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212
지난 1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신치하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판결내용과 판사명단을 공개했다. 대법원은 “30년 전 시대 상황에서 사법시스템 전체가 짊어져야 할 과오를 우연히 현재까지 현직에 남아있는 몇 명의 법관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면, 결코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는 진실과 화해에 바탕을 둔 미래지향적인 과거사 정리를 이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사법시스템 전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좋게 받아들이려고 해도 영 마뜩잖다.

도무지 사죄하는 사람이 없다. 대기업들이 불법행위 등으로 국민의 원성을 살 때 임직원 일동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했던 기억이 난다. 불법, 탈법의 주체는 그룹 총수 측근에게 한정될 것이 뻔한데도 아랫사람들까지 죄다 책임의 굴레를 씌우는 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그간 공적을 나누기는 꺼려하면서 과오는 나눌 것을 강요하는 지도층을 너무 많이 봐왔다. 판사들이 자신들의 인격권을 끔찍이 아끼는 마음으로 일반 국민들의 판결을 내렸다면 지금처럼 신뢰를 잃지 않았으리라. 영특한 머리가 아깝다.


070213
이필상 고려대 총장님이 논문 표절 의혹을 부인하며 전체 교수 신임투표를 제안한 일로 학내가 뒤숭숭하다. 나는 일평생 사상과 진리의 독점을 막기 위해 살고 싶다는 꿈을 품는 녀석이다. 내 모자란 머리로 궁리해볼 때도 진리가 다수결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도 명확하다. 이 총장님이 신임을 얻어 총장직을 수행하시든 결국 용퇴를 하시든 간에 적잖은 생채기가 남게 됐다. 사기 조선열전에서 사마천은 고조선을 침공한 한나라 수륙양군이 모두 치욕을 당했다(兩軍俱辱)고 기록하고 있다. 그 누구도 승자가 아닌 참담한 상황이지만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힘은 우직한 원칙에 있지 않을까. 고대스러운(?) 해법이 점점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자세한 내용은 익구닷컴 <이필상 총장님의 출처(出處)> 글 참조


070214
경복궁 건춘문 맞은 편에 자리한 술집 오로(ORO)에서 처음 만난 또래 친구에게 살가운 악수를 건네려고 했다. 모임 장소에 당도하기 전에 세 번을 상기했는데 결국 성공하지 못한 걸 보면 난 여전히 악수가 서툴다. 70도 정도 허리를 숙이는 인사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악수가 영 어색하지만 내 좋고 싫음과는 관계없이 익혀둘 예법 가운데 하나다.

악수는 서양 남자들 사이의 인사법에서 출발했다. 손에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연원이 있다.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는 여성들이 악수하는 풍속이 없다는 게 재미나다. 그 때문인지 나도 여자와 악수를 나누기가 조금 스스럽다. 여하간 강아지가 등을 땅에 대고 연약한 배를 보임으로써 친밀감과 무저항을 보여주듯이 인간의 무기인 손을 건넨다는 건 화합의 몸짓이며, 신뢰의 교태다.

“어르신을 위하여 나뭇가지 하나 꺾어 드리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爲長者折枝, 語人曰 我不能 是不爲也, 非不能也)”는 <맹자> 구절이 있다. 무능한 나이지만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을 뿐인 일도 많이 있다. 내 게으름을 조금 다독이면 금세 해낼 수 있는 일을 내 천학비재(淺學菲才) 탓으로 돌리지 말자. 천학비재는 고치라고 있는 것이지 핑계 삼아 비빌 언덕은 아니기에.


070215
보통의 필부가 그렇긴 하지만 나도 계획은 구만리 장공을 노니는 붕새지만 결국 하는 일은 매미 정도이기 일쑤다. 초등학교 시절 명언집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하기 시작한 이래로 명언명구 수집은 내 취미다. 아니, 내 생활의 일부다. 내 가슴 한 구석에는 명언집 편찬의 꿈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다. 배운 도둑질이 짜깁기라면 차라리 그 짜깁기를 멋지게 해보고 싶다.

양주동 선생님의 <세계명언대사전>은 서양 쪽에 치우쳤고, 모로하시 데쓰지의 <중국고전 명언사전>이 중국에 올인했다면 한국과 중국을 아우르는 동양고전명언사전이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멋대로 상상해본다. 아쉽게도 내가 아직 서먹서먹해서 일본까지 마수(?)를 뻗칠 자신은 없지만.^^; 쟁쟁한 대가들이 나서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그리 돈 되는 아닌 모양이다.

