썼던 글을 조금 덧붙여서 올린다. 나의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며 끊임없이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믿기에... 이 글을 쓴지 꽤 되었는데 학생운동의 미묘한 변화의 흐름을 느낀다. 학생운동의 한 축이었던 전학협이 해소를 선언하고 한총련도 발전적 해소를 논의하고 있다. 학생회 해체 운동이라는 격한 목소리도 들린다. 학생사회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느덧 대학 2학년이라는 직위(?)를 소지하게 된 것과 더불어 ‘헌내기’라는 칭호를 더하게 되었다. 문득 나의 대학 새내기시절을 돌아보니 별로 한 것도 없이 구질구질하게 보낸 것 같아서 영 안쓰럽다. 그나마 한 것이라고는... 35대 총학생회 기획국 차장이라는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말단 일꾼으로 활동했다는 것 정도라고 할까... 나는 입학하기 전인 2002년 1월에 총학생회 홍보를 듣고 지원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임기 끝까지 남아 있었던 거의 유일한 02학번 생존자(?)가 될 줄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나로서는 그 자랑스런(?) 업적을 드러내놓고 뽐낼 만도 하건만...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비록 잡일꾼이었지만 총학생회 살림이 꾸려지는 과정들을 새내기치고는 제법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35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고대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라는 명칭에 걸맞게(?) 이미 거의 대부분의 단과대를 장악한 운동권 학생회들과는 맨날 소모적 신경전이 벌어졌다. 말단 잡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나이지만 그런 파행적인 모습들을 지켜보며 인식의 간극의 방대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반학생들에 눈에는 뭐 저런 것을 가지고 피 터지게 싸우냐 싶을 정도로 그들만의 문제에 매몰되어 생산적인 활동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도 많이 있다. 또한 운동권 내에서도 서로 계열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먹서먹한 모습들을 볼 때면... 학생사회의 분열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기는 했다.



분명 나는 운동권학생들에게 진 빚이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뭐 학생운동사나 그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지만... 그저 남들이 그러니까 나도 덩달아 그러려니 하면서 말이다. 유시민씨의 말대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이 ‘미련한 인간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그의 말대로 경제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나는 채무의식을 내내 버리지 못했다. 침묵과 복종이 몸을 지키는 방책이던 시절에 말하려 했고 싸우려 했던 이들... 미련하고 바보스러웠던 사람들을 잊는다는 것은 ‘붕어대가리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기억력이 행복의 지름길이라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지만... 잊어야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 분명 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 없다. 또한 운동권에서 배출한 활동가와 이론가들이 이 땅의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을 부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하지만 미련하지만 순수한 운동권 분들에 대한 첫인상은 점차 노련하고 노회한(?) 정치꾼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간 운동권의 성지라고 불리던 고대에서 정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였을까.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장들과의 마찰은 참으로 낯부끄러웠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저렇게 싸우면서 접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를 축소판으로 보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난 또 낙관적인 견해를 내놨다. 결국 윗대가리들의 권력 다툼, 자존심 싸움일 뿐, 아랫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적대감에 불타 싸울 이유도 없다고, 다름이 있으면 그 다름을 인정하며 내가 더 적절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있으면 된다는 당위적 명제를 들먹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대립은 날카롭다. ‘빨갱이 자식’과 ‘수구꼴통’이라고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요원하기만 하다.



