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의 길 소감문(1)

2010. 6. 30. 23:33 |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개설한 <특강 법률가의 길>은 법률가의 길에 관하여 귀감이 될 만한 인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시간입니다. 모든 강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소감문을 제 때 제출한 것도 뿌듯한 일이지만, 더 놀라운 점은 오전 강의임에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P/F 과목이라 대부분의 학우들이 비중을 덜 두었던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목일수록 더욱 열성을 다하는 비효율적(?) 학생인 저로서는 이 수업시간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소감문에다 너무 많은 장밋빛 공약을 써 놓아 다시 읽으니 민망하기도 합니다. 선현들은 말이 행동보다 지나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강연자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강연 내용을 비판하는 대목이 거의 없다는 건 이 소감문이 반쪽짜리임을 의미합니다. 적잖은 부분이 제가 예전에 했던 말을 반복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로스쿨에서의 첫 학기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이 소감문을 일부 손질해서 올립니다. 한 학기 동안 만나 뵀던 여러 스승님들의 삶에서 제가 얼마나 배웠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도록 애쓰는지를 지켜봐주십시오.


<3월 8일 김영란 대법관님>

  판사가 어떻게 창의적으로 재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 오셨다는 김영란 대법관님의 말씀은 내게 죽비소리였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라는 수식어를 떠나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에 그분이 계셔서 감사하다. 특강 중간에 인용하시는 영화나 문학작품, 심지어 만화책에 이르는 다양한 지적 탐구 정신은 창의적 관점을 쌓기 위해 본받을 점이었다. 

  김 대법관님은 “실정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혜택을 받는 대상을 넓혀가는 것이 법치주의”라고 역설하셨다. 형식적 법치주의에서 실제적 법치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창하시며 그 과정에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의 역할을 당부하셨다. 로스쿨 제도는 불문법 국가의 이념과 관습이 결부되었기 때문에 성문법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접목해낼지가 관건이라는 말씀에 공감한다. 조문 해석에서 출발하는 성문법 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로스쿨 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에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다.

  김 대법관님은 대법원 재판연구관 시절의 경험을 회고하며 반대 관점에서 생각하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성찰하셨다. 문득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일화가 떠올랐다. 힐러리의 고교 선생님은 공화당 지지자인 힐러리에게 대통령 후보 모의 토론회 시간에 힐러리에게 민주당 출신 존슨 대통령 역을 맡겼다. 힐러리는 민주당 강령과 백악관 성명 등을 읽으며 민주당에 대한 오해를 풀었고 종국에는 민주당원이 되었다. 힐러리는 자기 스스로가 반대자가 되어 가려진 일면을 보았다. 자기가 틀렸음을 고민하고,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 말로 법률가의 기본자세가 아닐까 싶다. 대법관님께서 “결론은 옳았을지 몰라도 상처 받은 사람들의 서운함을 배려할 수 있지 않았을까?”를 늘 고민하시는 모습과 잇닿는다.

  김 대법관님은 시종일관 입법의 중요성을 설파하셨다. 입법 단계에서부터 법률가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법률가들이 정책의 입안과 집행에서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나도 궁극적으로는 좋은 법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입법이 법률 제정 실무자들에게 국한된 기술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입법의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이지만 정치학이나 행정학, 정책학과 연계한 통합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척할 여지가 많은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 만드는 법’, ‘지킬수록 이득이라고 여겨지는 법’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 싶다. 

  강의 말미에는 판사들이 국가 대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는가를 검토하셨다. 선출되지 않아서 간접적인 정당성에 그치는 판사들이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하는지에 대한 고찰인 셈이다. 김 대법관님은 사법부는 직접 민주주의에서 소외된 소수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다원민주주의를 확산하는 사법부의 역할에 동감한다. 김 대법관님은 입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지만 다수파 기관인 입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함도 지적하셨다.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용기 있는 판결을 내릴 때가 비다수파 기관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빛난다. 인용하신 “다수자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다수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라는 워렌 미 연방대법원장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김 대법관님이 임명 제청된 지난 2004년 당시에 파격적인 인사라는 이유로 설왕설래가 오고간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대법원이 대표성 확충이라는 목표에만 매몰되어 각계각층의 출신을 안배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좀 더 넓어진 대법관 구성원을 갖춰서 우리 사회의 다양성에 이바지하길 희망한다. 좀 더 많은 제2, 제3의 김영란 대법관님을 만나 뵙고 싶다.


