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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04 중화전에서 눈을 감아 보다

프랑스 화가 밀레는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감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옛것에 젖어들 만큼 감격하고 있는가, 아니 제대로 알고는 있는가? 딱히 돈이 안 되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이 아슬아슬하다. 지난 5월 20일 서울시는 새청사 기공식을 열었다. 당초에 서울시는 초고층의 건물 설계안을 내놓았는데 문화재위원회는 덕수궁과 조화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의를 퇴짜 놓았다. 여러 차례 건축 심의를 거친 끝에 서울시는 한옥의 처마를 형상화한 디자인을 확정했다. 서울시 새청사 논란을 놓고 일부 시민들은 덕수궁이 거치적거린다고 여기며 쌀쌀맞은 시선을 건넸다. 그저 도심의 공원에 지나지 않는 덕수궁이 서울의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대의명분(?)의 발목을 잡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덕수궁은 빤히 보이기라도 하니까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공사 지연이 두려워 쉬쉬하고 넘어간 매장문화재는 오늘날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이 난입해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훼손한 치욕이 불과 2000년의 일이었다. 철원군에서 태조 왕건의 사택지로 추정되는 철원군의 구 철원향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예산 부족 등으로 연기되었다가 올해 들어 2년 만에 재추진되었다. 가까스로 확보한 예산 2억 원은 숭례문 복원을 위한 추정예산의 100분 1 수준이다. 딱히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은 국가 지정문화재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모아져 아슬아슬하다. 거식증보다는 편식이 낫다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말이다. 궁궐의 속살을 더듬으며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세상에 맞설 재기 발랄한 언어를 궁리해본다.


덕수궁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여기저기서 많이 접했다. 덕수궁은 1907년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난 고종에게 붙인 궁호일 따름이라는 이야기다. 덕수궁은 상왕이 머무는 궁궐로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이지 궁궐 고유의 명칭은 아니라는 견해에다가 덕수궁 탄생 배경이 고종의 강제 퇴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맞물린다. 고종은 물러나서 장수를 즐기기보다는 구질구질한 옥좌를 좀 더 지키고 했으리라. 사실상 경운궁에 억류되었던 고종 입장에서는 덕수궁이라는 궁호가 마뜩잖았을 공산이 크다.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慶運)을 ‘경사스러운 일이 옮겨오다’로 풀이해보니 그 뜻이 절묘하다. 국운이 기울던 조선 말기에 경운궁을 드나들던 이들은 운수가 움직여서 중흥하길 바랐을 것만 같다.


1895년 을미사변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독살을 염려해 통조림으로 요기를 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벌어질 정도로 일본의 폭력은 혹심했다.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인 몸부림으로 열강의 공사관 밀집한 곳에 경운궁을 중건했다. 조선의 독자적인 관영 공사체제로 조영된 마지막 궁궐인 덕수궁은 원래 규모의 3분의 1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본래 궁궐터가 아니었던지라 배치가 뒤숭숭한데 군데군데 휑한 공간이 펼쳐지니 스산하다. 대한문을 들어가서 거닐게 되는 금천교는 조악하여 예의 은근한 맛을 잃었지만 말기의 작품에 서린 처연함이 다리의 못남을 가려주고 있다. 맹자는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뒤에 남이 그 나라를 정벌한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라고 역설했다. 자책하는 다리로 삼아 살뜰하게 반성해봄직 하다.


중화문이 옹글게 서있으나 문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지 오래다. 답사객들의 태반은 문으로 입장하지 않고 툭 터진 조정(朝廷)으로 자유로이 드나든다. 본래 중화문 좌우에는 행각이 늘어서 있었으나 일제가 헐어내 위용을 잃었다. 문 오른쪽에 ‘ㄱ’자 모양으로 약간 남아있는 것이 전부다. 그곳은 의자가 놓여있어 쉬어가게 해놨는데 도무지 맘 편히 쉴 수 없는 회한의 장소다.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들>에 나오는 도인은 꿈을 통해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한다. 도인은 오래 전에 불타버리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이제는 누구도 그 사원의 신을 숭배하지 않는 폐허를 꿈꾸기에 안성맞춤으로 여겼다. 한바탕 덜어내고 난 곳에서 채울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비참하게 잘려나간 중화문 행각에 걸터앉아 희망을 노래하자. 배부른 소리 좀 늘어놓고 보면 어느새 넉넉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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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히 보면 어도(御道)와 그 주변 부분에 깔린 박석이 다른 재질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가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어내고 잔디를 심었던 것을 최근에 뽑았기 때문이다.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이 국보와 보물의 일련번호 체계를 없앤다는 소식이 들린다. 등수 매기기 식의 서열화가 사라지는 계기가 될 듯싶어 기껍다.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에 귀천을 나누는 건 서글프지만 차이는 숙명적이고, 차이는 자연스럽게 차별을 낳는다. 지정문화재 제도는 국가적 관리의 우선순위를 확립함으로써 후손에게 좀 더 잘 물려줄 목록을 작성한다. 문화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국가적 차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반면에 개인적 차별은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편애는 넓혀나가고 국가적 편애는 좁혀나가야 한다. 숭례문의 참화는 국가적 편애를 제대로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개인적 편애를 희석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 애이불상(哀而不傷)하고 남은 힘으로 문화유산 사랑이 관념화되고 당위적인 구호가 되는 것을 경계하자.