주위 또래친구들을 돌아봐도 학생운동, 특히 운동권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민중을 외치면서도 급속히 대중성을 잃어가고 있는 운동권의 초라한 초상을 보는 듯해서 어떤 면에서는 아쉽기도 하다. 많은 분들을 겪어봤지만 참 영민한 분들이 많은데도 언뜻언뜻 발견하는 그들의 ‘계몽 전사’ 의식은 보통의 무식한(?) 이들에게는 부담감과 거부감을 주는 지도 모르겠다. “뭐 지들이 온갖 진보를 다 일구어내는 듯 생색을 내고 있다” 비슷한 의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깡그리 말아먹은 운동권들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운동권도 표현들이 많이 약해지고 좀 더 일반학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학생운동은 ‘인기 없음’에 마냥 초연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안타깝다. 대학 새내기 시절 호기심에 문을 두드리던 학생회 조직에 왜 한 두 해만 지나면 관심이 식어버리게 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나는 운동권들이 이를 갈았던 비운동권 총학생회에서 한 해를 살았다. 하지만 그저 약간의 잡일을 거들던 위치에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첨예한 대립과정에서 낄 일이 없었던 나는 여전히 운동권 분들은 학생사회의 좋은 일꾼 분들이시며... 아마 계속해서 논의되고 있다는 학생운동의 통합 혹은 발전적 해체와 관련된 것들에도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가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요즘 자꾸 들려오는 ‘한총련 합법화’뿐만 아니라 소위 운동권이라고 지칭되는 모든 학생 운동의 흐름은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정녕 ‘자유민주주의’국가가 맞다면 말이다. 별로 한 것도 없지만 지난 한해 소위 말하는 학생사회의 일꾼 역을 해본 소감은 아직도 정리가 되고 있지 못하다. 총학생회 내부에서의 모순, 그리고 운동권 단과대 학생회의 모순... 그리고 그 모순들의 요란한 파열음... 나름대로 시간을 투자해가며 활동한 것에 후회는 없지만 뭔가 뒤끝이 켕기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한때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듯이 나도 진보주의자인줄 알았고... 사회 변혁에 뭔가 안다는 듯이 남의 의견을 부지런히 주워 나르기도 했다. 그러나 차차 생각해보니 오래 전부터 나는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였다. 아무리 사탕발림이 되어 있어도 전체주의 냄새가 나는 좌파나 우파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좌파, 우파의 입지가 여전히 좁지 않은가라는 나의 짧은 생각이다. 결국 중간자가 으레 겪는 ‘회색인’ 취급을 받을지라도. 지난 한 해의 경험으로 운동권에 대한 환상이 철저히 깨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극우 헤게모니가 춤추는 한국 사회에서... 그들과 연대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음을 새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깊고 넓은 서로간의 오해와 불신은 여전히 학생사회의 큰 과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총학생회에서 알고 지내게 된 친구가 넌지시 묻는다. “작년에 조금 안 맞는 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뜨거운 마음으로 답한다. “어, 물론 다 맞는 것은 아니었지.” 그랬다. 솔직히 일하는 내내 조금 나와 맞지 않는 부분과 투쟁해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35대 고대총학에서 보고 배우고 느꼈던 것들은 너무나 소중하며, 그 점에 있어서는 후회가 없다. 또 그 친구는 나를 진보, 개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해 주었다. 물론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진보, 개혁적인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기본적인 삶의 양태로서 이념적 좌표를 대충이나마 잡아보는 것. 아직 조금 더 고민해볼 일이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고 앙드레 말로가 말했다. 내게는 꼭꼭 담아두고 평생을 두고 추구할 꿈이 있는지 늘 생각한다. 요즘 들어 조금씩 그런 거대한 희망보다는 좀 멋이 없지만... 평생을 담고 갈 삶의 자세에 마음이 머문다. 똘레랑스와 불관용에 맞설 수 있는 최소한의 용기, 자유에 대한 철저한 옹호와 남을 배려하는 마음,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함과 나를 아는 사람들에 대한 성실함과 진솔함... 이런 자그마한 부분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희망은 내 곁에 함께 해줄 것이다. 날로 소박해지는 나는 부끄럽기보다는 조금은 안쓰럽고 오히려 더욱 사랑스럽다. 6(^.^)9



덧붙이며...
결국 이것도 정치 이야기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정치 관련 이야기는 최소한도로 하려고 노력한다. 정치 이야기를 좋아하는 친구들보다는 싫어하는 친구들이 훨씬 많은 현실을 마냥 외면할 수 없다. 대중성 확보에 목맨 나로서는 더더욱. 다만 정치는 일부 사람들이 거창한 명제를 들먹이며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즐겁고 재미나게, 의사결정의 일환으로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싶다. 정치가 별거냐? 우리 모두가 정치를 하자. 그래야 쓰레기 정치인들이 발을 못 붙이게 된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을 주절거린 거랍니다. 인식의 박약함에 대한 질책은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어수선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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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빌린 것은 깨끗이 쓰자]와 마찬가지로 교양국어 과제물을 조금 다듬어 올린다.
아래 [빌린...]이 환경에 대한 원론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면
이것은 그것에서 좀 더 나아간 세부적인 입장 표명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무분별한 녹색바람을 경계한다]


