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읽은 자경문

익구 2009. 7. 18. 10:09 |

1995년 7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복귀를 선언합니다. 그 후로 내내 야당 분열과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제 생일날 다시 돌아온 그분을 저는 덜 미워했습니다. 제 생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때 만들어졌던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을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중학교 2학년 때는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응원했습니다. 1994년 7월 18일에는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이 주사파의 배후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주장하여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신공안정국을 형성하기도 했었죠.


서기 660년(의자왕 20년) 7월 18일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했습니다. 1401년 7월 18일 조선 3대 임금이 신문고를 설치했으나 유명무실한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이 일들은 양력인 제 생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굳이 양력 기록을 찾아보자면 64년 7월 18일에는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 황제가 범인을 크리스트교도로 지목하면서 엄청난 박해를 가했습니다. 1840년 7월 18일(음력 6월 16일)에는 영국이 청나라를 공격하면서 아편전쟁이 시작됩니다. 1936년 7월 18일에는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합니다. 공교롭게도 피 흘린 이야기가 많네요.^^;


1953년 미국의 예일대학교에서는 졸업생을 대상으로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글로 써서 소지하고 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꿈을 글로 기록해서 간직하고 있다고 답한 학생은 3%였다고 하네요. 20여년 후에 살펴보니 목표를 정해 기록해둔 3%의 졸업생이 그렇지 않은 97%의 졸업생 전부가 모은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65세 정년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고 합니다. 젊을 때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글로 적어 놓은 사람들이 상위 3%의 부를 누리고 있었다고 하네요(인터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정확한 출처는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부만을 측정했기 때문에 진정한 삶의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성급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몇 줄 글로 압축해서 써둔다면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당장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기 힘들다면 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라도 적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가령 스물 두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일기장에 “온 세계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진리”를 갈망한다고 썼습니다.


생일을 맞은 어스름 새벽에 청년 율곡이 스무 살에 쓴 자경문(自警文)을 여러 번 읽고 새겼습니다. 미욱한 제가 이 시린 마음을 얼마나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고마운 분들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제 이상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점검하는 하루 보내겠습니다. 자경문 원문은 최인호 선생님의 『유림』에 나오는 번역본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번역본을 참조해서 풀이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자경문(自警文)>
 
1. 입지(立志)
먼저 마땅히 그 뜻을 크게 품어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터럭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선수대기지 이성인위준칙 일호불급성인 즉오사미료


2. 과언(寡言)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 때가 된 뒤에야 말을 한다면 말이 간결하지 않을 수 없다.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심정자언과 정심자과언시 시연후언 즉언부득불간


3. 정심(定心)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放心)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힘을 얻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번뇌와 망상을 없애는 힘(定力)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마음이 어지럽고 어수선할 때에 의식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해서 그것을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뒤숭숭해지는 것과 같다.
마음은 갑자기 일어났다가 홀연히 없어졌다가 하여 나를 말미암지 않는 듯이 여겨진다. 설령 잡념을 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은 내 가슴에 가로막혀 있으니 이것 또한 망령된 잡념이다.
마음이 어지럽고 어수선할 때는 정신을 가다듬어 살며시 비추어 살필 일이지 집착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오래하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정해지는 때가 있다. 일을 할 때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는 것 또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다.

久放之心 一朝收之得力 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欲絶之 則愈覺紛擾
구방지심 일조수지득력 기가용이 심시활물 정력미성 즉요동난안 약사려분요시 작의염오 욕절지 즉유각분요
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숙기홀멸 사불유아 가사단절 지차단절지념 횡재흉중 차역망념야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당어분요시 수렴정신 경경조관 물여지구왕 용공지구 필유응정지시 집사전일 차역정심공부


4. 근독(謹獨)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도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게을리 함이 없다면 모든 나쁜 생각들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만 가지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생겨난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浴沂詠歸).’는 의미를 알 수 있다.

*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浴沂詠歸)’는 세속의 명리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자리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출전은 『논어』 선진편 마지막 꼭지를 참조.

常以戒懼謹獨 意思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상이계구근독 의사존저흉중 염념불태 즉일체사념 자연불기
萬惡 皆從不謹獨生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만악 개종불근독생 근독연후 가지욕기영귀지의미


5. 독서(讀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쉬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해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홀로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학문을 하는 셈이다.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효기 사조지소위지사 식후 사주지소위지사 취침시 사명일소위지사 무사즉방하 유사즉필사 득처치합의지도 연후독서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독서자 구변시비 시지행사야 약불성사 올연독서 즉위무용지학


6. 소제욕심(掃除慾心)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財利)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榮利)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영리 수득소제기념 약처사시 유일호택편의지념 즉차역리심야 우가성찰


7. 진성(盡誠)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 만약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 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딱 잘라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범우사지 약가위지사 칙진성위지 불가유염권지심 불가위지사 즉일체절단 불가사시비교전어흉중


8. 정의지심(正義之心)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거나,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상이행일불의 살일불고 득천하불가위저의사 존제흉중


9. 감화(感化)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집안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지 않음은 다만 나의 성의를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횡역지래 자반이심성 이감화위기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10. 수면(睡眠)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서도 안 된다. 비록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충분히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든 일어나 몇 바퀴 걸어 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비야면급질병 즉불가언와 불가파의 수중야 무수사 즉불와 단불가구박
晝有睡思 當喚醒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주유수사 당환성차심 십분맹성 안피약중 기이주보 사지성성


11. 용공지효(用功之效)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다.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용공불완불급 사이후이 약구속기효 즉차역리심 약불여차 육욕유체 편비인자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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