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정운영 선생이 향년 61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사회과학자로서는 드물게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이 깊게 배어나는 글쓰기로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다. 외국 사례의 무분별한 나열이라는 핀잔도 있겠지만 그의 글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권력에 눈이 멀어 제 밥그릇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이들에 대한 통쾌한 죽비소리였다.


조정래 선생은 그를 추모하며 "고작 이 세월을 살려고 그 많은 공부를 한 것입니까. 태산이 무색할 독서, 그 해박한 지식이 아깝고 아깝습니다(조정래. "[정운영 형을 기리며] 그토록 꼿꼿하고 당당했던 삶." 중앙일보. 2005. 9. 26.)"라고 탄식했다. 좀 더 많은 일을 해줬으면 하는 선생이 이렇게 빨리 속세의 짐을 내려놓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세를 풍미했던 논객의 떠나 보내면서 내 인생의 초라함과 막막함을 생각해봤다. 내 나이 이제 스물 셋, 아흔 둘까지 산다고 치고 이제 삶의 1/4을 지나고 있다며 농담 삼아 계산했던 일을 떠올렸다. 조정래 선생의 추도사에서 "태산이 무색할 독서"라는 구절이 머리에서 가시지 않는다. 내가 정 선생보다 서른 해를 더 산다고 해서 나의 글 읽고 쓰기가 그의 반의반에라도 미칠까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꿍꿍이가 발동했다. 아흔 둘까지 살아야겠다는 욕심은 남들이 환갑이면 이룰 일을 좀 더 시일이 걸려서라도 해내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젠장 술이라도 좀 줄여볼까.^^;


손해보는 장사를 싫어하는 경영학도로서 내가 배우고 익힌 것이 헛되지 않을 만큼의 삶을 꾸리고 싶다. 어차피 요절한 천재가 될 가능성도 없는데 그저 세월을 진통제 삼아 풍진 세상을 버텨 나갈 따름이다. 더군다나 곱게 늙는 것은 내게 있어 꽤 중차대한 목표 중에 하나다. 세월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고 아찔할 게다. 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와 여유를 갖춘 노년의 모습은 그 얼마나 기품 있는가. 나 또한 젊은 시절에는 많이 어리숙했고 윗사람 눈에 못미더운 녀석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후임자들이 잘하는 모습을 보고 시기하기보다는 기뻐하고 축복할 수 있기를. 그렇다면 신경질적인 노인 대신 해맑은 소년으로 평생을 살 수 있으리라.


절륜(絶倫)했던 인문주의자, 출중했던 스승이 떠나도 따르는 제자들의 몸부림은 계속된다. 고인을 가슴 깊이 추모하면서 다시금 치열하고 자유롭게 살 것을 다짐해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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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기 고연전은 1승 4패로 아쉽게 마무리되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한마당이었다. 고대인에게는 한해에 세 번 큰 명절이 있는 모양이다. 설날, 한가위 그리고 고연전! 기왕이면 승리가 좋겠지만 경기 승리로 인한 잠깐의 기쁨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자아실현 여부로 승부를 걸 수 있기를. 어느 자리에 있든 없어서는 안 될 소금 같은 존재들이 된다면 그것만큼 유쾌한 일도 없으리라.


둘째 날 럭비와 축구가 연거푸 지기는 했지만 마지막 응원은 여전히 흥겨웠다. 경기가 마치자 공교롭게도 비가 조금 내렸는데 나는 이건 고대의 눈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1시간 남짓 내리던 소나기를 거의 온몸으로 받아냈는데 비 맞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로서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서울외고 선배님이신 박수일 응원단장님 바로 아래에 있었던지라 열심히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정말 고생하셨어요.^^


올해는 연대 주최라 뒤풀이가 신촌에서 있었다. 어디로 갈지 고심하다가 선배님들과 동기들이 있는 안암골로 향했다. 처음 뵙는 국주형, 영빈형과도 인사 나누고 반가운 형, 누나, 동기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그 단란함이 너무 지나쳤던 탓인지 너무 술을 달려버렸다. 나름대로 패배의 쓴잔인데도 완급조절이란 찾을 길이 없었다.^^; 칠칠맞지 못하게 지갑과 디카가 든 가방을 몽땅 잊어먹고 집만 겨우 찾아 돌아온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의 어이없음이란...^^;


나는 술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아도 술자리는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려고 한다. 대개는 "쉬어가며 오래가는 음주(혹은 릴렉스 롱런 음주)"를 지향하지만 가끔은 사양하지 못할 때가 있고 기억이 지워질 때도 있다. 지워진 기억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만 지금까지 몇 번의 블랙아웃(blackout, 필름 끊김^^;)에서 특별히 민폐를 끼칠만한 주사는 없었던 것 같아 일단 다행이다. 이번에도 특별한 민폐는 없었지만 내 자신에게 엄청난 폐를 끼치고 말았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은연한 나는 이럴 때 의외의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그래도 휴대전화는 잘 챙겨왔다고 위안을 삼고, 신분증이 싹 사라졌지만 집에 옛 학생증이 남아 있어서 도서관 출입에는 지장 없겠다고 좋아하는 내 자신을 보니 이럴 때는 꽤 쓸만한 듯 하다. 마신 술에 비해서 숙취가 거의 없다며 흡족해하고, 집에는 잘 찾아왔다고 용하다는 아버지의 반응까지 보태서 이 침통한 사태를 잘 무마하는 중이다.^^;


너무 자기위안이 심한 것 같아 조금 우울하게 손해계산을 해봤다.^^; 문화유산 답사하면서 기념사진 찍는 것이 낙인데 당분간 그게 힘들어질 듯 하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가방 안에 넣어뒀던 내 학생회장 퇴임 기념 고대경영 배지도 다 못 나눠주고 잃어버려서 섭섭하다. 지갑 안에 있던 문화상품권 두 장으로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나 더 충동구매할 걸이라는 생각도 든다. 현금은 뒤풀이하러 신촌 간 후배들 술값에 보탰으면 더 좋았을 것을.


책탐으로 미루어 볼 때 내게도 적잖은 물욕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쥐고 있던 것들에 손을 떠나갈 때는 그저 인연이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에서 주인공 꼬마가 돈을 잃어버린 뒤 "내 돈을 주운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곤고로운 사건을 겪을 때라도 이런 정도의 넉넉함을 갖추고 싶다.


당분간 불편한 생활이 되겠지만 자기 소유에 대한 책임감도 좀 키우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얽매이지도 않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 아울러 술 핑계대지 말고 내 부족한 자제력을 수양해야겠다. 비록 지갑과 디카를 잃어먹었지만 술은 끊지 않겠다. 늘 자제하면서도 할 건 다 하는 오묘한 균형을 찾아봐야겠다. 피하기보다는 맞서는 데서 얻는 자유의 달콤함을 만끽하려는 쓸데없는 고집을 좀 더 부려볼 셈이다.


무료한 일상에 지치고 허망한 인생에 투덜거리다가 문득 고연전을 추억하는 날이 올 때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힘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간 잘 보지 못했던 지인들도 많이 만났던 살가움과 정겨움이 가득한 고연전이었다. 끝으로 2005 정기 고연전을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즐거웠어요.^^ - [憂弱]


추신 - 잃어버린 물건들은 택시 안에다 두고 내리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하고 있다. 택시에서의 유실물을 한 곳에 보관하는 택시 유실물 센터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하철과는 달리 택시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란 무척 힘들다. 택시기사의 선의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유실물 주인 찾아주는 수고로움을 덜어 준다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아무튼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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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싸이 미니홈피에서 하이에크의 명언을 접하고서는 형언할 수 없는 필에 사로잡혀 써서 올린 글이다.^^; 하이에크의 명언은 구청장들의 세목교환 반대 광고에 실렸다.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때문에 정확하게 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한다. - 하이에크

이 문구가 실린 신문광고 나도 봤어. 하이에크의 명구가 이렇게도 쓰이는 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했고.^^ 하이에크 선생의 말은 대단한 통찰이지만, 지금 당장 삶이 지옥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들리지는 않다는 단점도 있을 듯... 하지만 늘 가슴에 새겨두고 있는 구절 중에 하나지. 추가하자면 미래의 천국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오늘의 지옥을 없애려고 노력하라는 칼 포퍼 선생의 점진적 사회공학도 무척 좋아하는 말이고. 그래도 이렇게 고전에서 명구를 뽑아 제 주장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고. 막말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가끔 이렇게 교양을 떨어주는 센스도 좀 발휘해도 좋은 듯. 푸하하


시장경제를 위한다는 사람들, 특히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추앙해마지 않는 하이에크라는 인물을 알고 싶어서 그 분의 저서를 충동구매했다우. [노예의 길], [치명적 자만], [자유헌정론]... 하이에크 선생의 대표적 저작물은 거의 입수한 셈이지. [자유헌정론] 같은 경우는 얼마 전 인터넷 헌책방에서 힘겹게 구해서 좋아라하고 있고. 하이에크 사상의 골자는 이래저래 많이들 이야기해주니 얼추 들어 알고 있지만 조만간 천천히 읽어보려고. 젠장 사모으는 것에 비하여 읽어치우는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민망할 따름...^^;


꽤 그럴듯한 자유주의자가 되어보겠다고 결심한지 2년쯤 되었지만 아직도 흐릿하기만 하다. 마케팅 시간에 배운 포지셔닝이 잘 안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미래의 천국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오늘의 지옥을 없애려고 노력하라는 칼 포퍼 선생의 점진적 사회공학에 자꾸만 끌린다. 세상을 내 뜻대로 재단하려고 하지 않는 자제력과 사회의 부조리를 마냥 방치하지 않는 실천력을 겸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다.


안 그래도 우유부단한데, 사려 깊은 척 하려니 완전 우유부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듯하다니까.^^; 함부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움직일 때를 아는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좀 더 배우고 부딪혀 봐야할듯 싶구만. 그래도 궁리하고 탐구하다 보면 가끔 서광이 비칠 때도 있겠거니 하는 이 대책 없는 낙관주의에 기대어 오늘도 싱글벙글 웃으며 지내볼란다.


이제 본격적으로 휴학생활이 펼쳐질 텐데 일생을 두고 추억할만한 달콤한 기간이 되기를 빌어마지않는다. 열심히 놀라면 우선 튼튼해야겠지.^^ 늘 건강!


방명록이 대세인 싸이 동네에서 가끔 이런 식의 잡글 테러를 하고 간다. 그나마 텍스트를 많이 쓰는 친구의 미니홈피니까 이렇게 글을 남길 따름이다. 남들 다 다음카페와 한메일을 쓸 때 한참이나 늦게서야 미적대며 가입하더니, 너도나도 하는 싸이질에 동참하지 않고 사는 것도 마냥 쉽지만은 않다. 싸이 미니홈피를 별장으로 다시 열까 고심 중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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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다. 설령 꾸더라도 별로 의미를 안 두기 때문에 깨어나서 금세 잊어버린다. 프로이트 같은 분이 들으면 무지 섭섭해하시겠지만 말이다.^^; 주말 아침에 늦잠을 자다가 깨어나서도 생생한 꿈을 꿔서 또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둔다. 꿈속에서의 나는 1인 2역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 번은 3인칭 관찰자 시점, 또 한 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


장면#1
뜬금없이 전투가 한창이다. 어쩌면 꿈도 내 취향대로 각색되었는지 피와 살이 튀기기보다는 그저 칼과 창, 방패 등이 내는 쇳소리만 요란한 것 같다. 만신창이가 된 한 장수가 병사 몇 명과 함께 분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으레 이 대목에서 나오는 장면이지만 "중과부적이오니 어서 피하시옵소서 장군!"이라는 병사의 하소연에 장수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이윽고 장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어서 폐하를 보위해야겠다" 그래봤자 그 말을 따를 부하는 고작 대여섯에 지나지 않는다. 장수는 급히 몸을 피해 궁궐로 향한다. 하지만 몇 마리는 있을 법한 말은 보이지 않고 죄다 보병들만이 흙먼지 날리면서 싸우고 있다. 장수나 병사들도 그냥 냅다 뛰어서 도망하는 수밖에. 말뿐만 아니라 궁수들도 하나 없어서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여하간 비탈길에서 한번 미끄러져 주고, 개천을 힘겹게 건넌다. 이 초라한 몰골의 일행을 추격하는 무리가 있으니 어이없게도 절대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뒤꽁무니만 열심히 좇아오고 있다. 도망가는 쪽이 지쳐서 슬슬 걸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덕분에 어느 주택에 무사히 몸을 피한다. 도망가는 장면의 연속이었는데 힘들다거나 급박한 것을 못 느꼈으니 이건 3인칭 관찰자 시점인 듯 싶다.^^;


장면#2
장수와 병사 두 명(최종적으로 탈출 성공한 건 둘 뿐인 모양이다)이 도착한 곳은 으리으리한 고대광실(高臺廣室)이었다. 그러나 정식 궁궐은 아니고 행궁(行宮) 내지 임시 거처인 모양이다. 마치 창덕궁 내에 사대부들의 집을 본떠 만들었다는 연경당(演慶堂)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모든 건물이 단청이 없는 백골집이었다. 아마도 만월대의 옛풍경을 상상하기 힘들고, 고려 시대의 단청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보니 꿈속에서도 제대로 재현이 안 된 것 같다. 이쯤 되니 꿈의 배경이 고려말, 그 중에서도 최후가 임박한 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 밖에는 수천의 군사가 도열해있다. 행궁 안에서는 불안한 표정의 왕과 신료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러던 참에 문밖에서 서신이 날아든다. 한자로 되어 있어 잘 모르겠지만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처럼 얼른 항복하면 안위는 보장한다는 내용인 것 같다. 왕은 내게 답서를 준비하게 된다. 나는 비분강개하는 마음으로 "웃기지 마라, 너희들 이러는 거 아니다"라는 식의 내용을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우습게도 이 대목에서 마치 사극에서의 내레이션처럼 이 문장을 후세사람들이 절의의 상징으로 기린다는 말이 깔린다.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쯤 되는 양 말이다.^^; 큰소리는 뻥뻥 쳐놨지만 행궁 내의 군사는 일이백명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최대한 기억해낸 꿈의 기억들이다. 나름대로 생생하게 꿈을 꿨지만 돼지는커녕 동물은 하나도 안나왔으니 그야말로 별 신통치 않은 꿈일 듯하다. 고려왕국에 대한 애착이 꿈으로 표현되었나보다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개성 시범관광이 진행 중인데 그 여파로 꿈속에서나마 개성 땅을 밟고 싶었나보다.^^


초등학교 3학년 가을 어느 날 읽었던 정몽주/성삼문 위인전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꿨다. 이 얄팍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충의와 절개의 화신인 두 사람의 삶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으니 말이다. 내가 책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계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은 선생도 선생이지만 시호조차 못 받고 원통하게 간 우왕과 창왕, 결국 고려의 황혼을 장식해야했던 공양왕에게 늘 연민의 정이 솟아난다. 망하기 전에 지렁이도 꿈틀해본다는 심정으로 칼도 휘둘러보고, 문장으로 농락을 해보는 광경이 그려본 것이 아닐까 싶다.


여담이지만 고려시대 사가들이 썼던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도 하고, 『고려사』를 편찬한 후 정사를 편찬한 후에 소각하는 관례에 따라 소각되었다고도 한다(엄청난 분량의 사료를 소각했다니 조선왕조실록의 운영과 비교해서 다소 의아스럽다). 삼국시대의 역사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의해서 간신히 전해지는 것처럼 고려시대의 역사도 대부분 조선시대 사가들의 입맛에 재단되고 있는 셈이다. 여하간 당대에 기록된 1차 사료가 없다는 것은 고려사의 비운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2차 사료가 고려사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하기야 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위나라 조씨와 진나라 사마씨를 띄웠던 것처럼 패장은 말이 없고, 승자는 골라먹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잠에서 깨서 문득 야은 길재의 시조 한 수가 떠올랐다. 정몽주 위인전의 여파로 원척석의 시조와 더불어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외우는 시조 중에 하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읊으면서 고려청자와 고려불화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가끔 이렇게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좋아라 하는 것도 삶의 윤활유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종종 재미난 꿈들을 꿔보고 싶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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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에 ["조선찌라시·맹바기·발끈해공주" 고대 시험예문 파문]이라는 8월 10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제가 2004년 2학기에 강의를 들었던 경제원론1 중간고사 문제가 보도되었거든요. 그 시험문제에는 "조선찌라시/ 월간조선찌라시뺑끼칠/ 맹바기나라/ 딴나라의 화폐단위는 친미/ 발끈해 공주/ 國害擬員인지 寄生層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주성영씨" 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특정 정당의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을 비하하는 표현이 나와서 뒤늦게 언론을 탄 것 같습니다.


