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들을 만나러 노원역을 향하는 길이었다. 집에서 다섯 정거장인 짧은 거리였지만 챙겨온 책을 꺼내 들었다. 한국 명수필 모음집이다. 맛깔스런 문장들을 슬쩍 내 것으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유혹이 아찔했다.^^;

그러던 중에 상인 한 분이 1000원짜리 장갑을 팔기 시작했다. 전철을 타고 다니며 똑같은 장갑을 팔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보기는 했으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했다. 아마도 내 손에 쥐어진 책과의 부조화 때문인 것 같다. 책 뒤표지를 넘겨보니 12000원이라 써있다.

1000원짜리 장갑과 12000원짜리 책, 저 상인 분은 이 전동차 몇 량을 헤매어야 내 손에 들린 책 한 권을 장만할 수 있을까. 과연 이 땅에 자기가 읽고 싶은 책 맘놓고 사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내가 읽는 책값을 하고 있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번다하고 부잡스런 내 생활이 부끄러워졌다. 내 삶이 너무 평온하다 보니 지적 허영심만 들어 입만 놀릴 줄 아는 건 아닌지 참괴하다. 늘 모자라다고 투정부렸지만 실상 제 깜냥에 비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공짜가 없는 세상이라고 외치고 다니면서도 거저 얻은 것은 적당히 합리화했다.

세상에 넘쳐나는 눈물의 상당량이 눈물을 흘리는 당사자를 위한 것이고, 세상의 추함 가운데 하나가 자기연민이라고 한다(이 표현은 고종석 선생님의 『인숙만필』발문에서 훔쳐왔음을 밝힌다). 가끔은 남을 위해 눈물 흘리고 남을 위해 연민을 보듬고 싶다. 나는 내가 자주 연민을 품길 바란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고 예찬했지만 이 말은 절반만 맞는 게 아닐까. 성찰하고 긴장하지 않는 젊음, 치열하되 재미나지 않은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다울 수 없으리라. 우리는 아주 가끔 육체는 늙어도 정신은 청춘인 사람들을 만난다. 젊음을 아껴 써야 하는 이유는 시기가 유한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내가 읽어 치운 책값을 하도록 노력해보자. 간명한 듯 지난하다. 명리(名利)에 허겁지겁 길들지 말고, 빈한(貧寒)에 속절없이 굽히지 않기를. 내 선한 인연들을 더 값지게 간직할 수 있기를! 덧붙이며, 새해에는 서러운 눈물들이 좀 줄었으면 좋겠다. - [憂弱]


이상! 빛나는 귀중한 이상, 이것은 청춘의 누리는 바 특권이다. 그들은 순진한지라 감동하기 쉽고, 그들은 점염(點染)이 적은지라 죄악에 병들지 아니하였고, 그들은 앞이 긴지라 착목(着目)하는 곳이 원대하고, 그들은 피가 더운지라 실현에 대한 자신과 용기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은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 민태원, 『청춘예찬』中(전철 안에서 읽던 책의 한 구절^^;)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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