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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문화 2007. 11. 26. 15:34 |

지난 11월 3일 있었던 공민왕사당 답사에 함께 해준 청원이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0^

<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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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창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안내 표지판이 고맙다.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이다. 민(愍)은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어울리기는 하나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깎아 내렸다는 느낌이 짙다.



“이건 뭐냐!” 친구의 탄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전면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문이 닫혀 있어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인 만큼 노여움(?)을 풀라고 다독였다. 친구가 고른 저녁 메뉴가 실망스러웠기에 망정이지 지청구가 더 날아올 뻔했다. 사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을 찾다 보면 개방하지 않는 곳도 많고 퇴락해서 안쓰러운 경우도 흔하다. 함께 온 벗에게 미안한 마음에 마포구청에 몇 가지를 물었다. 마포구청 문화체육과에서는 사당 보수공사에 관한 안내가 부족해 문화재 관람에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씀해주셨다. 노후된 사당을 보수하는 공사는 10월 초에 착공하여 12월 초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보수를 마쳐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화재예방 및 사당내부 소품 보호를 위해 개방하지 않을 계획이란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조선 초기에 양곡창고인 광흥창에서 일하던 창고 관리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지어졌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공민왕을 모시는 건 반역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삼불제석(三佛帝釋)을 모시고 신당 또는 당집으로 부르다가 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이 복권되던 1790년경 비로소 공민왕사당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일제 강점기 때 화마를 입었다고도 하고,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고도 한다. 소실된 사당을 주민 스스로 건축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민간 전통건축기술 수준을 헤아리게 하는 자료로 평가되어 등록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공민왕의 위대성은 그 당시에도 인정받은 모양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공민왕에 대한 제사는 이어졌다. 이러한 숭모 분위기가 이어져 창전동뿐만 아니라 종묘 안의 공민왕신당이나 경북 봉화군 청량산 공민왕당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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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와우산 아래 광흥창터에 인접해 있다. 공민왕사당의 터는 옹색해서 도무지 사진 찍을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사당 옆의 담들은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 民俗大觀』 1권과 『마포 : 어제와 오늘, 내일』이라는 책에 공민왕사당의 내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진 자료들이 다수 있다. 공민왕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신상 외에도 최영장군과 마부, 삼불제석과 동자상 등이 걸려있다. 공민왕 신상은 제법 화격(畵格)이 있는데 황색 곤룡포가 미려하고 호피무늬 의자가 위엄을 더한다.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적들이 상당 부분 날조되었음은 널리 알려졌다. 붓이 굽었던 건 오백 년 고목을 찍어 넘기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던 셈이다. 공민왕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했다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험담과는 달리 넉넉한 신상의 모습이 반갑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 화가로 손꼽히며 글씨도 잘 썼다는데 예술가적 풍모가 얼마나 녹아나느냐가 공민왕 어진의 알맹이가 아닐까 싶다. 과연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시대 인물과 관련된 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옛것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시대만 떠올린다. 우리네 유구한 전통에 감춰진 여러 겹의 속살을 헤집기 위해서 고려도 알고, 근현대도 탐구하는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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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없었던 일각문(一角門)을 새로 만드는 듯싶다. 90년대 초 사진을 보니 투박한 철문을 달아놓았는데 그 후 태극문양을 집어넣었다. 점점 사당의 모양새를 갖추어 간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2001년 7월 도입됐다. 그동안은 일제 잔재라는 오명과 개발 광풍 속에서 멸실되기 일쑤였다면, 이제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준다. 등록문화재 제도가 정착된다면 일상의 흔적들에 대한 기록과 보존도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지정문화재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정책이다. 중앙정부나 지자체 지정문화재가 각종 규제를 수반하고 있어 재산권 침해가 불가피한데 견주어 등록문화재는 보존이나 활용에도 융통성이 많은 편이다. 소유자 중심형 문화유산 보호제도로서 국가는 각종 혜택을 통해 소유자의 활용 의사를 북돋워주는 방식인 셈이다. 흥미로운 등록문화재들이 많지만 공민왕사당도 매우 이채롭다. 근대에 지어졌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물은 600년도 넘는 옛날이다. 공민왕의 험난한 좌절을 따가워하기 좋은 곳이다.


공민왕은 민간신앙에서 받드는 몇 안 되는 임금이다. 무당을 소재로 한 소설 『계화』에는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민왕을 기리는 민중이 있다는 건 그 불운함에 대한 동정인지도 모른다. 무속은 비운의 죽음일수록 오히려 각별하다. 공민왕의 억울함이 우리네 서글픔과 잘 포개진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한국인에게 곧잘 한(恨)의 정서가 있다고들 한다. 이는 결국 한스러움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너무 헝클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문화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체현한 것이 마을굿이며 공민왕의 한을 푸는 것이 공민왕사당제다. 인습을 버리고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명분으로 서민의 소박한 기원을 무시할 용기는 내게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날 지역화합의 마당으로 살리는 방안을 고심해봤으면 좋겠다.


옛 기록을 살피다 보면 공민왕의 개혁이 어찌나 지난했던지 가슴이 짠하다. 부원배를 몰아내는 건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돈의 개혁에 얼마나 많은 저항이 있었는지를 엿본다. 북방을 개척했던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의 분노를 달랠 때는 참담했다. 관제를 격상시켰다가 다시 격하시키고, 원나라의 연호를 정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역경에 마음이 아렸다. 명나라 사신이 기녀의 실수를 트집잡아 항의하자 시중 염제신이 유배되는 대목에서는 괴로웠다.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돌아가자 애이불상(哀而不傷)에 실패해 총기를 잃은 게 단지 성정의 모자람 때문은 아니었다. 숙명은 그의 의지를 압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결과로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듣기 좋은 개혁 구호를 늘어놓는 지금의 지도자들이 경계 삼을 일이다. 부정적 지식(negative knowledge)이라는 말이 있다. 실패나 실수, 잘못으로부터 얻는 지식을 일컫는다. 우리는 성공보다는 실패로부터 많이 배운다. 고초 속에서 잉태되는 개혁을 입으로만 외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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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맞배지붕에 2칸으로 된 건물이다. 사당 옆으로는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운동기구가 있다. 맞은 편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데 주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활용될 것 같다.

영구히 보존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등록문화재는 외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고치거나 증축이 가능하다. 사당을 새로 짓는 모습을 보며 저래도 되나 싶었던 내 궁금증도 멀끔히 풀렸다. 아마 보수공사를 결정한 중요 원인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리라. 등록문화재 지정을 전후로 훼손된 근대문화유산들이 적잖다고 들었다. 다행히 공민왕사당은 마포구민의 지속적인 관심 덕에 새 단장을 준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공민왕사당제에 힘입어 이 작은 사당이 지역주민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친숙한 존재로 각인된 덕분이다.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는 찾기 나름이고 가꾸기 나름이다. 서운해하던 친구에게 등록문화재의 취지를 설명하고 금단청까지 잘 마르면 다시 찾아오자고 권해야겠다. 가서 고하리라. 대왕 당신을 도무지 미워할 수 없었다고.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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