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백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6.06.21 그레셤의 법칙을 넘어서 2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이란 이름은 1858년 H. D 마크로드가 명명한 것이다. 영국의 금융가인 그레셤(Thomas Gresham, 1519-1579)이 내놓은 화폐 유통에 관한 법칙으로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는 말이다. 이는 그레셤이 악화를 개주(改鑄)하여 외국환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구상을 엘리자베스 1세에게 진언한 편지 속에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는 한 사회 안에서 귀금속으로서 값어치가 큰 화폐와 값어치가 작은 화폐가 동일한 화폐가치를 지니고 유통되는 경우(실질가치가 다른 두 화폐가 똑같은 명목가치를 지닐 경우), 귀금속 가치가 큰 화폐는 유통에서 사라지고 가치가 작은 화폐가 활개를 친다고 주장했다.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쓰인 돈은 모두 은화 아니면 동화였다. 지폐와 달리 금속화폐는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했다. 1파운드의 금이나 은이 그만한 가치를 액면으로 반영했고, 그 무게단위가 화폐단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에서 재정 부담을 줄이고자 순도가 떨어지는 은화나 동화를 생산해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은화는 쓰지 않고 저장해 두고, 순도가 낮은 은화만 널리 사용했다. 가령 빳빳한 새 지폐는 좀 더 보관하려 하고, 너덜너덜 낡은 지폐는 얼른 써버리는 행위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금화와 은화가 똑같은 액면가를 가질 경우 될 수 있으면 금화는 쓰지 않고 저장하고, 은화만 쓰게 된다. 금화는 차라리 녹여서 금괴나 장식물로 쓰거나 해외로 반출하는 게 이득이 되어버린다. 가령 희소성이 있는 기념주화가 거의 유통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기 그 뿐인가. 주화 가장자리를 조금씩 깎아내 모은 금, 은을 팔았다고도 한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당백전(當百錢)을 찍어내 강제로 사용토록 했다. 당백전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 엽전)의 100배에 해당하는 큰돈이었지만 중량은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았다. 당백전의 실질가치는 명목가치의 20분의 1밖에 되지 않은 셈이다. 상인들이 당백전 받기를 꺼리자 강제로 당백전을 유통시키기 위해 애썼고 나중에는 양화인 상평통보 대신 악화인 당백전만 유통되어 물가가 폭등했다. 당시 백성들은 당백전에서 백자를 뺀 당전을 거세게 발음해서 ‘땅전’이라 불렀고, 땅전은 뒤에 ‘땡전’으로 일컬어졌다. 당백전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화폐발행차익(seigniorage)을 이용해 경복궁을 다시 지어 후손들에게 번듯한 문화유산을 물려줬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오늘날에는 금속화폐 대신 신용화폐를 주로 사용하다 보니 그레셤의 법칙은 화폐 유통을 설명하는 적실성을 잃었다. 오히려 경제학 이외의 분야에서 다양하게 응용되는 경우가 많다. 경영학자 H. A.사이먼은 경영의 의사결정문제로 전환해 “계획의 그레셤법칙”을 주창했다. 이는 경영자가 정형적 결정 책임과 혁신적 결정책임을 동시에 지니고 있을 때 일상적인 정형적 문제처리에 쫓겨 혁신적ㆍ전략적 결정을 놓치거나 미루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장기적 수익모델을 창출하고 급변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혁신적ㆍ전략적 결정이 통상 사무처리인 정형적 결정에 밀려 버리는 것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매일 매일 주문처리와 재고관리에만 얽매여 있다가 신기술 도입이나 신상품 출시를 소홀히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혁신적 결정을 수행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며 전문화된 부서를 설치하는 게 필요하다.


이런 다소 엄밀한 학적 개념 외에도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그레셤의 법칙을 적용해볼 수 있다. 본래 그레셤의 법칙은 선악의 가치판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 영역으로 확대 적용되어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득세하는 세상을 개탄할 때 자주 쓰인다. 가령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을 때 정직하고 유능한 사람이 부패하고 무능한 사람에게 밀려날 때 그레셤의 법칙을 떠올려봄직 하다. 양질의 전문 학술 서적은 맥을 못 추고 할인 경쟁을 하는 대중서적들만 난무하는 도서출판계의 사정도 비슷하다. 어쩌면 이토록 다양한 변용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이기심을 바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나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니 하는 말들이 허울뿐인 구호라는 체험적 지식에서 연유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反그레셤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다. 디지털 기술 기반의 여러 제품이나 서비스가 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제품이나 서비스로 탈바꿈하는 것을 가리키는 디지털 컨버전스(Digital Convergence)가 그 주인공이다. 기술 경계를 허물고 통합해 새로운 기술을 지향하는 흐름에는 악화가 마냥 넘쳐날 수 없게 만든다. 즉 시장지배세력이 기득권에 안주하며 신제품의 출현을 지연시킬 여지를 줄이게 된다. 소니는 브라운관 TV의 명품 브랜드인 베가(WEGA)를 지키려고 했지만 삼성전자를 위시한 LCD TV의 성장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소니는 2005년 LCD TV 전용 브랜드인 브라비아(BRAVIA)를 출범함으로써 LCD TV 경쟁에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디지털컨버전스와 반 그레셤의 법칙” 전자신문. 2004. 03. 08. 참조). 이처럼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경우가 좀 더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악화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자발적인 혁신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양화와 악화로 가름하는 건 편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재미나기까지 하다. 그레셤의 법칙을 들어 악화가 만개하는 세상이 도둑처럼 찾아오게 하지 말자고 외치는 건 얼마나 명쾌하고 통쾌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양화와 악화의 이분법으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양화와 악화의 건곤일척을 상정하면 싸움 구경하는 재미야 있겠지만 다원주의 사회에서 명백한 악화는 드물기 때문이다. 어쩌면 독선과 오만이야말로 진짜 악화인지도 모른다. - [小鮮]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