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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07 쇠고기 정국과 소통의 문제

쇠고기 정국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사실 나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굳이 머리를 굴려본 것이 있다면 ‘위험(Risk)’과 ‘불확실성(Uncertainty)’의 개념이다.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위험은 측정 가능한 불확실성이다. 즉 확률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불확실성은 측정 불가능한 불확실성이다. 최근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위험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의 문제였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일단 거래를 사절하거나 자금을 회수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자금 융통이 막혀 금융위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형국인 셈이다. 요즘 불거지는 광우병 논란도 위험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정부는 안전하다며 위험 측면에서만 해명하고 불확실성을 다독일 방안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응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나이트(F.Knight)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이윤을 발생시키는 원천이라고 역설했다. 보험 처리조차 불가능한 진짜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사람이 기업가이며, 사전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을 지는 대가로 기업에는 이윤이 발생한다는 논리를 편다. 아직까지는 미국 쇠고기를 들여오는 이득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정부측의 초기 대응은 안이하기만 했다. 쇠고기 협상에서 정부가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는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자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제 정신인 민주정부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굴욕적인 협상을 하고도 국민들이 괴담에 놀아나네, 촛불집회에 배후가 있네 어쩌고 하면서 깐죽거리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문제의 본질이다. 이명박 정부는 불확실하지 않다. 그들은 위험할 따름이다. 그건 측정 가능하고 통제 가능하다.


정부의 거짓말과 실책이 쌓여 정책의 신뢰성이 추락했다. 그간 광우병의 위험을 함께 호들갑 떨던 이들이 갑자기 새 정부 들어 협상을 불가피하다고 외치는 것을 넘어 옹호하고 있는 모습은 불신을 부채질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는데 자율규제 하겠다, 원산지 표기 잘하겠다는 말이 믿어지겠는가. 물론 정부가 국민의 생명권을 희생해가면서 미국에 굽실거렸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손익계산서는 분명 극악한 것이었고 그나마 나온 추가적인 조치도 국민들의 분개 때문에 겨우 이루어졌다. 국민은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호들갑을 떠는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네들은 국민이 호들갑을 떤다고 나무랐다. 전전긍긍해야 할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정부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도덕적 자원을 결핍한 지도자는 ‘비지지자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 유무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 대통령은 그 비용이 크리라 추정된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는 지지도 폭락 사태는 낮은 신뢰도에 기인했다기보다는 빠른 속도로 늘어난 비지지자 수인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판단이지만 지지자 충성도가 붕괴될 조짐이 보인다. 비지지자의 낮은 신뢰도를 방어하는 건 지지자의 높은 충성도다. 혹자들은 군중심리라고 타박할지 모르겠으나 이명박 정부는 많은 기대를 품고 출범했다. 설령 이해관계에 의한 투표를 건넸다고 하더라고 그와 같은 지지를 건넨 국민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정부라니 서글프다.


경찰이 청와대로 향하는 시민들에게 최초로 물대포를 쏘았다는 기사를 접하고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명박 정부의 탄생을 저지하려 했던 편파적인 녀석이다. 이 점을 부인하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고 살았던 것 같다. 물대포 사태가 벌어지던 날 헌책방에서 노닥거리다가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편파적으로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인 것이다”라는 구절을 만나고 무척 동감했다. 나는 아직 공정하게 편파적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편파적으로 공정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공정한 척하지 않는 건 내 자부심이다. 그저 이명박 정부를 막지 못한 죄를 감내하고 하루하루 견뎌내는 재미로 살려고 했는데 이쯤 되면 죗값에 견주어 너무 많은 벌을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속한 반 클럽에는 쇠고기 정국에 대한 논란이 불붙고 있다. 나는 고종석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이명박 정부의 업적이 있다면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는 무능과 부패, 도덕성과 능력은 정(正)의 상관관계에 있음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여준 것이 아닐까”라고 썼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늘 떠들고 다니던 말을 고 선생님이 먼저 글로 옮기신 것이지만^^;). 어느 누리꾼이 요즘의 일을 풍자하며 인용한 최치원 선생의 <토황소격문>의 구절을 재인용했다. “하늘이 잠깐 나쁜 자를 도와주는 것은 그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흉악함을 쌓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그 때 당시에는 나도 흥분했고(한편으로는 엄청 절제했지만) 감정의 나열에 불과해서 며칠 뒤에 지웠다. 이제 재학생 가운데는 꽤 높은 학번이 되어버린 제가 스스럼없이 툭 던진 한 마디가 어떤 맥락으로 받아들여질지를 고민해야 했는데 좀 소홀했다. 내 잡소리를 누가 귀담아 듣겠냐 싶지만 내 진솔함이 후배들에게는 불편함을 심어줄 수도 있겠다는 반성을 했다. 사석에서든 클럽 게시판 같은 공적인 지면에서든 가능하면 솔직하게 살려고 했는데 때로는 솔직함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예전부터 몇몇 선배님들은 내 ‘감춤 없음’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다. 정말 고맙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렇다고 갈등의 소지가 있거나 가치관이 맞부딪치는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온당하냐는 문제의식을 품어본다. 좋은 이야기와 인사치레 같은 덕담을 늘어놓으면 우리의 소중한 관계가 너무 허망할 거 같다. 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는 의만 상하기 때문에 친구 사이에서 꺼내지 않는 게 좋다는 식의 이야기에 별로 동감하지 않는다. 그건 귀한 인연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배신’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익명게시판은 백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리는데 정작 오프라인 상에서는 수강신청 이야기나 나누는 우리네 우애를 돌아보게 된다. 왜 우리는 이런 소재를 두고 오프라인 상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지 못할까. 서로 덜 친해서 그런 걸까, 더 친하고 싶어서 그런 걸까?


우리가 좀 더 격의 없는 사이가 된다면 오프라인에서도 이런 이야기 술안주 삼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대학에서 내가 사귄 사람들을 위한 생각일지 내 개인적인 욕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불완전성을 가정한 제도다. 관용은 “내가 잘 났으니까 너희들 이야기를 좀 들어줄게” 이런 것이 아니다.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존재와 가능성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에 나서는 것이다. 진리는 권력순도, 성적순도, 목소리 크기순도 아니다. 부디 내 둘레의 사람들과 관용의 미덕을 만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뒷담화 대신 앞에서 말하기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내가 내뱉는 만큼 얼마나 잘 경청할 수 있을까?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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