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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7 세한의 백송(문화재청 공모전 은상 수상작) 2

문화재청의 2009년 하반기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의 주제는 ‘천연기념물과 명승’이었습니다. 기대하지도 못한 큰 상을 받게 되어 그저 민망합니다. 글자수 제한과 시간 제약 때문에 문장을 급하게 줄이느라 생긴 어색한 표현과 오타를 일부 수정해서 올립니다.


1. 끝내 기도하다

천연기념물 8호 ‘재동의 백송(白松)’을 만나러 서울 북촌을 거닌다. 헌법재판소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 뒤뜰의 백송을 마주한다. 백송에 다가가기 전에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을 얻길 바라는 기도 따위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하얀 빛깔에서 빚어내는 신령함에 넋을 잃고 내 탐욕을 늘어놓았다. 나를 위한 기도가 조금 덜 추하도록 애써야겠다.


2. 소나무를 사랑하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무를 조사하면 늘 소나무가 1위를 차지했다. 2005년에는 소나무재선충병 방제특별법을 제정하기도 했는데 소나무라는 특정 수종을 지키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한 보기 드문 일이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 소나무는 가장 애틋한 인연을 맺은 나무인 셈이다. 옛날에는 아이가 태어날 때 소나무 가지를 끼워 금줄을 쳤다. 이 아이는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자랐으며 소나무를 땔감으로 삼은 밥을 먹었다. 소나무 껍질로 구황을 하기도 했다. 세상을 떠날 때도 소나무로 짠 관에 들어가 솔숲에 묻혔다. 이처럼 일평생 베풀기만 하는 소나무에 대한 고마움으로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를 의인화해서 벗으로 삼았다. 속리산의 정이품송은 벼슬을 얻었고, 경북 예천의 석송령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장학금도 주고 세금도 낸다. 자연을 이용하는데 급급한 오늘의 세태와는 사뭇 다른 자세다. 전북 전주의 삼천동 곰솔은 누군가 독극물을 투여했는데 천연기념물 지정으로 말미암은 불편함에 대한 앙심으로 추정한다니 씁쓸하다.


물론 소나무는 단순히 실용성에서 그치지 않고 고유의 매력이 넘친다. 그 매력이 생활 속의 친숙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일찍이 공자는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어려울 때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는 뜻처럼 소나무 하면 굳은 절조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앞선다. 성삼문은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겠다고 읊었고, 이개는 현릉(顯陵)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다고 노래하며 두 사육신은 죽음을 맞았다. 더우면 활짝 피었다가 추우면 말라 버리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하지만 이를 거슬러서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한결같은 소나무의 모습을 닮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옛사람들의 마음자리를 흠모한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면 소나무 감상이 차가운 이성의 눈매로만 다할 수 없음을 알겠다.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할 때 이상적은 추사를 위해 서책을 수집해 보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인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에서 느낀 바가 있었으리라. 스승은 권세와 이익에게 달려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준 제자에게 세한도(歲寒圖)와 발문으로 극진한 감사를 표한다. 세한도에 나오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굳건하다. 이상적 같은 이가 좀 더 많아진다면 우리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시서화(詩書畫)로 다양하게 변주된 소나무의 미덕은 우리가 후손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정신적 자산이며 외국에 우리의 이미지를 알리는 훌륭한 기호다. 일전에 경복궁 근정전을 보수할 때 대형 국산 소나무가 없어서 북미산 소나무를 가져다 쓴 일이 있지만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지길 희망한다.


3. 무심해서 아름답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벗겨지면서 흰빛을 띄기 때문에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현존하는 백송은 거의 다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구해다 심었으리라 추측한다. 사대부들이 모여 살던 서울에서 백송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재동의 백송 역시 고종 때는 개화파의 선구자 박규수의 집이었다. 박규수의 사랑채에 모여 백송을 완상하며 우국지정을 토로했을 젊은 꿈 앞에 부끄럽다. 이처럼 백송은 중국과의 교류의 증거이면서 양반 가문의 증표이다. 백송은 옮겨심기가 까다로워서 이역만리에서 끝내 운명한 백송이 무척 많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흔히 볼 수 없는 소나무이다 보니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서울에는 6그루, 전국에는 12그루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서울에 2그루, 전국에 5그루만 남았다.


