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7일부터 10일까지 3박 4일 간의 일정으로 가평 꽃동네에 다녀왔다.
노체 리안드리 자애병원이라는 곳에서 일을 거들게 되었는데
2층에 거동을 못하시는 중환자 16분을 모셔둔 호스피스 병동에 배정 받았다.
(그 곳에서는 ‘환자’라는 말 대신 ‘가족’이라는 정겨운 말을 썼다)
앙상한 가족들의 이따금 들리는 마른기침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리는 곳이었다.
식사 수발, 설거지와 청소, 세탁물 나르기, 똥 기저귀 빨래, 세안하기, 체위 변경...
이것저것 하나하나 요령을 배워가며 서투른 손을 놀렸다.
대인 접촉을 해야하는 가족들 식사 수발과 세안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가족이 거의 없어서 말벗이 되어 드리지 못했지만
아마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가족 앞에서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낯가림하는 무심한 성격이 이럴 때 더욱 드러나 버리는 것이 부끄럽다.


우연찮게 Night라고 지칭되는 야근도 해보게 되었는데
아침 식사 전까지 체위변경을 7번 하는 것이었다.
체위변경을 하는 이유는 24시간 누워지내는 가족이 병상에 닿는 곳에
피부가 짓물러서 생기는 부스럼인 욕창(褥瘡)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낮에는 1시간에 한 번, 밤에는 2시간에 한 번
몸을 좌우나 가운데로 돌아 뉘여 드리는 것을 거르지 않는다.
힘들고 지칠 때는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라는...
중 3 도덕선생님의 말씀이 체위변경 끝나고 쉬는 중에 떠올랐다.
이 흔하디 흔한 말이 생각나버린 것은...
도덕선생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이 더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들의 앙상함 앞에서 나는 내 안락함과 내가 속한 계급을 감사해야 했다.


조금 더우면 땀이 나고 발이 좀 아프면 통증이 찾아드는 것이 어김이 없는
몸은 참 정직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결국 몸을 비루하다가 욕하지만, 결국 몸이 ‘시작’임을 간과하고 있었다.
작은 입병만 생겨도 세상만사가 괴로운데
하물며 침상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족들의 고통 앞에서
몸의 비루함을 논하던 매서운 눈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야윈 가슴을 채우겠다며 잡념과 잡글에 파묻히는 호들갑을 떨 때
가족들은 당장에 야윈 몸을 걱정해야 했다. 이 간극이란...


‘형제님’이라고 살포시 불러주시던 어느 수녀님의 따스함이 여간 식지 않는다.
16인의 가족들의 건강과 일하시는 수녀님을 비롯한 형제, 자매님들 모두 평안하시길...
숨막히던 성찰의 공간에서 도망치듯 일상으로 복귀한 나는...
이 때의 기억들일랑 적당히 잊어버리고, 내 불평을 주절거리기 시작하겠지.
조금 덜 잊어버리고, 조금 덜 주절거린다면 그걸로 감지덕지하면서...  6(^.^)9
Posted by 익구
:

행복을 향한 릴레이

잡록 2003. 8. 13. 09:11 |
[행복을 향한 릴레이] - 서울외국어고등학교 교지 날애 기고문

  나는 잦은 우수(憂愁)의 유혹을 느낀다. 그럴 때면 내 불행을 지적인 방황으로 억지로 승화시켜 자기 합리화에 급급했다. 하지만 진정 지혜로운 이라면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고 자기 나름의 행복의 철학을 가지려 할 것이다. 행복의 물음은 절실한 실존의 물음이다. 젊은 날의 키에르케고르는 젊은 날 자신이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 있는 것을 찾지 못하여 한탄했다고 한다. 나는 조금만 탄식하고 행복이라는 가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인가?'
행복을 정의하는 데 어려운 점은 우리 모두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너무 자명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정의조차 필요치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행복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각 개인은 타인과 다른(어느 정도 겹치겠지만) 고유의 행복을 향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행복에 관해 보편적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러한 논리는 다분히 유명론(唯名論)적이다. 유명론이란 행복이란 일반적인 이름의 단어가 존재하지만, 단순히 행복이 단 하나의 현실이나 인간 정신 안에서 일반적인 생각으로 정해 있다는 점은 부정한다. 이러한 논리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결함은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행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행복이 있을지라도 그 안에는 공통된 어떤 것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라면 행복의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을 프랑스어로 '좋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bonheur'이라고 한다. 행복은 좋은 것이고 인간은 좋은 것을 원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행복이란 수단적 선이 아닌 본래적 선이다. 본래적 가치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행복해져야 한다는 물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행복해져야 하는 이유를 '가족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위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이라면 그 '∼위하여' 행복을 유보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여긴다. 그런 이들이 이러한 것을 타인에게도 강요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행복의 추구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행복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다음 대화를 들어보자.

지금은, 아침 7시 한 서울외고 학생이 종종 걸음으로 버스를 타러 가고 있다.
"당신은 왜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타러 가십니까?"
"학교에 공부하러 가기 위해서요."
"그럼 당신은 왜 공부를 하시나요?"
"원하는 대학이나 학과에 가기 위해서요."
"당신은 왜 대학을 가려합니까? 그 자체가 목적입니까?"
"아니요. 대학을 졸업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요."
"그럼 왜 일을 하려합니까? 일한다는 것이 목적입니까?"
"아니요. 일이 즐거워서 하기도 하겠지만 우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돈을 벌려 하십니까? 돈을 수집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요. 돈이 있으면 필요한 물건도 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으니까요."
"왜 필요한 물건도 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합니까?"
"그런 것이 안되면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이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겁니까?"
"예. 그렇다면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다소간의 비약도 많지만 이 대화에서 우리는 행복은 분명 인생의 목적이고 이를 위한 모든 인간 활동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적으로, 행복이란 유일의 목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칸트는 행복을 '가능한 만족의 총체'라고 말했다. 즉 현실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거나 맛보기 원하는 모든 만족을 얻은 사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정의에 입각해서 잘 생각해보면 행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있는가? 인간은 거의 필연적으로 채울 수 있는 정도보다 항상 더 많은 욕망을 가진다. 오죽하면 미국의 경제학자 스테일리는 다음과 같은 행복의 방정식을 만들었겠는가.


  행복 = 소유 / 욕망


  그렇다면 인간은 정녕코 행복을 알 수 없고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인가? 욕망이 생기자마자 모든 고통과 갈등을 제거하고 항상 새로운 쾌락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헛된 환상에 지나지는 않는가? 극적인 행복이나 환희의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무미 건조한 나날들인가? 행복이 하루 걸러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하는가? 아무런 생각 없이 행복을 좇기에는 던져볼 물음들이 너무 많다. 답은 없고 에피쿠로스의 가르침만 귓가에 울린다. "까르페디엠 (Carpe diem)" '열매를 따듯이 하루하루를 사시오.'


  나는 인간은 각자의 행복만을 추구할 때 도덕적이라는 윤리학적 이기주의에 호감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이기주의를 개인주의로 바꿨으면 하지만...) 개인 각자는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존재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각 개인의 행복 추구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한, 윤리학적 이기주의는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건 너무나 이상적인 바람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불행은 자신의 잘못만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았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개인들은 각자의 행복을 모두 잘 누리지 못한다. 또한 개인들의 행복 추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면 어찌할 것인가? 윤리학적 이기주의는 여기서 침묵을 지킨다.


  아는 바도 없지만 행복을 논하기 위해 광대한 칸트의 철학 중에서 그가 말한 인식이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자신의 인식이론을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했다. 종래에는 대상에 따라 인식한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선천적 형식에 따라 대상이 들어와 인식된다는 것은 마치 천문학상에서 천동설이 지동설로 뒤집힌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의 인식론은 주어진 명백한 대상을 우리가 인식해 가는 것이었다면 칸트의 인식론은 그냥 주어진 대상을 우리가 여러 가지 범주를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인식해 낸다는 차이가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여기 오이 한 접시가 가득 있다고 하자. 나같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잘 씻어서 아삭 깨물어 먹고 싶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다면 오이마사지를 떠올릴 테고, 달팽이를 키워 본 사람은 오이를 썰어서 달팽이 먹이로 주고 싶을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오이를 두고서 사람마다 다른 인식의 형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끼는 것임에도 말만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면 얼마 전에 불현듯 "개개인의 행복이 최대한 보장되고 개인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아마 윤리학적 이기주의에 미련이 남았는지... 물음은 꼬리를 이었고 결국에는 인간은 행복하게 살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행복의 방법론들을 모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근 한달 간 행복주의니, 해피즘이니 하며 고민하던 나였는데 어느 날 한 스님의 신문사설을 읽고 경악(?)했다. "반드시 행복해야 돼."라는 생각 속에서 행복은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그 글을 읽고 나의 지난 한 달간의 논의가 얼마나 허망했는가 돌아보니 허탈 그 자체였다. 나만의 행복은 무엇일까 하며 갖은 궁리를 하면서 행복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서는 스스로 행복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해냈다며 자화자찬(?) 해버렸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것은 진리지만 때로는 얻기 위해 잃은 건지, 잃기 위해 얻은 건지 알 수 없기도 하다. 그때마다 잃은 것에 가슴 아파하는 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잃은 것을, 모자란 것을 채워나가면 거기서 행복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얻은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설령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얻은 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행복을 찾고자, 누리고자 헤매이지 않아도 되지 않을는지...


  사실 행복에 대해 말하자니 가장 먼저 라이프니츠가 생각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이 세상을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창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넘쳐나는 악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반론한다. 그러한 악이 있기에 세상은 선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악이 없다면 선한 것은 결코 선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위해 있는 것이며,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비록 부분적인 악이 있다 할지라도 전체 속에서는 선한 것이며 무한한 신의 눈에는 결코 악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결국 악함이나 추함이나 불완전함 모두 우주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견해를 '철학적 낙천주의'라고 한다. 나는 '낙천주의자'라는 별명을 가진 라이프니츠는 못될 모양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행복에 목마른 이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이할까. 그런 그도 말년에 실각하여 분루를 삼키며 고독한 나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화려한 지위에 있었던 라이프니츠도 정치적 몰락과 함께 그의 장례는 아무런 격식도 없이 초라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감히 이런 그에게 조소나 던질 수 있겠는가? 그의 오른쪽 다리의 혈액순환에 이상이 생긴 이유가 아마도 며칠이고 의자에서 떠나지 않을 때도 있을 만큼 공부를 계속한데 있지 않을까라고 전기 작가가 말한 그의 삶을 보며 나는 그의 사상을 감히 억지 논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판하기는 쉬워도 주장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행복에 대한 많은 탐구를 하지는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나의 행복론을 정리해본다.


  행복이란 '행복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서 말한 것처럼 만족을 기반으로 하며, 누군가가 정하는 것이 아닌 내가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내면이 풍요로운 이에게 싹트기 쉽고, 사소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를 찾아간다. 행복이란 목적의 달성보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 노력하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혹자는 무척 실망할 것이다. 주절주절 늘어놓고 고작 이런 것 말하려 한 것이냐고. 시시콜콜한 책에서도 나올법한 이야기라고. 좀 더 멋있고 그럴싸한 말은 없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진리란 본래 지극히 단순하고 담박한 것. 속인들의 수많은 덧붙임은 부질없기만 하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단순하다기보다 빈약한 것이지만) 이런 뻔한 이야기를 참 빙빙 둘러서 말한 건가? 그래도 뭐... 어차피 행복이란 우리 삶을 영원한 화두일테니...


