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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12 사과를 요구하고 싶더라도 4

지난 세밑에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교 반 클럽에서 선배 갑이 쓴 댓글을 삭제해주기를 청하는 후배 을의 글이 익명게시판에 올라왔다. 갑이 댓글을 통해 어느 종교에서 추앙하는 위인을 폄훼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1000이 넘는 조회수와 100개 가까운 댓글이 오고 간 것을 보고 뭔가 방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을은 나를 비롯한 클럽 운영진이 문제의 댓글을 지워주기를 바란 모양이다. 하는 일 없는 부클럽장이었던 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댓글을 삭제하는 데 머뭇거린 까닭은 고학번에 대한 예우라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사안의 당사자가 누가 되었든 간에 그 분이 고학번이라면 편집권을 발동하는데 신중하게 응했을 것이다. 저학번에게는 편집권을 함부로 발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 더 망설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굳이 이런 식의 번거로운 절차를 밟으려고 한 것은 선배님들에 대한 흠모이자 머잖아 이 자리에 오를 후배님들을 위한 배려라고 여겼다. 적잖은 후배들은 나의 이런 발언을 “선배의 글이기 때문에 삭제하지 않는다”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선배가 아니라 고학번이라고 명확히 범위를 한정했다. 고학번을 개념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내가 속한 클럽에 종종 들러주는 고학번을 가파른 잣대로 보면 열 명이나 스무 명 남짓으로 보고 있었고 클럽 구성원들이 대체로 동감할 수치이다.


이 분들에게 우리 클럽의 손윗사람으로서 예우를 갖추는 게 특혜라고 치더라도, 그 특혜가 과도하다고 보기 힘들다. 그 특혜라는 것도 스스로 자기의 실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정도인데 말이다. 그 여유라고 해봤자 내가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밤새 기다린 몇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조회할 시간을 부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몇 시간 정도 벌어진 댓글 논쟁을 보면서 갑이 교정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알고 문제의 댓글을 삭제하려던 찰나에 댓글이 수정되었다. 갑이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의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표현의 과격함을 자구 수정한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매듭을 지었다.


고학번이라고 할 만한 분들의 글에 대한 수정이나 삭제에 신중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견에 대한 지적이 적잖았다. 하지만 내가 “학번 불문하고 공평무사하게 게시판을 관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솔직하지 못한 처사다. 더군다나 나는 고학번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도 우리 클럽을 종종 드나들어주는 분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마운 일이고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게 클럽 운영진으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자기 필요에 의해서 들렀든 간에 그래도 잊지 않고 반 클럽을 찾아준 일 자체가 너무 반가워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선후배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어떤 분쟁이 발생했을 때 먼저 스스로 자기 교정을 할 여유를 부여하는 것 정도가 과도한 특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원활한 소통을 꿈꾸는 내가 기다린 며칠, 몇 시간이 어떤 후배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 또한 무척 고통스럽고 가슴 시린 순간이었음을 헤아려주시면 고맙겠다. ‘예우’, ‘특혜’라는 표현을 부러 쓴 이유는 역설적으로 나를 비롯한 고학번 선배들의 자기 책임과 자기 반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선배된 자의 한마디가 후배들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을 먼저 품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할까.


을의 주장에 동조하는 몇몇 후배들은 갑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좀 자제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선배가 정색하고 후배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너무 야박한 상황이 아니겠냐며 다독였다. 굳이 후배가 나서지 않아도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보는 눈이 있는 만큼 서운함이 크더라도 살짝 기다려주는 건 어떻겠냐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리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도 막상 사과까지 받아내고 나면 후배들이 그 모짊에 대한 미움이 생길까 염려스러웠다.


이러한 나의 진의와는 관계없이 사과 자제 요청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내가 단순히 선배는 후배에게 사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짓지 않았음을 누구나 다 알아주실 것이라 믿는다. 나는 다만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라는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사사로운 친목단체에서는 꽤 각박하게 느껴지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당사자가 스스로 돌아보는 과정을 밟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몇몇 후배들이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운운할 때 좀 머뭇거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건 선후배를 떠나 누구에게나 힘든 일인만큼 조금만 넉넉하게 기다려줄 수 있으면 어떨까?