경제원론 재수강을 어떤 분을 들을까 하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이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되어 한 학기 동안 쉽고 재미나게 배울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학기 중에 강의용 클럽게시판에서 시험문제의 인명이나 단위가 편향된 것이 아니냐는 어떤 학우 분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 때 일을 계기로 편파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편파적인 채점 시비가 아닌 이런 정도의 시험 출제가 문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표현의 자유에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는 것인지는 아닌지 씁쓸합니다.


언론 보도 이후 선생님께서는 수강생들과 문제지에 실린 모든 이들께 사과한다는 요지의 사과문을 보내왔습니다. 사실 이만한 일로 사과까지 하고 불이익을 걱정해야하는가 안타깝습니다. 물론 경제학 강의였고 정치적 사안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시험 문제에 그런 식의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은 다소 부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강사의 편파성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강사의 해석이 과연 타당한 논거로 적실성 있게 주장되고 있는지 여부가 강의 시간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지적될 수는 있습니다. 강의 시간에는 별 말 없다가 시험 문제는 덜컥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당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그런데 시험에 앞서 단위 등을 비꼬아서 낼 것이니 주의해서 풀라고 누차 강조해주셨습니다).


문제 상의 인명과 단위가 명목적(nominal)이 아니라 특정인을 비하하고 조소할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좀 어떻습니까. 교양과목 강의에 그 정도의 여유와 풍자도 들어갈 틈이 없다면 너무 팍팍하겠지요. 물론 일부 의뭉스러운 보수 세력들이 밉살맞아서 이런 문제들을 내셨겠지만 크게 악의에 차 보이지도 않고요. 선생님께서는 사과를 하는 것으로 이번 사건을 마무리지으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식의 센스가 돋보이는 문제를 출제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고요. 차라리 경제학 또한 가치와 인간이 빠질 수 없는 학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난이도도 높일 겸 교수 재량으로 문제를 좀 비틀거나 희화화하여 내는 것을 너그러이 양해해달라고 하셨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시험 문제를 풀고 나서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풍자해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역으로 생각해봤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개구리나 놈현으로, 열린우리당을 닫힌너네당, 돼지우리당으로, 유시민 의원을 개시민 등으로 표현한 시험문제를 받아 들고서는 처음에는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교수 개인의 좋고싫음 자체를 구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기업, 나기업, 다기업... A씨, B씨, C씨... 원, 달러, 위안 대신에 개인의 편향이 가미된 것이 좀 들어가는 것 정도는 용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강의 열성적으로 해주고, 시험문제 깔끔하고, 채점 또한 공정하다면 딱히 시비 걸 까닭이 없지요. 오히려 제가 좋아하고 제가 믿는 바의 허술한 점을 집어주고 비판해줘서 발전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제자로서 감사할 노릇입니다. 여하간 학교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때로는 극단적이거나 유치한 표현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너른 포용력이 발휘되었으면 합니다.


살펴보면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주창하면서 뒷구멍으로는 추악한 편들기를 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티격태격하다가 생채기 나는 것은 회피하면서 말입니다. 자신의 표현에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남의 표현에는 과도한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처사일 겁니다.


그런데 다원화된 사회가 될수록 옳고/그름의 문제보다는 그저 다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납니다. 유시민 선생의 표현대로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은 판정 내리기가 비교적 쉽지만, 다름의 문제 앞에서는 선택의 자유를 움켜쥐고는 하염없이 고독해집니다. 실컷 고심해서 내놓은 결론도 남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편파적이고 자기본위의 주장이기 일쑤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깔끔한 객관성과 담백한 평형감각이라는 이데아(idea)는 확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당최 편파적인 것이 염려된다면 존 롤즈가 말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을 지향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반성적 균형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평가하고, 스스로 다시 궁리하여 보다 나은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중용(中庸)과 비슷한 개념이지요. 결국 조금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직관적 판단(개인적 선호)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숙고하여 적절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입니다. 여기서 반성적 균형상태는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라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이 포인트입니다.


저는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온 결과물을 가지고 당당히 편파적(!)으로 사는 멋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즐거운 편벽됨'이 우리네 삶을 보다 윤택하고 촉촉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습니다. 결론으로 이르는 과정이 진실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자세를 갖춘다면 말입니다. 저 또한 과정상의 엄격함과 성실함을 확보한다면 누구든 자유로이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존경하는 경제원론 선생님께서 앞으로도 고대 학우들께 좋은 강의 해주시길 부탁드리며 내내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즐겨하시는 말씀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평안하시길..." - [憂弱]

<참고기사>
- "조선찌라시·맹바기·발끈해공주" 고대 시험예문 파문(이걸 꾸욱~)
- '딴나라'의 '발끈해 공주'가 가격규제 한다면?(이걸 꾸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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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책임분석의 발견

잡록 2005. 8. 5. 21:30 |
중구청에서 일하게 된 4주는 그리 긴 기간은 아니지만 정이 제법 들었다. 그 결정적 이유 중에 하나가 싸고 맛있는 구청 구내식당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다. 훈련소 짬밥보다 백만배쯤 다채롭고 맛나는 점심식사를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스르르 풀리는 것 같다. 문득 즐거운 점심식사를 하다가 음식을 거의 남기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가령 반찬에 샐러드가 나올 때 오이를 빼고 담으려고 무던 애를 쓴다. 거의 먹지 않고 버릴 오이를 담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저런 노력을 통해 대부분 잔반이 거의 없었다. 문득 그 이유가 자유배식에 대한 모종의 책임감의 발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만큼 마음껏 덜어갈 수 있는 만큼 음식물쓰레기나마 덜 남기는 것으로 보답하려는 의지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훈련소 때 담아주는 음식들을 많이 남긴 것과는 대조적이다. 4주 동안 짬밥을 다 먹은 적이 단 한차례도 없었으니 말이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은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하는 언론”이라는 사시(社是) 혹은 모토를 내세우고 있다. 2004년 경영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학생회장 인사 시간에 내가 새내기들에게 했던 첫 번째 당부가 “자유를 만끽하시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시기 바랍니다"였다. 이처럼 “자유에 따른 책임을 지자”고 설파하고 다녔던 나는 무언가 선수를 당한 느낌에 아쉬웠다. 표절인지라 그대로 따오기는 민망하지만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은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슬쩍 빌려써본다면...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하는 익구”^^; 자유주의자에게 있어 그 어떤 모토보다 명징한 신념이 아니지 싶다.


히로가네 겐시의 [정치 9단]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 카지 류우스케는 “자유와 책임당”을 창당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종국에는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유와 책임당은 신자유주의 색채가 강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되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정강정책들은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자유책임당의 약자는 자책당(自責黨)이라고 쓰면 좋을 것 같다. 이승만 전대통령 때문에 자유당이라는 명칭은 이제 거의 쓸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맨날 남 손가락질하기 바쁜 정당이 아닌 내 탓을 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낄 줄 아는, 자책할 줄 아는 정당이라니 괜찮지 않은가!^^;


지난 2004년 미국 대선에서 뉴욕타임스는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열렬히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것은 뉴욕타임스가 보여주는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반성적 균형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반성적 균형상태는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라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설령 특정 후보 지지 같은 편파적인 결정이 나오더라도 그 과정이 공정하다면 불편부당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는 공평한 척하며 뒷구멍으로 온갖 꼼수를 부리는 우리의 일부 언론들을 볼 때 정치적 자유를 누리되 공정 보도, 객관적 분석이라는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참 부럽다.


쇠고기버섯국에 밥을 말아먹는 내내 자유와 책임을 생각했다. 자유로운 선택을 할 여지가 많을 때 그 만큼 책임도 막중해진다. 남 핑계대기 쉽고, 변명으로 떠넘기기 쉬운 세상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자기 몫의 일에 자기 탓을 할 수 있어야한다. 요리학적으로 자유라는 곰국에는 책임이라는 뼈다귀를 푹 고아 삶아야 제 맛이다. 연애학적으로 자유와 책임은 백년해로해야 할 연인인 셈이다. 수학적으로 자유와 책임은 일대일대응이 되어야 한다. 회계학적으로 분개할 때 차변에 얼마만큼의 자유를 쓰면, 대변에는 그만큼의 책임을 기입해야 대차평균의 원리가 맞는다. 점심시간 동안의 사색을 통해 앞으로는 주어진 자유만큼의 책임을 다했는가하는 자유책임분석(Liberty-Responsibility Analysis)을 생활화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경영학의 비용편익분석에서 영감을 얻었음). 이만하면 오늘 밥값은 한 셈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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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지향적이라는 말은 대개 부정적 뜻빛깔을 나타낸다. 미래로 치닫기도 바빠 죽겠고, 지금 현재의 행복을 누리기도 정신이 없는데 한가하게 과거 타령한다고 꾸지람을 듣기 일쑤다. 하지만 나는 무척 과거지향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역사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일개인의 역사에도 꽤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과거의 잘잘못을 가려보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별해낸다면 지난날을 들쑤시는 작업이 마냥 백해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쩌다가 흐뭇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부끄러운 마음에 후회가 한가득이다. 회상이 시작되기 전에 부디 자족하자고 스스로에게 신신당부를 해봐도 별로 소용이 없다. 이렇게 보면 나란 녀석이 은근히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결벽증도 적잖이 있어서 뒷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얼마나 제 자신을 타박하는지 모른다. 게으르고 굼뜨게 사는 주제에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몸서리치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공익근무 시작을 기점으로 내 대학생활 전반기를 마쳤다. 공익근무 기간과 남은 2학기 기간을 대학생활 후반기로 명명(命名)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부쩍 지나간 3년 반의 대학 전반기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확신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 훌쩍 지나가 버린 내 대학생활에 대한 회한이 짙게 드리운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시작하면 생각보다 그리 늦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위안이다.


[유몽영(幽夢影)]에서 "부끄럽다는 한 글자는 군자를 다스리는 까닭이 된다(恥之一字, 所以治君子)"고 했다. 문제는 한 글자로 그치지 않고 "부끄럽고, 부끄럽고 또 부끄럽고"가 된다는 데 있다. 무언가 동분서주한 느낌은 드는데 딱히 제대로 한 건 없다는 자괴감이 나를 짓누른다. 지나친 위악(僞惡)과 과도한 자기비하는 겸손도 아니고 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뿐이지만 한없는 부끄러움을 통해 통절한 반성을 하고 싶다. [중용(中庸)]에서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는다(上不怨天 下不尤人)"는 구절을 꺼내본다. 지난날의 과오들이 죄다 내 탓인 양 가슴이 저린다.


대학생활 후반기를 맞이하면서 "꽤 그럴듯한 자유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 전에는"꽤 그럴듯한 자유주의자"라고 칭했으나 무슨무슨 주의자보다는 그냥 자유인이라는 표현이 좀 더 그윽한 거 같다. 행동상의 제약이 있는 공익근무 생활에다가 진로에 대한 고심으로 뒤척일 4학년 생활 속에서 자유인 운운하는 것이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디 자유인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긴장과 자기절제, 성장통을 달고 다녀야 하는 것이리라. 어디론가 떠나고 옮겨 다니기보다 내가 맺은 인연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보람을 찾아야 한다. 침잠(沈潛)하되 얽매이지 않고, 견결(堅決)하되 열려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서도.


제 몸뚱아리 건사하며 사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대충 살기도 힘든 세상에 열심히, 재미나게 살기로 결심한 이상 그에 따르는 고통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시절 남들이 백 번의 노력을 할 때 천 번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백기천(人百己千)으로 유명을 떨쳤듯이 나도 인백기천하며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또 이런 멋들어진 말을 쓰려니 대학 전반기 동안 내가 내뱉었던 번지르르한 구두선(口頭禪)들이 떠오른다. 허영에 들떠 실수한 점도 많지만, 실천이 좀 더뎠다고 해서 살맛나는 세상을 꿈꿨던 풋풋한 이상들을 함부로 박대하지는 말기를.


얼마 전 "역시 고대생은 다르구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싱글벙글했다. 내 자신이 칭찬 받은 것도 기쁘지만 내가 보고 배우고 느꼈던 곳까지 추켜세워지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나로 인해 내가 딛고 있는 곳, 나와 교류하는 사람들까지 믿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니 개인주의자도 손뼉치며 뿌듯해할 일이다. 지금이야 일신의 영달에 전전긍긍하는 처지지만 내 마음의 고향 고려대학교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이런 식으로나마 보답할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이다. 여하간 대학 후반기를 가슴 뛰게 살고 나서 내 유식찬란(有識燦爛)에 놀라고, 인자무적(仁者無敵)을 실감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나의 힘!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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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을 되찾다

잡록 2005. 7. 21. 00:18 |
군복무 시작을 전후해 요 몇 주간 불안정한 생활을 보내다가 이제야 좀 평온을 되찾았다. 아직 요원 생활이 몸에 익지 않아서 그런지 일과시간이 마치고 나면 피로한 기운에 저녁 시간을 제대로 보내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다. 요원 생활 동안 허송세월을 하지 않으려면 저녁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지만 그게 마음만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훈련소에서 걸렸던 지독한 감기도 이제 다 나았고, 짧았던 머리도 제법 자라서 답답했던 모자도 벗어버렸다. 그간 초췌했던 모습은 윤기가 흐르는 여유로 바뀌고 있다. 자정도 되기 전에 졸리는 현상만 극복하면 훈련소 이전의 생활방식을 거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출근길에 공짜신문 3종을 탐독하다가 앞으로 덤으로 얻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 얻은 성과물은 나만을 위해서 쓰지 말기를 다짐했다.


마냥 귀엽고 잘해주고 싶은 남자 후배들의 대부분이 군대 문제로 씨름해야 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늘 따갑다. 한 두 사람 보내본 것도 아니고 이제 좀 무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떠나보내는 마음은 늘 섭섭하고 아쉽다. 복거일 선생의 말대로 징병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성 원리로 삼은 사회에는 맞지 않는 제도다. 가뜩이나 사병들에 대한 복지가 열악한 실정인데, 모병제 군대로 전환할 때 예상되는 엄청난 비용은 참 고심스런 문제다. 게다가 여전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도 우리 사회의 국방색이 탈색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적어도 의무복무기간을 대폭 줄이는 쪽으로 나아가기 바란다. 징병제를 실시하는 60여개국 중 우리보다 긴 복무기간을 가진 나라는 북한을 비롯해 5개국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탄탄한 동기부여와 전문가정신으로 무장한 정예병이 국가안보에 더 보탬이 된다고 본다면 복무기관 단축에 인색할 이유는 없다.


사는 게 고만고만한 현역병들에 비해 공익근무요원들의 삶은 다채롭다. 어떤 생활은 생각보다 빡세서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고, 어떤 생활은 얄미울 정도로 부럽기도 하다. 사람 욕심은 참 끝도 없어서 구청에 와서 보직을 배정 받는 그 순간까지 가능한 무난한 일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왕이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이라고 둘러댔지만 실상 남들이 선망하는 편한 일을 기대했다. 내게 주어진 일이 인연이라 생각하고 즐겁고 재미나게 해나가야겠다. 한결같은 것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2년은 제법 긴 시간이라 날마다 근면성실한 모습을 보이기는 힘들 것이다. 가끔은 태업의 달콤함을 맛볼지 모르겠지만 엄연히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만큼 나태함에 빠져 희희낙락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구청 구내식당에서 맛난 밥을 먹을 때마다 고마움을 품는다면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소소한 재미도 챙길 수 있으리라. 짜증과 투정보다는 안온한 나날들로 꾸려보자.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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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근무를 시작하며

잡록 2005. 6. 11. 06:09 |
이제 곧 공익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생각보다 날짜가 늦게 나와서 노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내 삶의 전환점으로 삼을만한 변화가 찾아온다. 공익근무를 기다리며 놀았던 반년의 시간동안 딱히 무엇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빠져보지도 못한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이제 나라의 녹(?)을 먹는 처지가 되어 일감(?)도 생긴 만큼 일도 열심히 하면서 좀 더 새로운 삶의 보람거리를 찾아봐야겠다.


또래친구 중에 빠른 경우는 벌써 제대를 해서 복학생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그들을 보면 제법 의젓한 풍모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는 식의 말은 전혀 믿지 않는다. 다만 군복무를 마치면 여유도 많이 줄고, 마음도 급해지는 모양이다. 이제 제 살 길을 찾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들이 느껴진다. 그것이 정말 성숙해진 증거이든, 국가에 헌납한 시간이 아까워 손실을 메꿔야겠다는 본전의식의 발로이든 보고 배울 점은 많다.