  "행복에는 날개가 있다. 붙들어 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고 실러는 말했다. 흥진비래(興盡悲來)인 것이다. 삶의 모든 일들은 무상(無常)하기만 하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행복할 수 있을 수 있지 않는가! 이 '무상의 역설'을 우리는 달게(?) 받아들이자.


  진리의 여신 아테네는 제우스의 머리 위에서 완전 무장한 채 튀어나왔다고 한다.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거짓과 싸우는 것이다. 진리는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투쟁해서 얻어내는 것이다. 나의 유치한 행복 이야기도 진리와의 싸움에 좋은 무기가 되었으면 한다. 교육 현실이 인문학적 사유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복의 철학, 자신의 인생관은 결국 스스로의 몫이기에.


  달라이라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정한 자비심은 물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 아직도 멀은 나이다.
          

[행복]  - 헤르만 헤세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네 것일지라도

잃어버린 것을 애석해 하고,
목표를 가지고 초조해 하는 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너는 모른다.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목표와 욕망도 잊어버리고
행복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사건의 물결은 네 마음에 닿지 않고
너의 영혼은 비로소 쉬게 된다.



  실로 그랬다. 행복이라는 주제로 생각하고 행복의 의미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행복의 결핍을 증명하고 있었다. 부질없이 '행복'이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 위해 또 샘물을 길러낸다. 6(^.^)9
Posted by 익구
:

강준만을 논하다

잡록 2003. 8. 1. 03:32 |
(강준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해보라는 친구의 질문에 졸린 눈 부비며 주절거렸던 글... 큰 인물을 논하기에는 너무 모자르다. 조속한 업데이트 요망이다.^^;)

하도 컴 앞에서 노닥거리다가 이제 좀 들어가 쉬려는 찰나... 강준만 교수에 대해 물어오는 너의 글을 발견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자판을 두들길 수밖에 없었다.^^


글쎄... 너가 말했듯이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 안그래도 편파적인 인간인 내가 바라보는 강준만 교수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일단 강준만 교수하면 [인물과 사상]이라는 1인 잡지로 유명하신 분이지. [인물과 사상]을 창간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네...


“우리는 기록과 평가의 문화에 인색하다. 특히 인물의 경유에 그러하다.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공익을 추구한 사람도 위선과 기만과 변절을 범한 사람의 과거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그래선 안 된다. 보상과 문책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공익을 생각하고 기회주의적 처신을 두렵게 여긴다.”- 강준만, [인물과 사상] 1권 표지안쪽


보상과 문책에 철저해져야 한다는 강준만의 문제 제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겠지... [인물과 사상]의 문제제기 중에서 소위 말하는 대박이 터진 것은 아무래도 ‘안티조선’일 듯... 한국사회가 침묵하던 언론의 문제를 가장 앞장서서 제기하며 불관용이 주특기인 신문인 조선일보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는 아마도 우리 언론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 아닐까 생각해.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나에게서는 찾기 힘든 화끈한 독설이 시원하기도 하거니와...(나란 놈은 늘 치졸한 자기검열로 말미암아 할 말 가려하기 일쑤이니깐...) 무엇보다도 중립성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실명 비판’으로 우리 사회 지도층의 봐주기 풍토를 비판하며, 토론의 마당을 펼치려고 노력한다는 점일세. 그의 말을 좀 들어보자면...


“튀는 두더지는 방망이로 찍어누르고 모난 돌은 정으로 때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둥글게 둥글게, 그게 인간의 조건이다. 집단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홀로 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자율적 판단능력을 발휘하려 하기보다는 연고집단에 적극 참여하거나 ‘대세’라고 판단되는 흐름에 무조건 동참하는 데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다”


아마 강준만도 어지간히 튀는 인간인 건 사실인 것 같다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웃사이더와 비주류, 약자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비판을 하는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되고...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분들도 많겠지만...) 집단주의를 혐오하고 학연, 지연 같은 것들의 침묵의 카르텔을 부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고. 강준만 같은 개성적 인간이 전체주의 문화에서 살기는 이래저래 불편하겠지...^^


마당발 정신, 둥글게 둥글게 주의, 화기애애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준만의 공격을 보면서 이 분의 탁월한 의제설정 능력에 감복한 점이 많지. 초심을 잃지 않고 매서운 비판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의 그의 한계점을 지적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존재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역설하지 않을 수 없구나.


“독립은 고립이 아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가치를 지향한다. 그래서 독립된 사람들끼리의 연대는 의외로 무서운 것이다. 서로 술 한 번 같이 마신 적 없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전화 한 통 한 적 없어도 같은 뜻을 나누고 힘을 모을 수 있다. 그래서 독립은 고독도 아니다. 고독하다면 그건 책임의 고독이다. 우리는 책임을 위해선 각자 좀 더 고독해져야 한다.”- 강준만, [인물과 사상] 9권 - 12쪽


독립된 사람들끼리의 연대... 익구를 흔들었던 개념이로세...^^ 노사모가 추구한 ‘각성된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이 연대의 개념은 익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지. 하여간 강준만 교수가 던진 화두 중에서 익구가 수입한 것이 꽤 많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분의 글들이 익구가 ‘정치적 인간’으로 살게 된 것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지.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고... 나머지는 너가 강준만 교수의 글을 읽어가면서 느껴보시라.


끝으로 강준만 교수의 팔뚝이 더 굵어지고, 띠꺼운 생각들을 더 많이 쏟아내시기를 바란다. 6(^.^)9


추신 - 정혜신 선생이 쓰고 개마고원에서 펴 낸 [남자 VS 남자]라는 책을 읽어보시길... 강준만 교수에 대한 분석도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인간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재미난 책이니까.
Posted by 익구
:

2003년 2월 어느 날에 자유기업원 주최로 열린 ‘자유주의 정책 제안’ 세미나를 다녀오고 나서 쓴 글이다. 지금 보니 죄다 유시민 선생의 글조각들을 정리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최초의 세미나 후기라서 염치 무릅쓰고 올려본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제는 기업이 정부보다 우선하는 시대라고 외치고 있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때를 아직 벗지 못한 시장만능주의자들과의 대립각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네들과 토론하기 위해서라도 경제에 대해 배우고 느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유주의 정책 제안 세미나 후기]

  지난 세미나는 여러 주제가 짤막짤막하게 이어졌지만 나름대로 유익한 내용들이었습니다. 대체적인 논조들이 국가의 권력을 낮추자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말씀들이 많았지만.... ‘시장은 선이요, 국가는 악’이라는 식의 논리가 대체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그런 쪽으로 많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시장의 효율성을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국가의 극소화를 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위적 질서’인 국가가 그런 것처럼 ‘자생적 질서’인 시장 역시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죠.


  결국 시장과 국가는 서로 대립하면서 의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의 실패니 어쩌니 하면서 규제를 만들어 권력의 극대화를 꾀하는 것을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충분히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시장에 맡기면 될 것이라면서 국가의 모든 시도를 비난하는 ‘광신적 시장론자’들은 사절입니다.^^; 물론 있는 제도도 잘 운영하지도 못하면서 이것저것 만드는 폐단도 분명 존재하겠지요. 그러나 있는 것을 잘 운영하는 것과 더불어 충분히 행해질 수 있는 새로운 시도들을 너무 악의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에 재벌 개혁에 대한 논의가 참 분분한 것으로 아는데...  편법상속과 부당내부거래 근절, 책임경영과 무능총수 퇴진, 소액주주권강화 등의 개혁정책이 실질적으로 집행한다면 기존의 재벌체제가 그대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환영할 일이 아닌가 생각도 됩니다. 여하간 제 개인적인 소견은 우리나라의 기업이 국민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맨날 국가권력만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문제점들을 성찰하고 고쳐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국민들이 언제까지 “재벌놈들은 죄다 악한 것들이야”라고 말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모든 종류의 권력 집중에 반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권력도 경계해야겠지만 재벌 같은 민간 경제권력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분 들 중에서는 경제에 치우친 자유주의자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경제적 자유는 그렇게 열심히 옹호하면서도... 다른 분야의 자유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해보이는 모습들을 접할 때 참 난감합니다. 하긴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양쪽에서 욕먹기가 십상이겠죠. 어느 한 편도 안 드는 박쥐같은 녀석 같아서 오히려 더 얄미움을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얕은 지식으로 주절거려 봤습니다. 인식의 박약함에 대한 질책은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어수선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건데... 머리를 맞대면 지혜가 보입니다. 6(^.^)9


덧붙이며...
자유기업원은 결국 전경련을 위시한 대기업들의 이익단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익 추구는 정당한 권리이고 자기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치적 제스추어를 취하는 것도 그네들의 자유다. 자신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려는 그들의 노력까지 폄하할 생각은 없다. 뭐 경청할 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이 공평한 논쟁을 하기보다는 현재 있는 기득권을 이용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기업의 자유만을 논하고 사상의 자유나 노동자의 자유를 외면하는 이들을 진짜 자유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음은, 적어도 자유에는 계급이나 구분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날라리 우파의 최소한의 지각이다.

Posted by 익구
:

여름학기 조직행동론 강의를 마무리짓다
- 집단사고에 대한 토막강좌

익구는 7월 18일 조직행동론 기말고사를 치름으로써 여름학기를 마쳤다. 이번 여름학기는 그간 강의를 한 번도 같이 못 들어서 아쉬웠던 고등학교 친구 청원, 무연이와 함께 들을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항간에 의하면 익구는 사학과인 청원이에게 경영학과 전공필수를 듣자고 꼬신 것에 대한 모종의 죄의식 때문에 부디 강사님께서 학점을 뿌리셔서 욕먹을 일 하나 안 만들게 되기를 비밀리에 빌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직행동론은 조직에서의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사람 자체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나 사람과 직무간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둔다. 즉, 조직에 속한 사람들의 행동과 내면적 세계, 그리고 상호간의 교류현상을 연구한다고 할 수 있다. 조직행동론은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경영학의 모든 분야가 사람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사람의 가정, 사람의 심리, 사람간의 관계, 사람의 통제 등을 연구하는 조직행동론이 경영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하지만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가는 다른 분과에서 펄쩍 뛸 일이다.


익구는 평소 철학의 맛만 나는 것을 건드리기를 즐겨오던 터라 동기부여, 리더십 이론 같은 부분에서 무척 흥미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경영학 과목 중에 숫자 들어가는 것에 유난히 취약한 모습을 보여야 상심이 컸던 익구는 조직행동론을 위시한 이른바 ‘말발’ 과목들을 공략해 학점 분산을 꾀하겠다는 대안을 검토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간 잠잠했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이번 강의를 계기로 점화될 것으로 보여 짧은 여름학기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익구는 이번 강의에서 재미나고 유용한 개념들을 제법 배웠지만, 그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자면 ‘집단사고’ 개념에 대한 것이다. 이 개념은 1961년 미국의 케네디 정부가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시도했지만 크게 실패한 피그즈만 침공사건이 그 발단이 된다. 실패 위험이 높은 허접한 작전에도 불구하고 각료회의에서 일사천리로 처리되어 실천에 옮겨졌다가 낭패를 본 이 사건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71년 미국의 심리학자 Janis는 이와 더불어 몇 가지 사례의 의사결정과정을 분석하여 밝혀낸 집단의사결정에서의 집단착각 현상인 ‘집단사고(Groupthink)’라는 개념을 주창한다.


