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생각

사회 2012. 8. 5. 07:09 |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은 대만의 공식 국호이다. 여당인 중국국민당은 중화민국을 공식 국호로 존중하는 반면에 야당인 민주진보당은 사실상의 국호인 타이완(Taiwan)에 애정을 품는 편이다. 국공내전에서 패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국민당 세력과 대만 토착인이 주축인 민진당 세력의 차이를 나타내는 지점이다. 2000~2008년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총통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타이완을 공식 국호로 삼아 타이완 명의의 유엔 가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는 의미가 컸다.

 

중화민국은 1949년부터 1971년까지 유엔 회원국이다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회원국 지위를 잃었다. 중화민국은 눈물겹게 유엔 재가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민진당 정권이 타이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국가의 신규 가입 형식을 꾀한 것마저도 무산되었다. 명백한 주권국가인 중화민국의 유엔 가입이 좌절되는 건 국제사회의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 3월에는 총통선거와 함께 민진당이 발의한 타이완 명의의 유엔 가입안과 국민당이 발의한 중화민국 명의의 유엔 복귀안을 두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였으나 투표자수가 과반수에 미달하여 두 안건이 모두 부결되기도 하였다.

 

2012년 1월에 치러진 제13대 대만 총통선거에서 대다수의 대만 기업인들이 성명 등을 통해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를 지지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대만인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비행기로 고향으로 몰려간 것도 박빙이라고 예상되던 선거 판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수이볜 집권 시기에 대만의 독립을 둘러싸고 중국과 마찰이 잦았던 탓에 대만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자는 대만 경제계의 주장이 일반 국민들에게도 공감대를 얻어 마잉주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내세운 대만의 장래는 대만인들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결정한다는 ‘대만 컨센서스(臺灣共識)’에 대한 지지도 만만치 않음이 확인되었다. 천수이볜이 대만과 중국이 각각 한 개의 국가라는 뜻의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을 주창하여 양국이 긴장관계를 불러일으킨 바 있기 때문에 차이잉원 후보는 다소 수위를 조절한 느낌이다. 중국과의 경제적 교류를 확대하는 것에 동감하면서도 대만의 자주와 민주주의를 건사하고자 하는 대만 국민의 복합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중국은 줄곧 대만은 중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보고 하나의 성(省)쯤으로 간주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패주한 국민당 역시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본토 수복의 가능성이 희박해진 시점인 1992년, 국민당 정권은 홍콩에서 공산당 대표를 만나 92컨센서스(九二共識)을 합의한다.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해석은 중국과 대만 각자에 맡기고 각자의 명칭을 사용하는 ‘하나의 중국, 두 개의 해석(one China, two interpretation)’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민당 입장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해진 정치적 통일은 뒤로 미루는 명분을 챙기면서, 경제적 통합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실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벌였던 반공주의자였던 국민당 세력이 오늘날 친중 노선을 내달리는 것은 고도의 통일전술일까, 이데올로기의 허망함일까.

 

냉엄한 국제사회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중화인민공화국의 뜻에 따라 해석되고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다시금 확인되었지만 국제행사에서는 중화민국이나 타이완 대신 차이니스 타이베이(Chinese Taipei)로 나라이름을 표기해야 한다. 실지(失地)를 수복하지 못한 중화민국의 타이베이 정부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국민당 정권의 ‘하나의 중국’ 기조에도 부합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와 국가(國歌)를 사용할 수 없다. 올림픽 개막을 축하해 런던 시내에 걸렸던 청천백일기가 사흘 만에 철거된 것도 중국의 입김 탓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태권도 종목에서 대만 스포츠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도 시상식에서 대만올림픽위원회 깃발이 올라가고 국제올림픽위원회(國旗歌)가 울려 퍼졌다. 이번 올림픽에서 대만의 선전을 응원하면서도 서글픈 광경이 재연되는 것은 가슴이 아프다.

 

올해는 한ㆍ중 수교 20년이면서 한ㆍ대만 단교 20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1948년에 국교를 맺었으나 1992년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중국과 전격적으로 수교하면서 단교했다.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대만의 단교에 따른 조치로 서울 명동 대사관 및 부산 영사관의 중화민국 국기와 현판을 한ㆍ중 수교 발표 후 72시간 내에 철거할 것을 통보하는 것으로 양국의 공식 관계를 끝이 났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관철하는 중국과 수교를 하기 위해 대만과의 단교는 불가피한 조건이었지만 한때 ‘자유중국’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이 나라를 매몰차게 버려야 했던 것은 씁쓸한 일이다.

 

장제스(蔣介石)는 우리의 독립에 적잖은 지원과 격려를 해줬고, 유엔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우리의 입장을 많이 대변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나라, 한국전쟁 당시 파병해준 나라와의 단교는 아무리 정중하게 이뤄졌더라도 대만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대만의 태권도 선수 양수쥔(楊淑君)이 반칙패를 당하자 중국 선수의 우승을 위해 한국 심판이 개입했다는 허위사실이 유포되면서 대만 내 반한 감정이 고조된 적이 있다.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이렇게 번진 것을 보면 그간 우리가 대만을 홀대한 영향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양국의 경제교역 규모도 큰 만큼 국익과 실리 차원에서도 교류를 좀 더 넓혀나가길 희망한다.

 

1600년대 이래로 늘 스페인, 네덜란드, 일본 등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던 대만인들의 독립 의지에 심정적으로 동감하지만, 국호만큼은 타이완보다는 중화민국을 편애한다.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역사를 아끼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의 면적은 36,191㎢, 중화인민공화국의 면적은 9,596,961㎢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0.0038%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작은 땅에서 표현의 자유, 인권의 신장, 평화적 정권교체 등이 이뤄지면서 중국과는 다른 발전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양안 관계는 변형된 중화주의라고 할 만한 중국적 예외주의에 대항하는 가치관의 다툼이기 때문에 풀기 어려운 문제인 듯싶다.

 

중화민국을 고찰할수록 우리나라에 시사 하는 바가 참 많다. 가령 정치적 접근과 경제적 교류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남북관계에서도 응용할 점이 적잖다. 대만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은 결국 정치적 예속을 가져올 것이라는 지적도 충분히 수긍하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사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이 아님을 중화민국은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 언젠가 중화민국이 중국의 구심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를 상당 부분 수정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아시아 민주주의의 자존심을 우리가 이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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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魯肅)과 민주당

사회 2011. 4. 30. 03:20 |

중국 삼국시대의 노숙(魯肅)은 강동의 인재 가운데 원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던 돋보이는 영걸이었다. 229년 손권이 제위에 오르면서 노숙은 일찍이 자신이 제위에 오를 것이라 말했다면서 그의 형세를 보는 안목을 칭찬했다. 노숙은 손권을 처음 만났을 때 “한실은 다시 일어날 수 없고 조조는 쉽게 제거될 수 없다(漢室不可復興 曹操不可卒除)”라는 정세 파악 위에 유표의 형주를 빼앗고 장강 상류에 있는 익주를 점령할 것을 진언한다. 장강 유역을 차지해 제왕이라 일컬으며 천하 통일을 꾀해야 한다는 웅대한 책략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표가 죽었을 때도 노숙은 유비-조조 연합이 성립할 가능성을 계산하고 이를 막기 위해 손권-유비 연합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국 그는 적벽대전의 숨은 주역으로 활약했다. 유비 세력과의 동맹을 성사해 조조 세력을 견제하는데 진력한 것은 오늘날 한국 야당들의 연합정치를 연상하게 만든다. 민주당을 이익을 위해서라도 한 뼘의 땅도 없는 집단에게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분은 찾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진수의 『삼국지』 오서(吳書) 여몽전을 보면 손권이 노숙을 평하며 “한 가지 단점이 두 가지 장점을 손상하기 부족했다(不足以損其二長也)”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첫 번째 장점은 정사의 핵심과 제왕의 공업을 언급한 것이고, 두 번째 장점은 조조가 형주를 손에 넣고 강동으로 남하하려 할 때 결연히 조조와 맞설 것을 주장한 것이다. 한 가지 단점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줘서 형주를 차지하게 만든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단점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적벽대전 이후 형주의 영유권을 놓고 손권과 유비가 대립각을 세울 때도 노숙은 정족지세(鼎族之勢)를 위해서는 유비에게 양보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주유는 이런 양보에 반대했고, 양측의 세력을 비교할 때 손권이 형주를 탈환할 가능성이 좀 더 높아 보였다. 그럼에도 노숙은 자기들의 우월한 지위를 남용하지 않고 냉철하게 순망치한(脣亡齒寒)을 계산했다.
 

당시 손권은 강동의 6개 군과 10만 명의 병사가 있었다면, 유비는 1개 군에 2만 명의 병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나마 유표의 장남 유기의 1만 명을 합산한 숫자이고,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관우의 수군인 1만 명이 유비 진영 군세의 전부였다. 4․27 재보선에서 승리한 제1야당이 자신들의 우위를 얼마나 절제할지 두고 볼 일이다. 지금의 민주당과 작은 야당들 사이는 손권과 유비의 세력 차이보다 더 크기 때문에 절제하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노숙의 뒤를 이은 여몽은 유비와의 우호 관계를 정리할 것을 추진한다. 조조의 영토인 서주를 공략할 지를 고민하는 손권에게 관우가 있는 형주를 취할 것을 건의하기도 한다. 결국 촉과 오는 관우의 죽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양국의 국력을 상당 부분 소모하게 되었다. 물론 국력이 약했던 촉한이 먼저 망하고, 오는 삼국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했다. 조조와의 일전보다는 형주 경략을 통해 국력을 확충하려 했던 여몽의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숙이 기획했던 대로 오-촉 연대가 좀 더 굳건했다면 오나라는 좀 더 큰 꿈을 꿀 수 있지 않았을까? 천하통일이라는 게 말은 쉽지만 민초의 피와 땀으로 이룩하는 것이니 1800년 뒤의 사람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다. 앞으로의 야권 연대 과정에서 가장 많이 내어 놓아야 하면서도 가장 얻을 것이 많을 제1야당을 오나라로 억지로 비유해보자. 민주당에 노숙과 같은 마음이 좀 더 늘었으면 좋겠다.


여하간 손권은 평가를 이어가며 “주공(周公)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갖추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단점을 잊고 장점을 귀하게 여기면서 늘 등우(鄧禹)에 견주려고 했다(周公不求備於一人 故孤忘其短而貴其長 常以比方鄧禹也)”라고 말한다(등우는 후한(後漢)의 광무제를 도운 명신이다). 야권에서는 툭하면 인물난을 호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야당 지지자들은 서로의 약점에 천착하기보다 강점을 도두보려는 노력을 나눌 필요가 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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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16화에서 『대학』의 첫 구절을 가지고 시험문제를 푸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간 대학원에서 큰 배움의 의미를 별로 생각하지 못한 것 같은데 이런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생각이나마 끼적거려봅니다.
이 잡글을 언제나 저를 과대평가해주는 벗 홍군(http://sttora2.net)에게 헌정합니다.


<성균관 스캔들> 16화에서 이선준과 김윤식(김윤희)는 황감제(黃柑製)의 장원을 겨룹니다. 정조대왕은 “이 나라 관원의 백성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파자를 통해 밝히라. 단 파자의 원조는 예기 42편의 주희 해석본을 따른다”라는 문제를 출제합니다. 사실 장원전 문제로서는 난도가 현격히 떨어집니다. 『대학』 첫 구절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본문의 첫 장만 보면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가장 기초이기 때문에 가장 어려울 수는 있지만요. 아니면 너무 앞부분이라 시험이 안 나올 것 같아서 공부를 게을리 할 수도 있겠고요.^^;


선준은 “사대부는 백성을 교화하고, 새롭게 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라는 뜻으로 신민(新民)이라 답했고, 윤식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한다”라고 하며 친민(親民)이라 답했습니다. 주희 해석본을 따른다는 문제의 단서조항 때문에 선준이 장원을 차지합니다(이 단서조항은 정답 시비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지요). 드라마가 유가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개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부연설명이 부족해서 아쉬웠습니다. 마치 윤식이 공부를 덜해서 오답을 낸 것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극중 인물인 정약용 선생이 그 뜻 역시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첨언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대학』 첫 문장에 나오는 경문(經文)인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에서 親民을 놓고 주희 선생과 왕수인 선생은 격돌합니다.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의 원문에는 親民으로 되어 있으나 주희 선생는 『대학』에 주석을 달면서 자신의 스승인 정이(程頤) 선생을 이어 받아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의 新民이라 고쳐 풀었습니다. 경문을 해석해 놓은 『대학』 전문(傳文)의 구절들이 모두 親이 아닌 新으로 나와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주희 선생은 “신민이란 말은 전문을 살펴보면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新民云字 以傳文考之 則有據)”라고 말씀하십니다. 親과 新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집니다. 주희 선생은 “新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을 말하며, 스스로 명덕을 밝힌 후에는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쳐서 그들로 하여금 옛날에 물든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新者, 革其舊之謂也 言旣自明其明德 又當推以及人 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汚也)”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은 물론 백성을 뜻합니다. 新民은 사대부가 백성 위에서 일방적으로 교화한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상하 신분 관계를 엄격히 하는 효과를 유발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경북대 중문과 이세동 교수는 “위대한 지도자는 단순히 백성을 사랑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백성을 도덕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적극적 실천을 강조”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왕수인 선생은 親民을 그대로 쓸 것을 주장합니다. 백성을 친근하게 한다는 뜻의 親民은 사대부와 백성이 같은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며 이를 통해 교화뿐만 아니라 서로의 개성을 온전하게 길러주는 양육의 의미를 함께 보듬습니다. 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치양지론(致良知論)이 외재적 규범이나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의 주체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과 상통합니다.


양명의 『전습록』에서는 “親民이라고 말하면 가르친다는 의미와 양육한다는 의미를 겸하게 되지만, 新民이라고 한다면 한 쪽에 치우친 감이 있다(說親民便是兼敎養意 說新民便覺偏了)”라며 新民이 ‘가르친다’에 경도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또 “오직 밝은 덕을 밝히는 것만을 이야기하고 親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곧 도가와 불가와 비슷하게 된다(只說明明德 而不說親民 便似老佛)”라고 강조하며 백성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유가의 특질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유가적 현실주의는 백성의 곤고함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견해에 동감합니다.


정인보 선생은 『양명학연론』에서 주희는 마음 밖에서 구하는 것이고, 왕수인은 마음속에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대별합니다. 주희처럼 해석하면 마음을 밝히는 일이 따로 있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이 따로 있지만, 왕수인처럼 해석하면 백성을 친애함이 지극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밝히는 일도 이루지 못하는 셈이라고 역설합니다. 두 분의 입장 차이를 나름대로 잘 짚어주고 있습니다.


이황 선생은 <전습록논변>에서 新民이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新民은 자기가 배운 것을 미루어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 덕을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학문과 교육(學)’의 뜻으로 일관되게 연결되어 있으니, 백성들을 ‘기르고(養), 친근히 한다(親)’는 뜻과는 처음부터 상관이 없다(在新民者 言推己學以及民 使之亦新其德也 二者皆帶學字意 作一串說 與養之親之之意 初不相涉)”라고 반박합니다. 퇴계가 이를 통해 백성을 수동적인 교화의 객체로 국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옹호했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물론 앞서 살펴본 이세동 교수의 풀이를 좇으면 꼭 그렇게 볼 수만도 없겠지만요.


정제두 선생은 <대학설>에서 親民을 지지하면서 『대학』의 텍스트를 고찰해볼 때 親의 뜻으로 볼 수 있고, 新의 뜻이 아주 약간 등장하지만 근본과 말단의 형세일 뿐이라며 퇴계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 반해 한원진 선생은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에서 新은 敎를, 親은 養이라고 보고 이 두 가지 사이의 경중을 논하면서, “敎는 養을 수반할 수 있지만, 養은 敎를 반드시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則敎者必能養 而養者未必敎也)”라며 결론적으로 퇴계의 손을 들어줍니다.


정약용 선생은 <대학공의>에서 親民을 수용하면서도 “親과 新의 두 글자는 형상이 이미 서로 가깝고 뜻이 서로 통하니, 친애하는 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다(則新新二字 形旣相近 義有相通 親之者新之也)”라며 두 해석 모두 타당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양명이 대학 공부를 한 사람의 마음이 온 세상 사람들을 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면, 다산은 백성들끼리 서로 화목하며 친애하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다산은 “백성이 서로 친애하면 백성은 곧 새롭게 되는 것이니, 어찌 꼭 한 획도 변함이 없어야만 이에 문장의 앞뒤가 서로 맞게 된다는 것인가(百姓相親 其民乃新 豈必一畫無變 乃爲照應乎)”라고 말씀합니다. 저도 역시 親民과 新民이 이렇게 대립해야 하는지 헛갈립니다. 親民 없는 新民은 맹목적이고, 新民 없는 親民은 공허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親民과 新民을 따질 실익은 지도자가 백성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담담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 유학자인 이토 준사이가 新民을 지지한 것에 반해, 오규 소라이는 親民을 주창하는데 그 이유가 다소 이색적입니다. 즉 <대학해>에서 정이가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나라를 바꾸는 일인데, 『대학』은 수성하는 군주가 받드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殊不知新民者革命之事 而大學者守成之君所奉也)”라며 정이가 新民으로 바꾼 것을 비판합니다. 新民은 혁명의 뜻이므로 지도자가 친애하는 모범을 보여서 수성을 꾀하도록 한 『대학』은 親民으로 봐야한다는 독창적인 견해입니다. 親民이 보수적이고 新民이 진보적인 함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조대왕은 『홍재전서』 <경사강의(經史講義)>에서 이 문제에 대한 고심을 보여줍니다. “대개 정이와 주희가 경문을 바꾸어 고치고 단연코 의심하지 않은 것은 그 이유가 두 가지이다. 하나는 親民이라고 하는 것은 글 뜻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치가 없고 新民이라고 해야 논리가 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新民이라고 하는 것은 전문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근거가 있고 親民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蓋程朱之改易經文。斷然不疑者。其說有二。一則曰親民云者。以文義推之則無理。而彼乃曰有理。一則曰新民云者。以傳文考之則有據。而彼乃曰無據)”라고 주자학파의 논거를 요약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자학파의 논거인 전문에 등장하는 新民은 모두 스스로 새로워진다는 뜻이지, 지도자에 의해 새롭게 된다는 뜻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대학』 전문 제2장을 살펴보아야 이해가 되는 내용이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구일신(苟日新)의 新은 스스로 새로워지는 新이요, 작신민(作新民)의 新은 백성이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이요, 기명유신(其命維新)의 新은 천명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세 문장에서 말한 新은 모두 新民의 新이 아닌데 어디에 그것이 新民을 해석한 뜻이 있는가? 전문 중에서 경문에 나오는 新자의 바른 해석을 지적한다면 마땅히 어느 곳에서 볼 수 있겠는가?
苟日新之新。自新之新也。作新民之新。民之自新也。其命維新之新。天命之新也。三節所言之新。皆非新民之新。則烏在其釋新民之義也。若就一章之中。指摘其經文新字之正解。則當於何處見得耶。
- 『홍재전서』 제70권 경사강의(經史講義) 7 대학(大學) 4 


이처럼 정조대왕이나 다산이 親民에 우호적인 생각을 품었더라도 실제 시험의 답은 드라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양명의 주장은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조선에서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윤식이 오답 처리된 까닭입니다. 양명학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이 새삼 아쉽습니다.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저는 그래도 이 둘의 다름에 더 관심이 갑니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직관을 긍정하고 실천을 중시했습니다. 둘레의 현실에 무심하지 않았던, 천하의 인심을 자신의 마음처럼 여겼던 양명의 정신을 곱씹습니다. ‘새롭게 만드는 사람’과 ‘새롭게 바뀌는 사람’의 구별이 없어지는 세상은 민주주의의 이념과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과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윤식 유생님~ 떨어져서 하는 말인데, 정말 잘했어요! - [無棄]


<참고 문헌>
금장태, 『도와 덕』, 이끌리오, 2004, 192-199쪽.
김기현, 『대학 -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 사계절, 2002, 100-114쪽.
김미영 역, 『대학·중용』, 홍익출판사, 2005, 36-38쪽.
김학주 역, 『신완역 전습록』, 명문당, 2005.
정인재, 한정길 역, 『전습록 1~2』, 청계, 2001.
홍원식, 이상호 역, 『양명학연론』, 한국국학진흥원, 2002, 55-56쪽.
김세진, 「「전습록논변」을 통해서 본 양명심학과 퇴계리학」, 제2회 강화 양명학파 국제학술대회(한국양명학회, 2005.10), 405-436쪽.
안병걸, 「정조 어제조문의 경학관 -『경사강의』, 대학조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1), 395-424쪽.
임옥균, 「주자와 일본 고학파의 『대학』 해석」, 『동양철학연구』(동양철학연구회, 2010.2), 303-334쪽.
황갑연, 최진덕, 「조선성리학자의 양명학 비판 논거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제3회 하곡학 국제학술대회(한국양명학회, 2006.11), 229-251쪽.


이 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변명’ 시리즈 - “최도영을 위한 변명”(http://ikgu.com/entry/최도영을-위한-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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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런치만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2004, 갈라파고스)에는 비잔티움이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 교회통합 문제에 매달리는 대목이 나온다. 동서 기독교계는 각종 교리 해석과 실천 문제를 놓고 갈렸다. 속인(俗人) 사제의 혼인에 대해 논쟁했고, 성찬용 빵이 발효된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냐를 놓고도 다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권의 문제였다. 로마 주교(교황)의 위상을 놓고 양측은 물러설 수 없었다. 동방 정교회는 모든 주교는 기본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고, 로마 주교는 수석의 지위를 가질 뿐 최고의 수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반면에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주창하는 서방 교회는 이를 양보하지 않았다. 비잔티움의 요안네스 8세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동서 교회통합을 억지로 추진했다. 비잔티움의 많은 지식인들이 반발했고 시민들은 분열했다.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던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이 그토록 갈망하던 서방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화해가 아닌 꿍꿍이로 맺어진 통합이 얼마나 실속 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 밤 소피아 성당은 북적였다. 라틴인과 통합론자들이 더럽힌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없다는 독실한 그리스인들도 이날만은 소피아 성당에서 기도했다. 교회통합을 반대했던 사제들도 교회통합파와 함께 예배를 보았다. 글쓴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서 교회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사뭇 비장하게 전한다. 그러나 이건 미화된 묘사일 뿐 하룻밤의 일치로 이네들의 갈등을 다 메우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다만 외침의 공포로 말미암아 내부에서 티격태격할 동력을 잃었을 뿐이다. 제국의 최후를 함께 하는 유대감 정도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내든 까닭은 오늘날의 현실이 갑갑해서다. 입으로는 거대 여당을 견제하겠다는 이들이 서로 앙금을 남기는 모습이 안타깝다. 10·28 재보선에서 야권은 결국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이들에게는 소피아 성당에서의 맞잡음 정도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현 시국에서 여권의 위세를 오스만 제국의 압박에 빗대는 건 다소 무리가 있지만 말이다. 야권은 단일화 협상이 끝내 무산된 경기 안산 상록을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 일단 후보를 출마시킨 다음에 합치는 것은 너무 어려운 길임을 새삼 확인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행위자가 뛰어들 공산이 크다. 지역구 한 곳에서도 이렇게 진통을 겪는데 협상 주체가 더 늘어날 전국 단위의 선거에서 과연 얼마나 통합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의외의 쾌승을 거뒀다.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고민했던 유권자들이 사표를 방지하겠다는 선택을 내린 덕이 크다. 안산 상록을에서 후보 개인의 경쟁력에다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의 지원이 합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종인 후보가 15.57%의 득표에 그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수치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진보정당이 사표 심리의 풍파를 견뎌내고 얻어낼 수 있는 표의 정점에 가까워 보인다. 지역구에서 임종인 후보만한 인지도를 갖춘 데다 야3당이 일치단결할 수 있는 상황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경남 양산에서 민주당 송인배 후보가 한나라당 박희태 후보에게 4% 포인트 차이로 석패하며 선전한 것도 민주노동당 박승흡 후보를 1순위로 지지하던 유권자들이 힘을 실어준 덕분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지금의 작은 승리를 넘치게 기뻐할 필요는 없다. 정부 여당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 일당 독주 분위기에서 한나라당 대 비한나라당이 비등한 수준이 된 것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예의 사표 논쟁이 다시 불거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최근 저서에서 “과거의 민주연합, 지역연합을 뛰어넘는” 연합으로서 “민생을 중심으로 한 연합”을 제안했다. 민생연합을 통해 양당구도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은 현 시점에서 가장 유효적절한 비전 가운데 하나다. 이를 위해서는 때때로 민주당이 기득권을 내어놓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사표 심리가 결국 민주당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안일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제1야당이 선거연합을 통해 당력을 선택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면 한결 전략적으로 선거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현재의 정치 구도는 1990년에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이 비교적 풍요로운 곳간을 자랑하는 것은 영남의 고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3당 합당 당시 대구 경북이 여당 정서가 강했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활약하던 부산 경남은 야당 정서가 상당했다. 통일민주당이 평화민주당과 민주정의당의 중간쯤이라고 본다면, 야당 진영에서 김영삼 중심의 영남 민주계가 이탈하면서 형성된 구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18대 국회의원 지역구 의석수를 살펴보면 영남이 68석으로 호남, 충청, 강원, 제주 지역을 모두 합친 66석보다 많다. 여기다가 정부 여당이 세종시를 흔들면서 수도권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크게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다.


이와 같은 독점적 이윤의 발생은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사분오열된 야권이 거대 여당을 이길 생각은 포기하고 그에 ‘버금’가려는, 즉 2등이나 하는 경쟁에 함몰된다면 끔찍하다. 이제 힘을 모으면 ‘으뜸’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백낙청 선생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한국사회의 개혁을 위해 민족통일을 중시하는 자주파인 NL,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중시하는 평등파인 PD, 개량주의 시민운동 및 온건개혁세력인 BD(부르주아 민주주의)의 3자 결합을 제안했다. 특히 BD는 하나의 단일한 세력으로 보기 힘들만큼 다채로워 정리하기가 까다롭다. 그럼에도 이들이 모두 힘을 합치지 않으면 한나라당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지 우리는 생생히 지켜보는 중이다.


