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2012년 1학기 행정법사례연구 수업의 발표 초안을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올립니다. 그간 행정소송법 개정안 가운데 원고적격을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만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조홍식 교수님을 비롯한 신중론을 접하고 보니 좀 더 조심스러운 입장이 되었습니다. 조 교수님은 실정법과 그 해석의 대부분이 도덕적 조정문제를 해결하는 규칙이라는 전제 하에, 그 ‘조정 규칙’을 제정하는 권위는 입법부ㆍ행정부ㆍ사법부의 민주적 정통성의 크기만큼 비례적으로 할당되어야 한다는 비례입헌주의(proportional constitutionalism)를 주장하십니다. 저는 이 견해가 사법부의 권한을 축소하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입법부와 행정부의 책무를 다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평가합니다. 앞으로 좀 더 고민하고 싶은 화두입니다.

 

 

비례입헌주의의 요체는,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기관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되, “‘조정문제’에 관한 한 민주적 정통성의 크기만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소결론을 종합해 내린 결론입니다. 즉 법적 문제의 대다수는 가치판단의 문제라는 점, 가치판단의 문제는 객관적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국가구성원 사이의 도덕적 불확정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국가가 통합될 수도, 존속할 수도 없다는 점, 그러므로 조정문제는 어떤 방향으로든 해결책(‘매듭’)의 마련이 중요하다는 점, 민주주의는 조정문제의 매듭을 민주적 정통성이 큰 정치부문에 맡긴다는 점, 사법부는 정치과정에서 결정되지 않은 나머지 조정문제를 결정하여야 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조홍식, 「환경법의 해석과 자유민주주의」, 『서울대학교 法學』, 제51권 제1호,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10, 262쪽

 

 

사법부는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권리구제만 할 수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사전적인 권리구제 수단으로서의 입법부와 행정부의 각성이 더욱 요구됩니다. 더욱이 선출된 권력인 국회와 대통령은 그 정치적 책임이 법원에 견주어 더 크기 때문이죠. 입법 과정과 정치적 타협, 집행 과정 다음에 사법 과정을 거치도록 함으로써 국민에게 입법-행정-사법의 삼세판의 권리보호를 하는 것이 환경소송을 비롯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미 그렇게 하라고 다 규정해놓고 있으니 정성스럽게 실천하는 문제만 남은 셈이지만요.

 

 

환경행정소송의 원고적격
-대법원 2010. 4. 15. 선고 2007두16127 판결-

 

 

Ⅰ. 판례개요

1. 사실관계

 

2005. 7. 19. 피고 보조참가인을 비롯한 28개 신청업체들은 피고(상고인 겸 피상고인, 김해시장)에게 이 사건 신청지를 대상부지로 하는 공장설립승인신청을 하였다.


2005. 11. 3. 피고는 낙동강유역환경청장에게 사전환경성검토협의를 요청하였다.


2005. 11. 28. 낙동강유역환경청장은 오염물질 확산에 의한 영향 검토 및 이 사건 신청지에 공장이 설립됨으로써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부산광역시와 양산시의 동의에 관한 보완요청을 하였다.


2005. 12. 9. 피고는 낙동강유역환경청장이 제기한 문제에 관하여 제대로 보완하지 아니한 채 다시 사전환경성검토협의를 요청하였다.


2006. 1. 5. 낙동강유역환경청장은 ① 이 사건 신청지로부터 약 2.4㎞ 떨어진 곳에 물금취수장이, 약 2.7㎞ 떨어진 곳에 양산취수장과 정수시설이 건설 중이어서 공장입지로서 적절하지 않고, ② 2005. 6. 4. 시행된 김해시의 공장건축가능지역 지정에 관한 조례 제5조 제2항에 위배되며, ③ 낙동강원수를 상수원수로 이용하고 있는 부산광역시, 양산시가 안정적인 상수원수 확보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는 등의 사유로 이 사건 신청지를 대상부지로 하는 공장설립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회신하였다.


2006. 1. 10. 피고는 다시 낙동강유역환경청장에게 사전환경성검토재협의를 요청하였다.


2006. 2. 7. 낙동강유역환경청장은 부동의한다고 통보하였다.


2006. 4. 27. 피고는 그 협의내용을 반영하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같은 날 신청업체들의 공장설립승인신청을 승인하였다(이하 ‘이 사건 처분’).


2006. 4. 29. 낙동강유역환경청장은 피고의 협의내용 미반영 통보에 대하여 협의내용을 이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2006. 6. 12. 낙동강유역환경청장은 경상남도지사에게 이 사건 처분의 취소 또는 정지조치를 요청하였다.


2006. 6. 9. 원고들은 “피고가 2006. 6. 5. 별지 기재 신청업체들에 대하여 한 공장설립승인처분을 취소한다.”라는 판결을 구하는 공장설립승인처분취소소송을 제기하였다. 부산광역시가 원고들의 승소를 위해 참가하였다.

 

※ 원고들의 지위
양산물금택지개발사업지구 내인 양산시에 거주하고 있는 원고 2인은 현재 밀양댐에서 취수한 수돗물을 공급받고 있으나, 양산취수장과 정수장의 급수가 개시되면 그곳에서 취수한 물을 식수로 공급받기로 계획되어 있고, 위 원고들을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은 대부분 부산광역시에 거주하면서 물금취수장에서 취수한 물을 식수로 공급받고 있다.

 


2. 소송경과

 

제1심 판결(창원지방법원 2006. 11. 2. 선고 2006구합1225 판결)
원고들에게 이 사건 처분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이 사건 소를 모두 각하하였다.

 

환송전 판결(부산고등법원 2007. 6. 29. 선고 2006누5540 판결)
양산시에 거주하는 원고 2인에 대한 항소를 인용하고, 나머지 원고들의 항소는 기각하였다.

 

이 사건 처분에 김해시 공장건축가능지역 지정에 관한 조례가 적용된다고 보고 해당 조례 제5조 제2항 제6호에 위배되어 위법하다고 판단한 고등법원의 판단은 대법원에서 이 사건 조례의 적용범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사건 각 공장은 그 부지면적(2이상의 공장을 함께 건축하는 경우로서 그 면적의 합계)이 148,245㎡로서 국토계획법 시행령 제71조 제1항 제19호 [별표20] 제2호 차목 소정의 부지면적이 1만㎡ 이상인 공장에 해당하므로, 이 사건 조례는 이 사건 처분에 대하여 적용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환송 판결(대법원 2010. 4. 15. 선고 2007두16127 판결)
나머지 원고들의 원고 적격도 인정되나, 김해시 공장건축가능지역 지정에 관한 조례는 이 사건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환송전 판결을 전부 파기ㆍ환송하였다.

 

원심 판결(부산고등법원 2011. 8. 17. 선고 2010누1910 판결)
양산취수장 및 물금취수장에서 취수된 물을 수돗물로 공급받는 원고들로서는 이 사건 처분의 근거 법규 및 관련 법규에 의하여 개별적ㆍ구체적ㆍ직접적으로 보호되는 환경상 이익, 즉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이 침해되거나 침해될 우려가 있는 주민으로서 원고적격이 인정받을 수 있으나, 이 사건 처분은 적법하다고 보아 청구를 모두 기각하였다.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2. 2. 23. 선고 2011두21805 판결)
법령 적용에 관한 법리오해의 위법이 없고 재량권 일탈ㆍ남용의 위법이 없다는 이유로 상고를 모두 기각하였다.

 


3. 대상판결 요지

 

행정처분의 직접 상대방이 아닌 자로서 그 처분에 의하여 자신의 환경상 이익이 침해받거나 침해받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취소소송을 제기하는 제3자는, 자신의 환경상 이익이 그 처분의 근거 법규 또는 관련 법규에 의하여 개별적·직접적·구체적으로 보호되는 이익, 즉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임을 입증하여야 원고적격이 인정되고, 다만 그 행정처분의 근거 법규 또는 관련 법규에 그 처분으로써 이루어지는 행위 등 사업으로 인하여 환경상 침해를 받으리라고 예상되는 영향권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영향권 내의 주민들에 대하여는 당해 처분으로 인하여 직접적이고 중대한 환경피해를 입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고, 이와 같은 환경상의 이익은 주민 개개인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보호되는 직접적·구체적 이익으로서 그들에 대하여는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환경상 이익에 대한 침해 또는 침해 우려가 있는 것으로 사실상 추정되어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으로 인정됨으로써 원고적격이 인정되며, 그 영향권 밖의 주민들은 당해 처분으로 인하여 그 처분 전과 비교하여 수인한도를 넘는 환경피해를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다는 자신의 환경상 이익에 대한 침해 또는 침해 우려가 있음을 증명하여야만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으로 인정되어 원고적격이 인정된다(대법원 2006. 3. 16. 선고 2006두330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 2006. 12. 22. 선고 2006두14001 판결 등 참조).

 

 

대법원은 원고적격에 관한 기존의 원론적인 태도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수돗물을 공급받아 이를 마시거나 이용하는 부산광역시, 양산시 주민들로서는 이 사건 처분 근거 및 관련 법규가 환경상 이익의 침해를 받지 않은 채 깨끗한 수돗물을 마시거나 이용할 수 있는 자신들의 생활환경상의 개별적 이익을 직접적ㆍ구체적으로 보호하고 있음을 증명하여 원고적격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긍정하였다.

 

 

나아가 (원심에서 원고적격을 인정받지 못한) 나머지 원고들의 거주지역이 물금취수장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부산광역시 또는 양산시이기는 하나, 수돗물은 수도관 등 급수시설에 의해 공급되는 것이어서 수돗물을 공급받는 주민들이 가지게 되는 수돗물의 수질악화 등으로 인한 환경상 이익의 침해나 침해 우려는 그 거주 지역에 불구하고 그 수돗물을 공급하는 취수시설이 입게 되는 수질오염 등의 피해나 피해 우려와 동일하게 평가될 수 있다고 할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물금취수장에서 취수된 물을 수돗물로 공급받는 나머지 원고들로서는 이 사건 공장설립승인처분의 근거 법규 및 관련 법규에 의하여 개별적ㆍ구체적ㆍ직접적으로 보호되는 환경상 이익, 즉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이 침해되거나 침해될 우려가 있는 주민으로서 원고적격이 인정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Ⅱ. 평석
1. 쟁점정리

 

이 사건의 주된 쟁점은 김해시장의 부당한 공장설립승인처분에 대하여 김해시민이 아닌 부산과 양산시민으로 구성된 원고들이 그 효력을 다툴 법률상의 이익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판단해야 할 내용은 이 사건의 처분이 부산광역시나 경상남도 양산시 주민인 원고들의 깨끗하고 원활하게 수돗물을 이용할 권리를 침해하거나 침해할 우려가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환경침해의 경우 피해의 광역성, 피해의 중대성으로 인해 행정처분의 상대방이 아닌 인근 주민(제3자)의 원고적격을 확대할 필요성 및 이를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 것인지가 문제된다.

 

 

이 밖에도 원고들은 처분의 직접 근거가 되는 법규뿐만 아니라 처분의 근거가 되는 법규가 원용하고 있는 법규도 처분의 근거법규로 인정하고 있는 법원의 태도를 고려하여 관련 법률 및 조례를 근거로 한 이 사건 처분의 위법성과 관련한 주장(가령 피고가 고의로 환경영향평가를 회피했다는 주장)들을 제기하였으나 검토를 생략하겠다.

 
2. 관련 판례의 흐름

(김향기, 「행정소송의 원고적격에 관한 연구- 환경행정소송에서 제3자의 원고적격을 중심으로-」, 『환경법연구』 제31권 2호, 한국환경법학회, 2009, 226-236쪽을 참조하여 정리)


(1) 연탄공장 건축허가 취소청구 사건(대법원 1975. 5. 13. 선고 73누96ㆍ97)
이 판결은 도시계획법에 의한 주거지역에서 행정청이 연탄공장건축허가처분을 하자 위 연탄공장으로부터 불과 70㎝ 거리에 사는 주민이 제기한 소송에 대한 판단이다.

대법원은 구 도시계획법 및 구 건축법이 도시계획구역 안에서의 주거지역에서 거주의 안녕과 건전한 생활환경의 보호를 해치는 모든 건축이 금지되는 것은 구 도시계획법 및 구 건축법이 추구하는 공공복리의 증진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주거지역 내에 거주하는 사람의 ‘주거의 안녕과 생활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데도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보았다.

주거지역내에 거주하는 사람이 받는 위와 같은 보호이익은 단순한 반사적 이익이나 사실상의 이익이 아니라 바로 법률에 의하여 보호되는 이익이라고 할 것이어서, 주거지역 내에 거주하는 역내 건물 소유자는 비록 당해 행정처분의 상대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행정처분으로 말미암아 위와 같은 법률에 의하여 보호되는 이익을 침해받고 있다면 원고적격이 있다고 판시하였다.
이 판결은 제3자의 원고적격, 환경소송의 원고적격의 법리 형성에 기초가 되었으며, 법률해석에 의하여 법률상 이익의 개념을 확대한 표현을 사용한 최초의 판결이라 할 수 있다.

 

 

(2) 청담공원 내 골프연습장 설치금지가처분신청 사건(대법원 1995. 5. 23. 자 94마2218 결정)
이 결정은 도시공원법상 근린공원으로 지정된 공원에 골프연습장의 설치가 인가됨에 따라 인근주민들이 골프연습장의 건설이 헌법이 보호하고 있는 기본권으로서의 환경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공작물설치금지 가처분을 신청한 사건으로, 헌법상의 환경권만으로는 국민에게 직접으로 구체적인 사법상의 권리를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없음을 밝힌 최초의 판례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대법원은 헌법상 기본권 침해가 원고적격의 요건인 법률상 이익이 될 수 있다는데 소극적인 입장이다. 이에 반하여 헌법재판소는 기본권을 법률상 이익으로 인정하거나 고려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헌법재판소 1998. 4. 30. 97헌마141 결정, 헌법재판소 1989. 9. 4. 88헌마22 결정, 헌법재판소 2008. 7. 31. 2006헌마711 결정).

 

 

(3) 화장장 설치를 위한 상수원보호구역변경처분 취소청구 사건(대법원 1995. 9. 26. 선고 94누14544 판결)
이 판결은 처분의 직접의 근거 법률뿐만 아니라 관련법과 그 시행령의 취지 해석을 근거로 하여 원고적격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종래 판결의 중요한 변화로 이해될 수 있다.

 

 

(4) 용화집단시설지구 공원사업시행허가처분 취소청구 사건(대법원 1998. 4. 24. 선고 97누3286 판결)
이 판결은 당해 처분의 직접적인 근거법령인 실체법령뿐만 아니라 절차법인 환경영향평가법령상의 환경상 이익을 법률상 이익으로 인정하고, 환경영향평가대상지역 안의 주민에게 원고적격을 인정할 수 있음을 인정한 최초의 판례이다.

 

 

(5) 남대천 양수발전소건설사업승인처분 취소청구 사건(대법원 1998. 9. 22. 선고 97누19571 판결)
이 판결은 환경영향평가대상지역 밖의 주민ㆍ일반 국민ㆍ산악인ㆍ사진가ㆍ학자ㆍ환경보호단체 등의 환경상 이익이나 전원개발사업구역 밖의 주민 등의 재산상 이익에 대하여는 이 사건 처분의 근거 법률에 이를 그들의 개별적ㆍ직접적ㆍ구체적 이익으로 보호하려는 내용 및 취지를 가지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아니하므로, 이들에게는 원고적격을 부인한 사례이다.

 

 

(6) 쓰레기소각장 입지지역결정고시 취소청구 사건(대법원 2005. 3. 11. 선고 2003두13489 판결)
이 판결은 원고적격의 인정여부는 법 및 법시행령의 제반 규정의 취지, 목적과 폐기물처리시설 설치로 인하여 침해되는 이익의 내용, 성질, 태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한 판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직접적이고 중대한 환경상의 침해를 받으리라고 예상되는 직접영향권 내에 있는 주민과 간접영향권 내에 있는 주민들은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환경상의 이익에 대한 침해 또는 침해우려가 있는 것으로 사실상 추정하여 원고적격을 인정하나, 직ㆍ간접적 영향권 밖의 주민은 환경이익의 침해 또는 침해우려가 있음을 입증해야 원고적격이 인정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7) 새만금간척사업 시행인가처분 취소청구 사건(대법원 2006. 3. 16. 선고 2006두330 전원합의체 판결)
이 판결은 환경영향평가대상지역 안의 주민에게만 원고적격을 인정하고 그 대상지역 밖의 주민은 수인한도를 넘는 환경피해를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한다는 종래의 판결을 확인하면서, 환경영향평가대상지역을 판단하는 주체를 사업자가 아닌 법원으로 보았고, 헌법 제35조 제1항의 헌법상의 환경권과 환경정책기본법 제6조의 일반적 규정만으로는 원고적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8) 공장설립승인처분 취소청구 사건(대법원 2006. 12. 22. 선고 2006두14001 판결)
이 판결은 환경영향평가대상지역 여부가 아니라 사전환경성검토대상지역의 여부에 따라 원고적격의 인정여부를 판단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또한 사전환경성검토대상지역에 포함될 개연성이 충분히 보이는 주민에게 원고적격을 인정하여 사전환경성검토대상지역의 여부를 법원이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두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9) 광업권설정허가처분 취소청구 사건(대법원 2008. 9. 11. 선고 2006두7577 판결)
이 판결은 당해 처분뿐만 아니라 그 후속절차로 인한 피해를 포함하여 환경상 피해와 더불어 재산상의 피해가 예상되는 경우에도 법률상 이익을 인정하고 있으며, 토지와 건축물의 소유자ㆍ점유자 또는 이해관계인 및 주민도 그 환경상 이익의 침해나 침해우려를 증명함으로써 원고적격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여, 원고적격의 범위를 좀 더 넓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대상판결의 검토

 

(1) 환경행정소송과 원고적격의 의의
환경행정상 법률관계는 기본적으로 행정청, 사업자, 인근주민의 삼각관계로 설명하기도 한다. 행정청이 사업자에 대하여 내려진 인ㆍ허가처분에 의하여 인근주민의 환경상의 이익이 침해되는 경우에 이를 사업자와 인근주민간의 사법상의 분쟁으로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행정청의 처분에 대한 항고소송의 제기를 통하여 환경침해를 막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권리구제수단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업자에 대한 환경침해적 내용의 행정청의 인ㆍ허가에 대해 인근주민이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핵심적인 논의과제가 된다.

 

 

환경행정소송에서의 원고적격도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원고적격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환경소송에서의 원고적격이란 환경분쟁에 있어서 행정청에 대하여 구체적인 행정소송의 제기를 전제로 하여 원고로서 소송을 수행하여 본안판결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김용섭 외, 『판례교재 행정법』, 법문사, 2011, 519-520쪽).

 

 

원고적격의 문제는 행정소송제도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행정소송에서 개인은 자신의 사적인 이익 내지는 권리의 구제를 받기 위하여 소를 제기하여 행정을 공격하는 것이고 행정은 이러한 전체 국민의 공적 이익 즉 공익이라는 측면에서 방어하게 된다. 행정소송의 목적이 ’권리구제‘에 있다면 권리구제가 필요한 자에게 원고적격이 인정되어야 하지만, 행정소송의 존재이유가 ’적법성의 통제‘에 있다면 이해관계를 갖게 되는 국민 일반이 원고적격이 인정된다(김동건, 「환경소송에서의 주민의 원고적격」, 『환경법연구』 제28권 3호, 한국환경법학회, 2006, 103쪽).

 

 

(2) 환경 피해의 영향권을 확장하는 해석
대상판결은 처분의 근거법률 및 관계법령에서 개별적인 사익보호 목적과 취지라는 연결고리를 보다 합목적적으로 확장하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수돗물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환경상 이익의 침해나 침해 우려가 동일하기 때문에 거주지역 등과 관련한 지역성 관련 기준은 상당히 완화되어 적용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법원의 태도는 환경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갖는 피해의 광역성ㆍ누적성ㆍ잠복성 등을 고려하여 환경오염과 그에 따른 피해의 관계를 특정 지역 내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환경피해의 영향권을 보다 폭넓게 인정할 수 있는 전향적인 해석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판결의 논리는 향후 수질뿐 아니라, 이와 유사하게 피해의 광역성이 인정될 수 있는 대기 및 소음ㆍ진동과 같이 광범한 영역에 피해가 야기될 수 있는 영역까지도 충분히 확장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원고적격의 판단 요인은 보다 유연하게 해석될 수 있다면, 앞으로는 원고적격의 인정 기준이 환경영향평가대상지역과 같은 기존의 한정된 지역성에서부터 점차 탈피하여, 보다 실질적인 피해의 존재 또는 예상 여부에 대한 기준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영향평가대상지역이라는 지역성에 따른 기존의 획일적 구분은 오히려 그 밖에 거주하는 주민의 환경권을 무시하게 되는 부당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준서, 「‘낙동강 취수장 판결’로 살펴본 환경행정소송상의 원고적격 확대의 문제」, 『한양법학』 제31집, 한양법학회, 2010, 77-79쪽).

 

 

(3) 영향권 밖의 주민들의 입증책임 문제
대상판결은 수돗물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환경영향평가지역 밖의 주민의 경우에는 환경상 이익에 대한 침해 또는 침해 우려가 있음을 증명하여야만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으로 인정되어 원고적격이 인정된다는 기존 판례의 태도를 반복하고 있다.

 

 

원고적격 단계에서 원고의 주관적 권리구제의 문제를 완전히 포섭하고 본안판단에서는 단지 처분의 객관적 위법성만을 심리하는 구조에 비추어보면 원고적격 단계에서 자신의 권리 침해 또는 침해의 우려가 완전히 증명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개별법령 규정에서 도출할 수 없는 법률적 이익을 증명책임의 전환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환경법 분야의 증명책임의 곤란 등으로 원고적격의 부인에 이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소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는 비판, 소송자료는 대부분 기술적, 전문적인 자료이고 환경전문가가 아닌 원고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기 어렵다는 비판, 환경오염물질의 위험성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는 행정청이나 배출시설의 사업자에게 편중되어 있으므로 개인인 원고가 이와 같은 자료를 얻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여 원고의 증명의 정도를 완화해야 한다는 비판 등이 있다.

 

 

행정소송에서 변론주의가 원칙이고 직권탐지주의는 변론주의를 보충하는 정도로 보는 판례(대법원 1986.6.24. 선고 85누321 판결)의 입장에서도 행정소송에서는 직권탐지주의가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민사소송보다는 넓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판례의 태도에 따르더라도 원고가 수집한 소송자료만으로는 원고적격 유무를 판단하기에 부족할 때 법원이 직권으로 소송자료를 수집하여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환경행정소송에서 원고적격의 경우 공익성이 강하므로 반드시 변론주의에만 기댈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판례의 의미와 전망

 

원고적격의 문제는 소송요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송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여 본안의 판단까지 갈 수 없도록 막는 것은 국민의 권리구제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행정법상 권리구제는 반드시 행정쟁송을 통해 승소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송법상 기각과 각하가 준별되는 만큼 행정청을 상대로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권리구제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는 바가 있으며, 현대 행정에서 원고적격이 모호한 경우는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본안판단까지 해서 이익의 침해 여부를 따져야 할 경우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본안전판단에서 미리 이익 침해가 있느냐 없느냐를 다 확정하게 되면 본안판단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장경원, 「환경행정소송(環境行政訴訟)과 제3자의 원고적격(原告適格) -대법원 2010. 4. 15. 선고 2007두16127 판결을 중심으로」, 『환경법연구』 제33권 2호, 한국환경법학회, 2010, 374쪽). 특히 이익 침해가 즉시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환경분쟁에서는 더욱 필요성이 있다.

 

 

대법원의 잇따른 원고적격의 확대 움직임은 개인의 권리구제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법원과 법무부의 행정소송법 개정안에서 원고적격의 개정 논의가 이뤄지기도 하였다. 다만, 원고적격의 무분별한 확대 주장은 적어도 권력분립의 원칙에 비추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도 있다. 특히 원고적격의 확대 논의가 자칫 ‘사법의 정치화’로 귀결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주장도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법부가 이런 환경권의 침해 문제에서 그 침해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사법부가 판결을 통해서 이런 가치관을 조정하는 결정을 한다는 것인데, 사법부가 이런 결정을 할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대표적인 예다. 국가의 특정 행위가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도 완벽할 수 없고 무엇보다 해당 국가의 행위와 관련해서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결론을 도출하기가 매우 어렵다. 게다가 환경분쟁은 특정한 개인의 권리침해 문제가 아니라 환경보호라는 공익과 경제발전 등을 이유로 하는 환경이용이라는 공익의 갈등문제이기 때문에 환경분쟁에 대한 결정은 곧 국가의사의 결정과 연결되는 문제이다(김종보ㆍ김배원, 「환경권의 헌법적 의미와 실현방법」, 『법학연구』 제53권 제1호, 부산대학교 법학연구소, 2012, 50-51쪽). 환경과 관련한 국가적 의사결정은 국민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국회가 우선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의회민주주의에 부합하는 방식이라는 점도 충분히 고려해야할 것이다.

 

 

결국 환경적 가치를 위해 원고적격을 확대할 필요성과 사법부의 통제에 내재한 권력분립적 한계를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환경분쟁이 사법부까지 다다르기 전에 입법부와 행정부는 환경과 관련한 절차적 통제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입법부의 섬세한 입법과 정치권의 원만한 타협, 행정부의 공정한 집행을 통해 사전적인 권리구제를 하는 길을 넓혀야 한다.

 


<보론>

 

현행의 소송제도는 자유주의ㆍ개인주의에 사상적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자연보호라는 객관적이고 공익적인 목적을 위하여 제정된 환경법과는 조화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요컨대 쾌적한 자연환경이나 생태계를 유지함으로써 누리는 이익(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태계의 이익을 포함한다)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인간만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마련된 수단인 현행 소송제도로 해결하기에는 많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공익적인 성격을 가지는 환경법 영역에서는 이 법이 추구하는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 그에 타당한 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설계경ㆍ정회근, 「自然의 原告適格에 관한 小考」, 『토지공법연구』 제44집, 한국토지공법학회, 2009, 173쪽).

 

 

(1) 공공신탁이론
어떠한 자원은 일반국민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므로 특정 개인의 자유로운 이익 내지는 사적 사유권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특정 자원은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이어서 특정 개인이 아니라 모든 시민을 위하여 보존되어야 하고, 그 사용은 그 자체가 공공적 성격을 가지므로 특정 개인의 사적 이용에 제공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2) 자연의 권리론
자연에는 자연 고유의 가치가 있으며 동ㆍ식물을 포함한 자연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고, 그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개인이나 단체가 이들을 대신하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자연의 권리 이론에 근거한 소송사건에서 대법원은 현행법의 해석상 도롱뇽의 당사자능력을 인정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06. 6. 2. 선고 2004마1148, 1149판결).

