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를 편애한다

문화 2013. 8. 4. 03:54 |

(2005년 3월 28일에 처음 썼고, 2012년 10월 20일에 손질했으며, 2013년 8월 4일 전면 수정을 한 잡글입니다. 결국 8년에 걸친 횡설수설이 되었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요.ㅜㅜ)

 

 

1. 묘호, 시호, 능호가 없는 광해

광해는 땅을 가진 이들에게만 조세를 부과하고,

제 백성을 살리려 명과 맞선

단 하나의 조선의 왕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문구다.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여 묘호(廟號), 시호(諡號)를 받지 못하고, 능호(陵號)도 없이 왕자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아마 이 영화의 제목 역시 광해군이 아닌 ‘광해’라고 표기함으로써 왕자가 아닌 왕으로 대접하겠다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나는 광해군에게 사사로이 묘호나 시호, 능호를 올리고 싶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탓에 어떤 분들은 광해의 光을 따서 광종(光宗)이라 부르기도 하고, 선혜법(宣惠法)에서 연유한 탓인지 혜종(惠宗)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둘 다 괜찮은 묘호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종(聖宗)도 생각해봤다. 이민홍 선생님의 풀이에 따르면 聖은 선정을 펴고 부세를 경감시키며 빈객을 예법에 맞게 잘 대접했던 지도자라는 의미의 시자(諡字)라고 한다. 본래 묘호가 다소 미화하는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뭐든 좋을 듯싶다(능양군이 仁祖라고 묘호를 받은 것을 상기하자). 비교적 까다로운 시호법과는 달리 좀 더 자유롭게 짓는 경향이 있는 능호는 지릉(智陵)이 어떨까 싶다. 대체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균형외교에 대한 지혜를 기리는 뜻에서 말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구차하게 도망이나 다니다가 여차하면 명나라 영토로 갈 궁리나 했으면서, 분조(分朝)를 통해 전장을 지휘했던 세자 광해군을 시기하여 후계 구도를 불안정하게 했던 선조는 영 신통치 않다. 또한 쿠데타를 통해 용상을 차지해놓고는 병자호란에서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 부부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조는 용렬한 암군이었다(이하 왕자 시절 봉작인 능양군(綾陽君)이라고 칭한다). 변변치 못한 임금들이 나라를 다시 세웠다는 의미에서 조(祖)자를 참람하게 쓰는데 광해군이 앞뒤 임금들에 비해 이렇게 크게 모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끝내 복권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일단 이 잡글에서는 그냥 대왕으로 칭하겠다.

 

 

2013. 4. 13.에 답사한 대왕의 능

 

 

2. “땅을 가진 이들에게만 조세를 부과하고”

영화에서는 대왕이 대동법을 시행한 것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오항녕 선생님을 위시한 여러 학자들이 대동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오 선생님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에서 광해군과 핵심 대북세력이 대동법에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대동법이 경기도에 시행된 지 1년도 안 되어 혁파 여부가 논의되었을 때 대왕은 마지못해 대동법을 존속시켰다. 대동법을 임시방편적인 조치로 여긴 발언도 보인다.

 

 

왕이 이르기를,

“선혜청 제도는 오래도록 시행할 만한 것인가? 또 하나씩 고쳐가는 일이 어떻겠는가. 전결(田結)을 기준하여 미곡으로 내게 하는 일을 영원히 시행하게 할 수는 없을 듯하다(宣惠廳, 乃久行之事乎? 且一一更張, 於事何如? 田結出米, 恐不得久遠行之也).”

광해군일기 정초본(정족산본) 35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11월 18일(기미) 2번째 기사

 

 

대왕이 대동법 확대 시행에 소극적이었고, 대동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상당 부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대규모 궁궐 영건 공사와 수취 제도 개혁을 통한 민생 안정을 함께 성취하기가 어려웠다고 본다. 대동법이라는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분명히 의의가 있지만 굉장히 제한적으로 실시했다는 점에서 아래의 비판을 살펴봐야 한다.

 

 

광해군대의 선혜법은 경기에서만 실시되었다. 또 처음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일부 논자들의 확대 실시 요구는 산발적이었고, 당위적 차원에 머물렀다. 무엇보다 광해군이 이 법의 확대에 반대했다. 오늘날, 대동법 실시는 광해군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광해군은 대동법에 대해서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278쪽.

 

 

대동법을 방납인들이 다들 원수처럼 생각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방납의 폐단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계층의 극렬한 저항과 대왕 자신의 인식 부족으로 대동법이 반쪽짜리가 되었다. 다만, 광해군 즉위년(1608)에서 숙종 34년(1708년)에 이르기까지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는 100년이 걸렸던 것을 보면 대왕 시절에 대동법을 전면 시행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과하다. 뒤를 이은 능양군 시절에도 강원도 지방에 실시하였을 뿐 대동법 확대는 지지부진하였고, 본격적으로 대동법이 정착되는 시기는 효종 대부터이다. 대왕은 즉위 초기에 대동법을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도 역사적 기여를 했다. 그만큼 대동법은 발상의 전환을 요하는 혁신적인 조치였다.

 

 

3. “제 백성을 살리려 명과 맞선”

임진왜란 때 남원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 선생의 『난중잡록』을 보면 당시 명나라 병사가 게워낸 음식을 서로 먹기 위해 굶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었다고 하는데 상상만 해도 참으로 참담하다. 심지어 『선조실록』에는 “길바닥에 굶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베어 먹어 완전히 살이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혹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장(腸)과 위(胃), 뇌의 골도 함께 씹어 먹는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참화를 겪었으니 조선왕조가 이때 망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잖이 들린다. 여하간 나라가 망하지 않은 덕분에(?) 세자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된다.

 

 

나는 대왕이 세자 시절 27개월 간 전국을 누비며 전쟁을 체험한 것이 그의 외교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배기찬 전 청와대 안보실 동북아비서관은 대왕의 외교 노선을 투항주의라고 비판한다. 군대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고 여차하면 후금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배 전 비서관은 능양군과 서인 정권의 모험주의가 투항주의보다 훨씬 나쁜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말이다.

 

 

왕족이면서 전쟁터를 직접 체험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던 대왕이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최대한 피해야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강박관념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왜군보다 수탈이 심했던 명군의 폐해나 명나라 조정의 내정 간섭을 겪은 대왕으로서는 명에 대한 악감정도 품었음직하다. 여하간 대왕에게서는 조선의 임금들에게서 듣기 힘든 말들이 쏟아진다.

 

 

“오랑캐로 인한 환란이 천지가 생긴 이래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주나라 태왕·문왕의 성덕(聖德)과 한 고조, 당 태종의 웅무(雄武)로서도 다 때에 따라 적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썼으니, 이는 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며 당시에 기롱하는 의논이 있었다는 말은 들지 못하였다. 따라서 나라가 이에 의지하여 오래도록 평온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어떤 괴이한 작자들이 시의에 맞게 변통할 줄은 모르고 한갓 썩어빠진 논의만을 하여 우리나라의 일을 망치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은 이 융통성 없고 오활한 의논이 가당치 않다는 것은 살피지 않고 다 입을 다물고 수수방관하여 우물거리고 있으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하는 신하로서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 광해군일기 정초본(정족산본) 172권, 13년(1621 신유 / 명 천계(天啓) 1년) 12월 5일(임신) 3번째 기사

 

 

“우리 나라의 병력이 과연 요양(遼陽)의 병력만 하겠는가. 답서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반드시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면서 한갓 한때의 사악한 논의만을 무서워하니 종사를 어디에 두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은 그저 자기의 몸만을 사랑하고 나라의 위망은 돌아보지 않는 태도이다. 또한 위에서 기미책(羈縻策)을 굳이 고집하도록 하려는 계책은 곧 뒷날 임금에게 모든 죄를 돌리려는 뜻이다. 옛날에 대신이 과연 이렇게 하였던가. 이제 만일 관문을 폐쇄하고 사신을 거절한다면 준절한 논의를 편 사람이 먼저 내려가서 적을 방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늘내일 하다가는 다만 나라만 망하고 말 것이다. 비변사의 여러 당상관의 의견을 모아 오늘 중으로 빨리 좋은 쪽으로 잘 처리하도록 하라.”

- 광해군일기 정초본(정족산본) 172권, 13년(1621 신유 / 명 천계(天啓) 1년) 12월 26일(계사) 2번째 기사

 

 

이런 발언들에 대한 재음미가 최근 들어 대왕의 국제정세 인식과 균형외교가 조명을 받아 외교적 치적은 인정받는 것 같다. 광해군 말년에 대왕은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도 후금에는 역관을 보냈다. 신료들은 그런 광해군의 왕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수시로 파업을 일삼았다. 어찌됐든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을 도왔던 명에 대한 의리는 함부로 파기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사대부들의 생각은 참으로 완고했다.

 

 

사대부들의 마음을 잃었던 것은 대왕이 실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존명의리(尊明義理) 이데올로기에 맞서기에는 소수파 정권의 대왕으로서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가령 정통성이 넘쳐흐르는 숙종 같은 왕이 대왕의 외교노선을 추구했다면 한층 더 추동력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에서는 숙종은 존명의리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키기 위해 창덕궁 깊숙한 곳에 명나라의 은혜를 기리는 대보단(大報壇)일 지은 인물이지만 말이다.

 

 

이권우 선생은 프레시안에서 개최한 도서 좌담회에서 “내치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치가 가능할까요?”라고 반문하였다. 물론 내치와 외치가 상호 조화를 이루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에서는 내치가 볼만했던 경우와 외치에 치적을 남긴 경우가 분리되는 경우가 적잖은 듯싶다. 더욱이 전후 복구가 한창인 시점에서 외세의 침략을 관리하는 것 역시 내치의 일환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대왕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이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더 악화시켰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여론 주도층인 사대부들이 사대주의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서 왕과 신하가 손발이 맞지 않았던 것을 온전히 대왕의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대왕의 외교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고 본다.

 

 

대왕의 실각 이후 능양군과 쿠데타 세력은 대왕의 외교정책을 강력히 비난하기는 했지만, 이미 후금을 오랑캐라고 매도하며 적대할 단계가 아니었고 제 나름의 유화책을 마련한 흔적도 보인다. 국제 정세는 오히려 대왕 시절보다 더욱 후금(청)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능양군은 더욱 섬세한 균형외교를 꾀하거나 방어전쟁을 준비하였어야 했다. 전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능양군과 쿠데타 세력의 대응은 참담한 수준이었고, 임진왜란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고초를 겪었다. 청의 침략전쟁을 일차적으로 비판하한 뒤에는 능양군과 쿠데타 세력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4. 대왕의 실책에 대한 고찰

물론 대왕이 강홍립에게 “정세를 잘 살펴 행동하라(觀形向背)”고 명했던 것이 내치에도 발휘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왕이 마냥 내치에 무능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흔히 회자되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조선 왕가의 피비린내 나는 변고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후계자 책봉에 관련해 선조의 미온적이었던 태도, 임진왜란 당시 원조를 빌미로 조선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도 딴죽을 걸던 명나라의 자세도 상당 부분 대왕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대왕의 폐위 후 대왕을 죽일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 인목대비는 모자관계라기보다는 정치적 라이벌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조선사에서 계비가 아들이나 며느리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가 이따금 있다. 인목왕후는 대왕보다 9세 연하고, 정조의 할머니인 정순왕후는 정조보다 7세 연하다. 아무리 종법(宗法) 질서가 중한 시절이어서 오늘날과는 나이 관념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민망한 일이다. 선조가 적장자를 갈구했던 나머지 후계자 선정에 대한 분명한 교통정리를 하지 못한 바람에 대왕은 정통성의 한계에 시달렸고 콩가루 집안이 된 듯싶어 안타깝다.

 

 

대왕이 대북파와 코드 정치를 했다고 비판도 일면 수긍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러나 탕평책을 부르짖었던 영․정조 시대에도 노론 벽파가 주도적 위치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했듯이 당쟁이 있던 대부분의 시기에 코드 인사는 그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대왕의 인재풀이 협소했던 측면이 부각되기는 하지만 폐위될 만큼 인사를 망쳤다고 보기는 조심스럽다. 대북파는 인조 쿠데타 이후 서인의 극심한 탄압으로 완전히 정계에서 제거되어 버렸다. 이는 남인이 잠깐의 집권기를 제외하고는 만년 야당에 허구한 날 옥사를 치렀으면서도 명맥이 이어진 것과 다른 점이다. 서인의 쿠데타가 얼마나 정통성이 허약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실정의 이유로 궁궐 영건에 집착한 것이 많이 거론된다. 그러나 선조의 무능으로 궁궐이 잿더미가 된 것을 다음 왕이 서둘러 재건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의 사고로는 궁궐 중수와 창건이 국가의 위신을 세우는 사업이었음도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왕권강화를 한답시고 무리해서 필요 이상으로 궁궐을 지으려 한 것은 아쉽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누구보다 더 잘 알 분이 저지른 실책이라 더욱 따갑다.

 

 

대왕 재위 중에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에 대한 공사가 계속되었다. 대왕은 창덕궁을 지으며 즉위하여, 인경궁을 짓다가 폐위된 셈이다. 광해군 대 지어진 건축물 중 현존하는 궁궐 건축으로는 창덕궁 내 돈화문, 선정전, 창경궁 내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 경희궁 내 흥화문, 숭정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창덕궁 선정전은 인경궁 광정전을 옮겨 지은 것인데 광해군 대 건축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광해군의 궁궐 영건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건축기술이 상당 부분 퇴보한 시점에서 대왕이 직접 궁궐 중건을 챙김으로써 건축 기술을 다시금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넉넉하게 평가할 만하다. 가령 중국에서만 사용하던 황기와를 사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전란 중에 단절된 청기와 제작기술의 복원에도 힘써서 인경궁의 주요 전각에는 청기와를 씌웠다. 그런데 그 후 청기와는 다시 전승되지 못하고 다시금 단절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측면에 비추어 볼 때, 대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건축기술의 복원에 대한 업적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우리 궁궐 전각들의 상당수가 대왕의 공인 것을 감안하면 후손들 입장에서는 고맙게 생각할 여지가 적잖다.

 

 

5. 패자의 역사

능양군 이종(李倧)의 쿠데타 이후 대왕의 북인 세력이 사실상 절멸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대왕이 조선시대 내내 혼군(渾君)이니 폐주(廢主)라고 불리며 종묘에 모셔지지도 않을 만큼 무도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왕위에 있던 시간보다 더 오랜 기간을 유배지를 전전하며 아들과 며느리, 부인을 앞서 보내야할 만큼 죄악이 깊다고 보지는 않는다. 적어도 평균은 되는 임금이었다. 참고로 대왕은 영조, 태조, 고종 다음으로 장수한 임금이다.

 

 

패자에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라이벌에게 옹색한 평가를 내리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패자와 라이벌을 존중하며 좋은 점을 배우는 것은 어색한 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다. 승자의 양지만을 좇기보다 과거의 패자에게서 가슴 시린 영감을 얻고, 현재의 라이벌에게서 새로운 안목을 배워보자. 패자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라이벌의 장점마저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대왕의 외교에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기민한 전략을 세우고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함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이 국익을 지키는 것인지에 대한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또한 소수파가 집행권을 어떻게 섬세하게 행사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도 남겨준다. 대왕이 던진 화두를 소중히 궁리하면서 그에 대한 부당한 평가절하도 걷어낼 필요가 있다. 하늘은 편애하지 않지만 나는 그를 조금 편애하고 싶다. 어질지 못한 것은 내 평생의 부끄러움이나 모질지 못한 것은 내 아름다운 약점인지도 모르겠다. - [無棄]

 

 

<참고문헌>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한명기,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계승범,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 제193집, 역사학회, 2007, 1-37쪽

손신영, 「光海君代 官闕營建 再考」, 『건축역사연구』 33호,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09, 267-292쪽

오수창, 「오해 속 병자호란, 시대적 한계 앞의 인조」, 『내일을 여는 역사』 26호, 내일을 여는 역사, 2006. 12, 33-45쪽

오종록, 「광해군 시대의 교훈」, 『내일을 여는 역사』 제5호, 내일을 여는 역사, 2001, 103-114쪽

지두환, 「宣組.光海君代 大同法 論議」, 『한국학논총』 제19집,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7, 51-71쪽

한명기, 「광해군(光海君)-외교의 ‘빛’과 내정의 ‘그림자’-」, 『한국사 시민강좌』 제31집, 일조각, 2002. 8, 62-78쪽

홍석주, 박언곤, 「光海君 代의 宮闕 營建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8권 4호(통권 2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1999, 25-38쪽

 

 

 

 

조선에서 후궁을 왕후로 추존한 사례는 광해군이 유일하다(현덕왕후는 문종이 세자였을 때 후궁이었지만 이미 문종의 유일한 부인이었기 때문에 엄연히 정비가 따로 존재했던 공빈 김씨와는 사정이 다르다).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그녀의 무덤을 성릉(成陵)으로 격상하였고, 말년에 어머니의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능양군의 쿠데타로 대왕이 폐위되자 공성왕후는 공빈 김씨로, 성릉은 성묘로 격하되었다. 왕릉급으로 조성된 석물을 철거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다행히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공성왕후의 화려한 성릉과 대왕의 초라한 능과의 부조화가 애잔하다.

Posted by 익구
:

(2009년 3월에 쓴 글을 대폭 수정하였습니다)

 

1.

2008년 10월의 어느 술자리에서 미팅, 소개팅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호기심 어린 마음에 듣고 있던 내가 한마디를 했다. “미국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남녀 간에는 소개팅을 주선하면 실수라고 하던데 거기에 동감한다”라고 말했더니 좌중이 폭소했다(나처럼 재미없는 사람이 이렇게 남을 웃긴 일도 드물다).

 

 

내가 언급한 이야기의 출전은 이진 선생님의 『나는 미국이 딱 절반만 좋다』(북&월드, 2001)라는 책에 나오는 일화다. 저자는 공화당파 남자와 민주당파 여자를 소개시켜주고 나서 두 사람 모두에게 항의 전화를 받은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글쓴이는 양 당의 지지자들이 온몸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사례를 나열하며 미국의 정치 문화를 실감나게 전한다.

 

 

나는 다대다로 만나는 미팅 자리에서까지는 따지지 못하더라도, 일대일로 만나는 소개팅에서는 지지정당을 물을 수 있다는 개인적인 소견을 밝혔다. 본래 정치적 가치관이라고 말하려다가 무슨 사상 검증하는 냄새가 나서 지지정당이라고 고쳐 말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까닭은 일대일로 만나는 자리에서 개인적으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정당의 지지자를 내게 소개시켜주면 상대방에게도 실례고 주선자와도 서먹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2.

업무상으로 만나는 관계에서야 공적 영역에 대한 견해를 크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친구나 애인 같은 사사로운 만남에서마저 공적 영역에 대한 토론을 꺼리는 풍토는 좀 누그러뜨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소개팅 전에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은 정보 가운데 하나가 지지정당(혹은 사회적 정견)이라고 했더니 놀랍고 어색하다는 반응이 더 많았다.

 

 

나는 사사로운 소개팅 자리 같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사회적 정견을 마음대로 나누지 못하는 한국의 문화가 너무 치우쳤다고 본다. 공적 영역에 대한 대화가 막혀 있다 보니 이야기의 소재는 사적 영역으로 집중된다. 자연스레 외모나 취미생활 및 생활습관 같은 지극히 개인적 영역에서 맴돈다. 좀 더 나가더라도 연예인에 대한 소식이나 예능프로그램을 포함한 문화적 이슈 정도로 확장되는 경우가 많은 듯싶다.

 

 

이런 문제의식을 김별아 선생님께서 <대통령에게 쌍꺼풀을 허하라>(한겨레, 2005. 3. 13)라는 칼럼에서 잘 짚어주신바 있다. 공적인 영역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사적인 영역은 감시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종종 거꾸로 되어서 공적 영역에 대한 토론은 억압되고, 사적 영역에 대한 간섭이나 참견이 넘쳐흐르는 것 같다.

 

 

3.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을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한국의 문화는 ‘비정치적’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발현된다. 그런데 이러한 강박관념이 주류적 정치세력의 과점 사태에 일조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비정치적이길 권하는 사회가 결국 오늘날 지배적인 세력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 현상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

 

 

어쩌면 비정치적이라는 정언명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분들이 가장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고민이 든다. 여담이지만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에만 기대는 안철수 후보 캠프와 그 지지자들의 반정치주의적인 행보가 우려스러운 까닭이기도 하다. 기존 정당들이 그 나름대로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옥석을 가릴 일이지 낡은 정치라고 무조건 매도하고 타자화하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다.

 

 

비정치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청년들이 남았다. 사회에 대해 가장 투덜거릴 법한 젊은이들이 세속적 기준을 맞추는데 허덕이느라 체제순응형 인간이 되어버린다면 마냥 달가운 일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중도나 중립을 내세우며 단순히 양극단의 산술평균에 천착하는 분과는 소개팅을 해도 재미가 없을 듯싶다. 이 땅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갈지 어설프게나마 의견을 나누고, 정책이나 가치 논쟁을 벌일 용기나 정성이 있는 분들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다양성을 애호하면서도 자신의 당파성을 감추지 않는 성숙한 민주 시민과 연애하고 싶다는 바람은 이 얼마나 소박한가?^^;

 

 

4.

2011년 7월, 피서 삼아 하루를 꼬박 들여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을 읽었는데 그다지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지금이야 재출간되어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지만 절판된 시절에는 장르문학 애호가들이 헌책방을 뒤지게 만든 책이었던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렇게 다양한 개인의 취향이 버물리는 세상에 작은 보탬이 되고 싶다고 뜬금없이 다짐하는 계기가 된 독서였다. 이런 사적 영역의 취향과 공적 영역에 대한 생각은 접근 방식에 다소 차이가 날 듯싶다. ‘개인의 취향’은 가급적이면 존중하는 게 옳다. 그러나 ‘개인의 생각’은 인정하되 토론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사회적 정견이라고 분류하는 것도 직관적인 판단, 단순한 이끌림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잖다. 양자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시 한 번 평가하고 스스로 다시 궁리하여 보다 나은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유효한지 여부다. 가령 “나는 당신이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당신이 불교도인 것에 반대한다”, “나는 당신이 초등학생을 무서워하는 것에 반대한다”와 같은 발언들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와 같은 개인의 취향에 함부로 찬반 투표를 던질 수 없다. 적어도 머뭇거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양식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 출판계가 추리소설 번역에 매달리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불교계의 불교문화유산 관리 방식에 이견이 있다”, “나는 초등학생들이 치르는 시험 제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본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교류하는 행위는 애인 사이든, 친구 사이든, 선후배 사이든, 사제 사이든 간에 얼마든지 장려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중도니 상생이니 통합이니 하면서 토론과 갈등이 필요한 지점을 적당히 넘어가려 하지 않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5.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2003년에 펴낸 자서전 『Living History』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보인다. 힐러리는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다. 1964년 힐러리의 선생님은 대통령 후보 모의 토론회 시간에 힐러리에게 민주당 출신 존슨 대통령 역을 맡겼다. 힐러리는 도서관에서 민주당 강령과 백악관 성명 등을 읽으며 민주당에 대한 오해를 풀었고 종국에는 민주당원이 된다. 힐러리는 자기 스스로가 반대자가 되어 가려진 일면을 보았다. 그에 비추어 나는 너무 편협한 짓을 벌이는 듯싶다. 물론 애정과 정견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힐러리의 어머니는 비밀스런 민주당 지지파였다고 한다.

 

 

소개팅의 의미를 너무 무겁게 여겨서 이런 횡설수설을 늘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간 내게 소개팅을 제안해주셨던 많은 분들의 후의에 보답하는 길은 솔직한 모습으로 임하는 것일 따름이다. 혹시 소개팅 자리에서 배우고픈 정치적 반대자를 만날지도 모른다. 내가 첫눈에 반할 ‘다른 생각’들이 대한민국에는 넘쳐날 게다. 그럼에도 내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문재인 후보가 당선하길 바라는 마음은 바꿀 생각이 없듯이, 소개팅 여성도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답하라 1997> 6화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온전히 나를 버리는 일이다. 나답지 않은 짓을 하게 만드는 힘, 사랑이다”라고 역설했지만, 사랑을 쉬운 길로만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있으리라.

 

 

“저는 이명박 지지자는 아니지만...”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저는 야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저는 친미파는 아니지만...” “저는 진보주의자는 아니지만...” “저는 군 면제는 아니지만...” “저는 재벌옹호론자는 아니지만...” 이런 식의 말을 입에 달아야만 안심이 되고 비로소 색안경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한국 사회는 아직도 불행하다.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문화를 퍼뜨리기, 내가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다. 기왕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나갈 수 있으면 더욱 행복하겠다.^^ - [無棄]

 

 

<추신>

이 글을 보신 분들이 저를 까다로운 녀석으로 보실까봐 두렵습니다.ㅜ.ㅜ 사실 제가 소개팅 자리를 자주 못 나가는 까닭은 위 글과 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독대를 즐기지 않는 취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는 무의식이 작용해서 대여섯 명 정도 모이는 자리를 가장 즐기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둘만으로도 알콩달콩 충만하게 보낼 수 있는 관계, 그래서 사랑이 위대한지도 모르겠습니다. 2013년 초부터는 소개팅 자리를 사양하지 말고 나가봐야겠습니다. 앞으로도 소개팅 제안 많이 해주시와요^^;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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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花>, 콩 가는 소리

문화 2010. 9. 26. 06:38 |

2010년 10월을 끝으로 MBC 주말의 명화가 41년 만에 폐지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9월 25일 오전 1시에 MBC 주말의 명화로 본 <황후花>가 제가 본 마지막 주말의 명화가 될 듯합니다. 2008년 2월경에 설 연휴 특집영화로 보고 난 뒤에 썼던 잡글을 조금 손질해서 올려봅니다.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며 설렜던 마음을 추억합니다.


<황후花>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주걸륜이 부른 국화대(菊花臺)라는 노래가 참 좋다. 가사도 많고 시간도 길어서인지 티비에서 틀어줄 때는 통째로 들어내 하마터면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DVD나 IPTV 등을 이용해 관람하시는 분들은 놓치지 말고 챙겨 들으셨으면 좋겠다. 복수를 모티브로 한 <황후花>와 이야기나 전개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한 영화인 <야연>의 엔딩곡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지만 중국 영화에서 이따금 등장하는 이런 곡들은 스토리의 애잔함을 깊어지게 한다. 마치 한시를 연상시키는 노래를 삽입함으로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다르다는 문화적 자부심을 드러내겠다는 속셈이 엿보인다. 눈 가리고 아웅 일지언정 OST 차별화에 쏟는 정성이 나쁘지만은 않다. 한국 영화도 배울 필요가 있다면 야박한 요구일까.


<황후花>의 원제는 <滿城盡帶黃金甲>이다. 황소(黃巢)의 시구로 온 성안이 황금갑옷에 점령당한 모습을 묘사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혹자들이 말했듯이 인해전술이 번뜩이는 부부싸움이라고 간단히 정리해도 무방하다. 황제 주윤발의 절대권력에 대한 혐오감을 잔뜩 고조시켜 놓고는 허무하게 꺾어버린다. 콩가루 집안이니까 그 놈이 그 놈이라며 투덜거리다가도 황제에게 구박을 더 건네도록 상황을 꾸민다. 정략결혼을 해서 사랑하지 않는 황후 공리를 서서히 독살하려 하는 것도 모자라 지난날 사랑했던 연인을 두 번이나 배신하는 파렴치한 황제를 변호하고픈 마음을 가시게 한다. <야연>에서 황후 장자이가 건넨 독배를 마다하지 않는 황제와는 확실히 다른 인간이다(장쯔이로 많이 부르지만 통일성을 위해 한국어 발음을 부러 썼다). 영화는 시종일관 권력이 사람을 무섭게 만든다는 식의 흔한 핑계를 둘러대지 않도록 유도한다. 개인적으로는 위장 보약으로 사람을 서서히 죽여 가는 방식이 너무 쩨쩨하게 여겨졌다. 사람을 간질여서 죽이는 게 이런 고통일까?


장예모 변절론을 설파하는 분들은 그의 영화 이력을 고찰하며 안타까워한다. ‘까불지 마라’로 요약되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바람을 은밀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그런 의도를 읽기는 힘들다. 전작인 <영웅>에서처럼 진시황의 천하통일이 무고한 생민을 살리는 길이라며 낯뜨겁게 제국주의를 찬미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황후花>는 적어도 그보다는 덜 노골적이다. 그 당시의 유치함을 보강해 이번에는 좀 더 세련함을 추구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 영화에서 중화주의와 국가주의를 선전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의심의 눈초리가 마땅할 정도로 장예모의 궤적에는 아쉬운 구석이 적잖지만. 그가 그렇게 살기로 했다면 그 자체로는 존중할 일이다. 물론 배우와 감독에게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서는 곤란하다. 배우가 변신에 성공하면 대개는 칭찬 받을 일이지만, 감독이 표변하면 산뜻함을 느끼는 팬도 있고, 서운함에 돌아서는 팬도 있게 마련이다. 감독이나 작가가 학자처럼 변화의 근거를 제시해야할 의무는 없겠으나 상당한 책임감은 품어야 한다. 작품 세계의 다양성과 일이관지(一以貫之)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중양절의 기념해 황후와 황제가 함께 써 내려간 글자는 忠孝禮義!  영화는 이 네 글자 모두를 보란 듯이 어긴다. 대다수 관객이 기대했을 반란의 성공은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그러나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셋째 아들 원성의 몸부림은 차라리 재롱이었다. 황금 갑옷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범하던 둘째 아들 원걸을 응원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으리라.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라면 긴 환멸이 견딜 만하도록 잠시나마 통쾌함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심보다(2007 대선의 민심이 그랬을까?). 설령 공리가 파안대소를 했더라도 그다지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리라. 그저 주윤발의 입에서 권력무상을 술회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겠다는 소박한(?) 마음뿐이다. 권선징악마저 사치스러워질 때 사람 사는 세상이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를 가슴 저미게 알려준다. 절대선이 사라진 시대에 사는 우리는 가상세계에서나마 절대악을 만나서 극단적인 상대주의 혹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둑을 쌓는다.


황제는 모반을 태연하게 진압한다. 이왕 밉상을 보이기로 작정한 김에 인간성의 바닥을 치다 못해 아예 운하를 판다. 황제는 생포한 원걸에게 황후를 위해(?) 독을 탄 보약 시중을 하면 용서하겠다는 더러운 거래를 제안하고, 원걸은 자결로 항거한다. 영화는 “죄를 짓고 얻은 권력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라고 꼬집은 역사가 타기투스의 외침을 끄덕이게 만든다. 인간은 (착하게) 변할 수 있다는 개과천선의 믿음을 송두리째 헝클어뜨린다. 영화 내내 콩 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은지라 적잖은 평자들이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며 비판한다. 하지만 복합적인 인간이 아니라 절대악에 가까운 인물을 그려낸 것이 마냥 무익하지만은 않다. 압도적인 미움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북돋는 효과가 있다고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진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황제의 냉혹함이 황후가 전처 소생의 첫째 아들과 통정하게끔 만들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황후는 공격을 했지만 결국 방어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의 패악질에 정당성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황제의 행태를 중국 공산당에 포개어 생각한다면 당사자들이 발끈할 일이다(장예모-공산당 결탁설은 너무 넘친다). 오히려 권력의 집중은 골육상쟁에 흩뿌릴 피의 양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린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싶다. 어차피 감독의 손을 떠난 영화는 관객이 주무르는 게 순리다. <황후花>는 단조로운 구성과 허망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창조적 재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주는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황제에 대한 비호감을 절대권력에 대한 경계로 치환하고프다. 도덕적 자원이 부족한 권력에 어떤 유지비용이 드는 가도 잘 보여주고 있다.


여담이지만 영화가 시작할 때 公元 九二八年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만큼 영화의 배경은 서기 928년이다. 이에 따르면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의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이 주윤발의 모델이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이사원의 치세는 볼만한 점이 있었다는 평가에 비추어볼 때 주윤발의 악독한 이미지와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다만 후계자 서열에서 유리했던 둘째 아들이 반역죄로 죽임을 당했다는 건 영화와 어느 정도 상통한다. 이사원의 뒤를 이은 건 셋째 아들 이종후였다. 영화에서는 주윤발이 과대(銙帶)로 팼던 셋째 아들이 죽지 않고 그의 뒤를 이었다고 하면 어찌어찌 맞아떨어지기는 하지만 억지스런 노력이다. 공리가 열연했던 양나라(後粱) 공주 출신의 황후가 가공의 인물이니 영화는 어디까지나 허구의 인물들이다.


이사원은 후당을 세운 장종(莊宗) 이존욱의 수양아들이다. 당시에 절도사들은 수양아들을 두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존욱은 반란군이 수양아들 이사원을 옹립함으로써 죽임을 당한다. 이사원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방기했다. 이존욱이 885년생이고 이사원이 867년생이니 자식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이상한 광경이기도 하다. 이사원의 선정도 부질없이 후당은 4대 13년 만에 멸망했다. <대장금>이나 <왕의 남자>가 사서의 몇 줄에서 출발한 것처럼 <황후花>도 당대의 시대상에서 영감을 얻었음은 또렷하다. 영화는 콩가루들이 요란하게 흩날리던 오대십국의 다반사 한 조각(황실의  치정)을 묘사하는데 그쳤다. 당대에 민초들이 겪었을 고초는 안 봐도 선하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묵공>은 <황후花>의 대체재일까, 보완재일까? - [無棄]


<군소리>
구슬픈 노래를 선사해준 주걸륜에게 보답할 길이 없을까 해서 그가 출연한 <이니셜D>를 찾아본 나도 좀 야릇하긴 하다. <황후花>처럼 뻔한 결말에다 밋밋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한바탕 속도감을 즐기다 보면 속풀이 효과는 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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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 답사기

문화 2010. 8. 30. 04:58 |

이번 여름은 서울 바깥나들이를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답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문화유산에 대한 짧은 감상을 늘어놓겠습니다.