자기 의사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건 더욱 애통한 일이다. 야권 연대 논의 과정에서 가장 많이 내어 놓아야 하면서도 가장 얻을 것이 많을 민주당이 좀 더 분발하길 바란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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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마음에서 ‘대통령님’이라는 잉여적 표현을 썼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1.
지난 일주일 동안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를 가슴 깊이 슬퍼했다. 나는 국민장이 치러지는 일주일은 애도만 하고 싶었다. 그냥 일주일의 기간만 온전히 비통해할 시간을 넉넉히 확보한 것이 내가 우울증을 앓지 않고 견뎌낸 비결이었다. 정치적 구호는 내세우지 말고 그냥 애도만 하라는 자칭 비판언론들은 국민장 기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내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정치 공세쯤으로 폄하할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애도만 하고 있을 마음이 전혀 없다. 비정치적인 삶을 권하는 정치적 술수에 맞서 이 비극이 발생한 원인을 제거할 방도를 모색할 것이다.


일주일의 애도 기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분들을 이따금 만났을 때도 그 조급증이 야속했을지언정 그 내용은 경청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갓집에서 수학문제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슬픔을 다독이고 나면 역사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할 테니 내 무지몽매함을 너무 탓하지 않기로 했다. 혹자는 뜬금없이 넘치는 애도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애이불상(哀而不傷)하는 수준에서 슬퍼한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며칠만이라도 그냥 애달파하고 화내는 풍경을 지켜볼 여유를 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한이 덜 쌓이고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와 친분이 없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건 그저 아름답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라는 비극에 일말의 책임이 있을 자들이 사과 한마디 없는 상황에서 고인의 유지를 빙자해서 화해니 통합이니 늘어놓는 건 참 기만적인 일이다. 관용은 피해자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노 대통령님과 그 둘레 사람들 몇 명이 아니다. 추모객을 향해 관용을 권하는 건 너무 이르고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 박절하게 들렸다. 추모 기간마저 상식과 예의를 잃어버린 졸렬한 정부 여당의 행태에 원한을 품는다면 그건 그네들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셈이다. 설령 그것이 넘치는 의견이라고 해도 그런 여론을 겸허히 수렴하는 것이 지금 정권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의 자세일 것이다.


노 대통령님의 서거로 말미암은 사회적 분열이나 갈등을 염려한다면 그 감정의 골을 메울 행위자는 어디까지나 정부 여당의 힘센 분들이다.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준 국민들에게 악감정을 품지 말라거나 원한을 표출하지 말라고 외칠 권한은 그들에게는 없다. 정부가 못하는 일을 대신해주겠다면서 몇몇 언론들이 관용 장사에 나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떤 언론들은 자신의 허물이 없었는지 돌아보는 용기를 보여줬지만 관용을 내세우는 언론들은 노 대통령님에게 비난을 넘어 저주를 퍼붓던 지난날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용서를 청하는 집단이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한단 말인가.


2.
노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책임론에 시달리는 검찰은 수사는 정당했다고 강변했다. 검찰이 스스로 수사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허무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을 망각한 처사다.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천신일 회장의 구속영장마저 기각되면서 검찰의 항변은 더욱 빛을 바랬다. 천 회장이 반드시 구속이 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부실하고 조급한 수사를 했다는 방증으로 이해해야 한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이번 사건 수사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존중해 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라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그나마 국민에게 사죄한 기품에 고개를 숙이지만 이번 일은 책임은 검찰총장이 모두 지고 갈 사안은 아니다.


노 대통령님의 시신이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되는 상황을 생중계할 때 한 시민이 “이명박 ××× 복수할 거야 이 ×××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TV 생중계로 나갔다.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할 때 행사장은 물론 행사장 밖의 시민들이 야유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입에 달면서도 줄곧 괴상하게 실천했던 청와대가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란 쉽지 않을 듯싶다. 저분들에게 용서나 사죄를 구걸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1991년 4월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 제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과 다르게 깊이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므로 인간 양심의 왜곡과 굴절이자 이중인격 형성의 강요라고 정의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89헌마160). 반성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정이다.


헌재의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유독 방송사에만 강요하고 있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는 위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고, 헌재의 결정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 약자인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만든다는 비판도 들린다. 여하간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자유는 선하고 올바른 판단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덜 선하고 덜 올바른 내심마저 보장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고갱이다. 양심에 거슬려 사과를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양심을 탑재하라며 구박한다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행동이다. 물론 사인과 공인은 차이가 있다. 굳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면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을 향해야 요구해야 한다. 공인들의 양심이 덜 소중하다는 건 아니지만 명예나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나 정서를 모두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잘못이 있어 사과하라면 사과할 수 있지만 잘못이 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까 사과하고 넘어가자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노 대통령님은 결국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정부의 사과 표명은 그네들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믿는다.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를 칭찬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잘못이 없다고 믿거나 잘못이 뭔지 모르는 분들에게 사과를 청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과에 미련이 남는 것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존중하면서 얻어낼 것이 그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3.
노 대통령님이 서거하시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나는 때 아닌 산수놀이에 빠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이 신영철 대법관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자정 노력을 지켜보는 것이 순리이겠으나 그와 더불어 입법부가 우회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고충을 이해하고 반겼다. 이것이 삼권 분립의 대의에 부합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탄핵소추안 발의조차 여의치 않아 보여서 서글펐다.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친박연대 3명의 의원직 상실로 재적의원 수가 296명으로 줄어든 지금 99명이 동의해야 하는 셈이다.


민주당 84석과 민주노동당 5석, 창조한국당 3석, 진보신당 1석이 모두 동참해도 한참 모자란다. 친박연대 5석과 호남 무소속 4석이 동조해야만 간신히 발의할 수 있는 실정이다. 자유선진당과 한나라당의 일부의 호응을 기대하려는 계산 자체가 너무 씁쓸했다. 소수 야당들이 사안에 따라 힘을 모으는 일이야 나쁠 것은 없지만 이렇게 구차하게 애를 써야 한다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의심스러운 현행 선거구제의 탓인지 몰라도 저 거대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들이 부재하다는 형국이 너무 아슬아슬하다. 그렇다고 여당의 절제나 양식을 기다리기도 어렵다. 신 대법관을 감싸고도는 한나라당의 태도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바라는 충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참담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물기 어린 눈으로 보냈지만 금요일 영결식 장을 나서던 운구차를 보며 살아생전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도 없는 그 분을 보내려니 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이 눈물들은 내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눈물을 닦고 다시금 산수놀이를 하려니 화가 치밀었다. 상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어 보여서다 모두들 미래를 말하는데 나는 지난 2004년 총선 당시로 퇴행하고 말았다. 단순히 열린우리당의 의회권력 쟁취에 집착한다고 비판받던 그 시기 즈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집권이나 승리 이후는 고심하지 않고 집권과 승리 자체를 열망할까봐 부끄럽다.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던 분들이 요즘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물론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반대하면서 이명박 정부를 반대하는 행위는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다 똑같은 놈들’ 정도로 여기시고 노무현도 했는데 이명박이라고 못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셨는지, 아니면 어쨌든 국민 다수의 뜻이니 차마 민주주의 후퇴 운운할 수는 없어서 그런 말씀들을 하신 건지 묻고 싶다. 나는 지금 지난날 노무현에게 과도한 책임을 물었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만큼 이명박의 난정을 바로잡을 세력의 수가 너무 적어 보이는 안타까움을 토로할 따름이다. 이명박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큰 행위자가 박근혜인 현실이 기가 막혀서다.


4.
서거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관계로 지금이야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지지율을 나란히 하고 있지만 조정기간이 도래할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 조정기간을 거쳐도 한나라당 지지율의 팔할 이상을 유지한다면 2010년 지방선거에서부터 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이어질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한바탕 겨뤄볼만 한 상황이 조성된다. 물론 미지의 카드이자 희망의 카드인 진보정당이 제자리를 지켜주고 계시지만 지방선거와 총선거에서의 선전은 기대해도 대선까지 도모한다는 건 진보정당 지지자 본인들도 믿지 않으실 게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지 않고 명줄이 늘어난 제1야당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표론 따위의 논쟁이 다시 나올까봐 걱정이다.


노 대통령님의 서거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을 치유하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온다. 내 소견으로는 열린우리당 지지층과 옛 민주당 지지층이라고 표현해야 더 적절하다. 자기들이 선출한 후보를 흔들면서 국민을 농락했던 분당 전의 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열린우리당은 지지했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지러운 창당놀음의 당연한 결과로 2007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결국 민주당 간판을 걸었지만 과연 이네들이 화학적 결합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민주당은 친노 세력을 껴안겠다는 속셈이지만 누구의 앙금이 더 남았든 감정의 골이 커 보인다.


뉴민주당 플랜을 추진하며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거리두기에 열중하던 민주당이 너무 표변하는 모습이 볼썽사납지만 두고 볼 참이다. 참여정부의 긍정적 유산을 건져 올리는 작업을 하겠다며 분주하지만 한나라당과 또렷이 차별화할 묘책을 찾아낼 결기를 보여줄지 미지수다. 한편으로는 친노 세력의 신당 이야기도 들리지만 지역적 기반이 없는 신당이라면 자유선진당 만큼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공산이 크다. 수도권이야 본래 어려운 싸움이고, 영남은 거의 가능성이 없으니 생환 확률이 별로 높지 않으므로 친노 신당의 미래는 바보 노무현의 험난한 좌절을 되풀이하고 막을 내리기 십상이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한 정당 전체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경우는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했던 꼬마 민주당 정도가 기억나는데 거대 여당을 눈앞에 두고 이 모험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민주당과 2등 경쟁에 함몰될 신당이라면 신중해야 한다. 굳이 신당이 아니더라도 친노파의 존속은 유권자들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열린우리당에 몸담았던 분들이나 친노파가 잘났다고 옹호하려는 뜻이 아니다. 당장 진보정당으로 달려가기를 머뭇거리는 상당수 국민이 정치 냉소자가 되어 버리는 현상을 막고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을 안도할 따름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반동의 징후라 하시겠지만 이 체제가 재생산되는 사태야말로 반동이다.


5.
노 대통령님이 퇴임하실 때 참여정부를 두고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는 견해에 동감했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유산을 남겼는지도 차차 밝혀지겠지만, 긍정적 유산 또한 드러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핑계를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때 비로소 참여정부를 차분하게 평가할 토대가 마련되리라 내다봤다. 하지만 노무현을 제물로 한 희생제의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미뤄두고 진행된 과정은 너무 야만적이었다. 우리들은 그 매질이 우리 스스로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욕보여서 이룩할 법치주의라면 너무 초라하다. 온 사회가 공인의 윤리적 책임, 법적 책임에 대해 성토를 했던 그 마음은 잘 간직해보자.


노 대통령님께서는 대통령 재임시절에 당신을 진보라고 표현하신 적이 많았고 생애 마지막까지도 진보주의를 궁리하셨다고 전한다. 한국적 맥락에서는 노무현이 얼마든지 진보로 분류될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진보와 보수의 중간 개념인 개혁세력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노 대통령님께서 한국 보수주의의 한 극점을 보여주신 분이라 좋아했다. 추모 열기를 ‘인간’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에 국한하기도 하지만 나는 ‘정치인’ 노무현은 한국 보수주의의 업그레이드를 이뤄낸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칭하는 분들이 노무현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다니 참 곤혹스럽다.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분을 가까운 시일 내에 찾지 못할 것 같아서 멍멍하다. 갖은 미움을 받았으나 현실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만큼 대중성과 진솔성, 원칙과 가치를 제시한 교양 있는 지도자는 너무 드물었다. 그 대중성은 굳건하지 못했고, 진솔성은 계산된 것이었으며, 원칙은 분열적이었고, 가치는 흐릿했다는 험담이 대개 온당하다고 수긍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이 추모 열기는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배어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노무현’이나 ‘더 나은 노무현’이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이랄까.


그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권좌에서 쌓은 허물을 내려와서 천천히 갚아나가길 바랐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일꾼이자 나의 대표가 세월의 손길을 마주잡고 가는 광경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해 가슴이 저민다. 그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그 분을 서서히 잊어감으로써 얻을 평화를 모두가 잃어버렸다. 이래저래 실망하고 서운했지만 그런 감정보다 한두 뼘쯤은 더 좋아하고 아꼈던 분에게 작별을 고한다. 죽은 뒤에 받는 복덕[冥福]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치열하게 살았던 당신의 삶이 살아 계실 때 상당 부분 보상받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바보 노무현, 고마웠습니다. - [無棄]


추신 - 노제 때 잠깐 개방됐다 다시 봉쇄됐던 서울광장의 차벽이 4일 새벽 철수했다고 한다. 아예 광장 주변에 성벽을 세우고 쪽문을 내는 게 좋을 듯싶다. 주인인 시민이 쓸 광장을 머슴인 자들이 멋대로 막았다 열었다 하는 꼴을 더는 보기 싫어서다. 며칠 전 헌법재판소가 옥외집회 개최 때 경찰에 미리 신고토록 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일정한 신고절차만 밟으면 일반적ㆍ원칙적으로 옥외집회 및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으므로, 사전 신고제도는 헌법상 사전허가 금지에 반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헌재의 결정에 아쉬운 점이 있지만 합헌의 논거로 들었던 내용이나마 지켜지는 나라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법과 원칙은 이 정권의 입맛으로 가름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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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이후

사회 2009. 4. 23. 02:59 |

(지난 4월 8일에 썼던 ‘친노 이후를 고민할 때’라는 잡글을 조금 수정 보완했습니다. 한 시절 저의 대표자이자 일꾼이었던 노무현 대통령님이 처참한 모습의 패장이 되어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침통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을 버려주기를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다가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라고 썼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그를 서서히 잊어감으로써 얻는 평화를 잃었다. 열린우리당이 맥없이 무너진 후에 참여정부의 계승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기에 참여정부의 지지자들은 노무현 개인을 향한 편애에 의지한 측면이 컸고 이번 사건에 더욱 허탈감을 느낄 듯싶다. 국민을 향한 그의 사죄가 진솔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면 좋겠다. 노 전 대통령에게 보장된 법적 방어권은 허위사실을 막는 선에서 보장돼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자기 잘못을 외면하거나,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마지막 기품을 건사하길 기원한다. ‘바보 노무현’의 잔영이나마 더듬고 싶다.


노무현의 재임 시절 그의 작은 성취마저 용납하지 못하던 이들이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깨끗한 정치를 들먹인다. 개중에는 지난 대선 때 도덕보다는 능력이라고 목청을 높이던 분들이 적잖을 게다. 그런 말씀을 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은 무능한데다 부패하기까지 했으니 더 구박받아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그 말을 하는 스스로도 얼마나 믿을지 궁금하다. 설령 노무현에게 험담을 할 만큼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라도 노무현을 향해 얼마든지 돌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져야할 짐이기 때문이다. 측근과 가족의 허물은 결국 노 전 대통령의 허물이기도 하다. 그 허물에게 쏟아지는 꾸지람을 담담히 감내해야 한다. 참여정부 민정 기능의 부실은 너무 뼈아픈 실책이다.


현 정권 인사를 향한 수사 강도와 견주어 볼 때 균형이 맞지 않다는 볼멘소리는 마음으로 삭혀야 한다. 물론 이 정부 들어 검찰의 신뢰는 많이 실추된 상태다. 아무쪼록 여야를 가리지 말고 공정하게 수사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죄가 있으면 벌을 받으면 그만이다. 일각에서는 편파, 표적, 기획수사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검찰은 이런 우려의 시선이 존재함을 헤아려야 한다. 지은 죄 만큼의 벌을 골고루 내리지 못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셈이다. 검찰이 할 일은 죄 만큼의 벌을 공평하게 부과하는 것이다. 물러난 권력에는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는 칼집이나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한다면 지금의 비극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피의사실을 무차별적으로 공표하면서 과거 정부의 흠집을 대서특필하는 데만 온 정신이 팔린 몇몇 언론들도 이 비극에 동참하지 말길 부탁한다.


이번 사안은 부정한 돈을 받은 이들이 각자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듯싶다. 정치적 실체로서 존재하던 ‘참여정부 계승세력’ 혹은 ‘친노 세력’라고 불리던 자들이 몰락한 후의 한국 정치의 지형도를 그려볼 때가 다가옴이 느껴진다. 친노파라 불리는 이들은 참여정부가 표상했던 정신을 창조적으로 이어가기보다는 노 대통령과의 연줄로 권세를 누린 사람들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담담하게 참여정부와 명운을 함께 하려는 몸짓이 있었다면 이렇게 마냥 동네북이 되는 신세는 면했을지도 모른다. 친노파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줬던 국민들의 정성을 생각했다면 오늘날의 참담한 꼴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누구를 탓하기 전에 자기 머리부터 칠 일이다.


정권 차원의 음모가 있든 없든 간에 이번 일로 말미암아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가슴에는 멍이 들었다. 정권 차원의 부패까지는 못 되고 몇몇 측근들의 난행이라고 해도 그렇다. 한나라당을 향해 도덕적 권위를 내세운 이들이 그 상대적 우위를 반납하고 나면 너무 초라하다. 친노 세력은 차떼기를 하고도 떵떵거릴 수 있는 저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깨끗한 정치는 참여정부의 핵심 가치 가운데 하나였다. 그 가치를 내걸고 목에 힘주던 이들이라면 좀 더 사려 깊은 처신을 했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4·19혁명 49주년 기념식에서 “선진화는 절대로 부정부패와 함께 갈 수 없다”라는 기념사를 남기는 빌미를 제공하다니 치욕스럽다. 저들이 유능을 참칭하더니 이제 청렴마저 훔쳐가려고 한다. 물론 유능이나 청렴은 특정인이 독점할 수 있는 덕목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때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노 전 대통령을 가엾기 여긴다는 건 민망한 일이지만 자나 깨나 노무현의 실패만을 꿈꾸던 이들의 열망을 깨트리지 못해 애석하다. 친노파와 명랑하게 이별할 준비를 하다가도 개혁세력의 한 축이 무너진 자리를 대체할 행위자가 당장 채워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친노의 중심인 영남 개혁세력은 한국 정치에서 소중한 존재다. 도매금으로 넘기기보다는 어지간하면 존속시켜야 할 실체다. 친노 세력에게 권력을 쥐어주었던 국민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서 우아하게 떠날 준비를 해두는 게 좋겠다.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유린하는 세력에 맞설 최후의 보루 몇 개쯤은 지켜내길 바란다. 별다른 충원 세력도 없는데 징검다리부터 치우려니 마음이 스산하다. 이 과정에서 퇴행적 지역주의가 독버섯처럼 돋아날 조짐이 보인다.


만약 친노가 붕괴하고 나면 유권자들은 하나의 선택지를 잃어버린다. 진보정당으로 달려가기를 머뭇거리는 상당수 국민들이 정치 냉소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현 정치 구도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할 정당이 없다고 여겨 적극적 기권층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사분오열된 야권이 거대 여당을 이길 생각은 포기하고 그에 버금가려는, 즉 2등이나 하는 경쟁에 함몰된다면 끔찍하다. 야권에게 필요한 건 ‘절반의 패배주의’다. 지금 이 상태로는 필패한다는 생각을 늘 품어야 한다. 현 정치 지형을 엄정히 성찰하고 시운에 따라 힘을 합치고 양보하면서 지지 않기 위한 모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간신히 으뜸이 될 수 있다.


이 뒤숭숭한 와중에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를 훼철하는 작업에 더욱 열을 올릴 공산이 크다. 자기네는 유능한데다 깨끗하다는 허황된 자부심을 품고 말이다. 융단폭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노무현 시대지만 그 잿더미 속에서도 긍정적 유산을 몇 개 건져 올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긍정적 유산을 부수려는 시도를 얼마나 저지할 수 있을까. 도둑고양이처럼 엄습한 친노와의 작별은 곤혹스럽다. 때 이른 친노의 퇴장은 한국 정치에 암운을 드리운다. “굿바이 노무현!”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모든 것을 노무현 탓으로 돌려 그만 수렁에 던지고 나면 우리는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아닐 것 같다. - [無棄]


여담 - 노무현의 첫 번째 고백이 나왔던 시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끝내 몸통이었다니>라는 제목의 4월 8일자 세계일보 사설은 노무현에 대한 저주라고 이를 만하다. 나는 세계일보의 독자는 아니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적 지면을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것인지 치가 떨리고 분통이 터진다(이 사설의 첫 구절을 그대로 따왔다). 나는 그저 이 사설의 구절들을 기억했다가 앞으로 이와 같은 불행한 사건이 터질 때 세계일보 사설이 뭐라고 쓸지 비교해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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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정동영!

사회 2009. 4. 11. 04:10 |

3월 24일에 썼던 <정동영과 617만 표>라는 잡글인데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전주 덕진 국회의원 재선거 무소속 출마 선언을 접하고 글 후반부에 바뀐 사정을 반영했습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을 수 있어야 대장부다(縣崖撒手丈夫兒, 현애살수장부아)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패배했을 때 정동영 당의장이 사퇴 회견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아무런 미련 없이 깨끗하게 물러나겠다는 비유다. 나는 이 회견을 접하며 그가 이 말의 정신을 새긴다면 다시 돌아오더라도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정동영씨는 7·26 재보선 정국에서 서울 성북을 출마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고사했다. 혹자는 질 것이 뻔한 선거에서 몸을 사렸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 때의 삼감이 크게 험담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2007년 정동영씨는 원내 제1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정동영 후보의 재능이 아무리 커다란들 그가 대선 과정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대선 참패 후에 정동영 후보와 그 둘레 사람들이 자책하는 모습을 도무지 볼 수 없었다. 이명박 후보에게 530만 표 차이로 졌지만 그에게 소중한 한 표를 건넨 617만 명의 지지자가 존재했다. 그들을 향해 진솔하게 사죄할 기회를 놓친 듯싶어 안타깝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독특한 관행 가운데 하나가 패자의 승복 연설(concession speech)이다. 패자의 연설이 먼저 있고 나서 비로소 승자가 연설하는 재미난 문화다. 1860년 링컨에게 패배한 스티븐 더글러스가 “당파심이 애국심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Partisan feeling must yield to patriotism)”라고 말한 것을 시초로 1896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때부터는 패배를 인정하는 전보를 보냈고, 1952년 스티븐슨 때부터는 TV 방영이 관례로 굳어졌다고 한다.


박빙의 승부와 법정 공방을 벌였던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고통스런 패배를 기품 있는 승복으로 승화시킨 명문을 직접 작성했다. 가슴 아픈 패배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갈등을 치유하자고 읊조리는 패자들의 연설은 승자의 환희보다 좀 더 기억에 남는다. 지고 난 다음날 아침이 괴로울 때 고어의 연설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때마다 우리에게도 이런 대표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기 일쑤다.


이듬해 펼쳐진 총선에서 정동영씨가 또 다시 쓴잔을 들이킨 것도 실패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처럼 난 자리일 때 애틋함을 남기지 못했다면 대중 정치인으로서 큰 실책이다. 국민들은 정동영씨가 머물던 소중함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고, 그의 빈자리를 크게 느낄 짬도 없었다. 절벽 위를 오르려는 안간힘만 느꼈다면 실례일까.


고어는 “나는 연방대법원 결정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인다. 앞으로 미국인의 단합과 민주주의의 역량 강화를 위해 양보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결승선에 도달하기 전에는 무수한 논쟁이 오가지만 일단 결과가 나오면 승자나 패자나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화합의 정신”이며, “나를 지지해준 많은 분들이 실망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나도 실망했다. 하지만 우리의 실망감은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극복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전투가 끝난 지금 문득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아무리 패배의 상처가 쓰라리더라도 패배 역시 승리만큼이나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영광을 가져오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no matter how hard the loss, defeat might serve as well as victory to shape the soul and let the glory out)”라는 대목에 이르면 가슴이 짠하다. 이명박 후보를 차마 찍지 못했던 유권자들 중에 가장 큰 수의 지지를 받았던 정동영 후보가 상심에 빠진 유권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정동영씨가 오는 4·29 재보선에서 전주 덕진 재선거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은 끝내 정동영씨의 공천을 거부함으로써 제1야당의 품위를 가까스로 건사했다.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려는 선거 구도를 유지하면서 지역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민주당으로서는 밑천이 동난 정동영이라는 카드를 조기에 버림으로써 차기 대선을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는 전화위복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정동영씨에게 명운을 걸어야 하는 정당이라면 사실 수권정당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정동영씨가 그저 금배지가 욕심이 나서 부랴부랴 뛰어든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선택이 사려 깊지 못했음은 또렷하다. 충분히 예측 가능했을 당내 분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돌파하겠다는 그의 의지 앞에 어안이 벙벙하다. 자신을 대선 후보로 올려주었던 정당을 박차고 나가면서 그 정당에 곧 돌아오겠다고 읊조리는 광경은 황당하다. 그가 금배지를 손에 쥐기도 전에 금빛은 바랬다. 녹이 슬었다. 호남당을 극복하려는 민주당의 안간힘에 전주 유권자들이 적잖이 화답한다면 이 난장판 속에서도 얻는 바가 있으리라.


정동영씨가 몸 담았던 정당이 비교적 힘이 셌을 때도 그는 한나라당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하물며 지금처럼 힘의 세기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그가 원내에 진입한들 무슨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특유의 비장한 어조로 호소하지만 별 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자신의 귀환을 환영하는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지자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한다면 비극이다. 당신만큼 아파했을 617만 명의 사표를 두 번 죽이는 셈이다.


지난 4월 8일 치러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범야권이 음으로 양으로 지지한 김상곤 후보가 당선됐다. 교육감은 정당 공천과는 관계없지만 향후 선거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앞으로의 각종 선거도 이런 단일화 및 선거연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거대 여당을 이기기 난망할 것이다. 그런 판단 아래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범야권은 모두 다 절반의 패배주의를 생활화할 필요가 있다. 현 정치 지형을 엄정히 성찰하고 시운에 따라 힘을 합치고 양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그나마 몸집이 큰 행위자인 민주당은 어떤 식으로는 내홍을 수습해야 한다.


정동영씨의 그릇이 그만큼인 것을 너무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 재보선의 눈이 온통 정동영씨에게 쏠린 것은 비생산적이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선보였던 가혹하고 어지러운 통치를 심판하려는 여론이 묻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동영씨에게 보내는 과도한 관심을 거둘 때다. 그저 똑똑하고 말솜씨 좋은 아저씨가 고향에서 인기를 누리는 정다운 모습 정도로 받아들이자. 명망 있는 야당 지도자가 그 전국적 위치를 벗어던지고 지역의 일꾼으로 헌신하겠다니 어찌 아니 아름다운가.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자. 굿바이 정동영!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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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때는 말없이

사회 2009. 3. 24. 03:44 |

어느 해라고 덜했겠냐만 내가 기억하는 2006년에는 추한 광경이 많이 벌어졌다. 한나라당은 7·26 재보선 서울 송파갑 공천에 기자 성 접대와 세금 체납 전력이 있는 정인봉씨를 공천했다가 취소했다. 부랴부랴 새로 공천한 사람은 놀랍게도 보궐선거의 원인을 제공했던 맹형규 전 의원이었다. 송파갑 보선은 맹형규씨가 그해 1월 서울시장 경선에 참가할 때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로 사퇴해 치러졌다. 비례대표 의원이 사퇴해 지역구 의원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의원직을 자진 사퇴한 후보자가 그 자리에 다시 출마한다는 것이 너무 볼썽사나웠다. 아무리 누구를 앉혀놔도 당선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어찌 이렇게 일말의 염치가 없을지 처량했다. 이번에 코레일 사장이 된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성북을 공천을 신청한 것도 두고두고 기억할 사건이다.


