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떠나기 좋은 계절인 모양이다. 쓸쓸함을 만끽하기도 좋다. 누군가 나를 잊었다고 한탄하기 전에 내가 잊은 누군가를 먼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우연히 접한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이라는 김탁환의 소설 제목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호승의 시구대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10월 13일 저녁에 열린 경영대 학생대표자회의(이하 “경학대회”)를 참관하면서 기쁘면서도 섭섭했다. 경영대 학생회칙이 대폭 개정된다는 소리에 적잖이 호기심을 가지며 예의주시하다가 결국 회의장까지 찾아갔다. 현 경영대 학생회칙이 비록 보잘 것 없고, 허점투성이지만 이 마저도 많은 이들의 노고 끝에 완성되었다.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정할 수 있도록 중지를 모으되, 회칙 한 조항 한 조항이 고심의 산물이었음을 존중해주었으면 하는 욕심도 솔직히 있었다. 수년간 멸실되어 있던 경영대 학생회칙을 이 사람 저 사람 번거롭게 하며 어렵사리 제정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학생회칙 조항들이 여기저기 뜯겨 나가는데 마냥 박수칠 만큼 모질지도 못하다.


그러나 이런 나의 감상과는 달리 경영대 학생회칙은 이미 나를 비롯한 회칙제정위원들의 손을 떠났다. 앞으로 어떤 예기치 못한 변화와 의도치 않은 귀결을 맞을지도 모른다. 후임자들 나름의 창조를 통해 다시 태어날 테니 말이다. 내심 “나만 하겠어?” 싶었던 후배들은 서로 다른 고민을 나누며 척척 잘 해나가서 기뻤지만, 내 빈자리를 결국 누군가 부지런히 채워나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니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후임자들이 잘하는 모습에 격려하고 축복하겠지만 콧잔등이 시린 애잔함마저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배들을 믿고 그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경학대회 대의원 정족수를 예년에 비해 대폭 줄인 관계로 고작 6명이서 경영대 학생회칙을 고치는 게 아무리 탐탁지 않고, 못마땅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결국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참지 못해 몇 마디 내뱉었다. 결국 회칙 개정 논의는 다음으로 미뤄졌다. 원하는 바를 이뤘지만 가슴 한 구석은 텅 빈 듯 했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회의장을 나서며 안도감보다는 자괴감이 압도했다. 태클 거는 대신 그저 인고(忍苦)할 수는 없었을까. 질시와 불신을 억누르고 내 자신을 다시금 다잡는 것은 어땠을까.


작년 이맘때 학생회장 임기 종료를 앞두고 걷잡을 수 없는 레임덕(?)에 시달렸다.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궁궐 답사가 인연이 되어 요즘은 문화유산 전반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기도 하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주문처럼 외웠지만 가을밤을 제법 뒤척였다. 늘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잊혀진다는 것이 너무 두렵고 아쉬워 어찌나 몸서리 쳤던가.


그 후 1년, 많은 것을 비우고 제법 가벼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한 움큼씩 쥐고 있던 것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버려야겠다. 그리고 조금 더 물러나야겠다. 지워짐으로써 자유롭고, 잊혀짐으로써 풍성해지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내던지고, 베어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세월의 무게는 영원할 것만 같은 것도 녹슬게 만들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도 낯설게 만든다. 가을바람에 나부끼며 끝내는 으스러지는 낙엽이 된다고 서글퍼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도 아름답지만, 어쩔 수 없이 회한을 짙게 남기고 떠밀려 가는 이의 퇴장도 그리 추잡한 것만은 아니다. 설령 미련이 남는다고 머뭇거리고 있으면 좀 어떤가. 어차피 다들 가을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이 될 터이니 말이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제법 스산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다가 문득 凡事留人情 後來好相見(범사유인정 후래호상견)을 떠올렸다. 모든 일에 인정을 남겨 두면, 다음에 좋은 낯으로 대하게 된다는 말이 참 와 닿는다. 언제 어떻게 떠나고, 잊혀지고, 지워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남을 서운하게 했던 일들이 마음에 걸린다. 함부로 내뱉었던 말들이 민망하다.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삶을 갈구하는 나로서는 본의 아니게 나로 인해 상심했을 많은 이들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남 눈의 티끌을 보며 뿌듯해 하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하나하나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 자신을 다스리는 데 더 정성을 쏟아야겠다. 가을에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시달리지 말자. 대신 지금 가고 있는 길에 감사하고, 함께 가는 이들에게 정다운 인사도 건네 볼 일이다. 떠남이 달콤하려면 머무는 시간들이 살갑고 진득해야한다. - [憂弱]

함께 영원히 할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함께 있을 수 있음을 기뻐하고

- 한용운, [인연설] 中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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