다시 말해 집단사고란 집단 구성원들간의 잘못된 의견일치 추구성향인데, 집단사고의 전제들로는 다음과 같다.

1. 집단의 응집력이 높은 경우
2. 외부로부터 고립, 비민주적 리더십, 토의절차상의 방법 부재, 구성원간의 사회적 배경 및 이념적 동질성 등의 충분한 토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적 결함
3. 외부위험에 의한 스트레스 급증, 일시적으로 유발된 자존감 저하 같은 촉진적 상황요건



이런 전제조건들로 말미암아 집단사고 경향, 즉 의견일치추구 경향이 발생하게 되는데 집단사고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1. 집단역량 과대평가 - 우리는 약점이 없다는 착각, 도덕적으로 옳다는 신념...
2. 폐쇄적인 아집 - 우리가 항상 옳다는 집단적 합리화, 타집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
3. 획일성 추구 압력 - 반대의견을 스스로 자제하는 자기검열 심리, 만장일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 반대자들에 대한 압력, 반대의견 제시 못하게 설정한 규제...



이런 증상들이 발생하여 역기능적 의사결정 증상이 나타나 성공적인 결과창출의 확률이 저하된다는 것이 집단사고 모델의 대강이다. 뭐 잠깐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을 했던 말 또 해가며 억지로 만든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여하튼 집단사고는 지나친 ‘우리주의’가 조직 내부의 비판 기능을 위축시켜서 문제와 대안에 대한 평가와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집단사고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들이 ‘뻔할 뻔’자로 보이지만 괜히 말만 붙여서 만든 것들이 있으나 그 요지는 간단하다. ‘반대자, 소수자의 자유에서 배우라’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실정은 배우기는커녕 자유조차 보장을 안 해주고 있다. 그만큼 집단사고의 위험이 높다는 뜻이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이론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직행동론 강의를 마무리지은 익구는 일주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떠난다. 과연 익구의 제주도 구상은 무엇일지 그 향방이 주목된다.

Posted by 익구
:

책 사랑에 대한 고백

잡록 2003. 7. 21. 01:40 |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때워볼 속셈으로 수유역 근처의 헌책방을 찾아 가봤다. 뭐 딱히 작정을 하고 간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둘러보며 손이 까맣게 되도록 고르고 골라 책 몇 권을 사들고 왔다. 세월의 무게였을까, 이래저래 먼지 투성이에 누렇게 빛바랜 책들을 그냥 두기 아쉬워 겉표지의 때를 한 번 벗겨본다. 바랜 책장이야 그저 먼지 한 번 쓰윽 닦는 것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지만.


사실 나는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은 어느 것이 더 좋은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서점을 활보하며 읽은 몇 구절이 절실했을 때도 많았다. 나올 시간을 정하고 나서야 서점에 들어서지만 지금까지 제 시간에 나온 적이 거의 드물다. 꼭 책장 몇 장 더 넘기다가, 책 몇 권 더 꺼내보다가 이런저런 약속도 늦고, 함께 온 사람 기다리게 하기 일쑤다. 어쨌든 이렇게 자기와의 약속 늘상 어겨가며 이래저래 주섬주섬 사 모은 책들을 책꽂이 앞에서 어디 꽂아둘까 궁리하는 재미는 아는 사람만이 아는 뿌듯함이다. 그래서인지 충동구매를 의식적으로 행한다. 이 정도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려나?^^;


지금 남들 다 하는 공부를 따라가기도 벅찰 판에 한가롭게 이런저런 책들 속에 파묻혀서 신선놀음 할 처지냐는 자괴감이 분명 있다. 필요한 책만 골라서 읽는 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대단한 능력일 것이다. 물론 모든 독서라는 것이 그렇게 일정한 목표를 이루는 징검다리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서가 그렇게 단지 수단이라면 궁극의 목적지까지 다다르는 도정의 괴로움을 어떻게 다 견뎌내라는 것인지 항변하고 싶다.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 오로지 정상에 오르는 희열만을 위해서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올라가는 걸음의 즐거움, 내려오는 걸음의 가뿐함도 함께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칸트의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을 조금 바꿔서 ‘독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말하고 싶다. 설령 어떠한 목표점이 존재하는 과정에 어느 책이 놓여있더라도 그 책을 집어들고 있는 순간만큼은 그 독서 자체의 즐거움 속에 빠져들 수 있는 외도(?)를 감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서가 좀 더 재미난 것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과거의 악몽에 아직 헤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 이외의 독서도 신분에 걸맞지 않는 행동으로 취급된다. 교과서 이외의 독서는 한낱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책을 읽는 동안 다른 누군가가 교과서를 파고들어 나보다 한 문제를 더 맞추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상당수 고3 수험생들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게 될 것 같은 이 강박관념은 우리의 독서 풍토를 사막화시키는 주범이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지적 성장이 퇴보하지는 않을까’ 하는 독서를 안 하는 데서 오는 강박관념보다 이처럼 고3 수험생들이 공유하는 (교과서 외의) 독서를 “하는” 데서 오는 강박관념의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상 모든 지식의 기초는 기본적으로 암기라는 푸념으로 위안을 하며 그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은 책을 읽기 좋은 환경이니 책을 많이 읽도록 합시다’라고 설파하는 것은 참으로 야만스러운 짓이다. 대학에서는 마음껏 독서하라고 외쳐봐도 한 번 떠난 마음이 쉽사리 돌아오기란 영 쉽지 않다. 비단 고3 만이 아닌 그 이전까지 포함해 중, 고등학교 시절을 죄다 ‘독서는 사치’라는 인식풍토 속에서 보내다가 이제는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라는 이 놀라운 경제학적 전이(?)에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필수품이 되어 좀 더 대중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독서는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때나 필요하지만, 청년 학생기에 있어서는 가장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 즉 모르는 것을 배워 익히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것이지만, 현대의 교육제도는 종합적이 되지 못하고 교수의 가르치는 방법도 불완전하다. 전공 학과에 관해서만 가르칠 뿐이고, 전공 외의 것에는 일체로 언급하기를 싫어하며, 또 그 전공 학과일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지극히 상세하지만 근본에 들어가서는 조금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다. 때문에 현대 교육의 이런 결함을 보충하고, 다시 더 알고 배우기 위하여 독서가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조용만, [학생과 독서] 中)
- 안춘근, [독서의 지식], 범우사, 44~45쪽에서 재인용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한계가 있다. 전공에만 파고들어 테크니션으로 전락하기보다는 다방면의 교양을 쌓아 좀 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독서의 가치를 새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미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독서를 외면하게 되어버린 많은 이들이 이제 와서 다시 독서의 즐거움에 풍덩 몸을 던지라는 속삭임이 우습다는 것은 솔직한 심정이다. 독서를 멀리 만드는 대학 이전의 교육 풍토를 시급해 개선해야 할 것이다. 시험을 위해서만 독서를 한 인생에게 ‘밑천이 달린다’는 위기감을 선사(?)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책을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어디서부터가 남의 생각인가 혼미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 책 속에 녹아 있는 것을 보고 선수(?) 당했다고 아쉬워할 때가 있다. 실상 내 고유한 생각이라고 자부하던 것들이 결국은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자꾸 반복되다보면 책에서 읽었다는 기억은 제거해버리고 이 생각은 나의 것이라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게 되고 만다. 고종석의 이 말에 내가 얼마나 무릎을 쳤던가.


내 표절의 역사에서 정녕, 놀라운 것은, 내가 남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훔쳐 내 이름으로 발표한 글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읽노라면, 그것들을 표절한 기억들은 가물가물 사라지고 그 글이 온전히 내 독창적인 생각인 듯한 착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 내가 그때 이미 이런 대단한 생각을 했구나”하며 후안무치한 자족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 고종석, [서얼단상], 개마고원, 266쪽


허영의 독서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불필요한 금전적 낭비도 따지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책장을 넘기며 그 책들만큼 아름다운 마음들과 대화를 한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至樂은 莫如讀書(지극한 즐거움은 책 읽는 것 이상이 없다)는 이제 옛사람의 감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지식의 광산을 캐는 연장에 책만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사랑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책 사랑에 대한 고백은 아무리 해도 모자란 그 무엇이다. 6(^.^)9 (2003/07/07)
Posted by 익구
:
지난 학기에 효순이, 미선이 1주기 기념을 위한 6.13 위원회에 대한 유인물을 받았다. 마침 날도 더운지라 부채 삼아 부치다가 문득 한 마디를 내뱉었다.


“참 그러고 보면 무슨 무슨 위원회도 참 많이 만들어지는구만...”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한 마디 한다.


“그게 다 반장 콤플렉스 때문이지.”


한바탕 키득거리다가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감투 밝힌다고 하는데 나도 그리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워낙 모범생적 답답함과 완고함의 이미지가 주로 각인되어서 친구들의 인기를 별로 못 얻어서인지 학창시절 통틀어 반장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물론 안 한 것만 못한 부반장 시리즈들은 제법 해봤지만 말이다.


뭐 친구가 말한 반장 콤플렉스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반장을 많이 해봐서 반장을 해먹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부류와 다른 하나는 반장을 하도 못해봐서 한이 맺힌 부류가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는 후자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한이 맺힌 것은 아니니 콤플렉스 딱지 붙이기는 좀 과분한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2인자 콤플렉스’다. 별 좋지도 않은 거 만들어서 무안하기는 하다만... 따져보니 직선대표에는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 일단 필수불가결한 표를 위한 아첨이 영 서툴다. 게다가 지금 내 모습은 대중성 확보하기가 힘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 반작용에서였는지 간선대표에 대한 욕망은 보통 이상인 것 같다. 이거 참 호가호위(狐假虎威)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닌가.^^;


대중성의 확보를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자유주의자의 정체성을 위해 내 개성의 수호에 힘쓰는 방향으로 전환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외교정책은 ‘비굴모드’를 바탕에 깔고 있으며 “놀아줘~”를 외칠 준비가 되어있다. 이것은 나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기 때문에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지만 너무 내 것을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다. 내 것과 타인의 것이 공존하며 교류하는 것을 원하지 어느 한 쪽의 소멸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관계다.


아무리 아웃사이더가 존중받고 비주류가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소수파에 서기란 일단 두려움이 앞선다. 하물며 이 땅의 현실은 두려움에다가 실질적 손해에 대한 손익계산서까지 첨부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쥐꼬리만한 권력이나마 부여잡아 조금은 편하게 개성 타령하고, 자유주의 들먹거리며, 대중성 추구하려는 심산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2인자 콤플렉스라고 하니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짐작하다시피 김종필이다. 때마침 오마이뉴스에 인터뷰기사가 실렸다. 그냥 노회한 정치인의 면상이나 좀 째려보고 말라고 했건만, 우연히 들어온 한 질문이 눈에 코옥 박혔다.


