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6041959년 마오쩌둥(毛澤東)은 대약진운동의 실책을 인정하고 국가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은 수정주의 노선인 조정 정책으로 대약진의 실패를 만회해갔다. 삼자일포(三自一包) 등으로 개별적인 경제주체의 운용 폭이 확대되면서 생산의욕이 크게 향상되는 등 백묘흑묘론(白猫黑猫論)으로 표상되는 경제중심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오쩌둥의 입지가 좁아지자 이에 반발하는 홍위병 세력이 조직돼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일어난다. 1차 표적이 된 류사오치는 손자뻘인 홍위병들에게 “제군들이 나 개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의 위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군들의 행동은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다”라며 항변했다. 하지만 그는 갖은 능욕을 당했고, 모든 공직이 박탈된 채 비참하게 죽었다. 문혁은 유토피아를 빌미로 벌어진 참혹한 파괴극이었다. 문혁이 계승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임은 또렷하다.
1981년 제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공식적으로 문혁과 모택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내려졌다. 다만 모택동이 중국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인정해 공적이 첫째이고 오류를 두 번째라는 평가를 내렸다. 덩샤오핑 개혁개방정책은 지역별, 기업별, 개인별 격차와 권력을 남용한 경제 부정, 인플레이션과 도시민의 실질소득 저하, 실업자 증가, 배금주의적 사고방식 등의 문제를 낳았다. 덩샤오핑은 정치적 안정과 당의 지도를 우선시 해 정치적 민주화 요구를 무시했다. 그러나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불리던 후야오방(胡耀邦) 공산당 총서기는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민주화를 담고 있는 정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주화 시위 진압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실각한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사망하자 베이징대학생을 중심으로 그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주장하며 1989년 6월 4일 제2차 천안문 사태가 촉발됐다.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시위 군중들에게는 정말로 총알이 날아갔다.
후야오방의 뒤를 이었던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는 참사가 벌어지기 전인 5월 19일 천안문광장의 학생들을 찾아가 “여러분의 충정을 이해한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라고 사과하며 눈물을 흘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반동 분자를 지지했다는 죄목으로 실각했고 2005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연금 생활을 했다. 힘없는 2인자의 소신 있는 패배에 옷깃을 여민다. “경제 개혁은 정치 개혁과 결합하여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한 자오쯔양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심하게 만든다.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지만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중국 정치제제의 특수성은 얼마나 더 유효할 것인가. 공산당 일당 독재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는 이원적 지배체제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는 양극화, 부패문제, 금전만능주의, 환경문제 등에 얼마나 잘 대처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덩샤오핑은 “양극화를 초래한다면 개혁은 실패다”라고 우려했다. 중국은 지금 극단의 오류를 극복하겠다며 또 다른 극단에 빠져있는 건지도 모른다.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중국에게만 해당되는 깨우침은 아니다.
070605
『잡아함경』 9권 254경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에 있는 소나와 거문고 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번역 참조). 부처님의 제자인 소나는 아무리 수행에 힘써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의기소침한 소나에게 부처님이 찾아오셨다. 부처님은 소나가 속세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었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물었다. “만일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더냐?” 소나는 아니라고 답했고 부처님은 다시금 물었다. “만일 거문고 줄을 느슨하게 매면 과연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더냐?” 소나는 역시 아니라고 답했다. 이윽고 부처님께서는 “거문고 줄을 고르게 하여 너무 늦추지도 않고 조이지도 않으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내더냐?”고 물었고 그제야 소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부처님께서는 정진이 너무 조급하면 들뜸만 늘고, 정진이 너무 느슨하면 게으르게 된다며, 이 두 가지 이치를 고루 익혀서 집착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않게 수행하라고 설법하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비유를 실행한 소나가 해탈에 이르렀다는 해피엔딩이다.
영화 <리틀 붓다(Little Buddha)>에서는 부처님이 고행을 하고 있을 때 네란자라강을 건너던 배에서 들려온 “실을 너무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연주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수행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향락과 고행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에 설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불교의 핵심 교리가 파생된다. 도법 스님은 중도의 길을 “사실에 근거해서 정확하게 사물을 봐야 한다”라고 풀이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여기서 실현하고 해결하라는 말씀이다. 스님께서는 우리는 자연, 사회, 부모라고 하는 대상에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 태어나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게 된다고 역설하신다. 성철 스님도 중도란 연기(緣起)의 이치로 바라본 사물의 실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좋은 말씀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너를 분별하게 되면 우열을 가르게 되고 차별하게 된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중도연기(中道緣起)는 탐진치(貪瞋癡,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를 달고 사는 내게는 너무 가파른 경지다. 그래도 기회주의와 근본주의의 양극단을 버리고, 팽팽하지도 않고 늘어지지도 않는 중도를 가고 싶다.