 

 

(3) 단체소송론(환경단체활용론)
전문성이 없는 개인에 대하여 환경단체의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단체 회원의 이익이 침해되어 소송을 제기하거나(이기적 단체소송), 환경보호, 자연보호, 기념물보호 등과 같이 일반적인 공공이익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타적 단체소송)으로 나뉜다. 환경분쟁을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역량적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환경단체의 역할에 주목한다.

 

 

<나가며>

사안에서 대부분의 원고들이 부산광역시에 거주하고, 부산광역시도 원고 측에 보조참가하였습니다. 공장이 설립되는 위치와 가까운 양산시 일대의 주민들보다 위치상 떨어져 있는 부산시 일대의 주민들이 환경소송에 적극적이었다는 역설적인 사실은 적잖은 시사점을 줍니다. 낙후 지역의 지역개발 욕구와 이미 상대적으로 개발의 이익을 누리는 인근 주민들의 환경보전 욕구를 조정해야할 일이 앞으로 많이 벌어질 것을 암시하는 듯하네요. 환경을 지키면서도 경제적 이유 등으로 환경보다 개발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지역의 주민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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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를 줄이는 법(?)

2012. 1. 21. 18:51 |

2011년 2학기 사회보장법 과제로 ‘과로’에 대한 자유로운 글쓰기가 있었다. 고민 끝에 내 오랜 화두인 ‘노력에 대한 보상’이 과로를 줄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공정한 평가는 엄정한 상대평가만으로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1.
  과로를 줄이는 해법 가운데 하나로 ‘노력에 대한 보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과로를 줄이자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를 쓰라니[努力]’!!! 일견 모순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능력주의 보상 체계에 대한 보완책으로 노력에 대한 보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만연한 과로 현상을 해소하는 하나의 방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주의의 보상 체계는 뛰어난 ‘능력’은 대부분 빼어난 ‘성과’로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그 성과에 대해 보상함을 골자로 한다. 유능과 성공 사이의 상관관계는 대체로 인정된다. 그런데 ‘능력’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성질의 힘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능력이 노력에 의해 계발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한계가 있음을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동감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한계가 과도하게 커서 능력과 노력이 합치하는 정도가 너무 작다면 능력주의 사회의 대원칙은 흔들리게 된다. 개념의 혼란을 막기 위해 ‘능력(재능)’은 후천적인 ‘노력’과 선천적인 ‘재주’로 나눌 수 있다고 개념 정의하겠다.


  능력이 노력보다는 재주에 의해 좌우된다면 능력주의 사회는 선천적인 요소가 크게 기능하는 셈이다. 노동소득조차도 이런데 재산소득으로 눈을 돌리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재산소득은 부모로부터의 상속이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재주와 상속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 바로 노력이며, 이것이 넘치면 과로가 된다. 과로가 대개 열심히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드워킨의 표현대로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주어진 ‘재주에 둔감해지는(endowment-insensitive)’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주에 둔감해진 만큼 노력에 민감해지기를 제안한다.


2.
  사회 전체적으로 과로를 줄이는 아이디어로 능력과 필요의 대립 구조에서 노력의 가치를 도두볼 것을 제안한다. 피터 싱어는 『실천윤리학』에서 타고난 능력보다는 필요와 노력에 따른 지불의 원칙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능력과 필요 사이의 간극을 노력으로 메워야 한다고 보고 “그들의 능력이 어떠하든 간에 그들의 능력의 상한선 가까이까지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돈을 지불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언명했다. 싱어는 필요에 따른 분배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에 따른 유인을 추가했다.


  그의 논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적용해보자. 갑의 잠재적인 능력이 100이고, 을의 잠재적인 능력이 50이라고 가정한다. 갑은 60%만 노력하더라도 을이 100%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남긴다. 싱어가 구체적인 예시를 들지 않아서 단정하기 어렵지만 자기 능력의 상한선까지 오른 을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보상을 해줘야 함은 분명하다. 또한 을이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마저 뛰어넘는 120%의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갑과 같은 60의 성과를 낸다면 갑보다 더 큰 칭찬을 건네야 할 것이다.


  능력을 노력과 재주의 합이라고 볼 때 노력을 어떻게 측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두 요소의 총합인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조차 마련하기 힘든 판국에 그 능력을 노력과 재주로 가름해서 그 둘의 비율을 따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갑-을의 예처럼 보상 체계가 수립된다면 갑은 자신의 재주를 감추려는 전략을 취할 유혹에 빠진다. 갑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을 정도라고 꾸미고 60%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종전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력에 따른 유인이 너무 커진다면 이처럼 재주를 감춰서 노력이라고 분칠하고 잠재적인 능력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소홀하게 된다. 갑이 60%의 노력보다는 70%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이끌어서 사회적인 후생을 증가시키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다고 할 때 재주 숨김 현상은 줄여야 한다.


3.
  결국 우리는 재주 많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노력은 이러한 인정과 더불어 고려할 요소다. 능력 있는 사람의 성과에 미치지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 노력한 사람에게 현재 수준보다는 높은 수준의 보상을 주도록 설계해야 한다. 다만 재원이 한정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노력한 사람에게 돌아갈 재원은 필요에 따른 분배의 몫을 유지한 채 유능한 사람에게 주던 보상에서 일부를 끌어와야 한다. 이를 통해 보상의 차이가 성과의 차이보다 현격히 차이나지 않도록 조정할 수 있다.


  이러한 조치가 현행 능력주의 보상 체계의 상층부에 위치한 유능한 사람에게 반드시 불리한 것도 아니다. 엄격한 능력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1등이나 2등에게만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노력을 통해 중상위권에 다다른 사람을 위한 보상 체계에 신경을 쓰게 되면 10등, 20등을 하더라도 상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매번 1등이나 2등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10등, 20등까지도 충분한 보상을 하는 시스템이 사회적 보험 역할로 작용하는 것을 마냥 반대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를 통해 전반적인 과로 수준이나 과잉 경쟁의 강도를 낮추기를 기대한다.


4. 
  후천적인 노력의 가치를 재조명했더라도 의문점이 생긴다. 정의하기에 따라 노력도 상당 부분 선천적인 재주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재능이 오로지 후천적으로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가 아닌 우연적인 이유로 노력을 싫어하는 성품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반박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속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재주보다는 노력이 우연성이 좀 덜하고, 보통 사람도 습득할 수 있는 재능이라는 점에 주목할 따름이다.


  노력의 적극적 재조명으로 말미암아 상위 1%가 아닌 상위 10%, 20%까지 보상 체계의 접근성이 높아진다면 재주가 모자란 사람과 노력이 부족한 사람도 도전할 동기 부여가 될 것이다. 1등에 도전하기는 힘들어도 10등, 20등은 도전해볼 만하다고 용기를 북돋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과로 유발요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종류의 경쟁을 설계하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 정착한다면, 적어도 열심히 사는 보통 사람들은 적당한 강도의 경쟁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5.
  국제중이나 자율형 사립고 입시는 추첨을 마지막 전형으로 채택했다. 추첨제는 정부가 수월성 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교를 도입하면서 사교육비 증가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고육지책으로 등장했다. 사교육을 조장하지 않겠다는 점을 부각하는데 급급했을 뿐 추첨을 결단한 것에 대한 철학적 고려가 부족한 듯싶다. 의미 부여를 하자면 시험이나 경시대회 성적으로 1배수를 뽑는 것을 지양함으로써 경쟁의 압력을 완화하고 불필요한 과로를 절감하려는 목적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만하다.


  나는 추첨제의 부분적인 도입이 노력에 대한 보상 체계를 수립하는데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추첨제를 1%에 대한 보상에서 10%, 20%에 대한 보상으로 늘리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노력을 해서 이룬 성과에 따른 정당한 차별이라는 대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추첨제를 적용하는 것도 과로를 줄이는 방법이 될 것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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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층을 위한 사회보장

2012. 1. 21. 18:51 |

2011년 2학기 사회보장법 과제로 제출했던 보고서를 손질해서 올립니다. 본래는 인터뷰 과제였으나 인터뷰 내용은 모두 삭제하고 재편집했습니다. 인터뷰를 도와주셔서 영감을 떠올리게 해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Ⅰ. 탐구의 배경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는 젊은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어른을 부양해야 하는 만큼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하고 포기할 사람이 없다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제 소수의 승자만이 안전한 생활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잠재성과 소질을 계발하도록 노력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사회, 개개인을 존귀하게 여기고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야말로 ‘개인보장’에서 나아가 ‘사회보장’을 지향하는 이유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년층이 시혜적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의 주체로 보아야 한다. ‘청년층을 위한 사회보장’을 궁리하면서 실업급여와 대학 등록금 문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대안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구직급여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수급자격자의 문제

실업자 중에 실업급여를 받은 사람의 비율인 실업급여 수혜율은 2010년 실업자 수는 920천명, 평균 실업급여 수혜자는 360천명으로 실업자 10명 중 약 4명이 실업급여를 수급하고 있으며, 연간 수혜율은 2004년 20.1%, 2006년 26.8%, 2008년 35.4%, 2009년 42.6%로 꾸준히 증가하다 2010년 39.1%로 낮아졌다(한국고용정보원, 『2010년 고용보험통계연보』, 2011, 46쪽). 실제 실업급여 혜택을 받는 사람이 적음을 알 수 있다.


2010년 3월 기준 종사상 지위별 실업급여 현황을 보면 상용직 근로자의 수급률이 37%인 반면, 임시직과 일용직은 각각 7.2%, 2.3%로 크게 떨어진다. 이는 상용직의 보험 미가입률이 9.0%인데 비해 임시직과 상용직은 46.9%, 61.6%에 이르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사업체 규모별로는 10인 이상 사업장의 가입률이 60%를 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25.3%에 불과하다. 고용형태 상으로 정규직(가입률 67.2%)과 비정규직(42.1%)의 차이도 문제지만 영세 사업장 정규직 노동자들도 비정규직과 별 다를 바 없는 처지다(프레시안, "저임금·임시직 노동자에게 실업급여는 '그림의 떡'", 2011. 4. 7.).


2009년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고용보험 가입 대상이지만 보험료 부담으로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고(45.0%), 스스로 직장을 그만두는 등 이직사유를 충족시키지 못하고(22.9%), 고용보험에 가입하더라고 180일 이상을 일해야 하는 피보험 단위기간을 충족(11.1%)시키지 못한 관계로 실직한 임금근로자 중 실업급여 혜택을 받은 사람은 11.3%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세 가지 대표적인 사유는 고용보험의 허점으로서 어떻게 보완해나갈 것인지 사회적인 관심을 모아야 한다.


이런 문제 제기가 지속되자 18대 국회 들어 고용보험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법안들이 제출되었다. 수급대상 확대, 청년 구직자로 대표되는 신규 실업자에 대한 배려, 구직급여 비자격자로 분류되는 자발적 이직자에 대한 요건 완화, 피보험 단위기간 완화, 구직급여액의 증액과 지급기간 연장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청년층의 사회보장과 관련한 문제는 법률상 보장되는 권리가 충분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향후 입법론의 역할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고용보험 가입률 통계를 나이대별로 보면 20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 29.3% 이래 2010년 21.4%로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구직급여와 국한해서 살펴보자면 수급대상자를 넓히려는 다양한 문제제기에 대한 전향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고용보험 개정에 대한 그간의 입장 가운데 하나가 반영되어 2012. 1. 22. 시행하는 고용보험법(법률 제10895호, 2011. 7.21, 일부개정)은 자영업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개선하기 위하여 자영업자도 고용보험의 실업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근로자를 사용하지 아니하거나 50인 미만 근로자를 사용하는 자영업자가 희망하는 경우, 본인을 피보험자로 하여 고용보험의 실업급여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정규직 임금근로자를 이념형으로 구성한 현행 법제의 수급대상 확대의 기점이 될 것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수급대상이나 수급요건의 문제를 제기하며 고용보험을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에 준하는 전국민적 사회안전망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경우 실업보험, 노동보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실업급여를 유지하되 공공부조의 성격을 가미한 실업부조제도를 통해 실업급여의 사각지대를 해소하자는 주장 등이 제시되고 있다. 전국민 고용보험을 주장하는 경우에도 저소득층이나 근로취약계층에 대해서는 보험료 감면을 언급하고 있는 만큼 사실상 양자는 실질이 유사하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 자기 책임, 자기 부담의 원칙이 지배적인 현행 제도로는 다양한 고용 형태와 개별적인 사정들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현행 고용보험제도가 헌법상 생존권과 근로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좀 더 적극적인 입법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 실현에 이바지하길 촉구한다.


 2. 이직사유의 문제

고용보험법 제2조 제2호는 “이직(離職)”이란 피보험자와 사업주 사이의 고용관계가 끝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직장을 옮기거나 직업을 바꾼다는 뜻의 이직(移職)과 혼동되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하간 고용보험법 제58조 제2호는 자기 사정으로 이직한 피보험자로서 전직 또는 자영업을 하기 위하여 이직한 경우 등을 급여 제한 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이직사유의 허위기재 및 진술은 부정수급행위의 유형에 해당한다. “수급자격이 제한되지 아니하는 정당한 이직 사유”로 고용보험법 시행규칙 제101조 제2항 별표2가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수급자의 구체적인 사정을 감안하는 데는 역부족이라고 평가한다.


2010년 자발적인 이직사유는 기타 개인사정이 44.3%, 전직, 자영업이 11.4%, 결혼, 출산 등이 1.6%, 징계해고 0.1%로 도합 57.5%였고, 비자발적 상실자는 41.9%였다(한국고용정보원, 『2010년 고용보험통계연보』, 2011, 34쪽). 10명 중 6명 정도가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고, 가입자가 실업자가 될 경우 10명 중 6명이 이직사유로 인해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자발적인 이직사유에 대한 제한은 구직급여가 사회보험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실업의 예방과 고용의 촉진을 하겠다는 고용보험법의 목적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이직사유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보호해줄 필요가 있다. 형식적으로는 비자발적 이직이지만 실질적으로 자발적인 이직인 경우는 비일비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령 야근이 많다는 이유로 비자발적 이직으로 분류되었더라도 오래 전부터 이직할 계획이 있는 사례처럼 평가하기 곤란한 경우가 적잖다. 이직사유 허위기재에 따른 부정수급을 단속하기 위해 막대한 행정비용을 투입하는 것도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직사유와 관련해 사업주의 의무 불이행도 문제가 된다. 병역특례의 경우 사업주와 사이가 좋으면 비자발적 이직사유로 인한 피보험자격 상실로 처리해주고, 사이가 좋지 않으면 자발적 이직사유로 처리해버리는 일도 존재한다고 한다. 중소 사업장에서는 온정주의 탓에 비자발적 이직사유로 처리해주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직사유의 엄격한 제한은 고용촉진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고용보험의 재정을 보전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상당수 외국은 자발적 이직자라 하더라도 3~4개월의 유예기간을 두되, 엄격한 구직 활동과 직업훈련을 전제로 실업급여를 제한적으로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가령 영국 1~12주, 일본 3개월, 스위스 6~12주, 독일 12주, 프랑스 4개월, 덴마크 5주 등이 그 예다(천웅소, 「<고용보험법> 개정: 고용보험 확대 및 구직촉진수당 도입」, 『월간 복지동향』 제155호, 참여연대사회복지위원회, 2011. 9, 10쪽). 우리도 일정 유예기간을 두고 지급하거나, 비자발적 이직자보다는 낮은 수준의 구직급여를 지급하는 방식 등으로 자발적 이직자의 소득을 보장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3. 수급액과 수급기간의 문제

구직급여의 수급액이 적고 수급기간이 단기라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고용 유연화가 심화되는 추세와 연동하여 실업급여가 확대되지 않은 문제가 누적된 것으로 보인다. 윤진호 인하대 교수가 덴마크와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과 소득안정성,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수준을 비교·분석한 결과 한국과 덴마크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소득안정성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지수는 큰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소득안정성을 살펴보면 덴마크(78%)와 달리 한국의 실업급여 수급자의 소득대체율은 43%에 그치며 평균 수급기간도 4개월에 불과하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실업급여 지출액의 비중도 0.24%로 덴마크(2.66%)의 10분의 1 수준이다(한겨레, “한국 고용엔 ‘유연성’만 있고 ‘안정성’은 없다”, 2009. 9. 1.). 실업은 쉽고 취업은 어려운 구조에서 구직급여의 수급액이나 수급기간의 문제가 제기된다.


특히 고용보험은 고용노동부장관이 관장하면서도(고용보험법 제3조), 국가의 부담분이 전체 기금운영비의 0.11%에 불과한 것은 국가의 법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OECD의 2011년 고용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실업급여의 소득대체율(2009년 기준)은 비교대상 31개국 중 꼴찌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한국의 실업 후 5년 간 평균 소득대체율은 6.6%로 OECD 평균(29.9%)의 1/4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용보험 확대 및 실업부조 도입 연대회의, 「OECD, 2011년 고용전망 보고서에 대한 논평」, 2011. 9. 16.). 이와 더불어 수급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수급기간마저도 짧다는 문제가 복합적으로 발생한다.


이처럼 현행 고용보험 제도는 수급요건을 엄격히 함으로써 사회보장이 필요한 모든 국민에게 위험을 경감시켜주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어 보편성 측면에서 취약하다. 또한 이렇게 엄격한 요건을 충족하더라도 실업급여의 액수나 기간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수준으로 보장된다고 보기는 힘들어 적절성 측면에서도 취약하다. 보편성과 적절성을 갖추지 못한 고용보험 제도의 대대적인 개정이 요청된다.

 

Ⅲ. ‘적직(適職)을 선택할 자유’의 보장하는 고용보험

고용보험법은 단순히 구직 활동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의 적성 및 능력에 상응하는 직업을 수행하는 상태를 보호”하는 쪽으로 설계해야 한다(전광석, 『한국사회보장법론』, 2010, 452쪽). 즉 실업 예방, 고용 촉진, 실업자의 생활안정, 구직 활동 촉진이 국가경제에 이바지하는 것에만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일생에서 적합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방편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헌법에서 말하는 ‘근로’는 ‘인간의 존엄에 걸맞은 일정 수준 이상의 조건이 구비된 근로’이어야 할 것이고 동시에 ‘근로자의 능력과 의사에 부합하는 근로’일 것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적직(適職)’이라는 개념에 동감한다(노호창, 「헌법상 근로권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재해석」, 『노동법연구』 제30호, 서울대학교 노동법연구회, 2011, 133쪽).


청년층이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활발하게 구직 활동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다. 청년층의 이직률이 높은 것은 세계적으로 일반화된 현상으로 청년층이 왕성하게 직업을 탐색하는 행태에 기인한다. 특히 생애 첫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층에게는 적직을 선택할 자유를 보장할 필요성이 크다. 적직에 대한 사회제도적 지원은 다양한 종류의 능력이 존중받고, 청년층이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선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고용보험법이 ‘방황할 시간’ 같은 여유를 용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종신고용이 한 직장에서 정년퇴직한다는 개념이라면 평생고용은 직장을 몇 번 옮기더라도 일할 나이까지는 계속 밥벌이를 해나갈 수 있다는 개념이다. 종신고용을 보장하는 시대가 지났더라도 평생고용을 달성하는 사회는 만들어 내야한다. 평생고용을 위해서는 청년층에게 적직을 선택할 기회를 부여하고, 생애주기에 걸쳐 다양한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적직을 선택하기 위하여 일정 기간 ‘자발적으로 이직할 권리’를 인정할 것을 주장한다. 현행 고용보험법의 틀을 유지하더라도 생애 첫 직장을 찾는 청년층에게 한시적인 특권(!)을 부여해줄 필요가 있으며, 적합한/적정한 직장을 찾기 위한 투자를 장려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고용 촉진이 될 것이다.


 

Ⅳ. 대학 등록금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사회보장으로서의 등록금

사실 적직을 선택하는 제약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상당수의 청년들이 대학 재학 중에 진 학자금 빚 등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한 빨리 소득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조급하게 취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직장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출발함으로써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층 고용 문제는 대학 등록금과 밀접하게 연관 지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대학진학률이 80%가 넘고 대학생이 300여만 명인 한국 사회에서 청년층에 대한 사회보장을 설계할 때는 대학 등록금과 연계하여 고려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의 반값 등록금은 국가의 부담을 늘리면서도 학생 관련 예산이나 시설 예산이 급격한 감소를 맞지 않거나, 부수적으로 학생이나 학교의 이해관계인들에 대한 부담은 늘리지 않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2011년 11월 13일 서울시립대학교가 서울시의회에 제출한 행정사무감사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립대 재학생 10,118명중 2,575명이 학자금 대출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학부생 2,123명, 대학원생 452명). 이는 2009년 대비 4.9%(314명)로 상승한 것이다. 국공립대학교 중에서도 등록금이 저렴한 서울시립대학교의 경우에도 학생 4명 중 1명 이상이 학자금 대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대학 등록금이 사회문제로 대두할 수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시민일보, “서울시립대생, 10명중 3명 학자금 대출”, 2011. 11. 14.).


대학 등록금의 인상률이 높았던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개인이 부담하는데 한계가 봉착했기 때문에 사회가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등록금 문제는 협의의 사회보장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머잖아 사회보장의 영역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을 통한 재분배 기능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대학 등록금의 인하는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학생의 대다수를 차지할 20대 초중반의 청년층에게 국가가 해줄 수 있는 대표적인 정책과제로 설정해볼만 하다.


 2. 등록금 이슈를 넘어

고용보험이 20대 후반의 문제라면, 대학 등록금은 20대 초중반의 문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실업급여도 무한정 늘릴 수 없듯이, 등록금도 무한정 낮출 수는 없다고 본다. 고용보험 같은 사회보험조차 제 기능을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반값이나 무상이라는 구호는 다소 공허하게 들리며 사회보장의 확대 단계에서 비약이 느껴지기도 한다. 반값 등록금이나 무상 교육에 대한 담론들은 공적 부조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만큼 재정 투입의 우선순위에 대한 면밀한 고려가 필요하다.


대학 등록금 인하가 국민적 공감대를 얻으려면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20%의 고졸자를 생각해야 한다. 대학 진학자보다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든 고졸자를 위해 구직 활동 지원을 마련하는 것이 한 예다. 또한 고학력화로 인해 대졸자뿐만 아니라 석․박사 학위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는 점도 또 다른 검토 대상이다. 대학생의 생활과 실업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책들이 개발되고 있는 반면 대학원생의 생활이나 실업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단결력과 교섭력이 약한 대학원생의 경우 등록금 문제의 사각지대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의 통계에 의하면 석․박사 학위 취득자 규모가 2000년 53천 명에서 2005년 77천 명, 2009년 86천 명으로 지난 9년간 약 60% 이상 증가하였고, 학부 졸업생 대비 석사 졸업생의 비율도 1990년 11.9%, 2000년 22.0%, 2005년 25.5%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일반대학원 졸업생의 정규직 취업률이 62.8%(2006)→61.0%(2007)→60.5%(2008)→54.0%(2009)으로 매년 감소 추세에 있으며, 일반대학원 졸업생의 전체 취업률도 81.9%(2006)→81.7%(2007)→81.6%(2008)→79.9%(2009)로 매년 꾸준히 감소 추세에 있다. 반면에, 일반대학원 졸업생의 비정규직 취업률은 14.8%(2006)→15.8%(2007)→16.8%(2008)→21.5%(2009)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이다(박상현․송창용, 「석박사 고급인력의 취업실태 분석 및 정책과제」, 『한국고용정보원 연구보고서』 2010. 3. 11, 1쪽).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수익자 부담 원칙이 강화되는 것은 수긍할 수 있지만, 등록금 인상 억제나 장학금 확충을 위해 고등교육법 제7조 제1항 소정의 국가의 재정 부담을 늘리는 것 또한 교육의 공공성과 평생교육이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다. 대학생, 대학원생에게는 등록금 인하나 인상률 억제만큼 훌륭한 사회보장을 찾기 어려운 만큼 복잡하게 생각할 여지도 없다고 하겠다. 다만, 등록금 부담 경감의 혜택을 일정 기간만 지급하여 5학년으로 대표되는 만년 대학생의 문제를 예방할 필요도 있다.


2011년 11월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의회가 고등학교 의무교육에 대한 논의가 오갔듯이 청년층 사회보장과 관련해서는 고등학교 의무교육까지 병행해서 고려하는 것이 타당하다. 교육을 사회보장의 영역으로 포섭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의무교육은 간과할 수 없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반값 등록금에 매몰되기 보다는 “고등학교 의무교육-고졸자 취업 추가 지원-대학 등록금 부담 경감-대학원(전업학생 위주) 지원방안 모색”이라는 일련의 틀에서 접근하는 것이 좀 더 합의 가능한 대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Ⅴ. 두 가지 제안 - 청년수당과 등록금 부담 경감

청년층에게 고용과 관련해서 세 번 정도의 청년수당을 지급할 것을 제안한다(정책화 단계에서는 시기와 횟수를 적절하게 조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졸자가 구직 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열악한 지위를 감안하여 교육훈련을 지원하거나 급여의 횟수를 추가로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그간 교육과학기술부 등에서 미취업 대학 졸업생 지원 프로그램으로 채용지원과 교육훈련 지원 사업이 시행된 바가 있으나 체감 효과가 크지 않았다. 차라리 현금 급여를 통해 국가의 보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어 수급한 청년층에게 적직을 선택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을 심어주고, 좀 더 의욕적으로 진로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이 적절하다.


청년수당으로 명명하기는 했지만 독창적인 개념은 아니고 고용보험기금이나 별도의 재정을 통해서 세 번째 직장을 잡을 때까지는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구직급여나 구직촉진수당 등을 수급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자는 정도의 내용이다. 첫 직장을 잡을 때나 이직을 할 때 경제적 사정에 쫓기지 않고 직업 탐색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함으로써 적직을 선택할 자유를 간접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취업과 이직의 공포를 경감해줌으로써 청년층이 좀 더 숙고하여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탐색할 기회를 열어준다면 오히려 이직을 줄일 수도 있고, 직업 만족도는 높일 수 있다.


기존 실업급여 체계와의 충돌이 우려된다면 현재는 구직급여의 수급대상이 아닌 첫 번째 직장을 얻을 때까지의 기간과 비자발적 이직으로 인한 실업에 대한 급여수준을 현행 구직급여보다 낮은 수준으로 지급하는 방안으로 디자인하면 될 것이다. 청년수당은 실업급여 확장이나 실업부조 도입을 통해 적직을 위한 구직 활동을 단념하지 않도록 유도하여 실망 실업자 등의 비경제활동인구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양산하는 세 가지 사유를 개선하여 청년층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에게 고용안전망을 두텁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우선 타협 가능하고 단기적으로 시급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청년수당이라는 아이디어를 고안해보았다.