흔히 'JP는 영원한 2인자'라고 말하는데, 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정치인 김종필'은 어떤 사람인가.

- "(사람들이 나를 '영원한 2인자'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선두에 서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늘 뒤에서 선두에 선 사람 도왔다. 그러면서 선두에 선 사람 못지 않게 보람을 느껴왔다. 내가 골프를 좋아하는데 '티샷'보다 '세컨드 샷'이 잘 나간다고 '골프도 2인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하하). 지금도 그렇게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야~ 뒤에서 묵묵히 퍼스트 리더를 돕는 세컨드 리더가 되겠다는 저 답변에 감동 먹었다. 김종필의 인생역정으로 볼 때 저 말의 진정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시할 것도 없다. 물론 그가 주인을 바꿔가며 연명한 데다가 무척 의심스러운 주인을 모시기도 했다는 점에서 대개의 사람들이 남을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은 잘 모른다. 저마다 대장 하겠다고 설치지만 부하 하겠다고 손드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는 부리고 섬기는 상하관계가 수평적이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주종관계식이다보니 섬기는 위치보다는 부리는 위치에 서고 싶은 유인이 크게 발생하는 것이다. 왕 아니면 노예라는 흑백의 세상에서는 나라도 왕을 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좀 더 평등한 상하관계가 구축된다면 굳이 부리는 위치에 목매달지도 않을 것이며, 섬기는 위치가 마냥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인격적 미숙함이나 학문적 조악함을 조금씩 메워 나가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2인자 콤플렉스도 좋지만 너무 남들 보이기 민망한 감도 없잖아 있다.^^; 반장 콤플렉스라도 좀 수입해야할 판이다. 2인자 콤플렉스는 너무 쩨쩨해 보이지 않는가.^^


안 그래도 한 친구 녀석이 내가 JP를 닮았다고 성화인데,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김종필이 그 무지막지한 보수성과 어울리지 않게 꽤나 낭만적인 구석도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김종필은 아니다. 어차피 눈치가 떨어지는 나는 김종필 만한 2인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뭐 좀 침이야 흘리겠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다행이다. 6(^.^)9


추신 -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남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발견했다. 역시 내가 하는 말들, 내가 하는 생각들... 죄다 예전에 한 번씩 나왔고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래도 발언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자.^^
(2003/06/26)
Posted by 익구
:

농활, 복거일, 자유...

잡록 2003. 7. 21. 01:33 |
얼마 전 기사에 성균관대 총학에서 농활을 운동권의 유물이라며 지원을 거부해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뭐 나는 농활을 안 가봐서 농활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모르겠다. 만약 농활이 단순한 봉사활동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야 나도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것 같다.


뭐 그렇지만 이번 사태는 성대 총학의 오바인 것 같다. 실상 오늘날의 농활은 가는 사람만 간다. 거기서 무슨 의식화를 기대할 것도 없으며, 운동권의 외연을 넓히는 자리가 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지레 겁을 먹고 있다는 조바심의 발로일 뿐이다.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는 거창한 이름이야 둘째치고, 농번기 때 농민들의 일손을 돕는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봉사도 하고 경험도 하겠다는데 입맛에 좀 안 맞다고 일체의 협력을 거부하는 것은 어떤 흐름의 자치활동이라도 육성할 최소한의 의무를 망각한 처사다.


다만 성대 총학이 농활 대신 다른 봉사활동을 추진하겠다며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하는 것 같던데 그 점은 다행스럽다. 요즘 농활 같은 전통 있는 봉사활동 말고도 각종 봉사활동들이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그건 일단 좋은 흐름이다. 봉사활동에도 우열이 있다고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지만...


농활에 대한 생각을 잠깐 해보면서 문득 지난 어느 강의가 생각났다. 지난 겨울 복거일의 강의를 한 번 접할 수 있었다. 작년 2학기 교양국어 시간에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을 주제로 발표하며 친일파의 논리라며 게거품을 물었던 기억이 있던 터라 조금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심약한 익구, 단호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나름대로 재치 있던 그의 강의에 빠져들었다. 결국은 농산물 시장 개방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논거들이 제법 탄탄했던 걸로 기억한다. 막연한 선입관을 부수는 것만으로도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좋은 교훈이기도 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식량안보론’을 비판하는 구절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아마 이건 두고두고 써먹을만한 가치가 있겠다는 고약한 심보가 발동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요약을 해보려고 했으나 그냥 그대로 인용한다. 타이핑하느라 고생한 손가락에 고마움을 표하며...^^


농업에 관한 ‘신화’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식량이 무기로 쓰일 수 있으므로, 사회 안보를 위해서라도 농업 기반은 보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먹는 식량에 관한 것이라, 이런 ‘식량무기론’은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다.


그럴 듯한 주장이지만, 그러나 ‘식량무기론’은 근거가 허술하다. 식량이 무기로 쓰일 수 없는 까닭들 가운데 먼저 들어야 할 것은 세계의 농업 시장은 일반적으로 ‘구매자 시장’이라는 사실이다. 농업의 생산성이 빠르게 높아진 현대에서 주요 농업국들의 만성적 문제는 과잉 생산이다. 농업의 생산성이 아주 낮은 우리나라에서도 농사에 관련된 파동은 늘 과잉 생산이었다. 그래서 주요 농업국들은 늘 안정된 해외 시장을 찾는다. 자연히, 식량이 무기로 쓰이는 일이 일어나면, 먼저 그리고 훨씬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들이다. 그런 나라들로부터 농업 시장을 열라고 거센 압력을 받는 우리가 그들이 언젠가는 식량을 무기로 쓸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은 한가롭고, 그런 한가로운 걱정 때문에 미리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다.


다음엔, 농업은 공업보다 기반을 복구하기가 훨씬 쉽고 간단하다.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덮이지 않는 한, 버려진 논밭은 한두 해 안에 아쉬운 대로 복구되어 다시 경작에 쓰일 수 있다. 실은 휴경(休耕)은 농약에 찌들고 화학 비료가 스며든 땅을 정화하고 지력을 높인다. 씨앗이나 생산 기술도 그리 어렵지 않게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떤 나라가 식량을 무기로 쓰려고 할 것인가?


셋째, 어떤 나라나 나라들이 식량을 무기로 쓰려면, 그들이 농산물 시장에서 적어도 과점적 지위를 지녀야 한다. 현재 그런 지위를 가진 나라는 없다. 어떤 농산물을 수출하는 나라들이 연합할 수도 있다. 실제로 커피처럼 생산국들이 한정되었고 가격등락이 심한 품목들에선 카르텔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런 카르텔은 과점적 이익을 겨냥했지 식량을 무기로 쓰려 한 것은 아니다.


넷째, 식량을 무기로 삼는 일은 너무 비윤리적이어서 그럴 가능성을 크게 줄인다. 더구나 지금 식량을 수출하는 나라들은, 미국을 비롯해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칠레, 네덜란드, 덴마크 등, 대부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녔고 사회가 안정되었다. 그런 나라들에서 식량을 무기로 삼은 정권이 안팎의 비난을 받고서도 살아 남기는 어렵다.


석유는 쌀보다 산업적으로 훨씬 중요하고 우리는 전혀 생산하지 못한다. 게다가 ‘석유수출국기구(OPEC)'라는 카르텔이 석유를 실제로 무기로 삼았고, 세계는 큰 불경기를 맞았었다. 우리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지금 우리는 석유가 다시 무기로 쓰일 상황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OPEC을 움직이는 나라들이 중동의 회교 국가들이어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분쟁과 미국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은 당장 석유 공급에 영향을 미칠 터이지만, 지금 석유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째서 그런 ’준비 없음‘이 큰일이 아닌가?


물론 식량과 관련된 위기가 올 가능성은 작지 않다. 어떤 농산물의 수출국들이 연합하여 과점적 이익을 누리는 경우를 상정할 수도 있고, 기후가 갑자기 바뀌거나 무슨 병충해가 심각해져서 세계적으로 식량이 크게 모자라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은 ‘식량을 무기로 삼는다’는 얘기에서 무기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식량 무기론’은 논의의 초점을 잘못 맞추어서 그런 재난으로 농업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방해한다.

- 복거일, [농업과 농민에 관한 선입관]中



길게 인용한 복거일도 무작정 개방만세만을 외친 것은 아니다.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쌀 농사에 포격을 집중했다. 채소 같은 경우에는 신선한 것이 낫기에 국내에서 여전히 생산될 것이라며 나름대로의 아량(?)을 베풀어 보이기도 했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무역상무론 교수님께서 지난 학기 강의 중에 쌀을 100% 수입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셨다. 평소 후덕함을 존경해마지 않던 터라 저 해맑은 표정에서 나온 격한 발언에 놀라웠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하니 그만큼 우리 농업, 특히 쌀 농사의 경쟁력이 형편없다는 절박한 상황의 방증이기도 한 것 같다.


아직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아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식량안보론만을 외치며 농산물 개방에 반대하는 것은 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영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다. 도서관에서 아무리 손쉽게 빌릴 수 있는 책이라도 내 방안의 책꽂이에 꽂힌 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 차이감 내지는 불안감이라면야 오죽 좋겠냐만은.


진중권은 복거일을 보고 자유주의에 극단으로 흘러 천박해진 인물이라고 평한다. 나 또한 복거일의 문제의식에 때때로 공감하면서도, 그 숱한 자유 중에서 ‘영업의 자유’만을 사랑하며 재벌의 이익 옹호에만 열심인 ‘자칭 자유주의자’들과 통한다는 것이 영 찜찜하다. 아무쪼록 대학을 주식회사로 만들자는 쇼킹한 발언들을 ‘유연한 과학’이라고 칭하는 자화자찬을 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 뭐든지 지나치면 ‘경직된 미신’이 되는 법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시지 않는가.


파격적인 발언들을 많이 쏟아내다 보니 여기저기 공격도 많이 들어오나 보다. 뭐 열심히 발언하는 자는 종종 비판을 넘어선 비난을 접하기도 한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복거일은 꽤 격이 높은 논객으로 보인다. 허나 “내게 도끼 들고 찾아온다는 사람까지 있었다‘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은 마냥 편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직도 국가폭력의 상흔에 시달리는 이들이 하고 많은데 그런 엄살은 고품격 논객으로서는 지나친 너스레다.


비록 자유지상주의자의 모습이 너무 강해 거북스러울망정 복거일은 내게는 아직 큰 존재다. 그의 헛소리를 매섭게 비판할 머리를 가지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겠지만, 자유가 철철 흘러 넘쳐 역겨움이 치솟는 그의 발언도 기꺼이 인정해야 하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책무다. 발언할 자유, 비판할 자유... 이 기본적인 것이 제대로 보장 안 된다는 것이 현실이다만... 자유주의자도 적어도 자유의 문제에서만큼은 과감할 줄 알아야 하는데 여전히 멈칫거린다. 6(^.^)9 (2003/06/26)
Posted by 익구
: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운’이라면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리는 문자였다. 그냥 ‘그런 줄 몰랐다, 좋은 거 배웠다’고 둘러대면 좋으련만... 이 심보가 그렇지 못하고 “나중에 내가 써먹으려던 건데 선수를 당했구만”이라는 답문을 보냈다. 열심히 엄지손가락 혹사시켜가며 문자를 보내준 친구가 민망하게 말이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이라는 것을 안지도 제법 되었는데... 여전히 행복이라는 풀밭에서 행운을 찾아 헤맨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행복보다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행운의 형상들에 끊임없이 손짓하며 딴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갖고 있거나, 언제든 얻을 수 있는 것보다는 좀 더 요원한 것에 마음이 끌리는 무책임한 확장욕구다.