동양명언명구집이 없지는 않지만 적잖은 아쉬움을 느낀다. 우선 몇몇 인기 고전에 치우치지 말고 잘 알려지지 않은 글도 고루 실어야 한다. 맛깔스러운 한국어로 옮기되 재미난 해설과 번뜩이는 혜안을 선사하는 고전명구집은 내 영혼의 이데아다. 피안(彼岸)이다. 이루지 못할 꿈, 지키지 못할 약속이지만 그런 최소한의 허영심도 없다면 매미의 삶이 너무 딱하지 않겠는가.


070216
김학주 교수님이 번역한 시경이 품절이라 출판사 명문당에 재고 문의를 해봤다. 교수신문 고전번역 비평 시경 부문에 선정된 책이 아까운 마음에서다. 출판사에서는 가지고 있는 책이 두 권 있는데 표지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출판사 재고로 남아있는 책은 대개 반품된 것일 터이니 상태가 양호하리라 기대하는 게 무리라 이거라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하다가 옥션에서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예용품과 서예서적 위주로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절판된 책을 구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운 마음에 4,000원짜리 용모양 필산(筆山)도 함께 구매했다. 필산은 ‘山’ 자 모양으로 만들어 붓을 걸어 놓는 기구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문진 용도로 쓸 수도 있고 필산도 겸용이라 서예를 하지 않는 나이지만 충동구매를 하고 말았다. 붓을 못 올려도 펜이라도 올려놓고 써봐야겠다.

일전에 어느 출판사 책창고에서 일일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일당 대신 책을 한가득 안고 와서 어찌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함께 일했던 아저씨 한 분의 말씀이 가끔 생각난다. 많은 책을 옮기고 하다보면 좀 찌그러지고 그럴 수 있으니 조금 봐달라는 취지의 말씀이었다. 그 때 이후로 좀 많이 나아졌지만 나는 아직도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면 제본부터 책등, 책배 상태 등을 꼼꼼히 살핀다. 책을 많이 사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나는 경미한 흠집이 있는 책을 많이 만나는 징크스가 있는 편이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표지에 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에 책 사기를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소한 흠집도 견디지 못하는 내가 약간 부족하거나 불편한 사람을 얼마나 잘 보듬을 수 있을지 반성해봤다. 장애책에 분개하는 내가 장애인에게 정성을 다하겠는가. 책의 껍데기를 중요시하는 내가 사람의 껍데기에 정신을 흩트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물론 이건 좀 억지 비교다. 책 제본 상태나 표지 디자인 등에 신경 쓰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상관관계는 낮다. 더군다나 나는 책 읽을 때는 손때나 땀이 묻는 것도 아까워 손을 깨끗이 씻는 녀석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고민은 미리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070217
영화 <홀리데이>를 중간 부분부터 봤다. 영화속 지강혁(이성재 분)이 외치던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는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을까.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돈을 많이 벌기 이전에 돈 없는 게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2006년 3월경 구멍가게에 들어가 1,800원을 훔친 스물 아홉 살 이모씨에게 구속영장을 신청을 신청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기각되어 풀려났다고는 하지만 1,800원에 추상 같이 무서웠던 국법은 왜 위로 올라갈수록 훈훈한 봄바람이 되는 것인지 우울하다.

<사기>에서 범려는 “천금의 자식은 결코 저잣거리에서 사형 당하지 않는다(千金之子 不死於市)”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면 진실도 덮고, 사람도 살린다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좀 더 늘었으면 좋겠다. 천금지자의 품위보다 무금지자(無金之子)의 서러움을 먼저 생각하는 나라가 진정 아름답고 기품 있다.


070218
청원이가 하도 재미나게 보고 있다기에 나도 결국 <하얀 거탑>을 시청하게 됐다. 권력을 향해 매진하는 장준혁을 우리 둘레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직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며 같이 물들면서 원래 뭐 이런 거라는 소리도 적잖이 들어왔다. 우용길 부원장이 장준혁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는 최도영을 구슬리자 끝내 마다하는 최도영을 보다가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정말 내가 이런 남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사람을 얼마나 사귈 수 있을까 하는 시험(!)의 유혹 말이다.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권세를 마다하고, 어짊을 건사하려고 부귀를 버리는 사람이 좀 더 늘기를 바라면서도 내 자신이 그렇게 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함부로 호언장담하는 게 얼마나 신중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인지를 이제야 좀 알겠다. 번민하지만 거짓 증언을 하고만 염동일에게 모진 회초리를 던지지 못하는 까닭은 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준혁 같은 유능한 확신범이나 최도영 같은 정의의 사도보다는 고뇌하는 염동일이 정규분포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우리 사회의 희망은 좀 더 많은 염동일이 최도영쪽으로 다가서게 하는데 있다.

내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드는 사명 같은 건 없겠지만 그 강물에 목을 축이기 위해 내 자신이 해야할 몫이 적잖으리라 믿는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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