2006년 3월 여기자 성추행 사건으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최연희 의원은 사건 발생한지 4개월 만에 스리슬쩍 공개행보를 재개했다. 2004년 탄핵 때 의사봉을 잡았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장직이 마지막 공직이라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2006년 6월 한나라당에 복당해 상임고문을 맡기도 했다. 부인이 4억 원의 공천헌금 수수 혐의로 구속되자 “조만간 정치적 거취를 밝히겠다”고 말했던 김덕룡 의원은 “대선에서 할 일이 있다”며 말을 바꿨다. 한번뿐인 인생인데 저렇게 구차하지 못해 안달인 모습을 보니 내 자신도 두렵다. 나는 얼마만큼 멈춰야 할 때를 잘 잡아낼 수 있을까.


남명 조식이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 하나에 달려있을 따름이다(士君子大節 唯在出處一事而已)”라고 강조하셨듯이 공인일수록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잘 헤아려야 한다. 기왕이면 자유의사로 이뤄지고, 가능하면 시대정신에 대한 승복이어야 가치가 빛난다. 은퇴를 선언했던 정치인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그리 우아하지 못하다. 2004년 17대 총선 때 한나라당 텃밭인 서울 강남을 지역구를 스스로 포기해 아름다운 퇴장이라 칭송 받던 오세훈 전 의원이 5·31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로 뛰어들어 당선됐다. 달랑 4년만 금배지 맛을 본 초선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해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던 그다. 서울 강남 을에서 쉽게 재선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달콤한 유혹을 저버린 그에게 설레지 않았을 사람이 누가 있었으랴.


당시에도 이미 서울시장 출마설이 돌았으나 그는 시종일관 부인했다. 그러나 역시 권세가 좋긴 좋은 모양인지 몇 번의 권유를 마다하지 못하고 그는 헐레벌떡 돌아왔다. 오세훈씨는 “(불출마 선언으로) 호감을 얻었지만 이를 밑천으로 정치적 도약을 노릴 만큼 미련치 않다”던 자신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그는 서서히 잊혀지기보다 승리자의 영광을 택했다. 그가 환멸을 느끼며 떠났던 정치판이 많이 바뀌었다기보다 그가 더 바뀐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한나라당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네들이 들어야 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하기야 오세훈 시장 탓만 할 건 아니다. 정치인이 은퇴를 번복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에서 패한 다음날 정권타도 투쟁을 선언하더니 1990년 전격적으로 3당 합당을 해버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2년 대선을 패배하고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가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대선 때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씨는 불복하고 대선에 출마했고, 2002년 민주당 후보 경선 때도 음모론을 제기하며 탈당하는 등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200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을 탈당해 대선에 출마했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도 있다. 그가 요즘 간간이 보여주는 총기에도 불구하고 울림이 반감되는 이유가 지난날의 말 바꿈과 관련이 있을 게다.


2004년 총선 당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10선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비례대표 1번을 받아들던 김종필씨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서산(西山)을 붉게 물들이며 떠나고 싶다”라는 노욕에 빠졌지만 그리 아름답지 못한 저녁놀이었다. 민망하게도 그의 아호는 운정(雲庭), 구름의 자유로움을 좋아해 지었다고 한다. “멈출 곳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止 可以不殆)”라고 할 때 知止는 소극적 개념이 아닌 적극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갈 시간이다(it's time for me to go)”라고 연설을 마무리하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승복 연설에 군침만 흘릴 필요는 없다. 드물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2006년 지방선거 때 당선 영순위로 꼽히던 이원종 충북지사는 3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하고 소속 정당을 탈당했다. “적절한 시기에 명예로운 퇴장은 오랜 소망이었다”며 “공을 이뤘으면 몸은 떠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는 노자의 ‘공수신퇴천지도(功遂身退天之道)’라는 문구를 꺼내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은퇴하면 그림자를 남기지 말아야 하는 법”이라는 그 마음자리를 좇고 싶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은 퇴임 기자회견에서 먼저 사의를 표명했느냐는 질문에 “떠날 때는 말없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제 때 떠난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해도 좋으리라. 자신의 아름다운 퇴장을 자랑스레 말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57세의 이른 나이에 정계를 은퇴하며 “떠나야 할 때를 넘겨 머물기보다 남들이 머물라 할 때 떠나겠다”라고 말한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의 뒷모습은 얼마나 위풍당당했겠는가. 나는 공인들에게 얼른 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게 아니다. 돌아오는 자들의 식언(食言) 릴레이가 식상하다는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떠날 때는 말없이’의 미덕보다는 ‘돌아올 때는 말없이’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돌아오는 사람은 이어지겠지만 그 멋쩍음을 미사여구로 분칠하지 말기 바란다. 물러났을 때의 그 견결한 마음을 실천하려면 말을 줄이고 더 많이 노력하느라 바쁘실 테니 말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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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저는 14세기 여말선초 이전의 한국사를 주로 관심 있게 탐구하고 있어서 근현대사는 잘 모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권고안을 놓고 다툼이 한창이다. 2010년에 제7차 교육과정이 끝나고 2011년부터 근현대사 과목은 고등학교 1학년 공통 필수과목인 역사 과목에 포함된다. 그런데도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문제를 놓고 건곤일척을 벌어지는 것이 다소 황당하다. 물론 잘못된 내용을 한시라도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이 맞지만 교육의 문제가 정치적 논쟁으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지난 11월 말에 이 논쟁의 한 복판에 서있으신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이하 경칭 생략).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고찰하고 문명의 의미를 조망하는 묵직한 시간이었다.


박 교수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는 식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어서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는 물질적 번영뿐 아니라 문명사적 가치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원주의 사회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펀더멘털(fundamental)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는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원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이 차이 난다면 정치공동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형식의 정통성 혹은 정체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국가의 형성이 잘 되었는지 여부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고 선을 그었다.


결국 그의 논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가치에 대해서는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제헌헌법의 정신인 자유, 인권,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논쟁을 벌일 토대가 마련된다는 논리다. 그는 금성교과서 사례를 들며 남북합작세력을 조명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불인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원죄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1955년 반둥회의를 소개한 의도가 광복 후 우리가 나아갈 길이 제3세계였다는 함의를 읽었다고 술회했다.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라는 식의 서술은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6·25 전쟁을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주의가 방어한 문명사적 의미를 누락하는 몰가치적 서술로 귀결되었다는 그의 주장이 매서웠다.


박 교수는 남북 간의 차이를 문화의 차이로 접근하려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역설했다. 문화의 차이는 인간의 존엄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남북의 차이는 문명과 야만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출신 성분에 따라 갖가지 차별을 받는 북한 사회에 대해 침묵하는 교과서를 언급했다. 전체주의 사회에는 사적 영역이 없는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며 비판했다. 또한 북한의 농지개혁은 사적 소유권 없는 집단농장화이며 소유권이 분배된 것이 아니라 경작권에 지나지 않음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은 것도 꼬집었다. 남한의 ‘유상매수 유상분배’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두고 객관적으로 비교하지 못했다며 질타했다. 그는 문명사적 가치와 함께 가야 건강한 민족주의이며 남한 지도자의 독재를 비판하듯이 북한 전체주의를 비판해야만 건강한 국가정체성, 시민의식, 비판정신을 함양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영화 <300>에 나오는 테르모필레 전투를 예로 들며 문명과 야만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묘사했다. 박 교수는 “인간은 인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라고 여긴 것이 문명의 징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시민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테르모필레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에게 전령을 보내 항복을 종용한다. 별 소득 없이 돌아온 전령은 레오니다스와 병사들이 마주보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스파르타군을 규율 없는 오합지졸이라고 보고했다. 감히 왕을 빤히 쳐다보는 자들에게 무슨 기율이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결사항전을 하자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에서 망명을 온 데마라토스에게 자문을 구한다. 데마라토스는 “스파르타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법(노모스)”이라고 말한다. 박 교수가 다른 글에서 그 발언을 좀 더 길게 인용하신 것을 발췌해봤다.


“그들은 물론 자유스럽습니다만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법(노모스)이라는 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정도는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합니다. 여하튼 그들은 이 왕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데, 이 왕이 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즉 어떠한 대군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말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적을 제압하든지 자신이 죽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박 교수가 헤로도토스의 『역사』 한 토막을 길게 인용한 것은 페르시아라는 야만에 대항했던 스파르타처럼 문명을 옹호했던 대한민국의 역사가 볼만한 것이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나는 북한이 야만적인 사회라는데 기꺼이 동의한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처럼 남북한을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북쪽 나라인 발해를 평가하기 위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쪽 나라인 신라와의 차이가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야만을 강조하면 할수록 야만국가는 제외하고 문명국가인 우리만이 선진화를 이룩하자는 식으로 나아갈 까봐 걱정이다. 문명 대 야만의 관점으로만 보면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이 평화적인 방법보다는 요란한 파열음을 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은 야만국가임이 또렷하지만 그것을 상술하는 실익이 어느 정도일지도 따져볼 문제다. 북한의 인권문제와 남북 화해협력 사이의 균형을 찾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만.


여담이지만 나는 북한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알리는데 열중하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문명국을 자처하기에 너무 초라해지고 있는 현실에 더 주목하는 중이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현상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당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인터넷 댓글에 적잖이 공감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푸념을 했을까 싶다. 야만에 대한 경계와 문명에 대한 열망이 따로 놀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긴밀하게 잇닿는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조화롭게 발전하는 것이 문명의 시금석이라고 한다면 한국 사회는 얼마나 떳떳한지를 묻는 시도가 마땅히 계속되어야 한다. 이런 고민을 역사 교과서에 자세히 실을 필요는 없어도 좀 더 멋진 문명국가가 되기 위한 자기반성이 살짝 들어가는 게 좋겠다.


현대사는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사람들과 소통해 합의될 만한 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다만 뉴라이트가 펴낸 대안교과서 필자 가운데 역사학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문제 제기는 적절하다고 본다. 근현대사가 역사학만의 영역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근현대사 연구자의 참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구색 맞추기를 위해 역사학자를 몇 명 끼워 넣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좌편향을 문제삼는 분들이 우편향으로 달려가는 징조가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3억 원짜리 수면제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 서울시 교육청의 현대사 특강이 대표적 사례다. 교과서 포럼 관계자들은 이 점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박 교수는 좌편향과 우편향은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지만 금성교과서가 그 제한을 넘어 타깃으로 삼았다고 설파했다. 그는 교과서는 학자적 소신을 펼치는 논문이나 학술서적과는 달라서 일정 수준 검증해야 하는데 이러한 검증의 주된 잣대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설령 금성교과서의 잘못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해도 그의 논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정부나 교육 당국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벌이는 억압적인 방식에 반대해야 한다. 이는 헌법 제31조가 보장하는 교육의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 교과서 시장을 권력을 통해 교란시킴으로써 이 땅이 그토록 힘겹게 건사해온 시장경제의 원칙도 무너졌다. 헌법정신을 지키며 절차를 준수하고, 권력의 자의적 남용을 방지하고, 사상의 자유시장을 존중해야 문명국가이며, ‘기적의 역사’가 아닌가?


강연을 듣는 내내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치유하지는 못한다”라는 고종석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이 하는 일에 편향이 없을 수 없지만 거기에는 절제와 금도가 있어야 한다. 정부나 교육 당국이 벌이는 일련의 행각을 사화(史禍)라고 지칭하는 분들이 있다. 절제와 금도를 넘은 사화는 또 다른 치우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괜찮은 문명국가임을 내보이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야만스럽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역사가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거대 언론과 정부 여당의 힘을 빌린 세력이 마녀사냥을 자행한다면 이것은 문명이 아니다. 이 정부 아래서 힘센 분들이여, 부디 역사를 그리고 문명을 외경하시길!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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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잊혀져 가고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생생하다. 현직 의경이 전의경 제도 폐지를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묘했다. 입만 살아 움직이는 내가 습관처럼 말하던 전의경 제도 폐지 주장과는 차원이 다른 무거움이 느껴졌다. 입으로 사는 사람과 몸으로 사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모든 것을 몸으로 살아낼 수는 없으니 입이 필요한 때가 있다며 자기방어를 발동하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이길준님을 두고 군복무 부적응자가 소영웅주의에 빠져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고 폄하하는 비난 댓글을 보며 마음이 허전했다. 내 또래인 이 청년이 자신의 행동이 낳을 후폭풍을 짐작하지 못했을리 없다. 법 어기는 걸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상층부에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 같은 소시민은 국법의 지엄함을 잘 알고 있다. 범법자가 되는 멍에를 감수하면서까지 이길준님이 지적하려고 했던 문제에 대해 고민을 나누는 것이 좀 더 슬기로운 모습이다. 제 삶의 주인이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나라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무엇을 특별히 주장했다기보다는 오는 2012년 전의경 제도를 폐지하고 단계적으로 경찰공무원으로 대체하기로 한 지난 참여정부 시절의 결정을 지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명박 정부가 그 때의 결정을 번복하려고 하고 있어 안타까워하는 수준이었다. 박종달 병무청장은 9월 1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해 “2011년까지 전·의경을 (매년) 1만2천명 수준에서 유지(배정)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라며 전·의경 제도 폐지 방침을 백지화했다. 이명박 정부가 끝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쇠고기 정국에서 그랬듯이 앞으로도 전의경을 정권 안보의 방패막으로 삼을 모양이다.


이러한 우려가 착착 현실로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이길준님이 정성껏 쓰신 양심 선언문의 전문을 꺼내 읽는다. 비장미로 흐르기보다는 낙관적인 자세가 묻어나는 글을 보니 이런 것이 마음을 담은 글의 힘이구나 싶다. “내 결정이 우리 사회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이길준님의 말씀은 오래도록 큰 울림이 될 것 같다. 문득 “각성은 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이라는 최순영 전 의원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각성이 그리 대단하고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길준님이 보여준 행동도 각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리라.


내가 이런 식의 각성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길준님은 국가의 폭력을 성찰하는 각성을 했지만 군복무를 통해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의 가치를 도두보고 자신의 삶을 검속하는 방편으로 삼는 각성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나는 그 각성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길준님의 각성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는 말자 정도의 해명을 보태고 싶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국방일보에 늘 등장하는 훈훈한 미담 사례만으로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적인 발언을 통해 알리는 분들도 있다면 이 땅이 좀 더 윤택해진다고 믿는다.


특정한 각성만을 강요하고 칭찬하는 건 한 사회의 구성과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그 불가피성을 이유로 남발될 때 나는 얼마나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한다면 이런 식의 다채로운 각성이 만개할 텐데 나는 얼마나 귀담아 들을 수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 제2장에서 이미 설득력 있게 논증했듯이 단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제약한다면 의롭지 못할 뿐더러 이롭지 못하기까지 하다. 교정의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확신한다. 나도 그 풍요로움에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보태길 희망한다.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각성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며 넉넉하게 접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정법에 어긋나는 각성을 마주칠 때 엄정한 처벌을 수행하는 정성을 조금 여투어서 처벌의 근거가 튼실한지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시민의식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각성을 옹호하는 분들이 좀 더 넉넉한 태도를 보여주시길 바란다. 우리네 민주주의가 고양될수록 이러한 넉넉함은 권장사항에서 의무사항에 가까워질 것이다. 가령 경찰 행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 전의경 제도의 존치가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분이 다수파고 전의경 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소수파라면 다수파가 좀 더 절제와 경청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다수파의 노력은 언젠가 소수파로 전락했을 때도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는 든든한 보험으로 작동할 것이다.


내가 그리는 ‘각성’은 전통을 긍정하고 상식을 존중하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용기다. 사람 마음이 매끄럽게 나눠지지는 않겠지만 용기에는 여러 무늬가 있고 그것들이 어우러질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주역』 구절이 그 모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열린 자세로 듣는 양적 변화를 쌓는 것이 첫 번째 용기, 양적 변화가 축적되어 질적 변화로 나아가 새로운 생각을 품는 것이 두 번째 용기, 그 질적 변화로 말미암아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을 티끌만큼 바꾸는 게 세 번째 용기로 삼아볼 수 있겠다(후배 정태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음을 밝힌다). 세 번째 용기는 이내 첫 번째 용기와 잇닿는다. 특히 애써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안 들리는 소수파나 약자의 목소리를 좀 더 챙겨 듣는 것도 첫 번째 용기를 키우는 훌륭한 방편임을 유의해야 한다.


여하간 이런 식으로 각성이 세 가지 용기를 통해 구현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정조대왕은 총명함이 발현하는 ‘속도’보다 총명함을 유지하는 ‘지속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끝끝내 지키는 사람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아실현을 위한 학문)을 하게 된다”라는 말씀이다(『일득록』 「문학」2). 각성도 마찬가지로 속도보다는 지속도에 좌우된다. 정조대왕이 “일시적으로 빼어난 재능은 한순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이라고 지적했듯이 각성 또한 섬광처럼 스쳐 가는 순간으로 그친다면 둘레의 감동을 자아내지 못한다. 순간의 호기로움으로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고, 짧게나마 그 실행을 위해 동분서주하기는 쉽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자신이 지녔던 아름다움을 가꾸는 건 지극한 수고로움이 따른다. 각성은 눈부시지만 그 빛남은 혜성이 아니라 항성이어야 마땅하다.


얻어먹는 밥에 연연하는 식객의 삶보다는 땀 흘려 개척하는 주인의 삶을 선택한 이길준님을 응원한다. - [無棄]


<추신>
이번에 알게 된 내용인데 독일,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남아공, 슬로베니아 등의 나라에서는 군인노조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한다. 물론 모병제 국가에서 직업군인들이 결성한 조직이겠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상력을 넓혀볼 좋은 소재였고 참신한 경험이었다. 하기야 지난 7월 말 서울시 교육감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것도 여러 상상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산물일 게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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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최소한 언짢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한우도 위험하다 혹은 더 위험하다는 ‘한우 위험론’, 전경이 무슨 죄냐는 ‘전경 동정론’, 너무 감정적이고 선동적이라는 ‘군중심리론’, 그래도 불법은 안 된다는 ‘준법시위론’, 본래의 순수성을 잃었다는 ‘순수 훼손론’, 쇠고기 협상만을 문제삼아야지 다른 정책이나 정부 퇴진을 외쳐서는 안 된다는 ‘쇠고기 국한론’, 집회로 인해 선량한 시민들의 이익이 침해받는다는 ‘선량한 시민론’, 시위에 참석 안 했다고 무뇌아로 몰아 부쳐서는 안 된다는 ‘계몽 반대론’, 재협상은 통상마찰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국익론’, 본래부터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했던 무리들이 문제를 부풀린다는 “안티 조장설” 따위가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은 안 했지만 대강 이해하시리라 본다. 몇 개는 쉽게 논파할 수 있지만 몇 개는 고민에 빠뜨린다.


특히 “물대포는 대한민국 폭력경찰이 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권리를 침해당한 다른 선량한 국민들이 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내가 ‘선량한 시민론’이라 이름지은 주장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는 “과연 선량한 시민이 침해받은 이익은 무엇일까요? 정부를 옹호할 권리? 이런 건 아닐 테고, 주말 저녁에 광화문 거리를 산보하는 여유? 한밤중에 숙면을 취할 자유?”라고 비꼬았다. 진의는 아니었지만 댓글 논쟁이 벌어진 곳이 익명게시판이라 직접 사과할 기회가 없어 안타깝다. 선량한 사람들이 빼앗겼다고 주장하고픈 권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적시해주시면 더 좋았다는 의도가 지나쳤다. 내가 든 예시는 경솔했지만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표현을 쓴 측면이 있으니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홍관희 통일교육원장 내정자는 촛불 시위자들이 자동차 운전자들의 도로통행 권리, 심야에 숙면을 취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열거해줘야 토론하기가 좀 더 수월하다.


경찰이 ‘더’ 선량한 시민을 대신해 ‘덜’ 선량한 시민을 향해 물대포를 쏘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덜’ 선량한 시민들은 ‘더’ 선량한 시민을 향해 촛불을 든 것도 아닌데 물대포를 쏘아줘야 안심이 된다면 좀 민망하다. 그렇게 해서 유지되는 선량함이 그리 탐스럽지는 않다. 이를 주장한 분은 어떤 시민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다른 시민의 어떤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어느 정도 명료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경찰특공대가 지키려고 했던 건 청와대인가? ‘더’ 선량한 시민의 이익인가? 이명박과 그 둘레 사람들인가? ‘더’ 선량한 시민의 공민권과 행복추구권인가? 나는 헛갈린다. 결사의 자유라든가 불복종 운동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섬세한 논쟁이 필요한 대목인데, 구체적인 내용 없이 “침해받은 시민을 생각하라” 이렇게만 말씀한다면 난감하다.


짧은 댓글에 모든 것을 담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를 내가 너무 타박하지는 않아 염려스럽다. 그럼에도 글쓴 분의 논지를 강화하려면 이런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가령 법을 준수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덕목이며 사회의 안정에 이바지해 궁극적으로 시민의 법익을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실정법에 어긋나는 가두시위가 적절치 않다고 볼 여지가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쇠고기 정국에서 정부의 태도를 지지하고 대통령을 옹호하는 국민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정부 VS 촛불집회 시민의 구도에서 혹시 소외될 수 있는 제3의 영역, 또 다른 우리 사회 구성원의 문제를 지적하신 건 좋은데 그 문제 제기가 좀 더 공감을 얻으려면 그에 걸맞은 근거가 조금 보강되었으면 좋겠다.


말씀하신 논리가 설득력을 더하려면 선량한 시민들의 범위가 좀 더 넓어져야겠다. 글 쓴 분은 사회적 소수파에 대해 넉넉한 시선을 보내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선량한데도 경찰이 대신 물대포를 쏘아주기는커녕 사회적으로 소외 받고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한다면 어떨까 싶다. 경찰이 보호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선량하다고 자부하는 시민들마저 나서서 손가락질하는 소수파의 목소리를 경청할 줄 아는 자세로 버려지는 사람, 버려지는 권리가 없기를 희망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이와 결부시켜 ‘전경 동정론’과 관련해서 한마디만 하자면 공권력을 확립해야 한다는 점과 공권력 사용에는 늘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마냥 어긋나는 목표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민주 경찰과 민주 시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번 촛불집회를 4·19나 5·18에 빗대는 것을 마뜩잖아 하시는 분들이 있다. 4·19나 5·18의 숭고한 대의를 높이기 위해 함부로 쓰이는 것을 경계하셔서 하신 말씀일 게다. 다만 그 기저에 흐르는 공통 분모를 뽑아내려는 시도가 그리 무익한 일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4·19와 5·18은 소중한 기억이지만 그것이 관념화되고 신성시되는 건 곤란하다. 아마 우려하신 분께서도 생활 속에서 그 정신이 녹아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시리라 믿는다.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 그 때도 오늘과 같은 논쟁과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4·19는 반쪽이나마 성공함으로써 성역화되어 버렸고, 5·18은 불온시되어 제대로 음미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4·19나 5·18의 의미를 정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헤아려보고 소통하려 하는 것이 4월 혁명, 5월 항쟁을 되새기는 또 다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정부가 거짓말을 남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은 확실히 있다.^^;


4·19와 5·18, 6월 항쟁을 지지한 시민도 그 때 당시에는 소수였다. 사안마다 다르지만 처음부터 전국민적인 공감대를 얻은 건 아니다. 우리는 이 기억들이 어느 정도 성공한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의 의미를 기리고 마치 일부 집권층과 동조 세력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지지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은 극히 소수라고 깎아 내리는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 과거 독재시절에 민주화를 위한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 때 그 시절에도 자칭 선량한 시민(?)들은 "그래 네 말이 맞는데 폭력시위는 안 된다" 뭐 이런 식에 가까웠다고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 때는 빨갱이 사냥까지 있었고, 언론의 왜곡보도도 심대했다. 우리가 자랑하는 그 민주화도 애당초 용인되었기에 실현된 것이 아니다. 감정에 휩쓸려 제 앞가림을 못하고 과격한 언사를 늘어놓았던 그들이 우리가 지금 대통령을 마음껏 욕하고, 언론 보도를 의심하고, 군사주의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아마 이런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명박 정부를 국민의 손으로 뽑았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의 상황이 당시의 정세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핵심 논거다. 분명 무력으로 집권한 군사정권에 견주어 정통성이 월등히 높다. 좀 야박하게 말해서 이명박 정부의 무능함을 꿰뚫어본 국민이 적었다는 것이 대한민국 불행의 시발점이었는도 모른다. 이번 정권교체에서 보여주듯이 민심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 민심이 다시금 요동쳤다고 해서 군중심리라거나 조변석개(朝變夕改)라고 투덜거리는 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나눠봄직한 주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그 둘레 사람들이 그런 말을 꺼내서는 곤란하다. “고객은 무조건 옳습니다”라고 써 붙인 식당처럼 국민의 올바름을 믿는 것은 직선 대표의 숙명이다. CEO 대통령이라면서 식당 주인만도 못한 정치를 펼친다면 부끄럽지 않은가.


2004년에 내가 통상정책 발표 주제로 삼기도 했던 EC-호르몬사건(EC Measures Concerning Meat and Meat Products)은 유명한 통상마찰 사례다. 미국은 WTO에 제소를 했고 WTO는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EU(당시 EC)의 거부와 잇따른 미국의 제소가 이어져 지금도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고 EU는 각종 대가를 치르면서도 버티고 있다. 이것만 봐도 통상마찰은 괴롭고 지루한 여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번 쇠고기 협상이 전격적으로 채결되기 전까지 많은 줄다리기가 있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은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온전히 져야한다. 그들은 소 잃고 고칠 외양간마저 불살라 버렸다. 나는 쇠고기 협상 타결 초기에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던 정부 관료와 여당 의원들의 작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제 그 과오를 만회할 길은 단 하나 뿐이다. 이게 과연 흑백논리이자 이분법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시 철회, 협상 무효”라는 국민의 요구는 간명하다. 현 시점에서는 이걸 수용하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통상마찰이 걱정되더라도 재협상 불가가 국익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지금 야당들이 장외집회로 선회하고 있지만 한나라당도 재협상(에 준하는 조치)을 사실상 수용하겠다고 밝힌 만큼 국회에서 의결하면 못할 것도 없다. 사실 의회 입법으로 정부의 빠져나올 알리바이를 만드는 방식은 미국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통상마찰을 우려한 국익론은 마치 지난날 이라크 파병 국익론과 마찬가지로 국민을 현혹하는 구호에 소모될 공산이 크다고 본다.