   인도의 종교 중에 자이나교가 있다. 자이나교는 엄격한 계율로 말미암아 대중성을 잃고 신도가 적게 되었다고 배웠다. 자이나교 신도들의 유명한 행동이 바로 땅위의 개미라도 밟을까봐 조심조심 걷는 행동이다. 비살생의 도리를 다하는 그들의 노력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작은 세를 유지하는 것도 어쩌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원광스님이 왜 세속오계를 만들어야 했던가? ‘불살생’인 불교의 교리를 몰랐을 리 만무한데, ‘살생유택’이라는 파계(?)를 감행해야 했던가. 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위한 배려였으며, 스스로 낮춤이었다. 환경보호에 대한 문제에서 이 둘의 대처방안이 어떤 시사점을 주는 듯하다.


   고3 때 입시를 위한 면접을 준비하면서 중요한 시사 상식으로 배웠던 ‘가이아 이론’이 떠오른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대기, 해양, 지표의 바위 등 환경계와 인간을 포함한 생물계로 이뤄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한다. 연일 환경오염에 대한 기사들을 접하는 나로서는 가이아 이론은 우리가 앞으로 가져야 할 삶의 양식이라며, 역시 진리는 소박한 것이라며 칭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이 이론이 뜨게 된 이유는 인간이 지구를 남용함으로써 유기체 전체를 위태롭게 한다는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지구와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라는 매혹적인 이론은 환경오염에 고민하던 많은 이들의 가슴을 환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우리 주위의 많은 환경주의자들은 환경운동을 “모든 생명체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그 안의 인간을 “욕망을 가진 동물이다”라고 규정한다는 점에서 가이아 이론과 관련성을 갖는다. 이들은 덧붙여 “산업혁명이 환경파괴의 출발이었다”라며 과학문명을 비판한다.


   똑같은 사안을 놓고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세상살이의 묘미와 불행이 다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산업혁명이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한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발전이 아니었다면 지구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투쟁의 결과 폐허로 변했지 않을까? (공산주의 실험을 볼 때 인간은 생각보다 더 이기적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객관성과 합리성 등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의 최대한 활용만이 환경문제를 줄이고, 발견하고, 해결할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살리기 위한 어떤 실질적 처방도 내리지 않은 채 인간에게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죄의식과  죄 값만을 강요한다. 자이나교 신도들이 “너희들은 하찮은 미물의 생명을 등한시하는 못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가졌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우월감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설법의 호소력은 내려갔으리라.


   “아류 생태주의는 몸에 해로운 만병통치의 비책을 찾으려 한다. 그들은 먼 과거의 신화적 정신성에 의지하던 직관주의를 찬양한다. 그것은 인간 이성을 부정하고 범신론적 ‘우주적 자궁’에 스스로 파묻혀 몽롱해진 결과가 아닐까?”
- 머레이 북친, [휴머니즘의 옹호], 18쪽 발췌



   이제 환경보호에 대한 화두를 반대하는 이는 거의 없게 되었다. 다만 환경에 거스르지 않는 개발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는 논의하는 수준이지 환경보호를 부정하기는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환경 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노고가 무척 크다. 그들이 환경오염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환경의 훼손을 막아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일부 환경주의자들에게서 보이는 모성적 자연에 대한 신앙, 다시 말해서 환경은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본질적 가치’를 지녔다는 믿음에는 고개가 저어진다. 자연을 그렇게 신격화 시켜놓고 우리 모두를 원죄의식에 시달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완전치 못한 동물이라 자꾸 구박만 하면 오히려 더 안 하게 된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들으면 더 공부하기 싫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요즘에는 환경보호의 강력한 논거로 이걸 보호하면 경제적 효용이 더 높다거나 하는 것을 드는 경우가 많다. 무척 잘하는 일이다. 환경 운동가들은 시민을 자꾸 환경파괴범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당근을 보고 좇아가도록 해야 한다. 조금 구차해 보이지만, 뭔가를 지키거나 뭔가를 바꾼다는 것이 그저 고고한 자세만으로 되지 않지 않던가.