<3월 15일 김진태 검사장님>

  서울북부지검 김진태 검사장님은 삶에 정해진 답(定答)이 없음을 강조하셨다. 끊임없이 ‘왜’의 관점에서 사고하여 창의성을 기를 것을 주문하셨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저서에서 시인과 판사가 하나가 되는 세상이라야 공적 영역에서 정의가 세워진다고 주장하고,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 없이는 법의 집행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학은 개인의 연민을 사회적 연대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학은 시대와의 불화를 겪으며 개인의 상상력을 공공의 상상력으로 탈바꿈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꼭 문학에 한정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김 검사장님께서 언급하신 재판 사례들 역시 공공의 상상력을 키우는 훌륭한 소재들이 된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개인의 상상력을 공공의 상상력으로 확장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설계해야겠다.

  김 검사장님께서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은 자기완결적이며 무한책임을 지며, 외부의 책임 추궁 장치가 없다는 특징이 있다고 역설하셨다. 프로라고 칭할 만한 분들을 살펴보면 일상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도저한 근면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산 정약용이 책상다리로 앉아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고사를 떠올리다 보면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라는 『중용』 구절과 만난다. 누구나 사흘쯤은 성인군자 행세를 할 수 있다. 닷새 정도는 공부를 하다가 지쳐 단잠에 빠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사흘과 닷새를 보름으로, 달포로 늘려나가는데 있다.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수학하는 동안 망양지탄(亡羊之歎)을 그치고 “나는 이것을 제일 잘한다”라고 외칠 수 있는 가치를 찾고 싶다.

  그런데 프로가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뉴질랜드의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는 “나는 기술적으로는 프로가 되고 싶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아마추어이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다. 프로가 맡은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재주라면 아마추어는 순수함이나 겸손함을 가리키는 뜻으로 많이 풀이한다. 전문 분야의 솜씨에 국한되지 않는 통섭하는 능력이라든가, 인간미와 동떨어지지 않는 기예라고 봐도 괜찮다. 빼어난 기능인이 되기도 어렵지만 이를 넘어서려는 다짐도 필요하다. 김 검사장님이 바람직한 법조인이라는 화두를 제시하시면서 열거하신 덕목들은 결국 기술적인 면과 아마추어적인 면을 모두 아우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로이면서도 아마추어인 법조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강의안 말미에 나오는 홀로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이라는 문구에 눈길이 간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내밀한 행동이 한결같다는 것만 해도 참 어려운 일인데,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더 잘하려는 마음가짐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신독하면 오규원 선생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가 떠오른다. 교통사고를 몇 번 겪고 나니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시다.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도무지 대충 살 수가 없다. 팬티로 눈동자를 굴리는 마음은 혼자 있을 때 경계하는 마음과 통한다. 나도 세월의 무게 때문에 때가 묻을 대로 묻어 남는 건 팬티 한 장의 깨끗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첫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겠다. 법조인이라면 품어야 할 명예이자 자존심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에 착한 법조인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선량함은 법조인의 덕목이라기보다는 모든 직업인의 윤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 그 바람을 자주 접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법률가는 규범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김진태 검사장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3월 22일 민형기 헌법재판관님>

  민형기 헌법재판소 재판관님께서는 우리들을 구법조인과 대비되는 신법조인이라고 지칭하셨다. 법학전문대학원 체제의 불확실성은 결국 시간이 해결될 문제이므로 이에 신경 쓰지 말고 미래의 주역으로서의 역할과 자세를 궁리하는 원론적 고찰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대학 시절에 자신의 꿈을 글로 기록해서 간직하고 있다고 답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졸업 후에 살펴보니 전자가 후자보다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떠올랐다. 물론 경제적인 부만을 측정했기 때문에 진정한 삶의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성급하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몇 줄 글로 압축해서 써둔다면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싶다. 