청년층의 사회보장과 관련해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고, 결국 일정 부분 증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해야만 실현 가능한 주장들이 대부분이다. 복지국가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재분재의 역설(paradox of redistribution)’이라는 가설이 시사점을 준다. 이는 가난한 계층에게 선별적으로 복지를 시행할수록 재분배효과가 나빠지고, 중산층을 포함하여 보편적으로 복지를 시행할수록 재분배 효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중산층을 포함한 보편 복지를 시행하면 중산층이 증세에 찬성하여 복지 규모가 늘어나고, 선별 복지를 시행하면 중산층이 증세에 반대하여 복지 규모가 작아지기 때문에 이런 역설이 발생한다고 한다(강남훈, 「반값 등록금과 대학개혁」, 『내일을 여는 역사』 제44호 2011. 9, 95쪽). 한국 정치 현실에 완전히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 가설을 응용하자면 청년층은 담세능력이 낮으므로 주된 납세자 계층이 증세에 동의하려면 복지의 혜택이 가급적 고르게 전달되어야 설득력을 높일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청년층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대학생 집단이 반값 등록금의 가치를 다양한 방식의 사회보장으로 구현하는데 얼마나 관심을 보여줄 지가 관건이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 고등학생이며, 졸업반 때는 취업을 준비해야 하며, 대학원으로 진학할 수도 있는 만큼 위험부담을 분산하는데 인색하지는 않을 것이라 낙관적으로 예상해본다.


구직 활동을 하는 청년에게는 청년수당을, 학교 진학을 한 청년에게는 등록금 부담 경감이라는 두 가지 사회보장만으로도 청년층의 위험부담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국가는 고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단계별로 적정한 보장을 안분함으로써 수혜자의 범위를 꾸준히 유지하도록 하여 각계각층의 국민의 여론을 형성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비용 추계를 통한 재원 조달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 청년층의 사회보장과 관련해 유력한 대안들은 이미 많이 제시된 만큼 이제는 구체적인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Ⅵ. 입법 수요에 대응하는 사회보장

청년층을 조망한 사회보장 가운데 청년수당과 등록금 문제만을 살펴보았는데도 복잡한 변수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미시경제학 용어를 빌리자면 일반균형분석(general equilibrium analysis)의 관점에서 어느 한 사회보장제도의 개편으로 인해 다른 영역의 사회보장에 미칠 파급효과와 상호작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이 앞으로 좀 더 확대되어야 한다는 기조가 국민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때인 만큼 정책결정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다양한 계층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를 하려는 태도를 연마하면 좋겠다.


사회보장법 영역에 대한 입법 수요는 폭증하고 있고 여느 법령에 비해 빈번하게 제․개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열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보장법에 대한 광범위한 입법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비교법적인 고찰이나 최신 통계 수치, 국민 여론의 동향에 대한 자료의 축적이 필수적이다. 사회보장을 둘러싼 사안이 터질 때마다 각자의 ‘해석’이나 ‘의견’만을 내세워 갈등을 증폭하기 전에 차분히 ‘사실’을 축적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

행정소송법 개정안 검토

2011. 12. 21. 18:49 |

대법원, 법무부의 행정소송법 개정안 가운데 원고적격과 대상적격의 확대에 대해서만 공부한 잡글입니다.

 Ⅰ. 원고적격 확대에 대한 탐구

  1. 판례의 원고적격 확대 경향

  대법원의 개정안에 따르면 현재의 판례는 원고적격에 관한 현행법상의 ‘법률상 이익’을 “당해 처분의 근거법규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익”이라고 해석해 국민이 권익구제를 받을 수 있는 폭이 너무 좁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고 판례의 태도를 정리하고 있다. 대법원은 새만금사업 등과 관련한 판례에서 근거 법규뿐만 아니라 관련 법규에 보호되는 이익도 원고적격에 포함하고, 지리적인 영향권 밖의 주민들도 환경상 이익에 대한 침해나 침해 우려를 입증하면 원고적격이 인정된다고 보아 항고소송의 원고적격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대법원 개정안의 판례 해설과는 다소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


  행정처분의 직접 상대방이 아닌 제3자라 하더라도 당해 행정처분으로 인하여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을 침해당한 경우에는 그 처분의 무효확인을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그 당부의 판단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할 것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이라 함은 당해 처분의 근거 법규 및 관련 법규에 의하여 보호되는 개별적·직접적·구체적 이익이 있는 경우를 말하고, 공익보호의 결과로 국민 일반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일반적·간접적·추상적 이익이 생기는 경우에는 법률상 보호되는 이익이 있다고 할 수 없다(대법원 2006.3.16. 선고 2006두330 전원합의체 판결).


  이 때문에 판례의 해석을 통해 원고적격을 확대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법무부 개정안 논의에서 원고적격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이 많았음에도 현행 규정을 유지한 것도 이런 견해의 연장선이다. 이에 대해 법무부 개정안은 결과적으로 원고적격 확대의 방법론에 있어서 판례를 통한 점진적 확대 쪽을 선호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객관소송적 기능을 하는 단체소송과 같은 공익소송이나 정보공개청구소송과 같은 유형에 대한 원고적격이 개별 입법에 의하여 도입되는 방식을 원고적격에 대한 일반적 규정의 개정을 통해 판례의 해석을 기다리는 방식보다 선호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이희정, 「行政訴訟法 改正(案) 중『原告適格』에 관하여」, 『고시계』 제52권 제12호 (통권 610호), 고시계사, 2007. 11, 33면).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우회적이어서 국민의 권리구제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는 행정소송법 개정 의도와는 부합하지 않으며, 행정청의 부담이 가중될 것을 우려해 원고적격의 점진적 확대를 고안한 것이라 판단된다.


  2. 원고적격 확대 입법의 필요성

  판례가 개별적 사안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원고적격을 확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률상 이익’이 ‘권리’보다는 넓은 개념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문리 해석의 원칙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행정재판실무상 ‘당해 처분의 근거 법규 및 관련 법규에 의하여 보호되는 개별적·직접적·구체적 이익’을 갖추는 것이 까다롭다는 지적도 적잖았다. 판례의 태도는 원고적격을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 이에 대판 비판이 계속 제기되었고, 입법론이 추진된 것임을 상기할 때 법원의 해석을 통한 원고적격 확대에 기대기보다는 입법을 통해 해결함이 바람직하다.


  대법원 개정안의 ‘법적으로 정당한 이익’이 있는 경우에 항고소송의 원고적격을 인정할 경우 처분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고 보기 힘든 명예ㆍ신용회복, 헌법상 기본권 등 일반적 법규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보호되는 정당한 이익이 있는 경우 등에도 원고적격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어 국민의 권리구제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법적으로’라는 문구를 붙인 것도 사실상 이익이나 반사적 이익이 포함되지 않음을 명확히 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방점은 ‘정당한 이익’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법원 개정안은 주관소송과 객관소송이 절충된 항고소송의 성격과 현행 행정소송법 해석의 다수 견해인 법률상 보호이익설보다 원고적격을 확대하려는 취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보호가치 이익설(소송상 보호할 가치 있는 이익구제설)’에 가까운 입장을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고적격의 문제는 소송요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송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여 본안의 판단까지 갈 수 없도록 막는 것은 국민의 권리구제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행정법상 권리구제는 반드시 행정쟁송을 통해 승소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송법상 기각과 각하가 준별되는 만큼 행정청을 상대로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권리구제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는 바가 있으며, 현대 행정에서 원고적격이 모호한 경우는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본안판단까지 해서 이익의 침해 여부를 따져야 할 경우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본안전판단에서 미리 이익 침해가 있느냐 없느냐를 다 확정하게 되면 본안판단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장경원, 「환경행정소송(環境行政訴訟)과 제3자의 원고적격(原告適格) -대법원 2010. 4. 15. 선고 2007두16127 판결을 중심으로」, 『환경법연구』 제33권 2호, 한국환경법학회, 2010, 374면).


  이런 맥락에서 대법원 개정안은 원고적격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본안판단까지 가서 이익의 침해를 판단할 기회를 넓혔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다만, 정당한 이익 개념은 법률상 이익보다는 넓은 개념으로서 어디까지 확대된 것인지에 대한 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현행 판례 이론의 ‘개별적·직접적·구체적’이라는 기준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원고적격 확대의 입법 취지는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행정청(피고)의 이익으로’ 해석하던 관행을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국민(원고)의 이익으로’ 해석하는 전환점을 마련해줄 것이다.


Ⅱ. 대상적격 확대에 대한 탐구

  1. 새로운 행정행위 개념의 적절성 검토

  대법원의 개정안에 따르면 현행법의 ‘처분’은 “행정청의 공법상 행위로서 국민의 법률상 지위에 직접적인 법률적 변동을 일으키는 행위”라고 좁게 해석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국민의 법률상 지위에 직접적으로 ‘사실상’의 영향을 미치는 공권력행사에 대하여는 항고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협의의 처분인 강학상 행정행위뿐만 아니라 사실행위, 법규명령을 항고소송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대법원 개정안 해설에는 권력적 사실행위만을 열거하고 있지만, 비권력적 사실행위의 상당수도 포함된다고 해석해야 법 개정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판례는 처분적 조례나 처분적 고시 같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권력적 사실행위나 대부분의 처분적 행정입법에 대하여 처분성을 부인해왔다. 대상적격 확대 문제도 원고적격 확대와 마찬가지로 기존 법문의 해석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법무부 개정안도 현행 조문을 유지함으로써 이런 입장에 서있는 것을 보인다. 하지만 현행 행정소송법 제2조 제1항 제1호 소정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행정작용”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대법원 개정안은 다양한 행정작용을 항고소송의 대상으로 포착하기 위해 현행 ‘처분’ 개념 대신 ‘행정행위’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행정청이 행하는 법적․사실적 행위로서의 공권력의 행사 또는 그 거부와 그 밖에 이에 준하는 행정작용”이라는 개념 정의는 강학상 행정행위 개념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용어로서 학계의 많은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실체법상 행정행위와 소송법상 행정행위 개념이 분리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행정행위등’이라는 용어를 관철하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용어 정의에 있어서는 좀 더 정제된 표현이 요구된다. 차라리 ‘행정행위, 사실행위, 법규명령 등’이라고 풀어서 서술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하다.


 2. 법규명령에 대한 항고소송의 문제

  특히 현행 조문에서 ‘구체적 사실에 관한 법집행’이라는 요건을 삭제함으로서 ‘행정행위등’에 집행행위 외에도 입법행위도 포함하도록 한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즉 행정입법인 ‘명령등’에 대한 항고소송을 인정한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되고 있다. 대법원 개정안 해설은 집행행위에 대한 항고소송의 제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법규명령 등에 대한 권리구제 폭을 넓혔다고 평가한다. 이에 따르면 법규명령 그 자체로서 직접 국민의 법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처분법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행정행위등에 포섭되는 법규명령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법규명령에 대한 항고소송을 인정하면 법규명령에 대한 헌법소원은 불가능하게 된다는 견해도 있지만, 대법원 개정안에 따라 헌법소원의 대상은 줄어들더라도 권리구제의 공백이 크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항고소송보다 객관소송 성격이 강한 헌법소원의 영역이 일정 부분 남아 있으며, 헌법소원에서는 항고소송에서 보다 청구인적격(직접성, 현재성)과 권리보호의 이익이 보다 넓게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박균성, 「處分과 命令에 대한 抗告訴訟」, 『고시계』 제52권 제11호 (통권609호), 고시계사, 2007. 10, 22면). 항고소송과 헌법소원의 상충 문제 때문에 어느 기관이 법규명령에 대한 심사에 적합하냐는 논의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에서 배제하는 법원의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입법하여 위헌 논란을 비롯한 부수적인 논쟁들을 정리하기를 희망한다.


  법규명령이 항고소송의 대상이 된다고 하고 나서 다시 원고적격이나 소의 이익 등을 통해 다툼을 차단한다면 행정소송제도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홍준형, 「행정소송법 개정의 내용과 방향」, 『월간 법제』 2005년 10월호, 법제처, 2005. 10.). 이와 더불어 행정입법의 제․개정 과정에서 절차적인 통제를 통해 사전적인 권리구제가 좀 더 강화되도록 설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법규명령에 대해서도 의무이행소송이 가능한 것은 입법 형성의 자유를 훼손할 여지가 있으며 권력분립에 반할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별도의 소송 형태를 고안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대법원 개정안이 ‘명령등의 취소소송의 특례’를 신설하여 법규명령의 특수성을 감안한 자세를 의무이행소송에서도 견지할 필요가 있다.


Ⅲ. 결어

  대법원 개정안의 원고적격 확대는 용어상의 다툼이 있겠으나 대체적인 취지에 동감하며 복잡다기한 행정현실을 반영한 타당한 입법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적격을 확대하기 위해 소송법상 행정행위 개념을 창설하는 것은 입법기술상 좀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사실행위를 포함한 것은 적절한 입법이며 특히 실질을 반영해 행정지도와 같은 비권력적 사실행위에 대해서도 다툴 수 있도록 한 것은 긍정적이다.


  다만, 법규명령을 행정소송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는 의견의 대립이 심하고 부수적인 문제가 결부된 만큼, 장기간 계류 중인 행정소송법 개정의 통과를 위해 현시점에서는 보류하거나 적어도 의무이행소송에서는 제외할 것을 제안한다. 행정행위(협의의 처분)와 사실행위라는 ‘한 지붕 두 가족’으로도 국민의 권리구제는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본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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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37조 제2항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한수웅, 「헌법 제37조 제2항의 過剩禁止原則의 意味와 適用範圍」, 『저스티스』 통권 제95호, 한국법학원, 2006, 5~28쪽
을 읽고

 

  논문의 저자는 헌법 제37조 제2항의 과잉금지원칙을 자유권과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는 참정권, 청구권적 기본권, 사회적 기본권 등에도 그 적용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헌법 이전에 존재하는 보호범위를 가지는 기본권만이 제한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과잉금지원칙은 특정한 보호범위를 가진 기본권인 자유권에 적용된다는 견해이다(15쪽).


  특정한 보호범위가 없이 법률에 의하여 비로소 구체적 내용이 형성되는 기본권의 경우는 입법자가 입법형성권을 제대로 행사했는지의 문제, 입법자에 의한 구체적인 형성이 헌법상 부여된 형성권의 범위를 일탈하였는지에 대한 심사의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6쪽). 제37조 제2항의 일반적 법률유보조항과 기본권 형성적 법률유보의 독자적인 법률유보조항의 차이에 주안점을 두는 저자의 견해는 기본권 침해에 대한 좀 더 실천적인 심사기준을 제시해준다.


  개별 기본권의 특성에 맞춘 고찰이라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조세에 관한 입법의 영역으로 확장해보겠다. 헌법 제38조에서 규정하는 납세의 의무는 국가의 존속과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하는 목적 외에도 각종 정책수단으로서 이용된다. 납세의 의무에서 기초한 조세의 부과와 징수는 원칙적으로 기본권 침해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세법률주의에 위반한 과세권 남용이 발생하는 경우 합리적 이유의 유무를 따지는 자의금지원칙으로 기본권 침해를 심사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정책수단으로서의 조세는 처음부터 정당화할 이유가 요청된다. 정당화할 이유가 결여된다면 기본권의 침해 여부를 다툴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경우의 조세입법에서도 과잉금지원칙을 적용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가 문제된다.


  헌법 제23조 제1항이 규정하는 재산권은 다른 자유권과는 달리 내용과 한계를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한계뿐만 아니라 내용까지도 법률로 정하도록 한 취지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입법형성의 자유를 비교적 넓게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신적 자유나 신체적 자유에 비해 경제적 자유에 대한 입법을 할 때 과잉금지원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이유이다.


  저자의 논지를 유추적용해볼 때 정책수단으로서의 조세의 경우에도 과잉금지원칙을 적용해 침해의 최소성이나 법익의 균형성까지 심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입법자 스스로가 입법과정에서 과잉금지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권장할 만하다. 과잉금지를 할 의무는 가장 먼저 입법부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입법 형성권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입법과정의 감시와 통제 같은 사전적 통제를 좀 더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국세기본법과 관련한 결정에서 “국회의 입법활동에 있어서 재산권 기타 경제적 활동의 자유규제는 다른 정신적 자유규제의 경우에 비하여 보다 넓은 입법재량권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재산권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내용이 침해될 수 없음은 물론 과잉금지원칙의 적용이 배제되는 것도 아님은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라고 판시하며 과잉금지원칙의 위배 여부를 검토했다(헌재 1990.9.3, 89헌가95 결정). 또한 종합부동산세와 관련한 결정에서 다수의견은 종합부동산세법의 세대별 합산과세 규정에 대하여 입법목적의 정당성은 인정하면서도 차별취급의 적합성, 필요성 및 법익의 균형성 등 과잉금지원칙 위배를 이유로 위헌결정을 내렸다(헌재 2008.11.13. 2006헌바112등 결정).


  그러나 과잉금지원칙이 재산권과 관련한 위헌심사의 기준으로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나 수단의 최소침해성은 매우 엄격한 심사기준이다. 헌법이 입법자에게 부여한 입법재량을 오로지 최소한의 침해가 있는 수단으로 선택하게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며, 사법부의 통제가 빈번해짐에 따라 입법에 부여한 재량을 사법부가 헌법적 요청을 넘어서서 제약할 수 있어 우려스럽다. 최소침해성은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사안에 따라 ‘비례적으로(!)’ 완화한 잣대를 제시할 실익이 있다. 이런 입장에서 제37조 제2항의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라는 문언을 반드시 “최소한으로”라고 해석하기보다는 경우에 따라 “상당히 필요한 경우”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


  이와 같이 이중기준 이론 등에 입각해 완화한 과잉금지원칙을 주장하는 견해에서는 채택한 수단이 입법목적과 ‘실질적으로 연관되는’(substantially related) 정도의 기준을 제시한다(이명웅, 「비례의 원칙의 2단계 심사론」, 『헌법논총』 제15집, 헌법재판소, 2004, 509-544쪽 참조). 엄격한 의미에서의 피해의 최소성과 단순히 자의성 여부만을 따지는 자의금지원칙 사이의 중간영역을 개척하려는 시도는 좀 더 현실적이고 다양한 사법심사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찬동한다.


  헌재는 상업광고 규제에 관한 심사에서 “‘피해의 최소성’ 원칙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달리 덜 제약적인 수단이 없을 것인지 혹은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제한인지를 심사하기 보다는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범위 내의 것인지’를 심사하는 정도로 완화되는 것이 상당하다(헌재 2005.10.27, 2003헌가3 결정)”라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사회경제적 입법에 대해서 완화한 심사기준을 적용하는 고민은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과잉금지원칙을 무조건 확대 적용하는 것은 입법 형성의 자유를 둔 취지를 몰각시킴으로써 기본권 실현을 오히려 요원하게 만든다. 따라서 기본권 실현을 위한 입법에 있어서는 중대한 제한인 경우와 보통의(통상적인) 제한인 경우를 나누어 심사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현행 헌법의 해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언론의 자유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한 규제는 엄격한 심사척도를 적용해야 한다. 반면 언론의 자유의 내용 이외의 사항에 대한 규제에 대해서는 완화된 심사척도에 의하더라도 무방하다고 할 것이다. 언론의 자유의 내용이라고 보기 힘든 언론 독과점을 막기 위한 언론기업 경영의 자유에 대한 합헌성 심사는 완화한 과잉금지원칙으로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미흡한 점은 입법부가 보완하도록 하는 것이 권력분립의 원리에도 부합한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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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조세법연구방법론”, 『서울대학교 법학』 제46권 제2호(통권 제135호),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05, pp. 1~35를 읽고


  논문의 저자는 조세법의 연구방법론을 법해석론과 입법론으로 구분한다. 비교적 간명한 구분으로 이해하기 쉽다. 현행 조세법의 해석학에 매몰되지 말고 입법론까지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수긍이 간다. 조세법 분야 역시 법제도 자체나 그 시행상의 효과와 문제점의 분석, 새로운 개선책 제시 등과 같은 입법적 문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조세를 정책수단으로서 활용하는 추세와 맞물려 입법과정에서부터 법률가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함은 적절한 제안이라 생각한다.


세법의 해석론

  저자는 세법이 형법의 해석에서 허용되는 정도의 확대해석을 금한다고 풀이할 길은 없다고 주장한다(14면). 세법에서 확대해석이나 유추적용을 허용할 수 없다는 논거로 판례와 학설이 들고 있는 조세법률주의를 여러 각도에서 비판한다. 세법에서는 오로지 엄격해석만이 인정된다는 식의 조세법률주의란 독일이나 미국에서는 없다는 논거를 든다. 세법에서 엄격해석만이 가능하다는 명제를 부인하는 저자의 논변에 비교적 수긍이 가지만 그 논거를 비교법적 고찰 외에도 다양하게 들 수 있겠다. 가령 한국의 경제발전 정도나 오늘날 행정의 사회국가적 요청 등에 따라 엄격해석만으로는 세법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등의 논거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정당한 해석의 범위 안에서는 납세자에게 불리한 확대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16면). 확대해석 자체가 아니라 정당한 해석의 범위 안에 있는가 만이 문제될 뿐이라고 말한다. 세법은 침익적 행정이기 때문에 법적 안정성의 요청이 강하다. 따라서 목적론적 해석이 허용되더라도 법문언의 내재적 의미 안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세법상 허용되는 해석에 의해서도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 납세자에게 불리하게 해석하기보다는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납세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입법과정에부터 납세자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법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입법부의 ‘사전적’ 해석은 사법부의 ‘사후적’ 해석보다 갈등비용을 낮출 여지가 크다.


세법의 사법심사

  저자는 불확정한 개념으로 보이더라도 그 의미내용을 특정한 판결이 쌓여 있으면 이는 이미 불확정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불명확한 법률의 내용을 장차 판결로 구체화해나갈 수 있는가는 헌법재판소의 권한 범위 밖(27면)이라고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따르면 대법원을 비롯한 일반법원의 판례는 불확정개념을 구체화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헌재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저자는 어떤 세법이 효율적인가에 관한 입법부나 행정부의 정책적 판단은 사법심사의 대상으로서 사실판단이라고 본다. 사실판단의 문제는 법관의 고유영역에 속한다고 보면서도 헌재의 역할에 부정적인 것은 헌재 결정의 파급효가 가장 심대한데 비해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다소 의아한 헌재 결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세법의 위임사항이 행정입법에 정확히 반영되지 아니한 경우에는 헌법 위반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며, 헌재 역시 입법재량에 대한 통제를 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2010년 개정된 헌법재판소법에 따르면 헌법재판에 대한 중장기적이고 집중적인 연구 수행과 헌법연구관 및 사무처 공무원 등의 교육을 위하여 헌재 산하에 헌법재판연구원을 설립하는 등 헌재의 전문성을 제고하려는 노력도 있는 만큼 사실판단의 문제에서 헌재를 배제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효율성의 심사는 법관의 권한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법관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나온 결론이다. 저자는 법관 스스로의 사실판단에 확신이 없는 경우라면 법원은 당연히 효율에 관한 사법적 판단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1면). 전문성이 없는 법관이 입법부나 행정부의 판단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는 결국 조세문제에 대한 판단에서 전문성이 중요한 척도임을 의미한다. 조세분야에서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점은 동감한다. 하지만 전문성이 있는 법관에게 강한 사법재량을 부여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법철학자 허버트 하트는 법관이 사법재량을 행사를 통해 규칙 창설적, 입법적 행위에 종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저자의 주장은 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법관은 선출된 기관이 아니며, 조세입법 역시 여느 입법처럼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하고 조정한 산물로서 존중해야 한다. 전문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법관이 재량을 행사해 법률을 수정하거나 창설해서는 안 된다.


세법의 입법론

  저자는 과세요건법정주의와 과세요건명확주의가 갈등하는 관계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다(23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말미암아 국회와 행정부는 가능한 한 모든 내용을 구체적으로 법률에 담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세요건법정주의를 따르다 보니 과세요건이 점점 더 불명확해지고 말았다는 비판은 음미할 만하다. 물론 법문의 분량이 많더라도 체계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의미가 분명한 알기 쉬운 세법이라면 분량이 좀 늘어난다고 해서 무조건 문제는 아니다. 향후에는 법률만으로 과세요건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위임입법은 그에 대한 실무상 지침에 주안점을 두는 식으로 개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조세입법 역시 국회의 권한이다. 하지만 세법의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특성으로 인해 행정부가 조세입법을 주도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경제현상에 대응하는 효율적이고 공평한 과세를 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사항은 입법부가 제정하는 법률보다 탄력성이 있는 행정입법에 위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러한 행정입법에 대한 통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앞으로는 조세입법에서 법률과 시행령의 관계에 대한 검토 못지않게 정부입법이 의원입법을 앞서는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이 정부입법을 처음으로 앞지르는 등 입법부의 활동이 양적으로 증가했음은 분명하다. 이제는 양뿐만 아니라 세법 같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도 입법부의 활동성이 제고되어야 한다.


  행정국가화 경향에 따라 행정부의 조세전문성이 강화되는 추세이며,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행정부가 조세문제에 있어서 사실판단을 내릴 권한이 가장 막강해진다. 이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협할 우려가 있으므로 입법부와 사법부가 조세전문성을 확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법부에 의한 통제는 사후적 구제절차라는 측면에서 입법부의 적극적인 통제가 요청된다. 즉 납세자의 기본권을 사전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조세입법 과정에서 절차적 통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산재한 입법지원기구를 통합하여 조직의 능률성을 높이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직능대표로서의 성격이 강한 비례대표 선출에서도 조세전문가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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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의 길 소감문(1)

2010. 6. 30. 23:33 |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개설한 <특강 법률가의 길>은 법률가의 길에 관하여 귀감이 될 만한 인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시간입니다. 모든 강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소감문을 제 때 제출한 것도 뿌듯한 일이지만, 더 놀라운 점은 오전 강의임에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P/F 과목이라 대부분의 학우들이 비중을 덜 두었던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목일수록 더욱 열성을 다하는 비효율적(?) 학생인 저로서는 이 수업시간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소감문에다 너무 많은 장밋빛 공약을 써 놓아 다시 읽으니 민망하기도 합니다. 선현들은 말이 행동보다 지나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강연자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강연 내용을 비판하는 대목이 거의 없다는 건 이 소감문이 반쪽짜리임을 의미합니다. 적잖은 부분이 제가 예전에 했던 말을 반복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로스쿨에서의 첫 학기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이 소감문을 일부 손질해서 올립니다. 한 학기 동안 만나 뵀던 여러 스승님들의 삶에서 제가 얼마나 배웠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도록 애쓰는지를 지켜봐주십시오.


<3월 8일 김영란 대법관님>

  판사가 어떻게 창의적으로 재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 오셨다는 김영란 대법관님의 말씀은 내게 죽비소리였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라는 수식어를 떠나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에 그분이 계셔서 감사하다. 특강 중간에 인용하시는 영화나 문학작품, 심지어 만화책에 이르는 다양한 지적 탐구 정신은 창의적 관점을 쌓기 위해 본받을 점이었다. 