1. 보은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7월 11일)


법주사 하면 목탑인 팔상전(捌相殿)을 가장 눈여겨보기 마련입니다. 지난 답사에서는 팔상전 뒤편에 있는 국보 제5호 쌍사자 석등이 가장 인상에 남았습니다. 우리네 돌조각이 대부분 그렇지만 사자는 온화함을 넘어 귀엽고 앙증맞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원성왕릉으로 추정하는 경주의 괘릉(掛陵) 앞의 돌사자들은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기보다는 씩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나 오래가는 아름다움은 결코 공포나 폭력으로 조성할 수 없는 것일까요.


한국인에게는 오래 전부터 양순함과 익살맞음이라는 정서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제멋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날 예의 넉넉함과 푸근함을 자꾸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웠고요. 요즘 방영 중인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에서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희구하는 닭살이 돋는 대사가 나오는데 천년이 넘도록 석등을 들고 있는 사자들이 바라던 바였는지도 모르겠다고 또 멋대로 상상했습니다.


사자가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고,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안내를 해주신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교(敎)를,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은 선(禪)을 표상한다고 합니다. 찾아보니 시작과 끝의 순환을 의미한다는 등의 다른 해석도 있던데 꿈보다 해몽이겠으나 꽤 그럴 듯하게 들려서 한참을 그 앞에 서있었습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불보살 이외의 자가 성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뒤에 이르러 일반 중생도 후천적인 수행을 통해 불성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퍼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종국에는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미망에 가려져 있을 뿐 그것을 떨쳐버리면 성불한다고 말하게 되죠. 이 석등이 세워졌을 시기에는 어떤 생각이 퍼져 있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인간은 본래 깨달은 존재라는 본각(本覺) 사상에 기반을 둡니다. 따라서 수행할 때 깨달음을 기대하는 태도를 대오(待悟)라 칭하며 경계합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헤아리고 따지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 하여 덧없게 여기죠. 선종의 법맥을 잇는 후계자는 육조 혜능(慧能)이었지만, 저는 신수(神秀)의 게송인 “틈틈이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라는 성찰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교와 선을 통한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점오(漸悟)야말로 저에게 어울리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고생스럽게 공부해야만 깨달음을 얻는 ‘곤이지지(困而知之)’라는 유가의 용어를 억지로 빌려서래도요.


제 잡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입을 다문 이판(理判)과 입을 벌린 사판(事判)을 연상해봤습니다. 한 개인이나 어느 사회가 지속하려면 무게중심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판과 사판 사이의 균형이 긴요한 과제라고 여겨져서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고 김대중 대통령님의 말씀과도 잇닿는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지금은 사판의 시대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사판을 연마하면서도 이판에 대한 관심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뭐 이판사판으로 지내는 제가 할 소리인가 싶지만요.^^; 
 

입 벌리고 있는 사자와 입 다물고 있는 사자(7월 11일 촬영)

잠깐 언급했던 경주 괘릉의 돌사자(2월 13일 촬영)

2. 철원의 승일교(8월 25일)

철원은 38선보다는 북쪽에 있고, 휴전선보다는 남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 초기까지는 북한의 땅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남한의 땅이 된 것이죠. 여담이지만 ‘남한’ 대신 ‘대한민국’이나 ‘한국’이라는 표현이 나을까 싶다가도 ‘북한’을 언급할 때는 ‘남한’이라고 말하는 것이 분단을 인식하고 통일을 지향하는데 좀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표기하려면 북한의 국호를 온전히 불러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남북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아서 정식 국호를 안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는 비판도 수긍할 만합니다. 어찌 보면 북한이나 남조선은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니까요.


본래는 철원으로 래프팅을 갈 계획이었는데 비가 많이 내려서 래프팅은 취소되고 숙소 근처를 산책했습니다. 그 덕분에 철원의 지형학적 위치를 설명해주는 문화유산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한탄강 위에 호젓하기 터 잡은 승일교가 그것입니다. 승일교는 이승만의 승(承)과 김일성의 일(日)을 합쳤다는 설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고 박승일(朴昇日) 대령을 기리고자 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승일교 초입에 붙은 석판에는 후자의 설명을 기록하면서 ‘북괴’라는 표현을 쓰는데 참 오랜만에 접하는 단어였습니다.


다리의 제작을 두고도 설이 갈려서 안내판에 두 가지 설명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건 북한이 다리의 절반 정도를 만들고,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이 완성해서 남북이 반반씩 만든 다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리가 좌우대칭이 좀 안 맞는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는데 실제로 양쪽의 무지개(홍예) 모양이 좀 다르다고 합니다. 작은 공법의 차이보다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남북 사이에 커져가는 마음의 거리겠지요. 래프팅 명소로 더 유명해진 곳에서 승일교는 통일을 기원하며 서있습니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너와 내가 닦고 낸 긴 길
형제들 손잡고 줄지어 서고
철조망도 못 막아
지뢰밭도 또 못 막아

휴전선 그 반은 네가 허물고
나머지 반은 내가 허물고
이 다리 반쪽을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을 내가 만들었듯
- 신경림, ‘승일교 타령’ 中


승일교는 등록문화재 제26호입니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2001년 7월 도입했습니다. 그동안은 일제 잔재라는 오명과 개발 광풍 속에서 멸실되기 일쑤였다면, 등록문화재 제도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줍니다. 등록문화재 제도가 정착된다면 일상의 흔적들에 대한 기록과 보존도 한층 강화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특히 등록문화재에는 성당이나 교회도 적잖이 지정되어서 불교 문화유산에 편중된 우리네 문화유산의 지평을 좀 더 넓혀주는 긍정적 효과도 있습니다.


3. 비무장지대의 태봉국 도성(8월 25일)

‘궁예도성’은 좋은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궁예도성은 궁예를 폄하했던 고려, 조선시대의 지리서나 일제 강점기의 지도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최근 철원군은 “역사적으로 국가가 건국됐거나 천도(遷都)를 했던 경우 도성에 국왕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사례는 없다”라는 지적을 받아들여 궁예도성을 태봉국도성으로 개칭했습니다. 승일공원에 세워진 관광안내지도에도 태봉국 도성이라고 표기되어 있더군요. 승자에게 치우친 기록을 조금 교정하겠다는 애틋한 마음씨가 고마웠습니다.


하나의 사물을 표현하는 데 단 하나의 정확한 표현이 있다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은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꼭 이런 이론이 아니더라도 태봉국 도성이 좀 더 올바른 표현인 것은 또렷합니다. 이름은 되찾았지만 태봉국 도성은 여전히 가볼 수 없는 곳입니다. 비무장지대(DMZ)에 남아있어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이 태봉국 도성을 함께 조사하는 모습을 희망해봅니다. 개성 일대의 고려왕릉들도 보존이 제대로 되지 못해 황폐해져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자본주의의 안목(?)으로라도 투자할 수는 없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아참~ 승일교 근처에 자리잡은 ‘궁예도성’은 음식점 이름이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간 분들과 영화 ‘인셉션’에 나오는 아리아드네 이야기에서 미노타우로스까지 화제가 이어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소머리를 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묘사됩니다. 문득 궁예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삼국사기』에서 미노타우로스 정도로 못된 인물로 그려집니다. 궁예의 포악한 성격을 나타내는 구절이 적잖고 비참한 최후 역시 박절하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전승되는 이야기는 궁예가 극악무도한 인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궁예와 관련한 지명이 오늘날 많이 전해지는 까닭도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였던 궁예에 대한 연민이 전해지는 탓이겠지요.


신화학자 정재서 선생님은 신화 읽기의 편식 현상이 상상력의 빈곤과 편견을 낳는다며 풍부하고 균형 잡힌 상상력을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와 동양신화는 물론 다른 신화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양의 미노타우로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소머리를 한 염제(炎帝) 신농(神農)이 있습니다. 신농은 농업의 신이자 불의 신이며 복희(伏羲), 황제(黃帝)와 더불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삼황으로 꼽힙니다. 신농은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해 중국 주변에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등장하기도 하고, 월남의 개국신화에서 시조신으로 나타난다고 하네요. 신농은 동이족 계열의 신화로 보는데 신농의 후계자가 바로 잘 알려진 치우(蚩尤)입니다. 신농은 인간에게 농사짓는 법이나 독초와 약초를 구별하는 법 등을 가르쳐 준 어진 신입니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했다고 하니 신농 같은 자애로움을 지향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패배자에게 돌아온 것은 미노타우로스라는 멍에였네요.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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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이 대학도서관 쓰려면 100만원 기부하라? (기사 클릭)

이태윤님께서 오마이뉴스에 대학 졸업생 대출 제도 관련 기사를 기고하셨습니다. 나눠 읽고 싶어서 링크를 겁니다. 기사 말미에 저도 인터뷰이로서 잠깐 등장합니다.^^; 이태윤님께서 주신 질문에 대한 서면 인터뷰 답변을 작성하면서 일전에 제 블로그에 올린 <졸업생에게도 도서 대출을!>이란 잡글을 상당부분 재인용했습니다. 제 의견이 크게 바뀐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정보 갈무리해주신 이태윤님께 다시금 감사합니다.^^


1. 졸업생이신데 필요한 책들은 어떻게 구해 보시나요?

제가 졸업한 학교는 열람실 이용과 자료 열람 및 복제 등은 허용하지만 자료 대출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도서관 홈페이지 상에서 ‘대출불가 사용자’로 분류되는 것을 보고 졸업을 실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서 대출 예약제를 실시하는 학교이다 보니 이용도가 높은 도서의 경우 예약이 불가한 졸업생은 거의 열람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정말 보고 싶은 책의 경우에는 후배들이 대출한 책을 얻어서 보기도 했습니다. 도서관 열람시간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열람 중에 누군가 대출해가면 독서 흐름이 끊기기 때문에 부득이 후배들에게 부탁해 책을 좀 나눠보기도 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죄다 빌려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새책이나 헌책을 사게 됩니다. 실제로 졸업한 이후에 평소보다 책을 더 많이 구매한 것 같기도 합니다. 설령 중고도서 시장이 활성화된다고 해도 한계가 있겠지요. 모든 종류의 책이 헌책으로 나와도 그것을 다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취업을 준비하거나 대학원 등의 진학을 준비하는 졸업생들은 봐야 할 책은 많으면서도 별다른 수입이 없으니 개인의 구매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올 3월부터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입학하는 학교 역시 현재는 졸업생 대출을 허용하지 않는 학교이다 보니 벌써부터 살짝 걱정입니다.^^;


2. 많은 대학이 졸업생 대출 예치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따라 금액 차이가 큰데요. 본인의 경우 얼마까지 예치금으로 납부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기사에 나오는 표를 참고해주세요)

저는 책을 많이 빌려보려고 하는 편이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예치금을 치룰 의향이 있습니다. 예치금이 가장 높은 수준의 학교가 30만 원 정도이던데 그 정도까지도 별 다른 거부감이 없습니다. 예치금이 아닌 연회비를 내야하는 학교의 경우 10만 원 정도면 높은 수준이던데 그것도 납부할 의사가 있습니다. 최고 수준의 예치금과 최고 수준의 연회비를 모두 내야한다고 해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부득이하게 운영하는 예치금이나 연회비 제도는 상징적인 수준으로 줄여나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기에 따라 돈으로 차별하는 인상을 풍겨서 섣불리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도서 대출 이용도에 따라 지불하고자 하는 액수가 다를 테니 조금 차등화 하는 방향도 고려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예치금만 납입하면 2권을 대출해주고, 예치금에다 연회비까지 납부하면 3권까지 대출해주는 식의 차등 말입니다. 오죽 답답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졸업생에게 도서관 이용 방식을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료실 열람은 기본적으로 허용하되, 도서 대출과 열람실 이용 가운데 선택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열람실 이용보다는 도서 대출이 긴요한 저 같은 처지의 사람이 적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재학생들에게 갈지 모르는 피해를 축소하는 방법의 하나로 고안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세세한 조치가 학교에서 실시하기에 비교육적인 처사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자 하는 이에게 아예 기회를 제약하는 것이 더욱 비교육적인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도서 열람과 도서 대출은 엄연히 다른 수준의 조치입니다. 저 또한 장기적으로는 졸업생에게도 도서 대출의 제약이 없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학교마다 처한 사정에 따라 당장 한정된 자원을 대폭적으로 늘릴 수 없다면 이런 식의 제약을 두고, 점차 줄여나가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3. 예치금이 아닌 대학발전기금을 내고 책을 빌린다면 사용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기사에 나오는 표를 참고해주세요)

위의 질문에서 답변 드렸듯이 가능한 한 높은 수준까지 지불할 의사가 있습니다. 도서관 대출 이용을 위한 납부인만큼 도서 구입비로 한정해서 사용하는 도서구입기금 같은 형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좀 더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학발전기금이도 크게 시비 걸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대학발전기금으로 100만 원씩이나 납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던데 졸업생 대출이 긴요한 처지에 있는 분들의 평균적인 지출 여력을 헤아려볼 때 다소 과도한 감은 있습니다.


대학발전기금이라는 명목 대신 동문회비라는 명목의 돈을 납부하면 책을 빌려주는 경우도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평생회원 자격의 동문회비를 한꺼번에 납부하도록 해서 일시불을 요구하는 경우는 1년 남짓한 기간 동안만 졸업생 대출을 이용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부적절한 제도인 듯합니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동문회 차원에서 졸업생 대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모습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장기간에 걸쳐 졸업생 대출 이용을 할 의지가 있는 분들에게는 큰 금액을 일시불로 납부하게 하더라도, 단기간에 걸쳐 졸업생 대출 이용을 하려고 하는 분들에게는 예치금이나 연회비 제도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생 대출이 불가능한 처지이다 보니 예치금, 연회비, 대학발전기금이라도 내고 대출이 가능한 학교가 모두 부러울 따름이지만 이미 졸업생 대출을 허용하는 학교에서도 좀 더 세분화된 정책을 마련하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합니다.


4. 졸업생에게 대출을 허락하지 않는 학교에서는 재학생에게 피해가 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학교 측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실제로 졸업생들이 졸업생 대출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서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혹시라도 재학생들의 도서 이용에 불편을 초래한다면 책을 빌려보는 마음이 그리 즐겁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학교 측에 도서관과 관련한 자원을 확충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야겠지만 그것은 점진적인 과제이지 단시일 내로 해결될 성격이 아닙니다. 보고 싶은 책을 제때 못 보는 불편함은 누구에게나 크겠지만 재학생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동감합니다. 그래서 졸업생들이 예치금 등의 금전적인 지출을 감수하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대학도서관에서는 보통 국내 단행본의 경우 한 종류의 책을 두 권 정도 구매합니다. 요즘에는 대학들이 등록금을 함부로 올리지 못하는 분위기다 보니 도서관 예산 역시 동결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한 권만 구매하는 경우도 적잖은데 대다수 학교도 비슷한 사정인 것 같습니다. 2008년 이후에 대학도서관들이 국내 단행본 구입에 소극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하간 한두 권의 책을 여러 학생이 돌려봐야 하는데 여기에 졸업생이 동참하고, 연체 문제까지 발생하게 되면 재학생들의 피해가 더욱 가중될 염려가 있습니다.


어떤 대학들은 지역 주민에게도 도서관을 개방한다고 들었지만 대학 당국이 우선 졸업생들에게 도서 대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대학도서관이 갖춰야 할 공공성 이전에 자기 몫의 사사로움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재학생에 비해 더 적은 권수를 더 짧게 빌려주고, 연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한다면 마냥 불가한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재학생 입장에서는 당장은 조금 불편한 점이 늘어날지 모르지만 재학생들도 언젠가는 졸업생이 되는 만큼, 이런저런 제약조건을 붙여 졸업생 대출을 허용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5. 동네 도서관(시립, 구립)이 있는데 굳이 대학도서관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졸업한 이후에 동네에 있는 공공도서관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은 장서를 보유하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개인적인 독서 취향 때문에 공공도서관보다는 대학도서관에 필요한 책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전공서적이나 학술서적은 대학도서관 사정이 낫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찾지 못했지만 장서수나 시설 면에서 공공도서관을 능가하는 대학도서관이 많을 것입니다. 대학도서관은 공공도서관에 견주어 절대적인 숫자는 적지만 장서수는 훨씬 많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도서관 관련 통계를 신문기사 검색을 통해 산발적으로 접했는데 앞으로는 도서관 관련 통계가 체계적이고 주기적으로 관리되길 바랍니다.


여하간 대학도서관이 공공도서관에 비해 장서수는 많지만 이용객수는 적다는 조사 결과도 본 기억이 납니다. 물론 대학도서관은 그야말로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니 모든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학도서관 개방 목소리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개방의 시발점은 졸업생 대출 확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악한 공공도서관 상황 때문에 주민들에게 대학도서관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을 당장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면 학교 구성원이었던 이들을 먼저 보듬어야 하지 않을까요?


6. 졸업생 도서 대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저는 궁극적으로 졸업생이 아무런 제약 없이 도서 대출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앞으로 대학을 평가할 때 졸업생 대출 여부 같은 도서관 관련 규정에 대한 평가도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가 졸업생 대출이 허용되지 않는 불편함을 토로하지만 심지어 휴학생에게도 도서 대출이 까다로운 학교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상당수 대학의 재정 운용에서 도서관 예산이 후순위로 밀려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이런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모아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끝으로 졸업생 대출을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을 책값이나 좀 아끼려는 심보에서 나온 행동으로 보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대출을 요구하는 분들은 도서관이 도서관다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도서관이 본연의 기능을 잃고 독서실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많이 접했습니다. 도서관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곳이면서도 빌려주는 곳입니다. 대학도서관이 책을 빌려주는 일에 너무 인색하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도서 복지’라는 말을 꺼내보고 싶습니다. 졸업생 대출 허용을 비롯한 도서 복지는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국민의 문화생활에 이바지하는데 큰 보탬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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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의 ‘세계 3’에 대한 논문들을 엮은 『객관적 지식』이라는 책이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관계로 여러 선생님들의 글을 참조해 이해해보았습니다.


일전에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라는 포퍼의 저서가 출간된 적이 있다. 포퍼는 유기체를 목적추구적이라기보다는 문제해결적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문제나 문제상황이 감각기관의 인식보다 선행한다고 보며, 우리의 감각기관은 문제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나 동물의 목적이 특정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생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통한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보는 셈이다.


가령 어떤 동물이 물을 마시려고 풀숲을 뚫고 갔다고 할 때, 다른 동물은 앞선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좀 더 쉽게 물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보면 최초의 동물이 특별히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길이 넓혀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계획하지 않은 귀결이다. 포퍼는 언어나 제도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포퍼는 문제를 과학 더 나아가 우리 삶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행착오의 방법을 “문제(Problem 1)→잠정적 이론(Tentative Theory)→오류 제거(Error Elimination)→새로운 문제(Problem 2)”로 도식화한다.


오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인 토론과 경험적인 테스트가 수행되어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 2는 문제 1보다 좀 더 진리에 가까운 객관적인 지식이 된다는 논리다. 이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지식이 성장한다고 이해하면 될 듯싶다.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절대적 가치로서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면 닫힌 사회로 가게 된다며 비판한 내용을 상기해보면 좋겠다. 그의 사회철학인 ‘점진적 사회공학’의 요체는 결국 삶이 문제해결의 연속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해결에 적합한 사회는 결국 자유롭게 비판하고 토론하는 열린 사회라는 데까지 이어진다.


객관적 지식의 성장을 주창하는 포퍼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 세계 이론’을 제시한다. 포퍼는 물질의 세계인 ‘세계 1’, 그리고 주관적 마음(정신, 의식)의 세계인 ‘세계 2’와 구별되는 ‘세계 3’을 고안한다. 객관적 사상의 세계, 마음의 산물이면서도 그 인식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는 세계 3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상, 언어, 윤리, 제도, 과학, 예술 등을 설명한다. 세계 1은 시공간에 있는 물질의 세계 정도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세계 2와 세계 3의 구별에 좀 더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이 이론의 특성상 세계 1의 정의는 물리적 속성이라는 측면이 부각되기만 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사실 포퍼 자신도 세계를 반드시 세 가지로 분류해야만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는 않는다. 스스로도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 편의상의 문제라고 보고 예술작품은 세계 4에 속하는 것으로 봐도 괜찮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 1, 세계 2, 세계 3이 시간의 순서대로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물리적 세계가 가장 분명하게 실재한다고 보는 것은 딱히 더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다. 포퍼는 의식의 출현은 생명현상에서 진화한 현상이라고 설파한다.


다시 말해 모든 유기체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계 1의 생명체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이 세계 2를 낳게 된다. 세계 1이 세계 2를 출현시켰지만 세계 2가 출현한 다음에는 자신을 출현시킨 세계 1에도 작용하여 변화시키는 모습을 두고 세계 2가 세계 1과 상호작용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는 세계 2와 세계 3에도 적용되어 세계 3이 세계 2에서 출현하지만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영역을 구축하며 세계 2와 상호작용한다. 포퍼는 세계 3이 세계 2를 매개로 하여 세계 1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가령 세계 3에 속하는 설계도나 각종 이론들이 세계 2에 속하는 건축가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해보자. 건축가는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땅을 얼마나 파고, 벽돌을 얼마나 쌓을지를 정해서 세계 1인 건축물을 만든다. 이처럼 세계 3은 ‘세계 2에 의한 산물의 세계’로 정의해볼 수 있다. 건축가가 참조한 세계 3의 이론은 결국 세계 2의 영역에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포퍼는 세계 3과 우리 자신이 상호 작용해서 객관적인 지식의 성장을 낳는 것은 동식물의 진화 같은 생물학적인 성장과 유사하다고 역설한다.


포퍼는 우리가 창안했지만 우리가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 3에 대한 예시로 자연수를 언급한다. 자연수는 인간의 창안물이지만 그 자신의 자율적인 문제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로 소수(素數)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소수의 존재는 인간의 의식인 세계 2에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 3에 존재하다가 발견된 것이다. 소수가 수학자들에게 발견된 이후에는 세계 2와 세계 3 모두에 존재하게 되었다. 덧셈이나 곱셈은 인간이 발명했지만 교환법칙, 결합법칙, 분배법칙은 의도하지 않은 발견인 것도 비슷한 사례다.


세계 3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인간의 산물이지만 일단 이론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갖기 시작한다. 이론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귀결을 산출하며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
One may say that World 3 is man-made only in its origin, and that once theories exist, they begin to have a life of their own : they produce previously invisible consequences, they produce new problems.
- K. R. Popper and J. C. Eccles, The Self and Its Brain(1977)


인간 정신의 산물들의 세계인 세계 3이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을 생산해낸 인간과 분리된다는 점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세계 3은 세계 2에서 파생되었으되 예기하지 못한 논리적 귀결들과 문제들로 구성되는 자율적 영역이라는 것이 포퍼 주장의 핵심이다. 이런 양태를 예기치 않게 불시에 나타난다는 뜻에서 창발적 진화론(emergent evolution)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의도치 않은 귀결, 인식주체를 벗어난 독자적인 발전과 전개는 세계 3의 자율성을 논증한다.


정리하자면 주관적인 인식의 세계인 세계 2에서 객관적인 인식의 세계인 세계 3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진화론에 대한 논증이야말로 포퍼가 애지중지했던 객관적 지식의 존재에 대한 논거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산출한 지식이나 이론 역시 오류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지식은 비판에 열려있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인 면모를 지닌다. 포퍼는 세계 2와 세계 3을 구별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인식하는 자가 없는 인식이다. 그것은 인식 주체가 없는 지식이다.
Knowledge in the objective is knowledge without a knower: it is knowledge without a knowing subject.
- K. R. Popper, Objective Knowledge : An Evolutionary Approach(1972)


세계 2와 세계 3의 구별은 획기적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말하는 사람과 그가 내놓은 이론, 지식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 지식은 어떤 사람의 행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말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비판을 구분해야한다고 설파한다. 비판과 토론에서 누가 주장했는가보다 어떤 주장을 했느냐에 주안점을 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 것이다. 이 전환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을 동일시하지 않는 혜안을 선물해준다.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제멋대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주장 자체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사람=그 사람의 말과 글‘이라는 등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포퍼는 과학의 객관성은 과학자 개인이 객관성을 갖추려는 시도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구와 원수 사이의 협동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객관성은 자기 혼자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 속에서 섞이고 스미면서 만들어진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견을 나누고, 비판을 가한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주의주장을 없애는 길은 그 주의주장의 제창자와 추종자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의주장 자체의 허실을 가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어떤 주장과 그 주장을 한 사람을 동일시해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주장을 묵살했다. 포퍼는 잘못을 통해서 배우려는 자세와 남을 함부로 단죄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먼저 점검하는 태도를 주문한다.


예송논쟁이 한창일 때 서인인 송시열에 대항했던 남인 논객 윤휴가 숙종 6년(1680) 억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조정이 어찌하여 선비를 죽인단 말인가(朝廷奈何殺儒者云)?”라고 외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쟁이 당초 취지에서 틀어져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던 참담함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려는 이상이나 신념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도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없는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공서파(攻西派)의 강경 대응 주문에 정조는 “사교(邪敎:천주교)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유학)의 진흥에 의해 막을 수 있다”라고 탄압에 반대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한 개명군주의 바람과는 달리 정조 사후에 천주교도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이어졌다. 그러나 교조화된 성리학의 답답함을 서학으로 풀게 된 이상 수천의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교사에 의한 전파보다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수용이 강한 한국 천주교 보급은 사대부의 무능한 통치에 신물이 난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홍경래가 최후로 버틴 정주성이 관군에 함락되면서 2천9백83명이 사로잡혔을 때 열 살 이하의 남자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을 모두 처형했다는 끔찍한 기록이 떠오른다. 지역 차별을 반성하지 않고 피로써 잘못을 감추려했던 역사의 비극이다. 어디 그뿐인가. 장보고에게 비수를 꽂는다고 신라 골품제의 비효율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만적을 강물에 던진다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육신을 거열형에 처한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찬탈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봉준을 죽여도 사람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식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없애 그 사람의 이론과 사상을 손쉽게 정리하는 야만을 저지르기 힘든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사람을 쳐내는 광경을 목격한다. 김제동, 진중권, 정연주, 이동걸, 황지우, 신태섭 등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명박 정권의 코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석연치 않은 모양새로 일터에서 쫓겨난 분들을 열거하려니 화가 난다. 비판을 감내하지 못하고 다양성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세 세계 이론은 그 사람이 내놓은 지식과 인식, 내뱉은 말과 글을 비판함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열린 세상을 만든다. 세계 3은 덜 폭력적인 문화적 진화를 바라는 희망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가수 김민기는 “내가 만든 노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노래란 향유하는 사람들 나름의 창조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자신의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무덤덤하다고 밝혔다. 이 말처럼 세계 3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되는 지식들을 모두 자신의 소유인양 착각하지 않는 겸손함을 가져야겠다.


세계 3이란 아이디어는 치열하게 토론하고 정직하게 경쟁하되 겸허하게 수용하고 깨끗하게 승복하라는 깨달음을 준다. 사람을 원망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세계 2와 세계 3을 분간할 수 있다면 우리네 삶은 한결 넉넉하고 너그러워질 것이다. 포퍼의 명언으로 맺는다.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그리고 노력하면 우리는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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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의 2009년 하반기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의 주제는 ‘천연기념물과 명승’이었습니다. 기대하지도 못한 큰 상을 받게 되어 그저 민망합니다. 글자수 제한과 시간 제약 때문에 문장을 급하게 줄이느라 생긴 어색한 표현과 오타를 일부 수정해서 올립니다.


1. 끝내 기도하다

천연기념물 8호 ‘재동의 백송(白松)’을 만나러 서울 북촌을 거닌다. 헌법재판소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 뒤뜰의 백송을 마주한다. 백송에 다가가기 전에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을 얻길 바라는 기도 따위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하얀 빛깔에서 빚어내는 신령함에 넋을 잃고 내 탐욕을 늘어놓았다. 나를 위한 기도가 조금 덜 추하도록 애써야겠다.


2. 소나무를 사랑하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무를 조사하면 늘 소나무가 1위를 차지했다. 2005년에는 소나무재선충병 방제특별법을 제정하기도 했는데 소나무라는 특정 수종을 지키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한 보기 드문 일이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 소나무는 가장 애틋한 인연을 맺은 나무인 셈이다. 옛날에는 아이가 태어날 때 소나무 가지를 끼워 금줄을 쳤다. 이 아이는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자랐으며 소나무를 땔감으로 삼은 밥을 먹었다. 소나무 껍질로 구황을 하기도 했다. 세상을 떠날 때도 소나무로 짠 관에 들어가 솔숲에 묻혔다. 이처럼 일평생 베풀기만 하는 소나무에 대한 고마움으로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를 의인화해서 벗으로 삼았다. 속리산의 정이품송은 벼슬을 얻었고, 경북 예천의 석송령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장학금도 주고 세금도 낸다. 자연을 이용하는데 급급한 오늘의 세태와는 사뭇 다른 자세다. 전북 전주의 삼천동 곰솔은 누군가 독극물을 투여했는데 천연기념물 지정으로 말미암은 불편함에 대한 앙심으로 추정한다니 씁쓸하다.


물론 소나무는 단순히 실용성에서 그치지 않고 고유의 매력이 넘친다. 그 매력이 생활 속의 친숙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일찍이 공자는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어려울 때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는 뜻처럼 소나무 하면 굳은 절조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앞선다. 성삼문은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겠다고 읊었고, 이개는 현릉(顯陵)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다고 노래하며 두 사육신은 죽음을 맞았다. 더우면 활짝 피었다가 추우면 말라 버리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하지만 이를 거슬러서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한결같은 소나무의 모습을 닮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옛사람들의 마음자리를 흠모한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면 소나무 감상이 차가운 이성의 눈매로만 다할 수 없음을 알겠다.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할 때 이상적은 추사를 위해 서책을 수집해 보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인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에서 느낀 바가 있었으리라. 스승은 권세와 이익에게 달려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준 제자에게 세한도(歲寒圖)와 발문으로 극진한 감사를 표한다. 세한도에 나오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굳건하다. 이상적 같은 이가 좀 더 많아진다면 우리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시서화(詩書畫)로 다양하게 변주된 소나무의 미덕은 우리가 후손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정신적 자산이며 외국에 우리의 이미지를 알리는 훌륭한 기호다. 일전에 경복궁 근정전을 보수할 때 대형 국산 소나무가 없어서 북미산 소나무를 가져다 쓴 일이 있지만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지길 희망한다.


3. 무심해서 아름답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벗겨지면서 흰빛을 띄기 때문에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현존하는 백송은 거의 다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구해다 심었으리라 추측한다. 사대부들이 모여 살던 서울에서 백송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재동의 백송 역시 고종 때는 개화파의 선구자 박규수의 집이었다. 박규수의 사랑채에 모여 백송을 완상하며 우국지정을 토로했을 젊은 꿈 앞에 부끄럽다. 이처럼 백송은 중국과의 교류의 증거이면서 양반 가문의 증표이다. 백송은 옮겨심기가 까다로워서 이역만리에서 끝내 운명한 백송이 무척 많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흔히 볼 수 없는 소나무이다 보니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서울에는 6그루, 전국에는 12그루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서울에 2그루, 전국에 5그루만 남았다.


재동의 백송은 600여년 된 나무로 한국에서는 가장 큰 백송이다. 근처에 자리 잡은 천연기념물 9호 수송동 백송은 조계사 대웅전 옆에 옹색하게 지내느라 생장의 어려움을 겪는 반면에 재동의 백송은 비교적 너른 터에 고즈넉이 자태를 뽐낸다. 백송의 수피는 연한 녹색이다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흰색이 짙어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흰 얼룩이 커진다고 해야겠다. 흥선대원군이 백송의 껍질이 유난히 희게 변하는 것을 길조로 삼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끝낼 수 있음을 확신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회청색에서 회백색으로 변해가는 과정 모두가 분청사기의 투박한 느낌을 빼다 박았다. 문일평은 ‘白松의 美’라는 글에서 “아무리 진목이훼(珍木里卉)가 있어도 모르는 이에게는 그것이 범수상초(凡樹常草)와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탄식했다. 평소 자주 지나치던 백송의 가치를 뒤늦게 깨닫고 쓴 글이다. 푸른 솔잎과 하얀 무늬가 햇살을 받아 빚어내는 색채 대비를 이제라도 만끽해서 다행이다.