  법조인이 처한 여러 환경적 요인 가운데 전문집단을 경원시하게 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언급이 흥미로웠다. 보통 사람도 전문지식을 공유하거나 전문분야에 참여할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에 법조 직역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강화된 추세다. 이제는 법조인의 권위를 강조하기보다는 신뢰를 구축하고 수요자 중심의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감한다. 갑(甲)의 사고에서 벗어나 역지사지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갑이 아닌 지금 시기부터 연마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맹자는 “사람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다(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라고 설파하셨다. 법조인이 전문가로서 그 역할을 존중받으려면 스스로에 대한 가치 부여가 필요하다. 이 일환으로 민 재판관님은 소명적 전문성을 강조하셨다. 오늘날 법조인이나 지망생들이 소명성을 버리고 전문가가 아닌 직업인이 되려 한다고 비판하신 대목이 인상 깊었다.

  민 재판관님은 사법시험 면접에서 술집을 함께 찾던 친구들이 무단횡단을 할 때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을 던지셨다고 한다. 민 재판관님은 당신께서도 친구들을 모두 이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범답안을 매번 실천할 자신이 없다고 하시면서 횡단보도를 안 건너고 갈 수 있는 술집을 제안할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2006년 3월 학부 엠티에서 후발대로 간 나는 청량리역에서 기차표가 모자라서 무임승차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내가 일행에게 다음 기차를 기다리든가 아예 엠티를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시외버스를 타고 엠티 장소로 향했다. 나는 선배의 권위를 이용해 후배들을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끌고 다닌 셈이다. 지난날의 나는 모범답안을 거의 지켰지만 방식이 세련되지 못해 마냥 뿌듯하지는 않았다. 규범을 어떻게 준수하고, 또 준수하도록 유도하느냐에 대한 고민을 더 이어가야겠다.

  헌법재판소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뒤뜰에서 천연기념물 8호 ‘재동의 백송(白松)’을 만날 수 있다. 이 백송은 밑동부터 V자로 갈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나눠진 줄기는 하늘에서 무성한 잎을 맺어 다시 만난다. 결국 뿌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헌법정신이라는 뿌리 위에서 이따금 갈등할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는 힘을 합쳐야 함을 백송은 담담히 술회한다. 이 정갈한 노거수(老巨樹)처럼 헌재를 비롯한 전 법조가 우리 사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길 희망한다.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려면 좀 더 열려있고 쉽고 낮은 자세가 요구된다. 민 재판관님께서는 그런 맥락에서 쉬운 사회현상도 법률용어로 환원하려는 행태를 꼬집으셨다. 아직 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현재의 모습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향후 의뢰인이나 시민의 눈높이를 맞추는 거울로 삼아야겠다.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는 것이 성숙된 양심이고, 한 사람의 품위를 나타내는 시금석이다.


<3월 29일 구상진 교수님(1)>

  구상진 교수님은 강연 모두에서 문민정부 이후 의원입법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씀하셨다. 의정사를 고찰하며 입법에 대한 실권이 입법부에 없었던 시절을 돌아보니 감회가 깊었다. 실제로 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이 정부입법을 처음으로 앞지르는 등 입법부의 활동이 양적으로 증가했음은 또렷하다. 다만 늘어난 양만큼 질도 높아졌다는 분석은 아직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앞으로 국회의원을 평가할 때 대표발의안 횟수 같은 식의 정량적 개념에 치중하기보다는 얼마나 당대에 필요한 법을 고민했는지를 정성적인 측면으로도 접근하는 활동이 함께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입법 현실은 사적인 성격이 강한 보좌진 등의 인재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얼마 전 출범한 국회 입법조사처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 공적인 조직으로서 기대가 크다. 사안이 터질 때마다 각자의 ‘해석’이나 ‘의견’만을 내세워 갈등을 증폭하기 전에 차분히 ‘사실’을 축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구 교수님은 법제사를 언급하시며 법조 집안의 내력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역설하셨다. 켈젠 선생이 한국을 독일의 알려지지 않은 손자라고 지칭하셨을 정도로 한국의 법제는 일본을 계수했다. 그 이전에는 중국의 영향력이 컸다. 일전에 고려대학교 화공생명공학과 현재천 교수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현 교수님께서는 한국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역사적 의제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생존하고 번영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하나둘 중국화(中國化)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아름다운 예외였다. 