한 학기 휴학을 하면서 이래저래 많은 약속도 잡아보고 생각지도 않게 05학번 후배들도 많이 만났다. 작년까지 학생회 일꾼 생활을 한답시고 정신 뺏겼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 더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새로 알게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더욱 친해진 사람도 많아졌다. 진작에 이렇게 교류 나누며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막심이다. 그리 사교적이지도 않고 무심한 편인 나이지만 모자란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고, 시간을 할애해주고, 생각을 나눠준 이들과의 좋은 관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시작하면 생각보다 그리 늦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


도무지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 없는 휴학생인 만큼 내키는 대로 잡히는 대로 책을 봤다. 대학 4년 간 한해에 100권씩 읽어치우겠다는 다짐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다. 그것을 만회라도 할 요량으로 책을 달고 지냈다. 차분히 앉아서 독서할 분위기는 아닌지라 내가 빨리 읽을 수 있는 역사와 문화유산 분야 책들 위주로 빨리 읽어내려 갔다. 간만에 독서열에 불타면서 대학 1학년 때부터 이렇게 살았다면 내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상상해봤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과거였고, 앞으로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짬짬이 못다 읽은 책들로 메우면 되리라. 내게 독서는 취미가 아닌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하기에.


공익근무라서 정말 다행인 점은 훈련소 기간을 제외하고는 민간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말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나이지만 천만다행으로 글 읽고 쓰는 것은 좋아해서 그나마 살아가는 재미에 보태고 있으니 말이다. 무언가 읽고 쓸 수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암흑이다. 그 암흑기간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짧다는 것에 감사하며 덤으로 얻은 시간만큼이라도 남들을 위해 쓸 것을 서약한다.


일단은 무탈한 요원 생활이 지상과제지만 적당히 안정이 되면 본격적으로 내 진로에 대해 고심할 생각이다. 천성이 게으르고 아무리 굼뜨다고 해도 대학 4학년씩이나 돼서 번듯한 미래설계도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공익근무 기간을 진로 설정을 위한 숙고의 시간으로 삼은 만큼 머리를 쥐어짜 보겠다. 내 영혼이 기쁨에 겨워 파르르 떨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시간이 그간 너무 없었다. 당최 뭐해서 벌어먹고 살지를 좀 정해봐야겠다.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2004). 마음산책. 67쪽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이라는 표현이 참 와닿는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
(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無癖)



여기서 벽(癖)이란 어떤 것에 흠뻑 빠진 상태를 말한다. 무상한 인생에 그나마 벽(癖)이 변치 않고 나를 지켜줄 것이다. 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라는 말처럼 미친 듯이 몰두해야 남이 따라오지 못하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어떤 것에 미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마니아적 감수성이 현실과 부딪힐 때 끝까지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내 편벽됨이 하필이면 주류의 것이 아니라 비주류나 소수파의 것이라면 또 얼마나 번민해야 할까. 부와 권력과 명예와는 별 상관없는 것을 추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물론 먹고사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세속적인 꿍꿍이를 외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온몸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 없는, 이것을 미친 듯이 할 때 따르는 아픔과 버림도 이겨낼 수 있을 것과 같은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그렇게 해봤자 내 꿈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일 따름이다. 모든 걸 평균치만 하는 사람은 결국 평균 이하가 된다. 차라리 평균 이하가 몇 개 있더라도 평균 이상이 몇 개 있어서 상쇄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선택과 집중을 위한 진통이 필요하다.


나는 그다지 변화무쌍한 삶을 원치 않으니 일단 한번 정하면 큰 궤도 수정 없이 밀고 나가길 바란다. 힘들게 결정하고 우직하게 밀어붙이고 싶다. 신중을 거듭하되 너무 지체하지는 말자. 여하간 공익근무를 앞두고 심사가 복잡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뒹굴 거리더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상은 손에서 놓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너무 걱정근심에 휩싸이지 말고 씨익 웃어보자.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는 이럴 때 진가를 발휘해야 한다. 뚜벅뚜벅 신명나게 요원 생활을 시작하자.^^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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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총학생회 탄핵발의안이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이하 전학대회)에서 찬성 13표, 반대 39표, 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전학대회 재적인원 66명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총회 또는 총투표 안건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그 전 단계에서 자초된 것이다. 이미 충분히 예견된 결과였고, 총투표 찬성의견을 밝힌 대의원들 상당수가 5월 2일 시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탄핵 총투표를 통한 재신임을 원한 것이었다고 한다.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 학내 여론을 극심하게 대립한 것에 비하면 학생 대표자들의 회의에서는 상당히 일방적인 결론이 난 셈이다. 전학대회 참석 대의원 54명 중 십 수명이 5월 2일 시위 참여 대의원이라고 하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조소가 나올 법하다. 시위 참여 대의원들만 반대해도 어차피 통과시키지 못할 참으로 싱거운 싸움이었다. 그러나 탄핵발의안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했고, 달걀로 바위치기를 하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평화고대 여러분들께도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이제 한바탕 소란은 정리되었다. 마땅히 승복하고 갈등을 마무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이번 일이 학생 대표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줬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번 일은 그간 학생회 살림을 주도적으로 꾸려왔던 학생운동 세력 전반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몰상식한 자들이 자신들을 음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여하간 이제 우리 고대에 평화가 좀 찾아오길 바란다. 그간 불필요하게 서로 너무 얼굴을 붉혔다.


이번 사건의 핵심적인 논란 중의 하나는 학생 대표자의 정파성 문제다. 일반 학우들은 학생 대표자 개개인의 정치적 의사 표현 자체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생 대표자들의 언동 하나하나는 비단 일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학생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적어도 학생회는 정치적 결사체가 아니다. 원하는 정치적 의사표시는 별도의 정치적 조직을 통해 하면 충분하다. 필요할 때는 학우들의 대표자라는 위세를 빌리고, 여의치 않을 때는 개인의 자유라며 빠지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번 이건희 학위수여식 사건은 정의와 불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부 학생들의 시위에 부정적인 여론을 재벌권력의 하수인쯤으로 취급하려는 태도가 더욱 반발을 재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우려스럽다. 이런 반대 여론을 삼성의 부정적 측면은 죄다 외면하는 놈들로 구획 지으려는 시도도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자신만이 정의라고 착각하기는 쉬운 일이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못해서 두부 썰 듯이 쉽게 두 동강나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옳다고 믿는 것은 좋으나 폐쇄적 자세로 일관한다면 허구한 날 민주주의를 외쳐도 비민주적인 조직이라는 비판이 따가울 것이다.


학생회 일꾼들의 땀과 눈물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종종 벌어지는 이런 행동은 그간의 공적을 야금야금 갈아먹는다. 여러분들이 직접 뽑은 사람에 대한 부당한 비난을 거두라고 다그치기 전에, 믿고 뽑아준 사람들의 상심을 헤아리는 여유를 보여주기 바란다. "고대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 것이 되어야 한다. 자유, 정의, 진리를 독점하려는 욕심을 버리자.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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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생회 일꾼에서 물러나 유유자적 재미나게 지내고 있는 나이지만 학교를 둘러싼 이런저런 일들에 내 의견을 묻는 경우가 끊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아예 자체 의견 정리를 해봤다. 이번 탄핵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향후 탄핵 절차를 소개할 필요도 있고 말이다. 사상 초유의 일이고, 이런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은 씁쓸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탄핵 총투표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고려대 총학생회 탄핵 총투표 실시해야>

지난 5월 2일 이건희 명예 철학박사 학위수여식 사건 이후 내홍에 시달리던 고려대가 결국 사상 초유의 탄핵발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16일 평화고대측은 재적인원의 10분의 1이 넘는 23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총학생회 탄핵안을 발의했다. 이제 단과대 학생회장, 과반 학생회장 등의 학생 대표자들로 구성된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이하 전학대회)를 소집해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총회 또는 총투표 안건으로 상정하게 된다(총학생회칙 36조 참조).


전학대회 과반수 출석으로 개회하는 것도 녹록지 않은데 2/3 이상의 출석은 더욱 힘들다. 더군다나 2/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렇게 해서 통과시켜봐야 겨우 총투표(총회는 사실상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절차를 밟는데 전체투표율 50%가 안 될 때에는 무효로 판정하기 때문에 이것도 까마득하다. 사실 탄핵안 발의가 된 것만으로도 너무나 유의미할 뿐 실제 탄핵까지는 넘어야할 산이 너무 많다. 대통령 탄핵보다도 힘든 것이 총학생회장 탄핵이다.^^;


개인적으로 지난 사건이 총학생회 탄핵까지 이어질 정도의 중죄라고 보지는 않는다. 총학생회로서는 억울한 점이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비단 이번 일 하나 때문이기보다 학우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이 이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합당한 탄핵 사유라고 보기 힘들지만 학우들의 누적된 불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총학생회의 잘못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학대회 대의원들은 지금의 이 비극적 상황에 책임을 통감하고 탄핵 총투표를 받아들이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전학대회 대의원들이 설령 탄핵에 공감하지 못해도 이제는 학우 전체의 의사를 물을 시점이다. 이는 대의 민주주의를 거스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전학대회에서 무마하기에는 파장이 너무 커졌다는 냉철한 분석이다. 만약 전학대회에서 탄핵안을 압도적 부결로 마무리짓는다면 탄핵안에 찬성한 학우들은 다시 한번 열패감에 사로잡힐 공산이 크다. 전례 없는 극심한 학내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번 탄핵 총투표를 재신임의 계기로 삼아야한다.


탄핵 사유는 부실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르나 탄핵에 대한 학우들의 의견을 묻는 것까지 봉쇄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커져버렸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뜻 깊은 해에 학우들이 양분되어 반목하는 것은 너무 서글픈 일이다. 이번 탄핵 총투표는 비단 총학생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간 학생회 살림을 주도적으로 꾸려왔던 학생운동 세력 전반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가슴 아프지만 이 고름을 쉬쉬하기보다는 이제 터뜨릴 때다. 끝으로 만약 총투표가 실시될 경우 학우 여러분들께서 투표에 참여하셔서 찬반 의사를 표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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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속의 일본어

잡록 2005. 5. 3. 07:47 |
얼마 전에야 쇼부란 단어가 승부(勝負, しょうぶ)의 일본어 발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뭐 일본어의 잔재이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막상 알고 보니 이물감이 더 커진다. 승부, 흥정, 결판, (뒷)거래 등의 우리말이 즐비한데도 쇼부란 단어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이 마뜩잖다. 본래 즐겨 쓰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더욱 멀리해야겠다.


나는 국어 순화에 애를 쓰거나 고운 말, 바른 말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국어 순화를 쓸데없는 짓거리라며 백안시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모국어를 사랑하고 아끼지 않는다면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고종석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어는 내가 자유롭게 다루어 쓸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언어"이며 한국어와 나와의 인연을 가슴에 사무치게 고마워하고 있다.


일본식 한자말 중에서도 고수부지(高水敷地,しきち)를 둔치, 강턱으로, 노견(路肩,ろかた)을 갓길로, 십팔번(十八番,じゆうはちばん)을 장기, 애창곡으로, 촌지(寸志,すんし)를 돈봉투로, 할증료(割增料,ねりましりよう)를 웃돈, 추가금으로 고치는 등의 노력이 있어왔다. 그러나 각서(覺書,おぼえがきね), 견적(見積,みつもり), 고참(古參,こさん), 납기(納期,のうき), 납득(納得,なつとく), 매립(埋立,うめたて), 사물함(私物函,しぶつかん), 생애(生涯,しようかい), 수순(手順,じゅじゅん), 식상(食傷,しよくよう), 역할(役割,やくわり), 잔고(殘高,ざんだか), 전향적(轉向的,まえきてきむ), 지분(持分,もちふん), 체념(諦念,てりねん), 추월(追越,おいこし), 축제(祝祭,まつり) 같이 이미 너무나 익숙하게 쓰고 있는 단어들을 일일이 손질하는 것은 지나친 강박증이 아닐까 싶다. 기왕이면 우리식 한자말을 찾아 쓰는 것이 좋겠지만 일본식 한자말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서 말한 일본식 한자말은 주로 와고(和語)를 의미한다. 와고는 한자어도 아니고, 서양 외래어도 아닌 일본 고유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단어를 말한다. 한자를 이용해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인 칸고(漢語, 넓은 의미의 중국계 외래어)의 경우는 사실상 논외라고 해야한다. 강의, 건축, 경쟁, 경험, 고전, 공산, 과학, 관념, 교통, 교환, 국제, 권리, 금융, 논리, 대통령, 독점, 명제, 문명, 미술, 민족, 민주, 박사, 법정, 봉건, 분자, 사회, 선거, 예술, 원소, 원칙, 윤리, 의무, 의식, 의지, 의회, 이성, 자료, 자본, 저축, 전통, 정당, 정부, 정치, 종교, 집단, 철학, 추상, 판결, 현실과 같은 어휘들은 중국 고전에서 비슷한 뜻의 어휘를 찾기도 했지만 대부분 한자를 결합해 일본인들 스스로 새로 만들어낸 말들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서구 어휘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한자를 음독하기도 하지만, 훈독하기도 하는 일본어의 특수성에 따라 일본어에서는 훈독을 하지만 한국어는 음독을 하는 와고의 경우는 조금 고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와고식 한자말(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들은 한자를 매개로 삼아 수입되어, 그 한자를 한국음으로 읽는 이상 한국인들에게 그 단어들은 이미 한국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종석, [감염된 언어](1999), 개마고원, 91~104쪽 참조). 다만 고수부지, 노견, 십팔번 같이 비교적 다른 한국어 어휘를 쓰는 것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많은 와고식 한자말을 다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참을 선임으로, 백묵을 분필로, 사물함을 개인 보관함으로, 세모(歲暮)를 세밑으로, 망년회를 송년회로, 흑판을 칠판으로 바꾸어 쓰는 등의 노력을 굳이 그만둘 까닭도 없다. 와고식 한자말을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대응되는 한국식 한자말이나 토박이말을 찾아 쓰는 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보다 큰 문제는 순일본말(일본음으로 읽는 말)과 일본식 외래말을 경계하는 것이다. 짬뽕(ちゃんぽん)을 뒤섞음, 초마면으로, 우동(うどん)을 가락국수로, 돈까스(とんかつ)를 돼지고기튀김이나 포크 커틀릿(pork-cutlet)으로 바꾸려는 것처럼 다소 억지스러운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쓰지 않아도 될 말을 굳어진 버릇 때문에 못 버리는 실정이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교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통해 반강제적으로 이뤄진 것이 많다. 특히 순일본말과 일본식 외래말은 충분히 고쳐 쓸 명분과 실리가 존재한다. 미싱, 사라, 오뎅, 와사비를 재봉틀, 접시, 생선묵, 고추냉이로 바꿔 쓰는 것이 편협한 민족주의의 발로는 아닐 것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내 미감을 심하게 거스르는 순일본말과 일본식 외래말 스무 개를 들어보겠다. 유일한 기준은 내 주관적 느낌이지만 비교적 대화 속에서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가라(から) -> 가짜, 헛것
겐세이(けんせい) -> 견제, 방해, 훼방
기스(きず) -> 흠, 흠집, 생채기, 티
낑깡(きんかん) -> 금귤(金橘), 동귤(童橘)
나가리(ながれ) -> (약속 등이) 깨짐, 허사, 헛일, 무효
노가다(どかた) -> 노동자, 막노동꾼
다라이(たらい) -> 큰 대야, 함지박
뗑깡(てんかん) -> 생떼, 억지, 투정, 행패
똔똔(とんとん) -> 득실 없음, 본전
레자(レザ-, leather) -> 인조가죽
무데뽀(むてっぼう) -> 막무가내, 무턱대고, 무모한
세꼬시(せごし) -> 뼈째썰기
스끼다시(つきだし) -> 기본안주(반찬), 곁들이 안주(반찬), 딸림 반찬, 밑반찬
싸바싸바(さばさば) -> 편법으로, 아첨하여, 대충 넘어가다
앗싸리(あっさり) -> 차라리, 아예, 깨끗하게, 간단히
요지(ようじ) -> 이쑤시개
이빠이(いっぱい), 만땅(まんタン) -> 가득(히), 한껏
찌라시(ちらし) -> 선전지, 광고전단지, 광고 쪽지
쿠사리(くさり) -> 꾸중, 야단, 핀잔, 나무람, 지청구, 구박, 면박
후까시(ふかし) -> 허세, 힘, 티내다/ 부풀머리


여담이지만 선조의 영향인지 나는 고3 수험시절에 틈틈이 한자공부를 해서 한자능력검정 2급 자격증을 딸 정도로 한자를 좋아한다.^^;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적정 수준의 한자 학습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아무리 한자의 매력에 빠진 나라고 해도 한글 전용의 대원칙은 건드리지 않으며 우리 말글살이가 한글만으로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 유네스코에서 문자로서는 유일하게 한글을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세계적 평가를 받는 한글이 정작 종주국에서는 갖은 생채기를 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를 아끼는 자만이 남의 존중을 받는 법이다. 일본어 찌꺼기들과는 쇼부(!)를 보지 말자.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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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 이상 투자한 글

잡록 2005. 4. 22. 05:17 |
대학 새내기 시절 [장자]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12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자판을 눌렀던 기억이 난다. 이 때 이후로 한나절 이상 투자한 글과 그렇지 않은 글로 이분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어차피 잡글인 것은 매한가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그 때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요즘도 가끔 그런 필(Feel)을 종종 받기도 한다. 침식을 잃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주로 밥 벌어먹는 것과 큰 관계가 없어서 고민이기는 하다.