재동의 백송은 600여년 된 나무로 한국에서는 가장 큰 백송이다. 근처에 자리 잡은 천연기념물 9호 수송동 백송은 조계사 대웅전 옆에 옹색하게 지내느라 생장의 어려움을 겪는 반면에 재동의 백송은 비교적 너른 터에 고즈넉이 자태를 뽐낸다. 백송의 수피는 연한 녹색이다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흰색이 짙어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흰 얼룩이 커진다고 해야겠다. 흥선대원군이 백송의 껍질이 유난히 희게 변하는 것을 길조로 삼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끝낼 수 있음을 확신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회청색에서 회백색으로 변해가는 과정 모두가 분청사기의 투박한 느낌을 빼다 박았다. 문일평은 ‘白松의 美’라는 글에서 “아무리 진목이훼(珍木里卉)가 있어도 모르는 이에게는 그것이 범수상초(凡樹常草)와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탄식했다. 평소 자주 지나치던 백송의 가치를 뒤늦게 깨닫고 쓴 글이다. 푸른 솔잎과 하얀 무늬가 햇살을 받아 빚어내는 색채 대비를 이제라도 만끽해서 다행이다.


백송의 나이대로라면 단종 1년에 벌어졌던 계유정난의 참상도 목도했을 것이다. 김종서의 집이 있던 재동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재를 뿌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이름이 ‘잿골’로 바뀌었고 오늘날 재동의 유래라고 한다. 번식력이 약한 백송은 혼자 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홀로 이 광경을 바라봤을 백송은 인간세상의 훼예포폄과 흥망성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나이를 먹었다. 국가권력의 정통성이 유린되었던 터에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아 의미심장하다. 계유정난이 발생한 지 338년만인 정조 15년에 단종의 능에 단종의 충신들을 제향 함으로써 역사 바로잡기가 마무리됐다. 역사는 결국 올곧게 산 자의 편인지 모르나 이렇게 만날 뒷북만 쳐서는 안 될 일이다. 헌정 질서를 수호하는 헌재의 책무가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4. 넓어질수록 깊어진다

문화유산 답사라고 하면 궁궐과 사찰, 박물관과 미술관만 떠올리기 일쑤다. 천연기념물과 명승 제도는 문화유산에 대한 사고의 틀을 넓힐 것을 요구한다. 외부의 자연뿐만 아니라 내부의 자연마저도 가만두지 못해 안달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 천연기념물의 존재는 전환점을 마련해줄 수 있다. ‘생태맹(生態盲)’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신비함과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우리의 사고와 의식으로부터 자연이 사라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천연기념물과 명승에 대한 문화적 가치를 부여할수록 생태맹을 좀 더 극복할 수 있으리라. 이는 생물다양성을 국가 경쟁력의 지표나 국가 브랜드의 척도로 활용하고 있는 추세에 걸맞다. 자연의 다양성은 문화의 다양성으로 직결된다.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된 이유는 석공의 솜씨가 빼어난 점과 더불어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문화유산에서 인공미를 느낄 때 그 소재까지 헤아린다면 좀 더 복합적인 감상을 할 수 있다. 문화유산의 모태가 되는 자연유산을 도두보는 혜안을 갖추는 셈이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자연이 경제다』에서 자연을 지키는 게 경제적이라고 역설한다. 무조건 자연보호를 해야 한다는 윤리의식에 호소하기보다는 생태자본의 효율성과 화폐가치를 평가해 설득해야 한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경제적으로 오래간다”라는 명제를 통해 자연과 경제가 양자택일이 아닌 양립할 수 있는 가치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연을 자기 자본금으로 여기며 제 것으로 안다. 자연스레 어떻게 하면 이 자본금을 굴려서 이익을 남길까를 궁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땅이 우리들의 자손에게 빌린 것이라면 자연은 우리의 부채이다. 어린이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빚이란 말이다. 이곡의 ‘차마설(借馬說)’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내 소유물은 결국 빌린 것일 따름이다. 문화재 대신에 문화유산이라는 말을 쓰기를 주장하면서 소유물을 연상시키는 ‘재산(property)’이란 표현보다는 ‘유산(heritage)’이 적절하다는 목소리도 같은 맥락이다.


