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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5 민노당, 분당이 불가피한가

1.
민주노동당에 대한 잡설을 늘어놓으려니 문득 이태 전에 읽었던 책 두 권이 떠올랐다. 백낙청 선생님의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최장집 선생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고 내 사상의 지평이 넓어진 듯한 착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고작 책 두 권을 읽고 유식해졌다고 자화자찬에 빠질 정도로 두 분의 글은 매혹적이었고 배울 점이 많았다. 혹자들은 두 진보진영 거성 사이의 논쟁이라고 싸움 구경을 유도하기도 했으나 사실 그 정도의 불꽃은 튀지 않은 듯싶다(반박과 재반박을 주고받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 선생님이 문제 분석에 탁견을 보이셨다면 백 선생님은 대안 제시에 설득력을 더했다는 게 내 졸견이다. 문제 파악과 해법 모색을 각기 다른 분의 손을 들어주다니 내 지적 분열(?)이 우습다.^^;


내 모자란 머리로는 통일문제와 계급문제를 어떻게 분리하고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지 아직 감이 잘 안 오기 때문에 그런 두루뭉술한 양시론을 펼쳤는지 모르겠다. 일전에 박현채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 변혁운동의 두 가지 이론적 경향을 두고 “PD적 입장에 서지 않은 NL의 비계급성은 허구이며 PD 역시 민족해방의 과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시기도 한 만큼 나의 어정쩡한 태도도 마냥 구박받을 일을 아닐 게다.^^; 능력이냐, 도덕이냐를 묻는 것처럼 통일이냐, 계급이냐를 묻는 것도 너무 잔인하다. 직관적 판단에서 좀 더 나가고 싶지만 이런 식의 비율 배합 문제는 명쾌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 대개 암묵지의 성격이 짙어 귀걸이, 코걸이가 난무할 가능성이 많은 탓이다.


최 선생님은 NL(민족해방)-PD(민중민주)의 두 구성요소가 분리되어 PD적 문제의식이 약화 또는 소진된 것을 문제로 지적하신다. 이 대목에서 신자유주의가 절제 없이 창궐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NL은 PD적 요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하나의 민족주의로 전락될 것이 분명하다”라고 역설하시며 민족주의적 정서로 민중 문제를 무마하는 걸 경계하신다. 반면 백낙청 교수님은 BD(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제3자를 제시해 NL, PD, BD의 3자 결합을 통한 변혁적 중도주의를 꾀하신다. 물론 민족통일을 중시하는 자주파인 NL,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중시하는 평등파인 PD, 개량주의 시민운동 및 온건개혁세력인 BD가 매끄럽게 융합하는 건 무척 까다로운 과제다. 신자유주의의 가속화에 대한 NL, PD와 BD는 적잖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고, 남북관계의 경색에 관해 NL과 PD, BD는 저마다 상이한 행보를 보였다.


특히 BD는 하나의 단일한 세력으로 보기 힘들만큼 다채로워 정리하기가 까다롭다. 자칭 개혁정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의 현란한 잡탕 퍼레이드만 봐도 그렇다(대통합민주신당은 아예 논외로 치자).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보수 우경화의 파고가 거세질 때 BD라고 통칭할 만한 세력의 유의미한 생존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유의미한 생존이란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말한다. 기실 자유주의 개혁세력(아쉬운 대로 이렇게 칭하겠다)은 2002년과 2007년 대선에서 단독으로 집권하지 못했다. 2007년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이 얻은 26.2%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율 21.2%을 상기해볼 때, 자유주의 세력은 단일화를 비롯한 각종 정치공학을 동원해도 집권 못할지도 모른다. 열린우리당도 건사하지 못한 자유주의 세력이 한나라당과의 차별화보다는 개별 투항하는 선택을 한다면 어떨까. 퇴행적 민주주의가 도래할 때 한나라당의 일당 독재를 염원하지 않는 대다수 민주공화국 시민들에게 불행하다. 지리멸렬한 BD는 그래도 25% 언저리의 득표율은 보이고 있지만 NL과 PD의 분열은 보다 더 치명적이다.