   변기 물 내리는 것을 절약하기 위해 변기 탱크에 벽돌이나, 패트병을 넣어야 한다고 한창 유행이던 적이 있었다. 마치 그것을 안 하면 물낭비의 원흉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대변과 소변을 구분해서 물의 양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 소변을 볼 일이 많으니,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보면 물이 절약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괜히 변기 탱크에 팔 걷어붙이고 벽돌이니, 패트병이니 넣고 환경보호에 뿌듯해 하는 모습보다는 더욱 편안하게 환경보호를 하는 것 아닐까?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벽돌이나 패트병을 넣어두면 대변 볼 때는 물이 적게 내려가서 가끔 막히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 휴지를 적게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자꾸 이런 이야기만 하니 내가 무슨 환경방임주의자(?)가 되어버린 듯 하다. 나 또한 환경보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 국민들이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환경보호가 상식으로 체화된 사회 분위기를 위해서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그 다음에 방법론의 차이에 대해서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간을 ‘자연계에 붙은 암세포’ 정도로 규정하는 일부의 인식은 너무나 反휴머니즘적이다고 지적하고 싶다. 비록 내가 ‘인간중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인간마저 휩쓸어 버리는 녹색바람(?)에는 비판을 가할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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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시절 교양국어 시간에 냈던 수시과제물을 조금 다듬어서 올린다)

[빌린 것은 깨끗이 쓰자]


  지구를 귀중히 다루어라. 지구는 부모가 당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어린이에게서 빌린 것이다. - 케냐의 속담


  환경오염이 위험수준에 달했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하도 많이 듣다보니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는지 웬만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고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게 된다. 얼마전 ‘생태맹(ecological illiteracy)’이라는 개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생태맹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신비함과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과)는 “천부적으로 물려받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이나 우리 자신이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감성이 결여된 상태가 바로 생태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우리의 사고와 의식으로부터 자연이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올 여름(2002년) 최악의 수해피해를 낸 태풍 루사가 난개발과 부실관리 등 환경파괴가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자연의 정복자인 인간이 벌이고 있는 과학 문명의 잔치 마당에서 지금 자연이 인간에게 반격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 것인가? 우리가 정복한 자연이 이제 우리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몰아넣고 있다. 과학 문명은 인간을 물질적 빈곤, 추위와 더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오늘날 첨단 과학 기술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까지를 우리에게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간의 물질적 소유욕과 그러한 인구 증가가 무한한 데 반해, 자연이 제공하는 자원은 물론 지구의 물리적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 골프를 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산을 깎지만, 지구상에 산은 그렇게 남아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과학 기술의 위대한 공적과 문명의 진보를 규탄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한계와 진보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과 문명의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지구의 살인범으로, 자연과 더불어 화석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사고 양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가치관과 세계관의 지각 변동과 같은 혁명이 절실하다.
- 박이문, [과학 문명과 자연의 반격]中



  이제 ‘지속 가능한 개발’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속 가능한 발전 문제의 현실적 심각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막연한 일로 여김으로써 실천적 논의가 미흡한 것 같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볼 때, 이 패러다임은 이미 유토피아적 논의를 넘어 21세기 지구 공동체의 최대 실천과제로 확산되고 있다. 유엔과 유럽연합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나라에서 미래 건설의 기본 틀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무역규제와 보조금 삭감 등 실질적인 행동계획이 점차 강화되는 추세임을 볼 때, 지속 가능 발전 문제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높이고 착실히 대처하는 노력이 긴요하다 할 것이다.


  이 개념은 “경제가 희생되더라도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는 환경 지상주의적 이상론이 아니다. 지속 가능 발전 패러다임은 결코 경제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며 경제, 환경, 사회의 동시적 균형발전을 추구하고, 이를 통하여 후손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자는 개념이다. 지나친 환경주의로 경제가 손상된다면 그것은 지속 가능할 수가 없다. 나아가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환경보전과 사회발전도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식량, 물 등 기초자원이 제약된 자원부족 국가이며 세계적인 인구조밀 국가다. 국토가 좁아 환경오염이 발생했을 때 자연정화 능력이 극히 제약된다. 이는,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필요성이 그 누구보다도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라도 지속 가능한 발전에 관한 실천적 인식을 확산하고 관련 정책을 발굴하여, 우리 경제,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착실히 높여 나가야 하겠다.