얼마 전 등재된 조선왕릉을 비롯해 8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우리나라는 세계유산에 대한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자연유산에 대한 관심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는 현재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하나에 불과한 세계자연유산을 2012년까지 3곳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한다. 문화유산에 치우쳤던 행정이 자연유산에 눈을 돌린다는 반가운 신호다. 당초에 제주도를 세계자연유산으로 삼으려 할 때 지역주민의 반대가 적잖았다고 한다. 다행히 관광 명소로 부각되면서 긍정적 인식의 확산에 기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유산 지정에 대해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손사래를 치는 일이 많다. 앞으로 정부는 국민의 권리의식에 높아지는 상황에 발맞춰 섬세한 보상과 촘촘한 계획으로 주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2009년 5월 자연유산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문화재위원회장이 탄생한 것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옛날 문화재의 개념이 점이었다면 이제 점에서 면으로, 면에서 공간으로 확대”된다는 이인규 문화재위원장의 말씀에 공감한다. 개별 전각에 후원 조경의 원리가 융합해서 오늘날 창덕궁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문화유산 감상은 넓어질수록 깊어진다.


5. 항심을 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거드럭거릴 틈을 주지 않고, 무용함은 죄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이 단지 항산(恒産)이 모자라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항산과 항심(恒心)의 선후관계가 뒤집어질 이유는 없더라도 항심에 대한 관심도 종요롭다. 항산은 결국 항심으로 이어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송을 응시하며 항심을 품는다. 조금 천천히 가면 넉넉히 볼 수 있음을, 조금 비우고 살면 웅숭깊어질 수 있음을 깨우친다. 솔향기에 취한 것도 아닌데 세한(歲寒)에 얼굴이 발그레하다.



장자는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발이 닿는 쓸모 있는 땅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다 파서 없앤다면 딛고 있는 땅이 쓸모없어지고 만다는 비유를 들었다. 상품화할 수 있는 문화만을 숭상하는 오늘날 곱씹어볼 대목이다. 백송이야 경제적 잣대를 통과하겠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산천초목들도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백송은 밑동부터 V자로 갈라진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나눠진 줄기는 하늘에서 무성한 잎을 맺어 다시 만난다. 결국 뿌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말해준다. 자세히 보면 지지대를 알록달록 칠해 놓은 것을 발견하는데 백송의 빛깔을 돋보이게 하는 배려 같아 정겹다.


헌법정신이라는 뿌리 위에서 이따금 갈등할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는 힘을 합쳐야 함을 백송은 담담히 술회한다. 이 정갈한 노거수(老巨樹)처럼 헌재가 우리 사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길 희망한다.


김홍도의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에는 “바다 용왕이 계신 곳에서도 나는 옆으로 걷는다(海龍王處也橫行)”라는 화제(畫題)가 적혀있다. 헌재를 비롯해서 공직자들은 살아있는 권력에 무심할수록 권위를 인정받을 게다. 백룡의 등 위에서 사는 새들도 그런 마음일까.


조계사 대웅전에 있는 수송동의 백송이다. 재동의 백송과 비교해서 답사하면 좋다.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남아 있는 모양새가 이채롭다. 재동의 백송처럼 아득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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