2.
2007년 대선에서 3% 득표에 그쳤던 민주노동당은 요란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미리 밝히지만 나는 민노당에 대해 잘 모른다. 어느 정당에 대해 얼마나 알아야 잘 안다고 뽐낼지는 애매한 문제다. 나는 적어도 대통합민주신당이나 한나라당에 견주어 민노당을 잘 모른다. 이건 민노당 지지자를 제외한 평균적인 한국인의 인식 수준과 크게 어긋나지 않다. 나는 민노당을 잘 몰랐기에 순진하게도 사회당과의 통합은 왜 추진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자주파 분들은 북한 생각에 여념이 없고, 평등파 분들은 고초를 겪느라 상심이 컸을 테니 사회당과의 통합은 검토할 여력이 별로 없었나 보다. 평등파의 논리를 좀 고약하게 패러디 해봤으니 너무 괘념치 마시길 바란다(이제부터는 요즘 많이 쓰이는 용어대로 NL, PD 대신 자주파, 평등파라 지칭하겠다). 국외자인 내가 볼 때 민노당 내 평등파 일각의 진보신당 주장은 당혹스럽다. 그 자체가 괴이하다는 게 아니라 최후의 카드를 꺼낼 시점인지 고개를 가로젓게 만든다.


우선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은 사실관계는 당최 민노당 내에 종북(從北)주의자 혹은 주체사상파가 그토록 많아서 당내 다수파를 점유하고 있냐는 점이다. 자주파라 불리는 정파의 전부가 종북주의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율은 얼마나 될까, 자주파 가운데 스스로를 종북주의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걸 대외적으로 천명할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공산이 크기 때문에 가늠하기 힘들다. 자주파와 평등파 양측에서 이 사실관계에 대해 합의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서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표류하는 판국이다.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조차 설득하지 못해 저주를 퍼붓는 논리와 가슴으로 대체 누구를 설득할 셈인가”라는 손석춘 선생님의 일갈은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어 한 말씀이더라도 맞는 말이다. 서로를 헐뜯는 정당에 표를 줄 유권자는 없다.


나는 자주파가 통일운동을 중점으로 삼고, 평등파가 노동운동을 중시한다고 알고 있다.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이지만 1990년대 들어 동구권 몰락과 궤를 같이해 PD계열이 쇠락하고 민족, 통일문제로 파고든 NL계열이 학생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고 대강 들었다. 자주파가 시대정신의 일부를 부여잡은 건 환영할 일이다. 이는 그네들의 교조주의적 일사불란함 덕만 작용했다기보다는 전략적 유연성도 한 몫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열린우리당 2중대라는 내부 비판도 있었지만). 자주파가 이런 성과에 얽매여 북한의 인권 문제에 있어 머뭇거리는 건 사실이다. 평등파가 이에 대한 비판을 던지는 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평등파가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공은 분점하면서, 친북적이라는 항간의 질시를 논박하기보다는 자주파에게 다 떠넘기려고 하지는 않았나 살펴봄직하다.


조승수 전 의원과 김창현 전 사무총장이 한겨레신문 지상에서 벌인 격론을 읽다 보니 다른 정당 사람들끼리도 이렇게 차이가 날까 싶다. 물론 부러 차이점을 드러내기 위한 토론이고 그 차이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노당의 건강함을 칭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민노당이 정파연합정당이라고 하더라도 이쯤 되면 좀 지나치긴 하다. 자주파는 험하게 말해 감상적인 민족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적 관점에서 보자면 자주파의 민족의식은 보수에 가깝다. 자주파가 한국적 맥락에서 진보로 인플레이션이 되는 현실이 한국 정치의 낙후성을 방증한다. 자주파의 논리가 백해무익한 건 아니다. 백해무익한 일부가 있겠으나 그건 극단적 입장이 보이는 일반적 폐해일 뿐 자주파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평등파에는 백해무익한 사람이 없겠는가(백해무익은 과장된 표현이다). 그런데도 같이 못해먹겠다는 아우성이 적잖은 것을 보면 자주파의 논리보다는 태도에 문제가 더 있었다고 추정된다.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싼 다툼이라든가.