  김 대법관님은 “실정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혜택을 받는 대상을 넓혀가는 것이 법치주의”라고 역설하셨다. 형식적 법치주의에서 실제적 법치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창하시며 그 과정에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의 역할을 당부하셨다. 로스쿨 제도는 불문법 국가의 이념과 관습이 결부되었기 때문에 성문법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접목해낼지가 관건이라는 말씀에 공감한다. 조문 해석에서 출발하는 성문법 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로스쿨 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에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다.

  김 대법관님은 대법원 재판연구관 시절의 경험을 회고하며 반대 관점에서 생각하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성찰하셨다. 문득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일화가 떠올랐다. 힐러리의 고교 선생님은 공화당 지지자인 힐러리에게 대통령 후보 모의 토론회 시간에 힐러리에게 민주당 출신 존슨 대통령 역을 맡겼다. 힐러리는 민주당 강령과 백악관 성명 등을 읽으며 민주당에 대한 오해를 풀었고 종국에는 민주당원이 되었다. 힐러리는 자기 스스로가 반대자가 되어 가려진 일면을 보았다. 자기가 틀렸음을 고민하고,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 말로 법률가의 기본자세가 아닐까 싶다. 대법관님께서 “결론은 옳았을지 몰라도 상처 받은 사람들의 서운함을 배려할 수 있지 않았을까?”를 늘 고민하시는 모습과 잇닿는다.

  김 대법관님은 시종일관 입법의 중요성을 설파하셨다. 입법 단계에서부터 법률가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법률가들이 정책의 입안과 집행에서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나도 궁극적으로는 좋은 법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입법이 법률 제정 실무자들에게 국한된 기술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입법의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이지만 정치학이나 행정학, 정책학과 연계한 통합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척할 여지가 많은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 만드는 법’, ‘지킬수록 이득이라고 여겨지는 법’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 싶다. 

  강의 말미에는 판사들이 국가 대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는가를 검토하셨다. 선출되지 않아서 간접적인 정당성에 그치는 판사들이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하는지에 대한 고찰인 셈이다. 김 대법관님은 사법부는 직접 민주주의에서 소외된 소수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다원민주주의를 확산하는 사법부의 역할에 동감한다. 김 대법관님은 입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지만 다수파 기관인 입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함도 지적하셨다.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용기 있는 판결을 내릴 때가 비다수파 기관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빛난다. 인용하신 “다수자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다수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라는 워렌 미 연방대법원장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김 대법관님이 임명 제청된 지난 2004년 당시에 파격적인 인사라는 이유로 설왕설래가 오고간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대법원이 대표성 확충이라는 목표에만 매몰되어 각계각층의 출신을 안배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좀 더 넓어진 대법관 구성원을 갖춰서 우리 사회의 다양성에 이바지하길 희망한다. 좀 더 많은 제2, 제3의 김영란 대법관님을 만나 뵙고 싶다.


<3월 15일 김진태 검사장님>

  서울북부지검 김진태 검사장님은 삶에 정해진 답(定答)이 없음을 강조하셨다. 끊임없이 ‘왜’의 관점에서 사고하여 창의성을 기를 것을 주문하셨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저서에서 시인과 판사가 하나가 되는 세상이라야 공적 영역에서 정의가 세워진다고 주장하고,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 없이는 법의 집행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학은 개인의 연민을 사회적 연대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학은 시대와의 불화를 겪으며 개인의 상상력을 공공의 상상력으로 탈바꿈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꼭 문학에 한정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김 검사장님께서 언급하신 재판 사례들 역시 공공의 상상력을 키우는 훌륭한 소재들이 된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개인의 상상력을 공공의 상상력으로 확장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설계해야겠다.

  김 검사장님께서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은 자기완결적이며 무한책임을 지며, 외부의 책임 추궁 장치가 없다는 특징이 있다고 역설하셨다. 프로라고 칭할 만한 분들을 살펴보면 일상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도저한 근면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산 정약용이 책상다리로 앉아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고사를 떠올리다 보면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라는 『중용』 구절과 만난다. 누구나 사흘쯤은 성인군자 행세를 할 수 있다. 닷새 정도는 공부를 하다가 지쳐 단잠에 빠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사흘과 닷새를 보름으로, 달포로 늘려나가는데 있다.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수학하는 동안 망양지탄(亡羊之歎)을 그치고 “나는 이것을 제일 잘한다”라고 외칠 수 있는 가치를 찾고 싶다.

  그런데 프로가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뉴질랜드의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는 “나는 기술적으로는 프로가 되고 싶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아마추어이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다. 프로가 맡은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재주라면 아마추어는 순수함이나 겸손함을 가리키는 뜻으로 많이 풀이한다. 전문 분야의 솜씨에 국한되지 않는 통섭하는 능력이라든가, 인간미와 동떨어지지 않는 기예라고 봐도 괜찮다. 빼어난 기능인이 되기도 어렵지만 이를 넘어서려는 다짐도 필요하다. 김 검사장님이 바람직한 법조인이라는 화두를 제시하시면서 열거하신 덕목들은 결국 기술적인 면과 아마추어적인 면을 모두 아우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로이면서도 아마추어인 법조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강의안 말미에 나오는 홀로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이라는 문구에 눈길이 간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내밀한 행동이 한결같다는 것만 해도 참 어려운 일인데,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더 잘하려는 마음가짐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신독하면 오규원 선생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가 떠오른다. 교통사고를 몇 번 겪고 나니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시다.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도무지 대충 살 수가 없다. 팬티로 눈동자를 굴리는 마음은 혼자 있을 때 경계하는 마음과 통한다. 나도 세월의 무게 때문에 때가 묻을 대로 묻어 남는 건 팬티 한 장의 깨끗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첫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겠다. 법조인이라면 품어야 할 명예이자 자존심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에 착한 법조인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선량함은 법조인의 덕목이라기보다는 모든 직업인의 윤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 그 바람을 자주 접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법률가는 규범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김진태 검사장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3월 22일 민형기 헌법재판관님>

  민형기 헌법재판소 재판관님께서는 우리들을 구법조인과 대비되는 신법조인이라고 지칭하셨다. 법학전문대학원 체제의 불확실성은 결국 시간이 해결될 문제이므로 이에 신경 쓰지 말고 미래의 주역으로서의 역할과 자세를 궁리하는 원론적 고찰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대학 시절에 자신의 꿈을 글로 기록해서 간직하고 있다고 답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졸업 후에 살펴보니 전자가 후자보다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떠올랐다. 물론 경제적인 부만을 측정했기 때문에 진정한 삶의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성급하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몇 줄 글로 압축해서 써둔다면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싶다. 

  법조인이 처한 여러 환경적 요인 가운데 전문집단을 경원시하게 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언급이 흥미로웠다. 보통 사람도 전문지식을 공유하거나 전문분야에 참여할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에 법조 직역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강화된 추세다. 이제는 법조인의 권위를 강조하기보다는 신뢰를 구축하고 수요자 중심의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감한다. 갑(甲)의 사고에서 벗어나 역지사지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갑이 아닌 지금 시기부터 연마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맹자는 “사람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다(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라고 설파하셨다. 법조인이 전문가로서 그 역할을 존중받으려면 스스로에 대한 가치 부여가 필요하다. 이 일환으로 민 재판관님은 소명적 전문성을 강조하셨다. 오늘날 법조인이나 지망생들이 소명성을 버리고 전문가가 아닌 직업인이 되려 한다고 비판하신 대목이 인상 깊었다.

  민 재판관님은 사법시험 면접에서 술집을 함께 찾던 친구들이 무단횡단을 할 때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을 던지셨다고 한다. 민 재판관님은 당신께서도 친구들을 모두 이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범답안을 매번 실천할 자신이 없다고 하시면서 횡단보도를 안 건너고 갈 수 있는 술집을 제안할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2006년 3월 학부 엠티에서 후발대로 간 나는 청량리역에서 기차표가 모자라서 무임승차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내가 일행에게 다음 기차를 기다리든가 아예 엠티를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시외버스를 타고 엠티 장소로 향했다. 나는 선배의 권위를 이용해 후배들을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끌고 다닌 셈이다. 지난날의 나는 모범답안을 거의 지켰지만 방식이 세련되지 못해 마냥 뿌듯하지는 않았다. 규범을 어떻게 준수하고, 또 준수하도록 유도하느냐에 대한 고민을 더 이어가야겠다.

  헌법재판소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뒤뜰에서 천연기념물 8호 ‘재동의 백송(白松)’을 만날 수 있다. 이 백송은 밑동부터 V자로 갈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나눠진 줄기는 하늘에서 무성한 잎을 맺어 다시 만난다. 결국 뿌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헌법정신이라는 뿌리 위에서 이따금 갈등할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는 힘을 합쳐야 함을 백송은 담담히 술회한다. 이 정갈한 노거수(老巨樹)처럼 헌재를 비롯한 전 법조가 우리 사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길 희망한다.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려면 좀 더 열려있고 쉽고 낮은 자세가 요구된다. 민 재판관님께서는 그런 맥락에서 쉬운 사회현상도 법률용어로 환원하려는 행태를 꼬집으셨다. 아직 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현재의 모습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향후 의뢰인이나 시민의 눈높이를 맞추는 거울로 삼아야겠다.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는 것이 성숙된 양심이고, 한 사람의 품위를 나타내는 시금석이다.


<3월 29일 구상진 교수님(1)>

  구상진 교수님은 강연 모두에서 문민정부 이후 의원입법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씀하셨다. 의정사를 고찰하며 입법에 대한 실권이 입법부에 없었던 시절을 돌아보니 감회가 깊었다. 실제로 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이 정부입법을 처음으로 앞지르는 등 입법부의 활동이 양적으로 증가했음은 또렷하다. 다만 늘어난 양만큼 질도 높아졌다는 분석은 아직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앞으로 국회의원을 평가할 때 대표발의안 횟수 같은 식의 정량적 개념에 치중하기보다는 얼마나 당대에 필요한 법을 고민했는지를 정성적인 측면으로도 접근하는 활동이 함께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입법 현실은 사적인 성격이 강한 보좌진 등의 인재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얼마 전 출범한 국회 입법조사처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 공적인 조직으로서 기대가 크다. 사안이 터질 때마다 각자의 ‘해석’이나 ‘의견’만을 내세워 갈등을 증폭하기 전에 차분히 ‘사실’을 축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구 교수님은 법제사를 언급하시며 법조 집안의 내력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역설하셨다. 켈젠 선생이 한국을 독일의 알려지지 않은 손자라고 지칭하셨을 정도로 한국의 법제는 일본을 계수했다. 그 이전에는 중국의 영향력이 컸다. 일전에 고려대학교 화공생명공학과 현재천 교수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현 교수님께서는 한국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역사적 의제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생존하고 번영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하나둘 중국화(中國化)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아름다운 예외였다. 

  한국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일정 부분 건사할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을 개방성이라는 요인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개방성이 반드시 독창성을 담보하지 않고, 우리가 모든 면에서 개방적이지도 않았다. 가령 양명학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보다 이단으로 여겨진 사례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대목의 고민을 이어가는 까닭은 대한민국이 복수의 문명권이 협력과 경쟁을 하는 좀 더 이상적인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나 국가 브랜드의 모색은 편협한 민족주의로 가두기에는 그 품이 너르다. 로스쿨 제도도 그런 거시적 안목에서의 시도라고 보면 좋을 듯싶다. 

  나는 시험보다 교육에 주안점을 둔 것에 법학전문대학원의 대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험이 고급화될수록 교육과 상충관계가 된다. 모든 가치기준이 수험적합성에 맞춰지면서 법과대학의 수업이 파행적으로 운영된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한 번의 시험이 아닌 다방면의 교육으로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로스쿨을 도입한 만큼 변호사시험은 의사국가고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의사국가고시의 합격률은 2010년 92.9%, 2009년 93.6%였다. 높은 합격률에도 별다른 시비가 없는 것은 의대 교육과정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쟁을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시험과 교육의 적절한 배합의 문제로 요약된다. 

  시험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교육을 향한 노력도 평가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구상진 교수님께서 설파하신 학교 수업의 중요성에 동감했다. 수험생이 시험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라면 학생은 교육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 아닐까 막연히 나눠본다. 물론 수험생과 학생이 크게 배치되는 개념은 아니다. 좋은 학생이 훌륭한 수험생도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의 취지다. 내가 학생에 방점을 찍는 이유는 앞으로 대비해야 할 각종 시험들에 소홀하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수험 공부만으로 채우기 힘든 배움의 기쁨을 좀 더 찾아보겠다는 정도의 뜻이다.


<4월 5일 구상진 교수님(2)>
 
  구상진 교수님께서는 법은 정신적 체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배우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법은 가치의 기준이어서 우리 정신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을 남과 공유하기 위한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 요청된다. 나에게 주관이 있듯이 상대방도 그 분 나름의 주관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상호주관성은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더욱 필요한 덕목이다. 법조인으로서 간주관성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열린 자세,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구 교수님은 법의 진화과정을 설명하시면서 집단적 신분관계에서 개인의 의사결정 선택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역설하셨다. 다만 이러한 인간의 의사에 대한 강조가 오만한 마음의 발로가 아닌지 반성하고, 과거의 신분사회보다 더한 신분사회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고 첨언하셨다. 구 교수님은 시종일관 지엽적인 판례 암기나 수험기술적인 접근이 아닌 핵심 원리와 법적 사고를 세울 것을 주문하셨다. 이런 노력을 통해 법의 진화에 이바지하기를 다짐한다. 

  법의 진화는 결국 법의 출처(出處)를 따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법이 나아갈 자리와 물러날 자리를 분간하는 혜안을 키워가는 길을 뜻한다. 법은 모든 인간의 자유와 독립에 신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행정국가화 경향은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고를 상당 부분 수정했다. 좀 더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입법정책에 대한 요청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이럴 때일수록 법이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판별하는 지혜가 더욱 요청된다. 법학전문대학원이 일정 부분 직업학교의 성격을 띠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 의미의 기능인(technician)에 그쳐서는 안 된다. 로스쿨 졸업생이 입법 자문이나 법제 컨설팅 등에도 많이 진출할 것을 감안해 이런 부분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야 한다.

 또한 법은 공동체 내에서 집행되어야 하는 규범임을 강조하셨다. 전혀 집행되지 않는 법은 법이 아님은 자명하다. 법은 현실로 집행될 수 있어야 하고, 현실이 법에 피드백 되어 규범력을 높여야 한다. 근래에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통상적으로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구별해서 생각한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면 법의 지배보다는 법에 의한 지배가 될 공산이 크다. 법의 지배는 평평해야 한다.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에게 기울어진 ‘편향된 법치’는 형용모순이다.

  자기에 대한 기준과 남에 대한 기준을 달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다(待人春風 持己秋霜)”라는 채근담 구절을 많은 이들이 좌우명으로 삼는 것을 보았다. 자기와 타인에게 동등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나에게 더 촘촘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나처럼 천학비재한 사람도 자기보다 빼어난 사람을 왈가왈부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 민주주의의 혜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제해서 행사할수록 더 빛난다. 

  물론 비판하는 대상보다 반드시 뛰어나야만 비판의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더욱이 공적 영역에 있는 인물을 비판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엄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적 사표가 될 만한 모범이 되라는 구상진 교수님의 가르침을 생활신조로 삼는다면 남의 잘못을 손뼉 치며 지적하는 건 삼가야겠다. 더욱이 법률가는 남을 책망하는 일을 맡기도 해야 한다. 그럴 경우 스스로를 먼저 책망하는 자세가 있어야만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 탓보다 자기 탓이 바지런한 사람을 좀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4월 12일 이재후 변호사님>

  이재후 김앤장 대표변호사님은 법관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실을 어떻게 판단하고 인정할 것인가를 꼽으셨다. 법률의 적용은 그 다음 문제라는 것이다. 학기 초에 우리 학교 최은희 교수님께서 사실심인 하급심 판결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다 배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사실관계 파악은 법해석학을 연마하는데 있어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실무에서는 사실관계를 따지는 능력이 가장 먼저 필요함을 새삼 깨달았다. 당사자가 가져다주는 사실만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그냥 단순히 법률만 아는 것이라는 지적이 매서웠다.

  이 변호사님은 기존 변호사와는 다른 접근을 선택하셨다. 거의 100%가 송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재판정이 아닌 투자자를 찾아가 기업법무와 국제법무의 영역을 개척하셨던 용기가 인상 깊었다. 이 변호사님은 다양한 법률 수요를 충족하고 전문화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로스쿨의 역할을 역설하셨다. 앞으로 전문화가 가속화되면 변호사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힘을 모아야 할 사건들이 늘어날 전망이다. 이 변호사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인재 영입을 위해서 “삼고초려가 아니라 십고초려도 할 각오가 돼 있다”라고 하셨는데 로스쿨에서도 다양한 인재가 육성되어 활약하길 희망하며 나도 일조하도록 애쓰겠다.

  이 변호사님은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변호사의 기본이라고 다시금 강조하시면서도 변호사의 자질을 몇 가지 더 열거하셨다. 법률 적용을 위한 리서치 실력, 짧게 요약 정리하여 핵심을 도출하는 글쓰기 기술, 설득하는 능력, 의뢰인을 획득하고 관리하는 방법 등이다. 어느 하나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보면 마케팅과 연관되는 내용이어서 경영학자 윤석철 교수님께서 마음(feeling)관리의 중요성을 언급하신 대목이 떠올랐다. 윤 교수님은 ”마음속 상처는 육체의 상처보다 더 크고, 상처받은 고객이나 종업원의 마음은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한다”라고 설파하셨다. 사실에 대한 균형적 감각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설득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극한 정성이면 감인(感人)이다.

  이 변호사님은 앞으로 법치주의가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법률수요는 증가할 것이라고 예견하셨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회가 될수록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법의 역할이 커질 것임은 자명하다. 일전에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장님은 금융이 선진화되려면 법치가 바로 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다. 금융은 신뢰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산업으로서 우리나라 금융산업에 엄정한 법치의 관행이 확립되어야 하는데 법이 약자보다는 강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된다면 금융산업의 성장잠재력을 저해한다는 말씀이다. 비단 법치금융만 확립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법치의 준수가 요청된다. 법 앞의 평등은 법의 내용이 모두에게 평등할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법의 집행도 모두에게 평등할 것을 요구한다. 

  김앤장은 한국 사회에서 성공 모델로 통한다. 혹자는 법률을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김앤장의 성과가 공익보다 사익만 추구한 결과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김앤장의 영향력이 입법부나 사법부의 권능까지도 넘보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들린다. 나는 김앤장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이런 고언도 새겨들으시리라 믿는다. 독선은 누구에게나 해롭다고 배웠다. 이 변호사님의 강연을 들으며 미래의 법조인은 전문성을 갖추되 특권의식을 버려야 함을 절감했다.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 법조인에게 응당 보장되는 ‘권력’이란 없다. 소명적 책임감을 맡은 이에게 부여한 제한된 ‘권한’이 있을 따름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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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의 길 소감문(2)

2010. 6. 30. 23:32 |

<4월 26일 양경승 교수님>

  양경승 사법연수원 교수님께서는 한 순간도 즐겁지 않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공부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책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읽었는지가 관건이라고 역설하셨다. 이를 위해서 공부할 때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시간도 자유롭게 운용하라고 귀띔해주셨다. 다만 이해를 못했는데도 진도만 나가서는 곤란하고 이해가 안 되면 꼭 물어서 해결하라는 묵직한 단서 조항을 다셨다. 이와 더불어 복잡한 개념들을 파악하기 위해 도표화시키고, 주제별로 묶고, 목차를 많이 보는 등의 여러 공부 방법에 대해 아낌없이 조언해주셨다. 

  양 교수님께서 공부는 요령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까닭은 아마도 시험 통과를 위한 수험 공부에만 매몰되는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법학을 주업으로 삼더라도 부업을 찾으라고 하신 이유도 결국 좀 더 즐거운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아니 그 이전에 법학을 더 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모든 공부가 다 그렇듯이 법학도 넓게 배우지 않으면 깊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양 교수님은 아직도 내가 즐겁게 할 마음이 있으면 성실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데도 매달리면 집착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일전에 김우창 선생님은 <자기가 선택하는 삶>이라는 칼럼에서 우리 사회가 젊은 시절이 없다고 탄식하셨다. 내면적 의미의 추구와 외면적 가치에의 순응 사이에서 고민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도 자기 스스로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삶을 성찰할 여유가 없다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남을 이기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에 몰두하기 십상이다. 정조대왕은 “끝끝내 지키는 사람이 위기지학을 하게 된다(『일득록』)”라고 말씀하시며 총명함이 발현하는 ‘속도’보다 총명함을 유지하는 ‘지속도’가 더 중요하다고 설파하셨다. 배움이 지속가능하려면 책을 펼치는 순간만큼은 가슴이 뛰어야 한다. 인격 도야와 자기 수양에 바탕을 두지 않고 세속적 공명(空名)에만 집착한다면 내 배움이 누추해질 것 같다.

  나는 ‘시험보다는 교육’이라는 법학전문대학원의 표어에 끌렸다.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것도 결국 잘게 나눠진 시험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내가 로스쿨에 진학한 까닭은 행복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꼴찌도 행복한 교실』의 저자가 독일의 쿠벤 김나지움의 교장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흥미롭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사고의 깊이와 인성이 고양되지 않은 지식인을 키우는 교육을 가장 경계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곱씹을 만한 이야기다. 고령화 시대에는 젊은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어른을 부양해야 한다. 이제 극소수의 승자만이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잠재성과 소질을 계발하도록 노력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인간을 생각하는 경쟁이 가능할까 막막하기는 하지만 경쟁이 심하더라도 그 안에서 보람을 찾고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교육 현장 등에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방안을 계속 궁리하고 싶다.

  양 교수님께서 중시하신 즐거움은 나 혼자만의 즐거움에서 그칠 수 없다. 연못가에서 새와 짐승을 바라보며 즐기던 양혜왕이 맹자에게 현자도 이런 놀이를 즐기느냐고 물었다. 맹자는 “현자라야 이런 것을 즐겨한다(賢者而後樂此)”라고 답한다. 현자는 여럿이 함께 즐거워할 줄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래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공직자의 자세쯤으로 좁게 해석하기보다는 모든 배우는 이의 덕목으로 삼아봄직하다.


<5월 3일 한이봉 변호사님>

  법무법인 태평양의 한이봉 변호사님께서 국제거래에 있어서 변호사의 역할에 대해 열강을 해주셨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국내기업의 M&A나 해외진출이 활성화되는 상황에 따른 변호사의 활동 영역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사내 변호사, M&A Vehicle 도입, 국내기업의 해외기업 인수, 국제적 반독점(Anti-Trust) 감시 활동, 법 준수 감사(Compliance Audit), 해외부패관행법(FCPA) 같은 새로운 활동 무대에 대해 관심을 기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자칫 소홀하기 쉬운 금융 기법에 대한 이해를 통해 경제 흐름을 읽는 노력을 이어가야겠다. 때에 맞춘다는 시중(時中)의 의미를 가슴에 새긴다. 끊임없는 변화에 맞춰가면서도 균형을 잡아봐야겠다.

  우리가 보통 의료 서비스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 의료 기술 자체의 문제보다는 긴 대기 시간 끝에 짧고 불친절한 진료를 받고 마는 경우에 대한 불만인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개선하는 것은 의료 시장 개방 여부와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의료 시장 개방에 대비해 국제적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는 첫걸음은 고객의 사소한 불만을 해결하는 것이다. 불만 고객의 클레임을 잘 해소하면 오히려 충성도(loyalty)가 높은 핵심 고객이 된다는 것은 마케팅의 상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률 시장 개방 문제도 접근해 봄직하다. 아마도 대형 로펌들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서비스 정신의 구현에 있을 것이다.

  한 변호사님께서 언급해주신 변호사의 역할 가운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으려고 애쓰고, 사후관리까지 챙기라는 말씀에 느끼는 바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거래구조를 검토할 수 있는 혜안을 갖추는 것은 만만한 과제가 아닐 것이다. 한 변호사님은 책뿐만 아니라 일을 하면서 배웠던 본인의 경험을 술회하시면서 실습을 통한 체화의 중요성을 역설하셨다. 이를 통해 문제 해결자(Social Provider), 위기 관리자(Risk Manager)로서 가치 창출에 기여할 것을 오늘날의 변호사는 요구받고 있다는 가르침이 무겁다. “배움이라는 것은 장차 그것으로써 행하려고 하는 바이다(學者 將以行之也)”라고 정이천(鄭伊川) 선생은 말씀했다. 단순히 알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 시험 답안지에 정리해내고, 남에게 설명해줄 수 있고, 실제 업무에서 활용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정성을 들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새삼 아득하다.

  국제거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고사 하나가 떠올랐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한 젊은이를 만났다. 눈이 멀었다가 갑자기 앞이 보였는데 자기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화담 선생은 그 젊은이에게 눈을 감으라고 충고한다. 눈감은 젊은이가 예전처럼 지팡이를 짚어가며 집을 잘 찾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고사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서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너의 눈을 감아라(還閉汝眼)”라는 일갈은 개안의 미덕에만 열중하던 내게 폐안의 가치를 품게 해주었다. 자신의 잣대를 먼저 세워야 제 것으로 삼을 만한 것을 가려내는 안목이 길러지게 마련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세계화의 너울에 맞선다면 좀 더 슬기롭게 넘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변호사님은 강의 말미에 현재 할 수 있는 일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경쟁력을 찾으라고 조언해주셨다. 자기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일보다 120% 정도 높은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움직임과 행동을 혼동하지 말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곱씹는다. 나는 등 떠밀려서 움직이고 있는가? 자기가 선택한 걸음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나는 앞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가? 그저 차려주기를 바라는 식객에 지나지 않는가? 목표 세우기는 내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리는 일이다.


<5월 10일 구상진 교수님(3)>

  아무런 의심 없이 영미법이라는 말을 많이 써왔다. 구상진 교수님께서는 미국의 건국 초기에는 영국보다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영국법을 계수할 상황이 아니었음을 짚어주셨다. 다만 선례구속의 원칙 같은 영미법의 공통된 원칙 등에서 영국법의 전통이 미국에 스며든 것을 엿볼 수 있다. 법학은 개념에서 시작해서 개념에서 끝나는 학문이라고 들었다. 섬세한 개념 정의를 하는 실력을 좀 더 연마해야겠다.

  구 교수님께서 설명해주신 이항녕 선생님의 풍토 법학은 매우 흥미로운 개념이었다. 시간, 공간, 사람이 합성된 종합체인 풍토라는 것은 상당 부분 동양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적, 구체적 특성이 법 내용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입법 과정에서부터 염두에 두어야 할 사안이다. 우리가 법이라고 지칭하면서 상정하는 공통된 원리에도 역사적인 특수한 제약이 있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다. 