며칠 동안 연호(年號)를 통해 한국사를 읽는 작업을 해봤다. 휴학생의 여유에 힘입어 간만에 한나절 넘는 글을 쓰는데 한 문장 한 문장이 쉽게 나가지 않는다.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보느라 자꾸 제자리걸음이다. 본래 생각이나 행동이 느린 편이니 글이라고 빨리 써질 리가 없다. 조금 정성을 들인다 싶으면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 나를 놀라게 한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는데 쓰는 시간, 많은 생각을 정리하는데 드는 시간 모두가 흥겹다가도 이내 고통스럽다. 이처럼 고질적인 생산성의 문제 앞에 맞닥뜨리면 회의가 몰려오기도 한다. 당나라 시인 노연양(盧延讓)은 "한 글자를 꼭 맞게 읊조리려고 몇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던가"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하물며 하찮은 소인(素人, 아마추어)으로서 글 쓰는 나는 애끓는 마음을 천형처럼 안고 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어디 그뿐인가. 혹시나 나만 알아먹는 이야기가 되지 않게 이런저런 부연설명이나 주(註)를 다는 것도 번거롭다. 내 온라인 보금자리는 분명 암호로 채워진 내밀한 공간은 아니다(그럴 거면 그냥 문서파일에 저장하면 그만이다). 내 글을 남들도 보고 왈가왈부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나중에 내가 썼던 글이 차꼬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까 신경 쓰는 것도 머리 아프다. 내가 꾹꾹 눌러썼던 텍스트는 지워지지 않고 내 곁에 맴돈다. 자신이 했던 말이 다시 돌아와 내게 비수가 되는 것처럼 아프고 부끄러운 일도 없다.


이처럼 글로써 소통하는 것은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다. 남이 읽기 위한 글, 남이 읽어줬으면 싶은 글을 쓰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감수해야 한다. 가끔 이것저것 말하거나 글 쓰고 싶어질 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린다.


지식은 회중시계처럼 살짝 호주머니 속에 넣어 주면 된다. 내보여 자랑하고 싶어서 굳이 필요도 없는데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 보거나, 시간을 가르쳐 주거나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만 대답하면 된다. 시간의 파수꾼이 아니니까 누가 묻지 않는데 시간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
- 필립 체스터필드,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1999), 을유문화사, 95~96쪽


그렇다. 하고 싶은 말 다하면서 사는 사람은 부박하다. 무언가 참을 수 없어 목구멍에서 뜨거운 이물감이 꿈틀거릴 때 쓰여지는 헌걸찬 글 한편이 그립다. 앞으로는 한 편의 글을 쓰고 한 마디의 말을 하기 위해 그것의 열 배가 넘는 책을 읽고 남의 말 열 마디를 듣도록 하자. 침묵의 시간이 살뜰할수록 내뱉는 말과 글이 탐스럽다. - [憂弱]

추신 - 이 글의 산파인 "연호(年號)로 읽는 한국사"라는 글은 거의 마무리 단계다. 개재하기 전에 이런 식으로 바람까지 잡았으니 어여삐 읽어주시기 바란다. 좀만 기달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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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황 선출에 부쳐

잡록 2005. 4. 21. 02:46 |
여기서 더 나아가 검은 피부의 교황을, 적어도 유럽 출신이 아닌 교황을 이번에 볼 수는 없을까? 그것은 가톨릭교가 바로 이름 그대로 보편적 종교라는 것을 처음으로 온 세상에 드러내는 길이기도 할 텐데 말이다.
- 고종석, "콘클라베 斷想.", 한국일보, 2005. 4. 13.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고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독일출신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로마 가톨릭 교회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 어느 때보다 비유럽 출신의 교황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터라 다소 실망스럽다. 내심 자기 지역에서 교황이 나오기 바랐던 중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의 신도들이 아쉬운 표정인 것은 인지상정이다. 보편을 추구한다는 종교에도 민족과 국가가 엄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성의 사제직 진출, 피임과 낙태, 동성애, 배아줄기세포 연구, 해방신학, 교회 개혁 등에 반대해왔다. 베네딕토 16세도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여성이 사제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하느님이라면 굳이 애써서 믿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또한 콘돔 사용을 철저히 반대하면서 에이즈가 횡행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을 부르짖는 것은 인간 존중의 종교라고 보기 힘들다. 자유와 구원을 외치면서 사슬과 차꼬로 동여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민족, 인종, 종교 등의 다툼으로 피눈물이 그치지 않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본인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세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교황 장례식의 조문단을 보라!). 하느님이 부여하신 사랑의 힘을 많이 퍼뜨리기를 기대한다.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는 성경 구절처럼 강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높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낮아지는 모습을 바라마지않는다. 하느님의 심판 이전에 종교의 자유시장이 가톨릭 교회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 교황 선종(서거)에서 새 교황 선출 동안 요란했던 관심을 정리할 때다. 이런 종교적인 이슈가 터질 때면 먼저 떠올릴 것은 대한민국 헌법이 아닐까 싶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를 부인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는 헌법 제20조는 늘 아슬아슬하다. 세속의 영역에서 종교를 이용하지 않는 성숙함이 좀 더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분명 세속주의 사회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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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말을 놓고 지내기를 희망하는 삼수생 04학번 후배 몇 명이 있다. 요즘은 확실히 학번이라는 표지(標識)만큼이나 재수, 삼수를 따지는 경향이 크다. 나는 새내기시절 학번이 깡패라는 소리도 적잖이 들었고, 어지간하면 학번으로 위계를 나누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배우고 느꼈다. 지금도 학번과 나이 사이의 교통 정리(?) 문제에서 어지간하면 학번에 무게중심을 두는 편이다.


이제는 학번만이 절대적인 표지이던 시대가 아니지만 아직도 비교적 학번을 고집하는 나를 보고 보수적이라며 핀잔을 준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나이끼리는 말을 놓도록 하는 것이 탈권위적이고, 진보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차피 학번이 사라진 자리에 생물학적 나이라는 표지가 들어찬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인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하간 농으로라도 아직도 말을 놓게 하지 않는다며 지청구를 먹을 때 많이 고심이 된다. 하기야 길게 잡으면 1년 동안이나 확답을 미뤄왔다. 03학번 후배의 경우 이런저런 경우로 말을 놓고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04학번의 경우에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말 놓기를 청원하는 후배는 그저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자는 의도에서 그러는 것이니 나의 튕기기가 궁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제를 확장시켜 보니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째려보는 것,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구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마름질하는 것에 대한 반발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요즘은 부쩍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난도질하는 것의 부박함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있다. 오늘의 가치관에 매몰되지 않고 어제의 생각묶음과 살림살이를 존중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변법자강운동으로 유명한 청나라 말기 학자 캉유웨이는 저서 <대동서> 중 '부모자녀문(門)'이라는 글에서 모든 인간이 정신의 윤회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이상 나이 차이란 우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대해서 특별히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박노자, 허동현, [우리 역사의 최전선](2003), 푸른역사, 102쪽 참조). 그의 이런 문제제기는 경청할 만 하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는 없다. 대개의 경우 "차마"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완전히 할 수 없음과 동의어다.


조선 말기 단발령을 내려지자 개화파 유길준은 유림의 거두 최익현에게 단발을 촉구하면서 "어찌 한줌의 머리털을 그리도 아끼십니까?"라며 힐난한다. 최익현은 개혁에는 본말과 경중이 있다면서 "부강(富强)으로 병립할 수 있다는 것만을 알고 강상(綱常)이 이미 추락하고 상하가 무서(無序)하여 만사불성(萬事不成)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한다(김삼웅, [왜곡과 진실의 역사](1999), 동방미디어, 230~237쪽 참조). 앞사람이 보기에 뒷사람은 늘 예의 없어 보이기 마련이니, 학번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 강상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학번중심주의(?)가 마냥 고루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다.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말을 놓는 것은 허용하되 선배라는 호칭만은 붙여줄 것을 제안할 생각이다. 예를 들자면 "익구 선배, 술 한 잔 해야지?"쯤 될 것이다. 어차피 대화 중에 내 이름을 부를 일은 거의 없으니 사실상 말을 놓는 것과 진배없다. 내가 끝내 "익구야~"를 마다하는 까닭은 내 02학번 동기들에 대한 경애의 표현이며, 선배님들에 대한 흠모의 산물이다. 또한 이 학교에 조금이나마 먼저 울고 웃은 내 자신에 대한 존경이기도 하다.


나의 타협안(?)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구태의연함을 고집하는 우매한 녀석으로 치부될까 두렵다. 호방하게 우리 이제 말 놓고 친구처럼 지내자고 하지 못하는 나의 졸렬함만 더욱 드러날까 저어된다. 하지만 나는 인덕을 보인답시고 넉넉한 척 헤프게 대한다거나, 위엄을 갖춘답시고 같잖은 유세를 부린다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내 깜냥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교류를 나눌 따름이다. 끝으로 나 같이 못난 놈에게 보여준 04학번 후배의 도타운 우애가 가슴 깊이 고맙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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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날의 상념

잡록 2005. 4. 5. 19:10 |
정민 교수님의 책을 읽다가 “미로득한방시한(未老得閑方是閑)”이라는 구절을 만났다. 젊었을 때 얻는 한가로움이라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라는 뜻이다. 이번 휴학시기가 내 삶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을 한가로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또 무뎌지는 것 같다. 그래도 술술 읽히는 책 위주로 독서도 제법 하면서 허송세월이 안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졸다가 남은 시간이 있으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졸아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어서 어떤 때는 하루 종일을 푹 자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어쩌다가 글을 지어 나의 뜻을 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 배운 철현소금(鐵絃小琴)으로 두어 곡조를 뜯기도 한다. 어떤 친구가 술을 보내 주면 기쁘게 퍼마신다. 취한 뒤에는 나 자신을 스스로 예찬해보기도 한다.
- 박지원,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中


책을 좀 보다가 컴퓨터를 틀어 글을 읽고 쓰고, 그러다가 한잠 늘어지게 자는 것이 박지원 선생이 누렸던 여유와 별반 다를 바 없다며 피식 웃었다. 여기에 덧붙여 지난날의 미숙함을 돌아보고 나의 말글이 비루했음을 반성한다면, 관계맺음에 대한 욕심에 미치지 못하는 내 자신의 부박함을 마주본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세속적인 꿍꿍이에서 벗어난 내면으로의 침잠이 그간 너무 부족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그냥 놀고있죠 뭐”라고 대답하는 것보다는 “이래저래 글 읽고 쓰는 재미로 지내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그럴 듯 하다며 권유를 받았다. 괜찮은 둘러대기인 것 같다.^^; 그 대신 내가 읽고 쓴 글이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생채기를 내고, 오랫동안 앓도록 해야겠다. 집착과 원망의 고름을 짜내고, 독선과 편견의 가시를 빼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문득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22세의 일기에 적혀있는 말이 생각났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는 구절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어서 노자의 “큰 모습을 잡으면 세상이 다가온다(執大象 天下往)”를 읊조려본다. 집대상은 내 꿈을 어딘가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집대상을 위해 지금은 우선 내 자신에 대한 분석과 시장조사를 할 시점인 것 같다. 나는 요즘 마냥 무위도식하지는 않고 딴에는 누운 용과 봉황의 새끼(臥龍鳳雛) 흉내를 내고 있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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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B반(보다 정확히는 단결飛반) 엠티를 와달라는 문자를 받고 안 갈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어느 행사든 간에 초청이 없으면 참석하기 힘든 처지가 된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던 참이었다. 알고 지낸지 한달 정도 되는 05학번 후배의 초청 문자는 그래서 더욱 값지게 다가왔다. 조금 과장해서 콧등이 시큰했다.


엠티 당일에 잠도 거의 못자고 오전에는 창덕궁 특별관람코스를 다녀오느라 부산을 떠는 바람에 피로가 몰려왔다. 오후 3시인 출발시간에 너무 빠듯해서 후발대로 갈까 생각했으나 귀차니즘 때문에 제 때 출발하기로 했다. 막상 가보니 02 동기들과 03학번 후배들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나홀로 왕고(?)가 되어버렸다. 내가 왕림(?)하여 자리를 빛내지는 못하더라도 민폐는 끼치지 말기를 다짐했다.^^;


대성리로 향하는 기차길에서 후배들과 환담을 나누고 숙소에 도착해서 둘러앉아 음식도 나누고 게임도 즐겼다. 지난날 게임의 블랙홀 활동이 다시 재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게임은 최소한도로 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었는데 정작 후배들 이름조차 제대로 못 물어본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고학번 선배의 고약한 심보인지는 모르나 내가 먼저 이름을 물어본 후배보다 먼저 이름을 알려준 후배가 훨씬 기억하기 좋은 것 같다. 제 자신의 머리 나쁨을 후배들의 열성 부족으로 치환하는 셈이다.^^;


컨디션이 저조했던 터라 내 트레이드마크인 “쉬어가며 오래가는 음주(혹은 릴렉스 롱런 음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 같다. 사실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어색함을 없애자고 술을 좀 급하게 마셨던 거 같다. 그래도 이번 엠티를 계기로 05학번 후배님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아 즐거웠다. 05학번 후배들과는 친해질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참 고맙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에 보면 공자는 술을 마시는 데 한도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해 어지러워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고 했다. 정해진 주량은 없으나 취하지는 않고 기분이 좋은 정도로 그친다는 말이다. 사실 유주무량과 불급난 중에 하나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결합시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나의 “쉬어가며 오래가는 음주”도 이 아름다운 결합을 지향한다. 그렇다고 기어이 고집하지는 않고 가끔은 사양하지 못할 때가 있고 기억이 지워질 때도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오래도록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것이 술값은 더 버는 장사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사교성이 많지 않은 내향적인 녀석이다. 흥을 띄우는 각종 잡기들도 전무하다. 유머감각이란 찾을 수 없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늘어놓기 일쑤다. 그렇다고 술을 크게 잘 마시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개개인의 숨겨진 매력을 만나는 재미는 쏠쏠하다. 사실상 이제 대학생활의 낭만은 끝났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아직 아름다운 추억이 현재진행형임을 깨달았다. 이번 엠티를 계기로 나 이만하면 고대 경영대에서 행복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매일 가슴 한 구석에 자제(自制), 자제, 자제라고 세 번씩 새기고 있지만 말이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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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생의 각오

잡록 2005. 3. 16. 02:59 |
한참을 미적거리다 휴학 신청을 했다. 공익근무 기간을 포함해 2년 반에서 3년 간의 긴 휴학기간이 시작된 셈이다. 공익근무 날짜가 나오기 전까지는 당분간 청강을 하며 학교를 다닐까 생각했으나 역시 강의에 대한 해방감이 나를 압도했다. 그래 일단 이렇게 푹 쉬면서 재충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공익근무 날짜는 빨라야 오월에나 나올 것 같으니 적어도 사월까지는 푸근한 자유를 만끽할 계획이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많은 분들과의 만남을 가져봐야겠다. 밥과 술을 함께 하며 정담을 나눌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인가. 또한 바쁘다는 핑계가 싹 사라진 만큼 차분히 책도 좀 읽어야겠다. 나름대로 삶의 전환기인데 책을 통해 희망과 영감을 얻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니까.