백송의 나이대로라면 단종 1년에 벌어졌던 계유정난의 참상도 목도했을 것이다. 김종서의 집이 있던 재동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재를 뿌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이름이 ‘잿골’로 바뀌었고 오늘날 재동의 유래라고 한다. 번식력이 약한 백송은 혼자 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홀로 이 광경을 바라봤을 백송은 인간세상의 훼예포폄과 흥망성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나이를 먹었다. 국가권력의 정통성이 유린되었던 터에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아 의미심장하다. 계유정난이 발생한 지 338년만인 정조 15년에 단종의 능에 단종의 충신들을 제향 함으로써 역사 바로잡기가 마무리됐다. 역사는 결국 올곧게 산 자의 편인지 모르나 이렇게 만날 뒷북만 쳐서는 안 될 일이다. 헌정 질서를 수호하는 헌재의 책무가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4. 넓어질수록 깊어진다

문화유산 답사라고 하면 궁궐과 사찰, 박물관과 미술관만 떠올리기 일쑤다. 천연기념물과 명승 제도는 문화유산에 대한 사고의 틀을 넓힐 것을 요구한다. 외부의 자연뿐만 아니라 내부의 자연마저도 가만두지 못해 안달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 천연기념물의 존재는 전환점을 마련해줄 수 있다. ‘생태맹(生態盲)’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신비함과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우리의 사고와 의식으로부터 자연이 사라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천연기념물과 명승에 대한 문화적 가치를 부여할수록 생태맹을 좀 더 극복할 수 있으리라. 이는 생물다양성을 국가 경쟁력의 지표나 국가 브랜드의 척도로 활용하고 있는 추세에 걸맞다. 자연의 다양성은 문화의 다양성으로 직결된다.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된 이유는 석공의 솜씨가 빼어난 점과 더불어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문화유산에서 인공미를 느낄 때 그 소재까지 헤아린다면 좀 더 복합적인 감상을 할 수 있다. 문화유산의 모태가 되는 자연유산을 도두보는 혜안을 갖추는 셈이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자연이 경제다』에서 자연을 지키는 게 경제적이라고 역설한다. 무조건 자연보호를 해야 한다는 윤리의식에 호소하기보다는 생태자본의 효율성과 화폐가치를 평가해 설득해야 한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경제적으로 오래간다”라는 명제를 통해 자연과 경제가 양자택일이 아닌 양립할 수 있는 가치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연을 자기 자본금으로 여기며 제 것으로 안다. 자연스레 어떻게 하면 이 자본금을 굴려서 이익을 남길까를 궁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땅이 우리들의 자손에게 빌린 것이라면 자연은 우리의 부채이다. 어린이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빚이란 말이다. 이곡의 ‘차마설(借馬說)’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내 소유물은 결국 빌린 것일 따름이다. 문화재 대신에 문화유산이라는 말을 쓰기를 주장하면서 소유물을 연상시키는 ‘재산(property)’이란 표현보다는 ‘유산(heritage)’이 적절하다는 목소리도 같은 맥락이다.


얼마 전 등재된 조선왕릉을 비롯해 8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우리나라는 세계유산에 대한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자연유산에 대한 관심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는 현재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하나에 불과한 세계자연유산을 2012년까지 3곳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한다. 문화유산에 치우쳤던 행정이 자연유산에 눈을 돌린다는 반가운 신호다. 당초에 제주도를 세계자연유산으로 삼으려 할 때 지역주민의 반대가 적잖았다고 한다. 다행히 관광 명소로 부각되면서 긍정적 인식의 확산에 기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유산 지정에 대해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손사래를 치는 일이 많다. 앞으로 정부는 국민의 권리의식에 높아지는 상황에 발맞춰 섬세한 보상과 촘촘한 계획으로 주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2009년 5월 자연유산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문화재위원회장이 탄생한 것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옛날 문화재의 개념이 점이었다면 이제 점에서 면으로, 면에서 공간으로 확대”된다는 이인규 문화재위원장의 말씀에 공감한다. 개별 전각에 후원 조경의 원리가 융합해서 오늘날 창덕궁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문화유산 감상은 넓어질수록 깊어진다.


5. 항심을 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거드럭거릴 틈을 주지 않고, 무용함은 죄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이 단지 항산(恒産)이 모자라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항산과 항심(恒心)의 선후관계가 뒤집어질 이유는 없더라도 항심에 대한 관심도 종요롭다. 항산은 결국 항심으로 이어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송을 응시하며 항심을 품는다. 조금 천천히 가면 넉넉히 볼 수 있음을, 조금 비우고 살면 웅숭깊어질 수 있음을 깨우친다. 솔향기에 취한 것도 아닌데 세한(歲寒)에 얼굴이 발그레하다.



장자는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발이 닿는 쓸모 있는 땅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다 파서 없앤다면 딛고 있는 땅이 쓸모없어지고 만다는 비유를 들었다. 상품화할 수 있는 문화만을 숭상하는 오늘날 곱씹어볼 대목이다. 백송이야 경제적 잣대를 통과하겠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산천초목들도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백송은 밑동부터 V자로 갈라진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나눠진 줄기는 하늘에서 무성한 잎을 맺어 다시 만난다. 결국 뿌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말해준다. 자세히 보면 지지대를 알록달록 칠해 놓은 것을 발견하는데 백송의 빛깔을 돋보이게 하는 배려 같아 정겹다.


헌법정신이라는 뿌리 위에서 이따금 갈등할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는 힘을 합쳐야 함을 백송은 담담히 술회한다. 이 정갈한 노거수(老巨樹)처럼 헌재가 우리 사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길 희망한다.


김홍도의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에는 “바다 용왕이 계신 곳에서도 나는 옆으로 걷는다(海龍王處也橫行)”라는 화제(畫題)가 적혀있다. 헌재를 비롯해서 공직자들은 살아있는 권력에 무심할수록 권위를 인정받을 게다. 백룡의 등 위에서 사는 새들도 그런 마음일까.


조계사 대웅전에 있는 수송동의 백송이다. 재동의 백송과 비교해서 답사하면 좋다.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남아 있는 모양새가 이채롭다. 재동의 백송처럼 아득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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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월 초에 ㅊ역에서 놀라운 게임기를 발견했다. 집게발이 달린 뽑기 기계에다 물을 채우고 바닷가재를 넣어 두었다. 불결한 공간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바닷가재가 너무 측은했다. 배병삼 선생님의 어느 칼럼 제목인 ‘먹을거리에 대한 예의’가 너무 없는 그 비정한 게임기가 미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종류의 게임기가 한 때 유행처럼 퍼지기도 한 모양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ㄴ역에서 본 바닷가재 게임기의 수질은 그나마 나아 보였다. 게임기에서 뽑은 바닷가재를 방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볼 때 어차피 조리될 운명이라면 남은 생애를 굳이 저런 곳에 가둬야할까 싶다. 위생상의 문제 때문에 조리하지 않고 버려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리라.


문득 광우병이 초식동물인 소에게 도살한 동물의 살과 뼈의 가루를 섞어 만든 사료를 먹인 일과 관련되었다는 조사가 기억났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국민의 건강을 위해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진 30개월 미만의 소만 수입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소의 생명을 그만큼 단축하자는 뜻이니 따지고 보면 잔인한 말이었다. 물론 그 당시 시국이 여기까지 검토할 여유를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공장식 사육시스템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차분히 귀를 기울여 볼만 하다. 강명관 선생님은 『시비를 던지다』에서 우리는 “미국이란 강자의 횡포를 통탄”하면서도 “우리 역시 동물에 대해 강자의 횡포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꼬집었는데 훌륭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강 선생님은 이어서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 식육(食肉)편을 인용한다. 성호 선생님은 만물이 사람을 위해 생겨났기 때문에 사람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주장에 대한 정자(程子)의 논변을 소개한다. 정자는 사람을 물어뜯는 이[蝨]를 위해 사람이 생겨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모기가 사람의 피를 먹고 산다고 사람이 모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성호 선생님은 “고기를 먹음은 군자로서도 부득이한 일인 만큼, 또한 마땅히 부득이한 마음으로 먹어야 할 뿐이다”라고 역설한다. 성호 선생님이 오늘날의 넘치는 육식을 보신다면 약자의 살을 강자가 뜯어먹는 행위라고 비판했을 듯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절제는 미덕이다.
 

피터 싱어 선생님의 『동물해방』, 『죽음의 밥상』을 읽으며 여러모로 괴로웠다. 육식 애호가인 나는 혀의 만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당장 육식을 그만 두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육식을 적극적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듯싶다. 동물의 처우 개선을 바라는 나의 바람은 이토록 시시한 것이다. 이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잡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채식주의자에도 여러 무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성 단백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비건(vegan)만 있는 게 아니라 조류와 어류만 먹는 사람, 어류만 먹는 사람, 우유와 달걀까지 먹는 사람, 우유까지 먹는 사람 등으로 나뉘었다. 마찬가지로 육식을 하는 사람 가운데는 방목된 고기만 먹는 사람, 덩어리로 된 고기는 먹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런 다양한 층위의 노력을 보고 나도 먹을거리에 대한 예의를 요청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복지 혹은 동물해방은 여러 빛깔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가령 육식을 하되 깐깐한 사람들처럼 낮은 단계의 동물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동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을 위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분류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물권리론을 주창하는 분들은 이러한 인간 중심적 윤리를 비판하며 동물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천부인권의 개념을 확장한 천부생명권(天賦生命權)이라고나 할까. 아마 강고한 채식주의자들은 동물권리론에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희생하는 현실은 인정하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자는 동물복지론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단순히 인간이 안전하기 위해 동물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사고를 뛰어넘어 먹을거리 앞에서 인간의 품격이나 기품을 갈구하는 게 더욱 인간다운 사회로 맞닿는 오솔길이 아닐까 싶다. 결국 동물해방을 인간이 덜 잔인해지는 방편이나 수단으로 삼는 셈인데 일단 이 정도부터 시작하는 것도 유의미한 시도다. 동물보호단체 휴메인소사이어티(HSUS)가 제안했던 고기를 덜 먹고(Reduce), 먹더라도 자연친화적으로 생산된 고기를 먹고(Refine), 가능하면 채식으로 식습관을 바꾸자(Replace)라는 ‘3R’에 이르지 못한다고 크게 자책하지 말자(동물실험의 3R 원칙을 응용한 듯하다). 티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연산(!)을 얼마나 맛있게 요리하는지 보여주려고 애쓰는 장면을 불편하게 바라보거나, 식당에서 고기반찬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 너무 시시하다고 여기지 말자.


19세기 노예해방, 20세기 여성해방에 이어 21세기는 동물해방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에 적잖이 동감한다. 한-EU FTA 협상에서 동물복지가 주요 의제로 채택되었고 앞으로의 국제무역협상에서도 제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의 동물복지는 동물이 사육·운송·도축 도중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일컫는다. 무역장벽이라는 험담도 들리지만 그런 곳에 관심을 두는 마음자리가 고맙다. 유럽인들이 동물을 사랑하는 현상의 근원이 제국주의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쌓인 옹골진 경제적 풍요 덕분이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우리도 선진국의 배부른 소리를 경청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스트레스를 덜 받은 고기가 더 맛있다는 명분(?)도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독일은 2002년에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헌법적 권리를 주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탈리아의 로마는 2005년에 관상용 물고기의 시력 보호를 위해 둥근 어항에서 살지 않을 권리를 부여했다. EU는 2009년부터 모든 가축 수송차량에 위성추적장치 부착을 의무화해서 수송 과정에서 가축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지 점검한다고 한다. 설령 위선일지라도 인간복지를 넘어 동물복지를 고민하는 그네들의 애틋함이 부럽다. 우리네 동물보호법은 아직 동물도 권리의 한 주체라고 보지는 않지만 앞으로 좀 더 그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동물실험에 대한 윤리성 및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2009년 3월부터 시행한 실험동물에 관한 법률도 반갑다.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인권, 보다 가까이는 북한 어린이들의 참상을 틈틈이 목도하면서 감히 동물권을 논하는 것이 온당한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극단적인 동물권리론을 제외하고는 동물을 존중한답시고 인간과 동물을 일대일로 계산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게다가 꼭 인간과 동물의 상충관계만 상정할 이유는 없다.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동물에게 이익을 주는 경우를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이익과 동물의 이익이 병존할 여지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맹자』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제사에 쓰이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가엷게 여겨 양으로 바꾸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고사는 인간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딱히 더 이익이 돌아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소 대신 양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는 눈앞의 소가 죽는 걸 차마 보기 어려운 마음이 어짊을 베푸는 실마리라고 평가했다.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에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엿본다. 보지 못했던 양을 덜 불쌍히 여기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위적 혹은 합리적 가치를 들이대기 무안하다. 자기 둘레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념에 지나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으려는 정성 말이다.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는 매끄럽게 정해지기 힘들지만 동물 같이 힘없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처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가 다른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데도 열심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다시 말해 측은지심의 확산이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동심원 구조라고 볼 필요는 없다. 게임처럼 1단계를 완료해서 2단계로 넘어가는 식은 아닐 듯싶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동물차별 문제를 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의 문제를 다 풀고 동물을 보듬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국내 경제가 충분히 성장하면 비로소 북한을 도울 수 있고, 통일까지 이뤄야 국제 구호에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인류가 충분히 평안해진 다음에 동물을 돌보겠다는 식의 엄격한 선후관계는 피해야 한다. 싱어 선생님이 설파했듯이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친절함과 동정은 다른 감각 있는 존재의 고통에 무관한 것보다는 확실히 나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모으더라도 동물복지에 드는 비용이 생산비에 반영되어 개별 경제주체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된다는 걱정이 든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심리적 반발을 극복한 상태라면 약간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 가능하다. 얼마 전에 영양 성분이 풍부하다고 광고하는 기능성 달걀이 제값만큼의 품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조사가 나왔다. 제조사들이 기능성 달걀이라고 홍보해야했던 이유는 소비자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동물복지 인증 제품에 대한 인식이 미비한 편이라 관련 제품에 대한 수요도 적다. 로버트 라이시 선생님이 『슈퍼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와 투자자’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시민’으로서의 가치관을 세우자고 촉구한 바를 곱씹는다. 우리의 건강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착한 소비, 어진 소비를 위해 동물복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를 희망한다.


‘채식이냐, 육식이냐’라든가 ‘인간이냐, 동물이냐’ 하는 양자택일은 상당부분 허구다. 싱어 선생님은 유인원 같은 고등동물에게 좀 더 나은 대접을 하도록 우선 검토해보자고 제안했지만 우리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반려동물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도 괜찮겠다. 가령 사망한 반려동물을 생활폐기물로 취급해 쓰레기봉투에 넣어 처리하도록 한 현행 규정을 개선해 합법적이면서도 저렴한 장묘 방식을 마련하자는 운동이 좋은 예다.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논거를 숙고할 때 그 설득력 넘치는 논증에 매료되지만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에게 따스한 시선을 건넬 때 인간에 대한 존중도 더불어 커진다고 믿는다. 우리는 동물해방론에서 논리적 일관성 이상의 것,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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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창덕궁 대조전을 거닐다가 새 모양으로 생긴 처마 빗물받이가 익살맞다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내가 마냥 좋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던 빗물받이가 있던 곳은 대조전 부속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이었다. 1910년 8월 22일 흥복헌에서는 한일합병을 결의하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흥복헌 앞에 서니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다는 순정효황후의 통분이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소설가 김인숙은 내가 느꼈던 오묘한 감정을 일상에서 체화한 듯하다. 『제국의 뒷길을 걷다』(문학동네, 2008)는 북경이 천하의 수도에서 한 나라의 수도로 내려오는 여정을 묘사한다. 저자는 그 내리막길을 따라가며 어디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헤집고 오늘날에 주는 함의까지 따져본다. 역사에 대한 입체적이고 총체적 이해가 돋보인다. 기록의 이면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우려는 시도는 풍부한 사료 검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이따금 역사의 물결을 탓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는 개인의 책임을 없애겠다는 속셈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귀결의 최종 책임자를 당대 최고의 의사결정자로 삼는 것은 대개 온당하다. 그런데 그 최고 권력자에게 얹어지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일 때 필부필부의 가슴은 짠하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일까. 김인숙 역시 선통제 푸이의 이야기에서 지은 죄보다 더 과중한 벌이 내려지는 것은 아닐까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중국은 남의 나라 이야기니까 덜 고통스러워서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지만 그의 눈길은 충분히 촉촉하다. 어쩌면 모든 동정은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문화유산들이 약탈당할 때 가슴 아파하는 까닭은 중국 근대사의 굴곡과 고스란히 빼닮은 대한제국의 말로가 자꾸 포개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동병상련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세계시민 의식이 꽃피는 실마리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수용소에서 양말을 깁고 있는 푸이의 모습이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사진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저자도 지적하듯이 “두 차례의 침략과 삼전도의 굴욕 등으로 조선에 가혹한 모욕을 주었던 청나라(76쪽)”의 마지막 황제의 안쓰러운 신세를 한껏 통쾌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욱일승천 하던 기세가 가뭇없이 소멸하는 무상함은 옛 원한을 눅이는가 보다.


고려 공양왕은 폐위당할 때 자신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다고 말하며 울었다. 푸이는 그럴 투덜거림마저 내뱉기 전에 용상에서 내쳐졌다. 아무리 권세를 누렸던 이라도 선대의 죄과를 한 사람이 모두 짊어지는 연좌제는 불편하다. 한때는 우리를 괴롭혔던 이들의 후임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연좌제에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 오늘날을 사는 시민의 양식일 게다. 어떤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하는 수난을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 뒷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만리장성 아래 깔렸던 원혼들을 비롯해서 억울한 죽음이 무수한데 몇몇 위정자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건 일견 사치스럽다. 기록된 치욕보다 더 많은 수모가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고통까지 추체험하기에 우리는 너무 약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념화된 추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 곳에서는 애틋함이 배어나오지를 않는다. 이름 없는 민초의 아픔을 추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인(仁)의 확산이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동심원 구조라고 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가엾어 보일 때 순서를 계산할 필요는 없다.


저자가 악명 높은 서태후에게도 연민의 시선을 보낼 때 역사에서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를 곱씹는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것이 서태후가 해군의 군비를 이화원의 증축에 유용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유용이 서태후의 탐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서태후에게 아부를 하기 위한 제삼자의 행동 때문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한 푼의 군비도 빼돌려지지 않았더라도 청이 일본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청나라가 좀 더 강력한 해군을 갖추었던들 쇠퇴해가는 길만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잔인한 말일까. 설령 이런 흐름이 눈에 보이더라도 서태후는 최선을 다해 억지로 거스르려고 했어야 옳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그리 하라고 만든 자리였으니 말이다. 그는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난을 감내해야 한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서태후가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인간에게 두 번의 삶이 없다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연개소문의 자식들이 골육상잔을 벌이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버틸 수 있었을까. 최영과 정몽주가 별다른 실책이 없었더라면 고려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큰집이 무너지려 할 때 기둥 하나로 떠받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목난지(一木難支)임을 알면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은 무모하다. 하지만 그 무모함이 때때로 눈부시다.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견지한 사람을 줄곧 외면하지 않음을 되새기는 것이 역사를 읽는 자세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것(18쪽)”이기도 하다.


물론 푸이와 그 둘레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시시한 것이었다. 예정된 실패였던 의화단이 품었던 꿈보다 더 초라한 바람이었다. 청 황릉의 도굴에 비분강개한 마음은 순정한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선통제가 복위할 명분을 세울 수 없었다. 푸이가 만주국 수립에 협조한 것이 일본의 강압으로 말미암은 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가 만주국 강덕제(康德帝)가 된 것은 단지 일본의 간계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푸이의 비극은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 제국민의 위한 제국을 꾀했더라도 시대정신은 제국을 거부했으리라. 일본 패망 이후 푸이는 전범 재판을 받고 사상개조라는 명목 하에 갖은 고초를 겪는다. 중국 공산당은 마지막 황제에 대한 예우를 외면하고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이전 시대와 결별했다. 푸이의 전기에는 자신이 한 사람의 인민으로 거듭났음을 밝히고 있으나 그것이 진심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새사람이라면 그리 탐스럽지 않다.


역사가 진보한다면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일도 점점 나아져야 한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60쪽)”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변치 못한 역사의 끝자락을 잡은 사람이더라도 야멸치게 업신여기는 건 사려 깊은 처사가 아니다. 폐허의 잔해를 수습하는 사람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보장이 없다. 건곤일척의 승부가 일단락되었다면 승자는 패자의 낡은 생각들을 향해 법적 책임을 넘어선 앙갚음을 하기보다는 자신과 패자 사이의 조심스러운 견줌을 시작해야 한다. 역사의 패자가 서서히 잊힐 여유를 품어서 역사의 비정함을 줄여야 비로소 승자가 될 자격을 얻는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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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보경님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안 빌려주자 비로소 대학 졸업을 실감했다. “대출불가 사용자”라는 문구는 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예약제가 있어서 이용도가 높은 도서의 경우 졸업생은 예약도 불가해서 거의 열람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학생 신분이 아니라고 책도 안 읽을 수는 없다. 미취업 혹은 미진학 졸업생들이 당장 거처를 옮길 수는 없고 학교 주변을 맴돌면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광야로 내몰린 사람들이 덜 스산하도록 책 몇 권 끼고 다닐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다.


관련 조사가 거의 없지만 2007년 8월에 <졸업생에 야박한 대학도서관…‘도서대출’ 제한>이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사 정도가 눈에 띈다. 서울시내 28개 대학을 취재했을 때 15곳이 졸업생에게 도서 대출을 허용하지 않았고, 아무 조건 없이 졸업생에게 도서 열람과 대출하는 학교는 경희대 한 곳뿐이었다. 나머지 학교들은 비록 예치금 등의 일정한 제한이 있지만 조건부로 대출을 허용했다. 심지어 휴학 기간에도 책을 빌려주지 않는 학교들도 있는데 너무 박절한 처사다.


나는 요즘 친구나 후배들에게 부탁해 책을 몇 권씩 빌려보는 형편이다. 다행히 2009년 3월부터 학부생에게 기존 5권에서 7권으로 대출책수가 늘어나 조금 미안함을 덜었을 따름이다. 학생증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말라는 도서관 이용 수칙을 지키겠다며 책을 빌려줄 사람을 도서관까지 불러 들여야 하니 여간 면구스러운 게 아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 발문을 읽다가 내게 책 보시를 해준 이들의 따뜻한 마음자리를 생각했다.


어떤 대학들은 지역 주민에게도 도서관을 개방한다고 들었지만 대학 당국이 우선 졸업생들에게 한두 권이라도 도서 대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셨으면 한다. 도서관이 공공성 이전에 제 몫의 사사로움을 다하는 길이다. 잡 셰어링 이야기가 많지만 북 셰어링도 긴요할 듯싶다. 재학생에 비해 더 적은 권수를 짧게 빌려주고 연체에 대핸 제재를 강화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여 재학생들의 도서 이용에 불편을 줄까봐 큰 목소리로 외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지역의 공공도서관을 활용하는 방안도 있겠지만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은 장서를 보유하는 양상이 다르다. 전공서적 혹은 학술서적은 아무래도 대학도서관 사정이 낫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는 찾지 못했지만 장서수나 시설 면에서 공공도서관을 능가하는 대학도서관이 수두룩할 게다. 대학도서관은 공공도서관에 견주어 수는 적지만 장서수는 훨씬 많다고 한다. 열악한 공공도서관 상황 때문에 주민들에게 대학이 도서관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지만 당장 힘들다면 학교 구성원이던 이들이라도 먼저 헤아려야 한다.


2008년 8월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가 발표한 도서관발전 종합계획에 따르면 2013년까지 607개(2007년 말 기준)인 공공도서관을 900개까지 늘린다고 되어 있다. 또한 현재 1권 남짓한 국민 1인당 장서수를 1.6권 수준인 8천만 권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1인당 장서수는 미국이 3권(2004년 기준), 일본이 2.8권(2006년 기준), 프랑스가 2.5권(2003년 기준), 영국이 1.8권(2005년 기준), 독일이 1.5권(2005년 기준)으로 우리가 많이 모자라다. 양이 부족하답시고 질로 승부할 역량도 아니니 문제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OECD 가입국 가운데 28개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대학도서관 현황(2001∼2002년 기준)을 보면 우리나라 학생 1인당 대학도서관 장서수는 44.2권으로 20위였다. 아이슬란드는 141.6권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이 131권으로 뒤를 이었다. 일본도 92.6권으로 우리의 2배가 넘었다. 2008년 한국대학교육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학생 1인당 장서수가 2000년 43.5권에서 2007년 58.5권으로 15권 증가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도서관 관련 통계를 신문기사 검색을 통해 산발적으로 접했는데 앞으로는 도서관 관련 통계가 체계적이고 주기적으로 관리되길 바란다.


숙명여대가 국내 대학 중 최초로 ‘학사후 과정(Post-Bachelor Program)’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밝힌 이후로 몇몇 대학들이 이와 유사한 대책을 내놓은 것은 그 실효성 여부를 떠나 반가운 일이다. 물론 그 학사후 과정에는 도서관 대출 가능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최근 순천향대가 ‘졸업생 회원제’를 도입해 졸업생들도 간단한 가입 절차만 거치면 재학생과 똑같이 도서관 도서를 대출할 수 있도록 했다. 온라인 논문 검색, 열람실 및 스터디룸 사용, 멀티미디어존 등 도서관의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한 그 애틋한 마음이 고맙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구상하는 ‘미취업 대학 졸업생 지원 프로그램(Stay-in-School)’은 채용 지원과 교육훈련 지원 사업으로 나뉘는 모양이다. 채용 지원은 사실상 현재의 행정인턴과 흡사해 보이고, 교육훈련이 좀 솔깃했다. 각 대학이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정부가 대학에 예산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육훈련이 내실 있게 운영된다면 언 발을 좀 녹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아서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눈에 보이는 실업률만 낮추려고 인턴만 양산하기보다 교육을 좀 더 받을 기회를 넓혀줬으면 한다. 도서 대출도 그런 맥락이다.


2008년 4분기 전국 가구당 월평균 교양오락비는 9만 7천원으로 1년 전에 비해 8.1% 감소했다. 소비지출 기본 항목 10개 가운데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셈이다. 항산(恒産)이 위태롭더라도 우리의 항심(恒心)을 건사하기 위해 책을 사보거나 문화유산을 완상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등의 행위를 너무 줄이지 않기를 희망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2008년도 출판통계에 따르면 책 1권당 평균 가격은 1만 2116원이었다. 책값이 비교적 싼 아동도서와 만화책, 문학 분야 도서를 제외한 많은 분야의 책값이 2만 원에 육박한다. 일감이 없는 졸업생들이 이 돈을 치를 여유가 없음은 자명하다.


읽고 싶은 책을 죄다 사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에는 빌리거나 헌책을 구해야 한다. 인터넷서점들이 중고도서 시장에 속속 진출하고는 있지만 중고도서 유통망이 갈 길은 멀다. 설령 중고도서 시장이 활성화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모든 종류의 책이 헌책으로 나와도 그것을 다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계 10위권의 출판대국이라는 칭호가 속빈 강정이라는 비판도 많지만 오늘도 읽을 만한 책은 쏟아지고 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면 나라의 불행이다. ‘도서 복지’의 개념으로 접근해보자.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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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에 썼던 <한국의 시호(諡號) 탐구>를 증보한 잡글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몇몇 분들이 이전 글을 퍼가셨던데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일부 오류를 다잡고 내용을 보강했습니다.


1. 시호란 무엇인가?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한 개인의 상징인 이름(名)을 존중하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이 있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 앞에서나 썼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피휘(避諱) 전통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대신한 자(字), 호(號), 시호(諡號) 등을 썼다. 우리 선조들은 피휘를 지켜 조상이나 군주의 이름과 같은 이름은 절대로 작명하지 않았다. 임금의 본명에 들어가는 글자는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에 사용이 금지됐다. 정조(正祖)의 휘인 산()처럼 대다수 임금들은 왕자의 이름을 지을 때 벽자(僻字)로 지었다. 아예 없는 글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그래야만 피휘하기 쉽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더했다. 시호(諡號)란 죽은 이의 행적을 살펴 붙여주는 존호(尊號)의 일종이다. 왕족, 제후, 공신, 학자를 비롯한 빼어난 행적을 남긴 사람 등이 죽으면 나라에서 시호를 올리거나 하사했다. 이순신과 제갈량이 받은 충무(忠武)는 가장 널리 알려진 시호 가운데 하나다. 시호도 넓은 의미의 호이지만 일반적인 호와는 달리 사후에 생시의 행적을 평가하여 국가가 망자에게 내린 칭호이다. 특히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을 이름을 바꾸어주는 은전(易名之典)이라고 하여 당사자나 자손의 큰 영광으로 삼았다.


시호는 대개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청간(淸簡), 서경덕은 문강(文康), 조식은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반면에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음에도 시호가 없는 경우에는 교우나 제자, 친지나 고향 사람들이 추도하는 의미로 시호를 짓기도 했다. 나라에서 지어준 시호와 구별하여 사시(私諡)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안을 내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한다. 1안을 수망(首望). 2안을 부망(副望), 3안을 말망(末望)이라 부른다(비단 시호를 정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을 뽑거나 할 때도 이러한 3안제를 쓴다).


2. 시호 짓는 법

시호는 살아있을 때의 업적을 참작해 몇 개의 자(字)로 집약한다. 본래 시호의 취지는 착한 일을 한 분에게는 선시(善諡)를 주고, 나쁜 일을 한 이에게는 악시(惡諡)를 주어 후대의 귀감과 경계로 삼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통일하고 자식이 아비를 평가하고 신하가 왕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시호 제도를 폐지한다. 진시황은 자신을 시호로 부르지 말고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명했으며 다음 왕을 이세황제(二世皇帝), 삼세황제(三世皇帝)라 하여 자자손손 이어나가기를 바랐다. 과연 진시황다운 발상이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 이후 시호 제도는 부활해서 점점 정교하게 발달했다. 중국이나 한국 모두 후대로 내려올수록 악시를 짓는 일이 줄어들고 좋은 뜻의 시호만 짓게 되는 경향이 심화된다. 시호를 한번 지으면 거의 고치기 힘든 점에 비추어 기왕이면 좋게 지어주려는 경향은 옛날부터 있은 모양이다. 『논어』에는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위(衛)나라 대부였던 공어(孔圉)의 시호가 어째서 ‘문(文)’이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듣기에 따라 시호 인플레를 따지는 질문이다. 공자는 “명민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이에 그를 文이라 이른 것이다(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라고 설명한다.


시호로 쓰는 글자는 제한되어 있는데 문(文)뿐만 아니라 충(忠), 공(恭), 무(武), 숙(肅), 의(義), 정(貞), 장(莊), 효(孝) 등 많이 쓰이는 시자(諡字)에는 다양한 뜻이 있다. 시호에 담긴 뜻을 시주(諡註)라고 하는데 어떤 뜻의 글자를 받았느냐에 따라 평가가 구분된다. 문(文)의 경우만 해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經天緯地)/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道德博聞)/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勤學好問)/ 충성스럽고 믿을 수 있으며 남을 사랑한다(忠信愛人)/ 널리 듣고 많이 본다(博學多見)/ 공경하고 곧으며 자비롭고 은혜롭다(敬直慈惠)/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敏而好學)/ 백성을 슬퍼하고 은혜롭게 하며 예로 대접한다(愍民惠禮) 등의 많은 시주가 있다.


결국 공자가 공어의 시호가 문(文)이 된 것은 그의 행적에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민이호학(敏而好學) 등의 장점이 있으니 그런 시호를 받을 만하다고 평한 것이다. 단 한 가지 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을 취해 시호로 삼아 악을 숨겨 주고, 오로지 악행만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악시를 주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자주 쓰이는 시자에 다채로운 시주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기야 오늘날 묘비명에도 악행은 좀처럼 기록하기 미안한 것과 매한가지 논리이리라.


조선 조정에서 올린 정조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인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여기서의 문이 경천위지(經天緯地)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이황의 문순(文純)과 이이의 문성(文成)에서의 문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유학자들이 도덕박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천위지 다음의 위상이었을 것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죽었을 때 그의 첫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훈구파가 이는 너무 과분하다며 논박하며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에서 박문다견(博學多見)의 문으로 시주도 바꿨다. 이를 볼 때 시자에 딸린 시주에도 어느 정도의 등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호로 쓸 수 있는 글자와 각 글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규정해 놓은 것을 시법(諡法) 또는 시호법이라 한다. 조선초기에는 194자였으나 글자 수의 부족으로 시호 정하기가 어려워지자 세종(世宗)이 명해 301자까지 늘어났으나 활용 빈도가 높았던 글자는 약 120자 정도다. 대표적인 관련 문헌으로 당(唐)의 주석가 장수절(張守節)이 『사기(史記)』를 해설한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한 편인 『시법해(諡法解)』와 북송(北宋)시대 문장가 소순(蘇洵)의 『시법』 등이 있다.


소순이 찬한 시법에는 311조에 168개 시자가 수록되어 있어 시호를 결정하는데 참고했다. 인터넷에 정리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직관고(職官考), 『한국고사대전(韓國故事大典)』 시고(諡考)편 등을 참조할 수 있으나 방대하고 산재해 있어 찾아보기는 힘들 듯싶다. 다행히 이민홍 충북대 교수가 『시법』과 「시법해』를 묶어 번역한 책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3. 고구려의 시호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시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중국의 시법과 다른 양상이 많이 보인다. 삼국별로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의 경우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는 시호에서 출발하는데 생시의 업적을 토대로 만든 시호인지가 불분명하다. 한자어의 뜻에 비추어 동명성왕이나 대무신왕은 그렇다고 쳐도 유리명왕의 경우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와 누리(累利)라는 휘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한 사람을 다르게 표기한 것은 한자 도입 초기 의미보다는 소리를 옮기는데 주력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28왕 중에 능의 위치(葬地)를 시호로 쓴 왕이 열두 분이다. 열거하자면 민중왕(4대), 모본왕(5대), 고국천왕(9대), 산상왕(10대), 동천왕(11대), 중천왕(12대), 서천왕(13대), 봉상왕(14대), 미천왕(15대), 고국원왕(16대), 소수림왕(17대), 고국양왕(18대)이다. 이것은 시호라기보다는 능의 이름을 일컫는 능호(陵號)라고 불러야 더 적절할 듯싶다.