  이항녕 선생님이 설파하셨던 풍토는 민족보다 넓은 개념이라고 한다. 이항녕 선생님의 법철학 저서를 살펴보니 세계사의 시원은 정신과 물질의 불가분적 결합체인 풍토적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적 조건을 무시하고 정신적 조건만을 중시하는 인종설과 자연의 물질적 조건만 강조하는 환경설은 각 일면의 진리는 있으나 전적으로 찬성할 수가 없다는 견해에 동감한다. “풍토적 배경 없는 법은 생활성이 없는 것이요, 생활성이 없는 것은 법이 아니다”라는 구절에서 보이는 ‘생활성’이라는 개념은 앞으로 법을 공부하면서 끊임없이 곱씹어야 할 대목인 듯싶다. 

  북송 시대 사마광은 황하 유역의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왕안석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 지역을 대표했다고 한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북 지역이 전통주의를 주장했다면 신흥세력인 동남 지역은 신법(新法)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이 사실을 접하고 지식인의 철학이나 정견이 온전히 그 개인의 것은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시공간의 제약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요소(要素)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생각에 시공간과 인간이라는 요소를 눅여낼 때 그 사상이 좀 더 탄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와 환경을 톺아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법학도로서 살아야겠다. 

  구 교수님께서는 지금 당장은 역부족이라고 느끼더라도 최상급의 법조인을 많이 만나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스스로 이류나 삼류로 자리매김하지 말고 어떤 분야이든 일류가 되라고 충언을 해주셨다. 정신이 없으면 우발적으로 성취할 수 없다는 말씀에 그간 나태해졌던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수험생보다는 학생으로 살고 싶다고 자주 말해 왔다. 수험생과 학생을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수험생이 시험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라면 학생은 교육에 주안점을 둔 개념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하고 있다. 이 보금자리에서 훌륭한 스승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는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역부족이라는 말씀을 접하니 공자의 제자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에 부칩니다(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라고 고충을 토로한 대목이 떠오른다. 공자는 “능력이 부족한 자는 도중에 그만두게 마련인데 지금 너는 미리 금을 긋고 있구나(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라고 꾸중한다. 즉 중간까지는 가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긋고 멈추는 자포자기한 상태를 질타한 말씀이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남들의 모습을 보고 지레 겁먹어 몸을 움츠리고 발을 뺄 궁리만 했던 건 아닐까 부끄럽다. 법학 공부는 획(畫)을 긋지 않겠다고 새삼 다짐한다.


<5월 17일 권남혁 변호사님>

  법무법인 로고스의 권남혁 고문변호사님은 어렵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라고 역설하셨다. 힘들고 우울할 때 생각을 바꿔서 완전히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것을 조언하셨다. 100%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100% 긍정적인 현상이 전개된다는 말씀에 가슴이 설렜다. 강의 말미에도 행복에는 조건이 없으며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 있어야 진정한 행복이라고 귀띔해주셨다.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니 가장 먼저 라이프니츠가 생각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이 세상을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직도 넘쳐나는 악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반론한다. 그러한 악이 있기에 세상은 선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악이 없다면 선한 것은 결코 선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위해 있는 것이며,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을 위해 있다는 논변이다. 

  그는 비록 부분적인 악이 있다 할지라도 전체 속에서는 선한 것이며 무한한 신의 눈에는 결코 악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결국 악함이나 추함이나 불완전함 모두 우주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견해를 ‘철학적 낙천주의’라고 하는데 언제 들어도 시원한 느낌이다. 내가 낙관주의자를 자처하고 다니는 건 사소한 현상에만 분노하다가 정작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지엽적인 것에 호들갑을 떠는 내 자신을 반성하며, 좀 더 길고 넓게 보고 대응하자는 마음에서 나온 구호다. “군자는 평생토록 지니는 근심은 있어도 일시적인 걱정은 없다(君子有終身之憂 無一朝之患)”라고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루아침의 걱정이라는 것은 이런저런 외부적인 조건을 의미할 것이다. 이에 반해 평생의 근심은 내면적인 고뇌이다. 내가 근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권 변호사님은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요약하셨다. 절차가 결론보다 중요할 수 있으며 절차를 중시할 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존 롤즈가 설파한 반성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외부의 비판을 검토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라며 마냥 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 번 평가하고 스스로 다시 궁리하여 보다 나은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로 중용(中庸)과 비슷한 개념이다. 결국 조금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직관적 판단이나 개인적 선호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숙고하면서 적절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반성적 균형 상태는 단순한 산술평균이 아니며, 숙고한 반성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제 우리 사회가 절차에 대해 좀 더 세심한 관심을 모아야 할 때이다.

  권 변호사님은 여기에다가 다수의 지지를 받은 사람 말고 소수의 이익도 보호해야 한다는 요건도 역설하셨다. 다수와 소수가 변동 가능한 것이 건전한 민주주의 사회일 것이다. 특정한 각성만을 강요하고 칭찬하는 건 한 사회의 구성과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그 불가피성을 이유로 남발될 때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겠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고양될수록 다채로운 각성이 만개할 텐데 나와 다른 견해를 경청하는 자세를 갖춰야겠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 제2장에서 이미 설득력 있게 논증했듯이 단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제약한다면 의롭지 못할 뿐더러 이롭지 못하기까지 하다. 교정의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확신한다. 나도 그 풍요로움에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보태길 희망한다.


<5월 24일 이만덕 변호사님>

  이만덕 인터로 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의 씀씀이에 대한 경계의 말씀으로 강연을 시작하셨다. 월 100만 원 정도를 받는 사법연수원생과 달리 로스쿨생은 특별한 수입이 없을뿐더러 만만치 않은 학비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도 절반쯤은 변호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재정 운용이 헤퍼질 수 있음을 지적하셨다. 빚은 늘어나기는 쉽고 갚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님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사례를 많이 언급해주셨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운동 경기장을 즐겨 찾던 어느 변호사는 지금은 로펌에서 모셔가려는 인재가 되었다고 한다. 드라마 명대사를 즐겨 외우던 어떤 변호사는 작가들과 인연을 맺고 그네들의 자문 변호사로 활약한다. 사내 변호사를 하다가 중국 유학을 간 변호사는 학부 때의 중국어 전공을 살려 중국에 진출한 회사의 상근 부회장에 올랐다. 기존의 소송 업무와는 다른 길이 많으며 서비스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아파트 하자소송에서 쌍방대리를 못하기 때문에 대형 로펌은 주로 원고보다 피고의 위치에 서게 되므로 개업 변호사나 중소 로펌은 원고 측의 대리를 할 수 있는 등의 여러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말씀에도 공감했다. 

  루쉰(魯迅)은 단편 「고향」에서 희망을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땅 위의 길에 비유했다. 누군가 먼저 간 땅 위를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서둘지 말고 쉬지 말고 걷다 보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경우가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인 토스카니니(Toscanini)는 본래 첼로 연주자였다고 한다. 그는 심한 근시였기 때문에 연주 시간에 제대로 악보를 볼 수 없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악보를 외웠다.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지휘자가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벌어져 단원들 중에서 지휘를 맡아야 할 상황이 되었다. 토스카니니는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 지휘자로서의 시발점이었다. 이처럼 자신이 딛고 있는 자리에서 충실한 삶을 살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이 변호사님은 로스쿨 생활에서 도움이 될 만한 태도를 설파하셨다. 먼저 옆에 있는 동기들을 경쟁자로만 생각하지 말고 동업자라고 넓게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그리고 너무 법리적으로 매몰되어 사고의 경직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다. 경제 위기 때문에 아파트 전매가 어려워져서 계약금을 날릴 위험에 처한 사안에서 조정 신청을 이끌어 내 계약금의 일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이 변호사님의 경험담이 흥미로웠다. 또한 의뢰인이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잘 들어주는 자세를 갖추고 의뢰인이 의지할 수 있는 변호사가 될 것을 주문하셨다. 이 변호사님은 경찰 입회를 많이 하시면서 경찰서 조사를 어려워하는 형사사건 당사자들에게 신뢰를 쌓았다는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셨다. 비슷한 맥락으로 찾아가는 서비스를 통해 현장에서 새로운 의뢰인을 만날 수도 있음을 강조하셨다. 로스쿨 시대가 배출하고자 하는 변호사 상을 잘 정리해주신 듯싶다.

  이 변호사님은 사건 선임이 문제이지 사건 처리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역설하셨다. 새로운 사건이 주어지면 책, 동료, 선배를 통해 공부하면 된다는 것이다. 학교 공부가 현장에서의 활용과 다를 수가 있고, 배운 것이 바뀌는 경우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세상 모든 공부는 무상(無常)함을 빗겨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행복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풀이해본다.


<6월 1일 김현 변호사님>

  김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님은 강연 모두에 법률시장 개방의 개념을 명확히 설명해주셨다. 김 회장님은 영국 로펌이 전세계 법률시장을 장악한 것은 고객에 대한 완벽한 서비스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서비스 정신만이 법률시장 개방에 대비해 국내 로펌이 갖춰야 할 요건이라고 역설하셨다. 세계화 담론이 요란하지만 진정한 세계시민이란 자기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한국 변호사는 한국 고객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21세기가 다중심성의 사회가 되었다고 보기는 조심스럽지만 역사상 세계는 어느 하나의 가치와 문화로 통일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보편성의 영역과 특수성의 영역이 저마다 충실하게 확장되는 형국이다. 법률시장 개방에 응수하는 우리의 자세도 보편적인 기준을 충족하려고 애쓰면서도 특수성에 대한 고민도 이어가야 한다.

  법률시장 개방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언급되는 독일의 경우에서 곱씹어볼 점이 많았다. 독일은 상위 10대 로펌 중 순수 독일 로펌은 2개만 남았다. 독일은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이면서 변호사의 공공적 (profession) 측면을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있었으나 사업가적(business) 측면이 중요시 되는 영미 로펌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시장이 잠식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시간당 청구(time charge)방식이 채택되면서 변호사 비용이 상승했고 변호사 간의 수입격차가 벌어졌다고 한다. 법률시장 개방은 국민의 법률서비스 선택의 폭을 넓힌다는데 주안점이 있지 반드시 법률서비스 부담을 낮추는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법률시장의 개방을 통해 사회 구성원이 좀 더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므로 더 행복해진 사람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독일의 사례는 우리에게 타산지석이다. 우리 변호사법 제1조에서 규정하듯이 한국 역시 독일 못지않게 변호사의 공익적 측면을 강조한다. 사적 측면을 보강하면서도 공적 측면에 대한 기여를 견지하는 변호사상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김 회장님께서는 국제화 시대에 국내 변호사들이 대응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대형화 전략보다 더 방점을 두고 추구해야할 목표라는 말씀에 동감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는 회원 변호사들의 전문성 제고를 위해 전공별 커뮤니티를 운영한다고 귀띔해주셨다. 이를 보며 이제 우리 사회는 평생에 걸친 지적 훈련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했다. 김 회장님은 해상법 국내 2호 박사이시다. 국내에서 해상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로펌의 대표변호사이기도 하시다. 김 회장님은 한 분야를 열심히 파고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확산되어 전공분야가 넓어진다고 말씀하셨다. 가령 해상과 금융, 해상과 건설이 연계되어 이해되는 것이다. 

  김 회장님께서는 지금 당장 전공분야를 정하고 전공 법과목을 많이 들을 것을 조언해주셨다. 개인적으로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천연기념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반년 전에 헌법재판소 경내에 있는 백송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사고의 틀이 넓어진 경험이 있다. 어떤 문화유산에서 인공미를 느낄 때 그 소재까지 헤아린다면 좀 더 복합적인 감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화유산의 모태가 되는 자연유산을 도두보는 혜안을 갖추는 셈이다. “옛날 문화재의 개념이 점이었다면 이제 점에서 면으로, 면에서 공간으로 확대”된다는 이인규 문화재위원장님의 말씀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화유산 감상이 넓어질수록 깊어지듯이 세상 모든 공부가 마찬가지다. 짐 콜린스의 『Built to Last』에서는 비전 기업들은 이상과 이익의 중간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이상과 높은 이익을 동시에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아마도 비전을 가진 변호사의 길도 이와 같으리라.


이 과목의 마지막 과제물은 미래의 법률가로서의 삶을 설계하는 <나는 이렇게 산다>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들의 잔치가 벌어졌지요. 인격 없는 지식이나 지식 없는 인격이 아니라 인격 있는 지식, 지식 있는 인격처럼 지성과 덕성을 결합해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 제가 그리는 삶의 모습인데 얼마나 실천에 옮길 수 있을는지요. 여하간 마지막 과제물의 도입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설마 이 잡글들을 다 읽으신 분이야 없겠지만 한 꼭지라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꾸벅

“저는 삶은 한 번 뿐이라고 믿습니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라는 명제를 지지합니다. 그래서 한 번 밖에 없는 생을 가능한 한 옳고 아름답게, 착하고 재미나게 살고자 합니다. 안연은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하는 자라면 또한 그와 같아질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임금이나 자신이나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한 사람은 성인이 되고, 안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자책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이 위대한 문장은 “터럭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율곡 이이 선생의 자경문에도 계승됩니다. 저 또한 그 호기로움을 본받아 목표로 삼습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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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하기의 어려움

2010. 4. 22. 02:50 |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2기 카페에 올린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1.
지난 20일에 방영된 문화방송의 PD수첩에서 보도된 검사의 스폰서 파문을 접했다. 이번 법조비리 파문의 진실이 어디까지 밝혀질지 모르겠으나 틈틈이 관심을 건네봐야겠다. 근래에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우렁차다. 통상적으로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구별한다고 배웠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면 법의 지배보다는 법에 의한 지배가 될 공산이 크다. 법의 지배는 평평해야 한다.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에게 기울어진 ‘편향된 법치’는 형용모순이다. 나는 또 부질없이 기대를 해본다.


어느 검사님이나 빼어난 재주를 지니신 분이실 텐데 태산이 무색하게 책을 읽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삶이 좀 허망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다. 이번 일을 목도하며 미래의 법조인은 인권감수성을 포함하는 전문성을 갖추되 특권의식은 버려야 함을 절감했다.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는 법조인에게 응당 보장되는 ‘권력’이란 없다. 소명적 책임감이 필요한 자리를 잠시 맡아준 이에게 부여된 제한된 ‘권한’이 있을 따름이다. 더욱이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검찰청법 제4조)가 아닌가.


보통 사람도 전문지식을 공유하거나 전문분야에 참여할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에 법조 직역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강화된 추세다. 전문집단을 경원시하는 현상은 일장일단이 있지만 어느 직종에 종사하든 자신의 권위는 스스로에 대한 가치 부여를 통해 세워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수자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다수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라는 워렌 미 연방대법원장의 말씀을 상기한다. 비단 법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법을 배우는 이들이 품어야 할 화두가 아닐까 싶다.


2.
『점필재집』의 한 대목이다. 어느날 김종직 선생이 아버지 김숙자 선생께 병조판서 안숭선이 남의 뇌물을 받아 의금부에 체포되었다고 아뢴다. 아버지는 “안공이 뇌물을 받은 일은 비루하지만 죄의 정상(情狀)이 아직 명백하지도 않고, 그는 군자이고 재상인데 너 같은 젊은이가 무슨 연유로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탓하는가?”라며 타이른다. 내가 나보다 훌륭한 어른들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꺼내 보는 이야기인데, 단순히 봉건 윤리로 투덜대기에는 곱씹을 점이 있는 듯하다.


나처럼 천학비재한 녀석도 자기보다 빼어난 사람을 왈가왈부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 민주주의의 혜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제해서 행사할수록 더 빛난다. 물론 비판하는 대상보다 반드시 뛰어나야만 비판의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더욱이 공적 영역에 있는 인물을 비판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엄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기를 굽히고서 남을 곧게 하는 경우는 드문 듯싶다.


정도전 선생은 『경제문감』에서 암행어사는 남을 꾸짖는 사람이므로 “오직 스스로를 책망하기 어렵게 여기지 않아야 남을 책망하여 능히 그 임무를 다할 수 있다(惟其不難於責己 則施於責人 能稱其任矣)”라고 역설했다. 법률가 역시 남을 책망하는 일을 맡기도 해야 할 테니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본다. 스스로를 먼저 책망하는 자세가 있어야만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책(自責)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남 탓보다 자기 탓이 바지런한 사람을 좀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3.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다(待人春風 持己秋霜)”라는 『채근담』 구절을 많은 이들이 좌우명으로 삼는 것을 보았다. 자기에 대한 기준과 남에 대한 기준이 같아서 자기와 타인에게 동등한 잣대를 들이대기란 어렵다. 하물며 자신에게 더 촘촘한 쳇구멍을 제시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 것 같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자리에 계신 분들이라면 자신의 쳇구멍이 너무 성긴 것은 아닌지 살필 일이다.


뒤숭숭한 소식이 날아오니 홀로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이라는 문구에 눈길이 간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내밀한 행동이 한결같기도 난망한 일인데,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더 잘하려는 마음가짐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신독하면 오규원 선생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가 떠오른다. 교통사고를 몇 번 겪고 나니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시다.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도무지 대충 살 수가 없다. 팬티로 눈동자를 굴리는 마음은 혼자 있을 때 경계하는 마음과 통한다. 나도 세월의 무게라는 핑계를 대며 때가 묻을 대로 묻어 남는 건 팬티 한 장의 깨끗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첫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겠다. 우리 사회에 착한 법조인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선량함은 법조인의 덕목이라기보다는 모든 직업인의 윤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 그런 바람을 자주 접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내가 중간고사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더욱 스스러운 일이다. 쿨럭 - [無棄]

Posted by 익구
:

2008년 봄학기에 수강한 <문학 속의 법> 강의에서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 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이 잡글은 2008년 4월 30일 발표 초안을 보강한 글에다가 2009년 2월 1일 수정한 것입니다.

사형제란 소재는 대부분 존폐론을 대비시키고 관련 현황 및 통계를 정리해 자신의 생각을 부연하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좀 더 색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지만 딱히 묘안은 없었네요. 그래서 법경제학에서 논하는 실증적 연구를 좀 찾아봤는데 별무신통입니다.

발표를 준비하며 찾아본 자료를 짜깁기한 터라 완결성이 떨어집니다. 제 멋대로 편집한 결과물을 공유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올립니다. 제법 시일이 지났지만 본문 내용은 크게 다듬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5장으로 구성된 글입니다만 5장은 생략하고 별도의 글을 만들 계획입니다.


1. 베카리아와 『범죄와 형벌』

  1738년에 태어난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는 이탈리아의 계몽사상가로서 근대 형법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764년 베카리아가 26세에 쓴 『범죄와 형벌』이라는 책에서 사형제 폐지를 최초로 주장한 사상가로 이름을 남긴다. 사형제 폐지 움직임이 그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처럼 체계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역설한 경우가 없기 때문에 베카리아를 맨 앞자리에 두는 것은 온당하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1829년에 발표한 『사형수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 서문에서 “66년 전 베카리아가 만든 틈새를 최선을 다해 넓힐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베카리아의 논설은 그 뒤로 이어진 사형 폐지론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당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대체로 사형에 반대했다. 그런데 이네들이 사형을 반대하는 근거는 도덕이나 신학적 논리에 기대기보다 사회계약론과 형벌의 유용성 또는 범죄의 예방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 우선 베카리아의 목소리를 좀 들어보도록 하자(이하 Cesare Beccaria 저, 한인섭 역, 『범죄와 형벌』, 박영사, 2006. 인용).


  형벌의 목적은 오직 범죄자가 시민들에게 새로운 해악을 입힐 가능성을 방지하고, 타인들이 유사한 행위를 할 가능성을 억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형벌 및 그 집행의 수단은 범죄와 형벌 간의 비례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정신에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인상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수형자의 신체에는 가장 적은 고통을 주어야 한다(49쪽).


  베카리아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관점에서 형벌을 바라본다. “쾌락과 고통은 감각을 부여받은 존재에 있어 행동의 유일한 동인(動因)(30쪽)”이라고 생각해 인간 행위의 원동력을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로 보고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 형법을 구현할 것을 주문했다. 베카리아는 “범죄자가 형벌을 통해 받은 해악이 범죄로부터 얻는 이익을 넘어서는 정도(108쪽)”의 형벌이면 충분하다고 논술했다. 범죄만이 사회적 악이 아니라 비례성을 잃은 처벌도 사회의 악임을 지적하는 탁견을 선보인다. 죄질에 견주어 처벌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울 경우 범죄 예방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형제를 당위론적 측면에서 간단히 주장하기보다는 한결같은 논지 위에서 사형이 범죄 예방에 실효성이 떨어짐을 논증하고 있다.
 

  아울러 사회계약설을 토대로 해서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권능을 타인에게 기꺼이 양도할 자가 세상에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인간이 사회계약을 맺는 이유는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인데 생명에 대한 권리마저 위임한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생명은 인간의 이익 가운데 가장 큰 이익이므로 자신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를 사회에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연장선상에서 “경미한 범죄에 있어 피해자가 용서함으로써 가해자가 처벌을 면하는 경우(128쪽)”를 고찰한다. 그는 이 자애롭고 인도적인 행위가 공공선에 반할 수 있음을 꼬집는다. “피해자인 한 시민은 그 권리 가운데 그 개인의 몫만큼은 포기할 수 있지만, 타인들의 몫에 속하는 부분을 무효로 할 수 없(128쪽)”다는 언설에서 형벌권은 한 개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계약의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한다는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50조 등 위헌소원에서 사형제도를 7대 2로 합헌으로 판시했다(헌재 전원재판부 1996.11.28. 95헌바1). 다수의견은 생명권을 법률로 제한하는 것이 헌법정신에 위배될 소지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생명을 부정하고 중대한 공공이익을 침해한 경우에 국가는 어떠한 생명 또는 법익을 우선하여 보호할 것인가의 규준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생명에 대한 법적 평가가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다수의견에 반대한 소수의견도 있다. 베카리아는 생명권은 절대적 기본권으로서 제한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에 찬동했을 것이다.


2. ‘사형에 대하여’ 내용과 그 비판

  인간의 정신에 무엇보다 큰 효과를 끼치는 것은 형벌의 강도(强度)가 아니라 그 지속도(持續度)이다. 우리의 감수성은 강력하지만 일시적인 충동보다는 비록 미약하더라도 반복된 인상에 의해 훨씬 쉽게, 영속적으로 자극 받기 때문이다(113쪽).


  종신노역형은 수형자보다 구경꾼에게 더 큰 공포를 안겨준다. 구경꾼은 수형자가 당하는 불행한 순간 순간의 고통의 합산을 고려하지만, 수형자는 눈앞의 순간의 비참함에 사로잡혀 미래를 생각할 여력이 없다(117쪽).


  격정적인 분노와 전쟁의 필요성이 사람들에게 유혈을 가르쳤다면, 인간의 행동을 순화시켜야 할 법률이 잔혹한 본보기를 증폭시켜서는 안 된다. 사법적 살인은 신중하게 그리고 격식을 갖추고 집행되는 까닭에 훨씬 더 유해한 것이다(119쪽).


  베카리아는 사형은 혹독함은 갖추고 있지만 지속성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사형이 한순간에 강렬한 인상을 주더라도 망각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봤다. 흔히 하는 말로 사형 집행 장면을 보면 사형에 반대하게 되고 흉악한 범죄 광경을 목격하면 사형에 찬성하게 된다고 하지만 베카리아는 이와는 조금 다른 접근을 한 셈이다. 여하간 종신노역형이 처벌의 지속성과 범죄의 예방에 더 보탬이 된다는 주장은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베카리아의 유지를 이어가겠다고 서술한 위고의 『사형수 최후의 날』에서는 이와 관련한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인 사형수는 도형장(徒刑場)에서 고생하는 죄수들을 보며 목에 도형수의 쇠고리를 차느니 기요틴의 칼날에 목을 맡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형이 임박해오자 낙인이 찍히는 종신 도형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도형수, 그것은 아직 살아서 걷고, 오고 가며, 태양을 본다”라며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임으로써 사형의 비인간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카리아 역시 사회계약설이나 범죄 예방의 효율성만으로 사형제를 접근하지는 않았다. 사법적 살인은 상당한 연구와 격식을 갖추고 집행되는 까닭에 전쟁보다 더 유해하다며 규탄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동류(同類)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인류의 자존감을 해칠 것을 걱정했다. 인권 감수성의 훼손을 염려한 듯하다. 이러한 베카리아의 언명에 대한 논박도 만만치 않다. 칸트는 “형법은 정언명령이다(Das Strafgesetz ist ein kategorischer Imperativ)”라고 단언한다. 칸트는 형벌은 오직 범죄자의 책임에 대한 절대적 응보로서의 의미만을 지닐 뿐이지 형벌을 통해 일반인의 범죄 예방효과를 꾀하는 등과 같은 다른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목적에 종사하는 수단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는 살인자도 자유의사의 행위자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살해했듯이 그를 같은 방법으로 대접하는 것이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길이라는 취지다.


  칸트는 응보의 권리만이 형벌의 질과 양을 명시할 수 있으므로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봤다. 고통은 많아도 종신형에 복역하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형벌은 베카리아처럼 범죄자의 동의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하려는 의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 위에서 “섬에 사는 사람들이 그 섬을 버리고 흩어지기로 결의한 경우에 감옥에 남은 마지막 살인자를 처형하고 떠나야 한다”라는 발언이 나왔다. 칸트가 하늘이 무너져도 세우려고 했던 정의는 타인의 생명을 부정하는 자에게는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다. 오늘날 낡은 이론으로 치부되는 응보형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는 일차원적인 복수 감정을 넘어서는 일리가 있다. 존 그리샴(John Grisham)의 『타임 투 킬』에는 공권력이 자신이 행할 보복을 대신해주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직접 보복에 나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사형(私刑)이 난무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마냥 무시하기 힘들다.


  헤겔은 “사형집행은 국가와 질서 유지 차원에서가 아니라 윤리적 질서의 절대성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인간이 올바른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옳은 것이기 때문이지 형벌이 무서워서는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개와 같은 자율성이 없는 존재로 봐서는 곤란하다며 통박했다. 헤겔은 칸트와는 달리 한 인간이 사형을 받는데는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베키라아의 견해에 일단 동조한다. 하지만 헤겔은 베카리아의 국가 개념을 부인했다. 헤겔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가 함께 실현되는 공동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공동체를 헤겔은 “인륜(Sittlichkeit)”이라고 표현한다. 헤겔은 인륜의 실현하는 도구로서의 국가는 개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그 자체의 독자적인 근거 내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가 개인의 상위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관에 입장에서 국가의 질서유지를 위해 사형이 인정될 수 있다고 봤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앞서 살펴본 헌재의 사형제 합헌 다수의견에서 규준을 제시하는 국가라는 표현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또한 헤겔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변증법을 통해 사형제를 옹호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범죄자는 다른 이성적 존재를 파괴하는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금 부정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적 구조다. 즉 법은 정명제(These), 범죄는 반명제(Antithese), 형벌을 부과해 새로운 법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합명제(Synthese)라고 봤다. 그는 형벌의 남용을 우려해 등가적 응보를 고안했고 이에 따라 살인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성적 국가라든가 절대정신은 사회계약과 마찬가지로 관념적인 개념이다. 둘 다 인간의 존엄성을 논하면서도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어 흥미롭다.