휴학생이라고는 하지만 도서 대출/반납을 빌미로 학교를 자주 드나들 예정이다. 집에서 학교가 가까운 특권(?)을 남용해볼 요량이다. 강의와 과제에 시달리는 재학생 여러분들께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놀아달라고 떼도 써볼 참이다. 공익근무를 다소 애매하게 신청해서 내가 스스로 의도한 이 여유의 시간은 내 삶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은 한가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넉넉함 앞에서 사뭇 비장해진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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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학생회장 A/S도 다 끝난 마당에 이제 학생회 일 이야기는 그만 하려고 했다. 허나 대학 3년 간 내가 유일하게 했던 학업 외 활동이 이 것뿐이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대학시절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해봤다고 하기에는 그 폭이 너무 좁은 것 같아 아쉽다.ᅮ.ᅮ


37대 경영대 학생회 홈페이지를 폐쇄하기 전에 게시판을 한번 둘러보던 중에 비상학생총회를 홍보하는 글을 읽다가 피식 웃었다. 당시 비상학생총회를 바라보는 내 견해가 그대로 드러난 글이었다. 이것은 홍보문이라기보다는 세부적 의견 차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절대 강제하지 않으며, 잠깐의 자발적인 참여로 권익을 향상하자는 나의 생각을 써놓은 논설문이었다.^^;


4월 8일 비상학생총회
오후 1시 중앙광장에서 만나요~

비상학생총회는 총학생회 회칙에 의거해 고대생 전체 재적인원의 1/10 이상의 참석으로 개의할 수 있습니다. 이번 비상학생총회는 등록금 인상 반대, 신자유주의 교육 재편 반대, 탄핵 반대, 국회해산의 기치 아래 진행됩니다.

2000명 이상의 학우가 모여야 개의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참여가 절실합니다. 설령 세부적인 구호에 동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차이와 이견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 우리의 뜻을 전달한다면 학교측에서도 좀 더 우리들의 요구를 수렴하는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바쁜 걸음 잠시 멈추시고 잠시라도 들러주시기 간곡히 호소합니다. 학생사회의 행사는 절대 강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잠깐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다 많은 우리들의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비상학생총회는 긴급을 요하는 사항이 있을 경우 소집하는 것으로 재적인원 1/10 이상 출석으로 개의하고, 출석인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재적인원 과반수 출석으로 개의하는 학생총회 성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장 높은 의사결정행위라고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학생총회를 소집할 만큼 난리가 났다면 재적인원 과반수 출석하고 자시고 할 여유가 있지도 않을 것 같다. 이런 불가능한 규정이 악세사리로 들어있는 것 같아 마뜩지 않다. 그리스 폴리스 시절에 있었다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향수인가?


여하간 이런 비상학생총회가 2002년부터 3년 간 열렸다. 누가 보면 학교가 늘 긴급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오해할 일이다. 3년 동안 지켜본 많은 학우들이 연례행사냐며 볼멘 소리가 가득했다. 2005년에도 비상학생총회를 계획하는 모양인데 언제 한번 정족수 미달로 회의가 무산되어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총학생회 선거 투표율 50%를 넘겨야 한다며 편법 연장선거를 자행하는 이들이 총투표니 비상학생총회니 하면서 학우들을 동원하려는 광경이 또 반복되는 것 같아 아쉽다. 피차 번거로운 행사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학우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이렇게 매섭게 쏘아붙였지만 사실 나는 2002년 비상학생총회 준비를 거들었고, 2003년에도 참석했다. 2004년에는 학생회장 신분인지라 참석을 독려해야 하는 처지에까지 놓였다. 비상학생총회의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 일부 반대표들의 항의가 곤혹스러웠고, 비상학생총회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나의 심중을 읽힌 탓인지 저조한 참석률에 애먹었다. 시간대도 최악이었고, 깔끔하게 불참한 단과대학도 있었지만 나는 적은 수나마 머릿수를 보태는 것으로 만족했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오래 전부터 비상학생총회 개최는 자연스런 지상과제였고, 별다른 이의제기도 없이 통과된 것이라 나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제기해보지도 못했다. 나의 책임방기지만 어차피 막지 못할 일에 태클만 걸면 가뜩이나 안 좋은 경영대 이미지가 더 나빠질까 봐 몸을 사렸다.^^; 사실 나는 1년 간의 중앙운영위원회(단과대/동아리 대표자들의 정기적 회의) 대부분을 고독한 소수파에다 깐죽거리는 성격파탄자가 되어야 했으니 가끔은 그냥 넘어가기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학생회 조직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학우들의 무관심의 벽은 더 높아가고 있다(여기서 학생회 조직은 주로 학생운동 진영이 꾸리는 학생회 살림을 말한다. 비운동권 진영은 일관성과 연속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분석하기 힘들다). 우리네 군대가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사회는 더욱 더 좋아져서 군이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아직도 말썽인 것처럼 말이다. 학생회가 아무리 변화해도 일반 학우들과의 거리감이 더 벌어지는 것은 비극이다. 이제 학우들은 아무리 선의가 충만한 것이라고 해도 동원이라는 생각이 들면 결연히 반대하고 있다. 자발적인 참여의 부재만을 탓하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현재 학생회 조직에 불만을 품는 학우들은 참여를 통한 변화를 꾀하기보다는 대부분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를 하고 있다. 합리적 무시는 다수의 대중보다 똘똘 뭉친 소수의 집단이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현상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있어 대개 소수에게 걸린 이해관계가 다수의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다수의 입장에서는 굳이 논쟁에 참여하는 비용을 지불하기보다는 무시하는 전략을 쓰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귀차니즘을 누적시키기보다는 다소 간의 참여와 논쟁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개개인의 비용 지출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외부의 자극이 시원치 않으면 내부의 혁신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학생회 상층부 의사결정에서 생산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너무 많은 일을 하려해서 문제고, 너무 제 생각을 고집해서 문제다. 기성 정치판에서도 익히 보아온 의사진행방해나 결과 불복도 적지 않았다. 고작 3년만을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인지는 모르나 내부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전/현직 학생회 일꾼들이 크게 섭섭하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학생회 조직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비상학생총회 참석을 독려하며 썼던 내 글을 보며 나 또한 매너리즘에 빠져 만만한 후배들을 이런저런 행사에 내몰았던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혹여라도 나의 날치기 통과(?)에 실망한 분들께도 깊은 사과말씀 드린다. 한가지 일을 오래 붙잡고 있어도 크게 나아지지 않음을 깨달을 때 내 자신의 초라함이 너무 부끄럽다.


프리챌 커뮤니티는 회원이 마스터 본인만 남아야 폐쇄가 가능한 관계로 1570명의 회원들을 강제탈퇴 시켜 겨우 폐쇄할 수 있었다. 폐쇄를 한 순간 지난 한해 내가 열정을 쏟았던 그 무언가가 이제 말끔히 지워짐을 느꼈다. 내게 아름다운 마음을 보여주신 분들, 모자란 녀석에게 투자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보답하기 위해 좀 더 멋진 녀석이 될 것을 다짐할 뿐이다. 이제 이 말도 그만하고 실천! 실천! 실천!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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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학생회장 A/S 완료

잡록 2005. 3. 13. 03:41 |
“저기... 05학번이세요?”


이런저런 반 행사 뒤풀이에서 05학번 새내기들에게 이런 질문을 몇 번 들었다. 세파에 나름대로 찌들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보인다니 고마운 일이다(선배를 위로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술을 줄이지는 못했지만 잠을 늘린 것이 피부에 보탬이 된 것이 아니냐며 속으로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02학번이라는 내 솔직한 정체를 밝히면 새내기들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어려워하는 05학번 새내기의 모습에서 나의 새내기 시절 99학번 선배님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음을 기억 해냈다. 사람 처음 만나는 것은 원래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아무래도 좀 더 까다로운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소중한 추억과 좋은 인연들과 함께 한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후배들의 어려워하는 눈치도 달갑게 받아들이자.


지난 11일 금요일에 경영대 세 개 반이 개강총회를 마쳤다. 조만간 05학번들이 실무의 주체가 되어 한해 살림을 꾸려나가게 된다. 경영대 학생회장 시절 함께 일을 나눴던 2004년 2학기 반일꾼들도 모두 임기가 끝나는 것이다. 그간 전임 학생회장이 A/S한다는 핑계로 행사들 챙겨서 다녔지만 이제 그것도 마지막이다.^^; 2002년 12월부터 경영대 학생회 잡일을 거들기 시작한 이후 짧지 않은 여정이 끝난 거 같아서 시원섭섭하다. 이제 정말 나와 업무상으로는 무관한 후배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새로운 반일꾼들에게 깊은 격려를 보낸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내 자신에게 개구리 올챙이적을 생각하자며 암시를 건다. 새로 뽑힌 후배들이 나와는 큰 연관관계가 없다고 해서 괜히 모자라고 어리숙하다고 핀잔을 주지 않기를. 나도 어지간히 어리버리했고, 선배님들의 눈에 못미더운 녀석이었음을 가슴 아프게 긍정하기를. 오히려 후임자들이 잘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축복할 수 있기를.


각종 행사들을 쫓아다니다 보니 “없으면 허전할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내 빈 곳은 누군가가 채우게 마련이다. 지난날 선배님들이 계시던 자리를 어느새 내가 꿰차고 있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도 세월은 내게 좀 더 높은 자리로 오르라고 할 것이다. 때가 됐으니 당연한 것이라며 냉큼 올라서기보다는 열심히 내 자신을 가꿔 멋진 선배의 모습으로 오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헛된 세월 보내지 않은 선배처럼 매력적이고 모시고 싶은 사람도 없으니까.


이제 A/S는 끝났지만 또 다른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하시라.^^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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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은 무장해제다

잡록 2005. 3. 10. 18:44 |
나는 ‘쿨(Cool)’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남을 제 뜻대로 강제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좋게 해석했다. 그러던 중에 한 친구의 글에서 “쿨하다=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로 왜곡되어 쓰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읽었다. 친구는 쿨하다는 방패로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통박했다.


다소 개인주의 색채가 짙은 쿨한 자세는 한국적 유대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게다가 개인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이기주의의 늪에 빠지기도 하니 쿨에서 이기주의의 냄새를 맡고 이물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할 만 하다. 비록 내가 쿨함이 부족한 것 같아 좀 배우려고 노력 중이지만 친구의 우려는 십분 동감한다. 나 또한 매정한 이기주의자가 쿨의 가면을 쓰고 횡행하는 것은 볼썽 사납다.^^


어쩌면 쿨 해야할 때와 쿨 하지 말아야할 때를 분간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세상만사는 대개 일장일단(一長一短)라서 나를 늘 곤혹스럽게 한다. 그냥 무조건 좋은 것도 있고, 무조건 나쁜 것도 있어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섞여 있다 보니 차마 속시원하게 버리지 못하고 지나고 나서도 미련을 가지거나 후회를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마다 장단점을 분석하는 노력은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내가 자청한 업보다.


쿨하다는 것이 치열한 자기절제 수준을 넘어 메마른 냉혈한이 된다면 사양한다. 과격한 열정을 줄이는 것을 넘어 다정한 모습까지 버리는 것이라면 원치 않는다. 나와 남을 구속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넘어 소중한 인연마저 경시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용기를 넘어 날카롭기만 한 독설을 즐기는 것도 경계해야한다. 이런 미묘한 차이를 재고 따지는 것은 그다지 쿨한 모양새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쿨한 백조가 되기 위해서는 수면 아래서는 열심히 발을 저어야하듯이, 쿨도 중용의 체로 걸러내야한다.


쿨하다는 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각박한 인심이 낳은 궁여지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만 쓰면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고, 헛된 집착과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쿨함에서 배워야할 것은 스스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자세와 인간에 대한 진솔한 애정일 것이다. 즉, 열심히 노력하되 결과에 따른 책임에는 쿨하게 승복하고,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 쿨의 미덕이다.


쿨은 내 자신이 상처 받을까봐 꼭꼭 막는 방패나, 남을 배려하지 않고 푹푹 찌를 수 있는 창이 아니다. 진정한 쿨은 열린 마음과 열린 자세로 건설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무장해제가 되어야 한다.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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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억울함

잡록 2005. 3. 9. 11:10 |
지난 2004년 2학기 경영대 사물함 추첨 때 사물함이 다소 부족했다. 새 사물함을 대거 들여오기 위해 낙후된 사물함을 일부 철거했기 때문이다. 늘 조금 남는 경영대 사물함이지만 이번만큼은 많은 학우들이 사물함을 못 쓰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경쟁률은 1.043대 1이었다. 신청 양식을 잘못 기입한 경우도 과감하게 배정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그것을 포함해도 1.1대 1도 안 되는 경쟁률이었다.


사물함 배정은 컴퓨터 학과 선배님의 도움으로 만든 추첨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으로 나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100% 아웃소싱으로 이래저래 많은 신세를 진 셈이다. 앓던 이가 빠진 심정으로 배정 결과를 공지했다. 그런데 그 후 곤혹스러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엄청나게 낮은 경쟁률이었음에도 떨어졌다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 것인지. 게다가 안면이 있는 학우들의 불평을 많이 접했다. 딱히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그들이 느끼는 인간적인 섭섭함 앞에서 참으로 난감했다.


사물함 수리를 철저하게 한 덕분에 예년에 비해 고장 신고가 거의 들어오지 않아서 여분 사물함을 추가로 배정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워낙 낮은 경쟁률이다 보니 떨어진 것이 납득하기 힘들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내게 쏟아진 볼멘 소리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 사물함 배정은 당초 공지한대로 랜덤 배정이며, 그 배정마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 맡겨서 한 것으로 한 점 의혹도 없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2005년 3월에 어느 후배로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 커플들이 많이 떨어졌다는 루머가 돌았다는 것이다. 2인 1조로 신청할 때 여자와 남자가 함께 신청한 조를 일부러 골라서 배정시키지 않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그냥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였던지라 웃고 지나갔지만 사실 엄청 억울한 일이다.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그런 만행(?)을 저질렀겠는가.^^;


하지만 원래 억울함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내 자신에게 치명적인 불명예가 아니라면 그 정도의 오해는 너그러이 품고 갈 일이다. 그런 화풀이를 통해 커플들의 우애가 돈독해지고 사물함 탈락의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가실 수 있다면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내 학생회장 임기가 끝난 지는 제법 시일이 지났지만 내 불찰로 걱정을 끼치거나 내 게으름으로 불편하게 한 점이 적지 않을 것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고마운 제보(?)였다.^^;


분명 그 사람이 지은 죄 이상의 벌을 내리는 것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것이다. 과도한 벌이 내려지는 경우는 대개 그 사람이 만만한 소수자이거나, 별 볼일 없는 비주류일 경우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 개인주의의 원칙이라면 보상과 문책이 누구에게나 공정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공만큼의 상을, 죄만큼의 벌을!”이라는 구호를 입버릇처럼 되뇐다. 하지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설령 내 잘못이 없다고 해도 한바탕 웃고 말일이면 좋게 간직하는 여유도 있어야 할 것이다. 예외 없는 법칙이 어디 있나.


이 에피소드를 듣던 중에 문득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에서 주인공 꼬마가 돈을 잃어버린 뒤 “내 돈을 주운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무료한 일상 속에서도, 곤고로운 사건을 겪을 때라도 이런 정도의 넉넉함을 갖춘 낙관주의자가 되고 싶다. 설령 진실이 아닌 일에 억울한 일을 겪고, 내가 조금 손해본 것 같을 때 누군가가 이익을 봤다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 인상 쓰고 비감에 젖어 살기에는 시간은 열심히 달리고 있고, 인생은 너무 짧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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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신입생 특강 뒤풀이에 참석했다. 05학번 새내기들과도 처음으로 말을 제법 많이 나눠볼 수 있었다. 내 짧은 기억력 탓에 이름과 얼굴도 거의 잊어먹었지만 05학번과의 만남도 무척 유쾌했다. 물론 늘 반가운 04학번 후배들과의 만남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새로움이 압도할 때 익숙함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고학번 선배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긴장감이 역력했다. 조금만 대화 나누다 보면 대단치 않고 부담 없는 선배라는 사실이 금방 탄로가 나지만 말이다.^^; 하지만 굳이 처음의 그 어색한 공기마저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는 원래 어렵고 힘든 것이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입장벽을 넘어서려는 아름다운 노력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대선배님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05학번들과 대화 나누면서 고학번 선배의 대열로 밀려들었음에 대한 서운함이 적잖이 들었다. [어린왕자]에서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는 핀잔이 나오기는 하지만 내게 붙은 02학번이라는 숫자가 세월의 무게를 머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기는 한 모양이다(여담이지만 경영학도라면 숫자에 밝을 필요가 있다).