타격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이 두려워 다른 방식을 모색한 단계는 지난 게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한미 FTA나 대운하 같은 경우 국민경제에 미칠 영향을 찬반 양측이 엄청난 차이로 계산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나타날 통상마찰에 따른 피해를 경제학적 수치로 계산해서 결정하겠다는 것도 어폐가 있을 듯싶다. 기업비리가 터질 때마다 재계에서 경제사범에 대한 선처를 요구하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핑계를 늘어놓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궁색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국민이 원하는 건 두둑한 지갑만은 아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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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정국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사실 나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굳이 머리를 굴려본 것이 있다면 ‘위험(Risk)’과 ‘불확실성(Uncertainty)’의 개념이다.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위험은 측정 가능한 불확실성이다. 즉 확률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불확실성은 측정 불가능한 불확실성이다. 최근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위험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의 문제였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일단 거래를 사절하거나 자금을 회수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자금 융통이 막혀 금융위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형국인 셈이다. 요즘 불거지는 광우병 논란도 위험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정부는 안전하다며 위험 측면에서만 해명하고 불확실성을 다독일 방안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응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나이트(F.Knight)는 불확실성이야말로 이윤을 발생시키는 원천이라고 역설했다. 보험 처리조차 불가능한 진짜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사람이 기업가이며, 사전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을 지는 대가로 기업에는 이윤이 발생한다는 논리를 편다. 아직까지는 미국 쇠고기를 들여오는 이득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정부측의 초기 대응은 안이하기만 했다. 쇠고기 협상에서 정부가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는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자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제 정신인 민주정부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굴욕적인 협상을 하고도 국민들이 괴담에 놀아나네, 촛불집회에 배후가 있네 어쩌고 하면서 깐죽거리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문제의 본질이다. 이명박 정부는 불확실하지 않다. 그들은 위험할 따름이다. 그건 측정 가능하고 통제 가능하다.


정부의 거짓말과 실책이 쌓여 정책의 신뢰성이 추락했다. 그간 광우병의 위험을 함께 호들갑 떨던 이들이 갑자기 새 정부 들어 협상을 불가피하다고 외치는 것을 넘어 옹호하고 있는 모습은 불신을 부채질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는데 자율규제 하겠다, 원산지 표기 잘하겠다는 말이 믿어지겠는가. 물론 정부가 국민의 생명권을 희생해가면서 미국에 굽실거렸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손익계산서는 분명 극악한 것이었고 그나마 나온 추가적인 조치도 국민들의 분개 때문에 겨우 이루어졌다. 국민은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호들갑을 떠는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네들은 국민이 호들갑을 떤다고 나무랐다. 전전긍긍해야 할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정부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도덕적 자원을 결핍한 지도자는 ‘비지지자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 유무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 대통령은 그 비용이 크리라 추정된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는 지지도 폭락 사태는 낮은 신뢰도에 기인했다기보다는 빠른 속도로 늘어난 비지지자 수인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판단이지만 지지자 충성도가 붕괴될 조짐이 보인다. 비지지자의 낮은 신뢰도를 방어하는 건 지지자의 높은 충성도다. 혹자들은 군중심리라고 타박할지 모르겠으나 이명박 정부는 많은 기대를 품고 출범했다. 설령 이해관계에 의한 투표를 건넸다고 하더라고 그와 같은 지지를 건넨 국민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정부라니 서글프다.


경찰이 청와대로 향하는 시민들에게 최초로 물대포를 쏘았다는 기사를 접하고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명박 정부의 탄생을 저지하려 했던 편파적인 녀석이다. 이 점을 부인하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고 살았던 것 같다. 물대포 사태가 벌어지던 날 헌책방에서 노닥거리다가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편파적으로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인 것이다”라는 구절을 만나고 무척 동감했다. 나는 아직 공정하게 편파적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편파적으로 공정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공정한 척하지 않는 건 내 자부심이다. 그저 이명박 정부를 막지 못한 죄를 감내하고 하루하루 견뎌내는 재미로 살려고 했는데 이쯤 되면 죗값에 견주어 너무 많은 벌을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속한 반 클럽에는 쇠고기 정국에 대한 논란이 불붙고 있다. 나는 고종석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이명박 정부의 업적이 있다면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는 무능과 부패, 도덕성과 능력은 정(正)의 상관관계에 있음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여준 것이 아닐까”라고 썼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늘 떠들고 다니던 말을 고 선생님이 먼저 글로 옮기신 것이지만^^;). 어느 누리꾼이 요즘의 일을 풍자하며 인용한 최치원 선생의 <토황소격문>의 구절을 재인용했다. “하늘이 잠깐 나쁜 자를 도와주는 것은 그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흉악함을 쌓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그 때 당시에는 나도 흥분했고(한편으로는 엄청 절제했지만) 감정의 나열에 불과해서 며칠 뒤에 지웠다. 이제 재학생 가운데는 꽤 높은 학번이 되어버린 제가 스스럼없이 툭 던진 한 마디가 어떤 맥락으로 받아들여질지를 고민해야 했는데 좀 소홀했다. 내 잡소리를 누가 귀담아 듣겠냐 싶지만 내 진솔함이 후배들에게는 불편함을 심어줄 수도 있겠다는 반성을 했다. 사석에서든 클럽 게시판 같은 공적인 지면에서든 가능하면 솔직하게 살려고 했는데 때로는 솔직함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예전부터 몇몇 선배님들은 내 ‘감춤 없음’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다. 정말 고맙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렇다고 갈등의 소지가 있거나 가치관이 맞부딪치는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온당하냐는 문제의식을 품어본다. 좋은 이야기와 인사치레 같은 덕담을 늘어놓으면 우리의 소중한 관계가 너무 허망할 거 같다. 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는 의만 상하기 때문에 친구 사이에서 꺼내지 않는 게 좋다는 식의 이야기에 별로 동감하지 않는다. 그건 귀한 인연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배신’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익명게시판은 백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리는데 정작 오프라인 상에서는 수강신청 이야기나 나누는 우리네 우애를 돌아보게 된다. 왜 우리는 이런 소재를 두고 오프라인 상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지 못할까. 서로 덜 친해서 그런 걸까, 더 친하고 싶어서 그런 걸까?


우리가 좀 더 격의 없는 사이가 된다면 오프라인에서도 이런 이야기 술안주 삼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대학에서 내가 사귄 사람들을 위한 생각일지 내 개인적인 욕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불완전성을 가정한 제도다. 관용은 “내가 잘 났으니까 너희들 이야기를 좀 들어줄게” 이런 것이 아니다.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존재와 가능성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에 나서는 것이다. 진리는 권력순도, 성적순도, 목소리 크기순도 아니다. 부디 내 둘레의 사람들과 관용의 미덕을 만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뒷담화 대신 앞에서 말하기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내가 내뱉는 만큼 얼마나 잘 경청할 수 있을까?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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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번지와의 문답

사회 2008. 4. 26. 19:59 |
이번 학기 교양으로 듣는 <유가적 사유와 논어> 과제물로 냈던 것을 부분 수정해서 올립니다. 지당하신 말씀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시절이 수상하긴 한가 봅니다.


<원문>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 好禮則民莫敢不敬 上 好義則民莫敢不服 上 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 『논어』 <자로편>


<국역>
   번지가 농사짓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는데 공자께서는 “나는 노련한 농사꾼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채소밭을 가꾸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는데, “나는 노련하게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인이로다, 번수여!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믿음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저 이와 같으면 온 세상의 백성들이 그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오게 되니, 어찌 곡식 심는 일에 힘쓸 수 있겠는가?”


<견해>
   정약용 선생은 공자가 번지의 질문을 물리친 것은 예의를 앞세우고 음식과 재물을 뒤로한다(先禮義 後食貨)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목민심서』에서도 “뭇사람을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신뢰뿐이다. 위엄은 청렴함에서 나오고, 신뢰는 자기 마음을 다하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자기 마음을 다하면서도 능히 청렴할 수 있어야 이에 뭇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馭衆之道 威信而已 威生於廉 信生於忠 忠而能廉 斯可以服衆矣)”라고 논하며 공자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吏典6條 馭衆). 주희는 禮, 義, 信은 대인(大人)의 일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대인은 위정자를 말한다. 주희는 공자가 언급한 소인(小人)을 세민(細民), 즉 서민이라고 봤다.


   이 문장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역할에 따른 사회적 분업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공자는 농사일과 같은 기술과 기능을 하찮게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설파했을 따름이다. 공자의 사상은 사회 변화의 주체를 선비 계급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변화의 방향은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긍정적 함의를 읽어봄직 하다. 후대에 이 뜻이 왜곡되어 노동을 천시하고, 백성에 대한 사랑 없이 군림만 하려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다. 위정자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이익을 안겨줄 것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번지가 농사일을 물은 것을 두고 농가학파(農家學派)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농가는 농경을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데, 임금도 백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공자는 위정자가 직접 농사짓는 일에 관여하는 것보다는 도덕정치를 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일이라고 봤다. 번지의 질문을 다르게 보면 유학이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물질적 이해에 대한 고려를 너무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 고민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학문은 실용적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실용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예가 아니라 그 기예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나 구조를 다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공자가 농사짓기와 같은 보여주기 식의 정치를 비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인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배척하고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는 배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중시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남의 기림을 받는데 급급해 이미지 고양에만 힘쓰는 것을 비판했다. 얼마 전 총선에서도 시장이나 농촌 현장에서 서민들의 애환을 듣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목욕탕에서 유세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오늘날의 선거문화에서 이런 모습은 불가피한 점이 있으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넘어서 진정으로 국리민복을 위한 활동을 하라는 공자의 질정은 경청할 만하다. 예를 좋아하고, 의를 좋아하며, 신뢰를 좋아하는 기품 있는 정치인이 나타난다면 국민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며, 진실한 마음가짐을 품게 할 수 있다.


   맹자도 “대인의 일이 있고, 소인의 일이 있다(有大人之事 有小人之事)”라고 말하며 정신 노동을 하는 노심자(勞心者)와 육체 노동을 하는 노력자(勞力者)로 구분했다(文公上 4). 번지의 경우와 비슷하게 진상(陳相)이라는 자가 농가인 허행(許行)에게 감화되어 맹자에게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 중에 나온 구절이다. 맹자는 자기가 쓰고 먹는 물건을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필요한 것을 교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기술자들의 일을 겸할 수 없듯이, 정치나 교육 등 마음을 쓰는 일도 다른 일과 겸할 수 없음을 논증했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해서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양심을 밝혀서 실천하면 군자가 되고 육체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주력하면 소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사고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서(漢書)』에 병길전(丙吉傳)에 나오는 문우천(問牛喘)의 고사는 공자의 가르침을 체화한 사례다. 승상이 된 병길이 어느 날 외출하다가 백성들이 떼지어 싸우는 무리들과 마주쳤으나 그냥 지나쳤다. 조금 더 가서 더위를 먹어 헐떡이는 소를 보고는 크게 걱정을 했다. 따르던 사람이 의아하게 여기자 병길은 백성들이 서로 살상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담당 관리의 소관이며 재상은 연말에 그들의 고과를 통해 상벌을 시행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어 삼공(三公)은 음양의 조화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계절의 기운이 절도를 잃을 조짐이 있으니 직분상 마땅히 큰 재앙이 닥칠까 염려해야 할 바라고 설명한다. 즉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대체(大體)를 살펴 조정하는 능력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공자와 번지와의 문답에서 자신을 다스린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유추해낼 수 있다. 유가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학문적 자기완성 정도에 따라 정치활동의 범위가 점차 확대된다고 봤다. 수기는 치인에 선행한다. 『대학』의 8조목인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순차적인 점진주의다. 개인의 윤리적 각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점차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는 유가의 사유다. 혹자는 정치가의 도덕적 수양에 몰두한 나머지 치인보다 수기에 치중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가는 수기적 행위에 치열하면 할수록 그것은 동시에 치인적 행위에도 치열한 것이 된다고 인식했다. 도덕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현실적 정치능력을 보유하게 된다고 본 셈이다. 다시 말해 도덕성이 곧 능력이라는 것이다.


   요즘 도덕성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이분법이 힘을 얻고 있다. 공자가 언급한 好禮, 好義, 好信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탈도덕 현상을 수기치인의 현대적 복원으로 극복해야 한다. 도덕과 능력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도덕력(道德力)은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 이론에도 부합한다.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연구 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윤리적 기업에 투자하면 투자수익률이 더 높다는 해외의 실증 연구가 종종 나온다. 국내에서도 윤리헌장 제정과 더불어 전담 부서를 설치해 윤리경영을 적극 실천한 기업의 주가상승률이 그렇지 못한 기업에 비해 높았다는 분석이 있다. 윤리경영이 기업성과를 크게 악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보아 윤리경영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업에서도 윤리경영이 강조되는 경향에 비추어 볼 때도 공자의 입장은 유효하다. 전문지식에 그치지 않고 인문학적 성찰을 갖춘 국가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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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취임식(사진 출처 - 노무현 홈페이지http://www.knowhow.or.kr)


떠나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가엾게 여긴다는 건 황당한 일이다. 나는 그의 출세를 부러워할지언정 그에게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최고의 권력을 누렸고, 퇴임한 후에도 월 1500만원의 연금과 경호원 및 비서관 등을 국가에서 지원 받는다. 이러한 예우는 그를 국가의 지도자로 삼았던 국민들의 품위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성공한 전직 대통령의 모범으로 꼽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본받으라고 여러 사람들이 충언하고 있다. 이 말에는 정치적 행보를 하지 말아달라는 주문도 적잖이 녹아들어 있다. 집짓기 운동으로 유명한 카터 전 대통령이 비정치적 행위만 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정치와 비정치를 가르는 기준은 애매하게 마련이다. 국가의 분배 구조에는 침묵하고, 자선 활동만 권장하는 식이라면 매우 기만적이다.


노 대통령의 임기 말을 조명한 MBC 스페셜 <대한민국 대통령> 2부에서 희망돼지 저금통 앞에서 목이 메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짠했다. 그는 옛 지지자들에게 미안함을 표할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다. 그가 악의에 차서 지지자들을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차례 팽개쳐진 지지자들 가운데 끝끝내 그의 선의를 믿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그네들 자신의 존엄성을 건사하고픈 심리 때문이라고 깎아 내리기 망설여진다. 적어도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았던 분들에게 중독자나 광신도라고 헐뜯는 건 예의가 아니다. 노무현으로 상징된 가치의 소멸을 안타까워하는 측면이 있다. 열린우리당이 맥없이 무너진 후에 참여정부의 계승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기에 노무현 개인을 향한 편애에 의지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노무현이 그저 대통령이 되어준 것을 고맙게 여기는 지지자들도 있겠지만, 애증이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그를 보내는 지지자들이 더 많으리라.


고종석 선생님은 노 대통령을 개혁세력 전체를 분열과 절망의 나락에 빠뜨린 트로이 목마라고 비판했다. 노무현이 싫다는 분들이 달려간 곳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라는 사실에 비추어 그런 비유가 나왔다. 그러나 중도 보수 혹은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은 목마를 성안에 들여서 망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모욕하고 나서 스스로 붕괴했다. 호남의 지역주의에 기대 연명했던 옛 민주당의 구접스러운 행각이나 올바른 패배를 마다해 정당 민주주의의 퇴행에 일조했던 옛 열린우리당 탈당파의 팔락거림은 노무현 탓으로 감추기에는 그 그림자가 너무 짙다. 아울러 노무현의 실패가 오늘날 넘실대는 도덕과 능력이 별개라는 낭만적(?) 사고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엄밀히 따져야 한다. 노무현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을 헝클어뜨린 분노를 고작 이런 식으로 표출한다면 정직한 절망 외에는 손쓸 방도가 없다.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놓고 재평가가 이뤄질 거라는 견해에 동감한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유산을 남겼는지도 차차 밝혀지겠지만 이제 노무현 때문이라는 핑계는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게 되었다. 노무현을 두고 벌였던 희생제의는 이쯤에서 그치고 노무현을 넘어설 정치 지도자를 찾는 노력을 해보자. 노무현에게 아쉬웠던 점을 메우면서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잡아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갖은 미움을 받았으나 현실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만큼 대중성과 진솔성, 원칙과 가치를 제시한 교양 있는 지도자는 너무 드물다. 그 대중성은 굳건하지 못했고, 진솔성은 계산된 것이었으며, 원칙은 분열적이었고, 가치는 흐릿하다는 험담이 대개 온당하다고 수긍하더라도 말이다. 참여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해 민심을 잃었다는 주장이 많다. 노무현을 반겼던 서민에게 환멸을 불러일으켰던 뼈아픈 실책이다. 노무현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정하기 싫은 분들도 이 점에 대해 겸허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일부 언론이 뒤틀린 해석도 모자라 신성한 사실마저 구부러뜨려 왔음은 또렷하다. 최근 일부 언론이 이명박과 그 둘레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모습은 섬뜩하다. 앞으로도 이중 잣대가 춤춘다면 언론의 신뢰도는 다시금 흔들릴 게다(참여정부가 사실을 어그러뜨린 사례도 무수히 많다). 그네들이 장악한 기록을 넘어선 균형 잡힌 평가가 다만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지 궁금하다. 편향된 사료를 남겨놓고 역사의 평가를 운운하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 평가는 결국 노무현 정부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형식이 아니라 후임 정부의 실정에 견주어 부각될 상대적 돋보임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당대에도 객관적인 성과 측정과 공정한 평가를 내렸는지를 살펴야 한다. 참여정부가 남긴 대통령기록물이 역대 정부에 비해 월등히 많은 까닭도 있는 그대로의 평가에 대한 욕망이 발현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려 공민왕은 재위 기간 동안 『서경』 「무일(無逸)」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무일」편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이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눠주거나 정무실에 걸어두도록 했다. 「무일」편은 주공(周公)이 조카인 성왕(成王)에게 남긴 정치적 조언이다. 주공은 군왕의 지위를 특권이 아닌 의무로 보아야 한다며 안일하지 말 것을 설파한다. 「무일」편은 왕의 근면 성실한 노력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의 충고를 청하는 「홍범(洪範)」편은 군왕의 의사소통 능력에 주안점을 둔다는 의견이 있다(김영수, 『건국의 정치』, 이학사, 2006, 208~231쪽 참조). 군왕이 망국의 유신에게 국정을 묻는 자세가 인상 깊었기 때문인 모양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그대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그대의 왕가(王家)’라고 칭하며 주나라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데도 말이다.


부지런함과 의사소통은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네 지도자들은 마땅히 두 가지 덕목을 품어야 한다. 윤택(尹澤)은 공민왕에게 「무일」편을 강의하면서 “전하께서도 성왕이 능히 주공의 가르침을 듣는 모습을 본받으셔서 엄숙하고 공손하여 삼가고 두려워하시면 사직의 복이 됩니다(願殿下 法成王 能聽周公之訓 嚴恭抑畏 社稷之福)”라고 말한다(『고려사절요』 공민왕 6년(1357) 5월). 주공의 언설만큼이나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맥락을 배워야 한다는 강설이다. 다시 말해 기자의 말에 귀 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갖추길 바랐다. 「무일」편 끄트머리에는 주공이 훌륭했던 이전 왕들의 행실을 평가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들은 백성이 자신을 원망하고 욕할 때 스스로 마음가짐을 조심하여 ‘그 허물이 나의 허물이다’라고 말하며, 노여워하지 않았음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노무현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 탓에 서툴렀기에 그네들이 상처를 받는 것 이상으로 국민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목민심서』의 마지막 편은 ‘관직에서 물러남(解官)’이다. 벼슬에서 물러날 때의 자세를 서술한 내용인데 제6조는 ‘사랑을 남김(遺愛)’이다. 다산 정약용은 수령이 임지를 떠난 뒤에도 백성들로부터 기림을 받는 선정의 이상향이라 생각했다. 이미 떠난 뒤에도 사모하여 심은 나무조차 사람들의 아낌을 받는 것은 감당(甘棠)의 유풍(遺風)이라는 구절이 있다. 감당의 유풍은 『시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백성들을 위해 일하다 팥배나무 밑에서 쉬어간 지도자를 경애하여 그 나무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는 고사다. 노무현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노무현이 임기 중에도 실현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보듬는 일을 퇴임 후에 해내기를 기대하는 건 무모하다. 그는 강은 똑바로 흐르지 않지만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고별사를 남겼다. 그가 염원하는 바다가 단지 힘센 벗들과의 어깨동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좀처럼 미워하지 못했던 내가 드리는 마지막 덕담이다.


노무현을 만나고, 그의 시련에 같이 아파했던 지난날이 애틋하다. 그와 함께 내 젊음도, 고집도 저물었다. 내가 미련한 젊음 대신 유능한 점잖음을 택하고, 우직한 고집 대신 표변하는 영특함을 예찬할까 두렵다.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 - [無棄]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일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입니다.

- 1988년 노무현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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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하지 않았던 자유

사회 2008. 1. 11. 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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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난 여드름이 결국 흉 질 모양이다. 발칵 짜증이 난다. 문득 1999년 계훈제님의 부고가 안쓰러워하던 어린 마음이 떠오른다. 나는 정치적 시비나 이념적 차이를 떠나 일평생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의 쓸쓸함에 많이 상심했다며 습관처럼 둘러댄다. 그런데 여드름을 향한 내 역정의 강도는 계 선생님의 만년을 따가워함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내게 민주화라는 건 여드름과 비슷한 존재였단 말인가.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에 소개된 황지우님의 「사육된 세대」를 읽다보니 새삼 스스럽다. 그렇지만 앞 세대 분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화는 궁극적으로 사사롭고 소소한 일에 분개할 수 있는 여유가 아니었냐며 투정을 부려본다.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높게 친다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는 지독한 인위였고, 인공미였다.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 팬티와 살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이들의 피딱지를 먹고 자란 대한민국. 나는 피딱지 대신 여드름을 걱정한다. 딱 그만큼은 세상이 좋아졌다.


07년 9월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성명서에다 “출교자들이여, 나와 함께 군대로 갑시다”라는 막말을 했다. 흔히들 민주화 투쟁을 하던 분들이 군사독재와 싸우다 군사독재를 닮아갔다고 곧잘 험담한다. 자칭 순수한 비운동권을 내세우던 그들도 미워하면서 닮아버린 듯싶다. 글쓴이는 서두에 “1987년 7월 한 학생의 저승 가는 길이 슬퍼서 100만 민중이 모였다”라고 썼다. 제 학교 선후배 동기들이 쫓겨나는 걸 찬성한다는 학생들과 더불어 사는 나로서는 21세 이한열의 죽음에 그토록 많은 필부가 서글퍼 했다니 어색하다. 80년 5월과 87년 6월을 꼭짓점으로 삼아 그 전후의 시린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에 등장한 내 또래의 사람들은 도무지 이상했다.


학교를 부러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자격증을 딴다. 부모님께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고 싶다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한다. 그런데도 위장 취업한 여대생의 언니는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라며 생활비를 보낸다. 이 요상함은 얼마나 야만적인 시대였는가를 방증한다. 동생을 내놓으면 형을 풀어주겠다는 연좌제가 섬뜩했다. 난사 당한 여성 시신 한 구를 놓고 두 어머니가 “내 딸이다”라고 다퉜다. 보안대 지하실에서 친구 이름을 적은 수첩을 씹어 먹어야 했다. 권인숙이 “간첩도 자궁에다 봉만 박으면 불어”라는 모욕을 당해야 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내가 그 시대를 추체험했다면 거짓말이다. 불가해하지만 과거로만 돌리기 힘든 시절이다. 상당 부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더 찾아보고 싶어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을 훑다가 콧등이 시큰해졌다.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을 묻혀 가지고 선착순으로 와야 할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디까지 흔들렸을지 아찔하다. 개미가 가득한 방에 넣고 개미가 온 몸에 달라붙게 했다는 대목에서는 구역질이 나왔지만 밥맛을 잃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저녁밥을 맛나게 먹었다. 타인의 고통을, 과거의 아픔을 제것처럼 느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황광우님도 어떤 교훈이 아니라 과거를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만지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육군교도소에서 자행된 폭력에 침묵한 자신이 싫다며 빵을 똥통에 던졌다. 후회가 되어 화장실에서 빵을 꺼내 먹을 때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를 고통스레 바꾼다. 아! 이 분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 하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다. 윤상원은 감칠맛 나게 노래를 잘 불렀고,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일기를 써내려 간 로맨티스트였다. 김남주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겠어요?”라고 넋두리하며 호구를 이었다. 내가 이 분들을 근엄한 투사로만 관념화하고 박제화하지는 않았나 반성한다. 이네들도 맞으면 아프고, 죽으면 슬프고, 배곯으면 고픈 똑같은 인간이었다. 물론 황광우는 통닭 대신 논어, 맹자를 달라고 했다. 윤상원은 도청을 나서지 않았고, 김남주는 우유곽에 시를 새겼다. 그러나 이들의 초인다운 면모가 인간다움을 가리지 못한다. 이 분들이 총칼보다 무서운 사람이었기에, 끝끝내 인간다움을 버리지 않았기에 성스럽고 아름답다.