고구려의 역대 왕은 시(諡)의 개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號爲○○王” 혹은 “號曰○○王”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효문제가 시호를 강(康)이라고 했다(諡曰康)는 기록 정도다. 다만 28대 보장왕의 경우 왕의 이름 휘가 장(臧) 혹은 보장(寶臧)이라고 하면서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시호는 없다(以失國故無諡)라고 적고 있는데 아마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시와 호가 헛갈렸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6대 태조왕(太祖王)과 7대 차대왕(次大王), 8대 신대왕(新大王)은 시(諡)의 개념이 녹아들어 가있다. 특히 태조왕(혹은 國祖王)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가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의미이기에 태조라는 시호가 쓰였다. 또한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이나 20대 장수왕(長壽王)도 왕의 특징을 나타내준다는 점에서 시(諡)의 개념이 있으나 직설적인 표현일 뿐 중국의 시법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다음 왕들인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은 휘를 그대로 쓴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중국식 시호의 흔적을 찾기도 힘들다(문자명왕은 다소 예외).


여담이지만 양원왕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평원왕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기록에서 양원이나 평원도 능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고국원왕도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는데 이 또한 왕이 묻힌 지명일 것이다. 결국 이 복잡한 문제를 풀 실마리는 광개토왕비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다.


국강상(國岡上)은 장지일 것이고,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땅을 넓혔다는 의미이며, 평안(平安)은 말 그대로 태평성세였다는 뜻이다. 호태왕(好太王)은 고구려왕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왕 중의 왕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만약 광개토왕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왕들이 이런 식으로 시호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현전하는 고구려왕의 시호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기록이 미비하여 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왕비의 기록은 고구려에는 고유의 시법이 있었음을 약하게나마 증빙하고 있다.


4. 백제, 신라, 발해의 시호

백제의 왕들은 사료의 부족인지 기록의 소홀인지 알 수 없으나 시호는커녕 장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23대 삼근왕까지 휘에다가 ‘왕’자만 붙인 것인지, 고유의 시법이 있었던 것인지 확실치 않다. 24대 동성왕(東城王)부터 시호처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글자 그대로는 동쪽의 성이라는 의미일 뿐 중국에서 시법의 용례도 보이지 않는다. 25대 무령왕(武寧王)부터 성왕(聖王), 위덕왕(威德王), 혜왕(惠王), 법왕(法王), 무왕(武王)으로 이어지는 왕들의 시호는 중국의 시법에 모두 있는 글자다.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서 무령왕을 사마왕(斯麻王)이라 칭하고, 위덕왕 재위 시절 만들어진 국보 제288호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에서 위덕왕의 휘인 창(昌)이 쓰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호와 더불어 왕의 휘를 직접 쓰기도 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신라도 처음으로 시호를 쓰기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백제는 신라에 앞서 중국의 시법을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신라의 왕 가운데 지증왕이 최초로 시호를 받았다. 『삼국사기』는 “新羅諡法始於此”, 『삼국유사』는 “諡號始于此”라고 명시하여 신라의 시호가 처음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호를 개정하는 등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시호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혹자는 지증이 한국 시법의 시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사례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지증이라는 시호는 지철로(智哲路), 지도로(智度路), 지대로(智大路)라는 휘와 관련지어 지었다고 짐작한다(고구려 유리명왕과 비슷한 사례). 한자로 우리말 소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뜻까지 나타내려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왕까지는 불교식으로 시호를 지었다. 29대 무열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는 중국 시법에 맞추어 시호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을 살필 때 신라가 왕의 사후에 당나라에서 시호를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성덕왕 16년 태자 중경이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고 했고, 흥덕왕 10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했다. 진성왕 2년에 위홍이 죽자 시호를 추증해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는 기사 등으로 볼 때 시호는 자체적으로 정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중국 시법에 맞게 시호를 지은 것은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국 시대의 발해 역시 중국 시법에 맞게 시호를 올렸다. 신라가 두 자 시호였던 반면에 발해는 한 자 시호를 올렸다. 『신당서』는 발해가 사사로이 연호(年號)와 시호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신라 또한 시호를 주체적으로 사용했던 만큼 아마도 발해와 신라의 차이는 독자 연호의 제정 여부였을 것이다. 발해는 문헌상 거의 전 기간 독자 연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독자 연호 기록이 광개토왕비와 일부 금석문에서나마 엿보이는 것에 견주어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대조영을 고왕(高王)이라고 칭한 것은 태조나 고조(高祖)의 의미로 보인다. 이어서 무왕(武王), 문왕(文王), 성왕(成王), 강왕(康王),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簡王) 등의 시호가 있었다. 시호가 전하지 않는 왕도 있지만 폐위된 왕을 제외하고는 기록의 탈루인 듯싶다. 일부 기록에서는 시호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기도 한데 발해와 대씨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협계태씨족보와 영순태씨족보가 대표적이다. 이에 따르면 미상이던 발해 말기 왕들이 화왕(和王), 원왕(元王), 경왕(景王), 애왕(哀王) 등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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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의 시호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시호 제도의 새 지평을 연다. 고려시대에는 왕뿐만 아니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도 시호를 하사했다. 신숭겸에게 장절(壯節), 배현경에게 무열(武烈), 복지겸에게 무공(武恭), 홍유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 대표적 예다. 8대 현종 때에는 신라의 최치원에게 문창후(文昌候), 설총에게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하기도 한다. 특히 역대 임금의 시호를 왕이라고만 칭하지 않고 중국 황제와 같이 조(祖) 또는 종(宗)이라 붙이는 조종법(祖宗法)을 따랐다.


이로써 시호와 묘호(廟號), 능호가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왕건의 시호는 신성(神聖),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이러한 시호, 묘호, 능호의 부여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일관되게 수행됐고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시호와 묘호가 구분이 되기 시작한다. 묘호를 대강 정의하면 왕실의 사당(태묘나 종묘)에 배향할 때 붙이는 이름으로 왕에게만 추증되는 또 다른 시호다. 쉽게 말해 왕에 대한 호칭으로 조나 종자가 붙는 것을 묘호라고 일컫는다. 중국의 묘호 기준을 적용해보면 통일 이전의 삼국에서 묘호로 보이는 것은 고구려 태조왕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전부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묘호와 시호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았던 것을 보인다. 묘호가 정형화되어 쓰인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중국의 은주(殷周)시대와 한대(漢代)에 걸쳐 묘호를 가진 임금이 있었으나 모든 임금이 묘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唐代) 이후에는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갖게 된다. 결국 묘호는 시호가 신하들에게도 수여되면서 왕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기능했음을 알게 된다. 시호 인플레가 심화되면서 시호가 점점 늘어나 수십 자에 달하는 황제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결국 묘호가 본래 시호의 역할을 대신해 그 왕의 치적을 평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조는 원칙상 묘호를 써서는 안 되었지만, 고려왕조부터 써오던 관례라며 대충 넘어가며 사용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내정 간섭을 했던 외세인 원나라는 묘호나 시호를 우리의 뜻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 이 시기 묘호는 쓰이지 않았으며 시호마저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표기한다는 뜻으로 “忠○王”이라 썼다. 충렬왕 시기부터 중국의 사시(賜諡)가 단행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충자 돌림 시호는 왕이 신료들에게 내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형식적이나마 중원의 황제가 동방의 제후에게 하사한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31대 공민왕은 원명교체기의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원의 연호와 관제, 예제 등을 철폐했다. 공민왕 6년(1357) 원의 시호를 받았던 임금들을 다시 추존해 충렬왕은 경효(景孝), 충선왕은 선효(宣孝), 충숙왕은 의효(懿孝), 충혜왕은 헌효(獻孝), 충목왕은 현효(顯孝)라고 시호를 올렸다. 고려 왕의 시호에 거의 들어가던 효(孝)자를 부활시킴으로써 자주성을 천명했다. 다만 30대 충정왕만은 시호를 올리지 않았는데 공민왕이 그를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6.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새로이 중원의 주인공이 된 명나라의 쩨쩨한 심보가 드러난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일 테고, 문제는 민(愍)자다. 민은 그리 좋은 시자는 아닌데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의 난,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제법 어울리는 시호이기는 하지만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폄훼됐다는 느낌이 강하다.


민(愍)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시자(諡字)로는 회(懷), 애(哀), 도(悼), 상(殤) 등이 있다. 회(懷)는 행실은 자애로우나 일찍 죽은 것(慈行短折), 지위를 잃고 죽은 것(失位而死)을 일컫는다. 장수절의 시법해에 의하면 단(短)은 60세 못된 것이고, 절(折)은 30세가 못된 것이다. 애(哀)는 공손하고 어질지만 일찍 죽은 것, 도(悼)는 중년이 안 되어 요절한 것, 상(殤)은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이다. 왕위에 올랐다가 요절하거나 뜻을 펴지 못했을 때 주로 쓰는 시자들이다.


한국사에서 이런 시자를 받은 임금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은 숙부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고,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은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자 패하여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閔은 愍과 상통하는 글자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견훤에게 핍박당해 자살하게 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고려 7대 목종(穆宗)은 처음에는 묘호가 민종(愍宗), 시호는 선령(宣靈), 능호가 공릉(恭陵)이었다. 이는 모두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가 지은 것이라 현종(顯宗) 3년 묘호를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宣讓), 능호는 의릉(義陵)이라 고쳤다. 제14대 헌종(獻宗)의 시호는 회상(懷殤)이었다가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 공상(恭殤)이라 고쳤다. 헌종은 숙부 계림공 왕희에게 사실상 왕좌를 찬탈당하고 후궁으로 물러나 14세에 사망했다.


조선 8대 예종(睿宗)이 재위 13개월 만에 죽자 명나라에서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주었다.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 뒤주 속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正祖)가 즉위 후 10일 만에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를 고쳤다. 도(悼)자를 바꾼 것으로 보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하간 회(懷)라는 글자에는 야니를 가슴에 묻고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아마 옛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마지막 경효(敬孝)에서 효자 시호가 여전히 쓰였다. 고려에서 올린 시호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나라와 명나라가 내려준 시호를 계속 쓰는 것은 『고려사』 편찬자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가뜩이나 고려 후기의 왕들은 묘호가 없어 허전한데 말이다. 조심스럽지만 고려에서 올렸던 시호를 병기하는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고려 왕 가운데 시호를 아예 받지 못한 임금이 우왕과 창왕이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웠다.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며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조선의 개창자들은 더욱 잔인하게도 『고려사』에서 우왕과 창왕을 국왕의 연대기인 세가(世家)에도 넣지 않고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으로 부르며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켰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의 시호는 신라의 경순왕(敬順王)과 마찬가지로 모욕적인 뜻이다. 공손히 왕위를 양보했다는 시호를 줘놓고도 결국 살해한 이성계 일파의 박절함이 밉살스럽다. 고려숭의회에서 펴낸 『여말충의열전』에서 우왕, 창왕, 공양왕은 조선의 왜곡된 호칭인 만큼 고려말의 유신(遺臣)들이 이네들을 지칭했다던 여흥왕(驪興王), 윤왕(允王), 간성왕(干城王)의 칭호를 준용(遵用)한다는 내용이 있다.


6. 조선의 시호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시호와 묘호, 능호가 잘 정리되어 별로 논쟁거리는 없다. 조선 왕의 시호가 길어져서 묘호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묘호인 세종,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장헌, 조선에서 올린 영문예무인성명효로 구성된다. 임금이 붕어하면 중국에게 시호를 받기 위해 청시사(請諡使)를 보냈다.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그 전까지는 신하들이 올린 시호를 쓰다가 중국에서 시호가 도착하면 그 시호가 왕을 대표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선원계보(璿源系譜)』를 비롯한 조선의 사서에는 명나라가 준 시호만 있을 뿐, 청나라가 줬을 법한 시호는 찾기 힘들다. 조선 숙종 때 역관이던 김지남이 아들과 함께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책에는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청해 받은 각 왕들의 시호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인조는 장목(莊穆), 효종은 충선(忠宣), 현종은 장각(莊恪), 숙종은 희순(僖順), 경종은 각공(恪恭), 영조는 장순(莊順), 정조는 공선(恭宣), 순종은 선각(宣恪), 순조의 세자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은 강목(康穆), 헌종은 장숙(莊肅), 철종은 충경(忠敬)이라 했다. 충(忠), 각(恪), 순(順), 공(恭) 등이 많이 보이는 것에서 고분고분하기를 바랐던 청나라의 소망이 선하다.


조선에서는 인조를 비롯한 국왕의 사후에 청에게 시호를 청하여 받았으면서 이 시호는 청에게 보낸 외교문서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각 왕대의 실록에서도 청나라에 시호를 청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어떤 시호를 받았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공식 기록에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이 시호들을 굳이 열거한 까닭은 앞서 고려 말기 왕들을 격하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이다.^^; 청나라 시호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자주성이라는 측면보다는 일그러진 모화의식의 산물일 공산이 크다.


조선 왕에게는 묘호가 중요해지면서 묘호 인플레가 극심해졌다. 고려에서는 태조만이 조(祖)이던 것을 조선에서는 조(祖)가 붙은 왕은 7명이다. 조선 후기 묘호가 개상(改上)된 경우는 전부가 종(宗)을 조(祖)로 바꾼 것으로 볼 때 조를 선호한 듯싶다. 실제로 본래 선종(宣宗), 영종(英宗), 정종(正宗), 순종(純宗)이던 묘호가 선조(宣祖),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가 되었다. 참고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들지 못했으니 당연히 묘호가 없고 왕자시절의 호칭을 그대로 쓴다.


조선조 묘호 산정이 편파적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1468년 세조가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신료들이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라는 세 가지 묘호를 올렸다. 묘호에 조가 들어가 있지 않았음을 비추어 볼 때 당대의 신료들도 세조의 찬탈 행위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경계를 그었던 모양이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예종이 아버지는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해 결국 묘호가 세조가 되었다. 선종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이 있다고 하여 선조가 되었는데 그 공로는 잘 도망 다녔다는 뜻이려나?


인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앉자 자신의 아버지를 본래 예법으로 대원군으로 삼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이라 칭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논란 끝에 왕으로 추존해 묘호를 원종(元宗)이라 했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가 추존왕이 된 것은 원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열조(烈祖)로 묘호가 정해졌다. 조를 남발한 것도 모자라 인조(仁祖)로 묘호를 고쳤는데 소현세자가 의문사하지 않았으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효종의 이심전심 띄워주기인 셈이다. 병자호란을 자초하고 아들과 며느리를 억울하게 죽인 아둔하고 냉혹했던 인물에게 어질다는 묘호를 붙이다니 민망하다. 왕에게 있어 시호의 역할을 했던 묘호 산정이 이렇게 흐물흐물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시호는 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謀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은 묘호이고, 문헌무장인익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 8자는 시호로서 고종이 붕어한 후 올린 것이다. 고종과 문헌무장인익정효 사이의 50자에 달하는 존호는 고종 9년부터 순종 즉위년까지 생존해있는 고종에게 일곱 차례에 걸쳐 상호(上號)한 것이며, 태황제(太皇帝)라는 존호는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해 순종이 즉위했던 1907년에 봉책한 것을 고종 사후에 재추봉한 것이다.


망국의 황제가 누리기에는 너무 넘치는 시호였다고 생각했는지 일제는 이에 대한 시비를 걸었다. 고종·순종실록 감수보조위원(監修補助委員)으로 활동한 에하라 젠쓰이(江原善槌)는 고종실록의 편찬과정에서 실록의 권두에 실릴 고종의 시호가 일본 황실의 한 왕가로서의 지위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창덕궁 이왕인 순종황제가 덕수궁 이태왕인 고종황제에 대한 시호를 봉책하여 태황제라고 할 권능이 없으며, 순종이 올린 8자의 시호 역시 삭제해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결국 일제는 한일합방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황권만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일합방 이후의 실록은 순종황제실록부록(純宗皇帝實錄附錄)으로 처리하고 제왕의 칭호도 격하시키고, 대한제국 황제의 재위년도나 연호 대신 일본의 연호를 사용했다.


7. 시호의 정신을 새기며


1456년 처형된 사육신이 1691년 숙종에 의해 시호가 내려진 것처럼 시호는 한 개인에 대한 역사의 엄정한 평가를 지향했다. 오늘날에 그 형식을 곧이곧대로 따를 것은 없어도 그 정신은 배울 점이 많다.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전기 문신이던 김국광이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했다는 의미(述義不克)의 정(丁)자가 포함된 시호를 받았다. 아들 김극유는 4년 동안 열 차례가 넘는 상소를 올리며 시호를 고쳐주기를 청하였다. 성종과 대신들은 김국광이 현저한 과실이 없는데 나쁜 시호를 얻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시호는 바꿀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끝내 바꿔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명회의 시호가 명성(明成)이라고 정해졌다. 생각이 과감하고 원대한 것(思盧果遠)을 명(明)이라고 했으나 자부심이 강하다는 뜻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는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 성종은 결국 특명을 내려 명을 충(忠)으로 고치게 했다. 시호를 고치지 말 것을 상소한 신하들이 있었지만 성종은 당대의 세도가에 자신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시호를 마냥 외면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시호는 황무(荒繆)로 정해졌다. 당시 전의부령(典儀副令)이던 공부가 그의 시호를 이렇게 짓자 종당(宗黨)이 이를 갈며 압박했지만 공부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황(荒)은 안팎으로 난이 생긴다, 방종하게 즐기면서 법도가 없다, 기강과 법도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무(繆)는 명분과 실제가 어긋난 것, 즉 명분은 아름다우나 실상이 손상되었다(名與實爽)는 뜻이다. 가히 한국사에 있어 악시의 대표 격이다. 이인임은 말년에 실각했으니 한명회와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했던 것일까?^^;


옛사람들은 시호 한 자에 웃고 울었다. 허울뿐이라고 구박해도 그만이지만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시호의 참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 [無棄]


<참고 문헌>
박영규, 『고구려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4
박홍갑, 『양반나라 조선나라』, 가람기획, 2001
신용호·강헌규, 『先賢들의 字와 號』, 전통문화연구회, 1997
이민홍 편,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문자향, 2005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호칭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경계』 제52집, 부산경남사학회, 2004, pp. 47~67
이민홍, “중원 시법(諡法)의 수용과 한국 역대(歷代) 제왕의 시호(諡號)”, 『한문학보』 제12권, 우리한문학회, 2005, pp. 485~509
이영춘, “『通文館志』의 편찬과 조선후기 韓中關係의 성격”, 『역사와실학』 제33집, 역사실학회, 2007, pp. 121~161
임민혁, “高ㆍ純宗의 號稱에 관한 異論과 왕권의 정통성 - 廟號ㆍ尊號ㆍ諡號를 중심으로 -”, 『사학연구』 제78호, 한국사학회, 2005, pp. 189~230
shyisna님이 올려주신 네이버 오픈 백과 “시호(諡號)”,  “시호(諡號) 사례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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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발문 읽기

문화 2009. 3. 15. 23:08 |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는 한국 회화 가운데 유명하기로 손꼽히지만 그 발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림에 대한 이해가 더욱 높아진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59세인 1844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이라 중국을 드나들며 추사를 위한 서책을 수집할 수 있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이 유독 더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 선생은 권세와 이익에게 달려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준 제자에게 그림과 발문으로 극진한 고마움을 표한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썼다. 옛사람이 왜 그림을 ‘읽는다’고 했는지 알겠다. 세한도는 발문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완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새겨진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스승이 찍었든 제자가 남겼든 서로의 도타운 마음자리가 내 무심함마저 녹인다. 정민 선생님과 오주석 선생님의 세한도 발문 번역을 내 입맛에 맞게 고쳤다. 세한도에는 진짜배기 의리가 배어 있다. 요즘 다시 꺼내 읽고 싶어진 이유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못 빌리는 아픔을 겪으니 졸업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광야로 내몰린 졸업생들이 덜 스산하도록 책 몇 권 끼고 다닐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다. 혹여 재학생들의 도서 이용에 불편을 줄까봐 큰 목소리로 외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친구와 후배들이 나를 위해 한두 권씩 책을 빌려다줘서 고맙다. 세한도 발문을 풀이하며 그네들을 생각했다.


<세한도 발문>

지난해에는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왔더니, 올해는 또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왔구나. 이는 모두 세상에 늘 있는 책이 아니라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며, 여러 해 걸려 얻은 것이지, 한 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차개비세지상유, 구지천만리지원, 적유년이득지, 비일시지사야.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귀한 책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도, 권세와 이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듯 하는구나.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차세지도도, 유권리지시추, 위지비심비력여차, 이불이귀지권리, 내귀지해외초췌고고지인, 여세지추권리자.


태사공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성글어진다”라고 했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나니, 권세와 이익이란 기준으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운, 이권리합자, 권리진이교소. 군역세지도도중일인, 기유초연자발어도도권리지외, 불이권리시아야? 태사공지언비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를 일컬으셨다(칭찬하셨다).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공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송백시관사시이불조자, 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 성인특칭지어세한이후.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이전이라 하여 지금보다 더함이 없지만(잘 해준 것이 없지만), 이후라고 하여 지금보다 덜함이 없다(소홀함이 없다). 그러면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겠으나,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이를 일컬었던 것(송백을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때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연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성인지특칭, 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아아!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서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짊으로도 빈객들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다. 하비의 방문(榜文) 같은 것은 박절함이 극에 달했도다.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오호! 서경순후지세, 이급정지현, 빈객여지성쇠. 여하비방문, 박절지극의. 비부! 완당노인서.
* 하비(下邳)는 하규(下邽)의 오기이다.


<참고>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급암과 정당시, 하규의 방문 이야기는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전한(前漢) 무제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어진 신하들이 현직이 있을 때는 손님이 넘치다가 좌천되었을 때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마천은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세력을 잃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 언급한 적공(翟公)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그 또한 해임되자 집이 한산하다 못해 문 앞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전작라(門前雀羅),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적공이 다시 관직에 오르자 손님이 다시 몰려오는 염량세태를 풍자하며 대문에 써 붙인 시는 다음과 같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한번 죽고 한번 삶에 사귐의 정을 알고
一貧一富 乃知交態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함에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貴一賤 交情乃見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함에 사귐의 정이 드러나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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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추천도서를 묻는 후배의 질문에 생각나는 대로 언급했던 책들이다. 나는 책을 손 가는대로 읽는 편이라 짜임새 있는 독서가 부족하다. 좋은 책은 나눠 읽을 수록 가치가 커질 테니 이런 식의 정리 작업을 좀 해봐야겠다.


<동양 고전>
신영복,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돌베개, 2004
오강남 옮김, 『도덕경』, 현암사, 1995
이세동 옮김, 『대학·중용』, 을유문화사, 2007
정민,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2007


신영복 선생님의 동양고전 강의는 원체 유명하니 길잡이 삼아 보면 좋을 듯합니다. 동양 고전 가운데 도덕경과 대학을 먼저 읽어보면 좋겠다 싶어 우선 선정했습니다. 일단 분량이 짧아서 좋거든요. 짤막한 글로 엮여졌다고 알려진 『논어』만 해도 완독하려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라 저도 몇 번 실패했습니다. 수많은 주석서 가운데 쉽게 번역되고 가독성이 높은 책 위주로 골라 봤습니다. 형이상학적 내용이 가미된 『도덕경』이 좀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오강남 선생님이 옮긴 또 하나의 역작 『장자』를 권합니다. 1학년 국어작문(지금의 사고와 표현) 과제물로 『장자』 독후감 써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장자를 좀 더 꼼꼼히 읽고 독후감 개정판을 내보고 싶습니다.


『대학·중용』은 같이 합본된 경우가 많은데 중용이 알쏭달쏭하기 때문에 대학만 읽어보면 동양 정신의 정수를 맛보는 겁니다. 대학 해석을 두고 성리학과 양명학이 갈리게 되는데 잡글로 정리하려고 준비는 해놨는데 언제 완성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양명학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이 새삼 아쉽네요. 사실 옛날 교육 순서대로 하자면 『소학』을 먼저 보면 좋습니다. 그냥 명심보감 같은 느낌으로 우리나라 인물을 대상으로 편집한 『해동속소학』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윤호창 선생님이 옮긴 홍익출판사 『소학』 번역본이 가장 깔끔한 듯싶습니다.


정민 선생님이 편집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어록집은 그 시도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선정했습니다. 저는 한국 고전 국역과 더불어 선현들의 어록 혹은 언행록을 정리하는 일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논어』 같은 어록이 우리나라라고 왜 없겠습니까. 이 책에 대해서는 상세한 서평을 써둔 게 있는데 익구닷컴에서 <더 많은 어록을 고대하며>라는 제목의 제 리뷰를 참조해주세요. 자매품(?)으로 정 선생님의 산문집인 『스승의 옥편』에 대한 리뷰도 <변화 속에 변치 않는>이란 제목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역사>
박원순,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한겨레신문, 1999
이태진 외,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푸른역사, 2005
이근우, 『고대 왕국의 풍경, 그리고 새로운 시선』, 인물과사상사, 2006
이덕일,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한겨레출판, 2008


박원순 선생님 책은 세기의 재판 이야기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 졸라의 활약은 배우는 사람의 자세를 곱씹게 합니다. 『고종황제역사 청문회』는 2004년에 교수신문에서 벌어진 지상 논쟁을 정리한 책인데 전문적인 서술이 많지만 한 시대를 조명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어 좋습니다. 고종과 대한제국에 관해 엇갈리는 평가를 접할수록 혼란스러집니다. 고종이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제국의 실정은 일제의 침략에 견주어 얼마나 나았겠냐는 투덜거림에 귀가 솔깃해지죠.


그럼에도 무능한 임금과 제국주의 침략세력과의 차이가 잗다랗다고 말하기에는 찜찜합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눈감은 채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따지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무모할뿐더러 윤리적으로도 박절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미운 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 때 자신들의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당시의 백성들이 기억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제군주의 죽음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를 잉태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사실(史實) 앞에 겸손해야 함을 담담히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근우 선생님 책은 역사적 기록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가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해줍니다. 백제 성왕의 죽음을 둘러싸고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일본서기의 서로 다른 서술을 헤집는 한 대목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이야말로 합의되고 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덕일 선생님 책은 나온 지 며칠 안 되는 따끈따끈한 신간입니다. 시대에 맞선 역사의 아웃사이더를 만나보세요. 패자의 역사에서 배울 때 우리의 미래는 풍요로워지리라 믿습니다.


<사회과학>
고종석, 『코드 훔치기』, 마음산책, 2000
김만권,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동명사, 2001
김만수, 『실업사회』, 갈무리, 2004
이정전, 『우리는 행복한가』, 한길사, 2008


제 영혼의 스승인 고종석 선생님이 새천년 전후의 사회적 이슈를 살펴본 『코드 훔치기』는 요즘도 논술 교재로 애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고 선생님의 정치적 시평 모음집도 권할 만한데 『자유의 무늬』,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는 짧은 호흡의 칼럼을 위주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바리에떼』라는 책에서 친일 문제에 대해 정성스레 쓰신 글이 있는데 그 명문에 보답하기 위해 저도 그 부분에 대한 서평을 쓴바 있습니다. 역시 익구닷컴 검색 기능을 통해 ‘삼일절 새벽에 읽은 <식민주의적 상상력>’을 참조해주세요.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자유주의의 사상적 궤적을 고찰하는 책입니다. 대한민국에는 대기업의 자유를 옹호하는 분들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의 원조격인 미제스는 “자유주의가 인류의 물질적인 복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는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외형적인 규제조치로도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고상한 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확신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물질적 측면을 넘어 영혼에다가 물신을 주입하려 한다는 점에서 민망합니다.


김만수 선생님은 높은 실업률이 구조조정이나 경제정책으로 인한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임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 자본구성 변화를 세밀하게 분석해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가 완연함을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우울한 이야기임은 확실합니다. 이정전 선생님은 행복경제학의 개념을 설파하시는데 이 책에 나오는 ‘이스털린의 역설’이 특히 인상 깊습니다.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이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데 대한민국은 이 역설이 성립하는 일정한 수준의 부에 다다랐을까요? 아직 갈 길이 멀까요?


최근 계간 <창작과 비평>에서 백낙청 선생님과 김종철 선생님이 논쟁을 나눴습니다. 전문을 찾아 읽지는 못했지만 백 선생님께서 “현시점에서 한국경제가 일정한 성장동력을 유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고 김 선생님을 이를 반박하셨습니다. 여하간 성장의 방향을 두고도 여러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경제성장 생각에 빠져있지만 그 성장은 순도가 높기보다는 불순물이 많이 섞인 잡스러운 녀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적당한 성장’이라는 개념은 사회구성원들의 합의하고 구성하는 것일 텐데 아직은 막막하네요. 박정희 방식과 다르게 경제를 운용하는 대안을 산뜻하게 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리즈물>
김영사에서 나온 <지식인마을> 시리즈 가운데 끌리는 대로 집어 잡아보세요. 두 인물을 비교 대조하는 형식인데 『사이먼 & 카너먼』, 『벤담 & 싱어』, 『공자 & 맹자』 등등 재미난 내용들이 많습니다. 개마고원에서 나온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경제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도 관심 있는 부분 찾아보면 재미날 듯싶어요. 논술용으로 펴낸 것 같은데 휴머니스트에서 펴낸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시리즈도 골라 읽어 볼만 합니다. 사상 부분에 관심이 있으시면 살림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도 기획 의도는 괜찮다고 하는데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마치며>
저는 비문학 청년(?)이라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미친 듯이 어려운 소설에 도전해보겠다는 분은 이남호 선생님이 해제를 단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보르헤스 선집을 읽어보세요. 저는 끝내 포기하고 말았지만 “문학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의도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의 해석 속에 있다”라는 구절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평론가의 시각이 아닌 우리 자신만의 자유로운 관점을 내놓는 것은 늘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학기 중에 쫓기듯이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여유 속의 독서라면 이런저런 상상력이 만개할 것만 같습니다. 끝으로 제가 읽은 소설의 앞자리에 두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 횡설수설을 마칩니다. 즐거운 방학 재미난 책과 함께 하세요.^-^ - [無棄]


지금까지 지구상에 단 하나의 종교, 단 하나의 철학, 단 하나의 세계관이 독재적으로 자리잡아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신은 언제나 모든 억압에 맞서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우고, 정해진 틀에 따라 생각하는 것, 천박하고 기력없게 만드는 것, 모두 똑같이 작게 획일화하려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신적인 다양성을 단 하나의 분모로 통합하려는 모든 노력은 얼마나 진부하고 헛된 일인가! 주먹의 논리로 쟁취한 원칙에 따라서 인류를 선과 악, 경건한 자와 이단자, 국가에 충성하는 자와 배신자로 단순하게 흑백으로 구분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 슈테판 츠바이크, 『폭력에 대항한 양심』, 자작나무, 1998, 23쪽


<한 줄 요약>
개권유익(開卷有益)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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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설과 관련 현판

문화 2008. 12. 18. 21:23 |

이번 학기 교양한문 강의에서 염계(濂溪) 주돈이 선생의 애련설(愛蓮說)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애련설을 여러 번역본을 참조해 제 취향대로 번역하고 연꽃의 특성을 묘사한 부분은 약간의 주석을 달아보았습니다. 서울 시내 궁궐에는 애련설을 출전으로 삼아 현판을 지은 경우가 두 가지 있는데 번역문 말미에 관련 글과 사진을 부기했습니다.


<애련설(愛蓮說)>

수륙에 자라나는 초목의 꽃 가운데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수륙초목지화, 가애자심번.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다.
晉陶淵明獨愛菊.
진도연명독애국.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
자이당래, 세인심애목단.


나는 연꽃이 진흙에서 나오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고,
予獨愛蓮之出於淤泥而不染,
여독애련지출어어니이불염,
* 予獨愛蓮之는 “나는 연꽃이 ~하는 점을 홀로 사랑한다”라고 해석해 可遠觀而不可褻玩焉까지 이어지는 연꽃의 특징을 나열한 뒤에 마지막으로 풀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出於淤泥而不染은 군자가 세속과 타협해 더럽혀지지 않음을 비유한다.


맑은 잔물결에 씻기었지만 요염하지 않으며,
濯淸漣而不夭,
탁청련이불요,
* 맑은 내면을 가지고 있지만 겉을 꾸미지 않는다. 요염하지 않다(不夭)는 남에게 잘 보이려고 치장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듯싶다. 겉은 단지 외모나 몸가짐을 가리키기보다 곡학아세하여 영달하지 않는 지조까지 포함한다. 바로 앞 出於淤泥而不染이 표상하는 태도와 비슷하게 되어 중복되는 감이 있다.


가운데는 비어있고 밖은 곧아,
中通外直,
중통외직,
* 잡된 생각이 없고 영묘하여 어둡지 않으며(虛靈不昧), 행동이 올곧다. 사욕이 없고 강직한 모습을 말한다.


덩굴지지 않고 가지를 뻗어내지 않으며,
不蔓不枝,
불만부지,
* 이익 때문에 편당(偏黨)을 지어 영달을 추구하지 않는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香遠益淸,
향원익청,
* 아름다운 덕이 멀리 알려진다. 명심보감에 “사향을 지녔으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어찌 바람을 맞아 서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라는 구절이 있는데 뜻이 상통한다.


우뚝하게 말쑥이 서 있어서,
亭亭淨植,
정정정식,
* 치우치지 않고 정결하게 바른 길을 걸어나가는 당당한 풍모.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서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는 것을 홀로 사랑한다.
可遠觀而不可褻玩焉.
가원관이불가설완언.
* 우러러 볼 수는 있어도 무례하게 대할 수 없는 위엄 있는 모습.