전에는 내가 제법 용감한 내부 고발자쯤이나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괜한 시비와 트집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이건 아니라며 분연히 따진 것들 중에는 꽤 호응을 얻은 것도 있고, 차가운 반응만을 받은 것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손익계산서를 만들어보자면 그다지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손해봤다는 생각이 커서였을까. 요즘에는 나의 칼날이 많이 무뎌진 것 같다. 전 같으면 왜 이렇게 못하냐, 왜 그런 식이냐며 닦달을 했을 나이지만... 이제는 될 수 있으면 좋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상대방 입장에서 저런 행동이 최선이 되었으리라고 선의의 해석을 하려고 한다. 좋게 말해서 역지사지이지만, 조금 비꼬면 알아서 기는 모드로 전환한 것이다.^^;


설령 아쉬운 점이 있더라도, 모자른 점이 있더라도... 지금 딛고 있는 곳을 옹호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치졸한 자기 방어 이전에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다. 현상황을 더욱 긍정하려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보수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취적인 모습이 거세되었다고 슬퍼하기 전에,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거둔 것들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모습을 아껴야겠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대학생활의 피상적인 인간관계가 한 몫을 했으리라. 굳건한 우정으로 영원할 것 같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소원해지는 것이 꽤나 진척되고... 나름대로 노력해도 대학살이에서 사람과의 만남이 지지부진하다보니...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고, 기존의 것에 더욱 충실하기를 강요받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네 잎 클로버의 허상만을 좇기보다는 세 잎 클로버의 소소한 행복을 누릴 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딱 그만큼은 더 현실적이 되었다. 어쩌면 세상은 나에게 좀 더 무뎌지기를 요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계몽의 열정'이 식은 자리에 '상실에 대한 경계'가 피어난다. 아직은 세 잎 클로버에 좀 더 다가설 때이다. 지금 이 순간, 지금 만나는 사람들, 지금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6(^.^)9 (2003/06/06)
Posted by 익구
:

중3 국사선생님의 말씀

잡록 2003. 7. 21. 01:28 |

잊힌다는 것은 때로는 홀가분하지만 대개는 슬픈 일인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사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아마 세월이 지나면 익구 같은 학생들은 잊히겠지만...
말썽부리고 속 썩이던 학생들은 기억이 나게 될 것 같다.” 뭐 이 비슷한 발언이었다.

당시 모범생의 대표주자였던 나를 예로 들어서
어쩌면 인간관계의 묘한 속성을 설파하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돌아보니 나에 대한 우회적인 조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란 존재는 기억하기보다는 잊혀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혹은 약간 특이했던 아이라는 희뿌연 이미지정도가 남을지도 모른다.

이제 제법 고등학교 친구들과 ‘잊어감’과 ‘잊힘’이 진행되면서 깨달았다.
누군가의 기억 한 구석을 차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이제 그토록 우정을 외치던 목소리도 거의 수그러들었다.
앞으로는 고단한 기억과의 싸움이 이어질 것 같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자꾸 끄집어내려 하지 말자.
지난날의 한계를 바로 보고 덧칠을 하려고 하지 말자.
혀를 깨물고 눈물이 찔끔 나도 지난 것에 너무 서러워말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실존하고 싶다는 것은...
내가 먼저 진정함과 성실함으로 대하겠다는 의지다.
딛고 있는 자리에 부끄럽지 않게 노력하고, 또 행복해야겠다.

다시금 물어보자.
그 때 국사선생님이 내게 전하려는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뻔한 것 같아도, 애써 외면해본다. 6(^.^)9 (2003/05/30)

Posted by 익구
:

학과에 대한 변명

잡록 2003. 7. 21. 01:27 |
(고3 시절 이과생이었던 친구가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가기보다는
학과를 먼저 생각해보자는 글을 올렸을 때 답글로 올린 것이다.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경영학도가 되게 된 나에 대한 궁색한 변명과
익구의 현실추수적인 단면들을 잘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문과라서 문과 중심으로 생각해보자면...
문과는 학과들의 성격에 큰 차이가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국문과나 법학과, 정치학과에 관심이 있었던 내가
순식간에 경영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도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하긴... 이번 수시모집에서도 내가 지망한 학과는
경영학과, 사회학과, 정치행정학과...로 정말 다양했다.
하지만 어느 것을 하게 되더라도 즐겁게 시작했을 것 같다.
진리의 길을 제대로 간다면 시작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에...

만법귀일(萬法歸一)...
물리학자에서 출발하든 철학자에서 시작하든
결국 어딘가에서는 만날 거라고 생각한다.
정해진 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무리 억지로 들어간 학과라도 혹시 재미있어 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실상 우리가 원하는 학과라는 것이 장래가 유망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학과에 집중되지 않는가...
정말 좋아서 진정으로 원하는 학과가 있겠는가...

어느 학교나 전교 1등 치고 법학과와 의예과
지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가능성 90% 이상)
그럼 전교 1등들은 모두 법학과와 의예과를 좋아한다라는
법칙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인가...
뭐,,, 어느 정도 성립한다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소위 말하는 그런 학과를 갈 때의 '보장'이 탐날 수밖에 없다.
전교 1등 하는 정도의 영특한 머리의 소유자라면
이런 정도의 이해타산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 그냥 이런 현실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서 해본 말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독일의 법학자 라드브루흐는 법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를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첫째 부류는 남들이 법을 공부하면 결코 손해는 안된다는 바람에
학문에는 관심도 없이 지망한 사람들.
둘째 부류는 중, 고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우등생으로서
법학과가 좋다니 당연히(?) 들어온 사람들.
셋째 부류는 철학, 예술 혹은 사회와 인도주의에 기울어지면서도
외적인 사정 때문에 부득이 법학을 택하게 된 이들.
예로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작가나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법학을 선택하게 된 사람들이다.

우스운 것은 라드브루흐는 셋째 부류의 사람들이 끝까지 법학을
공부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법학자와 법률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글쎄... 이 글을 읽고 나는 무척 웃겼는데... ^^

친구들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철학과에 가라고 하지만...
내 자신은 철학과에 가기 싫다.
철학과 출신들마저 자기 학과에 오지 말라고 충고하는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진로는 선택하고 싶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는 머리가 나빠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
이렇게 말을 하면 혹 이런 말을 들을까?
"너만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는데..."
할 말 없지만... 에구에구,,,
아직 이 땅은 정말 가난한 사람은 학문하기가 힘든 곳 같다.
왜 내가 사회학자의 꿈을 접어야 했던가...
학자라는 것만큼 소모적인 직업이 어디 있던가...
이런,,, 신세타령이 시작되기 전에... 각설.

결론을 내리자면...
학과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특정 학과가 신분 혹은 계급이 되어버리는 사회 현실일 뿐.
슬픈 현실이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학과보다는 입학자체가 더 문제이니까... ᅮ.ᅮ (2001/10/14)
Posted by 익구
:
한글 문서 정리를 한다며 뒤적거리다가...
친구와 채팅을 하다 나눈 ‘양성평등’에 대한 이야기에서 내가 했던 말들을 발견했다.
나는 페미니즘 이론을 치열하게 파고들거나 투쟁 대오에 끼어들 생각은 없고...
그저 생활 속의 소박한 양성평등 실현에 만족하는 소심한 놈이지만...
이마저도 그리 쉬운 일이라는 기막힌 현실 앞에 웃음이 피식.


물론 나는 여성의 권리와 기회균등에 그 누구보다 찬성하며 남성의 기득권을 내어줄 용의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과 그 책임을 매섭게 강조할거거든...^^;


~ 내가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여성의 권익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남성의 인간적인 권리를 옹호하기 위함이다. 결국 남을 도우려는 것이 아닌, 내가 편하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의 발로이다.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만이 용인되는 세상의 그 숨막힘을 싫어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식한 마초들만큼이나,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순한 양들에게도 비판의 화살을 던진다. 정작 아쉬워 해야할 사람이 누구인데...


일단 생활 속에서 양성평등의 개념이 친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해... 양성평등이 우리에게 이득이 된다는 확실한 신념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해... 비유가 좀 유치하지만... 우리가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이 무법천지의 도로보다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남녀차별보다는 양성평등이 더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 양성평등이 잘 된 나라일수록 경제성장이 잘 된다는 조사결과를 본 것 같다. 아무튼 요즘처럼 경제만능인 세상에서 양성평등이 살림살이에 보탬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좋은 방책일 것 같다. 인간의 의식이 바뀌는 데 30년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양성평등 실현까지 30년이라는 시간을 잡아봤다. 그 때가 2000년이니까 2030년에는 내가 그리는 양성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계산이다. 양성평등에 대한 신념이 하나하나 늘어갈 때 거대한 수익이 창출될 것을 믿는다.


내 꿈은 사회교과서에서 있는 양성평등의 그 유창한 내용들이 우리 실제생활에 콕콕 박혀들어 왔으면 해... 교과서 속의 글자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당연한 상식으로 자리잡는 그 날이 오기를^^


~ 위에 내가 했던 말... 너무 당연해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활자로만 남으려는 양성평등의 가치가 우리 마음속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행복을 꿈꾸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양성평등을 그토록 바라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성이라는 태초의 기득권을 버릴 수 있느냐부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상식’이 가장 어렵다.^^ 6(^.^)9 (2003/05/24)
Posted by 익구
:

“차이가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의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너무나 많이 짓밟히고 있다.


양성평등을 주창할 때... 무식한 마초들이 주절대는 것이 있다.
“억울하면 남자처럼 군대도 가고, 무거운 물건도 들어봐. 못하면 좀 가만히 있어.”


남성이 여성보다 근력이 세다는 생물학적 우위를 주장하며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일부 무식한 마초들. 그것밖에 자랑할 게 없다니 인생이 불쌍할 뿐이다.


일부 극단적인 마초들은 이 땅을 동물의 왕국으로 규정하려고 노력한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옹호하는 한 편으로는 인간만이 가지는 허위와 위선으로 치장하기 여념이 없다. 전혀 인간답지 않은 논리를 사랑하면서, 인간다운 품위를 누려보려는 모순이다.


최근 금녀의 영역에 여성들이 성취를 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 보이면서 여권신장이라는 호들갑을 떤다. 과연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양성평등의 길일까?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만 막으면 된다.


여자답게 살고 싶은 여자도 내버려 두고, 남자답고 싶은 남자도 내버려 두라.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자 말라. 특히 일부 극단적인 마초들은 자신의 단순함을 타인에게 전염시키려 하지 말라.