글쓴이는 “여전히 역사에서 ‘수’의 의미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라고 선언한다. 셀 수 없이 반복되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참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다. <나이 서른에 우린> 가사처럼 세월의 무게라는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요즘은 말하기가 너무 쉽다. 쉽고 쉬운 입을 놀려 이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데 정성을 좀 보태면 어떨까. 물론 기억을 구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식을 강요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고 이네들이 산화(散花)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용서하라고 한다. 나는 관용 권하는 사회는 식객의 도덕이며 마름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용서 이전에, 관용 이전에 기억을 논해야 한다. 기억하는 사람의 수, 통감하는 사람의 수를 늘려야 한다. 군부독재가 너무 어이없었기에 한 편이 되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갈라서고 있다. 이 분화는 역사의 발전이지만, 최소한의 공통 분모는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누리는 자유가 본래 마땅한 것이 아니었음을 곱씹는다. 바위 앞에 선 달걀 같던 사람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 가난한 자가 등불 하나를 켜는 심정으로 앎과 삶의 숙명적인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하루를 살자.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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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그리고 개혁

사회 2007. 12. 12. 23:23 |

1.
세상을 떠나 홀로 서있는 사람(離世獨立之人)을 얻어 크게 써서 오래 묵은 폐습(因循之弊)을 혁파하려고 (왕이) 생각했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공민왕과 신돈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나? 동상이몽은 아니었을까? 가장 먼저 이런 의문을 품어 본다. 공민왕 14년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 신돈은 국정의 전반에 등장한다. 공민왕은 재위 23년 동안 원년, 5년, 12년, 20년 4차례에 걸쳐 개혁조서를 반포했다. 그런데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조서의 형태로 일괄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사서의 기록에 산재되어 있어 복원하기가 힘들지만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은 신돈 집권기의 기록이 누락되어 그 시대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그 실례로 신돈 집권기 인사 이동 내역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를 든다. 하지만 기록이 없는 게 오히려 득이 되기도 한다. 가령 왜구의 침략을 분석한 기록을 보면 상황이 다르다. 신돈의 집권 이전 13년 간 44회, 집권기 5년 7개월 간 7회, 실각 이후 3년 간 23회 있었다는 기록을 들어 군사조직 개혁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사서의 기록을 불신하는 측에서는 나쁜 기사는 빼놓지 않고 실었을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신돈의 시대를 곱씹는 일은 부족하고 편향된 사료를 헤집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공민왕 8년과 10년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이 있었다. 개경이 함락되기까지 했고, 삼원수(三元帥)를 둘러싼 극심한 내부 알력도 있었다. 12년에는 흥왕사의 난으로 말미암아 홍언박을 비롯한 공민왕의 측근세력이 제거되고 무장세력이 권력의 일선을 자치했다. 그래서 12년에 발표했던 개혁교서를 선언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13년에는 덕흥군이 원나라의 세력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격퇴했고, 그 해 10월에는 원의 공민왕 복위교서가 도달했다. 이러한 내우외환을 가까스로 수습함으로써 공민왕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 국면을 이용해 내정개혁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인용했듯이 신돈을 등용한 목적은 비단 무장세력의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돈의 등용을 통하여 기존의 정치세력을 모두 억누르고 국왕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려는 의도는 공민왕이 기존의 정치세력들을 세신대족(勢臣大族), 초야신진(草野新進), 유생(儒生)으로 나누며 비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공민왕 5년에 있었던 반원 자주화이라는 대외적 개혁이 성공적이었다면, 사회경제적 모순을 타파하는 대내적 개혁은 신돈 집권기에 가장 빛났다.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민생문제의 해결, 정치운영의 정비와 교육개혁으로 요약된다. 가장 주목되는 건 역시 공민왕 15년(1366) 5월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다. 관리의 근무일수를 승진의 기준으로 삼은 순자격제(循資格制)의 실시, 성균관 중영(重營)과 과거제도 개편 같은 행동도 궁극적으로 전민변정사업을 보완하고 개혁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계개편의 일환이라 볼 만하다. 전민변정도감은 전(田)과 민(民), 즉 토지와 노비를 판정하는 기관을 말한다.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본래의 신분으로 만드는 기능을 하기 위해 꾸렸던 기구다. 기실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 시기의 고유 제도가 아니다. 고려 후기에 토지 및 노비에 대한 행정이 어지러워지자 원종 10년(1269) 처음 설치한 이래 충렬왕, 공민왕을 비롯해 우왕 14년(1388)까지 실시되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 원종 10년, 충렬왕 14년과 27년, 공민왕 원년, 우왕 7년과 14년에 두었다고 쓰여 있다. 공민왕 15년에 설치한 기록은 빠져있다. 식화지나 형법지(刑法志)에 신돈 집권기에 있었던 전민변정사업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애석하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신돈 집권기가 조서의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여파와 더불어 신돈에 대한 폄훼의 산물이다. 『고려사절요』에는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이라고 하고, 『고려사』 신돈열전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고 적혀 있다. 조금 용어가 다르지만 기능은 비슷했다고 본다.


고려말의 토지 문제는 체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권문세족들은 평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면서 조세는 내지 않고 백성들에게는 고리대를 받는 등의 수탈을 자행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고려말의 전민변정사업은 번번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돈 집권기에는 제법 볼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의 판사(判事)가 되어 전민(田民)을 권세 있는 무리들(豪强之家)이 강제로 빼앗아 차지해서 백성들은 병들고 나라는 여위게 되었다(病民瘠國)고 비판하며 변정사업을 시행한다. 신돈은 병든 백성(病民)만큼이나 여윈 국가(瘠國)를 걱정했을 것이다. 억울하게 토지를 뺏기거나 노비가 된 경우를 바로 잡아서 납세와 역(役)을 담당하는 양인이 느는 건 왕권 강화에도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연유로 신돈의 개혁이 친민중적이라 보기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민변정사업은 토지 겸병의 현실과 그 발생의 구조적 모순은 묵과했다. 사패전(賜牌田)의 폐단을 시정하고 농장(農莊)을 해체하려는 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고려사』 편찬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2.
명령이 발표되자 많은 권세가와 부호들이 빼앗은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 신돈은 하루건너 도감에 출근했으며 이인임과 이춘부 이하의 관리들이 소송을 듣고 결정을 내렸다. 신돈이 겉으로 공의(公義)를 가장하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답시고 천민노예(賤隸)로서 양인이라고 호소하는 자는 모두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에 주인을 배반한 노예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인(聖人)이 나셨다”라고들 하였다.
『고려사』 권132, 열전45, 반역6 신돈전


이 기록을 따져보면 신돈이 소인들의 환심을 사는 인기정책을 써서 노비가 주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비판이다. 성인이 났다는 열광도 신돈을 깎아 내리기 위해 인용했을 확률이 높다. 이 빈정거림이 신돈의 본모습을 추적하는데 결정적 증거로 활용된다니 아이러니다. 사가들은 신돈은 토지 및 노비 분쟁에서 편파적으로 판정(偏聽)했다고 비난한다(『고려사』 권111, 열전24, 임박전). 이는 바꿔 말하면 일반민의 입장에서 권문세족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제임스 팔레 교수는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사회경제적인 의미는 거의 없는 정치변동이라 평가절하하면서도 전민변정도감이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건드린 대담한 개혁 조치였다고 평했다(함규진, 『역사법정』, 포럼, 2006에서 재인용) 이러한 가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당대에 잦았던 외침과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전적(田籍)과 노비문서가 망실되었다면 관계 당국이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처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신돈은 “노예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奴隸背主者)”의 편을 들어서 기막힌 반전을 펼쳤다. 아무리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전민변정사업은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은 설득력 있다. 과전법(科田法)에 견주어 제도적 측면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돈의 기용 자체가 제도를 초월한 것이었고 이러한 파격을 통해 개혁추진세력을 육성하고 제도화를 노린 건 아니었을까. 관료체제 정비 등과 같은 제도적인 보완이 개혁의 지속을 위한 노력이라고 볼 여지는 없을까.


아무튼 전민변정사업은 권력자의 선의와 양심에 맡겨진다. 이는 국왕의 강인한 의지와 결단에 의한 집행을 촉구했던 이색을 위시한 사전개선론(私田改善論)자들의 방법론이다. 그들은 전주를 1인으로 한정하는 일전일주(一田一主)의 원칙에 따라 조세징수권이 중첩되는 데 따른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다. 합법적인 토지 겸병 대토지 소유자의 이익을 결과적으로 옹호하게 되는 셈이다. 조준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전혁파론(私田革罷論)자들은 사전문제의 원인과 해법에 차이가 있었다. 혁파하려는 사전의 개념(소유권이나 수조권이냐)과 대상(합법적인 사전을 포함하느냐 마느냐)을 둘러싼 논쟁도 있어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복잡한 측면이 많다. 개선론과 혁파론 모두 자신의 방안이 조종(祖宗)의 전법(田法)을 구현한다고 표명하고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인간의 내면을 중시했던 이색은 제도 자체의 변경보다는 운영의 묘와 부분적인 제도 개선을 주창했다.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의 관리나 수조권자의 책임의식 강화와 도덕성 함양이 필요하다고 봤다. 사마광의 구법당이 연상된다. 이에 반해 조준은 제도 개혁에 역점을 뒀다. 수조지의 몰수와 재분배를 주요 골자로 해서 합법적인 사전마저 혁파하려고 했다. 왕안석의 신법당에 비견될 이러한 시도는 고려의 통치체계가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하다. 사실 사전개혁에 반대했던 인물 가운데는 이성계 일파에게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인물이 많다. 이네들은 사전이 혁파되더라도 경제적 기득권을 크게 훼손 받지 않았을 공산이 컸다. 그럼에도 양측이 갈등한 까닭은 사전개혁 논쟁이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였음을 말해준다.


물론 사전개선론자들은 경제적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욕구가 충만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개량을 통해 현 지배질서를 존속하려는 측면이 적잖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전개선론자들을 수구의 온상으로 매도할 수 있을지는 조심스럽다. 사전혁파론자들에게서도 생산자인 농민계층에 대한 특별한 대책은 찾기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과전법은 당초 혁파론자의 계획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혁파론자들은 기본적으로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일반 백성을 비롯한 모든 국민들에게 배분하려고 했다.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이 온갖 방해를 해서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하면서도 고려의 문란한 전제에 비하면 몇 만 배가 낫다며 자부했다. 하지만 혁파론자 가운데 정도전이 급진적인 입장이었음을 감안하면 혁파론이 일반민을 위한 개혁을 표방했지만 지배계층의 교체를 통한 권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된 개혁은 아니었나 흘겨보게 된다. 조준의 혁파론과 이색의 개선론의 간극은 생각보다 작을지도 모른다. 민생을 내세웠지만 이는 다분히 역성혁명의 명분에 이용된 느낌이 짙다. 진정 권문세족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당초의 개혁안이 후퇴한 것인지 표면상 걸어놓은 구호와 달리 통치질서의 교체에 주안점을 두었는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여하간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개인 소유지는 그대로 두고 이에 대한 수조권을 국가가 가졌다. 수조권 토지와 불법적 탈세지는 몰수해 수조권을 재정비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과전법에 대한 다채로운 평가가 많아 취사선택하기가 어렵다. 과전법을 박하게 평가하는 이는 고려의 전시과(田柴科) 제도와 본질상 동일하다고 보기도 한다. 집권세력의 몰락과 신흥세력의 득세를 초래한 지배층 내부의 개혁에 그쳤다는 지적도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른 토지 소유권 조정이 아니라 수조권을 재분배했을 뿐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과전법상 토지(관직복무의 대가로 부여되는 토지) 수요가 늘어나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은 신랄하다. 실제로 과전법은 공신, 관리의 증가로 사전이 계속 부족해졌고 세조 12년(1466)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했다. 현직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다 보니 퇴직을 대비해 재직 중에 수탈이 심하다는 폐해가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점이 토지 국유제를 관철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다. 결국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향상은 단순히 지배층의 제도 개혁으로 만족할 사안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소유권에 기초한 지주전호제가 일반화되자 농민들은 창조적 방법으로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소작쟁의를 통해 경작권을 인정받는 등의 공력을 기울였다. 소작농에서 자영농이 되기 위한 끈질긴 분투가 기득권 세력의 양보를 받아냈으리라. 이 험난한 과정은 기득권 세력이 스스로 기득권을 내어놓은 역사가 없다는 걸 담담히 증언해주고 있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했던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꼬박 100년이 걸렸다. 개혁은 결코 국민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민주주의 좋다는 게 뭔가. 그것은 계몽군주에게 기대지 않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3.
신돈의 개혁은 위법적인 토지 점유를 방지하고 감찰과 재판 위주로 진행되었다. 전국적으로 얼마만큼의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기록상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공양왕 4년 2월의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이 정한 소송법에서 공민왕 15년 당시에 내려졌던 전민변정도감의 판결을 인정해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정확성을 짐작하기도 한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조)<각주>. 신돈의 개혁은 일견 사전개선론자들의 논리와 유사하고, 심화된 문제의식을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돈의 전민변정사업의 흐지부지되자 더 이상 이런 수준의 개혁마저도 속행되지 못했다. 신돈의 몰락 후에 발표된 공민왕 20년의 개혁에는 토지관계 조항이 하나도 없어 신돈의 개혁을 부정하는 세력에 장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돈의 개혁마저 감내하지 못했던 고려는 자체 정화능력을 상실한 듯싶다. 신돈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던 것은 어느 정도 실제적 효과를 거둬 일반민의 기대를 충족시킨 실행력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내용상에서 큰 차이가 없었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신속하거나 광범위하게 추진했다. 물론 신돈의 지지세력에는 부원배나 권문세족들이 참여해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뒤섞인 측면이 있다. 여기다가 국왕의 신임에 의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취약한 기반 때문에 전제개혁을 추동할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정책이 한시나마 실효를 거뒀다면 집행역량을 바탕으로 기층 민중에게 정책 신뢰성을 획득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러한 실천적 모습은 사전혁파론자의 적극적 자세와 잇닿는 면이 있다. 아니 신돈의 개혁이 실패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사전혁파론자들은 이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채워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으나 망설여지는 건 역시 조선조 사가들의 갖은 악평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신돈에 대한 사료는 정사가 유일하다. 신돈은 신하로서의 법도를 무시하고, 뇌물과 아첨을 좋아하고 여색을 밝혔으며, 호화주택을 과다하게 보유했다는 등의 비난을 받는다. 신돈의 사치와 방탕이 과장되었다는 심증이 있으면서도 그의 도덕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막막하다. 1968년 민현구 교수의 연구 이후에 신돈이 개혁가였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사료가 나오지도 않았으면서 행간의 의미를 재해석했기에 개인적인 추단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필이 왜곡되었다는 건 통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될 때도 그의 정통성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1389년 우왕 복위사건이 벌어지자 비로소 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는 대의를 내걸고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잔혹한 조작은 고려 말기의 사료가 얼마나 윤색되었을까 불안하게 한다. 당대의 기록이 허구라면 오늘날 과연 실체적 진실을 복원 가능할까라는 회의가 든다.


그러나 중기(中期) 이후로 임금노릇을 잘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폐신(嬖臣)에게 혹(惑)하고 밖으로는 권간(權姦)에게 제어(制御)되었으며, 강한 적들이 번갈아 침노하여 전쟁이 빈번하였고 나라가 쇠퇴(衰退)하여 가성(假姓: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한 것)이 왕위를 빼앗아 왕씨(王氏)의 제사가 끊어지기에 이르러서 공양왕(恭讓王)이 반정(反正)하였으나, 마침내 어둡고 나약해서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으니, 대개 하늘이 진주(眞主)를 낳아서 우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신 것은 진실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고려사절요』를 올리는 전(箋)


하늘이 장차 한 나라를 망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임금을 내고, 마음이 간사하고 흉역(凶逆)한 신하로써 그 사이에서 죄악을 양성(釀成)하여 임금을 미혹시키고 정신을 손상시킨 뒤에야 나라도 따라서 망하게 됩니다. 고려는 개국한 지가 장차 5백 년이 되어 가므로, 하늘의 돌보아줌이 이미 느슨해져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공민왕을 내었으며, 또 간사하고 흉역한 신돈을 내었습니다.
『동국통감』 공민왕 20년(1371) 신돈 처형 후 사론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서를 보면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신돈의 자식이 왕위에 올랐으니 고려의 멸망은 천명이라는 논리가 도출된다. 오백 년 고목을 찍어내기가 녹록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신돈과 우왕 부자는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다. 신돈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악마성의 표지가 된 건 아니다. 정사의 기록을 수용한다면 그의 집권기 전후로 이미 반대하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신돈의 시책에 대한 반발이었든 그 자신의 덕망이 부족해서 빚은 문제였든 간에 신돈은 당대에도 적잖은 미움과 견제를 받았다. 공고한 연줄망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적들을 과도하게 징벌한 면도 있다. 자신의 권세가 지나치게 커져서 시기심 많은 왕이 이를 꺼릴까 두려워 반역을 모의했다는 기록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 또한 신돈의 죽음은 공민왕의 선택이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신돈 권력의 비대화가 우려되었을 수도 있고, 측근정치로서의 쓸모가 다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요인과 더불어 중국대륙의 판도 변화도 작용했다고 본다. 신돈의 집권기에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영전을 짓느라 애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공민왕은 17년(1368) 1월 명나라가 건국되고, 그 해 8월 명이 원나라의 대도(大都)를 함락시키는 국제정세를 챙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명나라의 침략되는 만큼 내정개혁을 보류하고 무장세력을 주축으로 전시태세를 갖추고, 권문세족의 경제력을 지원 받기 위해 신돈을 처형했다. 왕의 결단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신돈은 집권 초기에 왕에게 건넨 말대로 “백성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평안을 누리게 한 연후에 옷 한 벌과 바리때 하나만 들고(一衣一鉢) 다시 산으로 돌아갈 생각”이 서서히 가셨는지도 모른다. 절대권력 앞에 그라고 절대부패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요승이라는 누명을 벗겨줘야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나 돌아본다. 그래도 그가 죄보다 많은 벌을 받는 건 안쓰럽다. 이는 반대로 조선 건국자가 공보다 많은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조선 건국이 고려 후기의 심각한 체제 동요를 극복하고 민생 안정을 이뤄 역사 발전을 일구었다고 하자. 우리는 이 대목에서 목적은 수단을 어디까지 합리화할 수 있는가, 결과만큼이나 과정을 중시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품어야 한다.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의 좌표를 삼는 건 목적과 수단, 과정과 결과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일 테다. 여말선초를 단순히 개혁과 반개혁의 대립으로 가르지 못하는 이유다. 개혁은 절대선도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개혁은 늘 언제나 무결하지 못하다. 우리는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많이 접했다. 개혁은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허물어지기도 하고, 지지층의 환멸로 어그러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권태와 부단히 싸워나가야 한다. 스스로를 욕되게 한 다음에 남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는 말씀을 실감한다. 개혁을 말하는 이들이여, 부디 실패에서 배우시길. 원칙 있는 패배 또한 아름답지 않는가. - [無棄]


<각주>
병신년(丙申年) 이전에 소송에 대한 명확한 문건이 없으므로/없는 것, 정미년(丁未年) 이전의 일과 무진년(戊辰年) 이후 변정도감 및 도관(都官)이 이미 판결한 것은 다시 신고하지 못한다.
丙申年前無爭訟明文 丁未年前事及戊辰以後 辨正都監及都官已決者 不許陳告
『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3
* 형법지 소송조에는 4건의 기사가 있다. 논의의 편의상 순서대로 소송2, 소송3, 소송4라고 번호를 매겼다.


이 구절에서 병신년이 공민왕 5년(1356)이고, 무진년이 우왕 14년(1388)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정미년이다. 공민왕 16년(1367)과 충렬왕 33년(1307)으로 견해가 갈린다. 일찍이 민현구 교수는 無爭訟明文을 병신년 이전에는 소송의 명문이 없어 논의될 여지가 없으므로, 이 때를 상한으로 그 이전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보았다(민현구,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下)”, 『역사학보』 제40집, 역사학회, 1968, pp. 53~119 참조). 다시 말해 1356년 이전의 쟁송명문이 없다는데 1307년을 거론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丁未年前事는 공민왕 5년~15년(1356~1366)까지를 가리키게 된다. 공민왕 15년은 신돈이 전민변정사업을 주재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의 판결을 인정한다는 자료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주본은 소송3의 바로 앞 기사로 공양왕 3년의 상소문을 실은 소송2에 忠烈王丁未年以前事라고 명기된 구절이 있는 만큼 충렬왕 33년(1307)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봤다(김일권 외, 『고려시대연구 8』,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참조). 그래서 無爭訟明文을 “쟁송한 명문이 없는 것”이라고 풀이해 상한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1307년에서 1356년 사이에도 쟁송한 명문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정미년이 충렬왕 27년(1301)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을 의미한다거나, 충숙왕 원년(1314)에 완성된 전적(田籍)인 갑인주안(甲寅柱案)의 작성 이전 시기를 통칭한다는 논거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볼 경우 굳이 1307년이라는 기준을 세웠어야 했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본문에서는 정미년을 민 교수의 견해에 따라 1367년으로 봤다. 오기나 결락이 없다고 가정할 때 정미년을 1307년으로 볼 근거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어색한 부분도 다소 보인다. 소송2는 토지에 관련된 기록이라면 소송3은 노비에 관한 기록이다. 비슷한 문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정책목표가 다소 다른데 같은 기준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민 교수도 충렬왕 1307년 무렵에 노비 변정(辨正)에 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고 논설한다. 그나마 인접한 시기인 1301년의 전민변정사업은 유명무실했다고 평가받는다. 아울러 소송4의 기사를 보면 “신축년(辛丑年) 겨울에 적이 수도를 범하였을 때 공사 문권이 망실되어 거의 다 없어졌는데, 간악한 자들이 이것을 계기로 하여 사건의 단서를 꾸며 일으키고 있다”면서 신축년의 쟁송명문이 없는 자는 다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게 하라는 상소가 나온다.


여기서 신축년의 일은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수도가 함락되었으니 1361년 이전의 쟁송명문이 상당수 소실되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356년 이전의 쟁송명문도 마찬가지로 많이 망실되었을 텐데 1307년이라는 기준을 내세우는 건 동떨어진 감이 있다. 설령 1307년이 맞다고 해서 그것이 신돈 집권기의 판결 효력이 완전히 부인되는 건 아니다. 소송2, 소송3 기사 모두에서 “다섯 번의 판결에서 세 번 이긴 것과 세 번의 판결에서 두 번 이긴 것을 따른다(五決之三 三決之二/五決從三 三決從二)”라고 했는데 신돈 집권기에 이루어졌던 판결의 효력은 이 대목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다섯 번 심리할 것을 세 번으로 하고 세 번 심리할 것을 두 번으로 한다”라고 해서 판결의 신속성을 강조하는 문구로 해석하면 또 달라진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돈의 실각 이후에 신돈 집권기의 판결이 아예 배제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하기 힘들다. 고려말 여러 전민변정사업 가운데 신돈 집권기가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나쳤을 수도 있다. 이런 머뭇거림에 얽매이지 않고 정사의 기록을 비판하며 재해석하려는 입장에서는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다. 신돈 집권기의 성과가 철저히 부정된 증거라고 투덜거릴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정사는 우왕과 창왕 아래서 녹을 먹던 이들이 우창비왕설을 내세우고, 그네들이 진짜라고 옹립했던 공양왕마저 비참하게 죽였던 자들의 기록이다. 그네들의 양식을 얼마나 신뢰해야 하느냐를 따지는 건 참 고심스럽다. 애매한 자구 해석은 이 정도 톺아봤으면 됐지 싶다. 들인 품에 비해 실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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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구
:

정부가 각 부처의 브리핑룸과 기사송고실을 통·폐합하는 방안을 심의해 확정했다. 기자실 통폐합을 놓고 언론과 정치권의 비난이 거세다. 그런데 누리꾼들의 댓글이나 블로거들의 글은 사뭇 다른 양상이다. 수많은 언론학자와 법학자들의 이 조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긍하지 못하고 항변하는 이들이 많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 정보를 주로 얻는 신문, TV뉴스, 정치권 성명 거의 모두가 한 목소리인데 설복되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어인 영문인가. 언론사 세무조사로 귀중한 언론 지면을 정부 성토장으로 쓰던 시절에도 몇몇 언론은 다른 목소리를 냈었다.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이 한 목소리인데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독자와 국민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내 기억에 이례적인 현상이다.


나는 기자나 공무원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인데 도토리 키재기로 누가 더 나쁜 가를 재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냐는 볼멘 소리에 적잖이 동감한다. 행정부의 공개 수준이 여전히 미흡하기 때문에 기자들의 접근이 차단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맞다. 기자실이 공무원을 접하는 방편(方便)으로서의 기능할 가능성이 있는 건 감추고 담합의 가능성만 부각시키는 건 균형을 잃은 처사라는 것도 공감한다. 원론적으로 말해 이번 사안은 언론도 정부도 함께 노력하면 그만인 일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가 있지만.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무원 조직에게 더 큰 책임을 지워야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마땅해 딱히 반박할 명분이 없다. 일반 국민들이 공무원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건 지당하다. 하지만 언론 자신들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기에는 좀 화끈거리지 않는가. 자신들이 그렇게 약자이고 책임이 덜하다고 생각할까?


기자실이 없는 수많은 선진국들에 견주어 우리네 정부의 취재 환경이 열악한 게 사실이라면 그것을 차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다. 괜히 언론 탄압을 들먹이면서 사생결단 하는 건 민망하다. 언론 자유를 억압하던 시절 방기하거나 심지어 동조하던 이들도 졸지에 언론 자유를 외치는 걸 보면 그만큼은 살기가 좋아진 모양이다. 언론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싸우는 건지 언론의 취재 편의를 위해 싸우는 건지 헛갈린다. 아마도 언론들의 과장된 수사가 거부감을 유발한 모양이다. 기자실을 유지해 국민의 알 권리가 신장된다는 확신도 없기도 하다. 기자들이 소속 언론사 데스크의 입맛에 어긋나는 기사를 쓸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자칭 비판 언론들의 트집 잡기는 식상한 수준이 아니라 측은할 정도다. 비판은 최대주의적으로 까는 게 아니라 최소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훌륭한 집도의는 피를 적게 흘린다고 하던데.


슬프게도 많은 이들이 기자란 집단의 자정능력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듯싶다. 이게 정부 탓은 아닐 게다. 언론의 권위, 기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걸 누구에게 시비한단 말인가. 권위라는 말이 싫으면 기품이라고 해도 좋다. 대다수 국민들은 대다수 정치인이 제 몫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대다수 기자들이 제 노릇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이 제 몫을 채우지 못하는 게 정부가 공개하는 정보가 적어서 만은 아닐 게다. 정부로부터의 독립만큼이나 중요한 건 편집국 데스크로부터의 독립이 아닐까 싶다. 시사저널 사태에 대다수 언론이 침묵하고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기자님들은 신장된 자유를 어디에 쓰시는 걸까? 물론 나의 이런 넋두리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정부 취재 논의를 하는데 편집권 이야기를 하는 건 논의의 본질을 흐린다. 그러나 몇몇 온라인 매체를 제외하고 거의 같은 논조의 기사들이 난무하는 걸 보면 이 분들이 정부의 독선이나 획일성을 질타할 수 있을지 난감하다.