  비록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화두에는 조금 빗겨서 있어 보이지만, 1854년 미국대통령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땅을 팔 것을 제안한 것에 대한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의 추장 시애틀의 답 글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그는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라고 했지만, 오늘날에는 마실 물을 사먹는 것이 일상적이고 공기까지도 돈을 내고 즐겨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또한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라고 했지만, 우리는 강의 오염을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쓰레기를 던져대기를 그치질 않는다. 오죽했으면 그가 문명인들에게 이런 경고까지 내리게 한다.“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야만인이라고 칭했지만, 도시적 안락함에 자연과의 교감을 내팽개친 우리는 얼마나 야만인의 혐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논거를 제공한다는 ‘경제논리’를 이용해서 환경보호의 의미를 설명해야겠다. 회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오는 회계방정식이 ‘자산 = 부채 + 자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연을 자본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원래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걸 잘 굴려서 이익을 남겨 먹을까를 궁리한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케냐의 속담이 잘 말해주듯이 자연은 엄연히 우리의 부채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등장하면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빚이란 말이다. (사실 인간세상에서 엄밀히 자본이라고 칠 만한 것이 자기 몸뚱이 빼고 뭐가 있을까 생각된다. ‘차마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세상 모든 재화는 결국 빌린 것일 따름이다.)


  이자는 쳐서 주지 못할망정 원금마저 깎아먹는다면 정말 상도덕(?)에 어긋나는 처사일 것이다. 상도덕도 지키지 못하면서 경제적 이윤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면 후안무치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마저도 먹히지 않는다면 자연을 더럽히는 일이 결국에 손해보는 장사가 된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전략을 쓰자. 시애틀 추장이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6(^.^)9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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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헌 회장의 유지를 계승해야 한다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투신 자살은 경악스럽고 슬픈 일이다. 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를 이어 대북사업을 총괄지휘하던 그의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한 인간으로서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정치인들은 저마다의 잇속에 맞는 해법을 내어놓고 다투는 모양이지만 결국 비극적 분단 현실과 우리간의 갈등이 만들어 낸 것은 분명하다. 그는 이제 많은 의문과 추측을 뒤로 한 채 떠났다. 이제 못다 이룬 남북 경제협력 사업의 이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다.


여기서 다시금 현대의 대북 사업을 돌아보게 된다. 그간 숱한 화제를 모으며 하나하나 추진되었던 현대의 대북 사업은 금강산 관광도 계속 적자가 누적되고 있으며, 대북송금 특검으로 말미암아 기업의 이미지도 실추되는 등의 여러 가지 위기에 봉착했다. 경제논리로 바라보자면 단기적으로는 남는 것 없고 고생하고 욕만 먹는 장사다. 하지만 이런 현대의 희생이 남북 화해의 분위기 조성의 밑거름이 되고 국가적으로 보이지 않는 많은 이득을 얻었다.


험난한 길을 개척하는 이들에게 쏟아지는 부당한 비난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손해보는 장사하고 있는 것을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의심의 눈초리가 너무 따가웠다. 평화를 위한 투자에 손익계산을 일일이 따지려는 조급증을 버리고 은근과 끈기로 차근차근 한반도의 비극을 해결해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두 가지 사안은 분명하다. 하나는 대북 경제협력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대북 사업에서의 현대의 기여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조금 밑지는 장사라고 한다면, 후자는 분단 현실을 극복하려한 것에 대한 응분의 보상으로서 크게 보아 상도덕을 확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상도덕을 세우기도 전에 이득부터 내려는 본말의 전도를 이제는 끝내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서민들의 자살에 이어 굴지의 재벌 회장의 투신 소식은 이 사회가 얼마나 불안한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배려 없는 적자생존의 논리가 횡행하며 극한 대립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혼돈 속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려는 선량한 사람들이 애꿎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합리적 사회 시스템 구축과 상대방을 인정하려는 관용의 문화 확산이 시급하다.


