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도로서의 익구

익구 2003. 10. 3. 06:45 |
어느덧 대학인으로서 찌들만큼 찌들었다고 할만한 4학기 째에 접어들었는데도 경영학도로서의 익구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친구들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낀다. “경영학이 잘 맞냐?”라고 의례적으로 묻는 질문에서부터 “경영학도로 그럭저럭 살만하냐?”고 조금 날카롭게 찌르는 질문에서 “경영학 별로 적성에 안 맞아 보이는데?”라며 결정적 비수를 날리는 물음까지 내 귀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고3 때 과연 어떤 학과를 지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의 도가니에 빠졌다. 경영학도였던 과외형께서 경영학이 그리 어렵지만도 않고 재미난 학문이라고 말해 주셨고 그 말에 자신감을 얻고 고민의 도가니를 냉큼 탈출해버렸다. 만약 그 때 형이 “뭐 별로인 것 같아, 그저 그래”라는 요지의 말씀을 해주셨다면 아마도 고민의 도가니에 푸욱 적셔져 있다가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모를 일이다. 이래서 역시 역사에다 가정을 하면 골치가 아파지나 보다.^^;


아무래도 사람을 많이 뽑는 경영학과다 보니 주위에 경영학도인 친구들이 제법 있지만 어쩌다가 전공 관련 이야기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제 살 깎아먹기를 하기 일쑤다. “경영학은 아무래도 학문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아.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잖아”, “4년 간 배우기보다 한 2년 정도만 배우면 되지 않을까?”라는 말들도 들었던 것 같다. 하여간 한때나마 경영학 깎아 내리기의 선봉에서 횃불을 들고 설치던 때가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그것이 한참이나 모자란 잘못이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렇게 자괴감에 빠져있던 나를 구원해준 것은 놀랍게도 정몽준씨(!)였다. 대선 전날의 그의 패악질을 두고 장사치, 장사꾼이라는 비난을 한참이나 듣고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고나 할까. 결국 장사 잘 하는 학문을 배우는 나로서는 모종의 방어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영학을 부당하게 비하하는 눈초리에도 이리저리 방어를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런 것을 심리학 용어로 ‘합리화’ ‘반동형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음을 부인할 생각도 없다.


시장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뼈와 살을 깎아 가는 노력으로 혁신하는 기업만이 살아남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서비스 정신으로 살아가는 기업인들이 별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경제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경영에 대한 이해와 기업인에 대한 합리적 비판이 많이 부족한 현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저런 고민의 끝은 ‘상도덕 바로 세우기’로 귀착된다.


상도덕 바로 세우기는 실상 별 것 아닌 생각이다. 모든 종류의 시장에서 룰을 준수하며 공정히 경쟁하기, 자기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 평가와 그에 따른 적절한 책임지기, 비용의 균등한 분담과 채무관계의 정확한 기록과 확실한 변제 등이 그 내용이다. 이것을 비단 경제의 영역에 국한시키지 말고 삶의 원리로 확대시켜보자는 것이다. 가령 잘못한 만큼만 욕먹고, 술자리에서 술값 떼먹지 않는 것이 상도덕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상도덕’에서 ‘商’字가 떨어져가야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레토릭(rhetoric) 차원에서 어여삐 넘어가 주고 말일이다.^^


여하간 왜 경영학도가 되었냐는 질문처럼 난감한 것도 없다. 이래저래 생각해본 결과 나를 경영학도로 이끈 두 가지는 ‘빵’에 마냥 초연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미지의 분야에 대한 정복욕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고3 때 사회학과도 지원했었는데, 경영학도로 제법 시달린 지금에서는 사회학도로서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을 비교적 다행이라고 여기는 비겁한 망각을 꾀하고 있기는 하지만... 얼떨결에 경영학도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솔직히 아주 좋아서 경영학도가 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굴러온 것이지만 기왕의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이제 짝사랑(?)을 하는 중이다. 본디 늦게 부는 바람이 무서운 법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오죽하면 경영학 빼고는 다 잘한다는 농담까지 듣는 나이지만... (이건 잘 뒤집어보면 은근한 칭찬이라며 아전인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일단 전공을 중간치는 한 다음에 외도(?)를 한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 주위 경영학도 중에는 경영 이외의 일체의 다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외곬들이 꽤 많아서 이런저런 한 눈 팔기가 두렵기도 하지만... 어느 교수님께서 경영학만 파고들어서는 편협한 테크니션밖에 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새기며 교양도 열심히 쌓고 전공에도 충실한 학업생활을 하려고 한다.


경영학 과목 중에서 숫자 들어가는 거 말고 말발로 승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그럼 그렇지...^^;) 그렇다보니 본의 아니게 회계학 과목들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비슷한 성격의 재무관리 분야도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있음^^:) 회계원리C+, 중급회계C+을 맞고 말았다. 2학년 2학기에 듣는 관리회계마저 이 대열에 동참하면 회계학 트리플 재수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안을지도 모른다. 회계는 경영의 언어라고도 하는데, 이 심각한 언어장애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이번에도 불살라본다.


2학년 들어오면서 전공 수업은 어떻게 듣나 고민도 했지만 막상 2학년 1학기를 그럭저럭 지내보면서 얼치기 경영학도로 무사히 대학 졸업을 할 수 있다는 모종의 자신감이 들면서 고민 한 점 없는 즐거운 상태에 빠져들었다.^^ 여하간 이것저것 열심히 배우고, 나아가 배운 것 좋은 일에 써먹을 줄도 아는 경영학도가 되고 싶다는 마음만은 건실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결심과는 관계없이 주위 사람들이 다들 암묵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앞으로 도저히 경영과 관계된 일을 할 것 같지 않다는 굳건한 의심의 눈초리다.^^;


고등학교 때 썼던 자기소개서에서 “사회의 공동선을 이루려는 의식을 가진 경영학도로서의 포부”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포복절도해버렸다. 세상에나,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내 머릿속은 비용최소화와 효용극대화가 가득 차 있는데 말이다.^^; 여전히 딴 짓을 더 즐기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나이지만, 자꾸만 무르익어 가는 전공에 대한 애정이 영 싫지만은 않다. - [憂弱]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