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이 다했다

잡록 2006. 3. 19. 05:55 |
불가 용어로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때가 오면 스스로 찾아오고, 때가 되면 스스로 물러간다는 뜻이다. 내 짧았던 연애도 시절인연이 다했다. 나로서는 이게 가장 손쉬운 해명이지만 실은 오롯이 내 탓인 것만 같아 민망하고 부끄럽다.

모든 것은 한때의 시절인연이며, 시절인연이 다해 가는 것을 잡아둘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 말로 둘러대기에 나는 너무 무심했다. 나는 진리는 시간의 딸이듯이 사랑 또한 시간의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 또한 버젓하지 못한 변명이었다. 결국 내 우려대로 내 부박함은 연인의 섬세한 영혼에 생채기를 남기고 산화했다.

법정스님의 잠언집을 건네고 헤어진 뒤 찾아간 동네모임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노원역에서 태릉입구역까지 만보(漫步)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동력이 소진된 연인에게 내가 굳이 직설법으로 종지부를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탄식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직설법은 여전히, 앞으로도 낯설고 어색할 듯싶다. 어쩌면 내가 먼저 동력이 소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간 한 게 뭐가 있다고.

그 날 만나서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도록 하자.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일부다.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정무를 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하루종일 페리클레스를 따라다니며 욕설을 해댔지만 페리클레스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저녁이 되자 페리클레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욕을 하며 페리클레스의 집 앞까지 좇아왔다. 집에 도착한 페리클레스는 하인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길이 어두우니 횃불을 밝혀 저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 주게.”

시인 이온(Ion)은 페리클레스의 그러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페리클레스는 지나치게 교만한 사람이오,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속마음을 감추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오.” 페리클레스가 고상한 척하는 것은 인기를 끌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 철학자 제논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도 그처럼 행동해 보게. 그렇게 행동하다 보면 자네도 분명 고매한 인품을 갖출 수 있을 것이네.”


본래 내 것은 없다. 그렇게 다짐해놓고도 있을 때 잘하지 못했다.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천형처럼 짓누른다. 좀 더 유익해지고 싶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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