05학번 새내기들에게 어줍잖은 충고라고 몇 마디 내뱉었던 것을 다시 되새겨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건 충고라기보다는 내가 못한 것을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란다는 일종의 주술(?)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후배가 이런저런 충고를 잘 취사선택하여 훗날 선배를 능가해 후생가외(後生可畏)를 실감하게 한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리라.


아직 술을 마시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들에게 음주인생(?) 초반에는 제 주량을 감지하기 위해 술잔을 세면서 마실 것을 주문했다. 선배들이 주는 술을 모두 받아먹는 미련함보다는 제 몸을 건사하는 재치를 귀띔하기도 했다. 술을 많이 마셔주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늦게까지 취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좋아하는 선배들의 이율배반적이면서도 변덕스런 마음을 잘 헤아릴 것도 당부했다.


또한 이름이 흔한 새내기에게는 금방 헷갈리기 쉬우니 한번 더 이름을 알리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학기 초반에 있을 각종 행사에서 최소한 동기들이라도 많이 익혀두는 부지런함을 역설했다. 그러면서도 옛친구들과의 유대관계도 이어나가고, 학과 공부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균형감각’이야말로 새내기의 덕목이라며 강조했다.


영특한 후배들이 이런 유의 시시한 내용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실천이다. 나 또한 대학 새내기로서 이 정도쯤은 할 수 있겠거니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새내기 시절 못다 이룬 꿈들은 이제 고스란히 빚이 되어 이자만 불리고 있다. 이를 갚아나가는 것은 기품 있는 선배가 되는 것에 있을지 모르겠다. 희망에 설레는 눈망울들을 바라보며 더 가슴 뛰게 살 것을 다짐했다. - [憂弱]


추신 - 술자리 말미에 B반의 아끼는 후배가 A반과 B반 중에 어느 반이 좋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다 소중한 경영대라며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후배는 적잖이 실망한 표정이었고, 나는 나대로 무척 당혹스러웠다. 물론 그 자리에서 B반이 당연히 더 좋다며 맞장구를 쳐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술 마시면 평소보다 더 잘 웃는 내 특성상 싫은 기색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좀 기분이 언짢았다. 어느 B반보다도 B반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행사 때마다 참여했던 내게 그런 물음은 좀 지나쳤다. 별다른 연락이 없어도 내가 먼저 일정을 확인하고 찾아왔던 것을, 늦은 시간에라도 찾아가서 인사라도 나누려고 했던 나를 몰라주는 것 같아 조금은 섭섭했다.


공식적인 행사 뒤풀이 때야 그나마 알고 찾아갈 수 있지만 각 반별로 소소하게 있는 행사들은 내가 알 길도 없다. 그런 잡다한 모임들에 내가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 때의 기분을 조금 헤아려줄 수는 없었을까? 때때로 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 이방인의 감정을 모르지 않을텐데 말이다. 이렇게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 후배도 좋고, 우리 경영대도 사랑한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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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반측 2005 새터

잡록 2005. 2. 19. 23:19 |
전전반측(輾轉反側)... 2005 새터를 갈지 말지 고민하던 나를 이렇게 묘사하고는 한바탕 웃었다. 새터 오라며 따스하게 권해준 고마운 후배들이 몇몇 있었고, 지난 2년의 새터에서 일만 한 기억밖에 없어서 놀러 가는 새터도 한번 가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02 동기들도 거의 없고, 은퇴한 몸이라는 등의 별 시답지 않은 핑계를 대고 끝내 가지 않았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새터 뒤풀이까지 외면하지는 못하고 간만에 반가운 얼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간만에 전철 첫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기분은 상큼했다.^^; 05학번 새내기를 알고 싶다기보다는 이제는 어엿한 선배가 된 04학번 후배들을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제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낼 일이야 없어도 뒤풀이 때는 짬짬이 다녀볼 생각이다. 전임 학생회장이 A/S 하는 셈치고 말이다.


차마 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04학번 후배들이 참 많이 고마웠고 함께여서 즐거웠다. 04학번 새내기들의 입학을 축원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어엿한 선배의 자태를 뽐내는 것을 보니 기쁘다. 기품 있는 선배들이 될 거라 믿는다.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 소중한 인연은 앞으로 더 돈독하게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04학번 후배들이 올 한해 소중한 인연들과 재미나고 보람찬 관계 맺어나가기 바란다. 다만 05학번 새내기 맞이로 분주한 이 맘 때 04학번을 추억하는 선배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기를. 넓어질수록 깊어지고, 높아질수록 낮아지는 멋진 고대인이 되도록 함께 노력할 수 있기를. 끝으로 적극적이면서도 진지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책임감 있는 05학번과의 만남도 고대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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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미뤄져왔던 익구방 정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서류 뭉치들 정리가 한창이다. 이것저것 모으기 좋아하는 익구의 수집벽을 방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뭐 하나 잘 못 버리는 성격 탓에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해서 1박 2일 동안에 말끔히 정리가 될지 의문이다. 아마 중랑구로 이사올 때나, 쓰레기 종량제 전면 시행 하루 전날의 대규모 정리에 맞먹는 작업이 될 듯 싶다.


이번 대정리 기간에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는 것들은 과감하게 폐기 처분하거나 이면지 활용을 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이후의 서류들도 상당하지만 그 이전 시절의 잡동사니들도 어마어마했다. 나중에 고등학교 전과목 선생님 할 것도 아니면서 각종 과목의 수업 자료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또한 대학에 들어와 무지막지하게 뽑았던 이런저런 강의 자료와 참고 자료들, 학생회 일꾼 시절의 문서들도 공해 수준이었다.


방 구석구석에 여기저기 들어서 있는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이번만큼은 확실히 버릴 것을 결심했다. 따져보면 종이 한 장 어느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지만 방안에 꼭 쳐 박아 둬야만 그것이 계속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채우려는 욕심이 지나쳐 내 자신에게 주어진 자그마한 공간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을 해봤다.


분명 덜어낸 만큼 또 채우겠지만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진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미련과 집착을 덜어내고 산뜻함과 담박함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한없이 살찐 방의 기름기를 제거하는 일은 내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을 잘 쓸 줄도 알아야 하지만 잘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사람보다는 일단 서류 뭉치들에게 먼저 적용해야할 판이다.^^;


이번 정리를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틈틈이 해왔던 신문 스크랩 뭉치들도 대폭 정리할 것 같다. 어지간한 문서들은 거의 이면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아마 어린 시절 레고 장난감, 초등학교 일기장이나 중학교 몇몇 공책들, 고등학교 교과서 몇 권은 이번 구조조정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겠지만 침대 밑 어둠 속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서류 정리가 얼추 끝나면 흉물스럽게 쌓아놓은 책들도 아름다운 가게 등을 통해 처분할 예정이다.


방만했던 지난날들이 베여나가고 있다. 황량함이 느낄 정도까지 정리를 한 뒤에 깨끗이 비워진 책상 위에 앉아 그간 읽지 않고 처박힌 책들을 꺼내어 상쾌하게 읽어 내려갈 계획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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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성탄절날 신촌에서 열린 고종석 팬클럽 오프모임에 참석했다. 고종석 선생님은 현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신데 [오늘]란을 연재하시고, [이런생각]이라는 칼럼을 기고하신다. 고종석 선생님은 내게 개인주의를 당당히 말할 용기를 주셨고,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신 내 영혼의 스승이다. 언젠가 한 번 꼭 뵙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만나 뵐 수 있어서 크나큰 행운이었다. 성탄절에 오붓한 시간을 보냈을 그 어느 커플도 부럽지 않았었다.^^; 그 날 모임이 끝나고 고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다음은 편지 전문이다.


[성탄절날 인사 드렸던 새우범생입니다^^]

안녕하세요. 고종석 선생님...

드디어 이렇게 전자우편 한 번 날려보게 되었네요. 저는 지난 성탄절에 있었던 고종석 팬클럽 오프 모임에 있었던 새우범생입니다. 지금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고요. 개인적으로 성탄절이 중요한 휴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선생님을 뵐 수 있어서 제 짧은 생애에 최고의 성탄 선물이 되었습니다. 산타할아버지께서 정말 귀한 선물을 주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개인주의를 당당히 말할 용기를 주셨고,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신 제 영혼의 스승이십니다. 사람 앞에서 막상 그 사람 칭찬을 못하는 성격 탓에 이 말씀을 못 드렸네요. 선생님께서 이런 치사(致謝)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 더 이상의 낯간지러운 말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개인주의나 자유라는 소재로 이런저런 말씀을 드려보고 싶네요. 요즘 개인주의의 물결이 대학가를 휩쓸고 있다고들 합니다. 저 또한 진짜 개인주의의 물결이라면 더 거세져서 한국 사회에 너무 깊게 찌들은 집단주의와 획일적 문화를 걷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미 있는 개인들이 부딪힐 때 우리 사회가 좀 더 빛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마다 개성, 개성하지만 획일화된 개인, 행복마저 유니폼이 되어버린 개인들이 되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개인주의자의 모습은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라면 타인과의 차이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는 것을 반대해야겠고요. 이는 모든 사람이 개성의 향연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성들 사이에 현저하게 다른 가치가 부여되지 않도록 하는 세상이겠지요.


미국의 철학가,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난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 살거나 다른 사람더러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는 말에 무릎을 쳤습니다. 저 또한 제 자신이 이기적 효용함수를 가졌으며, 이타주의적 희생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전체주의적 억압에 불편함을 느끼고, 집단의 이름으로 저나 다른 개인의 이익이 심하게 훼손될 때 언짢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습니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소수파가 되었을 때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는 양심적 기억력일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수 없다면 저는 언제나 소수파가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내세우는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남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열어야하는 보험료는 그리 싼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험료의 부담쯤이야 마음 편히 소수파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보험금의 혜택에 비추어볼 때 확실히 남는 장사로 보입니다.^^: 이처럼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며, 궁극적 소수로서의 다른 개인과의 연대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대략 이런 생각들을 정립할 수 있는 데까지는 선생님의 영향력이 지대했습니다. 제가 괜히 영혼의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정말 진짜배기 개인주의자가 되기는 너무 어렵네요. 정말 의미 있는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고독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용기도 제법 있어야 하겠고, 타인과 열린 마음으로 교류할 자세도 되어 있어야 하니까요.


지난 학기 과제물 작성을 위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과제물을 하면서 선생님 글의 다음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나 마르크시즘 역사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룩한 증오의 역사다. 그들이 내건 사랑이 그리 크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실천한 증오의 크기가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나 마르크시즘을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그려온 유토피아는 먼 미래나 과거, 또는 외딴 섬에 설정돼 있다. 그들이 그리는 유토피아가 지금 이곳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는 사랑, 우애는 무책임하게 클 수 있었고, 그 반동으로 그들이 실천한 증오도 덩달아 그리 클 수 있었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2002), 개마고원 刊, 233~234쪽


지적 쾌락을 추구하는 풍족한 유토피아 사회의 주된 특징은 획일성이었습니다. 2년에 한 번씩 똑같은 모양/색의 옷을 주기 때문에 의복의 자유도 없고, 이혼도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여행 허가증을 일일이 끊어야 해서 이동의 자유도 없었고 말입니다. 특히 각 가정에서의 식사보다는 공공 장소에서의 공동 식사를 하는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모어는 그럴듯하게 묘사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도덕적인 설교를 듣고, 연장자들의 평가를 상시적으로 받아야 하는 숨막히는 식탁 풍경이 그려졌습니다. 물론 종교적 관용이나 교육의 평등 같은 좋은 부분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통제사회라고 느껴졌습니다. 라파엘이 그렸던 유토피아는 엄격한 통제 메커니즘이 24시간 돌아가야지 겨우 실행되는 초라한 몰골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유토피아 사회는 사랑이 크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게 감시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봅니다. 절대선의 경지에서의 이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유토피아 시민들을 안심하게 만들고, 반대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유토피아 사회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과제물을 쓰면서 유토피아는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시켜줄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복은 집단의 위계질서 앞에 순응하고, 전체주의적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했습니다. 결국 사적 영역을 말소시키고 거대한 집단 속에서만 안온함을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게거품 물고 손가락질했답니다. 어쩌면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와 종이 한 장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토피아의 열정이 지나쳐서 개인의 공간을 소멸 당하고, 순응 속에서만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런 디스토피아도 없겠지요.


선생님께서도 많이 지적하셨지만 청결과 순수에 대한 강박과 조급증 때문에 자신의 네모 반듯한 기준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여분을 덜어내고, 부족함을 억지로 채우는 무리수를 두는 경우를 역사상 많이 보아 왔습니다. 십자군 전쟁도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성지를 수복하자는 거룩한 사명을 띠고 시작되었고, 마오쩌둥의 문화혁명도 혁명사상 고취를 통해 인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의 약속했으며,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또한 이라크에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라고 강변하고 있으니까요.


유토피아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열망에서 출발하고, 이를 위한 노력과 욕망이 인류를 진보시킨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유토피아 사상은 여전히 살맛나는 세상을 향한 의지의 표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로 치장한 전체주의는 더 이상 등장해서는 안되는 비극의 씨앗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동질성으로 무장하기보다는 다양성으로 흩어지는 사회를 건설해야겠지요. 특히 사회적, 문화적 소수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짜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일 것입니다.


요즘 들어 추상적인 이상에 대한 합의는 참 어렵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특히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절대선과 절대악이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입니다. 미국의 네오콘 같은 사명감에 불타는 무식쟁이들만 있다면야 옥석을 가리기 쉽겠지만, 대개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맞서게 마련이니까요. 가령 신자유주의 논쟁만 해도 WTO는 전세계 민중을 착취하는 미국식 세계화에 불과하다는 입장과 WTO가 실현할 자유무역과 다자통상체제로 말미암은 경제적 다극화가 우리가 살길이라는 입장과의 간극은 너무나 벌어져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악의 화신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대립하는 사회 개혁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숙고된 균형감각이 절실합니다. 제 아이디 새우범생은 이렇게 상반되는 두 상반되는 고래 같은 주장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새우등 터져 가면서 배우자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부지런히 새우등이 터지다보면 가끔 콩고물도 떨어지고 그러겠지라는 희망을 안고 오늘도 싸움 구경에 눈이 둥그래지는 수 밖에요.^^;


자유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낳고, 이 차이에는 여러 종류의 불평등이 포함됩니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라면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을 막고, 불평등이 계속 고착화되는 것에도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상호 존중이라는 가치를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숙고된 균형감각 위에 점진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해 나갈 때 유토피아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사실 이 대목은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을 수입했답니다^^;).


여하간 제 생각을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티격태격하다가 생채기 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고 싶습니다. 또한 제 사상과 양심에 비춘 편들기하지 않는 편파적인 놈이 되고 싶습니다. 가끔은 오해받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쳐야할지도 모르지만,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상도덕을 준수해가며 열심히 살다보면 공자의 말씀대로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 실현될 날이 오겠지요.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사르트르 말을 늘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이 저주가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하지 않는 녀석이 되는 것이 제가 꿈꾸는 저의 모습입니다.


그냥 선생님의 글들에서 깨우쳤던 내용들을 두서 없이 늘어 놓아봤습니다. 너무 횡설수설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네요.^^; 경영학도로서 손해보는 장사를 싫어하는 만큼, 제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아마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시급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배우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 게으른 몸뚱이 때문에 근심만 한가득입니다.^^;


평소 흠모하고 사숙하던 선생님을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더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는데...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다 못한 것 같아 아쉽네요. 기회가 되면 또 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선생님 글 잘 챙겨 읽으며 치열하게, 자유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훈훈한 세밑 되시고 늘 건승, 건필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다시금 만나 뵙게 되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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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요구됩니다. 벙커에 마린이 없는 광경이 우습지 않은 분, 오버로드 한 부대로 공격을 떠났다는 에피소드에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시는 분들은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가끔은 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한 컴퓨터 게임들은 거의 못하고, 잘하거나 좋아하는 운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래방에서 한 곡 뽑는 흥겨움을 즐길 줄도 모르고, 영화, 콘서트, 문화행사 등을 크게 즐기는 것도 아니며, 당구, 카드 같은 잡기에도 젬병이다. 이렇다 보니 사람 만나 노는 것의 대부분이 마실 거리 나누며 담소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궁궐 답사 같은 것도 다녀봤으나 번번이 파트너 구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대중성 확보에 아무리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들 사교 수단이 변변치 않으니 진전이 있을 리가 없다. 고작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책이나 붙잡고 있는 녀석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퍼진 것도 도무지 나머지 활동들이 전혀 안 보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일 것이다. 물론 나는 삼국지 게임을 열성적으로 즐기기도 했고, 만화책도 어지간히 읽었으며, 체스는 둘 줄 안다며 같잖은 변명을 둘러 대보겠지만 별무신통이다. 게다가 담소를 즐긴다면서 적당히 맞장구 치기보다는 괜히 시비 걸고 어줍잖은 독설을 내뱉어 분위기 깨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렇다 보니 무슨 재미로 나 같은 놈과 놀아줄까라는 역지사지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내가 중3 때 PC방이 등장해서 지반을 꾸준히 넓혀가더니 1시간에 2000원에서 1000원으로 떨어지자 급속도로 확산이 되었다. 단연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의 인기는 PC방의 전파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 남학우들의 태반은 틈만 나면 창동 근처 PC방을 애용하며 스타로 울고 웃었다. 그 나이 또래가 대개 그랬듯이 남학우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대학이나 공부 관련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스타에 관한 전략과 순위 싸움, 누구누구가 사귄다고 하던 연애담이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두 뜨거운 감자를 거의 거들 떠도 보지 않았다.