나는 말한다, “국화는 꽃 중의 은둔하는 자와 같다.
予謂, “菊, 花之隱逸者也.
여위, “국, 화지은일자야.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와 같다.
牧丹, 花之富貴者也.
목단, 화지부귀자야.


연꽃은 꽃 중의 군자와 같다.”
蓮, 花之君子者也.”
연, 화지군자자야.”


아! 국화에 대한 사랑은 도연명 이후에 들은 적이 드물다.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
희! 국지애, 도후선유문.


연꽃에 대한 사랑은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자가 몇 사람인가?
蓮之愛, 同予者何人?
연지애, 동여자하인?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것이 마땅하다.
牧丹之愛, 宜乎衆矣.
목단지애, 의호중의.


<애련설 관련 현판>

전통 건축물의 이름이 걸려 있는 판을 현판(懸板)이라고 부릅니다. 현판에는 각 건축물의 쓰임새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궁궐 건축물에는 유교적 도덕관이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화유산을 감상할 때 그 현판에 담긴 뜻까지 살펴보면 선조들의 마음을 좀 더 느낄 수 있을 것 같네요. 현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문화재청에서 편집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이라는 세 권 짜리 책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15년 기사에 “봄 정월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으며,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말이 나옵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은 삶의 자세로 삼아봐도 좋겠네요. 정도전 선생도 『조선경국전』에서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이것이 아름다운 게 되는 것이다(儉而不至於陋 麗而不至於侈 斯爲美矣)”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우리 궁궐에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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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애련정(愛蓮亭)입니다. 애련설 제목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숙종 임금이 지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는 주돈이 선생의 애련설을 상당 부분 인용하면서 “나와 뜻이 같은 자는 오직 염계 선생 한 분뿐(與吾同志者 其惟濂溪一人而已乎)”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연꽃도 좋지만 자신이 지탱할 만큼의 빗방울을 머금고 나면 미련 없이 비워내는 연잎의 모습도 닮고 싶습니다. 선의 아름다움과 간결미로는 한국 최고의 정자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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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있는 향원정(香遠亭)입니다.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왔습니다. 경회루가 사신을 접대하는 등의 공적 공간이라면 향원정은 휴식을 취하는 사적 공간으로서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향원정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연꽃 향기에 취한다는 뜻으로 취향교(醉香橋)라고 합니다. 위에서 본 애련정이 사모지붕으로 사각형이라면 향원정은 육각형인 육모지붕입니다. 우리는 육각이나 팔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향원정에는 중국풍이 살짝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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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사를 거닐다

문화 2008. 12. 2. 00:53 |

<이태 전에 전라남도 구례군에 들렀다가 매천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매천사를 찾았습니다. 매천사를 다녀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썼던 글 조각들을 모아본 것인데 다시 봐도 어수선하네요. 이번 학기 듣는 교양한문 강의에서 황현 선생의 절명시와 맹자의 사생취의(舍生取義)를 배웠는데 서로 잇닿는 면이 있어서 예전 글을 고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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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 같지 않고, 극락세계와 내세도 도무지 믿기 힘들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는 명제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한번뿐인 삶을 도저히 대충 살 재간이 없다. 그래서인지 치열히 살다간 선현들이 더 애틋하다.


전라남도 구례군에 있는 매천사(梅泉祠)는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그리 대단한 문화재적 가치는 없는 곳이다. 변변찮은 유형문화유산이지만 사당을 감도는 그 처연한 서정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문화유산은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많은 것으로만 우열을 가름할 수 없다. 그 자리에 걸맞은 역사성과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다면 제 나름의 흥미로운 역사의 숨결이 될 수 있다. 거창한 복원과 중건에만 현혹되지 말고 이런 식으로 영혼을 어루만지는 작은 문화유산들도 소중히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 문화는 우아한 기품과 현란한 기교 이전에 낮고 약하고 가여운 것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다.


창의문(彰義門)을 들어서며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생각했다. 하늘은 편애(仁)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무심하다. 천지는 인간세상의 훼예포폄과 흥망성쇠에는 별 관심이 없다. 누구는 더 어여삐 여기고, 누구는 더 역겹게 여기지 않는다. 내가 좀 더 잘 될 수 있게 빌고, 못된 놈이 망하기를 빌지만 천지가 이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야속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간의 책임일 뿐이며, 하늘은 면책특권을 내려주지 않는다. 하늘은 무심하지만 사람은 결코 무심하지 않다는 점을 믿는 수밖에 없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성이면 감인(感人)이다. 지극한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한말삼재(韓末三才)라 불렸던 매천 황현 선생의 탁월한 글재주보다 우리가 먼저 기억하는 건 1910년 국치를 비통해하며 남긴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서다. 유자제서(遺子弟書)에서 선비정신의 정수를 만난다. “내게는 꼭 죽어야 할 의리(義理)가 없다. 다만 이 나라가 오백 년 동안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라는 말에 가슴이 시리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득 이 포의지사가 남겼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소인배가 떠오른다. 을사오적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득의양양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부끄러움의 유무가 사람을 이렇게 차이 나게 만든다. 역시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부끄러움을 잃는 것이다. 먼저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얼마나 고대해야 할까. 세상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바뀌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선비들의 드높았던 목청에 비하면 조선이 망할 때 그네들의 행동거지는 시시했다. 그러나 매천사에서 만큼은 조선의 절의를 추념해도 좋다. 『논어』에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는 구절이 스쳐지나간다. 살다보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고만고만한 선택지라면 제 입맛에 따라 골라잡으면 그만이지만, 삶과 죽음처럼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경우에는 취사선택 앞에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매천의 죽음이 조선의 망국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 같은 선비 몇 명 없었다면 조선의 최후가 얼마나 초라했을까를 상상하면 깜깜하다. 지켜야 할 원칙을 무겁게 여기고 역사를 외경하는 진짜 보수주의자들이 우리 둘레에 좀 더 늘어나길 바란다.


1947년 개성 선죽교를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은 “선죽교에 흘린 정몽주의 피, 슬퍼하는 사람들 있으나 나 결코 슬퍼할 수 없음은, 나라의 위기를 맞은 충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음이라(善竹橋頭血 人悲我不悲 忠臣當國危 不死更何爲)”라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걸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사람은 없다. 절개도 좋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은 얼마나 근원적인가. 그렇기에 매천이 “내가 약을 마시려다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진솔해서 슬프다. 적당히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던 선생의 매운 얼에 옷깃을 여민다. 차마 영악하지 못했던 사람, 끝끝내 미련했던 사람들이 사랑과 존경을 받고, 본받고 싶은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종의 장릉(莊陵)에는 충의공 엄홍도의 정려각이 있다. 영월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는 단종이 시해 당하자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는 후환을 두려워하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고 의연히 말했다. 정조 15년 장릉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어 단종조의 충신들을 제향하는 것으로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가 마무리되었다. 계유정난이 발생한 지 338년, 단종이 비명횡사한지 334년만이다. 그릇된 역사를 다잡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역사는 결국 올곧게 산 자의 편인지 모르나 이렇게 만날 뒷북만 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에도 충의지사가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방효유(方孝儒) 선생이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는 조카인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한 중국판 수양대군이다. 영락제는 건문제 측근들을 무참히 제거했지만 방효유는 자신의 스승이기도 하거니와 명성 높은 대학자이기에 회유하기 위해 즉위 조서를 짓도록 명했다. 한사코 쓰지 않겠다는 방효유에게 영락제는 강제로라도 조서를 쓰게 할 작정으로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다. 방효유는 마침내 붓을 들어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종이에는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라는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영락제는 노발대발하며 방효유의 십족(十族)을 멸해 죽임을 당한 사람이 800여명이라고 한다.


조선 선비들은 방효유를 절개의 으뜸으로 삼았다고 한다. 옛 선비들의 고루한 습속까지 죄다 본받지는 않아도 견결한 정신의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상징조작에 불과하다는 핀잔을 받을만한 여지도 적잖지만 그래도 여전히 헌걸차다. 자신의 뜻을 목숨처럼 여기는 기백이야말로 선비정신의 고갱이가 아닐까 싶다. 만약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방효유의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효유가 제 아무리 선비정신의 고갱이를 보여주고, 지식인의 절조를 드높였다고 한들 억울한 죽음 앞에서는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고약한 사고실험으로 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건 괴롭다. 천만다행으로 개명된 천지에 살고 있는지라 적어도 이런 무도한 경우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며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러나 입술 꽉 깨물고 ‘연적찬위’라고 써 내려가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지인들을 북돋워주는 사람이 되기란 여전히 어렵다.


매천이 자결한 대월헌(待月軒)에 걸터앉아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품는다.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지킨 사람을 마냥 외면하지 않음을 믿는다. 물들고 타협하다가도 이것만은 양보 못하겠다 싶을 때 고개를 저으며 돌아설 수 있는 내가 되도록 하자. 힘들 때는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다면 천만인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는 『맹자』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말이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나를 얼마나 더 배신할지 모르겠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부끄러울 치(恥)자 셋이면 천박함을 피한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던 매천의 절규를 깊이 간직하며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지조는 선비의 전유물이 아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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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잡글이 많지만 정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무료함을 달랠 겸 그간 여기저기에 썼던 정확한 한국어 구사를 위한 노력의 일부를 긁어 모아봤습니다. 제가 매번 이렇지는 않아요.^^;

 

<바래다 VS 바라다>
‘바래다’는 빛이 변하거나 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것을 말하며 ‘바라다’는 생각대로, 소원대로 되기를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로써 VS -로서>
‘-로써’는 도구나 기구, 수단이나 방법을 나타낼 때 쓰며, ‘-로서’는 지위나 신분, 자격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로써’는 ‘-을 써서’에서 온 말이므로 ‘-을 써서’ ‘-을 이용해’ ‘-을 가지고’로 바꾸어 넣어 문장에 어울리면 ‘-로써’를 씁니다.


<이에요 VS 예요>
받침이 있을 때: -이에요/-이어요  ex) 광호형님이에요/ 광호형님이어요
받침이 없을 때: -예요, -여요  ex) 혜진누나예요/혜진누나여요


<집어넣어서 VS  집어 넣어서>
‘집어넣다’를 붙여 쓰면 ‘들어가게 하다(식순에 집어넣다)’의 의미이고, 띄어 쓰면 ‘집어서 넣다(집게로 집어 넣다)’의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집어서라는 동작보다는 삽입하다, 첨부하다의 의미이므로 붙여 쓰는 게 나을 듯합니다. 사실 좀 애매하지만요.^^;


<-이 VS -히>
‘곰곰히’ -> ‘곰곰이’, 단 ‘꼼꼼이’는 틀리고 ‘꼼꼼히’가 맞다는... ‘-이’와 ‘-히’의 용법도 은근히 까다롭지만 자주 쓰는 용례를 익혀두면 좋을 듯싶구먼. ‘-이’를 쓸 자리에 ‘-히’를 써서 틀리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번번이, 틈틈이, 뚜렷이, 촉촉이, 끔찍이 등이 있다네.


<되요 VS 돼요>
되요(X) -> 돼요(O)란다. ‘되다’에 ‘-어, -어라, -었-’ 등의 어미가 결합한 것을 줄여 쓰면 ‘돼, 돼라, 됐-’의 ‘돼-’ 형태가 되지. 예를 들어 안 됀다(X) -> 안 된다(O)/ 안 되요(X) -> 안 돼요(O)가 되는데 풀어쓸 수 있으면 ‘되’로 보고, 풀어쓸 수 없으면 ‘돼’로 보면 된단다. 여기서는 ‘되어요’가 줄어 ‘돼요’로 쓰는 게 맞지. 비슷한 원리로 자주 틀리는 표현에 뵈요(X) -> 봬요(O)가 있지. 자세한 건 한글맞춤법 제35항 [붙임2]와 관련 해설을 참조해주시길.^-^


<체크 VS 첵>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짧은 모음 다음의 무성 파열음 [p], [t], [k]는 받침으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래서 로켓(rocket), 카펫(carpet), 도넛(doughnut), 갭(gap), 북(book), 캣(cat) 등으로 씁니다. 이 원칙에 따르면 check는 ‘첵’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체크를 비롯해 노크, 세트, 쇼크, 히트, 배트, 메리트, 티베트, 네트, 커피 포트 등은 예외로 받침을 쓰지 않습니다. ‘첵’과 ‘췍’도 좋겠지만 오륀지인가, 어륀지가 맞다고 역설하시던 어느 분의 무지몽매함에 동참하는 건 신중해야겠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은 어디까지나 우리 언어생활에서 통일성을 기하고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 쓰는 것이니까요.


<우리 반 VS 우리반>

‘우리말’이라고 하면 “외래어 대신 우리말을 쓰자”처럼 한국어를 뜻하고 ‘우리 말’이라고 하면 “교수님은 우리 말을 믿어 주신다”처럼 우리가 하는 말을 뜻합니다. 표준어는 아니지만 우리반을 飛반으로 고유명사화한다면 한 단어로 봐서 “우리반밖에”라고 쓸 수도 있겠죠. 여기서는 그냥 띄어쓰는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우리반이든, 우리 반이든 간에 오직 그것뿐임을 뜻하는 “밖에”는 붙여써야합니다. 다만, ‘~이외에도/ ~바깥’을 의미할 경우에는 “이 밖에도 또 있다" "사무실 밖에 서있다”처럼 띄어씁니다.


<걸맞은 VS 걸맞는>
나는 이런저런 글을 쓸 때 맞춤법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정확한 한국어가 아름다운 한국어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믿음 때문이다. 물론 그 정확성의 기준은 선뜻 제시하기 힘든지라 명백한 비문이나 오류를 고치는 데 그치지만. 한글 문서를 사용하면 오타의 상당 부분을 손쉽게 고칠 수 있다. ‘걸맞는’에 빨간 줄이 그어지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걸 맞는’이라고 띄어쓰기를 했다. 빨간 줄이 없어지니까 맞게 썼다고 생각하고 넘어 갔다. 한참이 지나 한 후배가 띄어쓰기의 의문을 제기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좀 어색해 찾아봤다.


찾아보니 ‘걸맞다’는 형용사이므로 ‘걸맞은’으로 써야 맞다. 동사의 어간에 관형사형 어미가 붙을 때는 시제가 현재이면 ‘-는’(가는 벗, 먹는 꿀), 과거이면 ‘-은(ㄴ)’(간 벗, 먹은 꿀)을 쓴다. 그런데 형용사의 어간에는 현재와 과거 시제의 구별 없이 항상 ‘-은(ㄴ)’만 붙는데, 어간에 받침이 있으면 ‘-은’, 없으면 ‘-ㄴ’이 붙는다.


형용사 ‘기쁘다’‘예쁘다’는 받침이 없으니까 ‘기쁘는 일’‘예쁘는 아이’라고 쓰지 않고 ‘기쁜 일’‘예쁜 아이’라고 쓰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따라서 ‘걸맞다’도 ‘걸맞은’이 되고, ‘알맞다’ 역시 형용사이기 때문에 ‘알맞은’으로 쓴다는 것도 같이 알아두면 좋을 듯싶다. 후배 덕분에 그간 틀리게 알고 있던 표현을 고칠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한 잘못이나마 지적해주는 지인들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것>1
‘것’은 의존명사이므로 앞말과 띄어 씁니다. 다만 지시 대명사인 ‘그것, 이것, 저것’과 명사 ‘날것, 들것, 탈것’ 등은 붙여 씁니다.


<것>2
스치는게 인생 -> 스치는 게 인생
'게'는 '것이'의 준말이니 띄어쓰기를 해야 한다네. 비슷한 용례로 '건(것은)'과 '걸(것을)'이 있지. '것'은 의존명사로서 앞의 어미와 띄어 쓰면 돼.


모르는∨게 없다
기쁜∨건 어쩔 수 없다
느낀∨걸 털어놓겠다


'것, 바, 줄, 수' 등과 같은 의존명사는 우리는 띄어 쓰고 있는데, 북한은 붙여 쓰고 있다고 하더군. 근데 남북 단일 어문규범 논의에서 남쪽 방식으로 띄어 쓰는 걸로 대략 합의를 봤다고 하더라고. 당분간 바뀌지 않을 모양이니 잘 띄어 쓰면 될 듯싶구먼. 되게 우습지만 전역 선물이라고 생각해주렴.^0^ 


<한잔 씩 VS 한 잔씩>
‘한잔’은 간단하게 한 차례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지만 여기서는 말 그대로 1회의 의미이므로 ‘한-’과 ‘-잔’을 띄어씁니다. 아울러 수량을 나타내는 명사 또는 명사구 뒤에 쓰는 접미사 ‘-씩’은 당연히 붙여 씁니다.


한의 경우 관형사로 쓰일 경우(한 명, 한 개...) 띄어 쓰고, 하나의 명사로 쓰일 경우(한가득, 한낮, 한나절) 붙여 씁니다. 가령 한길은 넓은 길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명사이고, 한 길은 하나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기회 있는 어떤 때, 잠깐/일단, 과거의 어느 때의 뜻의 단어지만(조만간 한번 봅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1회(回)(턱걸이를 한 번 밖에 못한다, 한 번의 슈팅찬스를 놓치다)를 뜻합니다.


‘한번/ 한 번’이 미묘한 의미 차이가 나듯이 ‘한달/ 한 달’도 차이가 나는 것인지 몰라서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한 달은 붙여 쓰는 경우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는 띄어 쓰지만 순서를 나타내는 경우나 숫자와 어울리어 쓰이는 경우에는 붙여 쓸 수 있습니다. 예외규정의 예시로는 ‘다섯시, 삼학년’과 같이 순서를 나타내는 경우와 ‘12시, 1945년 8월 15일’과 같이 숫자와 어울리어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한 달’은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정종 VS 사케>
너는 사케를 언급하며 잘 모르는 분들을 배려해 정종이라는 용어를 썼겠지만 이제 알 만큼 알려진 만큼 청주라는 말을 써도 괜찮을 거 같단다. 정종(正宗)은 그리 바람직한 명칭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종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일본의 청주 상표 중 하나가 널리 쓰여 일반 명칭처럼 잘못 굳어진 것이니까.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청주 제조법을 전파했다고도 하니까 주객이 전도된 셈이야. 물론 일본은 주조 기술을 발전시켜 청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고유의 술인 사케(Sake)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원조라고 주장하기가 좀 머쓱하지만.


여하간 정종은 일본의 청주 상표 가운데 마사무네라고 불리는 사케의 한 브랜드일 뿐이지. 가령 한 때 진로가 수도권 소주 시장을 독점할 때 그냥 “진로 주세요”했듯이, 내가 버블에서 종종 즐기는 벨기에산 흑맥주 “레페 브라운 주세요”하는 것과 비슷한 셈이야. 일본 술 중에 예를 들자면 “아사히 주세요”하는 것과 비슷하고. 이처럼 상표명이 대표화된 예로 봉고, 워크맨, 레미콘, 미원 등이 있어. 술에서는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방에서만 생산되는 거품 나는 술인 샴페인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일본에서는 정종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정종이라는 술 브랜드가 많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걸 따를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정리하자면 정종은 일본말 마사무네를 우리 음으로 읽은 것이며, 소주나 맥주 같이 술의 종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 브랜드명인지라 진짜 정종 상표를 마실 때만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 비교적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청주 혹은 일본 청주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 국왕의 호칭 문제도 참 난감한 문제지. 일왕(日王), 일황(日皇), 천황(天皇) 혹은 덴노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사실 나도 헛갈린다(요즘 일본 하는 꼴을 봐서는 확 왜왕이라고 부를까도 싶지만^^;). 야채(野菜, やさい)가 일본식 용어임을 알면서도 채소(菜蔬)를 어색해 하고, 순우리말인 푸성귀나 남새는 거의 잊어버리는 현실을 보면 이름을 바로잡는 일(正名)보다 더 중요한 건 일상의 실천인지도 모르겠다. 본의 아니게 잡설을 늘어놓았어. 너그러이 헤아리시길.^-^


<뒤풀이 VS 뒷풀이>
앞으로 ‘뒤풀이’라는 표현을 많이 쓸 텐데 ‘뒷풀이’가 아니란다. 우리말 규정 가운데 사이시옷이 참 어렵지. 참고로 북한은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다고 해. 사이시옷 규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글 맞춤법 제30항과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등을 참조하면 쉽게 알 수 있을 테고, 우선은 자주 하는 실수 위주로 정리해두면 좋을 듯싶어.


‘뒤풀이’는 순우리말 ‘뒤’+‘풀이’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합성어라 사이시옷이 필요할 것 같지만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ㄲㄸㅃㅆㅉ)나 거센소리(ㅊㅋㅌㅍ)가 날 때는 사이시옷을 받쳐 적을 필요가 없단다. 그래서 ‘갯벌’은 맞아도 ‘갯펄’은 틀려서 ‘개펄’이 옳은 표현이야. 이것만 알고 있어도 사이시옷을 좀 더 정확히 구사할 수 있어. 더 예를 들어보자면 ‘뒤쪽’,  ‘뒤처리’,  ‘뒤편’,  ‘뒤뜰’,  ‘위층’,  ‘위쪽’,  ‘아래쪽’은 사이시옷을 쓰지 않아. 무의식 중에 사이시옷을 넣어 쓰는 표현들이야.


‘첫째’, ‘셋째’, ‘넷째’ 정도가 예외라고 할 수 있겠구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외라고 할 수는 없어. 이 단어들은 ‘첫’, ‘셋’, ‘넷’에 접미사 ‘-째’가 결합한 파생어이므로 사이시옷과 관련이 없고, 여기서의 ‘ㅅ’은 사이시옷이 아니야. 사이시옷은 합성어인 경우에만 적용되기 때문이지. 이와 비슷한 사례로 ‘해님’과 ‘나라님’, ‘나무꾼’ 등이 있어. 이것들도 ‘-님’, ‘-꾼’이 접미사라 합성어가 아니고 파생어이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쓰지 않아.


익히 알다시피 단어에는 단일어와 복합어가 있고, 단일어는 하나의 어근으로 이루어진 말이지. 복합어에는 둘 이상의 어근으로 만들어진 단어인 ‘합성어’와 어근과 파생접사(위치로 분류하면 접두사와 접미사)로 이루어진 ‘파생어’가 있지. 사이시옷은 합성어에만 적용되는 규칙이야. 따라서 ‘해님’과 ‘나라님’은 파생어라 사이시옷을 쓰지 않지만, ‘햇볕’, ‘햇빛’, ‘햇살’, ‘나랏일’, ‘나랏돈’, ‘나랏빚’은 합성어이므로 사이시옷을 써야해. 사실 합성어와 파생어 구분은 헛갈리는 면도 많고 일일이 따질 수 없으니 이네들은 그냥 아름다운 예외로 기억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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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라는 것은 장차 그것으로써 행하려고 하는 바이다(學者 將以行之也)”라고 정이천(鄭伊川)은 말했다. 간명하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놓고 선현들도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게다. 지와 행을 두고 벌어진 주희와 왕수인의 논변은 매력적이다. 정이천은 행동의 기초가 되는 앎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희 역시 제대로 알면 행하게 되며,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앎이 얕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먼저 이치를 깨우쳐야 행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은 직관적으로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서 우선 무엇이 옳은지 알아야 한다는 견해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정조대왕 역시 주희의 견해를 좇아 “만약에 지식에 참되지 못한 바가 있다면, 실천에도 부족한 점이 있게 된다(若知有所未眞 則行有所未逮)”라거나 “배움(學)이라는 한 글자는 넓게 말하면 지(知)와 행(行)을 겸하지만, 좁게 말하면 지에 중점이 있다(學之一字 專言則兼知行 偏言則主乎知)”라고 말했다(정조대왕어록인 『일득록(日得錄)』 참조).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앎을 쌓는데 열중하느라 영원히 실천을 못하고 인생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듯싶다. 어쨌든 실천보다는 앎을 중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지식의 습득을 강조할수록 많이 배울 여력이 있는 사대부 계급의 통치가 자연스럽게 공고해진다. 이 때문에 주자학이 체제유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배움이 깊어질 여력이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 상층부에 좀 더 몰려있을 테니 말이다.


주자학에서도 누구나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양명학은 좀 더 적극적으로 누구나 윤리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왕양명은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내세우며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단지 아직 알지 못한 것(知而不行 只是未知)”이라거나 “참된 앎은 행하기 위한 까닭이다. 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앎이라 말할 수 없다(眞知所以爲行 不行不足以爲知)”라고 목청을 높였다. 지행합일의 참된 앎(眞知)이 발현되지 않는 것은 사욕(私慾)에 가로막힌 것이며 사욕을 배제해 지행의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변이다.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은 부러 실천을 강조한 면도 적잖다.


선지후행설에 건네는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선지후행설이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복무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 지에는 지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조회하고 고치는 반성의 능력까지 포함한다면 선지후행이 예의 편협함을 상당 부분 덜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다가 생활 속의 소소한 실천에 인색하지 않는 정성까지 보탠다면 선지후행설은 지행합일설과 거의 의견일치를 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단서조항을 덕지덕지 달아가며 선지후행설의 불씨를 살리려는 까닭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라도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위인 앞자리에 잠곡 김육 선생을 둔다. 잠곡은 ‘앎’과 ‘삶’의 거리를 줄여나가는 노력의 전범으로서 내게 각인되어 있다. 칠순이 넘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동법(大同法) 확대 실시에 일생을 걸었던 잠곡의 신념을 흠모한다. 당시 대동법 반대론자들도 공납의 폐단이 심각한 지경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호패법을 강화해 농민의 유망을 막자는 해법을 내놓았다. 잠곡은 백성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민생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호패법을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장기 비전은 한결같은 소신이 되었고, 실무파악능력은 수행력으로 뒷받침되었다.


대동법 반대론자가 권세의 눈치를 보느라 호패법을 제시했다기보다는 그네들도 자신의 생각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 산물이었다. 잠곡의 삶이 선지후행인지 지행합일인지를 가르는 건 무의미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지의 문제가 좀 더 중요하게 조명될 필요는 있겠다. 대동법 찬성론자와 대동법 반대론자가 모두 지행합일에 충실했다면 그들 각각의 세계관을 조회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동법이 보다 나은 대안이라는 것을 호기롭게 주장하자니 뒷사람의 이점을 악용하는 것만 같아 스스럽다. 그 시대에 놓였을 때 대동법을 주창할 혜안이나 용기를 갖추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대동법과 호패법의 맞섬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실제로는 비율과 조합의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도덕적인 가치판단에는 어느 정도 합의 가능한 부분이 넓지만 정책적인 가치판단에는 합의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가령 선지(先知)에 가까운 경제학자들이 벌이는 논쟁 가운데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의 선택 문제가 있다.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 인플레이션이나 실업이 자원배분을 왜곡하거나 자원낭비를 유발한다는 건 또렷하다. 하지만 공평성 측면에서 살피면 판단 내리기가 어렵다(이영환·김진욱, 『경제학 강의』, 율곡출판사, 2007. 참조).


실업은 전체 인구의 일부에 해당하는 문제이지만 인플레이션은 모든 국민이 겪는 문제이므로 인플레이션 퇴치를 우선하는 것이 공평성을 충족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인플레이션의 증가보다는 실업률이 증가하는 것이 빈곤율을 더 상승시켜 피해가 저소득층에 집중되게 만들므로 이에 대한 처방이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있다. 후자의 견해로 대표적인 학자가 앨런 블라인더(Alan Blinder)인데 그는 『단단한 머리, 부드러운 가슴(Hard Heads, Soft Hearts)』라는 책에서 인플레이션이라는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 (높은 실업률이라는) 뇌수술 받는 건 어리석다고 질타했다.


블라인더는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기침체는 소득분배를 악화시키기 때문에 공평성을 해친다고 봤다. 경미한 인플레이션을 수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블라인더는 공직에 나가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부의장을 역임하면서 그린스펀 의장과의 마찰을 빚어 18개월만에 사퇴했다. 블라인더가 옹호하려고 했던 공평성과 인플레이션 중시론자들이 건사하려 했던 공평성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 것일까? 양측의 지식과 행동에 우열을 가리는 건 가능한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 보니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앎’과 ‘삶’의 관계를 두 갈래로 봐야하는 건 아닐까 싶다. 도덕적인 실천의 문제에서는 지행합일이 좀 더 맞고, 사회현상에 대한 정견은 선지후행이 좀 더 적합하다. 잠곡이나 블라인더의 사례를 보니 정책은 지행합일을 금과옥조로 내세우기 곤란하다. 두 영역이 매끄럽게 나눠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헛갈려서는 곤란하다. 지행합일이 요구되는 곳에서 지를 핑계되며 미적거리고, 선지후행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 행이 급하다며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하는 건 모두 경계할 일이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동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지식 없는 행동은 맹목적이다(언뜻 보면 지행합일을 논하는 것 같지만 뜻빛깔에서 차이가 난다).


고작 이런 이야기나 늘어놓으려고 쓸데없이 끼적였다. 알기도 너르게 알아야하고, 살기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무미건조한 한마디나 읊조린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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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밀레는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감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옛것에 젖어들 만큼 감격하고 있는가, 아니 제대로 알고는 있는가? 딱히 돈이 안 되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이 아슬아슬하다. 지난 5월 20일 서울시는 새청사 기공식을 열었다. 당초에 서울시는 초고층의 건물 설계안을 내놓았는데 문화재위원회는 덕수궁과 조화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의를 퇴짜 놓았다. 여러 차례 건축 심의를 거친 끝에 서울시는 한옥의 처마를 형상화한 디자인을 확정했다. 서울시 새청사 논란을 놓고 일부 시민들은 덕수궁이 거치적거린다고 여기며 쌀쌀맞은 시선을 건넸다. 그저 도심의 공원에 지나지 않는 덕수궁이 서울의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대의명분(?)의 발목을 잡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덕수궁은 빤히 보이기라도 하니까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공사 지연이 두려워 쉬쉬하고 넘어간 매장문화재는 오늘날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이 난입해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훼손한 치욕이 불과 2000년의 일이었다. 철원군에서 태조 왕건의 사택지로 추정되는 철원군의 구 철원향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예산 부족 등으로 연기되었다가 올해 들어 2년 만에 재추진되었다. 가까스로 확보한 예산 2억 원은 숭례문 복원을 위한 추정예산의 100분 1 수준이다. 딱히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은 국가 지정문화재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모아져 아슬아슬하다. 거식증보다는 편식이 낫다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말이다. 궁궐의 속살을 더듬으며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세상에 맞설 재기 발랄한 언어를 궁리해본다.


덕수궁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여기저기서 많이 접했다. 덕수궁은 1907년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난 고종에게 붙인 궁호일 따름이라는 이야기다. 덕수궁은 상왕이 머무는 궁궐로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이지 궁궐 고유의 명칭은 아니라는 견해에다가 덕수궁 탄생 배경이 고종의 강제 퇴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맞물린다. 고종은 물러나서 장수를 즐기기보다는 구질구질한 옥좌를 좀 더 지키고 했으리라. 사실상 경운궁에 억류되었던 고종 입장에서는 덕수궁이라는 궁호가 마뜩잖았을 공산이 크다.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慶運)을 ‘경사스러운 일이 옮겨오다’로 풀이해보니 그 뜻이 절묘하다. 국운이 기울던 조선 말기에 경운궁을 드나들던 이들은 운수가 움직여서 중흥하길 바랐을 것만 같다.


1895년 을미사변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독살을 염려해 통조림으로 요기를 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벌어질 정도로 일본의 폭력은 혹심했다.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인 몸부림으로 열강의 공사관 밀집한 곳에 경운궁을 중건했다. 조선의 독자적인 관영 공사체제로 조영된 마지막 궁궐인 덕수궁은 원래 규모의 3분의 1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본래 궁궐터가 아니었던지라 배치가 뒤숭숭한데 군데군데 휑한 공간이 펼쳐지니 스산하다. 대한문을 들어가서 거닐게 되는 금천교는 조악하여 예의 은근한 맛을 잃었지만 말기의 작품에 서린 처연함이 다리의 못남을 가려주고 있다. 맹자는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뒤에 남이 그 나라를 정벌한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라고 역설했다. 자책하는 다리로 삼아 살뜰하게 반성해봄직 하다.


중화문이 옹글게 서있으나 문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지 오래다. 답사객들의 태반은 문으로 입장하지 않고 툭 터진 조정(朝廷)으로 자유로이 드나든다. 본래 중화문 좌우에는 행각이 늘어서 있었으나 일제가 헐어내 위용을 잃었다. 문 오른쪽에 ‘ㄱ’자 모양으로 약간 남아있는 것이 전부다. 그곳은 의자가 놓여있어 쉬어가게 해놨는데 도무지 맘 편히 쉴 수 없는 회한의 장소다.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들>에 나오는 도인은 꿈을 통해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한다. 도인은 오래 전에 불타버리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이제는 누구도 그 사원의 신을 숭배하지 않는 폐허를 꿈꾸기에 안성맞춤으로 여겼다. 한바탕 덜어내고 난 곳에서 채울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비참하게 잘려나간 중화문 행각에 걸터앉아 희망을 노래하자. 배부른 소리 좀 늘어놓고 보면 어느새 넉넉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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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히 보면 어도(御道)와 그 주변 부분에 깔린 박석이 다른 재질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가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어내고 잔디를 심었던 것을 최근에 뽑았기 때문이다.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이 국보와 보물의 일련번호 체계를 없앤다는 소식이 들린다. 등수 매기기 식의 서열화가 사라지는 계기가 될 듯싶어 기껍다.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에 귀천을 나누는 건 서글프지만 차이는 숙명적이고, 차이는 자연스럽게 차별을 낳는다. 지정문화재 제도는 국가적 관리의 우선순위를 확립함으로써 후손에게 좀 더 잘 물려줄 목록을 작성한다. 문화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국가적 차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반면에 개인적 차별은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편애는 넓혀나가고 국가적 편애는 좁혀나가야 한다. 숭례문의 참화는 국가적 편애를 제대로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개인적 편애를 희석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 애이불상(哀而不傷)하고 남은 힘으로 문화유산 사랑이 관념화되고 당위적인 구호가 되는 것을 경계하자.


