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늦잠에서 간신히 깨자마자 강아지 산책을 나섰다. 간밤에 내린 비로 낙엽길이 펼쳐져 있었다. 강아지 목줄에 걸린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와 낙엽들을 헤집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낙엽길을 거닐다 보니 마음이 여려진다. 여하간 역시 가을은 시름과 상념에 잠기기 좋은 계절이다. 이 가을 상념을 착한 이야기와 좋은 생각들을 나누는데 쓰기보다는 남 험담하고, 내 자신의 경솔함을 보는 데 치중하다보니 민망할 따름이다. 문득 [논어]의 樂而不淫 哀而不傷(낙이불음 애이불상, 즐기되 지나치게 빠지지 말고, 슬퍼하되 자신을 상하게 하지 말라)이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어제 있었던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전에서 오매불망 응원하던 프로토스 유저가 우승을 차지했다. 오영종 선수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또한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던 테란의 황제 임요환 선수도 무척 멋졌다. 5판 3선승제에서 5경기까지 이어지는 대혈전을 살 떨리는 기분으로 지켜봤다. 경기 중계를 보면서 짬짬이 읽으려고 책을 옆에 뒀으나 경기가 끝날 때까지 단 한번도 펴보지 못할 정도로 안절부절못했다. 문득 무언가를 편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했다. 내 편, 내가 응원하는 것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 성취의 희열을 맛보기 전에 애간장이 새카맣게 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프로토스 종족이 엄혹한 시절 속에 맞이하는 환희는 정말 가슴 뿌듯했지만 낙이불음(樂而不淫)을 떠올렸다.


요근래 대학교에서 일이 좀 있었다. 사익추구를 공익으로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꼴이 영 마뜩잖아서 시비도 좀 걸었다.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고, 도덕군자와 소인배간의 건곤일척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사람들 간의 티격태격임을 깨달았다. 새삼 권력의 유혹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에 몸서리 쳤고,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는 오버가 얼마나 구역질나는지를 절감했다. 남 흉보느라 내 자신을 다잡는 것을 소홀히 했고, 험담하는 재미에 내 옹졸함과 부박함이 커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겪을수록 사람에 대한 실망을 많이 한 것 같다. 이 슬픔과 원망에 너무 상심하지 말도록 하자. 애이불상(哀而不傷)을 좀 더 확장해서 적용하면 좋겠다. 내 자신을 상하게 할 만큼 애상에 잠기지 않는 것과 더불어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더라도 깊은 생채기는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행복할 때 절제하지 못하면 뒤따르는 고통이 더 따가운 법이다. 남을 향해 회초리를 들 때 그 매질은 고스란히 내 가슴을 내리친다. 조금 빈 듯이, 약간은 주저하듯이, 덜 채운 모습으로 세파를 헤쳐나가면 어떨까. 기뻐할 때 한 발짝 물러설 수 있고, 가슴이 미어질 때 의연하게 추스를 수 있으리라. 즐거움에 겨워 사시는 분들, 자신이나 남에 대한 혐오 혹은 안쓰러움에 시달리시는 분들께 樂而不淫 哀而不傷을 권한다. - [憂弱]


니체는 말하기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深淵)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이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황금을 얻고자 싸운 사람은 황금에 먹히지 않도록, 권력에 집착한 사람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범인 잡는 데 종사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범인 닮아서 사악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명심할 것은 공산당과 싸운다면서 공산당의 수법을 닮아가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할 일이다.

- 김대중, 2000, 『김대중 옥중서신』, 한울, 348쪽.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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