  베카리아는 범죄를 저지를지 여부는 모두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봤다. 실증주의 범죄이론에 따르면 범죄가 자유의지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들과 결합하여 발생한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진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E. Durkheim)은  범죄의 원인이 개인의 이기적인 행위나 내재적 결함에 있기보다는 사회적 분업이 발달하면서 생기는 무규범 상태(anomie) 등 사회적 환경과 구조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의 법의학자 롬브로소(C. Lombroso)는 생래적 범죄인설을 주창하며 태생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존재를 가정했다. 범죄자에게는 일정한 신체적 특정이 있으며 선천적인 범죄적 소질이 발현되어 필연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견재는 요즘 논의되는 사이코패스와 잇닿는다. 묻지마 범죄를 저질러도 별다른 죄책감이 없는 반사회적 성격의 사이코패스는 사형을 비롯한 형벌 제도 전반에 대한 고민을 품게 한다. 비슷한 고민을 했던 롬브로소는 사형으로 유해한 종을 멸종시켰기 때문에 인류가 행복을 누린다고 주장했다. 관련 탐구의 귀추가 주목된다.


3. 처벌의 강도와 지속도, 그리고 확률

  베카리아는 사형을 논하며 형벌의 강도보다 지속도가 더 큰 범죄 억지효과를 낳는다고 봤다. 이와 더불어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형벌의 잔혹성이 아니라 형벌의 확실성에 있다(106쪽)”라고 목청을 높인다. 형벌이 비록 온건하더라도 확실하기만 하다면 충분한 억제효과를 발휘하며 “형벌이 잔혹해질수록 범죄자는 그 처벌을 피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107쪽)”라고 역설한다. 법경제학에서는 처벌의 강도와 지속도의 관계에 대한 연구보다는 처벌의 확률과 강도가 범죄의 빈도에 미치는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대체로 경제학자들은 처벌의 확률과 강도가 범죄의 빈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사회학자들은 합법적 분야의 취업시 소득수준, 반사회적 성향 정도와 같이 처벌의 확률과 강도를 제외한 기타 변수들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고 본다.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복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베카리아가 그런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인권이나 생명권에 대한 저변이 넓어진 시대적 분위기도 한 몫을 담당했으리라 추정된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가 비교적 낮았던 이전 시대에는 사형의 강도가 지금보다는 세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형의 종류를 다양화하여 중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십자가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좀 더 잔혹한 사형을 부과함으로써 처벌의 강도를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베카리아가 살던 시대에는 사형의 강도가 이전보다는 크게 계산되었기에 사형의 적절성 여부를 검토할 사유의 여백이 생겼다. 여담이지만 서양의 중세에는 처벌 확률이 낮다는 이유로 강도 높은 처벌을 하기로 했다. 중세에는 독살자를 가려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처벌을 강화해 기름으로 삶는 형벌에 처했다고 한다. 19세기 미국 서부에서는 말 도둑을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고 19세기 이전의 영국에서는 조직화된 경찰력이 없어서 처벌 확률이 낮기 때문에 그리 중하지 않은 범죄에도 사형이 남발되었다(Richard A. Posner 저, 정기화 역, 『법경제학 (상)』, 자유기업원, 2003. 참조).


  1968년 베커(G. Becker)는 처벌확률에 반응하는 탄력성이 처벌강도에 반응하는 탄력성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하고 처벌의 강도를 높이고 확률을 낮추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1980년 위트(A. Witte)의 연구 결과를 보면 과거에 높은 처벌의 강도와 처벌의 확률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사회복귀 후 상대적으로 새로운 범죄를 덜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한 범죄의 경우에는 범죄를 줄이는 데 처벌의 강도가 처벌의 확률보다 더 영향력이 크고, 반면에 경한 범죄의 경우에는 처벌의 확률이 처벌의 강도보다 영향력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범죄유형을 종합해 보면 처벌의 확률, 즉 처벌의 확실성이 처벌의 강도보다 범죄 억지력이 있다고 나왔다. 1983년 마이어(S. Myers)의 연구에서는 처벌의 확실성보다 처벌의 강도가 범죄 억지력이 큰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에 발표한 그로거(J. Grogger)의 연구는 처벌의 확실성은 범죄억지에 명확히 영향력이 큰 것으로 나타났으나, 처벌의 강도는 그 영향력이 대단히 미미하여 통계적 유의성도 없음을 보이고 있다. 학계에 지배적인 합의는 없으나 최근에 처벌의 강도보다 처벌의 확실성을 보다 강조하는 연구 결과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추세다(박세일, 『법경제학』, 박영사, 2000. 407~413쪽 참조).


  베카리아가 강조한 처벌의 지속도라는 개념은 포스너(R. Posner)에게 공박 당할 소지가 있다. 포스너는 범죄자의 시간 할인율이 상당하다면 추가된 수감 기간은 그만큼의 고통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간단한 계산으로 보여줬다. 할인율이 5%일 경우 10년의 형량은 1년 형량의 7.7배이고, 20년 형량은 12.5배 정도의 기간으로 느껴진다. 할인율이 10%로 늘어나면 10년 형량은 6.1배, 20년 형량은 8.5배에 그친다. 이 때문에 그는 범죄자의 시간 할인율이 상당히 높다면 사형은 극도의 중죄에 대해 불가피한 처벌 방법이 될 것이라고 봤다. 그의 말대로 범죄자의 현재시간 선호도 혹은 현재소득 선호도가 높아서 10년 징역과 20년 징역 사이에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경우 범죄 억지효과를 높이지도 못할뿐더러 국가적으로는 큰 처벌비용만 지출한다는 지적이 있다. 물론 측정하기 까다로운 시간 할인율이나 현재시간 선호도를 놓고 사형의 필요성을 논하기는 여러모로 무리가 많지만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건 분명하다. 베카리아는 경제분석에 처음으로 수학을 이용한 저술로도 유명한데 이러한 시간 개념을 인지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 자보다는 보는 사람에게 더욱 공포심을 심어준다고 설파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정책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일반 국민이 사형과 종신형(혹은 무기징역)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따져볼 가치가 있다.


4. 사형의 범죄 억지효과에 대한 논쟁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사형의 범죄 억지효과를 놓고 첨예한 갈등이 빚어진다.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이 형무소 생활에 비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있다. 만약 죽음을 형무소 생활보다 가혹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때는 사형이 살인의 기회비용을 증가시키게 된다. 이러한 가정이 성립할 때 비로소 사형이 억지효과를 지닌다. 사형과 살인율 사이의 경험적, 실증적 연구가 적잖았다. 사형제가 살인에 대한 억지효과를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많은 경험적 연구는 서로 다른 결과를 보여 준다. 억지효과를 지지하는 분석에서부터 억지효과는커녕 베카리아의 주장처럼 사형제로 말미암아 오히려 범죄가 더 흉포해진다는 추론도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최근 신뢰나 협력 같은 사회자본의 긍정적 효과를 조명한 연구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회자본이 경제발전의 독립변수인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 결과는 모호하다. 사회자본이 경제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사회자본이 형성될 여지도 배제하기 어렵다. 사회자본은 경제발전의 상호변수이거나 심지어 종속변수일 가능성도 있다.


  사형제와 범죄 억지효과를 탐구할 때도 이런 애매함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셀린(T. Sellin)은 사형의 존재가 살인율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므로 범죄 억지효과를 가진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셀린은 사형제도가 있는 주와 있지 않은 주의 살인율, 사형제도가 있는 주와 있지 않은 주의 경찰관 살인율, 그리고 사형이 폐지되었거나 부활된 관할의 살인율을 각각 비교했다. 이 결과 사형제도가 있는 주의 평균 살인율이 없는 주의 살인율보다 높았으며 사형이 경찰관의 살인율을 낮게 하는 상관성도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사형제의 폐지와 부활에서도 부활이 살인율 감소와 일관되게 연관성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셀린의 연구 설계가 정치하고 세련되지는 못했으나 사형 반대론자에게는 광범위하게 수용된 경향이 있다. 이 밖에 멕케(D. Mckee)와 세즈노비츠(M. Sesnowitz)이 구성한 살인과 형사사법체계의 상호작용모델에서도 범죄 억지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기브스(T. Gibbs)는 처벌의 확실성과 가혹성이 살인율과 역으로 관계하는데 이 중 처벌의 확실성이 처벌의 가혹성보다 살인율에 아주 강하게 관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티틀(C. Tittle)은 처벌의 확실성과 범죄간의 관계가 역관계에 있고, 처벌의 가혹성과 범죄간의 관계에는 정관계에 있음을 발견했다(살인은 예외). 기브스와 티틀은 사형의 억지효과를 검증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처벌의 범죄 억지가설을 지지하고 있다. 에리히(I. Ehrlich)의 분석에 따르면 검거?체포확률, 체포에 의한 유죄결정확률, 유죄결정에 의한 집행의 확률 순으로 억지변수와 역관계가 나타났다. 살인율과 이 세 가지 변수간의 관계는 통계적 유의미성을 지녔으며 사형 또한 살인에 억지효과를 지닌다는 결론이었다. 억지효과를 수치로 제시한 경우도 있는데 울핀(K Wolpin)은 사형 한 단위의 집행이 네 단위만큼의 살인수를 줄이게 된다고 보았으며, 융커(J. Yunker)는 한 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156명의 살인을 억지 시킨다고 발표하기도 했다(이상안, 『범죄경제학』, 박영사, 1999. 150~165쪽 참조).


  이러한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의 분석 대신 직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통계 결과도 다채롭다. 캐나다는 살인죄에 대한 사형을 폐지하기 직전인 1975년의 인구 10만 명당 살인율이 3.09명이었는데, 2001년에는 1.78명으로 줄어들었다. 1975년에 비해서 43% 감소한 셈이다. 한편 영국은 1965년 사형제를 폐지했는데 이후 20년 동안 살인 범죄가 60% 증가했다. 더욱이 이 기간 동안 우발적 살인과 계획적 살인의 비율이 72:28에서 59:41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형의 위험이 없어져서 치밀한 계산 하에 자행되는 살인이 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이 때문에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에서 흉악 범죄가 증가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치안 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이지 사형제 폐지가 독립변수가 되어 범죄율을 낮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도출된다. 하지만 대체로 사형제도와 살인율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많은 듯싶다. 유엔이 실시한 1988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사형제를 폐지하더라도 범죄율이 증가할 것이라는 추측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사형제도가 종신형에 비하여 살인 억제력을 가진다는 가설을 수용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여 년간 미국의 사형 존치주와 폐지주 사이의 살인범죄율 비교 결과 사형 존치주의 인구 10만 명당 평균 살인범죄율은 5.3명으로 폐지주의 2.8명에 비해 높았다.


  이 밖에도 사형이 종신형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는 기존의 인식을 비판하며 사형을 종신형으로 바꾸면 상당 액수의 세금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처럼 법경제학의 분석틀을 이용해 사형제를 헤집어보려는 시도는 안개 속을 거니는 기분을 자아낸다. 마치 산발적으로 보도되는 의학 관련 기사들의 종합하면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혼란상과 비슷하다. 다만 사형제가 윤리적, 법리적 문제로만 접근하기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 부딪치는 문제임을 짐작케 해준다. 앞으로 법경제학 등의 실증적 연구가 정교해져서 억제효과에 대해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형 존치론과 폐지론은 몇 가지 통계 수치로 결판날 사안은 아니다. 사형제는 상대적 찬반보다 절대적 찬반의 비율이 여느 사회적 다툼보다 크다는 점도 사안의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사형의 위하효과가 너무 작다고 해도 존치론자들의 정의에 대한 열망을 쉽게 눅이지는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형의 억제효과가 무척 크다고 해도 폐지론자들의 인류애를 헝클어뜨리기는 힘들다. 양측의 화해할 수 없는 가치관의 차이는 사회적 합의를 더디게 만든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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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중립을 위하여

2009. 10. 6. 08:52 |

2009년 9월 22일 전국공무원노조, 민주공무원노조, 법원공무원노조가 하나로 통합해 민주노총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현행법상 별다른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노조활동을 두고 정부는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 한나라당과 정책연합을 하고 있는 한국노총에도 이미 공무원 노조가 포함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처사였다. 한국노총에 견주어 좀 더 대정부 투쟁을 많이 하는 민주노총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10월 5일 국회 행정안전위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선관위 노조의 상급단체인 전국민주공무원노조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민주노총의 일원이 되기로 한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고도의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할 선관위 직원이 민주노총 소속원이 되면 선거관리의 공정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이유다. 신지호 의원은 “법관, 검사, 경찰 등 특정직 공무원들처럼 선관위 공무원의 노조 가입을 금지하도록 국가공무원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런 식의 규율 위주의 사고는 조심스럽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부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구체화하는 법률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국가공무원법과 공무원노조법에서 규정하고 있으나 범위와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라는 충정은 이해할 만하다. 정부가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 자체는 반갑지만, 정부의 작업이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를 옥죄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공산이 커서 걱정스럽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9조는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공무원법 제65조와 지방공무원법 제57조는 ‘정치운동의 금지’ 조항을 두어 공무원이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가입할 수 없으며, 선거에서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와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3조는 ‘정치활동의 금지’을 두었다. 공무원과 교사에게 너무 초인적인 중립의무를 지운다는 느낌을 준다.


‘정치운동’과 ‘정치활동’이 다른 법개념이라고 할 때, 정치활동이 좀 더 범위가 넓다면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에 대한 합의를 모색할 시점이다. 통합공무원노조가 자신들의 후생복지와 무관한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정치활동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정치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정치활동을 넓게 보면 볼수록 공무원들의 정치적 자유는 제약된다. 행정국가화 경향이 나타남에 따라 공무원의 자율적 책임이 두드러지는 추세에 따라 정치적 중립성 못지않게 시민의 요구에 대한 응답성이 중시되어 행정과 정치는 맞닿을 가능성이 높다. 타율적 통제로 억눌러 ‘영혼이 없는 공무원’을 양산하기보다 공무원의 영혼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2008년 1월 17일 헌법재판소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청구한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헌재는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규정한 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은 명확성의 원칙과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아 합헌이라 결정했다.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정치활동의 자유보다 우위에 둔 셈이다. 재판부는 “선거활동에 관해 대통령의 정치활동의 자유와 선거중립의무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선거중립의무가 우선돼야 한다”라고 천명하며 선거의 공정성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지난 2004년에도 탄핵 심판에서도 공무원의 중립의무 위반 여부가 쟁점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정치적 중립의무에 대해 다시금 환기한 사건이다.


이 공방이 벌어지기 전인 2007년 3월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급 행정 지도자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치와 행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거리가 존재하겠으나 장관 같은 고도의 정책결정자가 현실 정치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점은 또렷하다. 헌재의 결정도 이러한 속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보다 근본적 문제는 선출직 공무원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에 견주어 일반직 공무원들이 누리는 자유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데 있다. 당시 청와대가 정치에 무조건(!) 무관해야 하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처지를 먼저 헤아렸으면 좋았을 게다. 이것이 헌재 결정 직후 청와대가 발표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정치적 자유 보장과 우리 사회의 후진적 정치체계에 대한 논의는 계속돼야 한다”라는 의견에 좀 더 부합한다.


일전에 민주노동당이 교사와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당우(黨友) 제도의 적법성 여부에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민노당은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활동이 원천봉쇄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줄기차게 내놓았다. 우리 법체계는 공무원의 정치활동과 관련해서 자유의사에 따른 투표만 겨우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규제가 심하다. 일본이 우리와 비슷한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고 하지만 공직선거법 제60조에 규정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를 살펴보면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직역은 우리가 더 광범위하다. 일본의 법제에 영향을 준 미국의 해치법(Hatch Act)이 1993년 대폭 개정되어 정치적 중립의무보다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나아간 점을 곱씹어 볼 때 우리나라는 선진 민주국가들 가운데 광범위하게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편이다.


서구에는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치활동을 열어둔 나라들이 많지만 특히 영국에 눈길이 간다. 영국은 공무원을 세 개의 계층으로 나눠 정치적 자유를 서로 다르게 부여한다. 하위직에게는 정치활동을 완전히 보장하지만, 중간직은 입후보를 제외한 기타의 정치활동은 허가를 얻어 할 수 있게 했다. 정책 결정과 가장 관련이 깊은 고위직은 정당 가입은 인정하나 그 외 활동은 비교적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영국식 발상을 우리도 빌려 쓰면 어떨까 싶다. 정치적 기본권이 애틋하기는 지위 높낮이를 떠나 매한가지겠으나 그것의 확대는 하위직 공무원부터 서둘러야 한다. 정치적 자유는 대학 교수와 국무위원들만 향유하기에는 너무 귀중하다. 고위직 공무원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당과의 조율에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측면이 적잖다. 정치적 중립에 대한 감시가 요구된다면 그 우선순위는 정책결정권을 가진 고위직 공무원이어야 한다.


탄핵 정국과 맞물린 2004년 총선에서는 공무원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획일적인 정치활동 금지가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위한 필수적인 요건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2004년 3월 25일 헌재는 초중고 교사의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을 금지한 정당법과 선거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교원의 정치 참여가 학습권이라는 또 다른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헌재의 고뇌에 동감한다. 하지만 수업권 혹은 교육권을 헌법적 권리라고 인정하더라도 참정권을 일방적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헌재는 입법론적인 재검토를 주문했지만 해석론적으로 위헌이라 보는 견해도 적잖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한 대한민국 헌법 제7조 제2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다툰다.


헌재는 헌법 제7조 제2항을 권리가 아닌 의무로 해석했다. 그런데 다른 헌법조문들을 살펴보면 제6조 제2항(외국인의 지위), 제8조 제1항(복수정당제 허용)에서 “보장된다”라고 말할 때 여기서 의무가 도출되지 않는다. 반면에 제38조(납세의 의무)와 제39조 제1항(국방의 의무)에서는 “의무를 진다”라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의무를 보장한다는 건 대다수 한국어 사용자들의 상식에 어긋난다.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며, 의무는 부과하고 부담하는 것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7조 제2항은 권력이 공무원에게 정치적 간섭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무원이 특정 계층이나 정파의 이익에 복무하지 않고 국민 전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으로서의 성격이 짙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중립 조항은 제정헌법에는 없었으나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겪은 후에 신설됐다. 공무원들이 선거에 동원되어 집권 여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폐단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군사정권에서도 관권선거가 이어졌기에 87년 헌법 개정까지 그대로 뒀다. 오늘날 공무원의 정치적 개입보다는 정치적 권리의 행사가 좀 더 화두가 되고 있는 추세다. 헌법과 법률을 해석할 때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잇따른 헌재 판결을 승복하면서도 공론화 하려는 시도는 별개의 문제다. 헌법 제7조 제2항에 권리와 의무가 혼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권리에 쌀쌀맞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의무를 얹을 때는 재빠르면서 권리를 건넬 때는 머뭇거린다면 법치국가라는 위상이 초라하다. 제7조 제2항을 공무원에게 영혼이 있더라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거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불안정한 고용 사정과 맞물려 취업준비생들에게 공무원이 선망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부러운 존재인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까지 두둔하기란 정말 어렵다. 업무상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도 여전하다. 공무원의 직무 특성상 정치행위와 업무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에 제약을 받는 만큼 신분과 정년을 보장받는다는 항변도 수긍할 만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무원의 정치활동 자체를 금지하는데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공무원에게 직무와 관련한 공정성과 능률성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거의 모든 정치행위를 금지해 그네들의 헌법상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국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집단의 자유를 일괄적으로 제한하는 단순함이 마땅한지를 놓고 찬찬한 성찰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헌법 제37조 제2항의 기본권 제한에 대한 원칙에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최근에 신설된 국가공무원법 제59조의2 제1항은 “공무원은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라며 공무원에게 종교중립의 의무를 부여했다. 이 조항은 공무원의 종교활동에 대한 어떠한 한계를 두지 않는다. 종교의 자유와 종교의 중립이 함께 추구될 수 있는 가치임을 잘 나타낸다.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중립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차별 없이 직무를 수행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큰 이견이 없겠지만 한국이 선진 민주국가 중에서 가장 엄격히 정치적 자유를 제약할 근거가 튼실한지를 캐물어 보자. 지금처럼 정치활동을 전면적으로 불허하기보다는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직무수행에 지장을 주는 정치활동만 규제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공무원의 직무수행과 관련이 없는 정치활동을 일부 허용해야 한다. 먼저 정치적 견해를 표명할 자유는 폭넓게 보장하도록 애써야 한다. 단순한 개인 수준과 노조 같은 단체 수준의 차이를 둘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자유의 핵심은 정부 여당의 정책에 찬성할 자유가 아니라 반대할 자유를 보장하는데 있다. 교사들의 시국선언을 단죄하는데 급급한 모습이 볼썽사납다. 그 다음에는 하위직 공무원을 필두로 가장 낮은 단계의 정치운동이라고 할 만한 정당 가입이나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단체 수준의 집단적 행동이 부담스럽다면 개개인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하는 것부터라도 인정하자. 이는 내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지만 적어도 무조건 안 된다는 접근보다는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길에서 가깝다고 믿는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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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저작권법 제1조

2009. 2. 12. 05:20 |

2008년 가을학기에 저작권법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의 강의만 즐겁게 들은 것 말고는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듯싶은데 시험 성적이 전체 180여명 가운데 2등이라니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다(세상에 내가 등수 자랑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제는 생활법률이 되어버린 저작권법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이 만개 하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다. CCL(Creative Commons Licenses) 같은 게 좋은 사례일 듯하다.


저작권법을 내가 처음 지각한 것은 문장연구가 장하늘 선생님이 한국의 명문을 엮어 만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이란 책에서 비롯되었다. 출판사는 본래 43편이 아닌 53편으로 기획했는데 저작권자나 그 유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10편이 빠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책을 기획할 당시에도 법정허락 제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작권자를 확인하기 어려운 저작물에 대해 해당 출판사가 취해야 하는 신문 광고가 경제적 지출만 강요하는, 현실성도 실효성도 없는 허울뿐인 제도라고 출판사는 아쉬워했다.


결국 출판사는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저작권법이 오히려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장애 요인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라며 출판사는 작품 게재를 포기했다. 출판사의 합법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알지 못하던 명문을 접할 기회를 잃은 셈이다. 현재의 개정된 저작권법 이전의 사례라 지금은 법정허락 제도가 얼마나 정비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작권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첫 경험이었다.


미궁과 미로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한 작가 보르헤스는 미궁과 미로야말로 삶의 진짜 모습이라며 가장 완전한 형태는 미완의 형태라는 역설적 주장을 폈다. 사실 모든 법이 다 그렇겠지만 저작권법의 묘미 역시 미로를 더듬는데 있다. “이 법은 저작권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저작권법 제1조에는 저작권자와 이용자 사이의 정교한 균형에 대한 끊임없는 고심을 담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작권법 제1조가 표상하는 양자의 저울질은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탐구할 계획이다.


최근 일부 저작권자들과 이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몇몇 법무법인들의 무차별적인 고소가 갖가지 폐단을 낳고 있다. 정당한 법 집행 행위임에도 마냥 칭찬하기 어려운 까닭은 저작권 위반의 경중과 대상자를 가리지 않고 형사 고소를 남발하는 것이 저작권법 제1조의 취지에 어긋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체결된다면 저작권법은 문화의 향상 발전은 소홀한 채 저작권자의 배타적인 권리에 더 치우칠 우려가 크다. 문화부의 저작권법 개정안에 따르면 공정이용 조항을 신설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저작권자의 권리를 강화했다. 차세대 성장동력으로서의 저작권 산업이라는 구호는 아름답지만 외화내빈을 경계해야 한다.


저작물을 생산한다기보다 이용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 학생 신분으로서는 저작권법을 준수하는 게 마냥 달갑지는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작권법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제 값을 치르고 저작물을 이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저작인격권은 철석같이 지키더라도 저작재산권을 온전히 지키기란 큰 수입이 없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다. 학생뿐만 아니라 대다수 서민과 중산층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도로교통법 다음으로 위반자가 많은 법률이 저작권법인지도 모른다.


배운 대로 살기 위해 내 자신을 검속하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다. 저작권법 제30조 단서에 나오는 “공중의 사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복사기기에 의한 복제”는 사적 이용을 위한 복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학교 도서관에서 복사카드를 사서 무인카드복사기를 이용해 필요한 부분을 복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무인카드복사기를 이용하는 학생들이 저작권자의 이용허락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복제하는 경우를 아직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도서관에서의 복제가 사적이용을 위한 복제(공정이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례가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판례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사적복제보상금제도가 도입되지 않았으니 현재 쓰는 복사카드에 보상금이 포함된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제30조 단서 규정이 적용된다고 한다면 집안에 복사기를 구비하지 못한 학생들은 제31조 제1항에 따라 도서관에 의뢰하여 복제물을 제공받거나, 자기 손으로 필사나 컴퓨터 타이핑하는 정도밖에 법을 지킬 방도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제31조 제1항 제1호로 이용자가 복제물을 이용하는 목적은 조사·연구를 위한 것으로 한정하고 있다. 나처럼 한문고전이나 한국사 관련 서적을 단순히 개인적인 취미나 호기심으로 읽고 정리하는 경우 이마저도 할 수 없다면 너무 답답할 것 같다. 이 규정은 선언적인 의미 이상의 별다른 중요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라고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집행되지 않는 법을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그 법을 지키려는 의지를 부식시킨다.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법을 어길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얼마나 따가운지 입법자들은 아시는가?


설령 내 취미생활을 조사·연구를 위한 것이라고 우기고 복제를 의뢰한다고 해도 문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논어』 주석을 참조하려면 수십 종의 번역서 내용 중의 극히 일부를 참조해야 한다. 만약 이 번역서들을 복제하고자 하면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도서관 복사부에 책 10권을 들고 가서 각 권당 1~2장씩만 복사해달라고 부탁하면 그 분들도 불편하고 나도 미안한 상황이 벌어지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필사나 타이핑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러 저작권법 교과서들을 뒤적이며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얻고자 했으나 헛갈렸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저작권법을 어길 소지가 있는 대목인지라 나의 저작권법 스승이신 이대희 고려대 법대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다. 이 교수님께서는 “공중용 복사기는 학교 앞 복사집을 겨냥한 것이고, 개인이 직접 공중용 복사기를 이용하는 것은 저작권법 위반이 되지만 집행은 되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회신을 보내주셨다. 아 역시 저작권법 위반이었던 것이다. 털썩~ 나는 혹시나 학교 도서관 건물 내부에 비치되어 있는 복사기만이라도 예외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살짝 허탈했다. 그만큼 저작권법을 지키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책 사기 싫어서 별 고민을 다한다고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면 나는 이미 『논어』 번역서 9종을 구입해 집에 꽂아두고 있다. 그런데도 참조할 책은 많고 그 책들을 죄다 사 모을 수는 없으니 걱정을 해봤다. 책 사보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지만 중고도서 유통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새책만을 사봐야 하기 때문에 더 괴롭다. 발췌독하는 참고도서까지 모두 구매해야 할 수 있는 학생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이런 이유로 학생들에게는 무단 복사를 묵인하는 것이 국내외의 관행이기는 하다(학생은 봐주는 대신 사회인은 엄히 다스린다면 이 또한 문제다). 하지만 단지 관행으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저작권법 위반자를 양산하지 않는 방향으로 입법을 하는 것이 순리다.


