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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꿈

문화 2008.06.15 01:33 |

이번 학기 마지막 과제였던 <유가적 사유와 논어> 과제물을 부분 수정해서 올립니다. 이 과제를 작성하는 고뇌(?)를 나눠준 준 석훈이에게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원문>
子曰 老者 安之 朋友 信之 少者 懷之
- 『논어』 <공야장편>


<국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뜻은) 나이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친구에게 믿음을 주며 어린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니라.”


<견해>
  공자께서 제자인 자로, 안연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포부를 밝힌 문구다.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라고 볼 수 있고, 정책구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견 소박해 보이는 공자의 말씀에서 공자사상의 고갱이가 엿보인다. 『예기』 예운(禮運)편에서는 큰 도가 행해진 세상에서는 천하가 온 세상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며, 노인에게는 그 생을 편안하게 마치게 하였으며, 청장년들은 능력을 충분히 활용했으며, 어린이가 잘 자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가 제시되고 있다. 공자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다지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방법으로 대동을 지향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78년 덩샤오핑은 원바오(溫飽), 샤오캉(小康), 다퉁(大同) 사회라는 3단계 발전전략을 내놓았고 2050년까지 실현하겠다는 대동은 공산주의 이상향의 중국판이다. 기세춘 선생은 대동사회는 오히려 묵자가 서술한 안락하고 평화로운 공동체(安生生)와 맞닿는다고 보았는데 일리가 있다. 공자의 대동은 묵자와 실현방식이 달랐을 뿐더러 현세적이던 공자는 대동사회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중세적 신정정치에서 탈피해 합리주의와 세속주의를 추구했다. 지상낙원을 사후의 천상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구현하자는 것이다. 공자는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훨씬 앞서서 인간다움에 대한 풍부한 고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과 견주어 살펴봄직 하다. 칼 포퍼는 유토피아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점진적 사회공학을 주창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하려 생각하지 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경우 추상적 집단이 아닌 구체적 개인의 삶에 천착해 개인의 본성을 가꾸는 이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가의 현실적인 구세의식이 도드라진다. 선생 또한 미래나 천상의 유토피아를 언급하지 않았다. 공자는 신과 거의 무관한 세계의 인본주의를 역설했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는 말씀 속에서 인도를 넓히고 실천하는 주체는 사람 자신이고, 그러한 능력을 개개인이 충분히 품고 있다고 보고 있다. 공자는 현실에 밀착한, 현실을 떠나지 않은, 현실로 발현할 수 있는 이상을 갈파한다. 이것은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치들이다. 仁은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평생을 추구하는 힘이 된다.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바라고,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을 仁은 가리키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 서설에는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장미꽃이 피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어떤 거짓말쟁이가 자신이 로도스섬에 있을 때 굉장히 멀리 뛸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굳이 많은 증인이 필요 없지. 여기가 로도스야. 여기서 뛰어보게!” 헤겔은 이 우화를 미덥지 못한 이상을 늘어놓기보다 삶의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방안을 고찰하라는 것으로 풀었다. 진리라면 현실의 검증을 마다하지 말고, 로도스섬으로 피하기보다는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가능성을 보이라는 설명이다. 헤겔의 언설은 환상의 나라, 허구의 나라, 불가능의 나라에 닿기 위해 헛되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공자의 주장과 잇닿아 있다. 공자는 로도스섬을 꾸며내지 않았다. 그저 老者와 朋友와 少者를 생각하는 오늘 여기의 삶을 로도스섬으로 삼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이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공자는 이 역설을 오래 전부터 꿰뚫고 있었다. 공자는 물질을 부정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경시하지 않았다. 선생은 다만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른 것을 염려했다.


  공자가 체감(遞減)하지 않고 체증(遞增)하는 탐욕을 문제 삼은 것은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물신숭배와 황금만능주의로 타락하기 일쑤다. 인간보다 물질이 무겁게 여겨지는 사회를 공자는 경계했다. 선생이 설파한 仁의 개념은 추상적으로 정의되기보다는 다채로운 실례와 비유 속에서 표현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사랑함(愛人), 널리 사람을 사랑하는 것(汎愛衆)이다. 오늘날 가치관의 전도 현상으로 말미암아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 같은 목적적 가치보다 효율성과 편리성 그리고 경제적 부 같은 수단적 가치가 더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병리현상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치부하게 된다. 공자는 이것에 반대한다. 선생은 효제(孝悌)와 충서(忠恕)를 고안해 물질적 집착을 버리고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촉구한다.


  孝悌가 혈연을 매개로 한 본능적 사랑이라면 忠恕는 이를 바탕으로 남에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인간관계를 목적적 관계로 확립함으로써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만들려는 기획이다. 세종대왕 때 박연이 시각장애 악공들의 처우 개선을 요청하며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天下無棄人也)”라고 상소했던 내용의 바탕이 되는 사상이다. 『도덕경』 27장에 나오는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是以聖人常善求人 故無棄人)”라는 구절과 상통한다. 왕필(王弼)은 주석을 통해 성인은 나아갈 것과 향할 것을 만들어서 진보에 뒤쳐지는 사람들을 못났다고 버리지 않으며, 저절로 그렇게 됨을 도와줄 뿐 새롭게 일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라고 풀이한다. 사람을 구제하기를 즐기며, 스스로의 편견 때문에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없는 태도라는 실천덕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현해나가야 하는 것인가? 孝悌가 忠恕로 확장되는 관계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는 게 온당하다. 『맹자』에 나오는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이 이런 고심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제 둘레의 것들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더 먼 곳의 아픔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양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관념적 사고에는 정(情)이 묻어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동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렇다고 見牛未見羊에서 인간의 지각적 한계만을 논해서는 곤란하다.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는 실천을 꾀해야 한다.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여기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가 명료한 선후관계는 아닐 터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공자가 꿈꾼 바를 오늘날 접목시켜본다면서 단순히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노인 복지, 사회적 신뢰의 확립과 청소년 교육의 강화 같은 피상적인 접근으로는 부족하다. 공자와 그의 벗으로 상징되는 장년층이 노년세대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예우하고, 청소년세대를 정성껏 보살펴서 세대 간의 유대감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해석하면 실질적인 의미가 좀 더 커질 것이다. 즉 세대 간의 사랑과 배려를 돈독히 해서 문화와 역사를 계승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다. 젊음이나 늙음은 결국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역지사지한다면 세대 간의 허심탄회한 소통으로 갈등을 줄이고 사회적 응집력을 높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老者와 朋友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논어 구절에서 익히 만날 수 있지만 少者를 품겠다, 포용하겠다는 언명은 이 구절에서 또렷하게 드러나 특히 인상 깊다. 이는 젊은 세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해주고 싶다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나 불치하문(不恥下問)에서 알 수 있듯이 윗사람으로서 어린 사람에게 시혜적이고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베풀겠다는 뜻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배우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다. 최근 기업에서 관리자가 부하직원들에게 젊은 세대의 관심사와 노하우를 전수 받는 “리버스 멘토링(Reverse Mentoring)”이 강조되고 있다. 이를 통해 핵심가치를 공유하고 상호 만족감을 높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공자의 가르침을 응용한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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