070606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어떤 원리(연민과 동정)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들의 행복을 보는 것 말고는 얻는 게 없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How selfish soever man may be supposed, there are evidently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which interest him in the fortune of others, and render their happiness necessary to him, though he derives nothing from it except the pleasure of seeing it.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의 첫 구절이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모든 인간은 원래, 첫째로 그리고 대체적으로 자신을 돌보도록 되어 있다”라는 점을 인정한다. “관찰자의 느낌은 여전히 고통 받는 자가 느낀 것의 격렬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며 “타인이 겪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주요 당사자가 당연히 느끼게 되는 정도의 열정을 가질 수는 없다”라는 한계를 부인하지 않는다. 스미스는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공감으로 말미암아 도덕적 감수성의 적정성(propriety)이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 개인이 자신의 입장을 떠나 객관화해서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과 동기를 판단하는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는 불편부당한 양심의 힘을 제시한다. 이처럼 『도덕감정론』에서는 도덕적 이상주의가 도드라진다.
그런데 『국부론』에서는 경제주의적 사고가 완연하다. 도덕적 이상주의와 경제주의의 괴리를 어떻게 융합시키는가 하느냐를 ‘아담 스미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미스는 자기사랑(self-love)과 이기심(selfishness)을 구분했다. 그는 인간은 공감의 본성(sympathy, fellow-feeling)과 자기사랑(self-love)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았다. 공감이 이타심과 다르고 자기사랑이 이기심과 다르다고 한다면 공감과 자기사랑은 공존할 수 있다는 논리가 튼실하다.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국부론』이 당시 인도주의적 법령을 반대하는 데 흔히 악용되었다고 지적한다. “구성원 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고 행복할 수 없다” 같은 구절들은 인용되지 않은 채 말이다.
하준경 금융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분배 정책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기업 혁신 및 구조조정과 보완 관계를 이룬다”고 주창한다. 안전망이 탄탄하면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도 약해지고, 리스크를 안는 경제 행위도 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고용안정성이 비교적 높은 공공부문에 인재가 몰리는 것도 안전망의 부재 때문이다. 이를 온전히 개인의 무사안일 때문으로만 여기는 건 무성의하다. 약자에 대한 ‘사회적 최소한(social minimum)’의 배려가 있고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는 탁월한 분별력은 최고의 머리와 최고의 가슴이 결합했을 때 나온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내면적 윤리의식이라는 사회적 자본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참고 문헌>
박순성,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 풀빛, 2004, pp. 201~224
이근식,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 기파랑, 2006, pp. 66~86
070607
『대학大學』 첫 문장에 나오는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에서 親民을 놓고 주희와 왕양명은 격돌한다.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의 원문에는 親民으로 되어 있으나 주희는 대학에 주석을 달면서 정이천을 이어 받아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의 新民이라 고쳐 풀었다. 親과 新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新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이므로 스스로 명덕을 밝힌 후에 백성들로 하여금 이전에 물든 오염을 제거토록 하는 것인 셈이다. 新民은 사대부가 백성들 위에서 일방적으로 교화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상하 신분 관계를 엄격히 하는 효과를 유발한다. 왕양명은 이를 문제삼고 親民을 그대로 쓸 것을 주장한다. 백성을 친근하게 한다는 뜻의 親民은 사대부와 백성이 같은 자리에 놓이게 된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며 이를 통해 교화뿐만 아니라 서로의 개성을 온전하게 길러주는 양육의 의미를 함께 보듬는다. 왕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치양지론(致良知論)이 외재적 규범이나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의 주체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과 상통한다.