차이가 차별의 명분이 되는 세상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아름다움’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줄뿐이다. 양성이 ‘정말로’ 평등하게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개인은 좀더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성평등주의를 지지한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열정보다는 차별에 대한 경계로써 지지한다. 일각에서의 차별이 싫다고 차이마저 없애려는 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차이는 자유의 자연스런 산출물이다. 아울러 차이에 대한 상이한 보상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차이가 폭압적 차별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은 단호히 반대한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아직도 유효한 세상이라니 참 우스운 일이다.^^;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사소한 것에 시비를 거는 용기를 가지기를 다짐해본다. 6(^.^)9


잡담들...

극우 헤게모니가 춤추는 한국 사회에서 소수파 노릇이란 두려운 일이다. ‘주류편입’과 ‘별류(別流)창조’(개성적인 흐름 정도의 의미)사이의 고민은 주류편입으로 점점 기울어져간다. 나같이 모자른 사람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주류에 대항하기가 힘에 부친다는 솔직한 자기인식이 진행되면서, 주류로 끼어 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댄다.


전체주의가 해체되고 모두가 개인 자체에서 출발하는 세상을 옹호하는 개인주의자라는 정체성이 무색할 만큼 현실추수적으로 살아가는 나를 바라보면 씁쓸함만 느껴진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하자. “올챙이적 생각을 잊지말자고.”


나는 변방을 넓혀 중앙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모두가 서얼인 세상, 서울도 서얼이고 대구도 서얼인 세상, 자유주의자도 서얼이고 사회주의자도 서얼인 세상, 모두가 서북이고 송도인 세상, 남자도 서얼이고 여자도 서얼인 세상, 모두가 소수인 세상, 그래서 모두가 궁극적 소수 곧 개인인 세상. 모두가 서얼인 그 세상은 아무도 서얼이 아닌 세상일 것이다. 그 세상에서 나는 전라도 사람이기 이전에 개인이고, 서울 사람이기 이전에 개인이고, 한국인이기 이전에 개인이고, 아시아인이기 이전에 개인이고, 남성이기 이전에 개인이고, 김대중의 비판적 지지자이기 이전에 개인이고, 문필가이기 이전에 개인이고, 4인 가족의 가장이기 이전에 개인이고, 무신론자이기 이전에 개인일 것이다.
- 고종석, [서얼단상] 148쪽

(2003/05/23)

Posted by 익구
:
지난 토요일에 스승의 날 겸해서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뭐 이제는 제법 낯설어진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이 학교의 주인은 교복을 갖춰 입은 후배님들의 것이니까... 내 것도 아닌 것에 자꾸 침 흘리는 것도 상도덕에 어긋나는 처사이리라.^^; 고등학교 친구들 만나면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이 그립다는 이야기가 쏟아지지만... 그 투정은 지난날의 추억이나 고민들이 점점 옅어져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제 서로 얼굴 한 번 보기도 점차 힘들어지고, 딱 잘라 말해 콩가루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고등학교에 얽매여 있던 것들에서 상당수 벗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얽매인 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홀가분함이 가장 먼저 찾아오지만... 그 뒤를 이어 두려움과 혼란 등이 줄지어 찾아오기에 당분간은 이 어수선함을 달게 받아들여야겠다.


지나가 버린 것은 미화되기 쉬운 법이다. 좋은 것은 더욱 좋게, 그저 그런 것은 좋은 쪽으로, 나쁜 것은 덮어두려 하는 것은 한 개인의 소박한 심리적 방어기제일 것이다. 대학 새내기 시절을 어영부영 제대로 한 것도 없다고 매섭게 몰아붙이다가도, 당시의 선택 하나하나에 담긴 고민을 돌아보며 조금씩 누그러뜨리는 것도 마찬가지의 방어다.


고등학교를 찾아갔을 때 윤리 선생님께서 뼈 있는 말씀을 던지셨다. “이제 학교일랑 찾아오지 마라. 앞으로 나가기도 바쁜 너희들이 자꾸 뒤를 돌아봐서야 되겠냐.” 어찌나 가슴을 파고들던지 모르겠다. 과거지향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던 나에게는 더욱 날카로운 비수였다.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다. 쉬어 간다는 핑계로 숨 고르는 시간이 자꾸 길어지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아직도 간간이 나를 ‘익구어린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는 친구가 있을 정도로 유치한 짓거리를 많이 하며 살아왔다. 물론 ‘익구어린이’에 담긴 애정 어린 뜻 한 편에는 현실감각 없이 좌충우돌하는 익구에 대한 경멸의식도 조금은 섞여있다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다. ‘익구청년’으로 갈아치운 지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익구어린이’는 뜨거운 감자다. 익구어린이가 품었던 ‘순수’와 ‘이상’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성년의 날이다. 그간 어리게 놀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왕창 늙어버린(?) 기분이다.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노원구청에서 고맙게도 성년의 날 기념 카드를 보내왔다.


성년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웃과 사회에 큰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두 줄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떨림... 다음으로 서글픔을 느꼈다.


“익구어린이가 성인이 되기는 하는 걸까?” 6(^.^)9 (2003/05/19)
Posted by 익구
:
이제 나도 헌내기다. 새내기 시절을 제대로 못 보내기는 했다만 물리적인 위치상 헌내기임에는 분명하다. 고등학교 때 교지편집부 하면서 후배들 몇 몇에게 선배소리, 오빠, 형소리 들었지만 03학번들에게 선배소리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다.^^


권력을 마다할 사람 없고, 자기 따르는 사람 생기는 거 싫어할 사람 없겠다만 그래도 내가 누군가보다 높은 위치에 선다는 것은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누군가보다 물리적 위치상으로나마 우월하다는 것은 행복한 만큼의 책임감을 수반하는 일이다.


03학번들이 많이들 모여서 놀고,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는 노는 것이 본업이라고들 하지만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헌내기의 만시지탄인지도 모른다.


좀 더 많은 후배들을 알고 싶고, 끊임없이 후배들이 어떻게 지내나 묻고 싶다. 선배 대접을 받아보기 위한 술책이라기보다는 덧없이 흘러간 새내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앞으로 한 두 살 먹어 가면서 선배, 오빠, 형 소리를 들을 위치에 놓일 데가 더 많아질 것이다. (물론 그 역의 경우로 나의 손윗사람들도 많아지겠지만 논외로 치도록 하자) 그럴 때 나는 이른 바 ‘나이 값’을 할 수 있을까?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반드시 더 지혜로운 것도 아니요, 어린 사람이 꼭 무지의 온상이 되는 것을 아니다. 나이 값은 그런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위치상으로나마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보여주는 책임감을 말한다.


한 마디를 할 때도 더욱 진솔하고 신중하게 해내는 태도를 가질 수 있을지 두렵다. 누군가를 섬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누군가를 부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남을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지만, 그 일만큼 무거운 것도 없다.


여동생이 있다보니, 상대적으로 오빠 소리는 많이 들었다. 여기서도 얕은 경제학의 지식이 발동하는지, 희소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형 소리에 나는 더욱 기쁘고 한 편으로는 떨린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형이 될 수 있을까?


이 사람이라면 정말 형으로 모시고 싶다라는 진정한 마음이 우러나올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어린왕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생각 간절하다. 6(^.^)9 (2003/05/10)
Posted by 익구
:

서둘지 말고 쉬지 말고

잡록 2003. 7. 19. 08:13 |
"글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지나칠 때 그것은 미신이 된다. 즉 글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위험한 미신일 수 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이나 글쟁이들이 만들어내는 미신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폭력의 원리가 관철되어 있으며 글로써 사회가 변할만큼 이 사회는 아직 신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 '진보적' 글쟁이들의 글이란 '금 안에서만 노는' 글이다.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치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모든 글쓰기는 미망에 지나지 않는다."


[서준식의 생각]이라는 책의 머리말에 담긴 글입니다.
그저 잡글 정도 즐기는 일개 네티즌에 지나지 않는 저이지만...
진보를 머금은 글들에 설레는 저에게도 날카로운 이야기입니다.

두 번을 생각해봐도 저는 활동가적 기질을 갖춘 사람은 아닙니다.

쓰는 것, 말하는 것들에 비해 늘 몸이 늦게 움직이며...
움직여야할 시점에 한 번 더 생각하느라 기회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사회 모순의 일선에서 투쟁하는 ‘거시 혁명’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주위 사람들이나마 충실히 설득하고
자기 자신 하나 온전히 변화시키는...
‘미시 혁명’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어제오늘의 경험이 비추어 보아도 거시 혁명을 수행할 전사보다는...
미시 혁명을 수행할 소박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세상은 선량한 보통 사람의 소극적 도덕으로 일구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
자기와 다르다고 함부로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마음...
개인성과 더불어 사회성도 고려하는 균형 잡힌 마음...
이런 것들이 세상을 소리 없이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때의 진보에 대한 격정과 열정으로 불타다가
어느덧 싸늘히 식어 과거의 낭만이나 들이대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차갑게 타오르는 불이 쉽게 식지 않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미지근하겠지만 조그만 나아감을 품으며 평생을 꿈꾸고 싶습니다.
설령 거기까지가 제 한계라면 기꺼이 받아드리겠습니다.

저의 작은 이상, 작은 진보를 실현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쉬지도 않겠습니다. 6(^.^)9

--- 아침 비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이런저런 반성을 하면서 (2003/04/21)
Posted by 익구
: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께 보낸 편지의 일부...
에구 조만간 편지 한 통 써서 보내야겠다.)

이번 편지에서는 지난주부터 다니고 있는 운전학원에 대해서 이야기 할까합니다.
차안에서 핸들 이리저리 돌리고 정지했다가 기어바꾸고...
이렇게 정신 없는 찰나에도 섬광같이 스쳐가는 깨달음이 있더군요.
첫날 운전할 때 도로 가에 있는 돌 위에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그걸 연석이라고 하던가... 잘 모르겠네요...^^;)
둘째 날에는 한군데서 대여섯번 연속으로 시동이 꺼져서
제 뒤에 차들이 줄을 좌르르 서게 만들기도 했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굴절, 곡선, 방향전환 코스를 배웠습니다.
다섯 개 관문 중에 세 개를 배운 셈이죠.
이제 시동도 거의 안 꺼지고 중앙선 침범도 안 하는 경지에 다다랐습니다.
아직 급정거를 한다고 구박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학원에서는 월요일마다 새로운 반이 개강합니다.
월요일날 새로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전연습을 했는데
정말 만감이 교차하더라구요...^^;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는 말도 있는데...
일주일 전 저처럼 헤매고, 지그재그로 달리는 차들을 보고
한번쯤 비웃어 줄만도 한데... 왜 저러랴고 생각해 볼만도 한데...
좀체 그게 안되더라고요...^^;
그보다는 저의 초반 쩔쩔맴이 오버랩 되면서...
동병상련만 물씬 풍겨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감한다는 것, 공감한다는 것...
실로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랑 처지가 같거나 나와 같은 생각,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그 든든함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 고독이 모르는 재미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 바로 앞에서 길옆의 돌 위로 올라가는 차를 보면서
그때의 당혹감을 공감할 수 있기에...
함부로 웃어 제끼거나 할 수 없는 것이더라고요...^^

티비에서 두 번인가 본 ‘동감’이라는 영화도 재미났지만...
동감 혹은 공감은 힘은 엄청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무언가 공유할 수 있다는 것.
각박한 세상 살아가는데 무척 요긴한 녀석인 것 같습니다.