죽음은 허무할지 모른다. 그러나 삶은 허무해서는 안 된다.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 이 땅의 현실과 맞서는 수밖에 없다. 우리 앞의 모순과 혼란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으자.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상도덕을 지켜 가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싸움을 치열하게 해야 한다. 그 누군가의 희생으로 진보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같이 조금씩 나누고 다투면서 천천히 돌아가며 진보하는 사회를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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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강연회 후기

사회 2003. 7. 20. 01:46 |
2003년 5월14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부터 고려대 경영신관 학우강당에서 개혁당 유시민 의원의 [통일독일과 북한, 정치개혁]이라는 주제의 강연회가 열렸다. KUBS 방송제 표까지 구해놓은 것을 포기하고 가게 된 강연회는 무척이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유시민씨의 강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작년 7월에 교보 교양 강좌에서 [우리 시대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강연회가 있었던 것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홀홀 단신으로 참석했다. 그 강연회에서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대변신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개월 뒤에 이렇게 주목받는 정치 신인으로 성장할 것까지는 예상할 수 없었겠지만.^^;


작년 7월의 강연이나 이번 강연이나 내가 핵심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이다. 주제가 다르고, 상황이 달라도 그의 강연에는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본능적 경계가 깔려있는 듯하다.


이번 강연에서는 북한의 한글전용정책과 한자를 모르고서는 알기 힘들 정도의 한자어가 공존하는 북한 말글의 모순점에서 시작되었다. 북한의 어문정책이 성서 원리주의자와 비슷한 교조주의이며, 경직성의 증거라는 지적은 북한 사회의 참담한 모순 덩어리의 근원을 정확히 집어 주고 있었다. 자연스레 독일 통일 이야기로 넘어간 그는, 독일 통일 과정을 통화 통합, 기업 통합, 사회 통합의 단계로 이행된 것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특히 서독의 사회복지제도가 동독에 그대로 이식된 것을 높이 평가했고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북한에 그대로 이식해도 괜찮겠느냐는 부끄러운 질문을 던졌다.


다음으로 북한 전체주의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적 시스템을 외부적 강압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독일의 브란트 총리, 콜 총리로 여야 합의로 꾸준히 이어져온 독일의 통일 정책을 높게 평가한다. 특히 이미 한 사회를 정상적으로 유지할 기능을 상실한 북한과는 어쩔 수 없이 흡수 통일의 형태가 될 것이라는 발언은 조금 위험스럽기도 했지만 현실과 가장 부합하는 전망이라고 생각되었다. 자연스레 정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불관용이 특징이다” “북한 문제가 나오면 그 불관용이 폭발한다” 등으로 지금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그의 자유주의 신념을 풀어놓는다.


뭐 그의 자유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작년의 강연회나 그의 숱한 글에서 너무나 많이 듣고 보아와서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이런 당연한 바람이 아직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는 한국 사회의 초상이 건재하기에 늘 새롭고 반가운 이야기다. 우리에게 가장 긴급히 요구되는 것이 ‘개인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라는 그의 화두는 익구가 그대로 수입해서 재가공하고 있다.^^; 다수파의 자유는 저절로 보장되지만 소수파의 자유는 의지를 가지고 보장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내가 소수파가 될 경우 소수파로서의 자유를 꾀하기보다는, 다수파로의 편입을 더욱 궁리하는 나에 대한 반성이었으리라.


남북 통일의 기초는 남한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관용하고 어울리는 법을 배워나가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으로 그의 강연은 마치고 질의 응답시간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최근 관심사의 신당 논란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선거 때마다 나오는 신당들과 뭐가 다르냐는 것에서부터 다양한 신당 관련한 질문들이 있었다. 특히나 이번 ‘벼락치기’를 어여삐 봐달라는 말이 재미났다. 하긴 언제나 미리 공부해두겠다고 하지만, 막상 벼락치기하기 일쑤인 우리네 인생을 보아도 너무 나무랄 일은 아닌 것 같다.^^


불가의 자리이타(自利利他) 개념도 잠시 나왔다. 이는 스스로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며,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뭐 아담 스미스가 멋들어진 비유를 들어 설명했던 그 개념과도 일맥상통하겠다. 거의 대부분의 회사원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승진하기 위해서, 더 좋은 보수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할 수 있겠지만, 그 활동으로 인해서 한국경제가 풍요로워진다면, 자신이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될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한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사회... 익구가 제시하는 이상향인 ‘보통선(普通善)의 시대’와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보통선’은 전통적 의미의 착한 행동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것으로 성립되는 소극적 의미의 선행위를 말하는 익구가 멋대로 만들어낸 개념...)