『전습록』에는 “親民이라고 말하면 가르친다는 의미와 양육한다는 의미를 겸하게 되지만, 新民이라고 한다면 한 쪽에 치우친 감이 있다(說親民便是兼敎養意, 說新民便覺偏了)”라며 新民이 ‘가르친다’에 경도되었음을 지적한다. 또 “오직 밝은 덕을 밝히는 것만을 이야기하고 親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곧 도가와 불가와 비슷하게 된다(只說明明德, 而不說親民, 便似老佛)”라고 강조하며 백성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유가의 특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가적 현실주의는 백성의 곤고함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견해에 동감한다. 퇴계 이황은 <전습록논변>에서 新民이 맞다며 新은 學(학문과 교육)의 뜻이지, 양명이 말하는 親(백성들에 대한 친근)·養(상보적 기름)의 뜻은 없다고 반박한다. 퇴계는 이를 통해 백성을 수동적인 교화의 객체로 국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옹호했다. 양명학파의 거두 하곡 정제두가 親民을 지지했고 다산 정약용은 親民을 수용하면서도 “親과 新의 두 글자는 형상이 이미 서로 가깝고 뜻이 서로 통하니, 친애하는 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다”라며 두 해석 모두 타당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했다.
양명이 대학 공부를 한 사람의 마음이 온 세상 사람들을 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면, 다산은 백성들끼리 서로 화목하며 친애하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 일본 유학자 오규 소라이는 新民은 혁명의 뜻이므로 수성(守成)의 지도자가 친애하는 모범을 보이라고 규정한 『대학』은 親民으로 봐야한다며 다소 이색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親民이 보수적이고 新民이 진보적인 함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간 왕양명의 주장은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조선에서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졌다. 양명학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이 새삼 아쉽다.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나는 그래도 이 둘의 다름에 더 관심이 간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직관을 긍정하고 실천을 중시했다. 둘레의 현실에 무심하지 않았던, 천하의 인심을 자신의 마음처럼 여겼던 양명의 정신을 편애한다.
<참고 문헌>
금장태, 『도와 덕』, 이끌리오, 2004, pp. 192~199
김기현, 『대학 -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 사계절, 2002, pp. 100~114
김미영 역, 『대학·중용』, 홍익출판사, 2005, pp. 36~38
김학주 역, 『신완역 전습록』, 명문당, 2005
정인재, 한정길 역, 『전습록 1~2』, 2001
070608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지을 때의 일이다. 대왕의 정성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몇몇 신하들이 볼멘소리를 좀 했다. 군사 시설은 튼튼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모양내는데 너무 신경 쓴다는 핀잔이었을 게다. 대왕은 “어리석은 신하들아, 아름다운 것이 바로 적을 이기는 힘이니라”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출전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조선왕조실록』과 정조대왕어록인 『일득록日得錄』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이 정도로는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숱한 신하들의 개인 문집까지 범위가 넓어질 듯싶다.
이어령 선생님은 리움미술관 개관 축사에서 이 일화를 인용했고, 정조를 대상으로 한 어느 뮤지컬에서도 정조의 명대사로 회자됐다. 유응교 교수의 <신하가 정조에게 묻다>라는 시에서도 대왕의 말씀이 황홀한 대답으로 추켜세워진다. 고진화 의원은 2005년 대정부 질문이나 2007년 한나라당 통일외교안보 정책토론회 기조연설에서 이 문구를 언급했다. 어딘가 기록된 말이라면 출전이 좀 나올 법도 한데 감감무소식이다. “문체가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무관하지 않다(文風關世道)”며 문체반정까지 일으켰던 정조가 화성의 실용성을 넘어 심미적 가치에도 애정을 쏟았겠거니 추정할 따름이다. 출처가 어디냐는 개인적 집착을 떠나 아름다움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문화 양극화를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나를 대표하는 사람 중에도 그런 분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070609
리영희 선생님의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읽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젊은이들의 보수화에 대한 물음에 선생님은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뜨거웠던 지난날의 목표가 청년들이 자유분방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그의 말씀이 따습다. 그런데 ‘보수화’라는 언명이 얼마나 타당한지 의문이 생긴다. 내 또래(보다 넓게는 20대)는 전통적 의미의 보수와 진보의 잣대가 잘 적용되지 않는 측면이 적잖다. 이래서는 정명(正名)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비하 같지만 무식화, 맹목화, 저속화가 더 맞는 표현 같다. 내 또래는 이런 경향에 맞서 상식을 궁리하고 객관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며, 인간다움의 최소한을 탐구해야할 듯싶다. 우리 세대에게 건네지는 개성적이니 실용적이니 하는 표현은 좀 과분하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실증경제학논집(Essys in Positive Economics)』에서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라는 물음과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What should it be)라는 물음을 혼동하는 데에서 너무나 많은 틀린 이론과 그릇된 정책이 나온다”고 일갈했다. “What is it”이라는 실증적 물음에 대한 답을 충실하게 구하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살림살이 나아지기 위해서 현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부터 시작하자는 논리를 경청한다. 정치적 불감증이 일상화되고 취업에 올인하는 세태가 보수화의 증거라면 그런 보수파는 되고 싶지 않다. 한국적 맥락의 보수가 고작 이 정도라면 허기진다. 제 앞가림만 신경을 쓰는 풍토가 1987년 체제의 과실이라고 해도 많이 아쉽다. 이분법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하향 평준화 혹은 획일화가 그리 달갑지 않다. What is it이라는 물음에서 내 또래가 정말 보수화(실상은 경제지상주의 추종)라고 결론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진단한 무식화, 맹목화, 저속화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적 독점이나 기업사회의 전제(專制)가 심화될까 우려스럽다.