게임 한판을 치열하게 하고 난 희열을 동감하는 사람들이 있고
같은 책을 읽고 함께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들 수도 있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초면도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고
같은 어려움에 빠져있는 이가 있다면 꼭 오바해서 돕고 싶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는 발걸음이 있고...

생각만 해도 흥겨운 이런 일들이 부러워서
제가 “진솔한 대중성”에 그렇게 목매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체 고독과도 친숙하게 지내는 저라고는 하지만...
본디 남의 떡이 커보이는 법이라지 않습니까...^^

물론 이 공감이라는 녀석이 지나쳐서 엉뚱한 데로 흘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지연이니 학연이니... 뭐 각종 연줄이니 하는 것들...
크게 보면 공감 혹은 동감에서 싹이 트는 것이겠지요.
이런 것들은 철저히 경계할 일입니다.

천하의 ‘기계치’인 제가 운전을 배우다보니...
별의별 생각이 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삼수해서 그들의 서글픔에 공감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방학 때 별로 한 게 없다보니 이것 밖에 드릴 말씀이 없군요.
몇몇 친구들을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잘도 다니던데...
저는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런 제가 엄청 못나 보이고 모자라 보였는데...
짧은 성격심리학을 빌리면... 내향적인 사람은
밖에다가 에너지를 쓰면 금세 지쳐버린다고 하는 내용이 있더군요.
그 어느 천군만마가 저의 게으름을 이처럼 합리화시켜 줄 수 있을는지...^^; <2002년 8월 6일>
Posted by 익구
:

자작시 모음

잡록 2003. 7. 16. 23:55 |
각박한 세상, 우리 가끔 시인이 되어 조금 어깨의 집을 덜어보자.
고등학교 시절 함부로 끄적였던 흔적들을 좀 내어보며 웃어보자꾸나.^^

[爽秋情景]


남도의 초가을 단아한 논에는
청량한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벼들이 있다.

쓰다듬으면 사뭇 서글퍼지는
100년 고목이 호젓이 터잡고 있다.

달콤한 고독에 헤어나지 못하는
스산한 부슬비가 후두둑 나리고 있다.

번뇌 버혀내는 싱그러운 이슬과
시름 떨궈내는 지긋한 고추내음이 있다.

무수한 상념속에 헤매이는
깨어있고자 흐릿한 마음하나 있다.

세지(世智) 모를 풋선비가 고달퍼
가락만 나지막히 읊조리고 있누나.
<2000/09/13>

[혬가림]


저녁놀 너볏할제 바람이 스쳐가면
빛바랜 조약돌이 속절없이 애와티네
도니니 무지근하여 봄꽃만 시드는구나

짙은밤 곰살가워 샘물을 길러내면
차디찬 곳어름이 얼러붙어 아뜩하네
무르니 어수룩하여 통나무만 부둥키구나

밝을녘 가물대니 구름을 기다리면
텅비운 곱구슬이 시름겨워 한들대네
너르니 머뭇거리며 생채기만 쓰리는구나

<너볏하다 - 아주 떳떳하고 의젓하다.
애와티다 - 분해하고 슬퍼하다
도닐다 - 가장자리를 빙빙 돌아다니다
무지근하다 - 1.뒤가 잘 안 나와서 기분이 무겁다.
                    2.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무엇에 눌린 듯 무겁다.
곰살갑다 - 겉으로 보기보다 성질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곳어름 - 고드름의 옛말
가물대다 - 1.(불빛 따위가)희미하여 자꾸 사라질 듯 말 듯하다.
                 2. (멀리 있는 물체가)희미하여 보일 듯 말 듯하다.
                 3.(정신이나 기억이)맑지 못하고 희미하다.
곱구슬 - "고운 구슬"의 준말로 억지로(?) 만든 말
한들대다 - 가볍게 이리저리 자꾸 흔들리다. 또는, 자꾸 흔들리게 하다.>
<2000/09/17>

[은행나무]


흔들린다.
떨어진다.
무심하게도.
으스러지고 나부끼는 너희들.

쓴 미소도 과분한.
차마 떨구어 내지 못하는 너희들.
내 마지막 작은 집착.

다가올 겨울의 추위보다
지난날 얘기들이 더욱 야위게.

눈물 몇 방울쯤 애써 외면할 뿐.
<2000/11/10>

[망각의 늪]


망각의 늪에서 나는 기도합니다.

부시도록 슬픈 날
한 줌의 재조차 불어버리고
백사장의 빛나는 모래처럼

여름밤의 흐느낌은
쓰린 고통과 씁쓸한 미소가 되어
저만치서 헤매이는데

망각의 늪에서 나는 혼미합니다.

시련은 아름답지만
행복은 또 다른 아픔이 되어
나를 짓누르는고

순간 입이 닫히고 귀가 막히더니
채 못 벗어낸
역겨운 고백을 되뇌이는데

망각의 늪에서 나는 절망합니다.

얽어매인 고독이
소야곡 읊조리는
서글픈 시름에 겨워

잿빛 하늘은
잦아든 눈물을 부르고
공허한 괴성을 지르는데

망각의 늪에서 나는 주저합니다.

부질없는 순수와
헛된 낭만에
에이는 마음이라도

먼발치에서 바라다가
설렘은 한 떨기 금잔화로
파랑새는 날개를 접으려
<2000/11/21>

[踏雪]


아직은 눈을 밟을 수 없습니다.
그저 타인의 발자욱을 조심스레 스쳐봅니다.
순백의 눈.
짓이겨져 누런빛이 되고
감장물로 어지러이 녹아도
조용히 두 눈뜨고 보아야만 합니다.
못내 그러다
설원으로 목도리 두르고 나아가
청음의 황홀경에 빠져들지니.

오늘도 웃으며 놓인 발자욱에 입을 맞춥니다.
<2001/01/18>

[공명선생을 좇다]


- 대륙의 구석에서 채 피지 못한 웅지여...

혹자는 선생의 공을 논하고
혹자는 선생의 과를 논할 제
나는 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을 본다.

신선의 꿈은 접어두고
세진에 뒤덮이고
잡인과 어울리며
피를 토해내셨지만
선생의 터럭 좇지 못함을 탄식하니.

질퍽한 형극의 길을
기꺼이 필마단기(匹馬單騎)함은
썩어빠진 서생의 가련한 업이로다!
<2001/01/12>

[세상 바라보기]


녹음방초에서 순백까지
산이 좋다.
팽개치는 내가 자랑스럽다.

시대는 빨리 변하고
사람은 빨리 따라잡고
시대는 빨리 도망가고
사람은 빨리 쫓아가는

끝없고 무서운 숨바꼭질!

변하지 않는 것 하나 없어도
변하기 싫은 것 넘쳐나는
변하는 것 하나 없어도
변해야 하는 것 넘쳐나는

끝없고 우스운 숨바꼭질!

그저 푸르른
바다가 좋다.
팽개치는 내가 부끄럽다.

그렇구나! 얼마만큼은 버리고 가는 길.
<2001/02/11>

[그대는]


그윽한 커피향을 즐기면서도
나를 위해 녹차 한 잔 끊여주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음반 사기를 좋아하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나를 위해 시집 한 권 나눠보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내가 두려워하는 영어를 남들보다 잘해서
내가 가진 한을 조금 풀어주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비 맞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나를 위해
흐린 날에는 넌지시 우산을 챙겨주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내가 흔들리고 어려워할 때는
그 어떤 말보다 따끔한 구박 한마디하고 마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더럽고 메마른 세상에 부대끼면서도
맑은 눈물 떨굴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
그걸 할 때면 행복한 미소짓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내가 이상을 논하고 비판할 꺼리를 찾을 때
단지 사랑만으로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그대였으면 좋겠다.
<2001/03/11>
Posted by 익구
:

익구 염색하다!!!

잡록 2003. 7. 15. 21:44 |

(2002/04/14 고등학교 온라인 카페에 쓴 글)

나 염색했어...
푸하하... 꼴은 조금 우습다만...
또 새로운 영역에 발을 담가 보는구만...@.@
내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조건으로...
(신기하게도 나는 머리를 자르고 싶어하고...
부모님들은 머리를 기르라고 하시는 풍경이 벌어진다^^)
엄마께서 원하시는 염색을 했건만...
뭐 그럭저럭 만족한다.

솔직히 난 안경만 벗으면 아무것도 뵈는 것이 없어서...
염색을 하는데 어찌 되는 줄 몰라서 얼마나
은근한 공포에 떨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리버럴(liberal)한 이념적 지향에 충실하기 위해...
끝끝내 안할 줄 알았던 염색마저 하니 감개무량하다.^^;

근데 염색에서마저 인생무상을 느낀다.
지금 이 빛깔은 결국 바래질 것을...
결국 다시 검게 돌아갈 것을...

끝으로 내가 물들인 색깔은 불빛에 비춰봐야만...
염색했는지 알아 볼만큼의 연한 갈색이란다.
본디 녹색계통을 희망했지만... 본인도 감당 못할 것 같아서 후퇴했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지...
“나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無可, 無不可)
나도 자꾸자꾸 생겨나는 편견과 고정관념과 아집들에게...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별 것도 아닌 염색 한 것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나는...
역시 아직은 좀 더 살아야겠다... 6(^.^)9 

Posted by 익구
:

<2000/11/26 쓴 글>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칸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학자인 칸트는 그 학문의 내용도 물론이지만 한 학문을 위해 헌신한 그의 진지한 삶이 저를 매혹합니다. 아마 확실히는 모르지만 초등학교 생활의 길잡이에 나온 칸트의 규칙적인 생활 이야기를 접한 이후부터 그를 이렇게 받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광대한 칸트의 철학중에서 (물론 아는 바도 없지만...)그가 말한 인식이론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자신의 인식이론을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했습니다. 종래에는 대상에 따라 인식한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선천적 형식에 따라 대상이 들어와 인식된다는 것은 마치 천문학상에서 천동설이 지동설로 뒤집힌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인식에서의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란 대상이나 사물이 이미 완성된 상태로 주어져 있고, 우리가 그에 따라 모사하거나 반영함으로써 인식이 성립하는 대상 중심의 인식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고 그럭저럭 주어지는 대상을 인간이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나 사물로 만들어서 인식한다는 인간 중심의 인식론을 말합니다.