고등학교 학기초의 어수선함도 잦아들었지만 남학우들의 스타 사랑은 식지 않고 유지되었다. 2학기 들어 강원도 설악산 등지로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안에서 남학우들은 차창 밖의 군부대를 지나치며 벙커가 어쩌니, 마린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박장대소할 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야말로 소외감이란 것을 절실히 체험했다고나 할까. 결국 그 소외감을 극복하고 대중성을 확보하겠다는 일념 하에 11월 어느 날 PC방 무리에 섞여 낯선 곳으로 향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의 모범생적 감수성 오락실을 꺼리는 것에 모자라 거의 죄악시했다. 100원짜리 동전을 넣는 투입구가 마치 지옥의 문인 것처럼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내게는 크나큰 도전이었던 셈이다.


사실 PC방행이라는 거사를 치르기 전에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해놨다. CD를 구해 게임을 집 컴퓨터에 깔아서 기초적인 것을 미리 익혀둔 것이다. 매뉴얼을 보며 각 유닛과 건물의 특징들을 외우고 익혔다. 책을 보며 게임을 습득하는 나를 보며 대다수 친구들이 세상에 게임은 하면서 배우는 거라며 애정 어린 충고를 해주었지만 일단 내 식대로 했다. 여하간 나름의 준비를 갖추고 PC방의 한자리를 꿰차고 앉아 전투 준비를 했다. 어디서 주워들었던지 처음 하는 사람은 프로토스가 괜찮다는 말에 프로토스를 선택해서 첫 대전을 펼쳤다. 아마 4대 4 팀플레이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력이 0인 내가 끼어 들어 균형을 맞추려면 4대 4 팀플 정도는 해야했다.


(당시에 대규모 인원이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심할 때는 4대 4 팀플을 두 개 동시에 진행하고도 사람이 남아 기다리면서 교체하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서울외고 6기 중국어과 남학우가 두 반 통틀어 45명 남짓인데 그 절반이 한 PC방에서 하나의 게임을 주고받고 하는 진풍경이 한 동안 벌어졌던 것이다. 스타의 광풍이 조금 사그라지고서야 참전용사(?)들이 10여명 전후로 줄어들어 나중에는 4대 4보다는 3대 3이나 2대 2 정도의 팀플을 즐기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주워들은 빌드오더를 구사해서 일곱 번째 프로브로 파일런을 짓고 아홉 번째 프로브로 게이트웨이를 지어 마침내 질럿을 한 기 생산해냈을 때 왠지 모를 흥분에 휩싸였던 것이 생생하다. 아 드디어 공격유닛이 나왔으니 나도 공격을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흐뭇했던 것 같다. 질럿이 차곡차곡 쌓였고 저글링 몇 마리가 정탐을 왔으나 질럿으로 가볍게 해치우니 의기양양해졌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무탈리스크 몇 마리가 내 진영으로 날라 오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공부한다고는 했는데 질럿은 대공능력이 없다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결국 프로브는 몰살당하고 넥서스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 첫 참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대공능력의 부재라는 패인 분석을 통해 대공 능력을 위해 내가 꺼내든 방안은 포톤캐논이었다. 드래군을 뽑으려면 가스도 채취하는 등의 번거러움이 있다보니 초심자가 취약한 초반 러쉬를 막기 위해서도 포톤캐논은 유효한 수단이었다. 캐논에 맛들인 나는 그 이후 포톤캐논 꽃밭을 즐겨 썼는데 상대편에는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깍두기 신세이니 불쌍해서 차마 초반에 쳐들어가지는 못하겠는데 시간만 좀 주면 포톤캐논 꽃밭을 만들어서 괴롭히니 계륵인 셈이다. 특히 무한맵에서는 자원 걱정이 없기 때문에 혼란스러움을 틈타 중앙에 포톤캐논 꽃밭을 가꾸어 놓으니 얼마나 얄밉겠는가.^^


나의 이 너무 단조롭고 예측 가능한 게임 진행을 바꿔보라는 많은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의 포톤캐논 사랑은 변할 줄 몰랐다. 포톤캐논으로 충분히 방어하고 질럿, 드래군만 열심히 뽑아 아군의 병력에 보탬이 되는 것 정도로 2년여를 버텼다. 한 번은 내 자신도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를 연상시키는 똑같은 플레이에 지겨워진 나머지 전략을 바꿔 다크템플러 기습을 했는데 대성공을 거둬 상대편 일꾼들을 상당수 잡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아마 그 때가 스타를 하면서 거의 유일하게 칭찬을 들었던 것 같다. 대개는 포톤캐논 그만 좀 쓰라고 질타를 받았으니 말이다.^^;


가끔 기회가 되면 스타를 했지만 내 스타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고 나 또한 스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유한맵에서는 멀티를 해야하는데 타이밍 잡아 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단축키를 별로 못 익혀 마우스로만 사용하려니 한계에 부딪혔다. 게다가 유닛 컨트롤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인공지능을 신뢰하는 자유방임주의를 펼쳤으니 잘 될 리가 없다. 자신이 못하는 것을 재미나게 오래도록 하기란 힘든 것이 인지상정이라. 대학에 와서는 어쩌다가 팀플을 몇 번 했을 뿐 스타를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다른 사교 수단으로 위닝을 배웠고, 고스톱을 한 번 배워 보고 싶어서 스스로 세이 고스톱에 빠져보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는 PC방에서 스타를 한 것이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내 손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손에서는 멀어진 스타가 최근에 눈에서는 떠나지 않는다. 지난 3월 중랑구 묵동으로 이사온 집에 케이블 방송 몇 개가 나오는데 그 중에 온게임넷이 있다. 여름방학 끝날 무렵 시간 때우기용으로 몇 번 봤는데 캐스터와 해설자들의 구수한 입담과 프로게이머들의 기발한 전략과 재치 있는 컨트롤을 접하면서 재미를 느꼈다. 스타리그, 프로리그, 듀얼 토너먼트, 챌린지리그 등의 대회들이 쉴새 없이 이어지고 희비가 엇갈리는 프로게이머들의 모습도 흥미롭다.  


한 친구는 스타가 이제는 어른들의 바둑이나 장기처럼 부담 없이 즐기는 대중적 놀이가 되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화려한 그래픽과 매혹적인 스토리로 자극하는 게임들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의 위세가 이처럼 대단한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나의 스타 중계방송 애청이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날지 모르겠지만 무척 흥겨웠던 킬링타임으로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처음 스타를 배우려고 했던 대중성 확보를 위한 사교 수단으로서의 목적은 거의 실패한 셈이지만 쓸데없는 비용 지출이라서 아깝지는 않다. 가끔 아직 집에 남아 있는 스타 미션 게임을 치트키 쳐서 격파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SPORTS라고 불리는 스타가 우민화 정책의 일환인 3S(스포츠, 스크린, 섹스)의 그늘을 답습할지도 모른다. 지난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탱크를 위에서 진군 속도를 과시하던 종군 기자의 모습에서 고작 시즈 탱크를 타고 가는 테란의 병사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현실세계의 다양한 이슈들에 침묵하지 않고, 도피하지 않는다면 게임은 게임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예전에는 소설 읽기를 즐기던 내가 요즘에는 문학작품을 도통 손에 못 잡고 있다. 사진 찍히는 것을 피하던 내가 요즘은 사진광 소리를 듣는다. 온게임넷 애청자로서 틈만 나면 채널을 그 쪽에 고정시키는 나를 주위 친구들은 놀란 듯이 바라본다. 인생은 무상하고, 무상한 덕분에 사람은 늘 변한다. 그 재미에 이 무료한 삶이 그나마 살아 볼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세 가지 유형의 우정을 있다고 말했다. 첫째로 서로를 사귀는데서 비롯되는 즐거움에 바탕을 둔 쾌락을 위한 우정, 둘째로 교제의 유용성에서 비롯되는 우정, 셋째로 서로의 존경에서 비롯되는 우정인 덕성을 위한 우정이 그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세 번째 우정만이 참된 우정으로서 가장 가치 있다고 말하고, 어디선가는 좋은 우정을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원전을 확인해보지 않아서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느 책에서 언뜻 봤을 때는 앞의 해석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뒤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얼굴 보며 담소 나누는 것이 즐거운 사람과 사귈수록 이득이 있고, 배우는 점도 많아 유익한 사람과 서로가 존경하기 때문에 경애하며 만나는 사람을 두부 자르듯이 나눌 수 없는 것 같다. 결국 지인들과 사귈 때 이 세 가지 우정이 다 깃들어 있어야 만남마다 설레고 흥겨울 수 있을 것이다. 한바탕 술자리가 지나면 허무해지고 다음날 숙취가 가시자마자 전날 밤의 죽네 마네 한 이야기도 치기로 취급된다. 땀흘린 밤샘 작업이 끝나면 흩어지게 되고 다음날 새로운 동업자를 찾아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헤매야 한다. 상호간의 존경만 가득하면 무미건조할 따름이고 다음날 살 궁리를 하다 보면 알맹이 없는 한담은 잊혀지고 번드르르한 칭찬도 퇴색한다.


스타를 하며 우정을 키워나갔던 상당수 고등학교 친구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 세 가지 우정의 유형은 특히 어느 한 쪽이 더 강할 수는 있어도 어느 하나 빠진다면 관계는 지속되기 힘들다. 내키지 않았던 술자리에서 제법 진지한 이야기로 인생 고민과 세상 한탄을 나눌 수도 있고, 일 때문에 만난 사람에게서 의외의 매력을 느끼고 정신적인 교감을 나눌 수도 있다. 세상에 무조건 안 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스타에 영원히 관심 없을 줄 알았던 내가 스타 중계 방송에 푹 빠져 있듯이 세상만사 함부로 가름하고 제한해서는 안되겠다. 사람을 만날 때도 편견을 버리고 열린 자세로 대해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함부로 부정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 끝으로 더 이상 재미없는 놈으로 낙인찍히기 전에 나란 놈에게도 무언가 유머러스한 구석이 있음을, 나랑 더불어 즐길 거리가 있음을 개발하고 소개해야겠다. - [憂弱]


추신 - 요즘 프로토스 유저들이 죽을 쑤고 있는 것 같다. 엄연히 프로토스 유저인 나로서는 프로토스의 선전을 기원한다. 엄혹한 시절이 끝나고 찾아드는 서광은 아름다울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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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짱 퇴임 기념 인터뷰

잡록 2004. 12. 7. 01:15 |
3년 간의 학생회 일꾼 생활을 마치고 평민(?)으로 돌아온 익구와 인터뷰했다. 인터뷰 씩이나 해주는 곳이 있을리 없으니 주특기인 혼자 묻고 답하기로 진행했다. 그의 솔직한 심정 토로와 자화자찬을 감상해보자.^^ 스크롤의 압박이 좀 있으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지난 3년 간 고생 많으셨다. 시원섭섭하겠다.

- 시원섭섭하기보다는 그냥 시원할 뿐이다. 3년 간 학생회 일꾼으로써 해볼 수 있는 일, 겪어 볼만한 것들 다 해봐서 그런지 몰라도 더 이상의 미련이 없다.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시원한 기분만 압도할 뿐이다.^^


경영대 학생회장(이하 경짱)이 되기 전 학생회 생활을 정리한다면?

- 2002년 1월경 수시 합격생을 위한 오티에 참석했고, 그 때 35대 총학생회 홍보 시간이 있었다. 그 때 설문조사를 했을 때 학생회 일꾼 의사가 있다고 답했고 추후에 연락이 온 것이 인연이 되어 여기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입학하기도 전에 35대 총학생회 정책국원이 되었으니 지금 돌아보면 참 기막힌 노릇이다.

  총학생회 일꾼이었던 02학번은 나 이외에도 많았다. 하지만 36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있었던 새내기는 나 혼자였다. 나는 35대 총학생회 기획국 차장이라는 제법 그럴 듯한 말단 일꾼으로 새내기로서의 한해를 살았다. 비록 잡일꾼이었지만 총학생회 살림이 꾸려지는 과정들을 새내기치고는 제법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35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고대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라는 명칭에 걸맞게(?) 이미 거의 대부분의 단과대를 장악한 운동권 학생회들과는 맨날 소모적 신경전이 벌어졌다. 사소한 차이를 메우지 못하고 비생산적인 다툼이 나중에는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아마도 그 때의 경험 덕분에 내 인내력이 많이 신장되었을 것이다.^^ 막내 입장이었고 치열하게 투신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임기를 끝까지 채울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뭐든지 일단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 두지 않는 성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총학생회 일꾼 한해 동안 너무 지긋지긋하게 시달렸기 때문에 정말 딱 잊고 새롭게 대학생활을 꾸려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총학생회 사무국장을 하셨던 장정우 형께서 36대 경영대 학생회장 선거를 나가셨다. 더 이상 학생회 바닥에 기웃거리지 않기로 했었는데 학생회 조직이 취약한 경영대 사정을 잘 아는 터라 무슨 측은지심이 들었던지 결국 돕기로 했다. 36대 경영대 학생회 기획국장 일은 2003 새터 준비나 매 학기 사물함 배분이 좀 빡세서 그랬지 총학생회 일꾼 생활의 1/10의 힘만 들이고 한해를 보낸 것 같다.


37대 경짱 출마는 어떻게 결심한 것인가?

- 사실 내 꿈은 단과대 학생회 사무국장이었다.^^; 농담 삼아 내 궁극적 장래 희망이 국무총리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36대 경짱님께서는 내 바람과는 달리 내게 사무국장을 시켜주시기 않았다. 사실 초기에 이게 은근히 불만이라 학생회 일꾼 그만두려고 했었다. 그런데 일단 시작하면 쉽게 그만 못 두는 성격 탓에 결국 한 해 꼬박 다 채운 것이다. 경짱의 꿈보다는 경영대 사무국장 자리가 더 탐났고, 서울외고 6기 중국어과 동창회 건설이나 경영 E반 학생회 건설 등에 더 뜻이 있었지만 모두 다 지지부진했다. 그 와중에 고등학교 친구 중에 청원, 효석 두 친구가 학생회장 출마를 사실상 부추기기도 했다.^^;

  2학기 들어서 학생회 일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경영대 학생회 일이 크게 많은 것은 아니라서 부담 가지지 않고 한해 더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당시 학생회장으로 나올 만한 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학생회 활동이 취약한 경영대라고 해도 학생회 건설마저 무산되어서는 안되겠다는 학생회주의자(?)의 집착이 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단독선거도 이미 예상한 것이어서 부담 없이 출마하게 됐다. 애초에 작은 학생회를 공언하고, 현상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기 때문에 욕심부릴 것도 없었다. 어쩌다가 팔자에도 없는 직선대표를 하게 된 것 같다. 학생회에 대한 무관심이 어쩌다가 나 같이 무능한 놈이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어줬지 뭔가.^^;


경짱으로서 지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가장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

- 아무래도 2004 새터가 기억난다. 아쉬웠던 점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고 그 때 고생했던 많은 새터준비위원들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물론 사발식 시주 네 번 째 반에서 정신을 잃어서 다섯 개반 돌지 못했던 대형 참사도 빼놓을 수는 없다.^^; 그간 멸실된 경영대 학생회칙도 제정했으며, 미약하기는 했지만 경영대 단과대운영위원회나 경영대 학생대표자회의도 복원하는 등의 안살림을 챙긴 것도 잘했다고 자평한다. 회칙개정을 위한 임시 전체학생대표자회의 때 투표율 50%가 넘어야 개표할 수 있다는 규정에 대한 삭제 발의도 당연시 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다는 점에서 무척 뜻깊은 행위였다. 또한 각종 행사 때마다 다섯 개 반 뒤풀이 번갈아 가며 들렀는데 이 또한 소중한 추억이다. 슬픈 것은 잠깐씩 짬을 내어 들른 것이다 보니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고 막상 임기 끝나고 나니 좀 더 친해져 둘 걸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학생회 일하면서 사람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허무해서 어쩌겠는가?^^ 여하간 나를 도와줬던 분들, 나와 놀아줬던 분들과 앞으로도 좋은 관계 맺어간다면 경짱은 과거의 추억이기보다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학생회 회의나 사업들을 잘 알리지 못한 것이다. “열려있고 쉽고 낮은 경영대 학생회”라는 모토를 사용했는데 그에 부응하지 못하고 닫혀있고 어렵고 높은 학생회가 되지는 않았나 반성이 된다. 회의 진행 과정이나 사업계획 같은 것을 좀 더 잘 알려서 관심을 유발했어야 했는데 막상 회의 소집해서 진행하는 것만도 벅차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실 단과대 학생회 진행 사항을 일일이 기록할 영양가는 그다지 없는 편이다. 중앙운영위원회 같은 큰 회의도 회의록 작성이 제대로 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개인적인 욕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기를 좀 더 일찍 뽑아 활용했더라면 하는 후회는 여전히 남는다.