어느 선배님께서는 “손윗사람한텐 사과도 못 받는 고대의 경직성이 싫다”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선배님께서는 “선배가 후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경우는 조언인데 후배가 선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버릇없단 이야길 듣”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고 그런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비판’과 ‘사과 요구’는 동일선상에 놓고 재기는 힘들 듯싶다. 다시 말해 비판을 수용하는 것과 사과 요구를 실행하는 건 다소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판할 때는 한 번 생각하고 제기해도 되지만, 사과를 요구할 때는 세 번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장자』에 “저자에서 남의 발을 밟으면 미안하다고 사죄하지만, 동생이 형의 발을 밟으면 따뜻한 눈길로 보아주면 되고, 자식이 어버이의 발을 밟았을 때는 아무 말이 없어도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유가의 예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숭상하지만, 진정한 예는 유별나게 따지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도가의 입장이 녹아 들어가 있다. 사과마저도 필요 없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설파하지만 무조건 꿈결같은 상황만은 아닐 게다. 더욱이 사과 요구를 표현하는 것도 서로의 관계에 대한 신뢰와 친근함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작동할 여지도 있다. 또한 선배가 나의 비판이나 사과 요구를 받아들일 만한 아량이 품었다고 믿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우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교 모임에서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란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쓸 때 효용이 커진다고 본다. 사과는 자발적으로 해야 빛나고, 사과 요구는 공인(公人)에게 먼저 건네야 한다. 따지고 보니 이렇게 ‘사과 요구’를 두고 말이 길어진 연유는 내가 생각하는 ‘사과’에 대한 개념 정의가 다소 엄격했기 때문이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을 접하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헌재의 결정문 일부를 발췌해봤다(89헌마160).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에는 널리 사물의 시시비비나 선악과 같은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되는 내심적 자유는 물론,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권력에 의하여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않는 자유 즉 윤리적 판단사항에 관한 침묵의 자유까지 포괄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헌법과 달리 양심의 자유를 신앙의 자유와도 구별하고 사상의 자유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별개의 조항으로 독립시킨 우리헌법의 취지에 부합할 것이며, 이는 개인의 내심의 자유, 가치판단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리의 명확한 확인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고 인간의 내심의 영역에 국가권력의 불가침으로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불가결한 것이 되어 왔던 정신활동의 자유를 보다 완전히 보장하려는 취의라고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살피건대 원래 깊이 “사과한다”는 행위는 윤리적인 판단·감정 내지 의사의 발로인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며 그때 비로소 사회적 미덕이 될 것이고, 이는 결코 외부로부터 강제하기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이의 강제는 사회적으로는 사죄자 본인에 대하여 굴욕이 되는 것에 틀림없다. 사과의 정도에 따라 굴욕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사과”의 문구가 포함되는 한 그것이 마음에 없는 것일 때에는 당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요 치욕임에 다름없으며, “사과문”, “진사문”, “해명서” 등 어떠한 명목의 것이든 관계없이 그러하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앞서 공인을 향해 먼저 사과를 요구하자고 했던 것은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맥락에서 한 말이다.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사과 권하는 사회를 단숨에 고치기 힘들다면 사적 영역에서 사과를 받아내고픈 열망을 눅이는 대신에 공적 영역으로 눈을 돌려봄직하다. 그렇다고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다. 공인인 만큼 자기 반성을 더 바지런해야 하고, 자기 반성을 하다 보면 사과 또한 먼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따름이다(과연?).


정리하자.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름다운 덕목이다. 강제적인 사죄광고는 위헌 결정을 받았지만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사죄광고는 지금도 얼마든지 많이 이뤄진다. 나는 후배가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동기가 동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선배가 후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된 갑의 불관용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은 수정 및 삭제 조치 등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갑의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은 갑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 [無棄]


<참고문헌>
김욱, 『그 순간 대한민국이 바뀌었다』, 개마고원, 2005, pp. 39~53
박성철, 『헌법 줄게 새법 다오』, 이매진, 2007, pp. 26~35
윤진수, “謝罪廣告制度와 民法 제764조의 違憲 여부-憲法裁判所 1991.4.1.宣告, 89헌마 160決定(判例月報 250호 64면 이하)-”, 『사법행정』 제32권 제11호, 한국사법행정학회, 1991, pp. 73~89
윤철홍, “명예훼손과 원상회복: 사죄광고를 중심으로”, 『비교사법』 제10권 3호, 한국비교사법학회, 2003, pp. 25~55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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