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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들

일기 2007. 12. 3. 13:31 |
우수리를 모아서 업데이트 해봤습니다.^^;

070723
김현근님이 쓴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 (2006, 사회평론)를 우연히 집어들게 됐다. 과학영재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 수시 특차로 합격한 청년의 공부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제목이 너무 거창한 게 흠이지만 수재의 일상이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를 느끼게 해줬다(나는 그 시시함을 흠모는 하되 실천하지는 않는 녀석이다). 현근님은 소싯적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사장의 『7막 7장』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릴 적 나도 그 책을 읽었지만 내게는 큰 영향력을 끼친 거 같지는 않다. 왜 나는 그를 떠받들지 못하고 나와 다른 사람이 이 지구상에는 많구나 하는 식의 깨우침밖에 얻지 못했을까. 작년에 읽은 고승덕 변호사의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에 대한 교훈도 그와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이를 어찌할꼬.


사소한 트집을 잡자면 이런 식의 성공기는 인간은 노력만 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철학을 설파하기 일쑤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사람의 재능이 동질하지 않다는 점은 또렷하다. 아무리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노력이 유일 변수가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네들이 살인적인 학구열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현근님 같은 분들이 타인의 노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주고, 노력하려는 의지를 꺾는 환경을 살필 줄 아는 시야도 갖췄으면 좋겠다. 내심 뛰어난 머리는 사회의 공공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기도 하다. 빼어난 재주는 자신에게 별로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으로 보답해야 하지 않겠냐는 대다수 범재들의 질투를 부러 부인하지 않겠다. 이 시기심은 의외로 온당할 때가 많기도 하다.


현근님은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문구를 인용했다. “슬플 때 절망하지 않고 기쁠 때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42쪽)”라고 한다. 문득 잊고지내던 이 명구를 처음 접했을 때의 아찔함을 떠올랐다.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내가 큰 승리를 거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 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기고, 동시에 그 글귀는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도 함께 줄 수 있는 글귀여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보석 세공인은 문구를 고심하느라 끙끙 앓다가 솔로몬 왕자의 도움을 청했다. 솔로몬은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로 정했다. “왕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 이 글을 보면 자만심이 가라앉을 것이고, 낙심 중에 이 글을 보면 이내 큰 용기를 얻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친절한 해설도 덧붙여서 말이다. 유대교 문헌 미드라시(midrash)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 뛴다.


그러고 보면 환희와 시련이 잇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수그러들지 않는 기쁨이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한 것은 극소화되게 마련이다. 영민함을 뽐내던 솔로몬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고 읊조렸다. 하지만 덧없음이야말로 생명의 본질 아닐까? 구차한 변명 같지만 한번뿐인 삶은 어떻게 살아도 그 개인에게는 각별하다. 나는 아마 김현근, 홍정욱, 고승덕 같은 분의 삶의 궤적을 따르지는 못하리라. 비록 그들보다는 한참 게으르고 무식한 나이지만 그들과는 다른 보람찬 삶을 꾸려볼 수 있지는 않을까? 나는 절대적인 올바름도, 고정적인 아름다움도 믿지 않는다. 이 매력적인 사람들을 따르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른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071029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나오는 샹그릴라(Shangrila)는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어느 마을이다. 책을 읽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개된 바에 따르면 티베트 사원이 있고, 평화로운 대초원이 있는 곳으로 그려지는 모양이다. “순수한 자연상태란 지상에서 대다수의 인간이 가장 덜 사악하고,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말했던 루소의 자연상태처럼 다툼과 갈등이 없는 곳이다. 거기다가 무병장수까지 한다. 힐튼이 이 소설을 썼던 1933년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대공황의 참상으로 뒤숭숭한 시대였다. 작가는 시절이 하수상할 때면 으레 찾고 싶은 이상향을 그린 듯싶다. 1942년 전쟁에 지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메릴랜드주에 지은 대통령 별장을 샹그릴라라고 이름짓기도 했다.


1997년 중국 정부는 샹그릴라가 티베트와 맞닿은 윈난성(雲南省) 중뎬(中甸)과 더친(德欽)의 중간 지점이라고 발표했다. 2001년 12월에는 아예 중뎬의 지명을 샹그릴라(香格里拉)로 개칭했다. 중국은 제 나름대로 엄밀한 조사를 벌였다고 주장은 하지만 관광 수입을 노린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괜히 동북공정 같은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그네들은 무릉도원마저도 제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2003년 유네스코는 샹그릴라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으며 샹그릴라는 윈난성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어 많은 돈벌이를 하고 있다. 중국 안에서 가난하기로 손꼽히는 소수민족들이 사는 윈난성의 살림살이가 이 덕분에 핀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관광객 편의를 위한 개발로 옛 모습을 잃고 있다는 탄식도 적잖다.