장기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중고도서 시장의 활성화와 더불어 대학도서관을 비롯한 공공도서관의 내실화를 꾀해야 한다 이를 통해 책을 읽고자 하는 국민들이 돈을 절약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도 출판사의 수익기반도 마련하는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지숙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무조건적인 저작권 강화는 저작권자에게도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은 않는다”라고 주창한다. 필수재보다 선택재에 가까운 저작물은 너무 규제가 심하거나 가격이 높으면 이용자들이 저작물 이용을 축소시켜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저작물의 가격에 이용자들이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이야 학교 도서관 전자저널 기능을 이용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만 학술지 한 편을 학회지 사이트를 통해 다운로드받는다고 가정해보자. 『오늘의 동양사상』이라는 반년간지 제16호에 실린 글을 낱개로 모두 구매한다고 치면 49,700원(302쪽), 제17호는 51,000원(329쪽), 제18호는 44,300원(272쪽)으로 모두 오프라인 판매가 12,000원을 훌쩍 넘는다. 세 권의 1쪽 당 가격은 평균 160.82원으로 복사집의 복제 가격인 40~50원보다 훨씬 비싸다(더군다나 다운로드 가격이기 때문에 출력비는 별도로 계산해야 한다). 이래서야 이용자가 느는데 한계가 있다. 디지털 저작물의 이용자 확대는 규제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대한 검토가 절실하다.


무녀(巫女)의 금법(禁法)이 엄하던 시기의 일이다. 장령(掌令)으로 있던 조자(趙孜)는 무녀들을 멀리 내쫓거나 집단 수용하자고 아뢴다. 세종대왕은 “무릇 법을 세우는 것은 시행하기 위한 것인데, 시행할 수 없는 법은 세울 수 없는 것이다(凡立法, 爲可行也, 不可立不可行之法也)”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세종실록 제101권 세종 25년 9월 2일). 저작권법을 다룰 때도 이 마음가짐을 좀 배웠으면 좋겠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무용한 법은 필요한 법을 약화시킨다”라고 역설했듯이 지킬 수 있는 법,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법, 지킬수록 내게 이득이 된다고 여겨지는 법이 바로 유용한 법이다.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1조를 다시 읽어본다. 이 법은 저작권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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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밑에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교 반 클럽에서 선배 갑이 쓴 댓글을 삭제해주기를 청하는 후배 을의 글이 익명게시판에 올라왔다. 갑이 댓글을 통해 어느 종교에서 추앙하는 위인을 폄훼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1000이 넘는 조회수와 100개 가까운 댓글이 오고 간 것을 보고 뭔가 방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을은 나를 비롯한 클럽 운영진이 문제의 댓글을 지워주기를 바란 모양이다. 하는 일 없는 부클럽장이었던 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댓글을 삭제하는 데 머뭇거린 까닭은 고학번에 대한 예우라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사안의 당사자가 누가 되었든 간에 그 분이 고학번이라면 편집권을 발동하는데 신중하게 응했을 것이다. 저학번에게는 편집권을 함부로 발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 더 망설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굳이 이런 식의 번거로운 절차를 밟으려고 한 것은 선배님들에 대한 흠모이자 머잖아 이 자리에 오를 후배님들을 위한 배려라고 여겼다. 적잖은 후배들은 나의 이런 발언을 “선배의 글이기 때문에 삭제하지 않는다”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선배가 아니라 고학번이라고 명확히 범위를 한정했다. 고학번을 개념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내가 속한 클럽에 종종 들러주는 고학번을 가파른 잣대로 보면 열 명이나 스무 명 남짓으로 보고 있었고 클럽 구성원들이 대체로 동감할 수치이다.


이 분들에게 우리 클럽의 손윗사람으로서 예우를 갖추는 게 특혜라고 치더라도, 그 특혜가 과도하다고 보기 힘들다. 그 특혜라는 것도 스스로 자기의 실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정도인데 말이다. 그 여유라고 해봤자 내가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밤새 기다린 몇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조회할 시간을 부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몇 시간 정도 벌어진 댓글 논쟁을 보면서 갑이 교정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알고 문제의 댓글을 삭제하려던 찰나에 댓글이 수정되었다. 갑이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의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표현의 과격함을 자구 수정한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매듭을 지었다.


고학번이라고 할 만한 분들의 글에 대한 수정이나 삭제에 신중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견에 대한 지적이 적잖았다. 하지만 내가 “학번 불문하고 공평무사하게 게시판을 관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솔직하지 못한 처사다. 더군다나 나는 고학번이라고 불리는 시점에서도 우리 클럽을 종종 드나들어주는 분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마운 일이고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게 클럽 운영진으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자기 필요에 의해서 들렀든 간에 그래도 잊지 않고 반 클럽을 찾아준 일 자체가 너무 반가워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선후배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어떤 분쟁이 발생했을 때 먼저 스스로 자기 교정을 할 여유를 부여하는 것 정도가 과도한 특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원활한 소통을 꿈꾸는 내가 기다린 며칠, 몇 시간이 어떤 후배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 또한 무척 고통스럽고 가슴 시린 순간이었음을 헤아려주시면 고맙겠다. ‘예우’, ‘특혜’라는 표현을 부러 쓴 이유는 역설적으로 나를 비롯한 고학번 선배들의 자기 책임과 자기 반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선배된 자의 한마디가 후배들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을 먼저 품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할까.


을의 주장에 동조하는 몇몇 후배들은 갑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좀 자제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선배가 정색하고 후배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너무 야박한 상황이 아니겠냐며 다독였다. 굳이 후배가 나서지 않아도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보는 눈이 있는 만큼 서운함이 크더라도 살짝 기다려주는 건 어떻겠냐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리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도 막상 사과까지 받아내고 나면 후배들이 그 모짊에 대한 미움이 생길까 염려스러웠다.


이러한 나의 진의와는 관계없이 사과 자제 요청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내가 단순히 선배는 후배에게 사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짓지 않았음을 누구나 다 알아주실 것이라 믿는다. 나는 다만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라는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사사로운 친목단체에서는 꽤 각박하게 느껴지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당사자가 스스로 돌아보는 과정을 밟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몇몇 후배들이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운운할 때 좀 머뭇거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건 선후배를 떠나 누구에게나 힘든 일인만큼 조금만 넉넉하게 기다려줄 수 있으면 어떨까?


어느 선배님께서는 “손윗사람한텐 사과도 못 받는 고대의 경직성이 싫다”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선배님께서는 “선배가 후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경우는 조언인데 후배가 선배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버릇없단 이야길 듣”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고 그런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비판’과 ‘사과 요구’는 동일선상에 놓고 재기는 힘들 듯싶다. 다시 말해 비판을 수용하는 것과 사과 요구를 실행하는 건 다소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판할 때는 한 번 생각하고 제기해도 되지만, 사과를 요구할 때는 세 번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장자』에 “저자에서 남의 발을 밟으면 미안하다고 사죄하지만, 동생이 형의 발을 밟으면 따뜻한 눈길로 보아주면 되고, 자식이 어버이의 발을 밟았을 때는 아무 말이 없어도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유가의 예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숭상하지만, 진정한 예는 유별나게 따지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는 도가의 입장이 녹아 들어가 있다. 사과마저도 필요 없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설파하지만 무조건 꿈결같은 상황만은 아닐 게다. 더욱이 사과 요구를 표현하는 것도 서로의 관계에 대한 신뢰와 친근함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작동할 여지도 있다. 또한 선배가 나의 비판이나 사과 요구를 받아들일 만한 아량이 품었다고 믿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우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교 모임에서 정식적인, 공식적인 사과란 절차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쓸 때 효용이 커진다고 본다. 사과는 자발적으로 해야 빛나고, 사과 요구는 공인(公人)에게 먼저 건네야 한다. 따지고 보니 이렇게 ‘사과 요구’를 두고 말이 길어진 연유는 내가 생각하는 ‘사과’에 대한 개념 정의가 다소 엄격했기 때문이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을 접하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헌재의 결정문 일부를 발췌해봤다(89헌마160).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에는 널리 사물의 시시비비나 선악과 같은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되는 내심적 자유는 물론,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권력에 의하여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않는 자유 즉 윤리적 판단사항에 관한 침묵의 자유까지 포괄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헌법과 달리 양심의 자유를 신앙의 자유와도 구별하고 사상의 자유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 별개의 조항으로 독립시킨 우리헌법의 취지에 부합할 것이며, 이는 개인의 내심의 자유, 가치판단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리의 명확한 확인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고 인간의 내심의 영역에 국가권력의 불가침으로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불가결한 것이 되어 왔던 정신활동의 자유를 보다 완전히 보장하려는 취의라고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살피건대 원래 깊이 “사과한다”는 행위는 윤리적인 판단·감정 내지 의사의 발로인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며 그때 비로소 사회적 미덕이 될 것이고, 이는 결코 외부로부터 강제하기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이의 강제는 사회적으로는 사죄자 본인에 대하여 굴욕이 되는 것에 틀림없다. 사과의 정도에 따라 굴욕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사과”의 문구가 포함되는 한 그것이 마음에 없는 것일 때에는 당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요 치욕임에 다름없으며, “사과문”, “진사문”, “해명서” 등 어떠한 명목의 것이든 관계없이 그러하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앞서 공인을 향해 먼저 사과를 요구하자고 했던 것은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맥락에서 한 말이다.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사과 권하는 사회를 단숨에 고치기 힘들다면 사적 영역에서 사과를 받아내고픈 열망을 눅이는 대신에 공적 영역으로 눈을 돌려봄직하다. 그렇다고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다. 공인인 만큼 자기 반성을 더 바지런해야 하고, 자기 반성을 하다 보면 사과 또한 먼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따름이다(과연?).


정리하자.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름다운 덕목이다. 강제적인 사죄광고는 위헌 결정을 받았지만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사죄광고는 지금도 얼마든지 많이 이뤄진다. 나는 후배가 선배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동기가 동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선배가 후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 된 갑의 불관용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은 수정 및 삭제 조치 등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갑의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은 갑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 [無棄]


<참고문헌>
김욱, 『그 순간 대한민국이 바뀌었다』, 개마고원, 2005, pp. 39~53
박성철, 『헌법 줄게 새법 다오』, 이매진, 2007, pp. 26~35
윤진수, “謝罪廣告制度와 民法 제764조의 違憲 여부-憲法裁判所 1991.4.1.宣告, 89헌마 160決定(判例月報 250호 64면 이하)-”, 『사법행정』 제32권 제11호, 한국사법행정학회, 1991, pp. 73~89
윤철홍, “명예훼손과 원상회복: 사죄광고를 중심으로”, 『비교사법』 제10권 3호, 한국비교사법학회, 2003, pp. 25~55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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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불법에 대한 혐오는 정말 놀랍다. 근친증오라는 말이 떠올랐다면 실례가 되려나?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분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시는 분들이 법치주의를 무력화하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말씀하시니 민망하다. 이 분들이 요즘 불법집회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손해배상청구를 쉽게 하기 위한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지난 6월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집회의 인파를 보고 “뼈저린 반성을 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반성은 법치를 바로 세우겠다는 아름다운 목표를 내거는 것으로 구현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대통령의 법치는 평평하다기보다는 기울어진 듯싶다. 이 법치는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나 쟁의에 돌입한 노동자에게 더 엄정하게 적용될 공산이 크다. ‘편향된 법치’는 형용모순이다.


시위 집단소송제는 임지봉 서강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집회나 시위가 불법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사전에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크다. 시민들에게 자신이 참여한 집회나 시위가 불법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검열 혹은 검속을 하게 만드는 것이 이 입법의 주된 목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이룰 건전한 시위문화는 그리 탐스럽지 않을 게다.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고 나서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마땅한데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야간 집회를 원천적으로 불허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일말의 고민도 찾아보기 힘들어 아쉽다.


참여연대 공익법 센터의 논평을 통해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국가나 대기업의 불법행위를 견제하기 위한 제도이지, 돈도 없고 우월적 지위에 있지도 않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에게 수십억, 수백억원의 위협성 민사소송이나 제기하라고 있는 제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약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제도로 고안된 집단소송제가 국가 권력의 또 다른 통치수단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더군다나 한나라당은 현행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등에 대해서는 재계의 반발을 걱정한 탓인지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이중적인 잣대를 드러냈다. 불법집회에 대한 피해 구제를 하겠다는 본래 취지보다는 정권에 반대하는 시도를 징벌하겠다는 욕망만이 퍼덕거린다. 김용철 변호사는 “<PD수첩> 수사하듯, 삼성을 수사했더라면 아마 우리 사회가 많이 달라져 있을 게다”라고 푸념했다. 법이 가진 자와 힘센 자의 손아귀에 맴돈다는 탄식이 묻어난다.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학업 효능감이라고 부르고, 성공적으로 도전과제를 마칠 수 있다고 여기며 자기 능력에 대한 신뢰하는 것을 자기 효능감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을 응용해서 정치적 효능감이나 정책 효능감 같은 말도 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효능감들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법치 효능감(constitutional efficacy)’이 아닐까 싶다. 법을 지키면 나에게 이익이 되고, 법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푸근함 같은 감정 말이다. 슬프게도 대한민국의 법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있는 분들은 ‘법치 효능감’을 다른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으신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진 민주주의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시위 집단소송제를 제정하려 하겠는가. 정부 여당이 기획하는 법치 효능감을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기 힘들겠다는 불안감이 점점 커진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다수 국민의 지지에 따를 수밖에 없는 다수파기관의 성격을 지닌다지만 시위 집단소송제가 다수의 견해를 좇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다수파기관이면서도 다수의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다. 여하간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은 비다수파기관이라고 불리는 사법부다. 일전에 노회찬 전 의원은 “법은 만명한테만 평등하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 아니라 만명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지적이 매섭다. 앞으로도 행정부와 입법부는 자신들이 정의한 법치 효능감에 입각해 각종 법안을 쏟아낼 것이다. 이를 일차적으로 견제하는 힘은 사법부다. 사법의 정치화나 사법적극주의에 대한 논란이 적잖다. 적어도 사법부가 지금보다는 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적극적 행동을 했다면 지금처럼 법치 효능감이 낮지는 않았으리라. - [無棄]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이 그 구성과 존립이 다수국민의 지지 획득 여부에 달려있는 기관을 다수파기관이라 부른다. 입법부의 국회의원이나 행정부의 대통령은 선거에서 재선되기 위해 항상 다수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신경써야 한다. 그러나 사법부는 삼부 중 유일하게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임명’되는 비다수파기관이다. 따라서 다수국민의 의사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다수국민의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잘 조직화되지도 대표되지도 못하는 약자의 이익을 판결을 통해 획기적으로 구현해 나갈 수 있는 태생적 장점을 가진다.
- 임지봉 서강대 법학과 교수, [목요일언]약자 및 소수자의 법률가 中, 법률신문 2006.09.01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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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말미에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드라마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으나 혹시 미리 짐작하시게 만들 수 있으니 유념해주세요.


정이현의 동명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SBS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 오은수(최강희 분)는 양다리를 넘어 세다리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결혼 상대를 물색하려는 궁여지책일 수도 있겠다는데 생각이 미치니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오늘날 연애 결혼이 일반화되면서 동반자적 관계, 일부일처제를 내면화한 부부가 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혼율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충동적 이혼을 줄이겠다는 명분으로 2008년 들어 이혼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이혼을 다시 고려해 보는 기회를 부여하는 이혼숙려제도의 기간을 늘려 도입했다. 이는 미성년 자녀의 양육에 대해 합의하지 않은 경우 협의이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성숙한 개인의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비판이 적잖다. 이혼숙려제도는 개인적인 행복이나 독자적인 인격을 국가가 나서서 억압할 소지가 크다. 굳이 나라가 할 일을 찾자면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일 공산이 큰 이혼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해 봄직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결혼을 순수한 사랑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결혼의 문제는 대개 제도상의 결함으로 말미암는다고 봤다. 남자에게 결혼은 생활양식이지만 여자에게는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결혼이 여자의 경제주권을 확보하는 기능을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결혼을 계기로 남녀 관계에서 여성의 수동화, 예속화가 더욱 강화되는 것을 염려했다. 또한 남편과 아이들의 굴레 안에서 자신의 자주성을 잃어버리고 권태에 시달리는 여성의 실태에 좀 더 주안점을 두었다. 그람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의 독립성과 부부 사이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여성이 모성을 발현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기 영역을 마련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가족이 된다고 봤다. 보부아르는 여성이 스스로 원해서 간통을 했다면, 거기에는 자유의 한 단면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간통을 사라지게 하는 필요조건이 될 수 있다고 주창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결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행복한 삶을 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근본적 방책으로 삼아야 한다. 특히 혼자서도 윤택한 삶을 꾸릴 수 있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면 이성 사이의 사랑이나 결혼이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원만하게 유지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요즘 법과 제도의 변화는 가부장제의 약화를 초래했다. 1990년대 들어 남녀차별을 시정하고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입법이 잇따랐다. 여성발전기본법, 남녀고용평등법을 비롯하여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한 처벌법도 제정됐다. 호주제와 제대군인가산점제도에 대한 위헌결정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우리 법 제도에는 아직 주부의 가사활동을 폄하하거나 여성의 사회활동을 방해하는 성차별 조항이 남아 있다. 국민·공무원·군인 연금법에서 유족연금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 재혼하면 그 권리가 소멸한다고 규정한 것과 재산 등록 대상에서 '출가한 여자'는 제외시키고 있는 공직자윤리법 등이 그 사례다. 맥락은 다르지만 강간의 피해자를 여자로 한정해 동성 사이의 강간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 간의 획일적 성역할을 법제화한다며 피해자를 '사람'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미비점을 메우기 위한 입법은 계속될 전망이다. 법조문상의 형식적 문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성역할을 해체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눅여나가는 장치로서 법의 역할이 촉구된다.


고종석의 『사십세』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야합에 의해 태어난 자식, 첩의 자식이라고 명명한다. 사생아라는 처지를 자괴하면서 가족과 부인에게 무책임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하다. 소설의 핵심 주제는 아니지만 정상적이지 못한 가족 관계가 자식의 인격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불륜은 배우자의 피해 뿐만 아니라 자식의 고통을 야기하기 마련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축첩과 같은 지속적인 간통으로 형성된 부자관계는 위태로웠고 가족 관계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신의 육욕을 충족하려 했다면 정당한 방법으로 결혼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외도를 저질렀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했음은 물론이고 자식들에게도 갈등의 씨앗을 남긴 폐해가 크다. 이처럼 간통 행위는 혼인 외 자녀 문제나 가족의 유기 문제 등을 낳는다. 형법 제241조는 법률상 혼인을 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은 대부분 간통죄를 형사처벌하지 않는 대신 민사상 배상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1990년 김양균 헌법재판관이 간통죄에 대한 합헌결정에 반대하며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윤리 도덕을 지키는 주요 동기가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윤리의식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제시한 의견을 경청할 만하다. 간통한 배우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입법화 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간통죄 폐지를 논의해 볼만 하다.


간통이 위헌이든 합헌이든 그것이 나쁜 행위이고 줄여나가야 한다는 점은 또렷하다. 간통죄를 세분화하고 중벌 규정을 완화하는 대체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 접근을 해볼 수 있다. 다만 미성년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양육비 지급에 관한 강제 조항을 보완하는 등의 실질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소설에서는 서자인 주인공이 아버지의 호적에 올랐다는 내용이 있는데 새로 시행되는 가족관계부는 다양한 가정 모습을 보듬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는 견해가 맞을지도 모른다. 만프레트 타이젠의 『러브 사이언스』에 따르면 5천 종이 넘는 포유류 가운데 평생 같은 짝과 더불어 지내는 동물은 비버와 수달 등 약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에서는 대부분 포유동물의 새끼들은 젖을 떼자마자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하는데 반해 인간의 아이는 혼자 먹고 살 수 있으려면 훨씬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성이 배란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지 남성과 성교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남성이 가족의 둥지에 머무르며 아이를 함께 양육하게 되고 이것이 일부일처제로 진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흥미롭다.


현재의 결혼제도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잠정적으로 합의된 산물이라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점은 기꺼이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인간이 연애 호르몬에 의해 전적으로 조종 당하는 존재가 아닌 한 혼인서약을 나눈 배우자에 대한 신의와 존중은 봉건윤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권장할 덕목이다. 한스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에서 재벌의 아내 마리안네는 작가 베르톨트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훌쩍 떠나버린다. 일견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해방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그러나 이는 소설적 구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거꾸로 마리안네가 가난한 남편을 버리고 부유한 남자에게 마음이 동했다면 감동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남을 해쳐가며 탐닉하는 사랑에는 삼감이 필요하다. 내 욕망에 앞서 배우자를 배려하고 자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한다면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품어야 할 미덕이다.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면 적절한 시기에 헤어질 수 있는 시대다. 그것이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앞으로도 개인의 선택과 다양한 애정관을 수용하도록 법제도가 개편되어야 한다. 법이 상당부분 비켜서야 할 것이다. 법이 물러난 자리에 사랑이 다 들어차기보다는 여백을 남겨둬야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무한하거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욕망을 한꺼번에 채울 수 있는 결혼제도를 더듬기는 어렵다. 박현욱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한다는 아찔한 상상력을 선보였다. 비독점적 다자연애(Polyamory)라고 멋지게 이름지어진 이러한 시도들을 우리는 어디까지 수긍할 수 있을까? 독점은 대개 나쁘지만 한 사람을 독점하려는 노력은 그래도 애틋하다. 일부일처제를 건사해왔던 정성들을 퉁명스럽게 내치지 못하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결혼을 무덤이라고 투덜거리면서 내심 근사한 후원으로 가꾸려고 무진 애쓰는 사람들을 두둔한다. 두 남자를 사랑한 아내는 끝내 한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살면서 임자(?) 없는 매력적인 여남(女男)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가?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오은수는 한 사람을 선택하려고 고심하는 듯싶다. 은수는 세 남자와의 줄다리기 끝에 가장 모범적인 사회생활을 꾸린다고 여겨지는 김영수와 결혼을 계획한다. 그녀는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듯한 세계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였다”라며 자신의 결정을 치장하지만, “내 입으로 결혼이라는 말을 뱉은 뒤, 그를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역설이 거기 있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은수가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거나 팔자를 고치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득 보부아르의 언설이 떠오른다. 우리 둘레의 은수가 계산할 건 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나누는 사랑에 충실하길 바란다. - [無棄]


<소설 속 한 구절>
세상의 숨겨진 이치들을 이미 다 꿰뚫어 버린 것 같지만 실상 곰곰이 따져보면 내가 몸으로 직접 겪어낸 것은 별로 없었다. 아는 것과 겪는 것 사이에는 분명 엄청난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中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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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듣는 <문학 속의 법> 과제로 냈던 글을 재편집해서 올립니다. 「피니스 씨의 허무한 시간 여행」은 6쪽 정도의 짧은 이야기로 인터넷 상에서 본문이 돌아다니는 것으로 압니다.


   서기 원년의 로마로 날아간 발명가 피니스 씨는 20세기의 의학 기술과 청결한 생활 습관을 소개했다. 이 덕분에 기원 1세기의 인류는 전염병에서 해방되어 유아 사망률이 줄고 평균 수명이 늘어 인구가 급증했다. 인류는 발달된 과학기술을 이용해 먹을거리는 그럭저럭 해결했으나 폭증하는 인구를 수용할 ‘공간’이 부족했다. 지구상의 사람의 총 질량이 지구 자체의 질량을 넘어서는 상황에 직면하자 인류는 특단의 계획을 세운다. 한 사나이를 기원 1년의 로마로 보내 피니스 씨가 타임 머신을 타고 나타날 때를 기다려 그를 사살한다. 프레더릭 폴의 단편소설 「피니스 씨의 허무한 시간 여행」의 줄거리다. 이 짧은 소설을 소재로 문학과 법학의 상관관계를 고찰해보자.


  최근 애그플레이션(Agflation)으로 말미암아 버려진 이론으로 여겨지던 맬서스의 인구론이 재조명되고 있다. 자원 부족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지속될 상황이라는 예측이 많다. 실제로 중국과 인도가 급성장으로 인해 자원 수요가 늘어나면서 자원 고갈을 부추기고 있다. 프레더릭 폴의 소설에서는 공간이 모자랐다. 식량 위기를 기술 혁신과 대체재 개발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오늘날의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모든 인구가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을 때 파생될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즉 소설은 경제 성장 혹은 후생의 증진이 반드시 행복한 삶, 질적으로 고양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족계획이라는 구호 아래 산아제한이 실시되었으나 근래에는 저출산이 사회 문제시되면서 출산 장려대책이 다각도로 제시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게 해준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구밀도를 나타내고 있음을 상기할 수도 있다. 소설은 입법자에게 출산 장려대책과 더불어 시행한 정책 수단을 개발하는데 영감을 준다. 또한 입법의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있어서도 보탬이 된다. 가령 보육시설 확충은 출산 장려도 꾀할 수 있지만 여성인력을 활용하게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낳기 때문에 좀 더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김경수 서강대 교수는 「법과 문학, 문학법리학」이라는 논문에서 법학과 문학은 멀리 떨어진 세상의 이야기가 아님을 논증하고 있다(『현대사회와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법학과 문학은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거나 해석하고 묘사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법학과 문학은 양자 모두 언어를 매개로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체계를 형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학문 모두 텍스트의 해석 및 재구성이 중시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또한 허구(fiction)를 통해 사회적 현실을 규정한다는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허구가 발현되는 양식은 차이가 있으나 오히려 이 점이 상보적 연관 관계를 북돋운다.