끝으로 민주노동당 당원 분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지난해에 이미 이런저런 학생사회의 회의에서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해온 터라 이제는 자연스러웠지만, 이러한 지적들 앞에서는 늘 떨리는 마음이다.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며, 정리해고 증가와 국가보안법 사범 증가 등의 이야기가 반복되었고, 유시민씨는 격앙된 목소리도 답변했다. “김대중씨에 대해서 많은 기대를 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비슷한 문장으로 발언을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조금 부연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진보 정당 분들도 분명 이회창씨보다는 김대중씨에게 기대를 더 했을 테니까. 물론 유시민씨가 원하는 만큼의 기대는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굳이 매섭게 몰아붙이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 여기저기서 보여지는 진보 정당과 민주당, 혹은 개혁당과의 알력은 나같은 새가슴에게는 영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무 과도하게 싸우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김대중씨는 국민이 기대했던 만큼의 일을 하고 떠났다는 유시민씨의 견해에 동의한다. 김종필과 손을 잡아서 겨우 40%의 지지로 대통령을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제 제발 김대중 씹기로 연명하는 정치가 아닌, 새로운 기반에서의 정치가 되기를 유시민씨나 나나 한결같은 바람이다.


뭐 이번 강연을 딴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임했다. 뭔가 내 이 좌충우돌 인생의 좌표를 마련해볼까 하는 흑심도 품었다. 얼치기 경영학도로 이래저래 찌들다보니 적당히 물신주의에 물들어서 ‘개인의 자유’ 다음으로 ‘물질적 복지’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건전한 좌파나 우파나 개인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에서 동일하므로 결국 물질적 복지 추구는 나의 제일의 이념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좌파라고 선언한 적도 없지만, 우파라고도 선언한 적도 없다. 나름대로 ‘정치적 인간’(직업적이고 전문적인 ‘정치인’이 아닌 사회 의사결정과정으로서의 정치의 다양한 모습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자처하는 나로서는 아직도 눈치보기만 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대충 정리를 해도 될 것 같다. 익구는 극우파를 혐오해서 한국 사회에 팽배한 극우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데 코딱지만큼 일조하고 싶은, ‘날라리 우파’다. (김규항식으로 말하자면 낙제를 겨우 면한 ‘D급 우파’라고나 할까.^^;) 유시민씨가 한국사회에서는 리버럴을 외쳐도 진보가 된다고 했듯이, 익구도 날라리 우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옹호 정도를 역설해도 분명 불온하게 보거나, 극단적으로 보는 눈초리들이 많을 것이다. 유시민씨가 자신의 자유주의가 ‘고전적 자유주의’와 비슷하다고 했는데,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해 좀 더 배우고 나와도 얼마나 유사한지 찾아봐야겠다.


살아오며 아웃사이더, 소수파, 비주류에 많이 끼었던 터라 나의 이번 ‘날라리 우파’ 선언은 혹시라도 계급 의식에 반하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해먹을 거리가 많은 ‘범생 우파’의 길을 가지 않고 날라리 우파를 선언하는 것은, 그나마 자본주의 세상의 지나친 물신주의에 대한 경계이며, 소수파 경험에서 비롯된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연대의식의 발로이다. 물론 그 무엇보다도 익구의 심약함이 가장 큰 원인이 되겠다만은...^^;


이번 유시민씨의 강연회는 무척 유익했고 아울러 개인적인 결심을 선언하게 해줘서 고맙다.^^ 아무쪼록 새로운 정치 개혁의 흐름에서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기원하는 바이다. 개혁당 당원이 될까도 고심했지만, 역시 아직은 신당 논의를 지켜보는 수준에서 만족할란다. 뭔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익구의 지난 삽질의 역사상 아직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저울질 할 생각이다. 아악 이 옹졸한 눈치보기란...^^; 그래도 “생각은 힘이 세다”


문득 고종석과 칼 포퍼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6(^.^)9 (2003/05/16)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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