나는 바쁜 국민들을 대신해 언론이 정부의 고급 정보에 더 많이 접근해 그 문제를 파악하고 알려나가길 바란다. 기자들에게 보통 사람들보다 좀 더 내밀한 접근 권한을 준 것은 그런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역할에 충실했는가 스스로에게 반문해볼 수는 없을까? 언론은 사악한 정부에 맞서 진리와 정의를 수호하는 절대선인가? 정부도 국민이 비판하면 반성하는 시늉이라도 할 줄은 안다. 정당도 표 때문에라도 엎드린다. 가장 자성의 소리를 듣기 힘든 곳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다. 자기네 사주의 억울함(?)을 항변할 줄은 알았지 스스로 반성하고 고쳐나가겠다는 말은 좀처럼 안 보인다. 결국 언론의 십자포화에 상당수 국민들의 핀잔은 묻히고 정부는 항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지는 못하리라. 믿음은 남에게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남을 구박할 권리는 언론 집단에게 자연스럽게 도출된 권리가 아니라 국민이 맡겨둔, 빌려준 권리가 아닐까?


나는 정부가 기자들이 공무원을 접촉하는 걸 상당 부분 제약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 불만스럽다. 강준만 교수님 말씀대로 “언론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다 해도 ‘최악’을 감시하기 위해선 ‘차악’이라도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러 언론업 종사자들을 투덜거렸지만 공직 사회의 폐쇄성 또한 밉살맞다. 기자실 통폐합을 선진화라고 밀어붙이기에는 정부가 그리 떳떳하지 못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한미 FTA 추진 과정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후퇴시켰다. 정부 역시 기자실 통폐합에 상응하도록 행정 정보 공개를 넓히는 후속 조치를 내려야 한다. 나는 이게 윈윈이라고 생각한다(정부가 취재 편의 증진 방안을 내놓겠다고는 한다만서도). 강 교수님은 “이게 과연 한나라당 정권하에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권유하지만 그건 편견이다. 기자실 통폐합의 좋은 취지를 새로운 집권 세력이 악용한다는 논리라면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선의를 친북 세력이 악용한다는 주장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정일용 한국기자협회장 말씀대로 “정부가 정말 공무원들과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공무원 사회의 폐쇄성을 타파할 생각이라면 먼저 그것을 확인해주고 무엇을 하더라도 늦지 않”았다. 이런 방법상 혹은 선후관계의 실책은 인정하지만 기자실 기능을 대체하는 오히려 능가하는 행정 정보 공개로 논의의 초점을 옮겨가야 한다. 이 과정이 기자의 누림을 좀 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가 누리는 것을 좀 줄이더라도 국민의 세금도 절약(기자실 운영 비용)하고 국민의 정보 접근권도 높이는 방향으로 힘을 모을 수는 없을까? 반성해야할 건 정부만이 아니다. 언론의 권위나 기품이 추레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언론권력이 스스로를 신성시하는 것일 테다. 성역을 없애겠다는 이들 자신이 성역이 되는 모습은 희극이라기보다 비극이다. 여담으로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데 모든 언론사 홈페이지 메인 화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구독 중지를 손쉽게 신청하는 배너를 만드는 건 어떨까? 이솝우화에 나오는 병 문안 온 짐승을 잡아먹는 사자 동굴은 들어가기는 쉬운데 나오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끊기는 어려운 이 요상한 구조를 허무는 것은 가장 쉬운 수준의 언론개혁이 아닐까 싶다. 언론에 대한 평가는 절독 밖에 없으니 해보는 말이다. - [無棄]


* 노파심에서 추신 - 저는 제 주변에 알고 지낸다고 할 만한 기자가 단 한 분도 없습니다. 만약 기자분의 고충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 모질게 말하지는 못했겠지요. 오히려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속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기자란 직종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명제에 적극적으로 동감하지는 않는 녀석입니다. 가령 기자 같은 직업은 보통 생활인과 비교해 좀 더 멋지고 영향력도 있는 데다 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기대가 커서 실망도 큰 것이겠지만요. 상당수 기자분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시는 거 같아 아쉽네요. 하긴 뭐 기자의 밥그릇 동맹은 특별히 숭고하지는 않아도 특히 더 나쁜 건 아니니까요. 저는 궁극적으로 이 논의가 기자들의 기품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특권이 아니라 기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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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입니다)


고종석 선생님의 신간 『바리에떼』(개마고원, 2007)의 서문에는 2부의 첫 번째 글인 <식민주의적 상상력>(이하 <상상력>)을 꼼꼼히 읽어달라는 당부의 말씀이 있다. 나는 그 부탁에 기꺼이 호응해 삼일절 새벽에 그 글을 가장 먼저 읽었다. <상상력>은 복거일 선생님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이하 『변호』)를 비판한 글로서 친일 문제에 대한 많은 성찰거리를 남긴다. 『변호』는 일제 식민통치는 가혹했으며 조선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설파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식민통치가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다며 인구증가율 등을 들어 논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보인다’는 표현을 쓴 것은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 선생님은 『변호』의 주장을 “과격한 상황론”이라며 『변호』의 저자가 지금껏 취해온 개인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중시하는 우파적 스탠스와 다름을 지적한다. 특히 “이런 환경결정론을 일제 하의 친일 행위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범죄들, 특히 궁핍에 기인한 강력범죄나 ‘이념 범죄’들로까지 넓혀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의 논거가 한결 진지하고 단단해(93쪽)”질 것이라며 권유할 때는 무척 통쾌했다. 『변호』의 논리를 차용해 삼일절 새벽에 거리를 질주한 폭주족들도 이 날의 역사적 의미를 다소 요상하게 기린다는 상황론으로 넘어가 주면 어떨까? 각종 불법과 비리로 구속된 재벌 관계자들이 어려운 경제여건이라는 상황론으로 말미암아 유유히 옥문을 빠져나오는 것보다 훨씬 작은 너그러움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변호』는 통계적 수치를 통해 식민통치의 경제적 효용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유주의자(!)인 나는 그런 식민통치로 이룩한 경제발전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를 몇몇 통계수치로 가늠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가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훼손된 자유에 대한 비용 처리가 너무 인색하다. 추상적 가치를 계량화하기 즐기는 복 선생님의 장점이 바래는 순간이다. 고 선생님의 의구심대로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변호의 연장선에서 박정희를 바라보고 있(107쪽)”다 보니 이런 무리수를 던진 건 아니었을까.


복 선생님은 징집제도로 젊은이들이 맛보는 비참함은 우리 사회의 복지를 크게 줄인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또 징집 제도는 병사들의 낮은 생산성도 문제된다며 주관적 측면에 대한 계량적 접근을 시도한다(복거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문학과 지성사, 1996, 197~203쪽 참조). 이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복 선생님은 『변호』에서 예의 그 장기를 선보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 징병제 국가가 되고 군사주의 문화에 시달리는 게 일제와 아주 무관하지 않기도 하다.


일제가 조선을 돼지 키우듯이 먹여놓고 탐스러운 살코기를 음미하려했는지, 진심으로 내선일체를 퍼뜨려 이등국민으로나마 편입하려 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도록 하자. 조선과 비슷한 정착자 식민지로 손꼽히는 미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상상력>의 논박으로 충분할 듯싶다. “앵글로색슨족의 입장에서는 세 나라가 지상의 낙원일지 모르겠지만,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고향(101쪽)”에 지나지 않음은 또렷하다. 추출 식민지와 정착자 식민지 사이의 섬세한 차이를 헤아리는 것보다 “모든 식민주의는 그냥 나쁘다(105쪽)”라고 외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복 선생님이 힘주어 말씀하시는 그 자유주의가 경제적 자유를 떠받드는데 힘을 다한 나머지 정치적 자유에는 무심해서 당혹스럽다. 조선인들이 제 자유를 헌납하고 이룩한 경제적 이득에 우호적 눈길을 건네는 게 마뜩잖다. 게다가 그 헌납은 자유의지도 아니었다. 이런 점들을 부러 견뎌내더라도 “‘우리 모두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탓하랴’ 하는 전 국민적 반성주의(123쪽)”만큼은 단호히 반대한다. “죽은 자는 더 궁극적 소수다. 산 사람들과는 달리, 죽은 사람들은 연합을 이룰 수 없다. 그들은 홀로 누워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후대 사람들의 선고를 받는다”는 복 선생님의 주장에도 거의 동감할 수 없다.


안락하게 자연사함으로써 일신과 가문의 부귀영화를 건사한 이들은 충분히 남는 장사를, 보다 정확히는 부당이득을 취했다. 『변호』를 소수를 위한 변명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너무 다수였고 주류였다. 다수파와 주류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강요하는 건 어색하다. 관용은 의무라기보다는 권리다. 친일 행위를 했던 지식인 및 사회 지도층을 더 엄준하게 꾸짖는 것이 사회 발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억지스럽다. 그네들이 누렸던 자유만큼의 책임을 요청하는 건 그리 지나친 요구는 아니다.


사회 상층부에 대한 윤리적 기대 수준을 낮추려는 시도는 일제시대에 지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 파장이 전해진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커녕 남들 다 지키는 준법정신도 발휘하지 않은 이들이 사회 상층부에 머무르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지식인의 변절이 일제에게 적잖은 선전 도구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변호』는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이 없어진다(無恒産無恒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들의 단골 문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맹자는 곧이어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으면서도 항상 꾸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만이 가능하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고 말씀한다. 무항산유항심은 차치하고 무항산무항심도 아니고 유항산무항심이었던 지도층을 보는 씁쓸함이 가시지 않는다.


일전에 유시민 선생님은 민주화 유공자 보상법을 게임이론을 빌려 설명하며 경제정의의 실현으로 볼 것을 주창했다(유시민, 『WHY NOT?』, 개마고원, 2000, 74~84쪽 참조). 나는 그 제안에 공감하며 반복되는 게임에서 대한민국 구성원들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탄탄한 경제정의를 세우길 희망한다. 일제 치하와 같은 암울한 상황이 다시 벌어질 때 자유를 애호하고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과 지식인들이 더 늘기 위해서라도 친일파에 대한 최소한의 기록과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열악한 형편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 ‘배신전략’보다 ‘협조전략’을 선택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접근이라고 본다.


역사는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복 선생님은 ‘진화’라는 말을 좋아한다. 복 선생님은 진화에도 큰 추세는 있음을 인정한다(“‘친일은 없다’ 발언으로 논란 일으킨 복거일씨.” 동아일보. 2002. 06. 03. 참조). 생존을 선(善)으로 여기는 복 선생님께서도 인간은 점차 이타적으로 나아가는 추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복 선생님은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서 개인들의 이기심은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게임이론의 “‘되갚기’의 놀라운 성공에 담긴 함의들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한다는 통찰(“‘게임이론’ 벗어난 對北유화정책.” 동아일보. 2005. 11. 14. 참조)”을 조명하는 칼럼에서도 그런 낙관이 읽힌다(참여정부의 되갚기 정책이 미흡함을 질타하는 칼럼을 읽으며 나는 그의 되갚기가 편향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이 상호적 이타주의로 진화해감에 있어 되갚기가 필요불급하다면 왜 친일파는 예외가 돼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물며 여기서의 되갚기는 부관참시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며, 후손들을 단죄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진상을 규명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하겠다는 정도다. 광복 이후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최린이 자신의 친일행적을 사죄하며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달라”고 참회한 것과 같은 반성이 드물고 드문 까닭은 친일파들의 상당수는 확신범이었다는 방증이다. 적어도 부끄러움을 인지할 능력을 잃었다는 징표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이 그렇고 그렇게 살다간 자들과 그네들의 후손(특히 힘센 자들)의 명예권, 인격권까지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을까 싶다.


<상상력>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부득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책 제목 바리에떼(Variete)는 프랑스어로 ‘다채로움’이라는 뜻이다. <상상력>을 비롯한 여러 정치 에세이를 관통하는 원칙은 균형감각이 아닐까 싶다.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치유하지는 못한다(58쪽)”는 명제는 이 책의 핵심 주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회적으로든 유전적으로든)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차가운 인식과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지녀야 한다는 뜨거운 믿음 사이의 균형(58쪽)”을 찾기 위한 정성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고 선생님 글을 달게 읽는 이유는 불완전한 인간의 냄새를 맡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좀 더 기품 있게 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의 신산함이 거침없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라는 구절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산다면 한번 뿐인 삶을 대충 살지 않는 힘이 될 것이다. 책에 실린 각종 평론 외에 선생님이 지인들에게 건네는 사랑 표현도 넉넉한 덤으로 읽어봄직 하다. 아니, 또 하나의 본전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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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지난 2월 13일~14일 전체 교수 신임투표가 진행 중일 때 작성한 글입니다. 투표 결과가 나오기 전에 제 입장을 정리해본 글이라 시의성은 다소 떨어집니다. 이필상 전 총장님의 낙마는 여러모로 많은 성찰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이필상 고려대 총장님을 경영학 교수 가운데 드물게 빼어난 분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고대 경영대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마땅히 이 교수님 강의 하나는 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불문율이 있기도 하다. 가장 많은 열성 수강생이 있는 경영학과 강의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경영학자에게도 기품을 기대할 수 있다면 이 교수님을 앞자리에 꼽고 싶다. 고등학교 시절 백분토론 등을 즐겨볼 때 종종 패널로 나오셔서 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풍부한 식견을 보고 배우며 내가 팬을 자청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일련의 사태는 더 가슴이 아프다.


최근 마광수 연세대 교수님이 최근 펴낸 시집에서 제자의 시를 부분적으로 베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마 교수님이 표절 사실을 시인한 일이 있다. 연세대측은 도작이 드러난 교수가 문학창작과 관련한 교과목을 맡는다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마 교수님의 모든 수업을 폐강시켰다(성현석. “이필상 총장이 마광수 교수에게서 배울 점.” 프레시안. 2007. 02. 09. 참조). 물론 마 교수님의 과오는 변명할 여지가 없지만 일단 아니라고 잡아떼고 보는 풍토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난해 8월 이필상 총장님은 <연합공보>에 기고하신 글에서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님의 눈문 표절 파문에 대해 “논문 표절 비리는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칼럼을 기고하셨다. 이 총장님께서 김 전 부총리님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가?”라고 물으셨지만 사실 그 질문은 너무 매섭고 날카로워서 남에게 선뜻 던지기 망설여진다. 그 물음은 남에게 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먼저 여러 번 던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무능도 부끄러움의 능력을 잃은 것만큼 부끄럽지는 않다(고종석. “환멸을 견디는 법.” 한국일보. 2004. 06. 30. 참조)”는 고종석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어 본다.


표절의 경우 3년의 공소시효가 있다고 한다. 이 총장님의 표절 의혹이 발생한 시점은 20년 전이라고 하는데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건 너무 지나치다. 보다 섬세하게 논의를 하자면 표절에도 수위가 있으리라. 표절 아니면 결백 이렇게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닐 공산이 크기 때문에 단순히 마녀사냥식으로 접근할 문제도 아닌 듯하다. 가장 염려되는 점은 앞으로 교수님들이 학생들과의 공동 저술을 꺼리는 분위기가 퍼져 후속 학자를 양성하는 연구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정기원. “표절시비.” 한국경제신문. 2007. 02. 08. 참조).


비례원칙을 넘어서는 무분별한 매도행위에는 반대하지만 전체 교수 투표 또한 그리 바람직한 수단이 아니라는 건 명징하다. 내 모자란 머리로 궁리해볼 때도 진리가 다수결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도 또렷하다. 나는 이런저런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기로 했다. 기실 ‘학내 정치’는 변수(變數)가 아니라 늘 존재해왔던 상수(常數)에 가깝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이 총장님 논문의 표절 여부이기 때문이다. 이 본질을 흩뜨리는 곁가지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로 했다. 진실이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더라도 진실한 태도만큼은 남아 희망의 싹을 틔우는 것을 적잖이 보았다.


진상조사위의 결론이 미덥지 않다면 차라리 재무관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논문 표절 검증을 맡기는 방식을 제안하는 게 더 실효성 있다고 생각한다. 상당부분 표절이 인정될 경우 총장직 수행에 결정적 흠결이 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나는 학교의 단합을 위해 용퇴하라는 주장에는 동감하지는 않지만 김 전 부총리님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껏 촘촘해진 학문적, 윤리적 체를 이 총장님이 통과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고 보면 옛날 사람들의 출처(出處,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에 대한 자세는 너무 깐깐해서 탈이었다. 탄핵 상소가 올라오면 그 날로 벼슬자리를 버리고 낙향해버리기 일쑤였다. 일단 비판하는 말이 들려오면 관직에 물러나는 시늉이라도 하는 그 시절의 풍속이 때로는 너무 넘쳐서 황당하다. 허구한 날 상소-사직-등용의 무한반복이 이어지다 보면 행정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낮아지는 문제가 있었을 듯싶다.


남명 조식은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 하나에 달려있다”고 강조하셨고, 그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이 “고금의 인물을 두루 논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본 연후에 업적의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며 스승의 말을 실천하려 했다(이광일. “출처.” 한국일보. 2007. 02. 11. 참조). 이는 행정의 효율성, 효과성보다 더 중요한 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게다. 논문의 출처(?)가 문제되고 있는 요즘, 출처(!)하는 자세까지 함께 성찰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명확한 결론 없이 우물쭈물했지만 틈틈이 박절한 말들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필상 교수님이기에 더욱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충언을 한 것이라 생각해주시길. 부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벌어지는 곳에 맞잡음을, 마음의 가시가 돋아난 곳에 안도의 한숨이 있기를!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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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입니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유나영 옮김, 삼인출판사)는 메시지가 또렷한 책이다. 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의 상징동물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공화당이 만든 프레임에 민주당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코끼리가 되라고 주문하고 있다. 자신의 언어와 자신이 만든 틀 위에서 상대방과 경쟁하도록 만들라는 주장이 신선하다.


프레임(frame)은 통상 생각의 틀 정도로 해석되지만 책에서는 정부나 정당이 설파하는 구호나 선전으로 좁게 쓰이기도 한다. 가령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세금 인하(tax cut)’ 대신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를 만들어 씀으로써 민주당을 압도하는 프레임 우위를 누렸다. 세금의 압제(?)에서 국민들을 구하는 공화당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애틋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미국 민주당의 06년 중간 선거 이전의 잇따른 패배는 공화당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보다 궁극적으로 민주당이 자신들만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함을 글쓴이는 주장하고 있다. 상대방의 실책으로 얻은 승리는 그리 공고하지 못한 건 직관적 경험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집권 여당 의원들 위주로 이 책을 많이 탐독했다고 하는데 이 책의 알맹이는 익히지 못한 모양이다. 기껏 한다는 것이 조악한 정치공학이라니 좋은 책을 읽은 보람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은 06년 5.31 지방선거 직후 <계급의식은 어디로?>라는 칼럼에서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받은 지지의 크기를 보면, 이 사회의 가장 어려운 계층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이 부패한 부자 정당에 표를 건넨 것이 분명하다. 이들의 계급의식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묻는다. 또한 “사회 상층부가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고 하층부가 거꾸로 된 계급의식을 소비하는 허영에 몰두하는 한, 사회 양극화의 출구는 없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이 거의 싹쓸이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를 보면 이 정당이 받은 지지에는 그네들이 좀처럼 보살피지 않는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적잖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투표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게 투표합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 이익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정체성에 투표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이 자기 이익과 일치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쪽으로 투표할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단순히 자기 이익에 따라서 투표한다는 가정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52~53쪽


레이코프는 유권자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않다고 명쾌하게 말한다. 정체성 혹은 가치관은 프레임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레이코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그들은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는 가정은 신화라고 말한다. “진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부합해야 합니다. 만약 진실이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프레임은 남고 진실은 버려집니다(48쪽)”라고 주장한다.


언론개혁에 찬동하시는 분들은 종종 조선일보 프레임, 조중동 프레임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가령 보수 언론에서 세금폭탄이라는 프레임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부동산 이슈를 선점하는 효과를 누린 것을 들 수 있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오늘 신문에 종부세가 8배 올랐다며 세금폭탄이라고 하는데 아직 멀었다”라고 말한 것은 세금폭탄 프레임에 걸려든 셈이다. 2006년 1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당 서적, 인쇄물 구입에 지출한 돈이 월평균 1만 405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2000년 70%에 달하던 신문구독률이 지금은 40%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독서량이 적은데 몇몇 언론들의 프레임이 실재하다면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프레임 재구성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뉴딜(New Deal)을 잡딜(Job Deal)로 바꾸면서 일자리 창출에 선뜻 반대하기 힘들게 만든 것도 프레임 전환을 꾀한 대표적인 경우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평통 발언을 통해 예비역 장성들의 직무유기를 질타한 것도 전작권 환수가 한미동맹 균열이 아닌 자주권 고취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또한 옮긴이의 해제에서 들고 있는 중앙일보 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옮긴이는 중앙일보가 ‘양극화’라는 프레임 자체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중산층 되살리기’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222쪽 참조).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는 흔한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대신에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프레임으로 구성되지 않은 사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단순히 사실을 진술하고 그것이 상대편의 주장과 모순됨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프레임은 사실을 이긴다. 프레임은 유지되고 사실은 튕겨 나간다. 언제나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211~212쪽


글쓴이는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민주주의 주인의식의 기초는 제 이득에 따른 호불호를 밝히는 것이라고 원론적으로 주장했던 내게는 큰 지적 충격이다. 또한 진심과 선의가 반드시 통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기가 여간 힘이 든다. 앞서 언급한 평통 발언으로 촉발된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전 국무총리의 대립각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전달된 것보다 사실이 중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고 전 총리측에서는 “대통령께서는 진의가 아니라고 하시던데 일반 국민들이 무슨 뜻으로 들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이 책에 따르면 고 전 총리가 논리의 적부 여부를 떠나 효과적인 반론을 펼친 것이 된다. 물론 지도자나 지식인이 ‘전달된 것’에만 천착하는 건 민망한 일이지만.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vous devez vivre comme vous pensiez sinon aussitot vous penseriez comme vous vivez)”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이 시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프레임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새로운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어내라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단 자신만의 프레임을 만들 때 듣는 사람을 고려하고 현재의 지배적 프레임을 고려해서 섬세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전히 진실의 편에 서려는 사람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의 인간다움이 고양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의 상당 부분이 허상일 수도 있다. 프레임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통해 내 것의 허실을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으리라. 내 신념을 진실 되게 표현하는 프레임을 개발하고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곱씹어본다. 이 책은 내 인식의 한계를 넓혀준 고마운 스승이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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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책(http://www.mycahier.com)에 groove님이 프랑스 사회당의 새로운 기수가 된 세골렌 루아얄 이야기로 시작해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글을 재미나게 읽었다. 이 글을 놓고 mannerist님과 groove님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란 존재의 “문화적 효과와 심리적 위안”을 놓고 의견이 많이 갈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기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내 신조(?)에 충실해서 두 분의 댓글 가운데 새우범생이라는 아이디로 내 잡설도 살짝 달아봤다.


저는 기왕이면 여성에게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계속 따라 다닐 것 같습니다. 여성 권력자들이 특별히 부귀영화를 마다할 리는 없겠지만 기대를 가져볼 만 하다는 건 또렷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기대는 아직 권력의 단맛(?)을 많이 못 본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담백함 같은 것이겠지만요. 여성이 남성에 비해 특별히 더 유능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잘못된 희망을 퍼뜨리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성을 높이는 건 잘못된 희망이 아니라 마땅히 실현해야할 과제가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 수단이 좀 과격해서 당혹스럽기는 하지만요.^^; “심리적 위안과 문화적 효과”보다 더 논의의 진전 혹은 의견의 일치를 보기 힘든 대목이 바로 남성 후보보다 부적합하고 무능한 여성 후보 골라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박근혜님은 그나마 공적 행위가 많이 드러났지만 대다수 예비 여성 지도자들은 정보도 많이 부족하고요. 부족한 게 아니라 잘 알려고 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요.


개인적 차원의 내적 감정을 정치적 주장으로 논의하는 것의 해악을 지적하신 mannerist님의 말씀은 절반만 동감합니다. 문득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제물로 끌려가는 소가 가엾게 여겨져서 보지 못한 양을 제물로 쓰게 되었다는 희생양의 고사가 여기에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구체적 생활의 문제를 건드리는 생활정치(Micro-politics)는 결국 개인적 경험과 식견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사익의 단순합이 공익이라는 공익과정설(공익 = ∑사익)을 비교적 지지하는 터라 개인적 차원의 이해와 발언이 그리 구박될 사안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물론 지식인, 공직자 등에게는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다른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이용하려는 점은 비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 또한 거시적 통찰 혹은 일반균형분석을 해내는 안목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이를 기르기 위해 노력하려고요.


각종 통계를 보면 선거 때 기왕이면 여성을 뽑겠다는 사람들이 적잖음에도 늘 과소 대표되는 게 이상했습니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 대놓고 공언하지는 못해도 여자라서 찍는다라는 사람보다 여자라서 안 찍는다는 사람이 더 많은 탓인 거 같아요. “박근혜는 여자라서 안 될 거다”라는 말을 주위에서 많이 접한 제 개인적인 경험이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저는 성별 구분 없이 능력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편애 혹은 혐오의 수준이 여성과 남성이 차이가 나는 거 같더라고요. 이런 지극히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저는 차마 양비론을 꺼내들지는 못하겠습니다. “소수파를 소수파로 묶어두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 윤리에 어긋”난다는 고종석 선생님의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야할지 정말 어렵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비례대표나 공천의 여성 할당제보다는 여성후보에게 득표수의 일정 %를 가산해주는 우대조항이 더 실효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런데 이걸 채택한 나라가 있기는 한가요?). 아마 위헌 논란도 있고 역차별 문제도 있겠지요. 정당 경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게 만병통치약이 아님은 자명하고요. 하지만 아무리 제도적 보완을 해도 미미한 효과에 그친다면 한시적이나마 좀 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물론 생물학적 여성만이 선출직 공직자에서도 특혜(?)를 받아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이 남습니다. 그나마 생물학적 여성은 양적 다수파(적어도 절반)라도 되지만 양적 소수파인 약자들이 참 많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의 절반이 누리는 삶의 질이 제법 향상된다면 그 동력을 발판으로 사회적 약자와 문화적 소수파에게 건네는 눈길도 좀 더 넉넉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여성에 대해 가해지는 편견과 질시조차 극복하지 못하면서 그보다 더 낮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듬을 수 있을지 회의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계급문제에 둔감한 여성주의 운동”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반쪽짜리 시각이고, 부분균형분석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수긍하지만요.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으로 다시 돌아가면 이라크 민간인들의 원통한 죽음에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이 김선일씨의 죽음에는 격렬한 슬픔을 보이는 게 나쁜 일일 거 같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그게 어디냐” 싶습니다. 인간 이성과 감정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노력과 그 한계를 좀 줄이려는 노력을 동시에 진행해야겠지요.


