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여간 써왔던 제 호인 憂弱(우약) 대신 새로운 호를 만들어 쓰기로 했습니다. 여조겸의 [동래박의]에서 君子憂我之弱 而不憂敵之强(군자는 제가 약한 것을 걱정하지 적이 강한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憂弱은 언제나 저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인식하자는 다짐이면서도 약한 것, 어려운 것, 힘겨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는 뜻이었습니다. 둘러댄 유려한 의미에 부합하지는 못했더라도 늘 제 호를 염두에 두고 노력했다는 것만큼은 자부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부정적인 한자어로만 구성된 제 아호가 종종 불만스러웠습니다. 약함을 근심한다는 것인지, 약해져서 걱정스럽다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제 천성이 변덕이 많은 것인지 이런저런 흠을 잡아 싫증도 냈고 말입니다. 그러던 참에 잊고 지내던 약팽소선(若烹小鮮)이란 도덕경 구절을 만나던 순간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도덕경 20장에서 따온 잠잠히 흐르는 모양, 담담하구나!라는 뜻의 澹兮(담혜)라는 제 생애 최초의 호를 쓸 때의 마음이 새록새록 되살아났습니다. 제 영감의 원천인 도덕경에서 이번에도 신세를 좀 져야겠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自號(스스로 만들어 쓰는 호)를 짓는 것이 온당키는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이름을 매우 중요시하고 소중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이름에 떳떳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고명사의(顧命思義)라 하여 항상 자신의 이름이 품고 있는 뜻을 되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름마저 수신(修身)의 방책으로 삼은 옛사람들의 집요함을 마냥 찬양할 생각도 없지만, 그네들의 노력이 헛된 파닥거림이라고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월의 무게는 참으로 대단한지라 과거에는 상식과 양식이던 것들이 후세에는 고루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선현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호와 자를 분간하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옛사람들은 태어나면 이름(名)을 갖게 되고, 성년식의 일종인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자(字)를 받고, 호(號)도 지어 쓰며, 특별한 공적이 있는 사람은 국가에서 사후에 시호(諡號)까지 내려 주었습니다.


특별히 왕의 경우에는 묘호(廟號)와 능호(陵號), 존호(尊號)를 받았습니다. 묘호는 돌아가신 왕의 신주를 모실 때 부여하는 호칭이고, 능호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일컫는 호칭이며, 존호는 왕과 왕비의 공덕과 업적을 찬양하며 왕 또는 신하들이 올리는 호칭입니다. 조선시대 세종의 경우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叡武仁聖明孝大王)이라는 긴 호칭이 부여되었는데, 세종은 묘호, 장헌은 중국에서 준 시호, 영문예무는 존호, 인성명효는 아들 문종이 올린 시호입니다. 아울러 세종대왕릉은 영릉(英陵)이라는 능호로 불립니다.


자(字)는 성인 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어서, 태어난 후 받게 된 이름 외에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별도의 칭호로 쓰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중국 송나라 때부터 호(號)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자도 이름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자를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이름과 자의 제약을 피해 누구나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어 쓴 것이 바로 호입니다. 호는 아호(雅號)나 당호(堂號), 댁호(宅號)와 함께 불가의 법명(法名)까지 포괄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훈련소 법당 수계식에서 받은 법명은 명각(明覺)입니다.^^;


호가 이렇게 성행하게 된 까닭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어진 이름과 자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지어 쓸 수 있었던 호를 선호하는 인지상정 때문이었겠지요. 후대로 갈수록 호가 일상화되면서 자마저도 이름처럼 함부로 부르지 않게 됨으로써 호의 사용이 더욱 촉진되었습니다. 시호는 넓게는 호의 일종이나 일반 호와 달리 사후에 생전의 업적을 참작하여 국가에서 왕이나 유공자에게 내린 칭호입니다. 중국 주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고, 후대로 갈수록 시호법이 정착되어 정형화되게 됩니다. 특히 文, 武, 忠, 孝 같은 글자가 많이 쓰인 것은 익히 잘 아시리라 사료됩니다.