  간략히 말해 이전의 인식론은 주어진 명백한 대상을 우리가 인식해 가는 것이었다면 칸트의 인식론은 그냥 주어진 대상을 우리가 여러 가지 범주를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인식해 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여기 오이 한 접시가 가득 있다고 합시다. 저같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잘 씻어서 아삭 깨물어 먹고 싶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다면 오이마사지를 떠올릴 테고, 달팽이를 키워 본 사람(제가 옛날에 그랬죠...)은 오이를 썰어서 달팽이 먹이로 주고 싶을 겁니다. 이처럼 똑같은 오이를 두고서 사람마다 다른 인식의 형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끼는 것임에도 말만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면 며칠전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러다가 "개개인의 행복이 최대한 보장되고 개인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물음은 꼬리를 이었고, 그러다가 문득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공리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에 다소 의문을 가지던 저로서는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칸트는 절대론적 윤리설이고 공리주의는 상대론적 윤리설이지요.) 엉뚱하게 윤리 문제까지 번졌지만 결국에는 인간은 행복하게 살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행복의 방법론들을 모색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근 한달 간 행복주의니, 해피즘이니 하며 고민하던 저였는데 어느날 한 스님의 신문사설을 읽고 경악(?)했습니다. "반드시 행복해야 돼."라는 생각 속에서 행복은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그 글을 읽고 나의 지난 한달간의 논의가 얼마나 허망했는가 돌아보니 허탈 그 자체였습니다. 나만의 행복은 무엇일까 하며 갖은 궁리를 하면서 행복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서는 스스로 행복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해냈다며 자화자찬(?)했습니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것은 진리지만 때로는 얻기 위해 잃은 건지, 잃기 위해 얻은 건지 알 수 없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잃은 것에 가슴 아파하는 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겁니다. 잃은 것을, 모자란 것을 채워나가면 거기서 행복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얻은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설령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얻은 것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행복을 찾고자, 누리고자 헤매이지 않아도 되지 않을는지...


  이런 뻔한 이야기를 참 빙빙 둘러서 말했군요. 그래도 뭐... 어차피 행복이란 우리 삶을 영원한 화두일테니...


  달라이라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정한 자비심은 물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


  아직도 멀은 저입니다.

Posted by 익구
:

베개 두 녀석 덕분에(?)

잡록 2003. 7. 15. 21:08 |

<2001/11/20 쓴 글>

저의 침대에는 베개가 두 개 놓여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베개 두 개가 있는 것은 낯익은 제 방 풍경입니다.
한 녀석은 노란색과 남색의 체크무늬
한 녀석은 노란색도, 연두색도 아닌 어정쩡한 색깔...
두 녀석 중에 잠을 잘 때는 '체크무늬 베개'를 썼습니다.
그 베개가 더 낮아서 더 편하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 날 엄마께서 베개를 빨고 나신 후에
베개 껍데기를 바꿔 놓으셨습니다.
몇 년만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베개가 바뀐 관계로...
이제는 '어정쩡한 색의 베개'를 베고 자야했습니다.
하지만 며칠간은 무의식적으로
체크무늬 베개를 끌어다 베다가
높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베개를 바꿔야 했습니다.

밤마다 베개를 바꾸기를 며칠...
문득 "익숙함"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이 들더군요.

어린 왕자에서의 "길들여짐"이라는 단어도 스쳐갔지만
저를 흔들었던 것은 "실존(實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는 친구라는 이름을 얻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친구라는 이름에 머물지 않고
정말 익숙한 친구, 실존하고 있는 친구를
두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양(量)이 문제가 아니라 질(質)이 문제이기에...

과연 나는 얼마나 많은 친구에게 "실존"하고 있을까?
저는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실존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려고 하지만 쉽지만은 않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익숙한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누군가에게 실존하고 있다는 것,
익숙하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실존 해야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알 듯 모를 듯.
"나"라는 개체의 본질도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실존하고 있지 않다면
자신에게 익숙한 것 몇 개조차 두지 못했다면...
"나"라는 개체는 허상에 지나지 않을까요?

살아가면서 우리 안에 실존하고 있는 것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걸 명심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에 더 소중히 여겨야겠습니다.

만화 [원피스] 16권에서 닥터 히루루크의 대사를 꺼내봅니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냐? ...(중략)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내가 사라져도 내 꿈은 이루어진다.
"이어 받는 자"가 있다면..."

베개 두 녀석 덕분에(?)
새삼 익숙함의 축복, 실존한다는 것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실존하고 있는 것들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6(^.^)9

Posted by 익구
:

서글픈 잡담들...

잡록 2003. 7. 15. 21:06 |

<2000/11/10 쓴 글>

1.
[은행나무]

흔들린다.
떨어진다.
무심하게도.
으스러지고 나부끼는 너희들.

쓴 미소도 과분한.
차마 떨구어 내지 못하는 너희들.
내 마지막 작은 집착.

다가올 겨울의 추위보다
지난날 얘기들이 더욱 야위게.

눈물 몇 방울쯤 애써 외면할 뿐.


가을은 떠나는 계절이라고들 한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과연 나는 내게서 무엇을 떠나 보내야 할까? 한자로 '시름 수'자를 愁로 쓴다. '가을 추' 秋에 '마음 심' 心자가 합쳐진 꼴이다. 옛사람들도 가을의 마음은 시름뿐이었나... 괜스레 웃어본다. 시름을 달래고자 거닐어 본다.


2.
라이프니츠는 신이 이 세상을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넘쳐나는 악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반론한다. 그러한 악이 있기에 세상은 선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악이 없다면 선한 것은 결코 선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위해 있는 것이며,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비록 부분적인 악이 있다 할지라도 전체 속에서는 선한 것이며 무한한 신의 눈에는 결코 악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이런 그의 견해를 '철학적 낙천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어이할까. 그런 그도 말년에 실각하여 분루를 삼키며 고독한 나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화려한 지위에 있었던 라이프니츠도 정치적 몰락과 함께 그의 장례는 아무런 격식도 없이 초라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감히 이런 그에게 조소나 던질 수 있겠는가? 그의 오른쪽 다리의 혈액순환에 이상이 생긴 이유가 아마도 며칠이고 의자에서 떠나지 않을 때도 있을 만큼 공부를 계속한데 있지 않을까라고 전기 작가가 말한 그의 삶을 보며 나는 그의 사상에 감히 피식 웃어나 보일 수 있겠는가?


3.
제행무상(諸行無常)... 나는 어쩌면 허무주의자의 기질이 은연중에 많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공허감이 부족감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물질적, 직업적, 지적, 기술적, 사회적 부족감이 아니라 궁극적 '가치'에 대한 부족감. '의미' 부재에 대한 의식이다." - 박이문

공허감을 느낄 수 있는 여백의 마음이 절실하다. 왜 사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은 이제 접어두련다. 삶의 의미란 논술문을 작성할 것이 못된다. 개념으로 기술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아마도 삶의 의미란건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삶을 준비하는 데만 열심일까? 우리의 삶의 의미는 '여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만 있거늘... 훗날의 모습만 그리는데 삶의 보람을 써버리는 건 낭비이다.


4.
델리에 있는 간디의 동상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다. "간디는 진리를 믿고, 진리만을 생각하며, 진리대로 살았다." 아는 것, 믿는 것, 행하는 것을 서로 조화시키는 것... 어려운 일이다. 아는 바를 믿는 것은 쉽다. 그러나 행하는 것은 어렵다. 알면서도, 그렇게 믿으면서도 행함에 있어서 망설여짐은 비단 나만의 아픔은 아닐 것이다. "생각과 지식이 조화를 이룬 것을 '지혜(智慧)'라고 한다."고 나온 중학교 도덕책의 구절을 보며 지혜를 사랑하는 이내 마음은 달랠 길 없이 처량하다.


5.
이런 선문답이 있다.
"도란 무엇입니까?"
"평상심(平常心) 이니라."


남의 이야기, 물질적 욕심, 밖의 변화... 이런 것들은 좇다보면 마음은 흔들리게 마련이다. 세사에 마음을 빼앗기고 놀라고 화내고 미워하고... 부질없이 요원함만 한탄한다. 고독 때문에 괴롭다고 한다. 모든 이에게 나름대로 숨겨져 있는 고독을 보자. 고독 위에 사랑을 심자. 그런데 자꾸 나는 고독을 나의 채찍으로 삼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왜일까?


6.
[대나무를 심는 까닭]


식탁에 고기는 없을 수도 있겠으나
사는 집에 대나무가 없어서는 아니 될 일
고기 없으면 사람이 마르지만
대나무 없으면 사람이 속물 되기 마련
사람이 마르면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가 없다네
사람들은 이 말을 비웃어
고상한 듯하지만 역시 어리석다 말하네
대나무 옆에 두고 음식을 배불리 먹겠다 한다면
이 세상 그 어디에 그런 욕심 다 채울 사람 있으랴!

可使食無肉 不可使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 旁人笑此言 似高還是癡
若對此君仍大爵 世間那有揚州鶴

'기예론'에서 구박받던 소식의 시이다. 사람은 구박해도 시는 미워하지 말라인가... (이런... 위의 내 시랑 너무 비교돼잖아...T.T) 삶이란 추구의 연속이다. '나는 이걸 할래.' '이게 좋겠어.'... 이런 끊임없는 추구와 선택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내 삶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고기와 대나무... 아마 교묘히 타협하자고 그럴테지...


어여 떠나보낼건 떠나보내고 기쁜 마음으로 겨울을 맞이해보자. 6(^.^)9

Posted by 익구
:

노을에 취해서

잡록 2003. 7. 15. 21:00 |

이 글은 제가 고등학교 2학년(2000년) 여름 어느날 유난히 아리땁던 노을을 보고 "쓰인" (스스로 썼다기 보다 어쩌다 쓰였다고 하는 편이 맞을것 같습니다) 글인데 한글문서에 저장해 놓았던 것을 조금 고쳐서 여기다 풀어 놓습니다.^^

 

몸을 뒤척이며 개운치 않은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어 있더군요.


막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감상에 잠겼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한 단어...


"제․행․무․상"


 제행무상은 '삼법인(三法印)'중의 하나입니다. 삼법인이란 세상의 모든 일들은 덧없는 것이고(諸行無常),  일체의 존재하는 것들은 그 실체성이 없으며(諸法無我), 이처럼 모든 것이 덧없고 실체성이 없는 데로 불구하고 이를 추구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一切皆苦)를 말합니다.


 제행무상은 모든 존재는 영원 불변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 변화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한여름의 무더위도 이내 붉은 노을로 변하듯이...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줄로 믿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도 하지요.(저도 찔리는 군요.) 많은 이들이 약속하지요. '영원히, 언제나 함께' 그런건 부질없는 바램에 지날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 중에 '사람은 저마다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을 따로 해야 되고 행동도 같이 할 수 없다'가 생각나는 군요.


 제법무아는 일체의 존재가 공간적으로 자기의 고유한 성질이나 배타적 자기모습을 지닐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저의 삶의 제 1대 원칙이 '한결같은 삶' 입니다. 그것은 고정불변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변화와 갈등 속에서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나'또는 '나의 것'에 얽매이는 가련한 중생이여... (물론 저도 포함) 우리는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때 그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이다" (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中) 하지만 진심 어린 충고와 비판을 아껴서도 안될 것입니다.


 일체개고는 삶은 고통의 바다(苦海)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미운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 등의 숱한 괴로움 속에 허덕입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려고 하고... 이 모든 것이 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욕망과 집착에 있는 것이라고 불가에서는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집착에 욕심, 성냄, 어리석음, 교만,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것들에 얼마나 자유로우신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불국정토(佛國淨土)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읽느라 지루하셨을 이 어수선한 글의 결론은...



“노을에 취해 보지 않은 자, 술에 취하지 말지어다.”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