경영대 학생회 운영은 어떤 식으로 했나?

- 보다시피 나란 녀석이 풍채 당당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댈 것은 오로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처음부터 이야기 나누다 보니 회의가 길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언젠가는 한 번 “어쩜 그렇게 쉬지 않고 계속 말할 수가 있죠?”라는 구박도 들었다.^^; 반일꾼들 상당수는 함께 토론해서 무언가를 정하기보다는 내가 딱딱 정해서 공지해주는 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어지간한 사안들은 토론을 유도해서 좀 더 숙고해서 정하려는 내 방식이 어리버리, 우유부단하다고 질타 받기도 했다. 또 일이 지지부진할 때도 마냥 싱글벙글하다 보니 “화를 내본 적이 있어요?”는 진지한(?) 질문까지 받기도 했다.

  내가 비록 모질지 못해서 조금 강단이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한해 동안 숱한 회의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지켜 가면서 실무적인 것을 비교적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자부한다. 앞으로도 어떤 조직의 일꾼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는 통솔력 있는 사람도 아니고, 번뜩이는 재주를 지닌 사람도 아니지만 소심함에서 우러나오는 꼼꼼함과 성실함으로, 어수룩함에서 묻어 나오는 진솔함과 편안함으로 꾸려나갈 것이다.

  나는 도덕경 제 8장의 첫 구절인 '上善若水(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의 정신으로 학생회를 꾸려나가기로 약속했다. 자기를 비우고, 조용하고 성실하게, 오직 섬기는 자세로 시의 적절하게 움직이는 물, 어느 누구와도 다투는 일 없이 자기를 끝까지 낮추는 물의 자세를 얼마나 실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이 더러운 것을 씻어 준다는 것은 남의 허물을 대신 떠맡는다는 뜻이다. 부디 지난 한해 경영대 학생회의 모든 실수와 실책은 직간접적으로 다 내 책임이다.


상선약수는 익숙한 구호다.

- 사실 익구 전 생애를 통 털어 유지될 삶의 양식이라고나 할까. 뭐 지적하셨다시피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 때도 상선약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당시 중국어과 후보 단일화만 없었다면 상선약수를 좀 더 구체화되어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쉽다. 이제사 하는 말이지만 상선약수 하나만 연설에 제대로 반영했다면 3등은 가볍게 했을 것이다(참고로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 당시 1위 500여표, 2위 300여표, 3위 120여표, 4위 110여표, 5위 딱 100표, 6위 60여표 득표했다. 후보 단일화를 통해 연설도 대충하는 등 선거 관련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던 익구는 100표 득표로 5등 했다). 나는 도덕경에 나오는 물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애쓰거나 남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집착하기보다는 그저 밑에서 묵묵히 섬기는 자세를 갖추고 싶다. 상선약수는 앞으로도 내 단골 구호가 될 것이다.


학생회 집행부 이야기 좀 해달라.

- 우리 경영대는 학생회 인력풀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초기부터 고민한 것이 일꾼을 모집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퇴임 즈음해서는 10명의 집행부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일이 있을 때만 모여서 일을 돕고는 흩어져버리다 보니까 농담 삼아 007 첩보 활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내 임기 시작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내 곁을 지켜준 사무국장 재희, 내 꾀임(?)에 넘어가 입대도 한참 늦추고 나를 수행하느라 고생 많았던 기획국장 현수, 나랑 잘 놀아주는 다정다감한 교육국장 미선, 성실한 문화복지국장 회선, 글씨 잘 쓰는 홍보국장 윤원, 궂은 일도 마다치 않는 정책국장 호영, 든든한 인사관리국장 화영, 재치만점의 대외교류국장 철운, 촌철살인의 서기 겸 수석보좌관 은기, 꼼꼼한 편집국장 효진이까지 모두들 참 고맙다. 다들 마음에 쏙 드는 후배들이다. 좀 더 잘해주고 싶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리의 임기는 끝났지만 우리의 교류는 이제 시작이다.


비운동권을 자처했는데 학생 운동은 어떻게 생각하나?

- 열심히 운동권을 비판하고 있지만, 부당한 매도에는 방어를 해주는 편이다. 오늘날의 학생 운동이 상당부분 그들 스스로의 잘못과 실책으로 쇠락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우는 학생들이며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비록 나와는 정치적 라이벌이지만 그네들이 불신의 눈초리를 받는 것은 가슴 아프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운동을 하는 학우들의 길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한국사회가 학생운동에게 진 빚은 여전히 지대하다.

  학생회 일꾼들의 땀과 눈물을 너무 무겁게 여길 필요도 없지만 너무 가볍게 여기지도 말아줬으면 한다. 살맛 나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일꾼들에게 정파와 이해를 떠나 따스한 관심 부탁한다. 누구나 결점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 결점을 채워나가려는 노력을 보시고 애정 어린 비판을 아끼지 말아주시기 바란다. 건실한 경쟁 속에서 참된 진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학생회 일꾼들이 명심할 것은 이제 학생회 조직으로 대동단결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얼마 전 전직 학생회장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앞으로 학우들이 이렇게 학생회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없어질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학부 학생회도 대학원 학생회 정도의 위상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38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연장투표가 진행되자 전례 없이 많은 학우들께서 반발하셨다. 이제 학우들은 아무리 선의가 충만한 것이라고 해도 정치적 동원이라는 생각이 들면 결연히 반대하실 것이다. 학우들의 의사와 괴리되어 대리인 비용을 높이는 것을 이제 용납하지 않는 추세이다. 학생회 일꾼들은 대의 민주주의제 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리인 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참 힘든 과제다.


경짱을 하면서 받았던 오해가 있다면?

- 많은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있느냐 묻고 앞으로 그 쪽 방면에서 일할 것이냐고 물었다. 사실 이건 오해가 아니라 그냥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도 많이 하고 관심도 많은 편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정치가 잘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눈길을 보낼 것이다. 실제로 내가 지지하는 대통령과 정치 세력에게 도움을 주고도 싶다. 자유주의를 참칭하는 사이비 자유주의자들이 아닌 진짜 자유주의자가 이 땅의 개혁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정치란 국회의사당과 청와대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성격의 조직의 의사결정 속에서 백가쟁명 백화제방하는 생활정치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하고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에 더 관심이 있다.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지만 국가보안법은 얼른 폐지해야 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이 대목에서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으신 점이 있다면 나는 정치 분야만 관심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명색이 경영학도인데 그 쪽 분야도 관심이 지대하며, 역사, 철학 같은 인문학적 소양을 쌓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나는 배우는 학생이고 이것저것 많이 익혀서 써먹고 싶다.

  아참 그리고 항간에 내가 학점 4.0이 넘는다는 루머가 떠돌고 있어서 해명해야겠다. 지난 5학기 평점평균은 3.8이니 오해들 마시라. 물론 나는 학생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학업이고, 학업에 소홀해가면서까지 다른 일에 투신하는 것을 꺼리는 범생주의자다. 남은 학기들 학업에 열중해 졸업할 때는 4.0에 근접한 학점을 얻고 싶다. 재수강들 하면서 루머가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 35대 총학생회, 36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36대 경영대 학생회, 37대 경영대 학생회, 38대 경영대 선거관리위원회로 이어진 지난 3년 간의 학생회 일꾼 생활에 회한도 많이 남지만 이제 깨끗이 정리했다. 이제 다시 새로운 인생의 보람거리를 찾아야 한다. 최근에 평소 해보고 싶었던 역사기행을 이래저래 다녔다. 서울시내 5대 궁궐을 비롯한 문화 유적들을 제법 둘러봤다. 그 다음에는 소개팅 등을 통해 연애나 한 번 해볼까도 생각 중인데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지지하는 대통령과 정당을 위한 활동도 해보고 싶은데 아마 최소한에서 그칠 것이다. 또한 이 해방감을 채우는 데는 역시 책이 제격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생회 생활을 계기로 맺었던 소중한 인연들을 꾸준히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할 것이다. 내년 2/4 분기에 공익근무를 할 계획이라 당분간 휴학을 하며 어떤 공부를 할지 등도 좀 더 생각해야겠다. 여하간 그간 모자란 사람의 빈곳을 채우느라 고생했던 분들에게 참 고마웠다며 충심 어린 감사 인사를 나누고, 정을 담은 술 한잔을 건네고 싶다.


끝으로 한 마디 한다면?

- 익구는 앞으로 더 열심히 살 것이다. 지인 여러분들과의 관계도 더욱 돈독하게 이어나갈 것이다. 나는 빚지고는 못산다. 내게 아름다운 마음을 보여주신 분들, 모자란 녀석에게 투자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반드시 보답할 것이다. 에머슨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말했다. 익구란 녀석과 함께 했던 시간이 살림살이에 코딱지만큼이라도 보탬이 되고, 쥐꼬리만큼이라도 유쾌해질 수 있도록 치열하게 정진할 것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사귀고 싶은, 곁에 두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픈 녀석이 될 생각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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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면 가볍다

잡록 2004. 11. 3. 04:34 |
37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학생회장으로서의 생활도 이제 끝나간다. 38대 경영대 학생회장 선거가 끝나면 올리려고 했던 퇴임사를 완성해놓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떠나는 마당에 무슨 말이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고는 썼던 글들을 싹둑싹둑 잘라냈다. 버혀진 글 조각만큼 내 헛된 집착도 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비단 학생회 일이 아니라 다소 손해본다는 느낌이 드는 일을 할 때면 늘상 도덕경 2장의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란 구절을 떠올린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 즉, 공을 쌓아도 그 공을 주장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공을 쌓았다면 마땅히 보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상도덕의 근간이다. 이타주의적 희생정신을 가질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미 이래저래 충분한 보상을 받았는데도 마지막까지 단물을 빨아내려는 것은 추한 욕심에 불과하다.


내 임기가 시작되면서 거의 한해 내내 학사지원부와 씨름했던 사물함 교체와 자치공간 비품 확충은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해결이 될 모양이다. 문제는 내 임기가 다 끝나고 11월 말이나 되어야 하나둘 실현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한해 동안 얼굴 붉혀가며 이야기해서 겨우 실현한 것들인데 다음 대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 못내 섭섭했다. 어떻게든 내 임기 만료 전에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적잖이 들었다. 그 때 나는 공성이불거를 떠올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앞으로 내 임기 중에 이룬 것들을 마치 나만의 공인 것처럼 자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여러 가지 실수와 부족했던 점에 대해서도 구구절절이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나란 녀석이 금세 잊혀지는 것에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말았으면 한다. 선배님, 동기들, 후배님들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괜히 침 흘리지 말고, 하나둘 나란 녀석을 잊어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다.


37대 고려대학교 중앙운영위원회가 해소되고, 38대 고려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꾸려질 때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내심 중앙선거관리위원이라는 직함으로 한달 간 더 연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금 맡다가 신임 학생회장에게 물려주는 식으로 해서 중선관위원이라는 그럴싸한 이력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일개 잡일꾼이기는 했어도 36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열심히 일했었고, 2년 간 총학생회 선거 개표를 해봤으니 이제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중선관위원이 되어 선거본부들 간의 논쟁을 가늠하고, 징계 여부를 만지작거리는 행위의 유혹은 그렇게 수그러들었다.


며칠 뒤면 35대 총학생회, 36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36대 경영대 학생회, 37대 경영대 학생회, 38대 경영대 선거관리위원회로 이어진 지난 3년 간의 학생회 일꾼 생활을 접게 된다. 가슴 사무치게 느낀 것이 있다면 버리면 가볍다는 깨달음이다. 이제 가벼워서 자유로워진 모습으로, 좀 더 비워낸 모습으로 지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자질구레한 감상에도 불구하고 잊혀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학우들의 기대와 격려를 잠시잠깐 받은 것에 불과한데도 잊혀짐이 너무 아쉽다. 덧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리라. 서서히 지워지는 나를 발견하며 고독 속에서 내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를 가져야겠다.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것으로 실현되는 의회 민주주의 이어달리기 선수로서의 내 역할이 끝났음을 가슴 아프게 긍정할 것이다.


요즘 들어 이형기의 [낙화] 1연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주문에도 불구하고 가을밤을 제법 뒤척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 번의 뒤척임이면 충분하다. 축 늘어지는 것은 꼴사나운 짓이다. 한층 더 밝고 맑은 모습으로 그간 모자란 사람의 빈곳을 채우느라 고생했던 분들에게 참 고마웠다며 충심 어린 감사 인사를 나누고, 정을 담은 술 한잔을 건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인생의 보람거리를 찾아 힘찬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대학 새내기 시절의 첫마음은 아직도 뜨겁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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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하고 싶다면

잡록 2004. 9. 22. 03:52 |
시름시름 앓던 컴퓨터가 그에 하드디스크가 통째로 날아갈 위험에 처했다. 그간 틈틈이 작업했던 수많은 글조각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위기라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컴퓨터가 간간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부리나케 백업들을 해서 주요한 문서들을 천만다행으로 보전할 수 있었다.


A4 수 백장 분량의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글과 수 십장 분량의 내가 적어 둔 숱한 글조각들을 가까스로 살리면서 “실존(實存)”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실존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원 국어시간이었다. 당시에 어떤 지문에서 실존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해주셨다.


“지금 뒤를 돌아보지 말고 생각해봐. 이 교실 뒤의 창문에 붙여진 글씨가 무슨 색깔이고, 크기는 얼마나 되지? 늘 자주 보는 것이지만 무심코 지나가 버린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실존한다고 볼 수 없지.”


대강 이런 식이었다. 실존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쓰이므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본질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편할 것 같다. 창문에 붙여진 글씨의 색깔과 크기는 본질을 형성한다면, 그 창문에 글씨가 붙여져 있는지, 검은 색깔인지, 크기는 어떤지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실존인 셈이다.


문득 컴퓨터가 말썽을 일으켜서 그간의 자료들이 다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했던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 수많은 텍스트 중에서 내게 실존하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말이다. 점점 많은 양의 정보만을 수집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지나친 경계(hyper-vigilance)’에 빠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게 실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세세한 부분까지는 기억할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불현듯 떠오르는 상념들은 일단 붙잡아 두고 볼 일이지, 실존할 가능성을 따져가며 선별하는 것은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 할 짓은 아니다. 내게 실존하는 부분은 쥐꼬리만할지 몰라도 그 실존의 영역을 추출해내기 위해서는 바닷물과 같은 너른 모집단이 있어야 한다. 우물에서 건진 쥐꼬리보다는 바닷물에서 건진 쥐꼬리가 더 통통하고 빛깔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아직은 좀 더 텍스트의 바다를 항해해도 무방할 듯 하다.


실존의 고독은 사람 사이에서 더 두렵게 다가온다. 스쳐 가는 많은 인연 중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나란 녀석이 실존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남을 시험하고 싶은 유혹일랑 뿌리치고 그저 딛고 있는 자리에서 진정함과 성실함으로 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실존은 대개 양(量)이라기보다는 질(質)의 문제이기 때문에 너무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실존하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고 싶다면 절차탁마하며 내 자신을 가꾸는 느긋함을 가져야한다.


살아가면서 내 안에 실존하고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익숙한 것에 식상함이라는 멍에를 씌우기보다는 감사의 월계관을 선사해야 한다. 익숙함의 축복, 실존한다는 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대충 살지 못한다. 좀 더 꼭꼭 씹어서 충분히 소화된 것만을 나누려는 치열한 영혼들이니까 말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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