  한국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일정 부분 건사할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을 개방성이라는 요인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개방성이 반드시 독창성을 담보하지 않고, 우리가 모든 면에서 개방적이지도 않았다. 가령 양명학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보다 이단으로 여겨진 사례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대목의 고민을 이어가는 까닭은 대한민국이 복수의 문명권이 협력과 경쟁을 하는 좀 더 이상적인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나 국가 브랜드의 모색은 편협한 민족주의로 가두기에는 그 품이 너르다. 로스쿨 제도도 그런 거시적 안목에서의 시도라고 보면 좋을 듯싶다. 

  나는 시험보다 교육에 주안점을 둔 것에 법학전문대학원의 대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험이 고급화될수록 교육과 상충관계가 된다. 모든 가치기준이 수험적합성에 맞춰지면서 법과대학의 수업이 파행적으로 운영된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한 번의 시험이 아닌 다방면의 교육으로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로스쿨을 도입한 만큼 변호사시험은 의사국가고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의사국가고시의 합격률은 2010년 92.9%, 2009년 93.6%였다. 높은 합격률에도 별다른 시비가 없는 것은 의대 교육과정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쟁을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시험과 교육의 적절한 배합의 문제로 요약된다. 

  시험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교육을 향한 노력도 평가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구상진 교수님께서 설파하신 학교 수업의 중요성에 동감했다. 수험생이 시험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라면 학생은 교육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 아닐까 막연히 나눠본다. 물론 수험생과 학생이 크게 배치되는 개념은 아니다. 좋은 학생이 훌륭한 수험생도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의 취지다. 내가 학생에 방점을 찍는 이유는 앞으로 대비해야 할 각종 시험들에 소홀하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수험 공부만으로 채우기 힘든 배움의 기쁨을 좀 더 찾아보겠다는 정도의 뜻이다.


<4월 5일 구상진 교수님(2)>
 
  구상진 교수님께서는 법은 정신적 체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배우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법은 가치의 기준이어서 우리 정신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을 남과 공유하기 위한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 요청된다. 나에게 주관이 있듯이 상대방도 그 분 나름의 주관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상호주관성은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더욱 필요한 덕목이다. 법조인으로서 간주관성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열린 자세,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구 교수님은 법의 진화과정을 설명하시면서 집단적 신분관계에서 개인의 의사결정 선택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역설하셨다. 다만 이러한 인간의 의사에 대한 강조가 오만한 마음의 발로가 아닌지 반성하고, 과거의 신분사회보다 더한 신분사회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고 첨언하셨다. 구 교수님은 시종일관 지엽적인 판례 암기나 수험기술적인 접근이 아닌 핵심 원리와 법적 사고를 세울 것을 주문하셨다. 이런 노력을 통해 법의 진화에 이바지하기를 다짐한다. 

  법의 진화는 결국 법의 출처(出處)를 따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법이 나아갈 자리와 물러날 자리를 분간하는 혜안을 키워가는 길을 뜻한다. 법은 모든 인간의 자유와 독립에 신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행정국가화 경향은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고를 상당 부분 수정했다. 좀 더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입법정책에 대한 요청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이럴 때일수록 법이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판별하는 지혜가 더욱 요청된다. 법학전문대학원이 일정 부분 직업학교의 성격을 띠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 의미의 기능인(technician)에 그쳐서는 안 된다. 로스쿨 졸업생이 입법 자문이나 법제 컨설팅 등에도 많이 진출할 것을 감안해 이런 부분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야 한다.

 또한 법은 공동체 내에서 집행되어야 하는 규범임을 강조하셨다. 전혀 집행되지 않는 법은 법이 아님은 자명하다. 법은 현실로 집행될 수 있어야 하고, 현실이 법에 피드백 되어 규범력을 높여야 한다. 근래에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통상적으로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구별해서 생각한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면 법의 지배보다는 법에 의한 지배가 될 공산이 크다. 법의 지배는 평평해야 한다.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에게 기울어진 ‘편향된 법치’는 형용모순이다.

  자기에 대한 기준과 남에 대한 기준을 달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다(待人春風 持己秋霜)”라는 채근담 구절을 많은 이들이 좌우명으로 삼는 것을 보았다. 자기와 타인에게 동등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나에게 더 촘촘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나처럼 천학비재한 사람도 자기보다 빼어난 사람을 왈가왈부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 민주주의의 혜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제해서 행사할수록 더 빛난다. 