중국 정부의 상술은 얄밉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려는 고충은 나무라기 힘들다. 자연미에 인공미(!)를 더한 샹그릴라 사례는 우리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사극 열풍으로 드라마 세트장은 여기저기 지어진 모양인데 그 수준을 넘어서는 관광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인의 가슴에 새겨지는 관광지를 몇 개쯤 가꾸는 건 거기서 얻는 수입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이미지와 자존심 차원의 문제다. 볼 것 없고 살 것 없는 나라가 경제 성장을 얼마나 더한다고 세계인들의 기억에 남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조지프 나이(Joseph Nye)가 설파했던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쉽게 말해 다른 나라의 마음을 끄는 힘이다.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로 제시된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이 껄끄러워서 ‘매력’이라고 쓰기도 한다. 뭐라고 표현하든 우리에 걸맞은 샹그릴라를 찾자.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는 ‘내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고 말레이어로는 ‘영원히 젊은’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이 말처럼 마음 속에서 꿈과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영원한 젊음은 또 어떤가. 사무엘 울만이 <청춘Youth>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듯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라는 시구와 만난다. 후배 성구가 샹그릴라라는 필명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행복도 캐내고, 부조리도 헤집길 바란다. 안휘준 전 문화재위원장은 후생가외(後生可畏)가 아니라 후생가애(後生可愛) 정신을 강조하셨다. 사랑 받을 만한 후배이니 후생가애는 애초에 당연하고, 후생가외도 코앞이다. 나도 젊으니 함부로 후생가외를 외쳐서는 안 되겠지만. ^^;


071104
이기백 교수는 2003년 초에 펴낸 『한국전통문화론』에서 무술(巫術) 신앙은 인습의 대표적인 예로서 계승할 가치가 없다는 문제 제기를 했다. “기복신앙으로 전락한 무술신앙은 이미 오늘의 한국에서 종교적인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주장이다.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무속신앙을 박물관 전시품이나 연구자료로만 박제화하라는 견해에는 조심스럽다. 종교로서 기복신앙적 성격은 있게 마련이라는 항변도 설득력 있지만, 무속신앙이 민중의 물질적 희망을 채웠다는 점을 흘겨 볼 필요는 없을 듯싶다.


오랜 세월 지배계층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서민의 종교로 자리매김한 무속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무속은 나라에서 해주지 못하는 일을 신을 이용해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몸부림이었다. 인간의 생사화복, 불로장생 같은 살아가는 문제에 치중하다 보니 윤리적 요소나 정신의 문제가 적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은 무속의 특색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단점은 한국에 전래된 자칭 고등종교들에도 고스란히 이식됐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걸 부추길 의도는 없다. 하지만 제 것을 부러 폄하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고쳐야할 습속인 듯싶다.


최준식 교수는 『최준식의 한국 종교사 바로보기』에서 한국의 종교 전통은 유불선(儒佛仙)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한국의 종교전통에서 ‘선’보다 중요한 것은 ‘무(巫)’이므로 이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종교사 안에서 무교(巫敎)가 차지한 위상을 재정립하자는 제안은 신선하다. 무당을 소재로 한 소설 『계화』에 나오는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 불행해서 널 찾아왔다가도 행복해지면 침을 뱉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서러워도 하지 말고 노여워도 하지 말고 원망도 하면 안 된다. 무당은 아픈 사람, 억울한 사람, 불행한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라는 대목이 떠오른다.


무속은 비운의 죽음일수록 오히려 각별하다. 한국인에게 곧잘 한(恨)의 정서가 있다고들 한다. 이는 결국 한스러움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너무 헝클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문화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체현한 것이 굿이다. 계승할 가치가 있는 전통만 이어 받는다는 명분으로 서민의 소박한 기원을 무시할 용기는 내게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날 지역 화합의 마당으로 살리는 방안을 고심해봤으면 좋겠다. 나는 무속을 부정하고서 우리가 꾀할 부귀영화가 그리 탐스럽지 않다고 본다.


나는 무속을 권장하자고 주창하는 게 아니다. 그냥 있는 건 내버려두자. 무속을 미신이라고 지나칠 정도로 험담하는 분을 보면 문득 섬뜩하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 없는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었던 기억에 오싹하다. 무녀(巫女)의 금법(禁法)이 엄하던 시기의 일이다. 장령(掌令)으로 있던 조자(趙孜)는 무녀들을 멀리 내쫓거나 집단 수용하자고 아뢴다. 세종대왕은 “무릇 법을 세우는 것은 시행하기 위한 것인데, 시행할 수 없는 법은 세울 수 없는 것이다(凡立法, 爲可行也, 不可立不可行之法也)”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세종실록 제101권 세종 25년 9월 2일). 이 마음가짐을 좀 배우면 안 될까?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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