What should it be에 답해보자. 내 또래의 세대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경제지상주의를 극복하고 다원화를 정착시키는 게 아닐까 싶다. 존 스튜어트 밀은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 좋은 삶이라 역설했다. 선택의 지평을 넓히고 가능성의 예술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외재적 조건에 대응해 다원화라는 개인주의 원리와 자유주의적 가치를 개발해보고 싶다(여기서의 ‘자유주의’는 밀의 ‘좋은 삶’이란 명제에 바탕을 두고 썼다).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가 유월항쟁에 무임승차하며 되돌릴 수 없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누리는 만큼 뒷사람에게도 비가역적인 다양성을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혁명기의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이 땅에서 횡행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기가 없는 현상 그 자체에 관심의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인기를 잃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에 주목해야 한다.
알랭 드 보통 저, 정명진 역,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생각의 나무, 2005, p. 49
070610
마크 트웨인이 세계를 여행하던 때의 일이다. 그는 지나친 음주 때문에 인생이 엉클어진 젊은 승객을 만나고서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욕망은 거부할수록 더욱 커지게 마련이므로 맹세가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욕망과 함께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걸 인정하는 길”이 욕망이 확대되는 걸 막는 효과적 방법이라는 주장은 쾌락에 대한 방종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울림이 크다. 고독을 대하는 최상의 방법은 고독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닌 고독을 껴안는 것이라는 가르침과 비슷하다. 극단을 치유하는 수단이 또 다른 극단주의여서는 곤란하다.
쇠약해져서 어떤 약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인이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그간 체득한 경험에 따라 “사흘 간 맹세, 음주, 흡연, 식사를 중단하면 몸이 좋아질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조언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맹세, 흡연, 음주 같은 부정적 습관이 하나도 없었다.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무거운 화물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려야 할 상황인데, 그녀는 이미 화물을 하나도 싣지 않은 잠수함과 같았다”라는 표현이 익살맞다. 마크 트웨인은 당혹함 속에서 “나쁜 습관이란 젊을 때부터 몸에 배이게 해놓아야,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을 때 써먹을 수가 있다”는 명제를 도출한다(마크 트웨인 지음, 남문희 옮김, 『마크 트웨인의 19세기 세계일주』, 시공사, 2003, pp. 11~17).
소설가 김영하님은 이 이야기를 언급하며 “‘나쁜 습관’이란 인생 최고의 사치품”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시사저널 812호 <나쁜 습관, 나쁜 영화>). 내 나쁜 습관은 잡글 쓰기다. 늘 붙잡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나아지는 구석이 없어 먹먹하다. 귀한 젊음을 허비하는 건 아닌가 불안하다. 마크 트웨인은 “담배를 끊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수도 없이 끊어 봐서 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도 내 누추한 잡글 쓰기를 그만두고 싶어 무던 애를 썼다. 앞으로도 절필한다는 투정이 그치지 않을게다. 마크 트웨인의 처방전이 내게도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나쁜 습관을 너무 미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지난 301일 동안 매일 써온 好學日記를 휴간합니다. 재미없는 글 읽어주신 여러분, 왜 그러셨어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