  물론 비판하는 대상보다 반드시 뛰어나야만 비판의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더욱이 공적 영역에 있는 인물을 비판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엄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적 사표가 될 만한 모범이 되라는 구상진 교수님의 가르침을 생활신조로 삼는다면 남의 잘못을 손뼉 치며 지적하는 건 삼가야겠다. 더욱이 법률가는 남을 책망하는 일을 맡기도 해야 한다. 그럴 경우 스스로를 먼저 책망하는 자세가 있어야만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 탓보다 자기 탓이 바지런한 사람을 좀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4월 12일 이재후 변호사님>

  이재후 김앤장 대표변호사님은 법관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실을 어떻게 판단하고 인정할 것인가를 꼽으셨다. 법률의 적용은 그 다음 문제라는 것이다. 학기 초에 우리 학교 최은희 교수님께서 사실심인 하급심 판결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다 배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사실관계 파악은 법해석학을 연마하는데 있어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실무에서는 사실관계를 따지는 능력이 가장 먼저 필요함을 새삼 깨달았다. 당사자가 가져다주는 사실만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그냥 단순히 법률만 아는 것이라는 지적이 매서웠다.

  이 변호사님은 기존 변호사와는 다른 접근을 선택하셨다. 거의 100%가 송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재판정이 아닌 투자자를 찾아가 기업법무와 국제법무의 영역을 개척하셨던 용기가 인상 깊었다. 이 변호사님은 다양한 법률 수요를 충족하고 전문화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로스쿨의 역할을 역설하셨다. 앞으로 전문화가 가속화되면 변호사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힘을 모아야 할 사건들이 늘어날 전망이다. 이 변호사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인재 영입을 위해서 “삼고초려가 아니라 십고초려도 할 각오가 돼 있다”라고 하셨는데 로스쿨에서도 다양한 인재가 육성되어 활약하길 희망하며 나도 일조하도록 애쓰겠다.

  이 변호사님은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변호사의 기본이라고 다시금 강조하시면서도 변호사의 자질을 몇 가지 더 열거하셨다. 법률 적용을 위한 리서치 실력, 짧게 요약 정리하여 핵심을 도출하는 글쓰기 기술, 설득하는 능력, 의뢰인을 획득하고 관리하는 방법 등이다. 어느 하나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보면 마케팅과 연관되는 내용이어서 경영학자 윤석철 교수님께서 마음(feeling)관리의 중요성을 언급하신 대목이 떠올랐다. 윤 교수님은 ”마음속 상처는 육체의 상처보다 더 크고, 상처받은 고객이나 종업원의 마음은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한다”라고 설파하셨다. 사실에 대한 균형적 감각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설득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극한 정성이면 감인(感人)이다.

  이 변호사님은 앞으로 법치주의가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법률수요는 증가할 것이라고 예견하셨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회가 될수록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법의 역할이 커질 것임은 자명하다. 일전에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장님은 금융이 선진화되려면 법치가 바로 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다. 금융은 신뢰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산업으로서 우리나라 금융산업에 엄정한 법치의 관행이 확립되어야 하는데 법이 약자보다는 강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된다면 금융산업의 성장잠재력을 저해한다는 말씀이다. 비단 법치금융만 확립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법치의 준수가 요청된다. 법 앞의 평등은 법의 내용이 모두에게 평등할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법의 집행도 모두에게 평등할 것을 요구한다. 

  김앤장은 한국 사회에서 성공 모델로 통한다. 혹자는 법률을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김앤장의 성과가 공익보다 사익만 추구한 결과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김앤장의 영향력이 입법부나 사법부의 권능까지도 넘보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들린다. 나는 김앤장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이런 고언도 새겨들으시리라 믿는다. 독선은 누구에게나 해롭다고 배웠다. 이 변호사님의 강연을 들으며 미래의 법조인은 전문성을 갖추되 특권의식을 버려야 함을 절감했다.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 법조인에게 응당 보장되는 ‘권력’이란 없다. 소명적 책임감을 맡은 이에게 부여한 제한된 ‘권한’이 있을 따름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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