이처럼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은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말할 때 이름 두 자를 붙여 함께 말하지 않고 한자씩 떼어 "아무 字 아무 字"라고 하는 것도 피휘(避諱, 피하고 꺼림)의 일종으로서 이름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하간 이런 복잡한 메커니즘을 통해 서로의 품위와 인격을 존중하고 예우하고 배려하려했던 옛사람들의 자세는 곱씹어 볼만합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선현들의 아호 중에 백범 김구 선생과 무애 양주동 박사의 그것이 있습니다. 白丁의 白과 凡人의 凡을 딴 白凡이라는 아호를 두고 김구 선생은 "가장 미천한 사람까지 모두 나와 함께 애국심을 가져야겠다는 것이 나의 소원임을 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양주동 박사는 "나는 가없는 것을 좋아한다. 바다를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하고, 가없는 사랑을 사랑하고, 가없는 뜻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自號를 ‘无涯’라 하였다"고 밝힙니다. 두 분 다 자신의 호에 걸맞은 삶을 사신 분들이라 더욱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너무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이제 새로 지은 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자신이 호를 짓게 된 변(辨)이나 기(記)를 남기거나, 남에게 호를 지어 줄 때 그 의미와 전거(典據)를 밝힌 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호변(號辨) 또는 호기(號記)라고 하는데 옛사람들의 글 중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새로운 호에 대한 호변을 좀 늘어놓겠습니다. 아참 저도 그간 실수하던 건데 자신의 호를 우아한 호라는 뜻의 아호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으로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호를 쓰는 사람이 드물어서 아호라는 표현을 꺼릴 필요가 있겠냐 싶기는 하지만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小鮮은 도덕경 60장의 治大國若烹小鮮(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듯 해야 한다)에서 따왔습니다. 작은 생선을 굽는다며 젓가락으로 헤집고 뒤집기를 반복한다면 생선살이 부서지고 말 겁니다. 가만히 놓아두고 지켜보는 것도 어렵고, 적절한 시점에서 뒤집기는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생선을 은근하게 굽는 마음처럼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쥐어 짜내지 않고, 자연스레 배어나고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약팽소선은 도가적(道家的) 자유주의자를 지향하는 제가 그리는 無爲而無不爲(억지로 하지 않기에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의 고요함과 치열함이겠지요. 제 자신이 작은 물고기(小鮮)가 되든, 팽소선(烹小鮮)을 하는 자리에 가게 되든 말입니다.


小鮮이라는 자호에 부끄럽지 않도록 이 세상에 한 뼘의 자유라도 더 넓히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생선이 새카맣게 탈 때까지 야윔의 고착화를 방관하지도 않고, 노릇노릇 익기도 전에 뒤집으려고 서러운 눈물을 요구하지도 않겠습니다. 전체주의의 젓가락이 생선살을 들쑤시는 것에 맞서고, 인위적인 손길이 센 불로 높여 생선껍질 태우는 데 고개를 젓겠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숙고된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한 점진적 사회개혁을 추구할만한 깜냥이 될지 여전히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만이 익숙해진 절망을 헤쳐나가는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자중자애(自重自愛)하자는 의미에서라도 제 둘레에 아호 하나쯤 만들어 쓰는 지인들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어주거나 짓는 것을 도왔던 각영(刻影), 무념(無念), 무본(務本), 우로(雨露) 등의 벗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새삼 궁금하네요. 여하간 새로운 호인 소선(小鮮)을 의연하고 당당하게 써나갈 테니 많은 질정편달 부탁드립니다. 한번뿐인 삶을 알차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신념과 목표 등을 표상하는 호 문화에 빠져보심은 어떨까요? 고맙습니다. - [小鮮]


<참고 문헌>
신용호·강헌규. 1997. 『先賢들의 字와 號』. 전통문화연구회.
김석제. “[儒林 속 한자이야기] (69) 雅號(아호)”. 서울신문. 2005. 4. 30.
국립중앙박물관 안내문 중 "묘호, 존호, 시호, 휘호"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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