매우 재미나고 배울 점이 많은 댓글들의 빛남을 흐리는 잡글을 썼습니다. 해량해 주십시오.


mannerist님께서 내가 쓴 댓글과 관련한 코멘트를 해주셨다.


난 대체 그 '문화적 효과'라는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묻고 싶다. '우리도 저기까지 갈 수 있다'는 희망? 김규항의 말마따나 지독한 정치적 남성인 정치인이 펴나갈 정책 아래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난 되려 이게 더 나쁘다고 본다.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어 쓴다)무제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그로 인한 반 여성화 정책을 핀다 해도, 여성이 최고 의사결정자 자리에 있다면 '남녀차별? 여자도 저렇게 될 수 있는데 무슨!'라고 허울뿐인 억압기제가 되기 딱 좋다는 얘기다. 그런 이유로, 네가 말한 해악이 좋은 점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이야기다.


핵심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시 한 번 하자면, '자질 없는 정치인도 여자니까 지지해주자'라는 위험천만한 주장을 나포하는 데 대해서는 난 계속해서 씹을 거다. 그정도 위치에 있는 - 시네 21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지금은 영상문화진흥원 원장자리까지 앉은 - 조선희가 할 일은 자질없는 정치적 남성인 여성 정치인을 지지해야 한다고 '우리도 여성 최고 의사 결정자 하나 가져보자'고 한풀이성 외침을 공적인 자리에 끄적일 게 아니라, 정치적 여성성을 가진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박근혜를 비롯한 정치적 남성인 여성 정치인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영상문화진흥원의 비정규직을 포함안 여성 노동자의 처우를 그녀의 권한 내에서 증대시키는 거라 본다.


그리고 새우범생, 내가 '잘못된 희망'이라 언급한 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 실제 정치적 남성인 자질 미달인 여성 정치인이 최고 의사결정자가 된다는,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만으로 여성의 권익이 더 나아질거라는 생각이 위와 같은 이유로 착각이라는 이야기라는걸 하고 있다. 글로 써진 주장이 진지하게 펼쳐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본다면, 박근혜에 대한 지지, 함부로 말할 것 못된다고 본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서,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박근혜를 지지하는게 이해가 된다면, 똑같은 이유로 송영선과 전여옥을 지지하는 것 역시 의미있는 일이라는걸 생각해보기 바란다. 한국인에게 필요한 건, 여성 정치인에 대한 지지 증가가 아니라, 여성지향적인 정책을 펼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에 대한 지지와, 거짓된 근거에 기반한 지지에 대한 강한 반론이라고 본다.


나는 소극적으로 해명을 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지지하는 사람은 매우 적을 거라고 봅니다. 다만 박근혜님의 경우에는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적잖기 때문에 전략적 지지 같은 논의가 좀 되는 모양이지만요. 저는 여성이란 이유로 지지하는 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하지 않는 것보다 개미 눈물만큼은 우월하다고 봅니다. 저는 우월하다는 위험한 표현을 썼습니다. 똑같은 한 표인데 우열을 나누는 건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현저히 거스르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여성 후보는 절대로 찍지 않는 분의 한 표도 제 한 표 만큼이나 가치롭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어쩌면 이 발언을 한 걸 많이 후회할 거 같네요).


여하간 이처럼 제한된 유의미성인 만큼 어느 정도 용인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마 사회적 타협을 이루기는 어렵겠지만 여성에게 유리하게 약간 기울어진 경기장이 필요하고, 그것이 기회의 평등에, 실질적 민주주의에 좀 더 부합한다고 생각해요. “정치적 남성인 여성 정치인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말씀하신 대목은 많이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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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公人)이라면

사회 2006. 8. 21. 01:30 |
이우근 서울중앙지법원장이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부패의 향기’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다. 그는 최근 신임 헌법재판관으로 법조계 후배들이 지명되자 용퇴를 결심한 뒤 법조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글로 최근 법조 비리와 관련된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이라 원문을 볼 수 없어서 언론매체에서 보도된 조각들만 접할 수 있지만 대강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돈, 명예, 권력, 쾌락 따위의 달콤하고 나긋한 향기로 양심을 마비시키는 부패의 유혹은 차마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이성을 제압하고 도덕성을 무력화한다”

“부패는 악취가 아니라 향기를 풍기며 다가온다. 부패의 유혹 앞에는 장사가 없다. 명철한 지식인도, 시민운동가도, 근엄한 종교인이나 법조인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속적이고 습성화된 부패의 경향은 타락의 사슬로 영혼을 옭아매기에 자기 정화는 그토록 어려운 법이다”

“부패와 비리를 다스리는 법조인이 스스로 비리를 저지르거나 부패에 젖어드는 일은 여간 심각한 부조리가 아니다. 법조인이라면 시대의 아픔과 이웃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함께 나누는 사랑의 소명의식, 그리고 투철한 자유의지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손바닥 뒤집듯 쉽게 이뤄지는 자기 정화는 없다. 치열한 자성을 통해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나는 출산의 고통 없이 올곧은 자정은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준법정신이 투철한 모범시민으로 그렸다. 그러나 샤일록은 남의 곤궁함을 존중하지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남을 존중하고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법조인이라면 남의 비리를 벌하면서 자신의 부패에 눈감을 리 없다”


문득 이상호 기자의 “정치권력은 한철이지만, 자본권력은 장구합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요근래 정치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무게의 중심추가 옮겨가고 있다고들 말한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분들이, 똑똑하다는 소리 지겹게 들었을 분들이 돈 몇 푼에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는 게 참 민망하다. 이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시금석은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초연함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권력의 유혹은 향기는 기본이고 거기다가 부드럽고 섬세하기까지 할 것이다. 자본권력은 지난날의 정치권력처럼 폭압적이지 않고 소비자의 이익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별다른 견제를 받지 못하고, 그 폐해를 인지하지 못해 농노처럼 제 자유를 헌납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건 반동적이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닌가(天下公物豈有定主 何事非君)?”라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혹자는 정여립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여하간 천하가 공물이라는 발언만큼은 무척 감명 깊다. 천하는 비록 공물이지만 내 것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공인들이 더 늘어야 한다. “천하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길 만 하다(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는 노자의 가르침도 곱씹어보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자신의 재산인 사용(私用)을 절약하는 것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공의 재산인 공고(公庫)를 절약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공물을 사물처럼 여길 수 있어야만 어진 목민관이다(私用之節 夫人能之 公庫之節 民鮮能之 視公如私 斯賢牧也)”라고 말씀하신다. 장자는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藏天下於天下)”고 했다. 그만큼 감출 것 없이 떳떳하고, 정의롭고, 명쾌하다는 이야기다. 탐욕은 품을수록 커지고 권세는 누릴수록 더 보듬고 싶어진다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들였던 노력했던 지난날을 차분히 돌아보는 게 어떨까.


내가 고작 이 따위로 살라고 그렇게 뼈 빠지게 공부했는지 아느냐고 스스로에게 준엄하게 꾸짖어 본다면 달콤함과 향긋함에 몸과 마음을 함부로 팔지 않으리라. 우리가 공인(公人)이라고 기리는 건 단지 빼어난 재주와 명석한 머리만을 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능력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아는 베푸는 마음가짐과 함께 이익을 만날 때 의로움을 생각하는 기품 있는 정신을 겸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귀영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 사람, 제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을 죽음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다스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물론 대다수 분들이 묵묵히 그 가시밭길을 가고 있음을 잘 알면서 괜히 해보는 앓는 소리다.^^; - [小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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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편파성

사회 2006. 7. 25. 03:41 |

2002년 6월 당시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던 유시민 선생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유시민의 시사카페'에서 '칼럼니스트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를 언급했다. 이 칼럼은 지금도 내게 큰 지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칼럼니스트는 반드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칼럼니스트가 논리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중립을 지키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정치적 중립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 칼럼니스트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비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왈가왈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곱씹어 볼만한 주제다. 유시민 선생은 정치적 중립은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칼럼니스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고 답한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중립이냐 여부가 아니라 어떤 칼럼니스트가 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은 태도를 형성하고 표명하게 되었으며, 그가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뒷받침하는지 여부라고 헌걸차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이한 시각과 논리 사이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그의 입장에 거개 동감한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 대립은 중립성이 부족했다기보다 공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다른 견해와 겸허하게 경쟁하려는 시장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진단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중간 영역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중립성이라는 표현보다는 중간 영역이라는 표현이 좀 더 가치중립적인 것 같다). 자신이 편드는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 둘레를 살펴보면 저마다의 편향성을 보이면서도 상당부분 중립적으로 사안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이 한갓 개똥철학으로 치부될지언정 대개의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제 나름대로 정보를 처리하고 세상을 판단하며 소신을 품는다. 그것이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권능이자 책무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를 위한 요소 가운데는 이러한 갑남을녀들의 의사를 폭넓게 수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분명 포함될 것이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데아(Idea)가 실현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에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공정한 편파성도 이데아일 뿐, 우리가 추구하는 건 그 언저리까지다. 이데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답답해하지 말자. 그게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불확실한 세상일지니.


자신의 색깔을 사랑하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기를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는 중간 영역에 잘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시민 선생의 주장도 자칫 잘못하면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중립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모두 편파적이 되어야 한다로 귀결되는 건 곤란하다.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해법만이 최선이라고 외치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냉큼 달려가자고 재촉할 여지가 많다. 고교 평준화 제도가 문제가 있다며 당장 고교 입시를 부활시키라는 주장에 많이 무리가 있듯이, 민족사적 과제인 남북통일을 왜 당장 이루지 못하느냐고 보채는 것도 억지스럽다. 가령 한-미 FTA 문제는 찬성과 반대 두 가지 영역 밖에 없는 건가. 그 사이에 있는 조건부 찬성, 조건부 반대, 가능하면 찬성, 가능하면 반대식의 입장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이거 양보하면 차라리 협상을 결렬하겠다는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저쪽에서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해왔다면 우리의 마지노선도 다소 수정할 수 있는 게 아닐까(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구체적인 협상에 대한 평가를 내린 건 아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접근은 효율성을 높이고 지지자들의 충성도를 높인다. 강한 추진력을 통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경우도 적잖이 있다. 그러나 이익 갈등이 다각도로 진행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그런 틀을 가지고 사회를 운영하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높다. 섬세하게 계산되지 못한 갈등 비용은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다. 갈등 비용 관리는 주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마라. 그 질문은 너무 폭력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도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라고 말한다.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한다는 말은 많은 영감을 준다. 나는 유토피아를 믿지 않지만 굳이 말해보라면 ‘보통선(普通善)’이 만개한 세상이라고 말하겠다(보통선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만들어 놓고 자화자찬했던 용어로 쉽게 말해 소극적인 선이란 뜻인데 앞으로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볼 생각이다. 내 이런 소박한 바람이 결국 아담 스미스가 주창하던 내용들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 은근히 두렵다.^^;). 이는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진보하는 사회, 착한 사람들의 손해를 먹고 지탱되는 사회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상도덕을 준수하며 제 몫을 챙기는 사회다. 그곳은 날마다 천사와 악마가 건곤일척을 벌이지 않아도 되는 곳, 갈등 비용이 많이 줄어든 곳일 것이다.


중립성 이야기를 하다보니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문화일보 윤창중 논설위원이다. 나는 그가 2002년 이후로 연재한 칼럼을 거의 빠지지 않고 다 읽어 왔다. 그는 노무현 스토커로 불릴 정도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집권여당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를 해온 인물이다. 비슷한 소재로 글을 쓰면 질릴 법도 한데 늘 새로운 채찍을 준비하는 걸 보면 무척 솜씨 좋은 논객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2002년 대선 국면에서는 전국언론노조 문화일보지부 공정보도위원회에서 “윤 위원의 칼럼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 공정성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이런데 굴할 사람이 아니다.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두려우면 신문사 자리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매일매일 하며 살고 있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내가 사무실에 앉아 해야할 일은 노정권을 비판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밝히는 대목에서는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왜 그런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갈까.


윤 위원의 칼럼을 읽다가 그의 편파성을 도드라지게 드러난 부분을 발견했다. 2003년 5월 “전대통령 YS”라는 칼럼에서 김영삼 전대통령이 돈이 부족해 힘들게 지내고 있다고 전한다. YS의 덕목 중 하나는 돈에 관한 한 욕심이 없다는 점을 들며 “정부로부터 연금으로 월 844만원, 예우보조금 월 542만원 등 모두 1386만원을 받”지만 “어쩔 수 없이 전직 대통령의 품위 유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씀씀이가 있기 때문에 매달 돈 때문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 전대통령의 살림살이를 추론해 정부지원금이 순식간에 바닥나는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런데 2006년 3월 “盧대통령의 노후”라는 칼럼에서는 태도가 돌변한다. “노 대통령은 실제로 노후를 걱정할 게 없다”면서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른 혜택을 설명한다. “노 대통령이 저축한 돈 가운데 다만 얼마라도 서민 복지를 위해 쾌척하며 양극화 해소를 외친다면 서민들조차 이렇게 복장을 터뜨리고 있지 않을 것”이라면서 “하위소득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해 선거에 이용하려는 그 뻔한 위선과 언어의 유희, 그야말로 진정성의 문제”라며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퇴임한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김영삼과 노무현이 크게 다르기 않을 텐데 누구는 교훈적인 미담이 되고, 아직 퇴임도 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은 진정성이 없다고 외치니 참 난감하다. 이게 다 저축한 노무현 탓인가.^^;


외람된 말씀이지만 내 부족한 인식에 근거해서 볼 때 윤 위원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허상과 싸우느라 열심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6년 7월 24일자 “17% 대통령”라는 칼럼에서 “노 대통령의 지지층이 평택, 광주의 친북·반미시위 때나 볼 수 있는 맹목적인 좌파·친북·반미 세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기야 일전에도 열린우리정권은 주체사상 맹동주의 세력이라고 하신 분이니 더 이상 기대를 하는 게 무리일 듯싶다. 그토록 날카로운 윤 위원이 “‘내부 붕괴형’ 정계개편”란 칼럼에서 “무자비한 자상(刺傷)에 고통의 본능을 억제하는 농축의 절제미는 ‘2% 부족한 영남 공주’를 옛말로 만들어 버렸다”며 박근혜를 평하는 대목은 그가 꽤 따뜻한 품격을 지니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정치인의 약속”라는 칼럼에서 송파갑 불출마를 선언한 맹형규의 인간적 고뇌에 연민을 느끼면서 한국 정치가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외치기도 했다. 물론 맹형규는 재출마를 해버렸고 윤 위원은 졸지에 민망한 처지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를 예상했는지 “눈 딱 감고 재출마해도 그만이다”는 복선을 깔아두기도 했다. 놀라운 혜안이다.^^; 여하간 윤 위원의 글을 보며“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深淵)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이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이다”는 니체의 말을 꺼내들게 한다. 가뭄에 콩 나듯해도 한나라당에게 쓴소리를 내뱉던 그의 모습이 그립다. 2007년 대선의 승자가 누가 되든 간에 지금의 냉소와 저주에서 좀 더 나아간 글쓰기를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공정한 편파성이 손쉽게 이를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사안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을 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운 선택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차라리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내 편이 있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을 텐데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내가 그간 편파적으로 자랑스레 해왔던 언동들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좀 더 꼼꼼할 필요가 있었다. 윤창중 논설위원 같은 식의 편파성은 이제 정중히 거절해야겠다. 무엇보다 그렇게 단순하게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손쉽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물론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는 용기를 배울 용의는 충만하다. 나는 시원하고 화끈한 사람보다 맹맹하고 조신한 녀석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중간 영역을 청취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공정한 편파성이라는 이데아를 손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공정한 편파성과 균형적 중립성의 차이가 실상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일단은 좀 더 바지런해지고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않기를 다짐한다. 아무 편이 아닌 사람들과도 알콩달콩 잘 지내야겠다. - [小鮮]


편을 갈라서 사는 것이 편안한 사람들이 볼 때 아무 편도 아닌 사람은 회색인이자 경계인이거나 기회주의자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 편도 아닌 사람들이야말로 자유ㆍ민주주의자이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인문주의자다. 필요한 것은 관용의 정신이며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다. 그런 자세가 없으면 한국사회는 더 성숙해질 수 없다. 아무 편도 아닌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 임철순. "아무 편도 아닌 사람." 한국일보. 2004. 02. 05.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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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누나가 제안하신 긴급 설문 조사 "이번 출교 조치 정당하다고 보십니까?"에 답을 고르기가 쉽지 않아 고심하다가 얼떨결에 잡글이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경영飛반 커뮤니티에 동시 게재합니다.


<고려대학교 출교 조치 유감(有感)>
"언짢은 마음"이라는 뜻의 유감(遺憾)이 아닌 그냥 "느끼는 바가 있음"을 뜻하는 유감(有感)입니다.^^;


4월 19일 학교 당국은 교수 억류 사건으로 징계 대상에 오른 학생 19명 가운데 7명에게 출교(黜校) 조치를 내렸습니다. 출교란 퇴학(혹은 제적)과 달리 징계해지 사유가 발생하더라도 재입학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징계입니다. 출교를 당하면 영구적으로 학적이 삭제되어 재입학과 편입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출교 징계를 내린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감금하고 스승은 제자를 학교에서 영구추방하는 모양이 민망할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 생소한 출교 조치가 과연 필요한가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일단 학생상벌에 관한 시행세칙을 존중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태의 발단은 병설 보건전문대를 보건과학대로 승격해 고대로 편입시키는 과정이 매끄럽지는 못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통합 결과 06학번 보건과학대 새내기 300여명은 고려대생이 됐으나 2~3학년 1,200여명은 여전히 보건전문대 학적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4월 안암배움터 총학생회 재선거에서 일부 후보진영이 보건전문대 2~3학년도 총학생회 선거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교측은 학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투표권 여부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부 학생들은 지난 5일 보직 교수님을 억류한 채 농성을 벌였습니다.


또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총학생회 재선거를 실시하면서 가장 중대한 선거권자 획정을 너무 소홀히 했습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칙 4조 1항은 "정회원은 안암배움터 재학생 전원"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만큼 보건전문대 2~3학년에게 투표권을 주는 문제에 좀 더 신중했어야 합니다.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의 06학번부터 투표권을 가지는 것이 총학생회칙 규정에도 맞다는 수많은 학우들의 지적이 잇따르자 재선거가 종료된 후 전체학생대표자회의를 열어 보건전문대 투표 유효 여부를 정한 것은 한 편의 코미디였습니다. 관련 당사자들은 충분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여하간 작년 5월 이건희 명예박사 수여식 사태 이후 다시금 학내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스스로 살을 도려내는 비장한 각오로 징계를 결정했다"는 학교측의 항변을 상당수 학우들은 지지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대미문의 출교 조치가 너무 가혹하고 비교육적이라 비판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세인에 입에 그다지 화목하지 못한 모습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 학교측으로서도 여러모로 부담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학교측의 대응에 아쉬운 점도 적잖습니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며, 천려일득(千慮一得)이라고 했습니다. 학교측이 학생들의 요구 중에 수긍할 만한 것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모습을 그다지 보여주지 못한 점도 균형감각을 잃은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도 일방적이었지만, 학교측도 만만치 않게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교수 억류 사건은 "목적이 옳다고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지루하면서도 위대한 명제를 끌어와서 간단히 정리해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중징계가 능사였냐는 물음 앞에서는 무척 곤혹스러워집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작년에 곤욕을 치르면서도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며 젊은이들의 열정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혹자는 악어의 눈물이라고 마뜩잖게 여겼지만 삼성측의 그러한 아량이 문제 확산을 막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사안이 다소 다르지만 스승이 제자를 매몰차게 내치는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습니다. 제자의 잘못을 자신의 허물로 삼는 참스승의 모습을 거론하고도 싶고, 그러기에는 제자의 잘못이 막중해서 안타깝고... 참 난감합니다.


징계의 적절성 여부를 놓고 두 가지 기준을 검토해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했는가와, 지금 현재 다른 대상에게는 어떻게 하는 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4년 본관점거 투쟁 때도 17명의 징계대상자 명단 발표가 있었고, 2005년 이건희 명예박사 학위수여식 사태나 지난 2월 입학처 점거 사태에도 징계 이야기가 나왔으나 그 후 미미하게 처리되거나 철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조치가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징계 수위가 출교 7명, 유기정학(1개월) 5명, 견책(1주일) 7명으로 편차가 큰데 그리 명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물론 징계수위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지만 출교와 견책 사이는 너무나 가파른 차이가 있어서 말입니다.


본관 점거를 했던 학생들의 불관용적 자세를 저도 관용하지 않습니다. 그네들에 대한 징계에 상당히 명분이 있다고 보며 거개 동감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가 그간 유명무실하던 징계 조치를 갑자기 엄히 적용할 만큼 패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교수님들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제 일개인은 끝끝내 이번 사안에 한해서만이라도 출교를 거두는 것이 좋겠다고 입장 정리를 했습니다. 앞으로 징계 국면에서 상대적 아니 절대적으로 약자인 학생들의 처지를 고려할 때 징계를 통한 학생 계도는 조심하면서도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간 다소 무원칙적이었던 징계 처리가 자리를 잡아야겠습니다. 좀 더 체계적이고 투명한 징계 절차가 확립되고 징계 수위가 예측가능할 정도로 공신력을 가지길 바랍니다.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 진시황이 자국 신하들이 아닌 빈객들을 추방하려 하자, 초나라 출신의 이사가 그 부당함을 간하며 했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처럼 크게 될 수 있고, 강과 바다는 작은 냇물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처럼 깊게 될 수 있다(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는 말입니다. 이에 진시황은 축객령(逐客令)을 철회하고 오히려 이사를 중용함으로써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룩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간 일련의 학내 갈등 속에 서로에 대한 열린 마음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고향을 한없이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편협하거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너그럽고 섬세하며 온유해야겠지요. - [小鮮]


추신 - 이번에도 참사 수준의 횡설수설인 것을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이번 사안에 대해 확언을 하기가 힘들고 어려웠어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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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잘났다는 인걸들이 몰려 있는 정치판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는 수재가 그득한 정치판에서조차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우가 많다. 진중권 선생은 글쟁이로서의 좌우명으로 프리드리히 쉴러의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 한다"는 말을 꼽았다. 사람과 함께 하기를 좋아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를 품은 사람이라면 이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곡학아세(曲學阿世)가 별 거 아니다. 아군에게 듣기 좋은 유리한 말들만 골라서 하는데서 시작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이적행위는 아닌지 염려하고, 그간 나를 입맛에 맞게 여기던 사람들이 떠나가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할 때 곡학아세의 유혹이 스며든다.


나는 적어도 대중의 환호에 얽매여 나를 버리지 않을 자신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내가 만약 거대한 조직에 투신하게 되었을 때 조직의 논리를 보란 듯이 무시하고 나만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지 점점 확신이 사그라진다. 그간 내 편에 넉넉하고 저들에게는 깐깐하게 대한 적도 제법 있었으며, 내 탓을 남 탓으로 교묘하게 치환하는 기지에 스스로 흐뭇해하기도 했다. 눈앞의 세속적 성취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 편을 거스르기는 뼈를 깎는 아픔이다. 진리를 독점하라는 유혹은 늘 아찔하고, 광기의 국물은 늘 달콤하다.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우직하게 원칙으로 돌아갈 때 결국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얼마나 흐릿한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더라도 아름다운 패배일 수 있다"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말은 큰 울림을 준다. 지켜야할 것을 지키는 굳건함, 남아 있어야 할 때 남아 있는 진득함,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수 있는 산뜻함을 고루 갖추는 것은 자신의 원칙을 얼마만큼 애호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어차피 늘상 승전고만을 울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기왕 지는 거라면 아름다운 패배가 되는 게 좋지 않을까.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다면 천만인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는 맹자의 말씀은 아름다운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물론 최대한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다. 온전히 내 자신으로 승부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우아해져야겠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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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국무총리의 3.1절 골프 추문은 부끄러운 일이다. 물론 골프에 대한 호오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적 영역이다. 그러나 총리가 골프를 치는 순간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골프를 쳤느냐는 공적 영역으로 전환된다. 더군다나 개혁성과 도덕성을 주창하는 참여정부의 2인자인 그가 골프광으로 행세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총리도 자신의 재미를 추구할 권리는 있지만 조금 절제하는 덕목을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 송나라 재상이었던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 한 다음에 즐거워해야 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구절을 새겼어야 했다. 멸사봉공씩은 아니더라도 선공후사 정도는 했어야 했다.


유신독재에 비수를 던지던 이 총리는 홀컵에 공을 집어넣는 재미에 여념이 없었다. 과연 이 총리는 나이스 샷을 외치며 짝짝거리는 소리에 그 옛날의 곤고함은 까맣게 잊었는가. 그만큼 이 세상은 고루 살맛 나는가. 이 총리는 분권형 국정운영이라는 기조 아래 대통령으로부터 경제, 사회 분야를 아우른 내치를 사실상 일임 받았다. 국정의 새로운 지평을 연 분권형 총리에게 붙어 콩고물을 노리는 자들을 왜 결연히 떨치지 못했는가. 늘어난 권한만큼 더욱더 무겁게 처신하는 진중함이 못내 아쉽다. 엄혹했던 시절 이 총리가 믿고 의지했을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서는 곤란하다. 이 총리가 출세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자신의 출중한 재능 때문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운동권 출신들을 권좌에 올려 놓아준 국민들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떠나야할 때를 다소 놓치기는 했지만 이 총리가 책임지고 물러난 것은 바람직하다. 물론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이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에 사퇴하는 것은 영 찜찜하다. 지방선거 주도권을 잡기 위한 여하간의 쟁투와 한나라당의 물타기 전략에 희생이 된 감도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지지율이 40%에 육박하는 때에 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하지 못한 실책은 뼈아프다. 노 대통령은 그토록 애호하던 이 총리의 사퇴로 적잖이 당혹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참여정부 국정운영은 사람 보다 시스템이 일하는 체제를 지향했다고 본다. 이해찬이라는 걸출한 인재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노 대통령의 읍참마속은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시스템을 신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 총리의 불명예퇴진은 개혁세력의 타산지석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덜 혜택을 받아 그늘진 사람들의 열망을 제 이욕 추구에 온전히 들어바치는 광경은 무참하다. 개혁세력들은 혹여 이 사회에서 흥건한 혜택을 받아 양지바른 사람들의 열망을 대변할 이들에게 권력을 넘겨줄 때가 오더라도 국민의 핑계를 대지 말기를 바란다. 남의 누추함을 따지기 전에 제 자신의 비루함을 먼저 경계하라. 이 총리는 3월 15일 이임식에서 “나는 지금까지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디 그 결심을 앞으로도 유지하시기 바란다.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부끄러움을 잃는 것이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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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의 정치 참여라는 주제로 원고 청탁을 받아 쓴 글이다. 원론적인 주제라 재미난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 적잖이 고생했다. 대학생에 한정하지 않고 주고객(?)을 20대 청년으로 삼아 투표를 독려하는 글을 써봤다)


<한 표의 권리가 청춘을 더 빛나게 한다>

젊은이들이 보수화 되었다고 흥에 겨워 말하는 이들이 있다. 대학가의 보수화 물결을 집중 조명하는 기사들이 어지럽다. 그러나 민주화가 성숙해 가는 단계에서 대학생들이 진보의 짐을 과도하게 질 필요는 없다. 예전처럼 공부를 잠시 미뤄두고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를 고심해야 하는 시대는 아니다. 배우기 바쁜 20대 청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데 그걸 보수라고 치부할 까닭도 없다. 조사결과에 따라 때로는 한나라당 지지도가 높게 나오기도 하지만, 민주노동당 지지도도 평균보다 높게 나오는 만큼 보수화의 표지를 드리우는 건 다소 성급하다. 다만 우려할 것은 과도한 정치적 무관심이다.