3.
평등파와 자주파가 아름답게 결별하기에는 상황이 엄혹하다는 것도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한국사회당이 민주노동당의 위태로운 동거를 가열차게 비판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사회당의 그런 질타가 자신들이 번번이 제도권 진출에 실패하고, 2007년 대선에서 고작 0.07%를 득표한 참상을 가리는 건 아니다. 대선 참패라는 도화선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자주파와 평등파의 내홍이 임계점을 넘었다는 소식에 갸우뚱하는 건 상식적인 반응이다. 미우나 고우나 지난 세월 한솥밥을 먹던 동지들을 광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건 황당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 근래 증세(?)가 심화되어서 감당하기 힘들다는 항변을 할지도 모른다. 혹은 그래도 좀 나아지겠거니 생각했는데 오히려 전횡이 심해진다는 볼멘 소리도 있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노당의 패착에 평등파가 책임이 덜할지는 모르나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민노당에 진솔한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과문한 탓일까.


물론 민족지상주의와 통일근본주의는 그르다. 그것은 민족이나 통일이 나빠서라기보다는 모든 지상주의와 근본주의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평등파가 민생과 평등을 강조한다고 해서 민족이나 통일까지 내치지는 않을 게다. 여하간 자주파가 당내에서 얼마나 폭력적이었는가 하는 사실관계 또한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어 갑갑하다. 그런데 이 문제가 진행되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험담이 자꾸 나와서 서글프다. 민족주의도 개념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다툼이 있지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좀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가 계급모순을 가려 지배층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지적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한국 사회에 넘치는 건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가주의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가령 이라크 파병의 논거는 국가주의지 민족주의라고 보기 힘들다. 민족주의에서 국가주의를 발라내는 것이 단지 관념적인 유희일지 잘 모르겠지만 민족주의를 도매금으로 쳐내는 건 신중했으면 좋겠다.


혹여 이 잡글을 끝까지 읽으시는 분들 중에 내가 자주파를 편든다고 오해하실까봐 걱정이다. 내가 얼마나 북한 정권을 혐오하는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자주파로 표상되는 민족주의에 대한 연민을 표할 따름이다. 자주파를 솎아내야 한다는 열정이 지나쳐 민족주의마저 악마 취급당하는 건 막고 싶다. 과연 모든 민족주의는 나쁜 것일까? 국가주의에 맞서는 민족주의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일까? 자주파는 인적 청산의 대상일 뿐인가? 좀 더 궁리해봐야겠다. 평화 정착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분단된 채로 살아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보는 사람도 늘고 있다. 평화를 넘어 통일을 지향한다는 건 분단이 비정상적 상태라는 인식을 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이 넘쳐서 통일문제를 절대화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분단 조국을 아파하는 사람들 모두를 죄악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럴 일은 드물겠지만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이다.


민노당의 지지자가 아닌 사람이 민노당의 분당이나 몰락을 슬퍼할 까닭은 없다. 하지만 민노당을 찍지 않은 97%의 유권자들도 민노당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고, 지금보다는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게 맞다고 한 번쯤은, 아니 두 번쯤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입술이 닳아 없어진다면 우리네 이는 무척 시릴 테다. 민노당에 왜 문제가 없겠냐만 이 정당이 인권이나 복지 같은 사안뿐만 아니라 ‘어떤 경제성장이 되어야 하느냐’는 문제 제기에 쏟은 정성은 마땅히 평가해야 한다. 자주파의 폭거가 싫어 탈당했다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견제하겠다며 입당한다는 사람은 못 봤으니 민노당이 끝끝내 자기 정화에 실패할지도 모르겠다. 2008년 총선에서 진보정당 지지자들이 자신의 사표(死票)를 어느 당에 던져야 하나 고심하는 광경은 얼마나 애달플까! 이러다가 나 같은 녀석마저 민노당을 비판적 지지라도 해야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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