문화유산을 완상하는 저마다의 감상만큼은 세간의 평가라든가 경제적 가치 따위로 재는 걸 그쳤으면 좋겠다. 가슴을 흔들고 푸근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저마다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자. 나는 조선 최후의 궁궐 정전, 막둥이 중화전을 편애한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이 죄다 국보이지만 그네들의 우아함 못지 않은 기품이 중화전에 있다. 중화전은 창건 당시에는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중건되면서 재정난 때문에 단층으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제국의 정전으로서 단층은 멋쩍었는지 지붕을 크게 올렸다고 하는데 그 궁여지책마저 살갑다. 고운 금빛으로 기운차게 쓰인 중화전 편액을 보는 맛이 쏠쏠하다. 치우침, 기울어짐, 지나침, 미치지 못함도 없으며 늘 떳떳하고 변치 않는 상태를 중화(中和)라고 한다면 얼마나 버리고 비워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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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에서는 희로애락이 발현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하고, 발현해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고 풀이하고 있다.



중화전 답도에는 궁궐 정전 가운데 유일하게 봉황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다. 제국의 격식을 드높이기 위해 애를 썼던 게다. 용을 새긴 답도는 중화전과 원구단에서만 볼 수 있는데 만세 대신 천세를 외쳤던 조선에서는 파격이었나 보다. 중화전 천장에는 살진 황룡이 노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현문 안쪽에도 용이 그려져 있고 수막새에서도 용이 노닌다. 조지훈 선생은 <봉황수>에서 용 대신 봉황을 틀어 올린 조국을 안쓰러워했지만 막상 쌍룡을 만났는데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이 가리키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창덕궁 인정전과 함께 황제를 뜻하는 황색 창호를 쓰다듬다가 고종을 떠올렸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라는 책에서 벌어진 치열한 논쟁에서 엿보이듯이 그 시절의 빛과 그림자를 헤집는 노력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가 실패한 군주였음은 또렷하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해 자주독립을 천명했지만 그에게는 자주와 자강을 도모할 혜안이 없었다. 동학농민전쟁 때 고종이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여 지키고자 했던 것은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었듯이 그는 제국민을 위한 제국이었다기보다 황제를 받들기 위한 제국을 원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제국의 실정은 일제의 침략에 견주어 얼마나 나았겠냐는 투덜거림에 귀가 솔깃하다. 그럼에도 무능한 임금과 제국주의 침략세력과의 차이가 잗다랗다고 말하기에는 찜찜하다. 더 나아가 아예 일제의 통치 결과를 두둔하는 일각의 주장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는 눈감은 채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따지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무모할뿐더러 윤리적으로도 박절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민통치로 이룩한 경제발전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를 몇몇 통계수치로 가늠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가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훼손된 자유에 대한 비용 처리가 너무 인색하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왕정 복고를 바라는 민중이 거의 없었던 시대 상황을 반추할 때 황실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운 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 때 자신들의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당시의 백성들의 존재 또한 분명하다. 요즘은 너도나도 촌스럽다고 손가락질하는 민족주의라든가 애국주의의 열정에 이끌렸던 그네들의 마음자리를 애틋하게 여긴다. 망국의 일차적 책임자들을 차마 미워하지 못함이 조선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와 독살설이 몰고 온 충격이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전제군주의 죽음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를 잉태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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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의 소맷돌에는 돌짐승(瑞獸)을 장식했다. 앙증맞은 주먹코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살짝 쳐주고 싶다. 역경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 치켜든 얼굴이 익살스럽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한 젊은이를 만났다. 눈이 멀었다가 갑자기 앞이 보였는데 자기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개화의 파고 속에서 표류했던 대한제국을 추념하면서 과연 오늘의 우리는 슬기롭게 세계화의 너울을 넘고 있는지 묻는다. 화담 선생은 그 젊은이에게 눈을 감으라고 충고한다. 눈감은 젊은이가 예전처럼 지팡이를 짚어가며 집을 잘 찾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고사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서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너의 눈을 감아라(還閉汝眼)”라는 일갈은 개안의 미덕에만 열중하던 내게 폐안의 가치를 품게 해준다. 자신의 잣대를 먼저 세워야 제 것으로 삼을 만한 것을 가려내는 안목이 길러지게 마련이다.


중화문은 황궁 법전의 정문으로서 격을 높이려고 했던지 기둥이 높아지고 처마가 길어졌다. 덕분에 문 사이로 중화전의 용마루까지 훤히 보이는데 그 곡선미가 아찔하다. 가로 부재인 창방의 직선과 대비되어 보는 맛을 돋운다. 포실한 전통의 토대 위에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을 모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이 용마루 선과 같은 우리의 멋은 얼마든지 있다. 움직임과 행동을 혼동하지 말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곱씹는다. 우리는 등 떠밀려서 움직이고 있는가? 자기가 선택한 걸음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앞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가? 그저 식객에 지나지 않는가? 중화전은 내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리는 곳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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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함과 귀함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않는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벗어나지 않는다.
군자가 인을 떠나면 어디에서 이름을 이루겠는가? 군자는 밥을 먹는 사이에도 인은 어김이 없으니 황급한 순간에도 반드시 인을 행하고, 곤경에 처한 순간에도 반드시 인을 행한다.”
- 『論語』 里仁편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구절을 두고 해석이 갈린다. 크게 보면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대강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가난함과 천함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벗어날 수 없다면) 떠나지 않는다.

 

2) 가난함과 천함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닐지라도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2)의 해석이 전통적인 해석이지만 선뜻 의미가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1)의 해석도 음미할 만하다. 박기봉 선생님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을 제외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1)의 해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호기심이 생겨 도서관에서 논어 관련 주석서들을 이것저것 뒤적여봤다. 내가 이것저것 찾아본 번역들을 짜깁기하고 멋대로 편집한 것이라 드러내놓기 민망하지만 스쳐 가는 생각거리로 삼아주시길 바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올린다.


전통적인 해석인 2)의 핵심 논거로 작용했던 주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빈천이 아니지만 억지로 그 상황을 벗어나지 않는다, 즉 빈천을 편안히 여기는 태도라고 풀이했다. 군자가 부귀를 자세히 살피고 빈천을 편안히 여김을 이와 같이 한다고 보았다. 하안(何晏)과 형병(邢昺)은 “운수가 막힐 때와 태평할 때가 있으니 군자가 도를 실천할지라도 도리어 빈천한 경우가 있다. 이는 도로써 얻은 것은 아니다. 비록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억지로 벗어나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時有否泰 故君子履道而反貧賤 此則不以其道而得之 雖是人之所惡 不可違而去之)”라고 했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 호산 박문호가 不以其道得之 앞에 雖(비록)의 뜻이 있다고 본 것도 이와 상통한다.


다시 말해 정당하게 주어진 빈천이 아닐지라도 애써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은 착하고 어질게 살았는데 사회가 타락하고 정치가 어지러워서 군자가 빈천하게 되었다고 해도 구태여 그 빈천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당한 빈천이라면 태연하게 안주하라, 안빈낙도(安貧樂道)하라고 충고하는 글귀가 된다. 맹자가 대장부를 설명하며 “가난하고 천하더라도 자기의 뜻을 옮기지 않는다(貧賤不能移)”라고 했던 구절을 비롯해서 유가의 경전에서 곧잘 접하게 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나가는데 부귀나 빈천 따위의 외부적인 요소에 휘둘리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약용은 왕충(王充)과 견해를 같이 해 1)의 해석에 가깝게 풀이했다. “진실로 이와 같이 본다면 군자는 끝내 빈천을 버리는 날이 없을 것이다. 한번 빈천을 얻어 오직 이를 버리지 않는 것으로 법을 삼을 뿐, 도리인지 도리가 아닌지를 전혀 묻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다운 시중(時中)의 의(義)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 정당한 도리로 얻지 않았기에 그것을 버리지 않았을 따름이다”라며 하안의 주석을 반박했다. 결국 이러한 논리로 “빈천은 비록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에서 떠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즉 정약용의 관점은 2)와는 달리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 정당한 방법을 도모한다면 빈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좀 더 의역하자면 부귀처럼 바라는 것일 때는 온당하게 머무를 만한 가를 살피고, 빈천처럼 싫어하는 것일 때는 마땅하게 벗어날 방도를 궁리하라는 뜻이 될 듯싶다. 不以其道得之의 得之에서 去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 得去之로 해석했다. 得은 빈천에서 떠나는 방법을 얻는 것을 일컫는 셈이다. 양백준(楊佰峻)도 빈천은 사람들이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得은 부적절하고 不以其道得之의 得之를 去之로 바꾸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1)과 2)의 해석 모두 그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딱히 이것이 맞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한문 번역에서 정답을 내놓으라고 투정부린다면 우스운 일이다. 한쪽은 인간다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빈천에 억울해 하지말고 가야할 길을 가라고 주문하고, 다른 쪽에서는 빈천을 벗어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를 염두에 두라고 다독인다. 사실 서로 강조하는 바가 살짝 다를 뿐 결국 지향하는 바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자세한 논어 번역서를 읽다 보면 이렇게 해석상 이견이 있는 구절이 적잖음을 발견하게 되어 당혹스러워진다. 전통적 주석과 별개의 견해가 오늘날 제시되기도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빈천은 탈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써 추구할 만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적극적으로 빈천을 추구하는 삶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본 셈이다. 요즘 회자되는 ‘간소한 삶’의 개념과 잇닿는다. 이렇게 보면 其道得之는 도로써 얻은 빈천이 되고 不以其道得之한 도로써 얻지 않은 빈천이 되어 떠나지 말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전통적 해석은 정당하지 못한 빈천, 부당한 빈천을 자기 잘못에 기인한 것뿐만 아니라 불의한 세상 때문에 뜻하지 않게 손해를 본 것도 감내해야 한다(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정의한다면, 신영복 선생님은 부당한 빈천은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한정해서 본다는 차이가 있다. 


전통적 해석의 경우에 군자는 빈천은 외물(外物)이기 때문에 거기에 너무 마음을 쏟지 말고 도를 추구하라, 인을 행하라는 식의 가르침이라면 신 선생님은 부당한 빈천이 불합리한 사회구조나 어질지 못한 사람의 간계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인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저질러서 얻게 된 것으로 본 듯하다. 신 선생님도 반드시 이렇게 봐야 한다고 역설하시기보다는 이건 어떠냐고 제안하시는 정도인 것 같다. 이 부분도 놓치지 말고 생각해보자고 화두를 던져주신 것으로 읽었다.


이남호 선생님은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서문에서 “내가 읽은 보르헤스 소설은 이미 보르헤스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쓴 소설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선생님께서는 문학평론가이시기 때문에 엉뚱한 해석마저 힘있게 들린다.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유명한 명제를 좀 패러디 해 권위 또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라는 아우라를 접하고서 거기에 얽매이지 않기가 힘들다. 주자의 광휘에 맞서길 꺼렸던 조선의 유학자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문학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의도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의 해석 속에 있다”라는 이 선생님의 말씀은 한문 고전을 읽을 때는 얼마만큼 적용될지 고심스럽다. 문학은 오독이 창조적 독서의 일환일 수 있지만, 아니 오독이라는 것이 성립하는지가 의심스럽다. 한문 고전을 한국어로 번역해 읽을 때 오역 시비가 있다면 그것을 풍요로운 해석이라고 치켜세울 수 있는 것인지, 다른 성질의 문제인지 헛갈린다.

 

가령 『논어』는 孔子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고 그 책을 읽어온 모든 사람들의 공동저술이다. 『논어』에 새로운 주석을 단 사람은 『논어』를 새로 쓴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가 쓴 『논어』는 빈약한 내용의 책이었지만, 현재 내가 읽는 『논어』는 매우 풍부한 내용을 지닌 책이 되었다.


- 이남호,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민음사, 1995, 144쪽


내 얕은 『논어』 읽기는 발설자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과연 공자와 제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네들이 살던 시대 배경은 무엇이고 어떤 해법을 내놓고 있느냐는 식으로만 접근했다. 텍스트에는 실체적 진실이 있어야 하고 그것의 근처를 더듬는 것이 학생의 본분인 것으로 믿어왔다. 교조적 지위를 누렸던 주희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부러 찾으려는 노력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발언록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실익도 없다. 어쩌면 고전의 해석도 실체적 진실이 있다기보다는 결국 합의되고 구성되는 것인지 모른다.


용기를 내서 고전을 집어들고 있다보면 내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하기 일쑤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색하기보다는 어느 어깨가 더 탐스러운지 물색하느라 눈알을 바지런히 굴렸던 것 같다. 그저 거인의 쩍 벌어진 어깨 위에 올라서 호가호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았나 스스로를 반성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할 때 知新은 배운 것을 자신의 삶에서 재해석하고 다른 일에도 확장시켜 가는 과정이다. 이런 세세한 구절 풀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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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꿈

문화 2008. 6. 15. 01:33 |

이번 학기 마지막 과제였던 <유가적 사유와 논어> 과제물을 부분 수정해서 올립니다. 이 과제를 작성하는 고뇌(?)를 나눠준 준 석훈이에게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원문>
子曰 老者 安之 朋友 信之 少者 懷之
- 『논어』 <공야장편>


<국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뜻은) 나이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친구에게 믿음을 주며 어린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니라.”


<견해>
  공자께서 제자인 자로, 안연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포부를 밝힌 문구다.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라고 볼 수 있고, 정책구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견 소박해 보이는 공자의 말씀에서 공자사상의 고갱이가 엿보인다. 『예기』 예운(禮運)편에서는 큰 도가 행해진 세상에서는 천하가 온 세상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며, 노인에게는 그 생을 편안하게 마치게 하였으며, 청장년들은 능력을 충분히 활용했으며, 어린이가 잘 자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가 제시되고 있다. 공자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다지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방법으로 대동을 지향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78년 덩샤오핑은 원바오(溫飽), 샤오캉(小康), 다퉁(大同) 사회라는 3단계 발전전략을 내놓았고 2050년까지 실현하겠다는 대동은 공산주의 이상향의 중국판이다. 기세춘 선생은 대동사회는 오히려 묵자가 서술한 안락하고 평화로운 공동체(安生生)와 맞닿는다고 보았는데 일리가 있다. 공자의 대동은 묵자와 실현방식이 달랐을 뿐더러 현세적이던 공자는 대동사회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중세적 신정정치에서 탈피해 합리주의와 세속주의를 추구했다. 지상낙원을 사후의 천상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구현하자는 것이다. 공자는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훨씬 앞서서 인간다움에 대한 풍부한 고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과 견주어 살펴봄직 하다. 칼 포퍼는 유토피아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점진적 사회공학을 주창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하려 생각하지 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경우 추상적 집단이 아닌 구체적 개인의 삶에 천착해 개인의 본성을 가꾸는 이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가의 현실적인 구세의식이 도드라진다. 선생 또한 미래나 천상의 유토피아를 언급하지 않았다. 공자는 신과 거의 무관한 세계의 인본주의를 역설했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는 말씀 속에서 인도를 넓히고 실천하는 주체는 사람 자신이고, 그러한 능력을 개개인이 충분히 품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공자는 현실에 밀착한, 현실을 떠나지 않은, 현실로 발현할 수 있는 이상을 갈파한다. 이것은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치들이다. 仁은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평생을 추구하는 힘이 된다.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바라고,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을 仁은 가리키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 서설에는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장미꽃이 피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어떤 거짓말쟁이가 자신이 로도스섬에 있을 때 굉장히 멀리 뛸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굳이 많은 증인이 필요 없지. 여기가 로도스야. 여기서 뛰어보게!” 헤겔은 이 우화를 미덥지 못한 이상을 늘어놓기보다 삶의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방안을 고찰하라는 것으로 풀었다. 진리라면 현실의 검증을 마다하지 말고, 로도스섬으로 피하기보다는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가능성을 보이라는 설명이다. 헤겔의 언설은 환상의 나라, 허구의 나라, 불가능의 나라에 닿기 위해 헛되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공자의 주장과 잇닿아 있다. 공자는 로도스섬을 꾸며내지 않았다. 그저 老者와 朋友와 少者를 생각하는 오늘 여기의 삶을 로도스섬으로 삼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이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공자는 이 역설을 오래 전부터 꿰뚫고 있었다. 공자는 물질을 부정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경시하지 않았다. 선생은 다만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른 것을 염려했다.


  공자가 체감(遞減)하지 않고 체증(遞增)하는 탐욕을 문제 삼은 것은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물신숭배와 황금만능주의로 타락하기 일쑤다. 인간보다 물질이 무겁게 여겨지는 사회를 공자는 경계했다. 선생이 설파한 仁의 개념은 추상적으로 정의되기보다는 다채로운 실례와 비유 속에서 표현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사랑함(愛人), 널리 사람을 사랑하는 것(汎愛衆)이다. 오늘날 가치관의 전도 현상으로 말미암아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 같은 목적적 가치보다 효율성과 편리성 그리고 경제적 부 같은 수단적 가치가 더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병리현상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치부하게 된다. 공자는 이것에 반대한다. 선생은 효제(孝悌)와 충서(忠恕)를 고안해 물질적 집착을 버리고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촉구한다.


  孝悌가 혈연을 매개로 한 본능적 사랑이라면 忠恕는 이를 바탕으로 남에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인간관계를 목적적 관계로 확립함으로써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만들려는 기획이다. 세종대왕 때 박연이 시각장애 악공들의 처우 개선을 요청하며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天下無棄人也)”라고 상소했던 내용의 바탕이 되는 사상이다. 『도덕경』 27장에 나오는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是以聖人常善求人 故無棄人)”라는 구절과 상통한다. 왕필(王弼)은 주석을 통해 성인은 나아갈 것과 향할 것을 만들어서 진보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못났다고 버리지 않으며, 저절로 그렇게 됨을 도와줄 뿐 새롭게 일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라고 풀이한다. 사람을 구제하기를 즐기며, 스스로의 편견 때문에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없는 태도라는 실천덕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현해나가야 하는 것인가? 孝悌가 忠恕로 확장되는 관계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는 게 온당하다. 『맹자』에 나오는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이 이런 고심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제 둘레의 것들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더 먼 곳의 아픔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양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관념적 사고에는 정(情)이 묻어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동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렇다고 見牛未見羊에서 인간의 지각적 한계만을 논해서는 곤란하다.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는 실천을 꾀해야 한다.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여기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가 명료한 선후관계는 아닐 터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공자가 꿈꾼 바를 오늘날 접목시켜본다면서 단순히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노인 복지, 사회적 신뢰의 확립과 청소년 교육의 강화 같은 피상적인 접근으로는 부족하다. 공자와 그의 벗으로 상징되는 장년층이 노년세대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예우하고, 청소년세대를 정성껏 보살펴서 세대 간의 유대감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해석하면 실질적인 의미가 좀 더 커질 것이다. 즉 세대 간의 사랑과 배려를 돈독히 해서 문화와 역사를 계승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다. 젊음이나 늙음은 결국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역지사지한다면 세대 간의 허심탄회한 소통으로 갈등을 줄이고 사회적 응집력을 높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老者와 朋友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논어 구절에서 익히 만날 수 있지만 少者를 품겠다, 포용하겠다는 언명은 이 구절에서 또렷하게 드러나 특히 인상 깊다. 이는 젊은 세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해주고 싶다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나 불치하문(不恥下問)에서 알 수 있듯이 윗사람으로서 어린 사람에게 시혜적이고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베풀겠다는 뜻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배우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다. 최근 기업에서 관리자가 부하직원들에게 젊은 세대의 관심사와 노하우를 전수 받는 “리버스 멘토링(Reverse Mentoring)”이 강조되고 있다. 이를 통해 핵심가치를 공유하고 상호 만족감을 높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공자의 가르침을 응용한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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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애도하며

문화 2008. 2. 18. 00:44 |

나는 2005년 5월 숭례문 광장을 기꺼워했다. 옹성까지 남아있는 데다 개인적으로 더 자주 지나가는 흥인지문도 이런 식의 광장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올해 개통될 예정이다). 한창 진행중인 광화문 복원 공사가 잘 마무리되면 세종로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정면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문화유산의 복원과 개방이 미진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너무 한쪽으로만 말하고 다녔다. 나 또한 충분히 품었어야 하는 안전 관리에 대한 의심을 소홀히 했다.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문화유산 개방 움직임이 움츠러들 가능성이 높아 안타깝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숭례문마저 지키지 못한 마당에 산골벽지에 있는 문화유산들을 멋대로 열었다가 관리를 못하면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이번 소실과 문화유산 개방 사이의 개연성을 따지자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충격이 좀 다독거려지면 꼼꼼한 관리 감독과 별개로 문화유산 개방은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그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대에 음미하지 않은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고이 물려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화유산의 전승은 그것을 향유한 추억과 감동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시행정으로 잃어버린 숭례문에서 배운 교훈이 고작 답사객들의 손발을 묶는 방향이라면 우리는 또 다른 전시행정의 늪에 빠질지도 모른다. 꾸준한 안전 대책은 어렵지만 관람객들의 다가감을 막는 건 쉽다. 예산 부족이라는 핑계로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머잖아 국보와 보물의 일련번호가 없어지기 때문에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상징성은 소멸될 처지였다. 1등이나 1호를 선망하는 한국적 정서 탓인지 그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올라 있어 습관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국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부러 지워내기 힘들다. 국보 1호라서 좀 더 슬퍼하는 태도를 무턱대고 마뜩잖아 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숭례문의 소신공양은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대한민국을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애틋함이 지속될지 자신하기 힘들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숭례문은 그나마 괜찮은 관광자원이라 여겨 각별히 아쉬워했다면 정말 남세스럽다. 돈이 되지 않는 문화유산에 대한 냉대는 앞으로도 이어질 테니 말이다. 2000년 5월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이 난입해 훼손한 풍납토성 경당지구의 치욕을 반복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에 귀천을 나누는 건 서글프다. 문화유산에도 차이는 숙명적이고, 차이는 자연스럽게 차별을 낳는다. 문화유산을 완상하는 저마다의 감상은 있게 마련이고 숭례문보다 더 보살피는 문화유산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의 취향과는 별개로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는 국가적 관리의 우선순위를 확립함으로써 후손에게 좀 더 잘 물려줄 목록을 작성한다. 문화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국가적 차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반면에 개인적 차별은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가령 나는 국보나 보물은 아니지만 사택지적비가 무척 살갑다. 숭례문의 참화는 국가적 차별을 제대로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개인적 차별을 희석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다(전국민이 숭례문의 상주가 되어 침통해하는 걸 보라). 보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편애의 폭은 넓혀나가고, 국가적 편애는 좁혀나가야 한다.


이 분위기를 틈타 문화유산이 경제를 살리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라고 역설하지만 그 디딤돌은 큼직한 몇 녀석뿐이다. 서울시청사 신축을 계획할 때 거치적거렸던(?) 덕수궁을 놓고 시민이 건넨 쌀쌀맞은 시선은 현재진행형이다. 태조 왕건의 사택지로 추정되는 철원군의 구 철원향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예산 부족 등으로 연기되었다가 올해 들어 2년 만에 재추진된다는 소식은 지방지가 아니면 접하기 힘들다. 가까스로 확보한 예산 2억원은 숭례문 복원을 위한 추정예산인 200억원의 100분의 1이다. 딱히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무심함은 국가 지정문화재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모아져 아슬아슬하다. 거식증보다는 편식이 낫겠지만. 우리처럼 목조건축물이 많은 중국과 일본의 사례가 잇따라 보도되고 있는데 그네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단지 경제적 이득에 대한 기대감만은 아니라고 본다.


타다 남은 기왓장 하나도 교육의 자료, 참회의 유물로 삼자는 목소리가 높다. 숭례문의 비극을 원망이 아닌 애정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이 고맙다. 이런 몸짓보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의 균형을 찾는 일이 절실하다. 2007년 서울 중구청이 숭례문 관리에 쓴 예산은 1억 7,200만원이었으나, 숭례문 앞까지 행진하는 수문장 교대식 예산은 20억원이라고 한다. 방재 설비를 하나 줄이고 밤을 수놓는 조명을 하나 더 달고 싶은 마음을 눅이는 계기로 삼는다면 비싼 수업료이기는 하지만 얻는 바가 적잖다. 눈에 보이는 명확한 위험을 다스리는 것과 체계적인 방재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상충하는 가치는 아니다. 철길 옆에서 신음하고 있는 국보 안동 법흥동 7층 전탑이 기울어진 건 오래된 일이다. 이제 죽음을 방기하고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지금 혹독하게 겪고 있듯이 문화유산은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는 존재가 아니다.


일관성은 결국 일상성이다. 세계 주요 박물관 가운데 루브르는 유난히도 마니아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만든 루브르 후원회인 “루브르의 친구들”은 연간 30억 원이 넘는 회비로 루브르에 작품을 기증하는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문득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환수한 보물 김시민 선무공신교서의 감동이 떠오른다. 사건이 터지거나 언론매체의 선전에 기대어 이뤄지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에 녹아든 문화유산 애호를 모색했으면 좋겠다. 프랑스 화가 밀레(J. F. Millet)는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감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잘 된 작품이라도 결코 생명이 없다”라고 했다. 감동하려면 먼저 좀 알아야 한다. 싸이월드 첫 화면에 올려진 ‘황룡사 9층 (  )’이라는 퀴즈에 석탑 56%, 목탑 44%로 잘못된 응답이 더 많았다(2월 18일 0시 현재). 문화유산 사랑이 관념화되고 당위적인 구호가 된다면 경계할 일이다. 자신의 가슴을 흔드는 문화유산을 찾아보자. - [無棄]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4년 10월에 서울시 중구 답사를 할 때 찍었던 숭례문 사진입니다. 숭례문 광장이 있기 전이라 근처에 조성된 포토존에서 촬영했습니다. 당초 동선에 없어서 좀 돌아가야 했는데 이게 마지막이 되었네요. 애도하는 의미로 당분간 제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쓸 예정입니다. 너무 슬퍼하지도 넘치게 성내지도 맙시다. 그 힘을 아껴서 궁궐이나 박물관을 한번 들려보는 게 어떨까요. 클릭해서 보세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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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케이블TV를 스타크래프트 게임 중계와 <거침없이 하이킥> 재방송을 챙겨보는 정도로 활용한다. 1월 3일 늦은 밤에 우연히 Mnet의 <아찔한 소개팅(이하 아찔소)>이란 프로그램을 접했다. 문득 내가 생애 첫 소개팅을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상대 여성분도 처음이라서 둘 다 완전 어색한 마음에 네 시간동안 한자리에서 수다만 떨었다. 침묵의 공백을 만들면 안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오만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 관람, 몇 년 만에 확산된 중국어 열풍, 회계학에 대한 고충, 자기 학과공부에 대한 투덜거림, 재미난 마케팅 사례 소개, 한자와 한문 학습, 당시(唐詩)와 송시(宋詩), 여대와 공학의 차이, 중국 여행 이야기, 한국 고미술의 보편성과 특수성, 동양화 감상법, 향후 진로 고민, 문학과 비문학 독서, 대학 선후배 관계의 미묘함, 한국 고전문학 기억해내기, 각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기, 문헌정보학과 도서관 서가배치 등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아찔소는 소개팅이 이렇게 역동적(!)일 수도 있구나 일깨워 줬다. 하긴 모두가 나처럼 입으로만 소개팅하고, MBC의 <공부의 제왕> 같은 프로그램만 있다면 삶이 얼마나 밋밋하겠는가.^^;


아찔소를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채널을 돌리다가 몇 번 스쳐본 적이 있기는 하다. 다만 이번에는 좀 유심히 지켜본 듯싶다. 아찔소는 킹카 혹은 퀀가를 두고 여러 도전자가 서바이벌 형식으로 데이트를 즐긴다는 얼개다. NBC TV에서 방영한 <For Love or Money>란 프로그램에서 사랑이냐 돈이냐를 선택하는 형식을 빌렸다. 애정과 금전이라는 영원한 주제를 극화해 호기심을 모은다. 아찔소도 그렇지만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는 상당 부분 미국 것을 본떠 만들었다. 미국 리얼리티쇼의 자극적인 구조들은 익히 알려져 있다. 독신 남녀가 자신과 맞는 속궁합 상대를 구하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노골적인 성 상품화, 인간 상품화가 만개한다. 내가 본 방송은 스키장을 배경으로 스노보드 국가대표 경력이 있는 킹카에 여자 도전자들이 나섰다. 아찔소는 출연자들의 실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리얼리티를 통해 적잖은 인기를 얻었다. 취중진담을 듣고 싶어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페이크 다큐’가 얻은 인기도 그럴 듯한 엿보기에 대한 욕망의 표출이다.


집에서는 ComedyTV가 나오지 않아서 <애완남 키우기-나는 펫>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지는 못했다. 연하남이 능력 있는 연상녀 집에서 반려동물 같은 활약을 하는 장면을 담는다는 이 프로그램의 설정은 듣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 계약 동거와 다를 바 없는 소재가 방송될 만큼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리얼리티쇼가 한국에서 수용 가능한 극한을 보는 듯싶다. 케이블TV의 선정성 논란은 피할 수 없지만 지상파와 케이블TV에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건 또렷하다. 심의라는 정의의 밧줄로 못된 상상력을 옥죄려는 시도를 삼가야 한다. 무턱대고 천박하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케이블TV의 자체 제작 노력을 칭찬하고 북돋울 필요가 있다. ‘케이블 자체제작 드라마’의 줄임말인 ‘자드’라는 새로운 말까지 나왔는데 일단은 긍정적이다. 선정성으로만 승부하는 프로그램이 있기는 하겠지만 역량이 쌓이다 보면 볼만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 우리 사회의 다채로움에 이바지하리라 기대한다. 깊이를 경쟁하다 보면 넓음도 경쟁할 테니 말이다. 틈새시장 개척은 소비자를 행복한 고민에 빠뜨린다. 아직 실망하기에는 좀 이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봤던 아찔소 스키장편에서 여성 도전자에게 집단적으로 눈을 던져놓고, ‘눈 맞아야 얼마나 아프겠어요’라고 말하는 킹카의 태도는 아슬아슬했다. 커플 선정이 끝나고 선택받지 못한 여성 도전자들이 뒷담화를 하는 시간에 “남자면 요즘 평균 키는 180이다”라느니, “너 운동했다면서 몸이 왜 그래?”하는 발언들도 뜨끔했다. 출연자들이 서로를 품평하는 대목에서 어느 고깃덩어리가 탐스러운가 살펴보는 정육점 손님 같은 인상을 받았다. 처음 만나는 남녀가 노천탕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는 무척 화끈거렸다. 킹카는 노천탕에 가서 몸매도 보고 몸도 녹이면서 편하게 데이트하고 싶다며 천연덕스레 여겼다. 제작진이 운동선수인 킹카의 우람한 근육질과 미녀들의 늘씬한 비키니 차림을 내보내 눈을 홀리는 효과를 노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게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 다음 회를 시청하니 점입가경이었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퀸카는 남성 도전자에게 생뚱맞게 미스터코리아 대회를 출전하기를 요구했다. 한 도전자는 민망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 포기하기도 했다. 그는 뒷담화 시간에 “넌 내가 보기에는 변태과(科)인 거 같다”라고 쏘아 붙였다. 여하간 삼각팬티만 입은 두 도전자가 전문적인 훈련을 한 선수들 틈에서 기죽지 않고 열심히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엉겁결에 미스터코리아 대회에 참가한 도전자 두 분 다 몸매가 준수하다 보니 의도적인 코스 선정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퀸카는 한 도전자의 등에 컬러크림을 바르며 짜릿함을 느꼈고, 다른 도전자는 삼각팬티를 입기 위해 허벅지의 털을 깎기도 했다. 퀸카는 “복부에 지방이 약간 있는 거 같고요”라며 평가했는데 좀 마뜩잖았다. 결국 지방을 지적 받은 도전자는 퀸카와 몇 마디 섞지도 못하고 탈락했다. “퀸카 교양 좀 가져라”라는 탈락한 도전자의 일갈에 동감했다. 당최 그게 지방이면 나는 비곗덩어리란 말인가. 다시금 정육점을 연상했던 나의 비유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니 킹카나 퀸카들의 황당한 요구라든가 도전자들의 굴욕과 험담의 상당수는 짜여졌다는 심증을 굳혔다. 위선 권하는 사회에 대한 반발로 위악을 뽐내는 형국인지도 모른다. 위선이 리얼리티가 아니듯 위악 또한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있겠지만. 검색해보니 아찔소에는 위악적인 장면들이 많이 등장했다. 어느 정도 정해진 설정인가 보다. 드라마 등장인물을 구박하는 재미에 보는 사람이 있듯이, 매너 없는 출연자들의 행동을 투덜거리는 흥취도 시청자를 빨아들인다. 어느 편에서는 킹카가 여성들의 뱃살을 측정해 가장 두꺼운 여성을 탈락시키고, 도전자들을 성형외과로 데려가 견적을 뽑는 살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여성 도전자들에게는 비난을 퍼부으며 못되게 굴다가 킹카 앞에서는 갖은 교태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한 출연자에게는 아찔소 악녀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녀의 악녀 행동이 어디까지가 진실이냐며 공방이 벌어졌다니 너무 삭막하다. 진실을 최대한 밝혀야 하는 사안이 있는가 하면, 명백하게 만들 실익이 없는 것도 있다. 아찔소는 후자다. 우르르 달려가서 악플을 남기는 건 그리 갸륵한 행동은 아니다.