문화유산을 완상하는 저마다의 감상만큼은 세간의 평가라든가 경제적 가치 따위로 재는 걸 그쳤으면 좋겠다. 가슴을 흔들고 푸근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저마다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자. 나는 조선 최후의 궁궐 정전, 막둥이 중화전을 편애한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이 죄다 국보이지만 그네들의 우아함 못지 않은 기품이 중화전에 있다. 중화전은 창건 당시에는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중건되면서 재정난 때문에 단층으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제국의 정전으로서 단층은 멋쩍었는지 지붕을 크게 올렸다고 하는데 그 궁여지책마저 살갑다. 고운 금빛으로 기운차게 쓰인 중화전 편액을 보는 맛이 쏠쏠하다. 치우침, 기울어짐, 지나침, 미치지 못함도 없으며 늘 떳떳하고 변치 않는 상태를 중화(中和)라고 한다면 얼마나 버리고 비워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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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에서는 희로애락이 발현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하고, 발현해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고 풀이하고 있다.



중화전 답도에는 궁궐 정전 가운데 유일하게 봉황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다. 제국의 격식을 드높이기 위해 애를 썼던 게다. 용을 새긴 답도는 중화전과 원구단에서만 볼 수 있는데 만세 대신 천세를 외쳤던 조선에서는 파격이었나 보다. 중화전 천장에는 살진 황룡이 노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현문 안쪽에도 용이 그려져 있고 수막새에서도 용이 노닌다. 조지훈 선생은 <봉황수>에서 용 대신 봉황을 틀어 올린 조국을 안쓰러워했지만 막상 쌍룡을 만났는데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이 가리키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창덕궁 인정전과 함께 황제를 뜻하는 황색 창호를 쓰다듬다가 고종을 떠올렸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라는 책에서 벌어진 치열한 논쟁에서 엿보이듯이 그 시절의 빛과 그림자를 헤집는 노력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가 실패한 군주였음은 또렷하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해 자주독립을 천명했지만 그에게는 자주와 자강을 도모할 혜안이 없었다. 동학농민전쟁 때 고종이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여 지키고자 했던 것은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었듯이 그는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제국의 실정은 일제의 침략에 견주어 얼마나 나았겠냐는 투덜거림에 귀가 솔깃하다. 그럼에도 무능한 임금과 제국주의 침략세력과의 차이가 잗다랗다고 말하기에는 찜찜하다. 더 나아가 아예 일제의 통치 결과를 두둔하는 일각의 주장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눈감은 채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따지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무모할뿐더러 윤리적으로도 박절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민통치로 이룩한 경제발전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를 몇몇 통계수치로 가늠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가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훼손된 자유에 대한 비용 처리가 너무 인색하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왕정 복고를 바라는 민중이 거의 없었던 시대 상황을 반추할 때 황실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운 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 때 자신들의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당시의 백성들의 존재 또한 분명하다. 요즘은 너도나도 촌스럽다고 손가락질하는 민족주의라든가 애국주의의 열정에 이끌렸던 그네들의 마음자리를 애틋하게 여긴다. 망국의 일차적 책임자들을 차마 미워하지 못함이 조선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와 독살설이 몰고 온 충격이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전제군주의 죽음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를 잉태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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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의 소맷돌에는 돌짐승(瑞獸)을 장식했다. 앙증맞은 주먹코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살짝 쳐주고 싶다. 역경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 치켜든 얼굴이 익살스럽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한 젊은이를 만났다. 눈이 멀었다가 갑자기 앞이 보였는데 자기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개화의 파고 속에서 표류했던 대한제국을 추념하면서 과연 오늘의 우리는 슬기롭게 세계화의 너울을 넘고 있는지 묻는다. 화담 선생은 그 젊은이에게 눈을 감으라고 충고한다. 눈감은 젊은이가 예전처럼 지팡이를 짚어가며 집을 잘 찾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고사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서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너의 눈을 감아라(還閉汝眼)”라는 일갈은 개안의 미덕에만 열중하던 내게 폐안의 가치를 품게 해준다. 자신의 잣대를 먼저 세워야 제 것으로 삼을 만한 것을 가려내는 안목이 길러지게 마련이다.


중화문은 황궁 법전의 정문으로서 격을 높이려고 했던지 기둥이 높아지고 처마가 길어졌다. 덕분에 문 사이로 중화전의 용마루까지 훤히 보이는데 그 곡선미가 아찔하다. 가로 부재인 창방의 직선과 대비되어 보는 맛을 돋운다. 포실한 전통의 토대 위에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을 모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이 용마루 선과 같은 우리의 멋은 얼마든지 있다. 움직임과 행동을 혼동하지 말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곱씹는다. 우리는 등 떠밀려서 움직이고 있는가? 자기가 선택한 걸음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앞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가? 그저 식객에 지나지 않는가? 중화전은 내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리는 곳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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