젊은이들의 투표율을 날로 떨어진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96년 15대 총선 20대 투표율이 44.3%(전체 투표율 63.9%)이던 것이 2000년 16대 총선 20대 투표율은 36.8%(전체 투표율 57.2%)로 하락했고, 2004년 17대 총선 20대 투표율은 37.1%(전체 투표율 60.6%)을 보였다. 특히 탄핵 정국으로 투표 열기가 놓았던 지난 총선에서 20대들은 0.3% 포인트 상승한 투표율을 기록했다. 30대가 6.3% 포인트, 40대가 2% 포인트, 50대가 5% 포인트가 상승한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다. 20대 젊은이들이 17대 총선의 전체 투표율이 16대 총선 전체 투표율보다 3.4% 포인트 상승하는 것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투표부대를 위시한 온라인상의 뜨거움도 젊은이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비교적 투표율이 높은 대선이라고 해서 상황이 별반 나을 게 없다. 97년 15대 대선 20대 투표율이 68.2%(전체 투표율 80.7%)이던 것이 2002년 16대 대선 20대 투표율은 56.5%(전체 투표율 70.8%)을 기록했다.


2002년 지방선거 20대 투표율은 31.2%(전체 평균 48.9%)였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2006년 5.31 지방선거 20대 투표율은 30%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2005년 10.26 재선거에서는 20대의 투표율은 21%(전체 투표율40.4%)를 기록했다. 한나라당이 완승했던 재선거에서 60대 이상의 투표율은 61.2%에 달해 연령대별 투표율 차이는 최대 3배까지 벌어졌다. 특히 선거법 개정으로 처음 투표에 참여한 만19세의 투표율도 21.4%에 그쳐 그 험난했던 입법과정을 무참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젊은 세대들의 투표장 외면은 적잖이 심각한 수준이다.


물론 정치적 무관심과 선거의 기권은 개인 선택의 영역이다. 선출 투표는 참여한 사람들의 의사의 총합이 반영되면 그걸로 유의미하다. 기권의 자유 혹은 선거 무관심의 권리는 선출된 대표자에게 승복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 의회민주주의다. 있다. 세계 30여 나라가 투표를 의무로 규정해 불참에 대한 공적 제재를 가한다고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나라가 의무 투표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권리의 행사는 권리를 누릴 자유와 더불어 그것을 행사하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하기에 의무 투표제를 섣불리 지지하기 힘들다. 오히려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억지로 투표를 할 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투표장을 향할 때 그 행위는 공동체의 의사를 제대로 모으지 못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젊은 세대들의 투표 불참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다. 그러나 제 정치적 지향이 비교적 선명하면서도 단지 귀차니즘 때문에 기권을 하는 경우까지 보듬기는 힘들다. 정치적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나 옅은 사람이나 똑같이 한 표씩 가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 유신독재나 전두환 일당 시절과는 달리 한나라당은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결과를 통해 존속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아무리 밉살맞은 짓거리를 할 때 쉽사리 손가락질하기 힘든 까닭은 그네들을 찍은 국민들의 의사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을 부흥시킨 것이 국민들이듯이 그들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것도 국민들의 몫이다. 이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세상에서 그나마 평등을 실현하는 1인 1표제를 우리 젊은이들이 적극 활용해야하지 않을까.


경영학에서 대리인문제(agency problem)라는 개념이 있다. 기업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항상 일치될 수 없기에, 주주와 경영자, 주주와 채권자 등의 관계에서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일컫는다. 대리인문제와 관련하여 발생되는 대리인비용(agency cost)은 세 가지로 분류한다. 감시비용(monitoring cost)은 대리인의 행위를 직접 감시, 감독하는 데 드는 비용뿐만 아니라 일의 성과에 대한 평가비용, 합리적 보상체계와 유인체계의 도입비용, 기회주의적 행위의 제재비용 등을 말한다. 확증비용(bonding cost)은 대리인이 스스로 기회주의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물적, 인적 보증을 하는 비용을 말한다. 잔여손실(residual cost)은 감시비용과 확증비용 지출에도 불구하고, 대리인의 의사결정이 주인의 최적의사결정과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주인 부의 감소를 말한다. 감독과 보증노력을 하고 나서도 남는 비효율과 낭비인 셈이다.


보통의 합리적 인간이라면 대리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감시비용과 확증비용을 지출하려고 노력하게 마련이지만 말 그대로 비용이 들기 때문에 대리인의 기회주의적 행위를 원천봉쇄 하기는 힘들다. 결국 일정 정도의 잔여손실은 불가피한데 이를 정치 문제에 대입시켜보자.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이 일정 기간 동안 위임해준 것이다. 주인인 국민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정치권력은 감시비용과 확증비용을 현격히 높이다가 궁극적으로는 잔여손실을 증대시킨다. 사람마다 잔여손실을 견디는 정도는 다르겠지만 대리인들의 삽질이 계속되면 될수록 대리인들을 퇴출시키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다른 대리인을 내세우려는 유인이 커진다. 자신의 잔여손실 내성(耐性)을 넘어섰을 때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강력한 수단은 역시 선거권의 행사다.


루소는 18세기 영국 대의민주주의의 허상을 비꼬며 "영국의 인민들은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롭고 선거가 끝난 직후에는 다시 노예로 돌아가 버린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선거 기간에만 최고 주권자 대접을 받고, 투표날에만 주인의 권한을 행사하는 처지는 크게 나아진 바 없다. 한번 생각해보자. 현행 선거제도의 틀을 유지하고 앞으로 백 살까지 80년을 더 산다고 하더라도 대선 16번, 총선 20번, 지방선거 20번을 할 수 있다. 천수(天壽)를 누린다고 해서 백 살까지 장담할 수는 없으니 우리 생애 전국적 투표는 50번 정도다. 권력도 유한(有限)하지만 우리의 주인 노릇은 그보다 더 유한하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가 한껏 자유로운 시대에 이 빛나는 청춘의 일부를 구접스러운 세상을 세련되게 욕하고, 불의를 자행하는 정치꾼들을 단죄하는 데 쓸 수는 없을까. 청년들의 호기로운 문제의식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두려움에 잠식되게 놔두지는 말자. 나보다 못한 놈들이 나를 다스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면 김종필 대신 노회찬을 의회로 들여보냈듯이 우리 삶을 한 뼘이라도 더 윤택하게 만들 인물들을 좀 더 많이 의회로 보내자. 우리에게 주어진 한 표의 권리를 애호하자. - [小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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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독서토론 모임에서 관용을 주제로 한 토론의 후기다. 모든 집단주의는 대체로 악이다)

관용을 주제로 한 토론 즐거웠습니다. 특히 지역주의에 대한 고민은 하면 할수록 시름만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기득권층의 분할통치의 산물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지방분권과 다원화사회를 지향하는 길은 참으로 요원하기만 합니다. 영호남의 불균형이 아직도 적잖겠지만 앞으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 강북과 강남의 불균형에 대한 많은 문제제기가 있어야겠습니다.


지역주의의 폐해는 그 발생론적 오류(genetic fallacy)에서 기인합니다. 이는 논리 자체의 타당성을 검토하기보다는 논리를 생산한 사람을 보고 타당성 여부를 정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전라도 사람은 빨갱이다"는 언설은 빨갱이 운운한 데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전라도 운운하는 발생론적 오류가 더 심각합니다. 고종석 선생님의 지적대로 "한 사람에게서 그 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표상을 읽어내는 집단주의"인 셈입니다.


지역주의의 폐해를 보다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역시 개인주의의 심화입니다. 공동체의 번영이란 미명 하에 소수자 집단을 희생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개인주의, 개인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지역과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자유로운 사고판단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개인주의의 확산만이 이 야만적인 지역주의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한국 사회에 미만한 집단주의 사슬을 끊어내야만 합니다. 모든 집단주의는 대체로 악이니까요. 아래 고종석 선생님의 말씀대로 방어적 지역주의가 공격적 지역주의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수고로움이 들 것 같지 않습니다.


그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한국인으로서 또 나는 지역패권주의에 맞선 지역등권론이라는 것에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것이 한 노정객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방편적·전술적 차원에서 제기된 보기 흉한 선동이라는 판단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올바른 처방 역시, 공격적 민족주의에 대한 처방처럼, 개인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집단주의의 악을 작은 집단주의로 막을 수는 없다. 집단주의의 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개인주의다. 게다가, 작은 집단주의가 커다란 집단주의에 견주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예컨대 통일 베트남의 민족주의가 인도차이나의 이웃 나라들에 대해 행사했던 패권주의는 중국의 대국주의가 베트남과 그 이웃나라들에 대해서 행사하려고 했던 패권주의에 견주어 반드시 덜 흉했던 것도 아니다.
- 고종석. 1997. 『책읽기 책일기』. 문학동네. 297~298쪽. 「개인주의여 영원하라」中


저는 요즘 강준만 선생님이 그토록 통박하셨던 양비론에 빠져봅니다. 민주당에 대한 호남인들의 적잖은 지지에 놀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현상이 2004년 총선 당시에 민주당이 궤멸적인 몰락을 겪은 것에 대한 연민의식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호남인들의 동정표에 기대 의기양양한 민주당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자민련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 가 당혹스럽습니다. 호남인들의 상대적 진보성도 사실상 지역구도 아래 치러진 선거에서 본의 아니게 씌어진 허울이 아니었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도 해봅니다. 호남인들이 저항적 지역주의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겠지요.


팔이 안으로 굽는 편견을 빌미로 억압과 통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편견을 마냥 죄악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루한 속성이라고 해도요. 만약 다수자의 편견이 나쁘다면 소수자의 편견도 딱히 나을 건 없겠지요. 유시민 장관님이 일전에 말씀하신대로 "남의 허물이 나의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나라당을 찍는 영남인들의 심성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일부 호남인의 심성, 국민중심당에 혹하는 일부 충청인의 심성 사이에 있을 섬세한 차이를 헤아리는 건 부질없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의하다 연계해서 나온 대연정 문제를 살펴보면,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정치일생을 걸었다고 즐겨 말하는 노무현 대통령님이 제안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은 대체로 실책이라고 봅니다. 일부 토론자께서 대연정이 앵똘레랑스를 똘레랑스로 대응하는 새로운 모델이라고 전향적으로 평가하신 견해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앵똘레랑스에 앵똘레랑스하지 못했던 것은 반성하지 않고 뜬금없이 앵똘레랑스에 똘레랑스하자고 하니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그런 판국에 한나라당이 거절을 한다면 똘레랑스를 앵똘레랑스한 셈이 되니 얼마나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행위입니까. 노 대통령님의 지역구도 해체라는 목표의 진정성은 아름답지만 대연정 제안은 과정의 진정성이 부족했습니다. 노 대통령님이 갈등의 정치구조를 타파하고자 했다면 우선 열린우리당의 앵똘레랑스 전략을 독려했어야 합니다. 굳이 똘레랑스를 하려고 했다면 앵똘레랑스의 구심점보다는 앵똘레랑스를 지지하고 소비하는 국민들을 보듬었어야 합니다.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이 내세우는 가치들에 좀 덜 너그러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대통령님 자신의 문제의식만을 절대시하는 과오가 너무 컸다고 봅니다. 지역주의라는 집단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집단주의적 방법을 끌어다 오는 것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지역구도를 해소해서 정치문화가 바뀌면 사회 모든 부문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식의 정치환원주의에는 여전히 동감하지 않습니다. 앙시앙레짐은 분명 극복해야할 과제이지만 앙시앙레짐은 지역구도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굳이 앙시앙레짐을 해체할 열쇠를 들자면 지역주의 타파보다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확산이라고 봅니다.


현행 선거구제 하에서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동토에서 산화해야할 것 같습니다. 노 대통령님 말씀대로 농부가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앞으로도 지극 정성을 쏟아 부어야겠지요. 누군가의 희생으로 움트는 진보를 달가워하지 않는 저이기에 더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선거구제 개편 같은 제도를 개선보다 의식을 바꾸는 것이 더 긴요하다고 봅니다. 이제 정치적인 지역차별은 거의 사라졌지만 문화적인 지역차별이 남아 있는 만큼 제도개혁보다는 의식개혁이 더 필요합니다. 선거구제 개편은 의식개혁을 촉진하기 위한 유력한 방안일 뿐이고, 이 밖에 정치경제적인 지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지방분권 전략도 많이 요구되겠지요.


언제쯤 상대방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경상도에서 한나라당 안 찍어도 그만 이라는 인식이 퍼질 수 있을 까요. 저는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개인에 주안점을 두기 위해 “선의의 무심함”을 주장합니다(여기서의 선의는 윤리적 평가와는 관련이 없는 법률적 의미를 말합니다). 이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소수파에 대한 탄압을 알면서도 모르쇠 하는 악의의 무심함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상대방을 잘 모르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 무심함, 설혹 어떤 요소들을 알게 되더라도 그것을 편견의 잣대로 삼지 않는 무심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무심한 태도는 "이해는 못해도 인정한다", "공감하지 않지만 존중한다"는 식의 태도보다 훨씬 실천하기 쉬울 겁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집단주의 정서는 무심보다는 관심을 강조합니다. 물론 관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맹자가 말씀하신 “선을 권장함은 벗의 도리(責善 朋友之道也)”와 같은 관심은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타인의 행복을 보살펴 줄 권리는 그들의 가까운 친구에게 한정된 하나의 특권”이라는 칼 포퍼의 제언처럼 벗의 도리는 매우 절제되어 한정되어야 합니다. 집단주의가 관심을 만나면 대개는 과도한 간섭, 부당한 개입으로 나아가기에 각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악의의 무심함을 극복하기 위한 기제로서 제한된 관심이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아직 궁리하는 과정에 있어서 생각이 거칠고 해법이 정돈되지 않습니다. 토론 주제였던 관용으로 돌아가자면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한 똘레랑스는 여전히, 앞으로도 유효합니다.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 수는 없습니다. 부러 좇아서 다수파에 줄서지 않는다면 누구나 아웃사이더, 소수파, 비주류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진리를 독점하라는 유혹을 버리고, 나와 다른 것을 증오하지 않는 보험료의 부담보다는 보험금의 혜택이 더 큰 남는 장사라고 확신합니다. 똘레랑스라는 늘씬한 보험상품을 파는 외판원이 좀 되어봐야겠습니다. 하나 구매해주셔도 좋고, 같이 팔러 다녀도 좋을 것 같아요. 푸하하 - [小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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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상 최초의 국무위원 국회 인사청문회 진통 끝에 마무리되었다. 통과의례, 요식절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거세지만 일단 긍정적인 변화라고 본다. 앞으로 대통령의 인사권을 얼마나 제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섬세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의 국민연금 미납 등은 청문회 과정에서 제기된 것으로 청와대 검증과정에서 놓친 부분을 국회에서 찾아낸 성과도 적잖았다. 다만 장관 내정자가 청문회를 거친 뒤 최종 임명되기까지 너무 오랜 기간 업무 공백을 빚는 점은 조속히 보완해야할 것이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도덕성에 대한 검증은 혹독했지만 상대적으로 정책과 전문성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 여야는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기세 싸움으로 일관해야 했다. 시종일관 제 편을 들지 않고는 못 배길 살벌한 분위기였다. 유시민 청문회에서 대체로 질문이 답변보다 길었는데,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인고의 방어도 눈물겨웠지만 한나라당의 똑같은 시비 또 걸기도 안쓰러웠다. 아무리 양측이 정쟁만 주고받았다고 해도 한나라당은 국무위원 인준 여부를 국회에서 결정하도록 국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에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헌법적 문제가 결부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인사청문회에서 유시민 내정자의 태도 변화가 화제였다. 겸허한 자세로 대부분의 질책에 수긍하며 몸을 낮춘 그의 모습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한신(韓信)이 기어서 남의 바지가랑이 밑으로 지나갔다는 과하지욕(袴下之辱)의 고사가 떠오른다. 굴욕을 참아 그가 품은 뜻을 펼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예의 총기와 재기가 흐려진 듯 보여서 아쉽다. 이제 정말 그가 "나는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을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인물을 국무위원으로 보내는 대신 자유롭고 재기발랄했던 스승을 잃은 것만 같다. 여하간 유 내정자의 고초를 통해 국무위원 되기의 엄중함을 많이들 보고 느꼈으면 좋겠다.


유시민 내정자는 청문회를 마치며 도종환의 시「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낭독했다.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라는 구절에 가슴이 아렸다. 노무현 후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이래로 많은 오해를 받고 숱한 낙담을 겪었을 유 내정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가 시니컬해졌다면 절망에 익숙해져 염세주의의 바닷물을 들이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왕따를 당해 괴로울 때 나마저 손쉬운 손가락질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편애를 확인한다. 어떻게 나마저...


유 내정자가 참여정부와 우리당을 위해 형극을 마다하지 않은 걸 기억한다. 그런데 이제 그가 맡을 국민연금 개혁은 욕먹을 일이 태산 같다. 그 저주와 증오를 어떻게 견뎌낼지 걱정이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을 그와 함께 얼마나 비를 맞아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엄살을 좀 부려봤지만 그가 초심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서러운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그를 지지하겠다. 살아있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기란 이렇게 어렵다.^^ - [小鮮]


나는 범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비치듯, 이탈리아의 피렌체가 아테네의 문화를 받아 빛났듯이, 남의 광영을 힘입어 영광을 맛보는 것을 반사적 광영이라고 한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이 반사적 광영이 없다면 사는 기쁨은 절반이나 감소될 것이다.

- 피천득. 2002. 『인연』. 해냄. 199쪽. 반사적 광영反射的 光榮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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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세를 위하여!

사회 2006. 1. 27. 01:30 |
익구닷컴 방명록에 "생일이 빨라 학교에 일찍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올려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고심 끝에 독자맞춤형 줄기잡글(?)을 써보기로 했다. 이 글을 전국의 19.5세들에게 바친다.^-^


2005년 10. 26 재선거 때 2004년 6월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만 19세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만 18세에게 국방, 납세, 근로의 의무는 지도록 하면서 선거권은 이에 못 미쳐 다소 아쉽다. 2004년 중앙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세계 167개국 중 143개국이 만 18세 이상 선거권을 인정하고 있는 만큼 좀 더 적극적인 하향 조정을 해봄직 했다. 미국의 독립혁명 당시 영국이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세금은 미국인들이 납부할 수 없다는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ve)"라는 원칙을 상기해보자. "권리 없이 의무 없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무만큼의 권리는 누려야 하지 않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 통상 성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고등학교가 청소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 나이는 만 18세다. 그러나 선거 연령 인하가 쟁점으로 등장하자 여야는 만 18세 인하와 만 20세 고수를 놓고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중간점인 만 19세로 절충하게 된다. 선거 연령 인하의 모티브가 된 민법개정안 성년 규정이 정치판 눈치를 보다가 만 19세라는 어정쩡한 기준을 내어놓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특히 한나라당이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대승적 자세로 해결에 임하지 않아 밉살맞다. 앞으로도 현실과 법 사이의 괴리를 호소하는 볼멘 소리가 적잖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01년 4월 국회를 통과한 청소년보호법 개정법률안에 따르면 청소년보호법 2조 1항에서 <"청소년"이라 함은 만 19세 미만의 자를 말한다. 다만, 만 19세에 도달하는 해의 1월 1일을 맞이한 자를 제외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단서 조항에서 연(年) 나이의 개념이 등장한다. 연 나이는 생일로부터 다음해 1월 1일을 지난 횟수만큼 나이로 인정해주는 새로운 나이 개념이다. 생년월일을 모두 감안하는 만 나이와는 달리 연 나이는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뺀 나이로 태어날 때부터 한 살인 한국식 나이에서 1을 뺀 개념이다. 예를 들어 83년 7월생인 나는 2006년 1월 현재 한국식 나이로 24세, 1월 1일이 지났으니 연 나이로 23세, 생일은 아직 지나지 않았으니 만 나이로 22세가 되는 셈이다.


연 나이의 도입은 만 19세 미만과 만 18세 미만으로 혼재되어 있던 청소년 관련 법률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청소년 보호와 관련해 각종 법안마다 다르게 규정되어 있는 성년 규정이 연 19세 미만으로 조정되었지만 여전히 논란의 불씨는 살아있다. 2005년 12월 청소년위원회는 국회에서 심의 중인 영화 및 게임 등에 대한 법률의 청소년 연령 기준을 청소년보호법에 따른 연 19세로 통일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및 법제사법위원회에 전달했다. 문광위 소위 심의 과정에서 만 18세로 하향 조정한 것을 당초 정부안대로 해달라는 요구다. 문화관련 법령만 만 18세인데서 오는 법체계적 불일치를 해소하고 청소년보호정책을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제법 호소력 있다.


민법상 성년은 만 19세이며, 청소년보호법상 성년은 연 19세인데다 문화관련 법령은 만 18세여서 엄청난 혼선을 빚고 있는 만큼 법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의 개정은 불가피하다. 영화가 술이나 담배와 같은 청소년 유해물과 다른 문화매체라는 주장, 단속과 규제를 용이하게 하려고 기준을 통일하는 것이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항변에 동감하기 힘들다. 술, 담배와 영화는 선호의 문제지 우열의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문화예술의 열외성(列外性)을 주장하는 논리는 위험하다. 물론 그렇다고 문화 향수권 대상을 줄이는 것이 마냥 바람직하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 일련의 논란들이 만 18세를 관철시키지 못한 후유증인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문화관련 법령만 예외로 하기보다는 민법, 청소년보호법 전반의 성인 규정이 하향 조정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문화향유권만 특출나게 소중한 건 아니다.


연 나이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경계선에 있는 빠른 연령대 사람들, 한국식 나이 기준 19.5세들의 고초다. 매년 새해마다 반복되는 19.5세 경계인들이 겪는 곤란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5세들이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점이다. 청소년보호법이 개정되기 전에 만 19세 규정이 적용될 때는 그 폐해가 얼마나 심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만 19세에게 술을 파는 불법 업소가 오히려 흥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Bad money drives out good)하는 현상, 즉 범법자가 준법자보다 유리해지는 경우가 횡행했으리라. 연 19세 규정으로 인해 그나마 범법자 대량 양산을 줄인 것은 다행이지만 19.5세들이 겪는 소외감은 오히려 더 커졌다. 범법을 저지르는 동지(?)들이 대폭 줄었으니 또 얼마나 외로울까!


19.5세들은 소수자가 된 것도 서러운데 교통비등은 성인비용을 내며 청소년 할인혜택을 못 받는다. 연 19세 규정에 따르면 법적으로 엄연히 청소년인데도 말이다. 권한을 주는 건 더디면서 혜택을 앗아가는 건 재빠른 것처럼 약오르는 일이 어디 있던가. 2006년 한해 동안 빠른 88년생들은 얼마나 많이 법을 어겨야 할지 상상하면 아찔하다. 자기 자신이 이런저런 술자리의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느낌은 무척 구접스러우리라. 문득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새내기 시절을 보내던 2002년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을 한답시고 모였을 때가 떠오른다. 입장 가능한 술집을 찾아 전전긍긍할 때 84년생 친구들이 괜히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종국에는 짜증을 내던 기억이 선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술 한잔 나눌 자리를 위해 거리를 헤맬 19.5세들이 안쓰럽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해법이 새로울 건 없다. 이건 실천의 문제다. 빠른 생년의 취학을 인정하고 있는 만큼 그 연배의 동기들과는 똑같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맞다. 빠른 연령대의 취학 능력을 인정한 마당에 그들이 성년으로서 누릴 권리를 한해씩이나 늦추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제 연 19세 규정의 사각지대에서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 19.5세에게는 예외적으로 연 19세 규정을 적용하지 말고 만 18세에 도달하는 해의 3월 1일 정도로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해볼만 하다. 19.5세에게는 특별히 만 18세 규정을 적용하는 방안도 있겠으나 과도한 특혜로 여겨질 수 있는 만큼 조금 양보해서 3월 1일로 일괄 조정하자는 것이다. 대학생의 경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2월에 열리니 범법의 유혹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연 나이 개념상 87년 12월생과 88년 1월생이 1년이나 차이 나는 오류를 시정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다만 19.5세는 어디까지나 제도권 교육이나 적어도 그 동등 수준의 학력 개념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극소수의 청소년들은 열패감을 가질 만도 하다. 이런 문제까지 깔끔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성인 규정과 청소년 기준을 만 18세로 일원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어렵다면 19.5세의 자유와 권리의 제재를 덜어주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양자간에 자유와 권리가 현저히 차이 나는 문제에서는 기왕이면 그 자유와 권리가 큰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기 일쑤이지만 범법이 넘쳐 흐른 다음에 퍼덕거리는 건 민망한 일이다. 연 19세의 입법취지에 19.5세도 포함하는 것이 도리다. 이제 19.5세에게 멍에를 벗게 해주자. - [憂弱]


※ 미네르바의 올빼미란 지혜는 세상사의 변화가 가라앉아 그 세계를 차분히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때 비로소 발견 가능하다는 헤겔의 말이다. 대다수 학문이 이미 일어난 경험을 이론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실정을 빗댄 경구다. 진리와 진실에 대한 이성적 인식은 한 시대가 끝날 무렵에나 가능하다는 체념을 하거나, 불의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에 정의 실현이 뒷북처럼 나타나는 현상을 투덜거릴 때 많이 쓰인다. 굳이 이런 설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다섯 해 전쯤 처음 이 근사한 표현을 접하고 나서 뜻을 알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던 옛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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