대학교 새내기 때 주철환 PD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감명 깊었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립싱크하는 가수들을 뭘 그렇게 나무랄 필요가 있냐는 항변이었다. 가창력으로 승부해서 오랜 세월 인기를 얻을 사람도 있고, 반반한 외모나 현란한 율동으로 인기를 모을 사람도 있으니 자기 기준만을 내세우지 말자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리얼리티쇼에 대한 가파른 기준을 들이대려는 분들에게도 이런 호소가 좀 통했으면 좋겠다. 말 나온 김에 리얼리티쇼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을 검토해보자. 환상을 조장한다? 기실 정말 우리네 현실을 보려면 뉴스도 있고, 한숨 자아내는 시사다큐멘터리도 얼마든지 있다. 시청자들이 리얼리티쇼에게 기대하는 건 적어도 그런 사실성은 아니다. 조작된 실제이지만 거기서 영감을 얻고 의욕을 찾거나 한바탕 분풀이하려는 속셈이 더 크다. “인간은(혹은 남자는/여자는) 다 그렇지 뭐”라는 허무주의를 유포한다? 리얼리티쇼가 출연자들의 톡톡 튀는 개성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고는 있다. 만화경처럼 여러 빛깔의 사람을 보여주려는 기획 의도가 오히려 전일적 가치를 부추긴다면 서글프다. 이 점을 두고두고 경계하는 게 방송으로서의 최소한의 정치적 올바름일 테다.


별 것도 아닌데 법석이라는 핀잔이 들려온다.^^; 외모 중심주의가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정형화된 남성성, 여성성의 강요를 마주칠 때마다 불편하다. 내가 못났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아름다움은 획일적이지 않음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좀 더 솔직해지자는 마광수 선생님의 외침이 떠오른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결국 외모에 반한다는 얘기 아닌가요?”라는 반문에 맞서기는 힘들다. 멋지고 예쁜 사람들을 보는 즐거움 역시 사람 사는 낙이긴 하다. 작가나 교수들의 지성미에 사로잡히듯이 얼짱과 몸짱의 육체미에 반하는 행위도 마냥 미워할 일은 아니다. 마 선생님의 유미적 쾌락주의는 예술의 본질이라고 일컬어지는 카타르시스를 정화가 아니라 대리배설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예술적인 대리배설만 가지고는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시대가 될까봐 두렵다. 절제하기 위해서라도 점점 더 관음증의 창을 열어 놓아야 하는 묘한 이율배반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그런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하고 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채우려는 안쓰러운 몸짓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대리배설이 창안되길 바란다. 다양성이야말로 리얼리티쇼가 첫 번째로 갖춰야 할 덕목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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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주최한 제3회 우수 리뷰 대회 이벤트에서 도서별(『다산어록청상』부문) 우수리뷰에 뽑혀 적립금 3만원을 받은 글입니다. 놀고 먹느라 가난한 제게는 큰 힘이 되었어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탁(李鐸)이라는 분은 중국의 사마광을 본받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탁은 사마광이 “사람이 자기가 평생 걸어온 길을 만 사람 앞에서도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산다면 그는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다”라고 한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나도 나의 일을 남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결심했다. 아마 이탁이 자신의 평생 신조로 삼을 금언을 접한 책은 『소학』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나는 남보다 뛰어난 점은 없다. 다만 내가 평생토록 한 일 중에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을 뿐이다”라는 사마광의 말씀이 있다. 『소학』의 모든 글은 기존 문헌에서 추출했다. 경전이나 사서를 떠나 유가식 글쓰기에는 이처럼 편집물이 많다. 옛글을 가공하고 재구성해서 또 하나의 책을 내는 방식이다. 사마광의 이야기는 『송명신언행록』에 출전이 있다. 『송명신언행록』은 북송시대 160년 동안에 배출한 명신들의 언행을 모은 저서다. 무려 97명이 실려 있다. 우리가 배울 점이다.


정민 선생님의 『다산어록청상』을 읽다가 한국 고전을 국역하는 일과 더불어 선현들의 어록 혹은 언행록을 정리하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1884년 『소학』의 체계를 따와서 한국의 선현의 이야기로 엮은 『해동속소학』과 같은 책이 더 많이 늘어야 한다. 김종권 선생님이 편저한 『한국의 명언』이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펴낸 『한국선현위인어록』과 같은 작업이 그런 맥락이다. 여기다가 정민 선생님의 『다산어록청상』과 전작인 『죽비소리』도 힘을 보탠다.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출범하면서 고전 국역사업이 장기적이면서 체계적인 안목으로 이뤄지게 되어 기껍다. 계산을 하기 나름이지만 번역된 고전보다 번역되지 않은 고전이 많다는 건 모두 동의하는 바다. 번역은 되었다고는 하나 너무 고어투에다 편집이 조악해서 읽기가 어려운 고전도 많다. 고전을 국역해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학술문화 민주화의 일환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의한다. 김용옥 선생님은 다산에 대한 학위논문은 수백 편이 넘는데 여유당전서는 완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을 통박하셨다. 무척 공감하며 고전 국역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리 빨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다산어록청상』은 다산의 글에서 귀감이 될만한 토막을 가려 뽑아 모양새 있게 정리한 책이다. 공부법과 독서법을 비롯해 다산이 풀어놓는 인생론이 정갈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의 고갱이를 한마디로 줄여보라면 너무 잔인한 요구다. 열심히 착하게 살자 식의 멋없는 이야기만 맴돈다. 정민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 주인이 되는 데 인생을 걸어서야 되겠는가?(29쪽)”라고 해도 좋겠다. 다산은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했다. 물론 이건 다산만의 특징은 아니다. 옛사람들은 왜 그토록 인품을 강조했을까? 도덕적 자원을 과시함으로써 피지배층의 반말을 무마하고 지배층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게다. 『목민심서』 청심(淸心)조에서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大貪必廉)”라는 구절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런 꿍꿍이셈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덕본재말(德本財末)을 강조하고 재승박덕(才勝薄德)을 경계하던 당대 분위기는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 식견보다는 태도나 자세를 우선시하는 낯설음이다. 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나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적 점진주의의 산물이다. 수기적 행위에 치열할수록 동시에 치인적 행위를 통달하게 된다는 논리다.


심심지 않게 불거지는 공직 부패를 바라볼 때 이내 갑갑하다. 고작 저렇게 살려고 그리 뼈 빠지게 공부하셨는지 좀 안타깝다. 나는 그 분들에게 그걸 좀 묻고 싶었다. 그러면 민망해서라도 달콤함과 향긋함에 몸과 마음을 함부로 팔지 않으려는 분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고마운 선배님께서 “공인이라면!”이라고 일갈하는 건 통쾌한 느낌은 있으나 현실적 효용은 거의 없다고 비판하셨다. 나는 돈 몇 푼에 흐트러지지 않는 분이 1%라면 5%로 늘기를 바라고, 5%라면 10%로, 10%라면 20%가 되는 식으로 의미 있는 숫자로 나아가는 모습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라고 우겼다. 부귀영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 사람, 제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을 죽음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다스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나의 이런 바람은 제도나 시스템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제도와 의식은 거개 상보적이다. 부패를 미워하는 마음이 부패 방지 시스템을 다지지 않았는가. 성공을 자만하는 순간 툭 떨어진다는 다모클레스(Damocles)의 칼을 스스로 매달아 놓고 살피는 건 개인에게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채제공의 몸가짐(46쪽)도 그런 정신의 발현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각성된 개인의 힘이 굳셈을 기대한다.


그렇다고 옛사람의 말을 빌어다가 도덕적 훈계를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옛 어록을 인용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기실 어록이라는 건 일정 부분 권위주의적 요소가 있다. 권위 없는 어록은 상상하기 힘들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 없다”라거나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라는 말을 일개 경영학도인 내가 발설하는 것보다 유일한 박사님께서 설파하셨을 때 더 큰 힘을 얻는다. 금주령이 내려진 때에 세종대왕의 옥체를 염려한 신하들이 술을 들도록 간청한 일이 있다. 대왕은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予則飮酒, 而禁人用酒可乎)?”라고 답했다.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는 우리네 지도자들에게 이 옥음을 늘어놓는 까닭도 결국 세종대왕의 광휘에 기대려는 의도가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모범답안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 살아가는 문제를 재는 잣대로 어록을 끌어다 쓰는 건 더욱 위험하다. 앞서 본 이탁의 사례처럼 그건 개인 수준에서 그쳐야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근사한 문구 오려 붙이는 재미는 쏠쏠하다. 의사들이 진단서를 휘갈겨 쓰고, 공대생이 수식을 즐기는 것과 비슷한 심보다. 


나는 전고(典故)가 잦은 글쓰기가 권위에의 호소가 되기 일쑤며,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의도보다는 “좋은 걸 좀 배워보자”는 의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마음공부를 둘러싼 다양한 말씀과 사례들을 저마다 품으려는 정성을 너무 흘겨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령 『다산어록청상』을 읽고 갈무리 해둔 구절을 세밑 송년회 자리에서 써먹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담백함이 지나쳐 말라 비틀어져 가는 세태에 적절한 수준의 지적 허영이 순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겉멋에도 귀천이 있다면 너무 박절하겠지만 고전 인용 같은 겉멋이라면 어느 정도 권장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예기』, 『여씨춘추』를 발췌독한다고 했더니 친구에게서 “호사스럽다”라는 핀잔이 날아왔다.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책 좀 읽으라는 간곡한 충고도 곁들여서 말이다. 나는 차라리 이 팍팍한 삶에 호사스러움을 건사하고 싶다. 조금 투덜거리자면 고전을 읽고 일상에서 언급하는 게 왜 호사가 되고, 겉멋이 되고, 허영이 되어야 하는가. 그건 그만큼 우리가 옛것에 대한 홀대와 괄시 속에 살아왔다는 방증일 따름이다.


기파랑은 무척 기품 있는 인물이었나 보다. <찬기파랑가>를 감상하면 기파랑이 지닌 마음의 가장자리만이라도 따르려는 마음씨가 살갑다. 『다산어록청상』의 모티브가 된 <도산사숙록>도 이런 흠모의 소산이다. 사숙(私淑)은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분을 본보기 삼아 학문과 덕행을 쌓는 과정이다. 맹자가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숙을 통한 사제 관계는 매우 많다. 다산은 퇴계와 성호 이익을 사숙했고,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사숙했고, 김춘수는 릴케를 사숙했다. 간디는 소로(Thoreau)를 사숙했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사숙했으며, 보들레르는 포(Poe)를 사숙했다고 한다. 우리 둘레를 보면 멋있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역할 모델에게서 영감을 얻고 성찰함을 발견한다. 칸트는 흄의 저작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주위에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가 될 바지런함이 없지 않았는가 반성한다. 다산은 주희를 구박하는 재미에 살았던 모기령을 높게 보지 않았다(100쪽).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가 된다는 것, 앞사람을 극복하는 뒷사람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도전할 만하지만.


다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툭하면 중국의 일을 끌어다 쓴다. 이 또한 비루한 품격이다(168쪽)”라고 비판한다. 자식들에게 『고려사』 같은 한국 사서를 읽히려는 부정이 애틋하다. 정민 선생님과 같은 노고가 누적된다면 궁극적으로는 어린이들의 독서에 많은 보탬이 될 듯싶다. 미사여구로 분칠한 위인전에서 멈추지 말고 선현들의 어록을 익히고 평생의 신념이 될 경구를 만나게 한다면 더 흡족하리라. 기왕이면 그 폭이 넓어지길 희망한다. 정몽주의 <단심가>만 알지 말고 고려 말의 충신 변안열의 <불굴가>도 읊었으면 좋겠다. 성삼문에 그치지 말고 이개의 시조도 음미하며 올곧게 살기의 어려움을 곱씹으면 좋겠다. 정조대왕은 『홍재전서』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을 넘기며 대왕과 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만 노래하기보다는 퇴계 선생이 소장한 주자전서 사본 한 질이 너무 낡아서 글씨가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는 일화도 꺼내보면 어떨까. 새파랗게 어린 기대승과 서간문으로 엄밀하게 논쟁하면서도 고깝게 여기지 않고 선조 임금에게 기대승을 천거하는 그 넉넉함도 배워봄직하다. 인사를 맡은 사람이 『성학집요』 용현(用賢)편을 뒤적인다면 유쾌한 일이다. 서양의 그럴듯한 유언에만 눈을 돌리기보다 왕건이 “덧없는 인생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浮生自古然矣)”라고 유언한 내용도 모아두면 좋겠다. 이렇게 앞서 거닐었던 분들의 말을 기억해내고 창조적으로 이어가려는 노력이 마냥 무익하지만은 않을 게다.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문화사』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가 가슴이 짠하다. 연산군을 충동질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에게 어떤 사람이 “후세의 사필(史筆)이 무섭지 않으냐?”고 따졌단다. 유자광은 의기양양하게 “누가 『동국통감』을 읽나?”고 응수했다. 『동국통감』은 조선 성종 때 서거정이 단군 조선에서 고려 때까지의 역사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즉 누가 조선사를 읽어 내 행적을 기억하겠는가 하며 안심한 셈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더 애호하고 시시비비를 간직할 때 한가로운 소리가 아니라 실용적인 기능도 수행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도두보는 국민이 많은 나라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만만치 않을 듯하다. 흔히들 한국에는 영웅이 없다고 한다. 부러 영웅을 만드는 건 억지스럽다. 하지만 앞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하고 끊임없이 반추할 때 영웅보다 더 훌륭한 삶의 거울이나 나침반을 만들어 봄직하다. 오늘날의 이탁이 사마광도 좋지만 한국의 누군가를 우러르며 가슴 뛴다면 이 또한 반가운 일이다. 어색한 짜릿함보다 친숙한 푸근함을 꾀하자. 편집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좀 더 많은 편집자가 필요하다. 케인즈가 역설했듯이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思想)이다. 우리의 사상을 풍요롭게 할 편집의 만개를 고대한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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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1)

ㅋ - 정호승, 「칼날」

칼날 위를 걸어서 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는 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보라/ 칼날과 칼날 사이로/ 겨울이 지나가고/ 개미가 지나간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세상은 칼자루 쥔 쪽이 움직입니다. 칼끝에서 독설을 퍼붓고 몸부림 쳐도 생채기만 나고 칼 잡은 자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올챙이적 시절을 기억하는 양심적 기억력만 있다면 우리가 칼자루를 쥐어 보는 건 어떨까요? 열심히 벼린 칼을 남을 해치는 무기가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덜어내는 수술칼로 써봅시다. 춘추좌씨전에는 무(武)라는 글자를 止戈爲武(지과위무)로 풀이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무기를 거두어들이는 것,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무공이라는 뜻입니다. 공공의 적을 물리치며 부조리를 타파하고 남은 나머지 힘은 절제한다는 멋진 말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이 늘 휴대하고 다니셨다는 경의검이라는 조그만 칼과 성성자라는 쇠방울 두 개는 일상적인 긴장, 끝없는 자기검열을 상징합니다. 그 치열한 자아성찰은 자신의 능력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품은 꿈에 비해 힘이 약하다고 투덜거리지 말아요. 아직은 꿈을 줄일 때가 아닙니다. 벌써부터 output을 줄일 생각일랑 말고 바지런히 input을 늘려봅시다. 위기는 위대한 기회이며, 절망은 절실한 희망입니다.


후기 - 무(武)자 풀이처럼 정(正)자를 일(一)과 지(止)로 나눠서 풀이하기도 한다. 하나에서 그친다, 어느 정도에서 멈춤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꽤 그럴 듯하다. 바르게 살기 어렵지만 나는 우선 하나라도 잘 해야겠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2)

ㅌ - 안도현, 「퇴근길」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짧은 시지만 입안에 군침이 가득 고입니다. 우리말은 두겹, 세겹이라는 말을 쓰지, 이겹, 삼겹이라고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겹살은 1994년에야 국어사전에 올랐습니다. 돼지고기 가운데 인기 없는 비곗덩어리로 취급되던 삼겹살은 개성 사람들의 정성으로 온 국민의 벗이 되었답니다. 돼지에게 섬유질이 적은 사료와 열량 많은 사료를 번갈아 먹여 비계와 살이 적당히 섞인 삼겹살을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좋은 마케팅 사례로도 손색이 없을 거 같아요. 세상이 아무리 팍팍해져도 서민들이 한 주에 한 번쯤은 삼겹살 구워먹을 여유는 지켜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삼겹살 나눠먹는 즐거움이나마 건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배곯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눈길을 보내고 손길을 건네는 사회가 되는 소박한 꿈을 품어봅니다.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과 터질 듯한 상추쌈 앞에서 잠깐이나마 “먹기 위해 살지 말고, 살기 위하여 먹으라”라는 키케로의 말도 떠올리면 좋겠네요. 마음 맞는 대로 모여 앉아 삼겹살에 소주 한 병으로 불콰해진 얼굴을 마주보며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어봅시다.


후기 - “먹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큰 일이다. 하루도 먹지 않을 수 없거니와 또한 하루도 구차하게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먹지 아니하면 목숨을 해칠 것이요, 구차하게 먹는다면 의리를 해칠 것이다(食之於人 大矣哉 不可一日而無食 亦不可一日而苟食 無食則害性命 苟食則害義理).” 정도전이 쓴 『삼봉집』이 출전이다. 나 같은 소시민의 밥벌이에 의로움을 따지는 건 너무 팍팍해보이지만 정직하게 번 돈으로 삼겹살에 소주 한 병 나눌 수 있다면 내 인생도 그리 헛되지 않으리라.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3)

ㅍ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아름다운 네가 내게로 왔다. 나는 새벽까지 한가로이 책을 뒤적일 때나 왁자지껄 어지러운 술자리에 낄 때, 한바탕 욕지기를 하고픈 미움이 솟구칠 때나 산사에서 빛 바랜 단청을 감상할 때도 너를 생각했다. 날마다 어떻게 하면 너를 좀 더 꼭 껴안을 수 있을까 궁리한다. 사르트르 말을 빌리자면 나는 너를 사랑하도록 저주받았으니까. 그러니 나는 늦게까지 네 곁을 지킬 것이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고 하지만, 사랑 또한 시간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너를 알고 나서부터 한번뿐인 삶을 대충 살지 않게 되었다. 사랑의 생채기를 어루만지니 내 부박함이 원망스럽고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는 말이 사무친다. 나는 너와의 인연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다만 너를 아낀다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너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아서 슬프다. 그네들은 자꾸 너를 독점하려 든다. 자신의 사랑은 로맨스라고 말하면서 남의 사랑은 불륜이라며 해코지를 하려 드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건 없다. 내 용기가 허락하는 한 너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들과 싸우겠다. 나는 낮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너의 눈물을 닦아주는 동반자가 되고 싶다. 너는 내 운명, 자유(自由)!


후기 -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한 대목. “어째서일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한 새에게 그가 자유롭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일, 또한 그가 조금만 시간을 들여 연습한다면 스스로 그걸 증명할 수 있다는 걸 믿게 하는 것이라니? 어째서 그 일은 그렇게도 힘든 것일까?”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말했지만, 내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본래 마땅하지 않았다. 자유가 마땅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들이 학교를 부러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자격증을 땄다. 건전가요상을 탔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됐다. 5월 광주에서는 형은 계엄군, 동생은 시민군이 되어야 했으며, 6월 명동성당 농성장에는 고등학생이 지갑을 털어 성금을 보냈다.

상무대 영창에서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을 묻혀 가지고 선착순으로 와야 할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디까지 흔들렸을까. 한번 터뜨리면 쌀 7가마니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지랄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을까. 시위대가 불태운 도시락을 바라보는 전경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또 박종철과 권인숙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타인의 고통을, 과거의 아픔을 제것처럼 느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모두를 위한 자유를 위해 나는 좀 더 기억해야 한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4)

ㅎ - 황인숙, 「희망」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것이다.


이 시는 오늘이 그리워질 만큼 알차고 재미나게 보내라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는 것에 익숙하잖아요. 베네통사의 루치아노 베네통 회장의 좌우명은 “내일 할 수 있는 걸 오늘 하라(Do today what you could do tomorrow)”라고 합니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않고, 내일의 비를 위해 오늘의 우산을 펴지도 말고 오직 오늘을 위해 살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하는 사람의 먼 훗날 성공과 안락을 사랑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고뇌와 희망을 아낄 수 있다면 서로에게 늘, 혹은, 때때로 그리운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애틋한 그리움끼리 만나 서로의 허물을 보듬고 서러운 눈물을 닦아준다면 날마다 고마운 인연이 될 겁니다. 오늘이 사무치게 그립도록 열심히 삽시다. 어제가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 그것이 희망입니다.


후기 - 린위탕(林語堂) 『생활의 발견』에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12월 마지막 날, 연초에 결심했던 것들을 되돌아보며 ‘30%쯤 달성했군’하며 아쉬워하는 데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완역본을 찾아봤으나 어디에 있는지 잘 안 보인다. 나중에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이 말처럼 인간의 매력은 모자람을 아쉬워하는 데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알콩달콩 살아왔던 과거의 일상이 모여 내가 됨을 잊지 말자.


<연재를 마치며...>

글 읽고 쓰기를 축복처럼 여기는 제게 무언가를 털어놓을 공간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마무리도 짧은 시로 대신하려 합니다. 다시 ㄱ으로 시작해서 또 가슴 뛰는 여정을 떠납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인 시 몇 구절쯤 외울 수 있는 멋진 飛반인이 되세요. 사랑합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그 꽃’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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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6)

ㅂ - 조지훈, 「봉황수」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하략)


<명청교체기에 심란했을 광해왕에게 올리는 가상의 상소문이다>
신 엎드려 아뢰옵니다. 신이 듣건대 후금은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요동에서 세를 넓히고 있습니다. 저들이 중원마저 평정하고 나면 해동까지 탐낼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대신들 거개가 명나라의 은덕만을 칭송하고 있으나 나라 밖 사정에 슬기롭게 대처하여 위로는 종묘사직을 평안케 하고, 아래로는 생민의 환란을 막으시옵소서. 일찍이 발해는 군주를 황상(皇上)으로 높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호기를 보였습니다. 허나 당나라에게 황제가 아닌 제후로서 조공을 바치며 책봉을 받았고, 군주가 승하한 뒤에는 황제 칭호가 아닌 왕의 칭호를 올렸습니다. 이는 그들의 법식이 정돈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대국에 대처한 숙고의 산물이었습니다. 고려왕조 또한 몽골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밖으로는 왕국이면서도, 안으로는 황제의 제도를 꾸리는 외왕내제(外王內帝) 방식을 이어갔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중화가 소중한 것만 알고 이 강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의 말을 경계하소서. 섬기되 복종하지 않고, 낮추되 굴하지 않았던 선례를 무겁게 여기시옵소서.


후기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기획특별전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묘지명(高麗墓誌銘)’을 보고 왔다. 고려 시대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묘지명은 무덤 주인공이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기록해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이다.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가 공적인 내용을 담는데 비해 묘지명은 개인적인 동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기록 유물이다. 고려 숙종의 딸이자 예종의 친동생 복녕궁주의 묘지명에는 “천자(天子)의 따님이여, 보름달 같으셨네”라는 구절이 써있다. 비록 송나라의 연호를 쓰는 사대외교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로 자부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대외정책도 고려시대의 유연함을 좀 배워보면 어떨까.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7)

ㅅ -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황현의 『매천야록』의 한 토막입니다. 을사오적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더라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은 넘칩니다. 맹자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몰라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부끄러움을 잃는 것입니다. 늘 승전고만 울릴 수 없는 인생사에 기왕 지는 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패배가 좋겠습니다. 2004년 입실렌티 초대연사인 한비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힘있는 자에 보태며 달콤하게 살다가 자연사하시겠습니까, 그것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시겠습니까?”


후기 - “사람 사는 세상에 쉬운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힘겹게 밀어 올려도 다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기만 하는 시지프스의 바위 또한 없다고 믿습니다”라는 구절을 넣으려다가 분량 제한 때문에 뺐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프스는 영겁의 세월동안 높은 산의 정상까지 바위를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시지프스를 무익하면서도 희망마저 없는 처지라고 비관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위가 정상에 다다르면 결국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라고 부르고 싶다. 먼저 부끄러워하면서 먼저 고쳐나가고 싶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하지 않는 참회란 얼마나 공허한가. 백치미(白痴美)보다 무서운 것이 무치미(無恥美)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8)

ㅇ - 백석, 「여승」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생활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적 상황을 절제된 시어로 풀어낸 리얼리즘이 돋보입니다. 문득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를 떠올립니다. 이스털린(Easterlin)은 연구를 통해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상식 수준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죠. 이처럼 최저 생활수준을 벗어나면 경제 성장은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이 역설은 행복한 삶은 수치나 물질적인 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줍니다. 한미 FTA 추진 등을 통한 국민소득 상승이 진정한 부민(富民)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해야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크나큰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경제 발전을 반성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습니다. 서러운 눈물을 줄여나가는 성장전략을 모색하는 경영학도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후기 - 이스털린의 역설은 이정전(2002), 『시장은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53~81쪽/ 정갑영(2005), 『열보다 더 큰 아홉』, 230~232쪽을 참조했다. 소득수준과 행복 사이에 어느 정도 정(正)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가설 자체보다 의도치 않은 역설을 발견한 게 참 재미나다. 국민소득 2만불을 돌파하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욕망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빨리 커지는 게 아닐까?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지구는 넉넉한 곳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탐욕을 위해서는 지구는 넉넉하지 않다”는 간디의 말씀에 동감한다.

새로 사귄 친구가 어떤 성격과 취미를 가졌는지 묻지 않고 그 아버지의 수입이 얼마인지를 궁금해 하는 어른의 『어린왕자』 이야기가 떠오른다. 별을 많이 소유하기 위해 쉬지 않고 별을 세는 실업가도 생각난다. 물론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품는 거 자체는 나무랄 일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건 권장할 일이다. 다만 그 탐욕이 체감(遞減)하지 않고 체증(遞增)한다는 게 문제다. 신제품 가격이 떨어질 때를 기다려 사려다가 죽기 하루 전에야 장만하는 어리석은 이의 행태가 떠오른다. 모든 것이 숫자로만 표현되는 세상에 “이쯤 되면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9)

ㅈ - 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도무지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실의에 차있는 친구의 아들에게 지어준 시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로 “관을 덮고서야 일이 정해진다(蓋棺事定)”는 말이 있습니다. 두보는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좌절하지 말고 치열하게 살라는 뜻으로 한 말일 겁니다. 또 한 편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무척 복잡하고 다면적이기 때문이죠. 죽고 나서야 그 사람의 평가가 좀 더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니, 일평생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무서운 이야기로 들립니다. 마지막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해서 흐트러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잖아요. 팬티로 눈동자를 굴리는 마음은 혼자 있을 때 경계하는 마음과 통합니다. 옛 선비들이 좋아했던 말 가운데 홀로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내밀한 행동이 한결같다는 말이지요. 아니,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더 잘해야 합니다. 속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첫마음을 지키고 올바르기를 다짐한다면 웅숭깊은 삶을 꾸릴 수 있을 거예요.


후기 -  팬티 한 장에서라도 제 존재의 위엄을 부여하려는 안간힘이 짠하다. 비록 그것이 근원적인 문제보다는 지엽말단에 치중하는 것이라는 지청구를 늘어놓더라도. 죽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짓을 벌이는 이들보다야 훨씬 더 기품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에서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桐千老恒藏曲),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다짐하는 모습이 애틋하다. 그 소년 같은 마음을 나도 배우고 싶다. 나도 결국 때 묻을 대로 묻어 남는 건 팬티 한 장의 깨끗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애는 써봐야겠다. 한비야님의 말을 빌리자면 “될지 안 될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겠는가?”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0)

ㅊ - 충담사, 「찬기파랑가」

열어 젖히니/ 나타난 달이/ 흰구름 좇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부터 그 맑은 냇물 속 조약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 끝을 따르고자/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랑의 우두머리시여. (양주동 해독)


기파랑은 무척 기품 있는 인물이었나 봅니다. 기파랑이 지닌 마음의 가장자리만이라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하게 만들고, 눈조차 그의 고결한 인품을 흐트러트리지 못했다니 말입니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말 가운데 사숙(私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분을 본보기 삼아 학문과 덕행을 쌓는 것입니다. 맹자가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고 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상 사숙을 통한 사제 관계는 매우 많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성호 이익을 사숙했고, 신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사숙했고, 김춘수는 릴케를 사숙했습니다. 간디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사숙했고,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사숙했으며, 보들레르는 에드커 앨런 포를 사숙했다고 합니다. 우리 둘레를 보면 멋있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Role model에게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칸트는 데이비드 흄의 저작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외쳤습니다. 주위에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가 될 자신이 없는 게 아닐까요? 여러분은 몇 분의 스승을 모시고 계십니까?


후기 - 향가가 으레 그렇지만 찬기파랑가는 특히 해독에 차이가 큰 편이다. 학자에 따라 향가의 해독이 다른 것은 향가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한국어의 어순에 따라 표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때의 우리말을 향찰을 통해 재구성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양주동 박사가 괜히 인간 국보를 자처한 것이 아니다. 여하간 찬기파랑가의 해독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 양주동 박사의 원형 상징적인 해독과 김완진 교수의 개인 서정적인 해독으로 갈린다. 이 밖에 달, 물, 돌에 대한 의미도 차이가 적잖다. 여기서는 화자와 달의 문답으로 본 양주동 박사의 해독을 따왔다. 맹자 이루편(離婁篇)에 “나는 공자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통해 사숙했다(予未得爲 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는 구절은 언제 들어도 애틋하다. 나는 내가 모시는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

Posted by 익구
:

2005년 10월 경영B반 웹진에 객원기자로 들어가 처음 맡은 일감이 열 줄 짜리 연재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짜임새 있는 연재물을 궁리하다가 한글 자음 ㄱㄴㄷ을 열쇠말(키워드)로 하는 시 감상을 생각해봤다. 고종석 선생님의 『언문세설』 형식을 따왔다.

한국어 자음의 기능부담량이 동일하지 않은지라 어떤 때는 너무 넘쳐서 선택하기 힘들고, 어떤 때는 딱히 마땅한 게 없어 애태웠다. 가까스로 시 선정은 마쳤는데 그간 잊고 있던 주옥 같은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나 서글프다.

나처럼 비문학적(!)인 녀석이 살가운 마음과 아름다운 언어를 헤집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애를 써보겠다. 2006년 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틈틈이 연재되다 보니 나도 정리하는 걸 잊고 있었다. 그리 영양가 없는 글이지만 내 머리 아파 낳은 자식을 내칠 수 없는 노릇, 후기를 덧붙여서 소개한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

ㄱ- 고려가요 「가시리」

붙잡아둘 일이지만/ 시틋하면 아니 올세라//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자마자 돌아서 오소서


헤르만 헤세의 말대로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보다는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만한 대가를 감내하지 않고서는 누릴 수 없는 기쁨이기에. 양주동은 「가시리」를 "동서문학 별장(別章)의 압권"이라고 격찬했지만 가시리는 기교나 표현이 거의 산문에 가깝다. 시가라고 보기에는 너무 푸석푸석한 담박함이 흠이 됨직하다. 어쩌면 절창이라는 찬사는 몇 안 되는 고려가요 가운데 비교우위 정도인지도 모른다. 괜한 험담에도 불구하고 고은의 표현대로 가시리는 "위대하게 단순"하다. 가는 듯 돌아오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님의 침묵」의 역설과 만난다. 이처럼 집착을 덜어낸 절제된 미련이야말로 연애하는 이들의 미덕이 되어야 한다. 고종석은 "이 시의 화자가 남자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여리고 애틋한 사랑이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 둘레에 가시리 가락처럼 슬퍼하고 참아내는 남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후기 - 연재물의 첫 소재였던 가시리는 나름대로 많은 공력이 들어갔다. 일단 현대어 풀이를 어떻게 하는 지도 고민이 많았다. 영감을 얻기 위해 관련 논문까지 뒤적이고 집에 있던 먼지 쌓인 문고판 책도 찾아봤다. 양주동 선생의 저 유명한 가시리 평설은 예스런 말투가 너무 많아 해독이 여의치 않아 크게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산출물을 보니 하잘것없지만 창작의 고통은 장단(長短)을 가리지 않는다. 강준만 선생이 『글쓰기의 즐거움』에서 언급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스카 와일드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부치면서 자기 편지가 너무 길어서 미안하다고 썼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편지 길이를 짧게 못 만들었다면서...^^;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2)

ㄴ- 이형기의 「낙화」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JP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저는 「낙화」에서 떠남의 미학을 읽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10선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비례대표 1번을 받아들던 당신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습니다. 미셸 투르니에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앞모습은 꾸밀 수 있으나 뒷모습은 꾸미기 어렵지요. 화사하고 씩씩한 앞모습보다는 너절하고 쓸쓸한 뒷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에 좀 더 가까울 겁니다. 당신은 뒷모습을 보일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습니다. 메이저 전 영국 총리는 57세의 이른 나이에 정계를 은퇴하며 "떠나야 할 때를 넘겨 머물기보다 남들이 머물라 할 때 떠나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일으킨 기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은퇴한 정문술 전 미래산업회장이라고 왜 괴로움이 없었을까요. 수로부인에게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라고 노래했던 삼국유사의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아쉬울 때 내려오지 못한 당신을 반면교사로 삼습니다. 저는 있을 때 잘할 게요. 고맙습니다.