  문학은 인간의 갈등과 모순을 다루며 인간 존재의 문제를 탐구한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을 규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법이 포함된다. 아울러 비규범적인 소수자의 출현에 문학과 법학은 그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하려 한다는 태도가 비슷하다. 그렇다면 문학이 법학에 그리고 법학이 문학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이란 어떤 것인가? 문학이 법학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은 주로 법학도에게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 법과대학의 정형화된 커리큘럼은 경직된 사고의 위협이 적잖다.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는 소수 입장의 학설을 취하는 것을 자제해야 안전하다는 식의 접근이 대표적인 사례다. 판례에도 소수 입장이 있으나 대개는 다수의 판례를 익히기 때문에 획일화된 가치판단을 낳을 공산이 크다. 문학에 등장하는 비규범적이고 비정형적인 인물을 접하면서 다양한 사고를 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법학이 문학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은 주로 비법학도에게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 문학에 법의 요소가 녹아 들어가면 문학적 허구는 좀 더 개연성을 확보하게 되고, 법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눅이게 만든다. 법의 논리적 속성이 가미되면 좀 더 입체적으로 현실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법리학이란 법철학과 법이론에 대한 이론적 탐구를 일컫는다. 이러한 법리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문학이 이바지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문학법리학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저서에서 시인과 판사가 하나가 되는 세상이라야 공적 영역에서 정의가 세워진다고 역설했다. ‘공공의 상상력(public imagination)’을 주창하며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 없이는 법의 집행이 맹목일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공공의 상상력은 문학 작품을 미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의 변형을 모색하고 새로운 가치를 구상하는 등 적극적인 형성 작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학은 시대와의 불화를 겪으며 개인의 상상력을 공공의 상상력으로 탈바꿈한다. 문학이 품은 문제의식은 규범의 세계에 투영되어 개인의 연민을 사회적 연대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소설로 돌아가서 여기서 제기한 공공의 상상력을 발휘해 우리나라 경제참가율을 살펴보자. 선진국이 70%대인데 견주어 우리는 60% 수준이다. 이러한 부족분이 여성인력과 은퇴인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될 때 노인인력 활용을 위해서 정년연장을 비롯해 다양한 노동 형태를 고안해 늘어난 평균 수명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노후 안정의 개념을 바꿀 것이며 노인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을 촉진한다. 또한 여성이 일자리를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면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달라진다. 적어도 현모양처라는 규범의 강제성이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관점에서는 지역 불균형의 문제점을 인지하는 계기가 된다. 지난 노무현 정부가 벌였던 행정중심복합도시와 혁신도시 같은 균형발전 정책은 수도권 과밀화에 대한 해소를 위한 노력으로 소설의 상황과 통하는 면이 있다. 참여정부의 견해에 따르면 수도권의 교통혼잡, 대기오염, 환경처리 등의 비용은 생산력 악화를 낳고 있으며 반대로 지방은 인구의 유출로 저비용이라는 효율성을 활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이와 반대로 일각에서 제기된 수도권의 기능을 더 강화하자는 대수도권론이 있다. 소설이 보여준 공간의 문제는 대수도권론에 대한 비판적 논거를 마련해준다. 서울의 삶의 질 순위가 세계 하위권에 머무르는 실정에서 매력 있는 도시, 경쟁력 있는 도시가 되는 기준을 재설정하도록 이끈다.


  이처럼 소설은 규범이나 제도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시점의 처방에 급급한 미봉책을 넘어 장기적 안목에서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소설적 허구는 참신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존의 문제의식을 극적으로 포장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이 소설은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창의성과 과장성은 법과 규범이 바라보는 시각과 어긋나기도 한다. 이처럼 소설적 허구가 빚어내는 공공의 상상력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적 다수의 합의에 기초해 잠정적으로 약속한 제도적 허구다. 굳이 구분하자면 소설적 허구가 ‘있을 법한 세계’를 묘사한다면 제도적 허구는 ‘있어야 할 세계’ 혹은 ‘있었으면 좋은 세계’에 주안점을 둔다는 차이가 있겠다. 좀 더 나누자면 과학 소설은 ‘있을 수 있는 세계’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둔다고 할 수도 있다. 공공의 상상력이 새로운 사회적 규범으로 합의되기까지는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개는 시간이 걸린다. 소설적 허구와 제도적 허구 사이의 시차를 살뜰하게 채우는 사회 구성원간의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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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의 재판

2006. 10. 19. 01:30 |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리석은 젊은이여, 그대가 이 소송에서 승소하든 패소하든 그대는 내가 요구하는 것을 지급해야만 할 걸세. 만약 그대가 패소한다면 내가 승소하므로 판결에 따라 내게 나머지 수업료를 지급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대가 승소한다면 그대가 승소하므로 우리의 계약에 따라 내게 나머지 수업료를 지급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네.”


에우아틀로스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현명하신 선생님, 제가 이 소송에서 승소하든 패소하든 저는 선생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지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제가 승소한다면 제가 승소하므로 판결에 따라 제가 선생님께 지급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만약 제가 패소한다면 제가 승소한 적이 없으므로 우리의 계약에 따라 제가 선생님께 지급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재미난 이야기를 손수 번역해주신 사문난적님께 각별한 고마움을 표합니다.^-^

<출전> 스승과 제자---최후의 승자는?
http://www.cyberoro.com/board/board_view_pnt.asp?db=TB_CULTURE&num=3350
http://www.tygem.com/Column/Cboard/view.asp?seq=1699&pagec=1&find=프로타고라스&findword=title`content`&gubun=C002


프로타고라스의 제자 에우아틀로스는 법정에서 변론하여 승소하는 최초의 날에 절반의 수업료를 지불하기로 해놓고 차일피일 미뤘다. 프로타고라스는 제자가 한 번도 법정에서 변론을 하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을 보냄으로써 나머지 수업료를 지급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에우아틀로스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딜레마의 대표적 사례로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이 사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안을 찾았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명순구 교수님의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정구태님이 올려주신 답변인데 사견을 첨가해서 좀 더 알기 쉽게 정리해봤다. 물론 이것은 우리 민사소송법에 의거한 해답일 뿐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민사소송법상 법관은 사실심판변론종결시(事實審辯論終結時)까지 현출(顯出)된 자료만을 기초로 판결을 내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실심판변론종결시까지 에우아틀로스가 아직 승소한 적이 없으므로 프로타고라스의 수업료채권(授業料債權)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고인 프로타고라스는 수업료채권의 부존재가 되어 청구가 기각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에우아틀로스는 승소하게 되므로 판결확인시에 프로타고라스의 에우아틀로스에 대한 수업료채권도 발생하게 된다. 프로타고라스는 이러한 사실변경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소를 제기하면 승소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확정판결의 기판력(旣判力)이 문제가 된다. 기판력이란 확정판결의 내용이 갖는 구속력을 말한다. 일단 재판이 확정된 때에는 동일한 소송물에 대하여는 다시 소를 제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변론종결 후에 사정변경이 생긴 경우 기판력에 의하여 확정된 법률효과를 다시 다툴 수 있다. 가령 채무이행소송에서 기한이 도래되지 않아 원고의 청구가 기각되었다가, 변론종결 후에 기한이 도래한 경우에 원고는 새로운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복잡하게 할 것도 없이 에우아틀로스가 고의적으로 승소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면 프로타고로스의 청구는 이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에우아틀로스가 몇 번의 패소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변론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신의성실원칙에 반한다고 볼 상당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일부러 법서의 문체를 흉내내봤다. 행정법 책을 훑어보는 중인데 그 방대한 양도 양이거니와 헌법, 민법, 형법 같은 기초 법학의 소양도 없이 덜컥 행정법을 배우려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언젠가 김훈 선생님이 법학을 공부하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은 게 생각나서 좀 버티고는 있다만서도.^^; 조악한 문장에 주눅들지 말고 그래도 법학 특유의 논리적 구조를 배우려고 노력해봐야겠다. 이 재판의 결과만큼 궁금한 게 프로타고라스의 속내다. 이처럼 속 썩이는 제자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에우아틀로스 같이 얄미운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을 경계해야겠다. 유능한 확신범만큼 무서운 게 없구나.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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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행정고시 대비용 행정학 무료 동영상 강의를 재미삼아 듣다가 고위 공무원이 될 여러분들은 공무원 노조에 대해 부정적인 답안을 쓰는 것이 좋다는 등의 말을 들었다. 관리자급인 고위 공무원과 현행 공무원 노조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수험생 신분에서부터 공무원 노조를 부러 부정하는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게 씁쓸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7조 2항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보장한’ 대표적인 법률인 국가공무원법 제65조는 다음과 같다. 사실상 정치적 행위라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전면 금지되고 있는 셈이다.


제65조 (정치운동의 금지) ①공무원은 정당 기타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없다.
②공무원은 선거에 있어서 특정정당 또는 특정인의 지지나 반대를 하기 위하여 다음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1. 투표를 하거나 하지 아니하도록 권유운동을 하는 것
2. 서명운동을 기도·주재하거나 권유하는 것
3. 문서 또는 도서를 공공시설 등에 게시하거나 게시하게 하는 것
4. 기부금을 모집 또는 모집하게 하거나 공공자금을 이용 또는 이용하게 하는 것
5. 타인으로 하여금 정당 기타 정치단체에 가입하게 하거나 또는 가입하지 아니 하도록 권유운동을 하는 것
③공무원은 다른 공무원에게 제1항과 제2항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거나 또는 정치적행위의 보상 또는 보복으로서 이익 또는 불이익을 약속하여서는 아니된다.
④제3항외의 정치적 행위의 금지에 관한 한계는 국회규칙·대법원규칙·헌법재판소규칙·중앙선거관리위원회규칙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개정 1963.12.16, 1964.5.26, 1981.4.20, 1994.12.22>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탄핵 정국 관련 시국 성명은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의문사위는 대통령 탄핵에 대한 시국성명서를 발표하여 야3당의 ‘국민주권 찬탈행위’를 규탄했다. 더 나아가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지지’를 결의함으로써 공무원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논쟁을 심화시켰다. 이 와중에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2004년 3월 25일 중학교 교사 김모씨가 지난 2001년 10월 “초중고 교사의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을 금지한 정당법과 선거법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이 사건 법률조항이 청구인들과 같은 초ㆍ중등학교 교원의 정당가입 및 선거운동의 자유를 금지함으로써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등을 규정한 헌법 제7조 제1항ㆍ제2항,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규정한 헌법 제31조 제4항의 규정취지”와 “국민의 교육기본권을 더욱 보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익을 우선시해야 할 것이라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초ㆍ중등학교 교육공무원의 정당가입 및 선거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헌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합헌 결정 이유를 설명했다.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헌재의 본안 판단 가운데 눈 여겨 볼 대목은 다음과 같다.


다.공무원 및 교육공무원의 정치활동 제한의 헌법적 정당성
(1)헌법 제7조 제1항은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공무원은 국민전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입장에 있으며 일부의 국민이나 특정 정파 혹은 정당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헌법 제7조 제2항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의 요청은 정권교체로 인한 행정의 일관성과 계속성이 상실되지 않도록 하고, 공무원의 정치적 신조에 따라서 행정이 좌우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공무집행에서의 혼란의 초래를 예방하고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헌법재판소는 1995. 5. 25. 선고한 91헌마67 결정에서 공무원에 대한 정치적 중립성의 필요성에 관하여,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므로 중립적 위치에서 공익을 추구하고(국민전체의 봉사자설), 행정에 대한 정치의 개입을 방지함으로써 행정의 전문성과 민주성을 제고하고 정책적 계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며(정치와 행정의 분리설), 정권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의 신분적 안정을 기하고 엽관제로 인한 부패ㆍ비능률 등의 폐해를 방지하며(공무원의 이익보호설),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르는 사회경제적 대립의 중재자ㆍ조정자로서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담당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공적 중재자설)”이라고 하면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요청은 결국 위 각 근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공무원의 직무의 성질상 그 직무집행의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판례집 7-1, 722, 759).
헌재 2004.03.25. 2001헌마710, 판례집 16-1,422,436-436


헌재는 “초ㆍ중등학교의 교원들에게 정당가입과 선거운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입법론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현행 법률을 과잉입법금지원칙이나 평등원칙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법학 공부가 일천한 내가 볼 때에도 해석론적으로 위헌이라고 판단할 여지도 적잖다. 논란의 핵심은 헌법 제7조 2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헌재는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규정을 의무로 봤다. 그런데 의무를 보장한다는 건 대다수 한국어 사용자들의 상식에 어긋난다. 통상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며, 의무는 부과하고 부담하는 것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조악한 한국어 구사에 수치심이 없는 법률가들이 많으니 헌법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각종 학설과 판례는 그렇다고 쳐도 적어도 법조문만이라도 읽기 이해하기 쉬워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일반 국민들이 법조문을 읽고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 아닌가.^^; 물론 이런 험담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다른 헌법조문들을 보면 헷갈리는 헌법 제7조 2항의 해석이 좀 수월해질 거 같다. 가령 헌법 제6조 2항의 “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나 헌법 제8조 1항 “정당의 설립은 자유이며, 복수정당제는 보장된다”는 조문을 보면 아무리 봐도 여기서 의무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또한 헌법 제38조인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나 제39조 1항인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처럼 의무의 경우에는 “진다”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헌법 제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헌법 제7조 2항을 권리로 해석할 경우 더더욱 헌법정신에 위배된다. 해석론적으로 헌법 제7조 2항은 공무원이 특정한 계층이나 정파의 눈치를 봐서 이익집단의 사익에 복무하지 않기 위한 보호막을 마련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공무원들도 국민인데 너무 과도하게 정치적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위 공무원이나 하위 공무원이나 정치적 기본권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의 확대는 하위 공무원부터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백 번 양보해서 정치적 중립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 우선순위는 정책결정권을 가진 고위 공무원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선거 낙선자를 고위 공직에 임명하는 보은 인사가 정치적 중립성이 모자랄 여지는 있다. 하지만 일선 구청에 근무하는 운전수나 전기기사에게까지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건 가스검침원들에게 토익 성적표를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지나치다.


“모든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일괄적으로 전면 금지하는 것은 헌법상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임지봉 건국대 교수님과 “공무원 개인의 직무수행과 관련이 없는 한 정당 가입, 지지 표명 등 정치활동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는 것이 옳다”는 장영수 고려대 교수님의 말씀에 거개 동감한다. 아울러 국가인권위원회가 2006년 1월 확정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tional Action Plans·NAP) 권고안에는 ‘공무원은 정치단체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없다’는 국가공무원법 제65조 1항과 ‘공무원은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9조 등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과도하게 금지하는 법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혹자들은 이 권고안대로 관련 법 개정이 되면 수십만에 달하는 공무원과 교사들이 정치활동을 해서 나라가 혼란스러울 것을 염려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인공기를 흔들 것이라는 논리와 대동소이하다. 호주제 폐지 논쟁이 한창일 때 금수의 나라가 될 것이라며 반발하던 일부 유림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어떤 법률의 개폐문제에 있어서 반대하는 이들은 그 법률로 인해 지금 현재 발생하는 문제보다 그 법률이 개폐되었을 때 발생할 문제를 강조해왔다. 물론 논리 전개상 자연스러운 입장이지만 그 분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예측가능성을 너무 과도하게 신뢰한다. 그래서 측정가능한, 관찰가능한 현실의 문제는 외면하는 우를 범한다. 나도 예측을 좀 해보자면 공무원과 교사들이 국민의 법 감정을 넘어 과도한 행동을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저출산 및 여성의 고용촉진을 위해 시행 중인 육아휴직제도가 남성들에게 그림의 떡으로 운용되고 있는 현실이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물론 업무상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무원의 직무 특성상 정치 행위와 업무 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은 정치행위 금지를 내포하는 개념이라고 해석한다. 쉽게 공박하기 힘든 일리 있는 견해다. 교사의 정치 참여가 학생들의 학습권이라는 또 다른 기본권을 침해하고 제한할 수 있다는 헌재의 고뇌도 충분히 동감한다. 하지만 공무원과 교사의 권리 확대가 일반 국민들의 권리를 심대하게 침해할 것 같지는 않다. 혹여 수인한도(受忍限度)를 넘어선 경우가 있다면 관련 법률을 통해 처벌하면 그만이다. 아마도 추상적 조직으로서의 정부나 각 부처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제법 실현해낼지 모른다. 하지만 일개인은 불편부당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의사결정을 산술적 평균으로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저마다의 생각과 견해는 늘 갈리게 마련이다. 어차피 공무원과 교사는 지위의 특성상 온전한 정치적 자유를 누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제 자신을 감추고 숨겨야만 간신히 법을 지키는 상황은 고쳐야 한다. 범법자를 양산하는 법은 그 목표의 적절성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좋은 법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에 따르면 프랑스와 독일은 원칙적으로 공무원의 정치활동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당원가입은 물론 사직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마도 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은 연방공무원에게는 공개적인 후보지지 의사표시, 정치자금 기부 참여 등을 허용하고 있으며, 주와 지방공무원에게는 정치현안에 대한 의견개시, 정당활동 참여, 특정정당후보를 위한 선거운동도 가능하다. 영국은 하위직에게는 정치활동을 완전히 보장하고 있으며, 중간직은 국회의원 출마는 금지하고 다른 활동은 기관장의 허가를 받도록 돼 있다. 고위직은 정당가입은 인정하나 그 외 활동은 금지하고 있다. 다만 일본이 우리나라처럼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자민당 일당독재에 가까운 일본 정치 수준을 우리와 비교하는 게 좀 민망하다. 일본 우익들의 모델을 차용할 까닭도 없다. 하기야 우리 법률의 상당 부분이 일본 것을 베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제부터 우리 실정에 맞게 우리 국민의 권익을 더 신장하도록 고쳐나가면 될 것이다.


어느 친구는 삼성병원 면접 때 노조 가입 여부에 대한 질문에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어서 다른 병원에 취직했다고 한다. 이태 전 나는 노사관계론 강의 시험 시간에 노동자라고 쓰지 않고 줄곧 근로자라고 써 내려갔다. 여기까지는 법률용어에 충실한 것이라 그리 문제될 것은 없지만 답안 내용도 논란되는 사안마다 노조에 비판적인 내용으로 일관했다. 평소 생각이기도 했지만 사실 조금이라도 점수를 더 받으려는 속셈도 섞여 있었다. 적어도 참된 지식을 흠모하고 기품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녀석이라면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사무실 폐쇄 행정대집행이 100%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무원과 교사가 보수를 차등 있게 지급 받을 자유(?)를 강조하기 이전에 제가 믿는 바에 꿈을 투자할 자유부터 보장하는 건 어떨까. 의무를 지울 때는 재빠르면서 권리를 부여할 때는 머뭇거리는 것만큼 법치국가를 초라하게 만드는 건 없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제11조가 조문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 이 불평등한 인생사에 법마저 사람을 차별한다면.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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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 만세!

2005. 3. 7. 16:20 |
호주제가 폐지되었다는 낭보가 들려온 순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회상에 잠겼다. 당시 교지편집부원이었던 나는 편집부 기획의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고심 끝에 양성평등을 주제로 해봤으면 좋겠다고 주장했고, 거기서 조금 확장된 주제인 인간존엄성 문제로 선정되었다. 한해 동안 인간 존엄성에 위배되는 여러 분야의 문제들-즉 남녀 차별, 빈부 격차, 인간 소외, 복제 인간 등의 사회적 문제들을 진단하고 고민하게 되었는데 나는 처음 생각대로 양성평등 문제를 맡았다.


양성평등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고민하다가 설문조사를 통한 결과 분석을 하기로 했다. 여러 문항 중에서 담당 선생님의 제안으로 호주제에 대한 생각도 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결과는 폐지 여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여학생들이 많은 서울외고의 특성이 다소 반영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호주제 폐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호주제 폐지해야 한다는 보기에 “반드시!”라고 적혀 있거나 별이 쳐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 때 본 굵은 글씨의 “반드시!”와 빨간 별모양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05년 3월 2일 국회에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오랜 세월 양성평등을 저해하며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를 존속시켰던 호주제가 폐지된 것을 가슴 깊이 환영한다. 또한 모든 국민이 하나씩 독립된 신분등록부를 갖게 됨으로써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권리를 인정받게 된 것도 기쁜 일이다.


한 80대 여성이 호적등본 떼러 갔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평생 교사로 일했던 그는 일찍 남편을 잃고 장남의 호적에 올랐으나 몇 해 전 아들도 세상을 떠난 처지였다. 그는 자신이 차남의 가(家)에 입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남의 가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혹시 하며 삼남의 호적등본을 떼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5살짜리 손자의 호적등본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했다.

그 손자는 장남의 혼외자로 그는 자신의 연금으로 양육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 어린애가 자기 집안의 호주라니 어이가 없었다. “오래 산 죄로 사종지도(四從之道)를 걷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혼인 전엔 아버지, 혼인 후엔 남편, 남편 사후엔 아들을 따르라는 삼종지도로도 부족해서 이제 다섯 살 짜리 손자를 호주로 모시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평생 돈을 벌어 세 아들을 키우며 당당한 가장노릇을 해왔는데 법이 끝까지 여자를 사람대접 안 한다고 그는 개탄했다.

- 장명수, [할머니의 사종지도(四從之道)], 한국일보 2003년 6월 1일


그간 민법의 호주승계 순위는 남편→아들→손자→딸→처 순으로 남성 중심이었다. 위의 글처럼 삼종지도도 모자라 사종지도를 만드는 엽기적인 규정이었던 셈이다. 대학교 2학년 때 교양으로 들었던 법학통론 시험에서 호주제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 앞에서 시험 답안으로는 너무 거칠게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고 써놓고 더 이상 쓸 말이 없어서 할머니를 제치고 손자가 호주가 되는 현실을 통박한 기억이 난다.


요근래 여풍이 분다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이야기하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자가 가는 곳에는 이런저런 차별이 아직도 여전하다. 여성 인권 무시의 대표적 사례였던 호주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천만다행이다. 혹자들은 호주제가 가족을 지키는 제도라며 옹호하지만 도대체 그렇게 지키고 싶다는 가족 구성원들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세상의 절반이 희생되어 이룩하는 그 어떤 것도 온전할 수 없다. 제 아내의 고통은 외면하면서 후세의 안녕을 걱정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호주제가 오로지 하나의 형식의 가족만을 인정함으로써 다양하게 존재하는 우리네 가족들을 수용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겸허하게 살펴봐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만나서 사는 세상에 오순도순 백년해로하며 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간 이혼한 여성이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할 때 과거의 멍에 때문에 고통받고 그 자녀까지 낙인이 찍히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개개인이 행복해야 가족이 굳건한 것이지 한 개인이나 특정 성이 다른 개인들과 상대 성을 억압하는 구조라면 늘 위태롭고 아슬아슬할 것이다.


호주제 폐지에서 여성 인권의 존중만을 생각하지 말고 남성 인권의 동반 향상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 호주의 권리와 의무가 대폭 축소되어 현행 호주제는 사실상 관념적인 제도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가장의 상징적 권위는 은연중에 재생산되고 있었다. 호주제 폐지와 더불어 가장의 어깨에 모든 부담을 덜어주는 시대가 끝났다. 이제 여성이 확대된 권리만큼 늘어날 책임과 의무를 다 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권리의 달콤함만 느끼고 책임은 모른 척 하는 것처럼 꼴 보기 싫은 것도 없다.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의 흐름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깨우쳐야 한다. 남성중심의 세상에 적당히 안주하려는 사고를 버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개척하는 자세를 가져야할 것이다. 남자라는 이유로 특권을 가지던 것이 사라지고, 여자라는 핑계로 책임 앞에 모르쇠가 되지 않을 때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서 살림살이를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편집부 설문조사의 마지막 문항은 남녀차별의 사례를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선생님이 회장 찾을 때 누구건(학생도) 남자 회장을 찾는다”는 문구였다. 여남 회장 1인씩 두었던 내 고등학교에서 여자 회장은 양성평등에 따라 할당된 구색을 맞추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냐는 의문 앞에 나는 양성평등주의자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기사를 작성하며 “한결같은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모든 남자들이 한결같이 사내 대장부가 되기는 불가능하지 않겠는가?”라고 썼던 당시의 뜨거운 마음은 앞으로도 간직할 것이다. 잉글리시만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녀차별, 양성평등 모두가 우리 마음 속에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 [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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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법을 어기기 싫다

2005. 2. 27. 02:00 |
문화관광부 홈페이지에 있는 ‘네티즌이 알아야 할 저작권 상식’의 문서를 읽어보았다. 50개 항목이 문답식으로 정리되어 있었는데 다 읽고 나니 졸지에 범법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익구닷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칼럼을 수집하는 펀글 전용 게시판이다. 대부분 출처가 신문 칼럼이니 신문사나 칼럼니스트, 기자의 허락을 얻어야 하는 셈이다. 저작권 상식 문서 본문에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개인 홈페이지에 출처를 표시하고 이용하더라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코멘트에 올린 첨부자료 참조).


이미 익구닷컴에는 수백 편의 남의 글이 있다. 좋아하는 타인의 글을 멋대로 퍼온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냥 문서 파일로 나 혼자 보관만 해도 될 것을 이렇게 홈페이지에 게재한 것은 좋은 글은 나눌수록 더 가치가 커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저작권법은 친고죄로 되어 있어 저작권자가 고소하여야 비로소 책임을 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범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고소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아슬아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글을 기왕이면 가감 없이 게재하여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좋은 글을 나눠준 많은 네티즌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었기에.


여러 칼럼니스트가 빈곤층에 위한 정책을 논하는 글, 성차별 문제를 고찰하는 글, 병무행정 개혁을 촉구하는 글, 사회 고위층의 불법적 행태를 고발하는 글 등등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더라도 이를 퍼가는 사람은 저작권법상 범법자가 될 소지가 크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글들이 정작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널리 읽는 것이 어렵게 되는 어이없는 상황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글쓴이는 좀 더 많은 이들이 이 글을 읽고 공감해주기를 바라겠지만 그의 글이 해당 신문사 홈페이지에만 갇혀있게 되는 셈이다. 네티즌들이 맨날 그 사이트 찾아가 확인하고, 퍼가기 위해 일일이 허락 받을 만큼 한가한 사람들은 아니다.


무고한 네티즌들이 줄줄이 범법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저작권법의 억지 적용에 동감하지 않는 많은 논객들은 자신의 글을 영리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자유로이 퍼가서 쓸 수 있다고 공지해주기 바란다. 특히나 좋은 글을 많이 써주시는 분들일수록 더욱더 말이다. 이 글 퍼가도 되겠습니까라는 문의를 해야하는 독자나 괜찮다고 답변하는 글쓴이나 피차간에 피곤할 뿐이다. 이제 글 쓰는 사람은 읽는 이가 자신의 글을 합법적으로 나눠보고 토론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야 하는 우스운 상황이다.


여하간 저작권 보호라는 미명 하에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나 커뮤니케이션 권리 등이 침해되는 것은 불만스럽다. 인터넷 문화의 핵심인 문화적 교류의 편리함을 이런 식으로 규제한다면 국가보안법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통제 메커니즘이 될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끝끝내 존속시키고 있는 국회가 이번에는 정보보안법(?)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네티즌들이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억지스런 족쇄를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도 아니다.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통해 많이 배웠고 지적으로 성숙해졌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마시길.^^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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