* 이형기 시인은 2005년 2월 2일 고대 안암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1주기 즈음하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후기 - 요즘도 낙화가 교과서에 실려 있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국어시간에 처음 접한 이후 이 시는 내 애송시 가운데 늘 앞자리에 있다. 김종필은 마지막 순간까지 “서산(西山)을 붉게 물들이며 떠나고 싶다”는 노욕에 빠졌지만 그리 아름답지 못한 저녁놀이었다.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물러나지 못할까 걱정하라(不患其不能進前 而患不能退步)”는 퇴계 선생의 말씀이 사무친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3)

ㄷ - 김영랑의 「독을 차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벗과 영랑의 가상대화>
벗: 나도 독을 차보고 싶었지만 부끄럽게도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네.
영랑: 유족함에 개같이 숙이느니 따가운 볕 아래 고개를 들고 싶었어.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이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말일세.
벗: 날선 모습은 자네답지 않네만 좀 둥글게 둥글게 살수는 없겠나?
영랑: 그렇게 둥글게 살다가 떼굴떼굴 굴러서 나락으로 떨어진 걸 많이 봤지.
벗: 살다보니 세상의 비루함과 인심의 야박함에 절망하는 데 익숙해져버렸네.
영랑: 우리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헤매고 있는 까닭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벗: 아등바등해봤자 우리네 삶은 푸른 바다 속의 좁쌀 한 톨(滄海一粟)이지 않은가?
영랑: 그렇기에 풀 한 포기 앞에서 모래 한 알 앞에서도 솔직하게 살려고 하는 것일세. 도무지 대충 살수가 없단 말이지.
벗: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우리를 얼마나 배신했던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같은 친구야!
영랑: 벗이여! 칠흑 속에 지칠 때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쉬어 가세나!


후기 - 사실 이 글은 유치환, 조지훈, 박노해, 백석 시인 등의 시구를 슬쩍슬쩍 차용해 대화문 하나를 만들어냈다. 패러디한 문구를 맞혀보라는 퀴즈를 내볼까 하다가 반응이 시큰둥할 거 같아서 그만 뒀다.^^; 대개 그렇겠지만 나는 벗과 영랑의 심정을 반반씩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평소에는 영랑인척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벗처럼 사는 게 아니라 늘 고민하며 접점을 찾는 거 같다. 이걸 단순히 기회주의적이라든가 이중적이라고 지칭하기보다는 양가적(兩價的)인 캐릭터라고 적당히 둘러대 본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4)

ㄹ -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종종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됩니다. 외로움을 달래려 더 술을 마시는지도 모릅니다. “한 번 마셨다면 응당 삼백 잔은 마셔야 한다”고 이태백이 말했다지만 좋은 술벗이 있다면 석 잔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술을 마시는 데 한도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해 어지러워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고 했습니다. 유주무량과 불급난 중에 하나는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이 둘을 결합시키기란 고연전 지는 것만큼이나 어렵네요.^^; 아주 가끔은 지워진 기억을 더듬어가며 사무치게 부끄러울 때도 있겠지만 대개는 오래도록 도란도란 환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J. 헤이는 “술은 비와 같아 진흙에 내리면 진흙은 더욱 더럽게 되나, 옥토에 내리면 아름답게 하고 꽃피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네 술자리가 구접스러운 세상사 시름을 날릴 수 있는 훈훈한 옥토가 될 수 있기를! 인생은 짧아도 술병 동낼 여유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아찔했던 사발식을 추억하며 정철의 장진주사를 읊조립니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 이 시인은 ‘풀’,‘눈’,‘폭포’의 시인 金洙暎(1921~1968)이 아닌 동명이인 金秀映(1967~)입니다.


후기 - 소설가 김연수는 고교시절 참고서에서 봤던 이백의 시 장진주(將進酒)의 첫 구절 “그대 보지 못하는가(君不見)”를 떠올리며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고대광실의 거울 앞에서 백발 서러워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실처럼 검던 머리 저녁에 흰눈처럼 되었음을/ 인생의 뜻을 얻었으면 즐기기를 다할지니/ 금 술잔으로 하여금 공연히 달만 쳐다보게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소설가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나는 “그대 잊지 않았는가(君未忘)”를 읊조린다. 젊은 날의 높은 꿈을 벌써 잊지는 않았는가를 습관처럼 되뇌고 싶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5)

ㅁ - 서정주, 「무등을 보며」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玉)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미당은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궁핍은 고매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타고난 살결과 마음씨"를 헝클어 놓습니다. 미당 만한 재능이 없는 범인들은 오랫동안 헐벗고 외로울 겁니다. 더군다나 미당 자신은 "옥돌같이 호젓이 묻"히지 않았습니다. 생명파의 대표주자였던 미당은 손잡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내밂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의지가 얼마나 너절한지 보였습니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드높인 미당의 친일 행적과 군사 독재에 대한 굴신 앞에 탄식합니다. 그의 삶에서 발견되는 역겨움을 통해 예술적 성취와 인격적 성숙 사이의 불일치를 곱씹어 봅니다. 미당 옹호자들의 흠집 없는 영혼에서 나온 문학만을 허용할 수는 없다는 항변에 동감합니다. 그의 과오는 엄중하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면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문학만이라도 진실을 벗했으면 좋으련만 역시 헛된 욕심인가 봅니다. 문학이 딱히 더 절개를 지킬 까닭은 없겠지요.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던 매천 황현의 절명시가 새삼 숙연해집니다. 미당이 좀 더 부끄러워했다면 좋았을 것을!

* 시인 나이 스물넷에 이런 투명한 시어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못해 얄밉네요.^^;


후기 - 미당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작품과 그 작품을 생산한 문인의 실제 삶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분리할 것인가 하는 까다로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얼마 전 물러난 김진표 전 교육부총리는 외국어고 졸업생이 어문계열로 진학하는 비중이 낮다고 질타했지만 정작 그 자신의 딸이 외고를 나와 비어문계열로 진학한 것으로 밝혀지자 여론이 싸늘했던 것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물론 사람이 밉다고 그 사람의 주장에 아예 귀를 막는다거나 그 주장이 그르다고 그 사람을 제재하려는 식의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지식인이나 공직자 같은 인물들은 제 주장과 제 생활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김지하 선생은 “미당이 윤리적으로는 친일하고 친독재하고 살았지만 시 하나는 끝내준다는 등의 무책임한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미당의 삶이 윤리적으로 하자가 있기 때문에 미학적 관점에서도 시의 감동이 안온다”고 평가했다. 무척 설득력 있는 말이다. 또한 미당의 구차한 행적을 옹호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만연한 변절도 옹호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미당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들에 상당 부분 끌리면서도 미당에게 사면의 유혹을 느끼는 내 자신이 민망하다. 모든 예술작품은 생산자의 손을 떠나면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면서 독자들에게 흡수된다는 논리에 내가 적잖이 동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의 정치적 너저분함까지도 우리 문학이 품고 가야할 유산인지도 모른다. 미당의 행적을 숨기지 않되 그의 시는 더 많이 읽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뜩이나 시도 안 읽는 세상에.

이남호 선생은 인간 존재의 복합성을 강조한다. 예술가의 삶의 일부를 전체적인 평가로 평면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과 예술가의 삶이 분리될 수는 없긴 하지만, 그 연관성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문학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섣부른 일반화와 단순화일 것”라는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 여하간 미당은 왜 일평생 부당한 권력을 편들었을까. 그래서 그의 시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억지스런 변명을 내어놓게 만들었을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지게 마련이다. 그림자만 부각시켜 빛을 꺼트리는 것도 잘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도 부질없는 처사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그림자를 감추려는 시도가 너무 많다. 역사가 두려운 까닭은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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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문화 2007. 11. 26. 15:34 |

지난 11월 3일 있었던 공민왕사당 답사에 함께 해준 청원이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0^

<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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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창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안내 표지판이 고맙다.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이다. 민(愍)은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어울리기는 하나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깎아 내렸다는 느낌이 짙다.



“이건 뭐냐!” 친구의 탄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전면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문이 닫혀 있어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인 만큼 노여움(?)을 풀라고 다독였다. 친구가 고른 저녁 메뉴가 실망스러웠기에 망정이지 지청구가 더 날아올 뻔했다. 사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을 찾다 보면 개방하지 않는 곳도 많고 퇴락해서 안쓰러운 경우도 흔하다. 함께 온 벗에게 미안한 마음에 마포구청에 몇 가지를 물었다. 마포구청 문화체육과에서는 사당 보수공사에 관한 안내가 부족해 문화재 관람에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씀해주셨다. 노후된 사당을 보수하는 공사는 10월 초에 착공하여 12월 초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보수를 마쳐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화재예방 및 사당내부 소품 보호를 위해 개방하지 않을 계획이란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조선 초기에 양곡창고인 광흥창에서 일하던 창고 관리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지어졌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공민왕을 모시는 건 반역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삼불제석(三佛帝釋)을 모시고 신당 또는 당집으로 부르다가 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이 복권되던 1790년경 비로소 공민왕사당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일제 강점기 때 화마를 입었다고도 하고,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고도 한다. 소실된 사당을 주민 스스로 건축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민간 전통건축기술 수준을 헤아리게 하는 자료로 평가되어 등록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공민왕의 위대성은 그 당시에도 인정받은 모양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공민왕에 대한 제사는 이어졌다. 이러한 숭모 분위기가 이어져 창전동뿐만 아니라 종묘 안의 공민왕신당이나 경북 봉화군 청량산 공민왕당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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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와우산 아래 광흥창터에 인접해 있다. 공민왕사당의 터는 옹색해서 도무지 사진 찍을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사당 옆의 담들은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 民俗大觀』 1권과 『마포 : 어제와 오늘, 내일』이라는 책에 공민왕사당의 내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진 자료들이 다수 있다. 공민왕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신상 외에도 최영장군과 마부, 삼불제석과 동자상 등이 걸려있다. 공민왕 신상은 제법 화격(畵格)이 있는데 황색 곤룡포가 미려하고 호피무늬 의자가 위엄을 더한다.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적들이 상당 부분 날조되었음은 널리 알려졌다. 붓이 굽었던 건 오백 년 고목을 찍어 넘기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던 셈이다. 공민왕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했다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험담과는 달리 넉넉한 신상의 모습이 반갑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 화가로 손꼽히며 글씨도 잘 썼다는데 예술가적 풍모가 얼마나 녹아나느냐가 공민왕 어진의 알맹이가 아닐까 싶다. 과연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시대 인물과 관련된 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옛것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시대만 떠올린다. 우리네 유구한 전통에 감춰진 여러 겹의 속살을 헤집기 위해서 고려도 알고, 근현대도 탐구하는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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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없었던 일각문(一角門)을 새로 만드는 듯싶다. 90년대 초 사진을 보니 투박한 철문을 달아놓았는데 그 후 태극문양을 집어넣었다. 점점 사당의 모양새를 갖추어 간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2001년 7월 도입됐다. 그동안은 일제 잔재라는 오명과 개발 광풍 속에서 멸실되기 일쑤였다면, 이제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준다. 등록문화재 제도가 정착된다면 일상의 흔적들에 대한 기록과 보존도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지정문화재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정책이다. 중앙정부나 지자체 지정문화재가 각종 규제를 수반하고 있어 재산권 침해가 불가피한데 견주어 등록문화재는 보존이나 활용에도 융통성이 많은 편이다. 소유자 중심형 문화유산 보호제도로서 국가는 각종 혜택을 통해 소유자의 활용 의사를 북돋워주는 방식인 셈이다. 흥미로운 등록문화재들이 많지만 공민왕사당도 매우 이채롭다. 근대에 지어졌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물은 600년도 넘는 옛날이다. 공민왕의 험난한 좌절을 따가워하기 좋은 곳이다.


공민왕은 민간신앙에서 받드는 몇 안 되는 임금이다. 무당을 소재로 한 소설 『계화』에는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민왕을 기리는 민중이 있다는 건 그 불운함에 대한 동정인지도 모른다. 무속은 비운의 죽음일수록 오히려 각별하다. 공민왕의 억울함이 우리네 서글픔과 잘 포개진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한국인에게 곧잘 한(恨)의 정서가 있다고들 한다. 이는 결국 한스러움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너무 헝클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문화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체현한 것이 마을굿이며 공민왕의 한을 푸는 것이 공민왕사당제다. 인습을 버리고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명분으로 서민의 소박한 기원을 무시할 용기는 내게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날 지역화합의 마당으로 살리는 방안을 고심해봤으면 좋겠다.


옛 기록을 살피다 보면 공민왕의 개혁이 어찌나 지난했던지 가슴이 짠하다. 부원배를 몰아내는 건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돈의 개혁에 얼마나 많은 저항이 있었는지를 엿본다. 북방을 개척했던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의 분노를 달랠 때는 참담했다. 관제를 격상시켰다가 다시 격하시키고, 원나라의 연호를 정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역경에 마음이 아렸다. 명나라 사신이 기녀의 실수를 트집잡아 항의하자 시중 염제신이 유배되는 대목에서는 괴로웠다.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돌아가자 애이불상(哀而不傷)에 실패해 총기를 잃은 게 단지 성정의 모자람 때문은 아니었다. 숙명은 그의 의지를 압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결과로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듣기 좋은 개혁 구호를 늘어놓는 지금의 지도자들이 경계 삼을 일이다. 부정적 지식(negative knowledge)이라는 말이 있다. 실패나 실수, 잘못으로부터 얻는 지식을 일컫는다. 우리는 성공보다는 실패로부터 많이 배운다. 고초 속에서 잉태되는 개혁을 입으로만 외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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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맞배지붕에 2칸으로 된 건물이다. 사당 옆으로는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운동기구가 있다. 맞은 편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데 주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활용될 것 같다.

영구히 보존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등록문화재는 외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고치거나 증축이 가능하다. 사당을 새로 짓는 모습을 보며 저래도 되나 싶었던 내 궁금증도 멀끔히 풀렸다. 아마 보수공사를 결정한 중요 원인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리라. 등록문화재 지정을 전후로 훼손된 근대문화유산들이 적잖다고 들었다. 다행히 공민왕사당은 마포구민의 지속적인 관심 덕에 새 단장을 준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공민왕사당제에 힘입어 이 작은 사당이 지역주민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친숙한 존재로 각인된 덕분이다.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는 찾기 나름이고 가꾸기 나름이다. 서운해하던 친구에게 등록문화재의 취지를 설명하고 금단청까지 잘 마르면 다시 찾아오자고 권해야겠다. 가서 고하리라. 대왕 당신을 도무지 미워할 수 없었다고.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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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속에 변치 않는>
  - 『스승의 옥편』을 읽고

  ‘선발자의 이득’이라는 경제용어가 있다. 상대방에 앞서 신상품을 시장에 내놓은 기업이 얻게 되는 이익을 일컫는다. 이와 반대로 선발자가 터를 닦은 시장에 진입해 위험과 비용 부담을 줄이는 ‘후발자의 이득’이라는 말도 있다. 두 이점 가운데 어느 것이 크게 작용하느냐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시장 개척자들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닌 셈이다. 최근 산업자원부는 산업정책 패러다임을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전략에서 혁신 주도자(leading innovator) 전략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히 선진국 따라잡기로는 중국 등과의 경쟁에 한계가 있으므로 원천기술과 창조적 인재에 바탕을 둔 핵심역량을 키우겠다는 포부다.


  정민 선생의 『스승의 옥편』을 읽다가 엉뚱하게도 ‘혁신’ 생각이 났다. 글쓴이의 저작에 잇따라 흐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과 혁신 주도자라는 개념은 제법 닮았다. “전통의 계승은 지금 없는 변치 않을 옛것을 회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원래 있지도 않았다. 쉴 새 없는 변화 속에 변치 않는 정신의 가치를 깃들이자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책의 고갱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옛것을 바지런히 읽어 정갈하게 갈무리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18세기 지식인 탐구로 이어진다. 선생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에서 옛것을 흉내내기 급급했으면서 교조적 권위를 휘두르기 일쑤였던 기득권층을 비판한다. 그는 “민족문화의 주체성과 외래문화의 건강한 결합을 모색했던 지식인”들을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이라 평했다. 이 가능성이 사그라졌던 것에 대한 반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비유가 거칠지만 옛사람이 선발자의 이득을, 오늘을 사는 사람이 후발자의 이득을 꾀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2등 상품이 1등이 되기 위해서는 10배 더 좋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선현과 한바탕 승부를 벌이자는 건 아니지만, 그네들의 다채로운 삶을 추체험하는 게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글쓴이가 틈틈이 한탄하듯이 기술의 진보가 정신의 고양으로 확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생은 문화는 변화할 뿐 발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후고박금(厚古薄今)을 거부한다. 아울러 사람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언급되는 전거들 상당수가 자잘한 일상생활의 섬세한 묘사다. 이를 통해 옛사람들의 고민 상당수가 현재도 여전히 끙끙 앓는 화두임을 보여준다.


  북송 시대 사마광은 황하 유역의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왕안석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 지역을 대표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북 지역이 전통주의를 내세웠다면 신흥세력인 동남 지역은 신법(新法)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지식인의 철학이나 정견이 온전히 그 개인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역사와 환경이라는 맥락은 부러 외면하기 힘든 규정력을 행사한다. 자신의 생각에 시공간이라는 요소(要素)를 눅여낼 때 그 사상이 좀 더 탄탄해질 수 있다. 선생은 전작 『책 읽는 소리』 후기에서 ‘그때 여기’와 ‘지금 저기’라는 두 좌표축을 균형 있게 도두볼 것을 주창한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그때 여기’, 다시 말해 ‘우리의 과거’를 보강한다면 보다 혁신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동서고금을 통합하는 담론을 위한 저자의 제안을 세 가지로 나눠봤다.


  첫째로 기록하는 습관이다. 『지봉유설』, 『성호사설』, 『임원경제지』 등의 백과사전식 저술이 그 실례다. 정조의 『일득록』을 완독하며 희열을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이 새록하다. 퇴계선생고종기의 꼼꼼함도 감동적이다. 선생은 단순히 적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읽는 초서(鈔書)를 통해 자기 나름의 잣대로 가름하여 식견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치밀한 기록은 일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책임성을 높여준다. 다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한답시고 자기 만족하는 건 경계할 일이다. 실상 선생의 글쓰기 작업 자체가 기록의 극치다. 라디오 진행자의 한마디나 식당에서 손에 잡힌 소식지도 메모해둔다. 생활 속의 단상도 잊기 전에 적어 두는 듯싶다. 자식의 효도는 어린 시절에 다했다는 넉넉함이 푸근하다. 조봉암 선생 무덤 앞 어록을 보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고, 차마 속일 수 없는 사람을 모시고 싶다는 바람을 토로할 때 사람냄새가 난다. 이는 마치 18세기 소품체(小品體)의 생활작문, 미시작문을 연상케 한다.


  둘째로 위대한 일상성이다. 도저한 근면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글쓴이는 스승의 닳고닳은 한한대사전을 넘기며 단순무식한 노력이 왕도임을 확인한다. 다산 정약용이 책상다리로 앉아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고사를 전한다. 다산의 제자 황상이 오로지 부지런하라는 삼근계(三勤戒)를 받은 이야기도 꺼낸다. 편안한 휴식이 되는 공부가 진짜 공부이며 질리지 않고 가슴 뛰게 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럭저럭 소일(消日)하지 않는 삶은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라는 『중용』 구절과 만난다. 누구나 사흘쯤은 성인군자 행세를 할 수 있다. 닷새 정도는 공부를 하다가 지쳐 단잠에 빠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사흘과 닷새를 보름으로, 달포로 늘려나가는데 있다. 눈치 보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정성이 하늘까지는 몰라도 사람은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셋째로 줏대 있는 개성이다. 선생은 『미쳐야 미친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미치는 마니아들의 치열함을 예찬한 바 있다. 온달 이야기는 운 좋은 출세담이 아니라 신의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해석을 비롯해 고쳐 읽고 따져 읽는 자세를 환기시킨다. 저자가 두드러지게 살피지는 않았지만 유교 텍스트에 내재된 지배층 옹호 및 차별의식 같은 극복해야할 인습들도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 것이다. 양명학이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진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 같은 면들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전도 결국 그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특히 “정신을 본받고 표현을 본받지 말라(師其意 不師其辭)”라는 한유의 문장론을 강조한다. 옛것을 배우되 옛것을 답습하지 않고 편승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권한다.


  이 세 가지 비책의 뿌리는 역시 개권유익(開卷有益)이다. 서유럽과 영미 선진 출판시장에서는 컴패니언(companion) 북이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출판시장이 고전의 요약정리나 이색적인 재해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면 컴패니언 북은 고전의 핵심 부분을 발췌해 옮기고 여기에 자세한 해석을 다는 식이다. 이처럼 원문을 무궁자재로 인용하기 위해서는 고전 번역이 절실하다. 다행히 지난 7월 한국고전번역원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문고전 번역사업을 국가가 끌어안음으로써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고전 국역사업을 수행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포실한 고전의 토대 위에 특수성을 뽐내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한국적 가치관을 모색해보자. 민족주의로 가두기에는 그 품이 너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이 땅에서 곰삭은 옛글은 무슨 힘을 지닐까. 자본의 포섭에 맞설 재기 발랄한 언어는 무엇일까.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매운 의지를 벼린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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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본래 두 달 전인 6월에 작성한 글이지만, 과객님의 고마운 댓글을 반영해 고치고 문단을 이동시켰습니다. 외래어의 된소리 표기에 대한 부분을 좀 보강했을 뿐 크게 바뀐 부분은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어려운 문제네요.^^;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서해문집, 2004)라는 책 후반부를 읽었다. 서문에서 인명과 지명 표기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현재 중국이 오늘날 한국의 인명이나 지명을 한국어 발음으로 표기하지 않고 중국어 발음을 고수하고 있는 한 우리도 형평에 맞추어 우리 식으로 중국 인명, 지명을 표기하자는 고집”하기로 한 저자들의 결단은 수긍할 만하다. 중화민국을 세운 1911년의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람은 한국어 한자 발음으로 부르고, 그 이후는 중국어 한자 발음으로 부르는 게 대세로 자리잡았다. 호금도(胡錦濤)보다는 후진타오가, 온가보(溫家寶)보다는 원자바오가 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왜 가름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가 애매하다. 남의 나라의 역사적 사건이 우리나라 발음표기의 기준이 된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중국 지명의 경우 역사 지명으로서 현재 쓰이지 않는 것은 한국어 한자음대로 하고, 현재 지명과 동일한 것은 중국어 한자음에 따라 표기하게 되어 있다. 가령 쯔진청과 자금성(紫禁城), 톈안먼과 천안문(天安門), 완리창청과 만리장성(萬里長城) 등의 경우 역사 용어라 후자가 많이 쓰이는 편이다. 하지만 현대 지명은 일관성이 덜한 편이다. 베이징, 상하이가 많이 퍼졌지만 북경(北京), 상해(上海)도 여전히 많이 쓰인다. 청두보다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수도 성도(成都)가 익숙하고, 뤄양, 시안도 낙양(洛陽)과 서안(西安)이라고 부르고픈 마음이 적잖다. 사천(四川) 탕수육은 있어도 쓰촨 탕수육은 좀처럼 쓰지 않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충칭을 드나들었던 우리 선조들은 충칭보다 중경(重慶)으로 더 많이 불렀을 공산이 크다. 옌볜 조선족보다는 연변(延邊) 조선족이라 해야 어울린다. 실제로 연변대학 교문에는 한글로 연변대학이라고 써져 있다고 한다. 한국언론에서 옌볜대학이라고 표기하는 게 적절한지 헛갈린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경우 헤이룽장성을 흑룡강(黑龍江)성으로 쓰기는 해도, 하얼빈을 합이빈(哈爾濱)으로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혼란스럽다.


인명이야 중국어 한자음으로 부르는 데 거부감이 덜하지만 지명의 경우 한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들이 적잖기 때문에 쉽게 바꿔 부르기 힘들다. 우리에게 요동(遼東)과 집안(集安)은 있어도 랴오둥과 지안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반드시 관성 탓만은 아니다. 중국식 한자음을 무작정 존중하기 힘든 역사적 맥락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한국인이 백두산(白頭山)을 장백산(長白山), 심지어 창바이산으로 부르는 건 독도(獨島)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고 언짢은 일이다. 이 여파 때문인지 황하(黃河)를 황허라고 부르는 건 낯설다. 특히 심한 건 양쯔강이다. 양자강(揚子江)을 중국식으로 불러준답시고 한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장강(長江), 즉 창장으로 쓴다. 참고로 한국어에서 쟈, 져, 죠, 쥬, 챠, 쳐, 쵸, 츄는 소리가 없기 때문에 자, 저, 조, 주, 차, 처, 초, 추로 발음된다. 이로 말미암아 주스를 쥬스라고 쓰지 않듯이 江을 쟝이라고 쓰지 않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쟝졔스가 아닌 ‘장제스(蔣介石)’가 된다.


한글은 음소 문자이면서도 낱글자를 음절 단위로 네모지게 모아씀으로써 음절문자의 효과를 낸다. ‘하ㄴ가o(漢江)’, ‘겨o세제미ㄴ(經世濟民)’이라고 쓰는 것보다 ‘한강(漢江)’,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한자와 잘 어울림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을 위시한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한글 한 음절과 한자 한 음절이 일대일로 대응되면서 한자가 개입될 여지가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는 한국 한자음을 중국 한자음에 가깝게 고치고 싶다는 욕망의 실현이었다. 좀 좋게 말하자면 한국어와 중국어의 원활한 소통을 꾀한 것이 훈민정음이다. 고유명사의 경우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것이 외래어 표기법의 대원칙이라지만, 중국 고유명사를 표기하는 데 있어 겪는 혼란은 훈민정음 창제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습관과 버성기기 때문이리라.


김용옥, 최영애 선생님이 만든 중국어 표기법은 적극적인 된소리 표기와 더불어 모든 인명과 지명을 중국어 발음으로 읽기를 제안한다. 라오쯔(老子)와 차오차오(曹操)처럼 쓰자는 데는 공감하지 않지만 된소리를 좀 더 써야 한다는 주장은 검토해볼 만하다. 가령 東이 들어가는 마오쩌둥이나 산둥반도는 현지 발음과 너무 차이가 난다. 물론 외래어는 한국어 체계에 맞게 표기하는 게 맞지만 둥과 똥의 간극은 좀 지나치지 않나 싶다(예전 문교부안인 ‘동’이 더 나은 듯싶다). 이미 중국어 표기에서 ‘ㅆ,ㅉ’을, 일본어 표기에서 ‘쓰(つ)’를 쓰고 있다. 더군다나 2004년 12월 30일 문화관광부가 동남아시아 3개 언어의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면서 타이어는 ‘ㄲ,ㄸ,ㅃ,ㅉ’, 베트남어는 ‘ㄲ,ㄸ,ㅃ,ㅆ,ㅉ’ 등 된소리 표기를 인정했다.


푸케트(Phuket)가 푸껫이 되고 호치민(Hoa Chi Minh)은 호찌민이 된 것은 분명 현지 발음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것을 고치려는 의도다. 언젠가 중국어 표기에 ‘ㄸ’ 등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실제 발음과 가깝게 표기하려 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너무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빠리(Paris)’라고 굳이 고집하는 건 외국어 표기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한 외래어 표기법의 취지에도 맞지 않다(여담이지만 나는 ‘마르크스’와 ‘맑스’가 같은 사람인 걸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다만 어문규범의 신뢰를 높이는 측면에서라도 너무 실제와 다르게 느껴지는 대목은 다듬어줄 필요가 있겠다.


실상 우리가 내세우는 원음주의 표기법에는 많은 예외가 있다. 스페인을 에스파냐로 고쳐 부르는 건 영어식 표현을 교정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지만 여전히 영어식 명칭은 곳곳에 만연하다. 베네치아라는 이탈리아어 명칭만큼이나 베니스라는 영어식 명칭이 많이 쓰인다. 영어식 비엔나와 독일어식 빈은 같은 도시다. 프랑스 경제학자 Walras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발라’라고 해야하지만, 우리네 경제학 책에는 영어식으로 ‘왈라스’라고 소개하고 있다. 비단 영어식 표현만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바꿔 부르는 고유명사도 적잖다. 우리는 닛폰이라 부르지 않고 일본이라고 칭하며, 도이칠란트 대신 독일을 선호한다. 몇 해 전 중앙일보에서 독일어에 어원을 둔 게놈(genom) 대신 영어식 지놈을 쓰자는 홍보를 한 적이 있었다.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에서 이미 관용적으로 굳어진 게놈으로 통일하기로 결정해 논란이 일단락 났다. 이처럼 고유명사, 학술용어는 언중의 습관을 일차적으로 고려하는 게 옳다.


유럽 공통 화폐인 유로(Euro)의 경우 독일에서는 오이로, 프랑스에서는 외뢰, 이탈리아에서는 에우로 등으로 읽는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원음주의보다는 자신들의 발음으로 변환하려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반면 북한에서는 철저한 원음주의를 써서 러시아를 로씨야, 멕시코를 메히코, 헝가리를 마쟈르, 폴란드를 뽈스카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까지 살펴보고 나니 오히려 더 갈피를 못 잡겠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을 예외 없이 따르게 할 것인가 관행을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어지럽다. 로마자 표기법의 허점이 적잖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확정된 공적 규칙을 지켜왔듯이 외래어 표기법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어떻게 표기하느냐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똑 부러지지 않는다고 성내기 전에 한국과 중국의 애증 어린 관계를 조망해보는 것도 좋겠다. 아울러 한국어와 중국어의 비대칭성도 고찰해봐야 한다. 지난 2005년 1월 서울시는 서울에 대한 새로운 중국어 표기로 ‘首爾(서우얼)’로 확정해서 발표했다. 한청(漢城)이 입에 익은 중국 언중들의 습관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을 게다. 서울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고, 그 밖의 우리 인명과 지명은 여전히 중국어 발음으로 읽힌다. 노무현(盧武鉉)은 ‘루우쉬안’일 뿐이다. 최익구(崔翼求)는 ‘추이이추(혹은 추이이치우)’가 되는데 중국사람이 나를 이렇게 부르면 처음에는 무척 어색할 듯싶다. 중국인과 형평에 맞게 우리도 한국어 발음으로 통일하자는 주장은 무척 설득력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소리나는 대로 쓸 수 있다(雖風聲鶴 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라고 자부했듯이 우리말의 표현력은 중국어를 비롯한 세계 어느 말에 견주어 뛰어나다. 중국인이 한자어로 된 우리의 인명과 지명을 자기네 발음으로 부르는 건 중화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표의문자라는 언어적 특성 탓이기도 하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어 발음에 맞는 한자를 일일이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인은 외래어를 자기식대로 음차하는 걸로 유명하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커린둔(克林頓)’이라고 표기하고 맥도날드를 마이땅라오(麥當勞)로, KFC를 컨더지(肯德基)로, 코카콜라를 커커우커러(可口可樂)로, 피자헛을 삐셩커(必勝客)로 표기하며 외국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기발한 재주를 뽐내고 있다. 과연 우리의 인명과 지명을 이렇게 음차해서 불러주기를 요구하는 게 마땅한지 좀 더 고심해야겠다.


내 이름의 경우 중국어 병음으로 cui yi qiu라고 쓰고 로마자로는 choi ik gu라고 쓴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다면 최씨는 ‘Choe’라고 해야하지만 이름자는 예외를 인정하는 게 적당할 듯싶어 아직은 고치지 않고 있다. 여하간 내 이름을 중국어로 한국어 발음대로 음차하기가 어렵다. ‘최’의 중국어 병음인 cui 와 비슷한 음가로 chui 정도가 있으나 본래 한자를 바꿀 만큼 발음 차이가 많이 나는 건 아니다. 한국어 발음으로 ‘익’에 해당하는 한자는 모두 yi로 발음된다. 더군다나 중국어 병음에는 i로 시작하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yi가 그나마 가장 가깝다. 굳이 받침을 넣자면 yin 정도가 가능할 게다. ‘구’의 경우에는 gu라는 병음에 해당하는 글자가 많아서 무리 없이 바꿀 수 있다. 종합하면 내 이름 석자 가운데 음차할 수 있는 건 한 자 뿐이다. 어떤 사람은 석 자 모두 가능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한 글자도 근사치가 없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중국어 발음으로 부르는 것보다 원음에서 더 멀어진 음차로 부르는 게 온당할 것인가. 가령 내 이름을 모두 음차해서 chui yin gu라고 한다고 할 때 양국은 동등한 위치가 되는 걸까? 그래도 한국의 유명인사나 주요 도시만큼은 ‘서우얼’처럼 음차해서 부르는 수고로움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나.


현행 중국어 표기법도 이런 고민의 산물일 게다. 어느 나라 말이라도 소리나는 대로 옮길 수 있는 한국어의 장점을 국가적 자존심 혹은 언어 주권이라는 명분 아래 절제하고 감추는 게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등소평(鄧小平)을 덩샤오핑이라고 원음에 가깝게 쓰고 읽을 수 있는 한국어의 우수성 때문에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한국어의 강점을 저들이 모르고 알아서 긴다고 생각할까 그게 걱정이다. 아마도 이를 염려한 사람들이 저우언라이를 주은래(周恩來)로, 류사오치를 유소기(劉少奇)로, 자오쯔양을 조자양(趙紫陽)으로 부러 지칭하는 것일 테다. 대한민국 언중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까? 어쩌면 우리가 한국어의 매력을 얼마나 알려 나가느냐도 이 지끈거림을 다스리는 관건이 될지 모르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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